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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조의 詩는 좋은 詩가 아니다
2016년 05월 15일 00시 11분  조회:4765  추천:0  작성자: 죽림
이창배 교수의 시 창작 특강;

교훈조의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교훈시나 교훈조의 시는 시가 아니라는 말은 어불성설이지만 서정시를 논하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엔 그것이 좋은 시라고 하기 어렵다. 교훈시는, 혹은 교훈조의 시는 엄격히 말해서 운문으로 쓰여진 설교문, 訓話라고 할 수 있어서 같은 뜻이라도 산문으로 쓰여졌을 때보다 기억하기 쉽고 교훈적 효과가 크다. 우리나라의 시조 대부분의 경우가 그러하다. 시조는 그 간결한 표현과 기발한 비유에도 불구하고 엄격히 말해서 시라기보다는 교훈을 담은 격언이고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조가 애송되는 까닭은 거기에 운문에서 오는 기쁨이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서적 표현이 아니고 이념적 '논술'이기 때문에 산문의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내용면에서 종교적 도덕적인 지식, 철학적인 지식이 주가 되는 개념의 전달일 뿐 감정적 체험은 아니다.
시인 중에서도 상상력보다는 개념적 사고 능력이 우세한 시인들의 작품에서 교훈조의 시를 많이 볼 수 있다. 영국 시인 중에는 신고전주의 시대의 풍자시인들, 드라이든, 포우프 등의 시를 교훈시 혹은 '논설시'라고 부를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이광수, 설창수 등의 시를 교훈시라고 할 수 있다. 이광수는 본인이 자신을 시인이라고 자신있게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독자들은 그를 시인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러 편의 시를 썼고, 그 대부분이 교훈조의 시들이다. 그는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시에서도 인간의 존엄함, 사랑의 고귀함, 우주질서의 오묘함과 같은 서구 계몽시대의 도덕철학을 문학의 형식에 담은 계몽사상가이고 도덕적 설교사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빛'이란 시는 이광수의 교훈족 시세계를 잘 보여준다.


만물은 빛으로 이어서 하나,
중생은 마음으로 붙엇 하나,
마음 없는 중생 있던가?
빛 없는 만물 있던가?
흙에서도 물에서도 빛은 난다.
만물이 탈 때에도 온몸이 모두 빛.

모든 별과 나,
빛으로 얽히어 한 몸이 아니냐?
소와 나, 개와 나,
마음으로 붙어서 한 몸이로구나.
마음이 엉키어서 몸, 몸이 타며는 마음의 빛.

항성들의 빛도 걸리는 데가 있고
적외선 엑스선도 막히는 데가 있건마는
원 없는 마음이 빛은 시방(十方)을 모두 비쳐라.


이광수는 위 시에서 빛과 마음으로 만유가 한 데 묶여 있다는 계몽시대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존재의 사슬'과 유사한 관념론적 주장을 내세운다. 그 사상은 불교의 '보편불성' 혹은 범신론이 만유신성론에 해당한다. 이와 아주 흡사한 사상이 미국 시인 에머슨의 [개체와 전체 Each and All]에서도 볼 수 있다. 에머슨은 19세기 미국의 초절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철인이고 시인이다. 그 역시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교훈조의 시를 써서 철학적 주장으로 독자를 효과적으로 설득시킨다. 이 장시의 마지막 6행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머리 위에 빛과 신성으로 가득한
영원의 하늘이 솟아 있다.
다시 나는 말하고, 다시 나는 들었다,
저 굽이치는 강물 소리와 아침 새소리를……
나의 다섯 감각에 美가 스며들어
나는 이 완전한 총체에 몸을 내맡긴다.


이 시에서 에머슨은 우주질서의 완전함과, 그 안에 사는 인간의 환희와 기쁨을 노래했다. 다음 시는 설창수의 시 [민족의 바다]라는 시이다. 이 시인 역식 이광수나 에머슨과 같이 일체만상이 화합하고 민족은 같은 유대에 묶여 있음을 주장한다. 민족동포사상의 찬가인 셈이다.


一切는 아름다워라 -
찢어봐도 兄弟
씹은들 姉妹

千萬 千萬 또 千萬……
은실 금실 谿流는 흘러간다
巖壁에 부딪쳐 가루나도
다시 모여 靑潭이 되다.

千年 千年 만만년 -
흘거감만 凜凜하여라.
咆哮도 憤激도 旋回도
비약도 沫散도 저주까지도
오로지 함께 절대의 交響.

千里 千里 三千里 -
금수 찬란 山河 森羅하고나
녹슬어도 이끼 묻어도
헐어져 있어도 조각져 있어도
거룩할손 나의 것.


전체 6연 중 4연의 인용이다. 이렇게 몇 세대 이전의 시에서 예를 드는 것이 부적적한 것을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또 한 편 전형적인 교훈조의 시를 인용해보겠다.


……
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휴식처에
그대 혼자만이 가는 것이 아니고, 이보다 더
장엄한 잠자리를 바랄 수도 없느니라. 그대는 눕게 된다,
원초시대의 족장들과 함께 - 그리고 제왕들,
지상의 강자들과 함께 - 현인들, 선인들,
미인들, 그리고 과거시대의 백발의 예언자들과 함께,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무덤 속에.

……
그러니 살다가, 저 신비의 나라, 제각기
죽음의 침묵의 궁전에서
자기 방을 차지하고 있는 그 무수한 대열에 참가하라는
소환장이 오거든, 그대는, 채찍에 맞아 토굴로 들어가는
채석장의 노예처럼 가지 말고, 태연자약하게
부동의 신념으로 그대의 무덤으로 가라,
잠옷을 몸게 감고
상쾌한 꿈나라로 향하여 자리에 눕는 사람처럼.


이상은 미국시인 브라이언트 Bryant의 [死觀]이란 시에서의 인용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인간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물로 환원하는 것이고, 죽음은 인간의 운명이고 영원한 자연의 섭리인즉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죽음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설교한다.
이상 인용한 몇 편의 시에서 본 바와 같이 이 시들은 한결같이 시의 형식을 빌어서 어떤 신념이나 주의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신념이나 사상이 시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형상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나의 주장이다. 즉 엘리엇이 말했듯이 사상이 장미 향기처럼 감각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를 설명하기 이해서 대표적인 현대시 두 편에서 그 실례를 들어본다. 다음에 인용하는 딜런 토마스의 [런던의 한 아이의 불타 죽음을 슬퍼하지 않으련다]라는 시는 태초 이래 인간은 죽어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죽음을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死觀을 피력한 시로서 앞서 인용한 브라이언트의 시의 주제와 동일하다.


인류가 창조되고
새, 짐승, 꽃이 창생되고
만물의 겸허한 암흑이
정적으로써 마지막 광선의 트임을 알리고
고요의 시간이
질서 있게 혼돈의 바다에서 생기고

나는 둥근 물염주의 시온성당에
그리고 보리이삭의 유태인 교회당에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음성의 그늘에 기도시키거나
베옷의 아주 작은 골짜기에
나의 소금 종자를 뿌려서

불타 죽은 그 애의 장엄한 죽음을 슬퍼하지 않으리라.
나는 더 이상
순진과 젊음의 죽음을 슬퍼하는 哀歌로써
엄숙한 진실을 안고 간 그 애의
인류를 살해하거나
생명의 성지를 모독하지 않으리라.

최초의 죽음과 함께 런던의 아이는 누워 있다.
오랜 동무들과
세월을 초월한 낱알과 그 어머니의 검은 혈액에 싸여서
물결치는 템즈강의
슬퍼하지 않은 강변에 아무도 모르게 누워 있다.
최초의 죽음 후엔 죽음이란 없다.


이 시에는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또는 '죽음 후엔 죽음은 없다'와 같은 역설적인 표현, 그리고 '보리이삭' 또는 '음성의 그늘' 같은 기발한 메타퍼 때문에 읽기가 그리 쉽지 않지만 주제는 비교적 단순하다. 이 시는 2차대전 때 런던에 가해진 독일의 폭격으로 한 아이가 죽은 것을 보고서 시인 자신의 사관을 피력한 시이다. 시인은 말하기를 지상에 빛이 생기고 만물이 창조되고 역사가 시작된 후 우리 인간은 죽어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합쳐지는 것이니 눈물을 흘려 죽은 아이를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불타서 죽은 런던의 그 아이는 태초 이래 죽어간 무수한 친구들과 더불어 대자연의 품안에 누워 있다. 실로 죽음이란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한 것이니 필요없이 슬퍼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최초의 죽음' 후에 운명적으로 인간에겐 죽음이 정해진 것이니까 새삼스러이 죽임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1연은 천지창조 시의 암흑과 고요의 혼돈 속에서 최후의(우리 쪽에 말하는 최초의) 빛이 터지고, '시간'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2연 '둥근 물염주의 시온성당'이란 말은 자연물의 이미지이고, 염주는 시온성당과 함께 종교적 이미지이기 때문에 인간은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가고 신에게로 돌아간다는 뜻이고, '보리이삭의 유태인 교회당'도 똑같이 자연물('보리이삭')과 기도의 장소를 결합시킨 메타퍼이다. '음성의 그늘'에서 그늘은 슬픔을 의미하기 때문에 '슬픈 음성'이란 뜻이다. '베옷의 골짜기'는 슬픈 가슴에 대한 비유이다. 베옷은 성경에서 죽은 사람을 애도할 때 허리 아래를 가리는 베로 된 천을 말한다. '소금종자'는 눈물을 말한다. 3연에서 '인류를 살해한다'는 말은 런던의 폭격으로 죽은 아이는 인류의 대포라는 뜻과, 사람이 죽은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인즉, 그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곧 살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생명의 성지'는 카톨릭에서 십자가 순례하는 14개의 예배 장소와 관련되는 말이다. 4연 '세월을 초월하는 낱알과 그 어머니의 검은 혈액에 싸여서'라는 말은 이전에 죽은 모든 인간들이 인류 근원의 모체 혈관 속으로 환원되었음을 말한다.
이상 해설에서 본 바와 같이 시인은 이 시에서 죽음에 대한 사상이나 이념을 주장한즌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을 표상하는 수많은 이미지를 제시하여 독자의 감각적 체험을 유도할 뿐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시도 같은 현대시인 엘리엇의 유명한 시 [번트 노튼]중의 한 섹션이다. 이 섹션에서 엘리엇은 이광수나 에머슨과 마찬가지로 이 혼돈의 세계 너머의 조화와 질서의 세계를 구체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


진흙 속에서 마늘과 청옥은
파묻힌 車軸에 엉겨붙는다.
핏속에서 떨리는 철선은
만성의 성처 밑에서 노래하며
오래 잊혀진 전쟁들을 달랜다.
동맥에 전해진 舞蹈와
淋巴의 순환이
성좌의 운행에 표상되고
위로 올라가 나무 아래에서 전성한다.
무늬진 나뭇잎에 내리는 빛 속에서
우리는 움직이는 나무 위에서 움직이며
아래로 질퍽거리는 바닥에서
쫓는 사냥개와 쫓기는 멧돼지가
전과 다름없이 그들의 패턴을 쫓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성좌 속에서는 조화되어 있고.


위 시에서 시인은 이 세상의 미천한 것과 희귀한 것의 상징으로 마늘과 청옥을 제시하여 그것이 진흙 속에서 파묻힌 차축에 엉켜붙는다고 말한다. 진흙은 혼돈과 무질서의 이 세계를 의미하는 것인즉 마늘과 같은 범속한 것과 진귀한 보석이 무질서의 혼돈 속에 공존하지만 보이지 않는 우주의 원리(차축)에 의하여 통솔되고 대질서를 이루어 차바퀴가 돌듯이 돌아간다. '핏속에 떨리는 철선은 / 만성의 상처 밑에서 노래한다'는 말은 움직이는 세계가 전파를 통하여 메시지가 전달되듯이 우리의 혈관 속에서 그 고동이 느껴지며, 본능적인 생명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비록 우리가 원죄(만성의 상처)를 짊어지고 있을망정 창조 당시의 하늘에서의 천사들의 싸움을 잊고 살아감을 말한다. 혈액의 순환을 통한 생명의 기쁨을 '동맥에 전해진 무도'라 하였고, 동맥이나 임파선의 순환과 같은 소우주적인 조화상은 대우주적인 성좌의 운행의 조화상과 상응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체 내의 동맥과 임파선의 순환을 나무의 수액에 비유하여 그것이 가지로 올아와 잎과 꽃이 피듯이 인간적 질서가 나무를 통하여 우주적 질서로 바뀐다고 하였다. 이 나무는 차축을 의미하며 우주의 중심 로고소 즉, 신의 세계이다. 시인은 이제 세속을 초월하여 '움직이는 나무'의 상공에서 천국의 빛을 받고 있는 듯이 햇볕받아 무늬지는 나뭇잎을 아래로 바라보며 움직이고 있는 듯한 환상에 젖는다. 그렇게 초월한 입장에서 보니 질퍽거리는 하계에서 '쫓는 사냥개와 쫓기는 멧돼지'의 생존투쟁의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이 투쟁과 갈등의 현상이 천국에선 조화의 양상으로 바뀐다.
이상 딜런 토마스와 엘리엇은 다같이 시에서 생각을 이밎로 통해서 전개키시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사람 사이에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토마스의 경우는 그 이미지가 주로 생과 죽음, 종교의 사상에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끝내 초월이 없이 생명세계에 집중되어 있는데 반하여 엘리엇에게서는 그것이 인체나 자연물에 관련지어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무도' '순환' '조화'와 같은 중심적 우주 질서의 사상에 이끌리는 듯한 상향적 자세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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