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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발자국들이 남긴 길□고창환, 문학과지성 시인선 245, 문학과지성사, 2000 서정시의 문법에 아주 충실한 시집이다. 오히려 문학과지성사에서 이런 시집을 낸다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허무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발상도 그렇고 전개 수법도 그렇고 서정시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다. 이 경우 정서와 세계가 그 이전의 서정시가 갖는 것과 색깔을 달리 하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가 없다. 그 이전의 세계와 별로 색다른 것이 없는 무색무취의 세계가 이 시집이다. 그리고 내용 빈약의 특징이 이 시인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별로 할 말이 없는데 억지로 만든 시들이 적지 않다.★★☆☆☆[4337. 3. 7.]
522□먼지의 집□이윤학, 문학과지성 시인선 125, 문학과지성사, 1992 관찰력이 세밀하고 감수성도 섬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를 완결시키려는 성실성이 돋보인다. 이런 점은 시 전체를 다듬으려는 노력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어서 높이 살 만하다. 그런데 시집의 중반을 넘어서면 내용 없는 빈 쭉정이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그 만큼 이미지만으로 채워졌지, 그 이미지를 뒷받침할 만한 세계가 부실하다. ‘판교리’ 연작이 그런 경우이다. 연작 번호가 9까지 나갔으면 그에 상응하는 어떤 세계가 들어있어야 한다. 그런데 체험의 절실함이나 인식의 새로움도 없이 이미지만 나열되고 있다. 그런 이미지들이 자신의 정신세계 내의 어떤 감성을 드러내고 세계를 밝히려는 것인지 나타나야 한다. 그 뒤로 거의 모든 시들이 내용의 빈곤을 겪고 있다. 한자는 어울리지 않는 옷 같다.★★☆☆☆[4337. 3. 10.]
523□치명적인 것들□박청호, 문학과지성 시인선 157, 문학과지성사, 1995 시의 앞부분 절반과 뒷부분 절반이 너무 달라서 황당하기까지 하다. 앞부분에서는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이미지들이 낯선 충돌을 보이며 무의식의 깊이까지 들어가고 있는데, 뒷부분에서는 내용도 단순하고 방법도 건조해서, 이것이 같은 사람한테서 나온 것일까 의문이 들 정도이다. 앞부분의 시는 독특하다. 현대 문명과 삶의 양상을 숲과 우물로 요약시킨 능력이 놀랍다. 그런 실험이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려면 대상에 대한 환치에 머물지 않고 무의식을 담아내는 섬세한 감성이 요구된다. 시가 다분히 논리에 이끌리고 있다는 느낌이 계속 드는 것은 바로 그런 경계까지 나아가질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 글자든 두 글자든 한자는 시를 그저 악화시킬 뿐이다.★★☆☆☆[4337. 3. 10.]
524□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이윤학, 문학과지성 시인선 241, 문학과지성사, 2000 사물에서 새로운 징후를 읽어내는 것은 시인의 중요한 일이고, 이 시집은 그런 노력이 아주 돋보인다. 그런데 다소 성급한 결론을 내려고 하는 것이 시의 폭을 좁게 만든다. 인식이 있으면 그 인식과 이미지에 실리는 내용들이 적당한 살을 갖추어야 이미지도 살고 주제도 사는데, 이미지 하나를 찾아내면 그 하나에 어떤 주제를 정확히 실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시들이 서둘러 결론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런 조급함만 가신다면 좋은 시를 쓸 시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시 전체에서 노래해야 할 것이 무언인가를 빨리 깨닫는 일이다. 그것은 인생의 무게이기도 해서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빨리 알수록 큰 시인이 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소멸이나 슬픔, 외로움 같은 끝이 빤히 보이는 것들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시를 만들기 위해 억지로 조작된 감정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 한 가락 한다는 젊은 시인들이 일부러 그런 감정들을 조작해내고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나 한국 현대시를 위해서나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4337. 3. 13.]
525□벌거벗은 자의 생을 위한 주머니 속의 시작 메모□배신호, 문학과지성 시인선 219, 문학과지성사, 1998 의욕은 좋은데 수준이 그 만큼 따라가지 못한 작품이다. 장시를 쓸 때 유의할 것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주제가 분명해야 하며, 둘째,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 또렷해야 하고, 그 방법은 그 이전의 것과는 달라야 하며, 셋째, 전체 시의 주제를 상징해줄 수 있는 이미지가 필요하다. 큰 내용을 말할수록 상징은 단순해야 한다. 그래야만 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그 하나 주변에 자신의 생각을 붙잡아 둔다. 이 시집은 이런 모든 것들이 부족하다.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하는 것부터가 분명치 않다. 그리고 문장이 시의 문장이 아니다. 장광설이 때로는 필요하지만, 그 장광설이 갖춘 문구는 분명한 통사구조를 갖추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분명한 주제를 담고 있어야 한다.★☆☆☆☆[4337. 3. 13.]
526□그 나무는 새들을 품고 있다□이나명, 문학과지성 시인선 237, 문학과지성사, 1999 깨달음 없이 선사 흉내를 내는 것보다 더 참혹한 일은 없다. 화엄이라고 하는 것부터가 심상찮았는데, 거기에 따를 만한 깨달음이 없으니 그건 말장난에 불과하다. 단순히 나팔꽃의 과정을 노래하려고 한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다. 시를 끌어가는 수준이 고르고 말을 다루는 것이 일관된 것이, 능력 있는 시인이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주제가 빈약해져서 큰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쓰기 위해 쓴 시가 많다. 주제가 정해지면 그 주제에 걸맞은 상황을 설정하되 그 설정된 상황에 매몰되면 정작 할 말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대상을 묘사하되 대상에 빠져서 정작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주제에 알맞은 이미지를 찾아야 하고 그것에 매몰되지 않을 만한 세계관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작품의 양에 일정 정도 비례한다.★★☆☆☆[4337. 3. 13.]
527□부드러운 감옥□이경임, 문학과지성 시인선 209, 문학과지성사, 1998 시에는 처음 제시된 이미지에서 다음 이미지로 넘어가는 속도가 있고, 독자는 시를 따라가면서도 자신이 읽어 가는 속도가 있다. 그 속도가 잘 맞아야 독자는 쉽게 시를 읽는다. 그리고 그것은 감동으로 연결된다. 이 속도가 맞지 않는 것은 대개 시를 쓰는 사람이 불필요한 이미지나 의미를 중간에 삽입하기 때문이다. 즉 이미지 전개의 필연성과는 상관이 없는 부분이 들어갈 때 생기는 일이다. 이 시집은 감옥이라는 한 이미지에 다른 이미지들이 몰려들도록 전체의 조화까지 배려하고 있어서 시인이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도 이미지의 속도와 독자의 속도가 맞지 않아서 생기는 불편한 점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이미지를 잘 전개하다가도 거기에다가 설명을 덧붙이려고 하는 버릇에서 생기는 현상이다. 한자 역시 읽는 속도에 부담을 주는 요인이다.★★☆☆☆[4337. 3. 13.]
524□쇼핑 갔다 오십니까?□성기완, 문학과지성 시인선 213, 문학과지성사, 1998 시집 전체가 한 작품의 짜임새와 똑같은 구성을 띠도록 구성한다는 것은 여간한 능력이 아니어서 크게 칭찬 받을 만한 일이다. 그 패기도 좋고 실험하고자 하는 의도도 좋다. 그런데 왕왕 실험시들이 갖는 한계이고 문제점이기도 하지만 연결시키고자 하는 고리가 너무 멀어서 이미지들을 서로 연결시키기 어려운 지경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맥주거품을 씻는 하얀 손에서 겨울의 눈 이미지를 읽어야 하는 부담은 여간한 것이 아니며, 애써 그렇게 읽어서 연결시킨들 그 어려운 연결이 갖는 의미(우주의 순환성?)가 실험정신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면 작품으로서는 보잘것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의도는 좋지만 작품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지만 큰 작품을 쓸 시인인 것은 분명하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4337. 3. 13.]
528□식탁 위의 얼굴들□이철성, 문학과지성 시인선 217, 문학과지성사, 1998 꿈과 무의식 속으로 드나들면서 자유로운 상상력을 뻗는 모습이 아주 활기차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나의 과거와 만나서 씁쓸하지만 돌아볼 만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뒤로 가면서 시가 늘어진다. 군더더기가 많아지고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많아 동원해서 맥이 풀렸다. 습작기의 냄새랄까?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지어낸 시들이 적지 않다. 꼭 필요한 이미지만을 정확한 곳에 쓰는 법을 좀더 천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4337. 3. 13.]
529□빛을 찾아나선 나뭇가지□함명춘, 문학동네 시집 30, 문학동네, 1998 시에서 필요한 기술은 거의 다 배운 시인이다. 한 번 포착된 이미지를 완결된 모습으로 만드는 능력은 시인의 기본이지만, 그것을 갖춘 시인이 그리 많이 않은 시대에는 그것조차도 소중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지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이미지뿐인 것들이 많아서 결국은 시를 부실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미지는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어떤 것을 끌어안고 있어야만 빛을 제대로 낸다. 한 구절이라도 이 점에서는 예외일 수 없다. 이미지는 표현의 극대화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이미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깝다고 시에 그대로 남겨둔 이미지들은 시간이 갈수록 시에서 역겨운 냄새를 풍기게 된다. 첫 시집을 내는 시인들이 겪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허점이 용인된다면 그것은 프로의 세계가 아니다. 이미 뻔히 고정된 세계에 자신의 생각을 맞추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남들이 가지 않은 곳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시인의 용기이고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너무 많이 길들여졌다는 느낌이 든다. 이 시인을 이렇게 길들인 자들에게 똥침을!★★☆☆☆[4337. 5. 20.]
530□님□하종오, 문학동네 시집 33, 문학동네, 1999 방법상의 혼란이 시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시에는 말이 있고 이미지가 있다. 이 두 가지는 때로 잘 섞이면 좋지만, 잘 못 섞이면 시를 망가뜨리는 원인이 된다. 이 시집에서는 뒤쪽으로 아주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시집을 읽으면서 분명히 드러나는 주제조차도 파악하기 심히 불편한 것은 바로 이 점의 작용이다. 말은 그대로 말이고, 이미지는 그 말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앞서 말을 했는데, 그 말의 진척과는 상관없이 동어반복으로 이미지를 제공하거나 그 반대로 하면 독자의 읽는 속도는 물론 인식의 방법까지도 방해받는다. 그래서 될수록 서술과 묘사는 구별해서 해주는 것이 좋다. 말할 곳에서는 말을 하고 묘사할 곳에서는 묘사로 하는 것은 시인의 능력이다. 특별한 의도 없이 둘을 마구 섞으면 쓰기는 편할지 몰라도 읽는 사람은 불편하다. 때로 시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그러지 않아도 될 곳에서 그런다면 그건 실력 부족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시가 지닌 표현법의 기본을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할 시집이다.★★☆☆☆[4337.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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