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러워도 괜찮아
-김이듬(1969~ )
요가원에 등록했다 인도에서 수련하고 온 선생은 정갈한 수도승 같은 인상이다 옴 샨티 낮고도 맑은 목소리가 좋다 눈을 감고 마음을 바라보라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내겐 갖가지 생각이 떠오른다고 하자 차차 잡념을 버리게 될 거라며 웃는다 웃는 미간 사이에서 밝은 빛이 퍼져나가는 듯하다
며칠 후 지하철역에서 선생을 봤다 감색 요가복 대신 가죽점퍼에 청바지, 상투처럼 묶었던 머리칼을 풀어 내리고 있다 무언가에 짜증이 난 표정이다 그저 그렇다 평범하고 너무나 평범한 행인이다 화장이 진해서인지 그 빛나던 밝은 빛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더 좋아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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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넘어 무념의 경지에 이르고 싶은가. 무엇이든 넘어가고 싶은가. ‘너머’의 세계에 대한 욕망은 현재를 결핍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너머’를 넘어 무(無)결핍의 현존(現存)이 될 수 없다. 자아가 아무리 보초를 잘 서도 리비도(Libido)는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자아가 잠들면 꿈의 외피를 쓰고 얼굴을 들이민다. 적절히 “잡스러워”지는 것도 지혜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까지가 ‘적절한’ 것인가.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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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찌개김치사리
- 최은묵(1967~ )
메뉴를 바꿨죠, 빈 플랫폼으로 강물을 끌어오듯 냄비를 탐색할래요
목욕물을 데워줘요 면발 약한 기차는 어떻게 삶나요
발가락에 낀 반지로 육수를 내고 헌법을 갈아 수프를 만들어요 우리의 이빨은 도덕적인 밤보다 튼튼하니
쫄깃한 연애는 비법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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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독자라면 ‘라면찌개김치사리’라는 제목부터 난감할 것이다. 네 가지 음식이 하나로 합쳐져 있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난해성을 전경화(前景化)시키고 있다. 그 의도는 의외로 간단하다. 세계는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단순하지 않은 세계를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은 왜곡이거나 오역(誤譯)이다. “면발 약한 기차를 어떻게 삶”으며, “반지로 육수를 내고 헌법을 갈아 수프”를 만든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하고 질문을 던진다면, 당신은 손쉬운 해법을 구하려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파편화된 세계에 파편화된 이미지의 그물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의미를 구성하는 것은 이제 당신, 독자의 몫이다. 단일하고도 고정된 의미는 없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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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핌
- 크레이그 페레즈(Craig S Perez)
열여섯 달 된 딸애가 낮잠을 자다
깨서 운다. 나는 아이를 들어 가슴에 안고
내 손바닥이 오래된 이불처럼 따뜻해질 때까지
아이의 등을 문지른다. “아빠 여기 있어, 아빠 여기 있단다”
라고 속삭인다. 여기는 시리아에서 8500마일 떨어진
하와이의 오하우섬. 그렇지만 도대체 태평양의 무역풍이 갑자기
헬리콥터들이 되면 어쩌지? 화염과 손톱들과 파편들이
무차별적으로 우리에게 쏟아지면 어쩌지? 우리 창문에
비치는 그림자가 플루메리아 나뭇가지가 아니고
열기 속에 행군하는 군인들과 테러리스트들이면 어쩌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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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평양 괌 원주민 출신, 현역 미국 시인의 최근작이다. 그는 UC버클리에서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하와이대 영문학과 부교수다. 2015년 미국 도서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어린 아기의 아버지인 그는 자신을 내전의 한가운데 있는 시리아인으로 환치함으로써 공포를 현실화한다.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간단한 일인지도 모른다. 거꾸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추악하지 않은 전쟁은 없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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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노래
-고운기(1961~ )
봄은 왔다
그냥 가는 게 아니다
봄은 쌓인다
내 몸은 봄이 둘러주는 나이테로 만들어졌다
스무 살 적 나이테가 뛰기도 하고
그냥 거기 서 있으라
소리치기도 한다
어떤 항구의 풍경이 그림엽서 속에 잡히고
봄밤을 실어오는 산그늘에 묻혀
어둠이 어느새 마을을 덮어주는 내내
한 사람을 그리워한다
봄은 왔다 그냥 가지 않는다
계절은 서사(敍事)를 낳고, 이야기는 우리 몸에 기록된다. 우리 몸은 계절의 책이다. 푸른 “스무 살”과 “어떤 항구의 풍경” “봄밤을 실어오는 산그늘”의 이야기가 우리 몸에 나이테처럼 새겨져 있다. 그 나이테의 중심엔 늘 ‘그리운 사람’이 있다. 사람을 중심으로 퍼져 가는 동심원이 해마다 는다. 올해도 봄은 “그냥 가는 게 아니다”. 동심원 하나가 늘었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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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 김명수(1945~)
녹은 칼에 잘 슨다
녹은 새파랗게 갈아놓은 칼날에 잘 슨다
녹은 도끼에도 잘 슨다
녹은 지하실 바닥에 감추어 둔
지난달에 버려 둔 도끼날에 잘 슨다
녹은 저 혼자 힘이 겨우면
습기의 힘을 빌어서도 슨다
공기의 힘을 빌어서도 슨다
칼의 힘을 믿는 순간
도끼의 힘을 믿는 순간
녹은 제 몸과 더불어 칼날을 삭여낸다
남몰래 남몰래 쇠붙이를 삭여낸다
얼마나 다행인가. 폭력을 잠재우는 대립항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혼자 안 되면 다른 것의 힘을 빌려서라도 살의를 무력화시키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그것으로도 안 되면 “제 몸과 더불어” 폭력을 삭여내는 힘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남몰래 남몰래” 폭력을 이기는 힘이 있다는 것은.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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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을 깎다
-박금리(1962~ )
천하 모든 것에 삼가 송구하도다
녹음 접는 수풀에 명복을 빌며
거기 살던 무당벌레 참개구리
잠시 시름 놓던 실잠자리 흰나비
미안스러 면목이 없어 하노라
아가들아!
염치없는 농투사니는
탁배기 한 잔에 하루 숨을 접노라
한 생명은 다른 유기체의 생명과 연결돼 있다. 세계는 목숨으로 이어진 관계의 그물이다. 한 존재가 살기 위해 불가피하게 다른 존재를 세계 밖으로 밀어내는 경우가 있다. 농부의 낫에 깎여나가는 풀도 그런 것이다. 한쪽의 생업이 다른 세계의 종말을 이룰 때, 시인은 “미안스러 면목”이 없다. 풀을 깎을 때 무너지는 그들을 시인은 “아가들”이라고 부른다. 생명 있는 것들 치고 ‘미물’은 없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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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나 많은 새들이
- 이잠(1969~)
이렇게나 많은 새들이 내 몽상 속에서 살 줄이야 해 뜨는 동쪽에서 해 지는 서쪽 평원을 날아다니다 휘어진 내 팔뚝에 내려앉아 줄줄이 옆구리를 붙이고 잠이 들 줄이야 잡풀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 뽀얀 알들이 종알종알 꿈을 꾸고 있을 줄이야
새벽 창가에 날아와 곤두박질치려 하는 나의 일상을 흔들어 깨워 줄 줄이야 곪아 터진 내 심장에 부리를 디밀고 구더기를 발라내 줄 줄이야 흙 속으로 잠수하는 발가락 사이 사이에 죽은 새들의 영혼이 깃들어 살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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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있을 때도 시인은 날개를 꿈꾼다. 너무 높게도 낮게도 날지 말고 중간을 날아야 한다는 다이달로스(이카로스의 아버지)의 주문은 시인에게 통하지 않는다.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상력이 시의 힘이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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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난 미친 복숭아나무에서 태어난 털 없는 짐승입니다. 나는 한 번도 입을 벌린 적이 없습니다.
다만 안으로 자라난 손으로 안 보이는 문장을 기록했을 뿐입니다. 밖으로 내뱉고 싶은 말을 가둘 때마다 가려운 솜털이 생겨났습니다. 입을 벌리려면 온몸을 벌려야 했습니다. 너는 부끄러운 게 많구나, 세상을 모르는구나, 나를 함부로 쓰다듬었습니다. 나는 참으면서 점점 빨개졌습니다.
내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어찌 이런 맹랑한 게 태어날 수 있지? 멍들고 부풀어 있는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난 견디느라고 맹랑한 것이 되었습니다. 태어날 때 울지 않은 이유를 기억했습니다. 최초의 위엄을 붙잡고 세상을 견뎠습니다. 그것만이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이야기꾼인 나의 말이 들리나요? 멍과 피가 섞여 분홍이 된 나의 안에는 문장이 펄럭입니다. 포스트잇은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나 문장이 적힌 포스트잇은 떼어내기 어렵고, 그 포스트잇이 모이면 이제 막 물가에 도착한 아기바구니가 됩니다. 신생은 신성한 것입니다. 새로운 바다는 어디에서 나타날 수 있을까요? 포스트잇은 다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믿냐고요? 내가 지나온 여정을 보세요. 태어날 때 울지 않았습니다. 위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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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김만수
사변 후 그 때도 그랬다 일월동집
두통과 땀에 절어 쳐진 나를 어머니는
젖독 번진 당신의 품에 늘어 말렸다
어머니의 가슴에는
품어져 나올 대로 나온 습기로
뿌우옇게 흐려지던 창(窓) 하나 걸려있었다
야야쿨렁거리지말고건너오너라
아침 댓바람에 전화 넣으셨다 어머니
모과 썰고 배 삐져 넣고 끓인 조약 있으니
오라 신다 어머니
물러빠진 나를 또 늘어 말리려나보다
낡고 바람 숭숭 드는 당신의 창 안에
잠시라도 펴 말리고 싶으신 게다
남은 기운 다 주실 요량이다
그러실 모양이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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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혹은 엄마, 이 말만큼 아름다운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심신(心身)이 지친 내 몸을 누일 수 있는 마지막 언덕이 바로 어머니 아닌가.
오십이 된 어른도 우리 어머니에게는 그냥 여전히 아이인 모양이다.
남은 기운 다 내게 건네주시는 "야야쿨렁거리지말고건너오너라"라는 어머니의 깊고 따스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아버지 먼저 보내시고 시골서 혼자 살고 계시는 어머니에게 지금 전화를 한 통 넣어야하겠다.
-이종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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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는 말
그 말에는
그 말의 냄새가 나지
오래 묵은 젓갈같이 새그러운
그것은 구걸의 한 양식
그것은 마치
몹시 배가 고플 때
내가 나에게 속삭이는 말과 비슷해서
그 말은
냄새의 한 장르이기도 한데
여름날 내가 바닷가에 누웠을 때
햇빛이 내게 오는 것과 비슷한 일이거나
피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속삭임 같기도 해
묻지 않아도 아는 건 아무도 묻지 않듯이
그게 어떤 냄새인지 누구나 알듯이
너를 사랑해
―류경무(1966~ )
류경무 시인이 "언젠가 교차하는 환승 버스에서// 당신 얼굴 잠깐 비치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고 쓴 시구를 읽다가 나는 시집을 내려놓고 맥 풀린 사람처럼 한참 앉아 있었다. 가슴에, 마음의 내부에 사랑의 언약들이 가득 차고, "가끔 당신을 읽다가/ 가끔 당신을 덮다가" 하던 시절이 있었다.사랑은 설레며 붉은 뺨으로 오지만, 틀어져서 맞지 아니하고, 뜻하지 아니하게 갑자기 사라진다. 그러나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는 일을 두려워하지는 말 일이다. 아직도 "쫓기는 가젤처럼 솟아오르는 새잎"을 보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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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
만개한 벚꽃 한 송이를
오분만 바라보다 죽어도
헛것을 산 것은 아니라네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모심이 있었고
추억과 미래라는 느낌 사이
어느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는
그 이유 하나로도
너무 가뿐한
―서규정(1949~ )
꽃이 피어 세계가 한층 밝다. 온갖 꽃이 피어 이 세계가 화단 같다. 어떤 꽃은 일찍 피고, 또 어떤 꽃은 늦게 핀다. 그러나 각각의 그 꽃핌이 화단을 채색하고, 화단의 봄을 완성한다.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꽃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그에게 있는 아름다운 침묵이다"고 썼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신은 큰 왕국에는 싫증을 내지만, 작은 꽃에게는 결코 싫증을 내지 않는다"고 썼다. 꽃 핀 것 조용히 바라보자. 하던 일 멈추고 오 분만 꽃을 바라보자. 우리들 가슴에도 그 빛깔과 그 향기로 벚꽃이 만개할 것이다. 꽃을 바라보는 순간에 우리들도 한 송이 벚꽃처럼, 목련처럼 근사해질 것이다.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다가올 미래를 미리 염려하지도 말자. 꽃만 바라보자. 꽃 보면 문득 그리운 사람 있으려니 꽃 피었다고 전화해 안부를 묻기도 하자.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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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여관1
함명춘(1966~ )
마당엔 제비가 낙엽을 쓸고
몇 개인지 모를 방을 옮겨다니며
물고기들이 걸레질을 할 동안
오동나무와 족제비는 아궁이를 지펴 서둘러 밥을 짓는다
뒤뜰에는 장작을 패는 바람의 도끼질 소리
혹시나 오늘은 어느 객이 찾아오려나
주인인 듯한 허름한 옷차림의 산국화
현관문 앞 숙박계를 어루만지며
길고 흰 수염을 쓰다듬듯 시냇물이 산골짜기를 빠져나가는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세상의 길이란 길은 모두 잃어야 한 번 쯤
묵어갈 수 있는 산중여관
겨울의 초입에 서니 이런 산중여관에 가고 싶다. 가을은, 낙엽은 다 졌겠다. 나목이 되어 조용히 서 있어도 좋겠다. 산중여관의 주인은 까다롭지 않고 무던해서 노랗고 작은 산국화처럼 나를 보고 반겨 웃을 것이다. 그러면 엷은 향기가 그에게서 내게로 올 것이다. 나는 세상을 떠나와 산중여관에 묵고, 시냇물은 세상을 찾아가라고 거룻배를 띄워 보내도 좋겠다.
방과 마루에 걸레질을 하고, 불을 때 밥을 짓고, 밤새 문 밖에서 낙엽을 비질하는 바람의 소리를 듣고 싶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늦은 밤에 물을 끓여 차를 마시면 어느새 나도 수수해져 사람이 좋아질 것이다. 목침(木枕)을 베고 누우면 깊은 산속에 사는 사람처럼 순하게 잠들 것이다. 어느 날에는 소복하게 내린 눈을 순은의 아침에 보게도 될 것이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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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려고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고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립니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고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립니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엄마를 만나려고
내가 먼저 들에 나가 봄이 됩니다
―정호승(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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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香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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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우수가 지나 봄의 문턱이다. 땅속에서 개구리도 겨울잠에서 깨려고 몸을 꿈틀거리고 꽃씨들도 꽃을 피우려고 발을 꼼지락거린다. 봄은 언제나 그렇듯 오랜 기다림 끝에 온다. 우수가 지나면 우리는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리고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봄을 가장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아이들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이 눈밭을 퐁퐁 뛰어다니던 발자국에서 가장 먼저 눈이 녹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아이들 발자국 모양의 민들레가 가장 먼저 노랗게 핀다. 아이들은 좀이 쑤셔 방에 앉아서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이 동시처럼 '먼저 들에 나가 봄'이 된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봄의 엄마'를 만나려고.
이준관 아동문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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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화단에 앉아 꽃씨를 심는다
다섯 살배기 흙손가락에서 피어나는 봄흙의
귓불에선 아직도 말간 배냄새가 난다
나도 씨였죠?
이 씨도 쑥쑥 자랄 거죠?
한껏 치켜올린 입술이 나팔꽃처럼 둥글게 피어나고
꽃씨를 품은 봄흙을
다독이는 살빛 떡잎이 둘
타클라마칸 고비의 황사를 견디며
지구의 저 저 저 모퉁이를 견디며
씨에서 잎으로 꽃으로 몸 바꾸며
나이테처럼
쑥쑥 높아지는 키의 눈금들이
해님에게 가는 계단이래!
꽃씨를 묻은 플라스틱 화분을 안고
계단을 오르는 위태로운 흙물 엉덩이를 보며
목숨을 피우려는 모든 것들은
저리 온몸으로 뒤뚱이며 오르는 것이구나
바람에 휘청,
넘어진 피와 멍이 너의 꽃이고 잎이었구나
저 계단에서
잠시 붙잡고 선 난간이 너의 뿌리였구나
*정끝별 시인 약력
-1964년 11월 28일 전남 나주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88년 ≪문학사상≫에 <칼레의 바다>외 6편의 시가 당선.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서늘한 패러디스트의 절망과 모색> 당선.
-현재,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시론집 <패러디 시학>,
-평론집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시선평론집 <행복>,
-산문집 <여운>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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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씨와 아이의 쌍관관계를 놓고 이야기 형식인 시 한 편이 참 따뜻하게 들려오는 노래 한 자락 같은 이 시는 발상이 참신하고 견고하게 들려온다. 목숨을 부지하려는 움켜진 손아귀는 피와 멍이 들어 피어오르는 꽃이라는 것을 발견한 시인의 눈은 참으로 진지하다.
요즘 시는 기교와 말장난으로 눈속임을 하는 시들이 많은 반면 이 시인은 기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라 할 수 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도록 장치를 깔끔하게 한 시를 내놓으며 시란 이렇게 쓰는 것이다. 라고 가르쳐주는 것 같지 않는가 말이다.
“목숨을 피우려는 모든 것들은 저리 온몸으로 뒤뚱이며 오르는 것이구나” 말하는 시인의 눈은 잔광 속에서도 꽃이 피지 않겠는가? 끙끙대지 않고 수다스럽지 않고 번잡스럽지 않는 조용한 어조의 진정성이 숨어 있는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서문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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