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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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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31
2015년 02월 11일 11시 47분  조회:1825  추천:0  작성자: 죽림

 

301□진달래꽃□김소월,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 미래사, 1991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곳에 다다른 시인이다. 원래 가락을 잘 느낄 수 없는 우리말에서 운율은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다. 쉽게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통 시가 가락에서 벗어나 이미지로 달려가고 있는 까닭에 분명하지도 않은 운율이 독자에게 어떤 울림을 주기는 힘들다. 그런데 김소월은 그 생각을 뒤집어 놓고도 남을 만한 훌륭한 가락을 시에 실어놓았다. 가락이 살아있는 것은 쉽게 노래가 된다. 유행가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가 곡이 붙은 것은 김소월일 것이다. 이름난 모든 시가 거의 다 곡이 붙었다.

  이미지와 달라서 가락은 영혼을 직접 울리는 형식이다. 이미지는 머릿속의 연상작용으로 재조립한 다음에 그 그림의 의미를 분석하고 해석하지만 가락은 그 의미가 와 닿기 전에 이미 심장에 꽂힌다. 심장이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몸 속에서 박동을 쳤기 때문이다. 시의 가락은 바로 그런 본능에 호소하는 방법이다. 그것을 아주 잘 살린 것이 김소월이고, 그 이후에는 김소월만큼 탁월한 성취를 보인 시인이 없기에 김소월을 최고의 시인으로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으로는 김소월 같은 시인이 나오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시대는 영상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고, 또 산업사회의 구조가 우리의 전통 리듬과 단절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시인들은 의미 중심의 시로 쏠리지 않을 수 없다. 김소월 이후 시에서 가락의 전통은 박정만, 문병란, 양성우, 정호승 같은 시인들의 시속으로 면면히 흘러간다. 박정만을 빼면 대부분 민중시 계열의 참여시인들이라는 것은 눈여겨볼 만한 일이다. 가락이 감정을 자극하고 이미지가 이성의 작용을 강화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재미있는 현상이다. 무엇보다도 김소월의 시에는 한국인의 영혼이 담겨있다. 때묻지 않은 한국인의 영혼이 가락에 담겨있어서 그것을 후대의 시인이 따라할 수 없는 것이다.★★★★★[4336. 12. 8.]

 

302□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1, 미래사, 1991

  시에서 가락을 살리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많은 시에서 성공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 가락의 형태가 너무 한결같다. 4․4․5조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거기서 한두 음절을 변형시켰다. 물론 뒤에 오면 시가 길어지지만 앞부분의 짧은 시들은 그런 운율실험의 산물인 것 같다. 긴 시에서도 가락이 잘 살아있지만 거기서 어떤 형식에 가까운 것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가락을 살린다고 해도 의미를 죽이거나 너무 강화하면 안 된다. 의미가 강한 것 중에도 가락이 잘 살 수 있지만, 여서는 가락의 획일성으로 인해서 의미가 두드러지는데, 많은 작품들이 가락 때문에 의미가 잘리거나 비약하고 있다. 그리고 시 전체에서 추구하는 의미나 인식이 깊지를 못하다. 먼저 가는 사람의 불리함이리라.★★☆☆☆[4336. 12. 8.]

 

303□세속도시의 즐거움□최승호, 세계사시인선 4, 세계사, 1990

  시집 첫 장부터 끝장까지 일관된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 놀라운 집중력과 뚝심이다. 이 정도면 세계와 대결해도 될 만한 일이다. 세계를 보는 눈이 확고하고 그것을 표현할 만한 능력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통해서 세계의 끔찍스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공 여부를 떠나서 표현에는 홑겹의 묘사가 있고 겹겹의 묘사가 있다. 홑겹의 묘사는 단순하여 울림이 깊지 않다. 대부분 1:1 대응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겹겹의 묘사는 발상의 자극과 이미지의 작용이 겹겹이 이루어져 울림이 깊다. 당연히 홑겹보다는 겹겹의 울림이 나오도록 시는 써야 한다. 여기서는 홑겹의 시선에 머물러있다. 즉 낱낱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시들이 존재한다. 즉 시인이 세계를 낱낱의 개념으로 이해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한 한 개념을 설명하고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시들이 단순하다. 주로 죽음, 욕망, 허무 같이 이미 낯익게 개념화한 것들을 이미지로 풀어내려고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물론 시집 전체 속에서 세계를 보여주는 다양한 눈 구실을 하지만, 충분히 겹겹의 방법으로 세계를 보여줄 수도 있다. 그리고 시가 창처럼 찌를 수도 있지만 눈처럼 어느 순간 온 세상을 덮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창으로 찌르면 고름이 퍼지지만 눈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세계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고 만다. 시는 그러해야 좋은 시다.★★★☆☆[4336. 12. 8.]

 

304□사슴□노천명,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1, 미래사, 1991

  시의 전체 모습이 크게 둘로 나뉜다. 앞부분의 시들은 내용도 없이 형식에 매달려서 다듬으려고 한 것이고, 뒷부분의 시들은 내용을 담기 위해 무리수를 많이 둔 것들이다. 아마도 이것은 삶의 태도가 변화한 탓일 것이다. 시대에 대한 고민은 그것이 순진한 것이든 아니면 이데올로기 차원의 것이든 집권자들로부터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해방 전 일본이 통치하던 시절에는 그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가 자연 언어를 조탁하는 방향으로 틀어지면서 나름대로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당시의 실정으로 보면 여자의 섬세한 감수성이 담긴 시를 보기가 쉽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시집 후반으로 넘어오면 말하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 강렬해서 언어가 마치 동원되는 듯한 느낌이 온다. 이것은 아마도 한국전쟁을 계기로 사상 논쟁에 휘말린 탓이 아닌가 한다. 결국 시가 이데올로기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천명 이미지는 주로 앞부분의 것에 쏠려있다. 뒤의 것은 언어는 오히려 매끄러워졌는데 여기저기 불거진 사상의 몰골 때문에 그리 볼 만한 것이 없다.★★☆☆☆[4336. 12. 9.]

 

305□님의 침묵□한용운,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4, 미래사, 1991

  “기탄잘리”의 영향이 한 눈에 보인다. 어떤 절대성을 향해 인간의 고뇌를 읊는 방식은 굳이 기탄잘리의 특허는 아니지만, ‘타골의 시를 읽고’라는 시를 보듯이 기탄잘리가 한용운에 미친 영향은 어조에 직접 나타나있다. 그런데 기탄잘리의 영탄 내지는 찬양 일변도의 어조와 달리 이 시집은 상당히 세속화 되어있어서 현실의 삶 속에 훨씬 더 가까이 내려왔다. 이것은 아마도 한용운의 사상 속에서 어떤 변질을 입어서 그런 것 같다. 그것은 불교의 사상체계일 것인데, 어떤 영향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 영향을 받아들일 만한 성숙한 사상을 갖지 못할 경우에는 그 겉모습만 흉내내고 끝나는 경우가 많다. 김기림이나 김광균이 받아들인 어설픈 이미지즘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내부에 어떤 성숙된 사상이 이미 자리잡고 있으면 그 사상은 바깥의 어떤 촉발에 쉽게 싹이 터서 건드려준 외래의 것과는 전혀 다른 싹을 내민다.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이면 고욤이 나질 않고 탐스런 감이 열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내부에 그런 것이 없으면 그대로 고욤도 아니고 감도 아닌 엉뚱한 튀기가 나올 뿐이다. 이미 불교의 공 사상이 내부에 차지하고 있었기에 한용운은 기탄잘 리가 스치고 가자마자 그 향기를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여 이런 놀라운 세계를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 다른 대극의 개념을 활용하여 장점과 단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시를 쓴 것이 많다. 저쪽을 찬양하고 이쪽을 비판하는 식이다. 그래야만 님의 존재가 잘 드러나고 현실의 갈등을 드러내기가 쉽다. 그리고 이 양극은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한 관련에 긴장을 주는 것도 역시 한용운의 시에 잘 나타나는데, 아마도 이것은 공과 색의 개념에 익숙한 불교의 영향일 것 같다. 그러나 설명조의 말이 많은 것은 끝내 단점이다.★★★★☆[4336. 12. 9.]

 

306□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천상병,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48, 미래사, 1991

  마치 동시 같다. 순진하고 깨끗한 마음이 아주 자연스럽게 우러났다. 꾸밈없음이 어설픈 꾸밈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이 시집은 보여준다. 시행일치(詩行一致)를 보여주는 아주 희귀한 예가 될 것이다. 순수한 마음은 순수한 통찰을 낳고, 순수한 통찰은 때로 우주의 본질까지 꿴다. 곳곳에서 그런 놀라운 통찰이 드러난다. 설명하는 식의 화법은 중요한 단점이다.★★☆☆☆[4336. 12. 9.]

 

307□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도종환, 문학동네 시집 2, 문학동네, 1994

  서정시의 한 절정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접시꽃 당신”에서는 격앙된 감정이 시를 밀어올린 형국이었는데, 이 시집은 그런 격랑이 가라앉고 차분해진 상태에서 뽑아 올린 절창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도 차분하고 시의 서술도 냉정하다. 외로움이 차분히 가라앉아서 감정이 일렁일 때마다 연꽃 한 줄기씩 밀어올리는 듯하다. 말들이 자기 자리에 꼭 박혀서 별처럼 빛을 낸다.

  두 가지가 문제다. 어설픈 땡중의 깨달음 흉내를 내는 것이 흠이고, 또 한 가지는 뒷부분으로 가면서 시들이 마감이 덜 된 듯한 느낌을 준다. 간결한 맛이 사라지고 느슨해졌다. 시가 깨달음을 동반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선가의 발상에 너무 기울면 활구가 되지 못하고 사구로 전락하고 만다. 서쪽 하늘 이미지들이 그런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이미 사비유처럼 쓰여서 더 이상 신선한 맛을 내지 못한다. 뒤편의 시는 인식은 좋지만 앞부분의 절망과 외로움을 다룬 것들과 상당부분 배치된다. 그리고 무거운 내용을 가뿐한 발걸음으로 설명하려니 옷이 영 어울리지를 않는다. 욕심을 버릴 때는 과감히 버리는 것이 좋다.★★★☆☆[4336. 12. 9.]

 

308□노동의 새벽□박노해, 풀빛판화시선 5, 풀빛, 1984

  여태까지 묘사되지 않은 어떤 대상을 묘사하는 일은, 그 처음이란 조건 때문에, 한 글자 한 줄이 새로운 창조의 고통과 맞먹는다. 그 만큼 어려운 일이고 실험정신과 암중모색의 집념을 거쳐야만 열리는 세계이다. 그런데 그런 세계는 체험과 삶을 투자하지 않으면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도 많이 걸리고 만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이곳에 실린 시의 세계는 우리 주변 가까이 있으면서도 이상하게도 전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적이 없는 세상이다. 우리의 가장 아픈 부분이면서도 아무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은 곳, 바로 노동현장이다. 이것은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 사회와 역사의 비극이다. 좌우가 공존할 수 없는 현실이 이런 묘한 공동화를 가져왔다. 그런데 그 속에서 사람들이 꿈틀거렸다. 바로 그 현장에서 그들이 직접 낸 목소리기에 언어 전문가들이 만든 다른 시 세계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어떤 이론이나 조직의 지원을 받은 적이 없는 내용들이기에 더욱 값지다. 어떤 이론이나 체계에 의하지 않고 이렇게 저절로 발생한 경우, 이것은 시를 쓴 사람의 감수성과 능력에 따라 수준 차이가 많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이 시집의 경우 제도권의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대부분의 분야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만큼 좋은 작품이다. 인식의 힘이야말로 이 시집의 가장 큰 미덕이며 그것을 표현하는 형상성 역시 빼어나다. 다만 격앙된 감정에 휩싸여 곳곳에서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만든 것은 이 시인이 프로가 아닌 한 당연한 결과이고, 그것은 우리 사회의 여러 문화 유산을 누릴 혜택을 받지 못한 이 땅 노동자의 진실한 모습이기도 하다. 노동자가 자신의 말을 시로 하는 어떤 전형을 만들어놓은 시집이다. 그런데 대도(大道)니 별종(別種)이니 하는 한자가 섞인 것은 참담한 일이다. 노동자들조차도 한자를 버리지 못한다는 것은 한자라는 봉건의 관성이 얼마나 뿌리깊고 끈질긴 것인가 하는 것을 또 다시 생각게 한다. 제발 시집 편집자의 실수이기를 바랄 뿐이다.★★★☆☆[4336. 12. 9.]

 

309□멧새 소리□백석,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0, 미래사, 1991

  시가 감정을 담아내는 양식이고, 그것이 또 언어를 그 매개로 하는 갈래라면,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질감은 언제나 중요한 문제가 된다. 언어는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체이자 수단에 불과하지만, 때로는 수단이 목적을 결정하는 수가 종종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갈래보다 시에서 특히나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이 쓰는 언어를 잘 다듬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은 때로 수단에 불과한 언어의 존재양식에 따라서 변형을 입기까지 한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집착을 하면 언어의 쓰임에 소홀하기 쉽고, 이런 방심은 작품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어떤 순간에는 언어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문학행위가 될 수 있다. 사회변동이나 역사의 압력이 세어 언어가 기를 펴지 못할 시기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일제가 조선어를 탄압하기 전까지는 조선어로 말을 하고 사고를 했겠지만, 기록은 또 다른 차원이어서 그런 살아있는 말들이 기록으로 남겨지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고, 그 와중에 조선어는 일본어인 국어의 압력을 받았다.

  백석은 이러한 시점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서있던 시인이다. 따라서 그 시기에 쓰여진 그의 시는 시의 형상화 성공 여부보다는 조선어의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백석의 시는 토박이말로 사고를 하고 토박이말로 정서를 그려낸 수작이라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 언어가 그렇기 때문에 그런 언어를 통하여 담긴 정서는 이제는 돌아볼 수 없는 한 희귀한 풍물이 되었다. 시의 구조나 형상화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이 시집의 시들 중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토박이말이 그려낸 세계의 정서는 형상상의 기준으로 잴 수 없는 그런 곳까지 나아갔다. 그 역시 시가 도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중요한 한 경지이다.★★★☆☆[4336. 12. 10.]

 

310□오감도□이상,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9, 미래사, 1991

  옛날에 읽을 적에는 새롭고 재미있더니, 이번에 읽을 때는 사막같이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햇빛 속으로 간밤의 몰골을 드러낸 라스베가스라고나 할까? 그리고 어쩐지 기형도와 아주 빼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인식을 냉정한 도구로 하여 헛된 지식이 부리는 욕망의 지도를 눈에 비친 그대로 묘사한 것이나, 끝내 자신으로부터 구원을 읽지 않고 문명이 가는 대로 방치해버린 것이나 모두 닮은 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시는 그것이 제대로 쓰여진 시라면 시안에 모든 비밀이 들어있는 법이다. ‘회한의 장’이란 시에 이상의 마음이 지도처럼 나타나있다. 언어는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이고, 내가 밖으로 나가는 문이다. 문은 열려있지만, 그 밖으로 나가고 안 나가고는 문 안의 주인한테 달린 것이다. 문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지탄하는 것이 세상이고 그런 지탄을 받지 않으려고 문안으로 더욱 숨어버리는 것은 개인이다. 아마도 이상은 단군 이래 최초의 개인이 아닌가 한다. 언어는 개인을 밖으로 소환하려고 하고 개인은 그 소환장을 받아들고 어쩔 줄을 모른다. 그 소환장을 받지 않는 것은 미치거나 죽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죽을 용기가 없던 이상은 미치는 방법을 택한 것 같다.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로 보기에는 시들이 너무나 정연한 이미지의 체계와 논리를 갖추고 있다. 이미지들도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맞물려 돌면서 오히려 김수영의 시에서 보이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질 정도다.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미지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시를 이끌어간다. 아주 잘 쓴 시다. 정신이 움직이는 양상과 방향을 깊이 관찰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통찰이 시 곳곳에서 번득이고 있다. 이른바 근대가 개인의 발생과 자유의 실현이라면 그러한 세계를 처음으로 시에 이룩한 시인이다. 자유라는 개념조차 없는 곳에 사는 한 자유인의 처절한 절망과 유폐를 드러낸 시다. 그가 넘어설 수 없었던 일본만이 그의 벽이었을 것이다.★★★★☆[4336.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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