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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김기택 - 바퀴벌레는 진화 중
2015년 12월 27일 02시 26분  조회:6251  추천:0  작성자: 죽림

바퀴벌레는 진화 중

                        김기택

믿을 수 없다, 저것들도 먼지와 수분으로 된 사람 같은 생물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멘트와 살충제 속에서만 살면서도 저렇게 비대해질 수 있단 말인가. 살덩이를 녹이는 살충제를 어떻게 가는 혈관으로 흘려보내며 딱딱하고 거친 시멘트를 똥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벌릴 수밖엔 없다, 쇳덩이의 근육에서나 보이는 저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 앞에서는.

 

 

사람들이 최초로 시멘트를 만들고 집을 짓고 살기 전, 많은 벌레들을 씨까지 일시에 죽이는 독약을 만들어 뿌리기 전, 저것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흙과 나무, 내와 강, 그 어디에 숨어서 흙이 시멘트가 되고 다시 집이 되기를, 물이 살충제가 되고 다시 먹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빙하기, 그 세월의 두꺼운 얼음 속 어디에 수만 년 썩지 않을 금속의 씨를 감추고가지고 있었을까.

 

 

로보트처럼, 정말로 철판을 온몸에 두른 벌레들이 나올지 몰라. 금속과 금속 사이를 뚫고 들어가 살면서 철판을 왕성하게 소화시키고 수억 톤의 중금속 폐기물을 배설하면서 불쑥불쑥 자라는 잘 진화된 신형 바퀴벌레가 나올지 몰라. 보이지 않는 빙하기, 그 두껍고 차가운 강철의 살결 속에 씨를 감추어둔 채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 숨을 쉴 수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뜬 채 잠들어 있는지 몰라.

 

 

 

 

 

바퀴는 3억 년 전에 이 지구상에 출현하여
지금은 4만 종이 넘을 정도로 다양하게 진화해 왔다.

그 중에서 해충으로 분류된 것은 20종 정도인데,
그들은 언제부턴가 인간의 거주지로 몰려와 서로 친구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바퀴에 대한 인간의 적대는 다른 어느 생물종보다혹독하다. 말 그대로 바퀴와의 전쟁(컴배트)이다. '컴배트'가 드디어 바퀴를 몰아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3억 년간 진화해 온 바퀴의 생명력과 적응력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그들의 몸은 핵폭발에서도 살아남는다고 한다. 강한 약을 쓰면 바퀴는 더 강한 내성으로 대응한다.인간은 도리어 바퀴가 더욱 강하고 단단하게 진화하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

지금 바퀴는 인간을 노려보며 콘크리트 속에서 강철 같은 무장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끔찍하다.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 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가 이렇게 암담하다면
인간은 바퀴에게서 레드 카드를 받고 퇴장 당할지도 모른다.



 

김기택(金基澤, 1957 ~ )

생애 1957년 11월 6일 ~
출생 경기도 안양
분야 문학 작가

시인. 경기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뭄’과 ‘꼽추’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일상과 사물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를 특유의 묘사와 비유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시집으로 “태아의 잠”(1991), “사무원”(1999), “껌”(2009) 등이 있다.

작품

바퀴벌레는 진화 중
이 시는 환경 오염 문제가 미래에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는 우려를 ‘바퀴벌레’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1연에서는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시멘트와 살충제’ 속에서 인간이 싫어하는 ‘바퀴벌레’가 비대하게 증식하는 현실을 통해 현대 문명으로 인한 환경 오염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2연에서는 비정상적인 ‘바퀴벌레’가 등장한 이유가 인간이 오랫동안 환경을 파괴해 왔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현대 문명의 발달로 환경이 오염되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환경 오염에 적응을 잘하는 바퀴벌레의 놀라운 생명력을 설명해 주고 있다. 3연에서는 현대 문명이 발달할수록 환경이 더 파괴될 것이라는 우려를 ‘신형 바퀴벌레’의 등장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전개 과정을 거쳐 결국 이 시는 현대 문명이 초래한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고발하고 있다. 즉, 현대 문명이 발달할수록 환경은 파괴된다는 점과 ‘바퀴벌레’는 오염된 환경에서 더욱 비대해지고 증식하는 생물이라는 점을 바탕으로, ‘바퀴벌레’는 미래에 ‘신형 바퀴벌레’로 진화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금과 같이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 개발이 계속된다면 인간 문명이 환경과 생태계를 지금보다 더 파괴할 것이라는 섬뜩한 경고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수록교과서 : (문학) 지학

멸치
이 시는 반찬으로 접시에 담긴 멸치의 작은 무늬에서 바다의 흐름과 하나가 되어 헤엄쳤던 멸치의 역동적 생명력을 발견하고 있다. 바다의 물결과 분리되지 않고 한 몸처럼 움직이던 멸치는 인간이 던진 그물에 잡혀 점차 생명력을 잃고 결국 반찬이 되어 접시에 담기게 된다. 그러나 화자는 이미 딱딱해져 접시에 담긴 멸치에 아직 ‘바다’가 있고 ‘물결’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화자는 생명력의 상실이라는 부정적 인식에 머무르지 않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으며 저항하는 역동적인 생명력이 아직 멸치에 있음을 인식하며 생명력 회복의 가능성을 노래하고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두산, 상문

사무원
이 시는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는 사무원의 모습을 불교 수행자의 고행에 빗대어 표현으로써 주체성을 상실하고 사물화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풍자하고 있다. 의자에 앉아 사람 다리와 의자의 다리가 구분되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는 것은 사무원의 삶의 모습이 사물과 다름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암시한다. 자기 삶에 대한 성찰적 태도가 결여된 채 현상 유지에 급급해하며 주어진 일만 수행하는 수동적인 사무원의 모습은 인간 본연의 가치 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시인은 이러한 사무원의 모습을 풍자하면서 현대인의 삶에 대한 강한 비판과 반성을 시에 담아내고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천재(정재찬)

다리 저는 사람
이 시는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찬 지하철 역사 안에 장애인 한 사람이 걸어가는 풍경을 묘사한다. 그 풍경 묘사에서 시인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시인의 묘사에서 한쪽은 움직이고 있고, 한쪽은 정지되어있다. 움직이는 쪽은 오히려 장애인이다. '춤추는 사람처럼',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는 표현들은 장애인의 움직임이 보여 주는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전해 준다. 그 아름다운 생동은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온몸이 다리가 되어 흔들어 주고 있었다.' 라는 표현에서 절정을 이룬다. 시인은 아주 차분하게 사람들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지만, 여기서 우리는 장애인을 새롭게 보게 되고, 우리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


이 시는 소의 크고 촉촉한 눈망울을 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했을 법한 생각을 담고 있다. 소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친구이자, 가족이었고, 농가에 없어서는 안될 일꾼이었다. 천성이 순한 초식동물이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난동을 부리는 일이 거의 없는 소는, 유순한 성격 때문에 또한 안타가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화자는 가만히 소의 눈을 들여다본다. 크고 맑은 눈망울은 분명 화자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것 같은데 동물인 소는 그럴 수가 없다. 2연에서는 말하고 싶은 마음을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있다'라는 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표현하였다. 3연에서 화자는 소의 눈을 '순하고 동그란 감옥'으로 비유하였으며 4연에서는 소의 소화계 특성인 '되새김질'을 소가 말하고 싶은 마음에 빗대어 소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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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론>

             괄호의 미학
 
뒤샹의 <샘>과
김기택 시집『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사, 2012)




   지배이데올로기는 대중에게 강조해 보여줄 미디오만을 '괄호'에 넣는다. 어떤 판단이든 '괄호'에 넣어진 것은 '괄호'에 안 넣은 것을 무시한다. 우상의 실체를 보려면 내부로부터 '괄호 벗기기'(unbracketing)를 해야 한다.

   알랭 바디우가 『비미학(非美學)』이라는 책을 낸 것은, 미학을 부정하고 제거하자는 말이 아니라, 본래 ‘괄호’ 안에 들어가 있는 미학의 ‘괄호’를 벗기고 재구성 하자는 것이다. 새로 ‘괄호’ 안에 넣고, 또 ‘괄호’를 벗겨 새로운 의미를 산출하자는 것이다. 


1. 

 

   1917년에 있었던 뉴욕 앵데팡당(inde'pendant)전 출품작으로 R.MUTT란 가명의 인물이 출품한 작품은 남성용 변기였다. 변기회사 이름인 Mott Works라는 단어를 살짝 바꾼 이름의 제출자 R.MUTT라는 자가 내놓은 작품 ‘변기’의 작품제목은 <샘>이었다. 당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뒤샹은 그해 앵데팡당전의 운영위원이었다. 뒤샹 이외의 운영위원들과 설치위원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황당했다. 참가비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작품을 내걸수 있는 특별전시회였지만, 결국 운영위들은 이 작품을 전시장 칸막이 뒤에 놓기로 했다.

   뒤샹은 전시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에게 반격했다. <샘>을 왜 전시하지 않았는지 주장하며 뒤샹은 미술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이 일은 ‘예술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전복시킨 사건이었다. 뒤샹은  그후 <샘>이 외에 자전거 바퀴나 옷걸이 등 원래 있는 사물을 전시했고, 이런 사물들에 대해 그는 '레디 메이드(ready made, 기성품)라는 이름을 붙였다.

   뒤샹이 미술전에 변기를 전시한 것은 새로운 예술을 “괄호에 넣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괄호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선언이다. 만약 뛰어난 예술이라면 ‘괄호’ 안에 넣고 벗겨도 다른 해석을 허락할 것이다. 

   벤야민은 복제시대에는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실은 그 반대로 복제시대에 그때까지의 예술작품에 아우라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앤디 워홀 같은 이의 복제품이 ‘괄호’에 넣어진 것이다.


2. 

   ...김기택 시인이 신간『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사, 2012)을 내셔서, 선배님의 밥을 얻어 먹었다. 내가 모셔야 하는데 얻어 먹었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코코브루니에 가서 차를 대접했다. 내가 방금 ‘대접’이라고 썼는데, 나에게 김기택 시인은 그런 존재다. 

   다른 장르에 한눈 팔지 않고 시집만 여섯 권 내는 일은 쉽지 않다. 여섯 권이라는 숫자는 그의 집중력과 성실성을 증명하는 숫자다. 노동자 시인 최종천 형님과 더불어 내가 이 시대의 시인으로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시인이다. 숙명여대에서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 중 시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졸업하기 전에 꼭 김기택 시인의 시창작론을 들으라고 권해 왔다. 그날 선배와 대화하다가 얻은 두 가지 말을 기록해두고 일해야겠다. 

   “김 선생님이 일본에서 있는 동안 시 쓰기 어려웠을 꺼예요. 아무래도 외국에 있으면 좋은 시를 읽고 시에 질투를 느끼는 기회가 적지 않을까요?"

   나는 ‘시의 질투를 느낀다’는 문장에서 멈칫 했다. 바꾸어 말하면 김기택 시인은 좋은 시에 질투를 느끼며 더 탁월한 시를 쓰려고 집중해 왔다는 고백일 것이다. 그가 미학적 질투를 느낀 결과, 그가 즐겨 쓰는 수법은 ‘괄호의 미학’이 아닌가 싶다. 나는 김기택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뒤샹의 <샘>이 생각나곤 했다. 김 시인의 시 중 비교적 짧은 시를 읽어보자.  

 

 



     트럭 앞에 속도 하나가 구겨져 있다.
     부딪쳐 멈춰버린 순간에도 바퀴를 다해 달리며
     온몸으로 트럭에 붙은 차체를 밀고 있다.
     찌그러진 속도를 주름으로 밀며 달리고 있다.
     찢어지고 뭉개진 철판을 밀며
     모래알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유리창을 밀며
     튕겨나가는 타이어를 밀며
     앞으로 앞으로만 달리고 있다.
     겹겹이 우그러진 철판을 더 우그러뜨리며 달리고 있다.
     아직 다 달리지 못한 속도
     쪼그라든 차체를 더 납작하게 압축시키며 달리고 있다.
     다 짓이겨졌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속도가
     거의 없어진 차의 형체를 마저 지우며 달리고 있다.
     철판 덩어리만 남았는데도
     차체가 오그라들며 쥐어짠 검붉은 즙이 뚝뚝
     바닥에 떨어져 흥건하게 흐르는데도
     속도는 아직 제가 멈췄는지도 모르고 달리고 있다.
 

          ㅡ김기택,「고속도로・4」전문(밑줄은 인용자)


   김기택 시인의 특장을 잘 드러내 주는 시다. 

   시의 첫행은 “트럭 앞에 속도 하나가 구겨져 있다”다. 이 시에 나오는 ‘속도’라는 단어를 ‘사람’ 혹은 ‘운전자’로 대체하면 어떨까. 그렇지만 시인은 끝까지 ‘속도’로 명기한다. 인간은 오직 속도와 다름없다. 시인이 주목하는 ‘괄호’ 안에는 오직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속도’만이 존재한다. 

   김기택 시인은 한 장면을 ‘괄호’에 넣는다. 그리고 ‘괄호’ 안에 돋보기를 들이민다. ‘괄호’ 안을 치밀하고 끈질기게 투시하고 묵상하고 미시(微示)적으로 해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괄호’를 벗겨내고, ‘괄호’ 안에 들어가지 못한 ‘무관심’의 입장에서도 ‘괄호’ 안을 판단한다. 그는 늘 ‘괄호’ 안의 비극적인 사건을 무관심의 거리에서 바라보아, 전혀 낯설게 만들어 버린다. 급한 낭만주의자라면 ‘괄호’ 안에서만 평가하려 할 것이다. 저 자동차에 탄 인간의 죽음을 비극적으로 묘사할 것이다. 김기택 시인은 ‘괄호’ 밖에서 ‘괄호’ 안을 무관심하게 전복시킨다. 시인의 ‘괄호’ 안에는 이미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발한다. 인간의 대체물이 된 ‘속도’는 처절하게 붕괴되어도, “아직 제가 멈췄는지도 모르고 달리고 있다.”


3. 
   “선배님 시 중에 지하철에 관한 시가 있어요. 그쵸?”

   “맞아요. 나는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시를 쓰곤 해요. 골방에서 쓰면 시가 잘 안 돼요.”

   여기서도 멈칫 했다. 작가들 대부분은 골방에서 글을 써야 한다고 한다. 송경동은 거리나 광장에서 시를 쓴다. 나는 거리/연구실, 학교 교실/대중강의, 고급문체/홈리스 문체의 ‘사이’에서 글을 쓰려 했다. 

   김기택 선배는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시를 쓰고, 컴퓨터로 교정 보기보다는 프린트 해서, 원고 교정 보듯이 본다고 한다.

   김기택 시인은 철저하게 대상에 거리를 두며 시를 쓰는 성실한 문사다. 그의 창작 미학 중의 한 방법은 괄호에 넣고 빼기다. 위에 인용한 시에서 ‘속도’를 비판했듯이, 그는 느린 삶을 살고 있나보다. 

   지배이데올로기는 대중에게 강조해 보여줄 미디오만을 ‘괄호’에 넣는다. 어떤 판단이든 ‘괄호’에 넣어진 것은 ‘괄호’에 안 넣은 것을 무시한다. 그렇지만 뒤샹과 김기택 시인은 ‘괄호’ 안을 의심하고, ‘괄호’에 들어가지 않아 주목되지 않는 ‘비인간화’를 오히려 괄호에 넣는다. 그래서 우상의 실체를 보려고 내부로부터 고정관념을 ‘괄호 벗기기’(unbracketing) 한다.

   김 선배 시집을 연구실에 들어와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첫페이지에 써있는 <시인의 말>을 읽어 본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부럽다. 저 ‘괄호의 미학’에 질투해야겠다.  


     "죄송하지만 또 시집을 낸다. 시 쓰는 일 말고는
     달리 취미도 재주도 할 일도 없는 내 뛰어난
     무능력과 활발한 지루함과 앞뒤 못 가리는 
     성실함 탓이다."

          ㅡ2012년 10월 김기택



시 창작이란 무엇인가

김기택 (시인)


시는 일상적인 언어의 말하기와는 달리 ‘창작’이라고 말한다. 창작이란 이전에는 없던 것을 새로 만든다는 의미이다. 왜 일상적인 언어는 창작이라고 하지 않으면서 시는 창작이라고 하는가. 시를 쓰면 이전에 없던 무엇이 새로 있게 되는 것인가? 즉 무의 상태에서 유의 상태로 바뀌는 그것은 무엇일까? 시가 일상적인 어법, 산문적인 문장과 다르기는 하지만, 다르다고 해서 거기에 창작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가? 행갈이나 연 구분, 리듬이나 비유, 상징, 반어, 역설 등을 사용하면 이전에 없던 새로운 언어나 문장이 생기는 것인가?

요즘 텔레비전에서 음식에 대한 프로그램을 많이 방영한다. 거기 보면 어느 유명한 식당의 요리라든가 또는 어느 지방의 특별한 재료를 사용했다는 음식들이 소개되기도 하고, 어느 음식이 맛이 있는지 경쟁하기도 한다. 공중파라는 매체의 특성상 시청자는 시각과 청각으로만 그 음식을 대하면서 상상할 수 잇을 뿐, 그것을 먹어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청자들에게 일일이 맛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하니 음식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나서 출연자가 대표로 맛을 본다. 맛을 봤으면 시청자들에게 그 맛이 어떤지 말로 설명을 한다. 그 설명이란 것이 고작 ‘담백하다’, ‘깔끔하다’, ‘쫄깃쫄깃하다’, ‘고소하다’ 이런 정도인데, 아무리 잘 설명한다 해도 출연자가 직접 먹어본 맛의 경험 그대로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즉 맛에 대한 감각 체험을 시청자가 비슷하게라도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이 턱없이 빈약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출연자가 하는 말은 ’직접 먹어봐야 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 시청자는 출연자의 그 빈약한 말보다는 영상을 통해 상상하는 것이 맛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는데 훨씬 유리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의 맛을 체험적으로 표현해 줄 단어나 문장이 이렇게 부족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수천 년간 말을 써왔고, 단어나 표현법이 계속 생겨서 말이 계속 발전을 해왔는데도 말이다. 맛 뿐만 아니라, 소리는 어떤가? 처음 듣는 새 소리,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노래나 연주, 말로 그 느낌이나 감동을 실제 체험하는 것처럼 설명할 수 있을까? 냄새, 향기는 어떻고, 몰래 좋아하던 애인의 손을 처음 만졌을 때의 촉감은 또 어떤가? 또 감정이나 정서는 어떤가? 내가 이성에게 반해서 온몸이 그 사람에게 강력하게 끌리는 것을 느낄 때, 그 생생한 느낌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체험한 그대로 말로 전달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말이 그 체험의 실감과 질감을 그대로 나타내줄 수 있을까? 가족이나 친한 친구가 죽었는데, 그 느낌을 ’슬픔‘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실제의 느낌과 얼마나 가까울까? 어렸을 때의 기억,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저절로 떠오르는, 다시 체험하고 싶은 추억들은 또 어떤가? 이것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보여줄 수는 없지만, 분명히 우리 몸 안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을 체험하듯 생생하게 표현해 줄 마땅한 단어나 문장은 의외로 찾기 힘들다.

우리 몸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그 실체가 느껴지는 생명체가 분명히 있다. 그것은 하루 종일, 일생 내내 나와 함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명체를 체험한 그대로 표현해 줄 단어나 문장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내면에서 꺼내어 언어에 옮기고자 하는 순간, 그 살아있는 생생한 체험은 개념으로 변하고 만다. 짜다, 달다, 아름답다, 곱다, 사랑, 슬픔, 괴로움 따위의 말이 그것이다. 개념은 의미를 압축시켜 놓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가 체험한 것에서 몸의 살아있는 느낌은 모두 빼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의미만 남겨놓은 것이다. 그것은 몸의 생생한 체험을 머리가 처리할 수 있는 의미로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슬프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그 사람이 체험한 그대로 느끼는 대신에 머리로 이해하고 만다. 그때 그 의미는 머리로 처리하는 정보라는 점에서 교통 상황이나 뉴스 같은 정보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현대는 정보의 시대이고 개념화는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처리하여 세상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게 됩니다. 정보는 곧 권력이며, 인간은 이미 오래 전에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동물이 되어 세계를 지배해왔고 지금도 그 지배력은 날로 강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감이나 감정, 정서 등으로 체험한 살아있는 느낌, 보이지는 않지만, 이름도 없지만, 분명히 실체가 느껴지는 그 생명체(이것을 편의상 ‘이름 없는 생명체’라고 부르자)는 언어에 담는 순간 죽어버리게 된다. 체험이 개념으로 바뀌는 순간 의미라는 뼈다귀는 남고 체온과 떨림과 호흡이 있는 피와 살은 거의 다 제거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관습은 대부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의사소통을 하거나 정보를 전달할 때 대개 머리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개념화한다. 그래서 머리로는 많은 것을 알게 되지만, 살아있는 느낌은 모두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우리가 체험한 것들은 어떻게 되는가? 언어에서 주로 개념만 남고 살아있는 생명체는 거의 제거되고 나면, 그 사라진 것들은 어디로 갈까? 아마도 그 대부분은 언어를 통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몸에 기억으로 무의식으로 축적될 것이다. 저장되었다가 어느 순간 잠깐씩 단편적으로 환기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슬픔, 분노, 괴로움 등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는 숙변처럼 몸에 쌓여 무의식의 정신 작용으로 몸에 잠재하면서 왜곡된 형태로 행동이나 말이나 꿈에 나타나고 종종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심한 경우, 눈에 드러나는 정신 장애를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으나 보이지 않는 이 생명체를 몸 밖으로 꺼내고 싶다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카타르시스 작용과 같이 그것들을 연민이나 공포를 통해 배설시키기고 싶을 것이다. 몸에서 꺼내는 방법으로 가장 유력한 것은 그것을 말에 실어 내보내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오감이나 감정, 정서와 같이 그 살아있는 체험은 개념화된 언어에 잘 담겨지지 않는다. 언어에 담는 순간, 살과 피와 체온인 체험, 감정, 정서 따위는 새어버리고 뼈다귀인 개념만 언어의 그물에 걸리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면 언어에 담겨지지 않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어떻게 산 채로 언어에 담을 수 있을까? 그것은 가능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언어 대신 사물이나 사건, 장면 등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치환의 「깃발」의 첫 행,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자. 
여기서 “이것”은 깃발을 지시하는 대명사다. 즉 “깃발”이 “아우성”이라는 말이다. 왜 깃발이 아우성일까? 깃발은 긴 막대기 위에 매단 사각형의 천 조각인데 왜 이 시각적인 사물이 청각적 이미지인 아우성이 되었을까?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깃대에 매달린 깃발을 상상해 보자. 깃발은 사각형의 천조각이다. 그 천조각은 얇고 가벼워서 바람이 세차게 불면 쉽게 날아갈 수 있다. 그러나 깃발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천조각의 두 모서리는 깃대에 단단하게 메어있다. 바람의 힘에 의해 날아가려는 힘과 말아가지 못하게 꽉 붙들고 있는 힘 사이에서 그 연약한 깃발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물론 펄럭이는 것이지만, 그 펄럭임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떨기도 하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뒤틀리기도 하고 천조각의 물질성 때문에 물결무늬가 생기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몸짓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람의 난폭한 힘과 깃대의 고집불통의 힘 사이에서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천조각의 모습은 마치 무엇인가를 애타게 호소하기도 하고 견딜 수 없이 괴로워 떨기도 하고 대단히 절박하게 용을 쓰고 있는 “아우성”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우성은 소리가 없다. 마치 벙어리의 몸부림처럼 그 아우성은 소리 대신 온몸으로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속에서는 울음 같은 격렬한 외침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 소리는 나오지 않는 이 답답한 상황이 깃발의 격렬한 뒤틀림을 더욱 절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치환이 일제 강점기의 시인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깃발의 몸짓이 무엇인가는 비교적 쉽게 환기된다. 현실의 제약을 뚫고 광대한 세계와 우주를 향해 새처럼 훨훨 날아가고 싶은 욕망과 그 욕망을 억누르는 현실의 여러 가지 고집 붙통의 여건들 사이에서 유치환의 내면에 있는 깃발처럼 부드럽고 연약한 ‘이름 없는 생명체’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미친 듯이 허공을 향해 격렬하게 떨고 뒤틀며 움직이는 깃발의 몸짓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시의 후반부에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시인은 그런 내면의 모습을 ‘깃발’이라는 사물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깃발이 환기하는 ‘체험’과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 의미하는 바를 비교해 보라. 시인이 그것을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라고만 표현한다면 그것은 시인의 몸속에 있는 어떤 살아있는 생명체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개념적인 언어가 된다. 슬픔, 애달픔, 마음 따위와 같은 개념만 남고 시인의 몸속에 있는 생명체는 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언어의 ‘개념’ 대신에 깃발이라는 ‘사물’을 제시한 것이다. 깃발의 격렬한 떨림과 뒤틀림, 날아갈듯 날개처럼 넓고 가볍지만 하늘을 앞에 두고 날아가지 못하게 두 모서리가 단단하게 묶여있는 모습, 그 사이에서 허공을 향해 온몸으로 외치는 연약한 천조각의 몸짓, 그러나 아우성을 들리지 않고 벙어리처럼 온몸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모습, 바로 그것이 시인의 몸속에 있는 살아있는 감정이나 정서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이 깃발이 독자에게 주어지는 순간, 독자는 깃발의 움직임 속에서 시인이 갖고 있었음직한 마음을 즉각적으로 환기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개념적인 언어에 담아서는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언어의 개념 대신에 사물을 빌린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깃발의 저 움직임과 유사한 마음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깃발이라는 사물을 통해서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깃발’은 바로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에 해당하는 ‘객관적상관물’이다.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은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상관물(客觀的相關物)을 찾는 것이다. 즉, 개인의 정서의 외형이 되는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들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의 감각경험과 관련 있는 외부 경험이 주어졌을 때, 정서가 즉각적으로 환기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감정이나 정서는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고 언어에 잘 담기지 않으니까, 그것과 외부적으로 유사한 상관물(사물, 사건, 장면)을 찾아서 독자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독자는 자신의 감각 경험과 유사한 사물을 통해서 감정이나 정서를 일시에 환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상 언어 관습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버리고 그 개념 대신 사물이나 사건, 장면을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상관물이란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와 등가를 이루는 사물을 제시하고 그 사물을 통해 감정이나 정서가 환기되도록 고안된 일종의 폭발장치 같은 것이다.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에 뇌관을 만들어 놓고 그 뇌관을 건드려 그것들과 등가를 이루는 감정이나 정서를 환기하는 순간 그 폭발물이 폭발하도록 하는 장치인 것이다.

객관적상관물을 통해 표현된 시적 언어는 두 가지 면에서 일상 언어와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첫째는 몸속의 감정이나 정서 따위의 이름 없는 생명체를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머리로 알게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객관적상관물은 개념의 뼈다귀만 남은 언어에 살과 피와 체온이 있는 살아있는 몸을 부여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즉 형체 업  소리 없고 만질 수 없는 감정이나 정서를 마치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처럼 변형시키는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아는 것으로 끝나지만, 체험은 몸이 떨리거나 호흡이 가빠지거나 오싹해지거나 후련해지거나 흥분되는 것과 같이 구체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둘째로 객관적상관물은 시인 자신의 체험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자신의 경험,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통해 체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시는 단지 독자가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 감정이나 정서를 환기하도록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만 제시하는 것이고, 독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경험 속에서, 자기 몸의 감정이나 정서를 깨워 그것으로 체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체험이기 때문에 그 체험은 시인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 된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깨워 만들어낸 체험이기 때문에 그만큼 강렬한 것이 된다. 시인의 창작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독자의 몸속에서 독자의 경험과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재연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제2의 창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상관물은 시라는 장르가 난해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상 언어의 관습으로는 생명체를 언어에 담아 전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시적 언어는 일상 언어의 관습을 고의적으로 비틀어 사용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유치환의 시 구절은, 시인의 내면의 이름 없는 생명체를 깃발로, 깃발이라는 시각적인 사물을 청각적인 아우성으로, 그 아우성이은 소리가 없다는 모순 어법으로, 세 번이나 뒤튼 문장을 사용했다. 살아있는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언어를 이렇게 뒤튼 것이다. 그래서 박이문은 시를 “언어를 통해서 언어에서 해방되려는, 언어를 씀으로써 언어를 쓰지 않는 언어가 되려는 불가능하고 모순된 노력”이라고 했으며,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꾀하지 않는 언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가장 원시적인 감각을 언어로써 표현하고자 하지 않는 언어”는 시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시는, 일상 언어 문법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전달하려는 특별한 언어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상 언어 관습은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죽이기 때문에, 그것을 산 채로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특별한 언어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창작이라고 할 때, 시가 만드는 것은 일상 언어 관습에는 없는 새로운 언어 형식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언어 관습에는 없는 새로운 언어관습이기 때문에 많이 경험해온 소재나 이야기라도 세상에 나와서 처음 보고 경험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따라서 시를 창작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없는 언어 관습, 처음 보는 언어 형식을 만들어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존의 형식을 답습한다면 거기에 ‘창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주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라는 새로운 언어 관습은 앞에서 언급한 난해해질 수밖에 없는 특성 외에 몇 가지 슬픈 운명을 더 타고 났다. 그 하나는 일상 언어와는 달리 오나성된 형태의 문장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여백과 공간을 만들어 불완전하게 끝낸다는 것이다. 즉 완성품이 아니라 반제품으로 독자에게 내놓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시인이 제시한 사물이나 사건, 장면 들을 통해 자신의 감각이나 감정, 정서, 경험 등을 깨워 환기하여, 시가 설치해 놓은 ‘체험’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시는 독자가 참여하여 어떤 환기 작용을 통해서 체험을 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훈련된 독자가 아니면, 이 환기 장치는 무용지물이 된다. 일상 언어관습에만 익숙해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은 외국어 같은 모국어이다. 따라서 시는 그것을 좋아하고 어느 정도 시적 언어에 훈련된 사람들끼리 소통하는 폐쇄적인 말하기이다.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시를 읽지 않는다고 해서 생계에 지장을 받거나 생활에 그다지 불편을 얻는 일이 없으므로 안 읽으면 그만이다. 따라서 시라는 말하기의 관습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대다수가 쓰지 않는, 마치 사멸되어 가는 소수 민족의 언어처럼 슬픈 소통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시가 가지고 있는 슬픈 운명은 창작이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일상 언어처럼 사회적으로 약속된 기호를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쓰면 그것은 더 이상 창작이 아닌, 모방이나 복제가 된다. 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어 사용하는 말하기이다. 그리고 한 번 사용된 말은 다시 만들어서 쓸 수 없다. 많은 시가 창작되어 읽히면 더 소통이 풍요로워야 하는데, 시인은 고의적으로 이미 만들어진 말을 피하여 새로운 말을 만들어 써야 한다. 유치환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은 단 한 번만 창작될 수 있으며, 같은 문장은 물론 비슷한 문장도 피하여 새로운 말을 만들어 써야 한다. 의사소통이 주용 목적인 말의 특성상 이러한 소통 방법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말을 쓴다면 대단히 생산적이고 효율적일 것이다. 시는 아무리 불편하더라도(실제로 시 읽기의 괴로운 경험을 상기해 보라)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쓰지 않은 새로운 말을 만들어 쓰는 대단히 이상하고 특별한 말하기라고 할 수 있다. 

난해성과 소수만이 소통하는 폐쇄성과 기존에 있는 말을 버리고 끊임없이 새로 말을 만들어 쓰는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3천년 이상 시를 쓰고 즐겨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詩學’(the Poetics)은 기원전 330년 전에 씌어졌다. 시학에는 이미 호머(Homer, Homeros)의 서사시 '일리아드(Ilias)'와 '오디세이(Odysseia)'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 작품들은 기원전 800년 전에 씌어진 것입니다. 중국의 공자가 엮은 ‘詩經’에는 305편의 작품이 있는데, 가장 늦은 것이 기원전 600년의 작품이고, 가장 이른 것이 기원전 1115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시가 3000년 이상 생명력을 유지해온 것은 그만큼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특별한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 읽는 것이 즐겁지 않다면, 그 즐거움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시는 사라져도 벌써 옛날에 사라졌을 것이다. 

언어에 담겨지지 않은 이름 없는 생명체를 산 채로 언어의 그물로 잡을 때, 우리는 그 생명체를 밖으로 꺼내낼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이 큰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과 정서는 씻겨나가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무언가가 충족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삽날이 목에 찍히자
뱀은 
떨어진 머리통을 
금방 버린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뱀은 
쏜살같이
어딘가로 떠난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
잊으러 가야 한다
- 이윤학, 「이미지」 전문

농촌에서 삽을 들고 밭일을 하다가 뱀이 나타나면 일어날 법한 장면이다. 이 시는 삽날에 목이 잘린 뱀이 도망하는 사건을 객관적상관물로 제시하였다. 이 시는 독자에게 목이 잘린 뱀이 되어 그 상황을 체험하게 한다. 1연은 그런 상황의 제시이다. 이 시의 백미는 2연이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는 것은 뱀이 머리가 없어 세상이 캄캄한데, 몸속의 살아있는 본능은 강렬하게 움직이는 상황의 묘사이다. 세차게 물이 나오는 호스로 물을 뿌리거나 세차를 하다가 놓친 상황을 상상해 보자. 호스에서 분출하는 물의 압력은 큰데, 물이 나아갈 방향을 굳게 잡아줄 손이 없으면 호스는 요동친다. 몸에서 삶의 본능은 세차게 밀고 올라오는데 세상은 캄캄하고 가야할 방향이 없는 뱀의 모습이 ‘목이 잘린 뱀’과 ‘호스’라는 확장은유를 통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묘사는 머리가 없는 몸이 살아서 어딘가로 간다는,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고통을 체험적으로 상상하게 한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그 고통이 근원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절망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는 삶의 어느 국면에서 몸과 마음으로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의 한계를 넘어서는 큰 고통을 경험했을 때의 화자의 심리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자신이 마음으로 크게 의지하는 부모나 배우자나 자식의 죽음이나 이별을 경험했다거나 어떻게 수습할 수 없는 큰 사고가 났다거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병의 진단을 받았거나 등등 자신의 의지를 결정적으로 꺾는 좌절을 겪었을 때의 심리상태를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이 겪는 고통을 일상 언어로 표현한다면 아무리 잘 표현한다 해도 이름 없는 생명체의 모습과는 크게 다른 것이 될 것이다. 시는 이런 부정적인 경험을 꺼내는 과정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 즐거움은 이미지를 통해 부정적인 정서의 찌꺼기들이 씻겨나가는 경험이다. 

끝으로 객관적상관물이 보여 주는 다른 효과는 그것이 시작과정에서 분출하는 감정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데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읽어 본 이윤학의 시는 감정을 격정적으로 드러내기가 쉬운 시이다. 그러나 목이 잘린 뱀의 비유는 그런 감정의 분출을 적절하게 차단하고 있다. 시에서 극적인 체험을 하려면 감정이 한껏 분출되어야 하는데 왜 그것을 억제해야 할까? 감정은 시 쓰기에 있어서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시작 과정에서는 감정이 마음껏 분출되어야 시작 과정의 체험도 강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는 타서 없어지는 것이다. 즉 감정은 시작 과정에서는 극적인 체험을 하도록 마음껏 분출되지만 정작 시에서는 모두 연소되어 없어지게 되는데, 객관적상관물이 바로 그런 역할을 돕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화자가 겪었음직한 극도의 절망감은 목 잘린 뱀의 체험으로만 제시되어 있다. 그 외의 어떠한 감정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좋은 객관적상관물은 폭탄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독자가 감춰진 감정이나 정서를 사물이나 사건을 통해 환기했을 때 폭발할 수 있도록 하는 뇌관을 장치하는 것이다. 그때 시의 겉모양은 모양은 차갑고 단단하고 표면이 매끄럽고 광채가 나는 유선형의 쇳덩어리뿐이다. 어디에도 물기가 없다. 그러나 그 속에는 강력한 폭발물이 감추어져 있으며, 그것은 오로지 뇌관을 건드린 자만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시에 감정이 노출된다는 것은 정작 폭발해야 할 폭발물이 겉으로 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경우에 결국 속이 텅 비게 되므로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 감정을 효과적으로 억제한 시에서는 독자가 시인의 목소리를 느낄 수 없다. 오직 폭발작용만 일어난다. 그 폭발은 독자의 몸과 마음속에 있는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시인은 오로지 뇌관만 제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난 시는 시인이 독자의 시 읽기에 계속 참견을 한다. ‘나는 이렇게 슬프니까, 너도 같이 슬퍼해 줘.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왜 너는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거야. 당연히 내가 우는 목소리만큼 너도 고통스러워야지.“ 라고 독자에게 감정을 구걸하거나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시인은 독자의 몸속에 있는 감정이나 경험이나 정서를 깨워 그것으로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시인 자신의 감정, 정서, 체험을 독자가 수용하고 거기서 체험을 하도록 강요하게 된다. 이 경우 자발적이고 강력한 폭발작용은 없고, 억지 체험이나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해 정도에서 그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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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창작에 대하여


1. 시 쓰기에 가장 큰 장애물은 언어이다. 언어는 시의 재료이면서도 시 쓰기를 방해한다. 언어와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의 다양한 정서 사이에는 아득한 거리가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담기에는 언어는 너무 상투적이고 단단한 외피로 둘러싸여 있다. 더구나 시인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시의 원료는 기억과 경험과 오감과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는 혼돈 상태인데, 이것을 슬픔이나 사랑 따위의 두루뭉실한 언어로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슬픔’이라는 단어는 시인의 마음 속에 있는 정서를 얼마나 표현해줄 수 있을까. 그것이 읽는 이에게 전달되었을 때에는,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모두 죽고, 공허한 언어의 외피만 남게 된다. 읽는 이의 몸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몸으로 전달되지 않으면 감동은 없다. 시를 읽는 즐거움은 없다. 머리로 감동하는가? 정보만 얻으면 감동하는가? 감동이라는 말은 느낄 감, 움직일 동, 즉 몸에 무엇인가가 들어와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떨림, 미열, 숨가쁨, 기분 좋음, 기운이 생김, 눈물이 나옴, 소리가 들림, 냄새가 남 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몸이 변화하는 것이다. 2002 월드컵 경기를 떠올려 보자. 16강전에서 이탈리아에 내내 끌려 다니며 지고 있다가 동점골, 역전골이 터졌을 때 몸은 이겼다는 정보를 얻는 것으로 그쳤는가? 사전을 통해 입수한 정보와는 무언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골이 터질 때 몸은 구체적으로 반응했다. 떨림, 눈물, 소리가 터져 나옴 같은 구체적인 몸의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슬픔, 사랑, 기쁨 따위의 말을 하면 몸이 움직이는가? 그런 말들이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말들을 반에 반만이라도, 옮겨줄 수 있을까? 개인이 갖고 있는 정서는 대단히 개인적인 것이며, 복잡다단하고 미묘하다. 그것을 어떤 단어로 옮긴다는 것은 정서의 팔과 다리, 이목구비 따위를 모두 제거하는 것처럼 폭력적인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말들은 개인적인 정서가 갖는 몸통의 일부 조차도 산 채로 전달할 수 없다. 몸과 마음 속에 있는,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는 분명히, 눈과 코, 입, 귀, 팔다리가 달린,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언어는 뼈다귀와 같은 개념 덩어리이기 때문에, 산 것을 그대로 담아서 전달할 수가 없다. 일단 개인의 고유하고 다층적이며 미세하고 미묘하고 예민한 뿌리들이 가득 달린 무수히 많은 정서의 세목들을 언어에 담자면 우선 그 정서들을 죽여서 몸통에 달라붙은 이목구비며, 팔다리며, 머리카락 따위 자잘한 것들을 모두 발라내야 한다. 그런 후라야 앙상한 의미나 감정 따위가 겨우 전달될지 모르겠다.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비하면 언어는 개념의 뼈다귀로 이루어진 너무 폭력적인 도구이다. 실제로 언어의 생명은 딱딱한 개념의 외피 속, 보이지 않는 곳에 깊이 감춰져 있다.

2. 왜 시 쓰기를 창작이라고 하는가? 창작이란 창조와 같이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다. 시는 없는 언어를 만들어 내는가? 시어란 이전에는 세상에 없었는데 시인에 의해 새로 생겨난 언어인가? 시인은 시어를 창조하는가?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도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일상어임이 분명하다. 간혹 조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어가 시의 창조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조어는 시가 아니더라도 여러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생겨난다. 그렇다면 왜 시 쓰기가 창작인가? 시는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복잡하고 미묘한 개인적인 정서,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정서를 죽이는 언어를 숙명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 언어들은 정서를 시로 표현하고자 할 때 끊임없이 시 쓰기를 방해하며 시의 도구로서 사용된다.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숙명적으로 시 쓰기를 방해하는 폭력적인 언어,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를 죽이고자 하는 언어를 통해서 정서를 죽이지 않고, 가능하면 덜 다치게 하고, 산 채로 전달하는 것이다. 언어 안에 시인의 정서가 산 채로 담겨 있어야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되지 않고 읽는 이의 몸에 들어가 몸을 움직이게 하는 변화로서의 감동을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시가 주는 감동이 스포츠에서 얻는 감동이나 즐거움, 쾌감 따위처럼 직접적이고 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스포츠나 오락 등에서 얻는 감동은 시에 비해서 보다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표피적이다. 시의 감동은 약해보이고, 때로는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늦게 나타날 수도 있다. 대신 그것은 보다 심층적이고 지속적이다.

3. 어떻게 고유하고 복잡 미묘한 개인의 정서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언어에 담는가? 그것은 실체가 분명해 보이지 않는 감정, 정서, 고통, 생각 등 온갖 추상적인 것들을 사물로 표현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즉, 개념덩어리인 언어를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냄새 맡을 수 있는 것, 맛볼 수 있는 것, 손으로 만져서 촉감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실체가 없는 말에 육체를 입히는 것이다. 육화하는 것이다. 허공과 같은 말, 개념의 뼈다귀만 있는 말에게 살과 피를 입히는 것이다. 정서가 말의 살과 피와 체온에 스며들어 함께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이미지, 객관적상관물, 직유, 은유, 병치, 아이러니 따위와 같이 시에서 사용하는 여러 기교는 바로 사물을 통해 개인의 복합적인 정서를 드러내는 도구들이다. 예를 들면 <객관적상관물>을 보자. 엘리어트는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상관물(客觀的相關物)을 발견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 특유한 정서의 일정한 외형이 될 일조(一組)의 사물이나 장면이나 일련의 사건들을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감가경험으로 낙착되는 외부적 사실들이 주어졌을 때에, 정서가 즉각적으로 환기되도록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즉, 객관적상관물은 사물을 통해 정서를 환기시키는 장치이다. 사물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객관적상관물은 이 사물에다가 시인의 정서를 심어놓는 것이다. 이때 객관적상관물로 표현된 사물은 시인의 정서와 등가물(等價物)이 된다. 사람의 몸에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 겪은 여러 경험과 수억 년 몸의 유전자에 새겨진 진화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다. 이 기억들은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있다. 객관적상관물은 개인적인 기억과 정서를 사물에 심어 읽는 이로 하여금 사물을 통해 그것들을 환기하도록 한 것이다. 그것은 사물을 통해 감지한 것이므로 환기되는 순간 육체성을 갖게 된다. 즉 개인의 고유한 몸의 기억은 환기 작용을 통해 보편적인 정서, 살아있는 정서로 재생되는 것이다. 이미지(심상)도 언어를 육화시키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이다. 이미지스트들은 이미지를 <지적 정서적 복합체>라고 하였다. 이미지로 표현된 것은 사물의 육체를 갖고 있지만, 그 육체에는 시인이 투사시킨 지식과 정서가 복합적으로 들어있다. 개념적, 추상적인 말로는 획득하기 어려운 육체성을 통해 시인의 정서는 읽는 이에게 선명하게 제시된다. 

4. 시는 사물과의 대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물은 생김새, 물성, 운동, 크기, 무게, 냄새 등과 그것이 있는 위치와 장소, 그것들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여러 가지 특성과 인상을 가지고 있다. 개개 사물이 가지고 있는 육체성은 우리 몸이 갖고 있는 정서와 감정과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거나 사물을 의인화시켜 그것들로 하여금 사람의 말을 대신하게 하거나 그것들과 이야기하기를 즐겨 하였으며, 많은 문학 작품이 직접적으로 이런 내용을 다루거나 이런 방법을 사용해 왔다.

5. 시인들은 이와 같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정서, 감정, 의미 등을 전달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교를 사용해 왔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시인의 본능이 찾아낸 방법이지 시를 창작하는데 고정된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정된 방법은 오히려 시 정신을 죽인다. 좋은 시는 과거의 시인들이 기울인 노력에 더하여 살아있는 언어를 만들어 내려는 노력에 의하여 얻어질 것이다. 좋은 시는 과거에 사용했던 방법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계속 바뀌게 될 것이다. 스포츠나 만화, 영화, 모험 등 모든 육체적인 감동과 변화를 주는 것은 시 창작 방법에 응용될 수 있다. 문제는 살아있는 생생한 언어, 시인의 의식과 정서를 극적,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이지, 정해진 시작 방법에 교과서적으로 대입하는 것은 아니다. 만 명의 시인이 있다면, 만 가지의 시작 방법이 있는 것이다. 각자의 얼굴 생김새, 마음 생김새가 다르듯이 시작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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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김기택

 

 

 

 

 

  크고 작은, 굵고 가는, 뒤얽히고 헝클어진, 단순하거나 배배꼬인, 쩍

벌어져 다물 수 없는, 가당찮은, 기가 막힌, 눈물에 녹아 나오는, 한숨

에서 진액이 추출되는, 웃음이 뱃살을 잡아당기는,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 같지 않은, 한쪽에서는 계속 사라지고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이야기들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표정을 하고 흔해빠진 옷을 걸치고 전동차에 앉아

있다. 하품을 하고 코 후비고 눈을 끔벅거리고 있다. 두리번거리거나 하릴

없이 전동차 광고판이나 쳐다보고 있다. 너무 많은 자잘한 삶 속에 아무

것도 아닌 척 들어가 있다. 오랫동안

  컴컴한 곳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창자를

다 훑어낼 듯 독하지만 아직은 몇 개의 귀에만 겨우 들어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구덩이에 수백 번 소리쳐도 더 나올 말들이 남아 있는, 기억은

지금 막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크고 생생해도 말은 늘 어눌하고 답답한,

말이 나올 때마다 살점이 우두둑 뽑혀 나오는, 위장병이 되고 탈모가 되고

틀니가 되고 우울증이 되고 치매가 되는

  이야기들이

 

 

  아무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그 말이 그 말 같은, 여러 번 들어 짜증나고

귀찮은, 한 말 또 하고 또 하는, 잔뜩 튀겨지고 부풀려진, 술 취해 말의 앞뒤나

문장의 구조가 꼬부라지거나 뒤죽박죽된, 시비 붙어 욱 하고 나오는, 욕지

거리에 뚝뚝 끊어지며 나오는, 중얼거림 속에 숨어 있다가 가끔씩 소심하게 나오는

  이야기들이

 

 

  줄 달린 전화로 걸지 말고 핸드폰으로 걸란 말이야, 핸드폰. 똥 싸면서도

걸 수 있잖아 핸드폰은. 보험 든 게 벌써 세 개나 있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는 거야 영업이라는 거는. 어머머 얘 좀 봐! 호기심 좀

있으면 안 되냐고? 뭐? 알고 싶은 거 좀 있으면 안 되냐고? 야! 그 까짓것

알고 싶다고 꼭 남자랑 자고 들어와야 되겠어? 그게 어떤 건지 알 권리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이거 왜 이래. 나 운전면허 한 번에 딴 여자야. 시끌벅적

야단법석 노발대발 횡설수설 웅성웅성 쑥덕쑥덕 수근수근 속닥속닥

  이야기들이

 

 

  입을 꾹 다문 채 전동차 안에 서거나 앉아 있다. 백발에 UCLA 모자를 쓰고

앉아 있다. 고개를 힘차게 흔들며 졸고 있다. 심각하게 문자를 치고 있다.

지루한 얼굴로 신문을 보고 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머리를 흔들고 있다.

핸드폰과 다정하게 조잘대고 있다. 아직도 서로의 허리를 꽉 껴안고 있다.

동전이 든 파란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지나가고 있다.

전동차가 서고 한 무리의 이야기들이 나가고 한 무리의

  이야기들이

 

  들어온다. 길고 복잡하고 구불구불하고 누덕누덕 기워진 이야기들이 들어

온다. 터져 나오지 못하고 내장을 들들 볶아대기만 하는

  이야기들이

 

 

 

 

 

 

 

 

 

 

 

 

 

 

 

 

 

 

김기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갈라진다 갈라진다. 등이 있다.

 
 

시 쓰기, 시 앓기

                                          김 기 택

꼬집어 어디가 아프다고 할만한 곳도 없는데, 누워있는 것이 힘들고 답답하다.

자세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해 본다.

여러 번 자세를 고쳐 눕는다.

예민한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뒤척거린다.

가까스로 쌓아온 잠이 작은 뒤척거림으로 금방 무너진다.

오줌이 마려운 걸 참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해 본다.

그렇게 생각하니 금방이라도 쌀 것 같다.

오줌은 뜨거운데 변기에 떨어지는 양은 많지 않다.

다시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낯은 익은데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나는 얼굴들,

끊임없이 숫자를 대입해도 정답이 굳게 닫혀져 있는 수학공식들이 계속 꿈자리를 어지럽힌다.

감기에 걸린 것인가 생각해 본다. 저혈압이라는데, 혹시 피가 모자라 어지러운 건 아닌가도 생각해 본다.

병! 내가 아는 이름이 나오자 우선 마음이 편해진다.

초등학교 시절,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했을 때의 이상한 쾌감, 조금은 불안한 안락함,

아무도 없는데 어디선가 급우들이 떠들고 있는 듯한 다소 혼란스러운 고요함,

이런 추억들이 내 열과 불안을 자석처럼 빨아들인다.

나는 내 몸에 들어온 병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본다.

이 놈이 내 몸에 들어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숨죽이고 지켜본다.

잔 물비늘 같은 떨림이 온몸을 흔들며 지나간다.

내 몸에 돋은 닭살들이 갈대처럼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 즈음에서 나는 약한 잠에 빠져든다.

 

(『시와반시』, 2004년 가을호)

 

2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속에서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사하게 통과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과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다.

       - 졸시「바늘구멍 속의 폭풍」중에서

매일 불행하고 슬픈 일들이 일어난다.

그 슬픔과 불행이 왜 일어나는지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가 자기가 생긴 대로 열심히 살다가 생긴 일일 뿐이다. 그렇게 생긴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탈이 나서 배가 아프다고 대장균을 탓하겠는가?

그 미생물들이 할 일은 저들이 타고난 생김새와 성질 그대로 열심히 사는 것이다.

생김새와 성질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무의 잘못이 없는데도 언제나 적과 죄인은 있고, 계속 생겨나고 있다.

적과 죄인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만든 것이다.

분노와 적개심을 받아줄 대상이 필요한 자들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무언가 잘못한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들이 그렇게 생긴 것이 바로 그들의 잘못이어야만 하는 일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을 정교한 체계를 갖추어 시비를 가려내기 위한 법이 생겨난다.

불행과 슬픔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 필요성은 점점 커지고 비례하여 불행과 슬픔도 늘어나고 있다.

법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해지고 충실해졌지만, 불행과 슬픔이 늘어난 양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불완전하고 빈약하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적인가? 나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짓는 사람인가?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나는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인가에게 폭력이 되고 있다.

 나는 적이 필요한 사람과 내 행동이 단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불행과 슬픔이 생겨나도록 하기 위해, 매일 누구에겐가 적이 되고 무엇인가 잘못을 저지른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퇴근이 한참이나 지난 내 몸이 미세하게 떨고 있다.

그날의 일용할 폭력을 견뎌내느라 몸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들부들 떨고 있다. 오랫동안 그치지 않는다.

그 폭력을 견뎌내기 위하여 내 몸은 상처와 병을 필요로 한다. 상처는 폭력이 몸에 들어와 몸이 된 것을 말한다.

폭력이 몸이 되는 동안 몸은 뜨거워진다.

폭력이 몸이 되려고 뜨거워지는 것, 떨리는 것, 그것이 병이다.

병은 폭력을 껴안는다. 몸 안에서 폭력과 병은 서로 하나가 된다.

서로 싸우다가 다정해진다. 어느 순간, 폭력과 병은 폭력도 아니고 병도 아닌, 내 몸이 된다.

 

비에 젖은 구두

뻑뻑하다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신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구두는 더 힘껏 가죽을 움츠린다

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

나는 구두주걱으로 구두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

끝내 구두 안에 발을 넣고야 만다

내 발이 주둥이를 틀어막자

구두는 벌어진 구두주걱 자국을 조용히 오므린다

제 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소가죽은 축축하고 무거운 발을 힘주어 감싼다

                                    - 졸시「소가죽 구두」

    


몸살! 몸은 뜨거운데, 나는 춥다.

지금은 내 병이 내 몸 속의 폭력을 치료하는 중이다.

대부분의 경우, 앓는 동안 나는 내가 앓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병은 내밀하게 진행된다. 나는 둔하지만, 몸은 예민하다.

나는 단지 말이 없어지거나, 갑자기 화를 내거나, 술이 먹고 싶어지거나,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리거나,

갑자기 어떤 대상이 떠올라 적개심이 일어나거나, 몹시 피곤해지거나 하기는 하지만,

병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감기약을 사 먹어야 할 만큼 병이 두드러지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나에게 전에 없던 습관이 생겼다든가 갑자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은

폭력의 긴 육체화 과정이 잠시 멈추고 병이 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6

그동안 나는 여러 번 넘어졌는지 모른다

지금은 쓰러져 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제 자리만 맴돌고 있거나

인력에 끌려 어느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졸시「우주인」중에서- 

7


   매일, 매순간, 앓는다. 병은 내 눈이고 코이고 입이다.

그리고…… 그 병의 부산물로 시가 얻어진다.

 

 

 

 

 
 
 

 

 

 

김기택 시 모음

 

재활용

 

 

지하상가 입구 한 구석에 쓰레기가 쌓여 있다.

아무도 치우려 하지 않는다.

지나가던 캔과 담배꽁초와 가래침만 더 쌓인다.

파리 모기가 냄새에 미쳐 앵앵거린다.

발들이 멀찌감치 돌아간다.

 

하는 수 없이 쓰레기가 꿈틀거리더니

구겨진 넝마조각과 휴지들이

서로 끌어안고 스스로 팔다리가 되더니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스스로를 재활용하러 또 어딘가로 떠난다.

 

이미 폐품이 되어버린 고물덩어리를

제 몸으로 사용하기.

쓰레기로 숨 쉬기.

마지못해 밥을 씹어 그 쓰레기를 꿈지럭거리게 하기.

눕자마자 바로 쓰레기더미가 되기.

 

모든 쓰레기들의 잠을 깨우며

새벽 쓰레기수거차가 온다.

종량제봉투에 담긴 쓰레기만 수거하고 간다.

지하상가 입구 한 구석에 여전히 쓰레기가 쌓여 있다.

아무도 치우려 하지 않는다.

 

대패삼겹살

 

 

대패로 깎아 무얼 만들겠다는 거지?

100% 돼지로 만든 식탁

삼겹살과 핏줄과 신경의 무늬가 생생한 책장과 장롱

숨 쉬는 통돼지로 기둥을 세우고 벽을 만들어

친환경이라는 목조 주택

신문에 끼어 온 전단지에서 본 그 광고들인가?

 

전기톱은 깊은 숲으로 가서

아름드리 라지화이트종 한 마리를 골라 베었겠네

잎과 가지가 다 흔들리도록 비명을 지르다

그루터기만 남기고 돼지는 풀썩 쓰러졌겠네

고소한 비린내가 나무향이 되도록

사방으로 튀던 피와 비명이 무늬목이 되도록

얼마나 오랫동안

대패는 그 돼지를 쓰다듬고 핥으며 길들였을까

 

건강에는 역시 채식이 최고야

성인병도 예방하고 환경도 살리는 웰빙 음식 아닌가

가구나 집이 지겨워지면

미련 없이 부수어 불판 위에 올리게

구워지면서 나무는 비로소 돼지고기가 된다네

참 오래 살고 볼일이구먼

이 생생한 삼겹 나이테살 좀 보게

이토록 완벽한 돼지고기맛 퓨전 채식을 먹게 되리라고

예전에 누가 꿈이라도 꾸어보았겠나

 

손톱

 

 

방금 전에 분명히 깎은 것 같은데

손톱이 벌써 길게 자라 있다.

그동안 잘라냈던 자리를 다 밀어내고

그 자리를 꽉 채우고 있다.

초침 지나간 자리처럼 빈틈이 없다.

손톱이 있던 자리에 수많은 눈금이 새겨져 있다.

잘라낸 손톱 길이만큼 딸아이가 자라 있다.

딸아이가 보는 동안에도

손톱은 딸아이 키만큼 또 자라고 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손톱 자라는 속도를 쫓아갈 수 없다.

손톱 자라는 속도에 맞추느라

나는 또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탄다.

신호등마다 정류장마다 서는 답답한 속도에 화를 내며

택시로 갈아탄다.

손톱 자라는 속도를 먹여 살리느라

출근하고 침 튀기며 말하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친절한 웃음을 다하여 전화를 한다.

이 정도면 꽤 헐떡거리며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달력을 넘기자마자

또 한껏 자라있는 손톱이 보인다.

전에 깎아낸 길이보다 더 길게 자라 있다.

한 번도 안 깎은 것처럼 자라 있다.

할퀼 것도 없는데 긴 날을 세우고 있다.

잠깐 전화 받고 나서 보면 그 자리에 또 있다.

거울 안에서도 자라 있고

양말을 벗을 때마다 발가락에도 자라 있고

아침에 눈 뜨면 해처럼 둥글게 솟아있다.

세수하다 손톱을 보고 내 입은 또 쩍 벌어진다.

아이쿠, 또 늦었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다니!

 

할여으에어

 

 

불이 살을 녹여 얼굴을 지우고

손가락 발가락을 지우고

콧구멍을 막았다

병원이

녹은 얼굴에 두 개의 구멍을 뚫어

호흡만 겨우 이어놓았다

녹은 살 속에 숨어서

벌겋게 벌거벗은 한 사람이

두 손으로 '불'알을 꼭 가리고 웅크려

신음하고 있었다

(얼마나 깊고 어두울까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그 속은)

익어버린 혀가 침묵하는 동안

신음은 컴컴한 바람소리의 힘으로

간신히 발음 하나를 만들었다

할여으에어

 

고기냄새가 난다

불판 위에서 맹렬하게 들썩거리는 소리가 난다

지독한 발음냄새가 난다

살려주세요

 

모녀

 

 

딸의 얼굴이 조금 들어가 있는 엄마가

소곤소곤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딸이 엄마의 웃음을 똑같이 그리며 웃고 있다.

두 웃음이 하나의 얼굴에서 웃는다.

엄마가 나직나직 이야기할 때

두 얼굴은 모두 엄마가 되었다가

딸이 생글생글 이야기하면

두 얼굴은 금방 명랑한 딸의 얼굴이 되곤 한다.

두 몸에서 나온 하나의 얼굴.

두 얼굴에 맞붙어 있는 한 눈, 한 웃음.

한 웃음 속의 두 입, 두 웃음소리.

서로 단단하게 붙어있는, 둘로 갈라져버리면

바로 피가 날 것 같은 하나의 얼굴.

한 입으로 이야기하고

한 고개로 끄덕이는 두 얼굴.

엄마의 웃음 속에 있는 딸이 이야기하자

딸 속의 엄마가 무릎을 치며 맞장구친다.

딸의 웃음 속에 들어있는 엄마가 이야기하자

엄마 속의 딸이 까르르 웃는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엄마는

저도 모르게 40대의 딸이 되어서는

응, 응? 응, 고개를 끄덕이며 어린 대답을 한다.

딸 속의 엄마는 엄마 속의 딸을 대견하게 바라보며

인자한 웃음을 보낸다.

슬픔이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도록 명랑한

둘로 갈라진 자국이 없는

하나의 눈, 하나의 코, 하나의 얼굴.

조마조마하도록 가만히 소곤거리는,

하나가 없어진다면

둘 다 영원히 없어져버리고 말 것 같은

10대 엄마와 40대 딸.

 

목을 조르는 스타킹에게 애원함

 

 

눈빛으로

목구멍이 막혀 눈빛으로

손발이 테이프로 꽁꽁 묶여 눈빛으로

말할 수 있는 건 눈 하나밖에 없어 눈빛으로

막힌 목구멍 대신 눈동자를 뚫고 나올 것 같은 비명으로

눈구덩이로 튀어나온 심장 같은 벌건 눈알로

살갗을 울퉁불퉁 뒤틀며 찢고 나올 것 같은 근육으로

숨 막힌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한껏 벌어져 있는 입으로

공기 한 방울 맛보려고 입 밖으로 길게 빠져나오는 혀로

그 입에서 눈물처럼 뚝뚝 흘러나오는 침으로

빨간 루주를 칠했는데도 점점 새파래지는 입술로

방금 성폭행 당한 요도(尿道)에서 나오는 뜨거운 오줌으로

팬티와 치마와 에쿠스 시트가 다 젖는 줄도 모르는 떨림으로

목 조르는 팔뚝 속으로 스며드는 월척 같은 파닥거림으로

그 꿈틀거림으로 더욱 짜릿해져가고 있을 손맛으로

그 손맛 때문에 더욱 단단하게 조여지고 있을 모가지로

아무리 격렬하게 발버둥 쳐도 고요하기만 한 모가지로

빨간 스타킹 자국을 감싸고 있는 새하얀 모가지로

 

구직

 

 

여러 번 잘리는 동안

새 일자리 알아보다 셀 수 없이 떨어지는 동안

이력서와 면접과 눈치로 나이를 먹는 동안

얼굴은 굴욕으로 단단해졌으니

나 이제 지하철에라도 나가 푼돈 좀 거둬보겠네

카세트 찬송가 앞세운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지 않아도

잘린 다리를 고무타이어로 시커멓게 씌우지 않아도

내 치욕은 이미 충분히 단단하다네

한 자루 사면 열 가지 덤을 끼워준다는 볼펜

너무 질겨 펑크 안 난다는 스타킹

아무리 씹어도 단물 안 빠진다는 껌이나 팔아보겠네

팔다가 팔다가 안 되면 미련 없이 거둬치우고

잠시 빌린 몸통을 저금통처럼 째고 동전 받으러 다니겠네

껌팔이나 구걸이 직업이 된다 한들

어떤 치욕이 이 단단한 갑각을 뚫겠는가

조금만 익숙해지면 지하철도 대중목욕탕 같아서

남들 앞에서 다 벗고 다녀도 다 입은 것 같을 것이네

갈비뼈가 무늬목처럼 선명하고

아랫도리가 징처럼 울면서 덜렁거리는

이 치욕을 자네도 한 번 입어 보게

잘 맞지 않으면 팔목과 발목 좀 잘라내면 될 거야

아무려면 다 벗은 것보다 못하기야 하겠는가

요즘엔 성형외과라는 수선집이 있어서

몸도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척척 고쳐주는 세상 아닌가

옷이 안 맞는다고 자살하는 것보단 백 번 나을 거야

다만 불을 조심하게나

왜 느닷없이 울컥 치밀어 나오는 불덩이 있지?

나중에야 어떻게 되건

보이는 대로 아무 거나 태우고 보는 불,

시너 한 통 라이터 하나로

600년 남대문을 하룻저녁에 태워먹은 그 불 말이야

불에 덴 저 조개들 좀 보게

아무리 단단한 갑각으로 온몸을 껴입고 있어도

뜨거우니 저절로 쩍쩍 벌어지지 않는가

발기된 젓가락과 이빨들이 와서 함부로 속살을 건드려도

강제로 벗겨진 팬티처럼 다소곳이 있지 않는가

앞으로 쓸 곳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

일자리에 괴로움을 너무 많이 쓰지는 말게

치욕이야말로 절대로 잘리지 않는 안전한 자리라네

 

 

커다란 나무

 

 

나뭇가지들이 갈라진다

몸통에서 올라오는 몸을 찢으며 갈라진다

찢어진 자리에서 구불구불 기어나오며 갈라진다

이글이글 불꽃 모양으로 휘어지며 갈라진다

나무 위에 자라는 또 다른 나무처럼 갈라진다

팔다리처럼 손가락 발가락처럼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갈라져 있었다는 듯 갈라진다

오래 전부터 갈라져 있던 길을

거역할 수 없도록 제 몸에 깊이 새겨져 있는 길을

너무 많이 가보아서 훤히 알고 있는 길을

담담하게 걸어가듯이 갈라진다

제 몸통으로 빠져나가는 수많은 구멍들이

다 제 길이라는 듯 갈라진다

갈라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조금 전에 갈라지고 나서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다시다시 갈라진다

갈기갈기 찢어지듯 갈라진다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쉬지 않고 갈라진다

갈라져 점점 가늘어지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져 점점 튀틀리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진 힘들이 모인 한 그루 커다란 식물성 불이

둥글게 타오른다 제 몸 안에 난 수많은 불길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갈라지고 있다

 

파리

 

 

쓰다 말고 던져둔 시 「거미」 위로

파리 한 마리가 내려앉는다.

다리 많은 호기심이 발발거리더니

멈칫, 

‘거미줄’이란 글자 앞에 선다.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

무엇엔가 옭아 매인 듯 꼼짝 않는다.

‘거미줄’ 글자로 면벽하는 것 같기도 하다.

파리는 갑자기 두 앞다리를 모으더니

싹싹 빈다.

정성을 다하여 빌고 또 빈다.

발바닥 오체투지다.

파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거미줄에서 몇 글자 건너

‘거미’라는 글자가 떡 버티고 있다.

수성 잉크가 번져 글자마다 털이 돋아 있다.

글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파리도 글자 한 자가 되어 시 속에 서 있다.

 

 

 

[김기택]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중앙대 영문과 졸업,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꼽추」 
당선, 1992년 시집 『태아의 잠』, 1994년『바늘구멍 속의 폭풍』, 1999년『사무원』, 
2005년『소』,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지훈상 



 

국수행 전철에서/김기택

 

 

 

한낮에 국수 가는 전철은 한산하다.

노인은 왜소한 몸으로 7인석 좌석을 다 차지하고 앉아

신문을 쌓아놓고 보고 있다.

한쪽 다리를 좌석 위에 턱 얹어놓고

등을 옆으로 기대고 한껏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편할수록 더 결리는 허리.

최선을 다해 자세를 고쳐 앉아보지만

삶은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허리와 어꺠는 10초 동안 편안한 척하다가 다시 못 마땅해진다.

 

하루 종일 타도 공짜지만 다 탈 수 없는 전동차들.

텅텅 비어 남아돌아도 다 앉을 수 없는 좌석들.

아무리 많이 버려져 있어도 다 읽을 수 없는 신문들.

에어컨이 질 좋은 찬바람을 공짜로 퍼주어도

짜증만 나는 쾌적함.

물결치는 숲과 강이 보는 눈도 없이 차창 가득 지나가도

지긋지긋하기만 한 아름다움.

보던 신문을 확 던져버리고 의욕적으로 새 신문을 펼쳐든다.

먼저 본 신문에서 다 본 기사들.

그놈에 그 사건에 그 인생...... 사이에

 

반라의 모델 사진이 있다!

끊어질 것 같은 수영복 안에서 무언가가 계속 터지고 있다.

그의 허리가 민첩하게 진지해지고 성실해진다.

너무 정성껏 여자를 쓰다듬어 눈알에 지문이 생길 지경이다.

다시 허리가 아파오자 그것도 금방 시들해진다.

거의 드러눕듯이 앉아본다.

여기저기 쏘아보는 눈알들.

한떄는 눈치 보는 것도 스릴이 있었지만

꽉 찬 지하철에서 여자들 틈에 끼어

간이 오그라들도록 엉큼하고 도전적인 짓도 해봤지만

그런 재미조차 싫증난 지 오래다.

 

처치할 곳이 없어 전철에다 잔뜩 부려놓은 시간.

전동차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느려터지기만 한 시간.

아까 팔당역이었는데 어째서 아직도 팔당역이란 말인가.

전철이 달리면 잠깐 흐르는 듯하다가 멈추면 함께 정지하는 시간.

죽어라 밀쳐도 안 가는 시간.

고집스럽게 한자리에만 앉아 늙기만 하고 죽지는 않는 시간.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 시인선 417 / 20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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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길 산책 / 김기택 



비온 뒤 
빗방울 무늬가 무수히 찍혀 있는 산길을 
느릿느릿 올라갔다. 
물빗자루가 한나절 깨끗이 쓸어 놓은 길 
발자국으로 흐트러질세라 
조심조심 디뎌 걸었다. 
그래도 발바닥 밑에서는 
빗방울 무늬들 부서지는 소리가 
나직하게 새어나왔다. 
빗물을 양껏 저장한 나무들이 
기둥마다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 그친 뒤 
더 푸르러지고 무성해진 잎사귀들 속에서 
젖은 새울음소리가 
새로 돋아나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빗방울길 
돌아보니 
눈길처럼 발자국이 따라오고 있었다 




『좋은시 2003 』,삶과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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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셔츠 입은 여자/김기택 


탱탱한 피부처럼 살에 착 달라붙은 흰 셔츠를 
힘차게 밀고 나온 브래지어 때문에 
그녀는 가슴에 알 두 개를 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간혹 팔짱을 끼고 있으면 
흰 팔을 가진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처럼 은은한 빛이 
그녀의 가슴 주위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알에서 태어나 나라를 일으켰다는 고주몽이나 
박혁거세의 후손들이 사는 이 나라에서는 
복잡한 거리에서 대낮에 이런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드문 일도 아니다. 
길을 가다 멈춘 남자들은 갑자기 동그래진 눈으로 
집요하고 탐스럽게 그녀의 가슴을 만졌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그 눈빛들을 햇빛처럼 쬐었다. 
타조알처럼 두껍고 단단한 껍질 속에서 
겁 많고 부드러운 알들은 그녀의 숨소리를 엿들으며 
마음껏 두근거리고 있었다. 
가슴에서 떨어질 것 같은 알의 무게를 지탱하기에는 
그녀의 허리가 너무 가늘어 보였지만 
곧바로 넓은 엉덩이가 허리를 넉넉하게 떠받쳤다. 
산적처럼 우람한 남자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아기를 안고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 『좋은시 2003 』,삶과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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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먹는 일 /김기택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위암이라는 어른다운 병으로,그 아이는 어른같은 죽음을 죽었다 
. 막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마침 그 아이는 안경과 넥타이와 회초리만 남은 이름, 선 
생님이 되어 있었다. 기억된 아이들이 낡고 큰 옷을 걸치고, 누른 코를 흘리며, 부스 
럼이 난 대가리를 긁으며 기억된 교실에 앉아 있었다. 그 아이가 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일까,아는 사람? 많은 배고픈 눈알들이 데룩데룩 거렸으나 단 하 
나의 입도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은 없지만 그 중에서도 가 
장 힘든 일은 '밥 먹는 일'이란다. 몇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한 아이가 조심스 
럽게 침묵을 건드리며 웃었다. 그 옆에 있던 아이가 웃어도 되는 것인 줄 알자 같이 
웃었다. 그 뒤에서 몰래 장난질하던 두 아이가 웃어야 되는 것인 줄 알고 혼나기 전에 
얼른 웃었다. 그 아이의 죽은 기억을 무너뜨리며 모두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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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말들을 /김기택 

돌 지난 딸아이가 
요즘 열심히 말놀이 중이다. 
나는 귀에 달린 많은 손가락으로 
그 연한 말을 만져본다. 
모음이 풍부한 
자음이 조금만 섞여도 기우뚱거리는 
말랑말랑한 말들을. 

어린 발음으로 
딸아이는 자꾸 무어라 묻는다. 
발음이 너무 설익어 잘 알아들 수는 없지만 
억양의 음악이 어찌나 탄력있고 흥겨운지 
듣도 또 들으며 
말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음직한 비밀스러운 문법을 
새로이 익힌다. 

딸아이와 나의 대화는 막힘이 없다. 
말들은 아무런 뜻이 없어도 
저 혼자 즐거워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뛰어논다. 

우리는 강아지나 새처럼 
하루종일 짖고 지저귀기만 한다. 
짖음과 지저귐만으로도 
너무 할말이 많아 해 지는 줄 모르면서. 

 



-『사무원』 창비, 1999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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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소』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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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그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 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소』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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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원/김기택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管理大藏經(손익관리대장경)과 資金收支心經(자금수지심경)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장좌부립)’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 시집 ‘사무원’-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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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김기택 

 



그는 언제나 그 책상 그 의자에 붙어 있다. 
등을 잔뜩 구부리고 얼굴을 책상에 박고 있다. 
책상 위엔 서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두 손은 헤엄치듯 서류 사이를 돌아다닌다. 
하루종일 쓰고 정리하고 계산기를 두드린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거북등 같은 옆구리에서 
천천히 손 하나가 나와 수화기를 잡는다. 
이어 억양과 액센트를 죽인 목소리가 나온다 
수화기를 놓은 손이 다시 거북등 속으로 들어간다. 

때때로 그의 굽은 등만큼 배가 나온 상사가 온다. 
지나가다 멈춰서서 갸웃거리며 무언가 묻는다. 
등에서 작은 목 하나가 올라와 고개를 가로젓는다. 
갑자기 배 나온 상사의 목소리가 커진다. 
목은 얼른 등 속으로 들어가 나올 줄 모르고 
굽어진 등만 더 굽어져 자꾸 굽실거린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모래밭에서 한참 거북등을 굴려보다 싫증난 맹수처럼 
배 나온 상사는 어슬렁어슬렁 제 정글로 돌아간다. 

겨울이 지나고 창 안 가득 햇살이 들이치는 봄날, 
한 젊은이가 사무실에 나타난다. 구둣소리 힘차다. 
그의 옆으로 와 멈추더니 자리를 내놓으라고 한다. 
그는 기척이 없다. 그 자리에 꼼짝 않고 붙어 있다. 
젊은이가 더 크게 소리치며 굽은 등을 툭툭 친다. 
먼지가 일어나고 등이 조금 부서진다. 
젊은이는 세게 그의 몸을 흔들어댄다. 
조그만 목이 흔들리다가 먼저 바닥에 굴러 떨어진다. 
이어 어깨 한쪽이 온통 부서져내린다. 사람들이 몰려온다.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져버린 그의 몸을 들어낸다. 
재빠르게 바닥을 쓸고 걸레질을 하고 새 의자를 갖다놓는다. 

 



( 시집 ‘사무원’-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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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의자/김기택 



묵묵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늦은 저녁, 의자는 내게 늙은 잔등을 내민다. 
나는 곤한 다리와 무거운 엉덩이를 
털썩, 그 위에 주저앉힌다. 
의자의 관절마다 나직한 비명이 
삐걱거리며 새어나온다. 
잠시 후 가는 다리에 근육과 심줄이 돋고 
의자는 간신히 평온해진다. 

여러번 넘어졌지만 
한번도 누워본 적이 없는 의자여, 
어쩌다 넘어지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허공에 다리를 쳐들고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는 의자여, 

걸을 줄도 모르면서 너는 
고집스럽게 네 발로 서고 싶어하는구나. 
달릴 줄도 모르면서 너는 
주인을 태우고 싶어하는구나. 
오늘은 네 위에 얹는 것이 불안하다. 
내 엉덩이 밑에서 떨고 있는 너의 등뼈가 
몹시 힘겹게 느껴진다. 

( 시집 ‘사무원’-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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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얼굴 /김기택 



이윽고 슬픔은 그의 얼굴을 다 차지했다. 
수염이 자라는 속도로 차오르던 슬픔이 
어느새 얼굴을 덥수룩하게 덮고 있었다. 
혈관과 신경망처럼 덮수룩하게 온몸을 덮고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으나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뜨거운 눈물에 눈알이 메추리알처럼 익을 시간이 
그동안 내뱉은 모든 발음이 울음으로 한꺼번에 뭉개질 시간이 
팔자걸음처럼 한적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줌밖에 안되는 웃음을 당장 패대기칠 수도 있었지만 
슬픔은 그가 더 크게 웃도록 내버려두었다. 
조잘대는 주둥이 깊숙이 주먹 같은 울음을 처박을 수도 있었지만 
침들이 길길이 뛰는 말소리를 그냥 보고만 있었다. 
웃음과 수다에 맞추어 목과 이마의 핏줄이 굵어질 때마다 
슬픔이 지나가는 자리가 점점 붉어지는 게 보였다. 
한번 웃다가 일그러진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고 
고음으로 갈 때마다 웃음소리는 자꾸 울음소리가 되려고 떨고 있었다. 
슬픔이 얼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그다지 우습지 않은 농담에도 모두가 배를 움켜지고 웃고 있었다. 
웃음과 수다가 갑자기 그칠까봐 모두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세계의 문학 2005년 겨울호) 

 


 

 

 

 

김기택은 이름 석 자만으로도 어떤 무거움을 느끼게 하는 시인이다.

이 시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마음의 채비를 요하는 일이다. 현란한 언어는 없지만 읽어 내기가 만만하지 않다. 행과 행 사이로 생각의 단위들이 바뀐다. 눈으로 듣는가 싶기도 하고, 귀로 보는가 싶기도 하다. 몰두하지 않으면 읽을 수가 없고, 몰두하면 어딘가에 찔리는 듯하다. 예리하게 보고 끈질기게 생각하며 열정적으로 쓰고 오래 두고 고쳐서일까. 이것도 저것도 시가 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김기택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시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만 시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을.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을 시인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감정을 다 연소시켜야 한다

 

 

시인으로서의 김기택이라는 이름 석 자가 주는 무게감 때문인지 일찍 등단하셔서 오래 쓰셨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등단을 늦게 하신 편이더군요. 시는 언제부터 쓰셨어요?

 

김기택 처음부터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했던 것은 아니고요. 습작도 늦게 시작했어요. 스무 살 무렵쯤에요. 등단은 서른셋에 했는데요. 지금은 늦은 게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상당히 늦은 편이었어요. 시 창작을 배운 것도 아니고요. 저는 문단에 아는 사람도 없었고, 샐러리맨 생활을 하면서 혼자 썼던 거죠.

 

선생님 시를 읽기가 상당히 힘들었어요. 이유를 생각해봤더니 시가 뻑뻑한 거예요. 체력을 요하더라고요.웃음

 

김기택 뻑뻑해서 못 읽겠다는 얘기를 등단 초기에 들은 적이 있어요. 시가 답답할 정도로 뻑뻑해서 읽기가 힘들다고요. 《태아의 잠》하고 《바늘 구멍 속의 폭풍》을 낼 무렵에 이런 얘기를 들었었는데, 그 후로 못 듣다가 오늘 오랜만에 듣네요.웃음 《사무원》 이후로는 설렁설렁하지 않았던가 해요. 오랜만에 그런 말을 들으니 새삼스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네요. 왜냐하면 요즘에는 난해하게 쓰인 시들이 많으니까요. 반면 제 시는 고등학생들이 시를 공부할 때 읽기 좋다는 말도 듣거든요.  

 

시 한 편 쓰시는 데 시간을 얼마나 걸리나요?

 

김기택 사실 초고는 금방 써요. 단박에요. 퇴고는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혹은 그 이상 걸릴 수도 있고요. 저는 원고 청탁을 받을 때 이미 초고를 갖고 있어야 돼요. 그래야 마감 시간에 맞춰 충분히 퇴고할 여유가 있으니까요. 가지고 있는 게 없는 상태에서 청탁을 받으면, 초고가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고요. 나온다고 해도 퇴고할 여력이 없어서요. 쓰고 나서 버리는 게 좀 있어야 하거든요.   

 

 

방울
위에 방울 위에 방울 위에 방울 위에 방울 위에 방울 위에
방울 방울 방울 방울 방울
방울방울방울방울방울방울방울
방울에 올라타는 방울
다시 올라타는 방울
다시 올라타는 다시 올라타는 다시 올라타는
올라타는 올라타는 올라타는
- <거품> 중에서 《갈라진다 갈라진다》, 문학과지성사, 2012.

 

 

<거품>이라는 시가요. 리듬감이 살아 있더라고요. 선생님 시 중에서 드문 경우가 아닌가요? 어떻게 쓰시게 된 건지요.

 

김기택 쓸 때 어떻게 썼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나요. 계속 연상에서 연상으로 가는 거죠. 한 번 쓰기 시작하면 다른 걸 계속 불러오는 건데요. 이 시에서는 명사는 하난데 동사만 많잖아요? 대체로 시를 쓰고 나서 '내가 이 시를 왜 썼을까' 생각하는 편이죠. 이 시를 보니까 방울의 운동을 표현하려고 쓴 게 아닌가 싶어요. 방울은 세부적으로 본 거고 전체적으로는 거품이잖아요. 시를 쓰면서 리듬 같은 걸 생각하지 않는 편인데, 이 시는 좀 달랐어요. 리듬이 자꾸 시를 쓰게 만드는구나 했어요. <커다란 나무>도 좀 그렇거든요? 내게 약간 여유가 생겼구나 싶었어요. 당겼다 풀었다 당겼다 풀었다 하는 걸 즐기고 있구나.

 

이런 시가 나한테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감정을 드러내는 걸 굉장히 싫어하잖아요. 적극적으로 절제하면서 쓰는데요. 사실 감정을 절제한다고 해서 읽는 사람이 감정을 못 느끼는 건 아니거든요. 쓰는 동안에는 감정이 활발하게 일어나죠. 그럴 때 '시가 잘 나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요. 감정을 연소시켜서 완성된 작품에는 물기가 남아 있지 않도록 하죠. 시인이 미리 우는 것을 빼 버리는 거죠. 이 두 시를 쓸 때에는 감정이 활발하게 일어났다가 연소되고, 일어났다가 연소되고 하는 게 느껴지는 거예요. 이런 어법이 내 목소리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어요.

 

<커다란 나무>의 나뭇가지들이 갈라지는 모습에서 운동과 율동 같은 걸 느꼈어요. 소나무나 전나무 같은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나무가 시인한테 이런 시를 쓰게 했나 궁금했어요.

 

김기택 느티나무처럼 크거나, 아니면 크지는 않더라도 배롱나무 같은 거. 사실 쓸 때는 특정한 나무를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평소 유심히 봤던 나무가 그런 나무들인 것 같아요.

 

 

 

사물의 언어를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기

 

 

<커다란 나무>를 보면 "한 그루 커다란 식물성 불이 / 둥글게 타오른다 제 안에 난 수많은 불길을"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사무원》에 있는 <얼음 속의 밀림>을 생각했어요. "투명한 불의 흔적이 보인다"며 차가움 속에서의 불에 대해 쓰고 계신데요. 그럼 인간은 어떤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를테면, 흔한 일은 아니지만 자연발화가 일어나서 사람이 타 죽는 일 같은 것도 있으니까요.

 

김기택 <얼음 속의 밀림>에 대해서 누가 관심을 갖고 얘기해 준 건 처음이에요.웃음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애착을 갖고 있는 시예요. 뭔가 충분히 표현을 못했다고 느껴요. 나무가 식물성 불이라면, 타는 원리나 힘은 불하고 똑같거든요. 단지 속도가 불과 다른 거죠. 불은 순식간에 타오르니까요. 나무가 갈라져 올라가는 모습이랑 불이 타오르는 거랑 비슷해요. 글쎄요, 사람은 모양은 다르지만 팔다리가 갈라져 나온다든지 손가락이 갈라져 있다든지 하는 건 불하고 비슷하죠. 그런 생김새 속의 힘이나, 자라는 모양이나, 움직이는 모양으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 나름대로 그 언어를 사람의 말로 번역을 하는 거죠.웃음 그 에너지랄까, 힘이랄까 하는 게 나한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데요. 내가 번역한 인간의 언어는 아주 미흡해요.

 

이번 시집에서 이색적이었던 시가 <키스>였어요. 김기택 시집에 있는 시의 제목으로는 어쩐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웃음 물론 시의 내용은 지금까지의 시 세계와 닿아 있지만요.

 

김기택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왜 그런 시를 쓰냐는 사람도 있고, 재미있다는 사람도 있고요. 이것도 역시 관찰의 시지 사랑의 감정에 대해 쓴 시가 아니에요. 말하자면, 성적인 에너지에 대해 쓴 건데요. 키스를 할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은 무엇인가. 왜 입술이 닿는데 발가락이 움직이는가. 왜 이런 현상들이 생기는 것인지 궁금했던 거죠. 아직 인간의 언어를 입지 않은 현상들이 호기심의 대상인 거죠.

 

사랑의 감정에 대해 쓴 시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제겐 감정이 느껴졌습니다.웃음 특히 "네가 나의 심장으로 펄떡펄떡 뛰는 순간 / 내가 너의 허파로 숨 쉬는 순간"과 같은 구절들에서요.

 

김기택 보는 것이나 만지는 것과는 달리 그런 순간에는 상대방의 몸속으로 들어가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분리되었던 것이 합쳐져서 하나의 기관처럼 된다는 느낌, 그래서 내가 상대방 속으로 들어가고, 상대방은 내 속으로 들어가고 하는 그런 것이죠. 저는 이 시를 감추고 싶어서 뒤에다 놨어요.웃음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들추는 거예요.


 

 

<스키니룩>이란 시가 있는데요. 스키니룩이 그렇게 충격적이세요?웃음 여쭤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적응이 안 되세요?
 
김기택 사실 내 눈이나 다른 감각이나 감정은 어느 정도 적응을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속에 아직도 적응 안 된 부분들이 많이 있는 거예요. 적응 안 된 이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적응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뭐랄까, 함민복 시인이 '성고문'이라는 표현을 쓴 게 있잖아요? 미니스커트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가는 여자들이 자기를 성고문 한다고. 내 안에서 뭔가 적극적으로 일어나서 한편으로는 보고 싶어 하는데 나는 나이가 이미 들었잖아요. 그 사이에서의 충돌도 있고. 다른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 습관이 되어서 그러려니 해요. 감각이 둔해지고 마비되니까요. 그런데 스키니룩 같은 경우는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볼 때마다 첫 경험이 일어난다고 할까. 

 

이 질문을 드릴까 말까 망설였는데요. 드리기 정말 잘한 것 같아요. 볼 때마다 첫 경험이 일어난다니요.웃음

 

김기택 도대체 이게 뭔가. 미니스커트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육칠십 년대에는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지만요. 사실 시에서는 아무것도 입지 않는 맨다리를 ‘스키니룩’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맨 다리와 ‘스키니룩’이라는 옷 두 가지를 섞어 놓았지요.

 

개에 대한 시가 유독 많은데요. 오래 키운 늙고 병든 개가 있나 했어요. 특별한 교감을 나누었던.

 

김기택 그렇지는 않고요. 개를 잠깐 키우기는 했지만요. 시집마다 소나 고양이나 개가 많이 나올 때가 있어요. 저는 대상을 보고서 바로 시로 쓰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뭐가 하나 써질 때는 사건, 장면, 이미지로 결합돼서 나오는 것 같아요. 개에 대해서 썼지만 그 시에는 사람에 대한 경험이 많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시詩의 문법과 꿈의 문법은 닮아 있다

 

개인적으로 《사무원》에 있는 <겨울을 기다림>이라는 시를 좋아해요.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이 쓸 수 있고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할 수 있는 시라고 생각했는데요. 겨울에 시가 더 잘 써지시나요? 어떠세요?

 

김기택 겨울을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에요.웃음 그런데 지나고 나면 겨울이 많이 생각나요. 어렸을 때도 그래요. 과거의 경험이 힘들어도 지나고 나면 정화가 돼서 아름답거나 좋게 기억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 겨울이 훨씬 추웠던 것 같아요. 지금보다 난방이나 의복 같은 게 훨씬 열악했잖아요. 동상 걸리고 손발 터지는 건 흔한 일이고요. 그런 기억이, 이상하게도 괴롭다기보다는 행복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다시 체험하고 싶다는 생각? 그래서 그런지 겨울 시는 주로 여름에 쓰게 돼요. 축 늘어지거나 의욕이 없거나 그럴 때요. 그 고통스러운 경험 속에 행복이 있어요. 막상 겨울이 오면 싫죠. 시 속에서는 평소의 ‘좋고 나쁨’이 많이 바뀌는 것 같아요. 실제의 나는 너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시에서는 무관심일 때도 있고. 별로 안 좋아하던 것을 시 속에서 굉장히 크게 느낄 수도 있고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중요하게 느끼거나 사소하게 느끼는 우선순위하고 꿈속에서의 우선순위가, 완전히 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전혀 매치가 안 될 때가 있잖아요. 이런 꿈의 문법과 시의 문법이 비슷한 거 같다는 걸 느낄 때가 종종 있어요. 시를 쓰고 나서 생각해 보면 허탈할 때가 있어요. 내가 왜 이렇게 이걸 가지고 열심히 썼는지 모르겠는 거죠.웃음 동물도 그래요. 소라든가 개라든가 고양이라든가도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거든요. 그런데 시에서는 내가 그 대상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기라도 한 듯이 표현이 되는 거예요.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중략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 <사무원> 중에서 《사무원》, 창작과비평사, 1999.

 

 

선생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무원>이 전에는 이렇게 슬픈 시인 줄 몰랐어요. <사무원>에서 제일 슬픈 부분은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 없이 스며들었으나"인 것 같아요.

 

김기택 경험이 들어 있기는 한데요. 평소에 제가 유머가 별로 없어요. 경직되어 있고요. 여기서는 현실을 뒤집는 유머가 활발하게 나타난 것 같아요. 대표작이라고까지 하기는 좀 그렇지만요.웃음

 

저는 하나도 안 웃기고 먹먹했거든요.

 

김기택 아, 그래요? 시를 쓰면서 내 안에 있던 심술 맞은 어린애가 나올 때는 즐거워요.  심술꾸러기 어린애가 내 안에서 장난을 치는 느낌이랄까요. 내가 갖고 있던 질서들을 어지럽히고 제멋대로 놀고. 현실에서는 정신 사납게 장난 치고 노는 애들이 제일 싫은데.웃음 그런 목소리가 나올 때는 재미있어요. 이 시 쓸 때가 회사 생활이 가장 고될 때였죠. 시 보면 시간이 없어서 억지로 썼다는 느낌이 들잖아요?웃음 껍데기만 있는 채로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할 때였거든요.

 

 

 

방금 딴 사과들이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고층 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 
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 
-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중에서 《소》, 문학과지성사, 2005.

 

<어떻게 기억해냈을까>에는 서류 뭉치를 나르던 여 사무원의 갑작스러운 웃음이 나오는데요. 마법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쓰게 되셨나요?

 

김기택 회사에서 서류 상자들을 여직원들이 나르는데요. 되게 무거운 상자거든요. 여직원들은 깔깔대면서 나르는 거예요. 이십 대 특유의 명랑함과 발랄함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이 시간과 공간에 잘 매치가 안 되는 거예요. 터무니없는 낙관성이고 명랑함이고 즐거움이고. 도대체 저런 웃음이 어떻게 해서 나오는 것인가. 그래서 과수원에서 처녀들이 사과를 수확하면서 옮기는 상황을 떠올렸어요. 시에 이 두 가지 상황이 겹쳐 있잖아요. 말하자면, 그 웃음이 시공간을 바꿔 버리는 거죠. 건강하고 오래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어떤 공간이 떠올랐어요. 도시가 갑자기 농경 시대로 돌아가고, 햇볕과 바람이 느껴졌어요.

 

선생님 연배의 시인들은 보통 나무, 자연, 꽃의 이름 같은 것에 관심이 많잖아요. 김기택의 시에는 이런 것들이 보편화되고 추상적으로 나타납니다. 단순한 도식이긴 한데, 선생님을 리얼리스트라고 해야 할지 모더니스트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웃음 서정 시인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고요. 제가 과문해서인지, 계보를 지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김기택 사실 '나는 리얼리스트다 혹은 모더니스트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시를 쓰시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그런 생각을 거의 안 해요. 신춘문예 등단작 심사평을 김현 선생님이 쓰셨거든요. '기성 시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는 거였어요. 누군가의 시를 전범으로 삼지 않고 야생에서 배웠다고 할 수 있어요. 시가 실패하는 경우는 감정 조절에 실패하는 때라고 생각해요. 울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할 때 시가 아주 유치해진다는 걸 알았어요. 쓸 때는 감정이 활발하게 일어나지만 완성된 작품에는 그것을 다 제거하려고 하죠. 감정을 배제하고 어떻게 이미지로 응축시킬 것인가에 관심이 많아요.

 

시란 무엇인가라고 왜 물어봐야 하지?

 

 

유독 눈이 좋은 시인이신 것 같아요. 늘 관찰을 하고 메모를 하는 편이세요?

 

김기택 거의 길에서 쓴다고 봐야죠. 메모하는 정도가 아니고. 책상에서는 시가 나오지 않고요. 의식적으로 마음먹고는 못 써요. 미리 제목을 정해놓고 쓰지도 못하고. 주제를 정해 놓지도 못하고요. 내가 뭘 쓸지 모르는 상태라야, 뭐를 쓰겠다는 계획이 없어야, 아무것도 몰라야지만 쓸 수가 있어요. 길을 걸으면 방심 상태가 되고 뭔가가 툭 하고 나와요.

 

산책을 종종 하세요?

 

김기택 시 쓰기를 위한 산책, 의식적인 산책은 안 해요. 내가 걷는다는 것은 출퇴근 혹은 외출의 경우처럼 일상생활에서 걸을 때에요. 대신에 차를 될 수 있는 대로 안 갖고 다니죠.

 

선생님의 시집에는 부가 안 나뉘어 있는 경우가 많고 부제도 없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김기택 나는 그걸 굳이 왜 나누는지 모르겠어요. 소재별로 나눌 수도 있겠고 시기별로 나눌 수도 있겠지만, 오륙십 편 되는 시를 가지고 굳이 나눌 필요를 못 느끼겠어요. 시를 감상하는 독자들에게도 뭔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냥 자연스럽게 하려고 하죠. 시 선집이라면 나눠야 할 것 같아요. 그런 분명한 이유가 없이 대개 관습적으로 나누는 측면이 있어 보여요.

 

시에서 쓰지 말아야 하는 단어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김기택 특별히 그런 건 없는데요. 가능하면 관념어는 잘 안 쓰려고 하죠. 그렇지만 아무래도 쓰게 되는데요. 생이니 삶이니 하는 것들 있잖아요. 영국 시인 중에 딜런 토머스Dylan Thomas라고 있거든요. 중학교 정도밖에 안 나온 사람인데요.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 그 사람이 쓰는 시어가 다 어렸을 때 쓰던 말들인 거예요. 죽음이라든지 자유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자기가 자라면서 배운 농촌의 말로 썼어요. 그래서 이 사람의 시가 난해하고 번역하기 어렵기로 유명하거든요. 우리 식으로 하면, 미당이나 소월의 시가 번역이 힘든 것처럼요. 일상적으로 쓰지 않는 단어를 내 관찰력으로 재구성하고 만들어서, 말하자면, 단어를 수제품으로 만드는 거죠. 기성품을 쓰지 않고요.

관념어라는 것은, 단어 밑에 가려진 표현되지 않은 느낌과 현상들을, 일반화ㆍ추상화ㆍ평균화해서 뭉뚱그리는 것이거든요. 그것을 쓰게 되면 그 밑에 살아 있는 것들이 다 죽잖아요. 감춰진 채 드러나지 않은 말들, 아직 사용되지 않은 단어들을 꺼내서 내 식으로 만들어서 쓰는 거죠.

 

좋은 시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김기택 시를 읽을 때 독자들이 평소에 잊고 있었던 것들, 독자들 안에 잠재되어 있던 것들을 자극하고 깨워서 체험하게 하고 활동시키는 시가 좋은 시인 것 같아요. 독자가 읽기 전까지는 악보 위의 악상이었다가 읽는 순간 음악이 되는 거죠. 물론 사람마다 듣는 음악이 다르겠지만요. 머리의 반응이 아닌, 감정적이고 정서적이고 육체적인 반응. 놀라움이든 탄식이든 끔찍함이든 슬픔이든, 그런 것들을 활발하게 일으켰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는 않았죠?웃음

 

젊은 시인들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어떤 느낌을 받으세요?

 

김기택 내가 읽어 오고 써 오고 좋다고 생각해 왔던 시와는 많이 다르다고 느껴지는 게 사실이에요. 그런 식의 언어 사용법이나 시 창작법은 사실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들이죠. 예를 들어, 번역을 잘못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시가 있잖아요? 번역시를 읽을 때나 그런 것을 체험했지, 우리나라 말로 우리나라 시인이 쓴 시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 건 당황스러운 일이죠. 나와 비슷한 연배인 김혜순이나 송찬호 같은 시인이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분들이잖아요? 이런 시인들의 시는 자연스럽게 느껴진단 말이죠. 젊은 시인들의 시도 어느 정도 적응되니까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시들이 꽤 있어요. 저도 거기에서 알게 모르게 영향 받은 게 있을지 모르죠.

 

마지막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김기택에게 시란?

 

김기택 별로 생각 안했던 건데 느닷없이 한 방 맞은 것 같네요. 시를 처음에 쓸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내가 그냥 좋아서 한 건데요. 흔히 시인들은 끊임없이 시란 무엇인가를 물어 봐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왜 물어 봐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 거 물어 보지 않아도 시가 좋으니까 계속 해왔거든요. 시를 쓰는 이유는 다 다르겠지만, 저한테 시는 ‘숨통’이라고 해야 하겠네요. 시를 쓴 기간하고 사무원으로 일한 기간이 거의 겹치는데요. 시가 나를 견디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어요. 숨 쉴 수 있는 허구의 공간이 있다는 것, 거기서 다른 상상을 하면서 제2의 현실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시공간이 없는 그 세계가 정말 실제의 삶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것, 그런 게 있다는 것이 즐거운 일이었어요. 여기서는 숨이 쉬어진다는 느낌이었고요. 창작은 고통이라고 말하는데, 저는 그게 왜 고통인지 잘 모르겠어요. 스스로를 견디게 해 주었고,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거든요. 시에서 사건, 장면, 인물은 가짜지만 그 인물들을 생각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면서 발생하는 모든 정서와 감각과 마음은 현실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요.

 

 

시인은 시의 문법이 어쩌면 꿈의 문법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꿈의 문법이라니. 그를 만나고 나서 나는 이 두 단어의 조합이 주는 몽롱함의 역설에 사로잡혀 버렸다. 같이 붙여 두니 '꿈'과 '문법'이 얼마나 이질적인 세계인지 확연해졌다. 꿈이란 기승전결 없는 비논리의 세계요, 문법이란 꽉 짜인 논리의 세계이다. 그러니까 시는, 통제가 안 되는 세계를 통제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꿈을 꾸기도 하고 원하지 않는 꿈을 꾸기도 한다. 꿈은 우리가 모르는 것을 하며, 시는 우리가 모르겠는 꿈에 대하여 쓴다. 김기택은 길을 걸으며 꿈을 쓰는 시인이다.      

 

 


글_ 한사유 / 사진_ 김병관 / 감수_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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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꼽추>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갈라진다 갈라진다》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지훈상 등 수상.

 

한사유
문학을 전공하고 문학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신형철 
문학 평론가로 《문학동네》 편집 위원이다.
저서로 《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가 있다. 

 

 

 

 
꽃 잔치

놀이로서의 시 쓰기

1. 기다리기 


한 편의 시가 나오기 전까지 나도 내 안에서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 궁금해서 기다려진다. 시가 나오기를 기다릴 때 시가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이 녀석은 성질이 청개구리 같아서 꺼내려 하면 얼른 숨는다. 아무리 좋은 컨디션. 고요한 시간, 알맞은 분위기를 준비해 놓고 유혹해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무관심한 척,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하면, 그때서야 저도 심심하고 궁금하니까 살살 고개를 쳐든다. 내가 전혀 글을 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예를 들면 펜도 종이도 없거나 만원 전철 안에 있거나 하여 쓰기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갑자기 나에게 놀자고 덤벼든다. 이 녀석이 스스로 찾아와 놀자고 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므로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 녀석과 놀아주려고 노력한다. 잘 놀아주지 않으면 잘 뻗치던 상상력을 대부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언제 갑자기 찾아올지 모르는 이 녀석을 위해 가방이나 주머니에 필기구와 수첩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일을 할 때나 놀 때나 일상에 빠져 있어도 무의식적인 마음의 더듬이는 늘 세워두어야 한다. 그러나 시를 잡을 준비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그 녀석도 눈치가 빤해서 잡히려고 하지 않는다. 이 녀석은 내가 준비가 안 된 순간을 느닷없이 급습하여 난처한 상황에 빠져 쩔쩔매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어떤 때는 새벽꿈에 찾아와 상상력에 발동을 거는데, 일어나면 신기하게도 싹 사라진다. 번번히 당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 녀석은 그런 어수룩한 나를 보는 게 여간 즐겁지 않은가 보다. 가만히 있을 때보다는 걷거나 버스 안에서 창 밖을 보거나 움직일 때 이 녀석은 더 자극을 받는다. 그래도 때때로 나에게 제대로 걸려 꼼짝 못하고 작품이 되어 나오곤 한다. 


2. 산 채로 잡기 

내 시에는 묘사가 많지만, 시 쓰는 과정에서 실제로 묘사할 대상을 보는 것은 시 쓰기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각이나 인식, 마음에 따라 그것을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대상을 상상력 위에 올려놓을 때 그것은 실체를 보는 것 보다 더 생생하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나는 대상을 상상의 공간에서 움직이게 해 놓고 그것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글자로 표현된 것이 내가 가상공간에서 상상했던 것과 같이 실감이 나지 않으면 그것이 생생하게 환기될 때까지 몇 번이고 수정한다. 그것이 상상 공간에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될 때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표현하려다 보니 미세한 것까지 표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과장과 허풍이 나오게 된다. 과장과 허풍도 인식의 소산이다. 과장이나 허풍은 평면적인 그림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거나 지나치기 쉽거나 감춰진 것들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평면적인 사실 속에 숨은 사소한 것들 그러나 시에서는 중요한 가치들을 깨우는 것이다.

시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지만 시 쓰기에서 가장 큰 방해자는 역시 언어이다. 언어와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의 다양한 정서 사이에는 아득한 거리가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담기에는 언어는 너무 상투적이고 단단한 외피로 둘러싸여 있다. 언어는 너무 많은 사람이 사용해 닳고 닳아 살과 피는 별로 없고 뼈다귀 같은 개념 덩어리가 대부분이다. 이것을 그대로 사용하면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거의 죽고, 딱딱한 관념이나 언어의 질긴 껍질만 남게 될 것이다. 읽는 이의 머리로는 전달되겠지만 몸으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몸으로 전달되지 않으면 감동은 없다. 

시인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복잡하고 미묘한 개인적인 정서,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의 정서를 죽이는 언어를 숙명적으로 시 쓰기에 사용해야 한다. 시인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를 죽이려고 하는 언어를 사용해서 정서를 죽이지 않고, 가능하면 덜 다치게 하고, 산 채로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많은 시인 선배들은 은유나 이미지, 객관적 상관물, 아이러니, 낯설게 하기 등 언어를 산 채로 잡아 생생한 그대로 전달하는 여러 방법을 만들어 사용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흉내내는 순간 다시 상투어로 돌아가려 한다. 좋은 시는 남들이 썼던 것이 아니라 제 몸에 맞는 새로운 언어, 육화된 언어를 찾아 쓴다. 

표현하기 어려운 대상을 만났을 때 나의 놀이 욕구는 더 힘을 얻는다. 나는 온 힘을 집중하여 완강하게 활자화를 거부하는 대상과 싸운다. 나는 그것이 명확하고 알기 쉬운 표현이 될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 그것이 선명하고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이 되어 내 앞에서 얌전하게 꿇어 앉을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 그 과정이 치열할수록 시 쓰는 즐거움은 커진다. 그 표현과의 싸움에 집중할 때 나는 재미있는 놀이에 집중하는 아이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즐거운 시 쓰기도 고통이 될 때가 많이 있으니, 그것은 아둔한 재주와 헐거운 연장 때문에 능력의 한계를 절감할 때이다. 잡을 때는 산 것 같았는데, 잡아놓고 보면 죽어있을 때가 많다. 



3. 다듬기 

퇴고에서 내가 하는 일은 시 쓸 때의 흥분 상태를 가라앉히는 일이다.
흥분 상태에서는 못난 표현도 제 새끼들 마냥 다 예쁘게만 보인다.
군더더기에 상투적인 안이한 표현, 의도적인 오류가 아닌 습관에 의한 오류, 감정의 과잉에 의해 흘러넘친 과장 따위가 작품 속에 빠져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 나는 시간의 섬세한 여과작용을 이용한다. 되도록 이면 일주일 이상은 묵혀두고 시 쓸 때의 흥분도 충분히 제거시킨다. 그러면 뭔가에 홀린 눈이 조금씩 풀리고 냉정한 태도로 돌아와서 잘못된 표현이나 생각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렇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다듬는 것이 좋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늘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원고를 보낼 때가 많고, 활자화된 후에야 후회하는 일이 적지 않다. 완성된 원고를 확정하는 일은 늘 어렵고 원고를 보낸 후에도 늘 꺼림칙하다.

 

                                                                              시인 / 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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