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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백가묵가 - 묵자
2019년 11월 20일 22시 24분  조회:3463  추천:0  작성자: 죽림

철학사전

묵자

 

 ]

묵자

묵자

출생 - 사망 BC 479년경 ~ BC 381년경
이명 본명 : 적()
직업 사상가
분야 묵가
국적 중국
시대 전국시대 초기

이름은 적(). 제자백가의 하나인 묵가의 시조로 전국시대 초기에 활약한 사상가. 철기의 사용으로 생산력이 발전하자, 농민, 수공업자, 상인 등은 그에 힘입어 신흥계급으로 성장하고 점차 종래의 지배계급이던 씨족 귀족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신흥계급의 입장에 서서 씨족 귀족의 정치와 지배에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그의 사상을 전개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천하()에 이익되는 것()을 북돋우고(), 천하의 해가 되는 것()을 없애는()' 것을 정치의 원칙으로 하고, 그 실현 방법으로서 유능하다면 농민이나 수공업자도 관리로 채용하는 '상현'(), 백성의 이익에 배치되는 재화ㆍ노동력의 소비를 금지하는 '절용'(), 지배자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약탈이나 백성 살상의 전쟁에 반대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서로 높이는 '비공'()과 '겸애'()를 주장했다. 또 이러한 원칙과 방법에 기초를 둔 현실비판 속에서, 논리적 용어, '유'( : 보편), '고'( : 까닭, 이유)의 개념 등을 발명, 구사하여 논리적 사고를 풍부히 했다.

주요저서

  • 墨子 5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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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의 동상

묵자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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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네이버 지식백과]묵자 [墨子] (철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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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묵자

사랑의 정치 철학과 논리의 발견

 ]

민중 편에 서서

우리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여 진()나라를 세우기 이전의 혼란의 시대를 선진()시대 혹은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탐욕, 의심, 모략, 갈등, 살육의 시대였다. 춘추시대에는 제후국들이 명목적이나마 주()나라를 인정하고 있었으나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제후국들은 천하를 차지하려고, 혹은 다른 제후국들에 병합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전쟁의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삶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바로 일반 민중이다. 제후들의 탐욕과 강박관념에 의해 야기되었던 수많은 전쟁과 전투에서 살육되었던 사람들은, 제후들을 대표로 하는 위정자들이라기보다는 바로 이 힘없는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전국시대에 습관적으로 자행되던 전쟁에 대해 단호한 반대 입장[]을 보인 철학자이자 실천가가 탄생하는데, 그가 바로 묵적()이다. 전국시대에 있어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부당한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을 함축한다. 따라서 묵자와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강력한 공동체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공동체는 묵자가 죽은 뒤에도 계승ㆍ유지되었는데 그 지도자를 거자()라고 했다. 제자백가들 중 유일하게 선생의 이름을 학파의 이름으로 사용했던 묵가()라는 사상가 집단은 바로 이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묵자』의 10가지 주제

『묵자』는 묵자를 포함한 묵가들 전체의 사유와 논쟁의 기록이다. 묵가들의 철학적 주장들은 흔히 10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이 10가지 주제들은 각각 『묵자』를 구성하는 편명이기도 하다.

1. 상현() : 현명한 사람을 숭상해야 한다.
2. 상동() : 윗사람을 높이 받들며 따라야 한다.
3. 겸애() :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
4. 비공() : 전쟁을 금지해야 한다.
5. 절용() : 재정 지출을 절제해야 한다.
6. 절장() : 장례를 간소화해야 한다.
7. 천지() : 하늘의 뜻을 따라야 한다.
8. 명귀() : 귀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9. 비악() : 사치의 상징인 음악을 금지해야 한다.
10. 비명() : 주체적 노력에 반하는 숙명론을 거부해야 한다.

얼핏 살펴보아도 이 열 가지 주제들은 심각한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주장이, 윗사람의 뜻을 숭상하고 따라야 한다거나 하늘과 귀신의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수평적인 차원의 사랑인 '겸애'는, 수직적인 독재론이나 하늘과 귀신의 의지를 강조하는 초월적인 종교론의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묵자』를 자세히 읽어 보면 이러한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이 열 가지 주제 가운데 핵심 주제인 '겸애'이며, 다른 주제들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맹자』와 『장자』, 『한비자』, 『여씨춘추』, 『회남자』 등에서 묵가의 핵심 주제로 '겸애'를 규정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묵자』의 「겸애()」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반드시 혼란이 일어나는 까닭을 알아야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게 되고, 혼란이 일어나는 까닭을 알지 못하면 곧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마치 의사가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과 같다. 반드시 병이 생겨난 까닭을 알아야만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며, 병이 일어난 까닭을 알지 못하면 곧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다.

묵가는 세상에 혼란이 발생하는 원인을 바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현실에서 찾았다. 결국 문제는 사랑인 것이다. 공동체의 성원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이 발생했다면, 결국 공동체의 성원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게 할 수만 있다면 혼란은 종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묵가의 모든 사유는 어떻게 하면 공동체 성원들이 상호간의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있다.

사랑의 정치철학

묵자의 '겸애'는 '차별이 없는 사랑'이나 '상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묵가의 '겸애'를 기독교적 사랑과 유사한 '박애()'의 의미로 속단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러나 겸애는 현존하는 정치적 질서나 위계적 구조를 긍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남의 부모를 나의 부모처럼 여기고, 남의 집안을 나의 집안처럼 여기고, 남의 도읍을 나의 도읍처럼 여기고, 남의 국가를 나의 국가처럼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가족 제도나 정치 질서는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단지 '나'와 '남'의 차별을 없애자는 것이지 모든 사회적 차별을 없애자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묵자의 '겸애'란 평등한 사랑이라기보다는 불평등한 사랑이라고 규정될 수 있겠다.

다음으로 겸애라는 개념 속에 들어 있는 공리주의적1) 성격을 살펴보자. 묵가의 사랑은 아끼고 사랑하는 단순한 감정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물질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묵가에게 있어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물질적으로 이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겸애' 혹은 '겸상애()'2)라는 묵가의 주제는 항상 '교상리()'3)라는 표현과 연용해서 사용 한다. 예를 들어 참혹한 살육으로 점철되었던 전국시대 민중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을 것인데, 묵가는 민중의 고통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굶주린 자가 먹을 것을 얻지 못하고 추운 자가 옷을 얻지 못하며 수고하는 자가 휴식을 얻지 못하는 것, 이 세 가지가 백성들의 커다란 환난이다.

군주로서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반드시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추운 자에게 옷을 주어야 하며, 노동이나 병역으로 지친 자는 쉬게 해 주어야 한다.

백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백성에게 가장 유효한 이익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군주다. 그렇기 때문에 묵가는 "윗사람을 높이 받들며 따라야 한다"는 독재론을 피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독재를 지향하는 전체주의자들이라서가 아니라, 군주만이 유일하게 실질적인 재력과 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우리는 『묵자』의 나머지 네 주제, 즉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고 재정 지출을 절제하도록 하며, 장례를 간소화하고 음악을 금지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군주가 겸애를 실천하려면 백성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허례허식에 드는 비용을 줄여야 하고 재정 지출을 절제해야 하며, 백성의 삶 자체를 고통에 빠뜨리는 전쟁도 수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청된 초월적 종교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묵가에게 있어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물질적 이익을 준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자임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물질적인 이익을 누군가에게 제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준다면 그의 삶은 궁핍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경제학적 원리다. 이러한 점에서 묵가의 고난에 찬 실천 과정이 유래한다.

『장자()』에서는, 묵가의 무리가 "대부분 짐승가죽옷과 베옷을 입고 나막신이나 짚신을 신고서 밤낮을 쉬지 않았으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삶의 표준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 다시 말해 남에게 물질적 이익을 제공하려는 사람은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면 자신은 굶어야 한다. 헐벗은 자에게 따뜻한 옷을 주면 자신은 춥게 지내야만 한다. 삶에 지친 사람을 대신하여 노동을 하면 그 자신이 피로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들이 묵가의 무리였던 것이다.

묵가의 무리는, 이러한 희생이 너무나 힘든 일이긴 하지만, 사회의 혼란과 갈등을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확신했으며 스스로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희생 정신은 이기심이나 탐욕, 질투,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위정자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여기서 묵가는 위정자들로 하여금 겸애의 정신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 새로운 논리 장치를 고안한다. 그 논리 장치가 바로 하늘과 귀신의 의지를 긍정하는 초월적 종교론이다.

천자는 천하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며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부유하고 귀한 사람은 마땅히 하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며 - 즉, 겸상애() - 서로를 이롭게 해주기 - 즉, 교상리() - 때문에 반드시 하늘의 상을 받을 것이다. 하늘의 뜻에 반하는 사람은 서로를 미워하며 서로를 해쳐서 반드시 하늘의 벌을 받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기 쉽다. 묵가들은 하늘과 귀신의 의지가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을까? 현대의 일부 연구자들은 묵가의 초월적 종교론을 기독교와 비교하며, 그 유사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연구 경향은 묵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묵가들이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겸상애'와 '교상리'라는 실천적 원칙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결코 신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는 신학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 당시 제사와 관련된 종교적 통념에 호소함으로써 자신들의 실천 원칙을 정당화한 것에 불과하다. 만약 조상의 귀신이 있다는 믿음과 같은 종교적 통념이 통용되지 않았다면, 묵가들은 다른 논거에 의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했을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묵가의 주장은 '신을 믿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자는 데 있었다.

논리의 발견

서양의 철학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데 비해 동양의 철학은 직관적이고 신비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이성()4)은 합리적 추론의 능력을 가리키는 동시에 이유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성적인 사유는 기본적으로 어떤 주장에 대해 이유나 근거를 대는 사유다. 이 점에서 『묵자』는 동양 철학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뒤엎는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묵자』는 고유한 주장과 함께 철저하게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유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 『묵자』의 이런 합리주의적 정신은 다음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어진 사람들은 취하고 버리는 것과 옳고 그른 것의 이유를 서로 알려 준다. 이유를 대지 못하는 사람은 이유를 대는 사람을 따르고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는 사람을 따르며, 할 말이 없다면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

묵가에서는 어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필요한 이유나 근거들을 세 가지로 유형화하는데, 그것이 유명한 '삼표()'다.

말에 표준이 없는 경우, 이것은 비유하자면 움직이는 물레 위에서 동쪽과 서쪽을 확립하려는 것과 같아서 옳고 그름, 이로움과 해로움의 구분에 대해 분명히 알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말에는 반드시 세 가지 표준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세 가지 표준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곧 역사적 표본과 경험적 근거, 현실적 유용성이다. 무엇에서 역사적 표본을 찾는가? 옛날 성왕들의 사적에서 찾아야 한다. 무엇에서 경험적 근거를 찾는가? 백성들의 귀와 눈으로 듣고 본 사실에서 경험적 근거를 찾아야 한다. 무엇에서 현실적 유용성을 찾는가? 형벌과 정책을 시행하여 그것이 국가, 백성 그리고 인민의 이익에 부합되는가를 살펴보는 데서 알 수 있다.

위의 세 가지로 분류된 근거가 중요한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묵자』의 열 가지 주제들이 모두 이런 근거들로 정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도 있다. 옛날 성왕들의 사적이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또 사람들의 경험이 근거가 될 수 있을까? 혹은 현실적 유용성이 근거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묵가가 근거나 이유를 가지고 주장을 제기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따라서 묵가가 제시한 세 가지 근거는 당시의 사람들을 설득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정립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묵가는, 겸애라고 하는 유의미한 정치철학적 주장을 했다는 내용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려 한 사유 방식을 최초로 피력했다는 측면에서도 중국 철학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쉬운 묵가의 소멸

묵가의 철학은 전국시대 초기에서부터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가장 유력한 사상이었다. 이것은 전국시대 중기의 맹자, 말기의 순자()나 한비자()가 당시의 유력한 사상으로 묵가의 철학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도 확인될 수 있다. 묵가는 춘추시대 말기에 인문 정신을 드러낸 공자와 그를 수장으로 하는 유가()에 맞서 싸웠고 이런 싸움은 전국시대 내내 지속된다.

유가와 묵가 사이의 논쟁은 너무나 강렬하고 지속적이어서 장자()가 지식인들 사이의 사상 논쟁을 '유가와 묵가의 시비논쟁'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묵가가 이렇게 격렬하게 유가를 공격했던 이유는, 유가에서는 말로만 사랑을 외칠 뿐 그 사랑의 완성이 기본적으로 자기희생과 이타적 행위에 기초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묵가에서는 사랑이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을 물질적으로 이롭게 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묵가에게는 번잡한 예절, 무용한 장례 의식 혹은 화려하고 사치스런 음악 활동에 기생해서 살고 있는 유가의 무리가 위선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개 유가는 오만하고 자신만을 따르는 자들이어서 아랫사람들을 가르칠 수도 없고, 음악을 좋아하며 사람들을 어지럽히기에 직접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운명이 있다는 주장을 세워 할 일에 태만하므로 직책을 맡겨서도 안 되고, 상례를 중시하고 슬픔을 그치지 않으니 백성들을 자애하도록 해서도 안 되며, 옷을 기이하게 입고 용모를 치장하는 데 힘쓰기에 백성들을 이끌도록 해서도 안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유가에 대한 묵가의 치열하고 지속적인 공격이 묵가 사상을 역사 속에 묻히게 만든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는 점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단명한 뒤 한()나라의 무제()가 "모든 제자백가들을 물리치고 유학만을 숭상한다"고 선언한 뒤 중국의 역사는 유학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그 때문에 묵가의 사상과 실천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망각되어 버렸던 것이다.

철학사적으로 묵가 사유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차별적인 사랑을 강조했던 유가들과는 달리 인간 사이의 차별 없는 사랑을 역설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중요한 그들의 공헌은 동양 철학에 대해 해묵은 편견을 수정해 준다는 데 있다. 우리는 논리와 이유를 강조했던 서양 철학과 달리, 동양 철학이 예술적이고 직관적이며 나아가 신비주의적이라고까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유나 근거에 기초를 두지 않는 철학은 가능할까? 그렇다면 동양 철학은 철학이라기보다 종교에 가까운 것이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이유와 근거를 강조했던 묵가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동양의 정신을 다시 반추하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묵자』를 진지하게 읽게 되면, 우리는 동양에 합리주의적이며, 따라서 논증적인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긍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철학이 철학일 수 있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삶에 대한 건전한 주장과 그에 대한 충분한 근거대기 작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묵가는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늘의 의지로서 '천지()'라는 외적인 권위를 도입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외적인 권위에 의해 실현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가?
타인에 대한 사랑이 외적인 권위를 두려워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타인에 대한 사랑은 일종의 역설에 빠지게 된다. 이 경우 사랑의 대상은 타인이라기보다는 외적인 권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주체에 의해 결단되고 지속되는 정감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

2. 묵가들이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사회 구성원들 간의 상호 애정의 결여에서 찾았다. 그러나 사회적 혼란과 갈등은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올바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묵가에서는 군주, 관료, 인민으로 표현될 수 있는 통치 질서를 그대로 인정한 후, 사회 구성원 상호간의 사랑을 회복함으로써 사회적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다. 이런 논리라면 사회적 문제는 개개인의 자의적 결단에 내맡겨지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구성원 상호간의 사랑을 유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

『묵자』, 묵적 지음, 김학주 옮김, 명문당, 2003.

각주

  • 1) 공리주의(utilitarianism)에 따르면 도덕의 정당화는 더 많은 쾌락이나 이익에 대한 계산으로 가능해진다. 예를 들면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 좋다는 덕목은 음식을 과식했을 때 생기는 불쾌감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
  • 2) 겸애(兼愛)에 대한 자세한 표현으로, '모두를 아울러 서로 사랑한다'는 의미다. 흥미로운 것은 『묵자』를 보면 '겸애'를 공자 사유의 핵심 범주인 '인(仁)'으로 대치해서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 점은 묵자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공자의 사유를 배우면서 그를 극복해 갔다는 증거일 것이다.
  • 3) '상호간에 서로 이익을 제공한다'는 의미다. 『묵자』에서는 '겸애'를 '인'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교상리'를 '의(義)'로 대치해서 쓰기도 한다.
  • 4) 이성(reason)은 '계산'이나 '이유'를 뜻하는 라틴어 '라치오(ratio)'에서 온 말이다. 라치오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첫째로 자신의 행동을 인식하고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둘째로 동기나 이유, 셋째로는 정당화다. 그래서 '라치오'로부터 유래한 '이성'이란 말은 어떤 주어진 것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둔 채 반성하고 사유한다는 철학적 의미를 띠게 된 것이다. 거리를 두고 반성할 수 있어야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 수 있고 그 행동의 이유를 발견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그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묵자 [墨子] - 사랑의 정치 철학과 논리의 발견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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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라는 존칭으로 일컬어지는 묵적(墨翟)의 생존연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의 활동 반경을 미루어 볼 때 대략 BC 479~438 경으로, 공자(孔子)보다 10여 년 뒤에 노나라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사기(史記)에는 묵자가 송나라 대부라고 적혀 있으나 노예 출신의 수공인이어서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얼굴에 입묵했으므로 묵()이라 불린다는 설이 있다. 수성(守城)기구병기공구 등의 기계(器械) 제작에 능했으며 성곽 방위술에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주()나라의 사각(史角)이라는 사람의 자손에게 글을 배웠다. 그리고 공자의 유학도 배웠으나 번거로운 예의가 백성들의 생산을 저해하고 생활을 궁핍하게 할 우려가 있으며 혼란한 세상을 구제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배척했다.

 

그의 근본 사상은 [겸애설(兼愛說)]로서, 자타를 구별하여 사랑을 차등화하는 기존 유가의 한정적 사랑(묵가에서는 이를 별애(別愛)”라고 부름)은 개인 간에 시기(猜忌)와 도둑질, 살인과 투쟁을 유발시키며 국제간에는 전쟁을 야기 시키는 등 천하의 가장 큰 화근이라 하여 비판하고,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 겸애(謙愛)를 실천하는 것만이 이러한 사회적 병폐와 문제를 제거하여 궁극적인 태평성세를 이룩할 수 있는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이 계급이나 신분의 차등에서 벗어나 평등한 사랑을 실천할 때 사리사욕이 아닌 공리를 얻어 서로가 이익을 보게 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으니 이를 [교상리(交相利)]라 부른다.

 

정치적 견해에 있어서는 [상현정치(尙賢政治)]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으로는 운명론을 배척하고 노력에 의한 생산의 증대와 절용이 부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면서 귀족들의 사치낭비부의 편중을 지탄했다.

 

묵자는 이러한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극히 검소하고 분수에 맞게 생활했으며 월나라 왕이 사방 500리에 달하는 봉지를 준다고 하는데도 분수에 넘는 대우는 오히려 자신의 사상과 배치된다 하여 거절했다.

 

그는 천하에 이로운 일이 있으면 쉴 틈이 없이 동분서주, 찾아가 할만큼 근면하여 고통을 돌보지 않고 부지런히 활동했는데 정강이의 털이 부스러질 만큼 열심히 노력했다(맹자(孟子)).”는 정도로 호인이며 선인이었다고 한다.

 

제후들과 귀족들의 횡포 때문에 고통을 받아오던 백성들은 묵자의 평등박애 사상에 크게 공감하여 당시에는 오히려 유가를 능가하는 주도적 사상이 되어 일세를 풍미했다.

 

그러다가 전국 시대에서 진()의 통일을 거치는 동안 점차 쇠퇴하더니 한나라 때에 이르러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이처럼 잊혀진 사상체계였던 묵가의 사상은 청나라 말에 이르러 묵자의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묵가(墨家)는 묵자가 주창한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이르는 말이다.

 

묵자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이 그의 교설을 편집한 것으로 전해진 묵자(墨子) 53편에 남아 있는데 상현(尙賢)상동(尙同)겸애(兼愛)비공(非攻)절용(節用)절장(節葬) 등의 주장은 그 하나하나가 당시의 일반적인 민중들의 관념에 비해서는 아주 획기적인 것이었다.

 

신분과 지위상의 귀천경제적인 빈부지능상의 현우(賢愚)힘의 강약을 불문하고 모두가 평등함을 지적하며 육친간의 친소에 따라 사랑의 지향이 달라지는 유가(儒家)의 인()을 배척했다.

 

만민에 대한 박애 정신인 겸애(兼愛)를 주창하는 묵가는 출발점부터 유가와 대립하기 시작하여 당시의 양대 학파를 이루었으며, 상대방을 통박(痛駁)하면서 소위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서막을 올렸다.

 

묵가는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결정되었다고 믿는 모든 것을 타파하려고 했다. 혈연 관념을 타파하기 위한 겸애(兼愛), 인간의 숙명관을 타파하기 위한 비천명(非天命)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잘못된 관념을 타파해야만 비로소 시비곡직을 바르게 가릴 수 있고 현우(賢愚)근태(勤惰:부지런하고 나태함)만을 가지고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게 묵자의 생각이다. 이 겸상애(兼相愛)와 비천명은 묵자사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겸애(兼愛)사상과 교상리(交相利)

 

묵자는 그의 중심 사상인 자타를 구별하지 않는 평등애, 곧 겸애를 실현시키는 방법으로 [삼표(三表)]를 내세우고 이를 공리의 기준으로 삼아 개인의 사리가 아닌 천하의 공공복리를 추구하는 [교샹리(交相利)]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표란 성왕(聖王)의 사적에 근본을 두는 [()], 백성들의 직접 경험에 근거한 [(: 연원(淵源))]>, 국가와 백성들의 이익에 일치하는 데에 효용성을 두는 [()]을 가리킨다.

 

그들은 오로지 남을 위해 산다는 종지(宗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는 자기의 희생을 아끼지 않았으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오히려 가능한 한 삼갔다. 비락(非樂)과 절장(節葬:장례식을 검약하게 함)을 주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상현(尙賢)사상과 상동(尙同)사상

 

국가 제도는 안정되고 통일된 세상을 견지하기 위한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 묵자의 생각이다. 천하를 한 사람이 다스릴 수는 없으므로 각인의 능력에 맞게 제후와 향장이장(里長) 등을 임명해야 되지만 그러한 직분을 담당할 사람으로는 범인이 아닌 현자(賢者)라야 한다고 역설한다.

 

현명한 사람을 숭상하여 아랫사람이 위에 있는 현자를 모방하거나 동일하게 되어가도록 해야 한다는 [상동정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평화 사상인 비공(非攻)

 

[비공]이란 타인을 공격하지 않으며 따라서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비전론이다. 묵자는 전쟁을 집단적인 살인행위로, 모든 죄악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악이라고 보았다.

 

그는 실제적으로도 수성 장비를 제작하고 밤낮으로 10일을 달려 자기의 조국인 송나라를 침공하려는 초()나라 왕과 공성 기구 제작자인 공수반(公輸盤)을 찾아가 이를 저지시킨 일도 있다.

 

경제 사상인 절용

 

묵자는 근검절약을 주창했으며 이를 몸소 실천했다. 그는 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를 모두 갈아서라도 천하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하리라(마정방종 이천하위지(摩頂放踵, 利天下爲之)).”고 외치며몸을 가릴 만큼만 입고 먹을 만큼만 헤아려 먹으며 노예들과 똑같이 어울릴지언정 벼슬자리 따윈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탁신이의 양복이식 비어빈맹 미감구사(度身而衣, 量腹而食, 比於賓萌, 未敢求仕))”고 하면서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농민이며 노동자수공업자들이었던 묵자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생산의 증가를 위해서는 인구의 증가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조혼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생산의 증대와 아울러 물자를 절약해 써야함을 강조했다. 길흉화복이 타고 나는 것이라는 운명론을 배척하고 근면과 절약이 부의 원천이라고 하면서 왕후장상 등 귀족들의 호의호식과 사치낭비를 비난하고 특권 계층에 의한 부의 독점을 지탄했다.

 

묵자의 제자들과 묵가의 성쇠

 

묵자 사후에 그의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활동했는데 역대의 거자(鉅子: 묵가의 최고 지도자)로 알려진 금활리(禽滑釐)맹승(孟勝)전양자(田襄子) 등의 활약이 두드려졌고 절용과 실리 비공 등을 주장한 학자 송형(宋銒)과 윤문(尹文)공상과(公尙過)허행(許行) 등등이 묵자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했다.

 

또 여러 계파 중 상리씨(相理氏) 무리는 동방의 제()에서, 초나라 사람인 고획(苦獲)등능(鄧陵)자이치(子巳齒) 등은 남방에서, 상부씨(相夫氏) 무리는 서방의 진()나라에서 활동했다.

 

그 중 별묵(別墨)으로 불리는 혜시(惠施)와 공손룡(公孫龍) 등은 변론의 방법을 개발하여 묵가의 겸애사상과 철학적 입장을 밝히고 변호하면서 제가(諸家)에 대한 비평에 치중했는데 이들을 [명가(名家)]라고도 부른다.

 

한동안 묵가들의 활약은 유가를 압도했다.

 

맹자는 양주(楊朱)와 묵적의 학설이 하늘 아래 가득하여 천하의 학설이 양주에게 쏠리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간다.”고 한탄했다. 한비자(韓非子) 또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저명한 학파를 꼽자면 유가와 묵가를 들 수 있다.” 유가가 비약적인 발전을 했으나 그때까지도 묵자의 학설은 유가와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학(顯學: 뚜렷하게 드러난 학파)’으로 꼽힐 정도로 창성했다.

 

묵가 집단은 거자를 중심으로 철통같은 단결력으로 조직되어 종교 집단이나 정치 집단처럼 엄격하게 활동했으며 그 조직원은 [묵자(墨者)]라고 불렸다.

 

복돈()맹승(孟勝)전양자(田襄子) 등의 초기 거자들은 투철한 묵가 사상을 지니고 이를 실천하는데 전력을 다 했으나 이후 묵가 조직에 이들 만한 사상적 지도자가 계속해 출현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비자가 묵자가 죽은 뒤 상리씨의 묵가, 상부씨의 묵가, 등릉씨의 묵가로 분열되었다.”고 전하는 바와 같이 묵가의 분파들이 서로를 별묵이라 비난하며 다투었다〈《장자(莊子)》〈천하편(天下篇)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국 말기 칠국의 대립 항쟁 과정에서 쇠약해지기 시작한 그들은 진()한대(漢代)이후에는 학맥 자체가 완전히 끊어져 잊혀진 집단이 되었다.

 

그러다가 청대(淸代)의 고증학자들에 의해 비로소 묵가 연구가 부활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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