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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54
2015년 02월 11일 15시 43분  조회:2008  추천:0  작성자: 죽림

 

531□천둥 같은 그리움으로□이산하, 문학동네 시집 34, 문학동네, 1999

  과다한 생각이 시의 초점을 흐린 경우이다. 게다가 앞부분의 선명한 이미지들이 뒤쪽의 착란에 가까운 사고들과 너무 현격한 차이를 보여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결국 뒤쪽의 착란을 빠져 나오면서 앞부분의 시들이 쓰여졌다고 봐야겠는데, 그렇다고 해도 앞부분의 시들조차 너무 생각의 단련에 집착하고 있어서 주제만 무겁게 전달된다. 도사님 말씀하시니, 늬들 한 번 들어볼래? 하는 식이다.

  시에 철학이 들어올 때는 시의 본질 문제를 늘 건드린다. 시와 철학의 경계는 사실 모호하다. 겉으로 나타나는 차이는 분명하지만, 시속에는 특히 시인의 사고 속에는 철학이랄 만한 것들이 없으면 시가 되지를 않으며 그렇다고 그대로 쏟아놓으면 그건 또 시가 아니다. 그 사이에서 둘을 매개해주는 것이 일종의 표현들일 텐데, 그 표현들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해 산란하다. 앞부분에서는 상징을 이용해야 하는 방향이 약간 드러난다. 시집의 시 배열이 시간의 역순이라면 이미지와 상징의 훈련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중요한 관문이 될 것이다.★★☆☆☆[4337. 5. 20.]

 

532□랭보가 시 쓰기를 그만 둔 날□서동욱, 문학동네 시집 35, 문학동네, 1999

  사람이 숲도 보고 나무도 보았으면 좋겠지만, 특히나 시에서는 그게 쉽지 않다. 이 시집은 숲을 보는 데 너무 치중해서 나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경우가 되겠다. 이야기 전개나 이미지를 펼치는 수법은 아주 뛰어나고 상상력도 거침없이 잘 달린다. 그런데 눈이 거대 담론에 가 있어서 시가 관념화하였다. 작은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큰 것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으로 현실이 선택되기 때문에 현실을 얘기할 때도 밀착된 느낌을 주지 못한다. 큰 것을 통해서 이미 전제된 어떤 관념을 설명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 숨어있는 것을 통해서 큰 것까지 아우르는 것이 그런 모호함을 걷어내는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삶 전체를 밀고 가야 하는데 그때도 전제된 어떤 관념을 따라가면 성공하기 어렵다. 재주가 세계에 매몰된 경우이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자는 혹처럼 박혀있다.★★☆☆☆[4337. 5. 20.]

 

533□활주로가 있는 밤□마종하, 문학동네 시집 36, 문학동네, 1999

  겉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시들 같은데, 자세히 보면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보인다. 하나는 행에 나타나는 그럴 듯한 표현에 가려서 주제가 자꾸 희박해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를 쓰면서 시다운 표현에 치중한 나머지 시의 초점이 흐려지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시를 쓰는 방법이 선명하게 드러나지를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의 첫 번째 문제와 뒤섞이면서 상황을 더욱 어렵고 복잡하게 만든다.

  이 시집 속의 시에는 이미지가 주로 쓰였기 때문에 그 이미지의 흐름을 따라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세세한 이미지는 잘 살아있는데, 전체를 조율하는 커다란 이미지들이 선명히 살아나지를 못한다. 이것은 주제의 흐름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 한 편과 시집 한 권에서 어떤 말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어쩌면 시인에게 가장 중요한 물음일 수 있다. 겉모양이 시 같다고 해서 속까지 시가 되지는 않는 수가 이따금 있다.★☆☆☆☆[4337. 5. 21.]

 

534□적멸의 즐거움□김명리, 문학동네 시집 37, 문학동네, 1999

  한자를 청산하지 않으면 그 한자가 드리운 세계는 2천년대의 현실 속에서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만다. 새로운 세계를 보려는 의지가 시집 전체에 일관되면서도 어쩐지 진부하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점을 청산하지 못하고 옛것에 기대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집 후반부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것들도 그러한 관성 속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풍경 묘사로 마음을 담고자 할 때는 그 취사선택이 작품의 질을 결정해버리고, 그런 까닭에 대상에 대한 선택도 극도로 절제되어야 한다. 마음이 가는 곳에 이미지가 같이 가고, 이미지가 가는 곳에 마음이 동시에 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마음과 이미지가 나아가는 속도가 조금만 어긋나면 전체의 균형이 허물어지고 만다. 옛날의 선시나 한시들은 그 속도가 기가 막히게 맞았다. 그것은 그들이 그러한 세계 속에서 오랜 숙련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한 숙련을 할 세계도 없고 틈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하면 얼빠진 한시 꼴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시집 곳곳에 그럴 위험이 아주 다분하다. 그러나 낡은 것이라도 이용해서 무언가 새로운 세계를 보고자 하는 태도와 시도는 칭찬 받아 마땅하다.★★★☆☆[4337. 5. 21.]

 

535□서릿길□김익두, 문학동네 시집 38, 문학동네, 1999

  묘사는 어차피 세계를 직접 보여주지 못한다. 그 세계로 가는 어떤 암시를 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을 묘사할 때 그 암시가 줄 수 있는 세계를 스스로 상정하지 않으면 시는 모호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상정한 그 세계가 과연 얼마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세계인가 하는 것이 또 다른 문제이다. 옛날 시인들이 근세에 들어 지탄을 받은 것은 그들이 한시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숨가쁜 삶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세계를 넋두리처럼 읊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바뀔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묘사라고 해서 다 묘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묘사가 주를 이루는 시에 설명하는 시를 끼워 넣으면 그건 더 우스운 꼴이 된다. 이 시집의 한자는 음풍농월의 혐의까지도 뒤집어 쓸 수 있는 요인이다.★☆☆☆☆[4337. 5. 21.]

 

536□을숙도에 가면 보금자리가 있을까□박이도,  문학동네 시집 38, 문학동네, 1999

  시가 소재에 갇히면 상상력 역시 비유에 강하게 의존하게 되어 그 소재 안에 갇히기 십상이다. 이것은 특정 소재를 시집 전체에 담을 경우, 그만큼 다양한 생활의 모습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들은 스스로 고만고만한 상상력의 높이에 머물러서 지루한 읽기를 요구하게 된다. 이런 점을 극복해보려고 지역의 특색이나 그 소재에 관련된 사건을 끌어들이지만 그것이 역동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역시 상상력의 뒷받침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사정은 역시 마찬가지로 돌아온다. 이런 한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지만, 노장이 보는 세계에 대한 달관과 그것을 담는 차분한 어법이 이루는 세계는 시집을 가볍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있다. 한자는 그 무게를 더는 요인이다.★★☆☆☆[4337. 5. 21.]

 

537□빗방울에 대한 추억□김형수, 문학동네 시집 7, 문학동네, 1995

  해방 전의 카프 시를 보는 것 같다. 시의 모든 장식을 걷어버리고 오로지 사상성을 선동하기 위하여 뜨거운 가슴으로 노래한 시들. 그런 시들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자리는 왜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의 영역을 벗어난 질문이다. 특히 시의 형상화 정도를 아주 중요한 논제로 말하고 있는 이런 자리에서는.★☆☆☆☆[4337. 5. 21.]

 

538□쥐똥나무 울타리□하종오, 문학동네 시집 6, 문학동네, 1995

  시는 산문과 다르게 서술의 방법이 특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습작기 이전부터 본능으로 느끼는 것인데, 이 시집 속에는 그러한 방법이 거의 드러나지 않거나 산문의 일부에 종속되어 있어서 이 시인이 시를 아는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시들이 가벼운 행보를 갖지 못하고 엿가락처럼 늘어진 것은 바로 그런 특성 때문이다. 한 시 안에 시랄 만한 특징이 거의 없이 일기체의 수준으로 시집 한 권을 꾸렸으니, 시가 무언인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시집이다. 게다가 한자까지 섞여 있어서 시가 너무 무겁다.★☆☆☆☆[4337. 5. 21.]

 

539□새의 전부□박철, 문학동네 시집 5, 문학동네, 1995

  세상을 요약하는 방법 두 가지가 눈에 띈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것과 이웃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요약할 때는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가 만들어낸 시의 상황이 세상과 어느 정도 적실성을 띠는가 하는 것과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를 결여하면 시는 초점을 잃고 산만해진다. 그리고 틀림없이 넋두리로 떨어진다.

  이 시집에서는 공동체의 삶을 걱정하는 마음이 시집 전체를 떠받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많은 부분이 넋두리 가까이 가있다. 아마도 전망을 잃은 시대의 불가피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거기에 주저앉으면 시를 쓸 필요가 없다. 현실을 보여주는 성찰은 미래마저 드러내는데, 주저앉으면 그것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냉정하지 않으면 성찰이 어렵거니와 그런 상태에서 나온 것이 바로 넋두리이다. 그리고 이 시집의 시들은 굉장히 거칠다. 거칠다는 것은 불필요한 말과 표현이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뜻이다. 문예운동은 마음만으로도 할 수 있지만, 작품은 숙련이 필요한 일이다. 역사의 전망을 보고자 하는 시집에 한자까지 섞여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4337. 5. 22.]

 

540□꿈을 불어로 꾼 날은 슬프다□염명순, 문학동네 시집 9, 문학동네, 1995

  묘사를 통해 정서를 한 곳으로 모아서 독자로 하여금 그곳에 몰입하게 하는 묘한 능력을 가진 시인이다. 한 표현에 이끌리지 않고 전체의 묘사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결코 작은 능력이 아니다. 그리고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들을 한 정서로 느껴지도록 하는 능력까지 갖추었다. 그런데 중간중간에 이러한 정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시들이 섞여있다. 특히 2부의 시나 연작의 경우에는 그런 묘사가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들이다. 그럴 때는 묘사가 아니라 인식이 중심이 되어 시를 이끌어 가야 한다. 바로 이런 구별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이 시집의 단점이다. 그리고 이런 단점은 그리 어렵지 않게 극복되는 부분이어서 앞으로 나올 작품이 기대된다.★★☆☆☆[4337.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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