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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 리해돕기와 시 "간"과 "코카사쓰", "프로메테우스"
2018년 07월 05일 22시 21분  조회:4138  추천:0  작성자: 죽림
 
코카사쓰(캅카스) 지역의 1994년 지도. 

코카사쓰, 캅카스(러시아어Кавка́з문화어: 깝까즈) 또는 카프카스 또는 코카서스(영어Caucasus) 또는 카우카스 또는 코카시아(아디게어:Къэфкъас아르메니아어Կովկաս아제르바이잔어Qafqaz조지아어კავკასია , 오세트어Кавказ체첸어Кавказ터키어Kafkasya)는 유럽의 동쪽, 아시아의 서북쪽의 지리학적 지역이다. 유럽의 가장 높은 산(엘브루스 산)을 포함하는 캅카스 산맥의 발상지이다.



신화[편집]

그리스 신화에서 캅카스 또는 코카서스는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 중에 한개이다. 현생 인류가 불을 선물로 받은 이후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 의해 사슬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기 되었다.

로마의 시인 오비드는 스키타이에 캅카스를 두고, 굶주린 이들이 사는 곳으로 상징된 춥고 거친 산으로 묘사했다. 그리스의 영웅 이아손은 황금양모를 쫓아 캅카스의 서쪽 연안으로 출범했고, 그곳에서 명성높은 메데이아를 만나게 된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그의 지적인 면은 '미리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에서 강조된다.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최고의 장인이 되었고, 이러한 인연으로 불 및 인간의 창조와도 관계를 맺었다.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프로메테우스와 관련된 2가지 주요전설을 이야기했다.

첫번째 이야기에서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속아서 고기 대신 뼈와 기름을 제물로 받은 주신 제우스가 인간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불을 감추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 다시 지상에 돌려주었다. 불을 훔친 대가와 인간에 대한 벌로 제우스는 판도라라는 여자를 만들어 에피메테우스('때늦은 지혜'라는 뜻)에게 내려보냈고 에피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판도라와 결혼했다. 판도라가 자신이 가져온 단지의 커다란 뚜껑을 열었을 때 악과 고된 일과 병이 나와서 인간들 사이에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희망만이 그 안에 남아 있게 되었다.

헤시오도스의 또다른 이야기에서는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복수로 제우스가 그를 카프카스의 바위에 사슬로 묶고 독수리를 보내서 영원한 생명을 가진 간을 쪼아 먹게 하는데 그 간은 끊임없이 다시 회복되곤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아이스킬로스의 〈묶인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Bound〉에서 구체화되는데, 아이스킬로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인간에게 불과 문명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 수단 이외의 모든 예술과 과학을 줌으로써 불과 문명을 보호하는 존재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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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예언을 하는 노인이며 바다 짐승떼(예를 들면 바다표범)를 지키는 사람.

 
프로테우스(Proteus)
프로테우스(Proteus)

그는 포세이돈의 신하이며 나일 강 하구 근처 파로스 섬이나, 크레타와 로도스 사이에 있는 카르파토스 섬에 살았다. 그는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것을 알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해주기 싫어했다. 그에게 의논을 청하려는 사람은 그가 낮잠 자고 있는 동안 갑자기 들이닥쳐 그를 묶어야만 했다.

그는 일단 잡혔다 해도 온갖 모양으로 변해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이 신을 잡은 사람이 그를 꽉 붙들면 결국은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와 얻고자 하는 대답을 해주고 바닷 속으로 들어갔다. 프로테우스는 되고자 하는 어떤 모습으로든 변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 세상 만물이 창조되어 나왔던 원형질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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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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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
Προμηθεΰς
Prometheus Adam Louvre MR1745 edit.jpg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1762, 루브르
프랑스 조각가 니콜라 세바스체 아돔이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작품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를 형상화한 조각으로, 독수리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먹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먼저 생각하는 자
인간을 창조한 신
인간의 옹호자 또는 대변자
소속 그룹 남신
티탄 중 이아페티오니데스
배우자 헤시오네(또는 아시아)
부모 이아페토스와 
클리메네(또는 아시아)
형제자매 아틀라스 · 에피메테우스 · 메노이티오스 
자녀 데우칼리온[1]
로마 동등신 프로메테우스
 
찰흙을 빚어 인간을 창조하고 있는 프로메테우스와 이것을 보고 있는 아테나 (로마시대 부조, 3세기)

프로메테우스(그리스어Προμηθεΰς)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포스의 신들보다 한 세대 앞서는 티탄족에 속하는 신이다. '먼저 생각하는 사람, 선지자(先知者)'라는 뜻이다. 티탄 족인 이아페토스의 아들이며, 아틀라스에피메테우스메노이티오스헤스페로스와 형제였다.

헤시오도스 《신통기》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는 제 1세대 티탄족인 이아페토스와 바다의 요정인 클리메네(혹은 아시아) 사이 탄생하였다. 그는 본디 티탄 신들의 심부름꾼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프로메테우스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흥미를 끈 사건이 그와 제우스 사이 벌어진 권력 다툼이다. 이 사건이 인간의 운명과 간접적으로 얽힘으로써 프로메테우스의 존재는 인류 문명사에서 신화적 해석을 하는 데 종종 언급한다. 게다가 아래에서 볼 권력 다툼은 고대 그리스의 문학과 철학에서 즐겨 다룬 소재로 손꼽히기도 한다.

대양신 오케아노스와 테티스의 딸인 님프 클리메네 혹은 아시아가 그의 어머니라 하며, 아내는 그의 이모이자 사촌인 오케아노스와 테티스의 딸 헤시오네이다. 일설에는 오케아노스와 테티스의 다른 딸인 아시아가 그의 아내라고도 한다. 아들은 데우칼리온이다.[1]

프로메테우스의 신화[편집]

헤시오도스 《신통기》에 따르면, 인간이 신에게 바칠 제물을 두고서 신과 협정 맺을 때, 소의 뼈를 가지런히 정렬하여 이를 윤기가 흐르는 비계로 감싸고, 살코기와 내장을 가죽으로 감싸 제우스 신에게 무엇을 가져갈 것인지 선택하게 하였다. 프로메테우스 계락을 간파한 제우스는 분노하여 인류에게서 불을 빼앗는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속이고 꺼지지 않는 불을 회양목 안에 넣어 인간에게 몰래 주었다. 분노한 제우스는 인간을 벌하기 위해 최초의 여자인 판도라를 만들어 그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행동한 뒤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에게 보내고, 프로메테우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에피메테우스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이 일로 인해 "판도라의 상자" 사건이 발생하여 인류에게 재앙이 찾아오게 된다.

또 그는 예언 할 능력 갖추었는데, 제우스가 자신의 미래를 묻자 거부하였고, 이 때문에 제우스의 분노를 사 코카서스 산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게 되었다. 후일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그를 구해 주었다. 헤라클레스가 12과업을 할 때 아틀라스의 꾐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준 게 프로메테우스라고도 한다.

문명사적 해석[편집]

프로메테우스가 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주었다는 이야기로부터 신의 불을 '광명'으로 보아 인간이 신의 지식을 얻어 각성하게 되었다는 상징으로 유추되기도 한다. 같은 관점에서 구약의 율법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고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대한 지식(복음)을 전해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도 비교해볼 수 있다.









 

 

명작에 얽힌 일화 

                           일 남  시인

 

별 헤는 밤

 

 

               윤 동 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 짬, 라이나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슴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버렸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윤동주 시인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윤동주 시인을 택한 것은 그의 일화도 일화거니와 일제시대를 살아온 많은 문인들이 일제에 가담한 글을 써 비난의 대상이 된 오늘의 시점에서 윤동주 시인을 되짚어보는 것이 뜻이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항일 저항 시인으로서 불행하게도 이국의 차디찬 감옥에서 옥사한 시인을 든다면 이육사 시인과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게 된다. 이육사 시인은 북경 감옥에서 옥사했고 윤동주 시인은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했다. <별의 시인>이라 부르는 윤동주 시인은 우리 문학사에 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다. 위의 시 <별 헤는 밤>은 윤동주가 1941년 11월 5일 에 쓴 시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먼 북간도에 계시는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시라 하겠다. 이 시에 나오는 <언덕>은 지금의 서촌 인왕산 언덕을 말하는 것이리라. 인왕산 언덕에는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규모는 작지만 아담하게 지었다. 영상실이 있고 별보는 곳도 있다. 그러나 전시된 자료는 빈약하다. 후손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도 있다. 이 언덕에 윤동주가 자주 올라 가을 전경도 감상하고 밤이면 별을 헤어보기도 했던 것 같다.

 

그 별에서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를 생각하고 멀리 북간도에 계시는 어머니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엇인가 사무쳐 언덕에 자신의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지워버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상(理想)을 꿈꾸며 봄을 기다렸고 무덤 위에 돋는 파란 잔디를 생각했다. 파란 잔디야말로 자신의 꿈이며 미래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 문학관을 찾아 언젠가 가서 <시인의 언덕>을 혼자 거닌 적이 있다. 윤동주가 이름자를 썼다가 지운 곳이 어딘가 상상하며 1941년에 윤동주가 거닐며 고독과 현실을 괴로워하며 별을 헤던 일을 생각했다. 숲속에서 시인의 인기척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적도 있었다. 풀숲에서 우는 벌레소리를 윤동주도 옛날엔 듣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윤동주는 3남 1녀 중 장남이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이 함경북도 종성군에서 북간도 명동촌으로 이주해 자수성가했다. 넓은 과수원과 벼농사로 남부럽지 않은 기반을 잡고 살게 되었다. 아버지 윤영석(尹永錫)은 기독교 계동의 모교인 명동학교 교사였다. 할아버지는 명동교회 장로로 지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윤동주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자라게 된다. 윤동주가 명동중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의 길에 오른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를 다닐 때 처음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정병욱의 말에 의하면 1940년 동주를 만났는데, 그는 오뚝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일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마디로 미남이었다. 투명한 살결과 날씬한 몸매와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그는 멋쟁이였다, 고 증언했다.

 

연희전문에 다닐 때 처음엔 정병욱과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윤동주는 달이 밝으면 정병욱의 방문을 두드려 정병욱을 끌어내어 연희전문의 숲길을 거닐고 서강의 뜰을 거닐며 두어 시간의 산책을 즐기고 기숙사로 돌아오곤 했다 한다. 그 시간동안 윤동주는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때문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다만 <정형, 아까 읽던 책 재미있었어요?> 정도였다. 윤동주는 <별 헤는 밤>의 첫 원고를 정병욱에게 보여주었다 한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정병욱이 읽고 어쩐지 끝이 좀 허하다 했는데, 윤동주가 그 말을 듣고 <그러나 겨울이 자나고 봄이 오면 /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것이외다.> 이 넉 줄은 정병욱의 충고에 의해서 쓴 것이라 전한다.

 

학교 기숙 생활에서 대동아전쟁이 치열해 지자 학교 급식이 부실해 졌다. 윤동주는 하숙집을 구하려고 2년 후배인 정병욱과 인왕산 아래 누상동에서 옥인동으로 내려가는 길목 전신주에서 우연히 하숙광고 쪽지를 보게 된다. 거기가 바로 누상동 9번지인 소설가 김송(金松)의 집이다. 김송은 함경도 함주가 고향이고 서울신문사 문화부장을 지냈다. 또 극장도 창설했다 한다. 거기에 하숙을 정한 윤동주는 같은 방에서 정병욱(후에 서울대 교수가 됨)과 생활하게 된다. 윤동주의 하루 일과는 아침에 일어나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했다. 산골짝 물로 세수를 했다. 그리고 산을 내려와 아침을 먹고 등교했다가 수업을 마치면 충무로의 신간서점과 고서점을 방문했다. 그리고 음악다방을 들리거나 영화도 보고 청계천 헌책방을 순례 후 하숙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윤동주와 정병욱은 하숙집에서 마음이 편치를 못 했다.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 수시로 하숙집을 찾아와 가택수색을 했다. 주인 김송 소설가가 요시찰 인물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었다. 경찰들은 윤동주의 하숙방에도 들어와 책꽂이의 책을 뒤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안을 느낀 윤동주와 정병욱은 1941년 5월에서 9월까지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다른 곳으로 하숙을 옮겼다 한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졸업한 기념으로 시집을 내려고 했다. 시집의 제목을 <병원>이라 정하겠다고 정병욱이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잘은 모르지만 세상이 온통 환자들로 들끓으니 그런 제목을 생각한 것은 아닌지 그렇게 정병욱은 생각했다 한다. 그러나 여건이 허락지 않아 시집을 내는 것을 포기하고 19편의 시 노트를 자신이 하나 갖고, 이양하(후에 서울대 교수가 됨)에게 하나 주고 정병욱에게 하나 주고 일본으로 떠났다고 한다. 윤동주는 일본유학의 첫째 조건인 일본 이름으로 개명해야 하기 때문에 하라누마 도슈(平沼東柱)란 이름으로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정병욱은 시 19편의 노트를 고향 광양으로 가지고 가서 어머니께 건넸다.

 

“어머니, 이거 중요한 것이니 잘 보관해 주세요.”

“그래 뭔지 모르겠다만 잘 보관하마.”

정병욱의 어머니는 시 원고 노트를 비단 수건에 싸서 옷장 안에 잘 보관했다고 한다. 윤동주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1942년) 윤동주의 아버지는 의과대학에 입학해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아버지의 생각은 문과를 나와야 기껏 신문기자가 되는 것이다. 서촌의 문인 변영로 염상섭 모두 신문기자였던 것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권유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윤동주는 아버지의 의사를 무시하고 동경입교대학(東京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그해 고향 북간도 용정(龍井)에 마지막으로 다녀간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가 가을에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편입학하게 된다. 그런데 1943년 7월에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짐을 여객선에 싣고 배에 타려는 중에 사상범으로 일경에 체포된다. 1944년 6월, 재판에서 2년 형을 선고 받아 이듬해 규슈(九州)에 있는 후쿠오카 감옥에 수감된다. 이때 경도대학(京都大學)에 재학 중이던 고종(姑從) 사촌 송몽규도 같이 피검된다. 윤동주의 죄목이 독립운동이라고 하나 구체적인 죄과는 애매모호하다. 한인 학생모임에서 아리랑을 자주 불렀다는 죄목도 모호하다. 윤동주의 <쉽게 씌어 진 시>에 나오는 <육첩방>은 다담이가 여섯 장 깔린 일본식 방을 말한다. 자신을 구속하는 극한상황이며 어둠과 절망의 등가물일 것이다.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일본인 의사(醫師) 다케다 마사카스 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윤동주가 강제로 맞았던 주사는 생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친 관동군 산하 731부대가 혈장대용 생리식염수 일 것이다.”라고 하면서 윤동주뿐만 아니라 후쿠오카 감옥에 수감된 한국 독립 운동가들이 모두 실험대상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일제들은 윤동주에게 그 주사가 몸이 허약해 영양제 주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윤동주가 조국 해방의 기쁨을 보지 못하고 1945년 2월 16일 차디찬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해방을 겨우 6개월 남겨두고 간 것이다. 한편 정병욱은 학도병으로 끌려가 전선에서 부상을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윤동주가 옥사한 것을 알게 된다. 정병욱과 동료문인들이 유고집을 내게 된다. 정병욱이 고향 광양으로 내려가 어머니께 여쭙는다.

 

“어머니, 전에 저가 보관하라고 한 것은 어찌 되었지요.”

“그거 내가 잘 보관하고 있지”

정병욱의 어머니는 옷장에서 비단 보자기에 싼 윤동주의 시 노트를 아들에게 건네주었다. 이 시 노트의 19편의 시와 여기저기서 수집한 11편의 시를 합해 30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시집이 1948년 1월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된다. 윤동주 시인이 문학사에 <별의 시인>으로 남은 것은 정병욱 교수가 아니었다면 세상에서 그 이름이 지워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소월 시인이 스승 김억(金億)이 없었다면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지 모르듯이 윤동주도 좋은 시를 썼지만 운을 잘 타고 났다고 생각된다. 2007년 정부는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소재의 정병욱 생가를 <윤동주유고보존가옥>이란 이름으로 국가가 관리하기로 했다. 지금 그 생가엔 정병욱의 외 조카 박춘식 씨가 살고 있다.

 

윤동주는 이상(李箱))처럼 일본어로 쓴 시는 한 편도 보이지 않는다. 윤동주가 일본에서 쓴 시 <흰 그림자>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추억> <봄> 등이 윤동주가 살아있을 때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로 보내졌다 한다. 이 시들이 윤동주의 마지막 시다.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 수감될 때 갖고 있었던 상당수의 작품이 있었다고 하나 그 작품이 밝혀지지 않는 것이 아쉽다. <쉽게 쓰여 진 시>는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발표된 유작이다. 이 작품은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정지용 시인의 소개 글과 함께 실렸다.

 

윤동주의 누이동생 윤혜원이 생전에 언젠가 어느 언론의 인터뷰에서 한 증언을 일부만 여기 옮겨본다. 윤혜원은 호주 시드니에서 2011년 12월 13일에 87 세로 돌아갔다. 윤동주의 마지막 혈육은 이렇게 끊어지고 말았다. 부군 오형범과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윤혜원은 생전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언론 인터뷰 일부.

 

-‘쉽게 쓰여 진 시‘가 마지막 작품으로 보시나요.?

 

‘오빠의 마지막 작품이라기보다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마지막 작품이라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 오빠는 그 시를 쓴 후에 바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2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비록 감옥이지만, 오빠가 2년 동안 시를 쓰지 않았을 리 만무합니다.’

 

-오빠가 가끔 미워진다고 말씀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해준 것도 없이 나를 평생 귀찮게 하니까 그렇지-(웃음) 어쩔 수 없었지만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미워요. 눈치껏 일본경찰을 피해서 좀 더 일찍 고향으로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좋은 시를 썼겠습니까.?’

 

-오빠의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합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오빠도 자신의 시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겁니다. 고단한 삶을 위로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오빠의 동시를 많이 사랑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랐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했으며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던 윤동주, 희망과 용기로 현실의 괴로움을 돌파하려 했던 강한 정신이 그의 시에 내재해 있다고 여겨본다. 고독과의 투쟁, 현실을 초월하려했던 의지, 밤별을 헤면서 삶의 지향점을 별에서 잦으려고 했던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어머니가 기다리던 북간도를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고 영혼만으로 돌아간 윤동주의 무덤엔 봄이 되면 파란 잔디가 자랑처럼 무성할 것이다. 윤동주의 그 어느 시에도 제국 일본을 타도하고 무찔러야 한다는 강변의 시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윤동주의 강한 무기다. 윤동주의 시는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전범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 정병욱이 윤동주를 그리워하며 쓴 글의 일부를 올린다.

 

“동주(東柱)형이 악착스런 원수의 형벌에 못 견디어, 차디찬 돌마루 바닥에서 차마 감기우지 않는 눈을 감고 마지막 숨을 거둔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이 10년 동안 우리의 뼈를 저리게 하는 그의 시는 조국의 문학사를 고치게 하였고, 조국의 문학을 세계적인 물줄기 속으로 이끌어 넣는 데 자랑스러운 힘이 되었다. 독재와 억압의 도가니 속에서 가냘픈 육신에 의지한 항거의 정신, 아니 인간으로서의 처음이자 마지막의 권리이며 재산인 자유를 지키고자 죽음을 걸고 싸운 레지스탕스의 문학이 어찌 유럽의 지성인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일 수 있었으랴.(중략) 슬프오이다. 동주(東柱)형. 형의 노래 마디마디 즐겨 외던 <새로운 아침>은 형(兄)이 그 쑥스러운 세상을 등지고 떠난 지 반년 뒤에 찾아왔고, 형의 <별>에 봄은 열 번이나 바뀌어 졌건만, 슬픈 조국의 현실은 형의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 나게 하였을 뿐 새로운 아침 우리 다시 정답게 손목을 잡자던 친구들을 뿔뿔이 흩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형의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는 자랑처럼 풀이 무성> 하였고, 형의 노래는 이 겨레의 많은 어린이 젊은이 들이 입을 모아 읊는바 되었습니다. 조국과 자유를 죽음으로 지키신 형의 숭고한 정신은 겨레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뼈에 깊이 사무쳤고, 조국의 자유와 문학의 이름으로 더불어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빛나리니 바라옵기는 동주 형, 길이 명복하소서. 분향(焚香).” 2016년 ‘시인정신’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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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자화상"으로 보는 낯설음의 미학 2017-02-19 0 2581
248 사랑의 서정시에서 사랑을 풀다... 2017-02-18 0 2568
247 "아리랑꽃" 우리의 것과, 타민족 타지역의 것과, 가슴 넓히기... 2017-02-18 0 2370
246 "매돌"과 "한복"을 넘어서 우주를 보여주다... 2017-02-18 0 2605
245 서정시, 낯설게 하기와 보기 2017-02-18 0 4183
244 시인은 언어라는 무기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수 있다... 2017-02-18 0 2707
243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기괴하다" = "괴기하다" 2017-02-18 0 4970
242 [시문학소사전] - "르네상스"란?... 2017-02-18 0 2422
241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함께하다"의 띄여쓰기는?...(우리 중국 조선어문 문법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2017-02-18 0 2565
240 백명의 시민, 백년의 시인을 노래하다... 2017-02-17 0 2651
239 시조 한수는 마흔 다섯자안팎의 언어로 구성돼 있다... 2017-02-17 0 2771
238 시조문학의 지평선을 더 넓히자... 2017-02-16 0 3014
237 저기 폐지수레 끄는 할배할매들이 저희들의 친지입니다... 2017-02-15 0 2693
236 현대시 100년 "애송 동시" 한 달구지 2017-02-15 0 3943
235 "부끄럼"은 완숙된 시에서 우러나온 맛이다... 2017-02-15 0 2680
234 시는 만들어지는것이 아니라 몸을 찢고 태여나는 결과물이다 2017-02-15 0 2391
233 아일랜드 시인 - 사뮈엘 베케트 2017-02-14 0 3741
232 국어 공부 다시 하자, 시인들을 위하여!... 2017-02-14 0 2535
231 미국 신문 편집인, 발행인 - 퓨리처 2017-02-14 0 3934
230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방방곳곳"이냐? "방방곡곡"이냐!... 2017-02-13 0 4094
229 시작에서 좋지 못한 버릇에 길들면 고치기가 힘들다... 2017-02-13 0 2744
228 방방곡곡으로 못가지만 시로써 아무 곳이나 다 갈수 있다... 2017-02-13 0 2949
227 당신의 도시는 시속에 있어요... 친구의 시인이여!... 2017-02-13 0 2635
226 추천합니다, 노벨문학상 관련된 책 50 2017-02-13 0 2559
225 저항시인 윤동주에게 "명예졸업장"을... 2017-02-13 0 2488
224 동요동시 대문을 열려면 "열려라 참깨야"라는 키를 가져야... 2017-02-11 0 3266
223 동시를 낳고싶을 때에는 동시산실에 가 지도를 받으라... 2017-02-11 0 2422
222 동시인이 되고싶을 때에는 그 누구인가의 도움을 받고싶다... 2017-02-11 0 2766
221 상(賞)에 대한 단상 2017-02-11 0 2459
220 젊은 조선족 문학도 여러분들에게... 2017-02-11 1 3227
219 시란 "자기자신이 만든 세계를 깨부시는" 힘든 작업이다... 2017-02-11 0 2555
218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 우리 애들도 발음 좀 정확히... 2017-02-10 0 2758
217 시와 삶과 리듬과 "8복" 등은 모두모두 반복의 련속이다... 2017-02-10 0 2436
216 혁명이 사라진 시대, 혁명을 말하는것이 어색한 시대... 2017-02-09 0 3056
215 세계 47개 언어로 엮어서 만든 "인터내셔널가" 2017-02-09 0 2788
214 시인 백석 한반도근대번역문학사에 한획을 긋다... 2017-02-09 1 3600
213 불후의 명곡 "카츄샤"는 세계만방에 울러 퍼지다... 2017-02-09 0 3626
212 "카츄샤"는 떠나갔어도 "카츄샤"의 노래는 오늘도 불린다... 2017-02-09 0 4056
211 시의 형태는 시가 담겨지는 그릇과 같다... 2017-02-09 0 2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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