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의건축법 비주류학계의 주장
.피라미드는 어떻게 세워졌는가?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정점에 위치한 기자지역에 세계최고, 최대규모이면서 가장 정밀한 석조건축물이 우뚝서있다.주류고고학계에서도 4천5백여년전에 (비주류학계에서는 5천여년전이전이나.7천5백 여년전까지 라는 주장도 한다)건설 됐다고 인정하는 건축물이다.
쿠푸왕피라미드는 엄청난 수의 둘과 벽돌을 쌓아올려 만들어졌다. 도대체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어떻게 건설했을까?
정답은 아직까지 그 방법을 알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류학계든, 비주류학계든 정확하게 이런 방법을 썼다. 혹은 이랬을 것이다. 라는 추측만 난무할뿐 , 이렇다할 힘있는 "설"은 나오지 않고 있다.아직까지도.
예를 들어 미라 라든지 다른 소장품 같은건 연대 측정이 어느정도 가능하다. 대표적인 방법이 탄소 동위 원소 분석법(라디오카본 데이팅: 방사성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으로, 방사성 탄소 14C 는 거의 일정한 농도로 모든 유기물에 함유되어있다. 생물이 죽으면 , 새로운 14C 가 몸에 공급되어야만 하므로, 그 양은 시간과 함께 반감기에 따라 감소한다, 그 감소량에서 연대를 구하는 방법)이다.
쿠푸왕피라미드 건축방법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알려진게없고, 우리가 이해될 만한 어떠한 정보도 없으므로 여기에서는 "주류학계"와 "비 주류학계"의 주장을 같이 논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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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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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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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변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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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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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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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푸왕의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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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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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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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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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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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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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레왕의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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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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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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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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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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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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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카우레왕의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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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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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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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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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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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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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건축가들이 건물을 짓는데도 그렇게 정교하게 지을필요가 없다고들한다. 각방위를 정확히 맞춰야 된다던지, 각 모서리가 정확하리 만치 90도에 가깝게 짓는다거 말이다. 이건 이집트 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경사로(傾似路)를 이용해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인데, 경사로 또한 그냥 장난으로 집고 넘어갈 것이 아니다. 경사로부터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 경사로는 1:10의 기울기를 유지하고, 길이는 1467미터에 대피라미드본체의 부피의 세배가 될 것이라한다. 그림1을 보면 기울기가 저정도면 통나무를 깔고 돌을 밀고 올라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림을 좀더 정확히 하자면 경사로의 폭 또한 넓어야 되지 않나 싶다. 그리고 벽돌과 흙으로 경사로를 만들 수 없다고한다. 경사로는 피라미드에 사용된 석회암보다도 견고하지 않으면 무너진다고 한다. 이는 현대의 공사 전문가와 건축가들이 이미 증명한 사실이다. 또, 설령 석회암을 사용했다손 치더라도 작업이 끝난후에 남은 돌들은 어디로 없어졌는지도 밝혀내야만 한다.
1
그래서 다음으로 제기된 주장은 나선형 경사로이다. 그림2.. 이 방법을 쓰면 확실히 재료의 양은 줄어든다한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정상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한다. 거대한 돌을 끌어당기면서 회전시키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이외도 더 큰 이유는 나선형 경사로가 피라미드를 덮게 되서 건축가는 건설중에 정밀도를 조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 . . . 기자群 피라미드는 보란 듯이 초정밀도를 나타내고 있다. 건설자들은 정밀도를 확인했으며, 완성할 때까지 정밀도를 유지했다. 그것은 피라미드의 정점이 정확하게 밑면의 중앙지점에 위치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경사면의 각도와 변의 각도도 정확하고 돌 역시 정확한 장소에 놓여있었으며, 방위도 거의 정확하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과연 그시대에 그들은 어떤방법을 동원했을까
시간과 작업
그럼 이 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선 시간이 얼마나 필요했으며, 과연 몇 명이 작업에 투입되었을까?
이집트 피라미드를 다룬다는 거의 모든 사이트에 이 구절이 없는데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의문스럽고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집트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20년 동안 10만명이 투입되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1년 내내 일을 한 것이 아니고 1년에 3개월로 한정되었다고 한다. 나일강이 범람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때만 건설작업이 시행되었던 것이었다건설자들이 걱정해야 했던 것은 몇 만개에 이르는 15톤 돌뿐만이 아니었다. 이 돌들을 작업장까지 운반해야만 하는 문제도 있었다. 피라미드는 230만개의 돌로 지어졌다고 추정된다. 만약 기술자들이 1년 365일 동안 하루 10시간씩 일했다고 해도, 10년동안에 피라미드를 완성시키기 위해선 1시간에 31개의 돌을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분으로 따지면 2분에 한 개... 그러므로 만약 건설에 소요된 작업기간이 1년에 3개월로 한정되었다면 의문은 더욱 심화된다. 1분에 4개, 1시간에 240개나 되는 돌을 쌓아야 했기 때문이란다. 또 이야기를 덧붙여야겠지만 대피라미드의내부의 대회랑과 같은 구조나, 왕의 방, 여왕의 방에 보이는 돌의 배치는 말그대로 그냥 쌓기만 해서는안되는 건축법들이다. 이런 건축법을 간과하고서라도 시간상의 수치적으로도 저렇게 빡빡하게 해야만 하는데, 총 높이 140미터에 달하는 높이에서 무전기는 고사하고 확성기같은 기기조차 없이 작업을 해야만 했다는 것에 심히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이 거대한 토목공사에 철두철미한 감독이 없다면 하루에 나자빠 지는 인원도 심심찮게 발생할 것이다. 계산상의 인력은 이런 예외적인 요소는 배제했다.
일반적인 , 혹은 주류학자들은 대피라미드의건축에 기하학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인정은 하지만, 특별히 대단한 것은 아니며, 땅을 구분해주는 측량기술이 어느정도 발전했을뿐 더 이상의 추가적인 학설은 받아 들이지 않는다.
그들의 주장으로는 ,수많은 피라미드의 경사각을 예를든다. 이집트의 수많은 경사각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집트 전역에 걸쳐 있는 피라미드의 각각은 규모나 길이 경사각이 같은 것 은 없다.
만일 피라미드 건축에 높은 수준의 기하학적 지식이 적용됐다면 이렇게 다양한 경사각이 아니라 일률적인 값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대피라미드 건설 시기에 이집트인들이 알던 기하학은 경험적인 수치 단계를 넘어서지 않았다고 추측하고, 풀어야 할 기술적인 문제는 가장 적절한 경험상의 지식을 적용하거나 변형했다는 것이다.
측량(대피라미드의 오차각).1
플린더스 피트리 경 의 측정:19C 고고학자
대피라미드의 밑변의 길이는230.353m 에 대해 오차는 1.52Cm 의 오차가 있을뿐이다.(1/145,000) , 그리고, 모서리의 오차각은 12" 뿐이다.
우선 외장재를 측량해보면 180Cm 가 넘는 길이는 직선에서 겨우0.25mm의 벗어났다. 그리고,외장재들이 서로 붙어 있는 틈새는 0.5mm 도 않되는 칼날이나 종이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좁고, 그 좁은 틈 사이에는 몰타르가 발라져 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기술이며, 외장재의 접합부 면적은 대략 2.4m×1.5m 인데 이렇게 넓은 면적에 몰타르를 0.5mm 두께로 고르게 깔 수 있는 기술은 오늘날에도 없다.
( 우주를 날아가는 스페이스 셔틀의 표면에 붙이는 내화 타일간의 간격도 0.5mm 이상이다.)
현대적인측량기기로 측정
대피라미드의 밑변 길이는230.3m에대해 최대4.4Cm 의 오차뿐이다. 피트리의 측정보다 3배 정도 어긋나지만 여전히 그 정밀도는 1/5,000(0.02%) 미만이다.
그리고, 대피라미드의 밑면의 네 모서리는 거의 직각에 가깝다. 밑면의 남동쪽 모서리는 90°0'33",이고 북동쪽 모서리는 90°3'2", 남서쪽 모서리는 90°0'33", 북서쪽 모서리는 89°59'58" 로서 90° 에 대해서 최대 변위의 오차는 0.07% 이내이다.
전체 건물의 방향은 그 네 밑변이 각각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르키고 있다. 우선 북쪽 변은 2'28" 서쪽 방향으로 돌아가 있고, 남쪽 변은 1'59" 서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동쪽 변은 5'30" 북쪽으로 , 서쪽 변은 2'30"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 방향의 오차는 0.015% 로, 어긋난 최대 변위로 따지면 1.1m 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정도 정밀한 건축에서 방위를 결정하는데에는 나침반을 사용할수 없다. 나침반은 정북을 가리키지도 않을뿐더러 수시로 그 방향이 조금씩 변하는건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에는 천문용 방위각 측정 장치를 사용해서 원하는 방위를 구하는데, 로그표를 참고한 계산법이 뒤따라야한다.
어떻게 해서든 대피라미드 밑변의 방위를 결정했다고 해도, 실제 건축에 들어가면, 또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바로 대각선 공법이다. 대각선 공법은 전체 모양의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사용해야하는데 그 대각선 측량이 불가능했다. 대피라미드 가운데 돌출된 암석이 측량의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건축이 진행되면 피라미드 시야를 피라미드 자체가 완전히 가리기 때문에 측정이 불가능 했을텐데 놀랍게도 뒤틀림이 거의 없이 정확히 사각뿔의 중앙으로 모이도록 건축되었다.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의 자오선빌딩
현대의 가장 방위가 정확하고 모서리의 각이 직각에 가까운 건축물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측량탑이나 천문대 정도이다.
대표격인 건축물이, 전세계의 시간을 정하는 기준이 되는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의 자오선 빌딩이다. 이 건물 중앙의 남북을 잇는 선, 즉 자오선이 바로 0°이기 때문에 이건물의 남북 방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측정한 결과 각 천문대는 자오선 방향에 대해 6호분과 9호분씩 틀어져 있었다. 이에 비해 대피라미드는 3호분 남짓 어긋나 있을 뿐이다.
이집트 고유 수 체계로 대피라미드측정.2
이집트의 수 체계는 "로열큐빗" 이라는 최소 기본 단위이다.(1로열큐빗은 0.5236m이다)
대피라미드밑변 둘레는 921.46m이다. 이 값으로 1천 7백60큐빗을 나눈 1로열큐빗은0.52356m가 된다.
이 값에 6을 곱하면3.1413m 가 된다, 원주율3.1416과 불과 0.01%의 차이를 보여주는 값이다. 즉 1로열큐빗은1m가 지름인 원의1/6의 차이를 보여주는값이다, 즉60°에 해당하는 원주율이다.
그리고, 피라미드의 높이에 10억을 곱하면, 대략 지구와 태양사이의 거리(149,504,000Km)와 일치한다. 또, 피라미드를 관통하는 자오선이 대륙과 대양을 정확히 절반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피라미드 밑면둘레를 "2×높이" 로 나누면 역시 "3.1416 " 이 나온다.
대피라미드 끝에서 중앙에 있는 왕비의 방까지의 거리는2백20로열큐빗이다. 즉 전체 밑변길이는 1천7백60로열큐빗이다, 이를 미터로 환산해1로열큐빗의 값을 구한뒤 6을 곱하면 원주율과 거의 일치한다. 또다른 기본단위"신성한큐빗"이 있다. 내부의 주요시설과 통로의 연결마디를 결정하는데3개의 원이 사용됐는데, 이원의 반지름이 60"신성한큐빗"이다.
신성한 큐빗을 로열큐빗에 대응시키면 1백20 신성한 큐빗 이1백46.182로열큐빗이므로, (1신성한큐빗은 0.63784m 이다.)
이 값은 지구의 적도 반지름의 1천만분의 1인0.63770m 와 0.02% 의 차이를보인다.
. 비 주류학계의 반박
많은 고고학자들은 당시가 절대왕권 체제로서 자본과 노동력, 그리고 시간을 무제한으로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피라미드의 건축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이주장의 요점은 석기와 간단한 청동기 도구로 석회암을 채굴하고, 통나무와 지렛대, 그리고 윤활유를 사용해서 돌을 운반했으며, 완만한 경사로를 피라미드 상부까지 건설해서 돌을 쌓아올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 들이 언뜻 생각하기에는 가능할 것 같아도 건축의 규모를 헤아려보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쉽게 알수가 있다.
주류학계 에서는 왜, 피라미드의 건축자인 파라오 쿠푸가 암석을 사막에 있는 공사장으로 운반하게 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못한다.
그 이유에 대해선, 원래는 그 지역에 천연의 암벽 협곡이 있었는데 거대한 공사로 인해 암석을 다 써 버렸다는 것과, 궁색하긴 하지만, 파라오가 여름 궁전에서 작업이 진척되는 것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라는 가정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힘으로, 어떤"기계"와 기술을 사용하여 암석층을 수평으로 다듬었을까? 어떤 방법으로 건축가는 갱도를 파나갔을까? 그리고 무엇으로 갱도 안에 불을 밝혔을까.(주류학계의 방법대로 밑에서부터 건물 외벽과 안에 있는현실을 같이 쌓아 올렸다고 하지만 어느정도 진척후에는 갱도 안의 내각을 맞추거나 갱도 앞에서 뒤까지의 길이를 직선으로 맞추려면 작업을 갱도안에서 해야만 했을 것이다. )
하지만, 이곳에서도 , 왕들의 계곡에 있는 암석 묘지에서도 횃불이나 그 어떤 유사한 조명기구는 사용되지 않았다. 더럽혀진 천장이나 벽도 없고, 그런 흔적이 제거됐을지도 모를 최소한의 증거조차 없다.
260만 개의 거대한 석재가 채석장에서 잘라지고 연마되어 운반되고, 건축부지에서는 밀리미터 단위로 정확하게 맞추어졌다.
피라미드를 세울 장소는 파라오가 마음대로 결정했으며,,,,피라미드의 비교할데가 없는 크기는 ,건축가에 의해 우연히 떠올랐으며,,,몇 십만 명의 인부들이 12톤이나 되는 무거운 석재를 (지금은 없는) 밧줄로(지금은없는) 미끄럼 틀을 사용해 경사면위로 밀고 당기고,,,수많은 인부들이(지금은 없는) 곡식으로 연명했으며, 파라오가 여름 궁전 앞에 짓도록한 (지금은없는) 오두막에서 잠을 잤고,,,(지금은 없는)확성기로 140m 여미터의 피라미드 꼭데기에 있는 인부들에게 "영차 영차" 소리를 내어 인부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12톤짜리 석재를 하늘을 향해 밀어 올리게 하고, 인부들이 날마다10개의 석재를 쌓아 터무니 없는 도급일을 달성 했을까.? 만약 이런 씩 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했다면, 20년은 고사하고, 약 250,000일(684년) 에 걸쳐 대충 250만 개의 석재를 그 멋진 피라미드에 쌓아 올렸을 것이다.
방위각 즉, 정확한 북쪽을 별의 움직임 으로 측정을 했다.? 눈대중으로 어떻게 0.몇%의 오차를 극복했을까.
네모난 석재를 도르래 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그것도 나무도르래로, 하지만 그 당시 이집트에서 주로 자라던 몇 그루 안 되는 종려나무를 벌채해서, 그것을 가공해 미끄럼 도르래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려나무의 열매는 식량으로 꼭 필요했고, 그 줄기와 잎은 말라 버린 대지에 그늘을 제공하는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학계에서는 나무 도르래가 반드시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피라미드 건축에 관해 가장 뻔한 공학적 설명조차 찾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무를 수입한 것일까? 외국에서 나무를 수입하려면 상당히 큰 선박이 필요하며, 선박은 알렉 산드리아에 도착해서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 카이로 까지 나무를 운송해야 했을 것이다. 육지에서는어떻게 운송했을까....역시 도르래로 밀면서,,,?
그럼, 말과 마차로 옮기지 않았냐고,,? 말과 마차가 이집트에 도입된건, 기원전1600년,제17왕조 때 일이다.
주류 고고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의 절대 군주가 1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해서 나일강 건너 수킬로미터 떨어진 채석장에서 굴림대, 로프, 나무썰매, 뗏목 등을 이용해서 이 돌들을 20여 년 동안 운반해 쌓았을 것이라지만, 하지만, 이런 거석들을 1톤당 몇 명이 며칠 걸렸을 것이라는 식으로 산술적인 계산을 하여 책상 앞에서 상상만으로 피라미드를 쌓아올리는 고고학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인가는 토목 공학에 조금이라도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깨달을 수 있다.
토목 공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대피라미드는 노예나 일반인을 마구잡이로 불러다가 건설된 것이 아니라 극도로 효율적인 관리 체계와고도의 기술이 제공된 아래에서 매우 숙련된 노동력이 투입된 것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굴림대, 나무 썰매, 뗏목, 버팀목 등을 만들어 조달하는 인원이 필요한데, 어림 계산으로도 족히 10만 명은 필요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목재들을 주변에서 절목해 운반하기위해서는 또다른 인원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또, 피라미드로 돌을 운반하기 위해 10:1 의 완만한 경사로를 만들었다면, 거기에 소요되는 석재는 대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든 석재의 7배 이상이나 된다. 보조 석재를 줄이기 위해 다른 방법을 쓴다고 해도 어쨌든 추가로 최소한 두 배의 인원이 더 있어야 한다.
또, 이들 전부를 먹이기 위한 식량 조달, 운송, 요리사들, 그리고, 그 들을 재우기 위한 숙박 시설의 건설자들, 피복의 조달자들, 총무, 노무, 재무관리자들까지, 고려하면 실제로 소요된 인원은 적어도 5배가 넘는 5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변에 얼마나 충분한 목재가 있었을까 하는 문제도 생각해봐야 한다. 주변에 충분한 목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이를 먼 곳에서 운반해와야 하는데 이는 돌의 운반에 못지 않게 큰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돌의 무게가 평균 2,5톤 정도인 것으로 보고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2.5톤은 제일 작은 돌의 무게이며, 이보다 더 무거운 돌들이 피라미드 내부 곳곳에 사용되었다. 특히 왕의 현실로 알려진 곳을 구성하는 개당 70톤에 이르는 100개의 석재는 다른 작은 돌들과 같은 석회암이 아니라. 화강암이다.
주류학계에서는 피라미드가 단단한 지반위에 건설됐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믿고 있다. 600만 톤이 넘는초거대 건축물이,,,,,,,,,.
지반침하에 대한 예를들어보자, 1878년 영국인들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이라는 애칭이 붙은186톤짜리 오벨리스크를 영국의 런던으로 옮긴 일이 있다. 맨 처음에는 이 첨탑을 국회의사당 앞에 세우려고 했으나 그곳의 지반이 약하여 탑이 가라앉을 가능성이 있다는 조사 결과에 따라 현 위치인 임뱅크멘트(Embankment) 로 옮겼다고 한다. 대피라미드의 총무게는 이첨탑의 3만배가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피라미드는 오늘날 까지 침하된 정도는 5mm 정도라고한다. 이것은 오늘날 미국에서 대형 빌딩에 적용하는 지반 침하 기준인 100년간15Cm 와 비교해보면 그 건축 연대를 고려할 때 거의 기적에 가까운 수치임을 알수 있다.
우리나라에 예로는, 63빌딩이 건축되고 한동안 주변 지역의 지반 침하로 민원이 쇄도했었다. 또,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는 누구라도 아는 일이다. 삼풍백화점은 부실공사였다는 것을 다들 알고는 있지만 . 아무리 부실공사라고 하지만 주류학자들의 말대로, 원시인이었던 5000년전의 이집트인들보다 더 원시인이란 말인가. 삼풍건물 설계자들이?.......그건아니라고 본다.
오늘날 전세계 의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건축회사들 에게 "대피라미드" 정도의 초거대건축물을 어떤 지역에 만들라고 주문 한다면 정밀한 주변 지반 조사와. 거기에 맞추어 그런 설계도를 자신있게 제시할수 있는 회사가 과연 몇군데나 될까?. 오늘날 지어지는 일반적인 건물의 건축에도 1% 정도의 훨씬 큰 오차가 적용된다. 그러나 이집트의 대피라미드는 0.몇몇 % 이하다. .(못믿겠다면 여러분의 근처에 건축공학을 공부하는사람이나, 건설쪽으로 일을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수 있을 것이다. " 건물의 직각 의 오차가몇% 까지가 규정이냐. 아니면 건물전체의 공차의 규정이 몇 %가 한정치 인가" 라고 물어보라)
일본의 돈많은 어느 재력가가 축소판 피라미드를 지으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설계 초기에 포기한 일이 있다. (시카고 대학의 레너박사팀은 모형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며....? 어떻게 된거야..?)
그러나 레너 교수는 초소형 피라미드를 만든 것 가지고 이런말을 단정적으로 말 할 자격이 없는 듯하다. 대피라미드에는 무려70톤이 넘는 돌들이 많이 사용된 반면, 그는 고작 최대 3톤 정도의 돌들을 사용했을 뿐이다. 대피라미드가 230만 개의 돌로 140m 높이의 거대한 건축물인데 비해 그는 수미터에 불과한 모조품을 만들었을뿐이다. 레너 교수는 이런 모형을 만드는데, 굳이 맘모스급 건축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건축공학 적인 고려를 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고서 어떻게 그 옛날 대피라미드가 몇 번의 실습을 통한 노하우 축적으로 충분히 재현할 수 있는 기술로 평가를 할수가 있단말인가.?
주류 이집트학자들은 대피라미드가 건설되기 100년 전부터 피라미드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소형피라미드 건설부터 시작해 점점 건축 노하우를 쌓은 후 마침내 기자의 거대 피라미드군을 건설할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시대에 고대 이집트에서는 100년 남짓 동안 일대 기술 혁명이 이루어졌다고 봐야한다. 처음 자그마한 몇 개의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동안 측량학, 지질학, 건축, 운송, 의료, 자원개발 등에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지 않고는 이런 초대형 건축을 시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그 공사 자체는 당시 한 국가의 사회, 경제 문화 체제 전부를 좌우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쌓인 노하우는 문명의 발전에 어떤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정도로 지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피라미드 건설후 그 찬란한 문명은 도대체 어디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단 말인가.?
기자의 대피라미드는4왕조 때건설되었다. 그렇다면 5왕조 때는 기자의 피라미드보다 더 거대하고 더 정밀하고 더 완벽해야 하는게 아닌가? 하지만 5왕조때의 피라미드는 지금현재 그 형상을 원래대로 간직한게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피라미드를 외계인이 만들었다는둥, 아니면 또다른 초현대문명이 만들어 준 것이라는둥, 하는 주장을 연결시키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다음은 비밀의 방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피라미드 비밀의 방
피라미드 내에 비밀의 방, 즉 쿠프의 진짜 현실이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이 그 동안 줄기차게 제기되었다.
첫 번째 이유는 쿠프의 현실로 알려진 왕의 방이 피라미드의 정중앙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신이자 우주의 중심이었다. 그런 신의 안식처를 정중앙이 아닌 곳에 만드는 것은 고대 이집트인의 믿음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진실한 파라오의 무덤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현재 왕의 방으로 알려진 현실 상부에 있는 다섯 개의 하중 분산용 공간이 하부에 있는 현실을 보호하기 위해 건축된 것이 아니라 다른 장소, 즉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방을 보호하기 위해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파라오의 현실에는 쿠프의 빈 석관만 남아 있는데 820년에 칼리프 알 마문이 석관을 열었을 때에도 아무런 부장품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때부터 쿠프의 석관은 위장용이며 다른 장소에 쿠프의 진짜 현실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러한 추측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1985년에 프랑스의 건축가 도르미옹과 골뎅이 구조상 비밀의 공간이 존재할 것으로 보이는 부분을 발견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들은 쿠프의 대 피라미드를 조사하면서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몇몇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했다. 돌 블록 몇 개가 일반적인 조적법(造積法)처럼 서로 엇갈려 포개져 있지 않고 상하로 쌓여 있으며 벽의 중간 부분에 여러 개의 반짝이는 돌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게다가 어떤 돌들은 가공하지 않은 채 시공되기도 했다.
그들은 이 이상한 구조가 피라미드 내부에 비밀 공간이 존재하는 증거라고 판단했다. 이 공간 중 하나에 쿠프의 부장품이 있을 것이고, 수천 년 동안 많은 호사가들을 설레게 했던 쿠프의 진짜 관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 발견은 당시 이집트 연구자들을 비롯한 전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들의 제안에 의해 프랑스, 일본, 독일의 발굴 팀들은 피라미드 내부에서 과학적인 탐사를 펼쳤다.
① 프랑스 팀의 탐사
이집트 정부는 도르미옹과 골뎅의 제안을 근거로 한 EDF(프랑스 전력 회사)의 탐사 계획을 허가하였다. EDF의 지원을 받는 CPGF(프랑스 지구 물리학 탐사 회사)는 마이크로 중력 장치를 사용하여 피라미드 내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CPGF와 EDF의 조사에 의하면 피라미드 복도와 피라미드 표면의 평균 밀도는 2.05였다. 일반적인 석회석의 밀도는 2.4이므로 이 수치는 매우 낮은 수치였다. 특이한 것은 왕의 방 지붕 위 부분의 평균 밀도가 1.85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피라미드 각 부분의 비중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비밀의 방이 존재한다는 추측을 깊게 해주었다. 밀도가 낮다는 것은 빈 공간이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탐사 팀은 두 건축가가 예언한 장소에서 비밀의 방이나 비밀의 복도를 발견하지 못했다. 반면에 왕비의 방으로 가는 서쪽 복도에 적은 양의 질량 결핍을 근거로 빈 공간이 있다는 결론을 짓고 수많은 토론을 거쳐 빈 공간으로 예상되는 지점의 벽을 뚫기 시작했다.
드디어 두꺼운 석회암 벽이 뚫리고 빈 공간에 도착했다는 신호가 포착되었다. 수천 년 동안 비밀스럽게 간직되었던 피라미드의 신비가 모습을 드러내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들은 소형 카메라를 빈 공간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그곳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반짝이는 고운 모래 외에는 어떤 것도 없었다. 마이크로 중력 장치가 빈 공간이라고 지적한 장소는 모래나 잡석들만 쌓여 있는 무용의 공간이었다. 다시 한 번 쿠프의 대 피라미드는 그 비밀에 접근하려는 인간의 시도를 좌절시킨 것이다.
② 일본 팀의 탐사
프랑스 조사단에게 미지의 공간에 대한 발굴 허가를 내주었던 이집트 정부는 사쿠지 요시무라 교수가 이끄는 일본 팀에게도 똑같은 발굴 조사 허가를 주었다. 일본 팀은 마이크로 중력 측정 장치 외에 레이더도 사용했다. 레이더를 사용한 것은 마이크로 중력 장치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왕비의 방으로 갈 수 있는 기존 복도와 나란히 나 있는 길이 30미터 정도의 새로운 통로를 발견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중력 결핍은 서쪽 면에서 빠짐없이 나타났으며 새로운 통로의 크기는 4.50×3.50미터이다.
이것은 프랑스 팀이 조사한 결과와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학자들 간에 일본 팀의 조사에 대한 신빙성 여부로 격론이 벌어졌다. 레이더 장비는 습기를 먹은 흙이나 돌의 경우 공간 유무를 판독하기 어려우므로 일본 팀의 발표가 부정확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집트 당국은 결국 일본 팀에게 더 이상 발굴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일본 팀은 발굴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③ 독일 팀의 탐사
독일 고고학 연구소장 라이너 슈타델만은 독일의 로봇 기술자인 루돌프 간텐브링크에게 최첨단 소형 로봇을 이용하여 환기창을 탐색하도록 허가하였다. 간텐브링크는 왕비의 방 남쪽 갱도의 좁은 입구로 카메라가 달린 로봇을 투입하여 놀라운 사실을 포착하였다. 60m 지점에서 ‘내리닫이식 문’을 발견한 것이다. 기묘한 손잡이가 달린 이 문을 촬영한 비디오는 1993년 4월에 런던의 『인디펜던트』지에 게재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고고학자들은 이집트 최대의 피라미드 내부에서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방의 입구를 발견했다. ……몇 가지 증거에 의하면 이 방에 쿠프 파라오의 보물이 소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보물은 거의 틀림없이 완전한 상태로 있을 것이다. 방의 입구는 폭과 높이가 20센티미터에 길이가 65미터인 긴 통로 끝에 있다. ……이 통로는 큰개자리의 시리우스를 가리키며…….”
이 내용이 발표되자 전 세계의 매스컴은 피라미드의 열기로 들끓었다. 런던의 『더 타임즈』에서는 “비밀의 방이 피라미드의 수수께끼를 풀어줄지도 모른다”고 했다. 파리의 『르 몽드』와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역시 “피라미드의 미스터리”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발견에 대해서 간텐브링크로 하여금 갱도를 탐사하게 했던 독일 고고학 연구소조차 의문을 제기하였다. 연구소 측은 “갱도 끝에 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난센스다”라고 단호히 발표한 것이다. 결국 이집트 정부는 이들의 논쟁이 가열되자 독일 탐사 팀에게 피라미드 탐사 재개를 허가하지 않는다는 통보를 보내 시끄러운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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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방에 대한 허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피라미드 안의 비밀의 방에 대한 탐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정말로 비밀의 방이 있느냐 없느냐로 설전이 벌어졌다. 비밀의 공간이 틀림없이 있다는 주장은 왕의 현실이 특수한 건축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파라오의 현실 상부에 5개의 공간이 연속으로 쌓여 있는데, 도르미옹과 골뎅은 이 5개의 공간이 일반적으로 하층 분산용 공간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왕의 방이 아닌 다른 공간 소위 미지의 방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건축구조학자들도 도르미옹과 골뎅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다고 지지한다. 다섯 개의 하중 분산용이라고 알려진 공간의 역할이 너무나 미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정 하에 실시된 프랑스 팀의 탐사가 실패하면서 결론은 역시 비밀의 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옮겨갔다. 5개 공간에서 약간의 변형이 일어나는 이유도 수평으로 가해지는 과도한 압력이나 부실 공사 때문이라는 것이다. 파라오의 현실이 약간 남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이것은 그 막중한 중량을 지탱할 수 있는 토대들을 쿠프의 건축가들이 고려하지 않은, 한마디로 건축상의 실수라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쿠프 파라오 시대의 건축가들이 하중 분산이라는 건축상의 기술 내용과 화강석이라는 재료의 특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지 못하였다고 지적한다.
쿠프의 건축가들은 왕비의 방에 사용한 것과 같은 궁륭 시스템을 왕의 방에도 채택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궁륭 시스템은 스네푸르 파라오의 피라미드에서도 채택된 것으로 이미 시공 예가 있었다. 하지만 쿠프의 피라미드의 경우에는 석회암을 사용하지 않고 단단한 화강석을 현실의 재료로 채택하였다. 쿠프의 피라미드는 왕의 방으로 알려진 현실을 수평으로 덮기 위하여 화강석을 사용한 첫 번째 예였다.
그러나 화강석은 석회암보다 단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운모, 석영, 장석의 세 가지 성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균일하지 못하여 커다란 압력을 받으면 균열이 생기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평판을 설치하자마자 가장 단단하다고 생각한 화강석에서 피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란 건축가들은 설계를 변경하여 쿠프의 현실 위에 공간을 만들어 압력을 상쇄하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별다른 효과가 없자 두 번째, 세 번째 공간을 계속 만들었고 다섯 번째의 공간을 만들어 두 개의 경사면을 갖는 궁륭을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파라오의 현실을 외부의 힘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당시에 건축법을 잘 모르던 이집트 건축가들의 기술 미숙으로 쿠프의 피라미드 현실 상부에 5개의 공간이 설치되었다는 지적이다.
그러므로 피라미드 상부의 밀도가 낮아 빈 공간이 있더라도 보물이 들어 있는 비밀의 방이라기보다는 건설에 필요한 공간, 즉 창고나 작업 공간이라는 주장도 많이 있다. 피라미드만 60년 이상 연구한 로에 교수도 프랑스 건축가들과 일본 탐사 팀들이 피라미드 안에서 발견한 공간은 수없이 많으며 이 미지의 공간들은 건설 도중에 생기는 쓸모 없는 공간을 모래나 돌덩어리로 채워져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실제로 프랑스의 발굴 팀이 발견한 공간도 이런 건설상 필요했던 폐공간을 공사가 끝난 후 모래와 잡석으로 채운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미지의 방들에 대한 조사는 초기 단계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것이 세기의 대 발견이 될지 혹은 일과성 호기심에 지날지는 시간이 더 지나봐야 판가름날 것이다.
천체창
1638년에 영국의 수학자 존 그리브가 길이의 척도가 피라미드에 숨겨져 있다는 믿음을 갖고 피라미드를 조사하기 위하여 기자를 방문했다.
놀랍게도 피라미드 안에는 박쥐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브는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박쥐들이 자신을 공격하였지만 총을 쏘아 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윌리엄 해리는 박쥐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근거로 피라미드 내에 외부와 통하는 구멍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추측은 옳았다.
‘천체창’이라고도 불리는 환기 구멍이 발견된 것이다.
피라미드의 현실에는 남쪽과 북쪽으로 높이 20센티미터, 폭 22센티미터의 환기 구멍이 있다. 미국의 천문학자 트림블은 남쪽의 환기 구멍이 기원전 2600년에서 기원전 2400년경에는 오리온자리의 세 별에 정확하게 조준되어 있었다고 발표했다. 이것을 근거로 이 구멍은 환기 구멍이라기보다는 천체창이라는 명칭으로 더 많이 불리게 된 것이다.
실제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에서 완성된 천체창은 쿠프의 대 피라미드에만 있다. 왕비의 방이라고 알려진 곳에도 천체창이 있으나 미완성이며 케프렌의 피라미드도 천체창을 계획하기는 하였으나 완성하지는 않았다.
기자 피라미드 의 별자리 지형배치
기자 피라미드의 지형배치가 밤하늘의 별자리의 배치와 거의 흡사하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 것이다. 그 별자리는 오리온의 삼태성(三太星: 알 니탁, 알 닐람, 민카타)이다. 겨울 별자리에 유독 빛나는 별인데, 나도 부산, 마산에 있을 때는 그 존재를 몰랐다가 -아, 도시에선 그 별자리를 잘볼 수 없었다고 하는게 맞을 것같다- 그 별자리를 군에 가서 보초서다가 고참에게 들어 알았지만 누구나 한번만이라도 본다면 그 별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간해선말이다.
기자피라미드의 배치는세 피라미드를 일직선으로 그어보면 세 번째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라 불리우는 3번째 피라미드가 조금 어긋나있다는걸 알 수있다. 준비한 그림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세 번째 배치는 오리온자리의 3번째 자리의 별(민타카)의 위치와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더욱이 별빛의 선명도로 알 수 있는 별들의 크기도 기자 피라미드들의 규모와 일치한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것은 벨기에의 건축기사인 로버트 보발(이집트학 전문 학자가 아님)이란 사람이 발견한 것인데 어느날 우연히 이집트 박물관에서 기자피라미드의 하늘에서 찍은 항공 사진을 우연히 봤단다.
그런데 3번째 피라미드가 왜 일직선에서 좀 벗어나있을까 생각생각하다가 우연히 밤에 바람 쐬러나왔다가 목이 뻐근해 하늘을 쳐다봤는데 갑자기 그 별자리-오리온자리-를 보고나서 발견한 것이라 한다. 내 생각엔 우연한 발견이라고 하지만 이로인해 이집트의 모든 것들을 별자리에 대응해서 많을 것을 알게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한예로 스핑크스 또한 사자자리의 별자리를 적응시켰다는 것인데 이것은 스핑크스장에서 다룰 것이다. 그리고 이외에도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의 피라미드와 기자 피라미드 배치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자지역 피라미드의 항공사진
그림1: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
그림2:멕시코 테오테칸 피라미드
피라미드의 오리온자리 배치
오리온 별자리
피라미드의 오리온자리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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