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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 시모음
2016년 05월 30일 21시 21분  조회:3907  추천:0  작성자: 죽림
<단추에 관한 시 모음>

커다란 장미 한 송이는 온통 붉은 색이었다가, 붉은 색 속 발그레한 볼처럼 분홍이 되었다가, 흔들리는 분홍 속에서 언뜻 언뜻 흰색이 보여요.

그것은 내가 그리워하는 한 여자의 얼굴이었을까요. 먼저 허공에서 닿아보는 그림자들이었을까요. 장미 속에 장미가 있고 그 장미 속에 또 장미가 있어요. 정원을 홀로 거니는 여자예요.

나는 단추 두 개가 모자라는 옷을 입고 있어요. 제어할 수 없는 것이 있을 때 정처 없음이 되지요. 나의 정처 없음은 보리수 늘어선 한길에 이르게 하고, 장미 사이 여자와 눈이 마주치게 하지요. 먼 곳의 여자는 안쪽에 있는 여자예요. 내가 걸어갈수록 안쪽은 선명해져요. 장미를 헤치고 여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보이지는 않는 보리수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어요. 여자도 나를 향해 걸어왔던 것일까요. 여자는 원 속에 있고 나는 직선으로 걸어가요.

붉음과 흰색 사이 장미. 파랑과 초록 사이 보리수. 단추가 없는 옷과 단추 두 개가 모자라는 옷 사이 한길. 둘이 나눠 가진, 같은 것이에요. ‘아니’는 아폴리네르가 좋아했던 여자 ‘애니 플레이든’이라 하지요. ‘애니’가 아니라 ‘아니’라는 제목은 번역가인 황현산 선생님의 감각이지요. 주석 없이 시부터 읽을 때, 한국어로도 이중의 느낌을 갖게 하지요. 이것은 “거의 아무 것도 없이 읽을 만한 것을 만들어내”(황현산)는 아폴리네르의 언어에, 번역이 육박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언어에 한계를 느낄 때 이 시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는 하는데요. 그러다 보면 4D 화면처럼 바람과 향기와 눈빛이 담긴 풍경이 떠오르지요. 신기하게도 언어만의 선명함과 맞닥뜨리는 순간이기도 하고요. 좋은 번역은 이런 순간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지요.

이원 시인

 


+ 단추를 달듯

떨어진 단추를
제자리에 달고 있는
나의 손등 위에
배시시 웃고 있는 고운 햇살

오늘이라는 새 옷 위에
나는 어떤 모양의 단추를 달까

산다는 일은
끊임없이 새 옷을 갈아입어도
떨어진 단추를 제자리에 달듯
평범한 일들의 연속이지

탄탄한 실을 바늘에 꿰어
하나의 단추를 달듯
제자리를 찾으며 살아야겠네

보는 이 없어도
함부로 살아 버릴 수 없는
나의 삶을 확인하며
단추를 다는 이 시간

그리 낯설던 행복이
가까이 웃고 있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단추
  
단추는 오형제,
내 양복저고리에
정답게 달렸습니다.
그들이 형제라는 걸
나는
처음에
까맣게 몰랐습니다.
한 개가
떨어져 버리게 되자
남은 네 개의
쓸쓸한
모양,
비로소
한 탯줄에 태어난 오형제임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단추는 오형제,
내 양복저고리에
정답게 달렸습니다.
(박목월·시인, 1916-1978)  
  

+ 앞단추
  
너무 오래 입었던가

미처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잠그려는 저고리 앞단추가
제풀에 떨어져 내린다

다시 꿰매 매달 사이도 없이
빨고 다림질해 온 세월

너무 오래 잠가왔던가
(정세훈·시인, 1955-)


+ 단추를 채우면서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를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천양희·시인, 1942-)


+ 꽃단추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손택수·시인, 1970-)


+ 단추를 달면서

윗옷을 걸치고 단추를 잠그려는데
단추 하나가 덜렁덜렁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자신을 옭아맨 실을 풀고
제자리에서의 이탈을 꿈꾸고 있었나 보다
손으로 쥐고 당기면
툭,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다

단추를 여미지 않은 빈자리가
어색하다 단지,
자리 하나 비었을 뿐인데
옷매무새가 단정치 못하다
삶의 어느 강가, 징검다리를 건너다
돌덩이 하나가 비어 황당했던 기억처럼
자리를 비운다는 건, 균형을 깨뜨리는 일
生의 거대한 물살을 거스르는 일
그 어느 것도 단추의 빈자리를 대신 할 수 없음을 알겠다

홀로 떨어져나간 단추가 아무런 쓸모 없듯이
잠시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실로 꽁꽁 묶어 둔다

다시 팽팽한 일상이다
(조경희·시인, 1969-)


+ 단추

사람의 첫 단추는 어디일까.
출생일까.
부모의 결합이 자신의 처음이 아닐까.
학교의 졸업을 첫 관문이라 할 수 있을까.
첫 직장일까.
본인의 결혼일까.

인생의 첫 단추는 내가 가고자 한 길을
처음 시작한 날이 아닐까.
나는 글을 쓰며 살고자 꿈꾸어 왔으니
그 꿈이 있던 열 다섯에 첫 단추를 꿴 것이 아닐까.

아니다.
나의 첫 단추는 지금이다.
나는 지금부터
나로 말미암아 나를 아는 누구든 기뻐하며
누구든 해가 되지 아니하며
나로 하여금 그가 득 되게 도와주며 살리라.
그리하여 늘 새로운 단추를 꿰리라.
육肉과 영靈을 다하여.
(김순진·시인, 1961-)


+ 단추

장롱 밑에 떨어진 단추
어둠에 갇혀
먼지더미에 푹 파묻혀 있다
어느 가슴팍에서 떨어져 나온 것일까

한 사람을 만나
뿌리 깊게 매달렸던 시절을 생각한다
따스하게 앞섶을 여며주며
반짝거리던 날들

춥고 긴 골목을 돌아나오며
한 사람의 생애가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채우다, 끝내
서로를 동여맨 실이 풀려
바닥으로 떨어져버린 단추

세상 밖으로 구르다
먼지를 무덤처럼 뒤집어쓴 채
잊혀진 그대
(문숙·시인, 1961-)


+ 단추

누구의 단추가 떨어졌다
계단을 오르다가 단추를 본다
떨어져 있는 단추는 매우 춥다
배가 고파 보이는 단추는
네 개의 비어있는 구멍으로
지하도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방금 폭풍처럼 지나간 연행을 새겨볼까
나꿔채는 힘에 튕겨 나와 숙명처럼
버림받고 말았을까 영영
따뜻하게 입다물지 못하고
돌아갈 수 없는 곳에서 버려질까
채워지지 않는 단추는 서글프고
떨어진 자리는 아픈 상처로 남는다
어느 곳에서 지금 누구인가의 단추가 떨어지고
아무도 단추를 줍지 않는다
(강영환·시인, 1951-)


+ 단추를 달며

거울 앞에서 단추를 채우다가
실밥 몇 올 남기고 사라진 행방을 생각한다
가지런하던 일상의 틀 속에서
문득 일탈한 빈자리,
멱살 잡혀온 날들에 단추는 내 삶 어디쯤
한 방울 눈물처럼 떨어져 있을까

채우고 풀기를 반복하던 거친 일상 속
실날 같은 인연을 얼마나 움켜잡아 왔던가

실눈으로 눈뜨지 못하는
빈 단추 자리를 만지작거리다가
모두 끄르기 시작한다
팽팽한 가닥이 느슨해지면서
대롱거리는 단추들,
반짝거린다

몸을 둥글게 웅크려
단단히 바느질을 한다
生을 꿰매는 아침
시간의 숨구멍을 통과하고 있다
(윤성택·시인, 1972-)


+ 단추 하나  

이 옷 입을 때마다
바느질 야무지던 해순이 생각한다
아내도 그냥 넘겨 버린 소매 단추
그 날, 교실에 들어선 순간
어느샌가 실 꿰어 달려든 아이
떨어질 듯 달랑거리는 구멍마다
사정없이 바늘을 찔러
헐거워진 날들 촘촘히 박아준 녀석
일터로, 학교로, 종종걸음에
네 작은 손, 네 작은 눈 빛나더니
오늘은
작은 단추 하나 이렇듯,
내 야윈 옷깃 여미어 주는구나
(고증식·교사 시인, 1959-)


+ 첫 단추

콧물 훌쩍거리며 뛰놀던 어린 시절은
가끔 단추가 필요했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까지
개구쟁이처럼 뛰노는 시간은 천국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사 온 똑딱단추
잠글 때 똑딱 소리가 난다 하여 똑딱단추
내 삶의 첫 단추였다

어느 날 친구들과 뒷동산에 올라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리기도 하고
데굴데굴 멍석처럼 구르다
돌팍에 척, 걸린다
툭, 떨어지는 자유낙하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굴러갔을까
쌍심지를 켜고 훑어보지만
똑딱단추는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밤이슬 촉촉이 맞으며 자정이 되도록
수풀과 씨름할 때 반딧불처럼
눈에 확 박히던 그 섬광

나의 첫 단추  
(반기룡·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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