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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잊지말자]- 윤봉길, 그는 누구인가...
2016년 07월 16일 19시 45분  조회:6847  추천:0  작성자: 죽림

1932년 4월 29일, 조국 광복을 위해 중국 홍커우공원(지금 로신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사람이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윤봉길 의사 입니다.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민족을 위해 큰 결심을 했던 윤봉길 의사의 삶과 독립운동, 그 현장의 이야기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볼 까요?

 


 농민독본(1927) 
우리말을 가르치고 농민의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기 위하여 윤봉길 의사가 직접 만든 책 (충의사 소장)

 

 부흥원 건물 전경
윤봉길 의사가 야학회, 월진회 등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건물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난 윤봉길 의사는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배우고 책과 잡지를 읽으면서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일제가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로 빼앗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우리민족을 탄압하자 윤봉길 의사는 농민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1926년 야학당을 만들고 농촌의 부흥을 위해 부흥원, 월진회를 세워 농민조합 활동을 하였습니다.

 

 만주를 침략하는 일본군

 

1929년 부흥원을 세운 윤봉길 의사는 학예회를 열고 이솝우화 '토끼와 여우'를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였습니다. 이 연극은 마을 사람들을 일깨우고 많은 박수를 받았지만 일본 경찰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윤봉길 의사의 농촌운동을 심하게 감시 했습니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불타고 있는 상하이 

 

그 당시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고 또 한편으로는 한국과 중국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만보산 사건'을 일으켜 중국에서 독립운동이 매우 어려워 졌습니다.

 


 '만주국'을 인정하는 회의 모습

 

일본 경찰들의 감시로 농촌운동에 한계를 느낀 윤봉길 의사는 1930년 23살 되던 해에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글을 남기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떠납니다.

 


 윤봉길 의사의 유묵 <장부출가생불환>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한국애국단 입단 선서식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의거 소식을 들은 윤봉길 의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을 직접 찾아가 거사에 참여 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한국애국단에 가입 했습니다.

 

 

4월 29일 김구 선생과 아침 식사를 마친 윤봉길 의사는 전날 새로 산 시계를 꺼내며 말했습니다. '이 시계는 이제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 제 것하고 바꾸시지요.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윤봉길 의사는 김구 선생의 낡은 시계를 차고 홍커우공원으로 향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오전 9시 30분경, 일제의 승전 기념식 1부가 시작되어 군사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이어 11시 30분경 기념식장 무대 위에 상하이를 침략한 일본 장군들과 대표가 올라왔습니다.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끝나갈 무렵 윤봉길 의사는 일본 헌병들을 제치고 무대를 향해 폭탄을 던졌습니다.

 


 홍커우공원 행사장의 일본군 열병식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지는 순간 상황도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은 중앙 무대에 정확히 떨어졌습니다. 시라카와 대장은 다음날 죽고, 노무라 중장과 우에다 중장등 한반도와 중국 침략에 앞장선 일본인 다수가 중상을 입었습니다. 의거는 성공했지만 윤봉길 의사는 그자리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거사 후의 행사장 모습
 

 

 

의거 소식을 들은 중국인들은 한국과 힘을 합쳐 일제에 맞서 싸우자고 다짐했습니다. 한인 학생들이 중국의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와 맞서 싸울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이 성립되었습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1940.9.17)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식군대인 한국광복군을 만들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군사훈련과 전투에 참여 

 


 한인 학생 특별반을 만들었던 중국 낙양군관학교의 현재 모습

 

의거 이후 일제의 감시가 심해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게 되었지만 중국 주요 인사들과 동포들이 임시정부를 지원하여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윤봉길 의사 의거후 중국인들의 항일운동 시위와 포스터

 

윤봉길 의사의 용감한 의거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의 국민당 총제 장제스는 중국 땅에서 벌어진 한인 청년의 의로운 행동을 칭찬하며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중국군 30만 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 혼자 해냈다." 라고 말하며 이 의거를 주도한 한인애국단과 김구선생, 나아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사기가 꺾여 욕심을 포기하고 전쟁을 멈추는 협정을 중국과 맺었습니다. 행사장에 와 있던 외국 기자들이 의거 소식을 전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윤봉길 의사 의거를 보도한 세계의 신문들

 

상하이에서 터진 폭탄은 세계의 관심을 불러 왔습니다. 홍커우공원에는 일제의 기념식을 취재하기 위해 외국인들이 많이 와 있었습니다. 외국 기자들은 윤봉길 의사 의거 소식을 발빠르게 알리면서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했지요. 그리고 김구 선생의 편지와 윤봉길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에 대해 감탄하며 기사를 써서 널리 알렸답니다. 그래서 외국에 있는 동포들이 이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로 보냈습니다. 

 

 


 순국 직전 윤봉길 의사의 모습 

 

일제는 윤봉길 의사에게 서둘러 사형선고를 내리고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일제는 총살형을 집행함으로써 윤봉길 의사에게 최대한의 보복과 응징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죽음은 우리의 독립을 앞당기고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려는 거룩한 순국이었습니다. 

 


 순국한 윤봉길 의사 

 

 

사형 당일 일본인 검찰관 네모토가 사형을 집행할 것을 알리며 윤봉길 의사에게 유언을 물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침착하고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죽음은 이미 각오한 것이다. 할 말은 없다." 였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희생으로 국내외 동포들이 독립의지를 다지고 중국과 함께  항일운동을 펼친 끝에 1945년 8월, 마침내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암매장된 유해를 찾아 고국으로 모셔옴으로써 윤봉길 의사는 그토록 그리던 광복된 조국에 묻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던 광복을 기뻐하는 사람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중칭 연화지청사에서 귀국하기 전날 찍은 기념사진 (1945.11)

 

나라를 되찾게 되자 '임시정부유해발굴단'은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46년 3월 윤봉길 의사를 묻을때 불경을 읽었다는 각존원의 야마모토 류도라는 여승의 고백으로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윤봉길 의사 유해 발굴 장면

 


 1946.7.7 국민장으로 거행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의 장례식

 

윤봉길 의사를 화장 했다고 거짓으로 알려놓고 몰래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묻어두어 그 시신조차 찾지 못하게 한 것이지요. 하지만 양심 있는 일본인의 고백으로 늦게나마 윤의사의 유해를 찾아 고국으로 모셔올 수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민족에게는 희망과 미래가 없다고 하잖아요. 다시는 이러한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역사속에서 배우고 되새겨 나라사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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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사가 친필 작성한 민간 농촌운동단체 월진회(月進會)의 창립회원 명부가 최초로 공개.

농촌부흥운동 차원에서 설립한 월진회, 37명의 명부.

월진회는 1929년 4월23일 윤봉길 의사가 중국으로 망명하기 직전 자활적인 농촌진흥을 목표로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세운 민간 농민운동단체다. 월진회가 벌어들인 돈으로 농가를 지원해 자립시키는 활동을 펼쳤다. 부업을 희망하는 농가에 새끼돼지를 나눠주거나 양계사업과 유실수재배 산림녹화 등을 통해 농촌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이 명부를 소장해 온 기념사업회의 윤주 부회장은 "월진회는 이름 그대로 날로 앞으로 나아가고 달마다 전진하자는 목표 아래 실력 배양과 경제 부흥을 통해 조국독립을 이룩하고자 설립된 조직"이라며 "윤봉길 의사의 월진회 정신은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시대정신"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국민통합과 경제도약 그리고 조국 선진화는 80여 년 전에 이미 윤봉길 의사가 전개했던 전진운동을 계승, 실천하면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봉길 의사가 직접 쓴
월진회 창립 취지서 전문>

만천하의 동포여! 18억의 인류가 생명 그것으로 말미암아 생존경쟁에 천촉되어 만감(萬感)이 교지(交至)하매 그 좁은 심장이 찢어질 뿐이다. 만감(萬感) 만상(萬想)이 그 과연 어떠한 감상일까?

그야 물론 천차만별이겠지마는 일언이 폐지하면 고락(苦樂) 두 자로 편성되었도다! 환언하면 즉 남과 같은 사업을 성공하려고, 남과 같은 행복을 안형(安亨)하려고 노력을 할 때에 도덕과 인륜(人倫)을 허신적(許身的) 같이 내어 버리고 자아주의 (自我主義)로 황금만능을 부르짖으며 예의도 없고 염치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관자(管자) 왈 창름(倉凜)이 실(實)이라야 지영욕(知榮辱)이라 하였고, 맹자 왈 인무항산(人無恒産)이면 구무항심(苟無恒心)이라 하였으니 신사언야(信斯言也)하여 현대를 고찰하면 우리는 자작자급(自作自給)에 힘을 써서 나의 전도를 내가 이행(履行)하며 나의 운명을 내가 개척지 아니하면 불가한 것은 삼척동자도 지실(知悉)하는 바이다.

근위무가지보(勤爲無價之寶)요 천불능궁력사가(天不能窮役事家)라 하였으니 근검하면 될 것은 자연의 이치요, 춘불경작(春不耕作)하면 추무소망(秋無所望)이라 하였으니 노후에 안락을 누리려면 유시의 근검 저축은 당연지리요 불가결자(不可缺者)이다.

태산이 불양토양(不讓土壤) 고로 능성기대(能成其大)하였고 하해(河海)가 불택세류(不擇細流) 고로 능취기심(能就其深) 하였나니, 유원(維願) 첨위(僉位)는 물이망언(勿以妄言)으로 치지도외(置之道外)하시고 묵연히 과거를 회억(回憶)하시며 미래를 연상하시와 성연분비이(成然奮臂而) 본회에 광림하시와 원조하심을 경요(敬要) 함.

송한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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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윤봉길 의사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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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윤봉길은 파평 윤씨이고요,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습니다. 큰아버지가 가르치는 서당에 다니면서 글을 배운 윤봉길은 고향에서 글을 모르는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계몽 운동을 했지요. 그는 열다섯 살에 배용순과 결혼해서 아들 두 명을 낳았습니다. 윤봉길은 좀더 큰 세상에 나가 할 일을 찾아보자고 다짐하고 식구를 고향에 둔 채 혼자 중국으로 갔습니다...

    상하이에 도착한 윤봉길은 안공근을 알게 됐습니다. 안공근은 안중근의 동생인데, 임시 정부에서 일하고 있었죠. 안공근의 소개로 김구를 만난 윤봉길은 이봉창이 했던 것처럼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1932년 일본군의 상하이 이사변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거류민단장과  파견군사령관 등 여러 일본군 부대장들을 살해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오사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순국했던 겁니다.

    윤봉길의 의거는 침체돼 있던 임시정부를 되살리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김구는 윤봉길이 참 고마웠겠죠? 김구는 윤봉길을 잊지 않고 가슴에 묻어 뒀다고 해방이 되자마자 그 유해를 찾아나섰습니다. 김구의 노력으로 윤봉길의 유해는 1946년 고국의 품에 돌아와 지금의 서울 효창 공원에 묻혔답니다. 그리고 윤봉길의사에게는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죠.

    ...


     
  • 채택된 답변답변

    윤봉길 의사 직계 후손들의 근황
    윤의사는 부인 배용순(裵用順·88년 작고)여사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윤의사 의거(1932년) 당시 장남 종(淙)은 세 살이었고, 둘째 담(淡)은 배 여사 뱃속에 있었다. 둘째 담은 두살 때 영양실조로 일찍 세상을 떴다.
    일제때는 일제의 방해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장남 종(淙)씨는 해방후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10여 년간 농수산부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84년 간경화로 타계했다.
    윤의사의 부인 배여사는 남편없이 외아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다가 88년 82세로 작고했는데 배여사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윤의사 의거 50주년인 82년 배여사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는데 이 해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배용순 효부상’을 제정, 매년 윤의사 의거일인 4월29일 예산 충의사(忠義祠)에서 시상해오고 있다.
    현재 윤의사 직계후손 가운데 가장 웃어른은 윤의사 며느리 김옥남(金玉南·73)씨. 김씨는 딸 여섯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김씨는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金信) 장군이 교통부장관 재직시절 김포공항에 스낵 가게를 주선해줘 겨우 살림을 꾸려왔다”며 “윤의사의 후예 7남매를 모두 반듯하게 키운 것이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윤의사의 유일한 손자 주웅(柱雄·35)씨는 고려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였으며, 97년에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두었다. 주웅씨 위로 누나 여섯 사람도 모두 출가했다.

    =========================

     

     

     

     

                        △ 의거에 사용되었던 도시락폭탄.  

     

     

     


     

     ◁ 폭탄을 던진 후 현장에서 일본 헌병들에게

         연행되는 윤봉길 의사.

     

     


     

    ◁회중시계는 1932년 4월 29일 김구주석과

    최후로 작별할 때 정표로 서로 바꾸어 가진

    것으로 윤의사 순국 후에 일본정부에서 인장과

    함께 보내온 것이다.

    →(백범일지)

    윤군은 자기의 시계를 나에게 꺼내어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저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시간 밖에는 쓸 수가 없으니까요' 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군에게 주었다.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줬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하고 묻는 내말에 윤군이 '자동차 값

    주고도 5,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하였더니 윤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였다.

    자동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 공원을 향하여 달렸다.

     
     



윤봉길 의사 친필 유서

 

<유서 - 강보에 싸인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유서 - 동포에게 보내는 글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들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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