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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학과 김관웅의 수준차이(1)
2개월 전의 일이다. 필자가 연변대 인문학분야 모교수와 한국 유명대 정치외교학 교수 셋이서 함께 식사한 적이 있다. 식사 도중 어찌하다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화제가 돌았다. 일본인의 국민성을 파헤친 권위 저작으로는 미국여류문화인류학자 루스·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모교수는 이 책에 대해 금시초문이고 ‘토론’에 한마디 끼지도 못했다. 나는 매우 의아했다. 인문학 교수이면 세상의 학문적 흐름은 최소한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읽은 책을 반드시 당신도 읽어야 한다는 도리는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학자라면 특히 인문학분야의 교수라면 적어도 흐름은 알고 있어야 하고 그래야 타인과의 대화도 충분히 이뤄질 수가 있지 않을까?
연변문화인들은 흔히 자신을 ‘夜郞自大’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학문적인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은 그 문화인들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역 환경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필자는 한국에서 중국에 갈 때면 연길직행을 한 적이 한두 번밖에 되지 않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거개 심양이나 장춘으로 에돌아간다. 그 이유는 연길서점에서는 내가 원하는 책들을 구입할 수 없기 때문에 심양이나 장춘 서점을 들러 책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연길서점의 도서량은 심양이나 장춘 서점의 몇 십분의 일이나 되나마나 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문화인들의 독서에 문제가 생기지 아닐 수 없다.
다음 필자가 전에도 지적하였듯이 연변의 사회환경분위기로 볼 때 책 읽는 기풍이 매우 결핍되어 있고 연변은 중앙직속이라는 풍자처럼 너무 사상이 경직된 환경문제도 심각하다. 아직도 필자가 종교에 관한 글을 쓰면 혹자는 나를 ‘마레주의를 반대하고 종교를 선양한다.’고 비판하는 등 한심한 관점과 인식들은 그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환경문제와 관련이 깊다고 본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연변문화인들이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학문결핍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산재지역에 계시는 조선족문화인들과 대화해보면 연변문화인들보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더 넓지만 문혁교육잔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고 역시 한족학자들보다 세상의 흐름을 따르는 데 좀 뒤처져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혹자는 필자를 김문학을 일방적으로 찬양하고 심지어 나의 눈에 콩깍지가 끼지 않았나고 의심한다.
솔직히 나는 그의 친일언행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친일언행들이 정말 高行健이 <나만의 성경>(필자는 한국에서 홍콩에서 출간한 한문판을 읽었다.)을 지어 노벨상을 받았지만 반화분자라는 사실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중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나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문화인처럼 김문학도 중국정부가 찍어놓은 친일매국분자라면 말이 달라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 중국정부가 문제 삼지 않는 문화인에 대해 일부 안티김문학파들에 동조하여 나의 소신을 팔아먹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부 사람들이 아직도 흑백논리에 물젖어 친일이 아니면 반일이란 이분법으로 모든 문제를 보는 시야가 매우 안타깝다. 제삼의 관점과 견해 및 인간으로서의 다양한 존재형태를 말살하려하고 넌 김문학을 두둔하면 무조건 같은 친일족속이란 타매질이 역겨워난다. 현시대는 다문화사회이다. 다문화란 여러 가지 인종문화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부동한 문화형식과 내용 및 여러 가지 부동한 견해도 공존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한 문화인에 대해 학문적으로 인격적으로 인간적으로 나의 성향에 맞으면 친할 수 있다.
내가 김문학과 친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그의 학문적 시야가 나와 비슷한 점이 많고 내가 읽었던 책과 그가 읽었던 책들이 비슷한 것들이 많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고 축복이다. 더욱이 나는 이 몇 년래 김문학만큼 나와 학문적 대화의 상대가 되는 문화인을 만나보지 못했다.
말이 샌 것 같다. 본론을 말하자면 김관웅 교수도 필경 지역 환경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학문적인 수준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전의 작품들도 그렇거니와 요즘 그의 작품을 보면 독특한 자신의 관점과 학문적인 새로운 맛이 없이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방식 똑 같은 문풍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를테면 요즘 김관웅 교수의 <일제의 중국침략과 김문학의 왜곡>의 제목으로 쓰고 있는 시리즈를 보면 먼저 교과서 식의 나열을 늘여놓고 다음 정의를 외치고 그다음 김문학에 대한 온통 고깔모자를 동원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글을 올리는 사이트를 공격하고 연변유관기관을 걸고넘어지는 작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학문적인 서술이나 독특한 견해가 없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수준에 똑 같은 문풍으로 써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김교수께서 김문학을 무차별 공격하고 있으나 그의 어떤 작품 이를테면 <신 추한 일본인>은 그래도 일본인국민성 평가에 있어서 기존의 권위로 인정받아왔던 미국여류문화인류학자의 <국화와 칼>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각으로 일본인국민성을 파헤치는 창의성이 돋보인다. 학자와 학자 간의 비교수준은 그렇다 치고 솔직히 김교수의 이런 글들은 아무 타이틀도 없는 나의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는 문장에 비해 창의성, 학술성, 서술성 및 내용의 깊이와 넓이가 아예 비교되지 않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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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 혼자 다 아는 듯이 지절대더니 인제는 아예
자기가 김문학이나 김관웅과도 병렬하자구 든다.
삶은 쇠대가리 웃다가 꾸레미 터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