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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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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7    일본에서 일본인의 손으로 윤동주 시비를 세우려 하다... 댓글:  조회:4286  추천:0  2017-03-11
일본 지방자치단체가 윤동주(1917~1945) 시비(詩碑) 건립을 불허했다고 도쿄신문이 2016년 2월 5일 보도했다. 니시오카 겐지(西岡健治) 후쿠오카현립대 명예교수가 주도하는 일본 시민단체 ‘후쿠오카에 윤동주 시비를 설치하는 모임’은 시비를 후쿠오카(福岡) 모모치니시(百道西)공원에 세우려 했으나 지난해 여름 관할 구청으로부터 ‘불허’ 통보를 받았다. 구청 측은 윤동주가 후쿠오카에서 유명하지 않고, 후쿠오카 시에 공헌한 인물도 아니라며 불허 결정을 내렸다고 신문은 전했다. 윤동주 시비가 “시민의 교양에 값 한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윤동주 시비 모임은 일본의 대학교수와 시인 등이 지난해 2월 결성했다. 후쿠오카형무소 터와 가깝고 추도식을 해마다 열어온 모모치니시공원이 건립지에 어울린다하여 관할 지자체인 사와라(早良) 구청에 설립 허가를 요청했다.   후쿠오카 시에 따르면 개인을 기리는 비는 9개 공원에 15기가 건립돼 있다. 시민들의 뜻으로 세운 중국인 문학가 등 외국인의 비도 있다.     구청이 이런 결정을 내린 데는 결정 당시의 한일 관계, 현 아베 정권의 성향 등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후쿠오카 시는 안보관련법이 심의 중이던 지난해 여름 태평양전쟁 관련 전시회의 후원자로 이름을 올려달라는 다른 시민단체의 요청도 거절한 바 있다.  니시오카 교수는 “시비는 역사를 바로 보는 계기가 될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손으로 세운다면 상호 이해도 깊어질 것”이라며 “비를 세우기 위한 모금 활동은 계속해나가겠다”고 밝혔다.     나가사키(長崎)대 다카미 야스토시(高實康稔) 명예교수도 “나가사키 시의 경우 지난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외국인 병사 추도비를 시민 제안으로 시유지에 세웠다”며 “공공장소에 시민의 뜻으로 전쟁의 기억이나 특정 인물을 기리는 비를 세우는 예는 일본에서 드물지 않으므로 (윤동주 시비 건립을) 다시 검토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만주 연변에서 태어난 윤 시인은 일본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 대학에서 유학하던 1943년 7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붙잡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 ////////////////////////////////////////////////////////////////////////// 니시오꺼 겐지 교수의 메일입니다.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은 거치른 번역입니다. 참고하셔요. (장호병 드림)    <福岡に尹東柱の詩碑を建てる会>関係者の皆様へ   お待たせいたしました。 <尹東柱詩碑・通信>第13号をお送りいたします。 詩人・河津聖恵氏の講演には、尹東柱の詩を読むヒントがたくさん語られています。 また、<『尹東柱評伝』を読む部会>が発足いたしました。 <通信>をお読みいただいた感想をお送りいただければ幸いです。 よろしくお願いいたします。 ------西岡健治    관계자 여러분께   기다리게 했습니다.  제13호를 보내드립니다. 시인 카와聖恵씨의 강연에는 윤동주의 시를 읽는 요령이 많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또한 < "윤동주 평전」 읽는 모임>이 출범했습니다. 을 읽어 주신 의견을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니시오 카 켄지   <尹東柱詩碑・通信>第13号        (2016.4.24[日])   連絡先:福岡に尹東柱の詩碑を建てる会 〒814-0001 福岡市早良区百道浜1-5-5-603 西岡健治       電話090-9792-7239 メールアドレス:ydj.shihi@gmail.com    제 13 호 (2016.4.24 [일]) 연락처 : 후쿠오카에 윤동주 시비를 세우는 모임 〒814-0001 후쿠오카시 사와 라구 모모치 하마 1-5-5-603 니시오 카 켄지 전화 090-9792-7239 이메일 : ydj.shihi@gmail.com   暑くもなく寒くもなく、過ごしやすい今日この頃です。 皆さん、いかがお過ごしでしょうか? この間、「『尹東柱評伝』を読む部会」を準備し、いよいよ来週、第1回会合を持つことになりました。この会が今後どのように成長してゆくか、楽しみにしております。また、2月の追悼式後に行われました、詩人・河津聖恵さんによる「尹東柱文学講演会」の内容が活字になりました。ご参加いただけなかった方や、遠方の方々に読んでいただければと思っております。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살기 좋은 요즘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동안 ‘「윤동주 평전」 읽는 모임’을 준비하고 드디어 다음 주 제1차 회의를 갖습니다. 이 모임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해나갈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2월의 추도식 후에 이루어졌던 시인 카와 聖恵 씨에 의한 「윤동주 문학 강연회」의 내용이 활자화되었습니다. 참가할 수 없었던 분이나 멀리 있는 분들에게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また、先日、韓国語を学ぶ九大の学生より「韓国語の授業の中で韓国と福岡の関係について発表することになり、私たちの班は韓国の詩人である尹東柱について調べることにな」ったので、資料を送ってくださいという依頼がありました。さっそく資料を送りましたが、こうして若い世代に少しでも輪が広がって行けばと思いました。 では、<尹東柱詩碑・通信>第13号をお届けいたします。   또한 얼마 전 한국어를 배우는 규슈 대학의 학생보다 "한국어 수업에서 한국과 후쿠오카의 관계에 대해 발표하게 우리의 팀은 한국의 시인인 윤동주에 대해 조사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자료를 보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즉시 자료를 보냈는데 이렇게 젊은 세대에게 조금이라도 고리가 퍼져 가면 좋겠습니다. 그럼  제 13 호를 전해드립니다.   Ⅰ.報告事項   [1] 2016年2月5日(金) 韓国大邱にある嶺南大学の新聞部記者が取材に来ました。旧福岡刑務所の周りを案内して、いっしょに昼食を<めんちゃんこ亭>で食べました。関係書類をコピーして渡す。   [1] 2016년 2월 5일(금) 한국 대구에 있는 영남대 신문부 기자가 취재하러 왔습니다. 구 후쿠오카 형무소의 주위를 안내하고 함께 점심을 에서 먹었습니다. 관계 서류를 복사하여 전합니다.   [2] 2月14日、RKB毎日放送(テレビ)より尹東柱の追悼式と文学講演会の模様がニュースとして報道されました。 また、3月13日には、同じくRKB「九州・沖縄ドキュメント ムーブ」で、尹東柱の足跡を追う番組「空を仰いで――尹東柱の詩でつなぐ日韓関係」(30分)が放映されました。インタビュー出演された文芸評論家で文教部長官だった李御寧教授が、尹東柱に関して日本のテレビ局に出演されたのははじめてではなかったでしょうか。他に、文芸評論家・金宇鍾、尹東柱の甥の尹仁石教授、立教大学卒業生の楊原泰子氏、尹東柱の詩を読む会など。   2월 14일, RKB 마이니치방송(텔레비전)에 윤동주 추도식과 문학강연회의 모습이 뉴스로 보도되었습니다. 또한 3월 13일에는 같은 RKB ‘큐슈 · 오키나와 다큐맨토무브’에서 윤동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프로그램 ‘하늘을 우러러 – 윤동주의 시로 잇는 한일 관계」(30분)이 방영되었습니다. 인터뷰에 출연한 문예평론가이자 문교부 장관이었던 이어령 교수는 윤동주에 관해 일본의 방송국에 출연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외에, 문학평론가 김우종. 윤동주의 조카 윤인석 교수, 릿교대학 졸업생 楊原 야스코씨,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 등.   [3] 2016.2.29(月) 韓国のKBS・SBS・YTN三社が<3・1記念日>のニュースとして「福岡に尹東柱の詩碑を建てる会」を取材に来ました。 旧刑務所側の百道西公園に行って撮影していると、警官二人がパトロールする車でやって来て何をしているのかと尋問しました。テレビ局側が「この方にインタビューをしている」といい、「(維持管理課の)柳本さんに許可をもらっている」というと、さらに「書類を持っているか」と聞いてきました。百道西公園でこんな質問を受けたのは初めてでした。誰かが警察に電話したということでした。   한국의 KBS · SBS · YTN 3사가  뉴스로 "후쿠오카에 윤동주 시비를 세우는 모임'을 취재하러 왔습니다. 구 감옥 측의 모모치 서쪽공원에 가서 촬영하고 경찰 두 명이 순찰 차량에서 와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심문했습니다. 방송사측에서 “이 분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고 하였고, 유지관리과의 야나기모토 씨에게 허가 받은 사실이 있는가"라고 하면서 더 "서류를 가지고 있는가?"라고 물어 왔습니다. 모모치 니시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경찰에 전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4】2016.3.6(日) KBS(日本のNHKに該当)より「不滅の青年尹東柱」(20:00-21:00の1時間番組)が放映されたとのことです。友人よりメールで「나도 방송을 보고 윤동주 시인에 대해 이해를 깊이하게 되었네」と連絡がありました。 KBS(일본 NHK에 해당)보다 “불멸의 청년 윤동주”(20:00-21:00, 1시간 방송)가 방영되었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통해서보다 이메일로 "나도 방송을 보고 윤동주 시인에 대해 이해를 깊이하게 되었네."라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Ⅱ.「『尹東柱評伝』を読む部会」第1回(4月30日)が西南学院大学で開催されます。  関心のある方は、どなたでも気軽にご参加ください。 ‘윤동주 평전 읽눈 모임’의 제1회 (4월 30일)가 서남하권대학교에서 개최됩니다. 관심 있는 분은 누구나 부담 없이 참가해주십시오.   Ⅲ. 詩碑建立のため献金をお寄せいただき、有難うございます。 시비 건립을 위한 헌금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6年4月24日現在、総額は1666,598円です。 2016년 4월 24일 현재 총액은 1,666,598엔입니다.   (文学講演会や部会などに献金は使っておりません。    献金を詩碑建立以外の用途に使う場合は、相談させていただきます。) 문학 강연회와 회비 등에 헌금은 쓰지 않습니다. 헌금을 비 건립 이외의 용도에 사용하는 경우는 상담하겠습니다.)   Ⅳ.「福岡に尹東柱の詩碑を建てる会」のホーム・ページを開設いたしました。(今後、さらに充実させてゆく予定です)   「http://sihifukuoka.webcrow.jp/」 知り合いの方にでも、ご紹介いただけると幸いです。   “후쿠오카에 윤동주의 시비를 세우는 모임”의 홈페이지를 개설했습니다.(향후 한층 더 충실히 하고 갈 예정입니다) http://sihifukuoka.webcrow.jp 아시는 분들에게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Ⅴ. 尹東柱・作品論の紹介 次に紹介する詩人・河津聖恵氏講演「尹東柱の詩と生に照らされて」の分量が多いので、「星を数える夜」論(後半部分)は次回に回します。   Ⅴ. 윤동주 · 작품론 소개 다음에 소개하는 시인 카와 聖恵 씨 강연 “윤동주의 시와 삶에 대한 조명” 분량이 많기 때문에, ‘별을 헤는 밤’론 (후반부)는 다음으로 돌립니다.   Ⅵ. 詩人・河津聖恵氏講演「尹東柱の詩と生に照らされて」 (2016.2.13 西南学院大学「チャペル」小ホールにて)   講師紹介=河津聖恵さん(詩人、京大独文学科卒、H氏賞、現代詩手帖賞など受賞。近著に『闇より黒い光のうたを』藤原書店2015、『パルレシア-震災以後、詩とは何か』思潮社2015がある)   Ⅵ. 시인 · 카와 聖恵 씨 강연 “윤동주의시와 삶에 대한 조명” (2016.2.13 세이 난 가쿠 인 대학 '채플'작은 홀에서)   강사 소개 = 카와 聖恵 씨 (시인, 쿄토 대학 독문학과 졸업, H씨상, 현대시 수첩 등 수상. 근저에 "어둠보다 검은 빛의 노래를"후지와라 서점 2015, 『빠루레시아 - 지진재해 이후, 이란 무엇인가』 思潮社(2015)가 있다.   강연 내용은 생략했습니다. 원문이 필요하셔서 신청하시면 메일을 그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장호병 드림     '후쿠오카시(福岡市), 윤동주 시비(詩碑) 건립 허가해야'   -일본 시민단체 재검토 요구     와타나베 아키라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제가 몇 년 전에 장 선생을 후쿠오카 형무소가 있던 자리에 안내한 적이 있었지요?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죠. '한국시인 윤동주의 시비(詩碑)를 건립하려는 시민단체의 요청이 인정되지 않았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장소는 현재의 구치소 북측 공원 같습니다. 유감이군요."   일본의 오랜 지인 '와타나베 아키라(渡邊章·69)' 씨가 구정 연휴기간 필자에게 보내온 이메일이다. 필자는 4년 전 그와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 터가 있었던 니시진(西新) 사와라구(早良區) 모모치(百道)를 찾은 적이 있었다. 또 다른 일본인 '오츠보 시게다카(大坪重隆)'씨도 동행했었다. 와타나베 씨의 이메일에는 대서특필된 2월 4일자 서일본신문 기사가 첨부돼 있었다.   1877년 창간된 서일본신문(70만부 발행)은 후쿠오카 시에 본사를 두고 구마모토(熊本), 가고시마(鹿島), 나가사키(長崎), 오이타(大分) 등 규슈(九州) 지역 전체를 커버하는 유력매체다. 우리의 여러 신문이 이 내용을 다뤘으나 대체로 도쿄 신문에 보도된 기사 중심이었기에 서일본신문에 게재된 내용을 정리해본다.     전중(戰中), 후쿠오카시(福岡市)에서 옥사 한국시인·윤동주   시(市)의 공원에 시비(詩碑)인정 안 해.   지명도, 공헌 없다고 설명   '일한관계를 헤아린(忖度)것일까' 시민단체 지적       서일본신문의 윤동주 시인 관련 기사   보도된 기사의 제목과 도입부분의 내용이다. 후쿠오카 시와 일본의 시민단체가 서로 상반된 의견으로 맞서고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시민단체는 어떠한 사람들일까. 기사를 통해서 그들을 알아본다.     후쿠오카 형무소가 옮겨간 자리에 세워진 구치소 윤동주 시인은 1945년 2월 16일 새벽 3시 36분 후쿠오카 감옥에서 청춘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윤동주 시인의 기일(忌日)을 맞아 민간인들이 순수한 마음에서 시비건립을 추진한 것이다. 일본인들만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발족한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다. '후쿠오카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의 창립자인 '니시오카 겐지(西岡健治)' 후쿠오카 현립대 명예교수를 비롯해서 일본인 교수·문인 등 10명이 발기인이다.  후쿠오카 시는 어떤 이유에서 이를 거절했을까.     과연 정치적 문제는 없었을까.   신문은 '역사적 가치를 판단해야한다'는 나가사키대학(長崎大學) '다카미 야스토시(高実康稔)' 명예교수의 의견을 게재했다.     서일본신문은 시비건립위원회 대표인 '니시오카(西岡)' 명예교수의 멘트를 끝으로 기사를 마감했다.       서일본신문 윤동주 기사 16회 연재해     1994년 서일본신문은 라는 타이틀로 16회에 걸쳐 윤동주의 인생 역정(歷程), 시의 세계 등을 연재했다. 필자는 연재기사 중에서 '우리말 수난'과 '조국 소멸의 위기감' 부분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80년대 초반부터 일본에서 알려져   윤동주 시인 전시회에 모인 일본인들(2015년 2월 규슈대 / 사진: 오츠보 시게다카씨) 윤동주 시인이 일본의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4년 그의 시집(詩集)이 출판(記錄社)되면서 부터이다. 방송에서의 최초보도는 1988년 2월 ‘NHK 라디오 한글강좌’이다. 1990년 故이바라기 노리코(茨木則子, 1926~2006) 시인의 글 '윤동주에 대하여'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고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사진: 야후재팬)   일본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윤동주를 애도하고 시비를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우리도 이들에게 박수를 보냄은 물론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후쿠오카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이어서 한국 관광객들이 아주 많이 가는 곳이다. 이를 감안해서라도 후쿠오카 시(市)는 시민단체가 추진하고 있는 윤동주의 시비 건립을 재고해야 한다.  특히, 2017년은 윤동주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후쿠오카 시의 현명한 판단을 촉구한다.   과거의 아픈 역사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미래를 위한 척도이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비 위치 : 충남 천안시 목천면 독립기념관 (겨레의 탑에서 좌측 아래 도로변)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尹東柱 1917∼1945)   시인. 아명은 해환(海煥). 북간도(北間島) 명동촌(明東村) 출생. 기독교 장로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 1929년 문예지 《새명동》 발간에 참여하였고, 1931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관립학교를 거쳐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35년 평양(平壤)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로 옮겼으나 신사참배문제로 폐교되자, 용정의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38년 서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에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하였다. 1942년 일본 리쿄대학[立敎大學(입교대학)] 영문과 입학, 그해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동지사대학)]으로 전학하였다. 1943년 귀국 직전에 항일운동을 한 혐의로 송몽규(宋夢奎)와 함께 체포되어 2년형을 받고 규슈[九州(구주)] 후쿠오카형무소[福岡刑務所(복강형무소)]에서 복역중 1945년 옥사하였다. 그의 시는 초기 시부터 마지막 작품으로 보이는 《쉽게 쓰여진 시》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적 변모를 드러내고 있다. 초기 시 《겨울》 《조개껍질》 《버선본》 등에서는 암울한 분위기와 유년적 평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후기 시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등에서는 역사감각을 지닌 자아성찰을 보여준다. 그는 자전적이고 내성적인 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바탕을 둔 실존적 윤리의식, 그리고 시대와의 갈등에 성실했던 민족의식을 나타낸 시를 썼으며, 이러한 주제를 고도의 상징과 은유적 기법으로 독특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한국시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유해는 용정에 묻혔고, 1968년 연세대학교에 시비가 세워졌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있다.          
1076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에서 새 "조선말규범집"을 만들다... 댓글:  조회:3614  추천:0  2017-03-11
               새 《조선말규범집》 발행, 조선말 “4칙”규범 망라 부분적 내용 수정, 보충                            새 조선말규범 무엇이 달라졌나?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2017-02-24 ]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에서 새로 편찬한 《조선말규범집》이 지난해 12월에 출판되여 현재 정식으로 발행되고 있으며 동북3성조선어문협의지도소조판공실은 기존의 《조선말규범집》(2007년판)을 사용정지한다고 밝혔다.     중국에서의 조선어 규범화사업은 70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지만 정부차원에서의 규범화사업은 1977년 동북3성조선어문사업협의령도소조(이하 령도소조)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였다. 령도소조는 “중국 조선어의 규범화사업은 중국 조선족들의 의사교환에 유리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전체 조선민족의 의사교환에도 유리하여야 하며 민족화, 대중화, 과학화 요구에 맞아야 한다”는 지도사상을 확립하고 조선어문사업일군들을 조직하여 처음으로 중국 조선어의 발음법, 맞춤법, 띄여쓰기, 문장부호법을 제정하고 1985년에 첫 《조선말규범집》을 출판하였다. 그후 1996년과 2007년에 시대에 발전에 적응하기 위해 수정본을 출판하였다.     이번에 새로 출판된 규범집은 지금의 언어실태에 비추어 조선반도와의 공동성분을 늘이며 언어규범원리 즉 “과학성, 련속성, 점진성, 대중성을 골고루 돌보는 원칙”에 따라 “4칙”을 망라한 부분적 내용들을 수정, 보충하였다. 이 규범집에 수록된 내용들은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에서 심의, 통과한 것이므로 국내 조선어사용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규범들이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것중에서 보면 기존의 보조용언과 고유어불완전명사들을 앞의 단어와 붙여썼지만 앞으로는 띄여쓰며 주임, 국장과 같은 관직명도 이름과 띄여쓰는 등 변화가 있다. 례하면 “보고 싶다”, “아는 것이 힘”, “연변대학 김모 교장”과 같은 것이다.         문장부호법도 많이 달라졌다. 도서, 신문, 잡지 등의 이름과 영화, 드라마 등의 제목을 나타 낼 때는 서명표 (《》)를 쓰지만 글제목, 그림, 노래와 같은 예술작품의 제목은 기존의 인용표(“”)를 쓰던데로부터 거듭서명표(〈〉)를 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로 되였던 “ㄴ, ㄹ”의 모음 앞에서의 발음은 기존의 원칙을 견지하여 “녀성, 랑비, 력사”를 “녀성, 랑비, 력사”로 발음한다.           새 《조선말규범집》이 발행됨에 따라 조선언어를 사용하는 교육, 신문출판, 방송을 비롯한 모든 관련기관들은 반드시 새로운 규범을 따라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길림신문은 5월부터 전부 새로운 규범으로 신문을 꾸린다는 방침이다.  
1075    매사냥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다... 댓글:  조회:3604  추천:0  2017-03-10
중동권 로열패밀리의 고급취미로 오늘날까지 명맥 유지 출시 20여 일 만에 사용자가 1000만 명에 육박한 포켓몬GO의 인기가 뜨거운 가운데, '사냥'이란 측면에서 매사냥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관통하는 과거판 포켓몬GO 라고 볼 수 있다. 일러스트 = 이진경 디자이너 [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얼마 전 비행기 좌석을 가득 채운 매 사진이 네티즌 사이에 화제가 됐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왕자가 여행을 떠나는데 함께 온 매 80마리를 태우기 위해 비행기 이코노미석을 사 좌석마다 매를 앉혀놓은 것. 좌석에 앉은 매는 안대로 눈을 가리고 편안한 여행을 즐겼고 이 풍경은 SNS를 통해 ‘매 팔자가 상팔자’, ‘매가 나보다 낫다’ 등 다양한 반응을 불러왔다.   한편 국내 출시 20여 일 만에 선풍적인 인기를 타고 실내에 머물던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한 ‘포켓몬GO’는 각 지역에 포진한 다양한 포켓몬과 거점에 자리 잡은 포케스탑(기본량 소진 시 유료 구매 아이템인 포켓볼 등이 5분 간격으로 제공되는 곳)을 토대로 현대판 ‘사냥’의 재미를 일깨워주고 있다.   앞서 언급한 사우디 왕자의 ‘매’들은 무슨 연유로 비행기에 가지런히 앉아 왕자의 사냥 여행에 동행한 것일까? 그건 바로 그 매들이 왕자의 매사냥을 위한 '실사판 포켓볼'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시대 고분 '삼실총' 벽화에서 나타난 매사냥 풍경. 고구려 때 이미 매사냥이 활발하게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사료다. 매사냥의 기원을 찾자면, 기원 전후 고조선 시대 만주 동북지방에서 수렵생활을 하던 숙신족(肅愼族)으로부터 습득한 것이 삼국시대로 내려와 성행했다고 전해진다. 매사냥은 선조들의 포켓몬GO?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사냥기술 중 하나인 매사냥은 매를 잘 훈련시켜 짐승을 사냥해오게 하는 사냥법으로 매(매목 매과의 송골매류) 뿐만 아니라 올빼미나 부엉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 재미가 어찌나 쏠쏠한지 과거 우리 조상들은 일응이마삼첩(一鷹二馬三妾)이라 하여 매사냥을 승마와 연애를 제치고 풍류의 으뜸으로 삼았다. 매사냥이 곧 조선판 포켓몬GO였던 것.   현대의 포켓몬GO유저들이 희귀 포켓몬과 포켓볼 충전을 위해 포케스탑 인근을 헤매는 동안 조선의 응사(鷹師, 매 부리는 사람)들은 꿩과 들짐승이 많은 산을 찾아다녔고, 현대의 포켓몬GO 유저들이 커브볼 연마에 여념이 없을 때 응사들은 매 훈련에 매진했다. 희귀 포켓몬이 거리에 불쑥 등장했을 때 잽싸게 포켓볼을 날려 잡는 희열을 응사들 역시 귀한 산짐승을 향해 날려 보낸 매가 매섭게 달려들어 먹잇감을 낚아챘을 때 느끼곤 했을 것이다. 잘 치장한 말 위에 올라탄 매 사냥꾼이 덤불 속 사냥감을 살피는 순간을 담아낸 단원 김홍도의 귀인응렵(貴人鷹獵). 지본담채, 31.7x51.5cm, 간송미술관 소장 매사냥의 역사   선사 시대부터 시작된 매사냥은 삼국시대에 이미 우리나라 전역에서 널리 유행했는데 고구려 시대 고분인 삼실총 벽화에 매사냥에 나선 응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어 당시의 유행을 짐작케 하며, 백제는 일본 왕실에 매사냥 기술을 최초로 전해줄 정도로 매사냥의 종주국이었다. 일본과 중국은 이런 백제를 두고 응준(鷹準 매의 표준)이라 칭했다. 고려시대 충렬왕은 매사냥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매의 사육과 사냥을 전담하는 응방이란 관청을 설치해 매사냥을 체계적으로 육성했다. 비단 매사냥이 한반도에서만 유행했던 것은 아닌지라 충렬왕을 위시한 이후 왕들은 매를 잘 키워내 원나라에 조공 보냄으로 양국 우호를 다지기도 했다.  고려 후기에는 매사냥 열풍에 힘입어 야생 매를 포획, 사육, 훈련하는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기술한 응골방(鷹?方)이란 책이 나왔는가 하면, 조선 초 태종은 아예 7일 동안 매사냥에 전념하느라 정무를 잠시 미뤄뒀을 정도. 조선왕조실록 태종대에만 그의 매사냥 에피소드가 145회 등장할 정도니 진정한 매사랑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매사랑은 그의 첫째아들 양녕과 셋째아들 세종대왕에게 고스란히 대물림 됐는데, 세종실록에도 매사냥 일화가 무려 125회 언급되나 주로 선왕인 태종을 모시고 매사냥에 나간 기록이라 매 사랑과 함께 깊은 효심을 엿볼 수 있다.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의 매는 영리하고 사냥능력이 뛰어난 세계최고의 명품 매로 통했다. 끈기와 집요한 승부근성으로 한번 포착한 먹이는 반드시 잡아채는 매를 통해 세종은 명나라의 군마 2만 5천 마리 조공 위협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나라를 구한 매 15마리  아버지와 함께 매사냥을 즐겼던 세종 치세 8년, 별안간 명나라에서 말 2만 5천 마리 조공을 요구해와 나라가 도탄에 빠질 위기에 처하자 세종은 이를 막기 위한 고심 끝에 귀한 매를 준비하라 신하들에게 이른다. 명 황제 선종의 취미가 매사냥임을 알아낸 세종은 기지를 발휘해 잘 훈련된 매 3마리와 참매 12마리를 사신에게 보내 조선의 군사력을 경계하던 황제의 노기를 가라앉히고 환심을 샀던 것. 이후 명나라는 주기적으로 조선에 매 조공을 요구해왔고, 막대한 피해를 매를 통해 막아낼 수 있었다.  아부다비에 위치한 공립 매 병원은 사냥 중 다친 매의 치료 및 재활, 미용을 전문적으로 시행하는 기관으로 매 소유주를 비롯, 관광객에게 선진 매 문화를 소개하는 역할도 해나가고 있다. 사진 = ADFH 제공 아부다비의 명소, 매 전용 병원  이후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거쳐 매사냥이 크게 쇠퇴했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고 나자 매사냥의 전통이 거의 사라져 오늘에는 전국에 2명의 응사만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반면 앞서 매 좌석으로 비행기를 전세 낸 사우디아라비아는 매사냥이 활발하게 이뤄지며 잘 훈련한 매는 소유주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지표로 통용되는데, 아랍에미리트에서는 개인 소유의 매 밀수를 막기 위해 매에게 여권을 발행하고, 비행기 탑승도 가능하다. 매가 사냥 중에 다치기라도 하면 즉시 매 병원에서 치료가 이뤄지며, 사냥능력 향상을 위한 고도의 매 재활프로그램도 운영 중인데 이 진기한 광경을 보기 위해 프라이빗 투어로 매 병원을 찾는 관광객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고. 가장 유명한 병원은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 공립 매 병원(Abu Dhabi Falcon Hospital, ADFH)으로, 1999년에 개원한 이곳은 최고의 매 치료, 미용, 훈련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왕자가 자신의 매사냥을 위해 비행기에 80마리의 매를 태워 화제가 됐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 국가에서는 매사냥이 왕족, 부호들의 고급사냥문화로 중동국적기는 이코노미클래스 한정으로 매의 탑승을 허용하고 있다. 사진 = Reddit 캡쳐 지난 2010년 11월 아랍에미리트와 몽골, 한국 등 11개국의 매사냥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며 세계 각국의 독특한 매사냥 술이 주목받은 바 있는데, 80마리의 매를 비행기로 모시고 다니며 사냥에 나서는 아랍의 활발한 매사냥에 비해 국내 매사냥은 2명의 응사와 소수의 동호인을 통해 간신히 유지 중이다. 국내 출시 1주일 만에 이용자가 1,000만에 육박한 포켓몬GO의 인기에 비춰 과거 조상들의 사냥 문화가 무상히 사라져 가는 것을 불금한다.  /김희윤 작가 
1074    매로 까마귀떼를 쫓다... 댓글:  조회:4117  추천:0  2017-03-10
까마귀 피해 신고 감소 …일본내 다른 도시들도 관심 (서울=연합뉴스) 이해영 기자 = 일본은 방문해본 사람들은 도심 한복판에도 까마귀가 많은 사실에 놀라곤 한다. 도쿄(東京)를 비롯, 일본 주요 도시들은 아무 데서나 배설을 하는 것은 물론 때로 사람을 공격하기도 하는 극성스런 까마귀 퇴치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아직 뾰족한 대책은 없는 형편이다. 어지럽게 날고 있는 까마귀떼[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런 가운데 야마가타(山形) 현 야마가타 시가 최근 실시한 사냥용 매를 이용한 까마귀 쫓기가 상당한 성과를 거둬 여타 도시의 주목을 받고 있다.     요미우리(讀賣)신문에 따르면 야마가타시는 몰려드는 까마귀 떼를 쫓기 위해 23~25일 야마가타역 앞에서 맹금류를 이용한 까마귀 퇴치 실증실험을 실시했다. 야마가타시는 지난 8월에도 같은 실험을 실시했었다. 2번째인 이번 실험은 까마귀가 집단을 이뤄 행동하는 시기인 겨울에 맞춰 실시됐다. 계절별 효과를 확인해 내년 이후 지속적인 퇴치에 활용하기 위해서다.   2016년 12월 24일 저녁 무렵. 거대한 까마귀 떼가 서쪽 방향에서 야마가타 역 앞으로 몰려와 시내 중심가인 가스미초(香澄町)에 있는 호텔 지붕과 주변 빌딩의 간판 등에 내려 앉았다. 수십 마리씩 떼를 지어 울어대는 바람에 일대는 순식간에 까마귀 소리로 뒤덮였다. 오후 4시 50분께. 매사냥꾼 2명이 참매 한 마리와 해리스매 2마리를 데리고 나타났다. 매 사냥꾼은 야마가타 국제호텔 옥상으로 올라갔다. 깜짝 놀란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사냥꾼의 팔을 떠난 매가 까마귀들을 추격하자 시끄런 울음소리와 함께 한꺼번에 날아오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패닉상태에 빠진 까마귀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호텔 주변을 선회했다. 10분 정도 지나자 무리를 이뤘던 까마귀떼가 흩어지면서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게 됐다. 매사냥꾼인 세비로 고(33)씨는 "까마귀들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가끔 위협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야마가타현의 대표적 번화가인 가스미초 주변 지역은 4~5년 전부터 까마귀의 배설물 피해를 겪고 있다. 행정당국은 레이저 포인터를 이용해 까마귀를 쫓아 보는 등 갖가지 퇴치방법을 동원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가스미초 상가번영회 관계자는 "까마귀를 일시적으로 쫓아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곤 한다"며 머리를 내저었다. 야마가타시 환경과에 따르면 시내에 서식하는 까마귀는 약 4천 마리로 추산된다. 올해 들어서는 현재까지 까마귀의 공격이나 배설물 등의 피해신고가 27건 접수됐다. 피해신고는 2011년부터 증가해 왔으나 첫 번째 실험을 실시했던 8월에는 피해신고가 1건(전년 동기 대비 7건 감소), 9월에는 3건(전년 동기대비 9건감소). 10월 0건(동 3건 감소). 11월 1건(동 5건 감소)으로 눈에 띄게 감소했다. 환경과는 8월 1차 실험에서 일정한 성과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하고 이번 2차 실험에서도 상당한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환경과 관계자는 2차례의 실험결과 등을 종합해 "까마귀가 장기간 몰려오지 않을 효과적인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1073    매한테서 어원유래가 된 "시치미 떼다"?!... 댓글:  조회:3679  추천:0  2017-03-10
                                          [사진=한국전통매사냥보존회]         박 씨가 매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35년 전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산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새매 새끼를 집에 데려와 키운 것이 시작이었다. 박 씨의 아버지는 매를 다룰 줄 알았고 박 씨는 아버지에게 매 다루는 법을 본격적으로 배워 새매로 사냥을 시작했다. 그러나 취미로 하는 것이었을 뿐 매사냥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매와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군 복무 중에도 사육사로 일하며 매를 사육하고 조련하는 일을 맡아 전통 매사냥을 계속 연습할 수 있었다. 매사냥은 살아있는 매와 끊임없이 교감을 나눠야 하는 일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야 하는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도저히 매사냥에 집중할 수 없었다. 박 씨는 고심 끝에 직장생활도 접고 매사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주변사람들은 박 씨에게 ‘미쳤다’는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지금은 어느 정도 박 씨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지만 직장을 처음 그만 두었을 때만해도 경제적으로 도움이 전혀 안되는 매사냥에 매달리는 박 씨를 비웃는 사람이 많았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쯤으로 취급받고 멸시받았을 때는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박 씨는 “멀쩡하게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무병을 앓고 어쩔 수 없이 신 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는 것처럼 내가 매사냥을 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라며 “나는 매와 함께 있을 때면 이 세상 어느 하나 부러울 것이 없다”며 매에 대한 강한 애정을 표현했다. 그는 현재 키우고 있는 매 네 마리에게 매 끼니마다 영양제와 닭고기를 먹이는 등 그야말로 지극 정성으로 매를 돌보고 있다. 박 씨의 오랜 노력 끝에 대전시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지만 경제적인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예산 지원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원금이 있지만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매에게 먹일 영양제와 닭고기를 사는 비용은 전적으로 박 씨의 몫이다. 박 씨의 아내 문명자(47) 씨는 “남편이 사람은 굶어도 매는 굶길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매에 대한 애정이 깊다”며 “오죽하면 내가 나를 더 사랑하는지 매를 더 사랑하는지 말해달라고 투덜거리겠느냐”고 말했다. 박 씨는 이런 아내에게 항상 미안할 따름이다. 박 씨가 더욱 걱정인 것은 돈벌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매사냥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더 이상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면 오랜 전통은 금세 사라지게 될 것이다. 현재 박씨에게 매사냥을 배우고 있는 제자는 한 명도 없다. 가끔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지만 얼마 되지 않아 곧 떠나고 만다. 박 씨는 “세상이 갈수록 빠르게 돌아가고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매사냥은 더욱 발붙이기가 힘들어진다”며 “단순한 취미생활이 아니라 전통을 지키겠다는 자부심이 없다면 쉽게 매사냥에 빠져들 수 없다”고 말했다. 인간은 먹을거리를 해결하기 위한 생존의 수단으로 선사시대부터 매사냥을 해왔다. 삼국시대에는 왕실과 귀족들이 즐기는 레포츠 문화로 발전했고 고려 충렬왕은 매사육과 사냥을 전담하는 응방제도를 둘 정도였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매사냥이지만 형식적인 무형문화재 지정 말고는 정부 차원의 보존 노력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박 씨는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일반 사람들도 매사냥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한국전통매사냥보존회(www.kfa.ne.kr)’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박 씨 부부는 오늘도 생업으로 하고 있는 주유소에서 나온 수입 대부분을 매 네 마리를 키우는 데 쓰며 살고 있다. 박 씨는 “매사냥의 명맥이 끊이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며 “인생은 돈이나 명예를 거머쥐었을 때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법”이라고 말했다. 매사냥꾼이 전하는 매에 관한 상식들   ‘시치미 뗀다’는 말이 유래한 시치미. ‘시치미’는 ‘매의 주인을 밝히기 위해 주소를 적어 매 꽁지 위의 털 속에 매어 두는 네모진 뿔’이라는 뜻. 매사냥이란? 매를 부려 꿩을 잡는 사람은 지방에 따라 수알치, 봉받이, 매방소, 매받이 등으로 불린다. 매사냥을 할 때에는 수알치 외에도 잔솔밭에 숨어 있는 꿩을 날리기 위해 작대기로 나무를 두드리며 ‘우, 우’ 소리를 내는 4∼8명의 털이꾼과 매나 꿩이 날아간 방향을 털이꾼에게 알려주는 매꾼이 합세한다. 매사냥은 늦여름에 시작해 겨울까지 하며 매 한 마리가 하루에 잡는 꿩은 15마리 정도다. 매사냥 전날에는 매의 신경을 곤두세우기 위해 매의 가슴을 쓰다듬어서 잠들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꿩을 움켜쥐고 있는 매에게서 꿩을 때어낼 때에는 꿩을 쥔 다음 조금씩 내려뜨려서 빼앗아야 한다. 매는 발톱에 온 힘이 집중되어 있으므로 서서히 떼지 않으면 매의 발톱이 다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매사냥은 주로 어떤 매로 하나? 매사냥에는 주로 참매가 많이 이용된다. 참매는 장애물이 있는 산속 및 들판에서 순발력 있게 사냥을 잘한다. 비교적 좁은 장소에서도 사냥을 잘하기 때문에 참매 사냥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같은 참매라고 해도 부르는 이름은 여러 가지다. - 보라매: 만 1년이 안된 어린 매  - 보갈이: 어린 보라깃과 성조털이 섞여있는 참매 - 초진이: 1년 이상 2년 미만의 참매 - 재진이: 2년 이상이 지난 참매 - 수진이: 집에서 1년 동안 키운 매(사람에게 길들여진 매) - 산진이: 산에서 1년 동안 자란 매(야생에서 자란 매) - 새매: 참매의 축소판이며 차이가 있다면 덩치가 참매에 비해 훨씬 작고 어린매인 경우 참매는 배털이 세로줄인데 새매는 가로무늬이다. 송골매로 매사냥을 하기도 했다. 송골매는 날진이라고도 부른다. 비행속도 및 수직강하 수직상승 등 비행기술은 매 중에서 최고이며 넓은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송골매 사냥은 우리나라에서 사라졌다.  ‘시치미 뗀다’는 말은 매에서 유래했다? 이청준의 소설 에서는 매 꼬리에 ‘응주 00리 곽돌, 번개쇠’ 라 적혀있는 깃털이 달려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을 ‘시치미’라고 한다. 즉 매주인의 주소, 이름, 매이름을 기록한 것으로 일종의 매 명찰이다. 그래서 매사냥을 하다가 매가 달아나면 이 달아난 매를 발견한 사람은 시치미에 새겨진 이름을 보고 매를 주인에게 돌려준다. 이때 매주인은 그 대가로 닭 값을 주거나 매사냥하여 꿩을 주기도 한다. 매 값을 치를 수 없는 경우에는 매가 날아 들어간 마을에 가서 이삼일 매를 놀아 주어야 한다.  그런데 매를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시치미를 떼어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여기서 알고도 모른 체 하는 행동을 가리켜 ‘시치미 뗀다’고 하는 말이 유래했다.      
1072    매나 독수리로 사냥하며 즐기는것도 "스포츠"라니?!... 댓글:  조회:7700  추천:0  2017-03-09
요약 매나 독수리를 사냥하며 즐기는 스포츠. hawking이라고도 함. 목차 역사 새와 기술 한국의 매사냥 역사 매사냥은 인간이 선사시대부터 즐긴 고대의 오락이다. BC 8세기에 아시리아에서 매사냥을 했다는 증거가 있다. 유럽과 영국의 상인·모험가·십자군들은 동양의 매사냥에 익숙해졌고, 고국으로 돌아갈 때 매와 매사냥꾼을 함께 데리고 갔다. 이것은 중세에 서유럽과 영국제국 특권층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다. 17세기에 산탄총이 도입되고 공유지가 사유지가 되는 한편, 역사가 오래된 나라에서 수많은 사회적 격변이 일어나자 매사냥은 거의 사라졌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주로 매사냥 클럽 회원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중세 유럽 귀족들의 매 사냥 중세 유럽, 영국귀족이 매사냥을 즐기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 영국에서는 1770년경 영국매사냥꾼협회가 결성되었지만, 1838년 당시 협회 간사였던 버너스 경(卿)이 죽자 해체되었다. 영국 동부지방에 있는 매사냥 클럽의 송골매들이 주로 잡는 백로가 드물어지고 매사냥꾼들의 사냥터인 황야가 개간되었기 때문에 매사냥의 중심이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옮겨갔으며, 1839년에는 네덜란드 국왕인 빌렘 2세의 후원으로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의 루 매사냥 클럽이 결성되었다. 이후 8년 동안 1,500마리의 백로를 잡았다. 1853년 왕이 후원을 철회하자 루 클럽도 사라졌다. 영국에서는 몇몇 아마추어와 그들에게 고용된 전문 매사냥꾼들이 명맥을 유지하다가, 1864년 윌트셔다운스를 휘젓고 다니는 떼까마귀를 잡기 위해 영국 올드 매사냥 클럽이 결성되어 1926년까지 존속했다. 1927년에 결성된 영국매사냥꾼 클럽은 20세기 후반에 약 250명의 회원(절반 이상이 영국인)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약 30명만이 직접 매를 키우면서 매사냥을 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점액종증이라는 토끼에게 치명적인 전염병이 퍼지면서 토끼의 수가 줄고 옛날부터 잡아온 사냥감이 대부분 보호동물 목록에 올라 이 스포츠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올빼미를 비롯해 사냥감이 되는 영국의 모든 조류가 법률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매사냥꾼이 매사냥을 위해 새끼 매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내무성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야생생물보호, 수렵법). 유럽의 다른 나라에는 아직까지 매사냥 클럽이 존재한다. 프랑스의 샹파뉴 클럽은 1870년에 사라졌지만 프랑스 매사냥꾼협회라는 조직이 있다. 독일에서는 1923년 결성된 독일 매사냥꾼 클럽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도 매사냥꾼 클럽이 있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에 1,400명의 회원을 보유한 북아메리카 매사냥꾼협회가 매사냥을 대표하고 있다. 리비아에서는 지금도 매사냥을 하고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와 페르시아 만 연안의 족장들은 느시류를 잡기 위해 바다매를 훈련시키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펀자브 지방과 파키스탄의 북서부 변경지방에서는 매사냥꾼들이 매류를 이용하여 오리류를 잡고, 참매류를 이용하여 자고새류를 잡는다. 라호르와 암리차르에서는 매의 다리에 방울을 만들어 단다. 일본에는 몇 명의 매사냥꾼이 있는데 이들은 산에서 사는 뿔매로 토끼를 잡고, 참매로 꿩을 잡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으며, 매사냥을 다룬 잡지기사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매사냥 기술을 다룬 옛날의 전문서적들이 다시 간행되면서 새로운 매사냥 애호가들이 늘고 있다. 새와 기술 매류·올빼미류·독수리류는 육식성 야생 조류로 생존하기 위해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다. 인간이 기술과 끈기로 이 새들을 훈련하면 특정한 사냥감을 잡아서 먹어치우지 않고 가져오도록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어떤 새는 타고난 기질과 비행습성 때문에 다른 새보다 사냥에 더 적당하기도 하다. 오랫동안 가장 인기를 얻고 있는 새는 사냥에 알맞는 특성을 모두 갖고 있는 매(peregrine falcon)이다. 매는 어떤 나라의 기후변화에도 견딜 수 있고, 튼튼하고 빠르며, 상황에 따라 온순해지기도 하고 사나워지기도 하며 야생상태에서 잡아도 쉽게 길들일 수 있다. 매사냥(falconry) 해리스 매를 훈련시키는 매 사냥꾼의 모습 이런 특성을 갖고 있는 매는 '매류'라고 부르는 날개가 긴 매와, '새매류'라고 부르는 날개가 짧은 매의 두 부류로 약 12종이 있다. 새매속(屬)에는 참매와 새매가 있다. 요즘은 농약 때문에 매도 다른 육식성 조류와 마찬가지로 급속히 즐어들고 있다. 미국에서는 DDT 사용으로 매가 거의 멸종했었지만, DDT 사용이 금지된 뒤 1980년대에 매의 수가 많이 늘어났다. 매사냥꾼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언어를 갖고 있다. 그들은 크기가 암컷보다 1/3이나 작은 수매를 '터슬'(tiercel)이라고 부르고, 몸집이 큰 매사냥용인 암컷을 '팰컨'(falcon)이라고 부른다. '아이어스'(eyas)는 깃털은 다 났지만 아직 날지 못하는 둥지에서 잡아온 새끼매를 가리킨다. 야생상태에서 잡은 어린 매는 대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잡히기 때문에 '패시저'(passager)라고 부르고, 다 자란 야생매는 '해거드'(haggard)라고 부른다. 새끼매를 잡은 뒤에는 길들일 수 있게 될 때까지 모이판에서 먹이를 먹여야 하는데, 이 때는 나무판자나 돌덩어리에 새끼매를 묶어두고 항상 같은 장소에서 규칙적으로 날고기를 먹인다. 인도와 아프리카에서는 새끼매를 매사냥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 반면 유럽과 미국에서는 흔히 사용한다. 날개가 긴 매류는 탁 트인 곳에서, 날개가 짧은 새매류는 생울타리와 숲에서 사냥하는 데 더 적합하다. 매류는 대개 하늘을 맴돌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힘차게 땅으로 내려와 흥분상태에서 쉽게 먹이를 죽이지만, 때로는 먹이를 죽이지 않은 채 움켜쥐고 있는 경우도 있다. 토끼와 꿩을 잡을 때 주로 사용되는 참매는 나무 위에 올라앉아 사람과 사냥개들이 풀숲에 숨어 있는 사냥감을 찾아다니는 동안 열심히 그 광경을 지켜보기도 한다. 사냥감이 놀라서 날아오르면, 참매는 맹렬히 추격하여 먹이를 움켜잡고 땅으로 내려온 후 거대한 발톱으로 먹이의 숨통을 끊는다. 몸집이 더 작은 새매류는 자고새류와 메추라기류처럼 작은 사냥감과 찌르레기류를 잡는 데 가장 좋다. 매사냥꾼은 새끼매와 덫으로 잡은 야생매 중 어느 것을 길들여 사냥에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초보자는 대개 합법적으로 얻은 새끼매를 사용한다. 매를 덫으로 잡으려면 끈기와 기술이 필요하다. 야생매가 좋아하는 먹이 위에 그물을 치고 그 근처에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는 것도 매를 잡는 한 가지 방법이다. 매가 먹이를 먹으러 오면 밧줄로 그물을 잡아당긴다. 매를 잡는 데 성공하면, 매사냥꾼은 당장 매를 그물에서 빼내어 다리에 '제스'라고 부르는 가죽끈을 매고 '러프터'(갓 잡은 새에게 사용하는 부드러운 가죽두건)로 매의 두 눈을 가린다 . 길들이기의 첫번째 단계는 두꺼운 장갑을 낀 손에 매를 앉히고 날마다 몇 시간씩 부드럽게 말을 걸면서 깃털로 매를 쓰다듬어주는 것이다. 매가 눈가리개를 하지 않고도 사람의 손에서 먹이를 받아먹을 수 있게 되면 두건을 벗고 사람과 사냥개와 함께 매사냥의 생활에 적응할 준비가 된 것이다. 그 다음에는 속에다 솜을 채운, 비둘기나 다른 새의 날개를 달아 만든 가짜 미끼에 진짜 고기를 묶어놓고, 이 가짜 미끼에서 먹이를 떼어먹는 훈련을 시킨다. 사람은 가짜 미끼를 밧줄에 매달아 빙빙 돌리고, 매는 점점 더 먼 거리에서 미끼를 공격하는 훈련을 받는다. 이 훈련이 완전히 끝나면 매는 스스로 사냥감을 죽이는 훈련을 끝내고 사냥할 준비가 된 것이다. 새끼매도 야생상태에서 잡힌 매와 거의 똑같은 방법으로 길들인다. 한국의 매사냥 한국에서는 아득한 고대부터 매사냥을 해왔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아신왕은 매사냥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유사〉 영취사에는 매를 놓아 꿩을 쫓게 했으나 매의 행적을 알 수 없어 매에게 달아놓은 방울소리를 듣고 찾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매의 사육과 사냥을 다루는 응방이라는 관청을 설치했다. 사냥을 하는 매는 송골매라 하고 새끼 때부터 길들인 매는 보라매 또는 해동청이라고 한다. 야생으로 자란 산지니는 사냥에 이용할 수 없다. 또한 보라매는 초지니 또는 갈지개(1년생 이하), 재지니(1~2년생), 삼지니(2~3년생)로 나뉘며, 이중 초지니가 사냥에 가장 적합하다. 매는 배가 부르면 사냥을 하지 않거나 달아나므로 항상 허기진 상태를 유지시켜야 한다. 호연지기를 기르는 활달한 놀이로서 즐겼던 매사냥은 일정한 제약 없이 산이나 들판을 자유롭게 다니는 스포츠로서도 손색이 없다. [Daum백과] 매사냥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유형 개념용어 분야 예술·체육/체육 요약 매를 날려 보내어 꿩이나 토끼 따위의 짐승을 잡는 수렵활동.   기산풍속도첩 / 매사냥 ≪기산풍속도첩≫에 보이는 매사냥 가는 모습. 내용 옛날 기록에는 방응(放鷹)이라고 하였다. 길들인 매로 사냥을 하는 것은 활이나 총으로 짐승을 잡는 수렵 행위보다는 자연적이고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우리 선인들은 아득한 고대부터 매사냥을 하였다. ≪삼국사기≫에 백제 아신왕은 성품이 호매하여 매사냥을 좋아했으며, 법왕 1년(599) 12월에는 살생을 금지하여 집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전부 놓아 주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삼국유사≫ 영취사에는 어떤 사람이 매를 놓아서 꿩을 쫓게 하였는데, 그 매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가 매에 달아 놓은 방울 소리를 듣고 찾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매의 사육과 사냥을 전담하는 응방(鷹坊)이라는 관청까지 설치했는데, 충렬왕은 매사냥에 열중하여 민간에 피해가 많았다. 그래서 충목왕 때는 응방을 폐지했는데, 공민왕이 매를 사랑하여 다시 설치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응방이 있고 응방군까지 있어서 매사냥이 한층 성행하였음을 알려 준다. 조선시대의 태종은 매사냥을 자주 즐겼으며, 연산군 때는 매사냥 때문에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중종 때는 일부 폐지하였으나 민간에서 행하는 매사냥은 금지하지 않았다. 김창업(金昌業)은 매사냥의 호쾌한 기개를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자 넘은 보라매를 엊그제 갓 손 떼어/빼짓체 방울 달아 석양에 받고 나니/장부의 평생 득의는 이뿐인가 하노라.” 김창업은 조선 숙종 때 사람으로 벼슬을 버리고 시골에 파묻혀 살면서 농사짓고 매사냥이나 즐기며 유유자적 학문에만 열중한 큰 학자였다. ‘빼짓체’란 ‘빼깃이’라고 해서 매의 꽁지 위에 표하기 위해 덧꽂아 맨 새의 깃을 말하는데, 이 깃에 맑은 소리가 나는 청동방울을 달아 놓아 매가 움직이는 대로 방울 소리가 울리기 때문에 꿩을 쫓아 날아간 매를 방울 소리로 찾아내게 되는 것이다. 사냥을 하는 매는 송골매라 하며, 새끼를 길들여서 사냥에 쓰는 매를 보라매라고 하고, 보라매를 해동청(海東靑)이라고도 부른다. 산에서 제풀로 자란 매를 산지니라고 하는데, 이 산지니는 길이 들지 않아서 먹이를 뜯어 먹고 배가 부르면 제멋대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사냥에는 이용할 수가 없다. 사냥매는 아직 날지 못하는 새끼를 잡아서 사람 손으로 길들인 매라야 한다. 이렇게 길들인 매를 보라매 외에 육지니·수지니·수진개·수진매라고도 한다. 보라매도 1년 이내 것은 초지니 또는 갈지개라고 하고, 1년에서 2년까지는 재지니, 2년에서 3년까지는 삼지니라고 부르는데, 사냥하기에는 초지니가 날렵하고 용맹무쌍하여 가장 좋으며, 재지니·삼지니쯤 되면 동작이 느려서 별로 신통치 못하다. 매 중에서도 백송고리는 성질이 굳세고 날쌔어 해동청 가운데 아주 귀하게 아끼는 종류이며, 도롱태·황조롱이·새호리기 같은 것은 육지니로서는 적합하지 않아 기르지 않는다. 새매의 수컷인 난추니는 깃이 예리하여 새를 후려쳐서 잡고, 암컷인 익더귀는 독수리를 닮아 능히 호랑이를 잡는다고 한다. 매사냥은 보라매를 중심으로 행한다. 매의 발톱이 날카롭기 때문에 보라매를 받아드는 매꾼은 팔뚝에 두툼한 토시를 끼고, 그 토시 위에 매를 받아들고 사방이 잘 내다보이는 산마루에 오른다. 몰이꾼과 털이꾼들이 ‘우·우·’ 소리를 내면서 산줄기 나무숲을 훑어서 꿩을 퉁긴다. 어디서 꿩이 날아오르면 산마루에서 목을 지키고 있던 매꾼은 보라매가 날아가는 꿩을 확실하게 알아차리게 하고 나서 매를 떠나 보낸다. ‘매나간다’고 매꾼이 소리 지르면 몰이꾼들은 방울 소리를 듣고 매가 날아간 방향으로 달려간다. 험준한 산줄기를 타고 넘고 골짜기를 허겁지겁 건너 질러 쫓아가다가 방향을 모르게 되면 잠시 귀기울여 보라매의 방울 소리를 찾아 듣는다. 이때는 아무리 숨이 가빠도 쉴 여유가 없다. 일각이라도 속히 매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매가 꿩을 잡았을 때는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꿩 등 위에 올라타고 앉아서 표독한 주둥이로 꿩의 머리를 쪼거나 눈을 뽑아내는데, 그럴 적마다 꿩이 고통에 못 이겨 꿈틀거리면 매의 빼깃에 달린 방울이 가볍게 울리곤 한다. 사냥꾼이 일찌감치 도착하면 매의 발 밑에 깔려 꼼짝달싹 못하고 살아 있는 꿩을 그대로 빼앗아 낼 수 있지만, 웬만큼 늦어지면 벌써 꿩은 눈이 빠지고 머리가 깨져서 죽어 있게 마련이다. 더구나 아주 늦으면 아무리 길들인 육지니라도 잡은 꿩을 포식하고 제멋대로 훨훨 날아가 버리고 말기 때문에 매가 꿩을 먹기 전에 찾아내야만 한다. 꿩을 덮친 매를 발견하면 매꾼은 허리춤에 매단 주머니 속에서 닭의 넓적다리를 꺼내어 매에게 먹이면서 잡은 꿩을 가로채 낸다. 그리고 다시 보라매를 토시 위에 받아 올려 한쪽 다리목에 잡아맨 짧은 끈을 감아쥐고는 닭고기를 더 먹이지 않는다. 매는 배가 부르면 사냥을 안하거나 달아나 버리기 때문에 항상 허기지게 먹이를 많이 먹이지 않는 것이다. 수렵 행위는 고대인의 생활활동이었다. 원시인은 식량을 획득하기 위해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였고, 부족국가시대에는 무예의 수련으로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수렵을 행하였다. 매사냥은 자연에서 호매한 지기를 기르는 활달한 행락으로서 우리 선인들이 즐겨 해왔고, 일정한 제약 없이 산야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스포츠로서도 심신을 단련하는 데 손색이 없는 활동이다. [Daum백과] 매사냥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매사냥     [상세정보]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백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훈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지역에서 매를 이용해 꿩이나 토끼 등을 잡는 전통 사냥 방식. [개설] 진안군 백운면 지역에서 행해지는 매사냥은 길들인 매로 꿩이나 토끼를 잡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행하여졌던 민속놀이이다. 진안 지역 곳곳에서는 예전부터 매사냥이 행하여졌으나 2013년 현재는 백운면 원촌 마을에 거주하는 박정오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매사냥 기능 보유자] 2013년 현재 매사냥 기능 보유자는 진안군 백운면 백암리 원촌 마을에 거주하는 박정오[1940년생]이다. 작고한 김용기로 부터 1980년대부터 매사냥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2007년 3월 23일이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박정오는 그물을 이용해 매를 직접 잡아 꿩이나 토끼를 사냥할 수 있도록 길들인다. 또한 그물, 시치미, 매방울 등의 사냥 도구 제작 능력을 인정받아 무형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매사냥 준비] 매를 받으려면[잡으려면] 보통 비둘기를 미끼로 이용한다. 매 사냥꾼은 매를 잡는 ‘잡는다’는 표현 대신에 ‘받는다’라고 한다. 매를 인격체로 대한다는 의미이다. 보통 2마리 정도 받는다. 매를 받는 그물은 명주실을 사용하여 만든다. 변문수에 의하면 진안군 주천면 운봉리 안정동 운장산 중턱 물통골 골짜기에 3개의 폭포[3탕, 상탕, 중탕, 하탕]가 있는데, 이곳에서 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하탕에서는 목욕재계를 하고, 중탕에서는 제수 용품을 준비하며 그곳에서 떡과 밥을 지어 상탕에서 제사를 지낸다. 매를 받을 때 이와 같이 산제를 지내는 이유는 힘이 세고 용맹스런 매를 잡을 수 있도록 기원하기 위함이다. 산제를 드린 후 운장산 복두봉에 가서 움막을 짓고 매 그물을 설치한 다음에 비둘기를 미끼로 매를 받는다. 매가 잡히면 가슴 크기에 따라 7치, 8치 등으로 부르는데 이때 “매했네” 하며 매를 받았음을 알린다. 매를 받은 후 다시 산제 지낸 곳에 가서 제사를 지낸 다음 매를 길들인다. 이후 사냥에 나서게 된다. [매의 종류와 기르기] 보라매는 당년 새끼로 부화한지 채 1년이 안 되는 새끼 매를 말한다. 송골매는 사냥용 매를 칭한다. 산진이는 야생에서 1년 이상 자란 매를 말한다. 보라매로 들어와 1년을 사람 손에 난매를 수진이라 한다. 보라매와 산진이의 구분은 털 무늬를 보고 안다. 보라매는 죽엽같이 털 무늬가 아래로 향하나 산진이는 무늬가 가로로 생긴다. 먹이로 제일 좋은 것은 쥐를 날 것으로 주는 것이다. 지금은 쥐 대신에 닭고기를 준다. 쥐는 기름기가 없고 고기가 연하며 소화가 잘되고 영양이 적어서 기운 조절에 용이하다고 한다. 반면 닭고기는 기름기가 많고 소화가 잘 되지 않아 기운 조절에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매사냥 훈련법] 매사냥에 나서려면 최소 5~6명이 있어야 하고 평균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매사냥에서 역할은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사냥할 매를 받는 사람을 수알치, 봉받이, 매방소, 매받이 등 다양하게 부르나 진안 지역에서는 ‘봉받이’라고 부른다. 봉받이는 매를 훈련시키는 사람이며 매의 주인이다. 매는 주인을 알아보기에 다른 사람이 훈련을 시키면 낯가림을 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사랑(舍廊)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매를 앉히면서 낯가림을 없앴다고 한다. 날짐승이 첫 번째로 펼치는 날갯짓을 ‘배 본다’고 하는데, 매가 날아가는 가는 것을 지켜보는 배꾼 1~2명이 있어야 한다. 꿩을 모는 털이꾼이 있어야 한다. 털이꾼은 보통 4~5명 정도며 최소 3명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준비 되면 매사냥에 나서게 된다. [매사냥 과정] 매사냥 나서기 2~3일전에 매의 건강 상태를 살펴야 한다. 이때부터는 평소 먹이의 절반 정도 준다. 그래서 매로 하여금 무척 배가 고픈 상태로 만들어 사냥에 나선다. 사냥 전날 사냥 장소와 시간을 정하여 사냥감을 몰아주는 털이꾼, 사냥감 방향을 추적하는 배꾼 등과 할 일을 정하고 논의한다. 사냥 장소는 사냥감인 꿩이나 토끼가 살 수 있는 논이나 밭을 끼고 있는 야산 등 농경지 부근이 좋다. 특히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야산이어야 한다. 매사냥하는 날은 소위 3불이라 하여 삼가는 것이 있다. 비가 올 때는 사냥하지 않는 우불(雨不),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사냥을 하지 않는 모불(暮不), 바람이 불 때 사냥하지 않는 풍불(風不)이 그것이다. 봉받이가 매를 데리고 산 정상에 올라가 서 있고 산 아래 자락에서는 꿩이나 토끼를 몰면 배꾼이 방향을 알려줘 봉받이의 신호에 따라 매가 사냥에 나서게 된다. 이때 봉받이는 “매 나간다”라고 외친다. 매가 꿩을 사냥하면 방울 소리를 따라 찾아가 매에게 약간의 먹이를 주고 사냥한 꿩은 슬그머니 빼돌린다. 만약 꿩을 잡지 못했으면 봉받이가 매를 달래서 다시 사냥을 시도한다. 사냥이 끝나면 꿩 탕을 끓여 막걸리를 먹으면서 하루 일과를 정리한다. 사냥에 나선 매가 먹이를 많이 먹으면 살이 올라 도망갈 수 있기 때문에 며칠 쉬었다 다시 사냥에 나선다. [의의와 평가] 매사냥은 삼국 시대 이래로 전승된 문화인데 우리나라뿐 아니라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 몽골은 물론 멀리는 영국이나 미국에 이르기까지 행해졌던 사냥 법이다. 우리나라는 전역에서 매사냥이 있었으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사라진지 오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사냥이 진안 지역에서 전승되는 이유는 산세가 높고 계곡이 깊어 매의 사냥감이 되는 토끼나 꿩 등 날짐승이 많이 사는 자연환경 때문이다. 여기에 매사냥에 대한 열정을 가진 전영태, 김용기, 박정오 등 매 사냥꾼이 배출되었기에 전승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전통 수렵 문화인 매사냥 전승을 위해서는 전수자의 양성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속담에 ‘시치미를 떼다’란 말이 있다. 그 이유는 매꼬리에 달린 *시치미를 떼고 자기 것으로 달고 나서 우긴다고 하여, 나쁜 짓을 하고서도 뻔뻔스럽게 능청 떨 때 쓰이는 말이다. 또한 매가 잡은 꿩은 바로 빼앗지 아니한다. 그 이유는 바로 빼앗으며 매가 꿩 생각이 나서 사냥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적당히 먹게 한 뒤 준비한 닭고기로 유인하여 꿩을 치우고 대신 주는 것에서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이 있다.        매들은 어둡거나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훈련을 하지 않는 3금 한다. 그리고 매는 여름에는 약하고 겨울에는 강하다.    본행사로 ‘해리스매’는 응사 박용순씨가 고궁 호출 비행을 하였습니다. ‘해리스매’는 미국 남부나 칠레지역에 서식합니다. 전수자 유지영씨가 ‘황조롱’로 날밥 부르기, *멍텅구 시연, 메추리사냥을 하였습니다.  전수자와 이수자가 참매 훈련과정을 *뜀밥, 날뜀박, 줄밥, 꿩 사냥을 보여 주었으며, 응사 박용순씨가 참매로 전통 봉사냥과 송골매로 고궁 선회비행을 선보였습니다. ‘송골매’는 발톱과 주둥이가 갈고리 모양으로 날카롭고 재빠르게 날개를 펴서 꿩이나 비둘기를 사냥하는 맹금류입니다. 흑진주의 눈을 가진 매우 귀여운 맹금류이며, 매 중에서 최고로 빠른 새입니다. 하늘에서 날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수직하강을 하는데 그 속도가 시속 370km라고 합니다.  \\\\\\\\\\\\\ {닭값을 물어준  매  사냥꾼}  옛날  옛적에 매 사냥꾼들이 꿩 잡는 매를 길들여서 사냥을 나섰습니다. 산에서 매를 풀어두고 꿩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매에 쫓기던 꿩은 숨을 데가 없어 위태롭게 되자 산기슭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 숨어 버렸습니다.   꿩을 쫓아 마을로 내려온 매는 아무리 찾아봐도 꿩이 보이지 않자, 어느과부 집 닭장 속에 있던 씨암탉을 채어 물고 늘어졌습니다. 닭이 죽는다고 퍼덕거리며 "꼬꼬댁" 하고 소리를 지르자, 과부는 급한 김에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닭을 낚아채고 있던 매를 때려잡았습니다.   뒤늦게 매를 쫓아온 사냥꾼들이 이 사실을 알고 과부에게 매 값을 물어 내라고 을러댔습니다.   "매가 우리 씨암탉을 물어 죽일 판이라 하는수없이 매를 잡았다" 라고 과부가 변명을 해도, 매사냥꾼들은 " 매가 닭을 물어 죽이면 닭 값을 물어 달라고 하면 될 일이지, 왜 비싼 매를 잡았느냐? " 라며,  매를 잡은 이가 힘없는 과부인줄 알고 더욱 거칠게 매 값을 요구했습니다.   이렇게 "매 값을 물어달라" " 못 물어 준다"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합의가 되지 않자 마침내 원님을 찾아갔습니다.   원님이 양쪽 사정을 들어보니, 과부가 잘못한 일이 없건마는 매 사냥꾼들의 주장대로라면 과부가 꼼짝없이 매 값을 물어 주게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원님은  매 사냥꾼들에게 물었습니다.   "매는 무엇을  잡느냐?  " 꿩을 잡습니다." "매 값은 얼마고 닭 값은 얼마냐? " " 매는 열냥이고 닭은 석냥입니다." " 그럼 솔개는 무엇을 잡느냐? "  " 솔개는 닭과 개구리를 잡아먹습니다." " 그럼 솔개 값은 얼마냐?"  " 솔개는 닭이나 잡아먹고 사람들에게 피해만 주기 때문에 아무도 값을 쳐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솔개 값은 없습니다."   " 솔개는 닭을 잡고 매는 꿩을 잡는다고 했지?  그럼 너희들 매는 무엇을 잡았느냐?  꿩을 잡지 않고 닭을 잡아서 피해만 주었으니 사실상 솔개 노릇을 한것이 아니냐 !  솔개는 값이 없고 닭은 값이 석냥이니 닭 주인에게 당장 석냥을 물어 주어라 !" 매 값을  받아내려던 매 사냥꾼들은 매 값을 받아 내기는커녕 오히려 과부에게 닭 값  석 냥을 물어 주어야 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같죠?... \\\\\\\\   분류 매목>매과 서식지 해안의 절벽, 섬 먹이 잡식성(조류, 소형포유류, 설치류) 크기 수컷 38∼42cm, 암컷 49∼51cm 학명 Falco peregrinus 수명 약 15년 목차 특징 번식정보 구별하기(동정 포인트) 카리스마 ‘매’로 사냥하는 응사(鷹師) 특징 •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관찰되는 텃새이고 해안이나 섬 등의 암벽에서 번식하고 겨울철에는 강 하구, 호수, 농경지, 습지 등지에서 생활한다. • 번식기 외에는 단독생활을 하며, 비행능력이 뛰어나 공중에서 먹이를 낚아채 사냥하기도 하고 땅 위의 먹이는 덮쳐 발톱으로 움켜쥐어 잡는다. •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동물 Ⅰ급이며, 문화재청 지정 천연기념물 323-7호로 지정되어 있다. 번식정보 • 번식기인 3월 하순에서 5월 사이에 암수가 짝을 지어 생활한다. • 해안이나 섬의 절벽에서 번식하고 움푹 들어간 맨 바닥에 바로 알을 낳는다. • 알은 보통 3∼4개 정도 낳으며 회갈색 바탕에 적갈색 얼룩무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 알을 품는 기간은 약 28∼29일이며, 암수가 교대로 알을 품는다. 구별하기(동정 포인트) 매 • 암컷과 수컷은 크기 차이로 구분할 수 있으나, 야생에서는 구별이 쉽지 않다. • 몸의 윗면은 짙은 청회색이며, 몸 아랫면은 흰색이지만 때론 붉은색을 띠기도 하며, 검은색의 가로 줄무늬가 있다. • 어린 새의 몸 윗면은 옅은 황갈색을 띠며, 몸 아랫면은 갈색의 세로 줄무늬가 있다. • 유사종인 새홀리기는 크기가 더 작고 몸 아랫면에 흑갈색의 두툼한 세로 줄무늬가 있어요. 또한, 아랫배와 경부깃이 적갈색이다. 카리스마 ‘매’로 사냥하는 응사(鷹師) 우리나라 전통의 매사냥이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특이한 것은 11개 나라가 무형 유산 등재를 공동으로 신청했다는 것이다. 문화가 전혀 다른 11개 나라가 함께 등재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실에서 협력이 돋보이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겠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나라는 고조선시대 만주 동북지방에서 수렵생활을 하던 숙신족(肅愼族)때부터 전해져 내려와 그 이후 고구려를 중심으로 삼국시대에 매사냥이 성행하였다. 매사냥 기술은 나중에 중국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일본에도 백제인들이 전승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의 충렬왕은 매의 사육과 사냥을 담당하는 응방(鷹坊)이라는 관청까지 따로 두어 매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으며, 조선시대에도 응방제도를 계승하여 궁에 내응방을 설치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 날렵한 날개를 가진 카리스마 넘치는 매를 길들이고 사냥하는 사람을 뭐라고 부를까? 예전에는 매를 부려 꿩을 잡는 사람을 수알치, 매방소, 매받이 등으로 지방에 따라 다르게 불렀지만, 현재에 와서는 ‘응사’라 부르고 있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매 사냥꾼이란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전의 박용순 응사와 전북의 박정오 응사 단 두 명만이 전통 매사냥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더. 최근에는 매사냥에 매혹되어 이수자들도 늘어나고 있으며, 응사들의 전통문화 보존 및 전승과 더불어 일반 시민에게 홍보하려는 노력이 더해져 무형문화재인 매사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매 매 매 매   [Daum백과] 매 – 텃새 과학관, 국립중앙과학관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제실 : 무덤이나 사당 근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지은 집.  * 응사 : 사냥에 쓰이는 매를 맡아서 기르고 부리는 사람.  * 시치미 : 매의 꼬리깃에 매주인 인적사항을 적은 인식표를 말함.  * 검수리 : 흔하게 검독수리라고 하는데, ‘독’은 대머리를 뜻함.  * 멍텅구 : 인조 미끼를 말함.  * 뜀밥 : 손밥먹이기.  
1071    야생매 포획할 때 비둘기로 유인하다... 댓글:  조회:5774  추천:0  2017-03-09
길림성 길림응채 해동청 해동청 보라매로 몽고의 간섭기에 우리조상들은 매를 잡아 몽고에 보내는 촌극으로 세월을 보내는데 북방족은 매를 사냥용으로 친구로 반려로 중시한다 1970년대 이런 고사를 책에서 본 사우디 국왕이 우리나라에 매를 요구하여 대통령이 나서고 비행기로 보내는 촌극이 벌어진 일이 있는데 당시 건설수주를 위해 벌인 일이다 매는 대형 육식동물의 조류로 입부리가 예리하고 발이 사냥에 적합하여 흉맹한데 비행속도가 빠르고 시력이 민감하다           백금지수로 신기한데 양대민족의 대원한을 만든 응렵은 역사가 유구하여 사냥의 고수이다 아름다운 송화강변의 어루촌이 있는데 응둔이라 부르고 이곳에 누루하치가 설립한 매잡는 전문기구를 설치하여 황가의 매공급장소로 하였다 이들은 대대로 황제의 명으로 매를 잡아 훈련하는데 황공들에 공급하고 매사냥은 응파식이라 하는데 이제 한지류만 남아 13대전승인 조명철이 최후의 매사냥군으로 남았다 조씨는 만주족으로 이얼건주루어씨로 만주 양람기인으로 대대로 궁궐에 해동청을 공응하던 가족의 후대이다 전가족은 해동청사냥에 매달려온 것인데 중국 민간문화 해동청 순양의 걸출한 전승인으로 매를 기르고 사냥을 계속하고 있다 고대의 속담에 새는 먹이를 찾아 천하를 날고 사람은 재물을 찾아 큰거리에서 절을 한다고 하는데 매는 훈련이 어렵고 본성이 굴강하여 인내심이 강하고 기교가 뛰어나 사냥에 적합하다 매훈련은 만장의 어려운 길로 중국에는 수많은 매에 관한 고사가 있는데 무수한 문인작품중 매의 그림자가 보인디 중국고대 옥기상 매의 조탁이 많은데 해동청의 사냥장면이 소재로 강희황제는 해동청을 칭찬하여 만주족들과 몽고 거란족들의 매에 대한 관심을 말해준다 길림시는 만주족문화의 주요발상지로 매는 만주족문화의 종교와 문화의 대표로 길림시 만족문화관에는 신비적의식이 진행되는데 매에 대한 제사로 제사중 신비의 주술 저주어로 신응의 그림자가 보인다 길림우라만족 시크터리만족 응신제 표연중 샤먼제사수련과 백두산수련으로 창사중 매는 백두산에서 내려온다고 하여 매를 찬양한다 이는 토템숭배로 제사에 나타나는데 만주족들은 매를 신으로 봉하고 매에 대한 특수한 감정을 가진다 만족선민들의 매신봉습속은 사전시대로 소급하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데 신유중 매가 여진인들을 구한 전설이 전해온다 당조에 여진족들은 매를 진공하기 시작하는데 요대부터 응방을 설치하고 114년 9월 아골타는 2500명을 데리고 료를 공격하여 중국북방을 200년간 통치하던 료를 점령한다 아골타는 대금황제가 되는데 해동청의 진공에 대한 불만으로 전쟁이 촉발되는 희극적 사건이다 해동청은 건주여진 야인여진등 여진지역에서 주로 잡히고 훈련하는데 임무수행에 대한 거란의 불만으로 료황제는 대신을 파견하고 독려하는데 많은 원망이 생겨난다 민족간의 원한은 점차 깊어져 여진인들의 반항을 야기하는데 전쟁으로 청대문인 심조제는 료금의 흥기는 해동청으로 인하고 매의 발은 옥보다 귀하다라 평론하는데 료금의 흥망성쇠의 명운이 좌우된다             길림시 용담구 우라가는 푸하터우라로 만주어로 강변사냥이란 의미로 만족문화의 주요발상지이다 청대 12대황제중 5명이 직접 이곳에서 제사를 올리는데 길림시는 당시 북방의 조선창으로 우라에서 지린으로 변한다 이곳에서는 매와 먹 담배등이 공품의 주요품목으로 그중 해동청이 가장 중요한 품목이다 청순치연간에 타성우라총관아문을 설립하는데 포응정을 설치하여 공응을 담당한다 300년이 흘러 만주족의 매사냥은 이제 점차 사라지고 우라가에만 당년의 그림자로 남았다 많은 양응의 습속과 규정은 민간에만 남아 청조말기 해동청 공납이 정지되어 백년이 지났는데 해동청의 내력은 바다에서 온다고 하여 청이라 했다는데 순양후 해동청이라는 설법도 있다 청대 옹정연간 궁정화가 서양인 랑스닝이 그린 매사냥의 그림이 남아 황제는 백옥조를 귀족들은 해동청을 민간에서는 창응이라 한다 매의 사육도 엄격한 규정으로 해동청은 황친들의 전용으로 흑안주라는 눈이 검은 해동청을 말하는데 진정한 해동청은 학명으로 矛榫(모순)이라 한다 유럽북부 아메리카북부 아프리카북부에서 생육하는데 해동청은 만주어로 송쿤라의 음역으로 한국어로는 매 솔개라 한다 랑스닝이 그린 백옥조는 북극의 한랭지구에서 살아 현재는 희귀조로 송화강상유 길림시 만족취거지에서 매는 가격을 매기기 힘든 성물로 만족의 족보에는 매의 도안이 그려져 있고 묘비에도 매가 늘 등장한다 만주족은 샤먼신봉으로 매는 종교상에도 중요한 지위로 제사의식중 매의 그림자가 보이는데 종족의 야신제중 응신은 최고의 지위이다 샤먼은 지자 현자와 구통하는데 제사시 샤만은 인간과 신사이의 사자로 사람의 뜻을 샤먼을 통해 신에 전달한다 매는 샤먼의 영혼의 상징으로 응신은 여샤먼으로 변하여 역사적 전설이 많은데 생활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로 매는 만주족외에도 여러 국가에서 중요한 지위로 세계성문화중 하나이다 8월에 주로 매사냥에 나서 야생매를 포획하는데 매복하여 비둘기로 유인한다 중국에서 응렵의 역사는 구원한데 사마천의 사기에는 진대에 매사냥은 귀족의 특권으로 신강 내몽고 동북지구 중아시아에 매사냥의 습속이 남아있다 2011년 길림시 응렵문화절에 매사냥시합이 열려 열띤 관심으로 야성을 순화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무언의 대화와 대결로 매의 기를 꺾는데 여러날을 서로 노려보며 기싸움을 벌인다 기싸움이 끝나면 동지관계로 사냥의 동반자로 활동을 시작하는데 진정한 구통이 시작된다 매를 방출하면 다시 돌아오곤 하여 서로 감동한다고 하는데 만주족과 매는 상호 불가분의 관련을 갖는다                        박포수는 그 중국인 매사냥꾼이 자기의 매를 죽인 일본인 장교를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사냥꾼에게는 매는 자식처럼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자식을 죽인 원수를 그냥 두겠는가.   사람들은 사냥을 하는데 동물들의 도움을 받는다. 개, 말, 매, 치타, 가마우지 등이 사람들과 함께 사냥을 하는데 그 중에서 개, 매, 치타 등은 특별한 사냥의 벗이 된다. 사냥꾼들은 개, 매, 치타 등을 사용하려면 훈련을 시켜야되는데 가장 훈련을 시키기가 어려운 동물이 매다. 개와 치타는 사람과 같은 포유류에 속하는 고등동물이며 사람들이 시키는 것을 알아듣는 지능을 갖고 있으나 조류인 매에게는 그 능력이 부족했다. 그런 매를 어떻게 훈련을 시키느냐.   매는 넓은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동물인데 그런 동물을 어떻게 인간의 지배속에 가둘 수 있겠는가. 매에게 사냥을 시키려면 그를 공중에 날려보내야만 되는데 그때 매가 달아나버리면 다시 잡아올 방법이 없다. 인간은 땅과 강 또는 바다는 쉽게 지배할 수 있으나 3차원인 하늘은 그렇지 못했다.   매는 그 3차원의 공간에 사는 야생동물인데 그를 사냥의 동반자로 훈련시키려면 오랜 시간에 걸친 정의 교류가 필요했다. 깊은 정으로 사람과 매는 맺어진다는 말이었다. 사냥꾼과 사냥개 사이에도 깊은 정이 있었지만 매사냥꾼과 매 사이에는 그보다 더 깊은 끈끈한 정이 맺어져 있었다. 그건 조류의 세계까지 스며드는 정이었고 하늘의 세계까지 미치는 정이었다. 박포수는 피투성이가 된 매를 안고 매를 죽인 일본인 장교를 노려보는 중국인 매사냥꾼의 시선을 기억하고 있었다. 증오에 이글거리는 시선이었으며 결코 용서를 하지 않겠다는 시선이었다. 박포수의 예감은 적중되었다. 그로부터 한달쯤 뒤에 매가 죽었던 그 사냥터에서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박포수는 그날 아침 오카다라는 그 일본인 중좌를 만났다. 오카다는 부관과 하사관, 사병 등 여섯명을 데리고 왔다. 오카다중좌는 농민들의 밭을 엉망으로 만든다는 멧돼지를 잡아 사병들의 저녁 밥상에 올려놓기로 마음먹었다고 호기(豪氣)있게 웃었다. 박포수는 아직 눈이 내리지 않았으니 멧돼지 사냥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해주었는데 오카다중좌는 그 충고를 무시하고 삼림 깊숙이 들어갔다.   그들이 삼림안으로 들어간지 두시간쯤 되었을 무렵에 총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사냥꾼인 박포수는 그렇게 직감했다. 총소리는 처음에 서너발쯤 들렸다. 그다음 다시 거의 동시에 발포된 두발이 들렸는데 그건 좀더 먼 곳에서 발사된 것이었다. 그리고 또 수십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과녁도 없이 마구 쏘는 난사(亂射)였다. 박포수의 직감은 들어 맞았다. 20분쯤뒤에 삼림쪽에서 하사관 두명이 뛰어나왔다. 그들은 눈이 뒤집어져 뭔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하사관중의 한명은 박포수에게 따라오라고 말했고 다른 한명은 마을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사관을 따라 현장에 도착한 박포수는 사람의 시체를 봤다. 오카다중좌였다. 머리와 가슴팍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누군가가 그를 저격했다는 말이었다.   시미즈중위라는 부관이 범인들의 발자국 추적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포수는 일부러 천천히 발자국을 추적했다. 30m쯤 떨어진 곳에 범인들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들이 있었다. 두 명이었다. 그 거리에서 그렇게 정확하게 과녁인 머리와 심장을 맞춘 저격수들은 예사 사람들이 아니었다. 전문적인 총잡이인 것 같았다. 박포수는 발자국 추적을 계속했으나 시미즈중위는 빨라 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지금은 발자국 추적이 어려울 때입니다. 내가 첫눈이 내린 다음 멧돼지 사냥을 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말은 사실이었다. 낙엽이 쌓이고 바람이 부는 그 계절에는 발자국은 낙엽과 함께 날아가버렸다. 멧돼지의 발자국이든 사람의 발자국이든 간에... 발자국 추적은 결국 실패했다. 2시간쯤 뒤에 많은 일본인 군인들이 몰려왔으나 그들도 발자국추적을 할 수 없었다. 박포수는 그날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왔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들은 무사할까. 그들이란 두 사람의 저격수들이었는데 박포수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나무위에 숨어있었다. 발자국 추적을 하던 박포수는 그걸 알았으나 모른체 했던 것이었다.  박포수는 오카다중좌를 살해한 두명의 살인청부자들을 살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사람을 죽인 행위는 나쁜짓이었지만 오카다중좌는 살해를 당할 만한 짓을 했기 때문이다.   박포수는 오카다중좌가 중국인 매사냥의 매를 죽였을때 바로 그 사냥터에 있었다. 중국인 매사냥꾼은 머리가 반백의 점잖은 사냥꾼이었다. 그의 왼손에 매를 앉혀놓고 바른 손으로 말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그는 빈틈없는 매사냥꾼의 복장과 기구를 갖추고 있었고 개도 말도 매도 잘 훈련이 되어 있었다.   매사냥꾼은 총을 내리고 인사를 하던 박포수에게 점잖게 목례를 했다. 사냥꾼의 예의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박포수는 그를 지방 토호(土豪)로 봤다. 토호란 그 지방에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는 영주(領主)였으며 그만큼 농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매사냥꾼은 앞서가던 사냥개가 꿩을 날리자 왼손등에 앉혀놓고 있던 매를 풀어주었다. 매는 목에 은방울을 달고 있었고 두다리가 함께 묶여 있었다. 그걸 그 매가 야생의 새가 아니고 사람에게 사육되고 있는 매라는 표시였으며 누가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매는 침착하게 꿩이 날아가는 방향을 보고 있다가 그 앞으로 날아가 꿩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꿩사냥에 익숙한 특급 사냥매였다. 매는 높은 곳에서 화살처럼 빠르게 꿩을 덮쳤다. 매는 여덟개의 갈고리같은 발톱으로 꿩의 목덜미를 찍어 눌렀다. 아름다운 꿩의 깃털이 흩어져 날아갔다. 꿩은 급강하하는 매의 힘에 눌려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매와 꿩은 한덩이가 되어 아래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훌륭한 꿩사냥이었다. 사람 말 개 그리고 매가 일체가 되어 훌륭하게 꿩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산림 안쪽에서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방정맞은 총소리였다. 오카다중좌가 산탄총을 발사했던 것이다. 매와 꿩은 산탄총에 맞아 떨어졌다. 중국인 매사냥꾼은 전속력으로 말을 몰고가 피투성이가 되어 퍼덕이고 있는 매를 가슴에 안았으나 매는 이내 축 늘어졌다. 그때 서너명의 하사관들을 데리고 오카다중좌가 나타났다.   "난다, 고레(뭐야, 이건). 사람이 사육하고 있는 매가 아냐"   오카다중좌는 중국인 매주인에게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에는 만주를 지배하고 있는 일본 관동군(關東軍) 장교의 거만 만이 있었다.   그 때 분노에 새파랗게 질려 있던 매사냥꾼이 바른손에 쥐고 있던 채찍이 올라간 것 같았다. 그러나 중국인 매사냥꾼은 채찍으로 일본인 장교를 후려치면 어떤 결과가 된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깨달은 것 같았다. 중국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을 타고 가버렸다. 피투성이가 된 매를 가슴에 꼭 안고....   박포수는 오카다중좌를 죽인 살인청부자의 뒤에는 그 중국인 매사냥꾼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박포수는 중국인 매사냥꾼이 복수를 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으며 그 예견은 적중되었다. 오카다중좌는 죽음을 자청했다. 그는 사냥꾼이 아니었다. 그는 총을 쏘아 새나 짐승을 쏘아죽이는 살육자였지 사냥꾼이 아니었다. 사냥꾼이 지켜야할 규율과 예의를 전혀 모르는 무법자였으며 총으로 남의 나라를 침범한 침략자였다.   오카다중좌를 죽인 범인들을 수색하고 있던 일본군은 범인을 관동군에 반항하는 중국군 소행으로 봤다. 설마 오카다중좌가 죽인 매 한마리가 그의 죽음과 직결되어 있는지를 몰랐다. 일본군은 그 일대 산림을 이중 삼중으로 포위해놓고 철저한 수색을 하고 있었다. 박포수의 산막은 그 포위망안에 있었으며 박포수도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지 사흘째 되던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박포수의 집에서 먹다남겨둔 밥이 없어진 것이었다. 박포수는 집주변을 살펴봤다. 희미한 발자국들이 있었다. 밥을 훔쳐먹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발자국을 지우려고 있으나 박포수의 눈은 속이지 못했다. 박포수는 그사실을 일본군에 보고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발자국을 완전하게 지워주었다. 그리고 부엌에 많은 밥을 지어놓고 멧돼지 고기를 남겨두었다.   이틀후에 그 밥들과 멧돼지 고기가 없어졌고 앞마당 빨랫줄에 말려두었던 담요 두장도 없어졌다. 그만한 양인 것 같으면 두사람이 사흘동안 먹을 수 있을 것이고 담요는 추위를 막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박포수는 나흘후에 다시 밥과 멧돼지고기를 부엌에 남겨두었는데 역시 없어졌다. 밥과 함께 두었던 화주병도 없어졌고....   일본군은 오카다중좌의 살해범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보름후에는 포위를 풀었다. 이미 눈이 내리고 있는 추위속에서 범인들이 그렇게 오래도록 살아있을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러나 박포수는 범인들이 죽지않고 탈출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오카다중좌 살해범들은 마지막으로 박포수 집 부엌에서 밥을 갖고 갔을 때 쪽지 한장을 남겨놓았다. 셰셰(謝謝). 그리고 한달쯤 뒤에 박포수 집 부엌에서는 '셰셰'라고 적힌 쪽지가 또 발견되었다. 같은 필적이었다. 이번에는 부엌에서 없어진 것은 없었고 대신 다른 물건이 놓여있었다. 총이었다. 영국 런던의 보스사가 제조한 좌우2연신 라이플과 총탄 다섯 상자였다. 총에는 일본돈 1천8백엔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보통 산탄총의 10배가 넘는 엄천난 고가품이었다.   또한 깨끗하게 포장된 케이스 안에는 하얼빈에 있는 일류 총포상의 수입허가증과 판매증명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그 총이 합법적인 총이라는 보증서류였고 총을 갖고 있는 사람의 신원보증서와 같은 것이었다. 그 총은 과연 훌륭했다. 성능도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신원보증서로서의 효과도 컸다. 지린(吉林)성의 내무부는 즉각 총포사용허가서를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특별사냥허가까지 내주었다. 엽기와 관계없이 언제라도 사냥을 해도좋다는 허가였다.   그러나 박포수는 그 총의 마법과 같은 위력을 그후에 알게 되었다. 총을 얻은지 10개월쯤 지났을 때 박포수는 그 총을 갖고 범을 추격했다. 박포수가 쫓던 만주범은 이미 옆구리에 총탄을 맞고 있었다. 강력한 라이플총탄에 맞은 범은 살아날 가망이 없었으며 그놈이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박포수는 범을 쫓아 너무 깊이 삼림안으로 들어갔다. 장백산맥 서쪽 수림이었다. 박포수는 결국 쓰러져 있는 범을 발견했으나 그때 그는 비로소 그곳이 금단의 지역인 것을 알았다. 그곳은 만주에서 가장 강력한 마적들의 영토였다. 박포수는 그걸 알고 서둘러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30여명의 마적들이 이미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박포수는 반항할 수 없었다. 그는 총을 빼앗기고 포박되어 마적들의 산채로 끌려갔다. 박포수는 그때는 죽음을 각오했다. 마적의 산채에 끌려가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산채의 비밀을 알게된 외부인을 마적들이 살려 돌려보낼리가 없었다. 박포수는 포박된 채로 토굴안에 감금되어 그날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마적 두목앞에 끌려갔다.   마적의 두목은 20여명이나 되는 부하들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마적의 간부인 것 같았으며 백명이 넘는 부하들이 주변에 있었다. 두목은 50대의 사나이였는데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두목은 그 총을 어디서 약탈했느냐고 물었다. 박포수는 하얼빈의 총포상이 발행한 증명서를 보여 주었다. 그러자 두목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그는 박포수의 포박을 풀어주면서 예의에 어긋난 짓을 했다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두목은 박포수에게 식사대접을 하고 안내할 곳이 있으니 따라 오라고 말했다.   두목은 산에서 내려와 산기슭에 있는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높은 담에 둘러 쌓여있는 집이었으며 겉보기에는 지방토호(土豪)의 집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집은 보통의 토호집이 아니었다. 집주위의 숲속에는 인기척이 느껴졌는데 집을 경호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마적의 두목은 집대문 앞에서 몸수색을 당했다. 수배경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는 강력한 마적의 두목이 몸수색을 당한 다음 머리를 숙이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조용했으나 두목과 박포수가 안마당으로 들어서자 어디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매들이었다. 마당에 있는 소나무 가지에 앉아있던 세 마리의 매들이 날카로운 경고를 하면서 덤벼들었다. 매의 날개가 박포수의 얼굴을 스쳤다.   그 매들은 번견(番犬)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았으며 그대로 두면 위험할 것 같았다.   '조용해'   그때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마루에 노인이 한 사람 서 있었다. 반백의 머리와 강인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그였다. 그 매사냥꾼이었다. 오카다중좌를 죽인 그 사람이었다. 노인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박포수님" 노인은 마당으로 내려왔다.   "난 저놈들을 훈련시키고 있지만 아직도 웅비(雄飛)만큼은 못합니다"   노인은 마당 한구석을 손가락질했다. 그곳에는 웅비라는 비(碑)가 서 있었고 자그마한 무덤이 있었다. 오카다 중좌에게 살해당한 그 사냥매의 무덤이었다. 그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으나 백 명이 넘는 부하를 거느리고 있는 마적의 두목이 머리를 들어올리지 못할 정도로 강한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다.   만주에는 수십 명의 마적두목들을 배후에서 다스리는 대두목이 있다는데 그가 그런사람일지도 몰랐다. 노인은 자기는 그저 매를 사랑하고 매를 부리는 매사냥꾼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매의 얘기만을 하고 있었다.   박포수는 다음날 총과 많은 선물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출처] 길림성 길림시 만주족 응채 매사냥|작성자 박기수
1070    중국 길림성 길림시에 "매사냥문화축제"가 없다?... 있다!... 댓글:  조회:6581  추천:0  2017-03-09
  지린(吉林)성 지린(吉林)시 우라제(烏拉街)진 한툰(韓屯)촌의 응사가 자신이 직접 훈련시킨 사냥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인민망 한국어판 1월 9일] 최근 제22회 중국 지린(吉林) 국제 무송(霧凇, 상고대) 빙설축제가 개막됐다. 투청쯔(土城子)진에서는 매사냥 문화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는데 해당 공연은 많은 관광객들에게 문화 체험뿐만 아니라 근거리에서 매와 사람이 교류하는 모습, 매를 길들이는 모습 등을 제공하기도 했다.   매를 길들이고 훈련시키는 응사는 관광객들에게 매를 훈련시키는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고 야생매가 잘 길들여진 사냥매가 되는 과정을 ‘아오잉(熬鷹, 매 훈련)’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아오잉’은 매뿐만 아니라 응사에게도 아주 중요한 과정이라고 한다. 사냥매 한 마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응사의 정성과 관심이 없이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냥매 길들이기 과정은 ‘라잉(拉鷹, 매 잡기)’, ‘아오잉(매 훈련)’, ‘자잉(駕鷹, 매 조종하기)’, ‘자오잉(叫鷹, 매 부르기)’ 등으로 나뉜다. 응사는 매년 음력 7~8월 정도에 산으로 올라가 매를 잡는다. 이 과정을 ‘라잉(매 잡기)’이라고 하며 매를 잡고 나면 야생성을 줄이고 사람과의 교감을 키우는 ‘아오잉(매 훈련)’을 실시한다. 매 훈련은 인내심과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과정이다.   매는 자부심이 아주 강한 동물이다. 야생 매를 잡으면 단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되며 1주일 이상 훈련을 지속해야 한다. 매 훈련 기간에는 매를 항상 응사의 어깨에 앉아 있게끔 해야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점점 응사의 팔에 앉기 시작한다. 이것을 바로 ‘자잉(駕鷹, 매 조종하기)’이라고 한다. 응사는 매일 매를 데리고 사방을 다니며 모든 곳에 익숙하게 만들어야 하며 저녁에는 반드시 봉에 놔두고 그곳이 자신이 잠을 자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 줘야 한다.   ‘자오잉(叫鷹, 매 부르기)’ 과정을 할 시기가 되면 매와 응사는 어느 정도 감정이 쌓인 상태이다. 이 시기는 매가 응사의 팔에 앉아 밥을 먹을 정도를 말한다. 그럼 매를 날려 보냈다 다시 돌아오게 만들어야 되는데 이 훈련은 반드시 야외에서 진행해야 한다.   자오밍우(趙明武)는 매에게 소고기, 닭고기를 먹이면 살이 빠르게 많이 찌게 되는데 나중에 살이 근육이 되면 매가 아주 강한 힘을 얻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매에게 실제로 살아 있는 동물을 잡아먹게끔 훈련을 시키면 야생성을 잃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또한 갖 잡아온 매는 절대 배부르게 먹이지 말고 항상 배고픈 상태를 유지시켜야 쉽게 훈련을 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런 훈련 과정은 대략 1개월의 시간이 소요된다. 훈련을 마친 매는 언제든지 응사와 함께 사냥을 나갈 수 있다. (번역: 은진호)   원문 출처: 신화망(新華網) ///////////////////////////////////////////////////////// =================================== \\\\\\\\\\\ 매몰차게...매, 날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 2년 매사냥 참관기    2012년 1월 14일 오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매서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들녘 한복판에 낯선 외국인 80여 명이 모여 있다. 인도·말레이시아·일본 등 아시아 13개국과 미국에서 온 맹금류 연구자들이다. 이들은 국립공원관리공단 주최로 16일까지 열린 제7회 아시아 맹금류심포지엄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이들 앞에 한국 전통매사냥 시연이 펼쳐졌다. 1월 9일부터 중국 지린(吉林)성 길림시 土城子진 따위러우에서 매사냥 문화축제가 열렸다.10일 이 행사에 참가한 매사냥꾼이 자신의 매를 들고 있다. [지린성 신화통신=뉴시스]  한국전통매사냥협회 박용순 응사가 한국 매사냥 시연에 나섰다. 해리스매, 황조롱이, 참매, 송골매 순으로 줄밥주기와 멍텅구(고기를 매단 가짜 새) 공중낚기, 꿩사냥 순으로 이어질 참이었다. 그러나 강한 바람과 낯선 환경 탓인지 참매는 시연 자체를 거부했고, 송골매는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북미산 해리스매만이 비교적 응사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그럼에도 귀여운 황조롱이와 한국을 대표하는 해동청 송골매가 멍텅구를 낚아챌 때는 관람객의 탄성과 박수가 이어졌다. “매사냥 전통이 있다는 것이 부러워요! 하지만 현재의 매사냥 테크닉은 우리가 더 발달한 것 같아요.” 참매와 황조롱이를 주의 깊게 관찰하던 미국 아칸소대학의 말라 스텔레는 관람 소감을 묻는 질문에 짤막하게 답변했다. 1, 14일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에서 열린 매사냥 시연회에서 송골매가 가짜새 멍텅구를 공중에서 채고 있다. ©김연수 “놀라워요! 그리고 부러워요. 우리 인도에서는 매사냥이 법으로 금지돼 전통 매사냥 명맥이 끊겼어요. 다시 부활시키려고 해도 우리 문화의 특성상 여의치 않을 겁니다.” 인도 CEla 재단 라즈고팔 파틸 연구원의 소감이다.일본매사냥협회 엔도는 “일본에 매사냥 문화를 전해준 백제의 주군(酒君)이 없었다면 오늘날 일본의 매사냥 문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이 직접 제작한 일본 황실의 매사냥 도구를 박 응사에게 전달했다. 2, 고려응방의 수진이(참매)가 대전시 서대전공원에서 열린 매사냥 시연회에서 관람객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연수 3, 고려응방의 수진이가 잡은 꿩을 망태기에 담고 있는 박용순 응사. © 김연수 아시아 맹금류 연구보존회(Asia Raptor Research and Conservation Network)의 심포지엄 진행을 맡은 철새연구센터 최창영·채희영 박사는 “한국을 비롯한 11개국 매사냥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2010년 11월)를 기념해 맹금류 전문가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 이 행사를 기획했다”고 밝혔다.맹금류는 동서고금을 통해 최고를 뜻하는 상징물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 광각과 망원을 넘나드는 뛰어난 시력,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 빠른 속도와 비행술, 그리고 강력한 힘을 지녔기에 왕·국가·군대 등 권력의 상징이 됐다. 인류가 선망했던 맹금류는 한민족의 삶 속에서도 큰 획을 그었다. 매를 이용해 작은 동물을 사냥하는 매사냥(falconry)이 바로 그것이다. 매사냥은 매를 잡는 사냥이 아니다. 사냥술이 뛰어난 맹금류를 이용해 인간이 날짐승이나 들짐승을 잡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고차원적인, 사냥과 오락의 결합 문화다. 새를 좋아했던 우리 조상에게 매사냥은 삶의 일부였다. 중국 지안(集安)의 삼실총과 황해도 안악 1호분의 벽화에는 고구려 매사냥 그림이 남아 있다. 북방민족인 발해·거란·여진 역시 모두 해동청(海東靑)을 이용한 매사냥을 최고로 쳤다.  4, 참매가 장끼를 사냥하고 있다. 꼬리깃이 긴참매는 넓은 개활지보다 야산에서 사냥을 잘하기 때문에 조선 중기 이후는 송골매 대신 참매를 매사냥에 이용했다. ©김연수 5, 10일 중국 지린성 위러우에서 열린 매사냥 축제에 참가한 소녀가 매를 들고 있다.[신화통신=뉴시스] 6, 3일 일본 도쿄 하마리큐 정원에서 열린‘Suwa 매사냥보존회’의 신년 매사냥 시연 모습.[도쿄 AP=연합뉴스] 백제는 또 다른 이름이 ‘응준(鷹準)’이라 불릴 정도로 매의 나라였다. 백제 왕족 주군이 일본에 매사냥을 전파했다는 기록이 일본 역사서인 『서기(書紀)』에 기록돼 있다. 공주 수촌리 고분에서 2006년 발굴된 5세기 백제 금동관은 그 자태가 매의 형상이다. 고려시대에는 매사냥이 가장 융성했다. 매를 잡아 기르고 관리하는 관청인 응방(鷹坊)과 직업으로 매사냥을 하는 응사(鷹師)가 탄생했다. 야생매를 포획해 사육하고 훈련시키는 매사냥 교과서 『응골방』도 집필됐다. 매사냥을 찬양하는 가사(歌辭)와 시조(時調)가 유행했다. 원나라와 매사냥 문화 교류도 활발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매사냥 기록이 적잖다. 세종대왕은 역대 임금 중 재임기간에 매사냥을 가장 많이 나간 임금이다. 세종 8년, 명나라는 조선에 말 2만5000마리를 조공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영리한 세종은 명나라 선종제의 취미가 매사냥이라는 것을 알고는 매 3마리, 참매(黃鷹) 12마리를 보내 말과 대체시켰다.두 차례의 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조선 왕실의 매사냥은 쇠퇴했다. 반면에 일반 서민들도 매사냥을 시작했다. 서민들이 매사냥을 시작하면서 골속(매) 위주의 매사냥은 응속(참매) 중심으로 바뀌었다. 북쪽 지방의 매사냥이 생계 수단이었다면, 남쪽 지방의 매사냥은 한량들의 유희 대상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국토가 황폐해지고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 땅에서 매사냥은 서서히 사라졌다. 매사냥을 즐길 삶의 여유가 사라진 탓도 있지만, 매와 참매가 환경피해로 멸종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매와 참매는 모두 천연기념물과 법정보호동물로 지정돼 있다. 이들을 생포하거나 죽이면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7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는다. 현재 한국에는 2명의 매사냥 기능보유자와 몇몇 전수자가 있다. 대전의 박용순(대전무형문화재) 응사와 전북 진안의 박찬유(전북무형문화재) 응사, 경북 청도의 이기복 응사, 그리고 전통매사냥협회 주연상 회장, 황대인 총무 등이다. 또 외국에서 중학 시절부터 매사냥을 연구하고 체험한 국제매사냥협회(IAF) 한국대표인 박상현씨 역시 수준 높은 매사냥을 구현하고 있다. 한국의 매사냥 인구가 이웃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아주 적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매사냥 문화 11개국(아시아에서는 한국과 몽골만 들어 있다)에 선정된 것은 행운이었다. 역설적으로 그 책임이 크다. 중국은 매사냥 자체를 불법으로 규제하나 음성적으로 널리 퍼져 있어 베이징 내 동호인만 1만 명이 넘는다. 일본은 야생매를 이용한 매사냥은 철저히 금지되고, 사육매만 허용하기 때문에 무차별한 외국 사육매의 수입으로 환경단체들과 끊임없는 마찰을 빚고 있다. 한국 매사냥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지 햇수로 2년이 넘었다. 유네스코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나라들의 매사냥 문화가 일정 수준을 유지하도록 관리와 지원책을 펼치고 있다. 우리나라도 차제에 외국의 매사냥에 대한 다양한 제도를 연구해 우리 실정에 맞는 법규를 갖추고 유네스코 등재국다운 면모를 갖춰야 한다.  아울러 환경보호와 생명윤리 문제에 어떻게 조화를 갖춰야 할 것인지, 매사냥 면허를 어떤 수준에서 허용하고 대상은 어디까지로 해야 할 것인지 명확하게 법으로 정할 필요가 있다. 전통 매사냥에서 쓰이는 매의 명칭 송골매: 생물학적 분류로 매과의 매(Peregrine Falcon).골속. 참매: 생물학적 분류로 수리과의 참매(Goshawk). 응속. 해동청: 함경도 동해안에 서식하는 송골매의 북방종을 뜻했으나 후에 한반도산 좋은 매를 통칭함. 보라매: 참매의 털갈이 전 어린 새. 이 역시 후에는 해동청과 더불어 매를 통칭하게 됨. 초진이: 1년생 매나 참매. 재진이: 2년생 매나 참매. 삼진이: 3년생 매나 참매. 산진이: 나이에 관계없이 산에서 잡힌 참매. 수진이: 사람 손에 길들여진 참매. 날진이: 산에서 잡아온 참매로 사람에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매. /(중앙선데이)
매사냥 시연회도... 훈련과정 등 공개… 기념촬영도 가능   소싸움 축제로 유명한 경북 청도군에서 전통 방식 매사냥 시연회가 오는 12일 청도박물관 야외 마당에서 열린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가 두 번째다.   이기복 응사(鷹師·사냥에 쓰는 매를 부리는 사람)가 작년 청도 박물관 앞마당에서 매사냥을 시연하는 모습. 올해는 오는 12일 같은 장소에서 시연회가 열린다. 우리나라에선 선사시대부터 매사냥을 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왕실과 귀족층이 즐겼던 매사냥은 근대로 넘어오면서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퍼졌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엔 매사냥 허가를 발급 받은 사람이 17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기복씨 야생 상태 매를 길들여 사냥감을 잡게 하는 전통 매사냥은 고조선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이 땅에서 번성했으나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청도에서도 1970년대까지 겨울철 매사냥이 흔했다가 명맥이 약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매사냥은 국제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한국·몽골·프랑스·체코 등 11국 공동)으로 등재됐다. 이번 매사냥 시연회의 주인공은 청도군 공무원 이기복(51·매사냥 기능 보유자)씨. 그는 전북 진안에서 활동하는 무형문화재 전영태·박정오 응사(鷹師·사냥에 쓰는 매를 부리는 사람·매부리)에게서 15년 이상 매사냥법을 배웠다고 한다. 시연회에 나서는 매는 이씨가 청도 야산에서 잡아 50일간 길들인 참매이다. 그는 1년 안 된 매(보라매)로 한 해 겨울 사냥을 하고, 번식기가 되면 자연으로 놓아준다고 한다. 수년간 사람 손에 길들여진 매는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매는 국내에서 천연기념물 323호로 지정돼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은 사람만 다룰 수 있다. 이기복 응사와 한국매사냥협회 회원들은 시연회에서 1년 미만생 매를 잡는 방법, 매를 사냥 매로 훈련하는 과정, 매가 꿩을 사냥하는 모습을 재현한다. 매와 함께 기념촬영도 해준다. 매와 관련된 사냥 및 훈련 도구들을 전시하고 '한국의 매사냥'에 관한 영상 자료도 상영한다. 이기복 응사는 "앞으로 전통 매사냥 문화를 복원해 기록으로 후세에 남기는 것이 소망"이라고 했다.        ⓒ 조선일보 권광순 기자 ====================================== ====================================== 우리나라 최고의 매꾼 “전통 매사냥 복원·노하우 전수하고파”   매사냥에 나선 이기복씨가 자신의 야생 매로 잡은 꿩 두 마리를 들어 보이고 있다.   청도군청 공무원으로 근무 전북 진안 20년동안 오가며 전영태·박정오씨에게 배워 경북 무형문화재 신청 계획 “2천년 전 방식 시연 한국뿐” 2012년 12월 청도 이서면 금촌리의 한 야산 정상. 매꾼의 오른손 위에 걸터앉아 찬찬히 먹잇감을 노려보던 야생 매 한 마리가 순간 허공을 매섭게 가로지르더니 아래에서 위로 몸을 틀었다. 그러곤 놀라 도망가던 야생 꿩의 가슴팍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낚아챘다. 4~5초 만에 벌어진 이 장면은 당시 부산KNN 방송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혔다. 일제강점기 이후 우리나라에서 사라져 버린 야생 매의 사냥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보인 것이다.  그 매꾼이 바로 전통 매사냥 기능보유자인 응사(鷹師·사냥에 쓰는 매를 맡아 기르고 부리는 사람) 이기복씨(51)다. 청도에서 30여 년째 매사냥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이씨는 국내에선 최고의 매꾼으로 불린다. 현재 청도군 공무원이기도 한 그는 어릴 적 우연한 계기로 매사냥과 인연을 맺었다. 중학생 때 당시 매를 기르던 이웃집 아저씨의 모습을 어깨너머로 자연스럽게 보면서부터다. 매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 이씨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며 부모로부터 혼쭐이 나면서도 운명처럼 매사냥의 매력에 빠져들어갔다.  도전정신이 남달랐던 이씨는 1993년부터 전북 진안에서 활동하던 무형문화재 응사 전영태씨(2006년 작고)와 응사 박정오씨를 찾아가 매사냥 노하우를 배웠다. 그렇게 진안과 청도를 오간 세월만 무려 20여 년이다. “당시 이분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매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매사냥을 직접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사람과 매는 예나 지금이나 같지만 환경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산이 황폐해 꿩사냥이 수월했지만 지금은 숲이 우거져 사냥이 어렵게 된 것입니다.”  이씨는 두 명의 응사에게서 배운 매사냥 기술을 바탕으로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스스로 매사냥을 완성해갔다. 이때 그가 터득한 매 부리는 기술은 매와의 ‘교감’이다.  “매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순간 매는 사람을 멀리합니다. 매의 입장에서 ‘저 사람은 내게 해가 없고 내가 꿩 잡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 즉 동반자’라는 생각이 들도록 매를 부려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매사냥에 대한 철칙도 생 겼다. 현행법에는 5년 정도 매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그가 푼(조련한) 매는 반드시 1년 안(통상 3~4개월 정도)에 자연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것이다. 그는 올해 진기한 경험도 했다. 4년 전 그가 푼 매를 올해 다시 받은(포획한) 것이다.  “가을 한로에 철새가 날아오면 참매 한 마리를 받습니다. 한 15~20일 정도 푼 뒤 겨울 한철 꿩사냥을 하고 봄에 자연으로 되돌려 보냅니다. 그래야 매가 자연에서 생존하며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씨는 올해 매사냥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 매사냥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경북도 무형문화재 등록을 신청할 계획이다.  “매는 천연기념물로 함부로 매를 부리는 것은 불법입니다. 나 같은 경우 무형문화재인 응사 박정오 어르신의 도움으로 매를 부리고 있습니다. 올해 팔순으로 연세가 많아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저는 합법적으로 매를 부릴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 때문에 무형문화재 선정은 다소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는 화제를 잠시 돌렸다. “‘시큰둥하다’ ‘시치미 떼다’의 어원을 아세요?”라며 기자에게 물어 왔다.  “글쎄요”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잘 모르시겠죠. 그럼 매섭다·매몰차다·매끈하다·골낸다는 아시죠? 모두 매사냥에서 나온 말들입니다.”  “예? ‘시큰둥하다’‘시치미 떼다’가요?”  “네, 시큰둥하다는 말은 조련을 마친 매가 꿩사냥을 나섰는데 꿩을 보고도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을 때 짓는 표정에서 나온 말이고요. ‘시치미 떼다’의 ‘시치미’는 매꾼이 자신의 매 꼬리에 소뿔을 갈아서 만든 패각에다 방울과 하얀 고니 깃을 달고 이름을 적어놓은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 시치미를 떼어버리고 마치 자신의 매인 것처럼 행세할 때 쓰였던 말이 바로 ‘시치미 떼다’입니다. 그만큼 매사냥이 우리 일상과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우리나라 매사냥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이씨는 2천년 전 방식으로 야생 매를 갖고 시연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다른 나라에선 매알을 부화시켜 새끼 때부터 키워서 훈련시켜 시연하는 게 고작이라는 것. 이 때문에 6년여 전 야생 매로 야생 꿩을 사냥하는 이씨의 매사냥을 직접 본 일본 매꾼들은 이씨의 매사냥에 매료돼 겨울철만 되면 매사냥을 구경하기 위해 청도를 찾아오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올해도 전통 매사냥 시연회를 선보일 예정이다. 3월12일로 예정된 이 시연을 위해 최근 보라매(생후 1년 미만인 매) 한 마리를 받아서 한참 풀고 있다. 그는 전통 매사냥 문화를 복원해 기록으로 후세에 남기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무형문화재가 되면 27년째인 공직생활도 정리하고 남은 인생을 전통 매사냥 복원에 힘 쏟을 계획입니다. 매사냥에 대한 나만 의 노하우가 담긴 책을 꼭 펴내 후세에 전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매꾼으로서 제가 해야 할 책임이자 의무인 것 같습니다.” /영남일보 청도=박성우 기자 
1068    [쉼터] - 곰팡이, 의사, 정치가 그리고 꿈... 댓글:  조회:5738  추천:0  2017-03-06
    페니실린을 발견한 영국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의 이야기입니다. 플레밍은 열악한 연구실에서 포도상구균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어느 날 아래층 연구실에서도 곰팡이 알레르기 치료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 곰팡이가 창문을 타고 플레밍의 연구실로 들어와  배양 접시를 오염시키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플레밍은 배양 접시를 오염시킨 곰팡이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다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곰팡이에 페니실린의 원료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토대로 '페니실린'을 만들었습니다. 한번은 한 친구가 플레밍의 연구실을 방문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네가 이렇게 허름한 연구실에서 페니실린을 만들다니 만약 자네에게 좀 더 좋은 연구실에서 연구했다면 더 엄청난 발견들을 했을 것이네." 그러자 플레밍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을 거네 오히려 이 열악한 연구실이 페니실린을 발견하게 해주었다네.  창틈으로 날아온 곰팡이가 바로 페니실린의 재료가 되었지. 중요한 것은 환경이 좋다고 해서 꼭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라네"   윈스턴 처칠과 페니실린에 얼킨 이야기...   부유한 귀족의 아들이 시골에 갔다가 수영을 하려고 호수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발에 쥐가 나서 수영은 커녕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귀족의 아들은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그 소리를 들은 한 농부의 아들이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귀족의 아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그 시골 소년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둘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키웠습니다.   어느덧 13살이 된 시골소년이 초등 학교를 졸업하자 귀족의 아들이 물었습니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의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우리집은 가난하고 아이들도 아홉 명이나 있어서 집안 일을 도와야 해...,"   귀족의 아들은 가난한 시골소년을 돕기로 결심하고 아버지를 졸라 그를 런던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결국 그 시골 소년은 런던의 의과 대학에 다니게 되었고, 그 후 포도당 구균이라는 세균을 연구하여 페니실린이라는 기적의 약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1945년 노벨의학상을 받은 '알렉산드 플레밍'입니다          그의 학업을 도운 귀족 소년은 정치가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26세의 어린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정치가가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 중에, 폐렴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폐렴은 불치병에 가까운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 플레밍이 만든 페니실린이 급송되어 그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골 소년이 두 번이나 생명을 구해준 이 귀족 소년은 다름 아닌 민주주의를 굳게 지킨 '윈스턴 처칠'입니다.     주위를 보면 부족한 환경만을 탓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만을 탓하는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을  도리어 도약의 발판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환경에 불평하지 말고  가장 좋은 환경이라 생각하며 강인한 의지로 최선을 다해보세요. 여러분의 꿈은 분명 이루어질 것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자기 자신과 환경을 뛰어넘어 꿈을 이뤄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 처어칠과 플레밍의 우정 ♡   아름다운 인연 한 부유한 귀족의 아들이 시골에 갔다가 수영을 하려고  호수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발에 쥐가 나서 수영은 커녕 . .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귀족의 아들은 살려달라 소리쳤고, 그 소리를 들은 한  농부의 아들이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귀족의 아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그 시골 소년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둘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키웠습니다.  어느덧 13살이 된 시골소년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귀족의  아들이 물었습니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의사가 되고싶어! 하지만 우리 집은 가난하고 아이들도  아홉 명이나 있어서 집안 일을 도와야 해”  귀족의 아들은 가난한 시골 소년을 돕기로 결심하고 귀족인 아버지를 졸라서 그를 런던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결국 그 시골소년은 런던의 의과대학에 다니게 되었고  그 후 포도당구균이라는  세균을 연구하여 ''페니실린''이라는 기적의 약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1945년 노벨 의학상을 받는 알렉산더  플레밍입니다.                       그의 학업을 도운 귀족 소년이 정치가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26세의 어린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정치가가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 중에 폐렴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폐렴은 불치병에 가까운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플레밍이 만든 ''페니실린'' (정식 의약품으로 인정되기전)이 급송되어 그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골 소년이 두 번이나 생명을 구해준 이 귀족 소년은 다름 아닌 민주주의를 굳게 지킨 윈스턴 처어칠입니다. 어릴 때 우연한 기회로 맺은 우정이 평생 동안 계속 되면서 이들의 삶에 빛과 생명을 주었던 것입니다.                       후일 영국 수상이 된 부유한 귀족의 아들 윈스턴 처어칠이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우연히 알게 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을 무시했더라면 시골 소년은 의사가 되어 ' '페니실린''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며 처어칠은  폐렴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귀족 소년과 시골 소년의 깊은 우정을 바탕으로 농부의 아들은 의사가 되어 노벨의학상을 받을 수 있었고,  귀족소년은 전쟁 중에 나라를 구하고 민주주의를  지킨 수상이 될 수가 있었답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지위(계급)가 낮은 사람, 힘이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학식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하대하기가 쉽습니다.  이는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반드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비록 미천한 사람이라고 해서 업신 여기거나 깔보면 안됩니다. 위 귀족소년과 시골소년의 아름다운 우정처럼, 무슨 보답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을 베풀 때 서로에게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참 아름다운 인연이 온 세상 인류를 아름답게 했습니다.  ===================== "아름다운 인연"  부유한 귀족의 아들이 시골에 갔다가 수영을 하려고 호수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발에 쥐가 나서 수영은 커녕 ...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귀족의 아들은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그 소리를 들은 한 농부의 아들이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귀족의 아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그 시골 소년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둘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키웠습니다.  어느덧 13살이 된 시골소년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귀족의 아들이 물었습니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의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우리 집은 가난하고 아이들도 아홉명이나 있어서 집안일을 도와야 해...  귀족의 아들은 가난한 시골소년을 돕기로 결심하고 아버지를 졸라 그를 런던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결국 그 시골 소년은 런던의 의과 대학에 다니게 되었고 그 후 포도당 구균이라는 세균을 연구하여 '페니실린'이라는 기적의 약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1945년 노벨의학상을 받은 “알렉산드 플레밍”입니다.  그의 학업을 도운 귀족 소년은 정치가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26세의 어린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습니 다.  그런데 이 젊은 정치가가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중에 폐렴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폐렴은 불치병에 가까운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나“알렉산드 플레밍”이 만든 ‘페니실린'이 급송되어 그의 생명을 건질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골 소년이 두 번이나 생명을 구해준 이 귀족 소년은 다름아닌 민주주의를 굳게 지킨 “윈스턴 처어칠”입니다.  어릴때 우연한 기회로 맺은 우정이 평생동안 계속 되면서 이들의 삶에 빛과 생명을 주었던것입니다.  만약 내가 다른이의 마음속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수 있다면 그에게 있어 나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것 입니다.  후일 영국 수상이 된 부유한 귀족의 아들 “윈스턴 처어칠”이 어린 시절 시골에서 우연히 알게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을 무시했더라면 시골 소년은 의사가 되어 페니실린’을 만들수 없었을테고 처어칠은 폐렴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귀족 소년과 시골 소년의 깊은 우정으로 농부의 아들은 의사가 되어 노벨 의학상을 받을 수 있었고 귀족 소년은 전쟁중에 나라를 구하고 민주주의를 지킨 수상이 될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인연도 이렇게 오래도록 좋은 인연으로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 힘이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학식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학대 하기도 합니다.  비록 미천한 사람이라고 해서 업신 여기거나 깔보면 안됩니다.  교만한 마음은 받드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귀족소년과 시골소년의 아름다운 우정처럼.  어떠한 보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을 베풀때 서로에게 좋은 결실 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지요.  매일 만나도 매일 만나지 않아도 가까이 있든 멀리있든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늘 가슴 한켠에 말없이 잔잔한 그리움으로 밀려 오는 친구가 진실한 마음의 진정한 친구입니다.  멀리 있어도 마음으로 의지하고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동반자 같은 진정한 친구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같이 아파하고 함께 웃을 수 있는 희,노,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지란지교 같은 그런 친구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출처] 아름다운 인연, 페니실린, 알렉산드 플레밍, 원스턴 처어칠|작성자 섬 [출처] 처어칠과 플레밍의 우정|작성자 우란    
1067    [쉼터] - 실수(곰팡이)로 인해 만들어진 약 - 페니실린 댓글:  조회:7589  추천:0  2017-03-06
  ​페니실린, 실수가 만들어낸 발견 ​ ​ 누구나 한 번쯤은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페니실린은 푸른 곰팡이에서 얻는 화학물질인데, 세균성 질환을 치료하는데 효과적이라 항생제로 쓰이고 있습니다. ​ ​ ​ ​     그런데, 이 엄청난 발견이 어떤 미생물학자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계셨나요?   영국 스코틀랜드의 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세균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포도상구균을 배양하고 있었는데, 실수로 뚜껑을 열어둔 채로 퇴근하고 휴가를 가버리게 됐습니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다른 곰팡이가 실험하던 포도상구균을 먹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샬레를 폐기처분하지 않고 호기심을 가지고 세균을 녹여버린 곰팡이(푸른 곰팡이)에 대해 연구한 끝에 페니실린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의 발견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수많은 생명을 구하게 됐습니다.   이처럼 실수, 혹은 실패가 기회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다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을 겁니다. ===================================     출생 1881. 8. 6, 스코틀랜드 에어 록필드 사망 1955. 3. 11, 런던 국적 스코틀랜드, 영국 요약 1928년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감염성 질병에 대한 항생제 치료법이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939년부터 플레밍의 기본적인 발견들을 더욱 진전시켜 페니실린을 분리·정제하고 시험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양을 얻기 위해 시도했던 E. B. 체인, H. W. 플로리와 194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1906년 런던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후, 인간 조직에 무해한 항세균성 물질에 관해 연구했다. 포도상구균을 대상으로 연구하던 1928년, 오염으로 증식한 페니실리움 노타툼의 포자 주위에 있던 균들이 죽는 것을 발견, 계속적인 연구를 통해, 800배 정도로 희석해도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는 기능을 그대로 지닌 물질을 발견하고, 이 물질을 페니실린이라고 이름붙였다. 1943년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4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플레밍(Sir Alexander Fleming) 영국 스코틀랜드의 세균학자이다 1928년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감염성 질병에 대한 항생제 치료법이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939년부터 플레밍의 기본적인 발견들을 더욱 진전시켜 페니실린을 분리·정제하고 시험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양을 얻기 위해 시도했던 E. B. 체인, H. W. 플로리와 194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1906년 런던대학교의 세인트 메리 병원 의과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후, 인간 조직에 무해한 항세균성 물질에 관해 연구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중에 왕립군사의무단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한편 연구를 계속했다. 1918년 연구와 강의를 위해 세인트 메리 병원으로 돌아왔으며, 왕립외과협회의 헌터좌(座) 교수가 되었고(1919), 애리스앤드게일 강사가 되었다(1928). 1921년 눈물·타액 등의 분비액과 일부 동물조직에서 발견되며 항생작용을 보이는 효소인 리소자임을 동정하고 분리했다. 포도상구균을 대상으로 연구하던 1928년, 이 세균의 배지에 오염으로 증식한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의 포자 주위에 무균의 환(環)이 형성되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계속적인 연구를 통해, 800배 정도로 희석해도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는 기능을 그대로 지닌 물질을 곰팡이에서 발견했다. 그는 이 물질을 페니실린이라고 명명하고, 1년 후 그 결과를 〈영국 실험병리학 저널 British Journal of Experimental Pathology〉에 발표했다. 1943년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4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Daum백과] 플레밍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요약 가장 먼저 발견되었고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항생제 중의 하나이다. 1927년에 플레밍이 발견한 후 1940년 치료용 주사제로 만들었다. 페니실린의 구조 변화에 따라 항생제의 성질도 달라져 치료 목적에 따라 여러 형태의 페니실린이 생산되고 있다. 모든 페니실린류는 세균의 세포벽 합성을 담당하고 있는 효소의 작용을 방해하고 또한 유기체의 방어벽을 부수는 다른 효소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으로 효과를 나타낸다. 페니실린의 주요부작용으로는 피부발적·담마진·종창·아나필락시 등과 같은 알레르기 반응과 알레르기 쇼크가 있다. 경증의 증상은 코르티코스테로이드로 처리하면 되지만 대부분의 부작용은 교대 투약에 의해서만 막을 수 있다.   가장 먼저 발견되었으며,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항생제 중의 하나이다. 1927년에 알렉산더 플레밍은 우연히 푸른곰팡이인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으로 오염되어 있는 배지에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화농균)이 자라지 않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이 곰팡이를 분리하여 액상 배지에 배양해 이 곰팡이에서 인체에 감염을 일으키는 일반 세균들을 죽일 수 있는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1940년에 다른 연구자들이 치료용 주사제로 만들었다. 페니실리움속 곰팡이에 의해 합성되는 몇 종류의 페니실린은 생합성(生合成) 페니실린(곰팡이에 의한 발효 과정에서 생성되는 것)과 반합성 페니실린(모든 페니실린에서 발견되는 화학물질인 6-아미노페니실린산의 화학구조를 변화시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분류된다. 페니실린의 구조가 변화함에 따라 항생제의 성질도 달라지므로 여러 형태의 페니실린이 치료 목적에 따라 다르게 생산되고 있다. 벤질페니실린(페니실린G)은 현재까지 임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유일한 천연 페니실린이다. 페니실린G는 산에 불안정해 위를 통과하면서 대부분 분해되므로 충분한 약효를 얻기 위해서는 근육내 주사로 투여해야 한다. 일부 반합성 페니실린은 산에 안정하기 때문에 경구 투여할 수 있다. 모든 페니실린류는 세균의 세포벽 합성을 담당하고 있는 효소의 작용을 방해하고 또한 유기체의 방어벽을 부수는 다른 효소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으로 그 효과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포벽이 없는 미생물에 대해서는 효과가 없다. 전에는 페니실린에 감수성이 있던 세균의 일부 균주들은 페니실린에 대해 내성이 생겼다. 즉 이들 세균은 페니실린의 내부 구조를 파괴하는 효소인 페니실리나아제를 생산하여 약물의 항균작용을 파괴하거나 자체 세포벽의 페니실린 수용체를 감소시켜 약물이 세균의 세포 안으로 침투하는 것을 크게 감소시킨다. 페니실린에 감수성이 있는 세균 중에는 인두감염·폐렴·척수막염·가스괴저·디프테리아·매독·임질 등을 유발하는 것들이 있다. 페니실린의 주요부작용으로는 피부발적·담마진·종창·아나필락시 등과 같은 알레르기 반응(과민 반응)과 알레르기 쇼크가 있다. 경증의 증상은 코르티코스테로이드로 처리하면 되지만 대부분의 부작용은 교대 투약에 의해서만 막을 수 있다. 아나필락시성 쇼크는 이전에 투약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수초 또는 수분 내에 나타나는데 생명을 위협하는 반응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에피네프린을 즉시 투여해야 한다. ============================ [시선뉴스 이호기자] 과거에는 매독, 뇌막염, 폐렴 등의 질병은 걸리면 큰 고생을 하다가 사망하는 치사율이 높은 병이었다. 하지만 이 약품이 발명되면서부터 그 무섭던 병들도 별 것 아니게 되었는데 그 이름은 바로 페니실린이다. 1928년 스코틀랜드 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경은 푸른 곰팡이 주변에 박테리아가 자라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이전에도 이 현상을 발견한 사람이 있긴 했지만 이를 실험적으로 확실하게 밝힌 사람은 플레밍 경이 최초였다.         그는 페니실리움(Penicillium) 속에 속하는 푸른곰팡이로 오염되면 그 주변에는 박테리아가 자라지 못하는 현상을 관찰하였고 이 현상을 토대로 하여 푸른곰팡이가 박테리아를 파괴하는 항체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그 항체 물질에는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는 박테리아를 파괴하는 이 물질의 특성이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페니실린의 다량생산 시설 및 기술이 없다는 한계와 몸에 흡수된 후에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닌 바로 배출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이론으로만 남아야 했다. 그 후 하워드 플로리와 언스트 체인은 이 페니실린을 대량 생산하는 방법을 고안하게 되었고 페니실린은 2차 대전 이후에 박테리아로 인한 병들을 치료하여 많은 생명을 구하게 된다. 이 공로로 플레밍 경과 하워드, 언스트 체인은 1945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페니실린은 매독, 뇌막염, 폐렴같은 세균성 박테리아 질병에는 특효약이지만 바이러스 등에는 효과가 없다. 다만 과거에는 박테리아로 인한 질병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페니실린은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으로 불리곤 했다. 하지만 페니실린도 사람에 따라 알레르기에 의한 쇼크가 생길 수 있고 피부 반응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알레르기 여부를 확인하고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과거에는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며 큰 활약을 했지만 현재에는 더욱 발달한 기술과 과학, 의학으로 인해 더 빠르고 효과가 있는 대체제들이 많다. 하지만 페니실린은 발견된 지 거의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널리 쓰이고 있는 항셍제다. 인류의 많은 생명을 살렸다는데 이견이 없는 항생제인 페니실린. 그 위대한 발견은 현재의 의학을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Daum백과] 페니실린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사진=가디언 캡처 영국에서 90년 된 곰팡이 샘플이 경매를 통해 1만4597달러(한화1700만 원)에 팔렸다.  3월 1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이 곰팡이 샘플은 영국의 미생물학자인 알렉산더 플레밍이 배양했다. 알렉산더 플레밍은 이 곰팡이에서 세계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알렉산더 플레밍은 1928년 혈액 중독을 일으키는 세균인 ‘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당시 플레밍은 박테리아가 페니실리움 속에 속하는 푸른 곰팡이가 자라는 주변에서 자라지 못하는 현상을 연구했다.   이때 플레밍은 곰팡이가 박테리아를 자라지 못하게 하는 물질을 분비한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 물질을 ‘페니실린’이라고 발표했다. 페니실린은 박테리아의 세포벽을 자라지 못하게 하며, 이로 인해 박테리아의 세포액은 밖으로 나와 생장하지 못하게 된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이 상처 치료에 효과적인 소독제로 사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당시 최초의 페니실린을 만들 때 활용된 곰팡이가 바로 지난 1일 런던 경매장에 나온 곰팡이 샘플이며, 90년 동안 유리 상자에 보존돼왔다. 이 곰팡이는 1만4597달러(한화1700만 원)에 낙찰됐다.   한편 플레밍은 1929년 ‘페니실린 사용 작업’을 발표했으나, 당시에는 치료제로 사용할 만큼 충분한 양의 페니실린을 추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후 그는 병리학자인 하워드 플로리와 생화학자인 언스트 체인과 함께 페니실린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으며, 세 사람은 194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김은향 동아닷컴 기자 ================================ 활용[편집] 누룩곰팡이는 콩을 발효시켜 된장, 간장을 만드는데 쓰이며, 막걸리를 만드는 데에도 쓰인다. 일본에서도 간장, 미소(일본 된장), 사케(일본 술), 가쓰오부시 등을 만들 때 쓰인다. 살라미 같은 일부 소시지에도 풍미를 증진시키기 위해 곰팡이가 사용된다. 치즈 제조에도 사용되는데, 푸른곰팡이 종류인 Penicillium camemberti는 흰 곰팡이 핀 연성치즈를 만들때 사용하며, Penicillium roqueforti와 Penicillium glaucum는 블루치즈 제조에 쓰인다. 덤으로 속이 같다보니, 운이 안 좋은 경우 페니실린 쇼크를 일으킬수도 있다(...) 언급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막걸리나 일본 술인 사케와 소주를 만들 때 누룩 곰팡이가 필요한데, 그 이유가 조금 재미있다. 누룩 곰팡이는 직접 알코올을 만들지는 않는다. 알코올을 만드는 것은 효모다. 그런데도 누룩 곰팡이가 필요한 이유는, 효모에게 당분을 공급해주기 위해서다. 효모가 발효를 하자면 당분이 필요한데, 이런 술들의 원료인 곡물에는 당분이 다당류(특히 전분)의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곡물에 효모를 아무리 넣어도 술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누룩 곰팡이는 전분 분해 효소인 아밀레이스로 곡물의 전분을 분해할 수 있고, 그에 따른 부산물을 내놓는데, 그것이 바로 당분이다. 곡물에 누룩 곰팡이를 넣으면 전분이 분해되어 당분이 생기고, 이 당분을 효모가 분해하면 알코올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2][3] 짐작하다시피, 포도주 제조에는 곰팡이가 불필요하다. 원재료인 포도에 당분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의약품 제조에 이용되기도 하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푸른곰팡이를 이용한 페니실린이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1928년 푸른 곰팡이에서 발견한 항생제다. 내성균주가 점점 많아지는 추세라 요즘은 많이 쓰이지 않지만, 아직도 몇몇 감염증 초기에 사용하는 항생제이자 인류 역사상 최초의 항생제라는 큰 의미다. 항생제 외에도, 몇몇 지질 강하제(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약), 몇몇 면역 억제제가 곰팡이를 이용해서 만들어진다. 해악[편집] 곰팡이는 사실상 어디에나 서식하는 존재라서 늘 같이 생활할 수밖에 없다. 왕창 성장하지 않는 한, 사람이 맨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낼 뿐이다. 곰팡이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은 습기가 많은 곳으로, 즉 화장실이나 상태가 좋지 않지 않은 건물이나 반지하는 곰팡이가 살기 아주 좋은 곳이다. 때문에 벽지 같은 곳에 번식하면서 미관상으론 물론이고 공기까지 나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쥐와 바퀴벌레와 함께 주거 환경을 위협하는 생물 중 하나이다. 곰팡이는 미세한 포자를 배출하고 그 포자는 공기 중을 떠도는데, 이 포자가 많으면 알레르기 및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거나 무좀 같은 피부염을 유발 및 악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많은 종류의 곰팡이가 독소를 내놓으며, 이것이 건강에 해를 끼치기도 한다. 대부분의 곰팡이들은 휘발성 유기 화합물을 대기 중으로 분출하는데 이중에는 "새집증후군(Sick Building Syndrome)"을 일으키는 원인 물질이 들어있어 비염이나 피부염을 더더욱 악화시킬 수가 있다. 또한 염증을 유발하거나 면역력을 저하시키는 물질도 들어 있다. 심지어 발암 물질을 만드는 곰팡이도 있다. 옥수수나 땅콩 등에 번식하는 일부 곰팡이는 아플라톡신이라는 독소를 내놓는데, 이것은 발암성이 있다. 더군다나 사람에게 치명적인 곰팡이 감염[4]은 드문 편이라서 대부분은 증상이 비슷한 세균과 바이러스로 인한 원인으로 생각하고 잘못된 진단을 내려서 항생제 처방하다가 사람을 잡는 경우도 있다. 항생제는 세균에만 듣지 곰팡이에게는 전혀 듣지 않기 때문에 항진균제를 투약해야만 한다.[5] 곰팡이가 우울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브라운 대학교 연구팀이 2002년~2003년 사이 유럽의 2,982가구의 5,882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내용을 분석한 결과 곰팡이가 많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일수록 우울증 발병률이 더 높았다고 한다. 또한 평균적으로 곰팡이가 많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이 곰팡이가 없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보다 34~44% 우울증 발병 위험이 높았다고 한다. 상당히 높은 수치인데, 연구를 주도한 Edmond Shenassa 교수도 이 수치에 놀랐다고 한다. 물론 이 통계만으로 곰팡이가 우울증을 유발한다고 단정지을 순 없으며 현재 연구가 진행중이다. 곰팡이가 많은 환경에 사는 사람들 경제 상황이 더 큰 이유 아닐까 우울증에 걸리면 솔직히 집 치우기 힘들다 집먼지진드기의 먹이가 되기도 하며, 곰팡이가 증식하면서 형성한 대사 수분은 진드기에게 좋은 수분 공급원이 되기도 해 진드기의 과다 증식을 볼 수가 있다(...) 한편 진드기는 돌아다니면서 몸에 붙어 있는 곰팡이 포자를 운반해 주고, 배설물은 곰팡이의 양분이 되는 특이한 공생 관계(?)가 펼쳐진다. 특이한 종류는 전선이나 플라스틱, 심지어는 알루미늄까지 부식시켜 비행기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출처필요] 2007년경에는 양서류에 치명적인 항아리곰팡이의 번성으로 인한 양서류 멸종까지 우려되었다. 그러나 2010년 12월에는 양서류 개체수가 회복되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더니 지금은 별말 없는 상태. 아마 양서류가 이들에게 내성을 갖게 된 듯하다. 집의 벽이나 거실 벽 등에 곰팡이가 끼는 일이 생긴다. 반지하에 살거나 겨울철인 경우, 집 안팎의 온도 차이로 인해 결로 현상[7]이 일어나 부분적으로 습도가 높아지면서 곰팡이가 피어오를 때가 있다. 이런 경우 락스 희석액을 분무기로 해당 부위에 뿌려 주면 원래의 깨끗한 벽으로 돌아온다. 살균도 되고 보기 싫은 시꺼먼 곰팡이 때도 빠진다. 정도가 심할 경우에는 원액을 사용해도 된다. 다만 어느 경우든 고무 장갑과 마스크는 껴야 하며, 락스 액이 몸에 튀지 않도록 주의하자. 옷에 튈 경우 변색될 수 있으며, 환기는 꼭 하도록 하자. 벽지의 색이 빠지거나 변색되는 경우도 주의해야 한다.
1066    [이런저런] - 세계에서 제일 비싼 비둘기 댓글:  조회:3551  추천:0  2017-03-06
세계 최고가 비둘기   네덜란드의 비둘기가 세계 최고가로 팔렸다고 합니다~~~!! 어떤 비둘기길래????   영국 텔레그래프 보도에 의하면 네덜란드 한 비둘기 애호가가 그의 비둘기를 중국 선박업계 거물인 후첸위에게 31만 유로 (약 4억 4500만원)에 팔았다고 하네요   -0-...............억소리 난다 진짜..ㅋㅋㅋㅋ   세계 최고가로 팔린 이 비둘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불리는 우사인 볼트의 이름을 따 "볼트"로 지어졌으며 이름에 맞게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고 하네요 ㅎㅎ   중국에 비둘기 경주가 성행하고 있어 비둘기를 고가로 구입했다고 합니다..ㅋㅋ   얼마나 빠르길래...... 비둘기 몸값 장난 아니네???    
1065    [쉼터] - 곰팡이의 진실과 오해 댓글:  조회:6883  추천:0  2017-03-06
“우웩! 더러워!” 며칠 전에 사 둔 빵에 곰팡이가 가득 생겼어. 보기만 해도 근질근질~, 곰팡이들이 내 몸으로 들어와 병이 날 것만 같아. 한 손으로는 코를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빵 귀퉁이를 아슬아슬하게 잡아 쓰레기통에 ‘휙~’하고 버리려는 순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어. “미안해, 네가 오랫동안 먹지 않기에 내가 먼저 조금 먹었어!” 엥?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아. 어디서 들리는 목소리일까? 귀를 쫑긋 세워 보았어. “여기야 여기, 빵을 자세히 보라구! 안녕? 난 곰팡이라고 해. 넌 왜 그렇게 날 싫어하는 거니?” “그거야…, 징그럽게 생긴데다가 더럽고 몸에도 해롭잖아!” “넌 정말 나를 오해하고 있구나! 곰팡이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고 싶어! 나와 함께 곰팡이 세상으로 가 보지 않을래?” 곰팡이 세상이라고? 궁금하긴 하지만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 걸? 하지만 ‘어린이과학동아’ 친구들이 함께 가 준다면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아. 나와 곰팡이 세상으로 함께 가 줄래?   오해 하나 곰팡이는 작다? 곰팡이와 손을 잡고 곰팡이 세상으로 가려고 하는데, 곰팡이가 너무 작아서 얼굴은 어디인지 손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어. 나도 모르게 투덜거리고 말았단다. “으~, 넌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아. 도대체 네 손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 거니?” 그러자 곰팡이가 대답했어. “난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서 미생물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큰 생물이기 도 해!” 뭐? 곰팡이가 가장 큰 생물이라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니? 미생물 곰팡이? 0.1㎜ 이하로 작아서 맨눈으로 보기 힘든 생물을 미생물이라고 불러. 미생물에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들이 있지. 물론 곰팡이도 미생물이야. 곰팡이도 모여 있으면 눈에 보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거든. 곰팡이는 투명한 실 같이 생긴 균사로 이뤄져 있는데, 균사끝에는 곰팡이의 씨앗인 포자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단다. 포자는 아주 작아서 포자 100개가 일렬로 줄을 서도 1㎜도 되지 않아. 정말 신기하지? 버섯도 곰팡이라고? 흔히 버섯과 곰팡이는 전혀 다른 생물이라고 생각하지만 버섯도 곰팡이야. 마치 매미가 오랜 시간을 땅 속에서 살다가 여름 동안만 맴맴 우는 매미로 사는 것처럼, 버섯도 오랜 시간을 나뭇나 흙에서 실모양의 균사체인 곰팡이로 숨어지내. 그러다가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추워질 때 버섯으로 쏘옥 나오는 거야. 이 때 버섯은 곰팡이의 씨앗인 포자를 가득 품고 있지. 즉, 버섯은 주변 환경에 맞추어 포자를 빠르게 퍼뜨리기 위해 생겨난 곰팡이의 꽃이란다. 물론 곰팡이 중에는 버섯을 만드는 곰팡이도 있고, 버섯 없이 포자를 퍼트리는 곰팡이도 있단다. 곰팡이의 크기가 890만㎡? 1992년, 한 생물학자는 미국의 미시건 아이언 카운티의 숲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 한 종의 곰팡이가 균사를 펼쳐서 15만 3000㎡의 땅을 덮고 있었던 거야. 2003년 미국 오리건 주에서 발견된 뿌리 썩음 곰팡이인 ‘아밀라리아(아래사진)’는 여의도 면적의 약 3배인 890만㎡에 균사를 펼치고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어. 나이는 2400살에 무게는 605톤이나 됐단다. 지구에 살고 있는 동물 중 가장 큰 동물인 대왕고래도 길이 32m에 무게는 190톤 정도니, 정말 어마어마한 곰팡이지? 식빵에 생긴 곰팡이도 우리 눈에 보이는 부분은 작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균사는 빵 전체에 퍼져 있단다. 곰팡이가 좋아하는 먹이와 습기가 많으면 곰팡이는 아주 크게 자랄 수 있어. 실제로 영양이 풍부한 1만㎡에는 보통 곰팡이가 2700㎏이나 들어 있어. 놀랍지? 우리 곰팡이들을 작다고 미생물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넓게 퍼져 사는 거대한 생물이란 다.     곰팡이는 식물? 과학자들이 곰팡이를 처음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는 곰팡이를 식물이라고 생각했어. 식물과 동물을 구분하는 커다란 특징이 세포벽인데 세포벽이 있으면 식물(오른쪽사진), 없으면 동물로 구분해. 곰팡이는 세포벽이 있기 때문에 식물이라고 생각한 거지. 하지만 곰팡이는 식물과는 다르게 광합성을 하지 못하고, 곰팡이가 세포벽을 만드는 성분은 오히려 동물인 곤충의 껍질을 만드는 성분과 같단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고민 끝에 우리들을 식물도 동물도 아닌 ‘곰팡이’라는 새로운 생물집단으로 구분하기로 했어. 어때? 친구들은 생물을 식물 아니면 동물로만 구분했었지? 우리 곰팡이들도 동물이나 식물 못지 않은 큰 집단의 생물이란 걸 잊지 말라구! 오해 둘 곰팡이는 못생겼다? 곰팡이는 작으면서도 거대하고, 동물이나 식물이 아니라 새롭게 구분된다니…. 정말 대단하고도 신기한 존재인 것 같아. 하지만 곰팡이를 보기만 하면 징그러워서 소름부터 돋는 걸! 이런 내 모습을 보고 곰팡이가 말했어. “우리 곰팡이가 얼마나 예쁜지 모르는구나? 자, 가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내 여자 친구 곰팡이랑 다른 예쁜 곰팡이들을 만나게 해 줄게!” 아무리 봐도 징그러운 털뭉치 같은데…. 곰팡이가 예쁘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난 서둘러 곰팡이를 따라나섰어. 빨강 노랑 파랑, 예쁜 색깔의 곰팡이들 곰팡이 하면 화장실 타일의 칙칙한 검은색이나 회색의 곰팡이만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 곰팡이들도 빨강, 노랑, 파랑 예쁜 색을 가지고 있단다. 빵에 많이 생겨서 붉은빵곰팡이로 불리는 친구부터 누룩곰팡이, 푸른곰팡이, 녹색곰팡이 등 다양한 곰팡이가 있지. 곰팡이가 다양한 색을 띠는 이유는 대부분 포자 때문이란다. 포자가 파란색이면 푸른곰팡이로 보이는 거야. 그렇다고 무슨무슨색 곰팡이가 정식 이름은 아니야. 과학자들은 곰팡이를 정식 이름인 학명으로 부르거든. 예를 들어 푸른곰팡이는 페니실리움속의 곰팡이를 통틀어 말하는 거지. 이 안에는 페니실리움 크리소게눔, 페니실리움 컴팩틴, 페니실리움 코뮨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곰팡이들이 있단다. 푸른곰팡이라고 부르면 마치 ‘다양한 사람들중에 김씨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크게 묶어서 부르는 셈이야.   곰팡이도 보배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지? 우리 곰팡이들을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름답게 엮인 균사에 반짝이는 포자들이 옹글옹글 꿰어져 있는 보배 같단다. 어떤 곰팡이가 가장 빛나는 보석 같니?     잠깐! 세상에서 가장 빠른 곰팡이 포자! 물방울곰팡이는 예쁘게 생긴 외모만 놀라운 것이 아니에요. 포자를 날리는 실력도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답니다. 미국 마이애미대학교 식물학과 니콜라스 머니 교수팀은 초고속 비디오 카메라로 물방울곰팡이가 포자를 퍼트리는 장면을 촬영해 분석했어요. 그 결과 포자가 비행하는 속도가 초당 2~25m나 된다는 것을 밝혀 냈지요. 0.01㎜보다 작은 포자로서는 엄청난 거리를 날아가는 셈이에요. 이런 속도는 자연계에서 관찰된 생물의 속도 중 가장 빠른 속도랍니다.   오해 셋 곰팡이는 더러운 곳에만 있다고? “그래, 네 여자친구 물방울곰팡이는 참 예쁘게 생겼구나. 하지만! 우웨엑~! 초식동물의 똥 에 산다고? 더러워 더러워~!” 호들갑을 떠는 내게 곰팡이가 웃으며 말했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어. 하지만 우리 곰팡이가 더러운 곳에만 생기는 건 아니야. 우리는 세상 모든 곳에 있단다. 지구는 온통 곰팡이 세상이니까 말이야!” “지구가 곰팡이 천지라고? 에이~, 못 믿겠는 걸?” “그럼 나와 함께 곰팡이가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 볼래?” 집안에 가득가득, 곰팡이 세상 음식이 많은 부엌은 곰팡이가 좋아하는 곳이야. 빵이나 밥을 오랫동안 놔두면 색색의 곰팡이가 예쁘게 피어나지. 냉장고 안은 춥기 때문에 곰팡이가 없을 거라고? 천만의 말씀! 먹을 것도 많고 우리가 좋아하는 습기도 가득해서 냉장고를 좋아하는 곰팡이도 있단다. 욕실도 곰팡이가 먹을 것이 없어서 살기 힘들 것 같지? 하지만 욕실도 수분이 많고 따뜻해서 우리들이 좋아하는 곳이야. 에어컨도 차가운 바람을 만들면서 물방울이 생기는 것은 물론 필터에 먼지가 가득 쌓이기 때문에 우리 곰팡이가 아주 많이 사는 곳이란다. 심지어 플라스틱을 먹고 사는 곰팡이도 있어. 플라스틱을 만들 때, 모양을 잘 만들기 위해 아주 적은 양의 녹말이 들어가. 바로 이 녹말을 곰팡이가 먹고 사는 거야. 알터나리아나 클라도스포리움, 푸사리움, 트리코데마 등의 곰팡이가 플라스틱에 잘 살지. 알터나리아 곰팡이와 클라도스포리움 곰팡이는 검은색, 푸사리움은 분홍색, 트리코데마는 녹색의 흔적을 플라스틱에 남긴단다. 잠깐! 곰팡이를 닮은 곤충이 있다? 오른쪽 사진을 아무리 봐도 곰팡이가 가득한 걸로 보이죠? 하지만 곰팡이가 아니랍니다. 바로 면충(왼쪽 사진)이라는 벌레예요. 면충은 몸에서 밀납 성분이 하얀 솜털처럼 나오기 때문에 곰팡이처럼 보여요. 곰팡이를 닮은 씨앗도 있어요. 하얀 솜털이 마치 균사가 숭숭 난 곰팡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박주가리 씨앗(오른쪽 사진)이랍니다.   몸에도 우글우글, 곰팡이 세상 사람의 몸에 사는 대표적인 곰팡이는 바로 무좀이야. 말만 들어도 발가락이 간질간질하지? 무좀은 ‘백선균’이라고 불리는 곰팡이가 발바닥 피부의 단단한 부분에 살면서 생기는 병이지. 무좀균이 싫다면 발을 잘 씻고 늘 뽀송뽀송하게 말려야 해. 머리에 생기는 비듬도 ‘피티로스포룸 오발레’라는 곰팡이가 너무 많이 생기면 걸리는 병이야. 이 비듬 곰팡이는 원래 피부에 사는 곰팡이인데, 그 수가 적당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다만 너무 많이 생기면 비듬이 되는 거란다. 비듬 곰팡이도 축축한 곳을 좋아해. 비듬이 싫다면 머리를 감고 잘 말리는 것이 중요하겠지? 잠깐! 곰팡이가 우리 몸을 보호한다고? 건강한 사람의 입 안에는 적당한 수의 곰팡이가 늘 있어요. 이런 곰팡이나 세균이 싫다고 살균과 소독을 하는 구강청정제를 오랫동안 사용하면 오히려 병에 걸리기 쉽다는 연구결과가 있답니다. 그 이유는 건강한 사람의 입 속에 사는 곰팡이나 세균들이 병을 일으키는 나쁜 곰팡이나 세균을 막아 주기 때문이에요. 몸에 사는 곰팡이가 적당한 균형을 이룰 때, 가장 건강할 수 있답니다. 식물에도 옹기종기, 곰팡이 세상 동물의 몸에 사는 곰팡이도 많지만 더 많은 곰팡이들이 식물과 함께 살아. 식물의 잎에 곤충의 알처럼 보이거나 얼룩처럼 보이는 것이 우리 곰팡이들이지. 봄에 예쁜 꽃을 피우는 연산홍 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풍선처럼 크게 부푼 잎이 보일 거야. 이 안에 떡병균이라는 곰팡이가 들어 있단다. 밀의 잎에 노란 곤충 알처럼 보이는 것은 녹병균 곰팡이지. 이렇게 우리 곰팡이들은 이미 약해진 식물이나 죽은 식물을 먹고 살아. 하지만 많은 곰팡이들이 식물에게 도움도 준단다. 곰팡이가 여의도 면적의 약 3배에 균사를 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식물은 뿌리를 이렇게 크게 뻗기가 힘들어. 하지만 균사를 넓게 펼치는 곰팡이가 식물의 뿌리에 살면서 식물에게 양분을 준단다. 곰팡이와 식물이 서로 도우며 사이좋게 사는 거야. 오해 넷 곰팡이는 먹으면 큰일나?! “웁!” 공기에 곰팡이 포자가 가득 있다는 말을 들을 나는 손으로 얼른 입을 틀어막았어. 나를 보고 곰팡이가 웃으며 말했지. “크크크, 그런다고 아주 작은 포자를 막을 수는 없을 걸? 게다가 지금까지 곰팡이의 포자를 먹으면 서도 아무런 병에 걸리지 않았잖아? 건강한 사람은 곰팡이 포자를 먹어도 병에 걸리지 않아!” “저…, 정말?” “그럼~, 게다가 맛있다고 곰팡이가 핀 음식을 일부러 먹기도 하는 걸?” 뭐? 곰팡이가 핀 음식을 일부러 먹는다고? 도대체 어떤 음식이야? 곰팡이는 요리사 콩과 쌀, 우유, 가다랑어…. 우리 곰팡이들의 요리 재료야. 곰팡이들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를 만드는 멋진 요리사란다. 콩과 쌀은 누룩곰팡이 요리사의 단골 요리 재료야. 콩으로 구수한 된장을 만들고, 쌀로는 술을 만들지. 우유와 가다랑어는 푸른곰팡이 요리사가 특히 좋아해. 우유로는 치즈를, 가다랑어로는 가쓰오부시를 만들거든. 요리사 곰팡이들은 효소를 만들어서 음식의 단백질을 더 고소한 아미노산으로, 녹말을 달콤한 당으로 분해한단다. 물론 곰팡이 외에 다양한 미생물들이 요리에 도움을 주기도 해. 어때? 술 말고는 다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지? 보통은 음식에 곰팡이가 피면 상하지만, 특정한 음식과 특정한 곰팡이가 만나면 멋진 요리가 완성되는 거야. 흔히 곰팡이가 생겨서 썩는 것을 부패, 맛있는 요리가 되는 것을 발효라고 불러. 하지만 우리 곰팡이 입장에서 보면 부패와 발효 사이에 다른 점은 없지. 다만 사람들 입장에서 음식을 못 먹게 만드는 것을 부패, 음식을 먹기 좋게 만드는 것을 발효라고 나누어 부를 뿐이란다. 상상초월, 비싼 음식을 만드는 곰팡이 상상을 초월하는 비싼 가격의 음식을 만드는 곰팡이도 있어. 대표적인 음식이 귀부 와인과 덩이버섯(오른쪽)이야. 귀부 와인은 회색곰팡이에 썩은 포도로 만드는데, 달콤한 맛과 향이 무척 뛰어나다고 해. 한 병에 50만 원을 훌쩍 넘기도 한단다. 귀부와인보다 더 비싼 곰팡이가 바로 덩이버섯이야. 덩이버섯은 송로버섯이라고도 부르는데, 프랑스 요리를 만들 때 향신료로 사용해. 가장 비싼 덩이버섯은 2007년 12월, 경매에서 팔린 1.497㎏의 덩이버섯이야. 무려 3억 3,000만 원에 팔렸단다. 1g에 22만 원인 셈으로 금보다 비싼 가격이지. 어때? 우리 곰팡이들의 몸값, 대단하지?   미래의 식량자원 곰팡이? 체중 500㎏의 소는 하루 종일 풀을 먹어도 500g의 살이 찔 뿐이야. 하지만 곰팡이의 하나인 효모 500㎏은 하루 종일, 24시간 동안 먹고 자라면 10톤의 효모가 된단다. 효모는 쇠고기나 계란과 같은 단백질이 많은 곰팡이야. 그러니 인구가 계속 늘어나 식량이 부족하게 되면 어마어마한 속도로 자라는 곰팡이가 미래 인류의 식량이 될지도 몰라! 곰팡이 농사를 짓는 개미! 곰팡이를 주식으로 먹고 사는 개미도 있단다. 바로 아마존에 사는 가위개미야. 가위개미는 나뭇잎을 잘라 굴로 가져가서 곰팡이 농사를 지어. 그래서 이름도 가위개미란다. 가위개미는 잘라서 가져간 잎을 입으로 씹어서 부드럽게 만든 뒤, 그 위에다 포자를 뿌려서 곰팡이 농사를 짓지. 무려 5000만 년 전부터 이렇게 곰팡이 농사를 지어 왔단다. 그러니 사람은 물론 지구상에 사는 모든 동물들 가운데 농사를 가장 먼저 시작한 거야. 정말 놀랍지? 잠깐! 고추가 매운 이유는 곰팡이 때문?  고추가 매운 이유는 곰팡이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해요. 미국 워싱턴대학교 조슈아 튁스 베리 교수팀은 세상에서 가장 매운 고추인 ‘아바네로’를 연구했어요. 그 결과 고추에 구멍을 내는 곤충이 많아 곰팡이가 고추 안으로 쉽게 들어오는 지역에 사는 고추들은 매운맛을 내는 캡사이신이 많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 냈지요. 같은 종의 고추라도 고추에 구멍을 내는 곤충이 없어서 곰팡이가 고추를 공격하지 않는 고추는 매운 맛이 거의 없었어요. 고추의 캡사이신뿐만 아니라 커피의 카페인이나 소나무의 피톤치드는 모두 곰팡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식물이 만들어 내는 성분이랍니다. 오해 다섯 곰팡이는 몸에 해롭다고? “우와~, 곰팡이는 정말 대단하구나!” 나의 칭찬에 곰팡이는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어. “벌써 놀라기는 이르다구! 더 대단한 곰팡이도 많은 걸? 곰팡이 요리사에 이어 곰팡이 의사도 소개해 줄게.” 곰팡이 의사도 있다고? 럴수럴수 이럴 수가! 작은 미생물인 곰팡이가 어떻게 사람을 치료하는 걸까? 서둘러 곰팡이 의사를 만나러 가 보자! 위대한 의사, 푸른곰팡이 1929년 영국, 알렉산더 플레밍은 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을 연구하다가 이상한 곰팡이를 발견했어. 바로 푸른곰팡이란다. 플레밍이 병원균을 키우는 접시에 실수로 푸른곰팡이가 들어갔는데, 그 주변으로 병원균이 자라지 못했던 거야. 이를 이상하게 여긴 플레밍은 푸른곰팡이가 병원균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어떤 물질을 만들어 낼 거라고 생각했어. 이 물질이 바로 유명한 ‘페니실린’이지. 페니실린은 푸른곰팡이의 학명인 ‘페니실리움’을 따서 지은 이름이야.  페니실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다친 많은 군인들의 목숨을 건졌어. 영국의 처칠 수상의 폐렴도 페니실린이 치료했지. 플레밍은 페니실린의 발견으로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단다. 페니실린이 없었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병원균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푸른곰팡이를 위대한 의사라고 부를 만하지? 암도 치료한다고? 곰팡이가 만들어 내는 ‘로바스틴’이나 ‘심바스타딘’은 동맥경화를 치료하는 유명 한 약이야. 장기이식을 할 때 중요한 면역 억제제도 곰팡이가 만든단다. 신장 이나 간 등의 장기가 고장나 다른 사람의 장기를 이식 받으면 인체가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돼. 이 때, 곰팡이가 만든 면역 억제제인 ‘사이클로스포 린’이 거부반응을 막아 주는 거야. 암세포를 굶겨 죽이는 곰팡이도 있어. 이 곰팡이도 페니실린처럼 우연히 발견됐단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의 주다 포크먼 박사팀은 실험 실에서 사람의 조직을 키우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 혈관이 생기면서 잘 자라야 할 조직이 금세 죽어버리는 거야. 자세히 살펴 보니 ‘아스퍼질 러스 푸미가투스’라는 곰팡이가 피어 있었지. 이 곰팡이가 만들어 내는 ‘푸마질린’이라는 물질이 혈관을 못 만들게 막았던 거야. 포크먼 박사팀은 푸마질린이 암세포에 산소와 영양을 주는 혈관이 생기는 것을 막아 암세포를 굶겨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직은 푸마질린이 약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연구가 계속되고 있단다. 곧 곰팡이가 만든 암 치료제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방귀를 막아 주는 곰팡이? 뿡뿡뿡~, 시원하지만 부끄러운 방귀를 싹 사라지게 하는 곰팡이도 있어. 바로 검은곰팡이! 냠냠냠,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일어나지? 하지만 음식 속에는 사람은 소화시킬 수 없는 성분도 있단다. 이 소화되지 않은 성분을  장 속에 사는 미생물들이 분해를 해. 그러면서 이산화탄소나 메탄 같은 가스가 만들어져 방귀가 되는 거야. 이 때, 검은곰팡이가 만든 ‘알파갈락토시다제’라는 효소를 먹으면 방귀가 사라진단다. 소화가 잘되지 않는 성분을 모두 소화시켜서 장 속의 미생물들이 먹을 음식이 없게 만드는 거야. 그러면 가스도 만들어지지 않고, 방귀도 사라지지. 방귀대장 뿡뿡이는 방귀를 없애 주는 검은곰팡이를 싫어할지 좋아할지 궁금해지는 걸? 곰팡이가 미국과 캐나다를 만들었다? 곰팡이가 없었다면 미국과 캐나다는 지금과는 다른 나라가 되었을 거야. 무슨 소리냐구? 1845년부터 1846년까지 아일랜드에 곰팡이로 생기는 감자병인 ‘감자역병’이 돌았어. 감자역병에 의한 흉년으로 감자를 주식으로 먹고 사는 아일랜드 인들은 굶어 죽을 상황에 처하게 되었지. 결국 아일랜드 인은 굶어 죽느니 다른 곳으로 떠나기로 했어. 당시에는 황무지나 다름이 없던 미국과 캐나다로 150만 이상의 아일랜드 인들이 이주를 했단다. 1851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이 때 이주한 아일랜드 인들이 미국동부 주요도시 인구의 4분의 1, 캐나다 주요 도시 인구의 2분의 1에 이르렀어. 곰팡이 하나가 미국과 캐나다를 만드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한 셈이란다. 곰팡이 없이는 못 살아! “어때? 우리 곰팡이들의 활약이!” 곰팡이에 대해 알고 나니 놀라움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 입을 벌린 내 모습을 보고 곰팡이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어. “벌써 입이 떡 벌어지면 어떻게 하니? 아직 놀랄 게 남았다구! 우리 곰팡이들이 하는 일 중 가장위대한 일을 소개해 줄게.” 작으면서도 거대하고, 예쁜데다가 세상에 가득하고, 맛있는 음식과 약을 만드는 일 말고 또 곰팡이가 하는 위대한 일이 있다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걸? 도대체 어떤 일일까? 바이오연료도 곰팡이가 만든다! 사람들이 연료로 사용하는 석탄, 석유, 천연가스 같은 화석에너지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약 50년 후에는 완전히 고갈될지도 모른대. 게다가 화석에너지를 연료로 사용하면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는 지구온난화를 일으켜서 문제가 되고 있지. 이런 화석 연료를 대체할 후보로 바이오연료가 있어. 바이오연료는 식물을 이용해 에탄올이나 기름을 만드는 것이란다. 예를 들면 콩이나 옥수수에서 기름을 짜내거나 콩이나 옥수수를 발효해 에탄올을 만드는 거지. 이 때, 우리 곰팡이들이 멋진 활약을 펼쳐. 술을 만드는 것처럼 곰팡이의 일종인 효모가 콩이나 옥수수를 분해해서 에탄올을 만들거든. 최근에는 식량으로 사용하지 않는 부분인 식물의 잎과 줄기를 이용해 바이오연료를 만드는 방법이 개발되고 있는데, 이 방법도 곰팡이 덕분에 가능해. 곰팡이는 원래 죽거나 병든 식물을 분해하는 역할을 하잖아? 잎과 줄기의 단단한 섬유질을 우리들이 쓱싹쓱싹 분해해서 바이오연료를 만드는 거야. 미래에는 ‘어린이과학동아’ 친구들도 우리 곰팡이가 만든 에탄올로 달리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겠지? 지구의 청소부 곰팡이 이제 우리 곰팡이가 하는 일 중 가장 위대한 일을 소개할게. 그 일은 바로 지구를 청소하는 일이란다. 우리 곰팡이들은 죽거나 병든 생물과 생물들의 배설물이 썩어서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게하지.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결국 죽게 돼. 그런데 이 생명체들이 분해되지 않고 남아 있다면 지구는 죽은 생물과 배설물로 뒤덮일 거야.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물론 작은 곤충이나 세균들도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해. 하지만 우리 곰팡이들은 곤충이나 세균 친구들이 분해하지 못하는 생물도 분해할 수 있고, 더 작게 분해한단다. 우리가 이렇게 분해한 생물은 다시 식물의 양분이 되고, 이 식물을 동물이 먹으면서 생명이 계속되는 거야. 더럽다고만 생각했던 곰팡이가 하는 일이 이렇게 많다니 정말 놀랐어! ”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단다. 곰팡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인 지구 청소부 역할을 묵묵히 하고 있는데, 곰팡이라면 무조건 싫어했다니 말이야. 게다가 사람에게 유용한지 아닌지에 따라 좋은 곰팡이와 나쁜 곰팡이로 나누다니…. 모든 곰팡이는 지구에 꼭 필요한 좋은 곰팡이일 텐데 말이야. 과학자들은 지구에 곰팡이가 총 150만 종 이상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하지만 밝혀진 곰팡이는 곰팡이의 5% 정도인 8만 종에 불과하다고 해. 아직 우리가 알아채 주기를 기다리는 곰팡이들이 많은 거지. 새로 밝혀질 곰팡이는 어디서 어떤 일을 할까? 정말 굼긍하다. ‘어린이과학동아’ 친구들이 빵에 생긴 곰팡이, 비온 뒤 화단에 쏙 나온 버섯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찰한다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곰팡이를 찾아낼수 있겠지? 플레밍 아저씨처럼 말이야!   한 눈에 이해가 쏙쏙 특집 한 걸음 더! 곰팡이를 키워 보자! ➊ 식빵이나 밥을 준비합니다. ➋ 그릇에 담고 분무기로 물을 촉촉하게 뿌립니다. ➌ 따뜻한 곳에 둡니다. ➍ 빵이나 밥이 마르지 않게 때때로 물을 더 뿌려 주며 2~3일 관찰합니다. ➎ 곰팡이가 생기면 눈으로 곰팡이가 어떤 모양이고 무슨 색인지 관찰기록장에 그림을 그리고 기록합니다. ➏ 현미경이나 돋보기가 있다면 더 자세히 본 모습도 그림으로 그리고 기록합니다. ➐ 시간이 지나면서 곰팡이는 어떻게 변하는지, 또 빵은 어떻게 변하는지 계속 관찰하고 기록해 보세요. 곰팡이가 핀 음식, 먹을까? 말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요리사이기도 하고, 건강 에 도움이 되는 성분을 만드는 의사이기도 한 곰팡이. ‘그렇다면 곰팡이가 핀 음식을 먹어도 되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음식에 핀 곰팡이는 좋은 곰팡이인지, 나쁜곰팡이인지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된답니다. 곰팡이로 발효한 음식은 좋은 곰팡이만 생기도록 조절한 것이고, 곰팡이로 만든 약은 건강에 도움이 되는 성분만 뽑아낸 것이기 때문이지요. 곰팡이가 음식을 소화하면서 건강에 해로운 독소를 만들기도 하기 때문에 곰팡이가 핀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나거나 건강에 나쁜영향을 줄 수도 있답니다. 우주로 간 곰팡이 붉은빵곰팡이가 곰팡이계의 대표 우주인이에요. 우주에서 자고 깨어나는 주기인 ‘개일리듬’을 측정하는실험 대상으로 선발되어 우주에 갔답니다. 무중력 상태로 90분마다 하루가 바뀌는 우주에서 개일리듬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붉은빵곰팡이로 실험한 것이죠.그 결과 붉은빵곰팡이의 개일리듬은 우주에서나 지구에서나 똑같았어요. 즉, 붉은빵곰팡이의 개일리듬은 환경에 상관없이 생체시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랍니다.     글 : 현수랑  도움 : 배경숙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생명자원관리본부미생물자원센터  도움 : 석순자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유전자원센터 농업미생물팀  도움 : 홍승범 촌진흥청국립농업과학원 농업유전자원센터  진행 : 김영수  진행 : 레이먼드 워홀  /어린이과학동아
106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연변에 "한옥마을"이 없다?... 있다!... 댓글:  조회:3500  추천:0  2017-03-04
연변한옥협회 강녕한옥마을서 고고성 울리다 (ZOGLO) 2017년3월4일  -우리 민족의 전통주택인 한옥(韓屋)의 문화적가치를 살리는 뜻깊은 스타트 “우리 민족의 전통주택인 한옥(韓屋)의 문화적가치를 살리고 한옥의 력사적, 예술적특성을 연구하고 한옥건축 및 한옥문화교육활동을 통해 한옥의 현대화, 대중화를 실현하여 한옥문화의 개선과 창달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 연변한옥협회가 2월 25일, 도문시 장안진 강녕한옥마을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멋스롭고 품위 높은 웅장한 강녕한옥마을 일각(자료사진) 이날 선거된 연변한옥협회 회장 조광훈(강녕마을 리사장), 부회장 윤희상(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 전통건축연구소 소장), 국제회장 김준봉(북경대학 교수, 국제온돌학회 회장), 고문 서정호(한국국립공주대학 교수, 아산박물관 관장)등이 모임에 참석하여 한옥을 두고 서로의 견해들을 내놓았다. 조광훈회장은 “6년간의 체험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전통한옥을 짓는다는것은 단순히 집을 한두채 짓는 문제가 아니라 전통한옥문화를 지키고 계승발전시키는 영광스럽고 간거한 사업이라는것을 느끼게했다. 윤희상교수님의 성심어린 도움으로 6년간 강녕한옥마을을 건설하면서 한옥문화는 우리 민족의 우수한 주거문화이며 거기에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특수성으로 한복을 입고 한식을 먹으며 한방(온돌구들)에서 잠을 자는 의, 식, 주 총괄생활문화가 슴배여 있음을 알게 되였다. 한옥마을건축을 시작할 때 전통한옥을 짓는가, 연변한옥을 짓는가, 아니면 개량한옥을 짓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우회곡절이 많았다. 우리는 건축과정에서 일단 문제에 부닥치면 주유천하를 하면서 보고 또 보고 묻고 또 물으면서 연변에 진정한 한옥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례하면 진정한 전통온돌구들을 만들기 위해 중국조선족 주거지는 물론 조선, 한국의 온돌을 고찰하면서 저마다의 우수성을 종합하고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최종 국제온돌학회 김준봉회장에게 의뢰하였다. 나중에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물과 바람, 지열 등의 자연에너지를 활용하며 자연재료를 주재료로 한 생태건강건축, 미래건축의 대안으로 인정되고있는, 열기와 연기를 분리하고 열기는 보존하고 연기만을 배출하는 온돌, 따스하고 머리는 시원하며 공간위생이 깨끗한 전통한방온돌을 놓기로 했다.”고 말했다. 10년간 중국에서 사업한적 있는 윤희상부회장은 한국에서 한옥건축을 대상한 건축학 박사로서 2007년에 교환교수로 연변과학기술대학에 온 이래 지금까지 근무하고있다. 윤희상부회장은 “한옥건축사업의 시작은 도문의 두만강광장건설부터 시작되였다. 그때 시공목수가 없어서 정말 애났다. 본격적인 한옥건축사업은 2011년 조광훈회장을 만나서부터였다. 조회장이 추진하는 한옥마을건설은 건축설계로부터 조경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역사회의 발전과 민족사회의 문화발전을 위한 대단한 사업이였다. 그간 우리는 중국 내외의 한옥들을 견학하면서 구들온돌까지 전통한옥을 고집하였다. 나는 한국 전주론문발표대회에서 강녕한옥마을건설을 주제로 한 론문을 발표했는데 상당한 전문가들의 충분한 인정을 받았다. 우리는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리익을 위함이 아닌 지역과 민족의 문화발전을 위하여 기여해야 한다. 연변, 조선, 한국이 서로 손잡고 한옥문화의 공동연구, 공동발전을 위해 노력함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한국서 팀을 거느리고 강녕마을에서 전통온돌을 놓고있는 김준봉 국제온돌학회 회장(오른쪽 세번째) 김준봉국제회장은 수년전부터 연변과학기술대학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민가를 연구하고 민간답사를 하였으며 조선 평양에서 민족건축을 배우면서 민족건축이 친환경건축, 생태건축, 영구건축, 건강건축임을 배우게 되였다. 결국은 서양건축을 배우려던 생각을 버리고 여생을 민족건축연구에 바치련다고 늘 말한다. “온돌구들연구에 몰입하면서 일찍부터 서구라파에도 기름을 태우는 온돌구들이 있었고 그후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온돌구들을 버리게 된 리유를 알게 되였다. 신을 신고있으면 항상 준비된 태세여서 싸우고나서 쉽게 자리를 뜰수 있기때문이였다. 이에 비춰 신을 벗고 주거생활을 하는 우리 민족의 가족문화는 가족끼리 싸우고는 앉은 자리에서 쉽게 화해하는 상생의 문화였다.”고 김준봉은 말한다. 김준봉은 “조선의 구들문화도 좋았다. 조선에는 밥을 하는 구들, 체온유지를 위한 구들, 청결을 위한 구들로 분별이 되여있다.”고 설명했다. 서정호고문은 “한국은 전기온돌보급으로 전통온돌구들이 없어지고 부엌아궁이도 막혔다. 연변에서 전통한옥을 만나니 가슴이 울렁거린다. 한옥은 우리 민족의 영원한 기술로 한옥은 천년을 내다보고 짓는다고 한다. 조광훈씨는 천년을 내다보고 한옥마을을 건설했는데 조광훈의 한옥혼이 길이길이 이어져갈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하면서 “특히 오늘 우리 민족의 전통병풍을 발언석 배경으로, 전통농짝을 발언대로 한 자리에서 발언하게 된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긴다.”고 했다. 조광훈회장은 “앞으로 5년간의 노력을 더 들여 보다 더 완미한 건축, 조경, 시설로 강녕한옥마을을 잘 꾸며 명실공히 료양마을, 수연(壽宴)례 례식장마을, 드라마촬영마을, 문화관광명소로 부상시킬것이다.”고 밝혔다. 국제화를 대상한 연변한옥협회는 회장, 국제회장, 고문, 감사, 학술리사, 사업리사, 홍보리사, 국제교류리사, 교육리사회 부기원, 총무, 서무, 행정간사 등 총 23명으로 팀을 구성하였다. 연변한옥협회의 설립에 연변과학기술대학, (사)한국현대한옥협회,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에서 후원했다. 한옥문화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모임                                                       오기활/길림신문
106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두 장애인 정말 위대한 사람!!! 댓글:  조회:4308  추천:0  2017-03-03
[[중국]] 하북성(河北省) 정형현(井陘県) 손장향 치리촌(孫荘郷治裡村)에 사는 가해하(賈海霞) 씨와 가문기(賈文其) 씨라는 두 장애인이 12년간 나무 심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가해하 씨는 선천성 [[백내장]]으로 왼쪽 눈이 안 보였고, 2000년에 업무중 사고로 다른 한 쪽의 눈을 잃어 [[장님]]이 되었습니다. 가문기 씨는 3살 때 사고로 양 팔을 잃었습니다. 두 사람은 친구로 현재 나이는 55세.   가해하 씨는 장님이 되고 나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두 사람은 현지 정부에서 강가의 황무지 32,000제곱미터를 임대받아 장래 세대를 위하여 나무를 심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을을 홍수로 지키는 작업이기 때문에 약간의 수익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애를 서로 힘을 합쳐서 극복하였다고 합니다. 강을 건널 때는 눈이 안 보이는 가해하 씨를 가문기 씨가 엎어서 건너고, 가해하 씨는 팔이 없는 가문기 씨를 대신하여 나무에 올라가 식수를 위하여 가지를 잘라냈습니다. 나무에서 내려오면 가해하 씨가 땅에 구멍을 파고, 가문기 씨는 심은 나무에 물을 주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의 활동이 알려져, 많은 [[기부]]금이 모였고, 가해하 씨는 좋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네요...  
1062    저항시인 윤동주도 축구선수였다... 댓글:  조회:5529  추천:0  2017-03-03
케이프타운 해변에서 10㎞ 떨어진 바위섬 로벤은 경관이 아름다운 섬이다.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에 저항한 흑인들을 수감한 세상에서 가장 악명높고 야만적인 감옥이 있었다.  1960년대 구타와 힘겨운 노동으로 생활을 이어가던 수감자들은 간수 몰래 셔츠를 둥글게 뭉쳐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정치노선에 따라 갈라져 있던 수감자들은 축구를 위해 뭉쳐 한목소리로 교도소 당국자에게 축구리그를 요구했다. 4년간의 투쟁 끝에 축구리그 마카나축구협회가 결성됐다. 수감자 1천400여 명은 선수, 매니저, 심판, 코치를 구성, 3개 리그를 꾸렸다. 회색빛의 잔인한 수용소는 축구 이야기로 활기를 되찾았다. 수감자들에게 축구는 고된 생활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일탈이었고, 사분오열 정치집단을 결속시켜 주는 끈이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축구 없이는 수감생활의 절망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수감생활을 했던 자들의 증언이다.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축구에서 배웠다” 알제리대학 시절 축구팀 골키퍼로 이름을 날렸던 실존문학의 거봉 알베르 까뮈의 축구에 대한 찬사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한 윤동주 시인도 학창시절 축구선수였다. 세계적인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도 골키퍼 출신의 축구선수였다. 이처럼 유명 예술가 중 축구선수가 적지 않은 것은 축구 자체에 아름다움이 충만해 있음을 말해준다.  “인생의 어느 영역에서도 그렇게 좁은 공간에서, 그렇게 간단한 도구로, 그렇게 기초적이면서도 극히 다채로운 사건들을 빚어내는 제도는 지구 상에서 축구가 유일하다” 독일 예술사학자 호로스트브레데캄프의 말이다.  =============//////////@ 덤으로 더 보기+=@         고향 북간도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동그라미가 윤동주, 세모가 송몽규. 당시 윤동주가 다니던 일본의 릿쿄 대학은 군국주의 바람이 거셌는데, 학교 차원에서 단발령이 내려져 윤동주는 머리를 짧게 잘라야 했던 것으로 보임. 이 사진을 찍었던 당시가 생전 마지막 고향 방문이었고 3년 후에는 둘 다 유골로 고향에 돌아옴         송몽규의 아버지 송창희 선생은 원래 다른 아가씨와 선을 보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집에 다니러 갔던 윤동주의 어머니가 우연히 송창희 선생을 보고는 사람이 너무 괜찮아 자기 큰시누 남편 삼으면 딱 좋겠다 싶어서 바로 집에 가서 시아버지한테 보고함 ㅋㅋㅋㅋㅋ가로채기 ㅋㅋㅋ결국 윤동주 큰고모와 결혼. 일본의 영향 아래 있던 북간도 지역에서 학교 선생과 촌장직을 지내면서도 일본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꼬장꼬장의 상징 같은 사람이었음. 학생들 사이에서 별명은 송호랑이...송몽규가 일본에 유학가겠다고 했을 때도 "왜 원수의 땅에 가려느냐?"면서 반대했다고 함. 하지만 엄하다고 해도 무조건 엄한 것이 아니라 엄하면서도 이해심이 많았다고. 애처가였다고 함   북간도 조선인 기독교 마을인 명동촌의 부잣집이던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 집에서 윤동주보다 3개월 먼저 태어남. 윤동주와 송몽규는 같은 곳에서 같은 때 태어나 같은 곳에서 같은 때 죽은 형제이자 친구, 동지이며 라이벌이었음.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좋아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이 좋았다고 함. 깡도 세서, 열두 살 때 사회주의 이론을 동네 어른들 앞에서 연설할 정도였다고. 다시 말하지만 이 동네는 기독교 마을이었음. 일요일이면 동네 사람들 다 교회에 모이는 동네...다만 이 때 사회주의자들의 행태에 아주 질렸고 이후 다시는 사회주의 사상에 호의를 보이지 않았음. 임정 중에서도 가장 우파인 김구 계열이었으니 말 다했지 뭐...다니는 학교마다 문집 발간에 앞장서는 등 문학적 재능과 활동력을 동시에 갖고 있었음. 다만 운동신경은 별로였던 듯. 활발한 송몽규는 운동을 안 좋아했는데 얌전한 윤동주는 축구나 농구 선수를 하는 등 운동을 좋아하고 잘했다고 함   송몽규를 눈여겨보던 선생님한테 스카웃되어 낙양에 있는 임시정부의 군관학교에 갔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한 적이 있음. 나이 겨우 열아홉살에...이 때부터 일경의 감시가 시작되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게 됨. 이 직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제출한 단편이 당선되어 지면에 실림. 나이 겨우 열여덟살에...이 때의 송몽규의 작은 문학적 성취가 윤동주에게 상당한 자극을 주었다고 함. 이 직후부터 윤동주가 시에 완성한 날짜를 적기 시작했음. 문익환의 증언에 따르면 문익환은 윤동주에게, 윤동주는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윤동주가 문익환에게 "야, 대기는 만성이야!" 같은, 송몽규를 다분히 의식한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고...ㅋㅋ여담이지만 이 시기 윤동주는 문집에 넣게 시를 써 내라고 재촉해서 겨우 시를 써 준 문익환에게 "이게 어디 시야" 하면서 돌려줬다고 함 ㅋㅋㅋㅋㅋㅋ자기가 쓰라고 해놓곸ㅋㅋㅋㅋㅋ   같은 해 중학을 졸업하고 경성으로 진학하게 되는데, 둘 다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지원함. 자식들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고 지원해 준 송몽규의 집과는 달리 윤동주의 아버지는 "의과를 가야 사람노릇을 하지, 문과 가봤자 신문기자밖에 더되냐?" 같은, 요즘 어른들이나 하실 말씀을 하시며 크게 화를 내셨다고 함.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버지들은 비슷한 듯. 집안에 물그릇이 날아다녔다고...이 모습을 보던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 권사는 신문기자가 되게 시덥잖은 직업인 줄 알았다고 함 ㅋㅋ 보다못한 할아버지의 중재 덕에 윤동주는 겨우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함   윤동주와 같은 학교를 다니며 같은 기숙사에 살았는데, 성격이 너무 달라서 친구들도 재미있어했다고 함. 윤동주는 말이 적고 얌전한데, 송몽규는 말이 거칠고 행동반경이 컸다고. 4학년 때 문집을 만들었는데, 송몽규가 실무를 맡아서 했고 편집후기도 송몽규가 썼음. 시대가 시대인지라 편집후기는 일본어로 썼지만, 우리말 시나 영시를 싣는 등 나름대로 저항을 한 흔적이 있고 송몽규도 우리말로 쓴 시를 실었음. 해방 후 북한에서 살던 송몽규의 가족이 송몽규가 남긴 글을 모조리 태워 버린지라 송몽규의 글은 이 시와 신춘문예에 당선된 단편 등 극히 적은 수만이 남아 있음   연희전문을 차석으로 졸업하여 우등상을 받게 되었는데, 나중에 상품이라고 준 것을 뜯어 보니 대동아공영권 운운하는 책이었음. 당시 연희전문 교장이 윤치호였는데, 송몽규는 내용을 보고는 그 책을 집어던지며 "에이 그 영감 이따위 것을 상품이라고" 했다고 함 ㅋㅋㅋ당시 시대상을 생각하면 웃을 일은 아니지만..시원시원한 성격이었는듯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기 위해 윤동주와 송몽규는 창씨개명을 해야만 했음. 윤동주는 42년 1월 29일에 平沼東柱, 송몽규는 2월 12일에 宋村夢奎로 창씨개명을 함. 둘 다 일본에 유학가려면 늦든 빠르든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지만, 기왕 할 거면 언제 하는지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은 듯한 윤동주와는 다르게 송몽규는 하루라도 늦춰 보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느껴짐...일본은 대학 입학이 4월이니 일본으로 건너가서 입학시험을 칠 시간을 역산해 보면 2월 12일은 그야말로 한계까지 미룬 것으로 보인다고. 참고로 '참회록'은 1월 24일,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신고하기 닷새 전에 쓴 시   둘 다 교토제대를 목표로 입시를 치렀지만, 송몽규는 합격했고 윤동주는 불합격하여 도쿄의 릿쿄대로 가게 됨.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전문학교 출신의 대학 입학은 상당히 어려웠는데, 고등학교를 나온 일본인도 입학하기 어려운 교토제대를 전문학교를 나와 입학한 송몽규는 확실히 머리가 좋았던 듯. 그것도 일본어로 된 시험으로...문익환도 "머리가 좋은 놈이지"라고 회상한 적이 있음. 어느 날 북간도 집에 갑자기 나타나 아버지에게 일본 유학을 가겠다고 선언하고, 원수의 땅에 뭐하러 가냐는 아버지에게 내가 수양을 하고 민족이 수양을 해 나라 독립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살 의미가 없다고 말씀드렸다고 함...유학을 시켜 줄 여유는 없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께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답하고 실제로 집안의 지원 없이 일본 유학을 함   릿쿄대학의 군국주의적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교토의 미션스쿨인 도시샤 대학으로 편입한 윤동주와 자주 만나 독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열변을 토하곤 했었는데, 이를 일본 특수고등경찰은 1년 가까이 마크하고 있었고 결국 1943년 7월에 일본 특고에 검거됨. 민족의식의 앙양, 독립의식의 고취를 꾀했다는 이유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됨. 당시 송몽규의 강제징용에 대한 시각이 상당히 흥미로운데, 송몽규는 강제징용을 "무기를 알지 못하는 조선인"들이 군사경험을 체득하게 되어 장차 일본과의 독립전쟁의 시기에 민족적 무력 봉기를 가능하게 할 기회라고 꽤 전위적으로 생각했음. 임정 군관학교 재학 당시의 경험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 재판부는 너무나도 불온한 송몽규의 이러한 사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비슷한 시기에 체포된 다른 조선인 학생들은 금방 풀려나거나 조사 끝에 불기소 처분을 받았는데 유독 송몽규와 윤동주만 실형을 받은 것은 징용에 대한 이러한 시각에 검사와 재판부가 위기를 느껴서라는 분석도 있음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된 두 사람은 광복을 겨우 반 년 앞둔 1945년 초 세상을 떠나게 됨. 윤동주가 몇 주 먼저 죽게 되는데, 이 때 윤동주의 시신을 인수하러 온 윤동주의 아버지와 당숙은 해골이 다 된 송몽규를 면회하고 통곡...이 때 송몽규는 동주와 자기가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고 말했는데, 아마 이 당시 큐슈제대 의학부에서 행해지던 인체실험일 가능성이 높음. 후쿠오카 앞바다의 해수가 혈액을 대체할 수 있는지를 실험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씨발 그게 말이 되냐? 아무튼 이 때 송몽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로 보였고, 일주일 후에 사망함. 윤동주는 마치 자는 듯한 고운 얼굴로 관에 누워 있었고, 송몽규는 눈을 번히 뜨고 죽었다고 함. 아버지가 내가 왔다, 이제 눈을 감아라 하며 눈을 감겨 주니 그때야 눈을 감았다고...송몽규의 아버지는 내 아들의 뼛가루 한점이라도 원수의 땅에 남길 수 없다며, 화장하고 남은 뼈를 절구에 찧다가 주변에 튄 가루들을 흙과 함께 유골함에 담았다고 함. 송몽규가 아버지 꿈에 나타나 자신의 뼛가루 한 점이라도 이 땅에 남기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고. 이 때 일본인 간수와의 일화가 있는데, 당시 후쿠오카 형무소에는 사망한 죄수가 많아 화장하려면 보름은 기다려야 했는데 송몽규를 잘 알던 간수가 와서 훌륭한 사람이 죽었다며 일본인으로서 죄송하다고 울며 사과했다고 함. 그리고 편의를 보아 주어 빨리 화장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고   훌륭한 기대주를 한꺼번에 둘이나 잃은 북간도 조선인 사회는 말 그대로 초상집이 됨. 윤동주의 어머니는 초상을 치르는 내내 눈물 한 번 보이지 않다가, 밤 늦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윤동주의 여동생이 보았음. 송몽규의 어머니는 통곡을 하면서 너무 가슴을 때려 가슴팍에 시커멓게 피멍이 들었다고. 송몽규의 묘에는 청년 문사 송몽규의 묘라는 묘비가, 그보다 조금 뒤 윤동주의 묘에는 시인 윤동주의 묘라는 묘비가 세워졌는데, 묘비명이라는 것이 상당히 보수적이고 판에 박힌 형식에 따르는 일이 아주 많다는 것을 볼 때, 이러한 묘비명은 당시 사회상을 고려하면 아주 파격적인 것이라고 함   해방 후에 웬 부잣집 딸로 보이는 여성이 대여섯 살 되어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송몽규의 집에 찾아와 송몽규의 거취를 물었다고 함. 죽었다며 묘를 알려 주자 여성은 한참을 슬피 울다 돌아갔다고...후에 송몽규의 아버지는 아마 그 여성이 몽규의 일본 유학 학비를 조달해준 것 같다, 그 아이도 몽규의 아이일지 모르는데 경황이 없어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보낸 것은 잘못했다며 후회를 했다고 함. 하긴 저렇게 잘생겼는데 여자가 없었을 리가       둘의 고향 친구인 문익환 목사나 윤동주의 숭실중학교 동창인 장준하 선생이 해방 이후 하신 일들을 생각해 볼 때, 윤동주와 송몽규가 살아서 광복을 보았다면 그 많고 뛰어난 재주들을 얼마나 펼쳤을지...너무나도 아쉽고 너무나도 원통한 일이야 ============================ 용정은 한인들이 모여 사는 거점도시로 일본 간도 총영사관이 위치해 있었다. 중국 관청이 밀집한 연길(延吉)과 더불어 북간도의 양대 거점을 이루었던 용정에서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인쇄소를 차리고 도회지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내 실패하고 그 뒤 포목점을 비롯한 다른 사업에도 손을 대어 보았지만 부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집도 과수원이 딸린 큰 기와집에서 용정가 제2구 1동 36호의 20평 정도되는 초가집으로 바뀌어 옹색한 생활을 해야 했다.용정에서 윤동주는 1932년 4월 명동소학교 동창인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은진중학교에 진학하였다. 16세 때의 일인데, 이름을 아명인 해환 대신 ‘윤동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은진중학교는 ‘영국덕’이라 불린 용정 동남쪽 구릉에 위치한 미션스쿨로 명신여학교, 제창병원과 함께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학교였다. 윤동주가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1932년은 앞서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명목상의 통치자로 내세워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해였다. 그리하여 북간도는 만주국의 영토가 되었고, 그 실권은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 장악하였다. 그러나 ‘영국덕’의 학교와 병원들은 일종의 치외법권적 혜택을 받아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동생 윤일주의 회고에 따르면 은진 중학교에서 윤동주는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교내 잡지를 내느라 밤늦게까지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고, 또 옷맵시를 내느라 혼자 재봉틀을 돌리기도 하면서 활기찬 학창생활을 보냈다.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1등 상을 받기도 하고, 문학적 취향에 걸맞지 않게 기하학에 흥미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지은 시에 날짜를 적어 보관하며 작품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1934년 12월 24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는 를 비롯한 세 편의 시가 그것인데,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역사와 한문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에게서 받은 감화였다. 명 선생은 학생들에게 불굴의 독립의지와 치열한 역사의식을 일깨워주는 한편으로, 중국 군관학교 등에 입교를 주선하기도 했다. 에 나오는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 나의 방에 풍긴 /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는 시 구절은 그 같은 가르침에 대한 나름의 응답이었다. 민족의 제단에 바쳐진 ‘깨끗한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던 윤동주 자신 또한 뒤에 그 제물로 바쳐졌으니, 시인의 범상치 않은 예지를 읽을 수 있다...     [출처] 윤동주와 송몽규, 송몽규에 관한 몇가지 이야기|작성자 서림
1061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축구선수였다... 댓글:  조회:5918  추천:0  2017-03-03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이자 실존주의 작가인 알베르 카뮈는 축구선수였다. 카뮈는 17세 때까지 프랑스령 알제리의 지역 축구팀에서 골키퍼로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결핵을 심하게 앓으면서 축구를 그만두게 된다. 이때 카뮈는 사라진 꿈을 아쉬워하며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어쨌든 이로 인해 불행인지 다행인지 카뮈는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세월이 흘러 노벨문학상을 받은 카뮈에게 친구가 물었다.  "만일 건강이 허락했다면 축구와 문학 중 어떤 삶을 선택했을 것 같나?"  "당연히 축구지. 그걸 질문이라고 하고 있나."  카뮈는 살면서 종종 축구에 관한 명언을 남겼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나는 축구를 통해 도덕과 의무감을 배웠다"는 말이다. 도대체 축구의 어떤 매력이 당대의 지성에게 이런 아포리즘을 던질 수 있었을까.  언뜻 보면 축구는 원시적인 스포츠다. 이성의 상징인 손을 쓰면 반칙이다. 태클과 몸싸움이 허용되고, 팔을 제외한 온 몸으로 공을 들이받아도 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랑곳없이 경기가 진행된다.  사실 `원시성`이라는 말 속에는 인간의 본질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식인들은 축구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 본성에 관심을 가졌다.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발현되고, 그 본성이 어떻게 공동체에 녹아들고 규칙(제도)이라는 틀 안에서 존재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축구였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은 또 축구가 가진 기회의 평등에 주목했다. 축구에서는 누구도 공을 소유할 수 없다. 단지 공이 내 발에서 가까이 있을 뿐이지 내 것은 아니다. 야구처럼 글러브 안에 공을 가두거나, 농구나 배구처럼 손에 쥐고 있을 수 없다. 축구에서 공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즉 누구의 공도 될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  축구는 장비가 간단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도 쉽게 즐길 수 있다. 원리 역시 간단해서 두세 명이 할 수도 있고, 수십 명이 해도 무방하다.  또 축구는 세계 공용어다. 2014년 현재 유엔 회원국은 193개국이지만 국제축구연맹(FIFA) 가입국은 203개국이다. 스포츠 중에 축구처럼 전 세계인이 즐기는 스포츠는 드물다. 육상 정도가 있을 뿐이다. 스키 같은 동계 종목은 눈이 내리지 않는 열대 나라에서는 하기 힘들고, 크리켓이나 야구 같은 경기는 특정 나라 몇 군데에서만 인기가 있을 뿐이다. 다양한 종교와 인종, 이념이 뒤엉켜 있는 지구촌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인정하고 고개 숙이는 룰은 `축구 룰`밖에 없다.  축구는 인간의 본성과 그 본성들이 모여 만드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실험이다. 그 실험에는 감동이 있고 눈물이 있고, 분노와 애국심이 있으며, 좌절과 기쁨이 있다. 지식인들이 축구에서 감흥을 느끼고, 그 매력적인 실험에 빠져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축구는 희망이기도 했다. 배고프던 시절 축구 한ㆍ일전은 우리에게 국가적 자긍심을 충족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는 일본 열도 한복판에서 한국팀이 승리하는 걸 TV로 지켜보며 식민의 아픔과 콤플렉스를 이겨낼 수 있었다.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 이때, 우리는 최근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너무나 슬픈 일을 겪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실의에 빠졌고, 지금도 직간접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국민이 많다. 바로 지금 축구가 위로와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시 나아갈 힘을 주었으면 좋겠다.  영국 작가 프리슬리는 축구에 관해 이런 말을 했다.  "축구는 이웃들과 함께 환호하면서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 또 하나의 근사한 삶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허연 문화부장] /ⓒ 매일경제 우리 모두 행복한 시지프가 되자 - 알베르 까뮈  ///정윤수 ...2002한일 월드컵 이후 축구가 단순히 리모컨으로 즐기는 레저의 차원을 넘어 현대 사회의 중요한 문화 키워드라는 점이 널리 알려졌는데, 이런 정황 속에서 알베르 까뮈의 다음과 같은 말이 여러 매체에서 자주 인용된 바 있다.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배웠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찍은 알베르 까뮈 초상 사진 이런 식의 전형적이고 공식적인 말은 교장 선생님이나 아파트관리소장 같은 분이 해야 딱 알맞은 것인데, 다름 아닌 알베르 까뮈의 발언이므로 여러모로 생각을 더 하게 만든다. 진실로 축구는 도덕과 의무뿐만 아니라 이 지상의 모든 양식과 가치를 함축하고 있어서 까뮈의 이 말은 사실 누가 했더라도 전혀 틀린 말이 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부조리 문학의 대표자인 까뮈, 그러니까 얼핏 보기에는 대단히 염세적이고 절망적인 포즈를 취할 듯이 보이는 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어떤 뜻에서 '도덕'과 '의무'라는 말을 썼는가 하는 점이다. 어떤 뜻으로 그 단어를 썼느냐에 따라 까뮈의 말은 합숙소 소장의 말이 되기도 하고 한 뛰어난 철학자의 날카로운 직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 이 질문의 첫 번째 답안지는 까뮈의 철학적 에세이 에 있다. '시지프'는 고대 그리스어 'Σίσυφος' 혹은 라틴어 'Sisyphus'로 옮기자면 시시포스가 되는데, 신화에 따르면, 그는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의 아들이며 메로페의 남편으로 에피라(코린토스)를 창건하여 왕이 된 인물이다.  시시포스는 영리하고 꾀가 많은 인물이었다. 남을 속이기 좋아하였고 끔찍한 살해도 저지른 인물이다.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그를 데리러 오자 시시포스는 꾀를 부려 타나토스를 붙잡아 족쇄를 채워버렸다고 한다. 그 때문에 한동안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신 아레스, 저승의 신 하데스까지 속이면서 죽음의 운명을 거역했다. 나중에 헤르메스가 간신히 그를 저승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까지가 시시포스 신화의 기본적인 이야기이고, 까뮈가 그의 에세이에서 인용하는 부분하는 그가 저승에서 형벌을 받는 대목이다. 시시포스는 커다란 바위를 가파른 언덕 위로 올려야만 한다. 까뮈의 글을 인용하자면 "바위에 비벼대는 뺨, 진흙으로 뒤덮인 바위 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 그 바위 덩어리를 고정시키려고 버틴 다리, 다시 시작하려고 쭉 뻗은 팔, 아주 인간적이고 믿음직스런 흙투성이의 양손"으로 시시포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형벌(곧 의무)를 다한다. 하지만 커다란 바위는 정상에 올려지자마자 밑으로 굴러떨어진다. 시시포스는 다시 내려가서 바위를 끌어올린다. 그 단순한 의무를 끝없이 반복한다.  까뮈는 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프란츠 폰 스턱이 그린 '형벌을 받는 시시포스'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돌아오는 동안이고 멈춰 있는 동안이다. 바로 바위 곁에 있는 기진맥진한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인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거운, 그러나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끝도 알지 못하는 고뇌를 향하여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본다. 그의 고통처럼 어김없이 되돌아오는 휴식 시간, 이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소굴로 차츰차츰 빠져 들어가는 순간마다, 그는 자기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혹시 까뮈가 축구에 관하여 말한 '의무'는 바로 이런 무게를 지닌 말이 아닐까. '끝도 알지 못하는 고뇌를 향하여 다시 내려가는' 시시포스처럼 인간은(그의 동료이자 비판자였던 사르트르가 소설 의 주인공 로캉탱을 통하여 말한 바와 같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부조리의 처형에 순응하고 마는 게 아니라 '의식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자기의 운명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내면의 힘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적어도 까뮈는 그렇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고 바위를 들어올리는 고귀한 성실을 가르쳐준다. 그도 또한 모든 것은 좋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 주인이 없게 되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지나 하찮은 것이 아닌 듯하다. 이 바위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으로 가득 찬 이 산의 광물의 빛 하나하나가 유독 그에게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야만 한다."  2차 대전의 공포와 폐허, 그 이후의 황량한 문화 불모 상태에서 활동을 시작한 알베르 까뮈는 이 20세기 중엽의 '불모지'에서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을 했던 '행복한 시지프'였다. 까뮈는 1913년 11월 7일,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몽드비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북부 알사스 출신인 아버지는 1차 대전 때 전사하였고 어머니는 청각장애를 앓았다. 카뮈는 가난하고 외로운 성장기를 보냈다. 그런 처지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까뮈는 언제나 축구공을 차면서 성장했다. 그는 장 그르니에의 지도로 철학에 눈을 떴으며 문학, 연극, 저널리즘 등에 걸쳐 다양한 수련기를 거쳤다.        1946년의 알베르 까뮈 1928년에 알제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그 대학 축구부에서 골키퍼를 맡았다. 그는 에 이런 글을 쓴 적 있다.  "내가 나의 축구팀을 그렇게도 사랑했던 이유는 결국 열심히 뛰고 난 후에 뒤따르는 나른한 피곤함과 더불어 느껴지는 저 기막힌 승리의 기쁨 때문이었고, 또한 패배한 날 저녁이면 맛보게 되는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그 어리석은 충동 때문이었다."  까뮈는 1934년에는 알제리 공산당(KP)에 가입하였다가 1년 후에 탈퇴했으며 언론인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노동극장'을 설립하여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는 히틀러 파시즘과 2차 대전의 대혼돈을 겪으면서 서양의 오랜 관념적 형이상학이 빚어낸 순도 높은 '가상 유토피아' 대신 이 세상의 이종무규칙의 대혼란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이 부조리한 상황을 철저히 인식하고 당면한 현실을 최선을 다하여 견뎌내는 것을 참된 윤리적 목표로 삼았다. 1942년의 가 그 증거이다. 이 해에 발표한 역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함, 그것에 직면한 인간의 고독하면서도 왜소한 반항을 그린 작품이다.        까뮈는 레지스탕스 언론 활동을 벌였다 까뮈의 이러한 생각은 2차 대전이 끝난 뒤에 좀 더 실천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2년 프랑스로 이주한 까뮈는 반나치 레지스탕스 단체인 (Combat, 즉 전투)에 가담하였고 이 단체가 발행하는 저항 신문 '콩바'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드골 대통령은 대대적인 나치 협력자 청산 작업을 실시하였다.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한 자들은 사형, 무기, 장기강제 노동형 등에 처해졌으며 특히 언론인을 포함한 지식인에 대해서는 무려 200만 명 가량을 조사하여 99만여 명을 구속시켰을 정도였다. 알베르 까뮈는 비록 드골이 우파 민족주의자이지만 적어도 나치협력자 청산 정책만큼은 열렬히 지지하였다.  그는 반나치 저항신문 의 주필을 맡아 나치 협력자 청산 운동에 나서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이다"라고 역설하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악이 드골에게 관용의 정치를 권유했으나 드골은 까뮈를 지지했다.  까뮈의 이러한 현실적 면모는 1947년 작 에 잘 드러나 있다. 1940년대의 어느 해, 알제리 오랑시에 페스트가 창궐하여 이 시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격리된다. 한계 상황 속에서 역병은 더욱 기승을 부린다. 이 대혼돈 속에서도 권력과 돈과 욕망의 쟁투가 빚어진다. 의사 리외와 지식인 타루가 몹쓸 질병과 거대한 혼란에 맞서 묵묵히 그들의 의무를 다한다. 또 한 사람이 있다. 신문사 특파원 랑베르. 그는 처음에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다가 포기를 하고 의사 리외를 도우면서 페스트에 맞서 싸운다.        까뮈의 동료이자 비판자인 사르트르 맨 앞의 말을 다시 인용하건대,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배웠다.”는 알베르 까뮈의 말은 이처럼 상당한 질량을 갖고 있는 말인 것이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면, 그라운드에 내던져진 존재가 되는 선수들은 그 운명의 휘슬이 90분 후에 다시 울릴 때까지 커다란 바위를 끝없이 밀어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 시도는 언제나 실패하게 된다. 태클에 걸리고 골포스트를 때리고 관중석 멀리로 어이없이 빗나가는 슛도 있다.  그럼에도 다시 시작한다. 서로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며(패스) 언제나 원치 않는 방향으로 튀어버리는 불가해한 공의 리듬과 문전 앞의 부조리한 대혼돈에서도 침착하게 그 자리를 지켜내야 한다. 까뮈는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까뮈는 1952년에 UN이 독재자 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을 회원국으로 승인하자 유네스코 임원 자리를 박차고 나왔으며 1953년에 벌어진 동베를린의 노동자 파업을 진압한 동독을 강렬하게 비난했다. 1956년 폴란드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고 그해 10월에는 헝가리에서 봉기를 일어났으나 소비에트의 진압해 버렸다. 이에 대해 까뮈는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시했으나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까뮈의 '철저하지 못한' 태도를 비판하였다. 어쩌면 까뮈는 철저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정치적인 지향성 이전에 한계 상황에 봉착한 인간의 구원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그 때문에 50년대 중반 이후에는 다시 형이상학의 문제로 돌아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루르말랭에 있는 까뮈의 무덤. 까뮈는 195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60년 1월 4일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이 무렵에 그가 태어난 알제리는 프랑스에 대하여 거센 독립 저항 운동을 벌였고 끝내 그것을 성공하게 되는데, 까뮈는 이에 대해 정치적 발언을 삼갔다. 알제리에서 살고 있는 가족과 친지들의 신변 안전 때문이었다는 추측이 있었다. 만약 팔순이 넘어 장수를 했다면 진실로 지네딘 지단을 아끼고 사랑했을 것이다. 지단은 마르세유 출신이지만 그의 아버지가 알제리 사람이고 이 독립저항 운동 시절에 알제리를 '탈출'하여 마르세유에 정착했다. 아직도 지단의 친척들 중 일부가 여전히 알제리 산촌에서 살고 있다.   ==============================   알베르 까뮈 문학기념비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들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서 굵은 거품을 부글거리며 빛 속에서 신들은 말을 한다." 1961년에 건립된 까뮈의 문학비 이 구절이 알제리의 티파사를 방문하면 피부에 와 닿는다. 알베르 까뮈의 산문집 '결혼·여름' 중 ‘티파사에서의 결혼’의 첫 구절에서 티파사를 이렇게 묘사했다. 알제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한번 정도는 읽고 오는 책이기도 하다.   1961년 까뮈의 사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까뮈의 문학비가 이곳에 세워져있다. 지중해의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고대 로마의 유적들 속에서 까뮈가 묘사한 바로 그 장면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기념비에는 그가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Je comprends ici ce qu'on appelle gloire : le droit d'aimer sans mesure. (I understand what we call glory is the right to love without any measure.) -Albert Camus-   여기서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침없이 사랑할 권리이다.   ////////////////////////     "내가 축구를 그렇게도 사랑했던 이유는 결국 열심히 뛰고 난 후에 뒤따르는 나른한 피곤함과 더불어 느껴지는 저 기막힌 승리의 기쁨 때문이었고, 또한 패배한 날 저녁이면 맛보게 되는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그 어리석은 충동 때문이었다." -카뮈      
1060    [이런저런] - 축구선수 심판에게 총을 쏘다... 댓글:  조회:5017  추천:0  2017-03-03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경기에서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습니다. 선수에게 퇴장을 부여한 심판 세자르 플로레스(48)가 해당 선수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했습니다. 아니 레드먹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해야지 준 사람을 총으로 쏘다니.... 보자마자 이 말이 생각나더라구요."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다." 지역 보도에 따르면 이 선수는 레드카드를 보자 강하게 흥분했고 자신의 가방으로 가서 총기를 꺼냈고 다시 경기장으로 들어와 그대로 심판에게 총을 발사했다.......고 합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이 선수는 세 차례 총을 발사했는데 머리, 가슴, 목을 향해 차례대로 총을 발사했다는데요. 주위에 있던 몇몇 선수도 부상을 당했지만 다행히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황이라네요. 다행입니다. 현재(2016년 2월), 아르헨티나 경찰은 이 선수를 수배하고 있다합니다... 사람의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 저런 미친 짓을 하긴 하는 군요. 아니 근데 어떻게 축구하는 인간의 가방에 총이 있을 수 있지? 심판은 불쌍하네요... 가족도 있을 수 있을 텐데..ㅜ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최근 아르헨티나 축구에선 정말 병*들이 많습니다. 아르헨 가시는 분들 조심하세요... 축구선수만 저러는 게 아닙니다....   [출처] 세상에 아직도 축구판에서 이런 일이.......|작성자 차현준  
1059    [쉼터] - 축구판 심판 = 주심 + "제4부심" 댓글:  조회:3888  추천:0  2017-03-03
2017년 부터 K리그에 비디오레프리 제도가 도입된다.  © AFP=News1   오는 4일부터 2017시즌을 시작하는 K리그가 2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2017년 K리그 이렇게 달라진다’는 주제로 미디어 설명회를 가졌다. 프로축구연맹은 판정 가이드라인을 비롯해 달라지는 규칙 등을 소개했다.  가장 주목을 끈 부분은 역시 ‘비디오 레프리’의 도입이다. 야구, 농구, 배구 등 다른 종목에서 이미 실시되고 있는 ‘비디오 판정’을 K리그에서도 볼 수 있게 될 전망이다.   IFAB(국제축구평의회)는 지난 2016년 3월, 축구의 공정성과 결정적 장면(골 상황 등)이 축구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크다고 판단해 비디오 레프리(Video Assistant Referees/이하 VAR) 시스템을 도입했다.  지금까지 IFAB 테스트 승인 국가는 독일, 네덜란드, 포르투갈, 미국, 브라질, 호주 등이다. 국제대회에서도 선을 보였다. 지난해 12월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월드컵에서 VAR이 시행됐으며 올해 5월 한국에서 열리는 FIFA U-20 월드컵 때에도 시행될 예정이다.VAR 시스템을 간단히 정의하자면, 비디오 판독 시스템을 관리하는 그라운드 밖 ‘제 4의 부심’이 주심과 협의해 ‘결정적 상황’에 대판 판정을 내리는 것이다.  더 설명하자면 △경기결과에 영향을 주는 명백한 오심이나 심판이 놓친 심각한 반칙에 적용하고 △경기 흐름을 최대한 살리고 종목이 가진 특성이나 정서를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운영한다. 단, 심판에 따라 분석결과가 엇갈릴 수 있는 장면은 판정 정정이 불가하다. 주심의 최초 판정을 존중하겠다는 뜻이다.  VAR이 적용되는 대상은 득점장면, 페널티킥, 퇴장, 제재선수 확인(정확한 대상자에게 경고나 퇴장 명령을 내렸는가) 등 4가지 경우뿐이다. ‘결정권자’는 주심이다. 스스로 판정이 미심쩍거나 실수했다고 판단됐을 때 요청할 수 있다. 물론 반대편 경우도 가능하다. VAR 측에서 교신을 통해 주심의 실수를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결정은 주심의 몫이다. 선수나 감독, 팀에서 VAR 판정을 요구할 수도 없다.  판정절차는 주심이 VAR 영상을 확인하겠다는 사인을 먼저 보낸 뒤, 주심이 영상을 확인하고, 주심이 최종결정을 내리는 방식이다. 경기를 중단한 주심은 ‘심판 영상확인 장소(Referee Review Area)’에서 직접 영상을 확인한 후 최종 판정을 내린다. 최초 판정의 인정이든 정정이든 그 여부를 양팀 주장에서 설명해야하며 소요된 시간은 추가시간에 보상된다.  5월부터 7월까지는 오프라인 테스트를 실시한다. K리그가 열리는 전체 경기장에서 실시할 예정이며 동일 경기장에서 3회 이상 실시한다.  최종적으로 K리그에 도입되는 것은 7월 중순이다. K리그 클래식 전 경기가 대상이며 3라운드부터 스플릿라운드까지 VAR이 실시된다.  프로연맹 측은 VAR 도입으로 인해 △ 심판판정에 대한 항의 감소 및 판정 신뢰 회복 △ 경기 결과에 영향을 주는 심판판정의 정확도 향상 △ 선수들의 비신사적 행위 감소 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뉴스1   © 경북도민일보
105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지구의 나이 46억살?!... 댓글:  조회:3717  추천:0  2017-03-03
  현재까지 발견 중에 가장 오래된 지구 생명체 화석. 2017년 2월 캐나다 퀘벡에서 발견된 이 화석은 38억~43억년 전 미생물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AP=연합뉴스 자료사진] 미생물 화석 확인…심해 더운물에서 태어난듯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왜 여기 있는지에 대한 해답 " (서울=연합뉴스) 김수진 기자 = 지구에 생명체가 나타난 시기가 43억년 전까지 앞당겨졌다. 깊은 바닷속 더운물에서 첫 생명이 탄생했다는 설이 힘을 얻는다. 2일(현지시간) 영국 BBC방송 등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 중 하나인 캐나다 동부 퀘벡의 누부악잇턱 암대(Nuvvuagittuq belt)에서 38억∼43억년 전에 살았던 미생물 화석이 발견됐다는 내용의 연구 결과가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게재됐다. 원시지구 상상도[게티이미지뱅크]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유기물 보존 화석으로 알려진 것은 호주 서부에서 발견된 34억6천만 년 전 미생물 화석이다.     이에 따라 지구의 생명체 출현 시기가 지구 형성 직후로 앞당겨질 수 있다. 우주의 나이는 짧게는 120억년, 길게는 180억년이고 지구의 나이는 46억년 정도로 과학자들은 추산하고 있다.   이번에 화석을 통해 확인된 미생물들은 철광물을 산화해 에너지를 얻는 박테리아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들 생명체는 깊은 바다에서 더운 물을 뿜는 구멍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됐다. 오늘날에도 이런 심해 열수분출공(熱水噴出孔) 가까이에 미생물이 살고 있다. 연구팀은 이번에 발견된 미생물 화석이 오늘날 열수분출공 인근에 있는 박테리아와 같은 분기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 미생물 화석은 인간 머리카락 너비의 10분의 1수준으로 가늘며, 산화철이나 녹의 형태인 적철광을 상당량 포함하고 있다. 연구팀은 퇴적물이 묻혀 광화(鑛化) 작용이 일어나는 동안이나 직후에 온도와 압력 변화 등 미생물 형성을 설명하는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강도 높은 화학·물리적 실험을 치렀다. 미생물 화석 확대 이미지[출처:네이처]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연구팀이 캐나다 퀘벡 북부에서 발견한 43억년 전 생물화석을 현미경으로 확대한 사진. 연구팀은 화석에서 보이는 가는 실 모양(왼쪽 사진)과 관 형태(오른쪽)의 바위 속 구조물을 생명체 흔적의 증거로 제시했다.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연구팀   이번 연구를 이끈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국제 연구진 중 논문 주요 필진인 매슈 도드는 "이번 연구는 생명체가 지구형성 직후 뜨거운 해저 분출구에서 출현했다는 아이디어를 뒷받침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왜 이곳에 존재하는가'와 같이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연구팀은 최근 그린란드의 37억 년 된 암석에서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도 발견했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해안 퇴적물 속에 갇힌 시아노박테리아 등 미생물의 광합성에 의해 형성된 탄화칼슘질 구조물이다. 도드는 "그린란드 스트로마톨라이트와 우리의 발견은 다른 환경에서 생명체가 급속히 다양화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gogogo (c) 연합뉴스
1057    [쉼터] - 우리 고향에서도 "감자축제"를 열어보자... 댓글:  조회:3882  추천:0  2017-03-02
감자의 전설                         시  :  조현묵/ 이학박사                          편집 :  계방산방(이은상)                                                       아주 오랜 옛날 안데스 고원 어느마을에 꾸라까 라는 젊은 인디오 추장이 살았다. 그는 머언 바다가 보이는 산마루턱에 올라서서 흰거품을 일으키며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 페루 리마의 해변가>   그바닷가 한섬에는 붉은 태양이 넘실거리며 황금비늘을 파도위에 쏟는 황혼무렵이면 긴머리를 휘날리는 아름다운 여신이 하얀 파도와 금빛 노을을 바라보며 사랑을 그리고 있었다.                                                                                                                              < 감자꽃 >                                                                                                                      < 감자 꽃 밭>                                                                                                                               < 감자 열매>       젊은 인디오 추장은 바닷가로 달려가 바위 틈에 숨어서 그 여신을  바라보며 인간과 신은 서로 사랑을 할수 없다는 계율을 어기고 이내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다른 신들은 그들의 사랑을 눈치채고 사랑에 빠진 여신이 바닷가에 나가지 못하도록 가두었다.                            < 다양한 칼라감자들>   인디오 추장 꾸라까이는 그리움이 피빛 저녁노을이 되어 파도에 부서지는 슬픔을 삼키며 그리움이 푸른 별빛처럼 바다에 내려앉는 밤마다 소리내어 울었다.                          < 감자 조직배양 묘>   어느날, 까맣게 고요가 내려앉은 밤 꾸라까는 사무치는 그리움을 참을 수 없어 섬으로 몰래 헤엄쳐 갔으나 이내 다른 신에게 들키고 말았다.                                    < 다양한 감자 식물체>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신의 영역에 들어온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먹히는 형벌을 받게 되었 신들은 그를 땅속에 묻고 두눈을 멀게 만들었다. 그리고 온 몸에도 먼눈으로 가득차게 하였다. 다시는 여신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 감자 전분덩어리 츄노>                                               < 페루의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수공예품들>   그렇게, 아름다운 여신과 사랑에 빠졌던 젊은 인디오 추장 꾸라까는 땅속의 감자가 되었다.                                       < 인디오 추장 꾸라까를 닮은 감자들>                                  그래서 감자는 사람의 모습을 닮았다.                            < 밭에서 재배되는 유색감자>   감자의 부위별 이름도 사람처럼 몸체에 피부(표피)가 있고 솜털이 있으며 피부에는 호흡할 수 있는 숨구멍(기공세포)가 있다.                          < 감자의 속살과 감자 속의 모습>   머리에는 정수리(정단부)와 눈과 눈썹이 있고 감자가 달릴때 모태로부터 영양을 공급받는 배꼽(기부)와 탯줄(복지)이 있다.             < 옛페루의 수도 쿠스코의 원주민>해발 3400m   감자의 오장 육부에는 속살이 있고 양분이 이동하는 혈관조직(유관속)과 양분이 소화되고 살찌우는 골수가 있다.                 이와같이 감자는 사람의 모습을 닮았다.                                                                                          아름다운 여신을 그리워하는 인디오 추장 꾸라까의 모습이 슬프게 숨어있다.       *******************************   감자 전설의 의미     안데스산맥에 전해내려오는 감자의 전설은 고대부터 세계여러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대지 모신(Pachamama)과 다산능력 숭배와 비슷한 종교적 의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예로부터 젊은 신과 여신의 결합은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간주 되었다. 특히 식물에 있어서 영양번식 기원을 종교 의식에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원시시대에는 어떤 신의 살해와 매장의식에서 식물의 일부를 잘라 묻는 일이 있었고, 거기서 영양번식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 쿠스코에서 마츄피츄 가는길의 설산>   고대인들은 식물의 죽음과 재 탄생의 계절적 순환은 인간의 생활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옛날 사람들은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에도 생명을 부여하는 힘이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힘 처럼 소중하다고 생각하였다.                                        < 쿠스코 지역의 돌 유적:삭사와망>   현대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우리는 삶의 본질과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우리 자신과 주변의 모든 생명을 너무 소홀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 쿠스코 시내 광장의 대성당>  
1056    [록색평화주의者]우리 고향에도 "차 없는 마을"이 있었으면... 댓글:  조회:3698  추천:0  2017-03-02
KEI의 ‘국토자연자원의 현명한 이용전략 수립Ⅰ’에 따르면 해외 생태관광 성공사례는 자연자원 유형별로 생물종자원, 생태계 경관자원, 무생물자원 3가지로 대별된다.  생물종자원으로 유명한 곳으로는 프랑스 망통 지방 레몬축제가 있다. 해안도시인 망통에서는 자연 조건 덕분에 달콤한 오렌지와 강렬한 신맛을 내는 레몬이 많이 난다. 매년 2월 하순 약 17일간 열리는 레몬축제에는 20만명 안팎의 관광객이 몰리며 입장료 수익만 50억원에 이른다.    안데스 산맥에서 키웠던 수십 가지 감자 종을 고대 잉카제국의 중앙에 모아 놓은 페루의 감자공원도 전형적 사례다. 자생종의 유전자원을 보호하고 안데스의 서식처와 지역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전통적 지식을 십분 활용해 농업생태관광, 토종곡물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고유 생물자원과 그로부터 창출되는 이익에 대한 토착민의 권리의식을 고취하는 계기가 됐다.  생태계 경관자원으로는 일본 가고시마현 야쿠시마(屋久島) 생태관광을 들 수 있다. 야쿠시마에서는 아열대에서 한대기후까지 일본열도 전체의 자연을 볼 수 있다. 다양한 생태계, 산맥, 특이식물, 바다거북 서식지와 수령 천년 이상의 삼나무 등이 유명하다. 섬 전체 면적의 20%인 1만747㏊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이후 생태관광이 활성화됐다. 관광객과 지역주민은 섬의 생활방식을 일컫는 ‘야쿠시마 컨트리 코드’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호주 애들레이드의 밴락스테이션 습지는 철저한 보전을 통해 지역 관광상품의 가치를 높인 사례다. 이 습지는 머레이강 인근 땅을 사들인 한 기업이 전체 부지의 15%에 포도를 심고 1994년 나머지를 자연습지로 복원하면서 새들의 천국으로 재탄생했다.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후 매년 탐조객 10만명이 방문하는 관광명소가 됐다. 이곳에서 생산된 하디와인도 그린와인이라는 이미지 덕분에 크게 성공했다.  무생물 자원을 생태관광에 이용한 경우로는 일본 오이타현(大分)의 유후인(湯布院)온천지대와 스위스 체르마트의 차 없는 마을이 유명하다. 휴양지 산촌마을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곳은 모두 지역주민 참여형 관광모델로 성공한 경우다. 유후인에서는 여관업자와 농가의 경제교류가 특유의 향토요리와 보양온천이라는 관광자원을 낳았다. 체르마트에서는 관광협회와 지역주민이 주도적으로 나서 전기버스와 마차만 다니는 매력적인 마을을 만들었다. /임항 환경전문기자 
1055    [쉼터]-결혼식용 감자와 장례식용 감자가 따로 없다?...있다!... 댓글:  조회:4634  추천:0  2017-03-02
[글로벌 문화 현장] 우루밤바 감자공원 - 2300개 품종 키우는 '감자의 고향' 쿠스코서 1시간 거리 우루밤바, 다국적 종자기업 수탈 막기 위해 비영리단체와 보호구역으로 설정 잉카 세운 케추아族 문화도 보존… 꾸준히 방문객 늘고있는 관광지로   트리니다드·프란시스코 부부가 밭 한편에 쌓은 돌무더기에서 다 익은 감자를 꺼냈다. 감자는 노랑, 보라, 검정, 갈색 등 색깔뿐 아니라 모양도 길쭉한 것부터 동그란 것, 올록볼록한 것 등 천차만별로 섞여 있었다. 잉카제국을 세운 케추아(Quechua)족인 이 부부는 '와티아(watia)'를 시연 중이었다. 달궈진 돌로 감자를 익히는, 잉카 때부터 전해오는 전통 요리법이다. 남편 프란시스코는 "케추아족은 매해 첫 수확한 감자를 와티아 방식으로 구워 '파차마마(Pacha Mama·어머니 대지)'에게 감사의 표시로 바친다"고 설명했다. 페루는 전 세계 감자의 고향이다. 감자는 안데스산맥 알티플라노(Altiplano) 고원에서 8000년 전 처음 재배됐다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페루 수도 리마에 있는 국제감자센터(CIP)에 따르면, 페루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4000여 개 감자 품종을 보유한 나라다.   이미지 크게보기트리니다드(왼쪽)·프란시스코 부부가 잉카 때부터 전해오는 요리법‘와티아’를 보여주고 있다. 돌을 돔 모양으로 쌓고 그 안에 불을 지핀다. 돌이 달궈지면 불을 빼고 감자·옥수수·콩 등을 넣는다. 그 위로 돌을 허물어뜨리고 흙으로 덮는다. 한 시간쯤 두면 돌이 뿜어내는 열에 의해 완벽하게 익는다. /김성윤 기자 잉카제국 수도 쿠스코에서 북동쪽으로 자동차 1시간 거리에 있는 우루밤바(Urubamba) 계곡은 페루 감자의 중심. 이곳 주민들은 2300여 품종의 감자를 재배한다. 트리니다드는 "감자마다 먹는 방법이나 때가 다르다"고 했다. "구워 먹는 감자가 있고, 쪄 먹는 감자가 있어요. 얼려서 가루를 내거나, 술을 담가 먹는 품종도 있죠. 결혼식에 내는 감자, 장례식용 감자도 구분해서 사용하죠." 다국적 종자기업들은 우루밤바를 수시로 찾는다. 자신들이 특허 내 독점 판매할 감자 품종을 '사냥'하기 위해서다. '감자공원(Parque de la Papa)'은 이러한 다국적 종자기업들의 생물자원수탈(biopiracy)을 막기 위해 케추아족 주민들이 비영리단체 안데스(ANDES)와 함께 설정한 보호구역. 우루밤바 계곡 일대 12000헥타르(120㎢)가 지난 2000년 감자공원으로 설정됐다. 이 지역 6개 케추아족 마을이 공동 설립한 자치기구는 감자공원 내에서 감자를 포함 어떤 종류의 유전 정보 특허도 반대한다. 하지만 환경 변화를 이겨낼 새로운 감자 품종 개발을 위해서는 200가지 이상 토착 감자 품종을 과학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품종을 수천년 동안 이어온 전통 농업 방식으로 재배함으로써 감자 품종 다양성은 물론 케추아족 문화와 삶의 방식도 보존하고 있다. 감자공원이 알려지면서 꾸준히 늘고 있는 방문·관광객을 위한 농생태관광(agroecotourism)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토종 약초와 허브를 활용해 만든 천연 의약품과 비누를 판매한다.   페루는 세계 감자의 원산지로 지금도 4000여 가지 감자가 존재한다. /김성윤 기자 감자공원은 정부가 인정한 공공기관은 아니지만, 종자와 환경, 전통 문화를 동시에 지켜내는 중심지로 주목받고 있다. 유엔대학(UNU)이 발간하는 인터넷 잡지 '아워 월드(Our World)'는 '감자공원은 대안적 개발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페루 최고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센트럴(Central)' 오너셰프이자 페루 식문화를 알리기 위해 이번 와티아 시연을 준비한 비르힐리오 마르티네스(Martinez)는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페루 요리의 경쟁력은 식재료의 다양성에서 비롯된다"며 "이를 지키기 위해 페루 요리사들은 감자공원과 감자공원을 운영하는 주민들의 활동을 돕고 있다"고 했다. /ⓒ 조선일보 김성윤 음식전문 기자 ////////////////////////////////////////////////////////////////////// 여기는 해발 4,100미터 페루의 쿠스코지역과 피삭 지역 주변에 위치한 안데스감자공원입니다(안데스감자보존공원). 아기를 업은 안데스인디오 여인이 매일 500미터 산길을 오르내리며 특별히 관리하고 있는 감자밭입니다. 종자를 보존하기 위한 인류의 노력은 선진국이나 후진국이나 제1세계나 제3세계나 어디나 똑 같습니다. ...          
1054    [쉼터] - 축구스타와 "사인"받기 댓글:  조회:3485  추천:0  2017-03-02
맨유 포그바 /페이스북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공격수 폴 포그바(24·프랑스)가 사인 요청을 거절당한 팬들과 식당에서 몸싸움을 벌인 사실이 뒤늦게 전해졌다. 영국 일간지 더선(The Sun)은 1일(한국 시각) “포그바가 지난달 20일 영국 맨체스터의 커리 전문점에서 식사하다가 젊은 팬들의 사인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했다”며 “이에 격분한 팬들이 접시를 던지며 포그바를 식당 구석으로 몰아놓고 사과를 요청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보도 내용에 따르면 포그바는 블랙번 로버스와 FA컵 16강전을 마친 뒤 밤늦게 일행들과 식당에 들어왔다. 포그바를 발견한 2명의 젊은 팬들이 포그바에게 다가가 사인을 요청했지만, 조용히 식사하고 싶어했던 포그바로부터 거절당했다. 목격자들은 더선과 인터뷰에서 “조용한 식사를 원했던 포그바가 사인을 거절하자 젊은 팬들이 격분했다”며 “이들은 접시를 집어던지고 포그바를 식당 구석에 몰아놓은 뒤 사과를 요구했다”고 상황을 전했다. 이어 “주먹다짐 일보 직전까지 갔지만 식당 종업원들과 포그바의 일행들이 말렸다”며 “포그바처럼 몸값이 비싼 선수들은 종종 자신들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의 타깃이 된다. 포그바가 대처를 잘했다”고 말했다. ⓒ 조선일보 디지털이슈팀 기자 /////////////////////////////////////////////////////////////// =========================== ///////////////////////////////////////////////////////////////
105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야생동물 겨울나기가 잘 되기만을... 댓글:  조회:4286  추천:0  2017-03-01
백산변방지대 겨울철 야생동물 보호 (ZOGLO) 2017년3월1일  변방전사들이 산짐승이 먹을 먹이를 놓아두고있다. 고한산구에 자리잡은 백산시 경내는 지난해 겨울부터 지금까지 큰 눈이 많이 내려 산속의 눈 두께가 40쎈치메터에 달해 야생동물들이 먹이를 찾을수 없게 되였다. 이 기회를 빌어 일부 불법사냥군들은 남몰래 산짐승들이 자주 드나드는 산언제와 산골짜기에 덫을 놓아 야생동물을 함부로 잡아가고있다. 삼림보호구역의 야생동물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고저 일전에 길림성변방총대 백산변방지대에서는 당지 림업관리부문과 밀접히 련합하여 깊은 산속에 들어가 대규모의“야생동물보호”순라청산행동을 진행했다. 그들은 불법사냥군들이 야생동물들이 경상적으로 드나드는 곳에 놓았던 쇠사슬 덧씌우개와 덫을 하나하나씩 안전하게 청리하고 또 거기에 옥수수, 옥수숫대, 콩 등 먹을 것을 놓아 산짐승들이 산에서 마을밖으로 내려오지 않도록 여러가지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야생동물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고있다.                                                         /길림신문 단정박(单靖博), 최창남기자  
1052    [쉼터] - 봄꽃 꽃말 댓글:  조회:6042  추천:0  2017-02-28
봄꽃 꽃말 꽃이름 봄꽃사진...     ~ 봄꽃 꽃이름과 꽃말들 알아보겠습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 튤립 ~   *튤립 꽃말 빨강색 튤립- "사랑의 고백" 자주색 튤립- "영원한 사랑" 노랑색 튤립- "헛된 사랑" 흰색 튤립- "실연" 보라색 튤립- "영원하지 않은 사랑" [ 철쭉 과 진달래 ] 봄꽃 ~ 철쭉과 진달래 비슷한데요. 진달래는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나중에 나오고, 철쭉은 잎이 먼저 나오고 꽃이 피네요. 보통 진달래 핀후 철쭉이 나오는 시기네요. 산속에 꽃만있고 잎이 없는 것들을 보게 되면 진달래 라고 생각하시면 되네요.     철쭉 꽃말 - 사랑의 즐거움 , 사랑의 기쁨     노란 민들레 민들레 꽃말 - 행복 , 다시 만날때까지 안녕                 흰민들레 흰민들레가 약용 효과가 좋다고 재배하는 농가들도 많더군요.   무스카리 - 꽃말은 실연   노란개나리동산 - 응봉산의 개나리입니다. 봄을 한동안 노랗게 물들이는..아름다운꽃  개나리 꽃말 - 희망, 깊은 정 , 봄하면 또 빠질수없는게 벚꽃 봄의 벚꽃축제 는 빠질수없는 봄꽃 놀이중 하나인듯..             벚꽃 꽃말 은 순결 ,결백 벚꽃 - 남산 올라가는 벚꽃길..   목련 -꽃말은 고귀함     수선화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사랑 자존심 고결 신비 ..         금낭화   금낭화의 꽃말은 -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노루귀 라는 야생꽃입니다. - 겨울이 채사라지지 않은 산골짜기 이른봄에 만날수있는꽃이네요. 꽃말은 - 인내     [미선나무]-꽃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개나리랑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근데 흰색 이고 개나리와 다르게 꽃향기가 그윽하게 나더라구요. [복수초 ]- 꽃말 영원한행복 , 슬픈추억   복과 장수를 비는 꽃이라고 해서 옛날 달력사진 맨첫장에 자주 등장하는 꽃이구요 눈위에 피어있는 꽃사진이 많이 보이는.. 추위를 이겨내는 강인한 생명력이 보이는 꽃이네요.     [얼레지 ]-꽃말 질투     얼레지 라는 꽃입니다. 이건 홍릉수목원에서 찍은 거라 잔디 나 풀과 같이 찍혀있는데요. 꽃하나가 피기 까지 7년이란 세월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제비꽃]-꽃말 겸양 겸손 강남간 제비가 올때즘 피어난다 해서 제비꽃이라 한다나봐요. 제비꽃 종류도 많고 꽃색깔도 가지각각 ~ 귀여운 꽃입니다. [할미꽃 ]-꽃말 슬픈추억 무덤가 양지바른곳에 많이 볼수있는 꽃.. 고개숙인 할미꽃     [현호색]- 꽃말은 비밀 , 보물주머니   현호색 이라는 꽃입니다. 산계곡 등에 물가 에 많이 피어나는 봄꽃입니다. 복수초 노루귀 바람꽃 등 피고 나서 다음차례로 보게 되는 봄꽃입니다.     이름: 도라지꽃   특징: 통꽃이고 보라색과 하얀색이 있다. 분류: 초롱꽃과 꽃말: 영원한 사랑 피는 시기: 7월 ~ 8월 전설: 어느 산골에 도라지라는 소녀와 오빠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도라지의 오빠는 공부를  하러 떠나고 싶다고 했다. 도라지는 오빠가 떠나는 것이 섭섭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잘 다녀오라고  했다. 10년 뒤에는 꼭 돌아올 것을 약속하며  오빠는 떠났고 도라지는 매일매일 오빠가 돌아오기 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10년 뒤 오빠는 배가 뒤집혀  바다에 빠져 죽는 사고가 나서 돌아오지 못했다.  도라지는 기다리다 지쳐 죽고 말았다. 도라지가  죽은 자리에는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그 꽃을  ‘도라지꽃’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름 : 호박꽃 색깔 : 노란색 분류 : 외과 꽃말 : 해독 피는 시기 : 5월 ~ 10월     전설 : 옛날 한 스님은 황금 범종을 만들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성금을  모았고 온 정성을 다해 황금 범종을 만들다가  병으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죽어서 부처님  앞에 간 스님은 만들다 만 황금 범종을 완성 하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다시 보내 달라고 애원하여  인간 세상으로 돌아왔지만 그 동안 시간이 많이  흘러버려서 자기가 살았던 절은 흔적조차도  없어지고 말았다. 실망하여 바위에 앉아 있던  스님은 옆에 범종과 똑같이 생긴 황금색 꽃을  발견하고 뿌리를 파 보았더니 바로 그 곳에  스님이 만들다 만 황금 범종이 묻혀 있었다.  황금 벙종을 닮은 그 꽃은 바로 호박꽃이었다.   이름 : 장미 색깔 : 빨간색, 노란색, 하얀색,  파란색(최근 일본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개발함) 분류 : 장미과 꽃말 : 사랑(빨강), 질투(노랑), 순결(하양), 불가능(파랑) 피는 시기 : 7월 ~ 8월 전설 : 구두쇠인 향수 장수에게 로사라는 예쁘고 착한 딸이 있었고 향수 장수의 일꾼 중에 바틀레이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로사와 바틀레이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바틀레이는 주인 몰래 가장 좋은 향수  한 방울 씩을 모아 로사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 후  바틀레이는 전쟁터로 불려나가서 죽고 말았다. 슬픔에  잠긴 로사는 바틀레이의 유해 위에 그 동안 모아 두었던 향수를 뿌렸는데 구두쇠인 로사 아버지는 화가 나서  향수에 불을 질렀고 로사는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듬해 로사가 죽은 자리에서 로사처럼 예쁘고 향기가 진한 장미꽃이 피어 나게 되었다.   이름 : 해바라기 색깔 : 노란색 분류 : 국화과 꽃말 : 애모, 숭배, 의지 피는 시기 : 8월 ~ 9월 전설 : 물의 요정 그리다와 우고시아 자매가  물가에 나와 놀다가 태양의 신 아폴론을 보고 둘 다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두 자매는 아폴론을  보기 위해서 먼동이 터오기 전 까지만 물 밖에서  놀아야 한다는 명령을 어기고 말았다. 그리다는  아폴론을 독차지하기 위해 우고시아의 잘못을  고자질하여 우고시아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는데, 아폴론은 그 사실을 알고 그리다를 피했다.  그리다는 아폴론에게 용서를 빌고 아폴론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꼬박 9일 동안을 선 채로 기다렸지만  아폴론이 나타나지 않아서 해바라기가 되고 말았다. 이름 : 나팔꽃 색깔 : 흰색, 자주색, 분홍색 등 분류 : 메꽃과 꽃말 : 허무한 사랑 피는 시기 : 7월 ~ 9월 전설 : 어느 마을에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화가가 살고 있었다. 그 화가에게는 아주 아름답고  착한 아내가 있었다. 화가의 아름다운 아내에 대한  소문이 영주님의 귀에 들어가자, 영주님은 시기심이  생겨 아내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화가는 아내를  풀어 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화가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영주님의 성 앞에  파묻고 목숨을 끊었다. 다음 날 아내는 덩굴을 타고  벽을 따라 올라온 꽃을 보았다. 사람들은 화가의  영혼이 담긴 나팔처럼 생긴 그 꽃을 ‘나팔꽃’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름 : 수선화 색깔 : 노란색, 하얀색 분류 : 수선화과 꽃말 : 자아도취, 고결, 자만, 자신감 피는 시기 : 12월 ~ 3월 얽힌 이야기 : 어느 마을에 ‘나르시스’ 라는 아주  잘생긴 청년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요정이  나르시스에게 반해,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나르시스는 요정의 사랑을 거절했다. 요정은  복수의 여신에게 나르시스에게 복수를 해 달라고  기도 했다. 복수의 여신도 잘생긴 나르시스를  질투하고 있었다. 그래서 요정의 기도를 들어주기로  했다. 얼마 뒤, 나르시스는 샘가에서 물을 마시려고  하다가  
1051    죽림선생님, 안녕하심둥?... 댓글:  조회:6359  추천:0  2017-02-28
죽림선생님 안녕하심둥? 현춘사이꾸마.덕분에 잘 지우고 있슴다. 며칠전 수르 마일때하구 수르 뗀후의 다른 점으 얘기해달라고 하셌재임둥? 그래 며치르 갑자르면서 궁리했수꾸마.모처럼 하문하시는 말에 헛말로 대답할수 없구 반드시 진짜로 대답으 올리자니 영 바쁩꾸마.어찌겠슴둥,같은 문학인들끼리 무슨 허물할게 있슴둥?솔직이 저는 수르 못끊었수꾸마. '술맹세는 개맹세'라고 합니다.정말 저는 이런 개맹세를 수백번이나 하고도 남을 늙은 개인가 봅니다.지나간걸 다 얘기하자면 길어질것 같구 최근 10여일동안의 일만 여쭈겠수꾸마.   시발,[미안하구마.]좆같이[미안하구마], 10여일전에 가스미 답답허구 한쪽 골이 아파 병원에 갔습지비.나혼자.마누라는 아이 델꼬 갔습지비.나는 그 마누라와 가치 병원 가는거 지일 질색이꾸마.그 마누라 얼마나 퇴매한줄 암둥?글쎄 의사가 채 진단하기도 전에 하는 말이 '술 마이면 안되지요 네?'입지.세상에 어느 의사가 환자가 술으 마여도 된다는 넘이 잇슴두?없지비! 의사란 넘들은 물론 '암 그렁구 말구요!'합지. 그러면 마누라는 너무 좋아서 '내 머라 합디까?'하고 그후부터 날 술마시는걸 지키느라 허리띠건사도 못합꾸마. 그래서 그날은 그 녀잘 떼버리고 갔습지. 나;선생님,요즘 고리 띠끔띠끔하고 어지럽고 구토를 느낍니다요.글구 가슴  한판이 쿡쿡 쏩니다요. 의사;좀 봅시다. 나;어떻습니까?' 의사;정밀검사를 해 보십시오 . 나;[속으로]네미 씨 정밀검사르 하니 별문제 없다는데 의사란 놈이 날 붙드는게 아임두? '검사는 이렇지만 약은 써야 합니다.뽀쑈합니까?' 공비의료지만 외지에 있는 놈은 절반바께 결산못받는고로 나는 약을 안 사고 나왔습지비. 의사가 뒤에서 소리칩더구마. '절대 술 끊어야 합니다!' 그래 다시 들어가 따졌지 뭠둥. '왜요?' '어떤 병은 정밀검사에서도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허나 선생님진술에 따르면 뇌경색의 조기증세올시다.' 니기미씨비! 정밀검사는 그럼 괘니 허는 짓이야?너들 비싼 기게 사다놓고 그 기게값 봉창하느라고 감기걸린 사람도 쩌궁쩐시키는 개새끼들 아냐? 웃어르시님들께서 의료개혁을 하느라 수고 하겠지만 돈바께 모르는 이 놈으 도시(광주)에서는 언제나 그 혜택을 볼지 뉘기 암두? 씨발 정밀검사에서 일없으면 다지 뭐,시름놓구 술 마이자! 그날 저녁 술병을 슬그머니 꺼내니까 마누라가 덴겁. '어째 죽자구 그럽니까?나보기 그렇게 싫습니까' '당신없이 내 혼자 살아 뭣합니까?' 와늘 제가 이 세상에서 날 제일 사랑하는것 같이 놀재임둥. '의사가 그러는데 소주는 한잔씩,와인은 두잔씩,맥주는 한병씩 마셔도 괜찮다 했고.오히려 뇌공혈부족이나 뇌경색같은 병은 술로 혈공급을 촉진시켜서 좋다는것이요.' 물론 엄청난 거짓말입지. '정말입니까?' '믿기지 않으면 병원에 가서 물어보오.' 그러면서도 저는 아내가 내 병볼때 따라나설가봐 조마조마. 이렇게 결혼 40여년동암 그놈의 술가지고 아웅다웅해옵지비. 사실 내 건강상태는 아이 좋습지. 봅소.뇌공혈부족,경추병,관절염,신경근염,요간반탈출...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것들이 술으 마셔야 견디겠는거 어찌겟슴두. 스발,주그면 죽고.수리 없이는 못살겠는거 어쩜두? 내 마냑 위염이나 간염이라면 정말 수르 끊겟스꾸마. 그전에는 그냥 조금씩은 하게쑤꾸마.약삼아 먹겟수꾸마.어느 년놈이 말려도 소용없수구마. 수르 마셔야 사람 사는 멋도 있 고 글도 나오구 지랄두 나오구... 절믄 시절 동료들과 공소부한구석에서 소금이 허옇게 돋친 미역오리를 쫄졸 빨며 마시던 술생각이 가슴을 저밉꾸마.그렇게 배운 수리고 그렇게 줄기차게 마신 수리꾸마. 죽는 날까지 술병을 기울여 한점 유감이 없기를 입술에 맺힌 술방울에도 나는 기꺼워워했다 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오늘 밤에도 술이 술잔에 찰랑댄다.           댓글 11  0 카카오스토리트위터페이스북 스크랩0카페블로그메일 인쇄|신고   한영남 08:07  하하하하 술 끊지 말고 마셔야겠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답글 | 신고     현춘산 08:13  ㅋㅋㅋㅋ 위나 슬개나 간이 아니면 괜찮다고 여겨요 글구 내 시는 고쳣수 '오늘 밤에도 술이 술잔에 찰랑댄다' 답글 | 신고     답스 11:12  ㅋㅋㅋ 샘님 그런 고민있으셨군요~~전 그넘 담배땜에 와이프랑 매일 전쟁인데.... 답글 | 신고     현춘산 11:57  생명은 귀중하지만  사랑은 더 귀중해 허나 자유를 위해서라면 생명도 사랑도 몽땅 바치리!ㅋㅋ 답글 | 신고     새끼오리 13:50  ㅎㅎ 저의 부친 넘 술 좋아해서 어머니와 맨날 전쟁인데 ... 그래도 현쌤이 술 끊으면 사모님 제일 좋아하실검다 답글 | 신고     현춘산 13:51  ㅋㅋㅋㅋ 답글 | 신고     소나무 14:48  량은 꼭 적당히 오직 몸을 위해서라면 모든것을 희생해야죠 ㅋㅋㅋ 답글 | 신고     현춘산 15:23  ㅎㅎㅎ 답글 | 신고     전병칠 16:12  잠간 들렸다가 현선샘 글이 너무 재미있어 로그인하고 이렇게 댓글 달면서 웃어봅니다. ㅋㅋㅋ...마지막 시 몇줄을 더 멋 있구요....아무튼 술 적게 하소, 건강을 위해...물론 오늘 저녁 나 역시 술자리가 불러서 가지만... 답글 | 신고     현춘산 17:21  호상 면려하며 삽시다.ㅋㅋ 근데 왜 이렇게 뜸하신지요? 답글 | 신고         김승종 17.02.28. 19:51  현(형)님, 깻까잠둥?!!!... 제목 자체부터 맘 동하게 하잼둥!... 그리구스리 발음자체대로, 방언 내지 사투리를 섞어 표달해도 여러 분들도 알아 먹히고 있잼둥!... 참, 잼이께 자알 써쓰꾸매... 아프루 성화향에 계실쩌게 술얘기랑 문인들과 어울리며 건커니작커니 하던 술뒷얘기를 으로 풀어나가면 어떨지비... 그 속에서 밑바닥 삶과 그들의 인간미를 슬슬 겯드리면서 써내려가믄 여엉 조켓쑤꾸매... 기대하꾸매... 이누마두 또 이 시각 눈낄과 소니 다른데루 향함은 또,ㅡ... 반에 반도 안도옹에서 죽림 배상. 답글 | 삭제 | 신고     현춘산 17.02.28. 22:10  고맙스꾸마,노력해보겠습꾸마.저희는 카페가 활기르 띠길 바랍구마.정식작품도 올려야지만,때로는 우스개도 있어야 합지.자주 동참해주셔서 기쁩구마.김[아우]님도 재밋거리르 올리깁소.바랍꾸마.ㅋㅋ
1050    [쉼터] - 뒷간에서 "삼각함수의 법칙"을 발견하다... 댓글:  조회:3325  추천:0  2017-02-27
  절에 가면 ‘해우소’란 간판을 자주본다. 이곳은 스님들이 용변을 보는 변소다. 변소를 우리는 화장실 이라고 한다. 화장실도 따지고 보면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해준다는 의미로 볼 때 미사려구(美辭麗句)다. 같은 말이지만 변소란말은 누구나 기피하고 싶은 말이다. 그래서 외국에서도 변소를 여러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화장싱을 에치켓으로 표현한다. 화장실이 에체켓으로 부르게 된 이유는 루이 14세 때 부터이다. 당시에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고 한다. 왕이나 왕비 또는 왕자들이 급한 일을 보려면 하인들이 바로 분변을 받는 통을 대령하고 있다가 갖다 대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귀족들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티가 열릴 때 급한 일을 보기 위해 정원 으슥한 곳을 찾아 실례를 하곤 했다. ▼이로 인해 정원사들이 ‘화단에 들어가지 말 것, 용변은 저곳에서!’라는 푯말을 세웠다. 이푯말을 가리키는 말이 프랑스어로 에티켓이다. 어원은 게시판,설명서를 의미하는 ‘스팃켓’에서 나온 것으로 길을 알려주는 푯말이 되면서 후에 에티켓이 되었다. 그후에 에티켓이란 말의 뜻이 확대되어 예절바르게 행동하는 것으로 뜻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화장실에 대한 여러가지 명칭을 가지고있다. 뒷물을 하는 공간이란 뜻으로 북수간, 옆에 있다해서 측간, 생리적 걱정뿐 아니라 마음의 근심까지 소멸시킨다 해서 헤우소(解憂所), 몸속을 깨끗이 해준다 해서 정방, 농기어린 뜻으로 부르는 작은 집 등 그 명칭은 참으로 다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흔하게 사용된 말은 뒷간이었다.  ▼누구나 화장실에 가면 모든 근심을 잃고 혼자의 생각에 잠긴다. 그래서 화장실은 자기수양과 나를 바라보는 순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서 많은 철학이 생기기도 한다. 알르키메데스는 화장실에서 삼각함수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한다. 무엇인가 혼자 골돌히 잠길 수 있는 장소가 바로 화장실이기 때문에 ‘해우소’란 말이 격에 맞는 것 같다.  
1049    백두산호랑이 "드론" 사냥하다... 댓글:  조회:3760  추천:0  2017-02-24
[서울신문 나우뉴스]= 드론과 ‘한 판 승부’를 벌이고 있는 백두산 호랑이의 모습(동영상 캡쳐) 중국 하얼빈의 한 동물원에서 벌어진 호랑이와 드론의 한판 승부가 중국 관영 CCTV를 통해 공개됐다. 백두산호랑이(시베리아호랑이) 1000여 마리가 사육되고 있는 하얼빈 동북호림원에서 촬영한 이 동영상은 드론이 윙윙거리며 머리 위를 날아다니자 이를 잡기 위해 점프를 하거나 뛰어다니는 호랑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호랑이 약 10마리는 눈 위에 배를 깔고 한가롭게 누워있다가 드론이 등장하자 육중한 몸을 날려 드론을 두 발로 ‘사냥’하는데 성공한다. 마치 야생에서 닭이나 토끼 등을 사냥하는 듯한 모습이다. 언뜻 보면 이러한 장면은 드론의 성능을 테스트 하거나 드론에 카메라를 장착해 호랑이를 관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숨겨진 목적이 하나 더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동물원이 드론을 등장시킨 이유는 호랑이들의 다이어트 때문이다. 사육사들은 지나치게 살이 찐 ‘비만 호랑이’들을 움직이게 해 다이어트를 시킬 요량으로 드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애초 드론은 호랑이 관찰 및 촬영용으로 사용된 것이 사실이지만, 사육사들은 호랑이가 먹이를 쫓듯 드론을 쫓는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곧장 비만 호랑이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드론을 투입했다. 드론을 낚아 채 땅으로 끌어내린 호랑이들은 드론 부품을 먹어치우려는 듯 앞발로 강하게 잡고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기도 한다. 그러다 드론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겁을 먹은 듯 다 함께 물러서는 모습도 보인다. 동물원 측은 “비만 호랑이를 특별 관리하고 있다”면서 “이 호랑이들이 드론을 쫓는 장면을 보면 여전히 야생의 기질이 살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송혜민 기자
1048    [이것이 알고싶다] - "가짜 손"과 진짜 손?!... 댓글:  조회:3345  추천:0  2017-02-23
  마네킹
1047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한국인"-호머 헐버트 댓글:  조회:7749  추천:0  2017-02-22
호머 헐버트 국보 경천사십층석탑을 지켜낸 한글학자Homer B. Hulbert |   출생일 1863년 01월 26일 사망일 1949년 08월 05일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 1907년 일본 궁내부대신인 다나카는 황태자 순종 결혼식에 축하사절로 참석했다가 개성에 있는 경천사십층석탑을 일본군 85명을 보내 뜯어서 일본으로 가져가버렸습니다. 이를 안 한국의 문명화와 국권수호를 위해 온몸을 불사른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1) 박사는 즉시 현장을 답사한 뒤 《재팬 크로니클》과 《뉴욕포스트》에 기고하고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헤이그에서도 이 사실을 폭로했지요. 이런 헐버트의 노력으로 국보 86호 경천사석탑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육영공원 재직 당시 교사 헐버트(맨 왼쪽)와 학생들 헐버트는 《사민필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교과서를 펴내면서 한글애용을 적극 주장한 한글학자기도 했지요.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평소 소원한 대로 그는 서울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해마다 8월 5일 양화진묘지에서 헐버트 박사 추모식을 열고 있습니다. 헐버트 박사는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온 이래 《독립신문》 창간에 이바지했고 1907년 고종 황제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파견을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로 1910년 이 땅에서 추방되었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3·1운동을 지지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지요. 할아버지의 60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헐버트 박사의 손자인 브루스 헐버트 씨 부부는 "열 살 때까지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 할아버지는 한국의 아리랑과 전래동화를 손자 손녀들에게 매일 들려주셨는데, 일본 이야기가 나오면 매우 격해지셨다"고 전했습니다. 이국땅에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다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잠든 푸른 눈의 한국인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한국사랑에 대한 작은 보답일 것입니다. [Daum백과] 호머 헐버트 – 하루하루가 잔치로세, 김영조, 인물과사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호머 헐버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호머 헐버트   출생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 주 뉴헤이븐 사망 1949년 8월 5일 (86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청량리 위생병원 사인 노환 국적  미국 학력 다트머스 대학교 직업 감리교 선교사, 교육자, 항일운동가 종교 감리교 배우자 메이 헐버트 자녀 3남 2녀 웹사이트 ("); padding-right: 13px; word-wrap: break-word;">http://www.hulbert.or.kr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호머 베잘렐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년 1월 26일 ~ 1949년 8월 5일)는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이자, 육영공원에 교사로 근무하여 영어를 가르쳤던 교육인으로 한국의 항일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헐벗 또는 흘법(訖法), 할보(轄甫)였다. 그는 고종 황제의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고종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은 외국인이었고, 한국의 분리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 1907년 헤이그 비밀밀사에 적극 지원하여 밀사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매우 유창하게 하였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대한제국 시대에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어니스트 배델(영국 출신)과 더불어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출처 필요]   목차   [숨기기]  1생애 1.1초년기 1.2육영공원에서의 교직생활 1.3선교사로 재입국 1.4한국독립운동 지원 1.5말년 2사후 3저서 4상훈 5같이 보기 6각주 7참고 자료 8바깥 고리   생애[편집] 초년기[편집] 헐버트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 주 뉴헤이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들베리대학의 총장이었던 칼빈 헐버트 목사였으며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의 창립자 엘리저 윌록의 외증손녀인 매리 우드워드다. 1884년,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에 유니언 신학교에 들어가서 2년간 수학하였다. 육영공원에서의 교직생활[편집] 1886년(조선 고종 23년)에 길모어, 벙커등과 함께 조선에서 육영공원에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와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교사직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자비로 한글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한글을 배워 3년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정도의 실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육영공원에서 근무하면서 제중원 학당에서도 학생을 가르쳤는데, 1888년 3월경부터 하루 2시간씩 제중원 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1888년 9월 미국에 일시귀국하여 메이 한나와 결혼하여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육영공원의 교사였던 호머 헐버트가 집필한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1891년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해 육영공원 교재로 사용하였다. 육영공원에서 교직으로 근무했을때 헐버트는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채보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 정부에서 재정상의 이유로 육영공원을 축소 운영하게되자, 헐버트는 1891년에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헐버트는 1891년 여름 당나귀를 타고 아펜젤러, 모펫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 근교의 석탄 광산의 실태를 파악하였다. 아펜젤러와 모펫은 선교 정보를 얻기 위하여 동행하였다. 선교사로 재입국[편집] 1893년에 헐버트는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았으며,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한성부에 오기 전 미국의 한 출판사에서 출판에 대한 교육을 받고 왔으며 신시내티에서 신식 인쇄기를 들여왔다. 삼문출판사는 그가 부임한 지 1년이 안 되어 전도지와 종교 서적 1백만여 면을 인쇄하여 경영을 자급자족할 수준에 이르렀다. 1895년 2년간 휴간했던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을 다시 발행하였고, 최초의 영문 소설 한국어 번역판인 '텬로력뎡'(천로역정)을 출판하였다. 그해 8월에 한글 로마자 표기법을 고안하였다.[1]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그는 언더우드 그리고 에비슨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고 한다. 1897년 5월 조선정부와 고용계약을 맺고 학생수 50명이 되는 한성사범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관립영어학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0년부터 1905년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방문하기 전까지 현 경기고등학교의 전신 관립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일본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1901년부터 영문 월간지 'Korea Review'를 발행하였다. 헐버트 부인도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며 외국인 자녀들을 자신의 집에서 가르쳤다. 그녀는 또한 제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현 동대문교회인 볼드윈 교회를 맡아 담임목회를 하였다. 이때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한국의 역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1908년에는 관립중학교의 제자 오성근과 함께 '대한역사'라는 한글 역사 교과서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상,하권으로 기획되었으나 하권은 출간하지 못하고 상권만을 발행하였다. 이마저도 1909년 일제의 검열에 의하여 금서조치되어 일본경찰에 의하여 출판사에 있던 책이 모두 몰수되어 불태워졌다. 한국독립운동 지원[편집] 1890년대 중엽에 조선은 일본제국으로부터 위협을 겪게 되는데, 헐버트는 일제의 이러한 침탈행위를 목격하면서 조선의 국내 및 국제 정치,외교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조선의 자주권회복 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한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헐버트는 고종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헐버트는 고종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은 외국인이었다. 헐버트는 1903년부터 타임스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으며, 1904년에는 AP 통신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다. 그는 러일전쟁을 깊이 있게 취재하여 송고하였다. 1905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 사건이 있은 후에 헐버트는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으며,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또한 을사늑약의 무효성을 알리기 위해 고종 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아 1905년 미국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으며, 미국을 비롯한 열강국가들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헤이그 특사인 이준, 이상설, 이위종. 헐버트 박사는 이들을 네덜란드 헤이그로 파견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1907년 고종의 밀서를 받아,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비밀 특사 3명들을 파견하는 데 크게 일조하기도 했다.(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해 통감부의 감시속을 피해 사전 작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로 인해 헐버트는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 제국의 방해로 헤이그 특사들은 회의장에 입장조차 못했으며, 결국 실패로 끝나자 이것이 일본제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일본제국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헐버트를 대한제국에서 추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버트는 미국에서 서재필, 이승만 등의 미주 독립운동가들에게 적극 지원하여 활동에 힘을 보탰으며, 한국의 분리독립을 위해 미국 각지를 돌면서 일본제국의 침략행위를 비난하였고, 한국의 분리독립성을 호소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 평화 클럽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질타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1908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여, 스프링필드 훼이스 회중교회에서 목사로 안수받았다. 그는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 각종 회의와 강좌에서 일본 제국의 침략에 규탄하였고 한국의 분리독립에 관한 글을 썼으며, 1918년에는 파리 강화회의를 위한 '독립청원서'를 여운홍과 함께 작성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 후에는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고, 미국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였다. 1942년에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국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1944년 그는 '한국문제연구회'에서 간행하는 '한국의 소리'라는 책자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을사조약 직후 고종황제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동양의 역사가 바뀌었고, 미국이 친일 정책을 썼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말년[편집]   양화진 헐버트의 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는 독립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42년 만에 방한하였다. 방한 이후 1주일 후에 헐버트는 병사하여 8월 11일에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였고 오늘날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의 첫째 아들 쉘던은 2살 때 사망하여 이미 양화진에 묻혀 있었다.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민국으로 떠나며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후[편집] 1950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을 추서했다. 전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지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조선 말기 '조선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손꼽히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그의 저서〈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 멸망사)〉는 그리피스의 〈Hermit Kingdom(은자의 나라 조선)〉과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Corea and her neighbors(한국과 그 이웃나라들)〉과 함께 조선 말기 3대 외국인 기록으로 꼽힌다. 2014년 10월 9일에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2] 저서[편집] 그는 교육자이자 언론인이기도 하였다. 한글로 된 교과서 외에도 영문으로 된 '한국의 역사'와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등 편찬하여 미국 대중들이 한국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한국어와 한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인도의 드라비다어와 한국어를 비교한 논문을 내기도 하였다.[3] 상훈[편집] 195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2014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   ▣ 광복절 행사로 다시 한국을 방문한 헐버트     40년만에 귀국한 헐버트 [이미지출처] 네이버이미지검색     1949년 7월, 헐버트는 정부의 초대로 광복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다시 한국을 방문하는데요. 일본의 박해로 한국을 떠난지 40년만의 귀환이었습니다. 한 달 동안의 항해를 해야하는 힘든 일정이었지만, 헐버트는   "나 헐버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에 대한 사랑이 깊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긴 여정의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한국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헐버트 박사의 손자 브루스씨가 기증한 헐버트 박사의 유품. 사민필지, 건국훈장, 은촛대, 가족사진. 사진은 브루스씨의 아버지인 둘째 아들과 헐버트 박사 내외. [이미지출처]뉴데일리           선교사, 독립운동가 그리고 한글학자, 역사학자 언론인으로 조선의 문화 창달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는  일본의 무자비한 약탈에 저항하며 한국에 대한 헌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한국 정부는 1950년 종교, 교육, 언론, 문화 등의 개화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 헐버트 박사의 공로를 인정해 외국인으로 처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는데요.   그의 삶의 중심에는 한국이 있었고 누구보다 우리 말을 사랑했으며,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파란눈의 외국인이었습니다. [출처] [공유​] [호머 헐버트] 한국인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노력한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특사 호머 헐버트|작성자 꿈꾸는자  
1046    [이런저런] - 세상에?... 몇억조분에 일 정도일가???... 댓글:  조회:4681  추천:0  2017-02-22
정면충돌해 숨진 두 운전자.. 알고보니 '아빠와 아들' (ZOGLO) 2017년2월21일  사진=데일리메일/크리스티 넬슨 페이스북 미국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각각 차를 몰다 정면충돌해 함께 숨지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20일(현지시간) 미 폭스8뉴스에 따르면 앨라배마주 윈필드에서 18일 새벽 4시 10분께 제프리 브래셔(50)씨와 아들 오스틴 브래셔(22)가 몰던 차량이 서로 들이 받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부자는 둘 다 안전띠를 매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 제프리씨는 현장에서 바로 사망했고, 아들 오스틴은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오전 9시쯤 사망했다.  경찰은 음주운전 교통사고라고만 밝혔을 뿐 누가 음주를 했는지, 얼마나 마셨는지에 대해서는 조사 중에 있다.  유가족은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다"며 "한꺼번에 두 가족을 잃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파이낸셜뉴스
1045    [이것이 알고싶다] - 최초의 신문은?... 댓글:  조회:4947  추천:0  2017-02-22
외국   신문의 원시적 형태는 로마시대의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라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원로원의 의사록인 《악타 세나투스:Acta Senatus》와 평민원의 의회상황 등의 발표물을 총칭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8세기경에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서 《저보(邸報)》라 부른 정부 발표물의 보도기관이 있었고, 송(宋)나라 후기에는 《조보(朝報)》라 부른 관보를 발행하였으며, 청대(淸代)에 발간된 《경보(京報)》는 그 후신이라 할 수 있다.   로마시대 이후 귀족들 사이에는 뉴스의 교환이 성행하여 서한신문이 나오게 되었고, 독일에서도 같은 현상이 있었다. 13, 14세기부터 15, 16세기에 걸쳐서 르네상스 ·종교개혁 ·터키군(軍)의 유럽 침입, 신대륙 발견 등의 여러 사건이 일어나 뉴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제후와 도시, 대학 등에서도 뉴스를 모으는 일이 성행하였다. 또한, 상인들도 상업상의 필요에 따라 각지의 뉴스를 수집하였다. 유명한 것으로는 독일 푸거가(Fugger 家)의 이 있다. 서한신문이 발전하여 규칙적인 필사신문(筆寫新聞)도 발생하였는데, 인쇄술이 발달하자 서한신문이나 필사신문 중에서 흥미를 끄는 내용이나 또는 행상인 ·학자 ·학생 ·급사 ·농노 ·여행자 등으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모아 인쇄수단을 통해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부정기 인쇄신문을 신문사상 ‘플루크블라트(Flug-blatt)’라고 부른다. 그 후 17세기로 들어서면서 근대신문으로서의 새로운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1609년 독일에서 세계 최초의 주간신문인 《렐라치온:Relation》과 《아비소:Aviso》가 나오고, 이어서 네덜란드(1618년경) ·영국(22) ·프랑스(31) 등에서도 주간신문이 발행되었다. 그러나 초기 신문의 내용은 외국 뉴스를 주로 다루어 국왕의 허가를 받아야 발행할 수 있었다. 17세기의 신문에서 주목되는 나라는 영국이었다. 당시 영국의 신문은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뉘어져 싸우고 있었는데, 이 분쟁의 와중에 요구된 것이 ‘언론의 자유’였다. J.밀턴이 44년 를 발표하여, ‘사상의 공개시장’ 또는 ‘자동조정 작용(the self-righting process)’과 같은 현대적 언론자유의 개념을 개척하였다. 이후 88년의 명예혁명을 거쳐 95년에는 특허검열법이 폐지됨으로써 영국에서 처음으로 언론의 자유가 확립되었다. 세계 최초의 일간신문인 《라이프치거 차이퉁겐:Leipziger Zeitungen》이 독일에서 나온 것은 60년의 일이었다. 18세기로 넘어오면서 각국에서 일간지가 발행되는 동시에 근대신문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영국 최초의 일간지 《데일리 쿠란트:Daily Courant》가 창간된 것은 1702년이었고, 《더 타임스:The Times》의 전신인 《데일리 유니버설 레지스터:Daily Universal Register》의 창간은 85년이었다. 미국에서는 1690년 보스턴에서 발행된 《퍼블릭 오커런시스:The Public Occurrences》가 최초의 것이었으나 이는 한 호만 내고 발행이 금지되었으므로, 1704년에 창간된 주간지 《보스턴 뉴스레터:Boston News Letter》를 최초의 발행지로 볼 수 있다. 미국 최초의 일간신문으로는 《펜실베이니아 이브닝 포스트》지로 83년에 창간되었고, 프랑스에서는 77년에 일간지 《주르날 드 파리:Le Journal de Paris》가 처음으로 창간되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신문의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이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에서 동시에 일어난 현상으로서 그 원인은 나라에 따라 각각 다르나 교육의 보급과 문자 해독력의 향상 등이 배경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중화의 선구가 된 신문들은 프랑스 지라르딘(Girardin)의 《라 프레스:La Presse》(1836), 미국은 벤자민 데이의 《뉴욕 선》(33), 영국은 인지세(印紙稅)가 폐지(60)된 후에 나온 《데일리 텔레그래프》 등으로 볼 수 있다. 이들 대중신문은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성립된 것으로, 한편으로는 신문의 기업화를 가져온 원인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수의 서민계층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지면의 통속화를 초래하였다.   특히, 미국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심해서 J.퓰리처의 《뉴욕 월드:New York World》, W.R.허스트의 《저널:Journal》이 발행되자 이들은 황색신문(yellow journalism)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미국과는 달리 대중 염가신문이 발행되었으나 그 내용이 저속화하는 등의 변화는 없었다. 독일은 원래 신문의 선진국이었으나 언론자유의 보장이 늦어서 신문의 대중화도 1880년대에 이르러서야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독일 ·프랑스의 신문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정당적 색채를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다가 당파신문의 형태를 벗어나 보도신문이 주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전후부터였다. 일본의 초기신문은 62년 막부(幕府)의 양서조소(洋書調所)가 발행한 관판(官板) 《바다비아 신문》이다. 그 밖에도 막부 말기에 발행된 신문들은 외국신문 번역 중심의 해외뉴스가 대부분이었다. 68년에는 본격적인 신문이 각지에서 나오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추가이신문[中外新聞]》이 있다. 71년에는 일본 최초의 일간지인 《요코하마 마이니치신문[橫濱每日新聞]》이 창간된 데 이어, 72년 대표적 신문 《도쿄 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현 每日新聞)이 창간되었고, 이어 부녀자와 하층민을 대상으로 한 ‘소신문(小新聞)’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소신문으로는 74년에 창간된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79년 오사카에서 창간된 《아사히신문[朝日新聞]》 등이 이러한 계통의 것이다. 세계적으로는 20세기 초부터 신문의 기업화와 경영의 합리화가 시작되어 이 때부터 신문의 체인(chain)화, 그룹화 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통신망의 발달과 함께 뉴스도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세계적인 통신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제1 ·2차 세계대전은 각국 신문의 세력판도와 성격을 크게 변화시켰는데,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 신문의 보도기능을 크게 향상시켰다. 한편,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전연 다른 성격을 가진 신문들이 사회주의 여러 나라들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으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소련에서는 국민에 대한 사상선전의 무기로서 신문을 중시하여 모든 신문을 당과 정부의 기관지로 만들었고, 그 이후에 출현한 사회주의 여러 나라들도 모두 신문을 당과 정부에서 주도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신문이 정부권력을 비롯해서 모든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를 표방하는데 반해, 사회주의 국가의 신문은 이와는 다른 언론관에 서서 신문을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도구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한국   근대신문이 발행되기 전부터 ‘조보(朝報)’또는 ‘기별[奇別]’이라 불리는 관보성격의 필사신문이 있었다. 이 전근대적 신문 형태의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 또는 15세기 무렵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보는 승정원에서 발표하는 자료들을 각 관청의 기별서리(寄別書吏)들이 손으로 베껴서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과 양반층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조보의 내용은 관보적인 성격으로 국왕의 동정과 관리의 임면 등이 대부분이었으나 일반 사회기사의 성격을 띤 것도 함께 실었다. 조보는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와 《한성주보(漢城周報)》가 발행되기 전까지 존재하다가 1894년 정부가 정식으로 인쇄된 《관보(官報)》를 창간하고, 이듬해에 승정원의 공사청(公事廳)을 폐지하면서 없어졌다.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은 1883년 10월 31일에 창간된 《한성순보》이다. 이 신문은 정부기구인 박문국(博文局)에서 발간했으나, 당시의 개화파들이 국민에게 외국의 사정을 널리 알려 개화사상을 고취시키려는 데 큰 목적을 두었다. 《한성순보》는 창간 이듬해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폐간되었으나, 1886년 1월 25일에 다시 《한성주보》를 창간하여 88년까지 발행하였다. 한편,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서재필(徐載弼)이 창간한 《독립신문》이다. 이 신문은 한글전용과 띄어쓰기를 단행하여 그 후의 민간신문 제작에 큰 영향을 주었고, 민중계몽과 자주독립사상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독립신문에 자극을 받아 1898년에는 《일신문》 《뎨국신문》 《황성신문(皇城新聞)》 등의 일간지들이 뒤를 이어 창간되었다.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인(日人) 경영의 한국어 또는 일어신문이 늘어났고, 한국인 발행의 친일신문도 생겨났다. 일인(日人)의 신문발행은 1881년 부산에서 창간된 《조선신보(朝鮮新報)》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1895년에 창간된 《한성신보(漢城新報)》와 러 ·일전쟁 후의 《대한일보(大韓日報)》(1904.3.10. 발행) 《대동신보(大東新報)》(1904.4.18. 발행)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한국인 발행의 친일지로는 《국민신보(國民新報)》(1906.1.6. 발행) 《대한신문(大韓新聞)》(1907.7.18. 발행)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 영국인 E.T.베셀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항일운동의 선봉에 서서 민족진영을 대변하는 논조를 폈다. 이 신문은 국한문판 ·한글판 및 영문판인 《The Korea Daily News》 등을 동시에 발간하여 한말의 최대의 민족지였으나, 1910년 국권피탈 후에는 《매일신보(每日申報)》로 개제하여 총독부의 일개 기관지로 변신하고 말았다. 국권피탈 후 일제는 한국인에게는 단 한 건의 신문발행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한국어로 발행되는 신문은 매일신보가 유일한 것이었다. 3 ·1운동 후 1920년부터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조선일보(朝鮮日報)》 《동아일보(東亞日報)》 《시사신문(時事新聞)》의 3개 민간지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들 민간지들은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수많은 압수와 정간처분을 당했음은 물론, 필화로 많은 언론인들이 고통을 겪었다.   1920년에 창간된 3대민간지 가운데 《시사신문》은 이듬해에 폐간되었고, 1924년 3월에는 《시대일보(時代日報)》가 창간되었으며, 후에 《중외일보(中外日報)》(1926.11.15) 《중앙일보(中央日報)》(1933.11.27)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1933.3.7)로 몇 차례 제호를 바꾸면서 발행되다가, 1936년 9월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정간당한 끝에 복간되지 못했다. 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1940년 8월 일제의 강제폐간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그 후부터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만이 일제의 전통치기간 동안 중단되지 않고 발간되었다. 36년 동안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신문발행의 허가를 극도로 억제했을 뿐만 아니라, 허가해 준 신문에 대해서도 행정처분에 있어서 사전 ·사후 탄압을 자행하였고, 동시에 사법처분(司法處分)으로 언론인의 구속 등이 빈번하였다. 행정처분에 의한 사전탄압은 ① 간담(懇談), ② 주의(注意), ③ 경고(警告), ④ 금지(禁止)의 순으로 제도화되어 있었고, 제작된 신문에 대한 사후탄압으로는 ① 삭제(削除), ② 발매금지 및 압수, ③ 발행정지(정간), ④ 발행금지(폐간)의 4단계가 있었다. 삭제처분은 문제된 기사를 삭제하도록 하는 것으로서 가장 빈번하게 자행된 탄압 방법이었다. 발매금지 및 압수는 인쇄가 끝난 신문을 발매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서 심한 때에는 1년 평균 매주 한 번씩 인쇄된 신문이 압수되어 민족지는 경영상으로도 많은 타격을 입었다.   발행정지는 정간으로서, 일제강점기에 민족지가 발행된 1920년 동안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각 1회씩, 그리고 《중외신보》가 1회의 발행정지를 당했다. 발행금지는 폐간으로서 신문지법에 의해 허가되었던 잡지 《신생활(新生活)》이 1923년에, 그리고 《개벽(開闢)》이 1926년에 각각 폐간되었고, 1940년 8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자진폐간의 형식을 취했으나 실제로는 강압에 의한 강제폐간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언론계는 제일 먼저 활기를 되찾았다. 미군정은 언론의 완전한 자유를 약속하여 신문발행을 허가제가 아닌 등기제(登記制)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신문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자 가장 기민하게 움직인 것은 좌익계열의 신문들이었다. 1946년 5월 28일 현재로 신문 ·잡지 등 정기간행물은 무려 242종에 달했고, 이 해 9월에는 일간지 57종, 주간지 49종, 통신 13종 그리고 월간 ·격월간지 154종 등으로 정기간행물의 수는 무려 274개로 늘어났다. 이들 신문 가운데는 정론지(政論紙)적인 성격을 띠고 반대파들을 비방하면서 자기파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언론인에 대한 테러, 신문사 습격, 기물파괴 등의 무질서한 상황으로 급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과 좌익언론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 미군정 당국은 1946년 5월 29일에 군정법령 제88호를 공포하여 군정실시 초기에 내세웠던 언론정책을 크게 바꾸어 신문발행을 허가제로 환원시켰다. 이 법령은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신문발행을 억제하는 근거가 되었다.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된 대한민국정부의 언론정책은 미군정하의 골격을 대체로 이어받았다. 자유당 정권하에서는 정부가 신문발행 허가를 억제했기 때문에 6 ·25전쟁 이후 신문의 숫자는 점차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60년에 일어난 4 ·19혁명 후에 개정된 헌법은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받지 아니한다”(13조)고 규정함으로써 신문발행에 대한 허가제를 폐지하고 등록제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 후 8개월 뒤인 1961년 2월 말에는 4 ·19혁명 이전에 41종이던 일간지가 무려 124종으로 3배나 늘어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언론기관들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늘어남으로써 커다란 사회문제를 야기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5 ·16군사정변 직후 언론기관의 일제정비와 1980년의 언론통폐합으로 각 도에는 1개의 일간지만 남고, 서울에는 3개씩의 조간과 석간만 발행되었으며, 방송은 공영제로 되었으나 1987년의 6 ·29선언과 1988년 제6공화국의 출범 이후의 언론 자율화정책을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더욱 확대하여 발행과 편집의 자유는 계속적으로 신장되었고 새로운 신문이 대량으로 창간되었다. 신문 ·잡지 등의 정기간행물의 등록이 자유로워졌으므로 언론 환경은 제5공화국 또는 그 이전과 비교하면 크게 호전된 것이다. 자율화 이전인 1987년에는 전국에서 발행되는 일간신문이 32개였으나 1994년 6월 118개로 86개 신문(369%)이 늘어났다. /이자와라와
1044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 미국인이 없었다?... 있었다!... 댓글:  조회:5411  추천:0  2017-02-22
9일 한글날…한국인보다 한글 더 사랑한 미국인 한국 땅에 묻힌 '고종의 밀사'  1886년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한글 첫 교과서 '사민필지' 써 '가운뎃점 찍기' 등 맞춤법 연구…'한글, 영어보다 우수' 논문 발표 용산 국립한글박물관서 '한글, 헐버트를 만나다' 행사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 미국인이 있었다. 그는 한글에 띄어쓰기와 가운뎃점(·) 찍기를 처음 도입했다. 독립운동가 서재필에게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에서 ‘한국어가 영어보다 우수하다’는 논문을 발표(1903년)하기도 했다.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사진)의 얘기다. 제570돌 한글날(10월9일)을 하루 앞둔 2016년 10월 8일 오후 2시 서울 용산 국립한글박물관에서는 ‘한글, 헐버트를 만나다’라는 주제의 강연이 열린다. 체이스맨해튼은행 한국대표를 지낸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이 강연자로 나선다. 김 회장은 1991년 사업회를 조직해 헐버트 박사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는 “헐버트 박사가 한글을 연구하고 알린 덕분에 지금의 한글이 있을 수 있었다”며 “한글 발전과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공로를 모두가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헐버트 박사는 미국 동북부 버몬트주에서 태어나 다트머스대를 졸업했다. 1886년 조선 최초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에 외국어 교사로 오면서 조선 땅을 처음 밟았다. 조선에 도착한 그의 눈앞에는 처참한 현실이 펼쳐져 있었다. 조선인은 매우 가난했고 글은 물론 그 어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가 “조선의 근대화를 도와야 한다”며 발 벗고 나서기로 결심한 이유다.      헐버트 박사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한국어 공부부터 시작했다. 한글을 접한 그는 충격을 받았다. 서툴지만 나흘 만에 어느 정도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한글이 조선을 문명국가로 끌어올릴 ‘비책’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여전히 한자를 쓰면서 한글을 무시했다. 헐버트 박사는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1891년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제작했다. 세계 각국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내용의 천문·지리·사회서였다. 한글 사용을 호소하고 선비와 백성, 남녀의 평등을 주장하는 내용도 담았다. 이 책은 근대 교육사와 한글사에 크게 공헌했다.  육영공원이 축소 운영되자 헐버트 박사는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한글 사랑은 식지 않았다. 1892년 미국에서 한글과 관련한 최초의 논문(‘한글’)을 썼다. 1893년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들어온 그는 배재학당 교사로 일하며 국문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글 맞춤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던 한글에 띄어쓰기법과 가운뎃점 찍기를 도입한 게 연구 성과다.   고종의 정치·문화·외교 자문에도 응했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박탈하자 1907년 ‘헤이그 밀사’로 네덜란드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일제의 방해로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49년 7월29일 이승만 대통령 초청으로 한국 땅을 밟았지만 8·15 광복절 행사를 10여일 앞둔 8월4일 별세했다. 헐버트 박사는 유언대로 서울 마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잠들어 있다. /고윤상 기자 ==========================   ​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 ​ ​
1043    [자료] - 최초 "한글 띄여쓰기"를 한 사람은 외국인?... 댓글:  조회:5786  추천:0  2017-02-22
한글 대중화 이끈 기독교 역할 재조명  “무엇보다도 놀라운 섭리는 이런 문자(한글)가 400년 동안 긴 잠을 자다가 자명종 소리에 깨어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역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 연동교회 초대 담임목사를 지낸 제임스 스카스 게일(1863∼1937) 선교사가 1909년 영문 선교잡지에 기고한 내용 중 일부다. 이듬해 6월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사대회에서의 보고서 내용도 흥미롭다. “아마 한국어 이외의 어떤 언어도 그렇게 짧은 기간에 기독교적 사상과 용어를 쉽게 옮겨 전할 수 있었던 언어는 없었을 것이다.”    567돌(2013년 10월), 한글날을 맞아 한글 보급·전파에 구심점이 됐던 국내 기독교계의 역할이 재조명되고 있다. 2013년 10월 8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이달 초 펴낸 ‘기독교, 한국에 살다’ 등 문헌에 따르면 한국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글을 ‘선교 언어(mission language)’로 채택한 게 한글 전파의 중요한 견인차가 됐다. 1893년 1월 미북장로회 선교부는 “모든 문서는 한문을 섞지 않고 순전히 한글로 인쇄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앞서 1888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속한 미북감리회 선교부는 배재학당 안에 한글 자모를 구비한 활판소를 설립, 성서와 찬송가를 비롯해 ‘텬로력뎡(천로역정)’ 등 각종 한글문서를 출판했다.  특히 1911년 신·구약 성경 전체가 한글로 번역돼 총 2174쪽 94만여자를 수록한 ‘셩경젼셔(성경전서)’가 출간된 건 역사적인 사건이다. 한글 창제 이후 이 정도 수준의 풍부한 어휘와 활자로 한글의 존재를 표현한 적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기독 역사학계의 평가다. 당시 한글의 보급·전파, 교육·연구 등의 일등공신은 외국인 선교사들과 국내의 기독인 학자들이었다.  한글 출판물 가운데 처음으로 띄어쓰기가 도입된 문헌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스(1841∼1915) 선교사가 쓴 한국어 교재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이다. 그는 세례를 받은 한국인들과 함께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한글의 매력에 푹 빠졌다.  “한글 자모는 아름다운 음성문자로 너무나 간단해서 모든 남녀노소가 읽을 수 있습니다. 소리글자이므로 한글로 인쇄된 어떤 책이든 자모만 배우면 읽을 수 있습니다.”(조선어 첫걸음)  한국어 실력이 뛰어났던 언더우드와 게일 선교사 등은 한국어를 제대로 익히기 위해 한글 어휘를 수집·정리해 사전을 출판하는가 하면 한글 문법서를 손수 만들기도 했다. “해방 직전까지 한글을 ‘공공 용어(대중어·public language)’로 사용한 곳은 교회뿐이었다”는 주장(한국기독교문화운동사·이만열 저)도 있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 이후 교회에서도 일본어로 설교하도록 지시했지만 교인들은 계속 한글 성경과 찬송가를 사용해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한글날을 제정한 한글학회를 비롯해 이 단체 전신인 ‘국어연구학회’ 인사 대부분도 기독인 학자들이었다. ‘한글운동의 선구자’이자 감리교인이었던 주시경 선생의 한글 사랑은 배재학당과 상동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밑거름이 됐다. 그의 제자이면서 한글학회 핵심 멤버였던 최현배 장로는 평소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거룩한 뜻이 기독교에서 실현된 것”이라고 말했다.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겨레의 언어(한글)를 민족의 문화 속으로 뿌리내리게 만든 건 한국의 기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한글 성경의 발간과 보급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박재찬 김경택 기자  우리 나라도 1896년 이전까지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다가 서재필 박사가 창간한 〈독립신문〉에서 지금과 같은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했습니다. 띄어쓰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당시 〈독립신문〉의 주필이던 주시경 선생님이에요. 그러니까 〈독립신문〉은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이자 최초로 띄어쓰기를 적용한 신문이랍니다. ☞ 〈독립신문〉 〈독립신문〉은 1896년 독립 협회의 서재필과 윤치호가 발간한 우리 나라 최초의 현대 순 한글 신문이에요. 이 신문은 사회의 발전과 민중을 깨우치는 계몽 운동에 큰 역할을 한 신문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Daum백과] 우리말의 띄어쓰기는 언제부터 했을까? – 과목별 학습백과 퀴즈 초등, 천재교육 편집부, 천재학습백과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42    [자료] - 우리 말과 글의 력사를 알아보다... 댓글:  조회:3258  추천:0  2017-02-22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조선의 말과 글을 통일하라"           조선어학회는 1931년 조선의 말과 글의 연구 정리 및 통일을 목적으로 설립된 민간 학술단체로, 주시경을 계승한 제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어연구회가 재편된 단체이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 ‘조선어 표준말 모음’,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등을 공표했으며, 조선어 사전 편찬을 앞두고 조선어학회 사건 등 일제의 탄압을 받아 관계자들이 고초를 겪었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운동은 일제에 맞선 문화적 민족운동인 동시에 일종의 독립운동이기도 했다.     조선어연구회의 한글 연구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 이후 일본어가 ‘국어’의 지위를 차지하고, 한국어는 지방어인 ‘조선어’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대 학교 교육에서도 일본어 보급에 중점을 두고, 조선어는 한문과 함께 하나의 과목을 이루고도 주당 수업 시간은 일본어에 훨씬 못 미치는 형편이었다. 또한 교과서 편찬을 위해 1912년에‘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총독부 철자법)을 제정했지만, 곧 이어 1921년, 1930년에 개정하는 등 일관성이 없었고, 일본어의 오십음, 탁음, 장음 표기법을 병기하는 등 한글 표기법을 일본어 보급을 위한 보조 도구로 간주했다. 또한 조선어연구회의 주장을 반영한 3차 개정 이전에는 소리나는 대로 적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에 각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주시경의 제자들은 문법에 맞지 않는 총독부 철자법을 비판하며, 1921년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를 연구함’을 목적으로 한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주로 조선어 철자법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월례회와 동인지 『한글』에 발표하거나 강연을 통해 일반에도 보급하고자 했다. 또한 훈민정음 480주년을 맞은 1926년부터는 그 반포일을 ‘가갸날’또는 ‘ 한글날’(1928년)로 명명하고 성대한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하지만 연구를 1차적 목적으로 하는 조선어연구회는 회원들의 주장을 모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어연구회는 1929년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이극로의 활동에 힘입어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명칭을 바꾸고, ‘조선어문의 연구와 통일’을 위한 기관으로 거듭났다. 이극로는 베를린종합대학 유학 중 조선어과를 만들어 강사로 자처하는 등, 모국어를 유지해 민족과 민족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언어 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세웠다. 그리하여 1929년 4월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고, 회원들과 협의한 후 10월 한글날에는 조선어학계의 권위자와 좌우익 성향의 인사들을 망라하여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였다. 우리 손으로 표준말 항목에 대해 바른 한글 철자법에 따라 정확한 해설을 붙인 조선어 사전을 편찬함으로써 민족의 갱생을 꾀하려는 것이 사업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서는 먼저 표준어와 맞춤법을 제정하는 등 조선어와 한글의 ‘통일’이 필요했다. 이에 조선어연구회는 1930년 12월에 총독부 철자법이 아닌, 대한제국기의 연구를 기초로 한 별도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기로 결의하고, 1931년 1월 학회 자체도 조선어학회로 개편한 것이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통일 및 보급 활동     조선말과 글의 연구와 통일을 목적으로 한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첫 사업은 맞춤법 통일이었다. 권덕규, 김윤경, 이병기, 이윤재, 장지영, 최현배, 정열모, 이극로 등 18인의 제정 위원이 중심이 되고 3년에 걸쳐 총 433시간, 125차례의 회의에서 의견을 조율해 완성한 ‘ 한글 마춤법 통일안’은 1933년 10월 조선어학회 임시총회에서 가결된 후, 한글날에 반포되었다. 총론에서는 “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삼고,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하며 각 단어 사이는 띄어 쓸 것 등을 제시하고, 본론에서는 자모, 성음, 문법, 한자어, 약어, 외래어 표기, 띄어쓰기 등의 규정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어학회의 통일안은 박승빈을 중심으로 한 조선어학연구회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조선 각계 지식인들의 지지를 확보하여 주요 신문, 잡지, 단행본, 소설에서 사용되었다.     이어 조선어학회는 1936년 10월 490주년 한글날 기념식에서 ‘조선어 표준어 사정안’을 발표하고, 『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간하여 표준어와 표준 철자를 찾아볼 수 있게 했다. 이극로와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등이 중심이 되어 1934년에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를 설치한 이래, 총 73인의 사정위원이 3차례의 사정회를 개최하고 또 이를 수정한 결과였다. 사정위원의 구성은 서울말을 표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서울 및 경기 출신이 절반을 점하게 하고, 나머지는 방언을 참고하기 위해 각 도별로 위원 수를 배정하였다. 또한 민족 전체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직업 및 정치적 성향, 남녀 등도 고려하여 대표적 비타협민족주의자인 안재홍, 공산주의자 정노식 등도 사정위원에 포함시켰고, 사정안이 거의 완성되자 각 교육기관, 언론기관, 종교기관, 문필가 및 명사 등 500여 곳에 이를 발송하여 일반의 여론을 수합하였다. 조선어학회는 조선의 말과 글을 통일할 표준어를 사정하는 데, 실제 이를 사용할 조선인 전체의 의견을 망라하겠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극로도 문필가부터 꼭 표준어를 사용하여 일반에까지 보급될 수 있게 하기를 당부했다. 또한 조선어학회는 1931년 1월 외국어에 교양이 깊은 각계 권위자 45명으로 외래어표기법 통일문제협의회를 조직하여 외래어 표기법을 조사 연구하기로 한 후, 10년 후인 1940년 6월에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하고, 일제의 허가를 얻어 1941년 1월에 책자로 발간했다. 당시에는 예컨대 런던(London)의 경우, 로돈, 논돈, 윤돈 등으로 제각기 표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어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외국 고유명사나 외래어를 표기하는 방법도 정해야 했던 것이다. 이극로, 정인섭, 이희승이 책임위원을 맡아 통일안을 기초했는데, 그 원칙은 ‘한글 마춤법 통일안’(1933)에서 정한 대로 모든 외래어는 새 문자나 부호를 사용하지 않고 한글의 음운을 토대로 한글로 표기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한글과 만국음성기호의 대조안을 작성하는 한편, 조선음성학회 외 각국 음성학 연구단체 등 학회 외부의 의견까지 참작하여 통일안을 작성했기 때문에 제정까지 다소 오랜 시일이 걸렸다. 또한 조선어학회는 1938년 가을에 원안을 완성한 후에도, 이를 기관지 『한글』 등에서 시험 사용하고, 또 300여 명의 각계 저명인사들의 비평과 의견을 모으고 나서야 비로소 통일안을 발표한 것이었다. 이처럼 표준어와 외래어 규정이 마련되자, 조선어학회는 1937년에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표준말 사정안에 맞게 수정하고, 1940년에는 다시 이를 개정하여 ‘마춤법’을 ‘맞춤법’으로 고치고 사이시옷을 도입한 후 『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간하는 등 그 완벽을 기하였다. 한편, 조선어학회는 표준어와 맞춤법 규정을 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일반에 보급하여 조선의 말과 글을 실질적으로 통일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이극로는 중국 상해로 망명한 김두봉과 연락하는 과정에서, 정리 통일된 조선어문을 널리 민중에 보급함으로써 조선의 고유문화를 유지 발전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선 독립을 위한 실력도 양성할 수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 민중에게 한글을 보급하여 문맹을 타파하고 독립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에서 한글 운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먼저, 1920~30년대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의 문자 보급 운동과 결합하여, 각종 한글 강습 강연을 활발히 했다. 1930년에는 당시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와 하기 한글 강습회를 개최하였고, 조선어학회로 바뀐 뒤에도 단독 강습회를 개최하거나 동아일보사가 브나로드 운동의 일환으로 주최한 하기 한글 강습회에 강사를 파견하였다. 강습회에서 학생들이 사용한 한글 교재도 이윤재의 『한글공부』(1931)였으며, 조선어학회는1934년에 기관지 『한글』에서도 문자 보급 운동에 사용되는 한글 교재를 상세히 해설해주었다. 그밖에 학교 및 지방 청년회, 기독교 및 천도교의 한글 강연회나 강습회에도 강사를 파견해 한글을 보급했다. 또한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한 후에는 조선어학회 안에 한글 교정부를 설치하고, 특히 이윤재가 중심이 되어 교정을 요청한 사람의 글들을 새로운 철자법에 맞게 고쳐 주었다.   아울러 이극로와 이윤재는 일반인이 한글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단계별 공통 교과서를 발행할 계획이었으나 완성하지 못했고, 1935년에는 조선어학회의 부설기관으로 한글 도서를 출판할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을 설립했지만 김윤경의 『조선문자급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1938) 외 한 권을 내는 데 그쳤다. 조선어학회는 조선의 말과 글의 통일과 한글 보급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고질적인 재정난과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활동의 여지는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     조선어학회는 조선어 통일을 위한 기초 사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1936년에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추진해 온 사전 편찬 업무를 인수했다. 1937년부터 본격적으로 어휘를 수집하여 1939년 초에는 어휘의 정리와 그에 대한 해설까지 거의 완료되었다. 50명의 전문위원이 11년 동안 고심하고, 전문 용어는 학자들에게 맡겨 서술한 대사업이 마무리를 앞둔 것이었다. 조선어학회는 마침내 1940년 3월 조선총독부에 16만 어휘, 3천여 삽화로 구성된 『조선어대사전(朝鮮語大辭典)』의 출판을 신청해 일부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허가를 받았고, 1942년에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 간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해 10월에 발생한 이른바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 편찬은 중단되었고, 조선총독부는 사전 원고와 서적을 전부 압수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함남의 홍원경찰서가 1942년 7월에 영생여학교 박영희가 쓴 일기 내용을 구실로 삼아, 사전 편찬에 관여하던 정태진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준 교사로 지목하고,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의 단체라는 자백을 얻어낸 후 회원들을 검거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이전부터 한글 운동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려 한 조선어학회를 주시하고 있었다. 다수의 3·1 운동 참여자와 대종교 신자가 있고, 세계피압박민족대회 참여자(이극로, 김법린), 신간회(장지영, 안재홍), 대한민국 임시정부( 윤병호) 등 각종 민족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이 모여 있던 조선어학회는 민족주의자들의 ‘소굴’이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이미 1935년에 전국 단위의 한글 강습회를 전면 금지시켰다. 또한 표준말 사정안을 발표한 1936년의 한글날 기념식에서는 가출옥 상태의 안창호가 축사를 맡았는데, 조선 민족은 조상에게 받은 모든 것을 잃고 조선어만 남았으므로 일치 협력하여 이를 보급 발달시켜 독립을 이루자는 취지의 발언을 하다가 참관하던 경찰의 저지로 기념식이 중단되었다. 수양동우회 사건(1937)으로 학회 임원 중 이윤재와 김윤경이 검거되었고, 최현배, 이만규, 이강래도 흥업구락부 사건(1938)에 연루되어 학교를 퇴직하는 등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그 외 이극로, 이희승, 한징, 정열모 등도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기 때문에, 조선어학회는 이미 언제 해산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때문에 조선어학회는 사전 편찬 때까지라도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산하 기관이 될 것을 결정하고 간사장 이극로도 일제에 협력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사전 간행을 앞두고 결국 탄압을 받게 된 것이다. 일제는 1942년 10월부터 1943년 4월까지 조선어학회의 핵심 회원과 사전 편찬을 후원한 찬조회원을 대거 검거하였다. 치안유지법의 내란죄, 즉 조선 독립을 꾀했다는 혐의였다. 검거된 31명 중 16명을 기소하여 예심에 회부했으며, 예심 판사는 이중 감옥에서 사망한 이윤재(1943)와 한징(1944), 석방한 장지영, 정열모를 제외한 12인을 공판에 넘겼다. 1944년 12월에서 이듬해 1월 사이에 열린 재판에서 장현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집행유예 등으로 석방된 사람을 제외하고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등 5명이 함흥 감옥에 투옥되었다. 복역을 마친 정태진 외 나머지 4명은 즉시 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8월 13일에 기각되었고, 결국 일제가 패망한 이후 8월 17일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심문 과정에서 경찰은 조선어 사전과 사전 편찬을 위한 어휘 정리 카드에 태극기를 ‘대한제국의 국기’, 창덕궁을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궁궐’등으로 해설해놓은 것을 증거로 삼아 민족정신을 함양하려 한 것이 아닌지 추궁하였다. 또한 예심 판사는 1944년 9월의 결정문에서 “어문 운동은 민족 고유의 어문의 정리 통일 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문화적 민족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를 품은 민족 독립운동의 점진 형태”로 규정하여, 유죄의 판단을 내렸다. 이에 회원들은 어문 운동은 어디까지나 문학적 또는 언어학적 문화운동이지 정치적 민족운동이 아니며 어문 운동에는 독립운동을 부추길 만한 능력이 없다고 반박하여 상고했지만, 고등법원은 상고를 기각했다. 일제가 일본어 상용과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강요하던 전시체제기에는 민족 문화운동도 허용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해방 후의 조선어학회     석방된 조선어학회 인사들은 즉시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고 1937년 이후 중단되었던 한글날 행사를 복원하였다. 최현배, 이극로, 장지영 등은 미군정청이 조직한 조선교육심의회에 참여하여, 미군정이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조선어 표기법으로 채택하고, 초중등 교과서는 모두 가로쓰기한 한글로 서술하는 원칙을 결정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국어 교사를 양성하고 국어 교과서를 편찬하는 일도 조선어학회가 담당했고, 문교부에 국어정화위원회를 설치하여 일본어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도 추진하였다. 해방이 곧 독립국가 건설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미군정기 조선어는 다시 ‘국어’의 지위를 되찾고, 식민지기 조선어학회의 성과가 국가 권력의 후원 속에 공식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어학회 사건 때 증거물로 압수되었던 사전 원고가 1945년 10월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조선어학회는 1947년 한글날에 을유문화사에서 『 조선말 큰사전』 1권을 간행한 이래 1957년 마지막 6권까지 간행하여 한글 사전을 편찬하려는 오랜 숙원을 풀었다. 하지만 1948년 남북 분단 정부의 수립은 조선어학회도 변화시켰다. 이극로는 그해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떠난 후 그대로 북한에 남아, 북한 정부 수립 후 조선어문연구회의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김두봉과 함께 북한의 언어정책을 이끌었다. 최현배가 중심이 된 남한의 조선어학회는 1949년 10월에 이름을 한글학회로 바꾸었다. ‘조선’이라는 용어는 북한을 연상시키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 남한의 국어정책 정립에 기여하였다. 비록 해방 이후 조선 민족은 정치적으로 분단되었지만, 대한제국기의 주시경과 식민지기의 조선어학회가 이룬 활동의 성과는 현재 남한과 북한 공동의 유산으로 계승된 것이다.      
1041    96년 만의 귀향길에 백두산호랑이와 "기생충"과 함께였더면... 댓글:  조회:3497  추천:0  2017-02-21
성공률 낮은 멸종위기종 복원, 구충제 투여 때문일 수도 腸內 기생충 해롭지만은 않아… 숙주와 공존하며 생태계 보전 자가면역질환 발병률 낮추고 중금속 해독제 개발 등에 활용   이달 초 백두산호랑이가 경북 봉화의 보호구역에 방사된 지 9일 만에 죽은 채 발견됐다. 만성 신부전증을 앓고 있었지만 방사 전에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1921년 경북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게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발견된 백두산호랑이였으니, 96년 만의 귀향길이 허무한 죽음으로 끝난 것이다. 사람 손에 보호받던 야생동물을 자연에 돌려보내는 일은 그만큼 어렵다. 사냥 같은 적응 훈련을 숱하게 하고 특별한 병 없이 건강했어도 야생에 돌아가면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는 경우가 허다하다. 과학자들은 멸종위기 동물의 복원에 뭔가 잘못이 없었는지 인간이 아닌 자연의 눈으로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잃어버린 퍼즐 조각 하나가 나타났다. 바로 멸종위기 동물의 몸에 사는 '기생충'이었다. 뉴질랜드에는 카카포(Kakapo)라는 이름의 앵무새가 있다. 연노란색 깃털을 가진 이 앵무새는 날지 못한다. 나무만 흔들면 과일을 줍듯 쉽게 잡을 수 있다 보니 지금은 채 150마리도 남지 않았다. 종(種) 복원을 위해 카카포를 사육하던 사람들은 앵무새 배 속에 기생충인 촌충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장 구충제를 먹였다. 하지만 뉴질랜드 오타고대의 해미시 스펜서 교수는 "멸종위기 동물을 구하려면 그 동물의 기생충도 보전해야 한다"며 구충 작업에 반대했다. 스펜서 교수의 논리는 이른바 '위생가설'(hygiene hypothesis)로 설명된다. 1968년 영국 런던보건대 연구진은 배 속에 기생충이 많은 나이지리아인은 영국인보다 관절염에 덜 걸린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진은 인체 면역체계가 기생충과 싸우면서 어느 정도 반응이 적절한지 익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야 면역반응이 과도해져 건강한 세포나 조직까지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철원 기자 최근 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2001 ~2010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100여만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태어날 때 집에 애완견이 있거나 농장에 살아 기생충에 적절하게 노출됐던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천식에 걸릴 확률이 15% 낮았다. 야생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유럽 검은머리물떼새는 기생충이 적으면 오히려 생존 확률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카카포 앵무새 역시 수가 줄면서 몸속에 사는 기생충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기생충의 가치는 이뿐만이 아니다. 멸종위기 동물을 보전하려면 일단 어디에 사는지, 얼마나 있는지 알아야 하지만, 워낙 수가 적어 찾기가 어렵다. 과학자들은 거머리를 대신 조사한다. 거머리 피에서 멸종위기 동물의 DNA 지문을 찾아 서식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또 멸종위기 동물은 수가 적다 보니 근친교배로 인해 DNA 다양성이 크게 떨어진다. 동물의 유전적 다양성이 줄면 그 안에 사는 기생충도 다양성이 줄어든다, 과학자들은 호랑이가 남긴 똥에서 기생충을 분석해 호랑이의 DNA 다양성을 역산하기도 한다. 기생충은 신약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회충이나 촌충은 생존을 위해 숙주 동물의 면역반응을 누그러뜨리는 물질을 분비한다. 이를 이용하면 자가면역질환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다. 쇠파리는 말이나 소 같은 가축에 알을 낳는다. 알에서 깨어난 유충은 피부에 구멍을 파고들어간다. 이때 동물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연 진통제를 분비한다. 과학자들은 이를 수술용 마취제로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물고기 배 속에 사는 한 기생충은 중금속을 끌어모으는 능력이 있다. 이 과정을 밝혀내면 중금속 중독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물론 기생충이 숙주동물이나 인간에 도움을 주든 주지 않든 그 자체로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보전할 가치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일단 기생충은 가장 종류가 많은 생물집단이다. 지구 상 생명체는 모두 42개 문(門)으로 나뉜다. 이 중 31개가 대부분 기생충으로 구성된다. 문은 동물과 식물을 나누는 계(界) 다음으로 큰 분류단계이다. 사람은 동물계, 척추동물문 순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기생충을 보전하면 생태계가 살고 그 안의 숱한 숙주 동물들도 살아난다고 볼 수 있다. 1987년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 콘도르가 야생에서 멸종했다. 남은 콘도르는 샌디에이고 동물원에서 보호하던 27마리뿐이었다. 그러자 콘도르 깃털에 숨어 살던 '캘리포니아 콘도르 이'에게도 멸종 위기가 닥쳤다. 동물원의 콘도르에서 이를 발견한 사육사는 바로 살충제를 썼다. 그길로 콘도르 이는 멸종했다. 나중에 캘리포니아 콘도르는 자연에 복원됐지만 콘도르 이가 살아났다는 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카카포 앵무새가 콘도르의 전철을 밟을까 우려하고 있다.   /ⓒ 조선일보 이영완 과학전문 기자
1040    [이것이 알고싶다] - 목화는 인류의 보배 댓글:  조회:5107  추천:0  2017-02-18
목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수확을 기다리는 목화 솜   1890년대 미국 오클라호마 주에서 목화를 수확하는 모습   주사형 전자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본 목화 섬유 목화(木花)는 아욱과 목화속 식물 가운데 섬유를 뽑는 식물, 또는 그 섬유를 말한다. 그 섬유로 짠 직물을 면(綿)이라고 한다.   목차   [숨기기]  1꽃말 2전파 3특성 4종류 5같이 보기 6각주   꽃말[편집] 어머니의 사랑. 전파[편집] 인도에서 기원전 3000년경 첫 목화재배가 이루어졌는데, 그리스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헤로도토스가 목화씨를 가져와 유럽의 목화재배마저도 기원전 2500년 즈음에 이루어졌다. 인더스 유적과 안데스 유적에서 목화가 발견된 것은 이 때문이라는 일설이 있다. 또 몇천 년이 지난 1000년부터 2000년까지 그리스의 이리스에서 목화솜으로 여러 물건을 만들어 썼는데, 이는 십자군이 목화에 대해 유럽에 전한 것이다. 결국 그러한 과정이 여러번 반복되면서 동아시아 중원대륙까지 전파됐다.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의 문신 문익점으로 알려져 있다. 1363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목화의 실용성을 깨닫고 씨를 가져왔다. 보통 목화가 원나라의 금수품목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붓뚜껑속에 몰래 목화씨를 숨겨서 들여왔다는 전설이 있지만, 원나라에서 금수품목으로 지정한 것은 화약등의 무기류였기 때문에 역사적 근거는 없다.[1] 문익점은 그 가족들과 함께 목화를 키워 솜으로 실을 뽑아냈다. 특성[편집] 아욱과의 한해살이 또는 목본성 작물로, 높이 60-150cm로 줄기는 열 개의 가지로 나뉘고, 잎은 긴 잎자루를 가진 손바닥 모양이며, 잎의 반대쪽에 흰색 또는 노란색 꽃이 핀다. 일반적으로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어 홍색으로 변한다. 열매는 달걀 모양의 녹색 삭과로서 익으면 속이 3-5개로 갈라지고, 수십 개의 종자가 나온다. 씨앗의 표피 세포가 순백색 털로 발달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솜으로 이용하거나 실로 뽑아 옷감을 짠다. 한편 종자는 기름을 짜기도 하는데, 이것을 면실유라고 하며 식용이나 공업용으로 쓰기도 한다. 목화는 종류에 따라 육지면·해도면·아시아면·인도면 등으로 구분된다. 종류[편집] 목화에는 상업적으로 가꿀 수 있는 네 종류의 종이 있다. Gossypium hirsutum Gossypium barbadense Gossypium arboreum Gossypium herbaceum ================================ 원나라에 갔던 문익점이 붓대 속에 숨겨 온 목화씨는 고려인의 생활에 혁명을 불러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비단은 값이 매우 비쌌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은 한겨울에도 삼베나 모시로 옷을 지어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익점이 목화씨로 면화를 짜는 데 성공한 후에는 목면이 보급되어 혹한기를 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또 가난한 사람들은 결혼할 때 비단 이불을 마련하지 못해 혼기를 놓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이 비단이 면포로 대체되면서 혼인 풍습까지 변하게 되었다. 목면으로 면포를 만들고, 면포를 유통하는 과정에서 상업이 발달했다는 것도 문익점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문익점이 목화를 몰래 숨겨 왔다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태조실록》과 《고려사》에는 문익점이 “목화씨를 얻어 왔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어디에도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목화씨를 숨겨 왔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목화는 원나라 곳곳에서 재배되고 있었고, 반출 금지 대상도 아니었다고 한다. 이 주장은 2007년에 문익점의 목화씨 재배보다 800년이나 앞선 백제 시대의 면직물이 출토되면서 더 힘이 실리게 되었다. 국립부여박물관이 국보 제287호 백제 금동대향로가 출토된 부여 능산리 절터 유물을 정리하다가 백제 시대의 면직물을 발견한 것이다. 함께 출토된 창왕명석조사리감이 567년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이 면직물도 비슷한 연대로 추정된다. 다만 이 백제의 면직물은 목화의 원산지인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지역에서 들여온 토종 종자를 어렵게 소량 재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익점이 들여온 종자는 남쪽의 기후에 맞게 개량되어 대량 재배가 가능했기에 서로 쓰임이 다르다는 것이다. [Daum백과] 목화씨는 문익점이 들여온 것일까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문익점 목화씨 도입의 미스테리 우리는 흔히 목화씨 도입에 대해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즉,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돌아가는 길에 목화씨 3개를 관리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몰래 따서 그것을 붓뚜껑 속에 넣어서 고려로 돌아오다가 그것도 국경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원나라 관리들의 엄중한 검사를 무사히 피해서 그것을 가지고 고국에 와서 재배를 했는데 그 중 2개는 죽고 1개가 용하게 살아남아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에 성공해 그로 인해 국내에 널리 퍼져 의류 혁명을 일으켰다는 그런 내용이다. 그 과정이 상당히 드라마틱하며 극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사실을 유심히 보면 다소의 과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문익점에 관해서는 현재도 신화처럼 되어 있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그의 목화씨 도입으로 인한 의류혁명의 공헌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정확한 사실상의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 그에 관한 고려사 문익점 열전의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문익점은 진주 강성현 사람인데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올라 가 정언(正言)이 되었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덕흥군에게 붙어 있었던 바 덕흥군이 패배하니 본국으로 돌아 오면서 목화씨를 얻어 가지고 와서 자기의 외삼촌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그것을 심었다. 처음에는 재배하는 방법을 몰라서 거의 다 말라 버리고 한 그루만 남았었는데 세 해만에 마침내 크게 불었다. 목화씨를 뽑는 물레와 실을 켜는 물레들은 다 정천익이 처음 만들었다. 신창이 임금이 되니 문익점은 좌사의 시학으로서 상소하여 학문을 하는 방도를 논의하였다. 그때 간관(諫官), 이준(李竣) 등이 개인의 토지를 다시 돌려 주어서는 안된다고 상소하여 논쟁하였다. 문익점이 이색(李穡), 이림(李琳), 우현보(禹玄寶) 등에게 의탁하여 병이라 칭하고 서명하지 않고 있다가 이튿날 빨리 서연에 나갔다. 대사헌 조준(趙浚)이 핵론하여 말하기를 “문익점은 본래 벼슬하지 않고 시골 진주에서 농사하던 사람으로서 전하께서 현량(賢良)으로 불러 간대부(諫大夫)를 임명하여 측근에 두고 자문을 돕도록 한 것이니 진실로 충성스런 말을 올리고 정치 상 방도를 진술하여 훌륭한 정치를 보좌하여야 할 것인데 날마다 경연에 나와서는 아첨으로 우물쭈물하여 충직한체 하면서 순순히 전하의 비위를 맞출 뿐이요 간곡하게 간하는 절조가 없이 굽실거리며 덮어 놓고 모두 ‘예! 예!’합니다. 요전에 동료들인 오사충(吳思忠)과 이서(李舒)는 각각 상소하여 현재 시국에 대하여 극력 논평하였으나 문익점은 받는 봉록을 잃어 버릴가 걱정하여 말 한 마디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또 동료들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토지제도를 통론하였으나 문익점은 권세에 아부하여 병으로 칭탁하여 출근하지 않고 그 논의에 참여하지 않아 여러 사람들의 비방을 피하기를 꾀함으로써 잘 된 계획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위으로는 전하께서 사람을 아시는 총명을 더럽히고 아래로는 선비들의 기대하는 뜻에 어그러지니 마땅히 그의 벼슬을 삭탈하고 제 고향으로 돌려 보내 말할 책임이 있고도 말하지 않는 자들의 경계로 삼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곧 문익점을 파면하였다. 그의 아들은 문중용(文中庸), 문중성(文中誠), 문중실(文中實), 문중진(文中晉), 문중계(文中啓) 등이 있었다. 또다른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편에 나와있는 문익점 졸기의 내용을 보자. " 전 좌사의 대부 문익점의 졸기. 전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 문익점(文益漸)이 졸(卒)하였다. 익점(益漸)은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사람이다. 아버지 문숙선(文淑宣)은 과거(科擧)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익점은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글을 읽어 공민왕 경자년에 과거에 올라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순유 박사(諄諭博士)로써 좌정언(左正言)에 승진되었다.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갑진년에 진주(晉州)에 도착하여 그 씨 반으로써 본고을 사람 전객 영(典客令)으로 치사(致仕)한 정천익(鄭天益)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천익(天益)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향리(鄕里)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 중국의 중 홍원(弘願)이 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木)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하였다. “오늘날 다시 본토(本土)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몇 일 동안을 대접한 후에 이내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1필을 만드니, 이웃 마을에서 전하여 서로 배워 알아서 한 고을에 보급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또 한 나라에 보급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니 홍무(洪武) 을묘년에 익점을 불러 전의 주부(典儀注簿)로 삼았는데,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가 졸(卒)하니, 나이 70세였다. 본국의 조정에 이르러 의사(議事)하는 사람의 말로써 참지의정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 강성군(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江城君)으로 증직(贈職)하였다. 아들은 세 사람이니 문중용(文中庸)·문중실(文中實)·문중계(文中啓)이다. 이 두 사료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목화씨 도입 당시의 드라마틱하면서도 극적인 목화씨 도입의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기록상으로는 고려사에서는 목화씨를 얻어 가지고 왔다고 하고 있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길가의 목면(木)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목화가 주위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당시 목화씨는 국경에서 삼엄한 감시를 하며 반출을 금했던 물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익점의 정치 생활도 우여곡절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기록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덕흥군에게 붙어 있었던 바 덕흥군이 패배하니 본국으로 돌아 왔다"는 내용에 대해 사실 관계를 살펴보자. 당시 문익점이 원나라로 갔을 때는 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인해 여몽 관계가 급속히 악화된 상태였다. 이와 더불어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자 원 정부는 공민왕을 폐하고 원에 와 있던 충숙왕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왕으로 책봉해 고려에 보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문익점 일행이 원나라로 출발한 시기와 덕흥군이 고려로 향한 시기가 같았다. 당시 원나라에 있던 고려 관리들은 공민왕과 덕흥군 중 한 명을 임금으로 선택해야 했다. 과거에도 원나라가 고려의 왕을 폐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왕을 세운 선례가 많이 있었다. 충선왕과 충숙왕, 충혜왕 등이 모두 원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다시 즉위했던 임금들이다. 이런 전례 때문에 문익점은 원나라에서 선택한 덕흥군이 승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덕흥군에게 붙어 벼슬을 받았다. 그 후속 조치로 원나라는 군사 1만을 보내 덕흥군을 받들고 고려를 치게 했는데 이 군사는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덕흥군이 패함에 따라 그에게 벼슬을 받은 문익점은 객관적으로 역신(逆臣)이 되었다. 그런데 문익점 일행은 무슨 언질을 받았는지 우두머리인 이공수(李公遂)와 함께 공민왕 13년 10월 고려로 귀국했다. 다행히 파면에 그치면서 목숨을 건진 문익점은 고향인 진주 강성현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목화 재배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천익이 장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사에는 외삼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정천익과 함께 목화를 시험재배 하는데 처음에는 재배법을 몰라 한 그루만 겨우 살게 되었다. 목화 재배에는 성공했으나 목화씨에서 실을 뽑는 법을 몰라 실생활에 접목되지 못한 상황에서 원나라 승려(湖僧) 홍원(弘願)의 도움으로 목화에서 실을 뽑는 물레를 만드는 방법을 전수 받아 전국적으로 전파된 것이다. 이런 과정에 따라서 백성들의 의복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목화는 당시 반출 금지 품목이 아니었고 그의 정치 행적도 후세에 바뀌게된다. 덕흥군에게 가담했던 문익점이 덕흥군에게 저항했던 것으로 바뀌게 된다. 덕흥군에게 저항하다가 미움을 사 강남에서 3년 동안 귀양을 사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 내용은 훗날 문익점의 후손들에 의해 이뤄것 같다. 순조 19년(1819) 후손 문계항(文桂恒) 등이 편찬한 (삼우당실기 (三憂堂實記)와 (정조실록)에 실린 전라도 유생 김상추(金相樞)의 상소문에서 문익점의 내용이 나타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문익점은 사명을 받들고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공민왕이 어둡고 포악스럽다고 원나라에서 장차 폐위시키고 새로 다른 임금을 세우려고 하자, 조칙(謂勃)을 받들 수 없다고 다투다가 드디어 검남(劒南)으로 유배 (流配)되었습니다. 3년 만에 비로소 돌아오게 되자 중국에서 목면(木綿)을 몰래 가져와 사람들에게 직조(織造)를 가르쳤으니, 백성들에게 이롭게 한 사실이 이와 같았습니다."라면서 고려사 내용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바뀌게 된다. 공민왕을 배반하고 덕흥군에 붙었던 내용이 공민왕에 충성을 바치다가 강남에 유배당하는 것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그와 함께 목화도 몰래 들여오는 것으로 바뀐다. 그리고 사전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적 태도를 보이다가 대신들의 상소를 받아 파면 당하는 내용도 없어지고 만다. 이처럼 문익점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오면서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문익점으로 인해 백성들의 의류 생활이 보다 윤택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고 그의 크나큰 공헌이다. 그에게 높이 평가할 것은 중국을 왕래하는 많은 다른 사람들도 수없이 보았을 목화를 보고 고국에서도 재배할 것을 생각해낸 탐구정신이며, 귀국을 하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도 목화씨를 가지고 와서 재배를 해서 성공한 과학적 사고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객관적인 공로를 주관적인 정치 논리에도 개입시켜 정치행적마저 바꾸어 버리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후손들이 문익점이 목화씨 도입으로 인한 공로외에 정치적으로도 완벽한 조상을 만들려고 했을까? 어쨌든 역사가 후세에 의해 자의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게되어 씁쓸하기만 하다. /출처: 세이클럽 역사동호회   
103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목화씨"가 호랑이를 먹어버리다... 댓글:  조회:4002  추천:0  2017-02-18
한반도 생태, 조선시대 크게 변화… 경작지 개발로 호랑이 살 곳 잃어 야생동물 수 줄고 가축 수는 증가, 급증한 소 때문에 전염병 돌기도 "과거 알아야 환경 위기 극복 가능"   조선의 생태환경사 김동진 지음 | 푸른역사 | 364쪽 |  "이제부터 한 사람이라도 호랑이 때문에 상하는 백성이 있다면 너희에게 죄를 묻겠다!" 1402년, 지방 수령들에게 호통을 치는 조선 태종의 목소리엔 위급함이 담겨 있었다. '마마' '전쟁'과 더불어 옛날 어린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던 '호환(虎患·호랑이에게 당하는 화)'은 국가 차원에서 대처해야 할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 경작지를 넓히려는 인간이 서식지를 지키려는 호랑이에게 역습당하는 사고가 수시로 생겨났던 것이다. 조선 왕조는 태종 때부터 착호갑사(捉虎甲士)라는 전문 군사를 양성해서 호랑이 잡기에 나섰다. 호랑이 입장에선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사실은 더 근본적인 변화가 함께 일어나고 있었다. 고려 말 문익점이 가져 온 목화씨 때문에 면포 수요가 늘어나면서 빈 땅들이 속속 밭으로 변신했다. 야생동물이 어슬렁거리던 냇가 무너미(범람원)는 15~16세기에 점차 경작지로 바뀌었고, 17~19세기엔 고산지대의 평탄지와 완경사 지역이 화전(火田)으로 개발됐다. 야생동물이 마음놓고 살 만한 곳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도 17세기 초까지는 전국에서 매년 1000마리 정도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할 수 있었다. 출산 주기와 증식률을 따져 계산해 보면 당시까지 호랑이와 표범은 4000~6000마리 정도 존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서 영조 즉위년인 1724년에는 각 군현에서 호피와 표피를 바치게 하던 제도를 폐지한다. 호랑이 수가 급격히 감소했다는 의미다. 호랑이 없는 골에 새로 왕노릇하는 동물도 출현하는데, 18세기 후반에는 주로 몽골 초원 지대에 살던 늑대가 한반도 곳곳에 많이 나타난다. 20세기 초 한반도의 호랑이는 약 20마리에 불과했고, 지금은 절멸했다.   20세기 초 조선 포수가 포획한 호랑이를 깔고 앉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조선왕조는 호환을 막기 위해 호랑이 사냥 전문가를 국가 차원에서 양성했고, 이는 호랑이 개체 수 감소의 한 원인이 됐다. /푸른역사 조선시대를 다룬 수많은 책 가운데서도 이 연구서는 무척 새롭다. 사람 대신 사람을 둘러싼 '환경'을 중심에 놓은 저작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사 연구로 한국교원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서울대에서 수의과학·역사학 학제 간 연구에 참여했고, 생태환경사로 연구 범위를 넓혔다. 그는 이 책에서 '한반도의 자연환경은 산업화가 시작된 20세기에 들어와 망가지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에 쐐기를 박는다. 이미 15~19세기 조선시대에 이 땅의 생태 환경이 급속한 변화를 겪었다는 얘기다. 사람 때문에 바뀐 환경은 또 다시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한번 환경이 바뀌면 이전과 같은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연구의 근거 중 대부분이 '기록의 왕국'이라 할 조선의 각종 문헌인 점도 흥미롭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공식 기록은 물론 '임하필기' '산림경제' '수운잡방' 같은 개인 저술이 다양하게 응용된다. 예를 들어 15세기의 임목 축적량(단위 면적당 살아있는 나무의 부피)을 추산하기 위해 저자는 '경국대전'을 조사한다. 관청인 사재감·선공감에서 1년에 거둬들인 땔감의 양과 이 관청들이 나무를 가꿔 벌채하던 시장(柴場)의 면적을 따지고 땔감 채취 주기를 60년으로 했다. 그 결과 임목 축적량은 1㏊당 600㎥ 이상이었던 것으로 계산됐는데, 2010년의 임목 축적량이 1㏊당 125㎥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풍성한 산림이 존재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이 1910년 조사에서는 15세기의 7% 수준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던 것이다. 환경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기도 했다. 야생동물의 개체 수가 줄어든 반면, 농사에 꼭 필요한 가축은 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조선 초만 해도 2만~3만 마리 정도였던 소는 16세기에는 40만 마리가 됐고, 17세기엔 100만 마리에 이르게 된다(2010년 현재 국내 소는 268만 마리). 소는 누가 키우나? 농민이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소는 부와 권력의 상징에서 보편적 농업의 동반자로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가축과 야생동물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미생물계에도 변화가 생겨나 전염병이 창궐하기도 했다. 소 때문에 번성한 홍역과 천연두는 숱한 인간을 고통에 빠뜨렸다, 저자는 기후변화, 종(種) 다양성의 감소, 바이러스 변이 등 현재의 환경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과거 생태 환경의 역사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 위기를 처음 만든 사람은 현대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 ▲  조선의 중농 정책으로 서식지가 줄어들면서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절멸의 길로 들어섰고 반대로 소의 수는 늘었다. 생태와 삶은 이렇게 맞물려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사진은 맹호도. 자료사진       조선의 생태환경사 / 김동진 지음 / 푸른역사  왕의 이름만 외던 역사 공부가 당대를 살아냈던 다양한 인물 군상으로, 다시 그 시대를 만들어낸 정치·사회 풍경을 재조명하는 방향으로 깊어졌고 넓어졌다. ‘조선의 생태환경사’는 정치·사회를 포괄하는 더 큰 개념인 ‘생태환경’의 관점으로 조선시대를 들여다보는, 깊고 넓어진 역사서다. 생태환경 관점으로 조선을 봐야 하는 이유는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공유된 역사 전통 중 대다수는 15∼19세기에 새롭게 창조된 기억”이며 “필요한 자원의 대부분을 주변 자연환경에서 얻어야 했던 사람들이 창조한 문화”가 생태환경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이다. 생태환경을 이해하면 조선을, 하여 오늘 우리 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태환경사를 통해 한국사회경제사를 재정립”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역사학자 김동진은 프롤로그에서 고려말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가 조선과 동아시아 역사를 바꾸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밝힌다. “바람이 잘 통하면서도 질긴 면포로 만든 옷”은 남자들의 활동성을 높였고, 바느질과 씨름하는 여자들의 노동시간을 줄였다. 돈 많은 자들은 기능성·보존성이 뛰어난 면포로 부를 축적했다. 면포로 더 넓고 큰 돛을 만들면서 조선의 배는 커졌고 해상교역을 확대했다. “일본과 여진은 국가적 자원이 된 조선의 면포를 구하는 데 사활”을 걸 정도였다. 여진과 일본을 제어하는 외교력의 원천은 면포였다. 면포 수요가 확대되자 한반도의 생태환경은 일대 변화를 맞았다. 하삼도의 산림지대 중 목화를 재배하기 적당한 곳은 모두 밭으로 바뀌었고, 함경도에서는 논에 목화를 재배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야생동물들은 서식처를 잃어버렸고, 이에 따라 사람·가축·야생동물의 접촉이 증가하면서 각종 전염병이 창궐했다. 목화씨로 인한 조선의 생태환경 변화 외에도 이제껏 몰랐던 숱한 비밀들이 ‘조선의 생태환경사’에 담겨 있다.  저자는 먼저 야생동물과 가축으로 조선의 생태환경을 조망하는데, 애초 한반도는 “범과 표범의 땅”이었다. 인간을 제외한 최상위 포식자로서 산천을 누빈 것이 범과 표범이지만 조선 개국 후 이들은 “절멸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조선은 “백성은 하늘이었고,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은 먹을거리”라는 인식을 실천하는 방편으로 “농사와 가축 사육이라는 생산경제 체제”, 즉 중농정책을 추진했다. 논밭 면적을 늘리면서 “황무지 혹은 산림천택”은 줄어들었다. 은거할 곳이 사라진, 하여 먹이마저 줄어든 범과 표범은 민가로 내려와 소 등을 잡아먹었다. 조선이 국초부터 포호(捕虎) 정책을 실행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범과 표범이 “죽어서 남긴 가죽”을 탐한 권세자들로 인해 산천을 주름잡던 두 동물의 절멸은 앞당겨졌다. 반대로 노동력의 상징인 소는 대폭 늘어났다. 15세기 초 2만∼3만 마리였던 소의 사육 마릿수는 18세기 후반 100만 마리 이상으로 늘어났다. 소의 증가는 농업의 변천사와도 밀접한데, 500년 조선의 생태환경은 물론 최근 구제역 사태에서 보듯 21세기 한국의 생태환경사에도 큰 영향을 준 셈이다.  생태환경의 변화는 곧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내포한다. 그런 점에서 한 장을 헐어 미시생태, 곧 우리 선조들의 먹거리 변화와 전염병 등의 양상을 다룬 것은 의미 있는 구성이다. 누룩과 김치, 간장과 된장, 고추장, 식초의 변화와 쓰임새, 그것에 얽힌 역사 인물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연이어 다룬 전염병도 관심을 둘 만하다. ‘무너미’ 땅 개간은 부작용도 상당했는데 습한 토양 조건에서 모기류가 집단 서식하며 말라리아를 일으켰다. 수인성 세균인 병원성 살모넬라균과 시겔라균은 장티푸스와 이질의 발병률을 크게 높였다. 가족과 진배없었던 소는 홍역과 천연두를 사람에게 옮겼는데, 기록에 따르면 숙종 33년 함경도에서만 홍역으로 “1만 수천 명”이 죽었다. 이처럼 생태환경의 변화는 인간을 포함해 생명이 있는 모든 생물에 크고 작은 이익과 손해를 주었다. 기록을 꼼꼼히 살펴 생태환경을 통해 우리 삶에 직접 영향을 주고 있는 조선의 실제 풍경을 소개하고 있어 ‘조선의 생태환경사’는 여타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책임에 틀림없다.  /장동석 출판평론가
1038    세계 유명인들의 墓碑名 댓글:  조회:3723  추천:0  2017-02-18
세계 유명인들의 묘비명(墓碑名)       조지 버나드 쇼(극작가, 1856~1950)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어니스트 헤밍웨이(소설가, 1899~1961)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             벤자민 프랭클린(정치인, 1706~1790) 출판업자 벤 프랭클린의 시신이 여기 벌레의 먹이로 누워 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늘 새롭고 더 우아한 판으로 개정될 것이기 때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화가 / 조각가, 1475~1564)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 것만이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것.                 에이브러햄 링컨(정치인, 1809~1865)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영원할 것이다.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교육가, 1745~1827) 모든 일을 남을 위해 했을 뿐 그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노스트라다무스(철학자, 1503~1566) 후세 사람들이여! 그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시오.           토머스 에디슨(발명가, 1847~1931) 상상력, 큰 희망, 굳은 의지는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 것이다.       앤드루 카네기(기업인, 1835~1919)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들을 곁에 모으는 기술을 가졌던 사람이 여기 잠들다.                 프리드리히 니체(철학자 / 시인, 1844~1900) 이제 나는 명령한다. 자라투스트라를 버리고 그대 자신을 발견할 것을..               스탕달(소설가, 1783~1842)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기 드 모파상(소설가, 1850~1893)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조봉암(독립운동가,1898~1959) 우리가 독립 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호머 헐버트(사학자, 1863~1949)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윌리엄 포크너(작가, 1897~1962) 나의 야심은 역사에 묻혀 없어진 한 사람의 개체로 남는 것이다.                     로널드 윌슨 레이건(정치인, 1911~2004) 옳은 일은 언제나 궁극적으로 승리한다.                 프랑수아 모리아크(소설가, 1885~1970) 생은 의미 있는 것이다. 행선지가 있으며 가치가 있다.                 마타하리(스트립 댄서 / 스파이, 1876~1917) 마르가레테 게르투르드 젤러(마타하리의 본명)                 르네 데카르트(철학자 / 수학자, 1596~1650) 고로 여기 이 철학자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셔우드 앤더슨(소설가, 1876~1941) 죽음이 아니라 삶이야말로 위대한 모험이다.                         키에르케고르(종교철학자, 1813~1855) 잠시 때가 지나면 그때 나는 승리하고 있으리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시인, 1875~1926) 오 장미여!  순수한 모순의 꽃                 프랭크 시나트라(가수 / 영화배우, 1915~1998) 최상의 것은 앞으로 올 것이다.                 칼 마르크스(작가, 1818~1883)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토머스 제퍼슨(정치인, 1743~1826) 독립선언문의 기초자,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의 기초자.           조지 고든 바이런(시인, 1788~1824) 그러나 나는 살았고 헛되이 살지 않았다.           베네딕트 드 스피노자(작가, 1632~1677) 신에 취한 사람 스피노자.           프란시스 베이컨(화가 1909~1992) 아는 것이 힘이다.                 장 드 라퐁텐(시인 / 동화작가, 1621~1695) 장은 밑천과 수입을 모두 탕진하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갔노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시인, 1865~1939) 삶과 죽음에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마부여, 지나가라!                 프란츠 피터 슈베르트(작곡가, 1797~1828) 음악은 이곳에 소중한 보물을 묻었다.                 프란츠 카프카(소설가, 1883~1924) 내면을 사랑한 이 사람에게 고뇌는 일상이었고 글쓰기는 구원을 향한 간절한 기도의 한 형식이었다                           에밀리 디킨슨(시인, 1830~1886)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디오판토스(그리스 수학자, 246?~330?) 보라! 여기에 디오판토스 일생의 기록이 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작곡가, 1756~1791) 우리는 묘비명이 아닌 음악으로 위대한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기억한다 .               프랑수아 비용(시인, 1431~1463?) 아무 쓸 데도 없는, 머리가 돈 부랑자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대지에 몸을 되돌렸다.         라파엘로 산치오(화가 / 건축가, 1483~1520) 여기는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워 떨게 만든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마케도니아의 왕, BC 356~BC 323) 용기 있게 살고 영원한 명성을 남기고 죽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도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극작가 / 시인, 1564~1616) 여기 묻힌 유해가 도굴되지 않도록 예수의 가호가 있기를..           아서 코난 도일(소설가, 1859~1930) 강철처럼 진실하고 칼날처럼 곧았다.           엘리자베스 1세(잉글랜드의 여왕, 1533~1603) 오직 한순간만 나의 것이었던 그 모든 것들..                 게일 보든(발명가, 1801~1874) 나는 시도하다 실패했다. 그러나 다시 또 다시 시도해서 성공했다.                   모리야 센얀(일본 선승) "내가 죽으면 술통밑에 묻어줘, 운이 좋으면 술통바닥이 샐지도 몰라"                 청화 스님 (1924~2003) “사람들은 이 몸이 한낱 허깨비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절제하고 줄이지 않으면 행복과 평화란 없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노스트라다무스- 후세 사람들이여, 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시오"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니콜라이 고골리(러시아의 문호) 고골리는 죽었다. 그는 러시아인이었다. 그 손실이 너무 잔인하고 갑작스러워,우리는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르네 데카르트- "고로 이 철학자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모파상(프랑스 소설가) "나는 모든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바이런(18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그러나 나는 살았고, 헛되이 살지 않았다."     박인환(시인)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것"       블레즈 파스칼- 근대 최고의 수학자, 물리학자, 종교철학자인 파스칼     아르키메데스- "내 묘비는 원기둥에 구가 내접한 모양으로 세워달라."     아펜젤러-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에디슨(발명왕) 상상력, 큰 희망, 굳은의지는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것이다."     이소룡- 브루스 리. 절권도의 창시자.     이순신(장군) 필생즉사(必生卽死), 필사즉생(必死卽生)"     임마누엘 칸트- 생각하면 할수록  날이가면 갈수록, 내 가슴을 놀라움과 존경심으로 가득채워주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속 도덕률이다"     조병화(시인)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중광스님- "에이, 괜히 왔다"     프랑스와 모리악(프랑스 소설가) "인생은 의미있는것이다. 행선지가 있으며 가치가 있다."     미셸 투르니에 - 내 그대를 찬양했더니 그대는 그보다 백 배나 많은 것을 내게 갚아주었도다.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 -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최영 - 위엄을 떨쳐 나라를 구할 때 백발이 성성했구나.     라울 발렌버그 - 날씨가 좋을 때는 친구가 많고 하늘에 구름이 끼면 혼자일 것이다.     데보르드 발모르 -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네.     한니발 - 그의 강철의지 앞에서는 높은 산도 몸을 낮춘다.     토마스 에디슨 - 상상력, 큰 희망, 굳은 의지는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 것이다.     로버트 에반스 - 잘 사는 것이 최상의 복수이다.     게일 보든 -  나는 시도하다 실패했다. 그러나 다시 또 다시 시도해서 성공했다.       허목 - 말은 행실을 덮어주지 못하였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했도다.     미셀 투르니에- 내 그대를 찬양했더니 그대는 그보다 백 배나 많은 것을 내게 갚아주었도다. 고맙다 나의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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