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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축구의 처음 시작은?...
축구의 기원 ④ : 태생부터 남다른 축구
그리스에서 시작한 서양의 고대 축구가 로마에 이어져 군대 스포츠로 제국 전체에 전파되어 각 나라마다 고유한 형태의 축구로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다. 특히 이들 경기들은 저마다 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국가와 민족의 상징 놀이로 ‘손과 발을 사용하는 집단축구’의 형태로 발전했으며 지역별로 독특한 세시풍속이나 축제 또는 정식 대회 등 오늘날까지 다양하게 그 전통과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기원전 7∼6세기의 그리스라면 올림픽 제전이 정식으로 개최되어 달리기를 비롯해 5종경기가 정착되고, 격투경기와 경마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던 시기다. 또한 그리스 군사력의 핵심인 중무장 보병들의 역할과 위상이 중요해져 무장한 채로 달리는 경기(호프리토드로모스<Hoplitodromos>)가 올림픽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기도 했다.여기에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어 생각해 보면 그리스와 로마 군대는 전통적으로 융통성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공히 중장보병에 의한 밀집 전투대형을 기본으로 하여 고도로 훈련되고, 잘 조직화된 당대 최고의 전사들로 편성된 군대였다. 그리스의 ‘팔랑스
서양 집단축구의 전파도
고대 올림픽과 유사한 시기에 등장한 것이 고대 축구 에피스키로스라면 이 경기에는 조직의 전투기술이 포함되었을 법하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그 어떤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그리스를 계승한 로마의 군대에서만 축구(하르파스툼)를 정식 군사훈련으로 활용했다는 기록이 전해질 뿐이다. 축구를 군사훈련으로 채택했다는 기록은 로마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잉글랜드에서는 초기에는 외침으로부터 조국의 독립과 왕위계승 등의 사유로 연속된 전쟁에 대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축구에 심취했던 국민과 군인들에게 축구를 자제(금지)하고 유사시 전쟁 준비와 궁술 연마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후 등장한 대포와 화약의 위력은 활의 위상을 위협했고, 급기야는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전쟁양상의 변화와 함께 축구가 단결과 조직력을 향상시켜 국방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 당시 국왕이 직접 오랜 금지령을 풀고 군에서 궁술을 연마하는 대신 축구를 정식 훈련과목으로 채택해 장려한 바도 있었다. 이 밖에도 프랑스 역시 군에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 조직 응집력 등을 함양하는데 유용한 스포츠로 인식하고 군사훈련에 정식 과목으로 채택했었다.
또한 경기 성격이 말해 주듯이,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유럽에서는 각 나라마다 공통적으로 외침에 대항해 독립과 민족정신을 대변하는 상징으로써 축구의 역할도 컸는데 특히, 1바이킹의 지배를 받았던 잉글랜드에서는 11세기에 덴마크가 철수하자 그동안의 폭정에 대한 반발로 덴마크인의 무덤에서 두개골을 꺼내 발로 차면서 울분을 풀었다고 한다. 이런 전통은 매년 로마를 비롯한 외국의 점령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는 도시 전체가 참여하는 축구가 축제의 메인행사로 자리 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매주 마다 즐기는 축구(게일릭 풋볼
한·중·일 삼국의 축국 전파도
중국의 츄슈도 군사훈련을 위해 고안된 군대축구였다. 츄슈는 기원전 3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진(秦)나라가 등장하기 이전인 ‘전국(戰國)’시대로 소위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적 배경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제한된 공간에 너무 많은 국가들이 서로의 이익을 다투며 공존하는 상황에서는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각종 연횡합종(連衡合縱)의 정치외교술도 필요하지만 주변 상황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스스로의 생존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지키는 힘의 근원은 곧 군대이고 이 군대의 근간은 곧 군인들이었기에 군인들의 신체와 체력 그리고 정신력은 곧 나라의 운명과 직결되었다. 따라서 강한 군대를 보유하는 것은 모든 국가 지도자들의 소망이었다. 이런 시대적 필요와 요구에 따라 고안된 경기 종목이 비로 츄슈라 할 수 있다. 츄슈의 경기 방식은 서양의 집단축구와는 사뭇 다르다. 특히, 손을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여러 개의 구멍에 공을 넣는 방식을 채택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의 치열함은 상당했었으며 경기 자체의 중독성으로 민간에서 황실에까지 보급될 정도의 인기를 누렸다. 츄슈와 관련하여 자세한 설명은 다음에 계속 하겠다.
우리나리의 ‘축국’이나 일본의 ‘게마리’에서는 서양 공놀이에서 보이는 전투적 성향을 찾아볼 수는 없을지 몰라도 최소한 중국의 ‘츄슈’ 만큼은 로마제국의 ‘하르파스툼’이나 프랑스의 ‘술’과 마찬가지로 전시를 대비한 군인들의 군대 스포츠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여 년 전에 전혀 교류 없이 격리된 두 대륙의 국가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유사한 형태의 스포츠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축구의 기원 ⑤ : 중국의 츄슈
지금까지 동양에서 성행했던 고대의 공놀이(츄슈 등 3개)와 서양에서 기원했던 고대 및 중세의 공놀이(에피스키로스 등 6개)를 모두 살펴보았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영국을 축구의 종주국(宗主國)으로 알고 있는데 각 종목들의 특징을 비교해 보면 오히려 중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경기방식만 본다면 유럽의 집단축구 보다는 츄슈가 오히려 현대의 축구와 더 닮아 보인다. 이런 생각을 갖도록 한 배경에는 중국의 끈질긴 노력이 숨어 있는데 이와 관련한 긴 이야기가 있다.
지난 2004년 FIFA는 창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현대 축구의 종주국(宗主國)인 영국에게 인증서를 수여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세계 축구협회(FIFA) 회장과 아시아 축구연맹(AFC)의 회장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피파가 주최하는 아시아컵대회의 개회식에 참석해 개식사와 축사를 통해 “중국이 축구의 발상지”임을 언급했다. 그리고는 피파의 홈페이지에 한 스포츠사학자의 연구 논문을 인용하면서 ‘축구의 중국 기원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중국의 노력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다음에 소개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 시간대별로 정리한 것으로 그들이 중국을 거론하게 된 배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 중국 역사상 츄슈가 가장 성행했다고 주장하는 산동성 쯔보시에 축구박물관을 개관해 오랜 기간 준비했던 세계 축구박물관의 지평을 열었다. 이 박물관은 약 800백 평 규모의 거대한 공간에 가장 오래된 체육교과서로 주장하는 ‘츄슈 25편’을 비롯한 150여 점의 유물, 300여 폭의 그림 그리고 당시를 재연한 장면 등을 전시하고, 동시에 전문 기예단에 의해서 멋진 ‘츄슈 공연’도 주기적으로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관람이 끝나면 전시관의 초입에 세워 둔 안내간판에 적힌 문구(“세계 축구는 츄슈에서 기원했다<世界足球起源于蹴鞠>)”를 다시 일깨워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2006년 : 츄슈 민속축제를 국가급 문화유산에 등재해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츄슈를 하나의 축제로 승화시켰다. 이후에도 베이징 올림픽(2008년, 축구의 식전경기로 츄슈공연을 펼쳐 보인 바 있다.)을 포함한 국가의 주요 국내외 행사에 동원함으로써 중국인들과 세계인들 앞에서 츄슈 공연을 보란 듯이 시연하였다.
2007년 : 드디어 중국은 스위스 로잔에 위치한 현대 세계 축구의 본거지인 국제축구연맹(FIFA)의 본부에도 진출했다. 아래 사진은 당시 피파 회장(블래터)과 임원 그리고 중국 축구협회 관계자들이 함께 중국에서 준비한 조형물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인데 부조에 새긴 글귀가 매우 인상적이다. 중앙에는 전통복장을 한 두 명의 선수가 츄슈 경기를 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그 밖에는 외곽을 따라 ‘성스러운 공의 기원’을 의미하는 ‘성구지원(聖球之源)’을 조각했다. 이게 다가 아니다.
(1) (2)
(3)
유럽의 고대 또는 중세의 축구에서는 볼 수 없는 여섯 개의 구멍(골문)에 발로 차서 넣는 경기로 손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뒤로 감춘 모습(1)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리고 국가급 문화유산에 등록한 츄슈 축제 가운데 전문 기예단에 의해 재현된 모습(2)으로 베이징 올림픽과 영화(적벽대전)로도 만들어 홍보했다. 마지막 사진은 2007년에 스위스 로잔에 위치한 FIFA 본부에 ‘성구지원(聖球之源)’ 제목의 전통복장을 한 두 명의 선수가 츄슈를 하는 부조상을 거는 장면(3)이다.
2008년 : 잘 아는 바와 같이 베이징 올림픽이 거행된 해로 중국은 2004년 애틀랜타에서 소련 몰락 이후 세계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초강대국의 입지를 만방에 알린 미국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이를 세계에 알렸음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올림픽과 관련하여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2009년 : 2008년에 이어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하는 오우삼 감독의 영화 ‘적벽대전2’(적벽대전 1편은 2008년에, 2편은 2009년에 각각 상영되었음.)에서 조조군의 위나라 병영에서 결전을 앞두고, 장기간에 걸친 해외 원정에 지친 군사들을 위로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며 동시에 진중훈련의 목적으로 조조와 군 수뇌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규모의 츄슈 대회를 개최하는 장면을 과도할 정도로 노출시켜 세계 영화시장에 뿌리기도 했다. 2부작의 대작이기는 했지만 뭔가 이상하다. 4시간으론 턱없이 부족한 대사건을 다루면서 전체 스토리 전개와 아무 상관없는 츄슈에 과도하게 할애한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시의 군웅할거(群雄割據)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강군(强軍)이 필요했고, 정병양성(精兵養成)을 위해 츄슈를 적극 권장했다(다음에 소개하겠지만 역사적으로 츄슈가 전성기에 국기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는 정도로 봐주더라도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지금까지 언급한 일련의 과정이 의도적으로 기획된 것이라면 올림픽과 츄슈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막강한 정치·경제력에다 역사·문화 등을 한데 묶어 세계에 중국의 총체적인 힘을 과시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전체 맥락에서 본다면 영화의 진행에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츄슈 장면을 삽입한 배경도 충분히 짐작이 된다.
영화‘적벽대전2’를 제작할 당시 오우삼 감독은 양쪽에 6개의 골문을 만들었던‘경기장’이나‘축국을 즐기는 소녀상’(당나라 시대) 등 역사적 기록과 사료를 재현하는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세계는 중국의 집요한 노력 탓에 영국을 현대 축구의 종주국으로, 중국의 츄슈를 현대 축구와 가장 유사한 경기로 인정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중국은 2002년 한일 양국이 개최국의 자격으로 자동 본선에 진출하여 어부지리로 받은 혜택이기는 하지만 “올림픽에 나가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던 등소평의 염원도 달성(중국 축구협회는 2050년이 되어야 본선 진출이 가능한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했고,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고, 정치·경제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기회’를 의미하는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 영역에서도 그 중심에 우뚝 선 것이다.
우리는 2004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구소련 몰락 이후 세계 초강대국으로써의 입지와 이미지를 굳혔던 미국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중국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기울였던 노력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축구도 신중화(新中華)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이러한 일련의 노력이 치밀한 계획과 계산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면 중국은 축구를 포함한 스포츠의 영역에서도 그들의 역사와 문화 등 민족의 총제적인 우월성을 전 세계에 과시함으로써 세계를 호령할 수 있는 국가 위상을 갖추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성적만 보완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마냥 부럽기만 하다거나 우리 이야기가 아니라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왠지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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