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과 시적 자아
―김영남 작품론
박철화(평론가)
김영남은 성실한 시인이다.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단에 얼굴을 내민 이후 꾸준히 시 만들기의 길을 걸어왔다. 불과 한 해 뒤에 첫 시집 『정동진역』을 낸 것이야 긴 습작기간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두 번째 시집 『모슬포 사랑』과 그에 이어진 작품들을 보면 이 시인이 서두르지도, 그렇다고 게으르지도 않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성실하다.
그는 또 열성적인 시인이다. 첫시집의 「자서(自序)」는 제목처럼 정동진역의 카페에서 쓴 것인데, 마치 이후 시인의 삶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시의 대상을 찾아서 여기저기를 누비고 있다. 안 가는 곳이 없다. 바쁜 직장생활 틈틈이 멀리 제주도의 땅 끝 모슬포까지 가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여행은 단순한 공간적 자리 옮김으로 그치지 않는다. 시간을, 삶의 새로운 풍경을 찾아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공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의 대상을 발견하려는 시인의 열정이 더 두드러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아주 재미있는 시인이다. 실제 작품 속에서 구사하는 유머와 능청, 풍자 등이 그러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더해져 하나의 시론(詩論)을 이루고 있음이 더 흥미롭다. 여러 평자가 지적하기도 한 면모이지만, 그는 공급보다는 수요 위주의 작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반성하라!
경영, 경제학을 모르는 자.
효율, 효과를 모르는 자.
떠나라!
수요를 무시하는 자.
공급 위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자.
공부하지 않고 시위 현장에 따라나온 나는
아예 자폭하라!
그러나 벽, 인식의 벽, 고정관념의 벽……
그 벽들을 올라타는 재미를 아는 또다른 나는
살아라!
그 모든 학문에서, 아 답답한 이 시(詩)의 현장에서……
―「그 시위현장이 나를 성토하고 있다」 전문
‘인식의 벽’ ‘고정관념의 벽’을 깨기 위해 그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다양하긴 하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독자들이 읽고 즐거워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그는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세계를 추구한다. 엘리트들의 언어의식과 세계관을 표현한다는 전래의 시적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데서 그의 시는 출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가 대중 추수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평이한 세계는 자칫 잘못해 언어의 밀도가 떨어질 땐 시적 긴장을 잃는다. 대중적인 시는 많은 경우 익숙하다 못해 진부한 이미지와 평면적인 진술로 해서 독자들을 긴장시키지 못한다. 그에 반해 김영남은 시인과 독자를 함께 묶을 수 있는 시적 긴장을 찾아헤맨다. 시인은 그것을 “시의 오브제를 올라타”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첫시집의 해설자가 요령 있게 지적하고 있다.
시집을 덮고 딴 일을 하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구절, 그 구절의 우스꽝스러움. 기발한 상상력. 유쾌한 유머 감각. 다음 수에 대한 궁금증과 게임 도중의 팽팽한 긴장감. 이것이 김영남의 시다. 설사 시인이 놓은 여러 개의 덫에 다 걸려들지 않더라도 독자는 충분히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그는 예측 불허의 수를 무척 자주 놓기 때문에.
김영남은 독자가 수동적으로 편안히 시를 좇아오도록 결코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치 어린 시절의 소풍에서 보물찾기를 하듯 그는 곳곳에 단서를 마련해둔다. 그 단서 때문에 독자는 시적 엘리트주의의 난해함 앞에서 절망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대중적 진부함 속에서 권태로워하지도 않는다. 그가 감춰놓은 단서를 찾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흥미로운 시적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인 예를 보기로 하자.
와, 눈이다 눈! 눈이 가득 창을 메우니
갑자기 따듯해진다. 눈은 가볍게 살아
사각의 창을 자유롭게 한다. 나는 이 창을
친구에게 E-메일로 부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런 날 눈은 창을 넘고 산을 넘어
동서남북 저 아득한 곳까지 내린다.
산골마을에 내리고, 제주도에 내리고, 아메리카에도 내린다.
눈 감고 죽어라고 죽어라고 내리다가
팽이를 돌리고, 배를 타고, 비행기를 띄운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 카드로 되돌아오며
눈은 잠시 멎는다.
눈을 밟자, 이럴 때
멎은 눈을 밟으면 달아오르고 길까지 행복해진다.
행복한 길들은 밟으면 뽀드득 소리가 나고 모두 아름다운 흔적을 갖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밟으면 미끄러진다 행복도
그대여, 눈을 밟자 더 아프게 미끄러지기 전에
우와, 다시 눈이다 눈!
분분한 눈이 창을 또 한번 메우니
이번에 나는 불행해진다. 눈은 분분하게 다투면서
내 앞 창을 자유롭게 하지만 내 책상은 자유롭게 하지 못해
불행해진다. 다투니까 자유로워지고 다투지 않으니까 갇히는
이 답답한 世上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불행해진다.
그리하여 오늘은 총체적으로 불행이다, 창도 세상도 나도
눈은 어둠을 켜면서까지 계속 불행하게 불행하게 내린다.
―「눈이 내리면 총체적으로 불행하다」 전문
이 작품은 언뜻 보면 시인의 평범한 내면 진술로 읽힌다. 하지만 곰곰이 시적 흐름을 좇아가면 의외로 사소하지 않은 시적 반전(反轉)이 숨겨져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우선 겨울의 눈이 사람들에게 따듯하고 행복한 미소를 띠게 만드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가는 일이다. 창밖에 눈이 내린다. “가볍게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 눈은 솜털 같은 함박눈일 가능성이 높다. 싸락눈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무겁고 축축한 진눈깨비는 아니다. 그 가벼움에서 자유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래서 눈이 내리는 풍경을 담은 창을, 그 행복한 풍경을 친구에게 보내는 행복을 누린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건물의 유리창이 어느새 컴퓨터 윈도우로 바뀌었음을 본다. 거기서 창은 현실의 유리창이자, 사이버 스페이스의 출입구다. 마음 놓고 상상이 가능한 장소인 것이다.
현실의 유리창은 내부공간의 끝이자, 외부공간의 시작이다. 가상공간의 창 또한 현실의 끝이자 새로운 상상공간의 출발지이다. 그래서 시인은 상상력의 여행을 떠난다. 현실속의 ‘눈〔眼〕’을 감고서 죽어라고 ‘산골마을’ ‘제주도’ ‘아메리카’로 마음껏 누비는 것이다. 물론 눈〔雪〕의 가벼운 자유로움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다. 그게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는 “팽이를 돌리고, 배를 타고, 비행기를 띄운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천진한 동심(童心)의 이 상상력은 ‘크리스마스 카드’로 조용히 갈무리되어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눈〔眼〕’을 감고서 눈〔雪〕이 되었던 이 복합적 이미지의 상상력이 멀리서 날아오는 우편물처럼 현실로 귀환하는 것은 따듯하면서도 새롭다.
김영남에게서 눈이 우선 동심의 행복과 연결이 된다는 것은 다른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느티나무 집
부엌 아궁이에서 불 지피던 아낙이
우는 아이 달래러 방에 들어갔군요
느티나무 지붕 위에서
긴 손이 포근하게 나오는 걸 보니
그 손 또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라 아이들
기저귀까지 갈아주고 있는 걸 보니
이윽고 온 하늘 메우는
저 향기로운 파우더, 파우더……
예쁜 개울 토닥이다가 아낙도
함께 잠들었군요.
―「개울가 눈 오는 풍경」 전문
그런데 이 ‘향기로운 파우더’ 같은 행복 속에는 무언가 아슬아슬함이 있다. 마치 유년의 동화(童話)가 어른의 세계에서 깨져나가듯이, 깨끗한 눈을 뽀드득 소리 나게 밟는 행복은 미끄러질 위험의 가능성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이다. 이 행복과 불행을 연결시키기 위해 시인은 잠시 눈이 멎은 풍경을 다리처럼 제시했다.
그리고는 다시 눈이 내린다. 이젠 불행의 눈이다. 그 “분분한 눈”은 여전히 자유롭긴 하지만 우선 책상 앞의 나까지 자유롭게 하지는 못한다. 거기서 시적 자아인 ‘나’는 눈이 오는 풍경을 시로 만들어야 하는 시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현실을 살아내는 생활인이다. 상상 속에만 머물 수 없는, 현실의 구속이 그를 불행하게 만든다. 게다가 분분한 눈은 다투니까 자유롭다. 그런데 다투지 않는 나는 갇힌다. 이 역설의 상황이 그를 더 불행하게 만든다. 다투지 않으면서 자유로워야만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니 ‘창’과 ‘세상’과 ‘나’ 모두가 총체적인 불행을 겪게 된다. 이것은 눈이 환한 불을 켜는 대신 어둠을 켠다는 데서 극적으로 고조된다. 어둠 속에서 눈은 불행하게 내린다.
눈이 오는 풍경에 대한 평이한 진술로 보였던 이 작품은 여기까지 오면 답답한 세상에 대한 시적 풍자(諷刺)로 성격이 바뀐다. 그것은 함께 발표된 다음 작품과 이어지면 더 뚜렷해진다.
진보적으로 살까, 보수적으로 살까
금산 수통리 적벽강까지 한 사람을 데리고 와 걱정하는 내겐
저 절벽은 진보다
절벽 위에 재작년까지 보이지 않던 해오라기가 떼로 날아왔고
맞은편에는 작년에 없던 2차선 도로를 힘차게 뚫고 있으므로……
진보적인 여자와 텐트를 칠까, 보수적인 여자와 물놀이를 할까
텐트를 치며, 물수재비를 뜨며 계속 고민하는 나의 여름휴가
이럴 땐 한번 물어보는 거다, 저 흔들리는 미루나무에게
가지의 모든 이파리까지 뒤집어
바람이 불 때마다 시스템적으로 사고하고 있으므로……
뒤집어 사고해도 한결같은 목소리이므로……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는 사이
해오라기 한 마리가 날아와 미루나무 꼭대기에 앉는다
보라, 저 미루나무 꼭지점을
저건 진보와 보수의 교묘한 절충이다
내 고민의 정반합이다
아니다 저건 야합이다
금세 날아가버릴 새하얀 금언(金言)이다!
―「진보와 보수 사이에 해오라기가 앉는다」 전문
풍자는 불완전한 현실과 그에 대한 비판적 의식 사이의 거리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직설(直說)의 어법을 취하지 않는다. 딴전을 부리듯 하면서 어느새 비판의 대상을 전복(顚覆)시킨다. 그것이 풍자의 힘이다. 위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김영남의 풍자 취향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위 작품은 시작부터 ‘진보’와 ‘보수’로 나뉜 현실에 대해 의외로 직설적인 칼날을 겨누고 있다. 하지만 그 인상은 바로 뒤에서 지워진다. 갑자기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여자’ 이야기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눈을 부릅뜨며 목청을 높이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 세력에 대해서도 그게 별게 아니라는 풍자의 말을 넌지시 건네고 있다.
그 말은 새로움을 경전(經典)처럼 내흔드는 진보를 향해 더 ‘커브’를 그리고 있다. 도덕을 내세운 배타적 선민(選民)의식과 계몽의 억압이 아마도 시인에게는 불편했기 때문이 아닐까? 진보란 보이지 않던 해오라기 새떼가 날아오고, 도로를 뚫고 있는 강 언덕과 같은 것일 뿐인데 말이다. 그러니 “진보적인 여자와 텐트를 칠까, 보수적인 여자와 물놀이를 할까” 하는 고민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의 여름휴가를 편치 않게 고민하도록 만드는 일은 어딘가 옳지 않다는 항변이 그 안에는 들어 있다.
그렇다고 그가 절충주의적 사고를 하는 것은 아니다. “진보와 보수의 교묘한 절충”이 “내 고민의 정반합이”라는 생각은 바로 그에 뒤 이은 “아니다 저건 야합이다”라는 진술을 통해 부정 당한다. 김영남은 따라서 진보와 보수에 대해 아무런 확정적 답을 내놓지 않는다. 섣부른 절충주의는 진실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반합’이 ‘야합’으로 이어지는 시인의 말놀이다. “가지의 모든 이파리까지 뒤집어 / 바람이 불 때마다 시스템적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말놀이도 마찬가지다. 이런 말놀이는 언어의 현실 관련성을 높이는 풍자의 주요한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이어지는 “뒤집어 사고해도 한결같은 목소리”라는 시구(詩句)에서 우리는 변함없음과 몰개성을 동시에 읽는다. 한결같음은 부정적일 수도 긍정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의 말놀이는 이렇게 중층적 의미를 가짐으로써 시의 내포를 확장하면서 풍자의 힘을 더한다.
어쨌거나 여름휴가 여행을 통해서 시스템이나 진보와 보수 등등의 정치 언어에 대해 비판적 성찰 의식을 획득하는 것은 김영남의 시세계의 한 특징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거기에 대해서는 두 번째 시집 해설자의 적절한 지적이 있다.
여행을 통해 얻은 풍경의 발견은 자연 원리의 발견을 통한 삶에 대한 직관적 성찰과도 연계된다.
김영남은 이처럼 자칫 무겁게 우리를 짓누를 수 있는 현실의 언어에 대해 가볍게 문학의 언어를 대조시킴으로써 현실과 의식 사이의 풍자의 거리와 긴장을 확보한다. 눈과 눈, 정반합과 야합 등의 대조 어구는 단순한 말놀이를 뛰어넘어 이 시인이 현실 인식에 독자들이 함께 뛰어들 수 있는 ‘아름다운 흔적’의 역할을 한다. 거기에 덧붙여, “진보적인 여자와 텐트를 칠까, 보수적인 여자와 물놀이를 할까” 하는 대구(對句)도 비록 그것이 남성적인 시선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건강한 에로티시즘을 통해 무거운 현실을 가볍게 뒤집는 시인의 낙관과 능청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면모가 김영남의 개성이자 장점을 이루는 세목들이다.
여기까지 오니 문득 김수영의 시가 하나 떠오른다. 1956년 발표한 「눈」이 바로 그것이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눈」 전문
눈〔雪〕을 바라보는 눈〔眼〕을 내세워 당대 현실에 대한 시적 풍자의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김수영의 어떤 전통이 김영남에게 들어 있다. 모더니즘의 현실 비판적 힘에 대한 신뢰를 보낸 동시에, 난해함이라는 지적 오만을 경계했던 김수영. 그의 가능성을 부디 마음껏 올라타고 누비기를 나는 바란다.
그러다 다치면? 나는 그가 두 번째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요청한 대로 기꺼이 그에게 ‘안티프라민’을 선사하겠다.
내가 첫 시집 『정동진역』에서 소재를 박력 있고 재미있게 올라타려고 노력했다면, 두 번째 시집에서는 아마 난해의 벽을 쉽고 아름답게 올라타보려 애를 썼지 않나 싶다. 그렇게 생각하고 아랫도리를 한번 내려다보니까 정말 양 무릎이 다 까졌다.
하여, 독자들이여! 나의 시를 읽고 짚이는 데가 있거든 ‘안티프라민’이라도 하나 선사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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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에서 온 편지
―이지엽(1958∼ )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꾹꾹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간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 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 하고 지난 설에도 안 와브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릉 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안 그냐.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잔 혔다 지랄놈의 농사는 지먼 뭣하냐 그래도 자석들한테 팥이랑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종신서원이라니… 그것은 하느님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 더 살기 팍팍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더러 보고 자파도 꾹 전디라고 했는디 달구똥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종이에 꾹꾹 눌러 쓴 낯익은 글씨에 벌써 딸은 와락 그리움이 치밀 테다. 어머니만의 말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편지에 어머니의 모습과 목소리가 아른거리리. 삭신은 꾹꾹 쑤시고 마음은 질컥거리고, 그래서 사는 게 팍팍하단다. 하나 있는 아들이 ‘지난 설에도 안 와브럿다’고 딸에게 일러바치며, 그리움과 외로움과 서운함을 알뜰히 전하신다. 딸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각별하신 듯하다. 그만큼 살갑고 미더운 딸이 수녀 종신서원을 했으니, 알지 못할 세계로 가버린 듯 가슴이 휑하실 테다. 보고자파라, 내 딸! 편지로 미루어 시원시원한 성격인 어머니시지만 눈 밑 주름 고랑을 타고 ‘달구똥(닭똥)’ 같은 눈물이 흐르셨을 테다. 그 마음 감추고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라신다. 아, 그리운 어머니, 그리운 복사꽃!
곡식을 거둘 때도 자식 생각, 복사꽃이 피어도 자식 생각.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이 생기면 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일래라. 길지 않은 시에 홀로 농촌을 지키는 노인이며 한 집안의 서사가 담겨 있다. 구어체 편지 형식의 맛깔스러운 사투리가 시를 생생히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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