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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방네] - 조선족 민속 무형문화재 얼쑤ㅡ 절쑤ㅡ...
2018년 10월 24일 22시 42분  조회:3471  추천:0  작성자: 죽림
조선족민속결,
한 귀향농민이 이루어낸 무형문화재
(ZOGLO) 2018년9월18일 

     2011년 통계를 보면 중국에는 국가급 무형문화재 1,219건 성급 무형문화재 7,109건이 선정되여 무려 8,328건에 달하는 무형문화재가 전해지고있는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중국의 전통 매듭공예인 중국결(中国结)은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면서 중국 전역에서 장시기 전해져 온 민간공예이다. 그런데 실을 주요 재료로하는 이 수공예가 요즘 연변조선족민속과 접목되면서 새로운 무형문화재인 “조선족 민속결”을 탄생시키는 “기적”을 창조하여 사람들의 각광을 받고있다. 이 새로운 무형문화재인 “조선족민속결”을 탄생시킨 주인공이 바로 가난한 귀향 농민 박경훈(朴京勋)씨이다.

 



룡정시 민속박물관에서 민속결을 창작하는 박경훈씨

  1, “백락”과 “천리마”

  진달래광장의 야시장 난전에서 귀엽고 깜찍한 민속 소품들을 팔고있던 박경훈씨를 발견한 사람은 룡정시 로간부국의 라송화(罗松花) 국장이였다. 천리마를 알아본 백락처럼 그는 박경훈씨의 재능을 “부활” 시키는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어느날 아들을 데리고 연길 진달래광장 야시장에 나갔던 라국장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문화 소품들에 매료되였다.

  조선족이 좋아하는 빨간 “고추”요, “옥수수”가 있었고 조선족 로동도구인 “소보치”가 있었으며 조선족의 “북”이나 “새장구”도 있었다. 귀엽고 깜찍하게 만들어진 알록달록 크고작은 모형은 그처럼 정답고 사랑스러웠던것이다.

 

 

 

  중국결의 기술로 새로 짠 조선족 민속공예품들

  “이거 얼마합니까? 한국거 맞지요?”

  “아,아임다. 내손으로 직접 만든검다!”

  “정말임까?! 곱기두 해라~”

  라국장은 거친 사나이의 투박한 손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런 남자의 큰 손에서 어찌 이 같이 정교한 물건이 만들어질수있단 말인가?!

   [음향: “15년도 8월 연길에 집이 있으니 진달래광장 예스에 나왔다가 내가 파는 물건을 보고 저 ‘소보치’ 샀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룡정에 와서 사람들에게 기술을 배워줄수없는가?’했습니다. 저도 그가 연길 사람인줄 알았는데 후에 알아보니 룡정 로간부국 국장이였습니다.”]

  한달뒤, 연길 시내에서 자연공예품에 수요되는 재료를 구할수없자 박경훈씨는 고향인 룡정시 신화촌으로 돌아왔다. 옥수수 껍질도 얻고 버들도 얻어 특색있는 자연공예품을 만들어 볼 생각에서였다.

  박경훈씨는 룡정에 왔던김에 “기회가 되면 로간부국으로 찾아오라”던 라국장이 생각나서 찾아가 보았다.

  다시 만난 둘은 모두 룡정사람인것을 알고 더 반가워했다.

   [음향: “찾아가니 ‘원래 룡정사람이였는가?’해서 룡정사람이라고했습니다. 그러니 ‘더 가까워졌네’라고 합데다......”]

  이듬해인 2016년 라송화 국장은 룡정시문화보도출판국 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라국장은 곧 박경훈씨를 불러 그를 문체국에 받아둘 계획을 이야기했다.

   [음향 “승진하여 나를 찾아 나의 정황을 물어보던게 ‘크게 해결하지 못하겠지만 일상 생활을 할수있게 하겠다’고했습니다.”]

  라국장은 문체국의 항목으로 박경훈씨의 재능을 잘 발휘시키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는 우선 박경훈씨를 공익 일터인 문체국에 배치하기로 마음먹고 인사국에 전화를 했다.

   [음향 “내 앞에서 련계하면서 ‘안된다’고하자 ‘이 사람은 기술항목인데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기술을 잃어버린다. 정책도 적당히 써야한다’고 했습니다. 그후 시위에 저의 자료를 올려보내구 비준을 받아 16년 7월부터 여기 문체국 민속박물관에 출근하게 되였습니다.”]

  박경훈씨가 나이 조건이 부합되지 않는다고 인사국 국장이 답복하지 않으니 라송화 국장은 이는 룡정시의 중요한 기술항목이고 또 박경훈씨도 더 없는 기술인재이기에 꼭 유치해야한다고 주장하였던것이다. 그리고 관련 자료와 보고를 시당위원회에 올려보내 비준을 받고 드디어 그에게 일자리를 해결해주었던것이다. 그리하여 박경훈씨는 일반 농민으로부터 로임을 받는 공직 일군이 되였다. 농민으로부터 그것도 가난한 시골 농민으로부터 도시 문체국의 일군으로 되기까지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였다.

  박경훈씨는 모든 정력을 몰부어 열심히 신제품 개발에 힘쓸 각오를 다지며 부지런히 일했다.

  그는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았다. “나에게도 이런 날이 있다니!” 부득이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가 입에 풀칠이나 할 각오로 덤벼들었던 중국 전통매듭 강습! 중국결 강습반에 다니던 그 어려웠던 나날들을 생각하니 지금도 마음이 울컥해났다.

  2, 타향살이

  2005년 오랜 병으로 고생하던 박경훈씨는 허리까지 다쳐 집에서 그냥 몸조리를 하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누님의 전화를 받았다. 글쎄 누님의 아들이 료녕성 반금시에서 차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쳤다는것이였다. 그리고 “다친” 다리는 괜찮은데 와서 기타 관련문제들을 처리해 달라는것이다.

  누님은 자기는 녀자니 어찌 할지 모르겠다면서 이웃집에 가서 겨우 돈 6백원을 꾸어 동생의 손에 쥐여주면서 어찌하나 아들을 데려와 달라고 신신 당부했다.

  “설마 차 사고일까?”하면서도 누님이 하도 당황해하면서 부탁하니 박경훈씨는 그냥 대답하고말았다.

   [음향 “누님의 아들이 료녕성 판금에서 곤경을 치렀는데 다 알겠지만 다단계 판매에 걸려 들었던것입니다. 갈때도 다단계라는걸 예산하면서 갔습니다. 조카를 만나 자초지종 들어보니 다단계 맞았습니다. ‘다 걷어치우고 가자, 네만 만원 미쪗으면 됐다, 우린 가자’했지만 조카는 안 오겠다고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욕하고 때려서 될 일도 아니였습니다.”]

  산설고 물선 타향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고집스러운 조카를 버려두고 혼자 돌아올수도 없는 일이였다. 박경훈씨는 그냥 기다리고있었다. 굶어죽을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였다.

  낯선 타향에서 돈도 힘도 없는 그로서는 다른 별 방법이 없었던것이였다. 남은것은 악뿐이였다!

  얼마후 다단계업자들이 회원수가 많은 사평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였다. 조카도 따라 가야한다고 알리자 박경훈씨도 할수없이 사평으로 따라 가게 되였다. 그는 사평에서 가장 싼 세집 하나를 맡고 언제면 조카를 설득해 고향에 갈것인가만 궁리하고있었다.

   [음향 “세를 맡고 사는데 석탄을 사고, 감자 사고하니 돈이 떨어지니까 일거리를 찾느라 광고를 보게 되였는데 거기에 학습반한다는 광고가있었습니다. 기술을 배울뿐만 아니라 기술을 배우는 동안 만든 물건들도 다 구매한다고했습니다. 그래 ‘남자도 할수있는가?’ 해서 할수있다는 답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박경훈씨는 일자리라도 하나 찾아볼 생각으로 우연히 중국결 학습반을 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였다. 기술을 배워줄뿐만 아니라 학습반에서 만든 제품을 통일적으로 모두 구매한다고했다.

  기술도 배우고 물건도 만들어 팔고하면 생계는 유지할것 같았다.

  박경훈씨는 사평의 6선 뻐스를 타고 광고를 따라 가보았다.

  작은 방 벽에는 온통 중국의 전통매듭이 가득 걸려있었다. 너무 아름차서 그는 도저히 배울 엄두를 못내고 돌아섰다.

  돌아와서 세집에 누웠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갈마들었다.

  ‘연변의 수공예는 다 한족들의 공예인데 이 기술을 배워 우리 조선족의 민속과 결부시켜 보면 어떨까?’하는데 생각이 미치게 되였다.

  닷새후 박경훈씨는 다시 그곳을 찾아가 중국매듭 공예를 배우자고했다.

  학비 5백원을 냈다.

  한족 공예선생은 류복거(刘福巨)라는 50대 사내였다. 그는 반색을 하면서 자기에게서 재간을 배우고있는 사람은 일년에 2백명도 넘다고했다. 그런데 박경훈씨처럼 신중하게 결정 내린 사람은 없다면서 꼭 성공할거라 믿는다고 힘을 실어주었다.

  학습반의 사람들은 하루이틀 견지하다 그만 두는 사람이 허다했다. 하지만 박경훈씨만은 이를 악물고 견지하였다. 그는 사평의 영웅광장을 지나 왕복 13킬로메터 거리를 두달반이나 매일 다녔다.

  학비를 내고나니 남은 돈은 몇십원밖에 안되였다.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심지어 뻐스비도 아껴 그 먼 거리를 도보로 다닐때도 있었다. 그래도 얼마 안가서 돈이 바닥이 났다.

  돈이 뚝 떨어지고나니 쌀도 살수없었다. 그냥 겨울나이로 사두었던 감자 한자루뿐이였다! 옷도 올때 입었던 춘추내복뿐이고 솜옷은 하나도 없었다!

  박경훈씨는 감자로 끼니를 떼우면서 그냥 쓰러지지 않을정도로 하루하루 비텨 나갔다.

  매듭공예를 배워주던 류복거 선생은 자기 보다도 몇살 우인 박경훈씨가 솜옷이 없어 추위에 떠는것을 보고 안쓰러워 자기의 적삼을 내 주기도했다.

  두달반후 양력설이 되자 박경훈씨는 고향에 년로한 어머니도 계시니 가야한다면서 돈 50원을 꾸어가지고 설쇠러 연변에 왔다.

   [음향 “설을 쇠구 다른집에서도 기술을 배워보려고 2006년 다른집에서 더 배웠습니다. 두번째 집에서 배울때는 농업 대출을 받아가지고 학비를 해결했습니다.”]

  연변에서 설을 쇠고나니 기술을 더 배울 생각이 굴뚝 같았다. 자기의 기술이 어느 정도라는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박경훈씨였다. 그는 기술을 조금만 더 익힌다면 조선족 민속과 결부시키려던 자신의 꿈을 실현할수있다고 믿었던것이다. 그래 한번 제대로 해 볼 생각으로 농업대출까지 맡아서 다시 사평으로 떠났다.

  다시 사평에 온 박경훈씨는 기차역부근의 최하층 려관에 들면서 만두 몇개씩 사서 때마다 만두 하나씩 먹으며 지냈다. 드디어 그는 견본만 있으면 모든걸 다 만들어낼수있는 훌륭한 재능을 익혀냈다. 그리고 모든 중국결 작품들을 사진찍어서 간직해 두었다. 머리속에 훌륭한 견본이 많아야 좋은 작품을 만들수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독특한 물건을 만들어내고싶었던것이다.

  이 정도면 될거라고 생각한 박경훈씨는 강습 과정을 수료하고나서 곧 귀향하기로 했다. 그는 오는 길에 심양에 들려 재료로 쓸 색실도 도매로 가득 사가지고왔다.

  3. 끝나지 않은 타향살이

  재간을 익혔으나 그의 재간을 알아줄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는 먼저 몇가지 소품을 만들어 가지고 집 근처에서 팔아보려고했으나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음향 “룡정 3중 부근에서 물건을 팔았는데 룡정에서 근본 팔지 못하게 하여 연길에 갔습니다.”]

  할수없이 그는 중심도시인 연길로 가 보기로했다. 거기에는 전국 각지 관광객들이 많으니 알아줄 사람이 혹시 있으랴 싶어서였다.

  그의 타향살이는 계속 되였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하남의 옥수국수를 눌러 한국에 수출하는 집에서 한달간 일하면서 지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7년 1월부터는 연길시 하남에서 내몽골의 림지를 대리 판매하는 마음씨 좋은 녀성 신경리에게서 2년 동안 잔심부름을 하면서 지냈다.

   [음향 “물건을 팔때도 그렇고 그분이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공공뻐스 비용 다 그 녀자가 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일은 쉽게 하면서 그래도 지낼수있었습니다.”]

  그냥 마음씨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쉽게 지낼수는 없었다. 그는 자립해야했고 고생스럽게 익혀두었던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있어야했다.

   [음향 “나는 신경리에게 ‘가난구제는 나라에서도 못하는데 신경리가 이렇게 도와주는건 고맙지만 장구지책이 아닙니다. 저도 나가서 뻐덕이겠습니다!”라고했습니다]

  박경훈씨는 다시 연길시 철남에 세를 맡고 조금씩 시간을 내서 중국결을 기초로 머리속에 계속 생각해두었던 조선족 특색의 “옥수수”며 “고추”를 만들어 조금씩 내다 팔면서 지냈다.

  여름에는 그래도 아껴먹고 아껴 쓰면서 지낼수있었는데 겨울이 문제였다. 필수품인 쌀을 사고 전기세를 내고나면 석탄 살 돈이 없었다. 고민고민하다가 석탄을 사지 않기로했다. 그런 환경속에서 박경훈씨는 물건을 들고 다니며 팔며 지냈다.

  4. 다시 귀인을 만나다

  어느날 박경훈씨는 모아산에 가서 물건을 팔아 볼 생각으로 모아산 유원지를 찾아 갔다.

  연길시 시민들이 많이 선호하는 모아산 유원지는 늘 등산객들로 붐볐다. 박경훈씨는 관리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물건을 팔아야했다. 그러던중 거기서 연변건설국에서 일하는 김진우(金振宇) 주임을 만나게 되였다.

  모아산 공원 관리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관광객들에게 소품을 팔고있는 박경훈씨를 본 김진우 주임은 우선 그의 뛰여난 손재간이 마음에 들었고 또 그의 가긍한 처지가 마음이 아팠다.

  김진우 주임은 호주머니를 털어 돈 4백원을 내놓으면서 소품들을 자기가 다 사겠다고했다. 그리고 이 물건들을 가져다 자기 방식대로 선전해 보겠다고했다.

  남달리 조선족 민속에 관심을 보인 김주임은 조선족 민속과 관련해 이야기를 꺼냈는데 민속과 관련해 둘의 견해가 비슷하였다. 박경훈씨도 2004년부터 조선족민속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많은 책을 읽었고 또 중국결에 조선족 특색을 부여한다는 생각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오랫만에 지기를 만난 기분이였다. 둘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김진우 주임은 평범한 농민인 박경훈씨가 이런 생각을 가졌다는데 탄복했던것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신세를 질수없다고 거부하던 박경훈씨는 드디어 김진우 주임의 호의를 받아들였고 김주임은 그의 물건을 모두 사 가지고갔다.

  그해 9월의 어느 비오는 날이였다. 박경훈씨는 자기가 정성들여 만든 물건 32개를 들고 뻐스를 탔다. 하남에 가지고 가 팔려했는데 글쎄 그날따라 뻐스에서 두개가 팔렸다.

   [음향 “’물고기’가 두개 팔렸다. 10원씩했는데 공공뻐스에서 팔렸다. 재수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박경훈씨가 하남에서 물건을 진렬해놓고 한쪽에서 열심히 실로 매듭을 짜고있는데 전화가 왔다.

  김진우 주임이였다. 그는 다른 인사는 한마디도 없이 그냥 전화번호 하나를 알려주며 련락해 보라고했다. 전화번호를 적을수없어 억지로 기억했다가 련락을 하자 한 녀성이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자치주 관광국이라면서 견본이 있으면 가지고 오라고했다.

  박경훈씨는 대뜸 자치주 관광국으로 달려갔다.

  3층 비서실에 가서 전선옥(全先花)라는 녀성 사업일군을 만났다. 그는 견본을 보더니 물건이 너무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다고 치하하면서 곧바로 4층의 국장실에 올라가 보고하였다.

  자치주 관광국 주성문(朱成文) 국장은 김진우 주임에게서 소개를 다 들었다면서 견본으로 가져 온 깜찍한 물건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족 가운데도 중국매듭을 한족 못찌 않게 짜는 사람이 나타나 정말 반갑다”고 말했다. 특히 소품 “소보치”를 만지작 거리며 조선족 특색이 물씬 풍겨난다고 치하하였다.

  주성문 국장은, 유감스럽지만 이 소품들은 어디까지나 반성품이라면서 대량 생산이 따라 가야하고 포장이 따라가야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연변에서는 아무래도 민족특색을 살려야한다면서 자연공예쪽으로 생각해는것이 어떠냐고 권유했다.

   [음향 “돈을 안들이고 머리를 쓰면 재료를 가지고 만들수있지 않는가했습니다. 그래서 소보치를 만들어 보고 쪽지게를 만들고 또 조선족 “항아리”라든지 “물동이” 같은걸 만들어보았습니다. 민속 공예쪽으로 생각하니 다른 길이 열리는듯했습니다. 물론 물건들은 이전것보다 잘 팔리지 않았지만 물건 그 자체가 예술이고 문화재로 되는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잘 팔리지는 않지만 민속과 접목하기에 더 힘썼습니다.”]

  자치주 관광국 비서실의 전선화는 박경훈씨의 소상품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음향 “민족특색이 있는 기념품이라면 연변에서 한국 상품도 찾아볼수있고 또 조선상품도 볼수있습니다.다만 아쉽게도 연변것은 없었습니다. 박선생님은 바로 이 공백을 메워준것입니다. 중국매듭은 표지적인 기술입니다. 그렇다면 이걸 가지고 어떻게 우리 연변특색이 있는걸 만들수있는가 생각했던것입니다. ‘옥수수’도 만들고 ‘조롱박’도 만들고 ‘항아리’도 만들고 조선족 똬리도 만들고 우리 민속이 살아나게 되였습니다.박선생님은 우리 무형문화재를 탄생시킨것입니다.”

  전선화는, 2009년부터 새 지도자가 오면서 관광국에서는 관광상품 개발에 힘을 기울렸다고 소개했다.

  관광상품이라고하면 한국의 것도 있고 조선의 것도 있지만 연변의 것은 없었다. 연변의 민족특색이 있는 관광상품을 개발해야하는데 이것이 공백이라는것이였다. 바로 이 시기에 박경훈씨의 작품이 자치주 관광국의 눈에 들었던것이다.

  경제개발의 선봉격인 관광개발이 본격화되자 연변에도 여러가지 축제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축제가 있으면 박경훈씨는 관광상품 매장을 차리고 알록달록한 민속제품들을 전시하는 한편 또 직접 현장에서 수공으로 물건을 짜면서 많은 관객들의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그를 바라보았고 그의 손재간에 놀랐으며 정교하게 만들어지는 물건들에 매료되군 하였다.

  현장의 분위기를 더 고조시키기 위해 관광국에서는 수공예 표현을 할수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기까지 하였다. 박경훈씨는 현장에서 자신의 손재주를 한껏 발휘하면서 “새장구”요, “바게쯔”요, “북”이요, “소보치”, “고추”, “옥수수”, “락화생” 등 정교한 소품들을 만들어냈다. 관광객들은 기꺼운 심정으로 그의 재능을 관람했을뿐만 아니라 자기가 마음에 드는 소품들을 선정해 기념으로 사가군 하였다.

  중국 전통매듭과 조선족 특색이 잘 결부된 박경훈씨의 수공예품은 점차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민간 수공예 무형문화재로 자리를 굳혀가게 되였다.

  박경훈씨는 그동안 선후하여 2009년에 두만강아리랑 “빙설축제”행사에서 “최우수 매듭 수공예인” 칭호를 수여받았고 2013년 중국관광상품대회에서 그의 조선족 로동도구중 하나인 “소보치(簸箕)”가 출품작으로 선정되기도했다. 그리고 2017년 길림성관광상품전시, 제1회 연변조선족문화관광축제 관광상품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했다.

 

 

  자치주광광국에서는 연변 각지의 관광산업을 활성화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박경훈씨를 스승으로 청소년들이나 장애자들에게 수공예 재능을 조금씩 강습시키게 하였다. 현장에서 배워주고 또 여러 사람이 배우면 더 많은 관객을 끌수있을뿐만 아니라 수공예를 더 널리 선전할수있다는 생각에서 였다.

  박경훈씨는 그야말로 이곳저곳에서 알아주고 찾아주는 “보배”로 되였다. 각지 문화분야에서 찾아와 전통공예품을 달라고했고 장애인협회에서도 찾아와 장애인들을 강습시켜달라하였다. 장백이나 길림통화지역에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와 박경훈씨가 만들어 놓은 “쪽지게”라든지 “물독” 같은 전통공예품을 구입해갔다.

  2015년 연변에도 고속철도가 있게 되였다. 길림시로부터 훈춘시로 통하는 길훈고속철도가 개통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훈춘시는 사상 첫 기차역이 있게 되였다. 철도부문에서는 이 뜻깊은 날을 기념하기 위해 기차역을 아름답게 장식함과 더불어 연변의 특색, 조선족 특색을 강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도 소개를 듣고 박경훈씨를 찾아왔다.

  음향 “15년도 동북아 박람회에 갈때 요청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 박람회에서 돌아온후 요구대로 부채 술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19일까지 밤낮없이 짰습니다. 그런데 20일이면 고속철도 개통일이기에 꼭 완수해야했습니다. 그래 하던걸 그냥 차에 싣고 훈춘역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밤도와 짜구짜서 드디여 제시간에 만들어냈습니다.”]

  요구대로 박경훈씨는 집에서 술을 짰는데 18일까지 반정도밖에 완수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일에 철도부문에서는 전용차를 내서 박경훈씨와 짜던 술을 다 싣고 훈춘기차역 현장에 갔다. 현장에서 마무리 작업을 하게 되였던 것이다. 박경훈씨는 이튿날 고속철 개통 경축행사에 영향주지 않기 위해 밤을 새우며 짜고짜고 또 짰다.

  가느다란 실로 주먹만큼씩 굵고 큰 술을 만든다는건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였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구 끈질기고 부지런한 그런 장인정신이 없이는 도저히 해낼수 없는 일이였다.

  완성된 작품을 보면서 철도부문 관계자들은 경탄을 금하지 못했다.

  고속철도를 리용해 연변을 찾는 손님들과 고속철을 타고 세상 구경을 나가는 현지 군중들은 모두 기차역에 걸린 중국풍의 대형 부채와 조선족특색의 부채 술을 볼수있었다.

  5. 새 도전

  연변조선족자치주 무형문화재인 조선족 민속결을 만드는 예인 박경훈씨는 그동안 연변 전역을 전전하면서 기술을 전파하였고 각지의 문화전통과 자신의 기술을 접목시키는 공예품 창작에 심혈을 몰부었다.

  연변 각지에 축제가 있는곳이면 언제나 그의 모습을 찾아 볼수있었고 축제의 중심에는 언제나 산뜻한 민족 복장차림을 하고 민첩한 손을 부지런히 놀리며 작품을 창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많은 구경군들이 몰렸고 또 그의 재간을 배우는 학도들이 있었다.

  많은 영예를 안아왔고 명성도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박경훈씨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또 만족할수도 없었다. 중국의 전통매듭 기술을 조선족 민속과 결부시키려던 그의 꿈을 실현하자면 아직 멀었다고한다. 그리고 공예품도 아직 수정할게 많다고한다.

   [음향 “매듭은 거의 된것 같습니다. 코바늘 뜨개도 뜰수있는데 시간이 없습니다. 자연공예쪽으로 발전해야합니다. 룡정박물관 돌아보고 아직 내 생각하는 물건도 박물관에 없는게 많습니다. 기회만 되면 다 만들어 놓겠습니다. 조각칼 등 도구를 기본상 갖추었는데 창고와 작업실이 문젭니다. 큰 물건은 만들다가 그대로 두지 않으면 안될때가 많습니다. 거두지 못하거든요. 그러니 작업실이 있어야합니다. 창고도 그렇습니다. 재료들이 비 맞으면 안되니 꼭 있어야하지요.”]

  박경훈씨가 그동안 만들어 놓은 조선족 쪽지게는 남성용, 녀성용, 어린이용까지 구전하다. 그리고 쪽발기(썰매)도 있었다. 박경훈씨가 소개한데 의하면 얼마전 장백현에서 지게, 발구, 물동이 등 4천원에 달하는 민속공예품을 사가기도 했다.

  룡정시 동부 신화촌에 살고있는 박경훈씨는 지금까지 홀로 살아오면서 수공예품 창작에 몰두하고있다.

  룡정신화촌에 있는 박경훈씨 집은 작은 단층 벽돌집이였다. 마당에 재료로 쓸 버들햇순을 말리고있었고 기타 각종 창작품과 재료들은 집에 그냥 넣어두기 때문에 크지 않는 집의 방 하나는 그냥 “창고”로 변해버렸다.

  마당 한켠에 리는 버들 햇순은 광주리를 트는 주 재료라고한다.

   [음향 “버들 햇순인데 가지에 잎하고 껍질을 벗기면 이렇게 나옵니다. 가마에 넣어서 삶아서 베껴야합니다. 불릉불릉 끓게 해야합니다. 광주리를 틀때면 마른거 다시 가마에 넣고 끓게 한 다음 삶아서 한동안 퍼지워서 광주리를 틀어야합니다. 하나 틀자면 버들 햇순을 두번 가마에 넣어야합니다. 광주리 하나 만들자면 버들가지가 백 4,50개 들어갑니다.”]

  자연공예를 하는데 필요되는 재료들이 농촌에 많기 때문에 다시 농촌에 왔다는 박경훈씨다. 하지만 광주리 하나 트는데 수요되는 버들 햇순은 껍질을 벗겨 오래동안 말리워야하고 말리운 다음 다시 그것을 물에 담궈 두었다가 나른해진 다음 광주리를 튼다는것이다. 반복적인 일이 얼마나 많은지 상상하기 어렵다.

  박도 마을의 경험많은 농민에게서 배웠다고한다. 박이 자랄때 자주 쓰서 주어야하고 줄기로 영양분이 올라가도록 해주어야 박이 딱딱하고 곱게 열매 맺는다고한다. 또 이런 박이라야 공예품을 만드는데 쓸수있다는것이다.

  그냥 중국결을 짜는것만이 아니였다. 매듭을 짜는 기본 기술이면 박경훈씨는 웬만한 물품을 다 실로 짜서 더 곱게 만들어낼수있었다. 그리고 버들이나 짚 같은 재료를 리용해 실처럼 다양한 물건을 짜낼수있었다. 그는 지금 실 대신 버들이나 짚을 비롯한 기타 재료들을 리용해 조선족특색의 민속 공예품을 창작하고있다.

  지게, “물독”, 방석, 똬리, 광주리, “항아리” 등 자연공예품들이 줄줄이 창조되고있다.

  새로운 무형문화재가 탄생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흘러간 세월 우리민족의 삶이 그대로 묻어있었다. 그가 만들어내는것은 더는 “상품”인것이 아니라 엄연한 예술이고 작품인것이다.

  올해 9월 중순 산동성 제남시에서 제5회 중국무형문화유산박람회가 성대히 열리게 된다. 특히 박람회에서는 전통공예 경연대회를 진행하게 되는데 박경훈씨는 모든 예선전을 마치고 9월 13일과 14일에 진행되는 결승단계의 경연에 참가하게 된다. 결승전은 창작품을 제출하고 또 현장에서 기타 예인들과 함께 작품을 만드는것으로 승부를 가린다고한다.

  온갖 고생을 다 이겨내고 꾸준히 장인정신으로 공예품을 창작해나가고있는 박경훈씨가 더 훌륭한 성과를 이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그의 인생길도 더 생기로 차 넘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듯이 어찌 고생만 하겠는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중앙인민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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