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극영 가옥’ 현장사진 : 서울 강북구 인수봉로 84길 5(수유동 56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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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극영(尹克榮, 1903년~1988년) 동요작가
아동문학가 윤극영(1903~1988)의 전집 출간을 계기로 그의 친일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윤극영은 1940년대 간도 룽징에서 살 무렵 친일단체인 오족협화회에 가입해 활동했던 경력 때문에 사후 후배문인들로부터 적극적 친일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전집의 편찬자이자 고인의 둘째 며느리인 이향지 시인(62)이 처음으로 공식 해명하고 나서면서 그의 친일 여부에 대한 검증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다음달 3일 윤극영 전집(2권·현대문학) 출간을 앞두고 월간 ‘현대문학’ 5월호에 마련된 윤극영 작가특집에서 이향지씨는 “문단 일각에서 일고 있는 친일논의는 불충분한 고증과 일방적인 시각에 의해 지나치게 폄하되거나 매도당한 면이 있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윤극영의 친일논의를 주도한 사람은 소설가 조정래씨와 아동문학평론가 이재철씨이다. 조씨는 1990년 한국일보에 실렸던 ‘만주벌기행’이란 글에서 룽징의 윤극영이 살던 700평짜리 집터를 돌아본 뒤 친일한 대가로 영화를 누렸다는 식으로 매도했고, 이재철씨는 1992년 ‘아동문학평론’이란 잡지를 통해 조정래의 글을 유일한 근거로 제시하면서 윤극영의 문학을 일제식민잔재로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향지씨는 윤극영의 행적과 관련, 당시 일본군정의 강압으로 오족협화회에 가입해 회무를 보기는 했으나 오히려 한국인 교회가 일본 재향군인회에 넘어가는 것을 막아주는 등 한국인만 이롭게 한다는 이유로 일본 군정의 요시찰 인물이 됐다고 해명했다. 또 그가 넓은 집에 살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것은 도쿄에 건너가 극단의 성악과 연출을 맡아 인기몰이를 했고 친구의 광산매매를 도와 큰 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조씨가 보았다는 집터가 윤극영의 소유가 아니라 일본인의 집을 맡아서 생활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향지씨는 또 고인이 생전에 회고록 등을 통해 협화회 가입 및 활동 사실을 밝히고, 그것을 평생의 상처와 고통으로 간직한 만큼 새삼스런 친일시비로 명예를 실추시키는 문단의 처사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이재철씨는 “윤극영은 작고할 때까지 가까운 후배들에게조차 자신의 친일사실을 철저히 함구해 민족주의자로만 알았다”면서 “그가 오족협화회 책임자로서 적극적 친일을 한 것은 90년대 중국과의 국교수교 이후 조선족 아동문학계의 자료와 증언을 통해 속속 드러나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강원룡 목사도 월간 ‘신동아’ 2003년 12월호 인터뷰에서 “윤극영이 협화회 활동을 안하면 잡혀갈 입장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능동적으로 나섰고 나에게도 협조해달라고 협박했다”며 그를 상황논리에 따른 수동적 친일자와 달리 능동적 친일자로 분류했다.
이에 대해 황현산 고려대 교수(불문학)는 “고인의 친일행적은 자신이 남긴 기록위에서 철저히 밝혀질 때 생산적 논의가 가능하다”며 “상황논리이든, 의식착오이든 친일은 개인의 잘못일 뿐 아니라 역사가 개인에게 지운 짐이므로 똑같은 역사적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꼭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윤극영 전집에는 고인의 시가 들어있다. 그는 생전에 300편이 넘는 시를 남겼으나 아동문학가로 남기 위해 전혀 공식지면에 발표하지 않았다. 이번 전집에는 264편의 시가 동시 142편, 동요 188곡과 함께 실렸다. 또 중편소설 ‘누구의 제물이냐’를 비롯, 동화 시나리오 수필 사회평론 회고록 등 산문이 따로 묶였다. 이향지씨는 고인의 사후 한 보따리의 유고를 간직해오다 지난 1년6개월동안 전산입력작업과 정리를 거쳐 전집을 출간했다.
윤극영은 서울 종로에서 태어나 경성법전(서울법대 전신)을 중퇴하고 일본 동양·동경음악학교에서 작곡, 성악을 공부한 뒤 간도 동흥중학·광명여고 교사(1926~35년)를 지냈다. 1923년 방정환 등과 색동회를 창립하고 이듬해 한국 최초의 본격 동요인 ‘반달’ ‘설날’을 만들어 보급했다. 해방후 색동회를 부활시키고 회장을 지낸 그는 600여곡의 동요를 남겼다.
우리나라 첫 동요집 '반달' 원본 찾아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민족의 애환을 달래주던 동요 '반달'이 수록된 동요곡집'반달'의 원본을 찾았다. '반달'은 한국 동요 작사·작곡의 선구자인 윤극영(1903~1988·사진) 선생이 작곡한 동요 10곡을 수록한 노래책으로 1926년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 동요곡집이다.
근대서지학회 김현식 이사가 일본에서 구해 어린이날을 앞두고 4일 본지에 처음 공개했다. 동요곡집 '반달'은 1950~60년대 일부 언론을 통해 표지 사진이 소개된 적은 있지만 그 전모가 실물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동요곡집 '반달'은 가로 19㎝ 세로 26㎝ 크기에 표지와 뒷장을 제외하고 모두 22쪽.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로 시작하는 '설날'을 비롯해 '고드름''꼬부랑 할머니' '꾀꼬리' '흘으는 시내' '소금쟁이' '가을서곡' '귓드람이' '두루미' 등 주옥같은 동요 10곡의 악보와 가사가 실렸다. '두루미'는 오늘날 '따오기'로 알려진 동요다. 전체 10곡 중 3곡은 윤극영 자신이 직접 작사했다.
◇ 푸른 하늘 은하물…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동요 반달 원곡에는 가사가 '푸른 하늘 은하수'가 아닌'푸른 하늘 은하물'이라 적혀 있다는 점. 또 '삿대도 없이'에 해당하는 음의 경우, 지금 불리는 곡은 내림 마장조의 '미레미 라솔'인데 반해 원곡은 '미솔미 라솔'로 돼 있다.
'가을서곡'은 이번에 처음 알려지게 된 곡으로, 국내 최초 아동 창가극인 '파랑새를 찾아서'의 삽입곡임이 확인됐다. 제목 아래에 '창가극 〈파랑새를 차저서〉중 1절'이라고 부연 설명이 돼 있다. '파랑새를 찾아서'는 윤극영이 곡을 쓰고 연출을 맡은 총 5막의 어린이 창가극. 윤극영 선생은 생전 회고록에서 창가극 공연을 밝혔지만, 극에 사용된 곡의 면모가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첫 동요곡집 ‘반달’의 표지. 수록곡인 ‘반달’의 가사가 지금의 ‘푸른 하늘 은하수’가 아닌 ‘~ 은하물’로 돼 있다. /근대서지학회 제공
내지 첫 장에는 '도라간 누이 동생 덕윤이 영전에!'라고 적혀 있다. 윤극영은1924년 반달 창작 당시, 맏누이의 부고를 듣고 슬픈 마음에 곡을 썼다고 한다.
◇ "동요박물관에 갈 자료"
원로 동요학자 한용희씨는 "윤극영 선생 생전에 가까이 모셨는데도 1988년 돌아가실 때까지 동요곡집 '반달'은 보지 못한 채 들은 이야기로만 책을 썼다. 실물이 발견됐으니 동요박물관에 둘 만한 아주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윤극영 선생의 맏아들인 윤봉석(79)씨는 "우리 집에도 그 책은 소장하고 있지 않아 소재가 궁금하던 차에 너무나 반갑고 기쁘다"고 했다.
...구비문학회에서 동요곡집 '반달'을 주제로 연구 논문을 발표...장유정 단국대 교양기초교육원 교수는 "이번에 깨끗한 상태의 동요곡집이 일본에서 발견된 것은 출간 당시 일본 내에서도 반달이 인기가 높았다는 이야기가 사실임을 보여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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