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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정희성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2015년 12월 23일 01시 48분  조회:4542  추천:0  작성자: 죽림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시인 본색

/정희성

 

 

누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궁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도 오골계(烏骨鷄)!

 

            -정희성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창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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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성 시인의 시강의를 듣고 ♣

 

◆ 우리의 말이 누군가를 감동시키고 누군가의 마음에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시를 쓰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 시인들의 낡은 세계 속에서의 낡은 사물들 속에서의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해 내는 일은 아마도   과학자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원소나 원리를 발견해 내는 일에 비견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시인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 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해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의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형상, 이미지) 이 세가지 입니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진 시가 될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됩니다.) 

정희성 시인 프로필

 

1945년 경남 창원 출생

1964년  용산 고등학교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서울대대학원수료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변신>당선 등단

`972년 숭문고등학교 교사

1974년 시집 <답청>(문학동네)

1978년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창작과 비평)

1981년 제1회 김수영문학상  신경림 시인과<한국 현대시의 이해> 출간

1991년 시집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

1996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역임

1997년 시와시학상

2001년 제 16회 만해문학상 수상,  평양 815평화문화축전에 도종환, 김준태와 남축대표시집 <시를 찿아서> (창작과비평)

2003년 제8회 현대불교문학상

2006년 민족문학작가회의 16대 이사장

2008년 제5회 육사시문학상 , 시집<돌아다보면 문득>(창비)

 
 

 

  우리에게「답청」과「저문 강에 삽을 씻고」라는 시로 잘 알려진 정희성 시인. 그는 분명 과작(寡作)의 시인이다.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올해로 40년 가까운 시력(詩歷)의 중견 시인인데 지금껏 그가 펴낸 시집은『답청』(샘터사,1974)『저문 강에 삽을 씻고』(창비,1978)『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창비,1991)『詩에 대하여』(창비,2001) 단 네 권뿐이다. 정희성 시인이 3시집 이후 10년 만에 펴낸, 그것도 43편의 시로 묶여진 4시집『詩에 대하여』에서「가야산 홍류동 바위」를 읽었다. 이 시는 신라 말기에 무너져가는 나라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려 전방위로 애를 썼지만 반동 귀족 세력들의 반대로 그 시도가 좌절되자 가야산으로 입산해버린 고운(孤雲) 최치원의 삶에 기대고 있다. 특히 가야산 해인사 입구 홍류동 계곡과 그가 남긴 한시「題伽耶山讀書堂」,「入山詩」가 이 시의 배후에 놓여있다. 고운 최치원의 유(儒)․불(彿)․선(仙) 포함삼교(包含三敎)의 풍류도(風流徒) 정신과 뭇 생명을 살리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큰 사상은 우리 한민족의 정신으로 지금 새롭게 계승되고 있다. “말은 흘러가고/바위만 곧게 앉아”라는 시구는 객관적 실제를 기술한 것이겠지만 큰 사상과 간절한 마음이 어디 그리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인가. 정희성 시인이 이 시를 구태여 쓴 연유도 고운의 풍류도와 접화군생의 사상을 좇고 있음이리라. 그렇다. “말은 흘러가고”의 시구처럼 선생의 말(사상)이 흘러 절망의 우리 사회에 새로이 피어나 해원(解寃)과 상생(相生)의 새날을 하루 속히 불러와야만 한다.

-이종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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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 <숲>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2015년 6월, 교보생명 광화문글판이 시원한 여름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이번 〈여름편〉은 정희성 시인의 ‘숲’에서 가져왔습니다. <여름편>을 빛내준 정희성 시인은 ‘저문강에 삽을 씻고’ 등 시대상을 차분한 어조로 표현하는 대표적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문안은 생김새나 종류가 다른 나무들이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숲을 이루듯 각자 개성이나 생각이 다르지만 서로 배려하고 포용하며 함께 나아가자는 뜻을 담았습니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日月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 그 즈음에 
해와 달을 몸받아 
누리에 나신 이여
두 손 모아 비오니 
천지를 운행하올 제
어느 하늘 아래 
사무쳐 그리는 이 있음을 
기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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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전에서

나는 웬지 잘 빚어진 항아리보다 
좀 실수를 한 듯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내를 따라와 옹기를 고르면서
늘 느끼는 일이지만 
몸소 질그릇을 굽는다는 
옹기전 주인의 모습에도
어딘다 좀 빈데가 있어
그것이 그렇게 넉넉해 보였다
내가 골라놓은 질그릇을 보고 
아내는 곧장 화를 내지만
뒷전을 돌아보면
그가 그냥 투박하게 웃고 섰다 
가끔 생각해보곤 하는데 
나는 어딘가 좀 모자라는 놈인가 싶다 
질그릇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실수한 것보다는 차라리
실패한 것을 택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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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은 강을 건너며

얼음을 깬다.
강에는 얼은 물
깰수록 청청한 
소리가 난다.
강이여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물은 남 몰래 소리를 이루었나
이 강을 이루는 물소리가
겨울에는 죽은 땅의 목청을 트고
이 나라의 어린 아희들아
물은 또한 이 땅의 풀잎에도 운다.
얼음을 깬다.
얼음을 깨서 물을 마신다.
우리가 스스로 흐르는 강을 이루고
물이 제 소리를 이룰 때까지
아희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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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김

물에서 나와 산으로 쫓긴 영산
태평연월에 총맞아 죽은 영산
저승 가다 먹으려고 
도토리 한 알 손에 쥐고 
올 같은 풍년에 굶어 죽은 영산
가랑잎 뒤집 쓰고 산에서 죽은 영산
애면글면 살겠다고 
버섯 따다 죽은 영산 
칠성산 총질 끝에 쓰러져간 젊은 영산
넋이야 넋이로다 죽은 영산 죽인 영산
모두 다 우리 동포 아니시리
우리 형제 아니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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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를 찾아서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 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볼 틈도 가지지 못한 채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자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시를 찾아서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발표 안 된 시 두 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 한다 
시를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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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

겨울에도 핫옷 한 벌 없이 
산동네 사는 막노동꾼 이씨
하루 벌어 하루 먹는다지만 
식솔이 없어 홀가분하단다 
술에 취해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낯선 사람 만나도 알은체하고
남의 술상 앞에서 입맛 다신다
술 먹을 돈 있으면 옷이나 사 입지
그게 무슨 꼴이냐고 혀를 차면
빨래 해줄 사람도 없는 판에
속소캐나 놓으면 그만이지 
겉소캐가 다 뭐냐고 웃어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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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1998

틈만 나면 서울역에 갔다 
침침한 지하도 한 구석에는 
지쳐 쓰러진 사람들 
죄 많은 내가 누워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이 먼저 와 있다 
이 꼴을 볼라고 작년에 
하느님이 나를 인도에 보내셨던지 
북인도가 아프게 꿈에 보였다
노란 겨자꽃이 한창이었다 
마알간 거울 속처럼
이상하게도 세상은 고요했고
말을 해도 소리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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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설(辭說)

가여운 입술이나 손끝으로 매만질 수 없는 사랑의 깊이를 
더러는 우리가 어둑한 심장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을 왜 몰라 
오늘따라 어설피 흰 살점의 눈내리고 이 겨울 우리네 마음같이 어두울
뽕나무 스산한 가지 설운 표정을 목로에서나 달래는 심정으로 훼훼 
탁한 술잔을 흔들다가는 시나브로 눈발이 흩날리는 거리로 나서보지마는
언제 우리네 겨울이 인정같이야 따뜻한 것가 어두운 나무에서 반짝이는 눈빛같이야 
어차피 반짝일 수 없는 우리네 마음이 아닌 것가 
미쳐간 누이의 치마폭에 환히 빛나던 싸리꽃 등속의 그 꾀죄죄한 웃음결만치도 
밝게 웃을 수 없다면야 순네의 슬픔에는 순네의 슬픔에 맞는 가락지
우리 모두가 우리네 슬픔에 맞는 사랑을 찾아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나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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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청

풀을 밟아라
들녘에 매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 수록 푸르른
풀을 밟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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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 쉬는
공기(空氣)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공기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자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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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

촉촉히 비 내리던 봄날 
부드러운 그대 입술에 
처음 내 입술이 떨며 닿던 
그날 그 꽃자리 
글썽이듯 글썽이듯
꽃잎은 지고 
그 상처 위에 다시 돋는 봄 
그날 그 꽃자리
그날 그 아픈 꽃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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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여, 나라도 먼저 침을 뱉어 주마"  
  [기고] 이것은 '표절 시비'가 아니다  
 
     
 
    
  적요함, 그리고 일지소란
  
  적막하다. 바위처럼 외롭다. 아니 나무처럼, 안개처럼 외롭다. 문학의 신은 이미 오래 전에 사망 선고를 받고 죽었다. 아니, 죽지 않고 떠났는지도 모른다.
  
  슬픔과 그리움과 분노를 먹고 살았던 신, 우리가 외로울 때에 위안을 주었고,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게' 다독거려 주었던 신, 독재의 푸른 발톱 하에서도 살아 펄펄거리던 문학의 신은 어디로 갔는가.
  
  대신 문학의 제단 앞에는 지금 파리의 이국적인 노천카페에 앉아 한 잔의 카푸치노에 흰 빵을 찍어 먹으며, 혹은 늦은 밤 베란다에 앉아 붉은 와인 한잔을 홀짝거리며 전혜린과 뭉크와 불륜을 꿈꾸는 자들이 앉아 있고, 그들이 신 없는 신전에서 잔치를 벌이는 동안 자신의 정신적 노고를 보답 받지 못한 채 쫓겨난 문학의 사제들은 초라한 거지처럼 저자거리를 떠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사방을 둘러본다. 어디에도 살아있는 목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해마다 연중행사처럼 모 시인의 집 앞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모여 초조하게 노벨상을 기다렸다 흩어지고, 아직도 문단 황제의 꿈을 버리지 못한 작가들이 판을 휘젓고 다니지만 그럴수록 판은 더욱 초라해져 가고, 살아남은 것은 적요하게 무덤을 지키는 자들 뿐. 분노도 슬픔도, 비판적인 이성도 열정도, 자존심도 품격도 없는 문학 기술자들, 문학 전공자들이 벌이는 축제들 뿐. 대다수의 작가들이 일용직 노동자처럼 궁핍한 시대, 소설 한 편에 수천만 원, 시 한 편에 수천만 원이 호가되는, 로또복권보다 더 로또적인 문학상. 그렇게 자본주의적인, 너무나 자본주의적인 줄을 세우고 있는 자들과 줄서서 입을 벌리고 있는 초라한 군상들 뿐.
  
  제발 문학은 죽어도 작가 정신만은 살아있기만을 바랐던 것은 꿈이었을까.
  
  일제시대에도, 독재정권 하에서도 얼어붙은 가난 속에서도 한잔 술에 살아있던 작가혼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 어려운 시대, 이 가난한, 분노의 시대에…. 이 도처에 신음소리,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시대에….
  
  적요하다. 너무나 적요하여 숨이 막힌다. 나 역시 어디 은둔이라도 할까보다.
  
  그때 어디선가 자그마한 소란이 들려온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는가 보다, 할 뿐 관심이 없어진다. 요즘은 무관심이 미덕이다. 더구나 들려오는 소란의 내용인즉슨 '표절 시비'라는 낯익은 주제라니, 애초부터 누구 말대로 '매력 없는 공방'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소리란 당사들끼리 좀 티격태격하다가 제풀에 사라지게 마련이다. 우리처럼 점잖은, 이름께나 있는(?) 기성 작가들이 나서서 시시비비를 거들 판은 더욱 아닐 것이었다. 아서라! 술이나 마실란다.
  
  그런데 소란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니, 누군가가 분명히 분노를 하고 있다. 분노한 목소리는 들으면 금세 안다. 그 목소리 중에 평소에 알고 있는 자의 목소리도 끼어 있다. 드디어 독자까지 나선다. 그의 질타가 소설쟁이란 간판을 달고 사는 나의 귀에 까칠하게 박힌다. 하지만 철저히 적막하고, 철저히 무관심한 요즈음의 문학판에 그의 목소리 역시 바람처럼 곧 지나갈 것이다. 그러길 바라자. 
  

 

 

  그러나 마음이 한동안 무겁다. 내가 살아온 것. 나의 문학에 대한 오랜 번민에 빠진다. 갑자기 그토록 열정을 바쳐 살아왔던 세월이 모두 허망하게 느껴진다. 온 몸으로 부대끼며 지키려고 했던 가치가 갑자기 부질없어 보인다. 그와 함께 갑자기, 정말 갑자기, 문단의 일각에서 조그만 자리를 차지 한 채 그 역시 무슨 기득권이라고, 만수산 드렁칡처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엉켜서 살아왔던 안일함, 스스로 키워온 무력감에 대한 배신감이 물결처럼 밀려온다. 그러고 보니 누구를 원망하기 전에 내가 가장 먼저 이 침묵의 무덤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문학의 신을 죽이고, 작가 정신을 유폐시킨 것은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며 이런 '작은 일'에도 분개할 줄 모르는 가짜 소설쟁이, 가짜 지식인인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래, 문학이여, 미안하다! 순정한 독자 제위를 속이고 젠 체 목에 힘을 주고 살아온 자칭 문학도인 척 했던 내 얼굴에 먼저 침을 뱉어주마! 그러고 나서 문학에게, 천박한 유행과 시대에 굴종하여 이빨과 발톱을 다 뽑힌 채 멸시와 천대의 굴레에 떨어진 문학의 얼굴에, 힘껏 침을 뱉어주마! 문학의 신을 유폐시키고 마침내 죽여 버린 우리 시대의 문학 교수, 평론가, 작가, 출판사 기획자, 사장, 신문 기자들, 너와 나를 향해서도 마음껏 침을 뱉어주마! 자신은 아무 상관 없다고, 제발 자기를 이 '매력 없는 시비'에서 좀 빼달라는 우리 시대의 빌라도들에게 가래까지 게워서 침을 뱉어주마!
  
  우리 시대의 빌라도들
  
  내가 알고 있는, 사랑하는 후배 소설가 방현석은 '해명서'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당사자들 간의 대화를 통해 이견이 해소되기를 기대했던 저의 바람과 맞지 않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저의 이름이 거명되어 불편한 오해가 확산되는 것을 저는 원치 않습니다. 제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은 당사자와 언론에 간곡히 당부합니다. 이 매력 없는 공방에 저를 더 이상 관련시키지 말아주십시오."
  
  지랄.
  
  나는 헛웃음이 돌았다. 준엄하고 냉정하기까지 한 그의 '해명서'를 읽으며 나는 그가 내가 알고 있는, 과연 '새벽출정'을 쓴 그 소설가 방현석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때까지는 아직 두 편의 소설 조경란과 주이란의 '혀'를 읽기 전이었다.) 그의 글은 소설가 방현석이 쓴 글이라기보다는 거의 형사 앞에 끌려간 피의자가 쓴 심문조서에 가까웠다.
  
  그는 그간 자신이 두 작품과 두 작가, 그리고 출판사 사이에서 했던 역할을 차례로 서술한 다음, 자신은 이 사태로부터 아무런 책임도 없고 아무런 관심도 없으니 더 이상 자신의 영예로운 이름이 거론되지 않기를 간곡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방현석이 누군가. 누구보다 사태를 냉철하게 파악하는 힘과 논리를 지닌 작가가 아닌가. 그 어느 문장 하나 정서적인 빈틈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조와 주, 두 사람에 대해서 동시에 거리 두기 역시 잊지 않는다. 불편부당(不偏不黨)! 어떤 동정심도 흥분도 눈곱만큼 찾아볼 수 없다.
  
  사실 나는 문단 내에서 방현석과 같은 축으로 분류되는 무리이다. 그의 문제작 '새벽출정'이 <창작과비평>에 발표될 때 나의 졸작인 '벌레' 역시 같은 지면에 실렸다. 1980년대의 대표적 작가로서 그는 노동문학과 민족문학을 이끌어왔고 2000년대에는 소설 <랍스터를 먹는 시간>으로 황순원문학상과 오영수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전 <실천문학> 편집위원이었고, 현재는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해명을 그대로 직역하자면 '난 상관없으니까 제발 나한테 똥물 튀기지 않게 해주십시오!'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얄밉긴 했지만 방현석이 괜한 일에 걸려들었구나, 재수 없겠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그 후 느닷없이, 부산에 살고 있는 소설가 김곰치의 천둥 같은 글이 올라왔다. 방현석의 글보다 훨씬 소설가의 글에 가까운, 다시 말해 열정과 진정이 넘쳐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나는 비로소 확연하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표절 시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지금 우리 문학이 처해있는 중병이 어떻게 도져왔는지 알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폭로이자 전 시대적인 문학 싸움의 전초전이라는 것을. 이것은 중견 작가 조경란과 신인 작가 주이란의 싸움이 아니라 '조경란'이란 코드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작금 우리 당대 문학 권력과 양심적인, 그러나 파편화되고 힘없는 작가군과의 일대 전쟁의 시작이란 것을.
  
  변방에 살기에 아직 문학적 순정성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소설가 김곰치는 조경란의 '혀'와 주이란의 '혀'를 꼼꼼히 읽어본 다음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조경란의 부도덕성과 재능 없음에 일타를 날렸다. 이런저런 인맥과 이러저러한 안면으로 눈치 보기에 바쁜, 이미 동맥경화증에 걸린 서울 문단으로 보자면 상상할 수도 없는 폭탄이 터진 것이다.


 

 

  조경란이 누구인가. 신경숙과 은희경을 잇는 다음 세대의 여성작가로서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한 이래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을 받으며 이미 문단의 중심으로 떠오른 작가가 아닌가.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모르는 이런 작가와는 방현석의 말처럼 그저 무심하게 지나는 게 상책이다. 이미 상업주의에 멍든 출판사는 말할 것도 없고, 비판적 전문성 대신 스타의 박수부대로 전락해버린 언론사 문학 담당 기자까지 조경란을 건드려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고 판단을 한 것 같다. 더구나 극우 보수 신문인 <조선일보>는 때마침 올해 그녀에게 커다란 문학상까지 안겨주지 않았던가!
  
  그런 판에 저 변방, 부산에서, 촌놈 같이 생긴 소설가 김곰치가 겁 없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사정없이 죽은 문학의 신전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조경란을 향해 몽둥이를 날린다.
  
  김곰치는 말했다.
  
  "주이란 작가, 당신은 단편 '혀'와 '촛불 소녀'를 출산한 작가로서 자부심을 가지기 바란다. 조경란 말고 다른 누구라도 당신의 작품을 베낄래야 베낄 수가 없다. 베낄 실력들이 되지 않는다. 엇비슷한 혀 절단, 요리 설정이 있지만, 훗날 당신의 장편 <혀>가 출간되었을 때, 그 내용을 기사로 미리 다룰 신문 기자의 요약 수준으로 중첩되어 있을 뿐이다. 당신의 '사랑하는, 맛보는, 거짓말하는 혀'의 장편은 줄거리나 아이디어 수준으로 다른 누가 쓸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오직 당신만이 쓸 수 있는, 세계에 단 하나뿐인 작품일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미래작을 벌써부터 너무 사랑하고 있는 상태로 보인다. 그 사랑도 큰 재능이지만, 그러나 당신을 일종의 인지협착 상태로 빠뜨리고 있는 듯하다. 두 소설을 읽어보건대 도절당했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겠는데, 만약 도절되었다면 조경란 같은 작가가 도절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길 바란다." 
  
  그런가. 그렇게 좋은 신인이 있었단 말인가. 이쯤 되니 나도 소설을 끄적이며 먹고사는 동류의 한 사람으로서 두 사람의 작품을 찾아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결과는, 기름끼 많은 서양요리를 먹었을 때처럼 느끼했고, 나중엔 텅 빈 소주잔처럼, 씁쓸했다. 김곰치가 지적한 그대로이다. 그래도 한편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을 바꾸어 본다. 심지어는 다 죽은 문학의 시대에 그러면 좀 어때?, 하고 맥락 없는 심통도 좀 부려본다. 이런 약육강식의 시대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죽기 마련이지, 도덕이 뭐며, 시대 정신은 뭐며, 작가 정신은 뭐 빌어먹을 작가 정신이냐, 나 아니라도 누군가가 하겠지, 하며 고개를 떨궈 본다.
  
  어떻게 보면 모든 문학은 이전 문학의 표절이며 패러디다. 나는 한 작가의 탄생과 성장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다. 조경란의 초기작들이 보여주었던 섬세한 감각과 신선한 이미지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만은 아니다. 응원군 삼아 동원된 참고문헌을 보면 더욱 그렇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보통 수십 권의 책을 참고로 한다. 그러나 그것을 작품 뒤에 열거해 두지는 않는다. 빈약한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을 글로 먹고 사는 작가라면 다 알고 있다.
  
  이 너절한 소설 뒤에 붙여놓은 김화영의 너절하고 장황한 해설을 보며 나는 더욱 근질거리는 욕지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혓바닥 위에 세운 감각의 제국'이라는 거창한 제목 아래 거미줄처럼 이것저것 의미망을 만들어 붙여놓았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긴 해설을 붙였을까를 끝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한갓진 인간의 말장난을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옛 사람들은 이런 짓을 일컬어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고 했다던가. 어쩌면 그가 해설의 말미에 사족처럼 달아놓은 말, "소설 혀를 덮으면서 문득 혀 요리보다는 표면만 살짝 익혀, '입 안에서 벨벳처럼 녹아내리는 붉은 색 레어 스테이크'를 선호하는 나의 미각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목구멍을 간질거리는 것은 '바롤라 존케라'다. 칼도 포커도 필요없는 '바롤라 존케라'를 어디 가면 입술과 혀로 부드럽게 쓰다듬을 수 있는 것일까?"라는 말이 더 쉽게 다가온다. 그들의 살아온 삶의 방식, 그들의 문학적 감수성과 아주 딱 맞아떨어지는 기호니까 말이다.
  
  하긴 요즘 세상 취향대로 살면 그 뿐이다. 너는 너, 나는 나일 뿐이니까. 하지만 현기증은 쉽게 가시지가 않는다.
  
  김화영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뒤에 서서 박수를 쳐주고 그녀의 목에 꽃다발을 걸어주는 일군의 무리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렇듯 시끄러운 판에 그녀가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게끔 목에 큼지막한 꽃다발을 걸어 준 <조선일보> 동인문학상 평생 심사위원인 유종호·김주영·김화영·오정희·이문열·정과리·신경숙의 얼굴이 떠오른다. 무언지 모를 냄새가, 그들만의 커넥션이 그려진다. 모든 것이 이해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들이 권력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남은 한국 문단의 유일한 파워이다.
  
  모던하고, 댄디하고, 소프트하며, 어떤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지적이며, 고상하며, 어떤 코드와도 잘 들어맞고, 시대와 불화하는 척 포즈를 잡지만 사실은 시대와 가장 잘 야합하는, 그들만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지난 시절 독재와 싸우면서 거대한 힘을 가졌던, 아니 힘을 가졌다고 믿었던 작가회의는 마치 유효기간이 지난 식품처럼 껍데기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 주변에 모였던 작가들은 뿔뿔이 흩어졌거나 방 아무개 작가처럼 피곤한 표정으로 손을 씻고 돌아서기에 바빴다. 그래도 자기는 교수니까.
  
  그리하여 고난의 시대, 자신의 운명을 걸고 싸웠던, 그리하여 거리에서 감옥으로 헤매던 작가들은 이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거나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잔치는 끝났다. 오늘날 우리 문학을 상업주의의 덫에 빠뜨려서 구제불능으로 만들어버린 '문학동네', 이빨 빠진 사자 '창비'와 조용하게, 마침내 모든 권력을 차지한 너무나 지성적인 '문학과지성'과 하릴없이 죽어가는 '실천문학'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잔치는 끝났다. 대신 승리는, 문학의 승리가 아니라 현실적 몫으로서 승리는, 이제 모두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임승차 한 채 숨을 죽이고 있던 자들에게 돌아갔다. 반동적인, 너무나 반동적인 무리들에게.
  
  그리하여 지금 문학은 죽음처럼 조용하다. 어디 한 곳 살아있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간간히 들려오는 자조적인 빌라도들의 헛기침 소리 뿐. 이 적요함. 이 외로움.
  
  숨 막히게 조용하던 시절 일찍이 시인 김수영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래. 이제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그렇다. 말을 하자. 무슨 말이라도 지껄여보자. 비평의 날을 잃어버린 비평가들, 무력감에 젖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작가들, 시인들, 문학 교수들, 엉터리 문학 기자들…. 이 거대한 야합을 깨기 위해. 이 무거운, 더러운, 침묵을 깨기 위해.
  
  마치 우리가 그때 그 시절, 순정했던 시절, 처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러기 전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침을 뱉어주는 것이다!
  
  다른 누가 문학을 멸시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재빠르게 먼저, 울대 곳곳에 고여 있는 가래까지 모아, 힘껏 침을 뱉어주는 것이다. 온갖 모멸의 자세로 이 불순하고 음탕한 감성의 시대, 죽어버린 문학 위에, 피를 토하듯 침을 뱉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찍이 우리가 경배해 마지 않았던, 죽은 신에게 마지막 예의를 갖추어주는 것이다.  
    
  
 -  김영현/소설가·실천문학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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