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라트비아 리가에서 코로나로 사망한 김기덕(60) 감독은 왜 발틱해 소국(小國) 라트비아에 정착하려 했을까?

김 감독의 라트비아 거주와 영주권 신청 배경에는 옛 소련(蘇聯)의 요절(夭折) 가수 빅토르 초이(최)에 관한 영화 구상 때문으로 알려졌다.

빅토르 초이는 28세 요절했다. 김 감독 역시 요즘치고는 젊은 나이에 별세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전양준 집행위원장은 페이스북에 “김기덕 감독이 자신의 환갑일(12월 20일)을 불과 한 주 앞두고 코로나19로 타계했다는 충격적인 비보를 들었다”며 “한국영화계에 채울 수 없는 크나큰 손실이자 슬픔”이라고 애도했다.

고(故) 김기덕 감독
 
고(故) 김기덕 감독

김 감독이 사망한 라트비아는 빅토르 초이가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인연은 우연치고는 상당한 관계를 형성한다.

라트비아 리가는 아름다운 도시로 헐리우드 감독을 비롯해 옛 소련 감독과 유럽 감독들이 영화 배경으로 자주 등장시켰다. 김 감독은 라트비아 휴양도시 유르말라에 집을 구하고, 영주권을 신청하려던 중 변을 당했다. 김 감독이 장기 거주하려 했던 유르말라는 빅토르 초이와도 연관된다. 유르말라는 빅토르 초이의 마지막 행선지였다. 1990년 8월15일 빅토르 초이 역시 리가 공연을 마치고 자동차를 운전하고 유르말라로 가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28세였다.

라트비아 현지 교민들은 “김 감독이 위임장 신청 문제로 대사관을 자주 방문했다”고 했다. 또 김기덕 감독 생전 러시아와 옛소련 영화제 초청에 관여한 관계자는 “내년(2021년)이 한국과 라트비아 수교 30주년이라 빅토르 초이에 관한 영화를 구상했을 수 있다”며 “우리나라 감독이라면 한번쯤 고민했을 테마일 것”이라고 했다. 유르말라는 소련 때부터 유명한 휴양지 중 한 곳이다. 리가에서 서쪽으로 25km 떨어진 이곳은 리가만과 리엘유페강 사이 30km 해안을 따라 자리잡은 아름다운 도시다.

소련 당시 빅토르 초이는 러시아 대중음악계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가 죽은지 30년이 됐음에도 여전히 러시아 대중음악계의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빅토르 초이는 반전·평화를 주제로 한 곡을 발표했으며, 특히 비틀즈와 존 레논을 좋아했다. 그의 노래는 소련 젊은이들을 개혁과 개방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로 내모는 역할을 했다.

빅토르 초이 추모 우표 디자인.
 
빅토르 초이 추모 우표 디자인.

올핸 공교롭게도 옛 소련의 전설적인 록스타 고(故) 빅토르 초이의 사망 30주기다. 러시아에서 최근 그의 죽음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러시아 타스 통신은 ’1990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빅토르 초이의 사망 30주기를 맞아 ‘초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지난 9월3일 러시아에서 개봉 예정이었지만 불발됐다'고 전했다. 이 영화는 빅토르 초이가 죽기 직전 2개월 간 벌어진 가상의 사건을 다룬 내용이다. 이즈베스티야는 “ ‘영화 개봉을 앞두고 빅토르 초이 유가족들이 영화가 빅토르 초이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담았다'며 크렘린궁에 민원을 제기하면서 상영이 무기한 연기됐다”고 보도했다.

김 감독을 아는 러시아와 라트비아의 영화 관계자들은 “이런 빅토르 초이에 관한 일련의 논란이 김 감독을 자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또 2018년 개봉된 빅토르 초이에 관한 영화 ‘레토(여름)’가 김 감독이 생각하는 빅토르 초이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내지 않아 또 다른 시각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영화 레토는 한국인들이 빅토르 초이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후보작으로 출품되면서였다. 러시아에서 제작된 영화인데도 빅토르 초이 역으로 2000대1의 경쟁을 뚫고 한국인 배우 유태오가 연기하면서 관심을 더했다. 더구나 2011년 칸 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 시선상’ 을 수상하며 스타덤에 오른 김 감독이기에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김 감독이 빅토르 초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영화로 다룰법 했다는 게 현지 관계자들과 러시아 영화인들의 시각이다.

<빅토르 초이 누구>

빅토르 초이는 1962년 옛 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고려인(옛 소련 거주 한인) 2세 아버지와 당시 소련 국적(우크라이나)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세 때 록그룹 ‘키노(Kino)’를 결성해 약 9년 동안 페레스트이카(개혁) 와중에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음악을 통해 개혁·개방을 이끌며 우상으로 떠올랐다.

빅토르 초이는 인기 절정에 있던 1990년 8월 15일 순회 공연차 들른 라트비아 리가에서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해 28세로 요절했다. 이 사고는 아직까지도 KGB에 의한 타살설이 제기되고 있다. 정확한 사망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서구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전체주의 사회의 탄압 속에서 반정부 메시지를 전해준 밴드였기에 의문은 더했다.

빅토르 초이는 소련 당시 레닌그라드의 유일한 합법적인 록 공연장 ‘레닌그라드 록 클럽’에서 데뷔했으며, 1990년 1980소련 올림픽 개막식장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대규모 단독 콘서트를 열며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경기장에 6만2000여 명이 몰려들었다.

록음악을 ‘서구의 퇴폐적인 산물’이라며 금지하고 단속했던 소련 당국은 빅토르 초이 노래를 반체제 작품으로 규정, 공공 장소에서 공연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소련 말기 그의 인기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됐다. 특히, 소련 해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풍자한 노골적인 반전·반핵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발표하면서 정부를 자극했다.

키노의 최대 히트작은 1988년 발표된 ‘그루파 크로비(혈액형)’였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침체기를 맞고 있던 소련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곡이었다. 그해 영화 ‘이글라’에도 출연하는 등 배우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키노를 기억하는 러시아인들은 지금도 “키노 이전엔 소련에 대중음악이란 것이 없었다”며 “키노가 등장하면서 소련에 대중음악이 생겼다. 이것이 우리가 아직도 빅토르 초이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이유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