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탄생 100주년 맞아 ‘기억과 화해의 비’ 우지 강변에 설치 윤동주 시인(1917∼1945)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일본 교토(京都) 부 우지(宇治) 시의 강변에 기념비가 설치된다. 우지 시를 관통하는 우지 강은 윤 시인이 1943년 도시샤(同志社)대 영어영문학과 유학 시절 일본인 학우들과 야외 송별회를 하며 생전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은 장소다.
일본 시민단체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의 곤타니 노부코(紺谷延子) 사무국장은 최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지방자치단체의 협력을 얻어 우지 강변에 터를 확보했다. 인근에서 진행 중인 공사가 끝나는 대로 설치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며 “늦어도 올해 10월 전에는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윤동주 시인(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은
1943년 5, 6월경 도시샤대 유학 시절 학우들과 우지로 야외 송별회를 나와
생전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그해 7월 윤 시인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다 옥사했다. /동아일보DB
윤 시인의 마지막 사진은 NHK가 KBS와 함께 1995년 방영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중 윤 시인의 학우였던 기타지마 마리코(北島萬里子) 씨의 앨범에서 발견했다. 기타지마 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징병을 피하기 위해 귀국을 결심한 윤 시인은 1943년 5, 6월경 열린 송별회 자리에서 학우들의 요청을 받고 ‘아리랑’을 불렀다. 윤동주 연구자인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 씨는 현대문학 2006년 9월호에 당시 정경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목소리가 강물을 따라 흘렀다. 다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끝나자 박수를 쳤다.” 송별회로부터 한두 달 뒤인 그해 7월 14일 윤 시인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붙잡혔고 1년 7개월 뒤 옥사했다.
윤 시인을 기리는 이들은 이 사진의 배경이 우지 강에 놓인 아마가세쓰리(天ヶ瀨吊り) 다리라는 걸 알아냈다. 이후 뜻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기념비 제작 움직임이 일었다. 2005년 시민단체가 결성됐고, 2007년 각계의 모금을 받아 비석 제작까지 마쳤으나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설치를 미뤄 왔다.
곤타니 사무국장은 “교토 부 등에 수십 번 찾아갔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다 지난해 말 우지 시 시즈가와(志津川) 구에서 구 소유 땅에 건립하도록 허가해 줬다”고 말했다. 건립 예정지는 윤 시인이 아리랑을 부른 강변 근처로 사진을 찍은 다리가 보이는 장소다.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올해 일본 우지 시 강변에 세워지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에는
시인의 작품 ‘새로운 길’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겨진다.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제공비석의 정식 명칭은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로 정해졌다. 높이 2m, 폭 1.4m의 이 비석은 일본과 한반도의 화강암이 하나씩 배치돼 원통을 떠받치는 형태로 제작됐다. 비석에는 윤 시인의 1938년 작품 ‘새로운 길’을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긴다. 곤타니 사무국장은 “시인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에 기념비를 세울 수 있게 돼 뜻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일본에는 윤 시인이 유학했던 교토의 도시샤대와 당시 하숙집이 있던 자리(현 교토조형예술대)에 비석이 있다. 이번에 건립되는 우지 기념비는 가장 크며 시민들의 노력으로 대학 교내가 아닌 장소에 처음 세워지는 것이다.
한국 문학계는 윤동주 연구에서 이 일본 노(老)학자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다. 잊히다시피 했던 윤동주의 무덤을 1980년대 중국 시골 야산에서 찾아내고, 윤동주 육필 원고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그의 노력 덕에 국내 윤동주 연구도 풍성해질 수 있었다.
영하로 내려간 16일 오후 지바현 이치카와(市川)시의 한 작은 전철역에서 '윤동주 연구가' 오무라 마스오
(大村益夫·83) 와세다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한국말로 "안녕하십니까, 오무라입니다" 인사한 그는 잰걸음으로 자신의 집을 안내했다. 한국 문학 연구서들이 수백 권 보관된 자신의 서재를 먼저 보여줬다. "매일 여기서 나는 동주를 만납니다."
오무라 교수는 일본 학자 중에서 독보적인 윤동주 연구가로 꼽힌다. 윤동주 관련 논문과 책을 10편 이상
발표했고, 지난해에는 '윤동주와 한국근대문학'(초판·2001) 개정판을 펴냈다.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후쿠오카 형무소 부지에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를 세우기 위해 동료 학자들을 모아 백방으로 뛰기도 했다. 책 개정판 출판을 위해 방한한 작년엔 서울 대한극장에서 영화 '동주'를 관람했다.
오무라 교수는 1957년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대학원에서 중국 문학을 전공했는데, 지적 호기심이 넘쳤던 청년 오무라는 청나라 말기 중국의 정치소설을 조사하던 중 우연히 조선 문학에 빠져들었다. 이후 그는 전공을 바꿔 조선 후기와 한국 근대문학을 파고들었고, 윤동주의 시와 조우하게 된다.
일본인 학자에게 윤동주 연구의 길은 쉽지 않았다. 1985년 5월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서 윤동주의 묘를 발견할 당시 한국에선 "일본이 윤동주를 두 번 죽였다"는 날 선 비난이 날아왔다. 오무라교수는 "윤동주가 일본에서 돌아가셨고, 그 묘를 일본인이 찾아냈으니 아이러니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내에서 차로 1시간 거리였던 야산의 공동묘지. 산짐승이 파헤친 듯 어지러웠고 '詩人 尹東柱'라고 새겨진 묘비만이 윤동주의 무덤임을 증명했다. "'여기구나!' 싶은 생각에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1986년 경기도 과천에 있는 윤동주 유족을 찾아가 긴 설득 끝에 육필 원고를 손에 넣었다. 당시 그가 받아든 육필 원고 중엔 윤동주가 일본 유학 시절 남긴 습작 노트도 있었다. 1999년 이 원고들을 모아 한국 교수들과 공동으로 출판한 '윤동주 자필시고집'은 윤동주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시뿐 아니라 윤동주생가 터와 그가 다녔던 광명중학의 학적부, 송몽규 생가 등을 직접 확인한 결과를 담아 발표한 논문 '윤동주의 사적(事跡)에 대하여'도 주목을 받았다.
반평생 윤동주 연구에 헌신한 오무라 교수는 '시인 윤동주'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윤동주는 천재이면서 마음이 따뜻한 시인, 고뇌하는 시인입니다." 그는 "나 스스로 '부끄러움 덩어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서시의 구절을 읽으면 아직도 마음이 깨끗이 씻겨지는 기분"이라며 "일본어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정갈한 시어들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오무라 교수의 서재에선 한기(寒氣)가 느껴졌다. 고령 탓에 연구는 멈췄지만 노교수는 매일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을 만나게 된다면 꼭 물어보고 싶어요. 어떻게 그렇게 험한 세상에서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었는지…. 윤동주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 예쁜 동시를 많이 썼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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