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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늙은 퇴폐□이승욱, 민음의 시 50, 민음사, 1993 ‘진홍빛 꽃’ 같은 빼어난 작품이 꽤 많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을 보면 이 시인은 상징의 기법을 알고 그것을 통해 독자들을 빨아들인다. 그런데 그에 반해 세계관이 너무 확고하고 고정되었다. 사물을 상징화시키는 것은 제시의 방법에 가깝다. 제시란 단정보다는 제안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으로 잘 다듬어놓은 것에 군더더기를 붙여서 독자에게 제시하게 된다. 그 군더더기를 제거하는 것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열쇠이다. 생각을 제시할 뿐 말을 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면 정말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시인이다.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외국어부터 추방해야 한다.★★☆☆☆[4336. 11. 24.]
172□저녁의 첼로□최계선, 민음의 시 54, 민음사, 1993 하고자 하는 말에 비해 너무 많은 말들이 동원되고 있다. 이것은 언어에 대한 감각은 뛰어난데, 인식의 깊이가 부족한 탓이다. 세계를 보는 눈을 좀 더 깊고 넓게 확립할 필요가 있다. 세계에 대한 명징한 깨달음에서 언어가 떠올라야만 그 언어는 연꽃 같은 신선함을 준다. 그리고 사물에 대한 슈퍼마켓 식 지식이 주제를 전달하는 도구로 충실한 기능을 하지 않고 오히려 주제 전달에 장애를 주는 수가 많다. 이 역시 할 말을 정하고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이미지 하나 때문에 할 말을 만든다는 증거이다. 대체로 어떤 사물에 감상이 촉발되어서 시를 쓴다. 시를 써야 한다는 시인의 의무에 충실한 것은 좋지만 그런 부담마저 벗어버릴 때 좋은 작품은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에서 한자는 불필요한 지식 자랑과 같다.★☆☆☆☆[4336. 11. 24.]
173□딱따구리는 어디에 숨어있는가□최동호, 민음의 시 72, 민음사, 1995 풍경 묘사로 마음을 대신하는 시를 쓸 때는 될수록 자신의 위치를 시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 게다가 마음이 깨달음을 풍경으로 담아내려면 절제된 언어로 그 끝을 조금만 드러내주면 된다. 이 시집의 대부분은 몇 가지 방법론이 섞여 있어서 방법론으로도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마음을 풍경을 묘사로 대신하려고 한 시들은 대부분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은 스스로 주제를 말로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히려 비유를 통한 시들이 더 깔끔하다. 그러나 이 시집의 본령은 실패한 시들이다. 그것이 시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은 가벼워지는 시의 환경 속에서 아주 값진 것이다. 이미 진리가 없는 것으로 판정 난 듯한 시인들의 무수한 발언 속에서 진리를 찾는 것은 그것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그 진리의 문을 열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이기 때문이다.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서쪽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한자 속으로 왔지만 지금은 한자 밖으로 벗어났다는 것도 알아야 할 일이다.★☆☆☆☆[4336. 11. 24.]
174□숨은 사내□박기영, 민음의 시 37, 민음사, 1991 보여주기의 수법이 아주 잘 살아있다. 마치 카메라로 찍은 듯한 풍경을 제시하여 그 뒤에 어리는 이 세계의 주재자를 보여주는 확실한 방법론이 눈에 띈다. 그 매개체로 문명의 이기인 전화와 텔레비전의 눈을 이용하는 발빠른 움직임까지 보여준다. 그러나 보여주는 늘 한계를 갖고 있다. 아무리 잘 보여주어도 카메라나 텔레비전처럼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주재자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범을 잡으려면 범의 굴로 가야 하는 것과 같다. 범이 사는 동굴을 촬영해 가지고는 범을 결코 잡을 수 없다. 한자가 과연 범을 잡는 데 효용이 있는 그물인가 아닌가 하는 것도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4336. 11. 24.]
175□신은 망했다□이갑수, 민음의 시 34, 민음사, 1991 재치는 시가 아니라 발상의 몫이다. 시를 쓰기 위한 노트에 빽빽이 적어놓은 뒤 그것을 시를 읽어 가는 독자를 위해 살을 붙이고 완성하는 것이 시라는 형식이다. 그러나 재치 있는 발상을 적어놓는다고 해서 시가 되지는 않는다. 시에는 다른 예술 갈래와는 다른 겉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전체가 인식으로만 구성되어있다. 시의 형식을 모르거나 무시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시의 형식으로는 전하기 어렵거나 시로 만들기 어려운 사금파리 같은 깨달음이 나열되어있다. 이것이 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형상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형상 이전의 질료들이기에, 이 시인은 앞으로 시를 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류의 깨달음은 형식을 아주 거추장스러워 한다. 만약에 시로 돌아오려면 엄청난 고생을 하고 난 다음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생을 감수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발랄하고 경쾌하다. 이 발랄함은 시 같은 묵은 형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자는 이 경쾌함과 묘한 부조화를 이룬다. 시는 깨달음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4336. 11. 24.]
176□침엽수림에서□엄원태, 민음의 시 36, 민음사, 1991 하고자 하는 말에 비해 동원되는 이미지들이 약간 많다. 그 군더더기 때문에 읽는 속도가 느려진다. 시집 전체의 내용이 두세 군데로 분산되는 것도 흠이다. 이것은 할 말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훈련이 아직 덜 된 까닭이거나 써놓은 시들을 별다른 생각이 없이 시집으로 모아서 그렇다. 시를 쓸 때와 시집을 엮을 때는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시가 벽돌이라면 시집은 집이다. 벽돌만 모아놓는다고 집이 되는 것이 아니다.★★☆☆☆[4336. 11. 24.]
177□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손진은, 민음의 시 43, 민음사, 1992 이른바 신춘문예 용 시라는 것이 있다. 매년 초, 각 신문사에서 과거 보듯이 시인 지망생들이 자원해서 보낸 작품을 평가해서 급제자를 뽑는 것이다. 거기를 통과한 시들에는 한 동안 뚜렷한 형식이 있었고, 그런 형식이 급제자들의 실력을 판가름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심사라는 발상이 어쩔 수 없이 만드는 굴레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깨달음과 그 깨달음을 포장할 수 있는 그럴 듯한 미사여구 역시 중요하다. 미사여구도 그 발상법과 배열법까지 갖추어야만 시인의 능력이 드러난다. 이 시집 속의 시들에서 그런 형식성을 느낀다. 너무나 원칙에 충실하다보니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곳에서까지 그렇게 해서 답답해지기도 한다. 똑같은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엔진소리 같다. 한자가 이따금 그 흐름을 끊지만, 그때는 덜컹거린다. 역시 시집이라는 것이 문제다. 시집은 내용의 구도가 없다면 형식의 요철(凹凸)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4336. 11. 24.]
178□여우를 살리기 위해□이학성, 민음의 시 58, 민음사, 1994 삶의 근원을 이루는 것들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시다. 사고가 철학의 어떤 체계에까지 닿아있지만, 그것을 상상력의 옷으로 적당히 감쌀 줄 알고 이미지들을 상징화시켜서 어려운 개념을 녹이는 방법도 알고 있다. 이미지들이 지시어에 머물지 않고 정서를 환기시키도록 잘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시들이 너무나 명료해서 애써 만든 정서를 쫓아버리고 있다. 이 점만 극복한다면 좋은 작품을 쓸 것이다. 한자는 제일 먼저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4336. 11. 24.]
179□아름다운 사냥□박덕규, 문학과지성시인선 37, 문학과지성사, 1984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모여서 숨바꼭질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놀고 있다. 그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지만 언제까지나 그곳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끝내는 성장을 기피하는 아이에 그치고 말 것이다. 영원히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동네가 아니다. 이미지도 그렇고 말의 구조도 그렇고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는데 전후좌우로 꼭 막힌 것 같은 느낌이 가시지 않는 것은 원관념이 아주 엷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의 조합이 전할 메시지가 뚜렷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발표되던 치열한 현장 중심의 시에 대한 반발로 이미지 중심의 시상 전개를 의도했을 법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 이미지를 뒷받침해야 할 어떤 세계를 염두에 두었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속 빈 강정처럼 거품이 많이 남은 상태로 시가 쓰여졌다.★☆☆☆☆[4336. 11. 24.]
180□얼음시집□송재학, 문학과지성시인선 75, 문학과지성사, 1988 시의 귀족화는 비난할 것이 못 되지만, 귀족화 한 그 문학이 자신의 위안거리로만 남아있던가 타인이 접근하기 힘든 한 개인의 과거에 고착되어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 시집은 동원된 시어들도 이미지들도 나름대로 무언가를 나타내기 위해서 잘 정돈되어있다. 그러나 그 안으로 접근해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바로 기억의 폐쇄성 때문이다.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개인과 가족사의 특수한 관계와 정서 속에서 시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남들의 접근을 거의 막고 있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귀족화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능력부족이다. 실제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보다 불필요하게 많은 이미지들과 언어가 동원되고 있어서 살집이 무겁다. 체중 감량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려면 주제를 조금 더 선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드러내야 할 주제가 이미 드러난 것 이상으로 없기 때문에 거품이 생긴 것이다. ‘얼음시 2’와 ‘얼음시 4’조차도 숨가쁜 작품인데, 이를 능가하는 작품이 없다는 것은 이 시집의 비극이다. 이 비극에 풀무질하는 것이 바로 한자이다.★☆☆☆☆[4336.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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