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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모음
2016년 03월 19일 08시 07분  조회:5029  추천:0  작성자: 죽림
[ 2016년 03월 18일 08시 37분 ]

 

 

일본의 한 동물원에서ㅡㅡㅡ 



김혜순 시모음

[약 력]

 

1955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건국대 및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79년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했다. 김수영문학상, 소월문학상, 미당문학상을 수상했고

현재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으로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등이 있다.

 

칼과 칼

 


칼이 칼을 사랑한다
발이 없는 것처럼 공중에서 사랑한다
사랑에 빠진 칼은 칼이 아니다 자석이다
서로를 끌어당기며 맴도는 저 집요한 눈빛!
흩어지는 땀방울 내뱉는 신음
두 개의 칼이 잠시 공중에 엇갈려 눕는가 했더니
번쩍이는 두 눈빛으로 저 멀리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도 한다
서로 몸을 내리치며 은밀하게 숨은 곳을 겨냥하는 순간
그 눈빛 속에서 4월마다 벚꽃 모가지 베어지기를 그 몇 번!
누군가 하나 바닥에 몸을 내려놓아야 끝이 나는 칼의 사랑
분홍신을 신은 무희처럼 쉬지 않고 사랑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랑을 멈출 수는 없는
시퍼런 몸 힘껏 껴안고 버틸 수는 있어도
끝내 헤어져 돌아갈 수 없는
공중에서 내려올 수도 그렇다고 넘어질 수도 없는
꼿꼿한 네 개의 무릎에서 피가 솟는다
저 몸도 내 몸처럼 구멍이다 저 검은 구멍을 베어버려라
거기서 솟는 따뜻한 피로 얼굴을 씻어라
아무리 소리쳐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저 끔찍한 사랑
그러기에 이제 내 사랑은 몸을 공중에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고
한번도 발을 땅에 붙이지 못한 것이었다고 말해야 하나?
다행인가? 우리 사랑이 아직 저렇게 공중에 떠 있다는 것

 

 

모래여자

 

 

모래 속에서 여자를 들어 올렸다

여자는 머리털 하나 상한 데가 없었다

 

여자는 그가 떠난 후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도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

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

 

여자의 그가 전장에서 죽고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다시 꿰매 유리관 속에 뉘었다

기다리는 그는 오지 않고 사방에서 손가락들이 몰려왔다

 

모래 속에 숨은 여자를 끌어올려

종이 위에 부려놓은 두 손을 날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낙타를 타고 이곳을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꿈마다 여자가 따라와서

감은 눈 번쩍 떴다

여자의 눈꺼풀 속이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넓었다

<2006년 미당문학상 수상작>

 

 

 

 

장마

 

귀신들은 언제나 투덜투덜, 그래요

그중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여자들이 제일 시그럽줘

첫사랑에 빠진 귀신은 의외로 추적추적 조용하게 오고요

미친여자 귀신은 조금 무섭게 오죠

머리카락에 번개가 붙어 오니까요

 

호수는 그렇게 세게 두들기면 안되요

두드린 자리마다 핏물이 올라와요

 

입에서 지렁이가 나오는 저여자

너무 두들기진 마세요

매일매일 두들겨 맞으니까 입에서

지렁이가 한 가마니 두 가마니 쏟아지잖아요

나중엔 제 내장까지 꺼이꺼이 다 토하고

빈 몸으로 뭉개지내요

냄새 한번 요란하네요

 

숲속에서 산 귀신에게 당해보았나요?

입속에서 한없이 뻗어나오는 넝쿨을 꺼내

넝쿨마다 푸른 혓바닥 주렁주렁 매달아

그 혀들이 밤새도록 떠들게 하더라니까요

귀신들은 참 질기게 시끄러워요

갔다가 돌아오고 쫒아내도 찾아오고

제사날 온 집안에 퍼지는 연기처럼

투덜투덜 침방울 천지에 튀긴다니까요

 

호수가 수천 개의 입을 벌려 떠들기 시작 했어요

이제 누가 저 벌린 입술들을 틀어막지요?

아이구 천지 사방이 호수네요 벌겋네요

 

 

황학동 벼룩시장



신기료 할아버지 땡볕 아래 혼자 앉아 계신다
어휴, 저 많은 구두를 언제
서울 사람들이 신다 버린 구두를 남산보다 높이 쌓아 놓고
밑창을 갈고, 새끈을 끼우고, 금단추를 달고, 무두질하고
아이구, 저 구두는 원래 달렸던 것이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구나
행려병자의 시신이었나 해부하고 나니 국물밖에 없네
신기료 할아버지 새 구두를 만들어내고 있다
거짓말 같다, 새 구두가 남산보다 높이 쌓여간다


십 년이 지난 모터는 이제 다 닳아 녹이 더 많다
기침을 쿨럭쿨럭 하는 할아버지 기침을 쿨럭쿨럭 하는
기계 심장을 떼어내어 핏빛 페인트 국물에
첨벙 담갔다 꺼낼 때마다
새 무쇠 모터가 생겨난다
그 무쇠 모터가 천길 땅 속의 핏길을 모아
싱싱하게 땅의 체액을 퍼올릴 것 같다


텅 빈 두개골을 양다리 사이에 끌어안고
작업복 입은 청년 하나 머리칼 같은 전선줄을 심고 있다
그 앞의 또 다른 청년 하나 마주 보고 앉아 뇌를 심고 있다
간혹 연기도 피어오르고 냄새도 매캐하다
조금 있다 보면 거짓말처럼
그 전자 두개골이 머리칼 사이사이에서
전파를 내보내는 것도 보이고
전자 뇌의 현재가 폭죽처럼 터지는 것도 보게 된다
채널을 맞출 때마다 크나큰 외눈을 깜빡거리는 것도 보게 된다


수건 쓴 아줌마 둘이 다친 부처들의 숲속에 앉아 있다
부처들의 야전병원 같다
백시멘트를 맨손으로 으깨어
둘이 하나씩 부처의 귀를 붙이고 있다
손가락을 이어붙이고 미소를 그려 붙이고
점도 하나 그려놓고 있다
애 아부진 거기 점이 있는디 말이야
잠시 아줌마의 육담에 이끌리다 보면
분가루를 뒤집어 쓴 부처가
손끝을 말아 쥐는 것도 보게 된다
부끄러운 듯 두 발로 아랫도리를 가린 채

 

 

잘 익은 사과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 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사람의 마음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을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믈오믈 잘도 잡수시네요

 

 

 

타클라마칸

 

해 떠오르면 머리를 감는 여자

허벅지가 없는 그 여자가

머리칼 위로 모래를 한 바가지 퍼 들이붓고는

첨벙 모래 구덩이에 머리를 담그는구나

발도 없는 여자가

모래강 위에서 머리를 절레절레 헹구고 있구나

가슴도 없는 여자가

머리칼도 없는 여자가

오, 몸도 없는 여자가 머리를 감고 있구나

우리 가지도...오지도...말고...너는 거기...나는 여기

무너진 나날의 메마른 머리칼이 부풀었다 펴졌다 이리저리 뒤척인다

해 떠오를 때부터 해질 때까지

없는 허리를 한번도 펴지 않고 그 여자가 머리를 감는구나

모래강의 물살을 뒤적여 빗고 있구나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1

아침 일곱여덟시경

나는 생각한다

서울에서 지금

일천이백만 개의 숟가락이 밥을 푸고 있겠구나

 

동그랗구나

숟가락들엔 모두 손잡이가 달렸다

시끄러운 아스팔트 옆

저 늙은 나무엔 이천이백만 개의 손잡이가 달린 이파리들이 달렸다

 

 

2

 

하늘이 빛의 발을 서울의 동서남북

환하게 내다 걸면 태양이 일천이백만 쌍

우리들 눈 속으로 떠오른다 그러면

 

서울 사람들, 두 귀를

가죽배의 방향타처럼 쫑긋거리며

이불을 털고 일어난다

바람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 안으로

들어가고, 다시 그대 숨이 내 숨으로

들어오면 머리 위에서 신나는 풀들이

파랗게 또는 새카맣게 일어선다 오오

 

그러다 밤이 오면 죽음이 오백 년 육백 년 전 할아버지의

배꼽을 지나 내 배꼽으로

들어오고 일천이백만 개의 달이

우리의 가슴속을 넘나들며 마음 갈피갈피

두루두루 적셔준다

 

한밤중 서울의 일천이백만 개의 무덤은 인중 아래

모두 봉긋하고 오오오

또 한강은 일천이백만의 썩은 무덤 속을 헤엄쳐 나온

일천이백만 드럼의 정액을 싣고 조용히 내일로 떠난다

 

다시 하늘의 빛의 발을 서울의 동서남북 내다 길면

일천이만 쌍의 태양이 눈을 번쩍 뜨고

저 내장들의 땅속 지하 삼천 미터 속까지

빛살 무늬 거룩하게 새겨진다

 

 

어머니 달이 눈동자 만드시는 밤

 

 

나는 시방 바다로 걸어들어간다

머리를 베개 위에 반듯하게 얹고

두 손을 가슴 위에 나란히 포개고

그렇게 왼발 오른발 한밤내 걸어들어가면

우리 아버진 바다 깊이 잠들어 계시고

 

우리 어머닌 한 천 년째 바다를 휘젓고 계시다

그러면 세상의 파도란 파도

그 모든 파도의 물방울 방울마다

세상의 모든 아가들 영롱한 눈망울 하나씩 맺히고

 

우리 아버지 배꼽에선 연꽃 한 그루 억세게 높이 자라

그 연꽃 속에서 뛰어나온 청년이

바다 위 마을의 집집마다

영롱한 눈망울 두 개씩 배달 나간다

 

그러나 시방은 다시금 내가 그 바다에서 걸어나올 시각

나는 가슴에 나란히 포갰던 손을 풀고

오대양 육대주 넘실거리던

내 두 눈동자의 주름을 거두어들고

이불 밖으로 몸을 솟구쳐올린다

 

 

 

참 오래된 호텔

 

참 오래된 호텔. 밤이 되면 고양이처럼 강가에 웅크린 호텔. 그런 호텔이

있다. 가슴속엔 1992, 1993......번호가 매겨진 방들이 있고, 내가 투숙한 방

옆에는 사랑하는 그대도 잠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그런 호텔. 내 가슴속에

호텔이 있고, 또 호텔 속에 내가 있다. 내 가슴속 호텔 속에 푸른 담요가 덮

인 침대가 있고, 또 그 침대 속에 내가 누워 있고, 또 드러누운 내 가슴속에

그 호텔이 있다. 내 가슴속 호텔 밖으로 푸른 강이 구겨진 양모의 주름처럼

흐르고, 관광객을 가득 실은 배가 내 머리까지 차올랐다 내려갔다 하고. 술

마시고 머리 아픈 내가 또 그 강을 바라보기도 하고. 손잡이를 내 쪽으로 세

게 당겨야 열리는 창문 앞에 나는 서 있기도 한다. 호텔이 숨을 쉬고, 맥박

이 뛰고, 복도론 붉은 카펫 위를 소리나지 않는 청소기가 지나고, 흰 모자를

쓴 여자가 모자를 털며 허리를 펴기도 한다. 내 가슴속 호텔의 각 방의 열쇠

는 프런트에 맡겨져 있고, 나는 주머니에 한 뭉치 보이지 않는 열쇠를 갖고

있지만, 내 마음대로 가슴속 그 호텔의 방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다. 아,

밤에는 그 호텔 방들에 불이 켜지든가? 불이 켜지면 나는 담요를 들치고,

내 가슴속 호텔 방문들을 열어제치고 싶다. 열망으로 내 배꼽이 환해진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방문이 열리지 않을 땐 힘센 사람을 부르고 싶다. 비 맞

은 고양이처럼 뛰어가기도 하는 호텔. 나를 번쩍 들어올려, 창밖으로 내던

지기도 하는 그런 호텔. 그 호텔 복도 끝 괘종시계 뒤에는 내 잠을 훔쳐간

미친 내가 또 숨어 있다는데. 그 호텔. 불 끈 밤이 되면, 무덤에서 갓 출토된

왕관처럼 여기가 어디야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자다가 일어나서 보

면 내가 봐도 낯선 호텔. 내 몸 속의 모든 창문을 열면 박공 지붕 아래, 지붕

을 매단 원고지에서처럼 칸칸마다 그대가 얼굴을 내미는 호텔. 아침이 되면

강물 속으로 밤고양이처럼 달아나 강물 위로 다시 창문을 매다는 그런 호

텔.

 

 

하루가 다 가도록 산봉우리에 앉아 있었다

 

태 양 이 하 루 종 일 데 리 고 놀 던 산 의 옷 을

아 랫 도 리 부 터 천 천 히 입 히 기 시 작 하 자

안 개 가 어 두 운 계 곡 사 이 에 서 빽 빽 히

끌 고 있 는 것 이 보 였 어 요

 

나는 그만 조바심나서 시간을 쭈욱 잡아 당겼어요

빨리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요

 

구름이막달아났어요-->

축지법으로막달아났어요-->

호수와산봉우리를천방지축디뎌가면서-->

쏜살같이달아났어요-->

철새들처럼한방향으로만달아났어요-->

달아나다가녹아서쏟아지기까지했어요-->

견딜수없이바쁜척무지개를빠트리고가기도했어요-->

 

그러다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떠나려 차비를 차리면

산은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슬픈 척 했어요

구름은 몰려가고 몰려가도 언제나 다 가지 못해서

총탄 세례 받은 얼굴로 엉거주춤했어요

 

드디어 태양이 꼴깍 넘어가면

산은 그제서야 제 설움에 겨워 세차게 울기 시작했어요

나는 그만 수평선과 맞닿은 한 줄기 붉은 선에

손가락을 세게 베고 말았어요

손가락을 얼른 입 속으로 가져가자

 

나 도 모 르 게 내 육 체 의 문 짝 이 떼 어 져 버 리 고

몸 속 으 로 노 을 이 출 렁 거 리 며 쏟 아 져 들 어 왔 어 요

 

 

한 잔의 붉은 거울

 

네 꿈을 꾸고 나면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창들은 불을 다 끄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밤거리

간판들만 불 켠 글씨들 반짝이지만

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고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근거리며 오고

여름밤에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이 길에선 따듯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울 속 추위를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저기 저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

저 번개는 네 머릿속에 있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네 속에는 너 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

너는 그렇게도 많은 나를 다 뱉어내었구나

 

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만 나를 본자 온몸을 떠는 나를 본다

어디선가 관자놀이를 치는 망치소리

밤거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독의 총소리

이제 나는 더 이상 숨 쉴 곳조차 없구나

 

나는 붉은 잔을 응시한다 고요한 표면

나는 그 붉은 거울을 들어 마신다

몸속에서 붉게 흐르는 거울들이 소리친다

너는 주점을 나와 비틀비틀 저 멀리로 사라지지만

그 먼 곳이 내게는 가장 가까운 곳

내 안에는 너로부터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구나

 

 

허공에 뿌리를 내리는 나무

 

물구나무 기록보유자가 그것도 자랑이라고

두 손으로 계단을 짚으며 내려간다

계단 옆의 동백나무들이

일생을 물구나무 선 채

멀뚱히 쳐다본다

 

동백나무는 물구나무서서

아직도 언 땅 속을 손톱으로 후벼판다

후벼파다 말고 그 속에서

밥 알갱이라도 주웠는가

얼른 입 속으로 가져간다

 

이파리의 기억은 뿌리에 있다

우리 내장의 기억이 입술 밖

저 푸른 하늘에 있듯이

 

꽃들 속에 벌떼라도 숨어들었는가

꽃봉오리 속마다 소란하다

질식할 것 같은 땅 속에 입술을 부비고

넓디넓은 허공을 향해

저리도 얇은 태반을 내다 걸어

새끼를 매다는 저 꽃나무!

밤이 오면 누가 새끼라도 건드릴세라 전전긍긍

한쪽 눈이 충혈된 고양이떼 같다

 

일진 광풍이 멈추자

알뿌리처럼 웅크린 뇌를 허공에 두고

하루종일 허공에 입질을 하다

여수 오동도까지 내려온 가련한 한 인생이

동백나무에 기대어 섰다

거꾸로 서서 바들거리는 나무의 몸통에

알뿌리를 기대고 서서

해 지는 쪽으로 내려간

물구나무 기록보유자를 아직도 보고 있다

 

 

환한 방들

 

복사기가 일초에 한번씩

해바라기를 토해 내고 있다

잠시 후 돌아보니 방안 가득 해바라기 만발이다

어찌나 열심히 태양을 복사했던지

고개마다 휙 젖혀진 해바라기 꽃밭 사이

평생 늙지도 않는 소피아 로렌이 걸어 나올 것 같다

 

나의 복사기, 네모난 환한 상자

나는 복사기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피라밋 투탄카멘에서 출토된 미라처럼

가슴에 품었던 검은 꽃다발을 공기 중에

산화시키며 미소를 날린다

밥해서 먹이고 웃겨줘야 할 입들이 들어찬 방

외풍과 한숨이 들락날락하는 환한, 나의 방!

 

일초에 한번씩 불 켠 복사기가

내 몸을 밀었다 당겼다 할 때마다

들숨은 들어가고 날숨은 나온다

지하철 4호선 긴 의자에 앉은 내 얼굴이

복사된 얇은 종이가 벌써 수억만 번째

희미한 빛 속에 가라앉고

원본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내 얼굴

이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내가

또 한번의 출퇴근 궤도를 그리고 있다

 

집에 돌아오면 마멸이라는 이름의 비누로 얼굴을 씻고

마멸이라는 이름의 크림으로 얼굴을 지우고

오늘 밤 복사된 내가 철(綴)해진

스프링 노트를 힘껏 찢어 버린다

과연 나는 내 몸에 살고 있는 걸까

마지막으로 복사되다만 내 미소가 떠 있는

환한 방의 스위치를 내리면

복사기 네모난 상자도 어두워지고

내 몸도 관(棺) 속처럼 어두워진다

 

 

캄보디아

 

부비트랩이 설치된 길

 

하늘에서부터 천천히 공중에다 뿌리를 내리며

땅으로 다가온 나무들이

그 꿈틀거리는 거대한 육질의 뿌리로

궁궐을 쪼개고

시바의 아내를 쪼갰다

그러자 밀림이 그녀의 아랫도리를 덮어주었다

 

몇 세기를 걸어가는 동안 지워지다가

지워지다가 아직도 덜 지워진 사람들이

없는 다리를 끌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밤이 오면 다시 지워지다가

아직 지우개의 터치가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무너지다 만 칠흑의 궁전 속에서

끊어질 듯 이어질 듯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에서 떨어져 나온

가느라단 실 한 파람이

차가운 바람 속을 떠다녔다

 

혼자서만 떠났다가 혼자서만 돌아오는 보고픔처럼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아직도 긴가민가 나 혼자 오래 듣는 네 한 마디 말처럼

품에 안아보지 못한 혼령 하나가

내 옷깃을 가만히 건드리고 날아갔다

 

그러다 다시 태양이 떠오르면

부비트랩이 설치된 길

지워지다 만 그림 속에서

실타래같이 해진 근육을 햇빛에 태우는 시바의 아내가

너무 뜨거워 들을 수도 없는 비명을

귀가 멍멍하도록

퍼부어대는 길

 

세상에, 끈질긴 저주의 손길처럼 하늘에

뿌리들이 떠 있다니

 

 

 

 


 

달력 찍는 윤전기

 

이 음악은 이제 너무 들었어 지겨워

열두 곡이 다 흐른 다음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스위치를 누르면 눈이 휘날리지

다시 누르면 벚꽃 축제야

윤전기는 쉴새없이 돌아가고

비키니 입은 여자들이 공장 가득 쌓여 있어

어느 쯤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어느 쯤에서 장마가 시작되는지 난 다 알아

음악이란 모조리 되풀이되는 푸가지

물이 흐르다, 얼음이 얼고, 그 위에 눈이 쌓이고

지하로 눈 녹은 물이 스며들고, 그 다음엔 물 아지랑이 피어올라

어느 부분에선가 경건하게 옷을 갖춰 입고

낚시질 떠나시는 우리 아버지

기차가 지나가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날마다 새 아침이라고 소곤대는 남루한 계단이

쏟아지려는 듯 걸려 있어

나는 여러 번 이 계단을 올라갔었어

자고 나면 언제나 월요일이었어

그래도 강을 건넜었어 바위에서 바위로 건너뛰었었어

달력 속 여자는 맥주를 들고 가랑이를 벌렸어

그 여자는 해변으로 가고 나는 달력 속으로 들어갔어

내 딸이 엄마는 비키니 수영복이 안 어울려 그랬어

공장장님은 색분해의 도사인가 봐

지치지도 않고 여자의 비키니 색이 살아 있어

이 윤전기 앞에선 한 번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나는 매번 새로운 형량을 시작해야 한다니까

나는 벌써 이 음악을 다 외워버렸어 귀에 못이 박일 정도야

그러나저러나 나더러 뭘 더 읽으라고 윤전기는 쉬지 않고

자꾸만 같은 숫자만 찍어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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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 詩作은 언어와의 싸움... 2016-06-13 0 3934
1511 詩集이 성공한 요인 8가지 2016-06-11 0 3679
1510 詩人은 쉬운 詩를 쓰려고 노력해야... 2016-06-10 0 3858
1509 詩는 남에게 하는 대화 2016-06-10 0 3408
1508 <저녁> 시모음 2016-06-10 0 3806
1507 留魂之 碑 / <자기 비움> 시모음 2016-06-10 0 3573
1506 정끝별 시모음 2016-06-10 0 4313
1505 [무더위 쏟아지는 아침, 詩] - 한바구니 2016-06-10 0 3984
1504 詩는 독자들에게 읽는 즐거움을... 2016-06-08 0 3560
1503 정지용 <<향수>> 노래 2016-06-07 0 3808
1502 삶 쪽에 력점을 두는 詩를 쓰라... 2016-06-07 0 3876
1501 생명력 있는 詩를 쓰려면... 2016-06-06 0 3484
1500 <전쟁>특집 시모음 2016-06-05 0 4483
1499 詩제목은 그냥 약간 웃는체, 보는체, 마는체 하는것도... 2016-06-05 0 3731
1498 360도와 1도 2016-06-04 0 3788
1497 詩의 제목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시켜야... 2016-06-03 0 4538
1496 詩作을 많이 習作해야... 2016-06-03 0 3751
1495 詩의 제목은 참신하고 조화로워야... 2016-06-02 0 4121
1494 원작이 무시무시한 괴물이라면 번역도 괴물이 돼야... 2016-06-02 0 3990
1493 창작은 악보, 번역은 연주 2016-06-02 0 4401
1492 별들의 바탕은 어떤 색갈?!... 2016-06-01 0 4178
1491 찢어진것만 보아도 흥분한다는... 2016-06-01 0 4152
1490 소파 방정환 "어린이 날 선언문" 2016-05-30 0 7271
1489 <어른> 시모음 2016-05-30 0 4132
1488 문구멍으로 기웃기웃..."거, 누구요?" "달빛예요" 2016-05-30 0 4719
1487 詩人은 예리한 통찰력이 있어야... 2016-05-30 0 5600
1486 詩의 묵은 덩굴을 헤쳐보니... 2016-05-30 0 3934
1485 <단추> 시모음 2016-05-30 0 3923
1484 [벌써 유월?!~ 詩 한바구니]- 유월 2016-05-30 0 3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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