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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와 연변] - 조선민족 축구명장들
2018년 03월 20일 00시 44분  조회:4839  추천:0  작성자: 죽림

 

                                        중국축구계에 이름 날렸던 조선족축구명장들
                                                                                         2010년 12월 09일  
 

 

 

조선족은 축구를 가장 즐기는 민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축구를 론할라치면 누구와 어디서든 금시 《백가쟁명》의 열변장이 벌어진다. 조선족 축구나 선수들에 대한 관심은 더 말할것 없고. 그러다 각자 《무엇무엇해도 누가 뽈을 제일 잘 차더라》로 아퀴를 짓기가 일쑤다. 허나 조선족축구명장들을 핵으로 그어온 조선족축구력사에 진정 관심을 가지고 쟁론하는 이들은 흔치 않다고 본다. 조선족을 빛냈던 대표적인 축구명장 몇몇이나마 소개한다.


조선족축구의 시작


1905년이후 조선의 애국문화의 영향하에 연변을 중심으로 한 조선족지방들에서 축구운동이 차츰 보급되기 시작했다. 1910년부터 대항경기가 좀씩 있기 시작, 명동학교와 장동학교간의 축구경기가 그 대표적인 일례로 된다. 1920년부터는 조선족축구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여 많은《축구명장》들이 속출되였다.


20세기 30, 40년대 박익환 그리고 그의 고향


박익환은 룡정시 덕신향 남양촌에서 태여났다. 뽈로 유명해진 후 부모뵈러 오게 되면서 마을사람들이 그의 뽈재주를 보자고 졸라 남양학교 운동장 주위에 있는 수십대의 나무를 겨냥하고 뽈을 찼는데 정말로 백발백중이였다는 전설을 비롯한《박익환전설》이 아직 남양촌일대에서 류전되고있다. 박익환형제는 당시 간도성팀의 선수였는데 박익환은 하프선에서《명중포》란 별호를 가졌다고 한다. 박주환은 광복이 나던 해 쏘련홍군과 별동대의 축구경기중 불명하게 잡혀간 후 종무소식이 되였다고 한다.

박익환은 체대가 크고 남달리 건장하며 중학시절에 벌써 위만주국일대와 일본에서 명성을 날렸다. 박익환의 발에 뽈이 걸리기만 하면 100% 정확하게 공격수들에게로 넘겨주었다고 한다. 1937년 전 만주국 도시 대항 겸 동양축구대회에 출전하여 간도성팀이 우승을 거두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때 이미 박익환은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출중한 선수였다. 1938년 박익환은 프로축구선수의 꿈을 안고 조선으로 갔다.

한국 《월간스포츠》에서 박익환에 대해 수차 소개한 몇구절 옮겨본다.

1978년 9월 23일 2446호에는 《간도성팀과 전 일본에 이름 떨친 박익환은 고려대학에서 공부도 하면서 학교팀의 선수로 1940년 전 일본축구대회에서 강팀인 일본 관서학원팀을 전승하는데 위훈을 떨쳤다》고 기재하고있다.

1979년 5월 12일 2542호에는 당대 하프선에서 가장 뛰여난 선수로 민병대 버금으로 박익환을 꼽은 기사가 실렸다. 동아세아에 명성을 떨친 박익환이기에 연전(연전대학의 략칭, 광복후 서울 연세대학으로 개칭)에서 그를 스카우트하고 바로 하프의 중요한 자리를 맡겼다는 내용도 널리 알려졌다.

박익환의 죽음 또한 뽈을 너무 잘 차니깐 모해당했다는 말까지 나왔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 일간스포츠 1979년 5월 12일 2543호 스포츠일화에는《뜻밖의 물사고로 죽음, 연세대학과 한국의 큰 손실》이라고 밝혀졌다.

박익환의 《태줄》을 물고 나왔는지 당시 만주국팀에서 주력으로 있은 김용식, 국가 명선수로 이름 날린 최태환과 최증석 두 형제(《국가건장》칭호)도 다 덕신향 남양촌 출신이였다. 간도성팀과 만주국팀에서 활약했던 최죽송, 박장송, 김용식, 길림성팀과 국가팀에서 활약했던 국가축구건장 손중천도 다 덕신향 사람이였다. 덕신향은 중국조선족축구선수들이 가장 많이 나온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듯싶다. 조선에서 출판한《조선의 어제와 오늘의 축구》란 책에서는 길림성 연길현에서 출생한 허죽산을 세계축구왕 벨리와 못지 않게 뽈을 잘 차 그의 다리는 《기계다리》와 같고《곡예단 배우처럼 공을 잘 다룬다》고 높이 평가했다. 허죽산 역시 덕신향 출신이라고 한다.

 

 

 

50, 60년대 장경천


1935년 심양출신, 키 1.68메터, 체중 65킬로그람, 별칭 《작은 호랑이》.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체육명수》칭호를 수여받았다. 1953년 심양체육학원 입학, 동북팀의 핵심선수, 1954년 웽그리아 류학경력후 국가팀의 하프선수로 활약하였다. 1957년 제6회세계선수권대회 아세아와 대양주 지역의 예선경기에 출전, 그해《북경일보》와 북경방송국이 공동으로 진행한 국내《가장 사랑스러운 축구선수》에 당선, 국가체육운동위원회서 선정한《축구운동건장》22명 명단에 3위순으로 올랐다. 기술, 체력겸비, 전술의식이 강하고 대경기 경험이 많은 선수로서 국가팀 감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아온 조선족선수며 국가팀에 제일 오래 있은 선수로 알려졌다.

1962년 10월 17일, 국가《체육보》가 조직한 22명《전국우수축구선수》평선에서 장경천이 첫 자리에 있었고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체육명수》란 칭호도 수여받았다. 1973년 장경천은 전국 중학생팀 지도를 맡았다. 이듬해 오스트리아에서 있은 세계중학생축구선수권대회서 중학생팀은 6전5승1무의 성적으로 제1위를 과시했다. 80년대에 들어서서 장경천은 국가희망팀, 공군팀, 수도강철공사팀 등 권위 축구팀 지도를 력임해 축구생애를 연장하고 빛냈다. 1981년 국가《체육보》는 건국이래 소수민족 우수한 선수들이 속출되여 중대한 공헌을 했다는 론평에서 장경천 등을 지명 치하했다.


70년대의 별 리주철


1943년 흑룡강성 계동현 계림향 출신,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체육명장》칭호를 수여받았다. 계림향당위의 알선으로 그의 동생 리동철도 직접 만나볼수 있었다. 리주철은 돌상에서 빨간 뽈을 잡았고 또한《뽈개지》로 자란 많은 이야기들을 고향에 남기였다. 1963년 8월 계림중학교에서 공군부대로 참군, 뽈을 잘 찬 그는 입대후 대뜸 심양공군부대팀에 뽑혔다. 전국공군부대운동회 여섯껨의 경기에서 혼자 꼴 8개를 넣어 전국공군부대팀에서 스카우트해갔다.

1965년 11월, 남녕에서 진행된 전국을급팀련맹 흑룡강성팀과의 경기에서 7개의 꼴이 났는데 5개를 리주철형제간이 냈다. 그의 형님 리주찬은 당시 흑룡강성팀 선수로서 3꼴, 리주철이 2꼴을 내 신문계의 흥미로운 조선족축구뉴스거리로 전해졌다고 한다.

1969년 리주철은 국가팀의 우익공격수로 선발되여 제6회, 제7회 아세아운동대회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선수이기도 하다. 특히 제6회 일본팀과의 겨룸에서 승부를 결정하는 관건적인 꼴을 넣은 선수로서 조선족의 명성을 크게 떨치였다.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체육명수》로 추대되였고《아세아최우수우익공격수》로 구단에 명성을 날렸었다. 2002년 북경에서 별세했다.

 

 

80, 90년대 고종훈





우리가 가장 낯익은 조선족추구명장이라고도 할수 있다. 1965년 길림성 룡정시 출생. 국가《체육명장》이다. 1984년 룡정시체육학교를 졸업하고 길림성축구팀에 선발되였다가 그후 국가팀 선수로 선발되였다. 1985년 전국청소년팀의 선수로 구쏘련을 방문하였을 때 《중국의 가장 유망한 축구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2년 고종훈은 국가팀을 대표해 일본에서 있은 아세아컵 축구경기에 참가해 중국팀이 3등을 하는데서의 유공자로 이름을 날렸었다. 1994년 길림성팀 축구감독조리로 있었다. 그해 국가팀을 대표해 제12회아세아운동대회 대 일본팀 경기에서 중국팀이 2등을 하는데 관건적인 꼴을 넣어 대공을 세웠다. 국내 구단의 스타로 인정받았을뿐만 아니라 1996년 국가팀의 하프선 핵심으로 로씨야, 화란 등 나라와 지역에서 있은 대항경기들에서 조선족의 명성을 떨쳤다.

90년대 그는 《길림성 10대 걸출한 청년》,《최우수하프선수》,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체육명장》으로 명명받았다. 그후《당대조선족인물록》에 수록되였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연변축구의 재기와 더불어《백가쟁명》팬들은 더 많은 조선족축구명장이 솟아나기를 소망하고있다. 고훈감독은 《젊은 선수 양성에 힘을 기을이고있는 연변팀에 언제면 고종훈, 리홍군 등과 같은 국가명선수들이 나타나리라 생각하는가?》하는 매체기자들의 물음에 《연변팀에 수년간 국가명선수는 없었지만 싹수를 보이는 선수는 적지 않다고 본다. 이미 3명의 국가 청, 소년팀 선수가 속출되였고 현재 목적성있게 양성하고있는바 이제 1-2년정도면 꼭 국가명선수가 나타날것이다》고 확신적으로 대답했다. 


  ///길림신문

 

 
 


////////////////////////////////////덤으로 더...

중국에서는 베이징 올림픽을 두고 '선구자의 백 년 꿈이 이루어졌다'는 말을 한다.
백년 전에 구국의 희망을 청년들에게 걸고 올림픽의 꿈을 심어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애국교육자이며 톈진 남개대학(南開大學) 초대 총장이었던 장백령(伯岺) 선생은
학생들에게 연설하는 자리에서 우선 아테네 올림픽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였다.
다음 해인 1908년에는 런던올림픽을 계기로 <톈진청년>이란 간행물에 올림픽과
관련한 글을 발표하였다.

 

글의 내용은 세 가지 질문으로 축약된다. 하나, 중국은 언제 본국 선수 팀을
올림픽에 보낼 수 있을까? 둘, 중국은 언제 올림픽 첫 금메달을 딸 수 있을까?
셋, 중국은 언제 자기 나라에서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중국에 전해 내려온 '올림픽 세 자기 물음'이다.

 

국운이 위태롭고 국민이 도탄에 빠져 아시아의 병자라고 수모를 당하던 그 참담한 시대에
올림픽 출전을 꿈꾼다는 것은 천방야담과 같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때고 선구자의 꿈을 사명으로 여기고 용감하게 나서는 사람은 있었다.

 

1932년 단거리 달리기 선수 류장춘(劉長春)은 제10회 로스엔젤레스올림픽에
혼자 나가기로 결심한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이 세운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대표해
나가라고 했지만 거절하고 중국을 대표해 나갔다.
경비는 국민당 애국장령 장학량(張學良) 선생이 대주었다.
류장춘은 비록 그 달리기 경기에서 꼴찌를 했지만 중국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영웅이었다. 

 

4년 뒤인 1936년, 류장춘은 다시 제11회 베를린올림픽에 나갔다.
그때는 이미 혼자가 아니라 몇십명의 중국 선수들과 함께였다.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그 최초의 중국 선수팀에는 리혜당(
李惠堂)을 대장으로 한
중국 축구대로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선구자의 첫번째 꿈은 씨를 뿌린 지 28년 만에 이렇게 이루어졌다.

 

첫 올림픽 금메달은 그로부터 다시 48년이 지난 뒤인 1984년,
중국의 사격선수 허해봉이 제23회 로스엔젤레스올림픽에서 목에 걸었다.
선구자의 두 번째 꿈이 이루어지는 데는 꼬박 7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중국은 최근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경제가 성장하고 자신감을 갖게 되자
비로서 올핌픽 선구자의 세 번 째 꿈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15년 전에 처음 올림픽 개최를 신청했다가 21세기의 첫 번 째 올림픽 주최 자격을
중국에 줄 수 없다는 서방 세계의 일부 여론 때문에 2표 차이로 실패하고
7년 전에 다시 신청하여 성공했다.

 

중국 사람들은 베이징 올림픽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여기면서
국제사회에 약속한 대로 훌륭한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하여 여러 모로 최선을 다했다.
일본과 한국에 이어 아시아에서 세 번 째로 열린 베이징 올림픽,
이번 올림픽의 주제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이었다.
선구자가 백 년 전에 심은 세 가지 꿈을 다 이루고, 이젠 세계를 끌어안고
세계와 하나가 되고픈 더욱 큰 꿈을 꾸는 것이리라.

 

/자료

 

/////////////////////////////////////////////{자료}...



길림신문사
남아프리카 월드컵 취재자격 획득

 

편집/기자: [ 길신 ]  [ 길림신문 ] [ 2010-03-05 ] 

ㅡ2010년월드컵을 가는 국내 유일의 소수민족신문

6월 23일 새벽 2시 30분에 한국 vs 나이지리아전이 펼쳐지는 
더반, Moses Mabhida Stadium (약 70,000명 수용)

세계가 주목하는 2010년 남아프리카 월드컵이 100일앞으로 다가오면서 국내외 언론들에서 월드컵을 열점화제로 다루고 있다. 

지난 1월 27일 본사는 2010년 남아프리카월드컵 취재자격심사에 통과되였다는 중국축구협회의 팩스를 받았다. 그후 국제축구련맹 관방사이트에 접속하여 인증과 심사를 거쳐 보도단위회원가입에 성공하고 정식으로 취재자격을 획득했다. 이번 회원가입시 안전검사는 남아프리카국가정보국에서 책임졌다.

금년 월드컵취재기자증은 수량이 제한되였는데 중국에 60장밖에 차려지지 않았다. 국내 큰 언론들지간의 경쟁이 치렬했는데 본사는 국내 소수민족신문으로서는 유일하게 자격을 얻었다.

이번 취재자격을 얻은 본사 김룡기자는 월드컵현장에 가서 나란히 월드컵에 진출한 조선과 한국국가팀의 다수경기와 결승전 등 중요경기를 현장에서 보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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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신문》
남아공월드컵 현장취재 출발식을

편집/기자: [ 김태국 김파 ] [ 길림신문 ][ 2010-06-05 ]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으로 략칭) 월드컵 취재현장에서 중국 조선족기자의 모습을 볼수 있게 되였다.

6월 5일 오전, 길림신문사는 《남아공월드컵 현장취재 출발식》을 갖고 원정취재를 떠나는 김룡기자를 격려했다.

남아공 월드컵취재에 우리 나라에 할당된 공식 기자명액은 60명, 유일한 소수민족신문기자로 취재권을 획득한 김룡(필명 청룡)기자는 이번 취재길에서 전 세계 우리 말 축구팬들에게 남아공월드컵의 생생한 뉴스를 전하게 된다.

이날 출발식에서 길림신문 한정일 부주필은  김룡기자가 이번 취재권을 획득한 과정과 월드컵취재일정에 대해 소개하면서 《중국조선족신문으로서 우리 기자가 직접 월드컵에 가서 현장에서 취재하여 우리 말 독자들에게 생생한 스포츠뉴스를 제공한다는것은 그 어느 각도로 보나 심원한 의의가 있다. 월드컵본선에 동반진출한 조선팀과 한국팀을 자유롭게 취재할수 있는 세계 유일한 기자가 될수도 있다는 점에서 김룡기자의 남아공행이 기대된다》고 했다.

김룡기자는 오는 8일 북경에서 항공편으로 출발, 9일에 남아공에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취재활동을 시작하게 되며 7월 14일에 귀국하게 된다.

출발식에는 연변일보(조,한문), 연변방송국,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연길시텔레비죤방송국 등 매체의 기자들이 참가하였다.

김룡기자의 월드컵 취재는  《길림신문》 창간 25주년맞이 특별 기획행사중 하나이기도 하다. 

남아공월드컵으로 향발하게 되는 길림신문사 김룡기자(오른쪽).

남아공월드컵 출발식 취재를 진행하고있는 연변매체기자들.

 

 

김룡 기자 프로필:

1963년 11월 27일 연길에서 출생

1981년 10월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

1984년 7월 연변일보사 입사

1992년부터 현재까지 길림신문사 조판실주임, 편집반공실 부주임, 인터넷스포츠주임 등 직을 력임.

혈형: AB형

신장: 1.65m

애호: 축구, 낚시, 등산

좋아하는 축구팀: 독일팀, 조선팀, 한국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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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김룡기자
남아공에 도착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 2010-06-10 ] 

ㅡ기자증 발급받고 취재활동 본격 시작

지난 7일, 연길공항에서

지난 7일 아침에 연길을 떠난 김룡기자는 북경에서 8일 오후에 항공편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향발했다. 김룡기자는 9일 오후 1시(당지시간으로 아침 7시)좌우에 남아공수도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하였다.

9일 오후, 사커시티 스타디움에서

모든것이 낯설고 위험과 신비가 안개처럼 뒤덮인 아프리카대륙 남단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연길과 3만리나 떨어진 요하네스버그, 케이프타운을 비롯한 9개 도시를 홀로 전전하면서 김룡기자는 40여일간 2010남아공월드컵을 생생뉴스로 보도하게 된다.

하지만 세계축구계의 거물스타들이 월드컵 경기장에서 뛰는 모습을 처음으로 길림신문 애독자들을 비롯한 조선족축구팬들에게 전하게 되는 김룡기자에게는 어려움도 많다.

언어는 물론 음식습관과 6시간의 시간차, 남북위도차로 오는 피곤함은 그런대로 극복할수 있지만 가장 어려운것이 바로 홀로라는 점이다. 당지의 불안한 치안상황 때문에 남아공주재 중국대사관에서는 홀로 다니지 말고 택시를 함부로 타지 말라고 부탁하더란다.

국제축구련맹(FIFA)에서 발급한 기자증(촬영)

길가의 게양게시대에는 걸린 국기가 유표하다.

중국대사관의 도움으로 어렵게 호텔방을 잡고 월드컵주최측을 찾아 기자증을 발급받은후 개막전이 열리는 사커시티 스타디움에 다녀오면서 김룡기자는 길가의 게양대에서 펄럭이는 각국 국기외에는 월드컵의 뜨거운 분위기는 뜨겁게 느끼지 못했다고 말한다. 

멀리서 바라본 사커시티 스타디움

중국글로 된 상무중심이 눈길을 끈다.

개막 이틀을 앞둔 주경기장은 아직도 일부 공사가 마무리 되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사진제공: 김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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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김룡기자
월드컵취재 마치고 귀국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 2010-07-11 ] 

ㅡ외롭고 힘든 취재길 인신안전 수시로 위협 받아

길림신문창간 25주년 특별기획의 하나인 남아공월드컵취재임무를 맡고 지난 6월 7일 연길을 떠나 남아공행을 했던 김룡기자가 각종 취재임무를 원만히 마치고 6월 30일에 귀국, 7월 1일에 연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남아공에서 20일간 머물면서 월드컵현장취재활동을 해온 김룡기자는 이번 취재길에 대한 소감을 말하라고 하면 두손부터 내젓는다. 외롭고 힘들었다는 소리는 메신저를 통해 많이 료해했지만 퇴역군인으로 강직한 성격을 가진 김룡기자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요하네스버그 공항에서

6월 9일 새벽,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한 김룡기자는 언어소통이 되지 않아 진땀을 흘려야 했다. 월드컵같은 큰 행사에 외국인들을 위한 봉사자가 많아야 하는데 중국어나 조선말통역을 하는 봉사자를 찾아볼수 없었고 상세한 안내게시판도 없어 손시늉으로 겨우 의사소통을 했단다. 같은 항공편으로 남아공에 도착한 중국의 기타 큰 매체의 기자들은 팀을 묶었고 또 그곳의 화교들이 마중을 나왔기에 인츰 공항을 빠져나갔지만 김룡기자는 홀로 공항에 남게 되였다.

국내에서 그곳 치안상황이 좋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관계로 감히 공항밖으로 나갈수 없었고 또 FIFA(국제축구련맹)에 호텔신청도 하지 않은 상태라 부득불 중국대사관에 도움을 청할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3시간가량 공항에서 기다리다가 대사관에서 알선해준 호텔에 짐을 풀었는데 대사관에서 그곳 치안상황이 말이 아니니 홀로 다니지 말고 될수록 택시를 타지 말라고 부탁을 해오더란다. 호텔에 갇혀있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는데 취재활동을 할수 없다는 말처럼 듣겨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더라고 한다.

그날 오후 FIFA에 기자증을 발급받으러 갔다가 남방에서 온 중국 기자들을 만났다. 기자증 하나에 4명이 취재팀을 뭇고 왔지만 그들의 사정도 다를바 없었다. 하루전에 도착한 그들은 거리에 나갔다가 벌써 사진기를 빼앗기고 돈지갑을 털린 상태, 정상적인 취재를 할것같지 못하다면서 거친 말로 FIFA와 남아공월드컵주비위원회를 욕하더란다.

치안상황은 듣던바보다 더 심각했다. 김룡기자도 10일 저녁 대형공연을 취재하려고 호텔을 나섰다가 어이없이 봉변을 당한것이다. 앞에서 걸어오던 흑인 괴한 2명이 우호적인 손짓을 하며 웃음띤 얼굴로 다가서더란다. 멈칫하는 사이 뒤에 세사람이 나타나 두팔을 꽉 붙잡고 뭉툭하고 딱딱한것이 허리에 들어오더란다. 돌아보니 검은 괴한 3명이 그의 몸에 붙어 서있었고 검은 총부리가 오른쪽 허리께로 보이더란다. 눈깜짝할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꼼짝하지 못하고 돈지갑에 있던 1500딸라를 강탈당하고 말았다. 억울했지만 하소연할곳도 없었고 그날 취재도 포기해야만 했다.

고안끝에 그날저녁부터 김룡기자는 몸에 보호용무기를 장만하고 지갑에는 200딸라만 넣고 만일을 대비해 호주머니에 조금씩 더 넣고 다녔다. 그의 보호용무기란 바로 남아공에서 식사시 사용하는 한뼘 남짓한 포크였다.

중국에 할당된 60명 기자가운데 유일한 소수민족기자로 월드컵취재권을 획득, 연길에서 출발식을 가지고 환송을 받으며 떠난 취재길이 이렇게 험난할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다. 중국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 남아공에서는 백주에도 거리낌없이 벌어지고있었다. 이번 남아공월드컵 취재기간 김룡기자는 두차례에 걸쳐 2000여 딸라를 강탈당했다. 하지만 가족이나 신문사동료들이 근심할것같아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신문에 내지 말라고 부탁했다.

조선팀이나 한국팀을 취재하려고 많이 준비했지만 치안상황 때문에 그들의 훈련하는 모습을 취재하거나 선수나 감독을 만나려던 계획은 접어야 했다. 이에 김룡기자는 독자들에게 대단히 미안하다고 말했다.

김룡기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소조별리그 14껨과 16강전 2껨 도합 16껨의 경기를 취재하여 생생한 뉴스로 보도했고 수백장의 사진을 독자들에게 전해주었다. 요한네스버그, 프레토리아, 케이프타운, 더반, 엘리자베스 등 도시를 전전하면서 경기장에서는 부부젤라 때문에 귀가 먹먹하였고 경기장외에서는 치안상황 때문에 신경을 도사렸다고 한다.

함께 취재를 다녔던 외국기자들은 겁없이 홀로 취재를 다니는 김룡기자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들었고 월드컵이나 올림픽을 비롯한 큰 행사를 중국에서 거행하면 좋겠다고 말하더란다. 북경올림픽의 성공적인 주최가 외국기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는 말이다.

김룡기자의 이번 남아공월드컵취재활동을 위해 길림신문사, 장백산선봉스키리조트유한회사(회장 전룡만), 장춘시조선족기업가협회, 장춘시조선족골프협회 등 단위에서 대폭적인 지지를 주었고 사내동료와 친척, 친우들이 흔쾌히 호주머니를 털어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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