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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뿌리 알아보기- 남유럽 문학
2016년 03월 21일 02시 22분  조회:6068  추천:0  작성자: 죽림
 

 남유럽 문학

 

 
에스파냐편집

에스파냐 문학〔개설〕편집

-文學〔槪說〕 에스파냐 문학의 기원은 카스틸리아 왕국을 거점으로 하여 12세기부터 시작된다. 8세기초에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한 모로족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800년이나 소위 재정복전(再征服戰)을 벌였는데 이동안에 카스틸리아 왕국이 중추적 역할을 하면서 국토통일의 성업을 완수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카스틸라어(語)가 에스파냐어의 동의어가 되었고, 또한 ‘카스틸라’ 문학이 에스파냐 문학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2세기 초에 최초로 나타난 카스틸리아 문학, 즉 에스파냐 문학은 모로족과의 싸움을 영웅적으로 노래한 서사시 <나의 시드의 노래>(작자 미상)를 그 시발점으로 하였다. 13세기에 와서는 성직자 곤살로 데 베르세오가 시인으로서 에스파냐 문학사에 최초로 그 이름을 나타내고 있다. 그 뒤를 이어 14세기에는 환 루이스가 <아름다운 사랑의 서(書)>를, 로페스 데 아알라가 <왕국의 시>를 각각 써서 에스파냐 문학의 터전을 굳건히 했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뒤 문예부흥기를 맞이했다. 가르실라소 데 베가가 서정시인으로서 불멸의 시작들을 남겼고 유명한 희곡체 소설 <라 셀레스티나>(작자 페르난도 데 로하스)도 이때 햇빛을 보았다. <라 셀레스티나>는 실로 에스파냐의 <춘향전>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에스파냐 민중의 도덕적 기질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 하겠다. 16세기와 17세기는 에스파냐 문학사상 ‘항금세기’라 불리울 만큼 그 문학은 전성기에 달했다. 시에서는 공고라, 에레라 같은 불세출의 대시인들이 배출되었고 희곡에는 무려 22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한 자연의 괴물 로페 데 베가를 위시하여 돈 환을 창조한 티르소 데 몰리나, 에스파냐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칼데론 데 라 바르카 등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황금세기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돈키호테>라는 특이한 인물이 세르반테스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외에도 세계문학사에 크게 영향을 끼친 피카레스크 소설(惡人小說)도 이때에 나타났으며, 피카레스크 소설의 대표작인 <라사릴료 데 토르메스의 일생>(작자 미상)는 지금까지도 널리 애독되고 있다. 또 이때에 신비주의 문학도 크게 발달하였는데 성녀(聖女) 테레사, 성(聖) 환 데라 크루스 등이 크게 이름을 남기고 있다. 황금세기가 물러간 다음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에스파냐 문학은 명실공히 쇠퇴기를 맞이했다. 정치 문화를 비롯하여 문학 등이 철저할 만큼 프랑스 문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주체성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19세기가 들어서면서 낭만주의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에스파냐 문학은 재빨리 주지적(主知的)인 고전주의, 다시 말해서 신고전주의를 탈피하고 자아를 부르짖으면서 격렬한 감정 속으로 뛰어 들었다. <돈 알바로 또는 운명의 힘>을 쓴 낭만파의 거두 앙헬 데 사이베드라를 위시하여 에스파냐의 바이런이라고 불리는 에스프론세다 등이 문학적 기적을 행동으로 옮기면서 한때를 풍미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이르자 그 시대의 과학 만능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실주의 문학이 성행했다. 국민소설의 창시자인 페레스 갈도스를 위시하여 환 발레라, 로페스 데 아얄라, 페드로 안토니오 데 알라르콘 등이 에스파냐 소설의 황금탑을 이룩하였다. 시에서는 아들포 데 베켈이 서정시로서 불멸의 명성을 남기었다. 이때에 자연주의 문학도 파르도 바산, 팔리시오 발데스 등에 의해 에스파냐에 소개되었으나 크게 환영받지는 못하였다. 그 까닭은 감정이 강한 에스파냐인(人)들에게 자연주의 문학 같은 것이 생리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서자 두 조류의 문학운동이 일어났다. 즉 ‘모더니즘’(근대주의)과 ‘98년 사조(思潮)’이다. 모더니즘은 니카라과의 출신인 루벤 다리오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서 개성의 우위성과 이를 추구하는 순수한 문학운동인데 반해 ‘98년 사조’는 예술과 사상 방면에 걸쳐 당시의 정치적 쇠퇴기에 처해 있던 에스파냐의 비운을 극복하기 위한 애국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우나무노, 오르테가 이 가셋아소린 등은 철학자로서 ‘98년 사조’ 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에도 뛰어난 소설가들이 배출되었는데 <묵시록의 네 기사>의 작자 블라스코 이바네스를 비롯하여 피오 바로하, 바에 엉클란 등의 이름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희곡부분에서는 1905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에체가라이와 19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하신토, 베나벤테가 각각 극작가로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으며 시에서는 안토니, 마챠도, 가르시아 데 로르카, 환 라몬, 히메네스(195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전통적인 에스파냐의 서정시를 아름답게 가꾸어 놓았다. 에스파냐 내란(1936-1939)은 에스파냐 문학사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어 놓았다. 전후에 나타난 작가들은 ‘98년 사조’에 속하는 작가들이 보여준 열의와 역량에는 불급하지만 그러나 장래가 촉망되는 우수한 재질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카밀로 호세 셀라는 전후의 참담한 모습을 그린 <파스쿠알 두아르테의 가족>을 통하여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각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애독되고 있는데 평론가들은 셀라를 전후의 가장 중요한 작가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여류작가인 카르멘 라포레는 <나다(아무렇지도 않다)>라는 작품을 24세에 발표하여 문단을 놀라게 하였고, 그 외에도 안나 마투테미겔 델리베스 등이 각각 작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희곡에서는 알레한드로 카소나를 첫째로 손꼽을 수 있겠고, 시에서는 헤라르도 디에고 알레익산드레, 다만소 알론소 등이 있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전후에 속하는 작가들은 두 가지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국내파와 해외파이다. 국내파는 대부분이 전후에 문학활동을 한 이들이고 해외파는 전전(前戰)에 작가생활을 하다가 내란을 통하여 해외로 망명한 자들이다. 국외로 망명한 작가들은 계속하여 망명지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했는데 대표적으로 소설가 프란시스코 아얄라와 라몬 센데르, 극작가 알레한드로 카소나 등을 들 수 있다. <張 鮮 影>

중세의 문학편집

中世-文學 중세의 문학을 특징상으로 크게 구분한다면 12세기는 서사시의 시대, 13세기는 산문 확립의 시대, 14세기는 중세 최대의 시인 이타의 수석사제인 환 루이스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국토 회복운동이라는 그리스도 교도와 이슬람 교도의 영속적인 전쟁상태하에서 영웅들의 위업을 높이 찬양하는 서사시가 발생하고 또 유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12세기 중엽의 <나의 시드의 노래>이다. 한편 성직자·지식인에 의한 ‘메스데르 데 클레레시아’라는 시파가 종교적인 것, 또는 고대의 여러 사건들을 노래했다. 13세기의 시인 곤살로 데 베르세오(1195-1268)는 이 시파에 속하여 있으면서 카스틸라의 최초의 시인으로 그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산문 분야에서는 13세기 후반에 알폰소 현왕(1221-84)이 <칠부법전(七部法典)>의 작성, <대연대기>의 편집 등, 산문의 확립에 큰 업적을 남겼다. 14세기에 들어와서는 돈 환 마누엘(1281-1348?)의 우화집 <루카노르 백작>이 있는데 셰익스피어, 안데르센의 작품원형이라고 하는 우화를 포함하고 있으며, 비교문학상으로 주목되고 있다. 이와 거의 같은 시대의 시인 환 루이스는 <아름다운 사랑의 서>의 작자로서 중세문학을 대표한다.

나의 시드의 노래편집

Poema del Cid (1140?) 카스틸라어(語)에 의한 문학으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작품. 1070년경 활약한 국민적 영웅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 즉 시드 칸페아도르의 위업을 찬양한 무훈시(武勳詩). 시드라는 말은 모로인(人)들의 주군(主君)을 뜻하는 말에서 나온 호칭이다. 이 영웅의 무용·명예·신앙·충성·가족애·동지애를 사실(史實)과 전설을 교묘하게 혼합시켜 노래하고 있다.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와 거의 같은 시대의 서사시인데 <나의 시드의 노래>가 그 내용에 있어서 훨씬 현실적이며, 표현형식에 있어 시로서 어느 정도 갖추어지지 않은 대신 오히려 소박하고 힘차 에스파냐 문학의 특징인 사실성(寫實性)이 이미 여기에 나타나 있다.

루이스(환)편집

Juan Ruiz (1283-1350?) 에스파냐 시인. 그의 일생은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르카라 데 에나레스에서 출생하여 구아다라하라와 트레트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이타의 수석사제가 되었다. 이유는 불명하지만 13년 동안 옥중생활을 했다고도 전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아름다운 사랑의 서>뿐이다. 내용이나 그 형식에 있어 아주 잡다한 운문인데 작자 자신의 연애 편력을 주제로 한 자전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세태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풍자와 해학을 통하여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15세기 말의 <라 셀레스티나>와 함께 ‘피카레스크 소설’의 선구적 작품이다.

르네상스 문학편집

-文學 15세기 에스파냐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인쇄기의 발명이나 카스틸라어(語)의 표준어화(化)에 따라서 다음의 ‘황금세기’ 개화의 실마리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15세기 문학작품에서 우선 주목할 것은 몇 개의 <시가집>이다. 이는 당시의 서사시를 모은 것이다. 신틸라나 후작(1398-1458)은 민요풍의 아름다운 서사시를 만들었고, 환데 메나(1411-56)는 단테의 <신곡>을 모방한 거대한 작품 <미궁(迷宮)>을 남기고 있다. 호르헤 만리케(1440?-79)의 <부친 돈 로드리고의 애도가>(43편)는 완벽한 작품이라고 한다. 종전의 무훈시가 민중 사이에서 ‘로망세’로서 발달하여 14세기 후반에 가서 최성기에 이르렀다. 연극에 있어서는 환 델 엔시나(1468-1529?)가 15세기 말에 교회로부터 연극을 해방 독립시켜, 질 비센테(1465?-1537?)와 토레스 나로(?-1524)가 발전시켰다. 이 세기 최대의 문학작품은 <라 셀레스티나>이다.

라 셀레스티나편집

La Celestina (현존하는 초판 1499) 작자는 개종한 유대인 페르난도 데 로하스(?-1541)라고 하며 올바른 제명은 <카리스트와 메리베아의 비희극(悲喜劇)>. 줄거리는 메리베아에게 마음을 빼앗긴 카리스트가 간계에 능한 노파 셀레스티나에게 사랑의 청부를 의뢰하여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이야기다. 당시 백성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냉엄한 리얼리즘에 의한 최고 걸작으로서 ‘피카레스크 소설’의 원류가 되었다.

황금세기의 문학편집

黃金世紀-文學 정치적으로 에스파냐는 16세기의 부흥과 17세기의 쇠퇴라는 곡선을 그리고 있으나 문학사적으로 본다면 이 두 세기는 ‘황금세기’라고 불리며 특히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의 중엽에 걸쳐 절정을 이루어 뛰어난 시인·작가가 나타났다. 서사시 분야에서는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1501-36), 루이스 데 레온(1527-91), 페르난도 데 에레라(1534-97) 등 유명한 시인이 많고 그 중에서도 루이스 데 공고라는 에스파냐 최고 시인의 한 사람이다. 신대륙의 정복을 노래한 알론소 데 에르실라(1533-94)의 <라 아라우카나>는 대표적인 서사시다. 이 시대의 새로운 연극은 로페 데 루에다(1510-65)가 시작하여 환 데 라 쿠에바(1550-1610?)가 그 뒤를 이었고, 이어서 에스파냐 고전극의 네 거장에 의해 보기좋게 개화되었다. 로페 데 베가, 티르소 데 몰리나, 루이스 데 알라르콘, 그리고 칼데론 데 라 바르카 등이 그들이다. 소설에서는 <기사도 이야기>가 16세기 전반에 성황을 이루었고 도 호르헤 데 몬테마요르(1520?-61?)의 <디아나(Diana)>와 같은 ‘목인(牧人) 소설’도 유행했다. 에스파냐에서 발생한 특이한 문학양식 ‘피카레스크 소설(惡者小說)’은 16세기 중엽의 <라살릴료 데 토르메스의 일생>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후에는 마테오 알레만(1547-1614?)의 <구스만 데 알파라체의 일생>, 케베도의 <엘 부스콘>, 비센테 에스피넬(1550-1624)의 <하인 마르코스 데 오브레곤의 일생>, 루이스 베레스 데 게바라(1579-1644)의 <절름발이 악마> 등 일련의 걸작들이 나타났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로부터 근대소설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이 작품의 제1부가 1605년, 제2부가 1615년에 출판되었다. 이 밖에 산문에 있어서는 안토니오 데 게바라(1481?-1545)가 영국에 있어서 소위 유피즘(미사여구로 이어진 수식어가 많은 문체)에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환 데 바르데스(?-1541)의 <언어에 있어서의 대화>, 케베도의 <사랑>, 발타사르 그라시안(1601-58)의 <비평쟁이>는 각각 개성적인 작품이다. 또 신(新)대륙의 발견·탐험·정복에 수반된 많은 기록들이 남겨져 있지만 콜럼버스, 곤사로 페르난데스 데고마라, 베르나르 디아스 델카스틸료, 호세 데 아코스타 등의 기록이 중요하다. 끝으로 종교개혁과 반(反)개혁의 날카로운 대립 속에서 태어난 에스파냐의 성직자들의 ‘신비주의’는 특색있는 문학을 ‘황금세기’에 남기고 있다. 루이스 데 그라나다, 산타 테레사 데 헤수스, 루이스 데 레온, 산 환 데라 쿠르스 등이 신비주의 작가를 대표하고 있다.

라사릴료 데 토르메스의 일생편집

Lazarillo de Tormes (초판 1554) 작자 불명. 에스파냐가 낳은 특이한 문학 ‘피카레스크 소설’의 최초 작품. 천하게 태어난 소년 라사로가 마치 간지(奸智)의 덩어리 같은 장님 거지, 가난한 승려(僧侶), 무일푼이면서 거만하기만 한 양반 등, 사회의 저변에서 생활하는 자들의 심부름꾼이 되어 모진 고생을 한끝에 나중에는 시(市)의 포고령을 전달하는 역을 맡게 되어 높은 승려와 불미스러운 관계가 있다고 소문이 난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를 최고의 출세, 다시없는 행운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 당시 유행하고 있던 기사도 이야기의 영웅들이 높은 가문과 혁혁한 무훈을 자랑하는 것에 대해 라사로는 자기의 천한 성장과정과 일상생활에 관한 일만을 이야기한다. 담담한 서술 가운데 사회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에 신랄한 풍자를 담아서 묘사하고 있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최고 걸작.

세르반테스편집

Miguel Cervantes Saavedra (1547-1616) 에스파냐 작가. 가난한 외과의사의 아들로서 알카라 데 에나레스에서 태어나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부정규적인 교육을 받았다. 1569년 이탈리아에 건너가 어느 추기경 밑에서 일을 했다. 그 다음해 병사(兵士)가 되어 그 다음 다음해 레판토 해전에서 부상, 왼손이 불구가 되었으나 그는 일생을 통해 이를 자랑으로 삼았다. 1575년 튀니스 원정에서 귀국하는 도중 해적에게 습격을 받아 알제리에서 포로생활을 5년간 계속해서 그동안 용감하게 행동하였다. 1580년 자유의 몸이 되어 귀국했으나 냉대를 받아 환멸을 느꼈다. 극작(劇作)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 1584년 결혼했으나 행복하지는 못했다. 1585년 소설 <라 갈라테아>를 발표했다. 그 후 무적함대의 식량조달계라든가 징세역원 등에 종사했다. 1592년 승회(僧會)의 식량을 부당하게 징발했다는 이유로 파문되었고, 1597년과 1602년 공무상의 실책으로 투옥되었다. 1605년 <돈키호테>의 제1부가 출판되었다. 그 후 <모범소설집>(1613), <파르나소산(山)여행>(1614), <여덟 개의 코미디어와 엔트레메스(幕間喜劇)>(1615)를 발표. <돈키호테>의 제2부는 1615년에 출판되었다. 그 다음해 4월 23일 셰익스피어와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1617년 소설 <페르실레스와 시히스문다의 고난>이 출판되었다. 세르반테스의 일생은 만년을 제외하고는 실의와 환멸의 연속이었으나 그는 불후의 명작 <돈키호테>의 작자로서 세계 문학사상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돈키호테편집

Don Quixote (제1부 1605, 제2부 1615) 세르반테스의 소설. 정확한 제목은 <재치 넘치는 기사 돈키호테 데 라 만차>. 세르반테스가 제1부를 발표한 것은 이미 60세가 가까워서였다. 작품은 곧 큰 반응을 불러일으켜 실패의 연속이었던 인생의 만년에 가서 작자는 겨우 영광을 차지할 수가 있었다. 1614년 아베리아네다란 사람이 <돈키호테>의 속편을 출판하여 크게 분개한 세르반테스는 제2부를 재빨리 썼다. 그것은 그가 죽은 바로 전년(前年)이었다. 이 소설을 쓴 최초의 목적은 당시 유행됐던 ‘기사도 이야기’를 희극화시켜 이를 타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작자는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집필을 계속해 나가는 도중에 작자 자신의 비극적인 인생체험을 삽입한 대하소설(大河小說)이 되었던 것이다.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주변에 전개되는 기묘한 사건을 통하여 인생에 있어서의 이상과 현실의 상극이 너무나도 잘 포착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단순한 해학소설 이상의 진가를 발견하게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였고, 특히 스탕달,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등은 열렬한 찬미자였다.

공고라편집

Luis de Gongora (1561-1627) 에스파냐 ‘황금세기’의 시인. 콜도바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살라망카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분방한 생활을 보냈다. 고향으로 돌아와 승적(僧籍)에 들어가, 나중에는 왕실 예배당 사제에 임명되어 수도에서 살았다. 그는 소위 ‘공고리즘’을 완성시킨 위대한 시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작품은 두 개의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전통적 민중적인 주제를 간결하고 우아한 형식으로 표현한 초기 작품 <로망세>나 <소곡>으로 이는 당시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찬사를 받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폴리페모와 갈라테아의 우화>, 그리고 <고수(孤愁)>, 이 두 작품을 포함하는 후기의 작품으로 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사법을 구사하여 쓴 난해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찬사와 비난이 서로 엇갈렸다. 그러나 그 영향은 절대적이었고 후에 프랑스의 상징파나 에스파냐의 근대파 시인들이 ‘공고리즘’을 재평가하게 된 이후 그 위치는 확고하게 되었다.

케베도편집

Francisco de Quevedo (1580-1645) 에스파냐 ‘황금세기’의 작가. 시대의 양상을 체현(體現)한 것처럼 복잡하고 모순에 찬 성격의 천재적 작가로 여러 방면에 걸쳐 눈부신 활동을 했다. 우선 시 분야에서는 엄격한 소네트가 있는 한편 시닉하고 자유분방한 소곡으로 속물근성을 날카롭게 공격했다. 산문 분야에서는 철학자·신학자·모랄리스트·비평가·소설가 등 다양했으며 그 작품에 있어서는 특히 <꿈>과 <엘 부스콘>이 유명하다. 전자는 풍자로 채워진 산문집으로 그 시대의 여러 가지 인물·풍속·사건 등을 야유하고 있다. 후자는 ‘피카레스크 소설’의 걸작. ‘부스콘’이란 말은 사기꾼 정도의 의미에 해당된다.

베가편집

Lope de Vega (1561-1627) 에스파냐 ‘황금세기’의 국민연극(國民演劇) 창시자·시인. 마드리드 태생. 무적함대(無敵艦隊)를 타기도 하고 화려한 연애편력을 갖기도 하여, 그 일생은 파란곡절로 점철되어 있으나 극작가로서 또 시인으로서 많은 작품을 남겨 ‘재지(才智)의 불사조’라고 불리었다. 그는 일생 동안 1800편에 달하는 코메디와 400편의 성찬 신비극(聖餐神秘劇)을 썼다고 하나 현대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전자가 436편, 후자가 43편뿐이다. 코메디라는 것은 일종의 비희극으로 연극은 자연의 이면성(二面性)에 속해 있어서 비극과 희극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푸엔테 오베후나> <국왕만이 최상의 판관> 등이다.

티르소 데 몰리나편집

Tirso de Molina (1584?-1648) 에스파냐 극작가. 본명은 가브리엘 텔레스. 마드리드에서 출생하여 메르세데스 수도회사(修道會士)에서 관구장을 지냈다. 4백 편의 연극을 썼다고 하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86편. 특히 <세빌랴의 난봉꾼과 돌의 초대객>은 방탕아 돈 환을 처음으로 문학에 등장시켰던 극으로 유명하다. 여성을 차례로 유혹하곤 버린다는 테마와 묘지의 석상(石像)이 돈 환을 초대하여 복수한다는 줄거리로 되어 있다. 몰리에르, 메리메, 바이런, 모차르트 등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루이스 데 알라르콘편집

Juan Ruiz de Alarcon (1581?-1639) 에스파냐 극작가. ‘황금세기’의 4대 극작가의 한 사람. 멕시코에서 출생. 살라망카 대학에서 수학, 신대륙 행정원의 기록관이 되었다. 36편의 극작품은 성격창조가 특출하며 이해하기 쉽고 평이하고 간명한 운문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의아한 진실>이 대표작. 선천적 꼽추였고 그를 질투하는 자들로부터 비열한 중상을 받았다.

칼데론 데 라 바르카편집

Pedro Carlderon de la Barca (1600-1681) 에스파냐 극작가. ‘황금세기’의 4대 극작가의 한 사람. 마드리드에서 출생. 살라망카 대학에서 수학하고 궁정(宮廷)시인이 되었다. 그의 방대한 양의 작품 특징은 카톨릭에의 절대적 귀의(歸依), 국왕에의 충성, 극단적으로 명예를 존중하는 명예감정(名譽感情)이다. 등장인물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유형적(類型的)이었으나 로페데 베가의 뒤를 물려받아 오랫동안 연극계에 군림했는데 그의 죽음과 함께 황금세기는 그 막을 내렸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살라메아 촌장> <인생은 꿈> 등이 있는데 19세기에 독일 낭만파의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18세기 문학편집

-世紀文學 1681년 칼데론의 죽음과 함께 ‘황금세기’의 영광은 끝났다. 18세기초 에스파냐에는 부르봉가(家) 출신의 국왕이 들어와서, 에스파냐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완전히 프랑스에 종속되었다. 문예사조의 주류를 이룬 ‘신(新)고전주의’도 프랑스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비교적 주목을 끌었던 작가로서는 연극에 <아가씨가 승낙할 때>의 작자 레안드로 페르난데스 데 모라틴, 짧은 소극(笑劇)으로 실생활을 그린 라몬 데 라 크루스와 산문에서는 <모로코 통신>의 호세 카달소 등이 있고 이 밖에 우화시(寓話詩)를 쓴 사마니에고, 이리아르테 등이 있다.

19세기 로만티시즘편집

-世紀- 서(西)유럽에 일어난 로만티시즘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에스파냐에 도입되었다. 페르난드 7세의 독재정치를 피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국외로 망명했는데 그들은 영국이나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또는 그곳에 체재하면서 그 나라의 문예와 사상을 익혔다. 그리하여 후에 귀국함과 동시에 그들은 에스파냐에 있어서의 낭만주의 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또한 이들은 자기 나라의 옛 전통에 눈을 돌렸다. 예술에 있어서의 자유의 관념, 힘찬 문체, 지방색에의 애착, 그것은 즉 18세기에서는 잊혀졌던 것의 회복이었다. 에스파냐의 전통을 낭만주의에서 찾으려는 사람마저 있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로만티시즘은 겨우 15년 만에 쇠퇴하고 만다. 로만티시즘 작가들이 보여 준 특성은 다른 유럽 사람들이 목표로 한 것과 공통되지만 원래 외국의 영향은 그 자체가 절대로 단일한 것이 아니다. 에스파냐 로만티시즘은 세 가지의 과정을 거쳤다. 첫번째 시기는 라라(1809-37)나 마르티네스 데 라 로사(1787-1862)에 의해 대표되는 새로운 양식에의 과도기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리바스공(公)이나 에스프론세다를 중심으로 한 열광적 고양(高揚)의 시기이며, 세 번째는 소릴라에 의해 대표되는 로만티시즘의 에스파냐적 성숙기이다. 연대적으로는 페르난드 7세가 죽은 1833년 전후에서 19세기 중엽까지를 로만티시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에스프론세다편집

Jos Espronceda (1808-1842) 에스파냐 시인. 마드리드에서 교육을 받은 후 정치범으로 금고형(禁錮刑)을 받았으나 포르투갈에 도망쳐 테레사라는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그 여자를 따라 런던으로 건너갔다. 파리에서는 혁명투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1832년에 특사(特赦)되어 에스파냐에 돌아와 공화주의 논설가로서 활약하기도 했으며 국회의원에도 선출되었다. 낭만주의 시인답게 혁명적 활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짧은 일생을 보냈는데 새로운 문학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에스프론세다의 자질을 어느 사람은 소용돌이치는 ‘대투우장’의 정열에 비하기도 했다. 에스파냐 낭만파 가운데서도 다채로운 사랑과 혁명과 페시미즘의 시인이었다. <서정시집>(1840)은 그가 죽기 전 2년 동안에 그의 명성을 높였다. 서사시 <악마 현세>에서의 <테레사에게 바치는 노래>는 잘 알려져 있다.

소릴라편집

Jose Zorrilla (1817-1893) 에스파냐의 시인·극작가. 일찍부터 시나 희곡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평범한 생활에 싫증을 느껴 프랑스, 멕시코 등지로 방랑했다. 에스파냐의 낭만주의 성숙기에 활약했으며 그의 시나 희곡은 많은 국민대중들에게 공감을 갖게 했다. ‘조국과 종교, 이 두 개야말로 최고의 이념’이라 부르짖었고 작품의 음악성은 하나의 큰 특색이기는 했으나 너무나도 운율적인 점 때문에 공허하다는 불만도 들었다. 시작(詩作)에 있어서는 국토회복을 취급한 <그라나다>를 비롯하여 <전설 시집>이 있다. 그를 국민적 극시인(劇詩人)으로 만든 것은 <돈 환 테노리오>의 성공이었다. 희곡 <돈 환 테노리오>는 티르소데 몰리나에 의해 윤색된 전설상의 인물 돈 환을 무대 위에 재등장시켜 국민적 희곡의 하나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밖에 희곡으로는 <구둣방 주인과 국왕> <고트족의 단검> 등이 있다.

베켈편집

Gustavo Adolfo Becquel (1836-1870) 에스파냐 시인. 낭만주의(浪漫主義)의 참된 내용을 다시 새롭게 썼다고도 할 수 있는, 후기 낭만파를 대표하는 사람. 그의 서정은 내적이며 섬세하고, 그리고 가볍고 음악적으로 차분하게 독자의 마음을 파고든다. 남부의 안달루시아에서 태어나 고아가 되었고 마드리드에 가서 가정적으로도 불우한 생활을 보냈으며 그의 <서정 소곡집>의 1편은 그가 죽은 후에 출판되었다. 독일 낭만파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단순한 형식이나 표현은 유럽의 낭만주의보다도 에스파냐 고유의 민요 전통을 많이 전해받고 있다. 그의 서사시는 널리 애창되고 산문집 <이야기>(1864)에는 독일풍의 환상으로 충만되어 있다.

생활 사생문학편집

生活寫生文學 생활·풍속·인물의 모든 사생문학은 17세기의 에스파냐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다. 세르반테스의 <린코네티와 코르타딜료>도 그 한 예이다. 그것이 하나의 문학양식으로 다시 18세기 말에 일어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최성기에 들어섰다. 당시의 절대주의적 정치권력과의 관계에 수반되는 여러 사정도 취급하고 있다고들 한다. 낭만주의와의 관련은 지방이나 특정 사회의 인물이나 풍속 묘사 등에서도 생각될 수 있고, 또 사실주의에도 연결되어 있다. 에세이나 스케치 형식으로 잡지나 신문에 게재된 것이 처음이었다. 메소네로 로마네스(1803-82)의 <마드리드의 전망(展望)>은 수도의 생활을 포착하여 풍자적으로 썼다. 이어서 마리아노 호세 데 라라(1809-37)의 날카로운 비평 솜씨는 단순한 ‘생활 사생문학’이라기보다 시대를 초월한 뛰어난 문명비평의 문학을 만들었다.

19세기의 리얼리즘편집

-世紀- 로만티시즘의 쇠퇴는 뜻밖에도 빨리 찾아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리얼리즘으로 방향이 잡혀갔다. ‘생활 사생문학’이 수필이나 스케치 형식으로 먼저 유행하고 다시 이에 줄거리를 덧붙이는 말하자면 소설형식을 취하게 된다. 로만티시즘에서 리얼리즘으로 에스파냐의 근대문학이 겨우 시작되려는 때의 선구자가 페르난 카발레로이며 다시 그것을 한 걸음 진보시킨 것이 발레라였다. 희곡에서는 19세기 중엽을 지나 낭만주의 작가가 계속하여 있었는데 이와 함께 젊은 극작가들은 무대를 중세에서 현대로 옮겨 사실(寫實)에의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일반적인 경향은 여전히 감상주의적이고 과장된 작품이 그 대부분이었다.

알라르콘 이 아리사편집

Pedro Antonio de Alarcon y Ariza (1833-1891) 에스파냐 소설가. 젊었을 때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가 지원병으로서 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 건너갔다. 그 체험으로 아프리카 르포르타주를 썼다. 19세기의 지방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였으며 낭만적 정열을 느끼게 하는 묘사에 객관성도 잃지 않았다. 명쾌하고 흐르는 듯한 문장 속에 피카레스크적인 흥미와 자연스런 대화의 즐거움을 지닌 소설로 독자에게 환영을 받았다. 민화(民話)에서 소재를 얻은 <삼각모자>(1874)의 유머는 작가로서 이미 원숙해졌을 때의 것이다. <추문(醜聞)>(1875), <보르의 소년>(1880), <호랑이 대장>(1880) 등, 장·단편의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페르난 카발레로편집

Fernan Caballero (1796-1877) 에스파냐 여류작가. 본명은 세실리아 벨 데 파벨. 독일인을 아버지로 하여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문학에의 관심은 양친, 특히 부친의 영향을 받은 점이 많다. 성장하여 이주한 안달루시아의 민화(民話)나 민요에 흥미를 갖고 이 방면에 대한 저작을 남기고 있다. 대표작은 안달루시아 지방의 생활을 그린 소설 <갈매기> <아르바레다가(家)>로, 이들 작품에 의해 낭만주의적 소재에서 사실(寫實)에의 방향을 찾았고, 여성의 예리한 감수성에 의한 관찰과 묘사는 생활 사생문학 소설을 만들어내서, 에스파냐 근대소설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발레라편집

Juan Valera (1824-1905) 에스파냐 소설가. 상류가정에 태어나 외교관으로서 여러 나라에서 활약, 미국 주재 공사로 일했다. 풍부한 교양을 배경으로 한 평론의 저작도 많았지만 소설집필이 가장 큰 일이었을 것이다. 대표작인 <페피타 히메네스>(1874)는 성직자를 지망하고 있는 청년이 야심적인 아름다운 미망인의 매력에 사로잡히는 서간체(書簡體) 소설이다. <도냐 루스>(1879)는 중년의 성직자에 대한 젊은 여성의 플라토닉한 사랑을 그렸는데 전자의, 즉 육체의 승리에 대해 후자는 정신의 승리를 그려 아주 섬세한 심리탐구에 성공, 격조 높은 문장과 인간 의지에의 깊은 통찰은 새롭고 독자적인 근대소설을 만들어냈다. <재치있는 여파 파니타>(1895)는 만년의 작품.

페레스 갈도스편집

Benito Perez Galdos (1843-1920) 에스파냐 소설가. 극작가로서 출발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소설로 전향하여 에스파냐 근대작가의 거인(巨人)이라고 불리기에 이르렀다. 유명한 문학자 가운데서도 가장 풍부한 창작력에 뛰어난 다작가(多作家)로 알려져 있다. <국민 삽화집> 46권은 19세기의 역사에서 소재를 얻은 규모가 큰 소설로 그 중에 있는 <트라팔가르>(1873), <헤로나>는 걸작으로 되어 있다. 역사상의 사건이 객관적인 필치로 묘사되어 전투나 폭동의 장면도 생생하다. 고증(考證)이 치밀하여 사실(寫實)의 필력(筆力)을 자랑하고 있다. 역사소설 이외에 ‘현대’를 취급한 사회소설이다. 종교적 편집(偏執)과 교권주의에 맞서는 <도냐 페르펙타>(1876)나 <그로리아>(1887)가 그것이다. <포르투나타와 하신타>(1887)는 불행한 결혼을 한 두 여자를 사회적인 눈으로 관찰한 장편으로 원숙기의 사실소설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상의 개종(改宗)을 테마로 한 <안헤르 게라>(1891)는 갈도스의 톨스토이적인 일면을 엿보이게 한 장편이며, 갈도스는 19세기의 리얼리즘을 힘찬 필치로 20세기까지 가져온 최대의 작가였다.

모더니즘과 98년 사조편집

-年思潮 에스파냐 문학은 두 개의 운동으로 20세기를 맞이했다. 현대의 문학을 전망할 때 이 두개의 운동은 아직까지도 그 빛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하나는 ‘모더니즘’(근대주의), 그리고 또 하나는 ‘98년 사조’이다. ‘모더니즘’은 미를 추구하는 ‘예술’파, ‘98년사조’는 사상·정치·예술에 걸친 것을 말한다. ‘모더니즘’의 예술은 감각에 의해 생기는 내재적인 영원한 아름다움의 창조를 위해 형식을 닦고 과거의 양식을 종합하여 구성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다. ‘98년 사조’는 초절적(超絶的)으로 이 점에 있어 ‘모더니즘’에 대립하고 있다. ‘98년’이란 에스파냐가 대미전쟁(對美戰爭)에서 패배한 1898년을 뜻하는 것으로 황폐된 조국의 특이한 환경 속에서의 문학의 작용 내지 반작용적인 공명이었다. 전시대(前時代)를 부정하고 고전을 다시 평가하고 유럽에 눈을 돌림과 동시에 지방의 생활에 새로운 의의를 찾으려 했던 청년들의 혁신운동이었다. ‘모더니즘’ 활동은 니카라과의 시인인 루벤 다리오의 영향이 컸고 ‘98년’의 사상적 중심은 우나무노였다.

우나무노편집

Miguel de Unamuno (1864-1936) 에스파냐 사상가·시인·극작가·소설가. 살라망카 대학의 학장을 지낸 철학자로 소위 ‘98년대’ 작가이며 사상가였다. 사색의 태도는 단순한 순리(純理)의 추구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살과 뼈의’ 인간을 그 기반으로 하고 인간의 내부의식을 중요시했다. 이와 같은 태도로 <생의 비극적 의미>(1913)와 시, 그리고 <안개>(1914)와 같은 소설에서 신앙과 이성, 생명과 사상, 문화와 문명의 상극(相克)을 해명하고 <돈키호테와 산초>(1905)에서는 인생의 외적 행위를 논하여 돈키호테의 용기를 찬양했으며, 또한 <그리스도교의 고민>(1925)은 영원의 혼(魂)을 갈망하는 현대 에스파냐의 정신적 고민을 논했는데 이것들은 우나무노의 중심사상을 나타내는 주요 저작들이다. 시·소설·희곡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우나무노는 재능을 나타냈으며 소설이나 시는 본질적으로 그의 철학의 구현이었다. 소설 중의 인물이 작자의 사상을 말하고 철학적 대화를 통하여 그 묘사를 극도로 정리하는 독특한 형식의 작품을 썼다. <전쟁 속의 평화>(1897), <죽음의 거울>(1913), <안개>(1914) 등 작품이 많다. 우나무노는 실존주의라고 부르는 철학사조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우나무노는 에스파냐 내전(1936)이 시작된 날 사망했다.

아소린편집

Azorin (1874-1967) 에스파냐 소설가·평론가·본명은 호세 마르티네스 루이스. ‘98년 사조’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동남 해안에서 태어나 밝고 유연한 지중해적 성격은 감성을 낳게 했다. 짧은 문장의 단순한 문체도 그러한 감성의 소산이었다. 일상적인 하찮은 일이나 인물에 대한 사랑을 소설로 형성시켰고 모든 것에 대한 가치의 재발견, 정신적 전통의 재건에 힘을 썼다. <의사>(1902) <도냐 이네스>(1925) 등의 소설 이외에 <문학적 가치>(1914) <고전의 여백에>(1915) 등 평론집도 많다.

바로하편집

P o Baroja (1872-1956) 에스파냐 소설가. 페레스 갈도스 이후 20세기 전반(前半)의 대표적인 에스파냐 작가로 다작의 인물이었다. 바로하 소설의 본질은 플롯이나 성격 분석, 또는 그 줄거리의 형태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줄거리의 흐름이나 움직임이 먼저 앞선다. 그리하여 작자 자신은 거리를 두고 그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것은 향토인 바스크 지방을 소재로 한 <아이스고리가(家)>(1900)나 <모험아 사라카인>(1909) 등 초기의 작품으로부터, 하급사회를 취급한 <인생의 투쟁>(1904), 역사소설 <행동가의 회상>(1935), 내적생활의 <환상적 생활>(1902)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설의 특징으로 되어 있다. ‘98년 사조’작가의 한 사람인 바로하는 에스파냐 퇴폐를 냉정히 관찰한 비판자였다.

마차도편집

Antonio Machado (1875-1939) 에스파냐 시인. ‘98년 사조’ 작가의 한 사람으로 20세기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앙부의 카스틸라 지방의 풍토에 공감을 느껴 <카스틸라의 벌판>(1912)을 썼고, 이 작품에서는 그의 자연에의 애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극히 소극적이고 고독과 사색을 좋아했다. 초기 시집 <적요(寂寥)>(1903)는 지나칠 정도로 장식되지 않은 냉철한 작품으로 가사상태(假死狀態)의 에스파냐 현실에 분노를 터뜨렸다. 에스파냐 내란 후에는 프랑스에 건너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형인 마누엘도 같은 시인이었는데, 동생과는 작풍에 있어서 대조적이었다.

히메네스편집

Juan Ramon Jimenez (1881-1958) 에스파냐 시인. 에스파냐의 남단 모게르에서 출생한 그의 작품에는 안달루시아의 지방적 냄새는 거의 없었다. 초기의 <수심에 찬 아리아>(1903), <머나먼 정원>(1905), <엘레지>(1908) 등은 모더니즘 시인답게 자연이나 고독을 사랑하는 마음을 반영한 시집이다. 음울하면서도 화려하다고도 할 수 있는 소리나 색채로 충만된 시풍은 1916년경부터 시인들이 말한 소위 ‘벗은 시’에의 전개를 의미한다. 운율이나 형식 등 모든 외적인 장식을 버리고 순수한 형태를 자유시(自由詩)에서 구했다. <신혼 시인의 일기>(1917), <돌과 하늘>(1919) 이후의 작품이 곧 그것이다. 장편 산문시 <프라테로와 나>(1917)는 여러 나라의 국어로 번역되고 있으며 1956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후 얼마 안 가서 푸에르토리코에서 사망했다.

베나벤테편집

Jacinto Benavente (1866-1954) 에스파냐 극작가. ‘모더니즘’과 ‘98년 사조’의 두 종류와 상관없이 전시대의 ‘생활 사생문학’을 연극을 통해 이어받은 극작가. 도시의 상류생활을 세련된 필치로 예리하게 풍자한 <지명인>(1896), 심리극 <사모님>(1908), 우화극 <조작된 이해(利害)>(1909) 등은 각기 분위기를 달리하는 작품이며 이 밖에 아동극에도 손을 대었다. <바다를 난 나비>(1926)는 대표작인 <조작된 이해>와 함께 외국에도 많이 소개되었다. 20세기 전반의 에스파냐 연극을 발전시켰으며 또한 연극의 대표적 작가로 1922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블라스코 이바네스편집

Vicente Blasco Ibanez (1867-1928) 에스파냐 소설가. 정치에 흥미를 갖고 어릴 때부터 집을 떠나 파란많은 청년기를 보냈으며 시종 왕정반대의 필봉을 굽히지 않았다. 졸라의 영향을 받아 발렌시아 지방에서 소재를 얻은 향토소설<갈대와 진흙>(1902), <농가>(1898)는 자연주의적인 섬세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지금은 가장 높이 평가되고 있는 이들 향토소설에서 국내문제를 다룬 사회소설로 전향했으며 다시 유럽이나 남미(南美)를 무대로 한 말하자면 세계소설로 발전한다. <피와 모래>(1908)는 가끔 영화화되고 있으며, 특히 <묵시록의 네 기사>(1916) 등은 영화화되어 너무나 유명하다. 가끔 문장이 통속적이고 소설적 구성에도 약점이 지적되고 있으나 그 상상력·표현력이 풍부하고 유창하여 세계의 독자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가르시아 로르카편집

Federico Garcia Lorca (1899-1936) 에스파냐 시인·극작가. 에스파냐의 전통적 서정을 현대적으로 표현했으며 향토인 안달루시아의 마을을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드라마틱하게 노래했다. 최초의 <시의 책>(1927)에 이어 <집시시집>(1927)에서 그의 시는 성숙해졌다. 희곡 <동 페르린 프린의 사랑>(1933), <피의 결혼>(1933), <이에르마>(1934),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1936) 등 전부 에스파냐 연극에 있어 혁신적인 것이었다. 1931년경, 이미 실험극장을 결성하여 여행을 했다. 작품도 실험적인 시도를 구사했으며 항상 민중을 떠나지 않았다. 시는 주제나 그 형식과 수법이 잡다하고 음악적·연극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데 용어에 있어서는 어느 때는 철없이 보이고 어느 때는 신비한 베일에 싸여 있다. 에스파냐 내란이 일어났을 당시 최초에 살해를 당했다.

알베르티편집

Rafael Alberti (1902-1999) 에스파냐 시인·극작가. 후기 모더니즘에 속한 시인 <육지의 뱃사공>(1925)으로 일찍부터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했으며 에스파냐 내란 때에 남미(南美)로 망명하여 아르헨티나에 정주했다. 초기에는 초현실주의 사상을 비롯한 여러가지 영향을 받으면서 늘 작품 속에 자기의 특질과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발휘했으나, 최근에는 구도적(求道的)인 작풍으로 전향하고 있다. 대표작을 스스로 <시>(1943) 한 권에 선정 수록하여 발표했다. 희곡으로는 <프라드 미술관의 전야(戰夜)>(1956) 등이 있다.

1925년 사조 이후의 문학편집

-年思潮以後-文學 알폰소 13세 치하의 에스파냐의 지식인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거의 어떤 불만을 품고 있었다. ‘98년 사조’라는 식으로 말하자면 ‘25년 사조’의 젊은 작가·사상가의 배출이 바로 이 시기에 해당된다. 알폰소 13세의 부르봉 왕조는 1931년에 종막을 고하고 공화국이 수립된 후 민주적인 헌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 공화국도 실패로 끝나고 결국 1939년 이후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승리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25년 사조’의 사람들은 넓은 유럽적인 교양과 시야를 지니고 높은 비약에의 꿈을 안은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절대로 낡은 것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전(前)시대 사람들에 대한 존경이나 평가를 잊지는 않았으나 사상적으로 또는 예술에 있어서 가끔 대립되고 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1883-1955), 그레고리오 마라뇽(1887-1960), 살바도르 데 마다리아가(1886-1963), 아메리코 카스트로(1885- ? ) 등은 이 연대 이후의 에스파냐의 지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소설가로는 페레스 데 아알라(1881-1962)가 있고 그레게리아스라는 특이한 문학적 장르의 창시자 라몬 고메스 데라 세르나(1888-1963)도 이채로운 존재였다. ‘98년 사조’의 작가군에 있어서는 한쪽에 모더니즘 시인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25년대’ 이후에는 ‘후기’모더니즘의 카테고리에 속한 시인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호르헤 길렌(1893-1984), 헤라르토 디에고(1896- ? ), 비센테 알렉산드레(1898- ? ) 등이 바로 이에 속하였다. 이들은 에스파냐 시단에서 나름대로의 위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한편 가르시아 로르카의 독자적인 예술적 경지는 해외에서 주목을 끌었다. 20세기 중엽 후기까지 생존하여 예술활동도 비교적 길었던 작가 바로하와 시인 히메네스도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이에 계속되는 ‘25년 사조’의 사람들도 이미 젊지는 않다. 이렇게 하여 현재 겨우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 하게 되어 소설분야에서는 카밀로 호세 셀라(1916- )를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새로운 시인들도 많이 탄생되어 1930년 이후의 시인으로서는 루이스 로사레스(1910- ), 호세 루이스 카노(1912- ), 라파엘 모라레스(1919- ), 호세미에로(1922- ) 등을 들 수 있다.

길렌편집

Jorge Guillen (1893-1984) 에스파냐 시인. 후기 모더니즘에 속하는 시인으로 20여 년에 걸쳐 수년마다 작품을 추가해 온 시집을 갖고 있다. 현실과 정신의 융합이라는 에스파냐 시인의 전통을 계승받아 그의 ‘순수시’는 고전적 형식을 따르고 있다. 프랑스와 미국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며 학문적 저서도 있다.

살리나스편집

Pedro Salinas (1892-1951) 에스파냐 시인. 국내 또는 해외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했으며 살리나스의 시의 주제는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으나 그 작품에서는 낭만주의적 고민을 발견할 수 없다. 표현은 지적이며 무리가 없고 쉬운 현대어만을 사용했다. <전조(前兆)>(1923)가 처녀시집이며, 내란 때의 <사랑의 조리(條理)>(1936)와 그 이외의 다른 시집이 있다.

알렉산드레편집

Vicente Aleixandre (1898- ? ) 에스파냐 시인. 낭만주의와 초현실주의가 알렉산드레의 시에서 결합하고 있다. 알렉산드레는 “시인은 예언자이며, 시는 인간 속의 영원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말했으며 주위에 많은 젊은 시인들이 모여 현재는 그 원로적인 존재가 되어 있다. <마음의 역사>(1954) 이외에도 많은 시집이 있는데 그 형식에 있어서 장시가 많다.

알론소편집

Damaso Alonso (1898-1990) 에스파냐 시인. 유럽이나 미국에 대한 넓은 지식을 갖고 있으며, 시인인 동시에 세련된 학식을 가진 사람으로 현재 마드리드 대학 교수이다. 영미시(英美詩)의 번역도 있으며, 에스파냐 시의 연구 결과 <현대 에스파냐 시>(1952)를 저술했으며, 시집으로는 <도시의 시>(1921), <인간과 신>(1955) 등 수권이 있는데 깊은 성실과 감동을 전하고 있다.

바레아편집

Arturo Barea (1897-1957) 에스파냐 소설가. 어린시절에 여러 가지 직업에 종사하면서 생활이 어려워 독학을 했다. 에스파냐 내란을 극적으로 묘사한 <용기와 공포>(1938)를 발표한 후에 영국에 망명했다. 자서전인 3부작 <반역자 대장장이>는 처음에 영어로 발표, 그 후 남미에서 에스파냐어 판을 출판하고 이어서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많은 독자를 얻었다.

페레스 데 아얄라편집

Ra-mon Perez de Ayala (1881-1962) 에스파냐 시인·소설가·비평가. 공화정부 때 대사로 영국에 주재했으며 그 후 아르헨티나에 망명한 일도 있었다. 처음에는 시나 평론을 발표하고 있었는데 후에는 세련된 문장에 비꼬는 듯한 유머를 섞은 지적인 소설을 썼다. <시적 소설집>(1916), <벨라르미노와 아폴로니아>(1921), <호랑이 환>(1926)이 대표작이다.

카소나편집

Alejandro Casona (1903-1965) 에스파냐 극작가. 공화국시대에 <육지에 올라온 인어>(1934), <우리들의 나타차>(1936)를 발표한 후 아르헨티나에 망명했다. 이미 에스파냐에서 극작가로서 그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아르헨티나에서도 <새벽부인>(1944), <나무들은 말라죽는다>(1949) 등 작품마다 평판이 대단하여 극장에서는 관객을 많이 모았다. 꿈과 현실의 보기좋은 결합과 조화, 이것이 카소나의 희곡이었다.

센데르편집

Ramon Jose Sender (1902-1982) 에스파냐 소설가. 1935년에 국민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내란 후 미국에 망명하여 정주했다. 그의 작품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독자를 갖고 있지만 에스파냐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다. 아프리카 군대생활의 체험보고(報告) <이만(Iman)>(1929)이 처녀작이며 <반격(反擊)>(1938)은 우수한 내전소설(內戰小說)의 하나이다. <새벽의 역사>(1942)는 소년생활과 감정의 기록이며 <아리아도나의 다섯 권의 서적>은 반(半)자서전 소설이다. 테마나 그 작풍에 있어서 한 작품마다 변화를 주었으며 사회와 인간을 자연주의 수법으로 다룬 작가이다.

셀라편집

Camilo Jose Cela (1916-2002) 에스파냐 소설가. <파르쿠알 두아르테의 가족>(1941)은 엄격한 리얼리즘으로 우선 주목을 끌었으며 다시 내란 후의 마드리드의 서민생활을 음산한 터치로 묘사한 <벌집>(1951)으로 문명을 떨쳤고 현대작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이 외에도 <금발의 여인>(1955), <풍차>(1956) 등의 소설이나 시·수필·기행문 등이 있다.

순수네기편집

Juan Antonio de Zunzunegui (1902-1982) 에스파냐 소설가. 갈도스의 계보라 할 수 있는 에스파냐 리얼리즘 작가로 지나치게 관찰이 외면적이며 사실적이라는 비평도 있기는 하다. 최초의 장편은 <치리피>(1931)이고 이 외에 <파산>(1947), <지상선(至上善)>(1950),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1954) 등 마드리드나 빌바오를 묘사한 작품들은 주로 국내에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

라포레편집

Carmen Laforet (1921- ) 에스파냐 여류작가. <나다(아무렇지도 않다)>(1944)는 바르셀로나에 이사를 해서 거주한 한 여성의 생활을 소박하고 생생하게 그린 작품인데 이 한 작품으로 일약 문단에 데뷔했다. 이 작품은 에스파냐 내란 이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나다르상(賞)을 수상했다. 특히 이 작품은 주인공인 평범한 한 여성의 인생을 내다보는 작자의 리얼리즘이 너무나 투철했던 것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새로운 여자>(1955)는 간통사건을 소재로 한 것으로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었고 결국 첫 작품을 능가하는 작품은 쓰지 못했다.

 

 
포르투갈편집

포르투갈 문학편집

-文學 포르투갈 문학은 그 기원이 프로방스로부터 시작된다. 우선 서사시로 시작되는 최고(最古)의 것은 1189년의 것으로 음유시인(吟遊詩人) 파이오 소아레스 데 타베이로스의 서정적 연애시이다. 이때에 디니스 왕(王)을 비롯하여 많은 음유시인들이 배출되었다. 산문에서는 1192년의 <유산 분배의 서(書)>가 가장 오랜 문헌으로 이 밖에도 승려(僧侶)에 의한 성자의 언행록, 계보서(系譜書), 귀족 명부, 그리고 기사 이야기들이 있다.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에스파냐 시파에 속하는 궁정시가 유행되었으며 산문에 있어서는 궁정의 교훈적 산문과 로페스 등의 편년사(編年史)가 등장했다.

고전기편집

古典期 16세기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포르투갈도 문학의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이탈리아의 시형식(詩型式)을 도입한 시인 미란다, 국민극의 창시자 비센테, 묵가의 베르나르딘 리베이로, 그리고 포르투갈이 세계에 자랑하는 대(大)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의 시성(詩聖) 카몽이스 등이 유명하다. 이 세기는 포르투갈이 해외로 발전된 시기였기 때문에 핀토 등의 탐험기·여행기·역사서 등이 저술되었으며 17세기에는 희곡에서 메로, 종교방면에서는 유명한 비에이라와 베르나데스가 이채를 띠었으며 18세기에서는 시인 보가제의 이름을 빼어놓을 수가 없다.

낭만기편집

浪漫期 낭만주의시대에는 가레트, 에르쿨라노, 카스틸리오의 세 거장이 같은 시기에 탄생했다. 이 밖에 소설에서는 카스텔로 브랑코와 디니스가 주목된다. 1865년 이후를 사실주의시대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운동의 중심은 시인 켄탈과 문호 케이로스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 외에도 준케이로, 데우스, 브라가 등의 시인들도 있다. 또 고답파(高踏派)의 크레스포, 자연파의 베르데, 상징파의 에우제니오 데 카스트로 등이 있으며 동양의 일부를 소개한 수필가 모라이스의 존재도 잊을 수 없다.

20세기편집

-世紀 ‘근대주의’의 대표적 시인은 페소아, 소설에서는 아키리노 리베이로, 신사실주의 작가로는 페레이라 데 카스트로가 있으며 1950년 이후에는 루이스 등의 여류작가가 주목되고 있다.

카몽이스편집

Luis Vaz de Camoes (1525-1580) 포르투갈 시인. 출생지는 리스본인데 면학(勉學) 때문에 학문의 도시 코임브라에 1542년까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돈 조웅 3세의 궁정에서 일을 보았는데 1547년 북아프리카의 세우타에서 벌어진 무어인(人)과의 전투에서 오른쪽 눈을 잃었으며 그 후 고국에 돌아갔는데 1552년 궁정의 한 청년에게 상처를 입혀 체포되었다. 그 이듬해 석방되어 인도에 건너갔다. 그런데 이 투옥 중에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1572) 제1편을 썼다. 고아에서는 각지의 전투에 참가했으며 1558년에 마카오에서 부재자와 사망자의 재산관리인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다시 <우스 루지아다스>를 6편으로 완성시켰다. 그러나 직무태만으로 구속되어 고아에 호송되던 도중, 메콩강(江) 하류에서 조난당했다. 이때에 <우스 루지아다스>의 초고를 한 손에 쥔 채로 거센 물결을 헤엄쳐 나왔다고 한다. 고아에서는 다시 체포되었으나 1567년 고국을 향해 출발하여 리스본에 도착한 것은 1569년이었고 그 후 3년이 지난 다음 <우스 루지아다스>가 출판되었다. 국왕으로부터 연금을 지급받았지만 극도의 빈곤으로 신병을 앓는 중에 리스본에서 기구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불후의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우스 루지아다스>로서, 제명은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에 살았던 주신(酒神) 박쿠스의 아들이라고 하는 루조의 자손인 루지다니아인(人), 즉 포르투갈인(人)이라는 뜻인 것이다. 인도 항로 발견과 바스크 다 가마의 첫번째 원정을 축(軸)으로 한 극적인 줄거리를 부각시켜 포트투갈의 역사와 신화를 엮어 그 영웅적 위업을 높이 찬양하는 애국적 대서사시이다. 왕년의 대국 포르투갈의 위대함과 작자의 애국심이 전편에 넘쳐흐르고 있으며 11음절의 8연시(聯詩) 10편, 전부 1102절(節)로 되어 있어 포르투갈 국민의 성서라고도 할 수 있는 정신성을 갖는 문학이다. 서정시는 소네트, 대화체의 목가·비가·6연시·단시 등 여러 형태로 복잡하고도 섬세한 감정을 교묘하게 표현했는데 특히 소네트가 우수하며 <시집>(1595)과 세 개의 희극이 있다.

핀토편집

Fernao Mendes Pinto (1509?-1583) 포르투갈 여행가·저작가. 몬테모르 오 베리오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1537년에서 1558년까지 아프리카, 동양 등지에서 13번 포로가 되었고 17번 팔려가는 등 파란 많은 일생을 보냈다. 그의 저술 <순력록(巡歷綠)>(1614)은 인도, 아라비아, 중국, 일본에 있어서의 작자의 수많은 모험이나 진기한 풍경 등을 기록해 낸 책으로 허풍쟁이 핀토라고들 했으나 근년에 와서 그의 진실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가레트편집

Joao Baptista da silva Leit o de Almeida Garrett (1799-1854) 포르투갈 소설가·시인·극작가·정치가. 오포르토에서 태어난 아일란드계 사람으로 어린시절에는 한동안 아조레스 군도의 테르세라섬에서 보냈다. 입헌자유주의자였던 그는 1823년과 1828년 페드로 4세와 돈 미겔 친왕(親王)과의 정쟁(政爭)에 의한 내란 때문에 두 차례에 걸쳐 영국으로 망명했다. 이 망명에 의해서 이후 포르투갈에 낭만주의를 도입하게 되는데 내란은 돈 미겔의 전제파의 패배로 끝났으나 조국에 돌아와서는 정계와 문단에서 활약했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시에 있어서 포르투갈 낭만주의의 최초의 작품인 <카몽이스>(1825), 희곡으로는 근대 포르투갈극의 백미(白眉)인 비극 <수도사 루이스 데 소자>(1843)가 새로운 국민극을 형성했다. 소설에 있어서는 역사소설 <산타나의 공문(珙門)>(1845), 기행문학 <나의 향토여행>(1846) 등인데 가레트는 카밀로, 에르쿨라노와 함께 낭만주의 문학의 3대작가이다.

카스텔로 브랑코편집

Camilo Castelo Branco (1825-1890) 포르투갈 소설가. 리스본 출신으로 통칭 카밀로라고 부른다. 어려서 부모를 잃었으며 만년에 가서는 그의 아들까지 발광(發狂)했고 자기 자신은 실명되어 불치병임을 알자 스스로 권총으로 자살하기까지의 파란 많은 그의 일생은 그 자체가 이미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낭만파의 문호로 풍속소설의 창시자인 그는 근 260편에 달하는 소설·희곡·시·평론·번역 등을 남겼다. 이중에서 대표적인 소설은 <파멸의 사랑>(1862)으로 자기 숙부를 모델로 한 격정소설이며 또 사실주의적 경향을 나타낸 <미니오 이야기집>(1875-77)은 전원소설의 걸작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집 가운데서 주옥편이라고 할 수 있는 <마리아 모이제스>는 포르투갈 문학의 명장의 하나이며 이 밖에도 <에우제비오 마카리오>(1880), <플라진스의 브라질 태생 아내>(1882) 등이 있다.

디니스편집

Julio Dinis (1839-1871) 포르투갈 소설가. 오포르토 출신으로 본명은 조아킨 기리에르메 고메스 코에료라고 한다. <어떤 영국 사람의 가정>(1868)을 제외하고는 거의 미니오 지방의 전원소설을 써서 세상을 풍미했다. 부드러운 문장으로 청순한 사랑을 그렸으며 또 교훈적인 문체도 그 특색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교구장(敎區長)의 후견 아가씨들>(1867), <감자밭 주인의 외동딸>(1868) 등이 대표작으로 지금도 많은 부녀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작품들이다.

케이로스편집

Jose Maria E a de Queiros (1845-1900) 포르투갈 소설가·외교관. 포보아 데 바르진 출신으로 보통 에사라고 부른다. 시인 켄탈과 함께 포르투갈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이며 1869년 근동 여러 나라를 향해 출발했는데 이 여행이 종교감정의 기원이나 인간의 위선성을 취급한 <성자(聖者)의 유물>(1887)을 쓰게 된 바탕이 되었다. 그는 1873년 하바나 영사가 되고 외교관으로 구미 여러 나라를 전전했으며 파리에서 객사했다. 1866년-1875년 초기에는 낭만파에 속해 있으면서 <가제타 데 포르투갈>지(紙)에 기고했었는데 1875-1887년에는 승려의 죄많은 연애를 소재로 한 <신부(神父) 아마로의 죄>(1875)로 사실소설로 전향하여 타인의 아내 불륜을 그린 <종형 바지리오>(1878), 근친상간을 테마로 한 <마이아가의 사람들>(1888) 등의 대작을 썼다. 1887년 이후에는 <성자(聖者)의 유물> 이외에 지방의 소시민의 생활을 묘사한 <명문 라미레스가(家)>(1900), 도시의 반자연적 생활을 비판한 <도시와 산국(山國)>(1901) 등의 명작을 썼다. 그의 작품에는 세련된 감수성, 예민한 비판감각 양식, 보기 드문 예리한 심리적 통찰력 등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함부로 외국어를 사용하거나 고전적인 순수성이 결여되었다고는 하지만 유연성이 있는 적절한 표현으로 포르투갈의 산문을 혁신했다. 또한 날카로운 관찰력과 유머와 풍자에 넘치는 근대적 문체로 사회를 비판했다. 에사는 포르투갈 문학을 탄생시킨 근대 최대의 소설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페소아편집

Fernando Antonio Mogueira Pessoa (1888-1935) 포르투갈 시인. 리스본 출신으로 카몽이스, 켄탈과 함께 포르투갈의 대표적 시인이다. <오르페>지(誌)(1915)를 가지고 모더니즘 시파(詩派)를 개척했으며 알바로 데 칸포스, 알베르트 카에이로, 리카르도 레이스라는 별명을 썼다. 시집 <전언(傳言)>(1934), 영어로 된 시집 <영시(英詩)>(1921)가 있는데 그의 중요성은 점차 인정되고 있다.

주제 사라마구편집

Juje Saramagu (1922- ) 포르투칼 소설가. 1922년 포르투칼 중부 지역에서 태어나 3세 때 수도 리스본으로 이주했다. 고등학교만 마치고 기능공, 공무원, 번역가, 평론가, 신문기자, 잡지사와 출판사의 편집위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사라마구는 1947년 첫 소설 <죄악의 땅>을 발표했으나 우파독재자 살라자르 시절 내내 문학창작보다는 정치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본격적으로 문학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66년, <가능한 시> 라는 시집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시, 소설, 희곡, 콩트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발표했지만 문학적 명성을 공고히 한 작품은 79년작 <바닥에서 일어서서>다. 이후 <수도원의 비망록>(1982년), <돌로 만든 뗏목>(1986년) 등이 크게 인기를 얻으며 그의 작품은 25개 국어로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작품은 독자들을 몹시 긴장시키는 것으로 유명한데 소설 속에 쓰이는 문장부호는 마침표와 쉼표뿐, 직간접 화법조차 구분하지 않는다. 거기에 눈에 보이는 사실의 세계에 얽매이지 않고 초자연적인 요소까지 수용하는 거대한 상상력이 특징이다.1998년 95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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