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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고재종, 문학동네 시집 25, 문학동네, 2001 언어가 시로 점화되는 시점이 인식의 어느 지점이냐에 따라 시가 갖는 생동감이 각기 다르다. 인식의 현장에서 언어가 촉발되면 생동감이 있다. 그때 언어를 동원하는 자의 관념성이 현장감에 실려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미 어떤 세계관이 있고, 그것에 따라서 인식이 이루어지면 언어는 동원된다. 마치 한 가지 목표를 전하기 위해 우격다짐 식으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봉사한다. 언어는 희생될 때가 많다. 대체로 노동시나 민중시 계열에서 이런 과격한 투쟁이 일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언어가 갖는 내밀한 작용과 감성은 그런 강렬한 주제의식 때문에 시의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이다. 이 시집의 시들은 대체로 동원된 말들로 꾸며졌다. 그러다 보니 어떤 주제나 이데올로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언어들이 호출 당한 느낌이다. 감각과 체험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언어가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어떤 주제가 미리 준비되고 그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인식과 언어가 동원된 모습이다. 이런 시들은 주제가 강렬하다. 그리고 그것은 농촌의 현실을 전달하기 위한 메시지가 갖는 불가피한 속성이기도 하다. 농촌의 정서를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는 시의 모습인데, 실제로 이 시집 속에는 농촌 문제가 거의 들어있지 않다. 현장만 농촌일 뿐 시인 자신의 내면 풍경이 전면으로 드러나 있다. 이것은 어투의 문제와 충돌을 일으킨다. 그 충돌은 시의 전면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관과 인식의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이 농촌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농촌의 정서와 민중성을 끌어안는 더 큰 그릇으로 성장해가는 한 과정이기를 바랄 뿐이다. 전에 나온 시집이 뜬구름 잡듯 떠돌았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세계가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말하는 방법이 좀 더 뚜렷해졌다는 뜻이다. 대신에 자신의 안으로 깊이 들어박혔다. 농촌의 현실을 노래하던 시인으로서는 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4337. 1. 23.]
372□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푸른숲, 1991 시의 한 기준점이 될 듯한 시이다. 시집이 처음 나온 지 10년만에 100쇄 발간을 했으니, 일반 독자가 훨씬 더 많이 읽었다는 뜻이고, 이것은 바로 일반독자와 이른바 문단독자의 경계점을 가르는 그 지점에 아주 잘 살아있는 시가 되겠다. 일반독자들의 관심은 주로 사랑인데, 이 시집은 일반독자들이 약간 오해한 것 같다. 이 시집의 정서는 사랑이기보다는 삶이 피할 수 없는 어떤 세계에 대한 고뇌를 노래한 것이다. 그 중에 사랑이라는 감정도 들어있다. 그런 감정들을 노래한 시가 한 열 편 가량 된다. 열 편이면 적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시집의 전체 방향을 좌우할 형편은 아니다. 특히 이 시집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리를 찾아가는 자의 고뇌 비슷한 것인데, 사랑이 그러한 쓸쓸한 배경 앞으로 도드라져서 사랑과 그 사랑이 만드는 삶의 공허감으로 연결이 되어 사랑을 노래한 시집으로 오해하게 된 듯하다. ‘홀로서기’처럼 좋은 사랑시 한 편만 들어있어도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이니, 이 정도면 오히려 많은 수가 들어있는 셈이고, 그것이 독자의 정서를 자극한 것이다. 오히려 이 시집에는 사랑말고도 더 중요하고 인생의 깊은 통찰을 추구하는 세계가 들어있다. 그런데 그 세계가 추구하는 곳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는 작품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언저리에서 무언가를 보았다는 사실이다. 이건 아주 중요하다. 머지 않아 그 경계를 뚫고 그 안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용혜원이나 서정윤 같은 삼류 사랑시하고는 다른 구석이 있다. 그리고 문단의 시들로부터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 거리는 그가 현재 정신과 영혼을 실험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명상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명상의 도달점은 인간이겠지만 그 과정이 사람의 삶과 문학을 아름답게 하므로 이 시집은 그런 과정을 담아낸 공이 있다. 그가 어디에 도달하든 이 시집은 시가 닿아있어야 할 한 위치를 보여주고 있다.★★☆☆☆[4337. 1. 26.]
373□전장포 아리랑□곽재구, 오늘의 시인총서 29, 민음사, 1985 할 말 많은 것이 시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표현이 주눅들었다. 시를 쓰는 능력으로 보아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하고 어디까지 말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은 아닌데 전혀 그런 절제를 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시가 나온다. 아마도 시대의 문제에 집착한 까닭이리라. 그런데 마치 독립군들의 외침 같은 느낌이 든다. 교사의 이야기를 하다가 친척의 이야기를 하다가 뿌리뽑힌 자들의 심정을 이야기하다가, 이야기들이 온 나라 모든 계층으로 뻗어있다. 아마도 의식이 계급화 되기 이전의 시들이기 때문이리라. 같은 말이라도 분명한 방향을 설정하고 말하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안 된 것은 1980년대의 업보이리라. 이 시집의 성과라면 운율인데, 그 운율도 너무 많은 이야기들에 붙잡혀있다. 뒤쪽의 장시는 차라리 다른 시집 한 권으로 독립시키는 것이 그 시를 위해서나 이 시집을 위해서나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4337. 1. 27.]
374□꿈의 페달을 밟고□최영미, 창비시선 175, 창작과비평사, 1998 시집 전체에 흐르는 주제는 사랑인데, 그 사랑이 개인의 사랑 체험에 머물러있고, 그 주변에 사회에 대한 마음의 짐이 찌꺼기처럼 남아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랑의 이야기에서도 주제가 흩어진다. 시는 주제에 대한 감정이 분명해야 하는데, 그것이 희박한 것이 이 시집의 단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일기장에 써놓아야 할 것들이 시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다. 표현보다는 주제에 이 시집의 초점이 가 닿아있는데, 그 주제조차도 분명치 않아서 시가 무력해졌다. 사랑을 말하더라도 어떤 사랑을 말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먼저 정해야 하고 그런 다음에 그것을 전달해주는 방법과 표현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할 시집이다.★☆☆☆☆[4337. 1. 29.]
375□변명은 슬프다□권경인, 창비시선 181, 창작과비평사, 1998 시를 참 잘 쓰는 시인이다. 그리고 아주 큰 세계를 노래하고, 아주 큰 작품을 쓸 수 있는 시인이다. 이런 시인을 보면 한국 시의 장래도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는 안도감이 든다. 이 시인은 삶을 규정하고 삶을 열어주는 어떤 근원을 분명히 보고 그것을 노래하고 있다. 죽음, 외로움, 고통 같은 것이 그런 것들인데, 그것을 그냥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긴 구도를 이루는 한 원리로 보고 있다는 것이 다른 시인들과 다르다. 그것은 삶이라는 이 지루한 운동의 논리를 깨닫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긴 안목이 시를 아주 단단하고 큰 것으로 노래하게 한다. 그래서 단시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시가 다소 어렵고 거창해 보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점이 아니다. 이 시인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고, 그리고 그 장점은 머지 않아 자신의 장점을 가장 크게 살릴 중요한 주제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의 단련을 좀 더 거쳐야 한다. 지금 도달한 세계만 가지고는 어렵다. 한 번 더 통과해야 할 관문이 있으니, 그 관문을 통과하면 위대한 세계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 관문을 정확히 통과하려면 스승이나 도반이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이 걱정이다. 산에 가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그런 세계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진하여 이룰 수밖에 없는 그 높은 고지가 바로 코앞에 닥쳤는데, 이 좁다란 한국 시를 위해서라도 그 봉우리를 넘기 바란다. 한자는 버려야 할 유산이며, 다음 시집에서는 제목을 좀 더 적절한 것으로 뽑을 필요가 있다.★★★☆☆[4337. 1. 29.]
376□성에꽃 눈부처□고형렬, 창비시선 171, 창작과비평사, 1998 활구 아래 득도하면 온 우주를 구원하지만, 사구 아래 득도하면 제 몸뚱이 하나 건지지 못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글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말이라고 해서 다 말이 아니요, 말 중에는 해야 하는 말이 있고, 해도 되는 말이 있고, 하나마나 한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 법이다. 무릇 시인 된 자가 해서는 안 될 말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이 없는데, 이 시집에는 하나마나한 말들이 가득 차 있는 가운데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많이 끼어있다. 체험하지 않은 추측은 관념일 뿐이다. 체험했다고 해도 그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물어야 할 것들이라면 절간 몇 번 드나든 발길로 대웅전 위에 올라앉아 함부로 설법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절간에 침묵수행이라는 것이 괜시리 있는 것이 아님을 생각할 일이다. 한자가 왜 필요한가를 되묻게 하는 시집이다. 83쪽의 <햐안 배>는 <하얀 배>일 것이고.★★☆☆☆[4337. 1. 30]
377□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노향림, 창비시선 180, 창작과비평사, 2000 색다른 표현이 시인의 중요한 임무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너무 집착하면 시에 멍 자국이 남게 된다. 이 시집의 곳곳에 그런 멍 자국이 보인다. 대체로 시의 이미지들이 스스로 존재하는 듯하다가도 다른 무엇을 위해 봉사하거나 희생하는 쪽으로 급선회하는 경우가 많다. 표현은 의미를 전달하면서 이루어져야 100퍼센트 힘을 발휘한다. 그렇지 않고 표현이 표현으로만 남아있게 되면 공허하게 된다. 칸트의 말투를 빌자면, 내용 없는 표현은 공허하고, 표현 없는 내용은 맹목이다. 좋은 표현들이 의미를 제대로 끌어들이지 못해서 공허해진 곳이 아주 많다. 그리고 이미지들이 서로 인과관계로 물고 물리면서 이어져야 하는데, 연 구분이 된 많은 시들에서 그 전후 관계가 새로 설정되어야 할 듯한 것들이 많았다. 한자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스스로 답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4337. 1. 30]
378□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이경림, 창비시선 167, 창작과비평사, 1997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는 능력이 있다. 바로 그런 부분이 시인만의 고유한 영역이 될 것인데, 그런 점에서 이 시집에 보이는 그런 공간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다만 그런 공간이 뻔히 예상되는 결론이나 세계관과 결합하면 애써 발견한 그 세계마저 퇴색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의식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시들은 스스로 굉장한 절제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있는 형식들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 개인의 가슴속에 들어있는 정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정서의 촉수가 가 닿는 대로 언어를 쏟아놓게 된다. 그런데 나온 대로 쏟아버리고 말면 시가 되지 않는다. 결국 시와 시가 아닌 것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되는데, 그것을 시로 만드는 것은 사고의 긴장과 활력이다. 그 활력은 여태까지 가보지 않은 곳으로 가는 자만이 만들 수 있다. 그런 긴장과 활력을 잃는 순간 시는 말장난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 굉장한 실험 가운데 전통 서정시가 박혀있는 것은 어쩐지 덜 벗은 계절의 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경우 시가 좋아도 그것은 일종의 타성처럼 보인다. 한자 역시 특별한 의도가 아니라면 굳이 써야 할 무기는 못 된다.★★☆☆☆[4337. 1. 30]
379□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박영근, 창비시선 169, 창작과비평사, 1997 이미지의 의도에 대해서 생각해볼 시집이다. 이미지는 그 주된 기능이 일종의 제시이다. 제시는 보여주기의 일종이고, 보여주기는 그 뒤에 말하지 않음의 암시를 띠고 있다. 그래서 완곡 어법에 해당하고, 완곡 어법은 그것이 큰 전체를 지향하다가 그 전체가 한꺼번에 드러날 때 대단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낱낱의 시에서 그때그때 급한 이야기를 하는 데는 아주 불리하고 어쩌면 불필요하기까지 한 것이다. 감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면 그대로 쌍욕으로 나가는 것이 더 좋은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 시집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는 시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미지가 그 앞을 가로막아서 제2, 제3의 상징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어주고 있다. 그래서 할말이 주춤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이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장점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박노해나 백무산의 시가 성공한 것은, 그러한 이미지들조차도 쌍욕의 의지 속으로 빨아들여서 할말을 위한 도구로 철저히 부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지에는 어쩐지 지식인의 창백한 자기독백 비슷한 것도 들어있다. 의식의 방향이 문제인데, 과거에 집착해서는 앞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어디로든 나아가야 할 불굴의 정신이 미래를 뚫는다. 한자가 왜 등장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4337. 1. 30]
380□옛날 녹천으로 갔다□장대송, 창비시선 184, 창작과비평사, 1999 빈 수레가 요란하다. 이미지들은 나름대로 법칙을 가지고 잘 짜였는데, 잘 짜여진 그 수레에다 실을 내용이 없다. 그렇다고 절대 이미지를 추구하여 이미지를 통해서 무언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시를 쓰기 위해서 쓴 시이다. 무언가 할 말은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고 이미지 뒤로 숨어버렸다. 할 말을 정하지 않고 시를 쓸 때 어떤 결과가 오는가 하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시집이다.★☆☆☆☆[4337.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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