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조선의 말과 글을 통일하라"
조선어학회는 1931년 조선의 말과 글의 연구 정리 및 통일을 목적으로 설립된 민간 학술단체로, 주시경을 계승한 제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어연구회가 재편된 단체이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 ‘조선어 표준말 모음’,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등을 공표했으며, 조선어 사전 편찬을 앞두고 조선어학회 사건 등 일제의 탄압을 받아 관계자들이 고초를 겪었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운동은 일제에 맞선 문화적 민족운동인 동시에 일종의 독립운동이기도 했다.
조선어연구회의 한글 연구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 이후 일본어가 ‘국어’의 지위를 차지하고, 한국어는 지방어인 ‘조선어’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대 학교 교육에서도 일본어 보급에 중점을 두고, 조선어는 한문과 함께 하나의 과목을 이루고도 주당 수업 시간은 일본어에 훨씬 못 미치는 형편이었다. 또한 교과서 편찬을 위해 1912년에‘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총독부 철자법)을 제정했지만, 곧 이어 1921년, 1930년에 개정하는 등 일관성이 없었고, 일본어의 오십음, 탁음, 장음 표기법을 병기하는 등 한글 표기법을 일본어 보급을 위한 보조 도구로 간주했다. 또한 조선어연구회의 주장을 반영한 3차 개정 이전에는 소리나는 대로 적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에 각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주시경의 제자들은 문법에 맞지 않는 총독부 철자법을 비판하며, 1921년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를 연구함’을 목적으로 한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주로 조선어 철자법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월례회와 동인지 『한글』에 발표하거나 강연을 통해 일반에도 보급하고자 했다. 또한 훈민정음 480주년을 맞은 1926년부터는 그 반포일을 ‘가갸날’또는 ‘ 한글날’(1928년)로 명명하고 성대한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하지만 연구를 1차적 목적으로 하는 조선어연구회는 회원들의 주장을 모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어연구회는 1929년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이극로의 활동에 힘입어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명칭을 바꾸고, ‘조선어문의 연구와 통일’을 위한 기관으로 거듭났다. 이극로는 베를린종합대학 유학 중 조선어과를 만들어 강사로 자처하는 등, 모국어를 유지해 민족과 민족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언어 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세웠다. 그리하여 1929년 4월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고, 회원들과 협의한 후 10월 한글날에는 조선어학계의 권위자와 좌우익 성향의 인사들을 망라하여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였다. 우리 손으로 표준말 항목에 대해 바른 한글 철자법에 따라 정확한 해설을 붙인 조선어 사전을 편찬함으로써 민족의 갱생을 꾀하려는 것이 사업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서는 먼저 표준어와 맞춤법을 제정하는 등 조선어와 한글의 ‘통일’이 필요했다. 이에 조선어연구회는 1930년 12월에 총독부 철자법이 아닌, 대한제국기의 연구를 기초로 한 별도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기로 결의하고, 1931년 1월 학회 자체도 조선어학회로 개편한 것이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통일 및 보급 활동
조선말과 글의 연구와 통일을 목적으로 한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첫 사업은 맞춤법 통일이었다. 권덕규, 김윤경, 이병기, 이윤재, 장지영, 최현배, 정열모, 이극로 등 18인의 제정 위원이 중심이 되고 3년에 걸쳐 총 433시간, 125차례의 회의에서 의견을 조율해 완성한 ‘ 한글 마춤법 통일안’은 1933년 10월 조선어학회 임시총회에서 가결된 후, 한글날에 반포되었다. 총론에서는 “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삼고,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하며 각 단어 사이는 띄어 쓸 것 등을 제시하고, 본론에서는 자모, 성음, 문법, 한자어, 약어, 외래어 표기, 띄어쓰기 등의 규정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어학회의 통일안은 박승빈을 중심으로 한 조선어학연구회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조선 각계 지식인들의 지지를 확보하여 주요 신문, 잡지, 단행본, 소설에서 사용되었다.
이어 조선어학회는 1936년 10월 490주년 한글날 기념식에서 ‘조선어 표준어 사정안’을 발표하고, 『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간하여 표준어와 표준 철자를 찾아볼 수 있게 했다. 이극로와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등이 중심이 되어 1934년에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를 설치한 이래, 총 73인의 사정위원이 3차례의 사정회를 개최하고 또 이를 수정한 결과였다. 사정위원의 구성은 서울말을 표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서울 및 경기 출신이 절반을 점하게 하고, 나머지는 방언을 참고하기 위해 각 도별로 위원 수를 배정하였다. 또한 민족 전체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직업 및 정치적 성향, 남녀 등도 고려하여 대표적 비타협민족주의자인 안재홍, 공산주의자 정노식 등도 사정위원에 포함시켰고, 사정안이 거의 완성되자 각 교육기관, 언론기관, 종교기관, 문필가 및 명사 등 500여 곳에 이를 발송하여 일반의 여론을 수합하였다. 조선어학회는 조선의 말과 글을 통일할 표준어를 사정하는 데, 실제 이를 사용할 조선인 전체의 의견을 망라하겠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극로도 문필가부터 꼭 표준어를 사용하여 일반에까지 보급될 수 있게 하기를 당부했다.
또한 조선어학회는 1931년 1월 외국어에 교양이 깊은 각계 권위자 45명으로 외래어표기법 통일문제협의회를 조직하여 외래어 표기법을 조사 연구하기로 한 후, 10년 후인 1940년 6월에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하고, 일제의 허가를 얻어 1941년 1월에 책자로 발간했다. 당시에는 예컨대 런던(London)의 경우, 로돈, 논돈, 윤돈 등으로 제각기 표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어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외국 고유명사나 외래어를 표기하는 방법도 정해야 했던 것이다. 이극로, 정인섭, 이희승이 책임위원을 맡아 통일안을 기초했는데, 그 원칙은 ‘한글 마춤법 통일안’(1933)에서 정한 대로 모든 외래어는 새 문자나 부호를 사용하지 않고 한글의 음운을 토대로 한글로 표기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한글과 만국음성기호의 대조안을 작성하는 한편, 조선음성학회 외 각국 음성학 연구단체 등 학회 외부의 의견까지 참작하여 통일안을 작성했기 때문에 제정까지 다소 오랜 시일이 걸렸다. 또한 조선어학회는 1938년 가을에 원안을 완성한 후에도, 이를 기관지 『한글』 등에서 시험 사용하고, 또 300여 명의 각계 저명인사들의 비평과 의견을 모으고 나서야 비로소 통일안을 발표한 것이었다.
이처럼 표준어와 외래어 규정이 마련되자, 조선어학회는 1937년에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표준말 사정안에 맞게 수정하고, 1940년에는 다시 이를 개정하여 ‘마춤법’을 ‘맞춤법’으로 고치고 사이시옷을 도입한 후 『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간하는 등 그 완벽을 기하였다.
한편, 조선어학회는 표준어와 맞춤법 규정을 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일반에 보급하여 조선의 말과 글을 실질적으로 통일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이극로는 중국 상해로 망명한 김두봉과 연락하는 과정에서, 정리 통일된 조선어문을 널리 민중에 보급함으로써 조선의 고유문화를 유지 발전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선 독립을 위한 실력도 양성할 수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 민중에게 한글을 보급하여 문맹을 타파하고 독립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에서 한글 운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먼저, 1920~30년대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의 문자 보급 운동과 결합하여, 각종 한글 강습 강연을 활발히 했다. 1930년에는 당시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와 하기 한글 강습회를 개최하였고, 조선어학회로 바뀐 뒤에도 단독 강습회를 개최하거나 동아일보사가 브나로드 운동의 일환으로 주최한 하기 한글 강습회에 강사를 파견하였다. 강습회에서 학생들이 사용한 한글 교재도 이윤재의 『한글공부』(1931)였으며, 조선어학회는1934년에 기관지 『한글』에서도 문자 보급 운동에 사용되는 한글 교재를 상세히 해설해주었다. 그밖에 학교 및 지방 청년회, 기독교 및 천도교의 한글 강연회나 강습회에도 강사를 파견해 한글을 보급했다. 또한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한 후에는 조선어학회 안에 한글 교정부를 설치하고, 특히 이윤재가 중심이 되어 교정을 요청한 사람의 글들을 새로운 철자법에 맞게 고쳐 주었다.
아울러 이극로와 이윤재는 일반인이 한글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단계별 공통 교과서를 발행할 계획이었으나 완성하지 못했고, 1935년에는 조선어학회의 부설기관으로 한글 도서를 출판할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을 설립했지만 김윤경의 『조선문자급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1938) 외 한 권을 내는 데 그쳤다. 조선어학회는 조선의 말과 글의 통일과 한글 보급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고질적인 재정난과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활동의 여지는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
조선어학회는 조선어 통일을 위한 기초 사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1936년에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추진해 온 사전 편찬 업무를 인수했다. 1937년부터 본격적으로 어휘를 수집하여 1939년 초에는 어휘의 정리와 그에 대한 해설까지 거의 완료되었다. 50명의 전문위원이 11년 동안 고심하고, 전문 용어는 학자들에게 맡겨 서술한 대사업이 마무리를 앞둔 것이었다. 조선어학회는 마침내 1940년 3월 조선총독부에 16만 어휘, 3천여 삽화로 구성된 『조선어대사전(朝鮮語大辭典)』의 출판을 신청해 일부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허가를 받았고, 1942년에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 간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해 10월에 발생한 이른바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 편찬은 중단되었고, 조선총독부는 사전 원고와 서적을 전부 압수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함남의 홍원경찰서가 1942년 7월에 영생여학교 박영희가 쓴 일기 내용을 구실로 삼아, 사전 편찬에 관여하던 정태진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준 교사로 지목하고,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의 단체라는 자백을 얻어낸 후 회원들을 검거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이전부터 한글 운동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려 한 조선어학회를 주시하고 있었다. 다수의 3·1 운동 참여자와 대종교 신자가 있고, 세계피압박민족대회 참여자(이극로, 김법린), 신간회(장지영, 안재홍), 대한민국 임시정부( 윤병호) 등 각종 민족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이 모여 있던 조선어학회는 민족주의자들의 ‘소굴’이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이미 1935년에 전국 단위의 한글 강습회를 전면 금지시켰다. 또한 표준말 사정안을 발표한 1936년의 한글날 기념식에서는 가출옥 상태의 안창호가 축사를 맡았는데, 조선 민족은 조상에게 받은 모든 것을 잃고 조선어만 남았으므로 일치 협력하여 이를 보급 발달시켜 독립을 이루자는 취지의 발언을 하다가 참관하던 경찰의 저지로 기념식이 중단되었다. 수양동우회 사건(1937)으로 학회 임원 중 이윤재와 김윤경이 검거되었고, 최현배, 이만규, 이강래도 흥업구락부 사건(1938)에 연루되어 학교를 퇴직하는 등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그 외 이극로, 이희승, 한징, 정열모 등도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기 때문에, 조선어학회는 이미 언제 해산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때문에 조선어학회는 사전 편찬 때까지라도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산하 기관이 될 것을 결정하고 간사장 이극로도 일제에 협력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사전 간행을 앞두고 결국 탄압을 받게 된 것이다.
일제는 1942년 10월부터 1943년 4월까지 조선어학회의 핵심 회원과 사전 편찬을 후원한 찬조회원을 대거 검거하였다. 치안유지법의 내란죄, 즉 조선 독립을 꾀했다는 혐의였다. 검거된 31명 중 16명을 기소하여 예심에 회부했으며, 예심 판사는 이중 감옥에서 사망한 이윤재(1943)와 한징(1944), 석방한 장지영, 정열모를 제외한 12인을 공판에 넘겼다. 1944년 12월에서 이듬해 1월 사이에 열린 재판에서 장현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집행유예 등으로 석방된 사람을 제외하고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등 5명이 함흥 감옥에 투옥되었다. 복역을 마친 정태진 외 나머지 4명은 즉시 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8월 13일에 기각되었고, 결국 일제가 패망한 이후 8월 17일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심문 과정에서 경찰은 조선어 사전과 사전 편찬을 위한 어휘 정리 카드에 태극기를 ‘대한제국의 국기’, 창덕궁을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궁궐’등으로 해설해놓은 것을 증거로 삼아 민족정신을 함양하려 한 것이 아닌지 추궁하였다. 또한 예심 판사는 1944년 9월의 결정문에서 “어문 운동은 민족 고유의 어문의 정리 통일 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문화적 민족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를 품은 민족 독립운동의 점진 형태”로 규정하여, 유죄의 판단을 내렸다. 이에 회원들은 어문 운동은 어디까지나 문학적 또는 언어학적 문화운동이지 정치적 민족운동이 아니며 어문 운동에는 독립운동을 부추길 만한 능력이 없다고 반박하여 상고했지만, 고등법원은 상고를 기각했다. 일제가 일본어 상용과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강요하던 전시체제기에는 민족 문화운동도 허용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해방 후의 조선어학회
석방된 조선어학회 인사들은 즉시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고 1937년 이후 중단되었던 한글날 행사를 복원하였다. 최현배, 이극로, 장지영 등은 미군정청이 조직한 조선교육심의회에 참여하여, 미군정이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조선어 표기법으로 채택하고, 초중등 교과서는 모두 가로쓰기한 한글로 서술하는 원칙을 결정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국어 교사를 양성하고 국어 교과서를 편찬하는 일도 조선어학회가 담당했고, 문교부에 국어정화위원회를 설치하여 일본어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도 추진하였다. 해방이 곧 독립국가 건설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미군정기 조선어는 다시 ‘국어’의 지위를 되찾고, 식민지기 조선어학회의 성과가 국가 권력의 후원 속에 공식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어학회 사건 때 증거물로 압수되었던 사전 원고가 1945년 10월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조선어학회는 1947년 한글날에 을유문화사에서 『 조선말 큰사전』 1권을 간행한 이래 1957년 마지막 6권까지 간행하여 한글 사전을 편찬하려는 오랜 숙원을 풀었다.
하지만 1948년 남북 분단 정부의 수립은 조선어학회도 변화시켰다. 이극로는 그해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떠난 후 그대로 북한에 남아, 북한 정부 수립 후 조선어문연구회의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김두봉과 함께 북한의 언어정책을 이끌었다. 최현배가 중심이 된 남한의 조선어학회는 1949년 10월에 이름을 한글학회로 바꾸었다. ‘조선’이라는 용어는 북한을 연상시키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 남한의 국어정책 정립에 기여하였다. 비록 해방 이후 조선 민족은 정치적으로 분단되었지만, 대한제국기의 주시경과 식민지기의 조선어학회가 이룬 활동의 성과는 현재 남한과 북한 공동의 유산으로 계승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