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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노벨문학상 수상연설, 밑바닥인생, 그리고 문학세계...
2016년 12월 15일 19시 59분  조회:5404  추천:0  작성자: 죽림

2008-03-21 중앙일보>대중문화

21세기 중국문화지도 <18>

“내게 중국은 읽고 지나간 책의 한 페이지일 뿐”

80년대 실험극 잇단 성공
정부 “오염원”으로 지목
중국어로 작품 쓰지만 난 ‘세계인’으로 산다

 

 

문학은 본래 변방의 예술이다. 세상을 향한 문학의 시선은, 어느 장르보다 맵고 삐딱하다. 사회주의 중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중국 문학사를 돌아볼 때, 비판문학의 전통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회주의 이념이야말로 기득권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중국 사회주의 문학의 아버지 루쉰(魯迅)은 “진정한 지식계급은 사회에 한번도 만족할 수 없는 영원한 비판자”라고 일갈한 바 있다. 그 정신을 마오쩌둥(毛澤東)이 이어받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했다. 그 전통이 지금도 면면하다. 오늘도 중국 문학은 끊임없이 사회를 비판한다. 흥미로운 건, 비판문학에 대처하는 중국 당국의 방식이다. 소위 ‘고의적 허술함’의 전략을 구사한다. 중국 비판문학의 안팎을 들여다 봤다.


   중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오싱젠(高行健·68)의 거처는 화려하지 않았다. 프랑스 파리 시내 복판, 루브르 박물관 근처 생트 안(Sainte-Anne) 거리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그는 살고 있었다. 인테리어라곤 흰 벽을 채운 자신의 그림 몇 점이 전부였다. 그는 환한 얼굴로 한 층 아래까지 내려와 한국에서 찾아온 기자를 맞이했다. 안색은 좋지 못했다. 얼굴 곳곳에 내려앉은 검버섯과 잿빛 머리칼엔 불길한 병색마저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근육병을 앓아 지난해 큰 수술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망명 생활 십 년째다. 파리에서의 삶은 어떤가.

   “유럽에 온 뒤로 내 세계는 더 넓어졌다. 중국어 외에 프랑스어로도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소설가·극작가일 뿐 아니라 화가로도 활동 중이다. 매년 전시회도 열고 있다. 내가 쓴 희곡을 무대에 올릴 때 연출자로 나서기도 했고, 단편영화도 제작했다.”

   -유럽에서 당신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

   “현재 내 작품은 전세계 36개 언어로 번역됐다. 연극 작품도 전세계에서 공연되고 있다. 중국에서만 금지됐다.”

   -대표작 『영혼의 산(靈山)』(북폴리오, 2005)을 소개한다면. 스웨덴 한림원이 2000년 당신에게 노벨문학상을 줄 때 격찬을 했는데.

   “‘당신’이 주인공인 2인칭 소설이지만 사실 ‘나’의 이야기다. 83년 발표한 희곡 ‘버스정류장’이 당국의 비판을 받자 나는 양쯔강을 따라 여행을 다녔다. 그때 접한 소수민족의 삶과 문화를 소설로 옮겼다. 폐암을 앓다가 살아난 주인공 ‘당신’이 ‘영혼의 산’을 찾아 티베트 고원과 쓰촨(四川)분지 등을 떠돈다. 상상의 산을 갈망하는 ‘당신’이 자아와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가오싱젠은 애초 중국작가협회 소속의 프랑스어 번역가였다. 82년 첫 희곡 ‘절대신호’를 베이징인민예술극원(이하 ‘인예’) 무대에 올려 큰 성공을 거뒀다. 이 작품은 중국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통을 대표하는 ‘인예’에서 공연된 최초의 실험극이다. 총 공연 횟수 100회를 돌파했다.

   이듬해 그는 희곡 ‘버스 정류장’을 발표한다. ‘버스 정류장’은 중국 최초의 본격 부조리극이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오지 않는 버스를 막연히 기다리는 인물 군상을 그린 작품이다.

마침 84년 1월 중국 공산당은 개혁·개방으로 사회 기강이 문란해졌다고 판단하고 ‘반정신오염운동’에 착수한다. ‘반정신오염운동’은 실험극의 비주류 성향을 지적하고, 가장 대표적인 작품 ‘버스 정류장’을 ‘오염원’으로 지목한다.

   80년대 초반 가오싱젠의 전위적 작품은, 이후 중국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80년대 후반 위화(余華)·모옌(莫言)·쑤퉁(蘇童) 등이 주도한 선봉문학은 가오싱젠의 실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중국 정부가 왜 당신 작품을 금서로 지정했다고 생각하나.

   “중국 정부는 내 작품이 자산계급의 나쁜 풍조와 반사회주의적 문학을 모방해 중국 문학을 더럽힌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내 작품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정면 대치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내 작품 출판을 일절 금지했고,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길도 막았다.”

   -당신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자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다.

   “내가 할 말은 없다. 노벨상을 받은 게 내 결정이 아니어서다. 글쎄다. 그때 스웨덴 한림원이 중국작가에게 상을 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중국 밖에서 찾는 게 당연하지 않았을까?”

   -21세기 들어 중국작가협회가 밝힌 입장은 80년대와 많이 다르다. 협회는 “중국은 더 이상 사회주의 리얼리즘 속에 문학을 가두지 않으며 시장이 그 기능을 대신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중국에선 나를 전혀 모른다. 중국 안에서 내 작품은 철저히 금지돼 있다. 내 이름이 신문이나 TV에서 거론되는 것조차 금지됐다고 들었다. 나도 ‘안’의 친구들과 오래전에 인연을 끊었다. 가깝게 지내는 이들은 류자이푸(劉再復·89년 미국 망명)나 베이다오(北島·89년 독일 망명)처럼 ‘밖’에 있는 친구뿐이다.”

   -중국은 현재 개혁·개방에 사활을 건 모습이다. 중국 문학에서도 변화의 기운이 보인다.

   “내 생각은 다르다. 중국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올림픽을 개최한다고 해서 중국이 진실로 개방될 것이라 믿어선 안 된다.”

   가오싱젠은 인터뷰 내내 중국을 ‘조국(patrie)’이 아닌 ‘그 나라(le pays)’로 불렀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중국어로 작품을 쓴다. 끝으로 “당신에게 중국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나는 ‘세계인(l‘homme mondial)’이다. 내 정체성이 국적이나 민족에 매여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내 몸엔 중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반면에 지금의 나는 프랑스 국민이다. 나에게 있어 중국은 읽고 지나간 책의 한 페이지다. 과거일 뿐이다.” / 파리 글·사진=이에스더 기자

 

▒ 가오싱젠은…

-1940년 중국 장시성(江西省) 출생
-82년 첫 희곡 ‘절대신호’ 발표
-83년 희곡 ‘버스정류장’ 발표, 이 작품으로 당국의 비판을 받음
-89년 유럽 전시회 도중 천안문 사태 소식 듣고 귀국 포기. 프랑스로 망명
-90년 장편소설 ?영혼의 산? 발표
-97년 프랑스 국적 취득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 프랑스 최고 훈장 레지옹 도뇌르 수훈

 

◇ 21세기 중국문화 시리즈의 중국어 표기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명과 지명은 외래어 표기법을 따랐습니다. 루쉰(魯迅)·사오싱(紹興) 등이 그 예입니다. 책 제목은 한국어판 제목을 그대로 적었습니다. 모옌(莫言)의 『홍까오량 가족(紅高粱)』(문학과지성사, 2007)과 한사오공(韓少功)의 『마교사전(馬橋詞典)』(민음사, 2007) 등이 예입니다. 이때 외래어 표기법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할리우드 영화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를 국내 개봉시 제목 ‘석양의 무법자’로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당다이(當代)문학’ 등의 문학용어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책 제목은 자문위원의 의견을 참고했습니다. ◎

 

 

2008-03-21 중앙일보>대중문화

[21세기중국문화지도] “망명작가에 상 준 건 중국 자극하려는 의도”

가오싱젠을 인정 안하는 이유

 

 

   중국 당다이(當代) 문학에서 가오싱젠(高行健)은 ‘뜨거운 감자’다. 우선 그는 류자이푸(劉再復)·베이다오(北島) 등과 함께 망명작가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중국인 문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중국작가협회 장종(張炯) 명예 부주석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외국인이 중국어로 쓴 작품을 중국인 문학이라 할 수 없듯이 가오싱젠의 작품은 중국인 문학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논란의 핵심은 국적이 아니다. 중국 체제의 관점에서 가오싱젠 문학이 심각하게 위험한 것도 아니다. 이적성만 따진다면 베이다오가 더 심하다. 훨씬 선동적이다. 그러나 베이다오는 ‘중국인 문학’으로 간주된다. 사안의 본질은 되레, 노벨문학상을 둘러싼 미묘하고 복잡한 국제정치 역학에 있다.

   1989년 프랑스로 망명한 가오싱젠은 97년 프랑스 국적을 얻었고, 200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가오싱젠은 프랑스 국적으로 노벨상 수상자가 됐고, 그 업적으로 같은 해 프랑스 최고 훈장 레지옹 도뇌르도 받았다. 그러나 스웨덴 한림원은 그해 10월 12일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며 가오싱젠을 “중국 소설과 희곡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가”라고 소개했다. 한림원이 프랑스로 망명한 작가의 작품을 중국문학으로 인정한 것이다.

   중국은 즉각 반발했다. 10월 13일 중국작가협회 진장팡(金堅範) 대변인은 “가오싱젠은 중국인이 아니라 프랑스인이다. 중국엔 그보다 뛰어난 작가가 수백 명은 있다. 한림원의 결정은 중국 문학을 무시한 것이다”라고 언짢은 심사를 드러냈다. 중국 외교부 주방자오(朱邦造) 대변인도 10월 17일 “노벨문학상은 이미 정치적 목적에 따라 사용된 만큼 논평할 가치조차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중국작가협회는 왕멍(王蒙) 전 중국 문화부장을 후보로 추천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중국 공산당은 가오싱젠 작품의 금서 지정은 물론, 일절 언급도 금할 것을 지시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오싱젠 문학은 중국인의 정치와 인생을 소극적으로 다루는 회색작품이다. 무엇보다 중국의 2류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을 준 이면엔 중국을 자극하려는 서방의 의도가 숨어있다.’

   여기서 짚어봐야 할 건, 가오싱젠의 문학적 성취다.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가오싱젠의 수상에 고개를 갸웃한다. 이욱연 서강대 교수는 “서구의 중국 견제라는 정치적 논리”를 의심하고, 유럽에서 4년간 머문 황석영씨도 “가오싱젠의 수상은 유럽에서 일종의 교통사고로 인식된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한다. “차라리 왕멍이 낫다”란 시각도 있다.

   어찌 보면 가오싱젠에겐 억울한 구석이 있다. 본지 인터뷰에서 밝혔듯 자신의 결정으로 노벨상을 받은 게 아니어서다. 무엇보다 그의 문학은 그리 극단적이지 않다. 한림원이 극찬한 『영혼의 산』은 난해한 구도소설에 가깝다. 그렇다고 중국이 규제를 풀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중국 입장에서, 중국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아직 없기 때문이다. / 손민호 기자

 

※ 중국 당다이(當代) 문학 :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출범 이후의 중국 문학.

 

 

 


가오싱지엔(高行健)의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 / 양재오 번역

 

 

   문학을 하는 까닭(文學的理由)

 

   나는 어떤 운명이 나로 하여금 이 강단에 올라서게 하였는지 모릅니다. 이런저런 인연들이 만들어 낸 이 우연을 운명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제쳐놓고, 나는 줄곧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여김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는 언제나 알 수 없는(不可知) 것에 대하여 삼가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신(神)이 될 수 없으며, 더욱이 하느님(上帝)을 대신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초인(超人)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은 단지 이 세계를 더 혼란스럽고, 더 형편없게 만들어 놓을 뿐입니다. 
   니체 이후의 세기(世紀)에, 인간이 만들어 낸 재난은 인류역사에 가장 어두운 기록을 남겨놓았습니다. 각양각색의 초인이 인민의 지도자, 국가의 원수, 민족의 영도자로 불리면서, 모든 폭력적인 수단을 이용하여 죄악을 지은 것은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에 도취되어 있는 한 철학자의 광란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 문학의 강단을 이용하여 정치와 역사에 대해서 요란하게 말하고 싶지 않고, 단지 이 기회에 한 작가의 순전히 개인적인 입장을 표명하고자 합니다.

   작가도 일개 보통 사람입니다. 근데 아마 좀 더 민감할 것입니다.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들은 대체로 더 연약합니다. 일개 작가는 인민의 대변인이나 정의의 화신으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목소리는 극히 미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개인의 목소리가 진실이 됩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문학도 단지 개인의 목소리일 뿐이며, 또한 지금까지 줄 곧 그래왔다는 것입니다. 문학이 일단 국가의 송가(頌歌)가 되고, 민족의 깃발, 정당의 혓바닥 혹은 계급과 집단을 대변하게 되면, 그 전파 수단을 최대한 이용하고 그 성세를 떨쳐서 천하를 덮어버릴 것입니다. 
   이런 문학은 본성(本性)을 상실하여, 더 이상 문학이라고 불릴 수 없으며 한갓 권력과 이용의 대용품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막 지나간 한 세기, 문학은 바로 이러한 불행에 직면하였습니다. 지나간 어떤 시기에 남겨 놓은 정치와 권력의 낙인(烙印)은 아주 깊고, 작가가 겪은 박해의 상흔 또한 깊습니다.

   문학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지켜야하고 정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되며 개인의 목소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문학은 무엇보다도 개인의 느낌으로부터 나오고, 느낌이 있을 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이 반드시 정치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정치에 간여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학과 관련하여 이른바 경향성 혹은 작가의 정치경향 같은 유형의 논쟁도 지난 한 세기에 있었던 문학의 큰 병(病痛)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한 전통과 혁신은 보수와 혁명으로 가름하고, 문학의 문제를 모두 진보와 반동의 투쟁으로 몰아갔으니, 이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意識形態)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일단 권력과 결합하여 현실적인 힘(권력)으로 바뀌게 되면 문학과 개인 모두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20세기 중국문학이 처한 끊이지 않는 재난으로 문학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상태에 이르렀으니 바로 정치에 의해서 농락 당하는 문학의 시대에, 문학혁명과 혁명문학 모두 문학과 개인을 죽음의 땅으로 몰아 세웠습니다. 
   혁명의 이름으로 중국전통문화를 토벌하였으니, 공공연히 금서(禁書)와 책을 태우는 일(燒書)을 단행하였습니다. 과거 100년 간 무수한 작가들이 살해되거나 감금되고 유배 보내지거나 고된 노역에 처해졌습니다. 중국역사상 어떤 제왕시대도 이 시대와 견줄 수가 없을 정도로 문학활동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시대였으며, 더욱이 창작의 자유에 대해서는 더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작가가 만일 사상의 자유를 얻고 싶다면, 침묵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도망(逃亡)을 가야합니다. 그런데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가 오랫동안 말하지 않고 지낸다면, 그것은 마치 자살(自殺)과 다름이 없습니다. 자살이나 죽음을 피하여 자기 목소리를 내려는 작가는 도망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학사를 돌이켜보면, 동방이나 서방이 다를 것이 없는데, 취위엔(屈原)에서 단테, 조이스, 토마스 만, 솔제니친, 그리고 1989년 티엔안먼(天安門) 대학살 뒤의 수많은 중국지식인들 모두 유배되거나 망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시인과 작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마오쩌똥(毛澤東)이 전면적으로 전제정치를 실시하던 시절에는 도망(逃亡)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이 때는) 일찍이 봉건시대 문인들을 보호해 주던 산 속의 사찰(寺廟)에 은거해서 목숨을 걸고 사사로이 글을 썼씁니다. 한 개인이 만일 자신의 독립된 생각을 지켜나가고 싶으면 단지 혼자 말을 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도 세심하게 잘 감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 자신이 문학활동을 할 수 없던 시절에 스스로 그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였습니다. 문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식(意識)을 잘 견지하도록 해줍니다.

   혼자 말을 하는 것이 문학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통해서 서로 교류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사람이 느낌(感受)과 생각(思考)을 언어에 주입하고, 글을 써서 문자화하여, 문학이 됩니다. 그 때는 어떤 공리(功利)적인 생각도 없고 심지어 훗날 어떻게 발표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으며, 그저 쓸 뿐입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동안 이미 기쁨(快感)을 누리고, 보상을 받고 또 위로를 얻기 때문입니다. 
   나의 장편소설 링산(靈山, Soul Mountain)은 바로 내 작품이 당국으로부터 단속 받던 시절에 내가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으로서 순전히 마음의 적막(寂寞)을 다독거리기 위해서, 바로 스스로를 위해서 쓴 것으로서, 뒷날 발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창작 경험을 돌이켜 보면, 문학의 뿌리(根本)는 인간이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인이며, 글을 쓰는 그 때 이미 자기 확인(긍정)을 하는 것입니다. 문학은 먼저 작가의 자기 만족의 필요에서 탄생하며, 사회의 반응이 있는지 없는지는 작품이 완성된 뒤의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반응이 어떤가 하는 것은 작가의 뜻(意願)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문학사(文學史)에 전해오는 많은 대작(大作)들이 작가들 생전에 간행되지 못했습니다. 만일 작가가 글을 쓰는 동안에 이미 자기 확인(긍정)을 얻지 못했다면, 어떻게 계속 써내려 갈 수 있겠습니까? 
   중국문학사상 제일 위대한 소설 시여우지(西遊記), 수웨이후짠(水滸傳)과 진핑메이(金甁梅)와 홍러우멍(紅樓夢), 이 네 가지 작품의 위대한 작가들의 일생에 대하여 셰익스피어의 경우와 같이 여전히 확실히 밝혀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남아있는 것은 모두 스나이안(施耐庵)이 쓴 자서전적 에쎄이 한편 뿐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실이 그가 말한 바와 같지 않다면, 그저 잠시 스스로 위로로 삼는 것으로 족할 뿐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필생의 정력을 생전의 대가없는 대작을 만드는데 쏟아 부을 수 있었을까? 현대소설의 선봉인 카프카(Kafka)와 20세기 제일 깊이 있는 시인 페르난도 뻬소아(Fernando Pessoa)도 이와 같지 않았던가? 그들이 쏟아 낸 말들이 이 세상을 개조하려고 의도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자신의 무능함을 깊이 인식하면서도 여전히 말을 계속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언어가 가진 매력입니다.

   언어는 여전히 인류 문명의 최상의 결정체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정교하고 미세하며 움켜잡기 어렵고 투철하고 깊이 파고들고 인간의 지각(感知)을 꿰뚫어서 인간의 이런 느낌의 주체를 세계에 대한 인식과 연결해 버립니다. 
   써서 남긴 문자는 이처럼 기묘하여, 고립된 개개인이 설사 다른 민족, 다른 시대의 사람이라 해도 서로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쓰여진 문학과 그것을 읽는 현실성은 그것이 가진 영원한 정신가치와 이렇게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 일개 작가가 모종(某一種)의 민족문화를 애써 강조하는 것에 대하여 좀 의문을 가집니다. 
   내가 출생하여 사용하는 언어에 대하여 볼 것 같으면, 중국의 문화전통은 자연히 내 몸에 있습니다. 문화는 또 늘 언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로부터 지각이 생기고, 생각과 그것을 진술하는 그 어떤 비교적 안정된 특수한 방식이 생깁니다. 
   그러나 작가의 창조성은 바로 이런 언어로 말해진 곳에서 비로소 시작되며, 이런 언어가 아직 충분히 진술되지 않은 곳에서 좀 더 그 가능성을 모색하게 됩니다. 언어예술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지금 자기 자신에게, 한 눈에 금방 식별이 가능한 민족의 상표(표지)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문학작품은 국경을 넘어섭니다. 번역을 통하여 언어의 장벽도 넘어서서, 지역과 역사형성의 몇 가지 특정한 사회의 습속과 인간 관계 안으로 넘어들어 가며, 깊이 투과한 인간의 본성은 여전히 인류의 보편적인 것이고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작가는 그 누구든지 자기 민족 문화 외에도 다중문화의 영향을 받습니다. 민족문화의 특색을 강조하는 것이 만일 관광업종의 광고와 관련한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의심을 일으키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문학은 이데올로기를 초월하고, 국경을 초월하고, 민족의식을 초월하는데, 그것은 마치 개인의 존재가 본래 이런 주의(主義,-ism) 혹은 저런 주의를 초월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실존 상태는 언제나 실존에 대한 논설이나 사변(思辨)보다 우선합니다. 
   문학은 인간의 실존이 겪는 곤경을 두루 돌보며, 어떤 금기도 없습니다. 문학에 대하여 한계를 정하는 것은 언제나 문학바깥에서 옵니다.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습속 등은 모두 문학을 재단하고 각종 틀에다가 맞추어서 그 외양을 장식하려 기도합니다.

   그러나, 문학은 권력을 미화하지도 않고, 모종(某種)의 사회적 유행도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 그 가치판단을 갖고있으며, 또한 심미적(審美的)입니다. 인간의 정감(情感)과 깊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심미(審美)는 문학작품의 유일하고 제거할 수 없는 판단입니다. 물론 이런 판단은 사람에 따라서 다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정감은 늘 다른 개인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관적인 심미적 판단(審美判斷)은 확실히 보편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표준이며, 사람들이 문학의 훈련을 거쳐서 형성된 감상력입니다. 우리는 작품을 읽는 가운데 작자의 사상과 정감이 주입된 시의 느낌과 아름다움, 숭고함과 가소로움, 가엾음과 황당무계함, 유머와 아이러니 등을 다시 체험합니다.

   그리고 시적인 정취가 꼭 서정(抒情)에서만 나오지는 않습니다. 작가의 무절제한 자기 도취(自戀)는 일종의 소아병(幼稚病)입니다. 물론 처음 습작할 때 사람들은 이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면, 서정(느낌의 표현)은 아마 여러 층(層次)이 있으며,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냉정한 눈길(冷眼)로 바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적인 정취(詩意)는 이렇게 거리를 유지하고 바라보는 가운데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눈길(目光)이 만일 작가 자신을 응시한다면, 그 눈길은 책 가운데 있는 인물과 작자(作者) 자신을 압도(능가)하여 작가의 제3의 눈(眼)이 되며, 아마 이 때 그 눈(目光)은 가능한 중성(中性)의 눈(제 3의 눈)이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재난(災難)과 인간세상의 쓰레기도 진중하고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며, 고통이 일어나고, 세상을 혐오하고 구토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비극과 가엾음을 일깨우며,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모의 정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비록 문학이 예술과 마찬가지로 유행 따라 매년 변할지라도 인간의 정감(情感)에 뿌리를 내린 심미(審美)는 아마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문학의 가치판단과 시대적 풍조의 구별(차이)은 바로 후자는 오직 새로워지면 좋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시장의 일반적인 운영의 기제로서, 책 시장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고 작가의 심미(적) 판단이 만일 시장의 동향을 추종한다면, 그것은 곧 문학의 자살과 다름이 없습니다. 특히 소비사회라고 부르는 오늘날 내가 쏟아 내는 것은 일종의 냉담한 문학(冷的文學, cold literature)이라고 생각합니다.

   십 년 전, 내가 7년에 걸쳐서 링산(靈山) 쓰기를 다 마치고 나서, 단문(短文) 한 편을 썼는데, 거기서 문학은 이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문학은 본래 정치와 관계가 없으며, 순전히 개인의 일 일 뿐이다. 한 번 살펴보면, 일종의 경험에 대한 회고요, 약간의 억측(허구)과 이런 저런 느낌이요, 어떤 마음 상태의 표현이면서, 생각의 만족을 주는 것이다. 
   이른바 작가는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는지 없는지, 읽을 수 있는지 없는지 상관 않고, 혼자서 스스로 말하고 쓰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영웅이라고 불려지기를 요청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우상이 되어서 숭배하라고 할 가치도 없다. 더욱이 죄인도 아니고, 민중의 적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단지 다른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 때때로 (그가 쓴) 작품과 함께 수난을 당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몇몇의 적을 만들어서 민중의 주의력을 돌릴 필요가 있을 때, 작가는 일종의 희생품이 된다.
   더욱 불행한 것은 휘둘려서 어찔어찔해 하는 작가는 결국 희생제물은 하나의 큰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단지 일종의 정신상의 교류일 뿐이다. 서로 얼굴을 대면할 필요도 없고, 서로 왕래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작품을 통하여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문학은 인간의 활동에 있어서 여전히 없앨 수 없는 일종의 행위이다. 읽는 것과 쓰는 것 둘 다 모두 자발적이다(自覺自願). 그러므로 문학은 대중에 대하여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이렇게 본성을 회복한 문학은 냉담한 문학(冷的文學)이라고 불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존재는 단지 인간이 물질적 만족을 추구하는 것 밖의 일종의 순수한 정신활동이다. 이런 문학이 물론 오늘 시작된 것은 아니다. 다만 오직 과거의 주요한 정치세력과 사회습속(習俗)의 압력을 제압하고, 오늘날 여전히 소비사회의 상품가치관에 오염되는 것에 대항한다. 
   그리고 생존을 추구하고, 먼저 스스로 고독함을 달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가 만일 이와 같은 창작활동에 종사한다면, 분명히 살기가 곤란하다. 부득이 창작활동 이외의 다른 생계의 방도를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학창작은 일종의 사치요, 정신적인 만족이라고 말할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냉담한 문학이 다행히도 출판되어서 세상에 전해질 수 있으니, 그것은 오직 작가와 그들의 친구들의 노력에 의해서이다. 차오쉬에친(曹雪芹)과 카프카 모두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그들의 작품은 생전에 출판할 수 없었으며, (그들이) 무슨 문학운동을 야기하였느니 혹은 사회의 저명인사(스타)가 되었느니 하고는 더더욱 말하지 말라. 
   이들의 작가 생활은 사회의 가장자리와 틈새에 자리했으며, 당시에 그 어떤 보상도 바랄 수 없는 정신활동에 전념하였고, 사회의 인정도 구하지 않았으며, 단지 스스로 하는 일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었을 뿐이다.

   냉담한 문학은 일종의 도망하여 그 생존을 추구하는 문학이며, 일종의 사회가 억누르지 못하는 정신적으로 자기를 구하는 문학으로서, 한 민족이 만일 결국 이러한 일종의 비공리적(非功利的)인 문학을 용인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작가 개인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그 민족의 비애임에 틀림없다.

   나는 뜻밖에 생전에 다행히도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瑞典皇家學院)가 주는 이러한 큰 영예와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세계 각지의 친구들이 여러 해 동안 내 작품을 대가도 바라지 않고, 또 수고도 마다 않고 번역, 출판, 연출과 평가를 해준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입니다. 그들의 명단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그들에게 일일이 다 감사를 표시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나를 받아들여 준 프랑스에 특별히 감사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학과 예술로 명망이 있는 이 나라에서 나는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조건을 얻었고, 또 나의 독자와 관중을 얻었습니다. 비록 창작활동에 종사하는 것이 상당히 고독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행히도 그렇게 고독하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여기서 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생활은 축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지난 180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화로웠던 스웨덴과 같지 않습니다. 다가오는 새 세기는 지난 세기에 수많은 재난을 충분히 겪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과거의 전철을 되밟지 않을 것이라고 보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억은 생물의 유전자처럼 그냥 다음세대로 전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능(智能)을 가진 인간은 과거의 교훈을 잘 받아들일 만큼 그렇게 총명하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智能)에서 악의(적의)의 불꽃이 타오르면 그것은 인간 자신을 생존의 위협에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반드시 진보에 진보를 거듭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여기서 인간의 문명사(文明史)에 대하여 언급을 좀 하겠습니다. 역사와 문명이 반드시 함께 나란히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중세 유럽의 침체기부터 근대 아시아 대륙의 쇠퇴와 혼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20세기에 겪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을 죽이는 수단은 갈수록 더 정교하고 세련되었습니다. 인간의 과학기술이 진보함에 따라서 인간이 그만큼 더 문명화되지 못했습니다.

   일종의 과학주의의 입장에서 혹은 유사 변증법적인 역사관에 입각해서도 인간의 행위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과거 한 세기 동안 유토피아에 대한 열광과 계속적인 혁명은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것을 바라보며 그저 씁쓸함을 느낄 뿐입니다.

   부정의 부정이 반드시 긍정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고, 혁명이 반드시 새로운 것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며, 신세계의 유토피아가 구 세계의 파괴를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회혁명 이론이 문학에도 적용되어서, 창조의 영역이었던 것이 전쟁터로 변하였고, 앞서 간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문화전통을 밟아 버리고, 모든 것을 영(零,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였고, 오직 새로운 것은 좋은 것이고 문학의 역사도 거꾸로 뒤집어서 새롭게 해석되었습니다.

   작가는 사실 창조주의 역할을 담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마치 구세주(基督)나 되는 것처럼 부풀려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러다 보면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미친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이 현실을 환상으로 변용 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 밖에 있는 모든 것은 연옥(煉獄)으로 변하게 되고, 자연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만일 자아(自我) 제어를 상실하면 다른 사람은 물론 지옥이 되고, 말할 나위 없이 그는 자신을 미래를 위한 희생 제물로 만들어 버리며, 다른 이들도 그 자신처럼 희생제물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이 20세기의 역사를 서둘러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세계가 다시 모종의 이념적 틀의 폐허 속으로 침몰해 버린다면, 이 역사는 헛되이 쓰여질 것이며 후세가 그들을 위해서 그것을 다시 고쳐 쓸 것입니다.

   작가는 예언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살아가는 것입니다. 눈가림을 제거하고 망상에서 벗어나 이 순간을 직시하고, 동시에 자아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자아 또한 하나의 혼돈입니다. 세상과 타자에 대하여 질문하면서, 그때 그는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습니다. 재난과 압박은 보통 몸 바깥에서 오며, 인간의 비겁함과 걱정(불안)은 그 고통을 가중시키고,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불행을 유발시킵니다.

   인간행위는 이처럼 불가해하며, 인간은 그 자신에 대한 이해도 밝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문학은 단지 인간이 자아를 응시하는 그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자아의 의식(意識)에 빛을 비추어 그 싹이 자라도록 합니다.

   전복(파괴)시키는 것이 문학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의 가치는 거의 모르거나 조금 밖에 알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고 드러내 보이고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세계의 참된 모습(眞相)은 여전히 잘 모릅니다. 진실(眞實)은 아마 난공불락의 것이고, 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특질입니다.

   새로운 세기가 이미 도래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새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문학혁명과 혁명문학은 이데올로기와 함께 붕괴되어 거의 결말이 나 버렸습니다. 한 세기 동안 사회를 유토피아의 환영으로 덮어버린 연기는 사라져버렸습니다. 
   문학이 이런 주의(-ism) 혹은 저런 주의하는 굴레들을 벗어 던져버린 뒤에, 인간 실존의 곤경(딜레마)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 실존의 기본적 곤경은 크게 바뀐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문학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지금은 예언도 없고 약속도 없는 시대입니다. 나는 그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예언자(先知)와 판관 노릇을 하는 것은 끝나야 할 것입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수많은 예언들이 사람들을 기만하였습니다. 미래를 위하여 다시 새로운 미신을 만들어 내느니, (미래에 도래할 것을) 기다려 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작가는 증언자의 위치로 돌아가야 하고,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문학이 마치 무슨 사실을 기록하는 문서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실상에 대한 문서화된 증언은 대단히 적습니다. 게다가 사건의 배후에 있는 원인과 동기는 종종 덮어서 밀봉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문학이 진실과 접촉할 때, 인간의 내심에서부터 사건의 전체 과정이 가리움 없이 드러나게 됩니다. 작가가 이처럼 인간 실존의 참된 상황을 묘사하고 허튼 소리 무의미한 말을 하지 않을 때, 바로 그 안에 문학이 가지고 있는 힘(力量)이 있습니다.

   작가가 진실을 파악하는 통찰력을 지니고 작품의 품격을 결정하는 것은 문자 유희와 글쓰는 기교(테크닉)가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로 진실에 대한 정의는 많고, 진실과 접촉하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작가가 인간현상을 어떻게 윤색했는지, 완전하고 정직한 상(相)을 묘사했는지는 한 눈에 곧바로 파악됩니다. 어떤 이데올로기 아래서 이루어지는 모종의 문학비평은 진실여부를 의미분석으로 변환시켜버립니다. 그러한 원칙과 교조(敎條)는 문학창작과 그리 큰 관계는 없습니다.

   작가에 대하여 말할 것 같으면, 진실을 대면하는 여부는 단지 창작의 방법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글쓰는 태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펜을 들었을 때의 진실한지의 여부는 동시에 펜을 놓았을 때의 성실성을 내포합니다. 여기서 진실은 단지 문학의 가치판단이 아니라, 동시에 윤리적인 함의(涵義)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도덕적으로 교화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묘사할 때, 그는 또한 자기 자신을 비도적으로(사악하게) 드러내기도 하고, 그의 내심에 있는 은밀한 것마저도 노출시킵니다. 작가에게 문학적으로 진실한 것은 거의 윤리와 같고, 그것은 또한 지고무상(至高無上)한 윤리입니다.

   글쓰는 태도가 엄숙한 작가의 손에서 문학적인 거짓말(虛構)조차 인생의 진실을 드러내는 전제가 되고,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불멸의 작품이 가진 생명력이 바로 여기(文學的虛構)에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까닭에 그리스의 비극과 셰익스피어가 이 지상에서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문학은 단순히 현실을 모사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표층을 꿰뚫고 실재(現實)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 속으로 깊이 접촉합니다. 
   문학은 허상(假想)을 제거하고 또, 일상적인 일 위에서 높이 내려다봅니다, 즉 넓은 안목으로 전체성 안에서 사태(事態)의 흐름을 드러냅니다.

   물론 문학도 상상(想像)에 의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의 여정은 절대로 허튼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느낌에서 벗어난 상상과 생활경험의 근거가 없는 허구는 단지 창백하고 무력해 질 수 있을 뿐입니다. 작가 자신이 믿고 탄복하지 못하는 작품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참으로 문학은 단순히 일상생활의 경험에만 의지하지 않으며, 작가는 개인의 경험에만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과 이전의 문학작품 가운데서 이미 진술된 것들이 언어라는 운송수단을 통과하여 자신의 느낌으로 변용 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문학언어(文學語言)의 매력입니다.

   저주나 축복처럼 언어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언어의 예술은 진술하는 사람이 자기의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데 있는 것이며, 그것은 일종의 부호체계도, 일종의 의미론적 구조도 아니며, 단순한 문법구조로서 스스로 만족하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만일 언어 배후에 있는 그 말하는 살아 있는 사람을 잊어버린다면, 의미의 연역은 쉽게 지적인 유희에 떨어집니다.

   언어는 단순한 개념도, 관념의 운송수단도 아니며, 그것은 동시적으로 감각(느낌)과 지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부호와 표지가 살아있는 사람의 언어를 대신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말하는 사람의 배후에 있는 의지와 동기, 성조(聲調)와 정서는 낱말이 가진 표면적인 뜻과 수식어에 의해서 완전히 다 표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문학언어가 함축하고 있는 뜻은 살아있는 사람에 의해서 발성되어야만 비로소 충분히 구현됩니다. 그러므로 사유의 도구와 마찬가지로, 문학은 청각에도 의거하여야 합니다. 인간이 언어가 필요한 것은 단지 의미를 전달하는 데만 있지 않고, 동시에 자기 존재를 경청하고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말을 작가에게 적용하여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我表述故我在, I say and therefore I am). 그러나 작가로서의 나는 작가 자신일 수 있고, 혹은 서술하는 사람과 같을 수도 있고, 혹은 책 가운데의 인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서술하는 주체는 그도 될 수 있고, 너도 될 수 있으니, 셋으로 나뉘어 집니다. 주어의 인칭의 확정은 느낌을 표현하는 출발점이며, 이로부터 서로 다른 서술방식이 이루어집니다. 작가는 그의 독특한 서술방식을 찾는 과정에서 그의 느낌을 살려냅니다.

   나는 소설 가운데서 인칭(대명사)으로 통상적인 인물을 대신하며, 나(我), 너( ), 그(他)와 같은 서로 다른 인칭으로 하나의 주인공(같은 주인공)을 묘사함으로써, 하나의 주인공이 취하는 입지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느낌의 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동일한 인물에게 서로 다른 인칭을 사용함으로써 나타나는 거리감(距離感)은 또한 무대의 배우(演員)에게 더 넓은 심리적 공간을 제공합니다. 나는 서로 다른 인칭의 전환을 희극을 쓸 때도 소개하였습니다.

   소설과 희곡작품은 종말에 이르지 않았고 또 이를 수도 없습니다. 경솔하게 어떤 문학과 예술양식(쟝르)의 죽음(死亡)을 선언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인류문명과 동시에 탄생한 언어는 생명처럼 경이롭고 그것이 가진 표현력은 다함이 없습니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 언어가 감추고 있는(함축하고 있는) 잠재적인 힘을 발견하고 개척하는 것입니다.

   작가는 조물주가 아니며, 설사 이 세계가 오래되고 낡았다 할지라도, 그는 이 세계를 없앨 수 없습니다. 그는 또한 설사 이 현실세계가 황당무계하고 인간의 지력으로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 어떤 새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할 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어느 정도 새로운 표현을 진술해 낼 수 있으니, 이전 사람들이 말한 곳에서 좀 더 나아가 말할 수 있고, 이전 사람들이 마친 곳에서 다시 말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문학의 전복(顚覆)은 문학혁명(文學革命)의 빈말에 불과하였습니다. 문학은 죽지 않았으며, 작가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작가는 서가(書架)에 그의 위치가 있으며, 독자가 와서 여전히 책을 읽어 줄 때 그는 살아있게 됩니다. 하나의 작가가 만일 이와 같이 방대한 인류 문학의 보고(寶庫) 안에 미래의 그 누가 읽어줄 책을 한 권 남겨 놓았다면, 그것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문학은 작가가 글을 쓰고, 독자가 그 글을 읽을 그 때, 그 순간에 실현되고, 그 가운데 즐거움이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 만일 허위가 아니라면, 이는 자기도 속이고 또 남도 속이는 것입니다. 
   문학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고, 게다가 바로 살아있는 사람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큰 자유(自在)를 위하여 하나의 이유를 찾는다면, 영원한 현재 안에서 개개 생명의 긍정이 바로 문학이 문학일 수 있는 절대적인 까닭입니다.

   글쓰는 것이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닐 때, 혹은 글쓰는 것이 재미있어서 왜 글을 쓰는지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글을 쓰는지조차 잊어버릴 때, 이러한 때가 바로 글쓰기가 필요한 때이고, 바로 이 때에 글을 쓰지 않으면 안되며, 이 때 비로소 문학이 탄생합니다.

   문학은 이와 같이 비공리적(非功利的)이고, 이것이 바로 문학의 본성(本性)입니다. 문학의 글쓰기가 일종의 직업이 된 것은 현대사회의 노동의 분화에서 나온 것으로써, 썩 아름다운 결과가 아니며, 이것이 작가에게는 매우 쓰라린 경험입니다.

   특히 지금 마주 대하는 이 시대는 시장경제가 주도하여, 책(書籍)도 상품이 되었습니다. 경계가 없고 맹목적인 시장경제 시대를 마주하여, 일개 작가만이 아니라 과거의 문학단체나 문학운동도 이제 그 설자리가 없습니다. 작가가 이와 같은 시장경제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또, 시대의 유행에 입맛을 만족시키는 문화상품을 만들어 내는 유혹에 떨어지지 않고 글을 쓰려면, 생계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다른 수단을 찾아야 합니다. 
   문학은 잘 팔리는 책(베스트 셀러)도 아니고, 인기도에 있어서 상위에 오르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텔레비젼 같은 영상매체가 선전하는 광고에 의하여 알려진 작가도 아닙니다. 글쓰는 자유는 부여받은 것도 아니고, 구매되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도 먼저 작가 자신의 내면적 필요에 의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부처(佛, 깨달음)가 네 마음에 있다고 말하는 것 대신에, 자유가 그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저 당신이 그것을 쓸지 쓰지 않을지를 보십시오. 당신이 만일 자유를 다른 그 무엇과 바꾼다면, 자유라는 이 새는 바로 날아가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대가입니다.

   작가는 따라서 보상(대가)을 기대하지 않고,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씁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일 뿐만 아니라, 자연히 사회에 대한 모종(某種)의 도전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이 허위가 아니라면, 작가는 자아를 부풀려서 영웅이나 투사가 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웅이나 투사가 투쟁하는 까닭은 위대한 사업을 위해서이거나, 공로를 세우기 위해서인데, 이것은 모두 문학작품 바깥의 일입니다. 작가가 만일 사회에 대하여 도전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언어를 통해서, 또한 그의 작품 안의 인물과 상황 가운데서 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문학에 해를 끼칩니다.

   문학은 분노의 함성이 아니며, 개인의 분노를 고발로 바꿀 수 없습니다. 작가 개인의 감정은 작품 안에서 해소하여 문학이 됨으로써, 시간의 마모를 견뎌내고,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가가 사회에 대하여 도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작품이 도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낫습니다. 
   오랫동안 생명력을 잃지 않는 작품은 당연히 작가가 처한 시대와 사회에 대하여 일종의 강력한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작가와 그의 행위의 소란스러움은 언젠가 사라지더라도, 독자들이 읽어준다면, 그 작품 안에서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울려 퍼질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종류의 도전은 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하며, 그것은 다만 사회 생태의 한계들을 넘어서도록 하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자세를 취하는 개인적인 열망 내지 기도(企圖)요, 결국은 다소간 평범하지 않은 자세이지만,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자랑스러움(驕傲)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만일 알 수 없는(不可知的) 어떤 법칙(規律)에 의하여 좌지우지되고 맹목적으로 움직인다면, 개개인의 서로 다른 목소리는 들려올 수 없으며, 이것은 곧 인간의 비애(悲哀)가 됩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보면 문학은 바로 역사를 보충(補充)합니다.

   역사의 거대한 법칙이 인간에게 설명이 되지 않을 때, 인간은 자기의 목소리(聲音)를 남겨 둘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역사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유산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약한 인간이 여전히 지니고 있는 한 가닥 필요한 믿음입니다.

   존경하는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院士)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노벨상을 문학에, 인간의 고난과 정치적 압력을 피하지 않고, 더욱이 정치의 도구가 되지 않는 문학에 수여하는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 가장 영예스러운 상을 시장(市場)의 작품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그렇지만 한 번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에 수여하는 것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동시에 나는 또한 스웨덴 아카데미가 세계가 주목하는 이 강단에 나를 오르게 하여 내 말을 듣는 것에 대하여, 그것도 세계를 향하여 방송되는 공공 방송 매체 상에서는 보통 거의 들을 수 없는 약하고 듣기 쉽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는 나에게 이 기회를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바로 노벨상의 취지(宗旨)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이와 같은 기회를 준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끝)

 

 

* 이 글(가오싱지엔(高行健)의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문학을 하는 까닭(文學的理由)]의 원문은 臺北의 聯經出版社에서 2000년 12월(初版 第9刷)에 발행한 가오싱지엔의 노벨상 수상작 {링산(靈山,Soul Mountain)}에 부록(pp. 533-547)으로 실려있고, 같은 출판사에서 2001년 1월(初版) 출판한 {沒有主義} pp.339-352에 다시 실렸으며, 월간 "聯合文學" 第196期(2001年2月號)pp.16-24에도 실려있다.

** 가오싱지엔이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The Royal Swedish Academy)에서 그의 노벨상 수상연설 때 사용한 언어는"링산"에 부록으로 실린 한어(漢語,中國語)였다. 당시 한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청중을 위해서, 그의 연설 원고는 스웨덴어, 불어, 영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가오싱지엔은 지금 사용되는 한어(중국어)가 서양언어에 의하여 그 본래의 어법이 많이 변하여 서양화되었음을 지적하며, 자신의 글쓰기에서 한어가 가진 본래의 어법과 맛을 되살리려고 노력한다.

   그렇다고 그의 글쓰기가 단순한 복고 지향은 물론 아니며, 한어 본래의 특징을 현대적으로 되살리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그의 글쓰기의 특징이 살아난다. 이 점은 그의 노벨상 수상 연설문에도 나타나 있어서, 역자와 같이 서양화된 한어를 배운 대부분의 사람들은(이른바 현대식 학교 교육을 받은 중국의 젊은 세대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님) 그의 글을 읽을 때, 곳곳에서 낯선 곳을 대하게 된다. 사족을 붙이면, 이른바 문학은 나의 전업이 아니다. 나는 1996년 이래로 타이완의 조그만 시골 본당에서 살고 있는 천주교 신부로서, 가오싱지엔이라는 인물에 그냥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 그와 관련한 글들이 있으면 눈여겨보는 그의 독자일 뿐이다.

   이 글을 번역할 때, The Official Web Site of The Nobel Foundation에 마련된 가오싱지엔의 원고 {文學的理由}의 원문(漢語)이외에 Mabel Lee의 영역본을 참조하였다. (양재오,2001/02/08)

 

출처 : 디지털 창비




가오싱지엔(高行健)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나는 어떤 운명이 나로 하여금 이 강단에 올라서게 하였는지 모릅니다. 이런저런 인연들이 만들어 낸 이 우연을 운명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제쳐놓고, 나는 줄곧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여김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는 언제나 알 수 없는(不可知) 것에 대하여 삼가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신()이 될 수 없으며, 더욱이 하느님(上帝)을 대신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초인(超人)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은 단지 이 세계를 더 혼란스럽고, 더 형편없게 만들어 놓을 뿐입니다. 니체 이후의 세기(世紀), 인간이 만들어 낸 재난은 인류역사에 가장 어두운 기록을 남겨놓았습니다. 각양각색의 초인이 인민의 지도자, 국가의 원수, 민족의 영도자로 불리면서, 모든 폭력적인 수단을 이용하여 죄악을 지은 것은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에 도취되어 있는 한 철학자의 광란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 문학의 강단을 이용하여 정치와 역사에 대해서 요란하게 말하고 싶지 않고, 단지 이 기회에 한 작가의 순전히 개인적인 입장을 표명하고자 합니다.

작가도 일개 보통 사람입니다. 근데 아마 좀 더 민감할 것입니다.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들은 대체로 더 연약합니다. 일개 작가는 인민의 대변인이나 정의의 화신으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목소리는 극히 미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개인의 목소리가 진실이 됩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문학도 단지 개인의 목소리일 뿐이며, 또한 지금까지 줄 곧 그래왔다는 것입니다. 문학이 일단 국가의 송가(頌歌)가 되고, 민족의 깃발, 정당의 혓바닥 혹은 계급과 집단을 대변하게 되면, 그 전파 수단을 최대한 이용하고 그 성세를 떨쳐서 천하를 덮어버릴 것입니다. 이런 문학은 본성(本性)을 상실하여, 더 이상 문학이라고 불릴 수 없으며 한갓 권력과 이용의 대용품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막 지나간 한 세기, 문학은 바로 이러한 불행에 직면하였습니다. 지나간 어떤 시기에 남겨 놓은 정치와 권력의 낙인(烙印)은 아주 깊고, 작가가 겪은 박해의 상흔 또한 깊습니다.

문학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지켜야하고 정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되며 개인의 목소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문학은 무엇보다도 개인의 느낌으로부터 나오고, 느낌이 있을 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이 반드시 정치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정치에 간여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학과 관련하여 이른바 경향성 혹은 작가의 정치경향 같은 유형의 논쟁도 지난 한 세기에 있었던 문학의 큰 병(病痛)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한 전통과 혁신은 보수와 혁명으로 가름하고, 문학의 문제를 모두 진보와 반동의 투쟁으로 몰아갔으니, 이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意識形態)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일단 권력과 결합하여 현실적인 힘(권력)으로 바뀌게 되면 문학과 개인 모두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20세기 중국문학이 처한 끊이지 않는 재난으로 문학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상태에 이르렀으니 바로 정치에 의해서 농락 당하는 문학의 시대에, 문학혁명과 혁명문학 모두 문학과 개인을 죽음의 땅으로 몰아 세웠습니다. 혁명의 이름으로 중국전통문화를 토벌하였으니, 공공연히 금서(禁書)와 책을 태우는 일(燒書)을 단행하였습니다. 과거 100년 간 무수한 작가들이 살해되거나 감금되고 유배 보내지거나 고된 노역에 처해졌습니다. 중국역사상 어떤 제왕시대도 이 시대와 견줄 수가 없을 정도로 문학활동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시대였으며, 더욱이 창작의 자유에 대해서는 더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작가가 만일 사상의 자유를 얻고 싶다면, 침묵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도망(逃亡)을 가야합니다. 그런데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가 오랫동안 말하지 않고 지낸다면, 그것은 마치 자살(自殺)과 다름이 없습니다. 자살이나 죽음을 피하여 자기 목소리를 내려는 작가는 도망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학사를 돌이켜보면, 동방이나 서방이 다를 것이 없는데, 취위엔(屈原)에서 단테, 조이스, 토마스 만, 솔제니친, 그리고 1989년 티엔안먼(天安門) 대학살 뒤의 수많은 중국지식인들 모두 유배되거나 망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시인과 작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마오쩌똥(毛澤東)이 전면적으로 전제정치를 실시하던 시절에는 도망(逃亡)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이 때는) 일찍이 봉건시대 문인들을 보호해 주던 산 속의 사찰(寺廟)에 은거해서 목숨을 걸고 사사로이 글을 썼씁니다. 한 개인이 만일 자신의 독립된 생각을 지켜나가고 싶으면 단지 혼자 말을 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도 세심하게 잘 감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 자신이 문학활동을 할 수 없던 시절에 스스로 그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였습니다. 문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식(意識)을 잘 견지하도록 해줍니다.

혼자 말을 하는 것이 문학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통해서 서로 교류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사람이 느낌(感受)과 생각(思考)을 언어에 주입하고, 글을 써서 문자화하여, 문학이 됩니다. 그 때는 어떤 공리(功利)적인 생각도 없고 심지어 훗날 어떻게 발표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으며, 그저 쓸 뿐입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동안 이미 기쁨(快感)을 누리고, 보상을 받고 또 위로를 얻기 때문입니다. 나의 장편소설 링산(靈山, Soul Mountain)은 바로 내 작품이 당국으로부터 단속 받던 시절에 내가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으로서 순전히 마음의 적막(寂寞)을 다독거리기 위해서, 바로 스스로를 위해서 쓴 것으로서, 뒷날 발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창작 경험을 돌이켜 보면, 문학의 뿌리(根本)는 인간이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인이며, 글을 쓰는 그 때 이미 자기 확인(긍정)을 하는 것입니다. 문학은 먼저 작가의 자기 만족의 필요에서 탄생하며, 사회의 반응이 있는지 없는지는 작품이 완성된 뒤의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반응이 어떤가 하는 것은 작가의 뜻(意願)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문학사(文學史)에 전해오는 많은 대작(大作)들이 작가들 생전에 간행되지 못했습니다. 만일 작가가 글을 쓰는 동안에 이미 자기 확인(긍정)을 얻지 못했다면, 어떻게 계속 써내려 갈 수 있겠습니까? 중국문학사상 제일 위대한 소설 시여우지(西遊記), 수웨이후짠(水滸傳)과 진핑메이(金甁梅)와 홍러우멍(紅樓夢), 이 네 가지 작품의 위대한 작가들의 일생에 대하여 셰익스피어의 경우와 같이 여전히 확실히 밝혀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남아있는 것은 모두 스나이안(施耐庵)이 쓴 자서전적 에쎄이 한편 뿐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실이 그가 말한 바와 같지 않다면, 그저 잠시 스스로 위로로 삼는 것으로 족할 뿐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필생의 정력을 생전의 대가없는 대작을 만드는데 쏟아 부을 수 있었을까? 현대소설의 선봉인 카프카(Kafka) 20세기 제일 깊이 있는 시인 페르난도 뻬소아(Fernando Pessoa)도 이와 같지 않았던가? 그들이 쏟아 낸 말들이 이 세상을 개조하려고 의도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자신의 무능함을 깊이 인식하면서도 여전히 말을 계속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언어가 가진 매력입니다.

언어는 여전히 인류 문명의 최상의 결정체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정교하고 미세하며 움켜잡기 어렵고 투철하고 깊이 파고들고 인간의 지각(感知)을 꿰뚫어서 인간의 이런 느낌의 주체를 세계에 대한 인식과 연결해 버립니다. 써서 남긴 문자는 이처럼 기묘하여, 고립된 개개인이 설사 다른 민족, 다른 시대의 사람이라 해도 서로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쓰여진 문학과 그것을 읽는 현실성은 그것이 가진 영원한 정신가치와 이렇게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 일개 작가가 모종(某一種)의 민족문화를 애써 강조하는 것에 대하여 좀 의문을 가집니다. 내가 출생하여 사용하는 언어에 대하여 볼 것 같으면, 중국의 문화전통은 자연히 내 몸에 있습니다. 문화는 또 늘 언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로부터 지각이 생기고, 생각과 그것을 진술하는 그 어떤 비교적 안정된 특수한 방식이 생깁니다. 그러나 작가의 창조성은 바로 이런 언어로 말해진 곳에서 비로소 시작되며, 이런 언어가 아직 충분히 진술되지 않은 곳에서 좀 더 그 가능성을 모색하게 됩니다. 언어예술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지금 자기 자신에게, 한 눈에 금방 식별이 가능한 민족의 상표(표지)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문학작품은 국경을 넘어섭니다. 번역을 통하여 언어의 장벽도 넘어서서, 지역과 역사형성의 몇 가지 특정한 사회의 습속과 인간 관계 안으로 넘어들어 가며, 깊이 투과한 인간의 본성은 여전히 인류의 보편적인 것이고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작가는 그 누구든지 자기 민족 문화 외에도 다중문화의 영향을 받습니다. 민족문화의 특색을 강조하는 것이 만일 관광업종의 광고와 관련한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의심을 일으키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문학은 이데올로기를 초월하고, 국경을 초월하고, 민족의식을 초월하는데, 그것은 마치 개인의 존재가 본래 이런 주의(主義,-ism) 혹은 저런 주의를 초월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실존 상태는 언제나 실존에 대한 논설이나 사변(思辨)보다 우선합니다. 문학은 인간의 실존이 겪는 곤경을 두루 돌보며, 어떤 금기도 없습니다. 문학에 대하여 한계를 정하는 것은 언제나 문학바깥에서 옵니다.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습속 등은 모두 문학을 재단하고 각종 틀에다가 맞추어서 그 외양을 장식하려 기도합니다.

그러나, 문학은 권력을 미화하지도 않고, 모종(某種)의 사회적 유행도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 그 가치판단을 갖고있으며, 또한 심미적(審美的)입니다. 인간의 정감(情感)과 깊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심미(審美)는 문학작품의 유일하고 제거할 수 없는 판단입니다.물론 이런 판단은 사람에 따라서 다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정감은 늘 다른 개인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관적인 심미적 판단(審美判斷)은 확실히 보편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표준이며, 사람들이 문학의 훈련을 거쳐서 형성된 감상력입니다.우리는 작품을 읽는 가운데 작자의 사상과 정감이 주입된 시의 느낌과 아름다움, 숭고함과 가소로움, 가엾음과 황당무계함, 유머와 아이러니 등을 다시 체험합니다.

그리고 시적인 정취가 꼭 서정(抒情)에서만 나오지는 않습니다. 작가의 무절제한 자기 도취(自戀)는 일종의 소아병(幼稚病)입니다.물론 처음 습작할 때 사람들은 이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면, 서정(느낌의 표현)은 아마 여러 층(層次)이 있으며,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냉정한 눈길(冷眼)로 바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적인 정취(詩意)는 이렇게 거리를 유지하고 바라보는 가운데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눈길(目光)이 만일 작가 자신을 응시한다면, 그 눈길은 책 가운데 있는 인물과 작자(作者) 자신을 압도(능가)하여 작가의 제3의 눈()이 되며, 아마 이 때 그 눈(目光)은 가능한 중성(中性)의 눈( 3의 눈)이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재난(災難)과 인간세상의 쓰레기도 진중하고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며, 고통이 일어나고, 세상을 혐오하고 구토를 느끼면서도,동시에 비극과 가엾음을 일깨우며,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모의 정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비록 문학이 예술과 마찬가지로 유행 따라 매년 변할지라도 인간의 정감(情感)에 뿌리를 내린 심미(審美)는 아마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문학의 가치판단과 시대적 풍조의 구별(차이)은 바로 후자는 오직 새로워지면 좋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시장의 일반적인 운영의 기제로서, 책 시장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고 작가의 심미() 판단이 만일 시장의 동향을 추종한다면, 그것은 곧 문학의 자살과 다름이 없습니다. 특히 소비사회라고 부르는 오늘날 내가 쏟아 내는 것은 일종의 냉담한 문학(冷的文學, cold literature)이라고 생각합니다.

십 년 전, 내가 7년에 걸쳐서 링산(靈山) 쓰기를 다 마치고 나서, 단문(短文) 한 편을 썼는데, 거기서 문학은 이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문학은 본래 정치와 관계가 없으며, 순전히 개인의 일 일 뿐이다. 한 번 살펴보면, 일종의 경험에 대한 회고요, 약간의 억측(허구)과 이런 저런 느낌이요, 어떤 마음 상태의 표현이면서, 생각의 만족을 주는 것이다.

이른바 작가는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는지 없는지, 읽을 수 있는지 없는지 상관 않고, 혼자서 스스로 말하고 쓰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영웅이라고 불려지기를 요청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우상이 되어서 숭배하라고 할 가치도 없다.더욱이 죄인도 아니고, 민중의 적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단지 다른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 때때로 (그가 쓴) 작품과 함께 수난을 당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몇몇의 적을 만들어서 민중의 주의력을 돌릴 필요가 있을 때, 작가는 일종의 희생품이 된다. 더욱 불행한 것은 휘둘려서 어찔어찔해 하는 작가는 결국 희생제물은 하나의 큰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단지 일종의 정신상의 교류일 뿐이다. 서로 얼굴을 대면할 필요도 없고, 서로 왕래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작품을 통하여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문학은 인간의 활동에 있어서 여전히 없앨 수 없는 일종의 행위이다. 읽는 것과 쓰는 것 둘 다 모두 자발적이다(自覺自願). 그러므로 문학은 대중에 대하여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이렇게 본성을 회복한 문학은 냉담한 문학(冷的文學)이라고 불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존재는 단지 인간이 물질적 만족을 추구하는 것 밖의 일종의 순수한 정신활동이다. 이런 문학이 물론 오늘 시작된 것은 아니다. 다만 오직 과거의 주요한 정치세력과 사회습속(習俗)의 압력을 제압하고, 오늘날 여전히 소비사회의 상품가치관에 오염되는 것에 대항한다. 그리고 생존을 추구하고,먼저 스스로 고독함을 달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가 만일 이와 같은 창작활동에 종사한다면, 분명히 살기가 곤란하다. 부득이 창작활동 이외의 다른 생계의 방도를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이러한 문학창작은 일종의 사치요, 정신적인 만족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냉담한 문학이 다행히도 출판되어서 세상에 전해질 수 있으니, 그것은 오직 작가와 그들의 친구들의 노력에 의해서이다. 차오쉬에친(曹雪芹)과 카프카 모두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그들의 작품은 생전에 출판할 수 없었으며, (그들이) 무슨 문학운동을 야기하였느니 혹은 사회의 저명인사(스타)가 되었느니 하고는 더더욱 말하지 말라. 이들의 작가 생활은 사회의 가장자리와 틈새에 자리했으며, 당시에 그 어떤 보상도 바랄 수 없는 정신활동에 전념하였고, 사회의 인정도 구하지 않았으며, 단지 스스로 하는 일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었을 뿐이다.

냉담한 문학은 일종의 도망하여 그 생존을 추구하는 문학이며, 일종의 사회가 억누르지 못하는 정신적으로 자기를 구하는 문학으로서, 한 민족이 만일 결국 이러한 일종의 비공리적(非功利的)인 문학을 용인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작가 개인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그 민족의 비애임에 틀림없다.

나는 뜻밖에 생전에 다행히도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瑞典皇家學院)가 주는 이러한 큰 영예와 상을 받게되었습니다. 이것은 세계 각지의 친구들이 여러 해 동안 내 작품을 대가도 바라지 않고, 또 수고도 마다 않고 번역, 출판, 연출과 평가를 해준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입니다. 그들의 명단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그들에게 일일이 다 감사를 표시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나를 받아들여준 프랑스에 특별히 감사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학과 예술로 명망이 있는 이 나라에서 나는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조건을 얻었고, 또 나의 독자와 관중을 얻었습니다. 비록 창작활동에 종사하는 것이 상당히 고독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행히도 그렇게 고독하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여기서 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생활은 축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지난 180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화로웠던 스웨덴과 같지 않습니다. 다가오는 새 세기는 지난 세기에 수많은 재난을 충분히 겪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과거의 전철을 되밟지 않을 것이라고 보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억은 생물의 유전자처럼 그냥 다음세대로 전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능(智能)을 가진 인간은 과거의 교훈을 잘 받아들일 만큼 그렇게 총명하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智能)에서 악의(적의)의 불꽃이 타오르면 그것은 인간 자신을 생존의 위협에 빠뜨릴 수 도 있습니다.

인간이 반드시 진보에 진보를 거듭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여기서 인간의 문명사(文明史)에 대하여 언급을 좀 하겠습니다. 역사와 문명이 반드시 함께 나란히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중세 유럽의 침체기부터 근대 아시아 대륙의 쇠퇴와 혼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20세기에 겪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을 죽이는 수단은 갈수록 더 정교하고 세련되었습니다. 인간의 과학기술이 진보함에 따라서 인간이 그만큼 더 문명화되지 못했습니다.

일종의 과학주의의 입장에서 혹은 유사 변증법적인 역사관에 입각해서도 인간의 행위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과거 한 세기 동안 유토피아에 대한 열광과 계속적인 혁명은 오늘날 보는바와 같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것을 바라보며 그저 씁쓸함을 느낄 뿐입니다.

부정의 부정이 반드시 긍정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고, 혁명이 반드시 새로운 것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며, 신세계의 유토피아가 구 세계의 파괴를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회혁명 이론이 문학에도 적용되어서, 창조의 영역이었던 것이 전쟁터로 변하였고, 앞서 간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문화전통을 밟아 버리고, 모든 것을 영(,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였고, 오직 새로운 것은 좋은 것이고 문학의 역사도 거꾸로 뒤집어서 새롭게 해석되었습니다.

작가는 사실 창조주의 역할을 담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마치 구세주(基督)나 되는 것처럼 부풀려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러다 보면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미친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이 현실을 환상으로 변용 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 밖에 있는 모든 것은 연옥(煉獄)으로 변하게 되고, 자연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만일 자아(自我) 제어를 상실하면 다른 사람은 물론 지옥이 되고, 말할 나위 없이 그는 자신을 미래를 위한 희생 제물로 만들어 버리며, 다른 이들도 그 자신처럼 희생제물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20세기의 역사를 서둘러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세계가 다시 모종의 이념적 틀의 폐허 속으로 침몰해 버린다면, 이 역사는 헛되이 쓰여질 것이며 후세가 그들을 위해서 그것을 다시 고쳐 쓸 것입니다.

작가는 예언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살아가는 것입니다. 눈가림을 제거하고 망상에서 벗어나 이 순간을 직시하고, 동시에 자아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자아 또한 하나의 혼돈입니다. 세상과 타자에 대하여 질문하면서, 그때 그는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습니다. 재난과 압박은 보통 몸 바깥에서 오며, 인간의 비겁함과 걱정(불안)은 그 고통을 가중시키고,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불행을 유발시킵니다.

인간행위는 이처럼 불가해하며, 인간은 그 자신에 대한 이해도 밝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문학은 단지 인간이 자아를 응시하는 그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자아의 의식(意識)에 빛을 비추어 그 싹이 자라도록 합니다.

전복(파괴)시키는 것이 문학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의 가치는 거의 모르거나 조금 밖에 알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고 드러내 보이고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세계의 참된 모습(眞相)은 여전히 잘 모릅니다. 진실(眞實)은 아마 난공불락의 것이고, 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특질입니다.

새로운 세기가 이미 도래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새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문학혁명과 혁명문학은 이데올로기와 함께 붕괴되어 거의 결말이 나 버렸습니다. 한 세기 동안 사회를 유토피아의 환영으로 덮어버린 연기는 사라져버렸습니다. 문학이 이런 주의(-ism) 혹은 저런 주의하는 굴레들을 벗어 던져버린 뒤에, 인간 실존의 곤경(딜레마)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 실존의 기본적 곤경은 크게 바뀐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문학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지금은 예언도 없고 약속도 없는 시대입니다. 나는 그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예언자(先知)와 판관 노릇을 하는 것은 끝나야 할 것입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수많은 예언들이 사람들을 기만하였습니다. 미래를 위하여 다시 새로운 미신을 만들어 내느니, (미래에 도래할 것을) 기다려 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작가는 증언자의 위치로 돌아가야 하고,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문학이 마치 무슨 사실을 기록하는 문서와 같아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실상에 대한 문서화된 증언은 대단히 적습니다. 게다가 사건의 배후에 있는 원인과 동기는 종종 덮어서 밀봉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문학이 진실과 접촉할 때, 인간의 내심에서부터 사건의 전체 과정이 가리움 없이 드러나게 됩니다. 작가가 이처럼 인간 실존의 참된 상황을 묘사하고 허튼 소리 무의미한 말을 하지 않을 때, 바로 그 안에 문학이 가지고 있는 힘(力量)이 있습니다.

작가가 진실을 파악하는 통찰력을 지니고 작품의 품격을 결정하는 것은 문자 유희와 글쓰는 기교(테크닉)가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로 진실에 대한 정의는 많고, 진실과 접촉하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작가가 인간현상을 어떻게 윤색했는지, 완전하고 정직한 상()을 묘사했는지는 한 눈에 곧바로 파악됩니다. 어떤 이데올로기 아래서 이루어지는 모종의 문학비평은 진실여부를 의미분석으로 변환시켜버립니다. 그러한 원칙과 교조(敎條)는 문학창작과 그리 큰 관계는 없습니다.

작가에 대하여 말할 것 같으면, 진실을 대면하는 여부는 단지 창작의 방법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글쓰는 태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펜을 들었을 때의 진실한지의 여부는 동시에 펜을 놓았을 때의 성실성을 내포합니다. 여기서 진실은 단지 문학의 가치판단이 아니라, 동시에 윤리적인 함의(涵義)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도덕적으로 교화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묘사할 때, 그는 또한 자기 자신을 비도적으로(사악하게) 드러내기도 하고, 그의 내심에 있는 은밀한 것마저도 노출시킵니다. 작가에게 문학적으로 진실한 것은 거의 윤리와 같고, 그것은 또한 지고무상(至高無上)한 윤리입니다.

글쓰는 태도가 엄숙한 작가의 손에서 문학적인 거짓말(虛構)조차 인생의 진실을 드러내는 전제가 되고,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불멸의 작품이 가진 생명력이 바로 여기(文學的虛構)에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까닭에 그리스의 비극과 셰익스피어가 이 지상에서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문학은 단순히 현실을 모사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표층을 꿰뚫고 실재(現實)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 속으로 깊이 접촉합니다; 문학은 허상(假想)을 제거하고 또, 일상적인 일 위에서 높이 내려다봅니다, 즉 넓은 안목으로 전체성 안에서 사태(事態)의 흐름을 드러냅니다.

물론 문학도 상상(想像)에 의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의 여정은 절대로 허튼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느낌에서 벗어난 상상과 생활경험의 근거가 없는 허구는 단지 창백하고 무력해 질 수 있을 뿐입니다. 작가 자신이 믿고 탄복하지 못하는 작품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참으로 문학은 단순히 일상생활의 경험에만 의지하지 않으며, 작가는 개인의 경험에만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과 이전의 문학작품 가운데서 이미 진술된 것들이 언어라는 운송수단을 통과하여 자신의 느낌으로 변용 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문학언어(文學語言)의 매력입니다.

저주나 축복처럼 언어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언어의 예술은 진술하는 사람이 자기의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데 있는 것이며, 그것은 일종의 부호체계도, 일종의 의미론적 구조도 아니며, 단순한 문법구조로서 스스로 만족하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만일 언어 배후에 있는 그 말하는 살아있는 사람을 잊어버린다면, 의미의 연역은 쉽게 지적인 유희에 떨어집니다.

언어는 단순한 개념도, 관념의 운송수단도 아니며, 그것은 동시적으로 감각(느낌)과 지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부호와 표지가 살아있는 사람의 언어를 대신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말하는 사람의 배후에 있는 의지와 동기, 성조(聲調)와 정서는 낱말이 가진 표면적인 뜻과 수식어에 의해서 완전히 다 표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문학언어가 함축하고 있는 뜻은 살아있는 사람에 의해서 발성되어야만 비로소 충분히 구현됩니다. 그러므로 사유의 도구와 마찬가지로, 문학은 청각에도 의거하여야 합니다. 인간이 언어가 필요한 것은 단지 의미를 전달하는 데만 있지 않고, 동시에 자기 존재를 경청하고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말을 작가에게 적용하여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我表述故我在, I say and therefore I am). 그러나 작가로서의 나는 작가 자신일 수 있고, 혹은 서술하는 사람과 같을 수도 있고, 혹은 책 가운데의 인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서술하는 주체는 그도 될 수 있고, 너도 될 수 있으니, 셋으로 나뉘어 집니다. 주어의 인칭의 확정은 느낌을 표현하는 출발점이며, 이로부터 서로 다른 서술방식이 이루어집니다. 작가는 그의 독특한 서술방식을 찾는 과정에서 그의 느낌을 살려냅니다.

나는 소설 가운데서 인칭(대명사)으로 통상적인 인물을 대신하며, (), ( ), ()와 같은 서로 다른 인칭으로 하나의 주인공(같은 주인공)을 묘사함으로써, 하나의 주인공이 취하는 입지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느낌의 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동일한 인물에게 서로 다른 인칭을 사용함으로써 나타나는 거리감(距離感)은 또한 무대의 배우(演員)에게 더 넓은 심리적 공간을 제공합니다. 나는 서로 다른 인칭의 전환을 희극을 쓸 때도 소개하였습니다.

소설과 희곡작품은 종말에 이르지 않았고 또 이를 수도 없습니다. 경솔하게 어떤 문학과 예술양식(쟝르)의 죽음(死亡)을 선언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인류문명과 동시에 탄생한 언어는 생명처럼 경이롭고 그것이 가진 표현력은 다함이 없습니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 언어가 감추고 있는(함축하고 있는) 잠재적인 힘을 발견하고 개척하는 것입니다. 작가는 조물주가 아니며, 설사 이 세계가 오래되고 낡았다 할지라도, 그는 이 세계를 없앨 수 없습니다. 그는 또한 설사 이 현실세계가 황당무계하고 인간의 지력으로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 어떤 새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할 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어느 정도 새로운 표현을 진술해 낼 수 있으니, 이전 사람들이 말한 곳에서 좀 더 나아가 말할 수 있고, 이전 사람들이 마친 곳에서 다시 말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문학의 전복(顚覆)은 문학혁명(文學革命)의 빈말에 불과하였습니다. 문학은 죽지 않았으며, 작가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작가는 서가(書架)에 그의 위치가 있으며, 독자가 와서 여전히 책을 읽어 줄 때 그는 살아있게 됩니다. 하나의 작가가 만일 이와 같이 방대한 인류 문학의 보고(寶庫) 안에 미래의 그 누가 읽어줄 책을 한 권 남겨 놓았다면, 그것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문학은 작가가 글을 쓰고, 독자가 그 글을 읽을 그 때, 그 순간에 실현되고, 그 가운데 즐거움이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 만일 허위가 아니라면, 이는 자기도 속이고 또 남도 속이는 것입니다. 문학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고, 게다가 바로 살아있는 사람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큰 자유(自在)를 위하여 하나의 이유를 찾는다면, 영원한 현재 안에서 개개 생명의 긍정이 바로 문학이 문학일 수 있는 절대적인 까닭입니다.

글쓰는 것이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닐 때, 혹은 글쓰는 것이 재미있어서 왜 글을 쓰는지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글을 쓰는지조차 잊어버릴 때, 이러한 때가 바로 글쓰기가 필요한 때이고, 바로 이 때에 글을 쓰지 않으면 안되며, 이 때 비로소 문학이 탄생합니다. 문학은 이와 같이 비공리적(非功利的)이고, 이것이 바로 문학의 본성(本性)입니다. 문학의 글쓰기가 일종의 직업이 된 것은 현대사회의 노동의 분화에서 나온 것으로써, 썩 아름다운 결과가 아니며, 이것이 작가에게는 매우 쓰라린 경험입니다.

특히 지금 마주 대하는 이 시대는 시장경제가 주도하여, (書籍)도 상품이 되었습니다. 경계가 없고 맹목적인 시장경제 시대를 마주하여, 일개 작가만이 아니라 과거의 문학단체나 문학운동도 이제 그 설자리가 없습니다. 작가가 이와 같은 시장경제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 시대의 유행에 입맛을 만족시키는 문화상품을 만들어 내는 유혹에 떨어지지 않고 글을 쓰려면, 생계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다른 수단을 찾아야 합니다. 문학은 잘 팔리는 책(베스트 셀러)도 아니고, 인기도에 있어서 상위에 오르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텔레비젼 같은 영상매체가 선전하는 광고에 의하여 알려진 작가도 아닙니다. 글쓰는 자유는 부여받은 것도 아니고, 구매되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도 먼저 작가 자신의 내면적 필요에 의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부처(, 깨달음)가 네 마음에 있다고 말하는 것 대신에, 자유가 그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저 당신이 그것을 쓸지 쓰지 않을지를 보십시오. 당신이 만일 자유를 다른 그 무엇과 바꾼다면, 자유라는 이 새는 바로 날아가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대가입니다.

작가는 따라서 보상(대가)을 기대하지 않고,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씁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일 뿐만 아니라, 자연히 사회에 대한 모종(某種)의 도전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이 허위가 아니라면, 작가는 자아를 부풀려서 영웅이나 투사가 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웅이나 투사가 투쟁하는 까닭은 위대한 사업을 위해서이거나, 공로를 세우기 위해서인데, 이것은 모두 문학작품 바깥의 일입니다. 작가가 만일 사회에 대하여 도전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언어를 통해서, 또한 그의 작품 안의 인물과 상황 가운데서 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문학에 해를 끼칩니다. 문학은 분노의 함성이 아니며, 개인의 분노를 고발로 바꿀 수 없습니다. 작가 개인의 감정은 작품 안에서 해소하여 문학이 됨으로써, 시간의 마모를 견뎌내고,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가가 사회에 대하여 도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작품이 도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낫습니다. 오랫동안 생명력을 잃지 않는 작품은 당연히 작가가 처한 시대와 사회에 대하여 일종의 강력한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작가와 그의 행위의 소란스러움은 언젠가 사라지더라도, 독자들이 읽어준다면, 그 작품 안에서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울려 퍼질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종류의 도전은 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하며, 그것은 다만 사회 생태의 한계들을 넘어서도록 하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자세를 취하는 개인적인 열망 내지 기도(企圖), 결국은 다소간 평범하지 않은 자세이지만,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자랑스러움(驕傲)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만일 알 수 없는(不可知的) 어떤 법칙(規律)에 의하여 좌지우지되고 맹목적으로 움직인다면, 개개인의 서로 다른 목소리는 들려올 수 없으며, 이것은 곧 인간의 비애(悲哀)가 됩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보면 문학은 바로 역사를 보충(補充)합니다. 역사의 거대한 법칙이 인간에게 설명이 되지 않을 때, 인간은 자기의 목소리(聲音)를 남겨 둘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역사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유산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약한 인간이 여전히 지니고 있는 한 가닥 필요한 믿음입니다.

존경하는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院士)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노벨상을 문학에, 인간의 고난과 정치적 압력을 피하지 않고, 더욱이 정치의 도구가 되지 않는 문학에 수여하는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 가장 영예스러운 상을 시장(市場)의 작품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그렇지만 한 번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에 수여하는 것에 대하여 감사합니다.동시에 나는 또한 스웨덴 아카데미가 세계가 주목하는 이 강단에 나를 오르게 하여 내 말을 듣는 것에 대하여, 그것도 세계를 향하여 방송되는 공공 방송 매체 상에서는 보통 거의 들을 수 없는 약하고 듣기 쉽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는 나에게 이 기회를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바로 노벨상의 취지(宗旨)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이와 같은 기회를 준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

 

* 이 글(가오싱지엔(高行健)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문학을 하는 까닭(文學的理由)]의 원문은 臺北의 聯經出版社에서2000 12(初版 第9)에 발행한 가오싱지엔의 노벨상 수상작 {링산(靈山,Soul Mountain)}에 부록(pp. 533-547)으로 실려있고, 같은 출판사에서 2001 1(初版) 출판한 {沒有主義} pp.339-352에 다시 실렸으며, 월간 "聯合文學" 196(20012月號)pp.16-24에도 실려있다.

** 가오싱지엔이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The Royal Swedish Academy)에서 그의 노벨상 수상연설 때 사용한 언어는"링산"에 부록으로 실린 한어(漢語,中國語)였다. 당시 한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청중을 위해서, 그의 연설 원고는 스웨덴어, 불어, 영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가오싱지엔은 지금 사용되는 한어(중국어)가 서양언어에 의하여 그 본래의 어법이 많이 변하여 서양화되었음을 지적하며, 자신의 글쓰기에서 한어가 가진 본래의 어법과 맛을 되살리려고 노력한다. 그렇다고 그의 글쓰기가 단순한 복고 지향은 물론 아니며, 한어 본래의 특징을 현대적으로 되살리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그의 글쓰기의 특징이 살아난다. 이 점은 그의 노벨상 수상 연설문에도 나타나 있어서, 역자와 같이 서양화된 한어를 배운 대부분의 사람들은(이른바 현대식 학교 교육을 받은 중국의 젊은 세대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님) 그의 글을 읽을 때, 곳곳에서 낯선 곳을 대하게 된다. 사족을 붙이면, 이른바 문학은 나의 전업이 아니다. 나는 1996년 이래로 타이완의 조그만 시골 본당에서 살고있는 천주교 신부로서, 가오싱지엔이라는 인물에 그냥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 그와 관련한 글들이 있으면 눈여겨보는 그의 독자일 뿐이다. 이 글을 번역할 때, The Official Web Site of The Nobel Foundation에 마련된 가오싱지엔의 원고 {文學的理由}의 원문(漢語)이외에 Mabel Lee의 영역본을 참조하였다.

 

 

 
 


 
                      

{자료}ㅡ

노벨문학상 수상 모옌, 왜 논란인가?

"체제순응적 인물" vs "작품성으로 봐야"

이재호 기자  

 2012-10-12 오후 3:22:20

 
중국 소설가 모옌(莫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두고 중국 언론과 반체제 지식인들이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중국 소설가 모옌을 선정했다고 11일(현지시간) 밝혔다. 한림원은 "모옌은 환상적인 리얼리즘을 민간 구전 문학과 역사, 그리고 동시대와 융합시켰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모옌의 문학 세계에 대해 한림원은 미국의 윌리엄 포크너나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연상케 한다며, 환상과 현실, 역사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이 절묘하게 엮인 문학 세계를 창조했다고 설명했다.

모옌은 중국 근현대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의 고향인 산둥성 가오미현을 무대로 주로 소설을 써왔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부터 최근의 중국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민중의 삶을 그린 작가로 유명하다.

모옌은 이날 수상 발표 직후 <중국신문사>와 한 인터뷰에서 노벨상을 받아 매우 기쁘다고 소감을 밝힌 후, 자신의 수상이 중국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중국에는 뛰어난 작가들이 많고 그들의 작품 또한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중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소설가 모옌이 11일(현지시간) 고향 산둥성 가오미현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모옌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중국의 대표감독 장이머우(張藝謀)에 의해 영화화된 <붉은 수수밭>을 꼽을 수 있다. 이외에도 모옌의 대표작으로는 <생사피로(生死疲勞)>, <술의 나라(酒國)>, <풍유비둔(豊乳肥臀)>, <개구리>등이 있다.

모옌의 수상, 체제인사였기 때문에 가능?

모옌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중국 관영통신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내비쳤다. 중국 <신화통신>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노벨문학상이 그동안 '중국 국적'을 가진 작가에게는 수여되지 않았다"며 "올해는 이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란 기대감이 컸다"고 전했다. 중국 국영방송 <CCTV> 역시 수상 소식이 알려진 후 평론을 통해 "중국도 기뻐하며 세계도 기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중국 관영 통신들의 환영 보도는 2년 전 반체제 민주화 운동가인 류사오보(劉曉波)의 노벨평화상 수상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당시 관영 언론들은 류샤오보의 노벨상 발표 소식을 축소 보도했다.

또 중국 정부는 "노벨상이 반중(反中)이라는 목표에 부합하는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다"며 강력히 비난했다. 반체제 성향의 작가로 1987년 프랑스로 망명한 중국 작가 가오싱젠(高行健)이 200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도 중국 정부는 탐탁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중국 관영통신이 모옌의 수상을 적극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중국의 저명한 반체제 인사 웨이징성(魏京生)은 모옌의 수상은 한림원이 중국 당국을 기쁘게 하려는 조치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미국에 망명 중인 그는 11일(현지시간) 모옌의 작가적인 능력은 높이 평가하지만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문학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중국과 한림원 간 큰 거래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웨이징성은 "중국 정부가 모옌의 수상을 전후해 보여준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면 이번 수상 결정이 중국 공산당 정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목적임을 알 수 있다"며 "이 때문에 이번 노벨문학상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날을 세웠다.

중국의 유명 블로거 원윈차오(溫雲超) 역시 모옌이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모옌이 중국 내에서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핵심 인사 중 한 명이라고 비난했다. 중국독립중문필회(中國獨立中文筆會)도 모옌의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은 잘못된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19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운동 때 학생 지도자로 활동했다가 미국에 망명 중인 차이링(柴玲)은 11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모옌이 반체제적 작품을 쓰는 작가임에도 중국 관영언론들이 환영의 뜻을 보였다며, 이번 수상을 보고 희망을 갖게 됐다고 논평했다.

모옌의 작품은 어떤 작가들보다 체제 비판적

모옌의 수상을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체제 내부의 어용 인사라는 점을 지적한다. 모옌이 중국의 공공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작가협회의 부주석인데다가 지난 2009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때 반체제 인사인 다이칭(戴晴)과 베이링(貝嶺)의 참가를 이유로 도서전에서 철수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 모옌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계기가 된 <붉은 수수밭ⓒ서안촬영소 (Xi'an)
또 중국 지식인과 작가를 탄압한 계기가 됐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옌안(延安) 문예 좌담회 연설'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가운데 모옌이 기념집 출판에 참여하면서 '부역 작가'라는 비판도 받았다.

모옌의 수상에 대해 중국 반체제 인사들의 비판 발언이 이어지는 가운데 스웨덴 한림원 종신 서기인 페테르 엥글룬드는 11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문학상을 주는 것이다. 문학적인 장점을 고려한다. 정치적인 사항은 이 고려 사항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문학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거나 올해 상을 받은 사람이 정치적인 문학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라며 "모옌의 작품은 중국 역사와 현재의 중국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그러나 그는 반체제인사는 아니다. 그는 체제 안에서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이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모옌의 수상을 체제와 반체제의 이분법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중국 현대문학을 전공한 서강대학교 중국문화과 이욱연 교수는 <프레시안>과 한 통화에서 "모옌을 소위 관방작가냐 아니냐라고만 판단하는 시각은 냉전적인 사고"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옌은 체제 안에서 활동하는 작가다. 하지만 작품 내용만 보면 중국영토 바깥에서 활동하는 어떤 반체제 인사들보다 체제 비판적인 작품을 써왔다"라며 "체제와 반체제의 이분법적인 경계로 구분하면 모옌은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작품 자체로 평가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어 "모옌의 작품 중에 <인생은 고달파(원제 : 生死疲勞)>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초기부터 2000년까지 중국의 사회주의 역사를 다룬 작품인데, 농민들과 민중들에 대한 억압을 그들의 입장에서 풀어냈다"라며 "모옌의 작품이 대단히 체제 비판적이다. 그를 어용이나 체제 순응적인 작가로 보는 것은 반체제 인사들의 과도한 시각"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자리를 맡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중국 문학계의 시스템에서는 몇몇 젊은 작가를 빼놓고는 모든 작가들이 작가협회에 소속되어 있다"며 "그곳에 포함되어 있다고 어용이라고 보는 것은 비약"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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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옌 "침묵도 자유…비판.지지자 모두에게 감사"      2012.10.12 11:37

 

 

 

(홍콩=연합뉴스) 황희경 특파원 =
중국 소설가 모옌(莫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두고 중국의 자유 지식인 계층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베이펑'(北風)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중국의 유명 검색하기">블로거 원윈차오(溫雲超)는 모옌이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중국작가협회의 부주석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모옌이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주요 책임 인사 중 한 명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12일 홍콩 명보(明報)에 "온몸에 대변이 묻어 있는 사람이 훌륭한 요리를 만들었다 해도 삼키기가 쉽지 않다"면서 모옌에게는 노벨문학상이 강조하는 인본주의적 이상의 정신이 부족하며 수상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원윈차오는 또 2주 전 검색하기">노벨상 심사위원회에 모옌의 수상 가능성에 대해 항의하는 이메일을 보냈다면서 앞으로도 위원회가 상을 취소할 때까지 계속 항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비용 문제가 해결된다면 검색하기">시상식 때 검색하기">스웨덴에 가서 항의하겠다면서 심사위원들이 중국의 현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매우 순진하다"고 비판했다.

원윈차오는 노벨문학상 발표 이후 웨이보(微博·중국판 검색하기">트위터)에 비판하는 글을 올리자 계정이 삭제됐다고 주장했다.

미국에 망명한 중국 반체제 인사 웨이징성(魏京生)도 모옌의 작가적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림원이 모옌을 수상자로 결정한 것은 그가 다른 작가들에 비해 체제순응적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 정부가 모옌의 수상을 전후해 보여준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면 이번 수상 결정이 검색하기">중국 공산당 정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목적임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이 때문에 이번 검색하기">노벨 문학상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평가절하했다.

검색하기">인터넷에서는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풍자해 노벨상 메달에 들어있는 노벨의 입에 검정 검색하기">테이프를 붙인 사진이 돌고 있다.

그러나 소설가 겸 시인인 베이춘은 "작가는 성인(聖人)이 아니며 정신적 모순이 허용된다"면서 "모옌이 자신의 영향력을 다른 사람들이 양심에 따라 행동하도록 독려하는 데 쓰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모옌은 자신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방금 세례를 받은 것 같다"고 표현했다.

그 는 수상 발표 이후 홍콩 봉황TV와 전화통화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시대"라면서 "비판이든 지지든 모든 온라인상의 언급들이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며 비판자든, 지지자든 모두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모옌 은 또 "인터넷이 등장하기 이전 과거에는 작가는 많은 이들이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면서 "그러나 지금은 그게 가능하기 때문에 내 글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모옌은 앞서 자신의 작가협회 부주석 신분에 대해 단지 '명목상'의 직함일 뿐 실제 일하지는 않는다면서 자신의 실제 직업은 검색하기">문화부 예술연구생원 산하 문학원 원장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또 침묵 또한 일종의 자유라면서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글 쓰는 것이지 모두가 루쉰(魯迅)처럼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옌은 "중국엔 루쉰(魯迅) 한 명으로 충분하다. 만약 1만 명의 루쉰이 있다면 그것은 재난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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