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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 공민들 중에 나보다 영화를 더 본 사람 있으시면 어디 한번 나와보시지?>>
이렇게 광언(狂言)할 정도로 나는 극성스런 영화광이다.
개구쟁이 시절부터 나는 영화에 사로잡힌 아이였었다. 술래잡이, 유리알 치기, 썰매타기 등등으로 그 놀음거리들이 많았지만 스크린(銀幕)처럼 무진한 흥심을 포박(捕縛)해 가는 유혹은 더 없었다. 영화라면 사죽을 못쓰는 나는 짬만 나면 영화관으로 달려가곤 했고 그 무슨 일과를 완수하듯이 새로 개봉된 영화들을 낱낱이 빠짐없이 보곤 했다.
내가 동년을 보낸 70년대는 영화의 전성시대였다.
고색 창연한 자그만 현 소재지였던 나의 고향 룡정에서 겨우 세 곳밖에 없는 영화관은 뭇 사람들의 신심을 가장 사로잡는 곳 이였다.
영화관옥상의 이마 전에 떠인 영화포스터는 달마다 새것으로 바뀌곤 했는데 달 초가 되여 영화포스터를 바꿀 때면 사람들은 영화관 앞에 웅기중기 모여들곤 했다. 명절 맞는 기분 같은 얼굴들을 하고 새로 걸린 영화포스타를 목덜미 시큰하게 쳐다보며 새 영화의 상영일시를 깐깐히 읽곤 했다.
너나가 영화를 좋아하는 지라 아침 7시 반에 첫 영화가 있었고 9시 반, 11시 반, 2시 반, 5시 반, 7시 반, 다시 9시 반으로 영화방영이 하루종일 빼곡이 배치되여 있었다. 좋은 영화가 나오면 아침 5시 반과 저녁 11시 반으로 상영차수를 증가하기도 했다. 그래도 영화관은 언제 보나 초 만원이였다.
영화관에서의 관람표 구입은 한차례의 전투나 다름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영화관 매표구 앞에는 해바라기 씨 기름 받으러 량점(糧店)에 몰려들듯이 사람들이 떼지어 기다린다. 그렇게 줄을 서있는 사람들이 족히 100여명은 넘겼다.
그러다 매표구의 창에 드리워졌던 문발이 걷히면 그것을 신호로 하듯이 줄은 삽시간에 흩어지고 모두들은 크레물리궁을 점령하는 쏘련 전사들처럼 매표구를 향해 덮쳐간다. 비집고 밀고 헤치고 사람우에 사람이 덮치기도 한다. 손 하나만 들어가게 만든 비좁은 매표구입구로 승벽내기로 손을 밀어 넣는다. 그러다 손을 빼지 못해 비명을 지르고 서로 낯을 붉히고 싸움질도 벌어진다. 하여 그때 영화관의 매표구마다는 부역하는 죄수들의 감방처럼 쇠 살이 대여져 있었다. 표를 사든 사람은 복 받은 사람처럼 밝은 표정을 짓고 표를 수기처럼 흔들며 사람 숲을 헤치고 나온다. 표가 다 팔려 미처 사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영화관으로 미친 듯이 달려간다. 그때면 꼭 마치 귀향하는 막차의 차표를 사지 못한 사람 같은 초조한 얼굴들이다. 그 박절함과 열정은 지금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영화 표를 미처 사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림시표를 팔기도 했다. 림시표는 말 그대로 림시로 발급하기에 자리가 없다. 맨 뒤 켠 아니면 량 켠의 인도에 서서 영화를 봐야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맥풀려 오금이 접힐 듯 했지만 그런 대가라도 치러가며 영화를 보는 것이 너 나의 소원이였다. 림시표라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아프리카난민같이 불쌍한 표정으로 영화가 반 남아 상영되도록 영화관 앞을 뜨지 못해 한다.
영화관에 들어서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로 들어선듯 열뜬 기분을 감추지 못해한다.
소리쳐 서로를 부르고 영화 표를 쳐들고 번호를 소리내여 읽으며 자기자리를 찾아 앉는다. 영화관에서는 상영 종을 두 번 울리곤 했다. 예고종이 먼저 울리고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는 것이다. 그사이를 10분의 간격을 두었다. 그러나 그 10분의 시간이 나에게는 10년 맞잡이로 기다려 내기가 바쁘다. 드디여 영화관 천장에 달린 무리 등이 꺼지고 영사기의 빛 보라가 물줄기처럼 하얀 영사 막을 향해 쏟아질 때면 사람들은 흥분해서 갈채를 지르고 휘파람을 불곤 했다. 어둠 속에서 혹간 뒤돌아보면 수백 쌍의 유난히도 빛나는 눈동자들이 일제히 영사 막 쪽을 향해 있다. 그 어둠 속에 반짝이는 격조(格調)는 그 시기를 지나온 사람이 아니면 감득(感得)해 내는 수가 없을 것이다.
암울했던 70년대, 중국의 영화관들에서는 모택동의 부인 강청이 만들어낸 <<홍등기>> 등 이른바 <<본보기 극>>만을 상영했다.
영화에 앞서 기록영화를 꼭꼭 끼워 넣곤 했다. 당의 지도자들이 외국지도자들을 접견하는 영화가 아니면 <<이양기로 기계모내기>>와 같은 과학기록편이였다. 그 세월에는 새로 개봉하는 영화가 많지 못했다. 주로 혁명적 본보기 극영화들 뿐 이였다. 언제 봐도 <<홍등기>>, <<백모녀>>,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 <<사가퐁>>... 등 8부의 영화를 낡은 레코드 풀 듯이 되풀이했고 쏘련영화 <<10월의 레닌>>과 <<1918년의 레닌>>을 그 사이사이에 방영하곤 했다. 그런 영화라도 우리는 싫증을 몰랐다. 독실한 신자가 경서를 되새겨 읽듯이 보고보고 또 보았다.
당시 프로테리아사상으로 철저히 무장 되였던 사람에게 있어서 사회주의의 도사 레닌의 영화만큼 우리들의 심성을 매료시킨 영화는 없었다. 레닌 시리즈영화 속에 나오는 레닌의 신변 근위병 와씰리를 우리는 제일 좋아했다.
<<빵도 있게 될 거고 우유도 있게 될 거요>>
이 와씰리의 대사는 우리가 가장 즐겨 외우는 구절이였다. 영화 속에서 마뜨예브가 레닌을 암살하려는 적들의 음모를 알리려 총탄을 맞으며 <<와씰리- >>하고 외치며 창문으로 뛰여 내리는 장면은 당시 우리가 뽑은 제1위 경전장면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장면을 재현해 층집이나 다리우에서 겁 없이 뛰여내리곤 했다. 그 장면을 모방하다 우리 학교의 한 애는 다리뼈를 분질러 먹고 한 학기 휴학한 일도 있었다.
또 어느 한번, 보이니치의 동명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등에>>를 보고 주인공의 오금 꺾을 줄 모르는 강직한 성미에 나는 깜박 심취되여 버렸다. 지어 주인공의 얼굴에 생긴 기다란 칼자국 흉터마저도 사나이의 그 어떤 강의를 대변해주는 징표처럼 멋지게 안겨왔다. 그래서 미술도료로 얼굴에 인공칼자국을 열심히 새겼다. 그 모양을 보고 멋지다며 반 급의 애들이 자기 얼굴에도 <<칼자국>>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이렇게 서로가 네 얼골 내 얼골에 <<칼자국>>을 새기는 해괴한 짓거리가 벌어졌다. 저마다 선명한 <<칼자국>>을 달고 학교로 등교했다. 첫 수업시간은 한어시간, 교실로 들어섰던 한어과 교원의 입으로 맙시사!하는 가는 비명이 새여나갔고 코마루에서 안경이 껑충 막대 잡고 뛰기를 하였다. 반 급 남자애들은 정원 28명, 그중 반장 하나만 빼놓고 모두의 얼굴에 선명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반주임이 달려왔고 교장선생이 달려왔다. 요란하게 신칙을 당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영화 속의 혁명자의 본을 내였다는 말에 교장선생도 막무가내라는 듯 웃으면서 그에 그치고 말았다.
이렇게 외국영화가 나오면, 알바니아 영화나 루마니아영화만 나오면 우리는 금세 붉은 색을 본 투우처럼 더 흥분해했다. 그것은 맨 날 옥수수떡을 먹다가 허연 쌀밥을 먹는 듯한 감미로운 맛의 느낌이였다. 그 이방인들의 멋진 체격과 이색적인 모습, 호방한 성격과 유머적인 대사들을 나는 좋아했다. 루마니아 영화 <<신비한 노란 장미>>를 보고는 침착하게 해바라기 씨를 까며 륙혈포로 적수를 쏴 넘기는 독특한 제슈체어(行爲)에 홀딱 반해 입안에 구창이 생길 때까지 해바라기를 까기도 하였고 프랑스영화 <<졸로>>를 보고는 주인공의 본을 내여 남의 집 바람벽이나 담에 졸로의 징표인 Z를 커다랗게 써놓기도 하였다.
현 시가지에서는 때때로 로천영화도 돌리곤 했다. 그날이 우리에겐 명절이였다. 체육장이나 학교마당에서 커다란 향연이 펼쳐지군 했다. 어둘 녘에 방영원들이 마당에 하얀 영사 막을 칠 때부터 우리는 좋은 자리를 지키느라 찬 땅에 앉아있군 했다. 모두들 엉덩이에 깔 쪽 걸상이나 신문지들을 들고 그렇게 많이 몰려들곤 했다. 보았던 영화일지라도 쪼그리고 앉거나 엉거주춤 선 불편한 자세로 마지막까지 보군 했다.
그 즈음 조선영화 한 부가 현 시가지는 물론 온 중국을 들썩케 했다.
<<꽃 파는 처녀>>, 지주에게 가혹한 억압을 받던 한 가정의 오누이가 나중에는 혁명의 길에 오르는 과정을 그린 영화였다. 영화의 주제가는 그후로 장장 10년 동안 모두가 가장 즐겨 부르는 톱 가요로 떠올랐다.
<<꽃 사세요 꽃 사세요
어여쁜 빨간 꽃
향기롭고 이슬 맑은
어여쁜 빨간 꽃>>
광폭영화였는데 아직 룡정이나 화룡과 같은 현의 영화관들에는 광폭렌즈와 광폭영사막 설비가 마련되지 못했던지라 모두들 뻐스를 타고 연길로 가서 영화를 관람했다. 그 기간 연길로 오는 뻐스는 마냥 초만원 이였고 식당, 려관이 관람객들로 넘쳐 났으며 영화관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썩 후에 집계에서 본데 의하면 연변지역에서 이 영화를 4천 여차 방영하였고 관람객이 연인수로 258만 7천 여명에 달하여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의 흥행기록을 올리고 있었다. 중국관중들의 눈물샘을 무던히도 자극하였던 감정색채가 짙은 영화는 10년간 줄곧 정치운동에만 매여 경직 되였던 사람들의 정감을 폭팔 하듯 건드렸던 것이다.
요즘 같은 호(好)세월에 우리는 구태여 영화관을 찾지 않고도 안방에서도 비디오로, VCD로 DVD로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다. 컴퓨터의 동영상으로도 지어 핸드폰의 윈도우로도 무선인터넷서비스에 힘입어 신작영화예고편을 볼 수 있는 살맛 나는 세상이다.
그러나 영화관이라는 어제 날의 질박한 향수의 장소는 나의 심방에 색 바랜 사진처럼 클로즈업(特寫)되여 있다. 그 애틋한 감수를 못 이겨 문예지에 <<흑백영화를 보러 갔습니다.>>라는 산문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흑백영화를 보러갔습니다
작고한 어제의 스타들이 색조 없는 옷 입고 운명의 원무를 추고 깊은 물 속의 어족(魚族)인양 우리는 팝콘을 씹으며 눈물의 부침을 겪습니다
세월의 명암을 헤쳐온 령혼의 아픔이 삭아 스크린에 무서리로 내리고 성자의 말처럼 남아 귀전에 들립니다
사색을 두다리는 목탁처럼 드디여 종소리는 울리고 흑백의 향수에서 깨여나 우리는 세속의 칼라 속에 묻힙니다
아직도 진한 옹이로 남은 주인공의 형상, 작아도 헌헌한 충만이 깃 들던 스크린. 순백 같은 영사기의 빛 보라를 마시고 나 또한 오늘의 빛이고자 합니다
흑백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영화를 테잎들을 본격적으로 수장하기 시작한 것 은 6, 7년 전부터였다. 불운한 운명을 지니고 태여난 내게서 행복은 극장의 맨 뒤끝에서 본 영화처럼 거리가 멀었다. 청빈한 문인신세로 가정이 깨여진 뒤로 수천 권의 책과 비디오 하나만 달랑 지니고 북대의 작은 셋방 집에서 몇 해를 홀로 지냈다. 그때 나의 외로움을 크게 달래준 것이 바로 영화였다.
홀로 만의 지지리 한 밤을 이겨내려고 비디오 대여 점에서 매일이고 테잎을 3개씩 빌려다 보았다. 97년 한해 여름사이에 만도 나는 무려 300여부의 영화를 빌려 보았다. 세계영화사의 경전은 물론 할리우드의 흥행작이며 인도의 가무영화이며 홍콩의 깽 영화며 지어 애니메이션영화까지도 걸탐스레 보았다. 북대부근의 비디오대여 점을 다 돌고는 지어 철남 멀리의 대여 점에까지 뻐스를 타고 가서 테잎을 빌려다 보기도 하였다.
그러다 그저 이렇게 시간 죽이기로 좋은 영화들을 감흥으로 흘려보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영화들을 본격적으로 소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세계명작개편영화로부터 소장했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이며 살론 브론데의 <<제인 에어>>며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며 유고의 <<빠리노틀담>>이며... 문자로만 읽었던 그 명작들이 아름다운 화면과 정감 어린 육성으로 내 눈앞에 펼쳐졌고 나는 새로운 련인과 일견종정(一見鐘情)에 빠지듯 영화에 흠뻑 매료되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세계영화사의 경전들을 사들였고 그 다음에는 영화천국인 할리우드의 대작들을 사들였고 그 다음에는 중국신예감독들의 전위적인 영화를 사들였고 그 다음에는 요즘 폭발 적인 흥행 세를 보이고있는 한국영화들을 사들였다. 지어 영화평론가들이 <<쓰레기>>라고 지칭하는 홍콩 무협영화나 깽 영화도 선택해 보면서 그 폭력미학이 주는 류다른 감수를 즐기기도 하였다.
그렇게 박봉을 깨서는 <<새앙 쥐 콩알 물어들이듯>> 사들여 소장한 영화가 테잎으로, DVD디스크로 저그만치 3천 여부, 우리 집은 짜장 하나의 영화고(庫)와도 같다.
영화를 즐기다나니 영화간행물도 많이 사본다. <<월드 스크린>>, <<영화보기>>, <<영화세계>>와도 같은 잡지도 달마다 빠짐없이 사들여서는 새로운 개봉 작을 주시해보고 톱스타들의 최근 동향을 알고 경전에 대한 해석을 까근하게 읽어보기도 한다. 중앙TV제8채널의 <<세계영화엑스포>>, 북경TV의 <<영화세계>>, 길림TV문체채널의 <<슈퍼 영화팬>> 같은 프로들을 나는 다른 프로들을 제쳐놓고 본다. 집의 침실이며 주방 지어 화장실 문에까지 영화잡지에 끼여온 영화포스터가 붙어있고 나의 핸드폰 벨소리도 쏘련 영화 <<지바고 의사>>의 주제곡으로 설정되여 흘러나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주제곡이다.
10여년 동안 문예기자로 뛰면서 문화전란을 꾸리는 와중에 영화동태들을 열심히 편집소개, 많은 문화부 기자들 중에서 나만이 영화동태분석을 능수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하여 영화발행공사로부터 영화 평론원증을 지급 받았고 년 말이면 영화발행공사 선전과로부터 장려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아편의 원액이 주는 것과도 같은 영화의 궁극적인 맛에 나는 차츰차츰 빠져들고 말았다.
시와 노래, 가무, 회화, 조각과 건축에 이어 인류는 영화라는 쟝르를 탄생시켰다. 각 쟝르의 예술은 모두 인류가 세계를 관찰하는 하나 또 하나의 눈이다. 때문에 영화는 <<인류가 개안한 7번째 눈>>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유희적 욕망을 충족시켜줌과 동시에 사람들의 지적 수요에 응분의 감수를 안겨주는 영화는 좋은 발명임에 틀림없다. 영화를 보는 것이 우리 삶의 일부라면 영화 속의 기복다단한 스토리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취미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삶 그 자체라고 볼수 있지 않을가!
<<패왕별희>>, <<진시황을 찌르다>>의 메가폰을 잡은 내가 좋아하는 중국제5대감독 진개가는 베니스영화제의 기자초대회에서 이렇게 말한 적 있다.
<<교회당에서 신도들은 해바라기 씨를 깔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익히는 교회를 천국처럼 신성시하기 때문이다. 영화관에서도 해바라기 씨를 까지못한다. 그것은 영화관의 관리규정에 의해서이지만 어찌 보면 팬들에게 있어서 영화관이 바로 하나의 천국과도 같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나 같은 편집광 적인 영화애호가들의 심성에 꼭 맞는 말이라 하겠다.
이렇게 내 삶을 충족히 해주는 또 하나의 친구- 영화를 나는 좋아한다. 무지무지 좋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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