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 마지막 사흘간 한글문화예술제가 우리 울산에서 열렸다. 한글 반포 571주년과 외솔 탄생 123주년을 기리는 행사다. 수년 전에 읽었던 ≪간송 전형필≫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소장하기까지의 일화가 가슴에 깊이 남아있던 차에 마침 이번 행사에 ‘훈민정음 해례본 다시보다’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려서 행사장을 찾았다. 한글학회 관계자들이나 외솔 후손, 『훈민정음』 복각 참여자 등 면면이 반가웠다. 토론 과정을 쭉 지켜보면서 새삼 한글의 소중함과 창제자 세종대왕, 외솔을 비롯한 한글을 지켜낸 많은 분들이 고맙게 생각되었다.
이런 행사가 울산에서 열리는 것은 순전히 외솔 최현배(1894-1970) 덕분이다. “한 겨레의 문화 창조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기나니, 이제 조선말은 줄잡아도 반만년 동안 역사의 흐름에서 조선 사람의 창조적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성과의 축적의 끼침이라…….” 선생은 『우리말본』 서문에서 이렇듯 한글에 대한 강한 신념을 피력했다. 외솔은 한글이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보배임을 강조하고, 그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학문 체계를 면밀하게 세워 나갔다.
‘한글이 목숨이다’는 신념을 가졌던 외솔은 한힌샘 주시경(1876-1914)의 제자다. 한힌샘은 ‘훈민정음’을 ‘한글’로 개명시킨 국어학의 선구자였다. 국어연구와 사전 편찬사업에 관한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하였고, 1907년에는 국문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여러 학교와 강습소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보급하기에 진력을 다하였다. 한편 최현배, 이규영, 장지영, 이병기, 김두봉, 이극로 등 한힌샘의 문하생들은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 전신)’를 창설하여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함으로써 맞춤법의 과학적 연구가 결실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한글의 모태인 『훈민정음』 해례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훈민정음』 태동에 대한 설은 구구했다. 해례본이 없다 보니 창제의 원리를 추측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그래서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 기원설까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한글의 기원을 뿌리째 흔들어버리려는 일제의 간교한 술책이 작용한 탓이다. 일제는 조선상고사를 비롯하여 조선인들의 위대한 문화유산에 관한 기록물들을 닥치는 대로 모두 거둬들여 버려서 종적을 감춘 전적들이 무척 많다.
그즈음 간송 전형필의 손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들어왔다. 실로 극적인 과정을 거쳐서, 엄청난 거금을 주고 건네받은 책이었다. 이를 입수한 간송은 6·25 때 그 많은 수장 자료들 중에서 이 한 권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난을 떠났다. 1446년 9월 상한에 발행된 이 목판본은 모두 사라지고 현재는 이 <간송본/안동본>이 유일본이다. 2008년에 발견된 <상주본>이 있다고는 하나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언급이 있었지만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1940년이니 얼마나 소중한 희귀본인지를 간송은 그 무렵 이미 알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훈민정음』은 33장(66쪽) 중 ‘예의(例義)’ 4장과 ‘해례(解例)’ 2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는데, 창제의 목적과 사용법을 설명한 글이다. ‘해례’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던 집현전 학사들이 글자를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다.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문장은 ‘예의’의 첫머리에 있는 한문 글을 ‘훈민정음체’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것을 흔히 『훈민정음』 언해본이라 부르는데, 『세종실록』과 『석보상절』 등에 실려 있어 전해왔지만 ‘해례’는 『훈민정음』 원본 외에는 어디에도 실려 있지 않았다.
‘훈민정음’은 식견이 탁월하였던 세종의 발명품이다. 세종은 1443년 말에 ‘훈민정음’ 창제를 완료하고, 2년 9개월간 집현전 학자들의 검증과정을 거쳐서 1446년 9월에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든 닿소리 17자와 천지인 세 개를 파생시켜서 만든 홀소리 11자의 조음으로 모든 말소리를 적을 수 있다. 지금은 닿소리 석 자와 홀소리 한 자를 쓰지 않는다. ‘훈민정음’은 천지만물의 이치를 담았으며, 만든 사람과 시기가 명확하다. 여기에 초성, 중성, 종성으로 짜인 음운체계이니 세계 유일의 완벽한 글자임이 확실하다.
그동안 ‘한글’은 꾸준히 진화하여 왔다. 맞춤법과 띄어쓰기, 가로쓰기 등이 그 결과물이다. 한글학자들 외에 한글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도 많다. 한글기계화에 앞장섰던 공병우,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를 주도하였던 ‘뿌리깊은나무’의 한창기와 ‘한겨레신문’ 등이 그들이다. 최근 활동이 두드러진 신진 한글학자 김슬옹도 무척 반갑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역할이 매우 크다.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은 무한대의 가격을 지닌 세계기록유산이다. 한글의 세계화는 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모든 학교에서 배우고 익힐 때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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