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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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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7
2015년 02월 09일 13시 40분  조회:2107  추천:0  작성자: 죽림

61□만국의 노동자여□백무산, 청사민중시선 33, 청사, 1988

  노동에 관한 사상은 이미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가 살아있는 한 변함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모순에 관한 시는 새롭다. 특히 이 시집 속에 실린 시들은 살아있다. 체험이 현실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의 모순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을 현실 속에서 몸으로 찾아냈고, 그것을 아주 적절한 표현으로 나타냈다. 사상과 삶과 표현이 완벽한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 ★★★★☆[4336. 11. 6.]

 

62□죽은 자를 위한 기도□남진우, 문학과지성시인선 185, 문학과지성사, 1996

  죽음을 카메라로 찍을 수는 없다. 카메라는 색깔로 인식하고 눈으로 보여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지도 않은 장비를 가지고 내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 어떨까? 그러다 보니 카메라에 잡히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장례식 모습이다. 이것은 시인이 주제에 접근하는 시의 방법론을 전혀 모르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죽음을 시각 이미지로 묘사하는 것은 그림으로 그리는 것만도 못하다. 물감은 죽음의 색깔을 직접 보여주지만 문자는 주어진 문자정보를 통해서 머릿속에서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에서 죽음을 시각으로 접근해서는 전혀 효과를 볼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기초조차 모르고 쓴 무기력한 시들이다. 그러니 수박 겉핥기가 될 수밖에 없다. 수박의 겉을 아무리 핥아야 수박 맛을 알 수는 없다.

  죽음에 대해 백 날을 이야기해야 죽음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기형도가 죽은 자리에 가서 앉아본다고 해서 그의 죽음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방법론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쓴 시이기 때문에 뜬구름 잡기가 되어버렸다. 이미지 몇 개로 죽음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4336. 11. 6.]

 

63□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황지우, 문학과지성시인선 220, 문학과지성사, 1998

  시대의 몫이겠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환멸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게다가 생각이나 상상의 방법이 아주 거칠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불편하게 만든다. 아마도 시대와 시인 사이에 생긴 불화 때문이리라. 그렇다고는 해도 무언가 좀 더 편한 방법이 있을 듯한데,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 마감이 덜 된 듯한 시를 보는데, 이것을 시인의 태도라고 읽어야 할지 미숙이라고 해야 할지 구분이 잘 안 가는 시집이다. 이런 점이 장점으로 작용하기는 힘들 것 같다. 가장 심각한 것은 시가 이야기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시가 아닌 형식을 시로 만들기 위해서 이야기의 중간중간에 시의 인식이랄 만한 참신한 표현과 경구를 될수록 많이 넣었다. 그러나 경구가 몇 개 들어간다고 해서 시가 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이야기에 머물러 있다. 오히려 이런 경구들이 상상력을 붙잡고 늘어져 의미 전달의 흐름을 자꾸 동강낸다. 그런 단절들이 애써 얻은 귀중한 깨달음과 표현을 시 전체로 확산시키지 못하고 자꾸 부분에 얽매이게 만든다. 어눌한 중이 대단치도 못한 깨달음을 떠듬거리며 토해놓는 것 같다. 화두나 법어가 시와 친연성이 있지만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되지는 않는다. 상황이 제거되면 오히려 봉창 두들기는 소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환멸의 삶을 전하기 위해 화두 같은 말장난을 동원하는 것은 생각의 격렬한 반응이 빚어낸 결과물처럼 보이나 좀 더 냉정하게 보면 일종의 치기이고 습작기를 벗어날 무렵의 난봉 심리이다. 한자 표기는 여기에다 허영끼까지 덧칠하고 있다. 그런 표현보다 더 완벽한 건 1미터만 나가면 있다는 15층 베란다 밖이다. 거기에 기형도가 있다.★★☆☆☆[4336. 11. 6.]

 

64□불온한 검은 피□허연, 세계사시인선 53, 세계사, 1995

  말하자면 절망의 늪에 빠진 자의 눈에 비친 세상 풍경이라는 뜻인데, 상관물이 단순히 개인의 넋두리로 그치지 않고 종 보편의 의식으로 연결되려면 그 고리에 대한 인식이 정확하고 투철해야 한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리라는 막연한 기대는 너무 태만한 태도라 아니할 수 없다.

  특수한 체험이 특수한 모습 그대로 고정되어 버리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특수한 체험이 특수한 방식으로 상상력에 연결되어야 하는데, 그 고리를 상상의 어느 부분에 걸어야 할지 선뜻 알 수 없다. 게다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흔하디 흔한 절망과 소외이다. 그리고 남들의 예술작품을 통해 무언가 할 말을 전하려 한다는 것이 벌써 한 수 접혀 들어가는 것이다. 남의 문자를 함부로 쓰는 것 역시 시의 세계를 전달하는 것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일이다.★☆☆☆☆[4336. 11. 7.]

 

65□나무들은 폭포처럼 타오른다□박용하, 세계사시인선 51, 세계사, 1995

  표현은 요란한데 할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전달해야 할 내용에 비해서 너무 많은 말들이 동원되고 시가 길어지고 번잡해진다. 아직 습작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주제를 먼저 정확하게 정해야 하고 거기에 꼭 맞는 표현이 아니면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한다. 버리지 못하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런 중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한자이다.★☆☆☆☆[4336. 11. 7.]

 

66□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오정국, 세계사시인선 19, 세계사, 1992

  철지난 유행가처럼 내용도 그렇고 형식도 그렇다. 그렇고 그런 내용들이 빼곡하게 차 있다. 이 경우, 시가 새로워지려면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욱 깊어지거나, 체험을 표현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 깊이가 없기 때문에 방법이 새롭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현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인식이 신선하게 드러나는가 하는 것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4336. 11. 7.]

 

67□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이윤택, 세계사시인선 5, 세계사, 1989

  시집에 실린 시 전체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우선 눈에 띤다. 이것은 중간중간에 보이는 희곡의 기획력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그런데 정치현실을 멀찌감치서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그 정서나 내용은 정치와 역사에 상당히 깊이 꽂혀있다. 그것이 이율배반처럼 낯설다. 1980년대의 몫이겠지만, 그런 삭은 내용을 그나마 살려주고 있는 것은 말을 다루는 솜씨이다. 군더더기 없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살 만하다. 뒤의 장시는 너무 사실에 붙잡혀서 이미지와 말들이 무겁게 쓰였다.★★☆☆☆[4336. 11. 7.]

 

68□개□최준, 세계사시인선 14, 세계사, 1991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 시집 한 권을 낸다는 것은 시인이 성실성과 집중력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점 하나만으로 이 시집은 칭찬 받을 만하다. 한 가지 주제에 집착을 하다 보면 내용이 자꾸 깊어진다. 깊어지면서 관념화된다. 그것만 극복한다면 한 주제로 묶은 시집은 대성공이다. 과연 얼마나 시인의 사고가 현실의 곳곳으로 삼투해들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 관심거리이다. 이 정도면 정말 많이 들어갔다. 이 시인이 신인이라면 기성시인들은 많이 부끄러워해야 한다.★★★☆☆[4336. 11. 8.]

 

69□매혹, 혹은 겹침□김정란, 세계사시인선 22, 세계사, 1992

  내가 전봇대에 오줌을 깔기고 있는데, 어떤 점잖은 노인이 꾸짖는다면 그에 대해서 반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제일 저급한 방법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왜 남의 일이 끼어 드느냐고 욕을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노인은 그 노인 시대를 대표하는 한 종이 아니다. 그냥 노인일 뿐이다. 그 노인에게 욕을 할 때는 그 종에 대한 분노를 실을 필요가 없다. 그런 노인은 천지에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종을 대표하는 노인에게 분노의 근원을 드러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이 시집에 실려있는 것들은 그 노인에 대한 욕들이다. 그 노인과 싸워서 내가 이길 수는 있지만, 한 노인을 이기는 것이 그 종 전체를 이기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그 종 전체를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욕지거리나 멱살 드잡이 가지고는 안 되는 일이다. 말을 돌려도 욕은 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종들이 가진 가장 취약한 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 가장 좋은 효과를 내는 방법이다.

  이 시집에서는 그런 지점을 찾지 못해서 전투가 별 효과를 내지 못 하고 있다. 그것은 사상 투쟁의 표적을 찾지 못함과 동시에 그 투쟁을 담보해줄 시의 방법론 역시 확보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시의 형식을 비튼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4336. 11. 8.]

 

70□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김승희, 세계사시인선 56, 세계사 1995

  다작의 병폐는 할 말에 비해 형식이 다양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특히 한 가지 주제에 매달려서 그것을 악착같이 파헤치려고 할 때는 이런 문제점이 더욱 커진다. 바로 이 시집이 그런 모습을 잘 보여준다. 정형화된 것들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분노, 그에 대한 반발이 격렬한데, 그 격렬한 감정이 자신에게 꼭 맞는 옷을 찾지 못하여 누더기를 걸치고 있다. 해진 옷 사이로 때묻은 살결이 희끗희끗 드러난다. 시가 굳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형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식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귀찮고 어렵더라도 감정을 조절해서 시를 아껴 쓸 필요가 있다.★★☆☆☆[4336.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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