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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그대의 하늘길□양성우, 창비시선 63, 창작과비평사, 1987 분노가 단련되면 운율을 낳는 게 아닌가 싶다. 문병란의 경우도 그렇지만, 양성우의 경우도 시가 담고자 하는 감정은 지극히 단순한데, 시에 살아있는 것은 운율이다. 운율은 본능에 호소하는 양식이다. 아마도 분노를 전달하는 것은 명석한 인식이나 분석보다는 쿵쿵 뛰는 심장과 같은 계열인 리듬에 의존하는 것이 더 효과가 좋기 때문일 것 같다. 이 시집의 시들도 거의가 현장에서 낭독을 하면 굉장한 효과를 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운율이 시집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열 편을 읽으나 스무 편을 읽으나 주제는 동일하다. 그 동일한 주제를 장중하게 몰고 가는 것이 운율이다. 그리고 문병란은 감정이 차분히 가라앉아서 운율이 냉정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이 시집은 그보다 조금 더 격렬하고 떠 있어서 운율 역시 더욱 거칠고 세게 일렁인다. 박진감이 넘치는 운율이 시를 끌고 있다.★★★☆☆[4336. 12. 5.]
282□외로우니까 사람이다□정호승, 열림원, 1998 시의 주제가 단순한 사랑인지 사랑 너머 그 어떤 존재까지인지가 분명치 않다. “서울의 예수”에서는 사랑의 주제가 분명했다. 약자를 감싸는 예수의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시대의 험난한 굴곡과 맞물려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이번 시집에서는 시들이 한결 짧아지고 깨달음의 방법이 많이 나타나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종류는 분명치 않다. 어떤 배경 위에서 그것이 떠올랐는지 분명하지 않은 것이 이 시집의 단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부터 이 시인이 갖고 있는 문제였는데 여기에 와서 그것이 좀더 분명해졌다는 것이다.★★☆☆☆[4336. 12. 5.]
283□황지의 풀잎□박봉우, 창비시선 5, 창작과비평사, 1976 문학은 형태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역사를 더듬는다면 형식에 집착할 수밖에 없지만, 시에도 세대에서 세대로 넘어가는 시의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그 시대의 아픔을 민감하게 느끼는 어떤 정신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감염된다. 사람에서 사람에게 감염되는 정신이 있다. 그것이 시의 정신일 것이다. 그 시정신의 역사로 본다면 이 시집은 196~70년대를 일구어놓은 큰 산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픔 속에 너무 깊이 들어갔기에 여유가 있을 때 발견되는 새로운 형식을 건져 올리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쉽다. 한자는 그 시대의 업보라고 쳐도…….★★☆☆☆[4336. 12. 5.]
284□다시 광야에□김관식, 창비시선 6, 창작과비평사, 1976 한국 시가 이른바 근대로 넘어오면서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유산은 한시의 깊은 세계이다. 그것이 중세봉건의 세계를 고착화시킨 주범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기까지는 상당한 연유가 있기 마련이고, 그 연유란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쉽게 버려도 되는 그런 것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인류의 역사가 너무 짧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런 미련 없이 깡그리 버려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세계의 정서에 뿌리를 내린 사람이 현대시를 썼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이것은 시대 분위기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한시의 고결한 세계를 현대시 속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시들이 이쯤에서 머문 것이 너무 아쉽다. 한 발만 더 깊이 들어갔더라면 아주 독특한 세계를 이루었을 것이다.★☆☆☆☆[4336. 12. 5.]
285□벌거숭이 바다□구자운, 창비시선 8, 창작과비평사, 1976 아름답고 고운 말로 시를 써야 한다는 믿음이 일관된 시집이다. 아름다움을 인간의 사고와 감성의 형식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언어에서 찾은 셈이다. 그래서 끝내 뜨거운 현실이 시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안타까운 경우이다. 언어는 중립이다. 그것을 어떤 사람이 어디에다 갖다 쓰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그 색깔도 달라진다. 도자기에 관해서 읊은 시들을 보면 시인이 생각한 아름다움의 개념이 잘 드러난다. 시가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언어는 아름답지만, 감동은 가까이 오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는다.★☆☆☆☆[4336. 12. 5.]
286□한국의 아이□황명걸, 창비시선 9, 창작과비평사, 1976 시각 이미지를 다루는 데 아주 익숙한 시인이다. 묘사력이 뛰어나다. 그런데 시각 이미지를 이용한 묘사는 감정을 앞세우면 대부분 실패한다. 감정을 앞세우려면 시각보다는 청각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청각은 운율을 살리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이 시집에서는 뛰어난 묘사들이 곳곳에서 동원되고 있는데 많은 시들이 감정이 앞서나가는 바람에 묘사가 주는 효과를 최대한 살리지 못했다. 그리고 시집 전체를 떠받치는 건강한 사상은 조금 더 단련되었더라면 풍자로 나아갔을 그런 것이다. 풍자로 나아가기 바로 전 단계에 머물러서 자칫하면 우스갯소리로 전락하기 직전에 머물러있다. 그러나 시들의 구조가 아주 튼튼하여 시원한 맛이 있다. 한자는 끝내 아쉬운 흠집이다.★★☆☆☆[4336. 12. 5.]
287□백제행□이성부, 창비시선 12, 창작과비평사, 1977 시가 아주 단단하다. 군더더기 표현을 버리고 의미로 뼈대를 만들어 세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시는 강철처럼 단단해지지만 풍성한 느낌이 많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단단함이 지나치면 울림까지도 사라진다. 이 시집은 그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머물러 있다. 앞부분의 시들과 뒷부분의 시들이 너무 수준 차이가 나는 것도 흠이다. 시가 의미 쪽에서 단단해지는 것은 조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감이 넘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친 자신감은 시를 건조하게 만든다. 시가 건조해지면 읽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이나 지루해진다. 자칫하면 시 쓰는 일까지 지루해져서 절필까지 나아가는 수도 있다. 시가 끝없는 지구력을 가지려면 새로 생기는 내용을 담을 형식에 대한 고민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시인은 잠자는 시간에도 시의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다. 한자 역시 그러한 한계의 걸림돌이다.★★☆☆☆[4336. 12. 5.]
288□사랑의 감옥□오규원, 문학과지성시인선 102, 문학과지성사, 1991 인간은 무수한 제도와 규제에 둘러 싸여있고, 그러한 규제는 문화로 작동한다. 따라서 문화는 인간의 욕망이 빚어 올린 수갑과 차꼬와 감옥에 지나지 않는다. 시가 그러한 감옥을 공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감옥은 시 따위의 공격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공격하는 그것마저도 감옥의 한 편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의 양식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욕망의 조종을 받기에 끝없는 싸움이 된다. 결국은 욕망을 줄이거나 욕망을 대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들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시집 속의 내용은 거의가 그러한 규제와 문명과 욕망에 대한 공격 내지는 풍자로 가득 차있지만, 간간이 그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탐색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곳곳에서 그런 낌새가 감지된다. ‘후박나무’에 관한 연작이라든지 누란, 다라니에 대한 관심이 그러한 기미를 보여준다. 어쩌면 머지 않아 시를 안 쓰게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여태까지 쓴 시를 거두어 태우려들지도 모른다. 공(空)의 세계 앞에 욕망은 부질없는 짓이다. 시인이 그 공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는 공이 그를 찰 것이다.★★★☆☆[4336. 12. 6.]
289□참깨를 털면서□김준태, 창비시선 14, 창작과비평사, 1977 시들이 아주 건전하고 건장하다. 그리고 튼튼하다. 이것은 정신의 바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적당히 말을 통제할 줄도 알고 아낄 줄도 안다. 특별히 눈을 끌 만한 교묘한 재주는 없지만, 그것이 오히려 진솔한 느낌을 주어 감동으로 연결된다. 다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시에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군더더기가 많아지고 길어졌다. 시는 길어지면 긴장이 느슨하게 돼버린다. 이것은 앞서 유지했던 긴장의 느낌마저도 늘어지게 해서 실력을 의심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한자는 끝내 청산되지 않는 어떤 한계 같기도 하다.★★☆☆☆[4336. 12. 6.]
290□인동일기□김창완, 창비시선 17, 창작과비평사, 1978 감정을 흥분된 상태로 내놓지 않고 바깥의 상관물로 바꾸어서 표현할 줄 하는 여유와 솜씨를 두루 갖추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호흡으로 세계를 이끌어 올리는 능력이 돋보인다. 그런데 시집을 읽다 보면 어딘가 뿌리가 내리지 못한 개구리밥 모양 같다. 분명히 묘사력은 아주 뛰어나게 대상을 포착하고 있는데, 막상 나타나는 시의 모습은 뿌옇다. 이것은 할말을 너무 숨기려고 해서 그런 것이다. 때로는 말로 직접 드러내야 효과를 크게 보는 대목에서조차 조심스럽게 돌려 말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시인의 기질 탓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렇게 할 수 없던 시대의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 그렇다면 그런 한계는 개인의 탓만으로 돌기도 어려운 바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왕에 돌려 말하는 것과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것하고는 차이가 있다. 직접 발언하기 어려우면 돌려 말하는 것이 장기인 시의 특성을 살려서 좀 더 박진감 있는 묘사를 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980년대 이후에 썼다면 분명 뭔가 달라졌을 그런 시들이다. 시 쓰는 사람이 어디에 발을 딛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임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그런데 한자는 끝내 눈에 거슬린다.★★☆☆☆[4336.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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