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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와 연변] - 조선민족 축구명장 = 박익환
2018년 03월 20일 00시 53분  조회:5258  추천:0  작성자: 죽림

[연변축구50년]
우리 민족의 축구명장-박익환

편집/기자: [ 김룡 ]  [ 길림신문 ] [ 2015-09-21 ] 
연변팀 전국우승 50돐기념 계렬보도
《영광의 주인공들 찾아서 》
 
 
연변에서 우리 조선민족의 축구가 처음으로 시작된지도 어느덧 한세기가 많이 지났다. 1905년 서울의 로선생이라는 분이 장동촌에 축구공을 갖고오면서부터 연변의 축구가 있게 되였다.

1910년 단오절을 맞으면서 룡정시 덕신향 장동촌의 소학교와 장재촌에 있는 명동소학교간에 사상 첫 대항선경기가 있었다. 그후 여러 소학교들에서 축구경기가 있었으며 1926년 개산춘 제도촌에서 연변에서 사상 처음으로 장년팀 대항선경기가 있었다. 연변의 축구는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연변팀(간도성팀)은 전 만주국대회에서 기본상 1등을 하여 전  만주국(지금의 동북3성)에서 연변팀을 꺾을 팀이 없었다. 바로 여기에서 성장한 축구명장 박익환의 큰 공로와 갈라놓을수 없었다.

오늘 소개하가고 하는 박익환(朴益焕)에 대해 과거에 많은 축구선수와 축구팬들은 의론이 많았지만 인제는 시간이 흘러 그에 대해 아는 분들이 적어졌다. 안다면 년세가 많은 축구선수나 축구계 로 교수들이 알고있을 뿐이다.
 
 
1935년 전 만주국대회에서 1등한 간도성(연변팀)팀(앞줄 왼쪽 두번째 사람 박익환).

박익환명장은 《명정포》라는 별호를 달고 간도성(연변)팀과 전 만주국, 조선반도, 일본전역까지 중국의 조선족으로 제일 이름난 선수였으며 그의 친형님인 박주환도 연변팀과 위만주국팀의 중견선수로 《호랑이》라는 별호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빈 축구명장이였다. 필자는 축구선수와 축구를 사랑하는 축구팬들 한테 과거의 축구명장들도 기억 하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간단히 정리하였다.

박익환은 대정 칠년(大正七年)(1918년) 12월 7일 화룡현 팔도하자 남양촌(지금의 룡정시 덕신향)에서 태여났다. 소화(韶和)2년(1927년) 4월 1일, 팔도하자 보총소학교(지금의 덕신향 남양소학교)에 입학하여 소화 8년(1933년) 3월 25일에 졸업하였다. 소화 9년(1934년) 4월 1일 ,룡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여 소화 12년(1937년) 3월 15일에 졸업하였다.(참고: 저항시인 윤동주와 룡정 은진중학교 때와 연세대학시절에 동창생임 연세대학 시절에 박익환은 축구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윤동주는 시에서 이름을 날렸다.) 소화 13년(1938년) 4월 1일에 일본 광도현 오시흥문중학교에(일본 히로시마)입학하여 소화 15년(1940년) 3월 6일에 졸업하고 이해 4월 1일에 연의전문학교(연세대학)에 입학하였다.

박익환은 어려서부터 뽈차기에 흥취를 가졌으며 커서 간도성(연변)팀과 만주국 국가대  선수로 조선반도와 일본열도에까지 이름난 명선수였다.
 
 
1935년 5월 20일 연습중 잠시 쉬고있는 모습.(왼쪽으로부터 6번째 박익환)

1998년 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 조선민족문화사대계》 체육사에는 박익환명장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괴뢰만주국 축구계에는 신경(지금의 장춘) 안동, 목단강, 할빈, 길림, 대련, 봉천(지금의 심양) 등 지구의 축구명장들이 많았다. 그때의 중간방어수(하프)에서 가장 뛰여난 선수를 고르자면 연변팀의 박익환을 꼽을것이다. 룡정태생인 박익환선수는 체대가 크고 아주 건장하며 남달리 운동신경이 발달하여 중학시절에 벌써 연변과 괴뢰만주국 일본에서 그 명성을 떨쳤다.》


《한국일보》《일간스포츠》는 1978년 9월 13일과 1979ㄴ연 5월 12일부에서도 이 같은 내용을 기사화하였으며 《당대에서 가장 뛰여난 하프를 고르자면 연전(연세대학)팀의 박인환이다. 그의 축구기술은 현대 축구명장들의 축구기술과 이를바 없었다》. 허리구실(하프)을 잘하는 모든 선수들은 박익환한테 큰 기대를 모았다.》고 기사화하였다.

박익환명장은 간도성(연변)팀의 선수시절에 많은 간도성대회와 전 만주국축구대회에서 연변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는데 그의 공로가 절반이래도 과언이 아니였다고 한다.
 
 
1940년 10월 2일 전조선 종합축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훈련중 기념촬영(왼쪽으로부터 6번째 박익환).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체육사는 《1937년 8월초에(만주국 축구선수선발대회)가 신경(장춘) 남령경기장에서 진행되였다. 경기에서 신경(지금의 장춘), 대련, 연변, 삼강, 룡장, 봉천(심양), 길림, 안동(지금의 단공) 등 지간에 치렬한 경기를 펼쳐졌다. 연변팀은 모든 적수를 누른후 마지막에 강팀인 대련팀을 3대0으로 격파시켜 또다시 만주국 축구계에서 우러러보는 강호로 확인받았다. 뿐만 아니라 중간방어수(하프)로 활약한 박익환은 (만주국》축구계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유망한 선수로 인정받았다. 그후 박익환은 축구명장으로 되려는 큰 뜻을 품고 넓은 축구무대를 찾아 조선에 나갔다.》고 하였다.

한국에 나간 박익환은 처음 공을 찬 학교는 부전학교(지금의 고려대학)이였다. 뽈을 잘 차는 것을 알게 된 연전 전희전문학고(광복후 연세대학을 개칭)에서 인츰 스카우트하였다. 남달리 축구의식이 높은 박익환은 돌파능력이 강하고 드리블이 좋은데다가 가동작이 민첩하고 문전슛이 준확하여 축구계와 팬들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따라서 그의 명성도 날로 높아갔다.

그당시 조선반도에서 강한 팀들로는 함흥축구팀, 평양축구팀, 경정(서울)축구핌, 연세대학팀, 고려대축구팀 등이였다. 이 팀가운데서 우승팀만이 세계컵축구선수권대회 예선경기에 참가할수 있었다.
 
 
1940년 11월 15일 제21회 전 조선종합축구대회 우승후(왼쪽으로부터 네번째 박익환).

1940년 5월 2일 경성(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경기에 박익환이 소속된 연세대학팀은 경성구락부팀을 6대0으로 압승하여 서울을 대표하여 조선예선축구대회에 출전하게 되였다. 이해 5월 18일에 개막된 제4회 조선축구예선선수권대회에서 강팀인 평양축구단을 맞아 격돌끝에 3대2로 격퇴했다. 조선반도의 최강을 자랑하는 함흥축구팀은 연세대학팀을 어렵지않게 이길수 있으면 자기네 팀만이 예선경기에 참가할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들도 박익환선수를 잘 알고있었ㄷ. 연세대팀은 함흥팀에 비해 약세이면서도 패기가 높아 절호의 챤스를 놓치지 않고 공격한끝에 함흥팀을 1대0으로 눌러 패권을 잡았다. 함흥팀은 불운이 겹쳐 연세대팀의 드센 역습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하자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조선반도에서 우승한 연세대학팀은 이해 5월 24일 일본에서 열린 제6회 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이기게 되면 월드컵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자격을 얻을수 있었다. 조선을 대표한 연세대학팀은 첫 경기에서 일본축구계에서 제일 최강을 자랑하는 와세대대학팀과 격전을 벌렸다. 와세다팀은 독일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한 명장들을 주축으로 한 강팀이였다.

일본은 늘 그러했듯이 원정온 《팀》에는 의례 자기 팀을 유리하게 이끌 속셈이 작용하여 심판으로 상대방을 패배시킬 목적으로 부정행위를 마구 실시하였다. 그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써 도리가 있어도 제기할수 없었다.
 
 
1941년 6월 3일 제5회 경기도 전문축구대회 우승을 기념 본교 본관앞에서 기념촬영.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많은 조선의 축구건아들은 한 마음으로 단결되여 이를 악물고 격돌하였다. 허리(하프)가 든든한 연세대학팀은 절대적 우세로 한꼴을 넣어 와세대대학팀 진영이 흐트러지기 시작하였다. 후반전에 들어서 일본 심판의 고질병이 도지기 시작했다. 한심한 업사이드임에도 불구하고 묵과해서 고의로 두꼴을 넣게하여 결국 연세대학팀이 파하게 하였던것이다. 그때 경기를 관람하던 많은 량심적인 일본관중들은 《과세대학팀이 졌다. 심판이 공평하지 못하다. 연세대학팀이 이겼다》라고 하면서 분노를 토하기도 하였다.

박익환을 비롯한 선수들은 억울한 분위기에서도 일본동북대학팀을 6대0으로 누르고 강팀인 관서대학팀을 또 3대0으로 격파시켰다. 그때 박익환의 공로가 매우 컸다. 그는 두 날래(공격수)한테 주는 패스는 자로 재는듯 준확하여 축구계와 일본관중들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의 《한국일보》1978년 5월 12일부에는 《박익환은 연세대학교에서 언어와 행동이 고와서 전교의 학생과 선생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러기에 어려운 생활속에서 생활하는 그를 도와나선 학우들의 도움을 받았다. 뜻밖의 익사로 가버렸으니 연세대학교의 손실이였을 뿐만 아니라 학국축구계의 큰 손실이였던것이다.》라고 기사화 하였다. 문헌자료에는 《만약 박익환이 중도에서 목숨을 잃지 않고 2차대전이후까지 살았더라면 그는 대선수로 자라나 국가의 명예를 건 경쟁속에서 크게 활약했을것이다》라고 적었다.
 
 
1940년 5월 18일 제6회 전일본 축구선수권대회 파견 예선대회에서 우승하고 기념촬영(뒤줄 오른쪽 네번째 박익환).
 

유명선수는 이렇게 되여 너무 어린나이에 저세상 사람을 되였는가? 그당시 박익환선수의 죽음을 두고 조선과 중국에서 같지 않은 설이 돌았다. 즉 《뽈을 잘 차니 일본놈들이 죽였다》고 하는가 하면 《차 사고로 죽었다.》, 《경기도중에 고의로 죽었다》는 등 설이 돌았다. 그리고 몇 년간 노력을 들여 교육출판사에서 출판한 체육사에는 《앓아 죽었다.》고 문헌에 남겼다. 그들의 말은 《만주국 때부터 뽈을 차온 연변대학 체육계의 박로석 교수의 말을 믿고 남겼다》고 한다. 허나 모든 설은 사실과 모두 달랐다.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70여년전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박익환의 당안자료를 찾아보았다. 그의 학전부에는 박익환의 연세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학습성적과 출생지로부터 세상을 뜰 때까지 상세히 적혀있었다. 학적부에는 《소화 7월 6일 교내수영장에서 익사하였다.》고 적혀있었다.

박익환의 죽음은 이러하였다. 소화 17년(1942년) 7월 6일 축구팀 선수들은 학교수영장으로 수영하러 나갔다. 그때 박익환선수는 다른 선수들보다 좀 늦게 나가게 되였다. 박익환이가 좀 늦게 나오자 한 팀의 꼴키퍼 장기량선수가 《왜 늦었어?》하면서 옷도 벗지도 않은 박익환을 수영장에 밀어넣었다. 수영재간이 전혀없는 박익환이는 허우적거리면서 물을 삼키기 시작하였다. 기타 선수들은 그가 헤염치는줄로만 여겼다. 선수들이 다시 그를 보았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1941년 5월 31일 제5회 경기도 전문학교 축구대회 우승 기념촬영(경성운동장),오른쪽 네번째 박익환.

박익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꼴키퍼 장기량(张基良)은 자신의 경솔한 장난으로 친구를 죽음에 몰아넣었던것이다. 친구가 세상을 뜨자 장기량 꼴키퍼는 몇번이나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극히 말리는데서 실현되지 못하엿다. 문헌자료에는 《장기량과 박익환이는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그들의 관계는 실과 바늘관계였다》고 하였으며 《룡정 팔도하자에 있는 부모 보러갔다가 생활이 곤난하여 학비로 마련하지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그럴때마다 만주에서 소지주로 생활이 괜찮은 장기량은 부모들을 속여가면서 돈을 갖고와서는 박익환의 학비를 여러 번 대주군 하였다.》고 하였다. 문헌자료에는 《장기량은 유명 축구선수인 친구를 죽음에 몰아넣자 학교를 그만두고 3년간 만주에서 류랑생활을 하다가 부산에 있는 형님인 강기호가 약방을 꾸리는 형님을 도와 약방을 운영하였다.》고 기사화하였다.

연세대학 시절에 함께 뽈을 차온 범영광(范荣光)이 1988년 부산을 찾아가서 장기량을 만나자 그때를 생각하면서 그는 《땅을 치면서 통곡하였》는 사실도 《한국일보》에서 기사화하였다.

연세대학교에서는 우리 민족의 축구영웅 박익환선수의 죽음을 슬퍼하여 학교장(葬)을 지내주었고 대학교 본관의 뒤동산에 그의 유체를 매장하고 비석까지 세웠던것이다. 《연세대학축구사》에서(참조) 축구영웅 박익환은 24세의 너무 어린 나이에 생을 마쳤다. 그가 고인이 된지도 7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연변팀과 전 만주국팀, 연세대학팀 등 팀의 선수를 드넓은 그라운드를 누빈 박익환축구명장의 업적은 우리 조선민족의 축구사에 영원히 남아있을것이다.

///김원범, 촬영:김몽훈,사진제공:황범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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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중국동포라고 밝힌 한 분이 지난 16일 <보령신문>을 찾아왔다. 올해 64세인 김원범씨는 중국 길림성 용정시 덕신향 남양촌 출신으로 최근 국내로 들어와 주포면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김씨가 <보령신문>을 찾아온 이유는 자신의 고향인 남양촌과 그 곳에서 살아가는 동포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보령사람들에게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김원범씨로부터 건네받은 원고에는 남양촌 출신으로 우리 민족의 축구 영웅으로 알려진 박익환씨의 이야기가 씌여있었다. 자신이 직접 자료를 모아 쓴 글로 중국 현지는 물론 국내 각 언론사에도 여러차례 소개 된 바 있다.
이에 <보령신문>은 김원범씨의 각별한 고향사랑과 동포애를 함께 나누기 위해 3회에 걸쳐 소개하기로 한다. 연변지역 문체로 작성된 원고를 가급적 그대로 실었고, 일부 방언만 표준어로 고쳤다.
<편집자 주>

 

축구 영웅 박인환이라면 지금의 축구계와 팬들은 잘 모를 것이다. 안다면 한반도와 중국의 나이 많은 조선족 노인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축구전설도 알고 있다. 그럼 아래에 축구영웅 박익환 명장을 소개하기 전에 흘러간 우리 민족의 축구역사를 먼저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우리 민족의 축구는 고구려 시기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역사책 ‘삼국유사’에는 ‘축구’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중국의 역사책 ‘구당서(舊唐書)’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이 축구를 잘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5세기에 와서 그것은 현대축구와 비슷한 규정을 가진 축구놀이로 발전하여 왔다. 현대 축구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과 보급이 이루어진 것은 1904년 관립외국어 학교에서 축구가 체육과목의 일부로 채택된 이후부터였다.

1906년 3월 11일에는 왕실의 궁내부 예식원 주사를 비롯한 30여명이 모여 체육구락부를 조직하고 황성기독교 청년회 회원들과 축구경기를 하였다.

그 당시 못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축구공이 없자 솜뭉치나 천 조각을 뭉뚱거려 노끈으로 그물을 틀어 축구공으로 만들어 찼는가 하면 골대에 그물이 없으면 노인들한테 한 근의 술과 한 줌의 굵은 소금을 안주로 대접하면서 골대 그물을 틀게 했던 것이다.

축구장 선은 백회가 없어 백토를 실어다 축구장 선을 긋는데 사용하였고, 경기시작과 종료시간은 물통을 두드리면서 종을 대체하였다. 방송이 없자 양철판을 얻어다가 나팔모양으로 만들어 입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내고 방송대신으로 선수들의 입장을 알렸다.

운동복이래야 베적삼에다 종이장 번호를 달거나 직접 운동복에 먹으로 번호를 쓰기도 했다.

그 옛날 축구경기는 치우라 농촌에서 많이 진행되었다. 지금의 축구장은 푸른 초원같은 잔디지만 과거에는 따로 경기장은 별반 없었다. 좀 평평한 등판을 골라 축구경기장으로 만들어 진행하였으며 축구장이래야 울퉁불퉁하고 돌멩이가 많았고 비가 좀 와도 어찌나 질척거리는지 공을 차는 것이 아니라 진흙을 차다시피 하였으며 발톱이 빠지거나 상대편을 상하게 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은 모든 것이 발전되어 옛날과 달라 먼 곳을 가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지구촌의 축구경기를 볼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텔레비전 시청도 만족되지 않아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경기장을 직접 찾는다.

시대가 바뀌어도 좀 바뀐 것이 아니라 확 바뀌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주먹밥이거나 소래밥을 싸들고 남녀노소들이 원근을 물론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노인들은 소 수레나 마차에 앉아서 구경을 떠나 응원하곤 하였다.

축구시합에서 어느 선수가 공을 멀리 차거나 공중 높이 차면 경기장이 떠나갈 듯 관중들은 “와!”하고 함성을 질렀다. 그 당시 축구 의식이 낮아 “그 선수가 볼을 제일 잘 찬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놓았던 것이다.

지금도 축구에 대한 의식이 낮은 분들도 적지 않다. 여기에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한다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가족들과 함께 축구경기를 시청하던 한 할머니는 두 팀이 사정을 두지 않고 싸우는 장면을 보고 “다 큰 청년들이 볼 하나 놓고 왜 싸우는가? 나라에서 차라리 매 사람들한테 볼을 사 줄 것이지......” 하며 혀를 끌끌차더란다. 이는 축구의식이 낮은 할머니의 말이다.

지나온 우리 축구는 곡절과 애로가 많았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우리 민족은 축구를 즐겨하고 발전시켰다. ‘우리 민족이 왜 그처럼 축구를 즐겨하는가?’하는 확답을 주는 문헌자료는 없으나 필자는 중국 조선민족 축구 발원지인 룡정시 덕신향의 축구역사를 쓰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축구를 즐겨하는 초보적인 비결을 알아냈다.

우리 백의 동포들은 선천적으로 무엇이든지  발로 차기와 맞부딪히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다. 그보다도 36년간이나 일제통치를 받아 온데서 주요한 원인이었다. 빼앗긴 나라를 찾자면 혁명투쟁을 해야 한다. 혁명을 하자면 우선 신체가 튼튼하여야 적과 맞서 싸우는데 이롭고 혁명투쟁을 수행하기 위한 비밀사업을 하는데 매우 좋았다.

필자는 취재과정에서 축구운동을 즐겨하고 활발히 전개한 지방일수록 혁명의 봉화가 세차게 타 번졌고 독립운동가와 장령들도 많이 배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역사가 증명하다시피 중국 조선민족 축구발원지인 룡정시 덕신향이 그러하다. 연변에서 항일혁명의 주요 전적지나 다름없는 덕신향에서 축구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많은 항일투사들이 나왔다. 크나큰 중국 땅에서 시골 향촌이지만 고위급 장군과 축구 인재가 제일 많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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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5월 18일 전연전(全延專)이 제6회 전일본 축구선수권대회 파견 예선대회에서 우승하고 경성운동장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원안이 박익환 선수).

1932년 10월에 조선아식심판협회(朝鮮亞式審判協會)를 조선축구협회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압박 밑에서도 축구보급에 노력하다가 끝내 1942년에 해산당하였다. 항일무장투쟁은 아무런 국가적 후방도 정규군의 지원도 없는 최악의 조건에서 발톱까지 무장한 일제의 백만 대군과 정면으로 대결하여 벌인 간고하고 시련에 찬 혁명전쟁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혁명전쟁이라고 하여 결코 간고한 싸움만이 있은 것은 아니었으며 혁명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닌 항일투사들은 인민들과 함께 전투승리와 기념일을 계기로 각이한 형식의 축구경기를 자주 조직하였다.

그들은 산골에 있는 넓은 등판에다 골문대를 세워놓고 축구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기에서 우승하게 되면 생활이 아무리 어려워도 소나 돼지, 개를 잡아놓고 우승을 축하하는 일은 보통일로 되었다. 그것도 하루도 아닌 며칠씩 흙이 되도록 술을 마셔댔다.

매우 어려운 속에서 우리 민족의 축구는 발전하여 수많은 축구인재와 영웅들이 용 솟음쳐 나왔고 숫한 별호들도 나왔다. 즉 ‘중형 탱크’, ‘분사식 비행기’, ‘기계다리’ 볼을 감아치면서 차는 동작을 보고 ‘도리깨 마구리’, ‘쌕쌔기’, ‘번개’, 키퍼를 잘 선다고 하여 ‘철문’ 등의 별호가 그 얼마인지 모른다.

조선반도와 우리 중국 조선족 축구 건아들은 모두 나라 축구사업에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조선반도와 우리 중국조선족 축구는 백년 전부터 초보적으로 시작되었다.

필자는 백년래 (조선반도 중국조선족 포함) 많고도 많은 축구영웅 중에서 가장 돌출한 축구명장을 년대에 따라 소개하자고 하니 모두 박씨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유전인지는 몰라도 좌우간 박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역대로 볼을 잘 차온 것만은 사실이다.

60년대 북한의 박승진 축구영웅, 21세기 한국의 박지성 축구영웅, 30~40년대 축구영웅 박익환 이 세 명 가운데서 오늘은 ‘명중포’라는 별호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빈 박익환 축구명장만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해 9월말 필자는 30, 40년대 축구영웅 박익환에 대한 상세한 취재를 하고자 그가 다녔던 서울 연세대학을 찾아갔다.

1885년에 설립된 연전(광복후 연세대학으로 개칭)은 6만여명의 학생과 교원을 두고 있는 명문대학이다. 학교정문에 들어서면 백양로가 있다. 연세대학의 상징인 백양로에는 백양나무(은백양)가 심어져 있다.

1915년 YMCA(기독교 청년회)에서 개거했던 연희전문학교가 1917년 신촌에 교정을 조정하면서 화학과 교수 밀러의 지도로 학생들의 진입로에 은백양 나무를 심었다. 1968년 12월 백양로를 포장하면서 수명을 다한 은백양 대신 은행나무를 심어 오늘 날에 이루고 있다.

필자는 백양로를 따라 곧추 체육학부 학부장을 만나 찾아온 사연을 말하였다. 그들은 나를 학교 박물관으로 안내하였다. 체육학부와 가까이 있는 박물관에 들어서니 강희숙 연구원과 선생님들이 필자를 뜨겁게 맞아 주었다.

연세대학교에 다니면서 학교의 선수로 활약하면서 전 만주국(지금의 동북3성)과 조선반도, 그리고 전 일본 전역에 이름을 떨친 박익환 축구영웅에 대해 알아볼 의향을 털어 놓았다. 
“이미 고인이 된 지 너무나도 오래되어 인츰 찾기에 곤란합니다. 어째든 찾아보기에 힘 다하겠습니다.”
강희숙 선생님은 필자를 보고 전화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하였다. 이틀 후 강희숙 연구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김 선생님이 찾고자 하는 자료를 찾아냈습니다.” 
강희숙 선생님은 박익환의 축구시절 사진과 학생 때의 학습성적 등 문헌자료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너무나 반가운 소식에 기쁨을 금치 못했다.

그 까닭은 박익환 명장의 사진은 중국과 조선반도의 그 어느 신문과 간행물에 역대로 나간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강희숙 연구원의 아낌없는 노력에 감사를 드리면서 그의 손에서 박인환 명장의 문헌자료를 받아 쥐었다.

그리고 한국 ‘일간스포츠’ 편집국 이해준 축구팀장의 도움으로 30여년전 ‘한국일보’에서 박익환 축구명장을 연재로 소개한 문헌자료들도 찾아내 박익환 축구영웅을 꾸밈없고 짜임새있게 소개할 수 있었다.

박익환 명장은 1918년 12월 7일 생으로, 1927년 4월 1일 간도성 화룡현 팔도하자(八道河子) 보통소학교(지금의 연변 룡정시 덕신향 남양소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 3월 25일에 졸업하였다. 그 후 1934년 4월 1일에 조선 황해도 재녕군 명신중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3월 15일에 졸업하였다.

1938년 4월 1일에 일본 광도현 오시흥문중학교(히로시마)에 입학하여 1940년 3월 6일에 졸업하고 이해 4월 1일에 연전(연세대학)에 입학하였다.

박익환은 중학시절에 벌써 중국 간도성(지금의 연변)팀의 선수로 활약하면서 한반도와 전 만주국의 그라운드를 누비면서 명성을 떨치었다.

그의 축구기술은 현대 축구명장들의 축구기술과 다를 바 없었다. 박익환 명장이라면 한반도와 일본, 중국 조선족의 나이 많은 분들은 모두 잘 알고 있다.

박익환은 덕신향 남양촌에 있는 부모를 뵈려 왔다가 남양소학교 주위에 있는 백양나무들을 겨냥하고 볼을 날리면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룡정대성중학교(지금의 룡정중학교) 마당에서 그의 축구표현이 있었다.

숱한 관중들 앞에서 표현을 시작한 박익환은 문대를 겨냥하고 볼을 찼는데 볼을 차서 문대에 튕겨 나온 볼을 재차 차서 문대를 맞히고 또 차서 문대를 맞혔는데 열번씩이나 맞혀 많은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간도성(연변)팀의 선수시절에 박익환은 많은 전만주국 축구대회에 참가하여 간도팀을 기본상 우승팀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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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강신문=서울 2011-05-25 ) 김원범 = 지금으로부터 60여년전 축구장에서 크게 명성을 떨쳤던 박익환이라면 조선반도와 중국의 연세가 많은 노인들은 간혹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오늘 우리민족 축구역사에 일찍 큰 획을 그은 박익환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 민족이 왜 그처럼 축구를 즐겼을까?”하는 물음에 확답을 줄만한 문헌자료는 아직 찾지못했다. 필자는 중국조선족 축구발원지로 알려진 연변의 룡정시 덕신향의 축구역사를 쓰는 과정에 우리 민족이 축구를 즐겨하는 원인을 대충 알아 내였다.

  일제치하의 지난세기를 돌이켜 보면 축구운동을 즐기고 경기가 활발이 펼쳐진 고장일수록 항일투쟁의 봉화가 세차게 타올랐다고 하는데 일리가 있는 얘기인듯 싶다. 연변에서 항일의 전적지나 다름없는 덕신향에서 축구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독립투사도 많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당시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닌 항일투사들은 백성을 조직하여 전투승리와 기념일을 계기로 각이한 형식의 축구경기를 펼치었다. 또한 경기에서 우승을 하면 생활이 아무리 어려워도 소나 돼지, 개를 잡아놓고 성대하게 경축하였다.

  어려운 환경속에서 우리 민족의 축구는 끊임없이 발전하여 수많은 스타를 배출하였다. '중형땅크', '분사식 비행기', '기계다리','쌕쌔기'등등의 별호가 얼마인지 모른다.

  그중에 '명중포'라는 별호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빈 박익환이란 스타가 있었다.

  지난해 9월말 필자는 박익환이 일찍 다녔던 서울의 연세대학 체육학부를 찾아 60여 년전 연세대학팀 선수로 활약했고, 당년의 만주(지금의 동북3성)와 조선반도, 그리고 일본 전역에 이름을 떨쳤던 박익환에 대해 알아볼 의향을 털어 놓았다.

  이틀후 학교박물관의 강희숙 연구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선생님이 부탁한 자료를 찾아냈습니다."

  필자는 너무나 반가운 소식에 기쁨을 금치 못했다. 사실 박익환 명장의 사진은 중국과 조선반도의 그 어느 신문과 간행물에도 실린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박익환 명장의 문헌자료를 받아 쥐였다. 그리고 한국 '일간스포츠'신문사 편집국 이해준 축구팀장(축구부 주임)의 도움으로 30여년전 '한국일보'에서 박익환 축구명장을 연재한 문헌자료들도 찾아 내였다.

  1918년 12월 출생한 박익환은 황해도 재녕 명신중학교와 광도현 오시흥문중학교(일본 히로시마)를 거쳐 1940년 4월 연전(연세대학)에 입학하였다. 박익환은 일찍 중학시절에 간도성(지금의 연변)팀의 선수로 활약하면서 명성을 떨치었다.

  박익환은 덕신향 남양촌에 있는 부모님 뵈러 왔다가 소학교 주위에 있는 백양나무들을 겨냥하고 공을 날리면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룡정대성중학교(지금의 룡정중학교) 운동장에서 숱한 관중들이 보는 가운데 문대를 겨냥하고 공을 날리는 묘기를 펼치었다. 문대에 튕겨 나온 공을 받아차며 문대 맞히기를 열번씩이나 하여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다.

  간도팀의 선수시절 박익환은 전 만주국 경기에 참가하여 번마다 팀에 우승의 영예를 안겨주는데 공신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중국 조선민족 축구문헌자료에 의하면 1937년 8월초 동양 축구대회에 출전할 '만주선수선발대회'가 신경(지금의 장춘시)남령경기장에서 진행되었다. 대련, 길림, 간도, 신경, 삼강, 용강, 봉천(지금의 심양시), 하얼빈 등 팀과 치렬한 각축전을 펼쳐 간도팀은 모든 적수를 누르고 만주 축구계서 우러러보는 강호로 확인받았다.

  그중 중앙방어수(하프)로 활약한 박익환의 축구기술은 만주 축구계서 으뜸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후에 박익환은 더 큰 뜻을 품고 축구무대를 찾아 조선으로 갔다.

  조선에 나가 처음 선수로 활약했던 학교는 부전(고려대학)이었다. 그의 축구재주를 알게 된 연전(지금의 연세대학)에서 인츰 그를 스카우트하였다. 박익환은 돌파능력이 강하고 드리블이 좋은데다가 가동작이 민첩하고 문전슛이 준확하여 득점율이 높았다. 게다가 두 날개(공격수)에는 공을 자로 재듯 패스하여 수많은 축구팬들을 열광케 하였다.

  당시 조선반도 강한 축구팀들로는 함흥팀, 평양팀, 경성(서울)팀, 연세대학, 고려대학팀 등이었다. 이런 팀가운데서 우승팀이 세계대회에 나갈수 있었다.

  1940년 5월 2일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된 전 일본축구선수권 대회에서 박익환의 소속된 연세대학은 경성구락부(서울)을 6:0으로 압승하여 서울을 대표하여 조선예선 대회에 출전하게 되였다. 5월 18일에 개막된 제4회 조선축구선수권대회결전 일본 축구선수파견선발전에서 강팀인 평양팀을 3:2로 격퇴하고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는 함흥팀을 1:0 으로 눌러 패권을 잡았다.

  우승한 연세대팀은 조선을 대표하여 5월 24일 일본에서 열린 제6회 전 일본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와세다대학팀과 각축을 벌였다. 와세다대학팀은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맹장들을 주축으로 일본에서 최강을 자랑하였다.

  일본은 으례 '원정팀'을 패배시킬 목적으로 부정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연세대팀과도 예외가 아니였다. 하지만 허리 (하프)가 든든한 연세팀은 1골을 올려 크게 우세였다. 후반에 들어와서 일본심판의 도를 넘은 행위가 시작했다. 어처구니 없는 업사이드를 수차 묵과하여 두골을 넣게 함으로써 연세대팀이 패하고 말았다.

  박익환을 비롯한 선수들은 억울한 분위기에서도 패하기 전 동북대학팀을 6:0으로, 관서대학팀을 또 3:0으로 격파했던 것이다.



  '한국일보'는 1979년 5월 12일자에 "당대에서 가장 뛰여난 하프를 고르자면 연전팀의 박익환이다. 모든 경기에서 허리구실을 잘하는 박익환 팀은 가장 기대를 모았다."고 기사화했다.

  중국 조선민족 체육사에서도 "만주의 축구계는 명장들이 매우 많았다.그 때의 중앙방어수에서 가장 뛰여난 선수를 고르자면 박익환을 꼽을수 있다"고 적었다.

  1978년과 1979년 '한국일보'는 "박익환은 간도에서 어렵게 자랐으나 몸이 건장하였다. 남달리 운동신경이 발달하여 기린아적 존재로 중학시절에 이미 만주와 조선반도, 그리고 일본에까지 그 명성을 떨쳤다"고 적었다.

  신문은 또 "박익환은 뜻밖의 사고로 가 버렸으니 연세대 뿐만 아니라 한국 축구계의 큰 손실이었다"라고 적었다.

  축구명장 박익환은 어떻게 되어 저 세상 사람으로 되었는가? 박익환의 돌연사망에 대해 당시 조선반도와 전 만주에 같지 않은 설이 돌았다.

  수년간 노력을 들여 출판한 우리 민족의 체육사에는 병사로 기재되었다. 실은 모두 사실과 달랐다.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69년전 연세대학 박익환의 학적부를 찾아보았다. 학적부에는 '교내수영장에서 물 사고로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1942년 7월 6일 박익환은 선수들과 함께 학교수영장에 갔다. 박익환이 좀 늦게 나오자 장기량 골 키퍼가 "왜 늦었어?' 하면서 그를 수영장에 밀어 넣었다. 헤염을 모르는 익환이는 옷을 입은채 허우적거리었다. 선수들은 그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

  한참후 다시 보았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박익환의 죽음은 그와 절친한 사이었던 골 키퍼 장기량의 경솔한 탓이었다. 연세대학에서는 축구영웅 박익환의 죽음을 슬퍼하여 학교장(葬)을 지내었고 대학교 본관뒤 뒤동산에 유해를 매장하였다.

  우리 민족의 축구영웅 박익환은 앞날이 창창한 24세 어린 나이에 이렇게 생을 마쳤다. 그가 고인이 된지 이미 69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찍 만주의 넓은 땅과 조선반도의 그라운드를 누비며 쌓은 박익환의 업적은 우리 민족의 축구사에 영원히 남아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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