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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지용(鄭芝溶)
생애와 활동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시조시인 이병기 등과 사귀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강연에 종사했다. 1950년 6·25전쟁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월북했다가 1953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이 통설로 알려져 있다.
첫째는 1926~33년으로, 이미지를 중시하면서도 향토적 정서를 보인 모더니즘 계열의 시이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23년경이었다고 하나, 발표되기는 1926년 <학조〉 6월호에 실린 시 〈카페 프란스〉·〈마음의 일기에서〉 등에서 시작된다.
이어 이미지 시의 면모를 보여준 〈바다〉(조선지광, 1927. 2)와 〈향수〉(조선지광, 1927. 3)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했다. 이런 경향은 〈시문학〉의 향토적 정서, 섬세한 이미지 표현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이 시기의 시들은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면서도 순수 서정시의 가능성을 아울러 보여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 리야"(〈향수〉 1연)와 같이 곱게 다듬어진 우리말의 언어적 세련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감각적 이미지를 적절히 형상화하고 있다.
둘째는 〈가톨릭 청년〉에 관여하던 1933~35년에 보여준 종교적인 시이다. 이 시기에는 절대적인 신에게 관심을 갖고 시대적 상황에 무력한 자신의 정신적 허기와 갈증을 신앙을 통해 메우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갈수록 열악해지는 현실에 대한 절망과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시인의 정신적 방황을 드러내는 것이며, 특히 〈나무〉(가톨릭 청년, 1934. 3)의 "얼굴이 바로 푸른 하늘을 우러렀기에/발이 항상 검은 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도다"라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한갖 나무만도 못한 욕되고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참회와 나라를 잃은 민족의 정신적 갈등을 표현하고 있다.
셋째는 1941년까지 발표한 동양적 전통과 정신에 바탕을 둔 산수시이다.
이 시기에 그는 동양적 정신과 산수의 풍경을 그리는 여행을 떠남으로써, 시적 소재가 〈바다〉(시원, 1935. 12)를 거쳐 〈옥류동〉(조광, 1937. 11)·〈비로봉〉(청색지, 1938. 8)·〈장수산〉(문장, 1939. 3)·〈백록담〉(문장, 1939. 4)으로 바뀐다. 바다를 거쳐 산으로 오르는 이런 시세계의 변모는 즉 일제강점기 말의 암울한 현실에 구애됨이 없이 자연에 몰입하고자 하는 시인의 정신세계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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