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2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방문자

홈 > 보물 + 뒷간

전체 [ 3117 ]

917    훌륭한 그림을 그리려면 훨씬 더 많은 습작을 해야 한다... 댓글:  조회:5467  추천:0  2017-01-02
1888년 12월 23일 밤 반 고호가 자신의 귀를 잘라야만 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날 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일까? 1.사랑하던 여인과의 관계에서? -너무도 사랑했던 그녀에게 줄 것이 없어 고민하다가  아침마다 자신에게 아름다운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려주는  귀라도 잘라서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좋아하던 그녀가 볼품없이 생긴 고흐의 얼굴 중에서  그나마 잘 생긴 부분은 귀라고 했기 때문에. -사랑했던 그녀가 자기를 사랑한다면 귀를 선물해 달라고 했기 때문에. -투우사가 소와의 싸움에서 이긴 뒤, 그 소의 귀를 잘라  사랑하는 여인이나 아름다운 여인에게 바치는 풍습을 생각하고  소가 아닌 자신의 귀를 잘라 그녀에게 주고 싶었기 때문에.  (고흐의 일생에 고흐와 개인적인 관계로 등장하는 여인은 다섯이다.   첫째는 영국에서 로이어 부인 집에 하숙하여 살 때 그 부인의 딸이었던  열아홉 살 바기 외제니 우르술라였다. 당시 고호는 스무 살이었다.  고흐가 그녀에게 청혼했는데, 이미 숨겨 둔 약혼자가 있다고 응답했던 여자.  둘째는 1881년-고흐 나이 28세 때- 만났던 큰 아버지 스트리커라는 목사의 딸 케이.  남편과 사별한 처지에서 고흐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던 여인,  고흐와 만날 때는 이미 8살된 아들이 있던 그녀,  끈질긴 구애와 편지들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었고,  이에 암스텔담으로 찾아갔을 때 목사님을 통해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는 쪽지만으로 응답을 건넸고  이에 고흐가 석유 램프 속에 자신의 손을 넣으며  '제 손이 이 뜨거움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간만큼 이라도' 만날 수 있기를 갈망했고,  또 그녀가 나타나지 않으면 손 뿐 아니라 온 몸을 태워버리겠다고 했음에도  끝내 화상만을 입고 돌아서야 했던 여인.  셋째는 매춘부였고 이름은 크리스틴 클라지나 마리아 후르닉,  고흐는 그녀를 시엔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고흐가 그녀를 만났을 때 이미 3살이나 연상이었고  다섯 살 난 딸이 있었으며 또 임신 중이기도 했다.  알콜 중독에 성병을 앓던 여인.  그럼에도 고호의 모델이 되어주었고, 위로가 되어 주었으며,  생리적 욕구의 해결사이기도 했던 여인.  고흐는 두 아기의 엄마이기도 했던 그녀와 한 동안 동거하였다.  고흐는 그녀에게서 성병을 옮아 한 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생 테오를 비롯한 주변의 압박과 입 하나라도 줄여야 할 현실적인 가난,  그리고 그녀의 게으르고 문란한 생활,  돈 문제로 그녀의 동생이 고흐에게 폭행을 가하는 등  여러 가지가 겹친 복합적인 이유로 끝내는 그녀를 버려야만 했었다.   넷째 여자는 누에넨에서 만난 이웃 섬유공장 주인의 딸이었던 마호르트. 고흐보다 10살이나 많은 41세의 노처녀였다. 고흐의 집에서나 고호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마호르트의 가족의 반대로 마호르트가 정신 불안을 얻게 되었고 이에 곤란한 입장이 되었던 처지. 결국 그녀가 자살 소동을 부렸고 이에 대한 온갖 비난이 고호에게 쏟아져 비극으로 막을 내려버린 사랑 아닌 사랑. 다섯 째는 술집여자 라셸-라헬이라 발음하는 것이 더 낫다. 사실 같은 이름이다. 이 라헬이라는 이름에 관하여는 마태오 복음 2장 18절의 '자식 잃고 슬피우는 라헬'이라는 귀절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1888년 12월 23일 밤 11시 30분경 고흐가 '조심해서 다루라' 하면서 귀를 잘라 건네주었던 라마르틴 광장의 술집 여자였고 창녀였다.) 2.잠시 함께 살던 고갱과의 관계에서? -고갱과 말다툼을 하다가 고갱에게 심한 말을 들었고  그런 말을 들은 자신의 귀가 저주스럽다고 여겼기에. -고갱이 다툼 끝에 집을 떠나자 그 고갱을 죽이고 싶도록 미웠는데  떠나버린 고갱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생각 끝에 자신의 분을 못 이겨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아를이라는 곳에  여러 화가들을 초대했으나 이에 고갱만이 응답하여 같이 지내게 되었고,  얼마가 흐른 뒤 고갱과의 다툼 끝에 고갱마저 떠나려 하는 것을 듣고  자기의 진심을 너무도 몰라준다는 심정을 결국 자해로 표현해 낸 것. -고갱이 다툼 끝에 자기를 피하고 계속 만나주지 않으니까 화가 나서. -고갱과 다투었고, 그로 인해 고갱이 떠나겠다고 하자  또 다시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남겨주게 될  고갱과의 이별이 두려웠고 그 이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고갱과의 다툼 끝에 고갱을 면도칼로 죽이려고 덤볐으나  이에 실패하고 분함을 참을 길 없어서. -사실 고흐 자신이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 것이 아니다.  고갱과의 싸움 끝에 고갱이 옆에 있던 펜싱 검을 들어 자른 것이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고갱이 떠나버린 뒤 자신의 물건을 보내 달라고 했을 때,  펜싱 검만이 없고 마스크와 장갑이 있었는데 이는 고갱이 자신의 행실을 은폐하기위해  사고 직후 펜싱 검을 챙겨 떠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3.그림을 그리다가? -자화상을 그리던 중  자신의 귀가 잘 안 보이고 그림으로서 잘 포착이 되질 않아서. -자화상을 그리던 중 귀 부분이 이상하다는 고갱의 지적에  귀 부분을 계속 고쳐도 잘 되지 않았고, 이에 실제 귀를 잘라 그림과 맞춰 보느라고. 4.병적인 이유로? -귀 울림증을 오래도록 앓던 중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흐는 알콜 의존증이 있었다.  압생트(absinthe)라는 독한 술을 즐겨 마셨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고흐는 술에 취해 일시적인 환각 상태에서 귀를 잘랐다. 5.심리적인 이유에서? -추락을 두려워하는 비행기 조종사가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길 중에 하나가  그 비행기를 스스로 추락시켜 버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처럼,  처절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야 말 것 같은 자신의 추락이 두려워  스스로 자신을 추락시켜 버리기 위해. -그림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으나 끝내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그림,  그리고 동생에게 계속 생활비를 받아 연명해가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뭔가 색다른 돌파구를 마련하고픈 결심과 심정의 표출로서. 6.성서적인 근거에서? -일찌기 목사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고,    전도사로도 활약했던 고호의 과거를 볼 때   고흐가 성서를 익히 주지하고 있었음은 자명하다.   고흐는 비탄과 고독의 게쎄마니 동산에서   어느 날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무리들 중 하나인 말코스의 귀를   제자인 베드로가 칼로 내리쳐 잘라 버렸으나   이를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셨음을 상기했고   (참조.요한18,10 마태26,52 마르14,47 루까22,51),   자신의 비참하고 외로운 처지가 예수님과 같다고 여겼고   이를 구해 주실 분은 진정 예수님뿐이라고 생각했기에. /Posted by 벤지 =========================== 고흐가 귀를 자른 이유에 대해....   정확한 것(정설)은 없습니다. 1.제일 신빙성이 없지만 가장 많이 듣게되는 이야기 ▷ 자신의 자화상을 본 고갱이 귀가 비뚤어지게 그려졌다고 하니까, 아예 자신의 귀를 잘라 버렸다는 설. 2.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 ▷ 고갱과 그림에 대한 이견차이,또는 고흐가 생각했던 아뜰리에 파라다이스에 대한 것을 고갱이 무시하여 큰 마음의 상처를 받고, 분노하여 잘라 버렸다는 설. 3. 더러 평론가들이나 서적들에서 나오는 새로운 이야기 ▷ 귀를 자른 무렵은 이미 고갱이 아를을 떠나고 난 뒤여서, 소외감에 대한 폭팔과 자괴감에서 잘랐다라는 설. (여기서의 소외감은 파리의 인상파 화단이기도 함.) 4. BBC 다큐에서 가상해 본 의외의 이야기 ▷ 고갱이 아를에 왔을 때, 그림에 대하여 심하게 격론을 나눌 정도의 분위기는 아니었고, 고흐가 아뜰리에 집세를 반분하자고(이것은 사실 아를에 죽 머물러달라는 제안이기도 했슴.) 했더니 짠돌이(?) 고갱이 놀라 거부하였고, 이에 대한 실망감에 격론에 이어 잘라 버렸다는 설. -여기에 일반적으로는 자른 귀를 손수건에 싸서 동네 여인(창녀로 알려진)에게 주었다고 알려졌지만 이것 또한, 최근에는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로 거듭 확인되고 있다합니다. =========================== 반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정신적인 발작 때문에 귀를 잘랐다고 보는 견해와 귀를 잘랐기 때문에 발작이 시작되었다는등 걷잡을수 없는 해석과 평가가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고갱과 관련이 있다는점이다. 여기에 덧붙일수 있는것은 이미 그에게는 귀를 자를수 있는 요인이 압생트를 통해서 몸에 배어 있었으며 그것도 그의 독자적인 예술을 탄생시킨 찬란한 노란색 빛깔을 얻기 위한 노력의 부산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반 고흐가 진술한 발작시의 증상들과 압생트에 관한 많은 의학 정보를 감안하면 그의 발작에 압생트가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알수 있다. 그가 압생트를 마시기 시작한것은 파리 몽마르트에 있을때부터였는데 아틀리에서 만난 툴루즈 로트레크가 고흐를 데리고 술 마시려 다니곤 했다. 압생트에 중독되면 그 증상중 하나로 청각적인 환각, 즉 환청과 시각적인 착각, 즉 착시 현상이 나타난다. 또 압생트 중독자는 성격이 혼란해진다.흥분, 권위적 태도 분노등이 나타나 그 성격이 변하는것을 볼수 있다. 또 일단 발작이 일어나면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끼게 되고 이 공포에서 탈피하기 위해 거칠고 격렬한 공격적 충동을 느껴 남을 해치고 심한 경우에는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서슴치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 압생트 중독시에는 이러한 살인적 공격성이 스스로에게 향하는 경우도 있는데 반 고흐가 고갱을 공격하는 대신 자기 귀를 자른것도 압생트의 급성 중독으로 인한 발작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1874년 1월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 고흐는 이렇게 말한다: “산책을 자주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다”(13쪽).   1882년 10월 2일의 편지에서 반 고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자연을 사랑하기 때문에 원칙부터 틀린 그림, 거짓된 그림, 왜곡된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더 차원이 높고 더 훌륭한 그림을 그리려면 훨씬 더 많은 습작을 해야 한다”(80쪽). 반 고흐에게 그림이란 무엇인가? 그의 말을 들어 보자. “그림이란 게 뭐냐? 어떻게 해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까? 그건 우리가 느끼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서 있는 , 보이지 않는 철벽을 뚫눈 것과 같다. 아무리 두드려도 부서지지 않는 그 벽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인내심을 가지고 삽질을 해서 그 벽 밑을 파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럴 때 규칙이 없다면, 그런 힘든 일을 어떻게 흔들림 없이 계속해 나갈 수 있겠니? 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일은 분명한 의지를 갖고 있을 때 이룰 수 있다. 결코 우연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1882년 8월 22일, 93쪽).   반 고흐는 예술가의 성실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돈 버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세가 그 목적에 가장 빨리 도달하는 지름길이 아니겠니. 참되고 가치 있는 작품을 그리는 게 가장 기본이 되는 거니까. 그렇게 되려면 작품이 팔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작업할 것이 아니라, 작품에 정말 훌륭한 어떤 것이 들어 있어야 할 테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정직한 탐구가 필요할 것이다”(79쪽). “노력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절망에서 출발하지 않고도 성공에 이를 수 있다. 실패를 거듭한다 해도,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해도, 일이 애초에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돌아간다 해도, 다시 기운을 내야 한다”(91쪽).   1883년 8월에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반 고흐는 이렇게 말한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그것이 문제는 아니니까. 그러나 될 수 있으면 정기적으로, 집중하면서, 핵심에 접근해서, 완벽한 평온과 안정 속에서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99쪽). 같은 편지에서 그는 화가로서의 책무감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나는 이 세상에 빚과 의무를 지고 있다. 나는 30년간이나 이 땅 위를 걸어오지 않았나! 여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림의 형식을 빌어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다. 이런저런 유파에 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남기고 싶다. 그것이 나의 목표다. 이런 생각에 집중하면 해야 할 일이 분명해져서, 더 이상 혼란스러울 게 없다. 요즘은 작업이 아주 느리게 진행되고 있으니, 더욱더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겠다”(99쪽).   반 고흐에 따르면 “진정한 화가는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 화가의 영혼과 지성이 붓을 우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붓이 그의 영혼과 지성을 위해 존재한다.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그를 두려워한다”(1885년, 134쪽).   그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예술가가 되려는 생각은 나쁘지 않다.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억누를 수는 없지. 소망하는 것을 터뜨리기 보다는 태워버리는 게 낫지 않겠니.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157쪽). 그는 친구 안톤 반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1884년 3월)에서 예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술은 우리의 기술, 지식, 교육보다 더 위대하고 고차원적인 것이라는 인식 말일세. 예술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단지 손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네. 더 깊은 원천에서, 바로 사람의 영혼에서 솟아나온 것 아닌가”(113쪽).   아래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음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을 달래주는 어떤 것을 그리고 싶다. 그리고 영원에 근접하는 남자와 여자를 그리고 싶다. 옛날 화가들은 영원의 상징으로 인물 뒤에 후광을 그리곤 했는데, 이제 우리는 광휘를 발하는 선명한 색체를 통해 영원을 표현해야 한다”(207쪽). “나는 늘 두 가지 생각 중 하나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는 물질적인 어려움에 대한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색에 대한 탐구다. 색채를 통해서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208쪽). “너 하나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전체 그림을 보게 된다면, 그래서 그 그림 속에서 마음을 달 래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 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1889년 1월). “그래, 내 그림들, 그것을 위해 난 내 생명을 걸었다”(306쪽) ==================================   고갱과 공동생활을 하던 중 다툼이 있었고 그 와중에 자신의 귀를 자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신경증과 발작증세에 대한 이야기도 있더군요. 이에 대한 글을 아래에 첨부합니다. 참고 바랍니다. ^^  그는 1853년 3월 3일 네덜란드의 브라반트 지방의 한 가난한 마을 그로트 춘데르트(Groot Zundert)에서 태어났다. 16세 때에 백부의 소개로 하아그에 있는 화구상의 점원이 되어 그림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러다가 목사의 아들이라는 가정 환경의 영향과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 하는”(고흐 자신의 말) 종교적 정열에 불타 단기 목사 양성소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 한때 벨기에에서도 가장 비참한 탄광촌인 보리나쥬를 무대로 헌신적인 전도에 몰두한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천부의 재질(현재 남아 있는 그의 최초 데생은 9세 때의 것이다.)을 숨길 수 없었던 고흐는 화가가 되기를 결심한(1880년) 후, 브뤼셀을 거쳐 1881년 봄에 에텐의 부모 곁으로 돌아온다. 그 무렵 사촌뻘 되는 케이 포스에게 구혼했다가 깊은 사랑의 상처를 입고 집을 뛰쳐나온 그는 헤이그에서 그림 공부를 계속한다. 그 곳에서 우연히 밤거리의 창녀 크리스틴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를 모델로 해서 그린 누드 데생 은 “버림받은 인간에 대한 애절한 공감”을 표현한 매우 감동적인 작품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1883년 말경부터 1885년 11월 파리로 떠나기까지 약 2년 동안 그는 무려 유화 2백 점, 데생 2백50점을 남기는 본격적이며 열띤 작품 제작에 몰두한다. 이른바 ‘네덜란드 시대’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은 이 시기에 그려진 고흐의 리얼리즘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후 파리에서 화상으로서의 기반을 갖고 있던 동생 테오도르의 도움으로 코르몽 화실에 출입하면서 툴루즈 로트렉·피사로·드가·쇠라·고갱 등의 인상파 화가들과 친교를 맺게 된다. 이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이전의 어두운 화면이 갑자기 점묘풍(點描風)의 밝은 색채로 바뀌게 되고, 1888년 2월 남프랑스의 아를르로 옮겨간 뒤부터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확립해 나간다. 등은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 해 10월, 고갱이 와서 공동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견해와 작풍이 판이하게 서로 달랐던 두 사람은 잦은 성격의 충돌로 상호간의 우정이 깨어져, 마침내 고흐가 면도칼을 휘두르며 고갱을 죽이려고 쫓다가 오히려 자기의 귀를 잘라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소동을 벌인다.  아무튼 이 ‘귀 자르기 사건’을 계기로 고흐와 고갱은 헤어지게 되고 그 후 신경증의 발작 증세가 악화되어 아를르의 시립병원을 거쳐, 1889년 5월 생 레미에 있는 생 폴 요양원에 들어가게 된다. 요양 생활을 하면서도 작품 제작에 왕성한 의욕을 보여 등 1백50여 점을 그렸다. 그는 생 폴 요양원으로부터 야외 제작을 때때로 허가받기는 했으나 점점 그 곳이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느껴졌고, 그래서 사랑하는 동생 테오가 있는 파리, 꼭 파리가 아니더라도 그 근방의 시골로 자리를 옮기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흐는 파리 북쪽 34킬로미터 떨어진 조용한 시골 마을 오베르 쉬르 우와즈(Auver Sur Oise)에 사는 의사 가셰 박사의 손에 넘겨지게 된다. 그러나 고흐는 이 완성된 지 얼마 안되는 1890년 7월 27일 오후, 오베르 성에 올라가 끝없이 펼쳐진 보리밭을 보면서 자신의 가슴에다 권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뒤 “아 내 작품들, … 난 거기에 내 인생을 걸었었지. … 그러다가 내 정신이 거의 다 결딴났어. … 테오, 난 지금 죽었으면 좋겠구나”(어빙 스톤, 《빈센트 반 고흐》라고 나직하게 중얼거리다 두 눈을 영원히 감았다.  여러 차례에 걸친 신경증의 발작과 요양 생활, 특히 ‘귀 자르기 사건’과 ‘권총 자살’로 마감한 고흐의 비극적 생애에 대해서, 범속한 ‘정상인’들은 한편의 광인의 드라마쯤으로 쉽사리 간주해 버린다. 그리고 동생 테오와 가셰 박사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없었던들 광인인 반 고흐가 그 많은 작품들을 제작할 수 없었으리라 단정한다 ///건강정보나눔터 ========================================================   유명한 화가중에 귀가 잘린 일화를 가지고 있는 화가가 있죠? 바로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인데요. 이 화가는 생전에 남긴건 그림과 편지뿐입니다. 또한 무수한 일화도 있는데요. 그 중 귀를 잘른 고흐의 일화에 대해서 알려드릴게요.    "보물처럼 잘 가지고 있어 달라." 이 말과 함께 자신의 귓볼을 잘라서 매춘부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거론되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귀를 왜 잘랐고, 어떻게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단지 고흐가 귀를 잘라 매춘부인 라셸에게 직접 선물했다는 갖가지 추측만 돌고 돌 뿐입니다. 그런데 지난 12일 영국 BBC방송과 일간지 가디언이 고흐의 귀 사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네덜란드의 반 고흐 미술관이 고흐의 귀에 대해 중요한 단서를 담은 의사 펠릭스 레의 편지를 공개했던 것인데요. 펠릭스 레는 고흐의 귀 사건이 있던 1888년 당시 그 상처를 치료했던 의사였습니다.    레 박사의 편지는 1930년대까지 미국 작가 어빙스톤과 주고받았던 내용 중 일부로, 미국의 한 대학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가 최근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편지에는 고흐가 귀를 자르기 전, 후의 모습이 설명과 함께 그림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고흐의 귀는 귓볼 일부분만 남은 채 귀 대부분이 잘려 있었는데요. 이 뿐만이 아닙니다. 고흐가 귀를 선물한 여성 라셸의 직업이 그간 알려진 매춘부가 아닌 매음굴의 청소부였다는 추정도 제기 됐습니다.  박사의 편지를 제일 먼저 발견한 전직 미술교사 출신의 머피는 라셸의 본명이 가브리엘인 사실을 알아냈고 그녀의 유족을 추석한 결과 가브리엘은 당시 관경병에 걸린 개에게 물려 병을 앓고 있었고, 치료비 마련을 위해 매음굴 청소를 했던 것입니다. 머피는 고흐가 절박한 사정에 빠진 그녀를 도우려고 스스로 귀를 자른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반고흐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 대단히 감정적이 됐던 인물인데, 마땅히 도울 돈이 없었던 고흐는 그녀에게 선물로 자신의 살을 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희대의 명화들을 남겼던 반 고흐. 귀에 얽힌 일화를 포함해 여전히 쉽게 이해되지 않는 천재 화가의 삶은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큰 궁금증으로 남아 있습니다.  [출 반 고흐, 귓불 아닌 귀 전체 잘린 의사의 스케치 발견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프랑스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자신의 귓불을 잘라내 매춘부에게 줘버렸다는 이야기는 광기에 스러진 천재 예술가의 말년을 보여주는 일화로 종종 거론되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가 이제까지 알려진 대로 귓불 일부가 아닌 왼쪽 귀 전체를 잘라냈음을 보여주는 기록을 새로 공개했다고 영국 BBC 방송, 일간 가디언 등이 12일(현지시간) 전했다.   공개된 기록은 사건이 일어난 1988년 당시 반 고흐를 치료한 의사 펠릭스 레의 편지 내용이다. 1930년대까지 레 박사와 연락하고 지냈던 작가 어빙 스톤이 소유했던 것으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뱅크로프트 도서관에서 발견된 것. 레 박사는 편지에 반 고흐가 잘라내기 전후의 귀 모습을 그려놓았다. 이 그림을 보면 고흐는 귀 일부만 잘라낸 것이 아니라 귓불의 작은 일부분만 남긴 채 대부분을 잘라낸 것. 또한 반 고흐가 잘라낸 귀를 건넨 여성인 ‘라셸’은 그간 알려진 것처럼 매춘부가 아니라 사창가에서 청소 일을 하던 하녀였다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박사의 편지를 발견한 전직 미술사 교사 버나뎃 머피는 본명이 가브리엘인 이 여성의 유족을 추적해 반 고흐가 이 여성을 도우려는 생각으로 잘라낸 귀를 건넨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이 여성은 당시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린 상처로 고생하고 있었으며 치료비 마련을 위해 사창가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던 여성이다. 머피는 “반 고흐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 대단히 감정적이 됐던 인물”이라며 “그 여성에게 선물로 살을 주기를 원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반 고흐 미술관은 이 편지와 반 고흐가 그린 레 박사의 초상화, 반 고흐가 자살할 때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권총 등을 오는 15일부터 9월 25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다. [출처=캘리포니아대학교 홈페이지] /김상민기자처] 빈센트 반 고흐 귀 :: 귀가 잘린 일화는?|작성자 그린나무   ======================================  
916    그림을 상상으로 그린다? 그림은 고통속의 기억으로 그린다! 댓글:  조회:4630  추천:0  2017-01-02
후원자인 동생 테오의 약혼 소식이 ‘방아쇠’였다는 주장 나와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사진=BBC 동영상 캡처)   1888년 12월 23일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 도시 아를르의 추운 겨울날 저녁, 빈센트 반 고흐가 작은 책상위에 놓아뒀던 면도칼을 들고 왼쪽 귀를 잘라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광기, 음주문제, 폴 고갱과의 다툼 그리고 어머니에게 응석부리고 싶은 욕망 등 여러 가설들이 있지만 그가 ‘결혼식의 종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나왔다고 CNN이 1일 보도했다. 반 고흐는 그의 동생 테오가 결혼하게 된다는 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은 뒤 정신 분열 상태에 빠져 귀를 잘랐다고 미술전문가 마틴 베일리씨가 그의 책 “남쪽의 화실 : 프로방스의 반 고흐(Studio of the South: Van Gogh in Provence)”에서 주장했다.  “정신분열로 빠져들게 한 방아쇠(trigger)는 공포였다. 감정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버려진다는 데 대한 공포였다”고 저자인 베일리씨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반 고흐가 ‘귀 사건’이 벌어진 후에 동생의 약혼소식을 알게된 것으로 보고 이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CNN은 전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해 “결혼 소식이 그 날 확실하게 전달됐다”고 말했다.    “단서들을 함께 고려해야 할 문제다. 우리는 그 편지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반 고흐가 다음해 1월에 보낸 편지에서 (1888년) 12월 23일에 그의 동생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언급했다”고 그는 말했다. 베일리씨는 돈이 반 고흐의 동생 테오가 미술상인 조안나 본거와 약혼했다는 소식과 함께 전달됐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반 고흐 학자들이 놓친 것이 약혼녀가 12월 23일에 그녀의 오빠 헨리로부터 축하 전보를 받았다는 사실”이라며 테오가 그 이틀전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의 형에게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해듣지 않도록 소식을 전하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 고흐는 테오가 결혼하면 자신과 사이가 벌어지고 가족 부양의 압력때문에 자신에게 돈을 덜 보내게 될 것이라고 절망했을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더 깊이는, 아마도 질투의 요인이 있었을 수 있다 ; 테오는 사랑을 찾는데 성공한 반면 빈센트는 오래 지속되는 인간관계를 갖지 못했다”고 베일리씨는 책에 썼다.  이 책은 반 고흐가 프랑스 남부지방에 있는 아를르에서 자신이 ‘노란 집’이라고 부른 곳에 살면서 ‘밝은 색깔’에 매료되기 시작한 시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귀 사건’에 대해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 포함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말했다. 반 고흐는 1888년 12월 23일 밤 자신의 귀를 자른 뒤 이를 신문지로 싸서 들고 베레모를 쓴 채 근처의 사창가로 갔다. 거기에서 최근에 ‘가브리엘르 베를라티에’로 밝혀진 젊은 여성을 만나서 잘린 귀를 건넸다.  베를라티에가 잘린 귀를 보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자 반 고흐는 달아났고 뒤이어 벌어진 혼란이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됐다. 베일리씨는 반 고흐 자신은 이 사건을 “예술가의 단순한 광란”으로 묘사했을 것이라며 귀를 자르면서 동맥이 상해 피를 많이 흘렸을 것이고 고열도 앓았을 것이라고 썼다. 그는 동생의 결혼 소식이 반 고흐를 극단적 행동으로 몰고갔지만 유일한 촉매제는 아니었다고 CNN에 말했다. “반 고흐의 의학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쟁이 있다. 결혼은 방아쇠였을 뿐이다”고 저자는 말했다.  반 고흐를 당시 치료했던 의사는 이 예술가가 간질을 앓고 있다고 믿었으며 최근 전문가들은 압쌍트(프랑스 술) 중독, 정신 분열, 일사병 등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합의되지는 않고 있다고 CNN은 전했다. 또 자해행위는 이 예술가가 보낸 구조요청이었을 수도 있다고 CNN는 추정했다. 반 고흐의 치료기록들을 논의하는 1893년의 한 편지에는 이 네덜란드 인상파 화가가 “환청의 희생자”라는 언급이 있다고 베일리씨는 말했다. 그가 귀를 자른 것은 이 소음들을 꺼보려는 헛된 시도였을 수도 있다고 CNN는 덧붙였다.   반 고흐가 잘린 귀를 들고 만나러 갔던 '베를라티에'라는 여성은 당시 10후반의 소녀로 개에게 물려 광견병 치료를 받았으며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창가 카페의 청소부로 일했던 것으로 영국 BBC가 지난 7월 방영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밝혔다.  이런 사실을 추적한 전직 미술사 교사 버나뎃 머피 씨는 불우한 여성들과 이웃들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됐던 반 고흐가 아마도 이 소녀를 돕기 위해 "종교적 희생"으로 생각하고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겠느냐고 추정했다.    ================================= 【서울=뉴시스】오애리 기자 =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동료 화가 폴 고갱으로부터 작품에 대한 비판을 들은 후 분노해 자신의 귀를 잘랐다는 것이 지금까지 미술계에서 전해내려오는 정설이다.  하지만 고흐가 귀를 자른 것은 고갱 때문이 아니라 동생 테오 때문이란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테오는 고흐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자, 가장 충실한 지지자였고, 재정적 지원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 테오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접한 고흐가 상실감과 소외감, 그리고 재정적 지원을 못받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등으로 인해 자해를 했다는 것이다.  가디언과 텔레그래프는 영국 미술사가 마틴 베일리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고흐 미술관 기록 보관서에 있는 고흐 및 주변 가족들의 서신들을 조사한 결과,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날인 1888년 12월 23일에 동생의 약혼 통지 편지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는 주장을 새 책에서 밝혔다고 3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지금까지 미술사학계에서는 고흐가 귀를 자르는 자해를 한 이후에 동생 테오의 편지를 받았다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앞서 올해 초에는 고흐가 잘라낸 귀를 종이에 싸서 가져다 준 여성이 창녀가 아니라 사창가에서 세탁부로 일하던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연구 결과 새로 확인되기도 했다.  베일리는 오는 11월 3일 출간될 저서 '남쪽의 화실: 프로방스의 반 고흐'에서 "고흐가 귀를 자르기 몇시간 전 파리에서 편지가 왔다. 편지는 테오가 보낸 것으로 요하나 (조) 봉제르라는 여성과 만난 지 며칠 만에 결혼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빈센트는 가장 가까운 동료인 테오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그러면서 "테오의 약혼 소식이 근본적인 이유는 아닐지 모르지만, 파괴적인 행동을 유발했다"고 주장했다.  문제의 편지 자체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 다만 테오의 약혼자 봉제르의 오빠 앙리가 12월 23일 여동생의 약혼 뉴스 편지를 받았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이틀 전인 12월 21일 테오가 어머니에게 보낸 결혼 허락 요청 편지도 남아 있다. 베일리는 봉제르가 오빠에게 약혼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쓴 날 테오 역시 형 빈센트에게 자신의 약혼을 편지로 알렸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베일리는 지난 2009년에도 고흐가 귀를 자른 이유가 테오의 결혼때문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한 바있다. 특히 고흐가 귀를 자른지 약 한 달 뒤에 그린 '양파가 있는 정물'을 보면 편지봉투 한 개가 그려져 있는데, 이 봉투를 자세히 보면 숫자 67이 적혀져 있고, 이는 테오가 살던 파리 아파트 근처의 우체국 번호라는 것이다. 또 봉투에는 새해표식 인장도 그려져 있는데, 당시에는 대부분 12월달에 이런 인장을 찍곤 했다. 따라서 고흐가 이 그림에서 귀를 자르기 전에 동생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그려 넣었으며, 그만큼 고흐에게 동생의 편지가 큰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있다고 주장했다.  테오는 1889년 4월 18일 봉제르와 결혼했으며, 형 빈센트가 자살한 1890년 7월 29일로부터 약 반년 뒤인 1891년 1월 사망했다.  =========================== 작가 마틴 베일리 주장… "테오 결혼편지 받은 날이 귀 자른 날" (서울=연합뉴스) 김보경 기자 =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귀를 자른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하다. 이번에는 반 고흐가 동생 테오의 결혼 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에 빠진 게 자해를 저지른 이유라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31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작가인 마틴 베일리는 '스튜디오 오브 더 사우스'란 새로운 저서에서 반 고흐가 자신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동생 테오가 조 봉어르와 결혼하겠다고 알린 편지를 받은 후 귀를 잘랐다고 주장했다.     동생의 결혼으로 자신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후원이 중단될 수 있다고 우려한 반 고흐가 스스로 귀에 칼을 댔다는 해석이다. 반 고흐가 동생의 결혼 소식에 괴로워했다는 내용은 이미 알려졌으나 그가 결혼 소식을 전달받은 시점은 귀를 자른 이후라는 것이 이전까지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베일리는 테오의 편지가 반 고흐가 폴 고갱과 함께 기거했던 프랑스 아를의 노란 집에 배송된 날짜가 반 고흐가 귀를 자른 1888년 12월 23일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테오의 편지에는 돈 100프랑과 함께 오랜 친구였던 조 봉어르를 2주 전 만났고, 이번에는 그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베일리는 테오가 그의 어머니에게 미리 편지를 써 결혼 허락을 구했다는 점과 조의 오빠가 보낸 결혼 축하 전보가 1888년 12월 23일에 도착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주장에 힘을 보탰다. 편지를 받은 반 고흐는 결국 귀를 잘랐고, 크리스마스를 약혼자와 함께하려 했던 테오는 크리스마스 당일 형을 만나러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가디언은 이번 주장에 비춰볼 때 반 고흐와 싸운 고갱이 이별을 통보하자 반 고흐가 절망에 빠져 귀를 잘랐다는 해석이 의문스러워진다고 보도했다. 앞서 올해 7월에는 반 고흐가 매음굴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이 개에 물려 큰 상처를 입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귀를 떼어 줬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미술사 교사 버나뎃 머피는 반 고흐 미술관이 공개한 사료를 토대로 정신건강이 온전하지 않던 반 고흐가 '살을 잃은 이에게 살을 선물한다'는 다소 신비주의적인 생각으로 귀를 잘랐다고 주장했다. 베일리는 반 고흐의 유명작품 '침실'의 그려진 침대가 이후 어떻게 됐는지도 추적해 공개했다. 그림에 그려진 더블 침대는 반 고흐가 노란 집에 오는 고갱을 환영하기 위해 산 것이었다. 베일리는 침대에 베개가 2개가 놓여있다는 것은 반 고흐가 여성과 함께 침대를 쓸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반 고흐에 의해 파리로 옮겨진 침대는 1890년 반 고흐가 자살하고, 이듬해 테오까지 세상을 뜨자 봉어르가 네덜란드에서 운영하던 게스트하우스에서 보관됐다. 게스트하우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무너졌고, 침대는 그의 조카에 의해 집을 잃은 주민에게 기부됐다고 베일리는 전했다. 귀를 자른 반 고흐의 자화상이 그려진 벽 [연합뉴스 자료사진] ////////////////////////////////////////////////////// [CBS노컷뉴스 정병일 기자] 1888년 12월 23일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 도시 아를르의 추운 겨울날 저녁, 빈센트 반 고흐가 작은 책상위에 놓아뒀던 면도칼을 들고 왼쪽 귀를 잘라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광기, 음주문제, 폴 고갱과의 다툼 그리고 어머니에게 응석부리고 싶은 욕망 등 여러 가설들이 있지만 그가 ‘결혼식의 종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나왔다고 CNN이 1일 보도했다. 반 고흐는 그의 동생 테오가 결혼하게 된다는 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은 뒤 정신 분열 상태에 빠져 귀를 잘랐다고 미술전문가 마틴 베일리씨가 그의 책 “남쪽의 화실 : 프로방스의 반 고흐(Studio of the South: Van Gogh in Provence)”에서 주장했다. “정신분열로 빠져들게 한 방아쇠(trigger)는 공포였다. 감정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버려진다는 데 대한 공포였다”고 저자인 베일리씨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반 고흐가 ‘귀 사건’이 벌어진 후에 동생의 약혼소식을 알게된 것으로 보고 이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CNN은 전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해 “결혼 소식이 그 날 확실하게 전달됐다”고 말했다. “단서들을 함께 고려해야 할 문제다. 우리는 그 편지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반 고흐가 다음해 1월에 보낸 편지에서 (1888년) 12월 23일에 그의 동생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언급했다”고 그는 말했다. 베일리씨는 돈이 반 고흐의 동생 테오가 미술상인 조안나 본거와 약혼했다는 소식과 함께 전달됐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반 고흐 학자들이 놓친 것이 약혼녀가 12월 23일에 그녀의 오빠 헨리로부터 축하 전보를 받았다는 사실”이라며 테오가 그 이틀전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의 형에게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해듣지 않도록 소식을 전하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 고흐는 테오가 결혼하면 자신과 사이가 벌어지고 가족 부양의 압력때문에 자신에게 돈을 덜 보내게 될 것이라고 절망했을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더 깊이는, 아마도 질투의 요인이 있었을 수 있다 ; 테오는 사랑을 찾는데 성공한 반면 빈센트는 오래 지속되는 인간관계를 갖지 못했다”고 베일리씨는 책에 썼다. 이 책은 반 고흐가 프랑스 남부지방에 있는 아를르에서 자신이 ‘노란 집’이라고 부른 곳에 살면서 ‘밝은 색깔’에 매료되기 시작한 시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귀 사건’에 대해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 포함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말했다. 반 고흐는 1888년 12월 23일 밤 자신의 귀를 자른 뒤 이를 신문지로 싸서 들고 베레모를 쓴 채 근처의 사창가로 갔다. 거기에서 최근에 ‘가브리엘르 베를라티에’로 밝혀진 젊은 여성을 만나서 잘린 귀를 건넸다. 베를라티에가 잘린 귀를 보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자 반 고흐는 달아났고 뒤이어 벌어진 혼란이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됐다. 베일리씨는 반 고흐 자신은 이 사건을 “예술가의 단순한 광란”으로 묘사했을 것이라며 귀를 자르면서 동맥이 상해 피를 많이 흘렸을 것이고 고열도 앓았을 것이라고 썼다. 그는 동생의 결혼 소식이 반 고흐를 극단적 행동으로 몰고갔지만 유일한 촉매제는 아니었다고 CNN에 말했다. “반 고흐의 의학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쟁이 있다. 결혼은 방아쇠였을 뿐이다”고 저자는 말했다. 반 고흐를 당시 치료했던 의사는 이 예술가가 간질을 앓고 있다고 믿었으며 최근 전문가들은 압쌍트(프랑스 술) 중독, 정신 분열, 일사병 등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합의되지는 않고 있다고 CNN은 전했다. 또 자해행위는 이 예술가가 보낸 구조요청이었을 수도 있다고 CNN는 추정했다. 반 고흐의 치료기록들을 논의하는 1893년의 한 편지에는 이 네덜란드 인상파 화가가 “환청의 희생자”라는 언급이 있다고 베일리씨는 말했다. 그가 귀를 자른 것은 이 소음들을 꺼보려는 헛된 시도였을 수도 있다고 CNN는 덧붙였다.  반 고흐가 잘린 귀를 들고 만나러 갔던 '베를라티에'라는 여성은 당시 10후반의 소녀로 개에게 물려 광견병 치료를 받았으며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창가 카페의 청소부로 일했던 것으로 영국 BBC가 지난 7월 방영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밝혔다. 이런 사실을 추적한 전직 미술사 교사 버나뎃 머피 씨는 불우한 여성들과 이웃들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됐던 반 고흐가 아마도 이 소녀를 돕기 위해 '종교적 희생'으로 생각하고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겠느냐고 추정했다. ======================== [피플투데이 김은서 기자]=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준데르트에서 태어난 반 고흐는 성직자의 길을 열망하여 매일 성경을 탐독하고 설교활동을 하였으나 암스테르담 신학대학에 낙방하였다. 이어 복음 전도사가 되고자 했지만 격정적인 성격 때문에 교회로부터 전도사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1880년 그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 믿으며 파리에 가서 5살 아래의 미술학도에게서 드로잉을 배우고 외사촌이자 화가였던 안톤 모베의 화실에서 유화를 그리며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그는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노동자와 농민, 하층민의 생활과 풍경을 그렸다. 이어 걸작이라 평가되며 현대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아를의 집’ 등을 그리며 가난 속에서도 활발한 화가 활동을 펼쳤다. 그러던 중 그는 화가이자 친구인 장 폴 고갱과 공동생활을 하였는데 둘은 성격차이가 심하여 자주 다퉜다. 이에 1888년 12월 23일 반 고흐는 고갱과 다툰 끝에 발작을 일으켜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랐다. 그 후로 반 고흐는 발작과 입원을 연속하며 ‘고갱의 의자’, ‘별이 빛나는 밤’,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의 그림들을 그렸고, 1890년 끝내 권총 자살을 하며 생을 마감했다. 살아생전 그의 작품들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지만 1903년 그의 유작전 이후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화가로 인정하였고 현재까지 그는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편 올해 4월 한 방송에서 고흐가 귀를 자른 원인이 질병과 관련되었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이날 방송에서 변재용 교수는 "메니에르병은 난청과 이명을 동반한 병"이라며 "고흐는 생전에 메니에르병을 앓았고 '별이 빛나는 밤에' 속에서 고흐가 겪은 고통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림을 보면 고흐는 별빛이 마치 소용돌이 치듯이 밤하늘에 빛나는 모습을 멋있게 표현했다. 그러나 이 그림은 고흐가 실제 회전하는 어지럼증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고흐는 난청과 이명 때문에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귀가 윙윙 거리니까 자신의 귀를 자른 것이다"라고 밝혔다. 반 고흐가 스스로 귀를 자른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변재용 교수/ 사진출처: MBC ==================================== 반 고흐, 귓불 아닌 귀 전체 잘린 의사의 스케치 발견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프랑스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자신의 귓불을 잘라내 매춘부에게 줘버렸다는 이야기는 광기에 스러진 천재 예술가의 말년을 보여주는 일화로 종종 거론되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가 이제까지 알려진 대로 귓불 일부가 아닌 왼쪽 귀 전체를 잘라냈음을 보여주는 기록을 새로 공개했다고 영국 BBC 방송, 일간 가디언 등이 12일(현지시간) 전했다.   공개된 기록은 사건이 일어난 1988년 당시 반 고흐를 치료한 의사 펠릭스 레의 편지 내용이다. 1930년대까지 레 박사와 연락하고 지냈던 작가 어빙 스톤이 소유했던 것으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뱅크로프트 도서관에서 발견된 것. 레 박사는 편지에 반 고흐가 잘라내기 전후의 귀 모습을 그려놓았다. 이 그림을 보면 고흐는 귀 일부만 잘라낸 것이 아니라 귓불의 작은 일부분만 남긴 채 대부분을 잘라낸 것. 또한 반 고흐가 잘라낸 귀를 건넨 여성인 ‘라셸’은 그간 알려진 것처럼 매춘부가 아니라 사창가에서 청소 일을 하던 하녀였다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박사의 편지를 발견한 전직 미술사 교사 버나뎃 머피는 본명이 가브리엘인 이 여성의 유족을 추적해 반 고흐가 이 여성을 도우려는 생각으로 잘라낸 귀를 건넨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이 여성은 당시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린 상처로 고생하고 있었으며 치료비 마련을 위해 사창가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던 여성이다. 머피는 “반 고흐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 대단히 감정적이 됐던 인물”이라며 “그 여성에게 선물로 살을 주기를 원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반 고흐 미술관은 이 편지와 반 고흐가 그린 레 박사의 초상화, 반 고흐가 자살할 때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권총 등을 오는 15일부터 9월 25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다. [출처=캘리포니아대학교 홈페이지] /김상민기자  ======================================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어빙스톤-최승자 옮김-까치     p-20 고통이 그를 괴상하게 만들어놓았다. 자신의 고통을 통해 그는 타인의 고통에도 민감해졌다. 자신의 고통으로 인해 그는 주위의 값싸고 보잘것없는 것, 그리고 떠들썩한 속세의 성공을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그가 진실성과 깊은 감정을 발견할 수 있는 그림은, 그것을 그린 그 예술가의 거통이 표현된 그림밖에 없었다. p-22 “훌륭한 행동을 하려면,” 그는 읽었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내부에서 정신적으로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이승에서 존재함은 행복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그저 정직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인간이 이승에서 존재함은, 인류를 위한 위대한 행동을 실현하여 고귀함을 얻고 거의 모든 개개인의 삶이 질질 끌려가고 있는 비속함을 뛰어넘기 위해서이다.” p-28 우르술라는 그 사내의 두 팔에 단단히 끌어 안긴 채 입술을 그의 입술에 꼭 포갰다. 마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무언가 가느다란 것이 그의 내부에서 툭 끊어졌다. 산뜻하고 깨끗하게 끊어졌다. 마술은 풀렸다. 그토록 쉬울 줄은 몰랐었다. 그는 종횡으로 휘갈기는 빗줄기 속에 타박타박 아일워드로 되돌아와 짐을 챙기고서 영원히 영국을 떠났다. p-81 그는 목이 타는 듯 열에 들뜬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침묵의 공간을 가득 채웠다. 굶주림과 좌절감으로 야위고 쇠약하게 무참히 꺾여버린 광부들은 마치 신을 바라보듯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신을 그들에게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p-86 그는 신을 잃었고 자신을 잃었다. 한 죽은 혼이 왜 자신이 아직도 여기 있는가 의아해 하면서 아무도 없는 버림받은 세계 속을 헤매고 있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었다. 얼마 안 되는 초목이 시들어죽으면서부터 무엇인가 그이 내부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그자신의 인생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고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의 삶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다시 독서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독서는 언제나 가장 큰, 그리고 변함없는 즐거움이었는데 이제 다시 다른 사람들의 성공과 실패, 괴로움과 기쁨의 이야기를 통해 늘상 머릿속에 출몰하는 자신의 대실패라는 유령으로부터 그는 도피할 수 있었다. p-92 그는 야수 같은 마음의 고통을 눌렀고, 이젠 더 이상 자신의 불행을 생각지 않았으므로 행복함을 느꼈다. 아버지와 동생의 돈을 계속 받기만 하고 조금치도 자립할 노력을 하지 않는 자신을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리 중대한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고 그는 그저 그림만 계속 그릴 뿐이었다. p-97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 저 여잔 얼굴도 없어. 딱히 정해진 어떤 사람도 아니야. 어쩌면 저 여잔 그저 보리나쥬에 사는 광부의 아내들 모두가 한 데로 합쳐진 거야. 뭐랄까 자네가 포착해 놓은 그것은, 광부 아내의 영혼이야. 그리고 그거야말로 정확하게 그려진 그 어느 그림보다도 천 배나 귀중한 것일세. 그래 난 자네가 그린 저 여인이 좋네. 내게 무엇인가를 직접 말해주고 있거든.” p-207 “불평 없이 고통을 견디는 법을 배워라. 그것이 위대한 앎이요, 깨우쳐야할 교훈이며, 인생 문제의 해결법이다.” 그는 새로운 기운을 얻었고 또한 아이러니칼하게도, 갖가지 타격 중에서 가장 혹독한 타격을 안겨주었던 사람이 바로, 그 타격을 체념으로써 참는 법을 가르쳐준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즐거웠다. p-208 “고통이 크면 클수록 자넨 그 고통에 대해 더욱 감사해야 돼. 바로 그런 것들로부터 일급의 화가들이 만들어지는 걸세. 텅빈 뱃속이 꽈 찬 뱃속보다 낫고, 상심하는 가슴이 행복보다 훌륭한 걸세. 반 고흐, 그 점을 절대로 잊지 말라구.” p-209 “ 자네가 고금을 통해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생각된다 할지라도 난 도와주지 않겠네. 굶주림과 고통에 의해 죽음을 당할 만한 인간이라면 애초에 구해줄 가치도 없겠지.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화가들이란 오직,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마칠 때까지는 신도 귀신도 죽일 수 없는 사람들뿐일걸세.” p-211 “그림을 판다는 게? 나는 화가란 언제나 무엇인가를 찾으면서도 끝끝내 발견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을 뜻한다고 생각했었죠. 나는 그건 알고 있다, 나는 찾아냈다 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화가이다라고 말할 때, 그건 단지 나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고 노력하고 있으며 심혈을 기울여 몰두하고 있다는 의미일 따름이죠.” p-231 인물을 그리든 풍경을 그리든간에 그는 감상적인 우수가 아니라 진지한 슬픔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작품을 보고 “이 사람은 참 깊은 감정과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있군”이라고 말하게 되는 높은 경지까지 도달하고 싶었다.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그 외의 다른 활동들은 점점 더 그의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그런 다른 일들을 제거하면 제거할수록 그의 눈은 점점 더 쉽사리 삶의 회화적 특질을 포착할 수 있었다. 예술은 끈질긴 작업,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감행하는 작업, 그리고 끊임없는 관찰을 필요로 하였다. p-263 “그 여자는 창녀가 아니야. 당신의 아내였어. 그 여자를 구하는데 실패 한 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야, 보리나쥬 사람들을 구하려다 실패한 것과 마찬 가지로, 한 인간이 한 문명 전체에 대항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아무 것도 없으니까.” p-279 인간이 뭔가 신성한 것을 창조하였다면 그 신성함에 가장 가까운 것이 빈센트에게 있어서는 밀레의 만종이었다. 꾸밈없는 농부의 생활 속에서 그는 진실하고 영원한, 단 하나의 현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야외에 나가서 현장 그 자체에서 그리고 싶었다. 거기서 그는 수많은 날벌레들을 처치하고 먼지와 모래와 싸워야 했다. 히드 들판과 히드 울타리를 넘어 몇 시간이나 걸어 돌아올 때면 캔바스가 여기저기 긁히곤 했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와서 보면, 자신이 현실을 똑바로 직시했음을, 그리고 그 현실의 근본적인 단순함 속에서 뭔가를 사로잡았음을 알게 되는 것이었다. 자신이 그린 농부들의 그림 속에서 베이콘과 연기와 감자 찌는 냄새가 풍긴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건전한 게 아니었다. 마구간은 말똥 냄새를 풍겨야 제격인 것이다. 들판에서 잘 익은 보리나 비료나 거름 냄새가 난다면 그것 또한 좋은 것이다. 더욱이 도시에서 온 사람에게는. p-283 “나는 결코 고통이 진정되길 원치 않는다. 흔히 바로 그 고통을 통해 예술가는 가장 힘찬 자기표현을 얻을 수 있는 까닭에” p-289 네덜란드의 옛 대가들에게서 그는 소묘와 색채는 하나이다라는 사실을 배웠었다. 데 그로트 가족은 살아오면서 언제나 변하지 않는 똑같은 위치에서 밥상머리에 둘러앉았다. 빈센트는 등불 아래 감자를 먹고 있는 이 사람들이 접시로 가져가는 바로 그 손으로 대지를 일구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싶었고, 그것을 통해 “손”의 노동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정직하게 일해서 먹고 살아가는가를 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p-290 “사람들은 내가 상상으로 그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_나는 기억으로 그린다.” p-290 사라져 가는 것들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은 것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브라방트의 농부들은 이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p-299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나한테 물었지? 내가 말해주지. 형은 인상파들한테서 빛과 색채를 배워야 해. 그것만큼은 그들한테서 빚을 질 수밖에 없어. 그러나 그 이상은 안 돼. 그 사람들을 모방해서는 안 돼. 휩쓸려 처박히지 말아야해. 파리의 아가리에 삼켜지지 않도록 해야 해. p-319 “ 좋아요, 그렇다면 하 화가가 묘사를 하기 위해 배워야 하는 건 한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의 본질입니다. 화가가 어떤 말 [馬]을 그릴 때, 그 말이 거리에서 알아볼 수 있는 특정한 어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죠. 사진은 카메라가 찍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 화가는 그 이상으로 넘어서야 해요. 우리가 어떤 말을 글릴 때 반드시 포착해야 하는 것은, 반 고흐씨, 플라톤이 말하는 소위 ‘말이라는 것’ 즉 한 말의 외형에 나타난 정신입니다. 또한 한 인간을 그릴 때, 그것은 코끝에 난 사마귀까지 있는 대로 그린 문지기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즉 모든 인간의 그 정신과 본질이어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p-342 “로트렉 자네의 그림을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말이야. 대중은 예술에 있어서 도덕적 판단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한단 말일세. 예술은 도덕을 초월한 것이거든. 인생도 마찬가지야. 적어도 내게 있어서 외설적인 그림이나 책이란 것은 없네. 단지 보잘것없는 착상으로 보잘것없이 만들어진 것들이 있다 뿐이지. 뚤루즈-로트렉이 그린 창부는, 그가 그 창부의 겉모습 밑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표출했기 때문에 도덕적인 것이 된단 말일세. 그러나 부퀘로가 그린 청순한 시골 처녀는, 감상적으로, 그리고 쳐다보기만 해도 토하고 싶을 만큼 지긋지긋하게 달작지근하게 그렸기 때문에 부도덕한 것일세.” p-344 “우선, 우리는 모든 진실이란 그 겉모습이 아무리 끔직스러워 보인다 할지라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연의 모든 것을, 아무 것도 거부하지 않고 다 받아들인다. 우리는 아름다운 허위보다 가혹한 현실 속에 더 많은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으며, 파리의 그 모든 살롱보다는 세속스러움에 더 많은 시(時)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고통이야말로 인간 감정 중에서 가장 심원한 것이기에 우리는 고통이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창녀나 뚜장이가 연출한 것이라 할지라도 섹스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추악함보다는 인간성을, 예쁨보다는 고통을, 프랑스의 모든 부보다는 딱딱하고 거친 현실을 상위에 둔다. 우리는 창녀가 공작부인과 똑같이, 문지기가 장군과 똑같이, 농부가 장군과 똑같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들 모두가 자연의 틀에 맞추어 인생이라는 구도에 짜여져 들어가는 것이다.” p-369 “난 다른 화가들을 보기만 해도 이젠 정말로 구역질이 난다. 그들의 얘기와 그들의 이론과 그들의 넌더리나는 입씨름이 지긋지긋해졌어. 아, 웃을 필요없어. 나도 나 자신이 그런 싸움에 함께 끼어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게 바로 문제야. 마우베가 자주 하곤 했던 말이 무언 줄 아니? 그림을 그리던가, 아니면 그림에 관한 얘기를 할 수 있지만,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다는 얘기야. 그래, 테오야, 넌 내가 갖가지 생각들을 씨부렁대는 걸 들으려고 칠 년 동안이나 날 먹여살렸단 말이냐?” “그래, 하지만 우리가 그곳으로 옮겨갈 준비가 다 된 이 순간에 와서 난 내 자신이 그리로 가길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야. 난 거기서 살수도, 그림을 그릴수도 없을 거야. 내 말에 이해가 갈른지 의문이다만......아냐 넌 물론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브랑방트와 헤이그에서 혼자 있었을 때는 난 내 자신을 중요한 인물로 생각했었다. 나라는 인간이 혈혈단신으로 온 세상과 맞서 싸웠었지. 나는 화가, 살아 있는 유일한 화가였다. 내가 그리는 것은 뭐든 가치 있는 것이었어. 내게 위대한 능력이 있는 걸로,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결국엔 ‘빛나는 화가야’라고 말할 걸로 알고 있었다.” p-482 “내가 이런 그림을 단 한 점만 그렸더라도 난 내 인생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었을 걸세. 난 사람들의 고통을 치료하면서 오랜 세월을 보냈지......하지만 그 사람들은 어째거나 결국엔 죽고 말았거든......그러니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하지만 당신ㅇ의 이 해바라기 그림들은......사람 마음의 고통을 치료해줄 거야......세기가 지나고 또 지나는 동안 ......사람들에게 기쁨을 갖다 줄 걸세. 그 때문에 당신의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리고 그 때문에 당신은 행복한 인간인 거야.” p-495 사랑하지 않는 사람,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상처받지 않고 고통 받지 않는다. 아마도 사랑과 고통이라는 기름 없이는 고호의 삶은 위대한 한순간의 불꽃으로 타오르지 못했으리라. 고호, 그는 천재가 아니라 오히려 둔재였으며, 그의 생애는 우뚝 솟은 고상한 정신의 최고 극점이 아니라 가장 낮고 더러운 땅에 입맞춤하며 흐르는 물로서 우리에게 남겨질 것이다.      
915    [쉼터] - 천재 화가 반 고흐의 귀는 왜 누가 잘랐을까?... 댓글:  조회:7764  추천:0  2017-01-02
천재 화가 반 고흐의 귀는 왜 누가 잘랐을까? /이미지봉합수술흉터   고갱과 고흐는 아를에서 그림생활을 같이 했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견해가든가 성격면에서 종종 충돌했다고 합니다. 둘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고갱이 아를에 온지 두 달정도가 되었을 때 고흐는 밀레처럼 자연 속에서 그림이 나온다고 보았지만, 고갱은 그건 창의성 없는 그림이라며 그림은 화가의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고갱이나 고흐 둘 다 자존심이 굉장한 사람들이었기에 부딪혔다. 어느날, 고흐가 해바라기 그리는 모습을 고갱이 그렸고 그 그림을 본 고흐는 고갱이 자신을 정신병자 취급한다는 생각에 크게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술집에서 고갱에게 술잔을 집어 던졌고, 크리스마스 즈음 기분 상한 고갱은 그길로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항간에서는 고흐와 싸우던 고갱이 고흐 귀를 잘랐을 것이라고도 말 합니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고갱이 떠나버린 뒤 자신의 물건을 보내 달라고 했을 때, 펜싱 검만이 없고 마스크와 장갑이 있었는데 이는 고갱이 자신의 행실을 은폐하기위해 사고 직후 펜싱 검을 챙겨 떠난 것으로 여겨진다. 고흐가 고갱에게 보낸 서신 중 일부에서 그런 암시가 담긴 내용이 있다. ('너는 침묵하고 있구나. 나도 그럴 것이다.') 사건 전말을 보면 고갱은 저녁식사 후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고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자신에게 덤벼들려고 했는데, 그래서 고갱은 고흐를 노려보았고 그러자 고흐는 달아나 버렸다고 고갱이 남긴 기록이 있다. 그 일 직후 고흐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귀를 자른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고갱과의 충돌로 인해서 그가 아를을 떠나버리는 것에 대한 반발, 혹은 고갱이 떠남으로써 자신이 아를에서 실현 하고자 했던 화가 공동체의 꿈이 깨지는 것에 대한 실망으로 보통 추측한다. 요양원 담당의의 기록에서는 반 고흐는 눈과 귀의 갑작스러운 환각으로 심한 정신 착란의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하였고 발작 동안에 왼쪽 귀를 절단했다고 기술 되어있다. 보통 정신장애자가 자해를 하는 경우는 환각에 의한 경우가 많고 따라서 고흐가 그 환청의 근원이 되는 부분을 제거해 버리기 위해 귀를 자른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이 있기 몇일전에는 "아를 투우장의 관중"이라는 그림을 그립니다. 헌데 투우경기에서는 투우사가 소를 쓰러뜨리면 그 승리의 댓가로 쓰러진 소의 귀를 잘라 준다고 하는 군요. 투우사는 그것을 관중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바친다. 투우장의 관습을 고려함과 동시에 고흐가 귀를 자른 후에 그것을 알고 지내던 창녀에게 준 기록으로 추측해보면 고흐가 투우장의 쓰러진 소와 승리의 투우사 두 가지 역할을 다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확대 해석 하자면 고갱과의 충돌에서 승리하는 동시에 그것을 과시하려는 욕망이 정신적 착란과 함께하여 일어난 결과라고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고흐의 잘린 귀는 자화상에서도 그려지는데 본인의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여 그런 짓을 했을 것이다. KBS의 명작스캔들이란 프로그램을 보면 바람에 무섭게 흔들리는 밀밭, 곧 폭풍우가 들이닥칠 것 같은 검푸른 하늘, 그리고 그 위를 유유히 날고 있는 불길한 까마귀가 있는은 반 고흐가 자살하기 직전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 그림이 그의 유서라는 주장이 제기됐다고 한다. 밀밭은 곧 추수를 앞두고 있어서 추수란 곡식으로 말하면 수확당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추수란 낫으로 자신의 몸이 베어지는 과정을 담는 것이란 학설이 제기되었다. 요즘에는 워낙 미세접합수술이 발달해서 잘라져도 곧 얼음등에 보존해서 가져오면 붙이는 것도 가능은 하다. 하지만 수술후에 수쳐라 불리는 봉합수술자국등의 흉터는 남게 된다. 이미지한의원에서 만약 고호가 지금 살아서 접합수술을 마쳤다면 ST침으로 흉터 제거수술을 받았지 않을까 싶다. =================================     124년전 오베르 쉬르 와즈   124년 전인 1890년 7월27일 파리 북쪽 전원마을 오베르 쉬르 와즈(Auvers-sur-Oise). 긴 여름 해가 지고 어둑해질 무렵, 빈센트 반 고흐가 허리를 숙인 채 숙소인 ‘라부 여인숙’으로 돌아왔다. 신경쇠약에 걸린 반 고흐는 그해 5월20일 조용히 요양할 곳을 찾아 이 시골 2층짜리 여인숙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하루 한 점씩 그릴 정도로 왕성하게 캔버스를 채워 나갔다.     “괜찮으냐”는 주인 라부씨의 물음에 반 고흐는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2층 방으로 올라갔다. 걱정이 된 라부씨가 뒤따랐다. 침대에 쓰러져 있던 반 고흐는 그제야 팔을 들고 셔츠를 걷어 올렸다. 총탄이 박힌 그의 복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죽으려고 했어요.” 반 고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리고 라부씨에게 담배 파이프를 청했다.   총알은 심장 아래를 지나 척추에 박혀 있었다. 이튿날 외과의사가 왔지만, 총알을 제대로 제거하지 못했다. 소식을 듣고 동생 테오도 달려왔다. 반 고흐는 상태가 잠시 호전되는 듯했지만, 또다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29일 새벽 서른일곱의 불꽃 같은 삶을 마감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귀를 자른 자화상       누가 반 고흐를 죽였는가?   많은 명작 중 반 고흐의 작품이 유난히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면, 비단 작품 속 해바라기의 노란색과 소용돌이 같은 붓 터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귀를 잘라 낸 광기(狂氣), 생전의 가난과 불우함이 그림에 중첩되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그렇게 스스로 고단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이런 객관적 사실을 부정하는 전시회가 지금 파리에서 열리고 있다. 오르세미술관 1층에 마련된 ‘반 고흐/아르토, 사회적 자살’이라는 제목의 특별전(2014년 7월6일까지)이다.   이번 전시엔 반 고흐의 대표작 55점이 걸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맨 먼저 반 고흐의 자화상 4점을 만나게 된다. 오르세 소장품뿐 아니라 미국 워싱턴의 국립미술관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 있던 작품도 한자리에 모였다. 이어서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반 고흐의 방’ ‘가셰 박사의 초상’ ‘아를의 무도회장’…. 관람객들은 숨소리를 죽인 채 작품 앞에서 좀체 움직이지 않았다. ‘뒤집힌 게’와 ‘낡은 구두 한 켤레’ 등 평소 잘 볼 수 없었던 작품도 만나는 기회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1888)         이 전시의 또 다른 주인공은 프랑스 시인 겸 극작가인 앙토넹 아르토(Artaud·1896~1948년). 시대를 뛰어넘은 반 고흐와 아르토의 인연은 1947년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열린 반 고흐 특별전에서 시작됐다. 이번 오르세 미술관 특별전에는 1947년 전시에 나왔던 반 고흐의 작품 대부분이 선보이고 있다. 반 고흐의 이렇게 많은 작품이 한곳에 모이는 것은 유럽에서도 드문 일이다. 사람들이 이번 전시를 ‘67년 만의 전시’라고 부르는 이유다.   당시 전시 기획자였던 피에르 뤠브는 아르토에게 반 고흐에 대한 비평을 부탁했다. 당시 비평을 아르토에게 맡긴 이유가 있다. 아르토는 당시 정신병원에서 약 10년간 치료를 받다가 1년 전 퇴원한 상태였다. 이런 배경의 아르토가 ‘자살한 미친 화가’라는 평가에 묻혀 있던 반 고흐의 진가를 드러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때 아르토가 쓴 책이 ‘반 고흐, 사회적 자살’이었다.   이 책에서 아르토는 ‘누가 반 고흐를 죽였는가’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반 고흐는 건전하고 따뜻한 정신세계를 가진 천재였지만, 사회가 이런 반 고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자살로 내몰았다고 주장했다.     ‘아를의 반 고흐의 방’ (1888)       네덜란드 태생의 반 고흐는 어릴 적부터 사색적이고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화가가 되기 전 성직자가 되고 싶었던 그는 가난한 이를 돕기 위해 벨기에의 탄광촌에 갔다. 광부의 삶을 직접 느끼겠다며 좁은 움막에서 살고 막장까지 들어가 석탄을 캐던 반 고흐를 사람들은 미친 사람처럼 취급했다. 반 고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 주변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믿었지만, 이런 신념을 정작 주변인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했다.     아르토는 “반 고흐의 건전하고 우월한 정신세계를 인간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결국 반 고흐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우리 사회라는 결론이다. 아르토는 특히 반 고흐의 후원자로 알려진 ‘가셰 박사의 초상’ 모델인 가셰 의사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의사로서 반 고흐의 정신병이 악화하는 것을 사실상 방치했다는 것이다.   반 고흐 타살설도 나돌아   아르토도 반 고흐가 자살했다는 것에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 하지만 반 고흐가 타살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퓰리처상을 받은 유명 작가인 스티븐 네이페와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반 고흐의 편지 수천건 등 방대한 자료를 분석해 “반 고흐는 자살한 게 아니라 10대 청소년들이 우발적으로 쏜 총에 맞아 사망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내용의 책을 2011년 내놓았다.   네이페는 “자살했다면 총알의 각도가 비스듬하지 않고 직선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또 반 고흐가 정신병을 앓고 있어 실제 총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네이페가 반 고흐 살해 용의자로 지목한 사람이 당시 오베르 쉬르 와즈에 살던 16살의 렌 세크레탕 형제다. 세크레탕은 1956년 인터뷰에서 “빈센트에게 과일을 집어던지고 물감 통에 뱀을 넣는 등 괴롭힌 적이 있다”고 밝혔다. 물론 세크레탕은 자신들이 반 고흐에 총을 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네이페는 “세크레탕 형제가 총을 가지고 놀다가 우발적으로 발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당시 어차피 자살을 생각하던 반 고흐는 어린 소년들을 감싸기 위해 이 같은 사실을 숨기고 스스로 총을 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반 고흐의 친구 폴 고갱의 자화상       또 반 고흐가 귀를 스스로 잘랐는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 1888년 프랑스 남부 아를에 머물던 반 고흐는 친구인 화가 폴 고갱을 초대해 함께 지냈다. 그러던 중 미술에 대한 생각의 차이로 두 사람은 크게 다퉜다. 고갱이 자리를 박차고 떠나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반 고흐가 자신의 왼쪽 귀를 면도칼로 잘랐다. 그리고 그것을 평소 알던 창녀에게 주며 “이 오브제를 잘 간직하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독일 역사학자인 한스 카우프만은 “사실은 다투는 과정에서 고갱이 반 고흐의 귓불을 잘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 고흐가 친구인 고갱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귀를 잘랐다고 이야기를 꾸몄다는 것이다.’     반 고흐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자살 장소가 그림(까마귀 나는 밀밭)의 배경인 밀밭이 맞는지, 당시 사용된 총은 어디로 갔는지, 왜 유서를 남기지 않았는지 등 대중의 호기심은 끝이 없다. 오베르 쉬르 와즈의 공동묘지에 누워있는 반 고흐는 말이 없으니, 해답을 찾을 길도 없다. 전시를 보고 나면, 혹시 지금도 우리 사회가 품지 못한 어떤 천재가 몸을 웅크리고 어디선가 괴로워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성훈 파리 특파원 =============================   고흐가 귀를 자른 진짜 이유?   천재와 외로움, 고독, 우울증...자살.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천재성을 띤 인간의 뇌에 잠재되어 있는 어떤 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되어 창작/연구활동을 자극하고,  이것이 인류 발전의 수레바퀴를 굴러가게 했다면, 그 대신 그 천재는 그 호르몬의 분비로 인해 가장 비극적인 방법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면.    그래도 인류의 수레바퀴는 굴러가야 했어야 하는 걸까요 .       인상파 화가의 대표주자로 살아 움직이는 듯, 꿈틀거리는 붓터치로 유명한, 그리고 정신분열증으로 스스로 귀를 잘랐다고 알려진 고흐. 고흐의 대표작품으로는  《빈센트의 방》《별이 빛나는 밤》《밤의 카페》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귀를 자른 후에 그린 자화상 속에 반 고흐는 슬프고 외로워 보인다.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자신의 귀를 왜 잘랐는지는 오랫동안 미술계의 논쟁거리였다. 정신병설(說), 물감에 함유된 납 중독설, 친구 고갱과의 불화설 등이  그  이유로 제시되곤 했다.   27일 영국 일간 선데이타임스 인터넷판에 따르면 고흐 연구자인 마틴 베일리는 고흐가 귀를 자르고 한 달 후 완성한 `양파가 있는 정물'을 정밀 분석, 그가 평소 의지하던 동생 테오의 약혼 소식에 좌절한 나머지 귀를 잘랐다고 주장했다.         이 작품 오른쪽 아래에는 편지봉투가 하나 그려져 있다. 동생 테오가 1888년 12월 자신의 약혼 소식을 전하고자 파리에서 이 편지를 보냈고, 이미 정신적으로 불안했던 고흐는 편지 내용에 충격을 받아 귀를 잘랐다는 게 베일리의 추정이다. 베일리는 작품에 그려진 편지봉투를 현미경으로 살펴본 바로는 봉투 위에 숫자 '67'이 적혀 있었다고 밝혔다. 67은 테오가 살던 파리 몽마르트르의 아파트 근처에 있는 아베스 광장 우체국의 공식 표기다. 이 봉투에는 `새해(New Year's Day)'라는 특별한 표시도 찍혀 있다.         파리 우편박물관에 따르면 19세기 후반에는 12월 중순부터 편지봉투에 이런 표시가 찍혔다. 베일리는 작품 속 편지에 테오가 애인 요한나 봉어에게 청혼했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고 주장했다. 12월21일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결혼 허락을 구한 테오는 뒤이어 형 빈센트에게도 이 소식을 틀림없이 전했으리라는 분석이다.       테오는 형 빈센트가 금전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크게 기대던 동생이었다. 고흐에게는 이 편지가 무척이나 큰 의미를 띠었기 때문에 그가 의도적으로 편지봉투를 작품에 끼워넣었다는 것이 베일리의 결론이다.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브라반트 북쪽에 위치한 그루트 준데르트(Groot Zundert)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테오도루스 반 고흐)는 목사였다. 그의 어머니(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는 1857년에 그의 동생을 낳고 아버지의 이름을 따 테오도루스라고 이름 지었다. 1864년 빈센트는 부모와 떨어져 기숙학교에 다녔는데 가난으로 15세 때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1869년 빈센트는 숙부가 운영하는 구필화랑 헤이그 지점에서 판화를 복제하여 판매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당시 빈센트는 모범적이고 성실한 청년으로 인정받았다.  1873년부터는 빈센트의 동생인 테오도 브뤼셀 지점 구필화랑에서 일하게 되었다. 1873년 3월 빈센트는 헤이그를 떠나 구필화랑 런던지점으로 발령을 받아 영국에 머물렀으며 1875년부터는 파리지점에서 일하였다. 빈센트는 런던에서 부터 신비주의에 빠져 화랑일을 소홀히 하였다. 빈센트에게는 오로지 하나님밖에 없었으며 그는 결국 화랑에서 해고당하였다.             성직자의 길을 열망하였던 빈센트는 파리를 떠나 영국 램스케이트로 건너갔다. 그는 매일 성경을 탐독하고 설교 활동을 하였으며 복음 전도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 빈센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암스테르담 신학대학에 낙방하였고 전도사 양성학교에서도 그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겨 6개월간 평신도로서 전도활동만을 허가하였다. 빈센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보리나주로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최하층민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오두막에서 지내며 전도활동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그의 광신도적인 기질과 격정적인 성격 때문에 결국 교회로 부터 전도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80년 실의에 빠진 빈센트는 그동안 계속 해온 습작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빈센트는 미술공부를 위해 다시 파리로 갔다. 드로잉에 관한 기초 지식이 부족했던 빈센트는 라파르트라는 5살 아래의 미술학도에게서 드로잉을 배웠다. 이후 빈센트의 외사촌이자 헤이그화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톤 모베의 화실에서 유화를 그리게 되면서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이 시기에 빈센트는 그동안 열광했던 종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목사인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과격한 성격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작은 충고에도 심각한 상처를 입곤했다.       그런 그의 성격 때문에 그에게 그림을 지도하던 안톤 모베와도 절교하게 되었다. 빈센트는 크리스틴이라는 매춘부 출신의 여자와 동거를 하며 지냈는데 그녀는 알콜 중독에 매독 환자였다. 빈센트의 가족은 그가 크리스틴과 지내는 것을 우려하였고 동생 테오는 그녀와 헤어지기를 강요하였다. 빈센트는 그녀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였지만 생활비를 줄이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그녀와 어린아이를 저버리게 되었다. 빈센트는 이때문에 양심의 가책으로 오랫동안 고통받게 되었다. 마침내 빈센트는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언제나 노동자·농민 등 하층민의 생활과 풍경을 그렸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은 이 무렵의 작품이다. 1886년 화상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서 파리에 나온 빈센트는 코르몽의 화숙(畵塾)에서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를 알게 되었다.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풍(風)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빈센트 반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교(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했다.       한편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장 폴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해 12월 빈센트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그 후 빈센트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쳐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 것은 1890년 5월이었다. 한때 건강회복으로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다시 쇠약해져 끝내 권총자살을 하였다.       지금은 온 세계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작풍이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인상을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준 것은 1903년의 유작전 이후였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초의 야수파 화가들의 최초의 큰 지표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에 가장 많이 있는데, 40점 가까운 자화상 이외에도 《빈센트의 방》《별이 빛나는 밤》《밤의 카페》《삼(杉)나무와 별이 있는 길》 등이 유명하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화가, 역사인물 출생-사망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 1890년 7월 30일 경력 1890.01 브뤼셀 그림 전시  1880 브뤼셀 미술학교 입학  1879 바스메스 부목사  1877 서점 근무 ...           [출처] [고흐/빈센트반고흐/해바라기 고흐작품]고흐가 귀를 자른 진짜 이유?|작성자 들꽃     빈센트반고흐의 동생 테오 반 고흐는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자 충실한 지지자에, 재정적 지원자로 알려져있는데요. 이러한 동생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고흐는 상실감과 소외감 그리고 재정적 지원을 못받게 될 수도 있는 불안감으로 귀를 잘랐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는, 동료 화가 풀 고갱으로부터 작품에 대한 비판을 들은 후 분노해 자기 귀를 잘랐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영베일리 '남쪽의 화실: 프로방스의 반 고흐'의 저서에 따르면 "태오의 약혼 소식이 귀를 자른 근본적인 이유는 아닐지 모르지만, 파괴정인 행동을 했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베일리는 반고흐 미술관 기록보관서에 있는 고흐 주변의 서신들을 조사했는데, 그결과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를 1888년 12월23일에 동생한테 약혼통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유추해냈습니자. 문제의 편지 자체는 현재 사라지고 없지만, 그림'양파가 있는 정물'을 보면 동생의 편지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고흐에게 동생의 편지가 큰 의미를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양파가있는정물 지금까지 미술사학계에서는 고흐가 자해를 한 이후에 동생 테오의 편지를 받았다는게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고흐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고 귀를 자른 것은 소음을 꺼보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는 다른 가설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올해초에는 고흐의 잘라진 귀를 받은 여성이 창녀가 아니라 사창가에서 세탁부로 일하던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연구결과 새로확인되기도 했는데요, 동생테오는 이듬해 약혼녀와 결혼했지만, 형 빈센트가 자살한 반년뒤 사망한것으로보아 두 형제는 평생 동반자였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손끝뉴스 발췌... =============   [출처] 빈센트반고흐 귀를 자른 이유?|작성자 아프로티켓 후원자인 동생 테오의 약혼 소식이 ‘방아쇠’였다는 주장 나와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사진=BBC 동영상 캡처) 1888년 12월 23일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 도시 아를르의 추운 겨울날 저녁, 빈센트 반 고흐가 작은 책상위에 놓아뒀던 면도칼을 들고 왼쪽 귀를 잘라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광기, 음주문제, 폴 고갱과의 다툼 그리고 어머니에게 응석부리고 싶은 욕망 등 여러 가설들이 있지만 그가 ‘결혼식의 종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나왔다고 CNN이 1일 보도했다. 반 고흐는 그의 동생 테오가 결혼하게 된다는 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은 뒤 정신 분열 상태에 빠져 귀를 잘랐다고 미술전문가 마틴 베일리씨가 그의 책 “남쪽의 화실 : 프로방스의 반 고흐(Studio of the South: Van Gogh in Provence)”에서 주장했다.  “정신분열로 빠져들게 한 방아쇠(trigger)는 공포였다. 감정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버려진다는 데 대한 공포였다”고 저자인 베일리씨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반 고흐가 ‘귀 사건’이 벌어진 후에 동생의 약혼소식을 알게된 것으로 보고 이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CNN은 전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해 “결혼 소식이 그 날 확실하게 전달됐다”고 말했다.  “단서들을 함께 고려해야 할 문제다. 우리는 그 편지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반 고흐가 다음해 1월에 보낸 편지에서 (1888년) 12월 23일에 그의 동생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언급했다”고 그는 말했다. 베일리씨는 돈이 반 고흐의 동생 테오가 미술상인 조안나 본거와 약혼했다는 소식과 함께 전달됐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반 고흐 학자들이 놓친 것이 약혼녀가 12월 23일에 그녀의 오빠 헨리로부터 축하 전보를 받았다는 사실”이라며 테오가 그 이틀전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의 형에게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해듣지 않도록 소식을 전하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 고흐는 테오가 결혼하면 자신과 사이가 벌어지고 가족 부양의 압력때문에 자신에게 돈을 덜 보내게 될 것이라고 절망했을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더 깊이는, 아마도 질투의 요인이 있었을 수 있다 ; 테오는 사랑을 찾는데 성공한 반면 빈센트는 오래 지속되는 인간관계를 갖지 못했다”고 베일리씨는 책에 썼다.  이 책은 반 고흐가 프랑스 남부지방에 있는 아를르에서 자신이 ‘노란 집’이라고 부른 곳에 살면서 ‘밝은 색깔’에 매료되기 시작한 시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귀 사건’에 대해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 포함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말했다. 반 고흐는 1888년 12월 23일 밤 자신의 귀를 자른 뒤 이를 신문지로 싸서 들고 베레모를 쓴 채 근처의 사창가로 갔다. 거기에서 최근에 ‘가브리엘르 베를라티에’로 밝혀진 젊은 여성을 만나서 잘린 귀를 건넸다.  베를라티에가 잘린 귀를 보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자 반 고흐는 달아났고 뒤이어 벌어진 혼란이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됐다. 베일리씨는 반 고흐 자신은 이 사건을 “예술가의 단순한 광란”으로 묘사했을 것이라며 귀를 자르면서 동맥이 상해 피를 많이 흘렸을 것이고 고열도 앓았을 것이라고 썼다. 그는 동생의 결혼 소식이 반 고흐를 극단적 행동으로 몰고갔지만 유일한 촉매제는 아니었다고 CNN에 말했다. “반 고흐의 의학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쟁이 있다. 결혼은 방아쇠였을 뿐이다”고 저자는 말했다.  반 고흐를 당시 치료했던 의사는 이 예술가가 간질을 앓고 있다고 믿었으며 최근 전문가들은 압쌍트(프랑스 술) 중독, 정신 분열, 일사병 등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합의되지는 않고 있다고 CNN은 전했다. 또 자해행위는 이 예술가가 보낸 구조요청이었을 수도 있다고 CNN는 추정했다. 반 고흐의 치료기록들을 논의하는 1893년의 한 편지에는 이 네덜란드 인상파 화가가 “환청의 희생자”라는 언급이 있다고 베일리씨는 말했다. 그가 귀를 자른 것은 이 소음들을 꺼보려는 헛된 시도였을 수도 있다고 CNN는 덧붙였다.   반 고흐가 잘린 귀를 들고 만나러 갔던 '베를라티에'라는 여성은 당시 10후반의 소녀로 개에게 물려 광견병 치료를 받았으며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창가 카페의 청소부로 일했던 것으로 영국 BBC가 지난 7월 방영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밝혔다.  이런 사실을 추적한 전직 미술사 교사 버나뎃 머피 씨는 불우한 여성들과 이웃들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됐던 반 고흐가 아마도 이 소녀를 돕기 위해 "종교적 희생"으로 생각하고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겠느냐고 추정했다.    원문보기:  http://www.nocutnews.co.kr/news/4678042#csidx1589c437420bde7b1718a92a5bf32a1     
914    [쉼터] - "검은 악마"의 두얼굴을 가진 커피 댓글:  조회:4462  추천:0  2017-01-02
  [피로회복 이뇨 흥분 뇌의 중추를 활성화하는 커피]   ▶ 이뇨작용, 흥분작용, 뇌의 중추를 활성화 시키는 작용, 긴장작용, 강심흥분약, 피로회복, 머리아픔, 조소화(助消化), 두통목혼(頭痛目昏), 다수호면(多睡好眠), 식적유이(食積油膩), 소변불통(小便不通), 정신적 및 육체적 업무의 능률을 높여주는 그윽한 향기의 검은 악마 대중 음료 커피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시기에 대해서는 서양문명이 들어온 개화기인 대략 1890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채집한 열매의 과육 속에는 '파치먼트'라는 옅은 갈색의 겉껍질과 실버스킨이라는 속껍질에 싸여 있는 씨앗이 2개 들어 있으며, 안팎의 껍질을 벗겨서 햇볕에 말린 것을 '커피원두'라고 부른다.  성분은 알칼로이드(alkaloid)의 카페인(caffeine), 펜토산(pentosan), 지방유 등을 함유한다. 커피에 들어 있는 카페인은 적은 양일 때는 중추에 작용하여 정신적, 육체적 업무의 능률을 높이고 피로 회복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카페인은 일종의 각성제로서 혈관을 수축시켜 천식에도 효과가 있는데, 하지만 부작용으로 지나치게 많이 섭취하면 불안, 흥분, 각성작용으로 인한 집중력장애, 위장장애, 두통, 환각증상, 불면증이 생기고, 더 심하면 맥박이 불안해진다. 적정량을 섭취했을 때 이뇨작용이 있어서 도움이 되지만 고혈압이나 뇌동맥경화증이 있는 사람들은 자주 마시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알려져 있다. 과도한 카페인 섭취에 따른 가장 큰 문제점으로 카페인 중독에 따른 금단증상이 있다. 금단증상으로 집중력감소, 불안, 초조, 우울증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식품의약품안전청의 카페인 일일 섭취기준량은 성인은 400mg이하, 임산부는 300mg이하, 어린이는 체중당 2.5mg(평균 87.5mg)이하로 섭취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처럼 카페인은 커피 외에도 콜라, 초콜릿, 녹차 등에도 들어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장기 어린이들에게 카페인의 각성 효과는 숙면을 방해해 잠자는 동안 가장 활발히 이뤄져야 하는 성장 호르몬 분비를 가로막아 아이들 성장을 저해 할 수 있어 의도적으로 카페인 섭취를 줄이도록 하는 것이 성장기 어린이들에게 좋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커피의 상식에 대해서  177~178면에서는 이러한 기사가 실려있다. [coffee의 상식 커피는 명문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주는 기호품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음료이다. 커피의 맛과 향기를 따를 만한 차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 커피가 임상에서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① 커피는 말초 혈관(명문)을 수축시키는 작용을 한다. 말초 혈관을 수축시키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면 혈액순환이 빨라진다. 혈액 순환이 빨라지면서 일시적으로 신진대사가 잘 되어 상쾌함을 느끼고 피로도 가시게 된다. 따라서 피로하면 누구나 커피를 찾게 된다. 그러나 커피를 많이 또 오래 마시게 되면 혈관이 긴장수축으로 혈압이 상승한다. 아울러 혈관의 수축으로 인해 유발되는 여러 가지 증상이 오게 되고 심장의 부담이 증가되어 심비대가 온다. 혈압이 낮은 사람에게는 혈압을 높여 주기 때문에 아주 좋은 차가 되고 약이 될 수도 있지만 고혈압인 경우 증세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신경이 예민한 사람은 커피가 뇌 중추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에 밤에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② 명문의 혈관 수축은 - 뇌경색(중풍)을 오게 한다. - 심근경색을 오게 한다. - 혈압을 상승시킨다. - 골다공증이 빨리 온다. - 정력이 약해진다. 이상과 같이 커피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어 결코 남용해서는 안 된다. 맥진을 공부할 때 현맥은 혈관의 긴장, 수축된 맥인데 이 현맥을 만들기 위해서 커피를 마시게 한다. 현맥이 나오는 환자는 커피를 마시면 병세가 더욱 악화된다. 따라서 어떠한 환자나 현맥이 나오는 환자에게는 절대로 커피를 마시게 해서는 안된다. 커피는 명문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③ 커피에 주의해야 할 사람 - 혈압이 높은 사람 - 혈액순환장애로 손발이 찬분 - 정력이 약한 분 - 중풍 치료 받는 환자 분 - 심장 질환을 앓고 있는 분 - 골다공증이 있는 분 - 퇴행성 관절 질환을 앓고 있는 분 - 피부에 백납이 있는 분 - 장이 냉한 분 - 손발이 냉한 분 이 상과 같이 커피는 혈관(명문)을 수축시키기 때문에 절대 남용해서는 안된다.] 커피, 그윽한 향 ‘검은악마’ 의 유혹 활력·중독의 두얼굴 ‘커피’ ‘약물 중독’하면 제일 먼저 대마초나 히로뽕 같은 무시무시한 마약이 떠오르지만, 세계적으로 가장 즐겨 마시는 음료인 커피도 미약하나마 중독성 물질중 하나다.  미국 사람 한명이 1년 동안 마시는 커피를 1.5리터 콜라병에 담으면 그 개수는 무려 86통이나 된다. 우리나라 사람은 그 보단 좀 덜하지만, 거리마다 커피숍이 즐비하고 매시간 텔레비전 광고에 유명스타들이 등장해 “나와 함께 마셔요”를 속삭이는 걸 보면, 한국에서도 커피는 가장 인기 있는 음료중 하나다.  커피만의 특별한 매력은 ‘그윽한 맛과 향기’에 있다. 커피광으로 유명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이 남긴 명대사 “마지막 한 방울까지 좋았다”는 100년 동안 커피회사 맥스웰하우스의 광고문구로 사용될 정도였다.  여기에 덧붙여, 커피만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각성 효과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은 흐린 정신을 맑게 해주고 밤에 즐기는 커피 한 잔은 졸음을 쫓고 활기를 되찾게 도와준다.  피로물질 ‘아데노산’ 억제  흐린 정신 맑게하고 졸음 쫓아  뇌 기능 자체 높여주지는 않아  하루4잔 넘으면 ‘독’  세포들이 에너지를 사용하면 그 부산물로 ‘아데노신’이란 물질을 만드는데, 아데노신이 체내에 많이 쌓이면 우리 몸은 피로를 느끼고 각성중추를 자극하던 신경전달물질이 약화되면서 졸음이 온다. 흔히 열심히 일하고 나면 ‘피로가 쌓인다’는 표현을 쓰는데, 의학적으로 보자면 아데노신이 쌓이는 셈이다. 그런데 커피에 들어있는 카페인은 아데노신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막는 물질이니, 졸음이 사라질 수밖에.  바로 이런 커피의 각성 효과 때문에, 프랑스의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는 밤마다 커피 잔을 연거푸 비우며 74편의 장편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커피와 함께 밤샘 작업을 한 뒤 ‘커피 칸타타’라는 명곡을 남길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커피가 뇌 기능 자체를 향상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커피가 뇌의 전반적인 각성수준을 높이고 주의력을 강화한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것이 논리적 추론이나 이해력, 복잡한 계산을 잘 하게 도와준다는 증거는 없다.  다시 말해, 커피 덕분에 임마누엘 칸트나 장 자크 루소 같은 커피마니아들의 정신이 한결 명민해 질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들은 커피를 안 마셨더라도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거라는 얘기다.  커피의 효과나 부작용은 사람마다 그 편차가 굉장히 크다. 낮에 마신 커피 한잔 때문에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밤늦게 커피를 마시고도 1시간 후면 깊은 잠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카페인에 대한 감수성이 사람마다 다른 이유는 아데노신과 반응하는 수용체의 숫자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편차는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커피를 여러 잔 마시고도 잠을 잘 잔다고 해서 ‘미련한 사람’이라고 놀리지 마시길.  매일 아침 커피를 습관처럼 즐기는 사람들은 가끔 ‘내가 커피 중독은 아닐까’ 걱정하게 된다. 커피는 술이나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하지 않아서 ‘중독’ 대신 ‘습관성’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지만, 확실히 중독을 유발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머리가 아프거나 피로가 덜 풀린 것 같고, 예전과 비슷한 효과를 얻기 위해 점점 많은 양의 커피를 마셔야 한다면 ‘커피 중독’일 가능성이 있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아서 줄이려고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면 ‘커피 중독’일 가능성이 높으니 치료가 필요하다.  커피 한잔에 들어있는 카페인의 양은 평균 100밀리그램. 카페인의 치사량은 5천 밀리그램이니 커피 50잔을 연달아 들이켜야 도달할 수 있는 양이다. 커피에 중독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대개 하루에 15잔 이상 마시지는 않기 때문에 커피 먹다가 죽을 염려는 없다. 하지만 심장발작과 같은 부작용을 줄이고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서라도 하루에 4잔 이상은 안 마시는 것이 좋다.  활력과 중독의 두 얼굴을 가진 커피, 적당히 마시고 현명하게 즐기는 지혜가 필요하다.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시스템학과 및 콜롬비아의대 정신과 조교수        
913    [쉼터] - 명인들과 커피 중독자들 댓글:  조회:4665  추천:0  2017-01-02
[헤럴드경제=육성연 기자= “아, 이제 더 이상 커피 잔을 들 수 없구나.”  죽음을 앞둔 루소의 마지막 말은 가족도, 친구도 아닌, 바로 커피였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녀도 몇년 지나면 식상해지기 쉬운 법, 대체 커피의 매력은 얼마나 치명적이길래 그토록 오랫동안 사람들을 중독시켜 온걸까. 커피는 17세기 베네치아를 통해 유럽에 처음 소개된 이래, 서양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해왔다. 책을 읽거나 생각할 여유까지 주는 커피는 주의력을 모아주고 창의력까지 높여 사유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왔다. 그래서일까. 역사 속 많은 위인들이 커피를 즐긴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커피 폐인’ 볼테르=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계몽주의 선구자 볼테르는 하루 50잔의 커피를 소비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쯤되면 그는 커피마니아가 아닌 ‘커피 폐인’이다. 볼테르(Voltaire) 와 함께 했던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역시 커피 마니아로서, 프랑스 시민혁명 사상적 근간은 두 사람의 커피타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 있는 카페 프로코프에는 단골이었던 두 사람의 테이블을 300년 넘게 보관하고 있다. ▶‘지못미 커피광’ 발자크 =볼테르가 하루 50잔의 커피를 마시고도 84세까지 장수한 걸보면 그는 분명 타고난 커피체질이다. 반면 커피체질도 아니면서 용감하게 커피를 사랑하다 죽은 이도 있다.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 (Honore de Balzac)는 하루에 커피를 40잔 이상 마셨는데 이후 그는 과로와 카페인 중독이 겹치면서 숨졌다. 사실 발자크의 ‘커피광’ 타이틀은 안타까운 사연이 숨겨져 있다. 유부녀 백작부인에게 반했던 33세 발자크는 남편이 죽고나면 결혼하겠다는 그녀와의 약속때문에 결혼 비용을 마련하려 하루 15시간 이상씩 글을 썼다. 그래서 그는 잠을 쫓기 위해 더 커피를 마셔야만 했다. 결국 18년에 걸친 구애끝에 그는 51세때 백작부인과의 결혼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카페인 과다복용과 과로로 결혼한지 5개월만에 죽고말았다. 한 프랑스 통계학자는 발자크가 마신 평생 커피가 무려 5만잔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내가 제일 잘끓여’ 브람스= 독일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는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악보 종이, 담뱃갑과 함께 커피 추출기부터 찾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아무도 자신의 커피를 끓이지 못하게 하면서 그 누구도 자신만큼 커피를 잘 끓이지 못한다고 자만하기도 했다. ▶카페 ‘진상고객’ 사르트르=프랑스 실존주의 사상가인 장 폴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는 카페를 사무실처럼 이용한다는 코피스(Coffee+Office)족이었다. 카페를 집필실로 삼았던 그는 파리 생제르맹에 위치한 카페 되마고를 10년넘게 드나들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찾아와 커피한잔만 시켜놓고 반려자와 테이블 두개를 차지한 채 진을 쳤으니 카페 주인에게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재능 기부’ 바흐=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는 자신의 작곡 재능을 바쳐 커피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커피 칸타타‘로 알려진 ‘칸타타 BMV211’는 세계 최초로 커피 광고 음악으로 사용됐다. 이 곡의 내용은 커피를 끊으라고 강요하는 아버지와 이를 거부하는 딸 간의 실랑이다. 특히 이 곡의 작사자인 시인 피칸다는 “천번의 키스보다 황홀하고 마스카트 포도주보다 달콤하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커피맛 좀 아는 남자’ 고종=고종황제는 지대한 커피사랑때문에 목숨까지 건질수 있었다. 1898년 고종황제는 식사를 마친후 황태자(훗날 순종)와 커피를 마셨다. 하지만 몇 모금 마시던 그는 평소와 향이 다르다면서 곧바로 밷어내기까지 했다. 반면 그 향을 구별하지 못했던 황태자는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앙심을 품었던 김홍륙이 커피속에 아편을 타 암살을 시도했던 것. 커피 향을 바로 구별할 정도로 남달랐던 커피 사랑이 그를 살렸다. ▶‘커피 된장남’ 베토벤=커피마니아로 브람스· 바흐만 언급되면 서운해 할 루드비히 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독일 작곡가인 그는 아침마다 정확히 60알의 원두를 세어 커피를 추출해 마실만큼 커피 맛에도 엄격했다. 손님이 오시는 날에는 손님 수만큼 120개, 180개…일일이 세어 커피를 대접할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커피는 대중음료가 아니었기에 커피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난했던 그였지만 늘 생활비에서 커피값을 떼어 원두와 분쇄기를 구입했다. 그런 원두를 아침마다 한알한알 세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그는 정말 눈물나는 커피마니아이다. =======================   ♥ 모카 마타리 커피를 사랑한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3.30 ~ 1890.7.29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명인   몇 점 되지 않습니다.  그는 커피의 여왕이라 부르는 예멘 모카 마타리를 즐겨마셨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유명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 중 그의 커피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Café Terrace, Place du Forum, Arles)'   빛 받지 못했던 그의 삶이 빛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가난함 속에서도  빈센트 반 고흐.       ♥ 커피 칸타타의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3.21 ~ 1750.7.28       독일 출생, 음악의 아버지 바흐. 음악적 업적을 이룬 음악가입니다.  바로 , 커피 칸타타 'Coffee Cantata' !  커피와 클래식의 즐거운 조화, 인상적인 칸타타입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           ♥ 사랑을 지키기 위해 커피에 빠진 발자크 1799.05.20 ~ 1850.08.18 [ 커피가 나폴레옹의 부대처럼 ...   이윽고 종이는 검은 잉크로 물든다.  일단 창작의 몸부림이 시작되면
912    [쉼터 - 천재 작가들의 유별난 글쓰기 <<비법>> 댓글:  조회:6089  추천:0  2017-01-02
        천재 작가들은 글을 술술 쓸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들 역시 글을 쓰기 위해  이상야릇하고 유별나고 엽기적이기까지 한 방법들을 동원하는데요. 지금부터 천재 작가들의 유별난 글쓰기 비법을 전수합니다. 여러분도 글쓰기의 고수가 되어보세용^^...   (* 주의 : 함부로 따라하지 마세요)               1  누워서 쓰기     * 침대에 누워 있는 마크 트웨인       이 방법을 애용한 작가로는 마크 트웨인 외에도  조지 오웰, 우디 앨런, 마르셀 프루스트, 이디스 워튼 등이 있습니다.   미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트루먼 카포티는 이 방법에 완전히 길들여진 나머지, 눕지 않으면 생각이 떠오르지도, 글을 쓰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중독성이 강한 권법이므로 입문 전에 다시 한번 고려해보시길 바랍니다.             톰 소여의 모험 작가 마크 트웨인 출판 더클래식 발매 2014.04.21   허클베리 핀의 모험 작가 마크 트웨인 출판 민음사 발매 1998.08.05           ​ ​ 2  서서 쓰기   * 서서 글을 쓰고 있는 헤밍웨이     누워서 쓰기만큼이나 작가들에게 사랑받는 글쓰기 자세입니다. 이 권법의 고수로는, 헤밍웨이, 찰스 디킨스, 루이스 캐럴, 필립 로스가 있지요.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으면, 척추에도 무리가 올 뿐만 아니라 소화도 안 되고 혈액순환이 안 돼 다리가 퉁퉁 붓기도 하죠. 건강이 염려되는 분이라면, 이 권법을 추천드립니다. 다리 근육 강화에 특히 좋은 방법!     ​ ​ ​  킬리만자로의 눈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2.04.10   노인과 바다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출판 더클래식 발매 2015.07.01               3  거꾸로 매달리기     * 발을 땅에 붙이고 있는 댄 브라운   ​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신다구요? 이 방법을 추천합니다. 이 권법의 유일무이한 세계 최강자는 바로 『다빈치 코드』를 쓴, 댄 브라운입니다.   댄 브라운은 글길이 막히면 헬스클럽에 가서 거꾸로 매달리기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안정되고 글쓰기에 집중도 잘 되서 자주 헬스클럽을 찾는대요.   좀 이상해 보이는 방법이지만, 물구나무 서기가 건강에 좋은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다빈치 코드 1 작가 댄 브라운 출판 문학수첩 발매 2013.12.11   인페르노 1 작가 댄 브라운 출판 문학수첩 발매 2013.07.05           ​ ​  4  벽 보기          *프랜신 프로즈Francine Prose       흡사 한국의 주부처럼, 남편의 잠옷 바지를 입고 글을 쓴다고 밝힌 프랜신 프로즈! 그녀 역시 ​독특한 글쓰기 비법의 소유자인데요. 바로 벽을 보고 글을 쓴다고 합니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에는 옆건물의 벽을 향해 뚫린 커다란 창문이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주의가 산만해지는 걸 막기 위해 책상을 창가로 옮기고 창밖에 보이는 높은 벽돌 벽을 바라보며 글을 쓴다고 해요. 단조로운 환경을 만들면 아주 긴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글을 쓸 수 있다고 합니다.       ​ ​   매혹의 조련사 뮤즈 작가 프랜신 프로즈 출판 푸른숲 발매 2006.06.05   탐식 작가 프랜신 프로즈 출판 민음in 발매 2007.05.23   ​     ​     ​  5  카드에 쓰기     *나보코프와 그가 쓴 색인 카드. 크기: 3 x 5 inch   ​ ​ ​장편소설을 색인카드에 썼다는 독특한 이야기입니다. 나보코프는 상자에 색인카드를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글을 썼다고 합니다. 이 이상한 방법의 장점은 바로, 색인카드 위치를 이동시키면 쉽게 사건 순서를 바꿀 수 있다는 점! 그는 갑자기 생각이 떠오를 때를 대비해 베개 아래에도 카드를 놓아두었습니다.   색인카드나 포스트잇은 작품의 구상 단계에서 아주 유용한 도구라 많은 작가들이 애용한다고 합니다.   ​      ​ ​     롤리타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3.01.30   오리지널 오브 로라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4.03.20           ​ ​ ​ ​  6  혼신의 연기하기     * 열정이 넘치는 아론 소킨     아론 소킨은 잘 아시는 영화 와 미드 의 극작가인데요. 글을 쓰다가 코가 부러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 그는 쓰고 있는 작품의 대사 부분을 혼자 거울을 보며 연기하길 좋아한다고 합니다. 연기하다 흥분한 나머지 결국 머리를 거울에 부딪치고 말았대요.   지나친 몰입은 금물입니다. 이 권법은 꼭 혼자만의 공간에서 따라하십시오.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요 ^^     ​ ​ ​ ​  ​ 소셜 네트워크 감독 데이빗 핀처 출연 제시 아이젠버그, 앤드류 가필드, 저스틴 팀버레이크, 아이미 해머 개봉 2010 미국   뉴스룸 연출 아론 소킨, 스콧 루딘, 그렉 모톨라 출연 크리스 초크, 올리비아 문, 트리우 트란, 제프 다니엘스, 에밀리 모티머, 샘 워터스톤, 알... 방송 2012 미국             ​  7  매일 커피 50잔씩 마시기     * 오노레 드 발자크와 커피     오노레 드 발자크는 매일 50잔의 커피를 마시며 글을 썼습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희극』을 쓸 때 그는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해요. 발자크 외에도 커피에 중독된 작가가 또 있었으니, 바로바로 볼테르!! 하지만 발자크보다는 한 수 아래라 하루에 겨우(?) 40잔을 마셨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의 야근과 시험 기간을 책임지는 카페인의 힘, 무시할 수 없죠?   ​ ​       사라진느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1997.11.05   고리오 영감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 출판 을유문화사 발매 2010.04.25             ​ ​    8  나체로 쓰기                  * 빅토르 위고     마감이 코앞이라면 이 방법을 써보시기 바랍니다.   빅토르 위고는『파리의 노트르담』을 쓸 때 일정이 아주 빡빡했습니다. 그는 하인을 시켜 자기 옷을 전부, 모조리, 싹 가져가 숨겨버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집 밖을 나갈 수 없고 집안에 틀어박혀 글만 쓸 테니까요. 위고는 그렇게 나체로 명작을 썼고, 추울 때는 맨몸에 담요만 둘둘 두르고 있었다고 해요.   이 방법을 애용한 현대 작가로는 존 치버가 있습니다. 그래도 존 치버는 팬티는 입었다고 합니다. ^^;;;   ​ ​   ​  파리의 노트르담 작가 빅토르 위고 출판 작가정신 발매 2010.01.17   레 미제라블 1 작가 빅토르 위고 출판 민음사 발매 2012.11.05   ​   ​              9  메이크업으로 기분전환       * T. S. 엘리엇 (합성)       T. S. 엘리엇은 『황무지』를 완성한 후부터 얼굴과 입술에 초록색으로 화장을 하고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20세기 초반에 영국 시인 겸 소설가인 오스버트 시트웰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창백했지만 분명히 초록색이었다... 은방울꽃으로 만든 가루였다." 고요.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에는 '그가 입술까지 칠했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기록되어 있대요. 그가 왜 초록색 파우더를 얼굴에 발랐는지 루머가 많지만 확실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현대적이고 재미있는 사람으로, 은행 직원이 아니라 시인으로 보이고 싶어했다는 증인들의 증언이 눈에 띄네요.             황무지 작가 T.S.엘리엇 출판 민음사 발매 1974.05.01     ​   ​ ​   ​ ​ ​  [출처] [공유​] 함부로 따라하지 마세요! 천재 작가들의 유별난 글쓰기 비법|작성자 cureryu  
911    [쉼터]중국인 해외에 나가지 않고도 명화들을 감상할수 있다 댓글:  조회:4136  추천:0  2017-01-02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7040만 달러에 팔린 모딜리아니의 '누워있는 나부'. 모딜리아니 작품의 역대 경매가로는 최고액이며 경매 사상 두번째 고가로 낙찰됐다.   세계적 콜렉터로 주목받고 있는 상하이의 억만장자 류이첸.   1980~90년대 주식 투자로 엄청난 부 일궈  경매 나오자 에이전트에 "무조건 잡아라"  세계 경매시장서 두번째 비싼 금액 낙찰  "가장 아름다운 누드 작품" 각별한 애정  현재 상하이서 롱 뮤지엄 등 2곳 운영  향후 세계적 관광 명소로 키우는 게 꿈 2015년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누워있는 나부'(Nu Couche)를 1억7040만달러에 사들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중국인 류이첸(Liu Yiqian:52)이 화제다. 이번 경매에서 모딜리아니의 나부는 세계 경매시장에서 두번째 비싼 금액으로 낙찰되는 기록을 세웠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팔린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Les Femmes d'Alger)로 지난2015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7940만 달러에 낙찰됐었다.  상하이에 거주하며 용(龍 Dragon)이라는 뜻의 '롱 뮤지엄'(Long Museum)을 운영하는 류이첸은 이미 세계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돈 아끼지 않고 걸작품을 사들이는 거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이번 경매에서는 거래 당시 이름 밝히기를 꺼렸다. 이번 경매는 세계 최대의 경매업체인 크리스티가 '예술가의 뮤즈'라는 구미 당기는 테마로 마련한 특별 경매. 워낙 많은 콜렉터가 눈독을 들이고 있어 혹시라도 성사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크리스티 특별 경매에는 한국인 미술품 딜러 신홍규씨도 응찰, 한때 1억4000만달러로 낙찰되는 듯 했으나 결국 전화로 3000만달러를 더 부른 류이첸에게 돌아갔다.  이제 원하던 작품을 손에 넣고 곧 자신의 상하이 뮤지엄에서 작품을 공개할 꿈에 부풀어 있는 그는 자신이 모딜리아니 걸작의 소장가임을 자신만만하게 밝히고 있어 미술계 최고 화제의 인물이 되고 있다.  그는 모딜리아니의 이 누드화가 크리스티에 나왔다는 뉴스를 듣고는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금액에 구애받지 말고 이 그림을 손에 넣도록 하라"고 요구했다.  작품 낙찰 후 그는 "모딜리아니는 다른 화가들에 비해 여인의 나체를 많이 그리지 않아 그의 누드화는 모두 훌륭하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이 작품은 고혹적이고 예술성이 뛰어나다"며 이 작품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설명했다. 모딜리아니가 1917년- 1918년에 캔버스에 그린 '누워있는 나부'는 나체의 여인이 붉은색 소파 위 푸른색 쿠션에 누워있는 유화. 모딜리아니가 그린 누드화는 35점 가량 되며 이 그림은 모딜리아니가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풍기 문란으로 화랑 주인과 함께 경찰에 연행됐을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작품. 당시 전시회가 열린 갤러리 밖에는 이 작품을 보려 행인이 몰려 경찰이 전시회 폐쇄를 명령하기까지 했다.  매우 가난하고 병약했던 모딜리아니는 이 전시회를 낭패로 마치고 3년 후인 36세 나이에 파리의 한 병원에서 결핵성 뇌막염으로 숨을 거뒀다.  최근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를 가진 류이첸은 "상당히 자랑스럽다"고 세상이 주목하는 자신의 콜렉션을 밝히며 "중국인이 해외에 나가지 않고도 서양의 걸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돕는게 꿈"이라고 말한다.  류이첸이 특별히 주목받고 있는 것은 젊은 시절을 매우 힘겹게 살아온 어려운 과거 때문.  중국의 문화혁명 직전 상하이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장사에 뛰어드는 길이 최선이라는 생각에 중학교를 집어치웠다. 이런저런 장사 경험을 하며 청년기를 보낸 그는 한때 거리에서 가죽 가방을 팔기도 했으며 택시 운전사로 하루 종일 상하이를 돌며 관광객을 실어날랐다. 1983년 샹하이 노르말 대학에서 타이피스트로 일하던 아내 왕웨이를 만나 결혼했을 때도 그는 여전히 가난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막 자유 경제의 문턱으로 진입하던 중국이 그에게 기회를 줬다. 투자에 손을 댈 때마다 그는 대박을 터트렸던 것. 특별히 주식 투자를 통해 그는 엄청난 부를 일궜다.  '포브스'에 의하면 선라인 그룹(Sunline Group)이라는 홀딩 컴퍼니의 회장인 그의 현재 자산은 12억2000만 달러. 부동산 개발회사와 제약회사 등을 운영하는 그는 현재 베이징 카운슬 인터내셔널 옥션의 최대 투자자다. 그가 미술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예술적 식견이 높은 아내의 덕이 크다.  큰 돈 번 주변 친구들이 너도나도 개인 비행기를 몰고 다니며 위세를 떨자 류이첸 역시 비행기를 구입하려 했을 때 현명한 그의 아내 왕웨이는 "그럴 돈 있으면 차라리 뮤지엄을 세워 중국인들에게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자"며 설득했다.  현재 그가 운영 중인 뮤지엄은 두 곳. 앞으로 한 곳을 더 지을 계획이다. 이들 부부의 꿈은 자신들이 세운 뮤지엄을 세계적 관광 명소로 키우는 것.  최고의 현대 미술품을 보기 원하는 사람들이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찾는 것 처럼 이제는 중국 상하이 '롱 뮤지엄'으로 오게 만들 것이라고 요즘도 매일 그는 세계적 걸작품을 찾기 위해 전세계 경매시장으로 눈을 돌린다.  /유이나 기자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최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모딜리아니의 그림 '누워있는 나부'를 1억 7천40만 달러(약 1천967억 원)에 낙찰받은 중국 억만장자가 그림 값을 결제하면서 쌓일 신용카드 포인트로만 평생 비행기 일등석을 공짜로 탈 수 있을 전망이다. 모딜리아니 그림을 거액에 낙찰 받은 중국인 류이첸 (AP=연합뉴스 자료사진)   2015년 11월 23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그림을 낙찰받은 류이첸(劉益謙)은 자신의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센추리온 카드로 그림 가격을 지불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블랙카드'로 불리는 이 카드는 사용금액이 많은 극소수의 고객에게만 발급되는 카드로, 카드 사용한도가 없으면서 다른 신용카드와 마찬가지로 사용금액에 따라 포인트가 쌓인다.     보통 1달러당 1포인트가 쌓이기 때문에, 미술품 경매 사상 2번째 최고가인 이번 모딜리아니 그림 결제만으로 1억7천40만 포인트가 한꺼번에 쌓이게 되는 것이다. 여행 포인트 정보 사이트인 더포인츠가이닷컴의 잭 호니그는 만약 류씨가 이 포인트를 싱가포르항공의 마일리지로 전환할 경우 일등석을 타고 미국과 유럽 간을 3천 번 여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쌓이는 포인트로만 류씨 가족이 평생 일등석 공짜 여행을 할 수 있는 셈이다. 실제로 류씨는 이번 그림 낙찰 이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카드 포인트로 온 가족이 평생 여행을 다닐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류씨는 이에 앞서 지난해 소더비 경매에서 낙찰받은 명나라 희귀술잔을 3천600만 달러(415억 원)에 구입할 때도 이 카드를 사용해 결제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쌓인 포인트만도 엄청나다. 그렇다고 15억 달러(1조 7천307억 원)의 천문학적 자산을 지닌 류씨가 공짜 항공권 때문에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자국민이 한 해 5만 달러 이상을 해외에 반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어 이 이상의 금액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카드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류씨가 명화도 사고 공짜 항공권도 얻게 된 반면 크리스티는 결제금액의 2∼3%에 해당하는 막대한 수수료로 물게 생겼다. 크리스티가 내는 수수료만 수백만 달러에 달하기 때문에, 카드사로서는 류이첸에게 어마어마한 포인트를 내줘도 전혀 손해가 아니라고 AP는 덧붙였다. =============================== ====================덤으로 더 그림작품 감상하기@@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년 ~ 1920년   이탈리아 화가. 베네치아·피렌체 미술 학교에서 공부하고 파리로 나가 세잔의 영향을 받음. 일생을 가난에 시달렸고, 몸도 약했으며 술과 마약을 즐겨 36세에 요절함. 파리의 뒷거리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및 여성의 나체 등을 즐겨 그렸다.   모딜리아니는 수많은 여인을 만났지만, 최후에 약혼녀가 된 잔느 에뷔테른느는 어떤 여자와도 달랐다. 잔느는 모딜리아니에게 그 어떤 계산도 없는 순진무구한 사랑을 바친 유일한 여인이었다. 한 눈에 반해 열렬히 사랑했지만 땔깜마저 없는 가난을 겪는  잔느는 친정으로 돌아가 부모에게 붙잡혀 그후 두 사람은 만날 수도 없이 요양병원에서 외로히 숨졌다.  난방비마저 없이 가난하던 그의 그림 하나가 2천억 원 가까운 거액에 팔렸다니 아이러니다.  2천억 원 가까이에 낙찰된 '누워 있는 나부'는 마지막에 제시됨.           모딜리아니 `누워있는 나부`, 1972억에 낙찰…역대 2위 /한국경제 2015.11.10   이탈리아의 요절한 천재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의 회화 '누워 있는 나부(Nu couche)'가 9일 밤(현지시간)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7040만달러(1972억원·수수료 포함 가격)에 낙찰됐다. 전 세계 미술품 경매 사상 역대 2위에 해당한다.  지난 5월 역대 최고가 1위를 갈아치운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 낙찰가(1억7936만달러)에 근접한 가격대.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탈리아 미술품 수집가인 잔니 마티올리의 딸 라우라 마티올리 로시가 내놓은  이 작품은 경매 시작 후 9분간 열띤 경합을 벌이도록 했다. 모딜리아니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누워 있는 나부'는 30호 정도의 크기로 1917∼1918년께 캔버스에 그린 유화. 붉은색 소파 위 파란색 쿠션에 누워 있는 나체의 여인을 담았다.  프랑스 파리에 처음 전시됐을 때 논란이 일었고, 군중이 창밖에 몰려들어 경찰이 전시 폐쇄를 명령하기도 했다. 한국인 미술품 딜러 신홍규 씨가 1억4000만달러(약 1620억원)를 불러 한때 낙찰되는 듯했으나 중국 상하이의 롱미술관 설립자인 미술품 수집가 류이첸과 왕웨이 부부가 전화로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해 결국 작품의 주인이  됐다. 이들 부부의 입찰 가격을 듣고 신씨는 고개를 흔들며 포기했다고 WSJ는 보도했다.  
909    "억"소리가 나는 中國발 축구선수영입료, 이건 아닌데 "악" 댓글:  조회:5968  추천:0  2016-12-31
  [인터풋볼] 유지선 기자= 첼시의 안토니오 콘테 감독도 ‘억’소리 나는 중국발 슈퍼머니에 우려를 표하고 나섰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향한 중국의 파격적인 제안에 적잖이 놀란 모습이다.  호날두는 최근 중국 팀으로부터 파격적인 연봉이 포함된 영입 제의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호날두의 에이전트인 호르헤 멘데스는 30일 ‘스카이 이탈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팀으로부터 3억 유로(약 3796억 원)의 제안을 받았다. 연봉도 1억 유로(약 1,265억 원) 이상에 달하는 제안이었다”면서 “그러나 우리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고 밝혔다. 중국 팀들이 잇달아 스타 선수들에게 손을 내밀면서 겨울 이적시장도 요동치고 있다. 최근에는 오스카가 6,000만 유로(약 759억 원)의 이적료로 상하이 상강 유니폼을 입게 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콘테 감독은 오스카가 막대한 이적료를 기록한 덕분에 수혜자가 되기도 했지만, 현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다는 입장이다.   콘테 감독은 30일 ‘ESPN’과의 인터뷰에서 “이것(멘데스가 밝힌 중국 팀의 제안)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액수의 돈을 이야기하고 있다”면서 “믿기 싫은 일이다. 믿고 싶지 않다. 최근에는 카를로스 테베스의 이적 소식도 들려왔다”며 중국 팀들의 통 큰 투자에 혀를 내둘렀다.  이어 그는 “선수 입장에서 이런 제안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돈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막대한 이적료가 오가는 현 상황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우려를 표했다.  ==============================   ⓒAFPBBNews = News1 [스포츠한국 김경동 기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1·레알 마드리드)가 중국 구단으로부터 천문학적인 금액을 제시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호날두의 에이전트인 호르헤 멘데스는 30일(이하 한국시각) 스카이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모 구단이 레알 마드리드에 이적료 3억 유로(약 3816억원), 호날두에 연봉 1억 유로(약 1272억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영입을 시도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돈이 모든 것은 아니다"라며 "호날두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행복해하고 있다. 중국행은 불가하다"라며 호날두의 중국 이적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어 "중국이 새로운 축구시장인 것은 맞다"라며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면 호날두의 중국행은 불가능하다. 호날두는 세계 최고 선수인만큼 영입 제의가 오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호날두는 현재 레알에서 주급 36만5000파운드(약 5억4000만원)를 받고 있다. 연봉으로 치면 1903만파운드(약 281억원)인데 이에 약 4배가 넘는 연봉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908    [쉼터] - 올해 축구는 메시의 해(년)???... 댓글:  조회:3701  추천:0  2016-12-31
[스포츠Q(큐) 박상현 기자]  역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레알 마드리드)의 트로피 싹쓸이에 제동을 건 것은 라이벌 리오넬 메시(FC 바르셀로나)였다. 메시가 영국 스카이스포츠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에 올랐다. 메시는 30일(한국시간) 영국 스카이스포츠가 발표한 올해의 선수에서 1위를 차지했다. 메시는 영국 축구 전문 통계사이트인 후스코어드닷컴의 평점에서 8.3205점으로 호날두(8.0523점)을 4위로 밀어내고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 리오넬 메시(왼쪽)가 30일(한국시간) 영국 스카이스포츠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에 뽑혔다. 이로써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오른쪽)로 일방적으로 기울어지던 FIFA 올해의 선수상 주인공 경쟁도 다시 팽팽해지게 됐다. [사진=AP/뉴시스] 이와 함께 새해 1월 10일 발표되는 국제축구연맹(FIFA) 올해의 선수(베스트 플레이어)가 누가 될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FIFA는 지난 2일 발표한 최종후보로 메시와 호날두, 앙투안 그리즈만(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등 3명을 뽑았다. 그러나 그리즈만은 올해 아무런 트로피도 팀에 안기지 못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는 물론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고 2016 유럽축구선수권(유로 2016)에서도 포르투갈에 져 프랑스의 정상 등극을 이끌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FIFA 올해의 선수상은 역시 호날두와 메시의 2파전으로 압축된다고 볼 수 있다. 호날두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UEFA 챔피언스리그와 FIFA 클럽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고 포르투갈의 유로 2016 정상을 견인했다. FIFA 클럽 월드컵에서는 골든볼까지 받았다.   그러나 메시도 만만치 않다. 바르셀로나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우승을 이끌었다. 또 코파 아메리카 센테나리오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지난해에 이어 코파 아메리카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것은 오히려 '동정표'로 작용할 수도 있다. 특히 2012년에는 바르셀로나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와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음에도 메시가 FIFA 발롱도르를 받았다. 오히려 2011~2012 시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우승은 레알 마드리드가 차지했음에도 메시가 호날두를 앞섰다.   호날두와 메시는 전세계 축구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라이벌이다. 역대 수많은 축구 전설이 있었지만 동시대를 이렇게 양분하는 경우는 적었다.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가 대표적인 라이벌로 꼽히지만 이들은 같은 시대에 뛰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오랫동안 올해의 선수 타이틀을 양분해왔던 메시와 호날두의 라이벌 맞대결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메시의 스카이스포츠 올해의 선수 수상으로 호날두 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울었던 FIFA 베스트 플레이어상 주인공 경쟁도 다시 팽팽해졌다./박상현 기자
907    [쉼터] - 올해 축구는 호날두의 해(年)???... 댓글:  조회:4378  추천:0  2016-12-31
  최근 일본에서 열린 클럽월드컵에서 골든슈(득점왕)에 오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AFPBBNews) [이데일리 김인오 기자] ‘특급 골잡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레알 마드리드)가 각종 ‘올해의 선수’ 부문을 석권하고 있다.   호날두는 28일(한국시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린 ‘글로브 사커 어워드’에서 올해의 선수에 선정됐다.  유럽축구에이전트협회(EFAA)와 유럽클럽연합(ECA)이 주관하는 글로브 사커 어워드는 한 해 동안 가장 뛰어난 활약을 선보인 선수, 감독, 팀 등에 주는 상이다. 2014년 이 상을 수상한 호날두는 2년 만에 다시 트로피를 안았다.  바쁜 일정으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호날두는 화상 연결로 “올해는 최고의 한 해였다. 내년에도 올해처럼 좋은 결과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호날두는 하루 전인 27일 ‘유럽 올해의 스포츠 선수상’을 받았다. 이 상은 폴란드 PAP통신이 주관하고 27개국 유럽 언론 기관의 투표로 스포츠 전 종목을 대상으로 최고 선수를 정하는 권위 있는 상이다. 호날두는 204점을 기록해 테니스 선수 앤디 머레이(180점)를 제쳤다.  지난 13일엔 리오넬 메시(FC바르셀로나)를 제치고 개인 통산 네 번째로 발롱도르(Ballon d‘Or)를 수상했다. 최근 열린 클럽월드컵에서는 골든슈(득점왕)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또한 내년 1월에 발표하는 국제축구연맹(FIFA) 베스트 플레이어 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유럽 현지 매체 유로뉴스는 “호날두가 연말 시상식을 싹쓸이하고 있다. 트로피 전시하는 방의 크기를 늘려야 할 것 같다”고 보도했다. 호날두가 발롱도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서울=포커스뉴스)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리가 레알 마드리드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포르투갈)가 '2016 발롱도르'의 주인공이 됐다. 호날두는 지난 12월 13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프랑스 축구 전문지 '프랑스 풋볼(France Football)' 주최 '2016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최종 수상자로 선정됐다. 호날두는 지난 2008년을 시작으로 2013년, 2104년에 이어 네 번째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    [스포탈코리아] 김진엽 기자= 레알 마드리드 지네딘 지단 감독이 올해 발롱도르 수상자로 팀 에이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1)를 예상했다. 영국 매체 ‘BBC’는 28일(현지시간) “지단 감독은 호날두가 발롱도르를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라며 지단 감독의 인터뷰를 보도했다. 최근 국제축구연맹(FIFA)과 파트너십을 끝낸 '프랑스 풋볼'은 올해부터 독자적으로 발롱도르 시상을 진행한다. 이에 ‘프랑스 풋볼’은 최근 발롱도르 후보 30인을 공개했다.  후보 중에는 레알서 2015/2016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서 우승을 차지했고, 포르투갈 소속으로 유로 2016 우승에 큰 공을 세웠던 호날두가 있었다. 또한 호날두와 함께 현 축구계 양대 산맥으로 손꼽히는 리오넬 메시(29, FC 바르셀로나)도 있었다. 후보가 공개되자 호날두의 스승인 지단 감독은 수상자와 관련된 질문을 받았다. 지단 감독은 “호날두는 올해 발롱도르를 수상할 자격이 있다”라며 호날두의 수상을 예견했다. 이어 그는 “호날두는 그가 달성한 것들이 자신의 노력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라며 호날두의 태도를 칭찬하기도 했다. 한편 지단 감독과 호날두가 속한 레알은 현재 6승 3무(승점 21점)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단독 선두에 위치해 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1, 레알 마드리드)가 13일(한국시간) 2016년 발롱도르(Ballon d'Or) 수상자로 선정됐다. 발롱도르만으로는 두 번째, 국제축구연맹(FIFA) 올해의 선수 상과 통합됐던 FIFA 발롱도르를 포함하면 네 번째 수상이다. 예상됐던 결과지만 아쉬움도 있다. 호날두의 수상 자격에 이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기량이 정점에 오른 선수들을 두고 해마다 최고를 뽑는 것에서 기준은 업적일 수밖에 없다. 리오넬 메시(FC바르셀로나)와 호날두가 상을 탔을 때 비판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 클럽이 거둔 성과의 질이나 대표팀에서의 부진이 문제가 됐다. 이번에는 깔끔하다. 호날두는 레알 마드리드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포르투갈의 유로 2016 우승을 이끌었다. 자격이 충분하다. 아쉬운 것은 선수가 아니라 축구에 대해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축구가 매력적인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권투와 함께 가장 원초적인 스포츠라는 점, 다른 하나는 그라운드에 펼쳐지는 스물두 명의 움직임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전자가 대자연이라면 후자는 인간이 창조하는 예술이다. 팀이라는 이름의 화가가 그려낸 명화 속에서 멋진 골은 가장 빛나는 묘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체 화폭의 일부일 뿐이다. FIFA 발롱도르 기간을 포함해 지난 2008년부터 2016년까지 투표에서 1,2위에 호날두와 메시가 아닌 선수가 이름을 올린 것은 바르셀로나의 극성기였던 2010년 딱 한 번(메시 1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2위)이다. 황금공은 호날두와 메시 둘을 위한 타이틀이었다. 축구사에 이처럼 탁월한 두 선수가 치열한 경쟁을 펼친 라이벌 관계가 또 있을까. 1970년대의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워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포지션이 같은 호날두와 메시가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골 결정력을 보여주고 있다면, 크루이프와 베켄바워는 역할과 특징이 달랐으면서도 각자가 뛰고 있는 팀을 변화시켰고, 축구 자체를 바꿔놓았다. 승부를 넘어 자신의 기량을 좀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최고선인 스포츠도 있다. 축구는 좀 다르다. 최고의 선수는 자신 뿐 아니라 동료와 팀을 바꿔놓을 수 있어야 한다. 호날두에게서 그의 클럽 선배이자 감독인 지네딘 지단, 클럽 '대선배'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정도의 카리스마를 느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두 거인과 열여덟 난쟁이'가 뛰는 프리메라리가의 상황을 들어 호날두와 메시를 깎아내릴 수는 없다. 아까운 선수들이 발롱도르의 문턱조차 밟지 못하고 있다 해서 돌아가면서 수상자를 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수상자가 아니라 발롱도르를 통해 드러나는 시각이다. 화려한 골 사냥이 다른 가치들을 시야 밖으로 밀어내는 느낌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최고'를 가리는 기준일 수는 없다.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면 축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임'이 아니다.   XML:Y
906    고향문단소식 한토리 - 2017년 윤동주시인 탄생 백돐 맞는 해 댓글:  조회:3340  추천:0  2016-12-31
윤동주 탄생 99돐기념 및 룡정.윤동주연구회 설립 3주년 기념행사 룡정서 (ZOGLO) 2016년12월30일 17시36분    윤동주 탄생99돐기념 및 룡정.윤동주연구회 설립 3주년 기념행사가 12월 30일 오후 2시부터 룡정구주영화관에서 성대하게 펼쳐졌다.      채영춘 연변주선전부 전임 부부장, 김병민 연변대학 전임 총장,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 룡정시 문체국 라송화 국장, 연변 한인상공회  신주열 회장, 윤동주의 친지 윤인주 등 과 룡정.윤동주연구회 임직원, 작가, 문학애호가, 매체기자, 룡정시 시민등 8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행사는 연변이 낳은 걸출한 시인 윤동주의 생애를 기리고 민족의 력사와 문화의 고양을 위해 달리고있는 "룡윤회"가 걸어온길을 회고했다. 윤동주의 생애를 소개하는 연변대학 리광일교수 윤동주 시랑송을 하는 연변시랑송협회  송미자회장 룡정윤동주연구회 경비사용내역 공개하는 연구회 김순희 사무국장 룡정윤동주연구회 력사답사 지역 소개를 하는 력사답사팀 오광욱 팀장 축사에서 채영춘 연변주선전부 전임 부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윤동주는 룡정이 낳은 우리민족의 자랑스런 아들입니다. 룡정이라는 이 반일항쟁의 피어린 땅이 윤동주가 저항시인으로 부상되는 밑거름이 되였다고 할 때 윤동주는 유서깊은 룡정 반일넋의 필연적 소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민족의 자산 윤동주 기념이벤트를 정례화하는 목적은 그의 정신과 자세가 담고있는 심오한 의미를 모두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시인에 대한 연구는 아직까지 초급단계에 있습니다. 윤동주에 대한 발견이 우리가 아닌 일본인 학자에 의해 지난 8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후 우리문단이 서서히 윤동주 알기에 들어가기 시작했지만 윤동주연구가 이방국에 편중해왔던것도 사실입니다. 다행히 소설가 김혁선생이 3년전에 윤동주문학연구회를 발족시키고 왕성한 활동을 펼치면서 늦은대로 윤동주연구가 본격적인 흐름을 타지 않나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 이 연구회가 윤동주연구를 '력사와 문학의 만남'이란 연장선에서 유적지답사와 사이버공간을 리용한 생생한 커뮤니케이션수단까지 겯들여 사회공감대 확산에 진력하는것을 보면서 커다란 고무를 받았습니다."  채영춘축사에 이어 김병민, 김호웅 등 하객들과 "장백산"잡지사, 룡정시 문체국, 룡정3.13반일기념위원회, 한락연연구중심등  단체들이 축사를 드렸다.   행사에서는 오광욱, 리승국, 김단비, 류설화 등 선진회원을  표창, 장려했다.     사업보고를 하고 있는 김혁 (룡정.윤동주연구회 회장,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2014년 9월27일 윤동주 시인의 고향 룡정에서 발족된 사단법인 “룡정·윤동주연구회”는  조선족의 작가, 학자, 교직원들로 무어졌다.   “룡정·윤동주연구회”는  윤동주의 민족애와 문학정신을 선양하고 나아가 민족의 문화와 력사의 의미를 환기하고 고양하는데 그 취지를 둔 단체로 짧디짧은 시간내에 많은 일들을 해왔다.      2014년 12월 20일, 명동촌 윤동주 생가에서 윤동주 탄신 97돐 기념행사. 2015년 2월 16일, 윤동주 옥사 70주기를 기념하여 “항일 시인 윤동주 70주기 기념행사”를 가졌다.    룡정·윤동주연구회의 편찬으로 문화총서 “룡두레”를 편찬, 출간했다. "룡두레"는 룡정의 력사, 룡정이 배출한 인걸들을 조명하고 민족공동체의 이슈와 현안에 대해 진맥하며 나아가 우리 민족의 비전에 대한 제안 등의 알쭌한 내용들을 여러 코너를 개설해 다양한 문체로 꾸며나간다는 취지의 문화총서 “룡두레”는 문단의 각 장르에서 뛰어난 실적을 올린 작가들과 대학 교수들로 편집진을 뭇고 그 첫 기를 윤동주 추모특집으로 꾸며졌다.   2015년 초, 윤동주연구회 사무실 오픈식을 가지고 본격적인 사무에 착수했다. 룡정.윤동주연구회가 사무실로 오픈한 자리는 바로 윤동주의 장례식이 치러졌던 윤동주의 룡정자택 자리로서 그 력사의 현장에서 윤동주의 정기를 전수받아 민족을 위한 일에 매진하려는 룡정·윤동주연구회들의 취지와 의중을 보여주는 뜻을 둔 선택이였다. 2015년 4월 4일, 청명을 맞아 장춘에서 꾸리는 조선족의 순수문학지 “장백산” 잡지사와 손잡고 윤동주추모제를 개최했다.    유족의 동의를 얻어 룡정의 시민들을 휘동하여 윤동주의 묘소를 새롭게 단장했다.   2015년 9월 20일 룡정·윤동주연구회 력사답사팀을 발족시켰다.   윤동주의 발자취가 어린 명동, 나아가 조선족역사의 “박물관” 격인 룡정, 연변지역에 산재한 민족의  유적지, 전적지에 대한 계획적인 답사를 취지로한 답사팀은 그동안 윤동주의 발자취 테마, 15만원탈취사건 테마, 청산리대첩을 테마로 다섯차례의 비교적 규모가 있는 답사를 펼쳤다.   조선족문학의 순문학지인 “도라지” 잡지사, 문화종합지 “문화시대” 등 잡지들과 손잡고 룡정·윤동주연구회 회원 특집을 마련했다.    윤동주를 위한 인물연구서 “윤동주 코드”를 출간했다. “윤동주 코드”는 출간후 호평을 이끌어내며 누구나 쉽게 접할수 있는 “백과사전처럼 읽는 윤동주생애”라고 일컬어지고있다.   윤동주관련서적, 민족인걸들을 조명한 서적 수백부를 무료증정했다.   2016년 7월 15일 윤동주 시읊기 대회를 성황리에 펼쳤다.“‘별’을 노래하다- 제1회 윤동주 시 가영(歌咏)대회”라는 제명하에 연변각지의 문인, 유명 아나운서, 아나운서를 꿈꾸는 어린이, 룡정.윤동주연구회 임직원, 룡정시 시민, 학생등 100여명이 모여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편들을 랑송했다.      2017년은 윤동주시인의 탄생 백주년을 맞는 해이다. 사업보고에서 김혁회장은 " 조선족 최초의 “윤동주평전”을 대형문학지 “장백산”에 2년간 련재했습니다. 100주년을 맞는 명년에 출간하려 합니다."고 밝혔다. 뿐만아니라  "금후 지속적으로 출간하게 될 '룡두레' 총서는 윤동주를 연구하고 그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잇는 문헌들과 회원들의 다채로운 창작품들들을 게재할 타산"이라고 밝혔다.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7년 선전을 기약하는 룡정·윤동주연구회는 새해에도 변함없이 김혁회장을 구심점으로 모든 회원들이 열성적 시인을 기리는 정신을 고양하는 활동에 박차를 가할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조글로미디어 리계화기자    
905    [쉼터] - 겨울 "수은주"를 녹여주는 아름다운 천사들... 댓글:  조회:3777  추천:0  2016-12-31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인사이트] 배수람 기자 = 매해 성탄절 즈음 거액의 성금을 기부하고 사라지는 대구의 '키다리 아저씨'가 올해도 찾아왔다.   지난 23일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직원들은 '키다리 아저씨'로 알려진 익명의 고액 기부자에게서 "사무실 밑에 있으니 잠깐 내려와 달라"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직원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한 그는 봉투 하나를 건네며 "메모에 쓰여 있는 내용처럼 소외 이웃을 잘 지원해달라"는 말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   봉투 안에는 1억 2천여만 원이 찍힌 수표와 함께 "정부가 못 찾아가는 소외된 이웃을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자필 메모가 동봉돼 있었다.   박용훈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처장은 "올해도 잊지 않고 거액의 성금을 기부한 키다리 아저씨께 소외된 이웃을 대표해 깊이 감사드린다"며 "소중한 성금을 기부자 뜻에 따라 이웃들에게 잘 전달하겠다"고 전했다.   한편 키다리 아저씨는 2012년 1월 1억 원을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1억 2300여만 원을 전달한 뒤 해마다 1억 원 이상 기부해왔다.   키다리 아저씨가 지난 5년동안 여섯차례에 걸쳐 기부한 돈은 모두 약 7억 2000만 원에 달해 대구공동모금회 사상 개인 누적 기부액으로는 규모가 가장 크다.   /배수람 기자 ==============================@@ ==============================@@   전주 "키다리아저씨" 40대 익명의 남성 2000년부터 2016년까지 16년동안 총 4억5000만원 기부     “사무실 아래로 잠깐 내려와 주시소” 지난 23일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구사랑의열매 직원들이 올해도 기다리던 키다리 아저씨. 전화를 받은 직원은 급히 사무실 아래층으로 내려가 키다리 아저씨를 만났다. 그는 차에서 직원과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후 확인해보라는 말과 함께 봉투 한 장을 건넸다. 봉투 안에는 신문 광고 전단지 뒷면에 쓴 ‘정부가 못 찾아가는 소외된 이웃을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1억2천여만 원의 수표 한 장이 들어있었다.  감사의 뜻을 전하는 직원에게 키다리 아저씨는 “메모에 쓰여 있는 내용처럼 소외된 이웃을 잘 지원해 달라”는 말을 남긴 뒤 홀연히 사라졌다. 대구 키다리 아저씨는 2012년 1월 모금회를 찾아 익명으로 1억 원을 전달하며 나눔을 시작했다. 2012년 1억2천300여만 원, 2013년 1억2천400여만 원, 2014년 1억2천500만 원, 지난해 1억2천여만 원을 전해왔다. 2012년부터 5년 동안 6회에 걸쳐 기탁한 성금이 모두 7억2천여만 원으로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역대 누적 개인 기부액 중 가장 많은 액수다. 60대로 추정 되는 키다리 아저씨는 인적사항에 대해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단지 170~175㎝의 중년 남성인 것으로만 알려졌다. 대구에서는 지난 9일에도 3대(代)에 걸친 9명의 가족이 한마음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 했다. 각각 1억 원씩 기부한 이들 가족은 “나눔문화 확산을 위해 오랜 고민 끝에 가입을 결심했다. 성금은 대구의 소외된 이웃을 위해 잘 써달라”고 당부했다. 대구 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얼굴 없는 천사’들의 기부가 잇따르고 있다. 28일 전북 전주에서도 지난 2000년부터 17년 동안 약 5억 원을 기부한 완산구 노송동의 기부천사가 주민센터 인근 나무 아래에 지폐와 동전 등 5천21만7천940원을 놓고 같다. 올해는 정치·사회적 혼란이 이어지면서 경제가 얼어붙고 있다. 겨울 수은주 만큼이나 기부 분위기가 움츠러든 상황이라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이들의 선행이 더욱 빛나 보인다. /경북일보 ////////////////////////////////////////////////////////////   환자 사연 보내면 익명으로 지원, 다리 종양에 17년 고통 40代 수혜    /박상훈 기자 지난 7일 서울 강동경희대병원 3층 회복실. 전신마취 수술을 받고 5시간 반 만에 깨어난 김영석(47)씨가 다리를 덮고 있는 담요를 살짝 들췄다. 붕대가 친친 감겨 있는 왼쪽 다리를 보며 김씨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주치의인 이재훈 정형외과 교수에게 "죽기 전에 내 다리가 다시 홀쭉해질 줄은 몰랐다"며 "10년 만에 제대로 신발을 신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의 두 다리에는 17년 전부터 사마귀 같은 물혹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혹은 점차 테니스공 크기 종양으로 커졌고 범위도 발등에서 무릎까지 확산됐다. 김씨는 10년 전 여러 병원에서 '불치' 판정을 받았고, 치료를 사실상 포기했다. 종양 때문에 신발을 신을 수 없어 8년 전엔 신용카드 단말기 영업사원 일을 그만뒀다. 아내가 발병 7년 차에 가출해 연락을 끊은 뒤 김씨는 기초생활 수급자 생계비로 두 아들을 홀로 키워왔다. 희망을 잃고 살던 김씨에게 지난 11월 '이메일 키다리 아저씨'의 기적이 찾아왔다. '이메일 키다리 아저씨'는 8년째 강동경희대병원 환자들의 사연을 이메일로만 접수해 치료비를 지원하는 익명 후원자다. 올해 10월 우연히 이 병원을 찾은 김씨의 사연을 이메일로 알리자, 키다리 아저씨는 이례적으로 병원에 전화해 "돈을 아끼지 말고 꼭 치료해줘라"고 말했다. 김씨는 키다리 아저씨의 도움을 받은 30번째 환자가 됐다. 김씨가 앓고 있는 병명은 '점액수종'. 진피 내에 점액이 쌓여 피부가 붓고 단단해지는 병이다.   /ⓒ 조선일보 =====================         //     환자사연을 이메일로 보내면 ,치료비 대신 내줘..8년간 23명에 '익명의 기부'       지난 5월 24일 오후 서울 강동경희 대학병원에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모(19) 군은 "얼마전 병역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양쪽 무릎연골판이 심히게 손상돼 빨리 수술을 받지 않으면 더 이상 걷지 못할 수 도 있다 고 한다 " 며 울먹였다 이 군은 2년전부터 지히 단간방에서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이군의 어머니는 10년 전 이혼하고 두아들을 혼자 키우다가 "동업을 하자"는 지인에게 사기를 당해 집을 담보로 대출받은 돈을 모두 날렸다 이군이 대학등록금으로 쓰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모아뒀던 돈도 함께 날아 갔다         이군의 사연을 들은 한 직원이 "키다리아저씨에게 이메일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키다리 아자씨'는 8년째 이 병원 환자들에게 치료비를 지원하는 익명의 후원자를 말한다 이메일로 연락만 주고 받을 뿐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병원 직원들이 동화에 나오는 "키다리 아저씨' 라고 부르는 것이다         김린아 사회사업팀장이 이 후원자에게 "사정이 이러한데 도와주실 수 있으신지요?" 라는 메일을 보냈다 세 시간뒤 "돈을 보냈습니다 "라는 답장과 함께 병원계좌에 치료비 350만원이 입금 됐다 며칠후 병원측이 "치료 잘 받았다"고 알리자 다음날 "참 다행입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연락 주세요"라는 답장이 왔다       키다리아저씨의 기부는 지난 2008년 4월 시작됐다 병원 사회사업팀에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중장년남성의 음성이 들렸다 "큰돈내기는 힘들지만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돕고 싶습니다 메일 주소를 알려 드릴테니 지원이 필요한 환자가 있으면 사연을 보내 주세요" 이 남성은 아들이 만들어 줬다는 이메일 주소를 부른뒤 직원이 답도 하기전에 전화를 끊었다       이후 병원은 사장이 급한 환자기 있으면 키다리 아저씨에게 메일을 보냈고 그때마다 그는 군말없이 치료비를 보내왔다 대장암에 걸린 60대 독거노인 ,기초수급 가정에서 1.1kg 미숙아로 태어나서 뇌병변 장애판정을 받은 갓난아기까지 그간 23명이 이 익명의 기부자 덕에 치료를 받았다 도움을 받은 환자들은 여러치례 병원측에 "키다리아저씨의 연락처라도 알려 달라 " 고 요청 했지만 병원측의 답은 항상 같다 "저희도 이분이 누군지 모릅니다 '좋은 분' 이 도와줬다고만 말해 달래요"       그동안 3000 만원의 치료비를 기부해온 키다리 아저씨는 지난달 10일 병원에 1억원을 내놓으면서 이메일을 한통 보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아 이 돈을 보냅니다 " 그는 신상이 드러날까 봐 기부금 영수증도 발급받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6월 개원 10주년을 맞은 강동경희대병원은 이 돈으로 '키다리아저씨 기금'을 조성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을 우선적으로 돕기로 했다 조선일보는 병원 측에 부탁해 키다리아저씨와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그는 "몸이 아파 일을 못하고, 일을 못해 살림이 어려워지는 악순환에 빠진 분이 많은것 같아 기부를 시작했다" 고 했다 그는 신원공개요청에 이렇게 답했다       "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자랑하면 기부하는 의미가 있나요 도움을 받은 분들이 다른 분에게도 베풀어 주면 그걸로 됐습니다 "   //       경제적 어려움으로 메마르고 각박한 세상을 환히 밝혀주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우리 대구에 있다. 수성구의 얼굴없는 `키다리 아저씨’가 6년째 한가위 이맘때만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전하고 있어 훈훈한 귀감이다.  어린나이에 삼팔선을 넘어 대구에 안착한 팔순의 노인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희망의 빛을 전해 온 얼굴 없는 독지 노인 한 분이 올해도 추석을 앞두고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2003년부터 대구 수성구청 주민생활지원과에는 매년 한 통의 반가운 전화가 걸려온다. 어려운 이웃에게 전해 달라며 다량의 쌀을 기증하겠다는 한 얼굴 없는 독지가의 전화다. 수성구청 직원들이 이 얼굴 없는 독지가를 `키다리 아저씨’로 부른다.  미국의 소설가 진 웹스터의 명작 `키다리아저씨’에서 따 온 말이다. 고아원에서 희망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소녀 지루셔가 자신을 후원해 주는 얼굴 없는 자선가를 `키다리 아저씨’로 부른 것을 본뜬 것이다. 6년 전 처음 구청을 방문해 쌀을 기증하던 때 당시 복지행정과 직원들이 선행을 알리려 했지만 한사코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면서 20㎏들이 쌀 500포를 맡기고 갔다. `키다리 아저씨’는 구청에 쌀을 전달하기 전에 늘 내세우는 조건이 있다.  쌀을 받을 수혜자가 직접 현장에 나오거나 자신의 신분이 언론에 공개되면 그날부터 쌀을 맡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쌀을 전달하는데 꼭 필요한 동사무소 직원들을 제외한 간부 공무원이 현장에 나오지 않아야 하는 것을 조건을 내세웠을 정도이다. 명절 때면 낯부끄러울 정도의 작은 선물을 양노원이나 고아원 등 불우시설에 내 놓으면서 사진 찍기 좋아하고 언론에 보도되기를 희망하는 세태를 말없이 꾸짖는 듯하다.  수많은 공직자들의 뇌물사건으로 검찰의 소환을 받거나 기소된 사람들이 이분의 언행을 만분의 일이라도 닮는다면 세상은 훨씬 살맛나는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올해도 `키다리 아저씨’는 어김없이 10㎏들이 쌀 1천포를 트럭에 싣고 지난 2일 오후 수성구민운동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복지과장이 감사의 말을 전하려고 하자 `여기 나올 시간 있으면 다른 이웃들을 돌보라’고 호통 친 적도 있다.  `키다리 아저씨’는“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매년 쌀을 기증할 테니(신분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나 잘 지켜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 대구사회에 이런 훌륭한 어른 옹이 계신다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고 감사를 드립니다.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공동으로 소외 계층 챙기기에 나서는 등 각계에서 복지시설을 찾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웃에 더 어럽고 서러운 사람들이 없도록 훈훈한 정을 나누었으면 한다.  =========================   지난달 29일 오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에서 얼굴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을 센터 직원들이 세고 있다.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는 2000년부터 시작돼 15년간 총 397,301,750원 이다. 2014.12.29/뉴스1 ⓒ News1 김대웅 기자[편집자 주] 연말연시를 훈훈하게 하는 사연들이 있다. 밀려드는 기부의 물결이 그것이다. 특히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기부천사들은 사회의 귀감이 되고있다. 뉴스1이 전국의 '얼굴없는 기부천사'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전주서 15년째 불우이웃돕기 뭉칫돈, 까치, 고물상주인 등…"세상은 아직 따뜻해" 택시운전으로 모은 돈 기부한 부산 노부부 "우린 연금이면 충분해" 11년간 매년 추석때 쌀 50~200포 놓고간 대구 '키다리 아저씨'는 하늘나라 8년간 군청 주사의 도움 받은 노부부 "더욱 더 힘 내 살아야겠다" 편지글 전주시는 2008년 '얼굴없는 기부천사' 기념비 세워 지난해 12월29일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 주민센터에는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시간이 없으니 동사무소 인근 세탁소 옆 자동차 뒤에 A4 종이박스를 놓았으니 빨리 가져가세요. 불우한 이웃을 위해 써주시고요.“ ‘얼굴없는 천사’는 이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의 말대로 세탁소 옆 자동차 뒤에는 5만원권 지폐와 동전이 든 종이박스가 놓여 있었다. 종이박스 안에는 돈과 함께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글이 적힌 종이도 있었다. 이날 그가 두고 간 돈은 모두 5030만4390원. 이 기부자는 2000년 4월 58만4000원을 기탁한 것을 시작으로 15년째 매년 선행을 베풀어왔다. 지난해까지 3억4699만7360원을 기탁했고, 이번까지 15년 동안 총 3억9730만1750원을 동주민센터 근처에 두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 돈을 놓은 곳을 알리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돈을 놓고 갔다. 이날 전화를 받은 노송동 직원 임나경 씨는 "40대 중후반의 남성 목소리로 들렸으며, 전화번호는 발신전화 제한표시가 떠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익명의 기부자를 전주시민들은 '얼굴 없는 천사'라고 부른다. 시는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2009년 12월 기념비를 세웠다. 노송동 일대 주민들은 '천사'를 의미하는 10월4일을 '천사의 날'로 지정해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등을 돕는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주의 극단 '창작극회'는 이달 12일부터 28일까지 '천사는 바이러스'라는 공연으로 이 기부자의 선행을 무대 위에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많게는 10년이 넘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을 실천하는 '얼굴없는 천사'들이 전국에서 널리 감동을 전하고 있다. ◇죽음도 알리지 않은 대구 '키다리 아저씨' 대구의 ‘수성구청 키다리 아저씨’도 빼놓을 수없는 지역 유명인사다. 2003년부터 2013년까지 11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추석이 다가올 때면 대구 수성구청에 쌀 기부해 온 ‘키다리 아저씨’. 20kg 500포로 시작해 지난해까지 10kg 2000포 등 11년간 4억원 가량을 기부했다. ‘키다리 아저씨’는 한사코 신상을 알리기를 사양하는 탓에 수성구청에서 붙여준 이름이다. 성이 박씨이고 평안남도가 고향. 6.25전정때 부산에 머물다 대구에 정착한 뒤 양복지 도매상을 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키다리 아저씨’는 지난해 봄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뒤늦게 전해졌다. 시민들은 끝까지 이름없는 선행을 지킨 아저씨의 죽음에 숙연했다. 부산 해운대구 반송2동 주민센터에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9년째 ‘사랑의 동전 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사랑의 ‘동전 천사’ 때문이다. 지난해 23일 오후 1시30분께 반송 2동 주민센터에는 ‘동전 천사’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주민센터 측은 이 ‘천사’가 복사용지 두 상자에 동전을 가득 담아 민원대에 얹어두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전했다. 상자에는 ‘구겨지고 녹슬고 때 묻은 돈, 좋은 곳에 쓸 수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라는 손글씨 메모와 함께 115만5000여원의 동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직원에 따르면 허름한 녹색점퍼를 입은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고개 숙여 일하던 직원의 어깨를 두 번 톡톡 쳤다. 이어서 말없이 손가락으로 박스를 가리켰고 박스를 열어본 직원이 그가 ‘동전천사’임을 알고는 급하게 뒤따라갔으나 사라지고 없었다. ‘동전천사’는 180㎝ 정도 큰 키에 마른 체격이었다. 주민센터 직원들은 매년 크리스마스 전후로 동전을 기부하는 익명의 기부자를 ‘동전천사’라 불러왔다. 반송2동 이승용 동장은 “동전천사가 올해도 찾아줄지 내심 기다렸다”며 “기부금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소중히 쓰겠다”고 감사를 표한 뒤 동전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탁했다. 인천 남구의 한 익명의 기부천사는 지난해 추석에 백미 10kg짜리 100포를 구청에 기부했다. 지난해 설을 앞둔 1월 24일에도 백미 10㎏짜리 100포가 전달됐다.  남구청은 5년째 명절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백미 100포를 같은 사람이 보내는 것으로 보고있다. 이럴 경우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7번 기부를 한 셈이 된다. 5년간 명절에 배달된 쌀의 양을 합하면 6950㎏에 이른다. 이 얼굴 없는 기부천사는 쌀 포대에 ‘즐겁고 행복한 설 명절을 보내시기 바랍니다’라는 쪽지만 남기고 있다.  지난해 12월29일 익명의 기부자가 서울 성동구 금호4가동 주민센터에 전달한 108만원 현금과 손편지.(성동구 제공)ⓒ News1서울 성동구 금호4가동 주민센터는 2년전부터 설이면 찾아오는 '까치'를 기다린다. 지난해 12월 29일 오후에는 2층 민원실에 한 남자가 만원짜리 지폐와 편지가 들어 있는 종이상자를 전달하고는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사라졌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데다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 할 수 없었다.  '날씨가 매우 차갑습니다. 독거노인을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적힌 손 편지가 유일한 흔적이다. 상자 안에는 2013년처럼 만원짜리 지폐 108장이 담겨져 있었다. 금호4가동 황인혁 주무관은 “ 작년에는 편지 말미에 ‘이름없는 까치’ 라고 쓰여져 있었다. 올해는 이름은 빠졌지만 글씨체도 같고 내용도 똑 같다”며 “작년 이름없는 까치 그분이 확실한 것 같다“고 말했다. ◇농사지어 모은 돈 이웃 독거노인 위해 쾌척 꼭 여유가 있어서 남을 돕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팍팍한 삶과 맞서면서도 더 어려운 이웃의 손을 잡는 진짜 ‘천사 중의 천사’들도 있다. 부산 해운대구 반여동에서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한 70대 노부부는 한 달에 받는 40만원 연금으로 생활하면서도 한푼 두푼 모은 1000만원을 선뜻 불우이웃을 위해 써달라고 내놓았다. 지난해 12월27일 오전 10시 해운대구 반여1동 주민센터에 허름한 차림새의 70대 할머니가 들어왔다. 낡은 스카프와 솜털 패딩을 입은 할머니는 평범한 민원인처럼 보였다. 누구도 이 할머니가 5만 원짜리 200장을 묶은 돈다발을 주민센터 접수대에 올려놓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이 돈을 반여동 주민들을 위해 잘 써 주세요”라고 말하고는 뒤돌아 나갔다. 놀란 직원이 뛰어 나와 할머니를 붙잡고 억지로 말을 붙였다. 할머니는 더듬거리며 "우리 양반이 택시를 오래 몰았는데 그렇게 모은 돈이야. 둘이 상의해서 기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직원은 할머니의 주소를 물었고, 할머니는 주변 주택에 산다고만 했다. 반여동 일대에 낡은 집들이 많이 모여 있다. 할머니 부부 역시 넉넉한 형편이 아님이 분명하다. 할머니의 형편이 좋아 보이지 않아 이 직원은 재차 "이렇게 큰돈을 주셔도 돼요?"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매달 연금 40만 원이 나오는데 그거면 우리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직원은 끝까지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한테 혼나"라는 말만 남기고 직원을 뿌리치고 갈 길을 갔다. 반여1동 주민센터 관계자는 "총총걸음으로 걸어가시는 할머니의 구부정한 등이 그렇게 커 보일 수 없었다"며 "진짜 부자는 마음이 넉넉한 사람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해운대구청은 '얼굴 없는 노부부 천사'가 기탁한 1000만원과 직원들이 모금한 돈을 모아 공동모금회를 통해 주변 어려운 이웃들의 지원에 쓸 예정이다. 전북 장수군 장계면에 4년째 이웃돕기 성금을 기탁하고 있는 한 '얼굴없는 천사'는 올해도 성금 95만원을 면사무소에 기탁했다. 이 기부천사는 연말이면 "A고물상에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맡겨 놓는다"는 전화 한통만 남기고 자취를 감추고 있다. A고물상 주인은 “(돈을 맡긴 분이)1년간 폐품을 모아 처분한 돈을 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놓고 있는데 올해는 폐품가격이 하락해 많은 금액을 기부할 수 없다며 굉장히 미안해했다”면서 “자신의 신분을 절대 밝히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밝혔다. 장계면은 기탁된 성금을 관내 저소득 및 독거노인 등 5가구에 연탄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울산 남구 신정2동 주민센터에도 지난해 10월 22일 익명의 60대 할머니가 찾아와 현금 500만원을 기부했다.  할머니는 “외롭게 살고 있는 독거노인들을 보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그 분들을 위해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제서야 실천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 할머니도 혼자 외롭게 살고 있는 독거노인이었으며 기부한 500만원은 평생 농사를 지어서 모은 돈이었다.  광주시 서구 금호1동에서 홀로 살다 간암으로 투병 중이던 최모 노인(75)이 10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40만 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매달 노인연금 20만 원과 생계 급여 28만 원으로 생활해온 최씨는 그동안 아낀 40만 원을 성금으로 전했다. 강원 양구군의회 직원이 8년간 남들 모르게 노부부에게 선행을 베푼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눈길을 끌고 있다. 사연의 주인공은 양구군의회 지방운전 주사 원종배씨(55)로 8년간 뇌병변을 앓고 있는 김종권(75)·최윤애(60)씨 부부에게 8년째 연탄 1000장과 쌀, 고기 등을 보내주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도움을 받자 최씨는 11일 원씨의 선행을 널리 알리고자 양구군청에 이 같은 내용의 편지를 들고오면서 세상에 전해지게 됐다. (사진제공=양구군) 2014.12.12/뉴스1 2014.12.12/뉴스1 ⓒ News1 황준 기자남몰래 8년째 기부활동을 해온 ‘얼굴없는 천사’가 뜻하지 않게 얼굴을 드러내게 된 경우도 있다. 뇌병변장애를 가진 김종권(75)·최윤애(60)씨 부부는 올 겨울에도 어김없이 도움을 받자 원씨의 선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직접 쓴 편지를 강원도 양구군청에 들고왔다. 부부는 편지에서 “자살도 여러 번 생각을 했으나 도와주시는 원종배님 생각에 더욱 더 힘을 내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라며 “이 글을 대통령님이 봤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편지 하나로 세상에 알려진 양구군의회 원종배(55) 주사는 연탄 1000장과 쌀, 고기 등을 노인 부부에게 8년째 기부해오고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지역주민 이병용(26)씨는 “남을 돕는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8년간 했다는 것이 대단하다. 다른 사람들도 귀감을 받아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다면 따뜻한 겨울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출처-뉴스1    
904    [쉼터] - 스포츠, 영양사, 그리고 우승비결 댓글:  조회:4094  추천:0  2016-12-31
NYT 분석 "선수별 특식이 효과" EPL 단독 2위… 우승까지 기대   EPL(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최고 명문 구단 중 하나이지만, 좀처럼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던 리버풀. 그러나 올해만큼은 EPL 단독 2위를 달리면서 '우승 기대감'을 부쩍 키우고 있다. 이들이 올해 이렇게 잘나가는 비결이 뭘까.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뜻밖에도 "지난 6월 리버풀로 영입된 독일 출신 영양사 '모나 네머(Nemmer·32·사진)'의 공이 크다"며 "올 시즌 리버풀의 돌풍 뒤에는 '밥상의 힘'이 있었다"고 28일 분석했다. 밥상까지 살피는 구단의 세심함이 성적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NYT에 따르면 네머는 모든 선수에게 일괄적으로 균형 식단을 짜 주는 보통 영양사와는 달리 선수별로 '맞춤형 특식'을 낸다. 역할이 다르면 필요한 영양분도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골키퍼는 공격수나 미드필더처럼 오랜 시간 달리지 않는 대신 순발력이 좋아야 한다. 순간적인 힘을 내게 하는 영양분으로 식단을 맞춰주는 식이다. 네머는 "선수는 먹고 싶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원칙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리버풀 구내식당에선 운동선수에겐 '절대 금지'인 튀김이나 케이크도 나온다. 다만 질 좋은 식용유를 쓴 튀김, 설탕 파우더 대신 정통 카카오로 만든 초콜릿 푸딩 등을 낸다. 네머는 원정 경기가 있는 날엔 선수들이 묵는 호텔까지 찾아가 주방장과 메뉴를 상의하고, 휴일엔 선수들이 직접 요리해 먹도록 레시피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클롭 감독은 그런 네머를 "리버풀 선수들의 서른두 살짜리 엄마"라고 부른다. 밥맛이 좋으니 선수들도 뛸 맛이 나는 걸까. 리버풀은 28일 열린 EPL 18라운드에서 스토크시티를 상대로 4대1 대승을 거뒀다. /윤형준 기자
903    [쉼터] - 인젠 "우상화"는 전설적 이야기... 댓글:  조회:3963  추천:0  2016-12-31
쿠바 혁명 지도자였던 피델 카스트로〈사진〉 전 국가평의회 의장, 독재 체제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러나 사후(死後) 정반대의 길을 가다. 로이터통신은 지난 12월 27일(현지 시각) "쿠바가 카스트로 전 의장에 대한 우상화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보도했다. 카스트로 전 의장은 지난달 말 임종을 앞두고 동생이자 후계자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나는 불멸의 존재로 숭상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유언을 남겼다. 90세로 사망한 카스트로 전 의장의 유해는 화장돼 지난 4일 고향인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에 안장됐다. 묘비에는 '피델'이라는 이름만 적힌 명패가 붙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쿠바 국가평의회는 이날 카스트로 전 의장에 대한 우상화 금지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호메로 아코스타 국가평의회 서기는 "이 법안은 피델 카스트로의 겸손한 정신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상화 금지법 통과로 카스트로 전 의장의 이름과 사진은 상표·로고·인터넷 도메인·상업 문구 등에 사용할 수 없다. 카스트로의 동상을 세우거나 도로·공원·광장 등 공공장소에 그의 이름을 붙이는 것도 금지된다. 그러나 음악·문학·무용·영화 등 예술 영역에서는 '피델 카스트로'를 쓸 수 있다. 카스트로 전 의장에 대한 학문적 연구도 가능하다. 은퇴한 쿠바 경제학자 후안 안토니오 곤살레스는 AP통신에 "우리는 모든 곳에 피델의 이름을 새기고 싶지만 (우상화 금지는) 피델의 결정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형원 기자
902    [쉼터] - "여러분, 난 지금 별을 마시고 있소..." 댓글:  조회:5639  추천:0  2016-12-31
      딱 여자의 술이라고 정의되진 않았지만 흔히들 여자의 술, 여인을 아름답게 하는 술이라고 하는 이유는 샴페인은 톡쏘면서 깔끔한 맛과, 독하지 않아서 마신 후에도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는 이유 등으로 그렇게 불리는것 같네요 아래의 글을 한번 읽어보시면 이해 하시는데 도움이 되실것 같네요   단 하루, 황태자비가 되어 최고의 와인을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저없이 샴페인 한잔을 꼽겠다. 서양에서는 벼락부자라는 뜻으로 사용될 정도로 상류사회의 상징이다. 18세기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폼파도르(Madame de Pompadour)는  “샴페인은 마신 후에도 여자를 아름답게 해주는 유일한 술”이라고 예찬했다. 국내에도 최근 와인인구가 늘어나면서 샴페인 골수 애호가들이 부쩍 눈에 띈다. 무엇보다 요즘처럼 더운 날에는 타닌이 텁텁하게 감기는 레드와인보다 알코올 도수가 낮고  맛이 상큼한 샴페인을 많이 찾게 된다.  뜨거운 들녘을 훑고 가는 한줄기 비처럼 싱그럽고,  축하의 자리에 재잘재잘 쏟아지는 웃음처럼 경쾌한 술. 황금 액체를 밀고 올라오는 기포만큼이나 기분 좋은 에너지다.   #기포가 있다고 다 샴페인은 아니다 17세기, 어느 따뜻한 봄날. 펑! 펑! 샴페인지방 지하 와인저장고에서는 여기저기 와인 병이 폭발하는 소리가 요란했지 싶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위쪽에 있는 포도밭이니 겨울이 빨라 와인을 만들면 발효가 멈추는 일이 많았고,  봄이 되어 기온이 올라가면 병 안에 남아 있던 당분이 재발효하여 탄산가스 압력에 의해 병이 터지는 경우가 흔했다. “악마의 술이야”. 농부들은 기겁했다. 이 저주받은 와인들은 모두 버려졌다. 하지만 이 지방 오빌 레 수도원 와인저장고 담당이던 돔 페리뇽 수사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마셔보니 놀라웠다. 입안 가득 톡톡 쏘는 황홀한 맛. “여러분, 난 지금 별을 마시고 있소.” 돔 페리뇽 수사의 연구에 의해 코르크 마개와 독특한 병이 고안되었고, 지금의 특별한 샴페인이 세상에 나왔다. 이때부터 특성이 다른 백포도 샤도네이와 적포도 피노누아, 피노뮤니에를 섞어  복합적인 맛을 끌어내 병속에서 2차 발효시키는 샹파뉴(Champagne)만의 기술이 발전되었다.  무엇보다 매서운 서리와 강우 등 기후적인 악조건이 어느 나라도 따라갈 수 없는 섬세하고 미묘한 향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따라서 샹파뉴 이외의 지역에서는 아무리 똑같은 품종과 기법으로 만들었어도 샴페인이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 발포성 와인을 미국에서는 스파클링 와인(Sparkling Wine), 이탈리아에서는 스푸만테(Spumante), 스페인은 카바(Cava), 독일은 젝트(Sekt)로 부른다. #빈티지로 마시는 돔 페리뇽과 모엣 샹동 돔 페리뇽은 명성과 가치만큼이나 늘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다. 81년 영국 찰스 황태자와 고 다이애나비 결혼식 때 공식 샴페인으로 선정된 바 있다. 아울러 덴마크, 스웨덴, 벨기에, 네덜란드 등 왕실의 수많은 대관식과 결혼식은 물론 각 나라 국빈 만찬장에 늘 최상의 예우처럼 등장한다. 돔 페리뇽은 만족스러운 맛이 나오지 않으면 이름을 붙이지 않는 등 명성만큼이나 까다로운 관리로 유명하다. 이번 국내에 런칭한 돔 페리뇽 1996 또한 ‘눈 부시도록 아름답다’는 와인메이커 베노아 구에의 감동만큼이나 드물게 완벽한 빈티지로 찬사를 받고 있다. 엷은 황금색을 지녔고, 설탕에 절인 레몬과 배, 바닐라 향이 관능적이다. 한 모금 머금으면 비단처럼 가볍고 섬세하지만, 목젖을 넘기며 견고하고 뛰어난 집중력을 보여준다. 지하 저장고에서 8년간 절제된 에너지가 진화하면서 폭발하는 에너지는 오감을 흔들기에 충분하다. 특히 여느해보다 조직감과 뒷맛이 강해 오랫동안 숙성시켜도 무리 없을듯 하다. 이렇듯 와이너리가 특정 해, 특정한 맛을 추구하며 3년에 1번정도씩 만드는 ‘빈티지 샴페인’은 일반 샴페인보다 2년 정도 더 숙성시켜 향이 강하며 피니시도 길다. 모엣 샹동 1998 또한 4개 연도의 포도를 섞어 만들었다. 해마다 다른 날씨와 작황을 겪은 400~500개의 포도밭 중 250개 베이스 와인을 골라 블렌딩했으나 맛이 흔들림없이 균일하다.  효모까지 자체 개발하여 균질화된 맛을 연출하는 모엣 샹동의 250년 철학이 돋보인다. 그랜드 하얏트 서울은 7월6일까지 파리스 그릴에서 돔 페리뇽이 포함된 디너세트 메뉴를 선보인다. #입맛 없는 여름날의 식욕촉진제 식전주로 가볍게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를 살리는 데는 샴페인만한 것이 없다. 무엇보다 식욕과 소화를 돕는 술이다. 한 모금 머금었을 때 입안에 꽉 차는 거품과 상큼한 산미는 여름날 더위를 잊게 해줄 만큼 짜릿하다. 아울러 깔끔하고 맛이 개방적이어서 어떠한 음식과도 잘 어울리는 매력을 지녔다. 안주 없이 마셔도 좋으나 해산물 샐러드, 연어, 캐비어, 흰살 생선, 파스타, 비스킷, 담박한 모차렐라 치즈와 곁들이면 환상의 궁합이다. 돔 페리뇽 1996은 맛이 강해서 초콜릿과도 잘 어울렸다. 샴페인 생명은 기포이므로 잔은 튤립 모양의 길죽한 전용잔을 사용해야 방울방울 피어오르는 아름다움과 넉넉한 향을 즐길 수 있다. 잔을 닦을 때도 세제가 남으면 기포가 오르지 않으므로 가급적 물로만 깨끗하게 세척한다. 오래된 샴페인일수록 색이 짙고 기포는 적다. 마실 때는 냉장고에서 2~3시간 보관하거나 아이스 버킷에 담가 차갑게 내놓는다. 2~3년은 보관해도 되지만, 가장 좋은 맛일 때 출시하므로 가급적 바로 마시는 게 좋다. 온도와 습도, 빛에 민감하므로 필요할 때마다 전문숍에서 구입하는 것이 요령이다.   ========================== 와인에 기포가 있다고 해서 모두 샴페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북동부의 샹파뉴 지역에서 생산되어야만 ‘샴페인’이라 불릴 수 있다.       프랑스 샹파뉴(Champagne)라는 지역 이름은 캄파니아(Campagnia)에서 유래한 것으로, ‘로마 북부의 시골’이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이 지역에서 샴페인이라는 발포성 와인이 탄생한 것은 17세기 말 수도사 동 페리뇽에 의해서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가 샴페인을 창안했다기보다는 샴페인의 개발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 페리뇽은 최초로 서로 다른 포도밭의 포도로 생산한 와인을 구분해 관리했으며, 몇 가지 비발포성 와인(또는 스틸 와인)을 섞으면 더욱 흥미로운 샴페인이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샴페인의 빛과 신선함을 보존하기 위해서 나무통 대신 유리병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최초로 내놓았다. 이러한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샴페인을 훌륭한 와인으로 만들어내는 밑바탕이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페리뇽은 샴페인의 거품을 막을 방법을 찾지 못했고 오히려 와인에 거품이 많이 솟아오르는 것을 그 와인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수도사 동 페리뇽.         샴페인은 자연발생적인 우연성과 샹파뉴 지역민들의 많은 노력을 거쳐 탄생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와인을 가을에 만들어 겨울에 저장했는데, 겨울의 추운 날씨 때문에 (샹파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추운 와인산지다.) 효모가 활동을 정지하면서 포도의 당분이 모두 알코올로 전환하기 전에 발효를 멈추었다. 그러다가 봄이 오고 온도가 올라가면서 와인은 다시 발효를 시작하고 이 때 와인에서 거품이 생기게 된 것이다. 즉 발효는 병 속에서도 계속됐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가스는 와인에 용해됐다. 추가로 첨가한 약간의 설탕과 효모는 그 과정을 더욱 촉진시켰다. 결국 2-3년의 숙성을 거치면서 와인은 힘과 개성을 지닌 와인으로 거듭났으며, 끊임없이 솟는 기포들이 와인에 생생함을 주었다. 오늘날에는 발효가 완전히 끝난 드라이 와인에 설탕과 효모를 첨가하여 병 안에서 2차 발효가 일어나게 한다.(‘와인아틀라스’, 2009)   스파클링 와인은 어디서든 만들지만 이들은 샹파뉴의 샴페인과는 분명히 다르다. 샴페인이 다른 스파클링 와인과 구별되는 이유는 바로 샹파뉴 지역의 독특한 특성 때문인데, 이러한 지형적 특성의 기원은 6,50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사시대 때 프랑스 북부와 영국은 바다였는데, 물이 빠지면서 남은 것은 화석들과 미네랄 향이 진하게 밴 백악질 토양이었다. 부드러운 백악질 땅은 수분이 많아 서늘하고 습한 와인저장고를 만들기에 용이하며, 토양을 따뜻하게 하여 질소가 풍부한 포도를 자라게 한다(질소는 효모의 활동에 도움을 준다). 샹파뉴의 대표 품종은 세 가지로, 육질 많은 피노 누아가 재배 면적이 가장 넓고, 그 뒤를 재배가 쉽고 과일향이 많은 피노 뮈니에 그리고 신선하고 크림향이 나는 샤르도네가 잇는다. 최근에는 점점 많은 샴페인이 단일 포도밭에서 나오지만, 여러 포도밭에서 수확한 최상급 포도들을 섞는 전통은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다(샹파뉴처럼 추운 와인 산지에서는 포도가 완전히 익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다양한 밭의 포도를 섞는다). 연간 3억1천5백만 병 정도 생산되는 샴페인은 영국으로 가장 많은 양이 수출되고(연간 3천5백만 병) 미국, 북유럽, 이탈리아, 일본 등이 그 뒤를 잇는다.       샴페인 하우스 포므리(Pommery)의 지하 와인 저장고.         샴페인 양조 일일이 손으로 수확한 포도알은 곧바로 압착하는데, 포도 껍질에 함유된 색소가 과즙을 물들이지 않도록 부드럽게 살짝 짜기 때문에 적포도인 피노 누아와 피노 뮈니에조차 맑고 투명한 즙이 나온다. 좋은 품질을 얻기 위해 160kg 정도의 포도에서 100ℓ의 과즙을 얻도록 압착한 후, 포도즙은 즉시 발효조로 옮겨 1차 발효를 거친다. 샴페인 양조자는 1차 발효를 마친 와인을 다른 품종 또는 다른 빈티지의 스틸 와인과 섞는데, 이렇게 블렌딩한 와인이 과연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맛을 낼지 판단하는 과정에서 양조자의 경험, 상상력, 직감, 기술을 최고로 발휘한다.       수확 후 봄이 오면 각 샴페인 하우스의 양조자와 양조학자가 모여, 각기 다른 해에 생산된 수십 가지 스틸 와인을 블렌딩함으로써 기본적인 넌빈티지(NV, Non-vintage)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렇게 블렌딩한 와인이 완성되면, 당분과 와인을 혼합한 리쾨르 드 티라주(Liqueur de tirage)와 소량의 효모를 첨가하고, 와인에 즉시 캡슐을 씌운 채 병입하여 시원한 동굴 안에서 최소 12개월 동안 보관한다. 이 때 병 안에서 2차 발효가 일어나는데, 2차 발효 동안 발생한 탄산가스는 병 안의 압력을 높이고, 발효가 끝나면 효모는 찌꺼기가 되어 가라앉는다. 그리고 와인병을 45도 정도 기울어진 선반에 얹어 놓은 후 규칙적으로 회전시키는데(르뮈아주 Remuage라고 함) 이는 효모 찌꺼기를 병목 쪽으로 모은 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컴퓨터가 달린 정밀기계가 르뮈아주 작업을 대신하기도 한다).     병 안에서 2차 발효가 진행되는 동안 생긴 효모 찌꺼기를 르뮈아주 작업을 통해 병목으로 모은 후 제거한다. 르뮈아주는 19세기 초에 뵈브 클리코 여사가 창안한 것이다.         병목으로 가라앉은 효모 찌꺼기를 제거하는 방법을 데고르주망(Degorgement)이라고 하는데, 병목 부분을 0℃ 이하의 찬 소금물에 담가서 급속 냉각시킨 후 병마개를 열면, 병 안의 탄산가스로 인한 압력 때문에 병목에 모여있던 찌꺼기들이 얼음이 되어 튀어 나온다. 그리고 이 때 빠져나간 양만큼 와인과 설탕을 혼합한 리쾨르 드 도사주(Liqueur de dosage)를 첨가하며 이 과정에서 당도를 다양하게 조절한다. 샴페인은 당분 함량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누어 진다.   엑스트라-브뤼(Extra-Brut): 1ℓ 당 6g 이하, 매우 드라이함 브뤼(Brut): 1ℓ 당 15g 이하, 드라이함 엑스트라-드라이(Extra-Dry): 1ℓ 당 12-20g 이하, 약간 드라이함 섹(Sec): 1ℓ 당 17-35g 사이, 약간 스위트함 드미-섹(Demi-sec): 1ℓ 당 33-50g 이하, 스위트함 두(Doux): 1ℓ 당 50g 이하, 매우 스위트함         샴페인의 종류 로제 샴페인(Rose Champagne) 샴페인에 레드 와인을 섞거나, 적포도 품종을 사용하여 로제 와인 양조방식으로 만든다. 붉은 열매와 향신료의 아로마를 풍기며 알코올 도수가 비교적 높고 육감적이다. 샴페인의 꽃이라 할 수 있다.   블랑 드 블랑 샴페인(Blanc de Blancs Champagne) 청포도 품종인 샤르도네로만 만들어진 샴페인이다. 흰 꽃 향의 섬세한 아로마와 가볍고 미세한 거품이 특징이다. 생생하며 신선한 맛을 지니고 있다.   제조 연도가 명기되는 빈티지 샴페인  샴페인은 주로 여러 해의 와인을 섞어서 만들기 때문에 레이블에 연도를 기재하지 않지만, 작황이 뛰어나게 좋은 해라면 샴페인 양조자들의 결정을 통해 연도를 표기하기도 한다. 빈티지 와인은 샹파뉴 전체 생산의 10%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블랑 드 누아 샴페인(Blanc de Noirs Champagne) '블랑 드 블랑'과는 반대로 피노 누아와 피노 뮈니에 두 가지 적포도 품종으로 만들어진다. 타닌이 풍부하고 제비꽃, 건과류, 나무 또는 담배향 등의 아로마가 조화롭다.     샴페인은 ‘왕의 와인’이라 불리는데, 그 배경은 거의 모든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던 랭스 대성당과 관계가 있다. 샹파뉴 랭스(Reims)에 위치한 이 대성당은 13세기에 지어졌는데 완공되는데 100년이 소요되었다. 특히 거대한 장미 문양의 인상적인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 동상 2,300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1954년 자크 시몽이 샴페인 양조자들로부터 샹파뉴의 포도재배와 와인양조 풍경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그린 세 개의 창문도 있다.     참고문헌 더 와인바이블 (The Wine Bible)    30여 년 넘게 와인작가, 컨설턴트, 교육자로 활동하고 있는 캐런 맥닐의 저서로, 미국 내 베스트셀러이자 수상작이다. 출간된 후 45만부 이상 팔렸다. 집필하는데 무려 십 년이 걸린 이 책은 와인을 주제로 쓴 가장 포괄적이고 권위 있는 책으로 인정받고 있다.     ======================== 프랑스의 샹파뉴(Champagne)지역에서 생산된 스파클링 와인(Sparkling Wine).   스파클링 와인 중에 가장 대표적이며 인기 있는 와인이다. 모든 스파클링 와인을 샴페인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며, 프랑스의 샹파뉴(Champagne) 지역에서 생산된 것만 샴페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원산지인 프랑스어로는 '샹파뉴'라고 발음하지만 영어식의 '샴페인(Champagne)'이라는 명칭으로 굳어졌다. 샹파뉴 지방은 연평균기온이 매우 낮아 포도를 재배하기에는 기후조건이 좋지 않지만, 오히려 이러한 기후조건 때문에 신맛이 강하고 세심하고 예리한 맛의 와인이 제조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의 다른 지역에서 제조된 스파클링 와인은 크레망(Crement), 뱅 무쐬(Vin Mousseux)라고 하여 샴페인과는 구별한다.   샴페인의 제조과정은 다음과 같다. 1차 발효가 끝난 와인을 병입(Bottling)한 후 당분과 효모를 첨가하고 수개월 동안 10~12℃에서 보관한다. 병 속에서 2차 발효가 끝나면 효모의 찌꺼기가 남는데, 병을 거꾸로 세워 여러 번 돌려 병목에 찌꺼기가 쌓이게 한다. 이 작업을 '르 르뮈아주(Le Remuage)'라고 한다. 다음에는 병을 거꾸로 해서 영하 25~30℃의 냉각 소금물에 병목을 잠기게 하여 얼린 뒤 찌꺼기를 병 밖으로 빼내기 위하여 충격을 가하면 병 속에 남아 있는 가스의 힘으로 찌꺼기가 밖으로 튕겨나간다. 이를 '르 데고르주망(Le Degorgement)'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르 도자주(Le Dosage)' 과정을 거쳐 일정량의 와인과 당분으로 부족해진 양을 채운 뒤 쇠고리가 달린 병마개로 봉인하여 병 속의 탄산가스의 압력을 견딜 수 있도록 병입 과정을 마치면 샴페인이 완성된다. 샴페인의 경우 각각의 병에서 2차 발효를 하는 것이 큰 탱크나 수조에서 발효시키는 것보다 고급 와인으로 친다.   17세기 샹파뉴 지역의 오빌레 베네딕토 수도원의 수도사였던 동 페리뇽(Dom Perignon)은 샴페인의 생산과 품질 향상에 큰 기여를 하였다. 와인제조 책임자였던 동 페리뇽은 상파뉴 지역의 추운 날씨 때문에 발효를 멈추다가 봄에 발효가 시작되어 터져 버리는 와인을 보고 스파클링 와인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동 페리뇽은 탄산가스를 보존하기 위하여 코르크 마개를 개발하고 새로운 블렌딩 기술을 개발하였으며, 레드와인의 세심한 압착 기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동 페리뇽이 죽은 후,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스파클링 와인이 제조되었다. 그 후 클리코 퐁샤르댕(Clicquot Ponchardin)은 '르 르뮈아주' 기술을 개발하여 샴페인 산업에 발전을 가져왔다.   샴페인은 일반적으로 세가지 이상의 포도를 블렌딩하여 만드는데, 적포도 품종인 피노 누와, 피노 뫼니에르, 샤르도네가 대표적이다. 이들을 여러 지역 밭의 포도, 생산년도가 다른 포도를 블렌딩하여 만들기 때문에 빈티지가 라벨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단맛이 없는 것부터 Extra Brut(엑스트라 브뤼)-> Brut(브뤼)-> Extra Dry(엑스트라 드라이)->Sec(세크)-> Demi-Sec(데미 세크)-> Doux(두스)로 분류되어 라벨에 표기된다.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은 청포도만을 사용한 샴페인으로 섬세한 맛이고, 블랑 드 누아르(Blanc de Noir)는 적포도만을 사용한 샴페인으로 깊은 맛이 있다.   샴페인은 축하, 행사, 손님 초대 등에 이용되며 긴 튤립 모양의 잔에 따라서 아름다운 기포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한다. 잔에 따라 마실 때 일반 스틸 와인처럼 스윌링(Swirling)하지 않고 기포가 부서지지 않게 향을 음미하기 위하여 빠르게 비틀어 돌리는 트윌링(Twirling)을 한다. 기포가 작고 지속적으로 올라오는 것이 좋은 샴페인으로 평가받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샴페인 [Champagne] (두산백과)
901    [쉼터] - 샴페인 기포 다량 빠지면 맛이 있다?... 없다!... 댓글:  조회:3815  추천:0  2016-12-31
샴페인, 고급일수록 기포 작아         와인을 마시는 즐거움은 가까운 사람과 나눌 때 더욱 커진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겠지만, 샴페인은 특별히 남을 위해서, 그리고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구입하여 선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샴페인은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서 생산되는 발포 포도주를 일컫는 말이고, 다른 지방에서 생산되는 발포 포도주는 샴페인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미국과 호주에서는 스파클링 와인, 이탈리아에서는 프로세코(Prosecco), 스페인에서는 카바(Cava)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다른 품종의 와인이 종주국인 프랑스에 못지 않은 훌륭한 품질로 세계 곳곳에서 생산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발포 와인만큼은 아직까지 프랑스의 샴페인이 그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할 품질로 최고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프랑스 샴페인은 지난 300년 동안 변함없이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만들어져 200여년 동안 끊임없이 축배의 술로 판촉되어왔다. 그 결과 유행과 멋을 따라 축배주로 샴페인을 마시는 사람도 많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흉내낼 수 없는 프랑스 샴페인만의 산뜻하고 우아한 맛을 즐기기 위해 샴페인을 찾는 사람들의 수도 늘었다.  샴페인의 맛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산도(acidity)인데 산도는 산뜻한 맛을 더해주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숙성시킬 수 있는 요소도 된다. 과일향과 산도, 그리고 이산화탄소의 기포가 잘 조화를 이루고 어우러질 때 비로소 훌륭한 샴페인이 탄생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고급 샴페인일수록 기포의 크기가 작다.  샴페인은 피노 누아, 피노 무니에, 그리고 샤도네 이 세가지 품종으로 만든다. 이 중 샤도네만 뺀 나머지 두 품종이 모두 적포도라는 점이 흥미롭다.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s-백포도로 만든 백포도주) 샴페인은 100% 샤도네만으로 만든 것이고, 블랑 드 누아(Blanc de Noirs-적포도로 만든 백포도주)는 100% 적포도로만 만든 것이다. 가장 값비싼 샴페인 종류 중 하나인 로제(rose) 샴페인은 피노 누아의 껍질에서 붉은 색을 추출하여 샴페인 색이 핑크빛으로 변하게 한 것인데, 전체 샴페인의 3~5%에 불과하는 샴페인의 꽃이다.  모든 샴페인은 약 30~60가지의 와인을 블렌딩해서 만드는데, 매해 샴페인의 품질을 고르게 유지하기 위해서 지난 수년간 수확된 포도로 빚어진 포도주들을 혼합하여 만든다. 전체 샴페인의 약 80% 이상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샴페인이고, 100% 그 해 수확된 포도로만 만들어진 빈티지 샴페인은 20% 미만일 뿐만 아니라 빈티지로 지정된 해에만 만들어질 수 있다.  최근 빈티지로 지정되었던 해는 1990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9년이었다. 그 밖에 빈티지 샴페인 중에서도 좀 더 오랫동안 숙성될 조건을 갖춘 '프리스티지' 쿠베(prestige cuvee)는 각 샴페인 하우스를 대표하는 최고급 샴페인으로 꼽힌다.  샴페인은 또한 당도에 따라 종류가 나뉘는데, 당도가 0~0.6%인 엑스트라 브루(Extra Brut)가 가장 드라이하고, 1.5% 미만인 브루(Brut) 샴페인이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종류이다. 엑스트라 드라이 샴페인은 당도 2% 미만이며, 브루 샴페인과 함께 식전이나 식사 중 반주로 쓰이고, 3.5% 미만의 당도를 포함한 섹(Sec)과 5% 미만의 데미-섹(Demi-Sec)은 디저트용으로 많이 쓰인다.  2003년 연말은 그동안 침체되었던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며 덩달아 고급 샴페인이 많이 판매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샴페인으로는 모에&샹동(Moet & Chandon),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 Perrier-Jouet(페리에-쥬에), 멈(Mumm), 태팅어(Taittinger) 등이 꼽히는데, 델리킷하고 가벼운 샴페인을 즐기는 사람은 로랑-페리에(Laurent-Perrier), 멈, 페리에-쥬에, 태팅어를, 미디엄 바디를 즐기는 사람은 샤를 하이드지익(Charles Heidsieck), 모에&샹동을, 좀더 풀한 바디를 원하면 루이 로데레(Louis Roederer)를, 매우 진하고 풍부한 맛의 풀 바디를 원하면 볼린저(Bollinger), 크루그(Krug), 뵈브 클리코를 택할 것을 권하고 싶다.  샴페인을 오픈할 때는 냉장고 속에 넣거나 얼음반, 물반 채운 통 속에 담가 두었다가 병마개 주위의 호일을 걷어내고, 코르크 주변의 와이어를 조심스럽게 벗겨내면서 코르크가 압력에 의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한 손으로 코르크 전체를 감싼다.  코르크 위에 냅킨이나 수건을 덮고 코르크를 천천히 돌려서 빼내면 되는데, 샴페인이 거품과 함께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열어야 한다. 샴페인 병을 흔들어서 코르크가 흰 거품과 함께 터져 나오도록 하는 것은 기분을 내는데는 좋지만, 샴페인의 이산화탄소 기포가 다량 빠져나감으로써 자칫 김빠진 샴페인을 마시게 될 수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    출처 : dream infinity  30도를 넘는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와인 애호가들이 샴페인에 대한 관심도 늘고 있다.  특히 시원한 음료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와인 동호회를 중심으로 샴페인을 더 맛있게 즐기기 위한 방법과 같은 정보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계절적 요인과 전반적인 와인 소비 증가가 이유겠지만 무엇보다도 샴페인 소비에 대한 개념이 축하할 일이나 파티 등 특별한 이벤트에만 마시는 것에서 가정에서 혹은 친구들을 만날 때 일상적으로 즐겨도 좋다는 쪽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샴페인은 사실 보통명사가 아니라 상퍄뉴의 영어식 발음으로 프랑스 상퍄뉴 지역에서 나는 스파클링 와인을 말한다. 스파클링 와인은 말 그대로 탄산가스 기포가 함유된 와인으로 보통 한 병에 25억개의 이산화탄소 기포가 들어있다. 이런 와인을 일컬어 프랑스에서는 크레망(Cremant) 또는 뱅 무스(Vins Mousseux)라고 하며, 영어권에서는 스파클링 와인(Sparkling wine), 스페인은 카바(Cava), 이탈리아는 스푸만테(Spumante), 독일은 젝트(Sekt)라고 부른다. 스파클링 와인은 보통 샤도네이, 피노누아, 피노무니에 등의 포도 품종을 사용하며 특별히 빈티지가 표시되는 경우는 드물다. 보통 화이트와인에 쓰는 품종을 사용하지만 강렬한 맛을 위해서는 레드와인 품종을 사용하며, 최근에는 로제 와인처럼 우아한 장미 빛을 띠는 제품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울러 샴페인 이외에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스파클링 와인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뜨거워지면서 호주나 아르헨티나 등 신대륙 제품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스파클링 와인은 다른 와인에 비해 빛과 온도에 특히 민감해 12∼18도 정도에서 보관하는 것이 좋다. 구입 후 1년 이내에 마시는 것이 좋고, 아이스 버킷에 30분 정도 넣어둔 후 4.5∼7도 정도의 온도에서 즐기는 게 가장 맛있다. 튤립 모양의 잔으로 마셔야 기포를 잘 유지하도록 도와주고 스파클링 와인 특유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돔 페리뇽 1999년산’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한 샴페인으로 숙성된 와인의 중후함과 풍부한 미네랄로 인한 경쾌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제품이다. 관자 등 해산물, 쿨라텔로 이탈리아 햄과 찰떡궁합이다. 가격은 매장에서 구입시 17만원대이다. 또한 ‘크루그 그랑퀴베’는 미각을 깨우는 풍부한 맛과 신선한 꽃향기가 특징으로 한입 머금으면 입 안 가득 느껴지는 장미꽃 향기가 신선함을 부여한다. 이탈리아 요리와 잘 어울리며, 가격은 20만원대이다. 중간 가격대 제품으로 ‘로제 임페리얼’이 적합하다. 진한 핑크색을 띤 제품으로 주품종인 피노 느와에서 느껴지는 과일향과 깔끔한 끝맛이 매력이다. 구운 조개와 올리브 오일에 튀긴 생선 등 지방질이 풍부하며 요리 방식에 따라 다양한 맛을 내는 음식과 잘 어울린다. 과일과 함께 마셔도 좋다.가격은 7만원대다. 최신덕 수석무역 와인마케팅팀장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샴페인이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 잡고 있다”며 “소비층이 젊은 만큼 달지 않고, 레이블이 감각적으로 디자인의 샴페인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출처:파이넨셜뉴스    
900    [쉼터] - 샴페인 기포가 크면 클수록 맛이 없다?... 있다!... 댓글:  조회:5923  추천:0  2016-12-31
  1. 와인의 한 종류 1.1. 개요1.2. 주요 샴페인 메이커1.3. 마실 때 유의사항1.4. 기타 이야기거리 2. 무적코털 보보보의 등장인물     1. 와인의 한 종류[편집]     와인 와인/색상 화이트 와인 · 레드 와인 · 로제 와인 와인/용도 식전주 · 테이블 와인 · 디저트 와인 와인/종류 스파클링 와인 · 귀부 와인 · 아이스 와인 · 셰리 · 포트 · 토카이 와인/국가 와인/프랑스 · 와인/이탈리아 · 와인/독일 · 와인/스페인 · 와인/칠레 와인/프랑스 보르도 · 부르고뉴 · 샹파뉴 · 론 · 알자스 · 프로방스 · 랑그도크   스파클링 와인의 부류에 들어가는 지역한정 술로, 강제로 이산화탄소를 주입하는 스파클링 와인과는 다른 전통방식으로 탄산을 갖도록 양조한 고급 와인이다. 샴페인은 영어로 읽었을 때 이름이고, 프랑스어로는 샹파뉴(Champagne)라고 한다. 철자는 똑같다.  1.1. 개요[편집] 프랑스의 샴페인(샹파뉴) 지역[1]에서만 생산된 포도만을 사용하여, 전통 양조법으로 생산한 것만 샴페인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다. 당연히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기 때문에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기도 하지만, 샴페인에 대한 마케팅효과로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더불어 가격이 상승된 측면도 있다. 지리적 표시제/유럽연합을 참고할 것. 샴페인 양조에는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 그리고 청포도인 샤르도네 등의 3가지 품종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검은 포도는 껍질은 제거하고 만들기 때문에 레드 와인이 아닌 화이트 와인의 형태로 만들어지게 된다. 대부분의 제품은 상기 3개 품종을 서로 배합(blending) 하여 생산하지만, 일부 제품은 검은 포도로만, 또는 청포도로만 만든 것이 있다. 전자는 검은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라는 뜻에서 블랑 드 누아르(Blanc de Noir), 후자는 청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라는 뜻에서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이라고 부른다. 거기에 적당한 양조기법을 활용해 생산하는 로제(Rosé)도 있다! 거품 포도주로 주로 파티할때 쓰는데, 마개인 코르크를 안에서 탄산이 밀어내어 발사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진짜 샴페인은 비싸기 때문에 보통 이를 흉내낸 거품 포도주일 가능성이 크다. 흉내냈다고 해도 오리지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고급 샴페인은 입안을 살짝 자극하는 정도의 기포 입자가 미세하고 오래가도록 하기 때문에, 폭발하는 정도라면 고급 샴페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 고급 음식점 가면 항상 최고 레벨에 랭크된 술인 돔 페리뇽이나 크뤼그 같은 것이 고급 샴페인. 그 중에서도 원조 샴페인은 돔 페리뇽[2]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최초로 샴페인을 발명한 수도사의 이름을 브랜드로 내세워 판매하고 있으며, LVMH그룹의 대표적 상품이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이름만 샴페인인 1,000원대의 술이 존재했기 때문에[3] 그런데다가 샴페인이라고 붙이고싶으면 SYAMPEIN이라고 하던가.. 선물용으로는 절대 금물인 술이다(...)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명이기도 하다. 1.2. 주요 샴페인 메이커[편집] 볼랑제(Bollinger) 되츠(Deutz) 뒤발-르르와(Duval-Leroy) 고세(Gosset) 앙리오(Henriot) 크뤼그(Krug) 랑송(Lanson) 로랑-페리에(Laurent-Perrier) 루이 로드레(Louis Roederer) 모엣 에 샹동(Moët & Chandon) 멈(Mumm) 니콜라 푀이야트(Nicolas Feuillatte) 페리에-쥬에(Perrier-Jouët) 피페-에이식(Piper-Heidsieck) 폴 로제(Pol Roger) 포므리(Pommery) 살롱(Salon) 테탕제(Taittinger) 뵈브 클리코 퐁사르당(Veuve Clicquot Ponsardin)   1.3. 마실 때 유의사항[편집] 샴페인의 코르크는 일반 와인의 코르크보다 매우 두껍고[4], 만일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철로 만든 안전장치가 달려있다. 안전장치를 제거하고 엄지로 코르크를 누르면서 천천히 코르크를 열어주는 것이 좋다. 이때 넓은 장소나 맨 벽등 코르크를 조준할만한 방향이 없으면 좀 신이 덜 나도 코르크를 날리지 말고 보통 병 따듯이 두 손으로 제대로 잡고 따자. 레스토랑 같은 곳도 당연히 다른 테이블에 튈 수 있으니까 코르크를 안 날리는데, 실수로 코르크가 발사되어 전등 같은 물건이 부서지거나 사람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5]  주로 식전주로 입안을 상쾌하게 하고 식욕을 자극하는데 사용된다. 가볍게 즐길 수 있기 때문에 파티나 클럽에서도 은근히 많이 소비되는 편이다. 아이스버켓에 두어 차갑게 서빙하는 것이 좋으며, 이 이유는 온도가 올라가면 상쾌한 맛이 떨어지고 기포의 질감이 무거워지기 때문. 벌컥벌컥 마시기보다는 입에 살짝 머금어 기포를 즐기고, 혀를 굴리면서 질감까지 느껴보도록 하자. 단, 너무 오래 머금으면 온도가 올라가서 맛이 없다(...). 술 중에서 가장 숙취가 없는 술 중에 하나이다. 단 최대 한 병까지만... 많이 마시게 되면 당도가 높고 가스가 있기 때문에 다음날 고생하는 건 예사의 화이트와인과 마찬가지나 그 이상. 게다가 차게해서 마시기때문에 살살 잘 넘어가므로 "어느새 이만큼 마셨네"가 되기 쉬우므로 주의.  마찬가지로 차게 나오기 때문에 잔을 잡을 때 잔의 다리를 잡고 마시는 것이 권장사양. 샴페인 전용잔은 잔의 다리가 길고, 볼의 형태도 길고 입구가 좁은 모양을 갖추고 있다. 기포를 좁은 잔에 가두고, 차갑게 서빙된 샴페인의 온도에 체온이 전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잔의 다리가 긴 것이다. 1.4. 기타 이야기거리[편집] 한국에서는 무지하게 비싸게 팔지만 정작 프랑스에서는 생각보다 많이 싸다!! 2011년 8월기준 35유로정도선에서 모엣 에 샹동(Moët & Chandon)이나 둬츠(Deutz),뵈브 클리코 퐁사르당(Veuve Clicquot Ponsardin) 한병을 무려 슈퍼!에서 살수 있다. 로랑-페리에(Laurent-Perrier)나 니콜라 푀이야트(Nicolas Feuillatte)는 28유로부터 있고.한국이 봉인게지. 한국에서 와인21기준으로 15만원안팎의 제품들이 결국 35유로짜리인셈.(35유로가 이미 프랑스 유통마진 다 붙은 가격임을 생각하면 환율을 두배로 잡아도...) 하지만 웬만한 카페나 술집에서는 한병에 못해도 60유로(굉장히 싸게파는 셈이다 그래봐야 로랑-페리에(Laurent-Perrier)정도지만)에 팔고 주로 80유로대이며 클럽에 가면...함부로 시키지 말자. 현지에서 낚이지 않고 살려면 주류 전문점 니콜라 Nicolas에 가서 사는게 제일 손쉬운 방법. 딱히 낚일것도 없지만.단 동네 자그마한 이민자 슈퍼에서 사면 가격이 제멋대로이므로 비추.  덧붙여 샴페인(샹파뉴)는 국제무역기구(WTO)의 지적재산권관련 규정인 TRIPs 규정에서 인정하는 지리적 표시제(GI)에서의 규정에서는 스파클링 와인인 백포도주의 보통 명사임을 감안, 일단 보호에서 제외되었다. 프랑스나 유럽 연합에서는 샴페인도 보호할 것을 각국에 요구하면서 한EU FTA에서도 샴페인, 샹파뉴, Champagne가 일단 지리적 표시제 대상에 포함되었다. fta가 발효되면 이 부분의 효력이 중단되는 결정이 나지 않는 한 한국에서 이 이름을 쓸 수 없게 된다.[6] 굳이 한국에서만의 일이 아닌 것이 일본에서 유비트 등등의 리듬게임에 쓰인 Rocknrolla!라는 곡으로 유명한 밴드였던 [Champagne] 의 경우, 일본의 C.I.V.C.(샴페인 형제 위원회)의 권고로 근 오년간 사용하던 밴드명을 [Alexandros] 로 바꾼 전례가 있다. 여담으로 어떤 선박이나 잠수함을 완성할때 진수식에서 샴페인 병을 배에 부딪치게 해서 깨뜨리는 절차아닌 절차를 밟고 이름을 부여받는다고 한다. 가끔 샴페인 병이 안깨지는 경우도 있는데,만약 샴페인 병이 안깨졌다면 이는 불길한 징조라고 여겨왔는데... 샴페인을 냉장고에 보관할때 병입구에 금속성 포크나 숟가락을 꼽아두면 신선하게 유지할수있다.[7] 인터뷰영상 엿 같은 티셔츠나 사라고 2. 무적코털 보보보의 등장인물[편집] 풀네임은 무알콜 샴페인. 보보보보 보보보의 형중 한명인 베베베베 베베베의 부하. 구 A 구역 대장. 구 B 구역 대장인 전봇대와는 달리 사람 모습을 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이가스뀌리의 성장판 모습에 머리에 쥐나 곰의 귀(?)같은게 나있고 목에 머플러를 두르고 있다. 별 비중및 활약은 없고 그냥 전봇대와 같이 열받은 베베베를 말리거나 돈벼락, 떡꼬치맨, 젤라티노, 절망맨에게 린치당하는 안습한 활약밖에 없다.    [1] 정확히는 샹파뉴-아르덴 주(레지옹)에 속한 랭스(Reims)가 중심도시이다. 이곳에서 유명한 샹파뉴 중 하나인 멈(Mumm, 뭄)의 공장 견학이 가능하다.[2] 원래 수도자. 겨울 내 숙성되지 않던 포도주들이 봄이 되어 따듯해지면서 급속히 숙성되어 탄산 가스로 인해 폭발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악마의 장난이라고 무서워했는데, 그 맛을 보고 "오.. 나는 별을 마시고 있다."라는 말을 남긴 후 샴페인의 내부 압력을 버틸 수 있는 용기를 만들고, 품종까지 연구했다고 한다[3]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2012년 중반기 기준으로 최저가가 대형마트에서 3,000원을 넘어가며, 슈퍼 및 편의점 등에서는 4,000원 이상 줘야 한다.[4] 기포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고, 좀 더 단단히 고정하기 위해서 병에 삽입되는 부분이 매우 두껍다[5] 이때문에 비행기가 회항하게 된 사건도 있다. 승무원이 샴페인을 따다가 실수로 코르크가 발사되었고 그 코르크가 비행기 천장을 때리면서 산소 마스크가 내려와(...) 기내가 난장판이 되어 어쩔수 없이 회항하게 된것. #[6] 대부분의 지리적 표시는 청도반시, 강화인삼과 같이 지명+품목의 경우이다. 하지만 유럽의 포도주의 경우 지명 자체가 품목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어 논란이 있다. 특히 '샴페인'은 한국에서 샹파뉴 지방의 이름을 가리키는 말로 쓰지 않기 때문에 더 논란이 될 것이다.[7] 샴페인속에 기포는 이산화탄소로 온도가 낮을수록 용해도가 커진다. 열전도율이 높은 금속성 포크나 숟가락이 냉장고에 냉기를 샴페인에 전달해 신선하게 유지되게 한다. ====================================================== 2016.12.29 03:00 - 佛 과학자들 맛의 비밀 밝혀 위로 솟아오르는 기포 클수록 향과 맛 느끼게 하는 화학물질 공기 중으로 많이 발산돼   ▲ 샴페인 기포 생성 과정 - 잔에 붙어 있는 섬유소의 빈 공간에 이산화탄소가 들어가면서 기포가 생긴다. 주변의 이산화탄소가 기포에 달라붙으면서 기포는 점점 커진다. 이에 따라 부력도 커지면서 결국 기포가 위로 떠오른다. 공기와 만나 기포가 터지면 그 자리에서 샴페인이 위로 솟구친다. /자료: 프랑스 랭스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마개가 열리면 거품이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기쁜 일을 다 같이 나누는 날에 샴페인만큼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게 또 있을까. 샴페인의 본고장 프랑스의 과학자들이 샴페인의 맛을 더해줄 수 있는 비밀을 밝혀냈다. 바로 샴페인을 잔에 따랐을 때 위로 솟아올라 오는 기포(氣泡)가 크면 클수록 풍미가 더해진다는 것이다. 프랑스 랭스대학의 물리학자 제라르 리제르-블레어 교수는 '유럽 물리학 저널 스페셜 토픽' 최신호에 "샴페인 기포가 클수록 터질 때 공기 중으로 향과 맛을 느끼게 하는 화학물질이 많이 발산된다"고 밝혔다. 샴페인은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만드는 스파클링 와인, 즉 발포성(發泡性) 포도주를 말한다. 포도주를 한 차례 더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이산화탄소가 많이 나와 탄산음료처럼 기포가 많이 생긴다. 랭스대학은 샴페인의 본고장인 샹파뉴-아르덴 지역에 있다. 연구진은 샴페인을 잔에 따랐을 때 술과 공기가 맞닿는 면에서 기포들이 터지는 과정을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했다. 기포의 크기는 0.4~4㎜였다. 이 중 지름이 3.4㎜일 때 공기 중으로 맛과 향을 담은 입자들이 가장 많이 퍼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제라르 리제르-블레어 교수는 "기포가 작으면 작을수록 샴페인의 품질이 좋다는 기존 관념과는 정반대의 결과"라며 "기포 크기를 키우는 방법을 개발하면 샴페인의 맛을 더 좋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랭스대 연구진은 10년 넘게 샴페인의 과학을 연구하고 있다. 그동안 샴페인의 기포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 나왔다. 먼저 샴페인의 기포는 잔에 묻어 있는 섬유소 때문에 생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잔을 닦는 천에서 나온 섬유소는 가운데 빈 공간이 있다. 샴페인에 녹아 있는 이산화탄소가 이곳으로 들어가면서 기포가 생긴다. 이산화탄소가 더 많이 몰리면서 기포는 점점 더 커지고 부력(浮力)으로 인해 기포가 위로 떠오른다. 연구진이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보면 기포 하나가 터지는 순간 샴페인이 물줄기처럼 위로 솟구친다. 기포가 터지면 빈 공간이 생기면서 주변의 기포를 잡아당긴다. 그 힘이 샴페인을 위로 밀어올린다. 연구진은 샴페인 잔 하나당 100만 개 정도의 기포가 발생한다고 밝혔다. 샴페인에 기포가 많이 생기게 하려면 좁고 긴 잔에 따라야 한다. 그래야 기포가 샴페인 전체를 빠짐없이 순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샴페인을 차게 마셔야 기포 속에 들어 있는 알코올이 줄어들어 샴페인의 미묘한 맛을 더 잘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 밖에 차가울수록 코르크 마개의 움직임이 적어져 병을 열 때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영완 기자 =============================================== 크루그의 최고경영자 매기 헨리케즈. 28세, 32세의 두 아들을 둔 60세의 나이지만 스키·테니스·사이클링·승마를 즐기는 열정과 에너지의 소유자다. -올드한 브랜드를 변화시키기 위해 처음 한 일은 무엇인가. “취임 첫 해는 럭셔리 시장을 이해하기 위해 브랜드의 역사와 철학, 헤리티지를 공부하며 보냈다. 매출은 점점 더 떨어졌고, 그 해 임원 평가에서 D를 받았다. 평생 최악의 점수라 절대 잊을 수가 없다. 하하.” -취임 첫 1년 동안 브랜드를 공부한 후 찾아낸 결론은 뭔가.  “오래된 브랜드인데도 소비자들이 존재 자체를 잘 모르더라. 너무 오랫동안 왕실이나 유명 인사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닫힌’ 브랜드가 된 탓이다. 럭셔리 브랜드들이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오만이다. 좀 더 많은 소비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브랜드 이미지를 모던하게 바꿀 전략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방법으로 샴페인마다 어울리는 스토리텔링이나 음악·음식을 매치하는 ID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창립자 조셉 크루그의 꿈은 ‘매년 달라지는 기후와 상관없이 해마다 최상의 샴페인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년 10여 가지 빈티지 와인과 그 해 포도로 만든 120여 가지 베이스 와인을 블렌딩한 다음 6년 이상 숙성시켜 논빈티지 샴페인 ‘그랑 퀴베’(‘프레스티지 퀴베’와 같은 의미)를 만들어왔다. 헨리케즈는 이 특별한 그랑 퀴베 스토리를 고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병마다 각각의 ID를 부여했다. 6자리 숫자로 구성된 ID를 크루그 모바일 앱이나 웹사이트에 입력하면 샴페인의 숙성 기간, 블렌딩 된 베이스 와인의 수, 사용된 리저브 와인(오래 숙성된 고급 와인)의 최고&최신 연도, 어울리는 음식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이 샴페인을 마시면서 듣기딱 좋은 음악도 감상할 수 있다.? -브랜드 홍보대사로 왜 셀럽이 아니라 셰프를 선택했나. “유명인들 사이에선 이미 ‘크루기스트’가 형성돼 있기 때문에 소비자와 더 밀접하게 만나는 셰프가 홍보대사로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앱·음악·음식…. 모두 요즘 젊은 층의 취향이다. “크루그만의 샴페인 스토리를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선 밀레니얼들에게 친숙한 트렌드와 방법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럭셔리 브랜드는 무엇을 생산하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게 우선이다. 젊은 층은 정보에 민감하고 스토리텔링을 좋아한다. 그들을 겨냥하려면 호기심을 이용해 브랜드의 장인정신을 전달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샴페인을 더 맛있게 마실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일단 집에 있는 플루트(flute·목이 긴 샴페인 잔)를 모두 버려라. 입구가 좁은 잔으로는 좋은 샴페인이 가진 미묘한 향을 충분히 감상할 수 없다. 마치 콘서트장에서 이어폰을 끼고 감상하는 꼴이다. 그리고 너무 차게 마시지 마라.역시 향기가 잘 퍼지지 않는다.” -첫 방한이라고 들었다. 혹시 한식을 접해봤는지. “한국은 모든 게 정돈되고 현대적이더라. 어제 저녁 샴페인을 곁들여 한식을 먹었는데 아주 잘 어울렸다. 궁합이 잘 맞는다. 덕분에 어젯밤 너무 많이 먹었다. 하하.” /글=서정민 기자   ==================================   기포가 잘 올라와야 좋은 샴페인인가? 제품 협찬 / 촛대는 이딸라 페스티보(02-749-2002). 1 EGLY-OURIET BLANC DE NOIRS V.V NV 대형 샴페인 하우스가 위상을 떨치는 것을 보면서, 고품질이지만 저평가된 샴페인을 수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가장 먼저 달려들었던 샴페인 하우스가 에글리 우리에다. 이 샴페인은 이곳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레인지다. 한우성(‘비티스’ 팀장) 2 DESBORDES AMIAUD ‘M ELODIE’ PREMIER CRU MILLESIME 1990  드물게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올드 빈티지 샴페인이다. 신선한 스타일의 논빈티지 샴페인과 달리, 셰리에서 느낄 수 있는 달콤한 향이 나면서 숙성된 향도 올라온다. 10만원 후반이니 올드 빈티지 샴페인치고는 꽤 괜찮은 가격이다. 이현정(‘비탈와인’ 대표) 3 BELLAVISTA FRANCIACORTA PAS OPERE DOCG 2007  샴페인은 아니지만, 샴페인만큼 눈을 번쩍 뜨이게 한 프란치아코르타 지역의 스파클링 와인. 20년 이상 된 고품질 포도밭에서 재배한 포도로 작은 오크통에서 양조한다. 샴페인이 최고라는 사람과 함께 마셔본다. 손기은(에디터) 4 PIPER HEIDSIECK RARE 2002  익숙한 샴페인 브랜드 파이퍼 하이드직에서 만드는 ‘레어’ 샴페인이다. 모든 포도는 그랑 크뤼 밭에서 생산해 블렌딩한다. 왕관 모양의 금박 장식은 병과 분리할 수 있어 기념으로 간직하기에도 좋다. 양윤주(‘하프패스트텐’ 오너 소믈리에)   Q 기포가 잘 올라와야 한다? A 힘 있게 쭉쭉 올라오는 기포가 샴페인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플루트 잔에 샴페인을 따르고 방울방울 올라오는 기포를 만끽하는 것이 샴페인을 마시는 즐거움 중 하나일 수 있지만, 혀를 때리는 듯한 강한 기포가 전부는 아니다. 음식과 함께 마시는 걸 고려해 일부러 아주 약한 기포의 샴페인을 만드는 생산자도 있다. “샹파뉴의 젊은 RM 생산자들 사이에서는 부드러운 기포, 그러니까 마이크로 버블을 만드는 것이 내추럴 와인과 함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샴페인 전문 수입사 아베크뱅 양세열 대표가 증언한다.   Q 무조건 차갑게 마셔야 한다? A 테이블 높이만큼 다리가 긴 샴페인 쿨러가 놓인 테이블은 바라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하지만 모든 샴페인이 얼음의 온도만큼 차가워야 하는 건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샴페인의 스타일은 빈티지, 논 빈티지 , 프레스티지 퀴베, 로제, 블랑드 블랑, 블랑드 누아 등으로 다양하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쿨러에 푹 담갔다가 가장 차가울 때 꺼내 마시는 게 오히려 어색하다. 바디감이 좋은 강인한 샴페인이라면 얼음에서 막 뽑아낸 듯한 온도가 많은 향과 맛을 마비시켜 버릴지도 모른다.   Q 샹파뉴 이외의 스파클링은 역시 좀 아쉽다? A 샹파뉴 밖의 프랑스 스파클링은 크레망, 스페인은 카바, 이탈리아는 스푸만테, 독일은 젝트…. 이 정도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역시 샴페인에 비하면 품질이 떨어진다는 인식을 떨치긴 쉽지 않다. 레드 와인에 대해서는 산도가 강한 걸 좋아한다거나 타닌이 약한 걸 즐긴다는 식으로 취향이 분명히 말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스파클링 와인의 스타일을 말하는 일은 아직 덜 자연스럽다. 그건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는 재미를 아직 완전히 못 느꼈다는 뜻이다.
899    [쉼터] - "띠"의 기준을 알고 "사용" 잘 하기... 댓글:  조회:3552  추천:0  2016-12-30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제가 새해 인사를 드리면서 'xx년(px年)'이라는 말을 일부러 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육십갑자(六十甲子)의 몇번째 간지(干支)'인 'px (px年)'에 대해 그 적용을 제 개인적으로는 설날(음력 1월 1일)부터로 알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언론, 학계, 인터넷을 위시한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서로 다르게 주장하고 있는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서입니다.   xxxx년 1월 1일이 되자, 사회의 각계각층과 수많은 국민들께서는 "희망의 xxxx년 px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px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인사를 하셨습니다. 저는 음력 1월 1일(양력 2월 8일)이 되기 전에는 'px년'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간지'는 '양력'이 아니라 '음력'으로 따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게 틀리지 않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올해 음력 1월 1일이 돼야 비로소 'px년'이 되는 것을 미리 가불(?)이라도 해서 쓰고 있다는 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TV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언론에서도 새해의 동이 트기가 무섭게 "px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면서 미리(?) 친절하게 인사를 하고 있으며 화려하게 찍어 나오는 xxxx년 달력에는 1월 달력부터 'px년'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인쇄돼 있습니다.   이를 두고 저는 그분들이 무식해서, 상식이 없어서 그러신다고 보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이런 주장을 하면서 '지금은 양력 1월 1일부터 간지가 시작되는 것이 상식'처럼 돼 버린 현실 앞에서 만의 하나라도 '정부 측에서 간지의 기준을 양력으로 변경 공지'했는데 제가 그걸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그런 변경 공지를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부의 관련 부처나 학계, 언론계 등의 책임 방기를 간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양력이 '간지'의 기준처럼 잘못 착근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국민들이 잘못 알고 있다면 그와 관련하여 책임 있는 자리에 계신 분들,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분들께서는 그 잘못을 바로잡는 일에 백방으로 발을 벗고 나서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한 해에 'r m년(r m年)', 'px년(px年)'의 두 해가 동시에 들어 있는 게, 합리적인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학설이라고 보신다면 '인문학적 혁명'을 해서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양력'을 간지의 기준으로 삼는 특단의 조치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혼란이 있든 말든 그냥 너희 민초들이 알아서 맘대로 해라라는 식으로 뒷짐을 지고 어물쩍 넘어가시는 것은 국록을 먹는 사람으로서 무책임한 것이며 학자들은 진리를 고양해야 할 학문의 양심을 저버리는 비겁한 처신일 것입니다.   그러면 말이 나온 김에 '띠'에 관련해서 언급해 보겠습니다. 이 '띠'에 대한 기준도 각양각색입니다. 저는 '열두 가지의 지지(地支)'인 '띠'의 기준 역시, 음력 1월 1일을 기준으로 바뀌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요즘 들어서는 은근히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다음'에서는 '띠 자동 계산기'를 검색하면 '음력 1월 1일'을 기준으로 '띠'가 바뀌는 것으로 나오지만 '네이버'에서는 당해 연도의 입춘(立春)을 기준으로 '띠'가 바뀌는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주역파(周易派), 역경파(易經派) 등에서는 '동지(冬至)'를 '띠'가 바뀌는 기준으로 보고 있습니다.   님들도 지금 인터넷을 여기저기 검색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요즘은 명리학(命理學)을 하시는 분들의 논리 정연(?)한 이론에 힘입어 '입춘이 띠가 바뀌는 기준'이라는 주장이 질풍노도처럼 번지면서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습니다. 교통사고 현장에서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입춘 기준설'의 목소리가 워낙 크다 보니 저 자신도 주눅이 드는 심정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명리학 쪽에서는 같은 입춘이라도 태어난 시각에 따라 '띠'가 다르다고 주장하고 계시니 이쯤 되면 '국가 공인 실시간 띠 자동 계산기'라도 가정마다 한 대씩 구비해야 하는 게 아닌지 기우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역시 '국가 공인', '학계 공인'이 부재하다는 것입니다. 국립국어원이나 그 어느 백과 사전에서도 '띠'의 기준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내로라하는 국어 전문가들이 집필하고 있다는 중앙일보 '우리말 바루기'에서조차 이러한 문제에 대해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안일하게 보고 있는 것이 놀랍습니다.    학문에는 '백화제방(百花齊放)'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은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띠'의 문제는 '백화제방'을 적용할 일이 아닙니다. '띠'는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이 돼야 진정한 '띠'인 것이지, 각자의 입맛대로 '띠'를 정한다면 그게 무슨 '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우습지 않습니까?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난 사람이 서로 '띠'가 다르다는 게 말이 됩니까? 올해의 경우, 1월 1일부터 2월 7일까지 출생한 아기는 그 부모가 '띠'의 기준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날에 태어났어도 '띠'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잘들 아시겠지만 신문 같은 데 보면 '오늘의 운세'라는 게 있습니다. '오늘의 운세'에서는 대부분 '띠'로 분류해서 그날그날의 운세를 봐 주고 있는데 거기에는 예를 들어 '원숭이띠'를 얘기하면서 1992년생, 1980년생, 1968년생... 이라고만 표시돼 있지, 음력이나 당해 연도 입춘을 기준한다는 말은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오늘의 운세'가 나름대로 인기가 있는 기사인데 음력 1월 1일 이전이나, 입춘 이전에 태어나신 분들 중의 많은 분들이 다른 사람의 운세를 자신의 운세로 읽었을 것을 생각하니 아무리 재미로 보는 거라고 해도 쓴웃음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잘난 학자님들 누구 한 분, 이런 문제를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 삼지 않고 계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지식인'들의 '비겁한 침묵'을 개탄해 마지않습니다.   '띠'는 우리나라에서 결코 무시 못 하는 우리나라의 오래된 문화이며 정서입니다. 그런데도 책임 있는 관련 공직자나, 전문 지식이 있는 학자들께서 이를 나 몰라라 하며 방관만 하시면 되겠습니까? 하다못해 인터넷을 여기저기 찾아봐도 관련 부처나 명망 있는 학자님들의 '결정적인 한마디'가 보이지가 않습니다,    이런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난 사람이 서로 '띠'를 다르게 알고 있는 것을 바르게 알려 주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올해도 입춘(2월 4일) 이전에, 음력 1월 1일(2월 8일) 이전에 소중한 새 생명은 태어날 것입니다. 그 새 생명들한테 '띠'를 '양띠'라고 해야 합니까? '원숭이띠'라고 해야 합니까? ...의 교육 과정이 눈부신 발달을 했어도 '띠의 기준' 하나 제대로 못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 것까지 정부가 나서고 지식인들이 굳이 나설 필요가 있냐구요? 하기는 그런 거 신경 안 쓰셔도 금배지 다시는 데 지장 없고 월급 타 드시는 데 지장 없고 교수 재임용되시는 데 하등의 지장이 없으실 테니 충분히 이해는 됩니다. 그럼, 임시방편으로 이렇게 하시면 어떨까요? 매년 새해가 되면 설날이 입춘보다 앞에 있으면 입춘 전날까지, 입춘이 설날보다 앞에 있으면 설날 전날까지 출생한 사람은 '가죽띠'로 정하는 걸로요. 이 띠, 저 띠 골치 아프게 따지지 않고 '2016가죽띠', '2017가죽띠'... 이런 식으로 정해 보시지요? 뭐, 이왕이면 그 비싸다는 '소가죽'을 붙여 '소가죽띠'로 명명하셔도 괜찮겠네요.  헐~     
898    [쉼터] - 모든 "방문객님"들께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댓글:  조회:6067  추천:0  2016-12-30
목차 국가 운수를 점치기 위해 등장한 『토정비결』 풍수도참서에서 신수풀이 점술서로의 변화 애민(愛民)을 몸소 실천한 이지함의 명성에 기대다 『토정비결』 괘를 구성하는 체계 『토정비결』의 괘사, 은유적 표현에서 좀 더 단정적으로 『토정비결』에 대한 두 가지 평가 국가 운수를 점치기 위해 등장한 『토정비결』 “시작이 좋아야 끝이 좋다”라는 속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첫 시작을 특히 중요하게 여긴다. 1년의 계획을 세우는 새해 첫날 설날은 그런 까닭에 1년 중 가장 비중 있는 날로 꼽힌다. 그런 설날에는 늘 간절한 바람이 따랐으며, 자연히 점복·기복(祈福)과 관련된 풍속이 있어왔다. 갖은 방법으로 괘를 만들어 길흉을 점치는 윷점, 오행점, 『토정비결』 등이 그것이다. 이들 점복이 정초 세시풍속으로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그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1800년경 유득공이 지은 『경도잡지(京都雜誌)』는 윷점만 자세히 다루고 있고, 1835년경 유만공이 지은 『세시풍요(歲時風謠)』에도 윷점에 관한 기록만 있다. 1849년경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윷점과 더불어 오행점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 토정 이지함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토정비결』에 관한 기록은 『경도잡지』 『세시풍요』 『동국세시기』 등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조선 후기까지 펴낸 다른 문헌들에서도 『토정비결』에 관한 기록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미국 역사학자 겸 선교사인 호머 헐버트가 1906년에 쓴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에도 당사주를 비롯해 당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다양한 점복이 망라되어 있는데, 윷점과 오행점은 등장하나 『토정비결』은 전혀 다뤄지지 않는다. 『오행(五行)』, 36.2×31.7cm, 19세기 말~20세기 초, 개인 오행의 점괘를 풀이한 책이다. 『윳』, 21.6×17.5cm, 19세기, 경상대 문천각 윷점으로 친 점괘를 풀이해놓은 책. 『당사주책』, 1943, 국립민속박물관 12성의 운행에 따라 길흉을 점치는 방법을 수록해놓았다. 현재까지 『토정비결』이란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문헌은 『황성신문』 1899년 12월 19일자 논설로, 『정감록』과 관련하여 언급된다. 그러나 이 논설에서 말하는 『토정비결』이 지금의 『토정비결』처럼 개인의 한 해 신수를 봐주는 책인지, 아니면 이름만 같고 내용은 다른 비결서(祕訣書)를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토정비결』은 『황성신문』 1907년 5월 8일자와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1일자 논설에도 나온다. 이 기사에서도 『토정비결』이 지금처럼 개인 신수를 풀어보는 점술책이 아니라 『정감록』처럼 국가 존망과 풍수도참에 관한 내용을 싣고 있는 비결서인 듯이 언급된다. 보국론(保國論): 나라를 지키세, 나라를 지키세. 오늘이 마침내 바로 그날이요, 이때가 마침내 바로 그때로다. 남산 아래 노생원(老生員)도 완고한 꿈에서 조금씩 깨어나서 신서적(新書籍)을 눈여겨보시오. 고을마다 있는 수전노들도 슬기 구멍이 문득 열려서 각 학교에 기부 좀 하시오. 『토정비결』을 손에 쥐고 십승지(十勝地)를 찾는 사람들도 지금 차츰 돌아가시오. - 『황성신문』 1907년 5월 8일 위 신문 기사들의 내용으로 추정해볼 때 지금처럼 개인 신수를 풀려고 했다기보다 『정감록』과 같이 국가 운수를 예언하려던 쓰임새를 지닌 또 다른 『토정비결』이 19세기 초에서 20세기 말 민간에 널리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토정비결』을 손에 들고 십승지(十勝地)를 찾아 나섰다는 표현으로 봐서 그 『토정비결』은 풍수도참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구한말 정치·사회가 혼란한 시기에 『정감록』과 함께 이 『토정비결』이 전국으로 유포되었으며 사람들이 여기 실린 내용을 믿고 따랐음이 『독립신문』 1920년 5월 1일자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제2보호조약을 늑결한 때: (…) 경복궁 안의 둥둥거리는 무당 북소리는 (1904년 러일전쟁 때) 팔미도의 대포 소리와 서로 화답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민 측으로 보면 독립정신은 보부상의 나무 몽둥이 아래에서 남겨진 것 없이 타파되어 우국지사는 거의 절반이 해외로 바삐 달아나 숨고, 그나마 대부분은 『정감록』 『토정비결』에 홀리고 미혹한 바 되어 계룡산과 우복동(牛腹洞)을 찾는 소리가 전국 도처에 왁자지껄하였다. - 『독립신문』 1920년 5월 1일 이처럼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구한말 신문 기사에 등장하는 『토정비결』은 개인 신수가 아닌 조선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새로운 왕조의 등장을 예언하며, 18세기 이후 민간에 줄곧 유포되어 사회에 널리 영향력을 끼친 『정감록』과 비슷한 유의 국가 운수에 관한 풍수도참 비결인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이나 『이토정비결(李土亭祕訣)』을 가리키는 듯하다. 『토정가장결』의 이름 뜻은 이지함이 그 후손의 안녕을 위해 가문에서 간직하도록 하며 전해준 비결이란 의미다. 그러나 이것은 19세기 후반 다른 술수가가 자신의 저술을 이지함의 명성에 가탁(假託)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점은 『이토정비결』 또한 마찬가지다. 『토정가장결』 풍수도참서에서 신수풀이 점술서로의 변화 당시 조선에는 『삼한산림비기』 『도선비결』 『정북창비결』 『남사고비결』 『서산대사비결』 『두사총비결』 『옥룡자기』 『경주이씨가장결』 『서계이선생가장결』 등 다른 많은 비결이 공공연히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감록』과 함께 『토정비결』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은 토정의 명칭에 가탁한 비결이 당시 사회적으로 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말해준다. 1923년 간행된 『비난정감록진본(批難鄭鑑錄眞本)』에 함께 수록된 『토정가장결』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선생이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 40년째 되는 을사년 무자일에 장남이 아들을 얻으면 그 아이가 우리 가문의 성을 이어갈 사람이다. 내가 비록 죽은 뒤일지라도 어찌 자손을 위하여 앞일을 미리 헤아려보지 않을 것인가? 감히 천기를 누설하며 대략 연운을 논하여 너희를 가르치노니 삼가 새어나가게 하거나, 음흉하고 간사한 사람에게 망령되이 퍼뜨리지 말며 오로지 집안을 보존하는 방책으로 삼아야 한다. (…) 내 비록 재주 없으되 우러러보고 굽어 살피며 오랫동안 성수(星宿)로써 운수를 헤아려보니 한양이 50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병란은 신(申)·자(子)·진(辰)년에 있고 형살은 인(寅)·신(申)·사(巳)·해(亥)년에 있으니 이는 피난할 시기로다. (…) 큰 궁궐이 다시 흥하고 남문이 고쳐 세워지며 오랑캐 돈이 통용될 때는 바로 군자가 가야 할 때다. 만약 요동 간방으로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반드시 삼척부(三陟府)의 크고 작은 궁기(弓基)를 향하고 부지런히 힘을 기울여 곡식을 쌓을 일이다. 그러면 반드시 구조해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10년 후에는 또 풍기 소백산 아래 금계 위로 옮기고, 을미년에 이르러 다시 공주 용흥의 서쪽 옥봉 아래로 옮기면 이것이 바로 큰 도회지다. 이 글에서 1592년 임진왜란, 1636년 병자호란,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1865~1872년의 경복궁 중건, 1883년 신화폐 주조를 위한 전환국(典圜局) 설치, 1895년 을미사변 등 역사적 사실이 비유적으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토정가장결』은 1895년, 일러도 1883년 이후에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어 예언에 대한 사회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저술된 듯하다. 국모가 시해당하고 국왕마저 다른 나라의 공관으로 피신하는 상황에서 백성도 의지할 곳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당시의 처참한 사정과 훗날을 위한 대비 방책을 잘 표현하고 있다. 『토정비결』의 기원과 관련해 지금까지 고찰한 내용을 시기별로 정리해보면, 먼저 1883~1895년 사이 익명의 지식인(유학자이거나 술수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 저술했던 『토정가장결』 또는 『이토정비결』이 국운을 예언하는 풍수도참서로서 『토정비결』이란 별칭으로 1890~1900년대 항간에 유포되었는데,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더욱 성행하기 시작했다. 1906년 당시 조선의 정초 점복 풍속을 기록한 문헌인 『대한제국 멸망사』에 윷점과 오행점은 등장하나 『토정비결』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한 해 개인 신수를 보는 책으로서의 『토정비결』의 등장은 빨라도 1906년 이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윳과뎜책』(박문서관, 1918)에 ‘당년신슈길흉보는법’이란 제목으로 한글로 풀이된 『토정비결』이 활자본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 책에 실린 『토정비결』은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토정비결』의 하나인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한문 필사본의 『토정비결』과 내용이 거의 같다. 다만 일반 사람들이 읽기 쉽도록 내용을 한글로 옮긴 것만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장서각 소장 『토정비결』은 1918년 이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윷과 뎜책』, 국립중앙도서관 『토정비결』, 연대미상, 장서각 이런 정황을 종합해볼 때, 개인의 한 해 신수를 풀어보는 쓰임새의 『토정비결』은 조선의 국운이 완전히 기울어가던 1910년 무렵부터 보급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민간에는 이미 ‘토정비결’이라는 통칭으로 국운에 관한 풍수도참 비결인 『토정가장결』 『이토정비결』이 먼저 유포되고 있었다. 이즈음 어느 술수가가 ‘당년 신수 보는 법’에 관한 책을 지어 퍼뜨리면서 이지함과 기존 『토정비결』의 명성에 가탁한 것이 지금 전해져오는 『토정비결』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조선왕조의 멸망을 분기점으로 『토정비결』이라는 동일한 명칭 아래 국운 관련 풍수도참서와 개인 신수풀이 점술서가 약간의 시차를 둘 뿐 비슷한 시기에 있었는데, 조선왕조의 멸망이 현실화되면서 차츰 국운 관련 풍수도참서에서 개인 신수풀이 점술서로 『토정비결』의 의미가 바뀌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추정할 수 있다. 1910~1920년대에 발행된 『윳과뎜책』(1918), 『가정백과요람』(박문서관, 1918), 『백방길흉자해』(신명서림, 1923) 등에 ‘당년신슈길흉보는법[토정비결(土亭祕訣)]’이라 해서 ‘토정비결’이 ‘당년신슈길흉보는법’과 함께 표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에는 지금의 『토정비결』이 개인의 신수를 보는 책으로서 아직 확실히 인식되지 않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백방길흉자해』, 국립중앙도서관 애민(愛民)을 몸소 실천한 이지함의 명성에 기대다 1720년(숙종 46) 토정의 현손인 이정익(1655~1726)이 이지함의 유고를 묶어 간행한 『토정유고(土亭遺稿)』에도 『토정비결』은 실려 있지 않다. 또한 이지함의 행적을 채록한 유사(遺事)에서 “천문·지리·의약·복서·율려·산수·지음(知音)·관형찰색(觀形察色)·신방비결(神方祕訣) 등에 밝아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위로 배운 바가 없었고 아래로 전수한 바가 없었다”고 기록한 것을 봐도 『토정비결』은 이지함의 저술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토정비결』이 이지함의 저술이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참고로 이지함의 행적을 살펴볼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대체 어떤 점에서 『토정비결』과 이지함이 연관되었는지를 탐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지함은 목은 이색의 6대손이고, 형은 지번(?~1575)과 지무(?~?)이며, 지번의 아들 산해(1539~1609)는 영의정을, 지무의 아들 산보(1539~1594)는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지함은 57세 때인 1573년 유일(遺逸)1) 로 천거되어 만년에 포천현감과 아산현감을 지냈으며, 율곡 이이와 교유했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헌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지함은 천문에 밝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술법도 꿰뚫고 있어 조카인 이산해가 해(亥)년에 태어나 장차 집안을 일으켜 세울 것도 내다보았다. 재주가 특출해 제갈량에 견주어지기도 했으나 기이한 것을 좋아하고 끈기가 없어 일을 하는 데 유시무종할 때가 많아 이이는 크게 쓰일 인재는 아니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지함의 사상과 행적을 살펴볼 때 이이의 평가는 지나치게 절하된 면이 있다. 시(詩), 이지함, 종이에 먹, 25.4×26.5cm, 16세기, 서울대박물관 토정은 학문을 하는 데 있어 주경궁리(主敬窮理)와 실천이행(實踐履行)을 독실하게 할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수양에 있어서는 과욕(寡慾)을 강조해 과욕을 하다가 무욕(無慾)의 경지에 이른다면 심(心)이 허령(虛靈)해져 중화(中和)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이지함의 행적은 『선조수정실록』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는 기품이 신기했고 성격이 탁월해 어떤 격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지함이 졸할 즈음인 62세 때 아산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토정은 곤궁한 백성의 생업을 영위하게 해주려고 (보령) 바닷가에서 소금을 굽고 있었는데, 그을음이 얼굴에 잔뜩 묻어 다른 사람들은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에 소금을 담은 소쿠리 이지함은 보령 바닷가에서 소금 굽는 일을 하기도 했다. 여러 문집과 실록의 기사를 볼 때 이지함의 언행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또한 곤궁에 처한 백성을 위해 궂은일도 마다 않고 몸소 실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한 시기에 그의 이름을 빌려 민중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토정비결』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토정비결』 괘를 구성하는 체계 『토정비결』의 원저작자가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과연 그가 어떤 인물이었을까를 추정해볼 수 있는 또 다른 단서는 『토정비결』의 구성 체계를 직접 분석해보는 것이다. 그리하면 『토정비결』 원저작자의 학식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토정비결』의 구성 체계를 살펴볼 때 『토정비결』 원저작자는 역학과 관련해 상당한 지식수준과 응용력을 지닌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토정비결』은 생년월일을 144가지 괘로 만들어 신수를 보는데, 8괘의 8, 6효의 6, 변수인 3을 근거로 했다(8×6×3=144). 『토정비결』은 언뜻 보면 괘상점(卦相占)으로 여겨지지만 괘를 만드는 토대가 생년월일이므로 시상점(時相占)에 속한다. 『토정비결』은 반드시 음력으로만 보도록 되어 있다. 괘를 만드는 방법은 먼저 신수를 보려는 사람의 그해 나이 수와 신수를 보는 그해의 태세 수(太歲數)를 더해 이를 8로 나누어 남은 수가 상괘(上卦)다. 태어난 달에 해당되는 수(큰달이면 30, 작은달이면 29)와 태어난 달의 월건수(月建數)를 더해 이를 6으로 나누어 남은 수가 중괘(中卦)다. 태어난 날의 수와 태어난 날의 일진수(日辰數)를 더해 이를 3으로 나누어 남은 수가 하괘(下卦)다. 남은 수가 1이면 각각 1, 1, 1이 되어 111괘가 되고, 남은 수가 0이면 각각 8, 6, 3이 되어 863괘가 된다. 그러므로 첫 번째 괘는 111이 되고 마지막 괘는 863이 된다. 첫 괘가 111이니 모두 144개의 괘라면 마지막 괘는 254라야 할 텐데 863이 된 것은 『토정비결』의 괘가 일련번호로 나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누는 수로서 8은 주역의 8괘를 의미하고, 6은 8괘를 구성하는 6효를 의미하며, 3은 천지인 삼재(三才)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토정비결』은 그해 신수를 보려는 이의 생년·생월·생일을 가지고 각각 상·중·하괘를 계산하며, 이 세 괘를 합하여 자기의 『토정비결』 괘를 얻는 것이다. 누구나 이 144가지 괘 가운데 어느 한 괘에 해당된다. 수많은 사람의 운세를 144가지로 규정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불합리해 보일지 모르지만 조선 후기의 정초 점복 풍속이었던 윷점이 64괘, 오행점이 32괘였던 것에 비하면 한층 더 세분된 것이다. 『토정비결』의 괘사, 은유적 표현에서 좀 더 단정적으로 144가지가 되는 『토정비결』의 각 괘에는 1년 동안의 운수를 개괄적·은유적으로 예언한, 그래서 두루뭉술하고 애매하기도 한 4언 절구의 글귀가 있다. 예를 들면 111괘는 다음과 같은 괘사(卦辭)를 갖고 있다(장서각 소장본 번역). 동풍에 얼음이 녹으니 고목이 봄을 만나네(東風解凍 枯木逢春). 물이 성가에 흐르니 적은 것을 모아 큰 것을 이루도다(水流城邊 積小成大). 좋은 꽃에 봄이 저무니 꿈이 남쪽 하늘에 깨었구나(好花春暮 夢覺南天). 낙양성 동쪽에는 복사꽃이 빛나도다(洛陽城東 桃花生光).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한문 필사본)과 『윳과뎜책』에 수록된 한글 활자본의 『토정비결』 둘 모두에는 주역 괘가 전혀 표기되어 있지 않으며 각 괘사가 4언 4구로만 간략히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토정비결』은 그 내용이 매우 복잡하다. 먼저 주역의 본괘(本卦)·지괘(之卦)가 표기되어 있으며, 괘사도 4언 44구(남산당 『원본토정비결』) 내지 4언 41구(명문당 『원본토정비결』)가 더 추가되었다. 1964년 발행된 명문당 발행 『토정비결』이 주역 본괘·지괘에 관한 설명 외에 각 괘사가 총 4언 26구로만 구성되었던 것과 비교해봐도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생활에 발맞춰 『토정비결』의 괘사도 점차 추가되어왔으며 복잡해졌음을 알 수 있다. 괘사의 내용도 좀 더 단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토정비결』과 『주역』을 연계시킬 때가 많은데, 이것도 점서로서 『주역』의 권위에 의탁해 『토정비결』의 가치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중간에 끼워진 것일 뿐 실제 『주역』과의 관련성은 없다. 『윳과뎜책』에 실린 『토정비결』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토정비결』에서는 주역 괘와 전혀 연결시키지 않고 있는데, 이후 발행되는 『토정비결』들에서 주역 괘가 등장하는 것을 볼 때 『토정비결』과 『주역』의 연결고리 작업은 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주역』, 23.5×18.5cm 『주역』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 『토정비결』은 이와 관련하여 언급될 때도 많았다. 『윳과뎜책』의 1918년 『토정비결』의 괘 풀이는 은유적이고 개괄적이어서 길흉의 뜻이 분명하지 않으며 두루뭉술하고 애매한 반면, 『백방길흉자해』의 1923년 토정비결은 별도의 뜻풀이는 없으나 『주역』 본괘·지괘가 첨부되었으며, 괘 풀이도 “재물은 인해(寅亥, 정월·상달)에 왕성하고 일은 신유(申酉, 7·8월)에 되리로다. 사오월에 난 사람의 구설을 조심”에서와 같이 좀 더 구체적이며 단정적으로 바뀌었다. 점괘가 세분화되고 괘사가 더욱 다양해지면서 농경사회의 특성뿐 아니라 19세기 후반 이후 급속히 모습을 바꿔가던 당시 사회의 다양한 가치관이 반영되었다. 『가정보감전서』(명문당)의 1964년 『토정비결』과 『원본토정비결』(남산당)의 2003년 『토정비결』에서는 『주역』 괘에 대해 별도의 해석이 곁들여져 있으며, 전체적인 괘풀이 외에 월별로 풀이가 추가되었고, 1964년 『토정비결』의 4언 27구에 비해 2003년 『토정비결』은 4언48구로 괘사가 더욱 많아지고 복잡 다양해졌다. 이어령은 『토정비결』 괘사에 나타나는 주요 특징으로 구설수, 관재수, 친구(사람)로부터 받는 피해, 출타하지 말라(不出行) 등을 꼽았으며, 이는 그동안 한국사회가 겪어온 어두운 시대상과 인간관계상을 반영한다고 했다. 즉 인간관계와 사회에 대한 불신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의 폐쇄적인 생활을 반영한 점괘라고 본 것이다. 1982년판 『토정비결』에 수록된 7056개 구(句)의 내용을 컴퓨터로 분석한 김중순은 크게 9개의 특성으로 범주지었는데, 막연한 행운과 불운, 우연이나 요행을 바라는 심리, 대안보다는 금기나 경고가 우선, 소극성, 여자 멸시, 실천 윤리, 벼슬과 재물, 불신, 독립성 결여 등이다. 『토정비결』에 대한 두 가지 평가 『토정비결』의 기원과 유래에 대한 뚜렷한 정설이 아직 없다보니 이에 대한 평가도 분분한데, 대략 두 가지로 그 내용을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우리 민중의 숙명론적 인생관에 편승한 허무맹랑한 미신이자 점술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인 실천 강령이나 도덕률을 모은 교육서라는 것이다. 대체로 앞의 것은 『토정비결』을 위작으로 보는 쪽의 평가이며, 뒤의 것은 토정의 저술로 간주하는 쪽의 평가다. 이 둘의 평가 모두 『토정비결』의 모습이긴 하나 극단적으로 치우친 면이 없지 않다. 점복 행위는 인간만이 가진 욕구인 예지욕에 바탕을 두고 어느 시대, 어디서나 널리 존재해온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 현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정초 『토정비결』 보기 풍속을 두고 한국인의 전근대성이나 숙명성 운운하는 것도 일본의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조선의 점복과 예언』(1933)에서 한국의 점복신앙을 한민족의 미개성·타율성과 연결지어 왜곡했던 인식과 다르지 않다. 한편 『토정비결』을 한민족 고유의 인생 지침서 내지 교훈서로 여기는 것도 비결류(祕訣類)에 대한 묘한 기대심리와 우리 것에 대한 지나친 애착이 낳은 과대평가라 할 수 있다.
897    [쉼터] - 세계에서 제일 높은 다리 댓글:  조회:5486  추천:0  2016-12-30
中 200층규모 세계 최고 다리 개통                    ...'구름위 둥둥'... 정은지 기자2016.12.30 16:22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인쇄하기 글씨크기 작게글씨크기 크게   29일(현지시간) 정식 개통된 베이판장 대교. ©AFP=뉴스1 (서울=뉴스1) 정은지 기자 = 중국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리가 개통됐다고 인민망 등이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는 기존 최고인 중국 후베이성 소재 쓰두허 대교(496m) 보다 70m 높아진 기록이다. 중국 남부 윈난성 쉔웨이와 구이저우 수이청 사이 협곡을 잇는 베이판장(北盤江) 대교는 전날 오전 9시 정식으로 개통됐다. 이에 따라 항저우를 시작으로 저장, 안후이, 장시, 후베이, 후난, 꾸이저우, 윈난까지 이어지는 3404km 길이의 G56 고속도로도 동시에 개통됐다. 이 대교는 수면에서 565m 높이에 위치한 세계 최고 높이의 다리로 고층빌딩을 기준으로 할 경우 200층에 해당한다. 다리의 총 길이는 1341.4m,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는 720m로 설계됐다. 충 투자금액은 10억28000만위안(약 1704억원)에 달한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현재 건설중인 대교를 포함, 세계에서 가장 높은 대교 20개 가운데 5개가 중국에 소재했다. 2번째로 높은 다리는 2021년 완공 예정인 리장 타쿠진사강 대로로 512m 높이에 건설된다. 29일(현지시간) 정식 개통한 중국 베이판장 대교. ©AFP=뉴스1
896    [이런저런] - 돼지 화가 = 피그 +피카소 = 피그카소 댓글:  조회:3791  추천:0  2016-12-28
@ 1 @ = 그림 그리는 돼지 영상이 화제다.  이솝우화에 나올법한 영상 속 주인공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도 케이프타운에 존재하는 진짜 돼지다.   지난 12월 24일 Caters Clips 유튜브 채널에 지구에 존재하는 유일한 돼지 화가 피그카소(Pigcasso: Pig와 Picasso의 합성어) 영상이 게재됐다. 입에 붓을 물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흰 도화지에 거침없이 그림을 그리는 녀석의 모습을 본 누리꾼들은 환호했다. 피그카소의 주인 조안 렙슨은 “남아프리카 돼지 농장에서 자라던 피그카소는 고깃덩어리가 될 뻔했다. 도살장에서 구해진 녀석은 이제 예술가가 되어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다”며 디즈니의 해피엔딩과 같은 녀석의 삶을 소개했다.  [출처: 서울신문]
895    [이런저런] - 돼지 화가 = 피그 +피카소 = "핀토" 댓글:  조회:4979  추천:0  2016-12-28
@ 2 @ =  그림 그리는 피카소 돼지?   미국 시카코 한 동물원에서 사육되고 있는 "핀토"라는 돼지 "화가"... 
894    우리 고향 연변에서도 "문학예술의 전당"이 있었으면?!... 댓글:  조회:9348  추천:0  2016-12-28
지금은 눈부신 미술 작품들로 가득 찬 오르세 미술관은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맞춰 건설된 기차역이었다. 그전에는 최고재판소가 있던 곳이다. 1871년 파리 코뮌 당시 화재로 불타버린 오르세 궁의 잔해가 남아 있기도 한 이곳을 기차역으로 만들겠다는 발표가 있자 파리 시민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아름답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센 강, 루브르 궁을 마주한 곳에 산업화의 상징인 ‘괴물 같은 기차역’을 세운다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축가 빅토르 랄루(Victor Laloux)는 철골구조로 지어진 기차역의 외관을 대리석으로 마감하고, 뛰어난 조각가들의 작품들로 장식하여 시민들의 우려를 한 번에 떨쳐내는 데 성공했다. 370여 개의 객실을 갖춘 호텔과 이어진 오르세 역은 이후 파리 중심에서 프랑스 남서부를 잇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기차역 노릇을 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기술이 발달하면서 옛 방식의 기차를 위해서나 존재하던 이곳은 무용지물이 되어 1939년에 폐쇄되었다. 과거 오르세 기차역 내부 풍경 오르세 역은 한동안 버려지다시피 했다가 1970년에 객실 수가 850개나 되는 고층 호텔로 재개발될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시민들이 직접 거리에 나서서 이를 막았고, 결국 호텔 대신 미술관으로 바뀌어 1979년에 문을 열게 된다. 건축가들은 가능하면 건물의 외관뿐 아니라 구조도 옛 역사(驛舍)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고려했고, 이는 최근까지도 유효한 증개축 지침이 되고 있다. 현재 오르세 미술관 내부 풍경 오르세 미술관은 인상주의를 중심으로 그 전후에 활동한 미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따라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프랑스 미술이 가장 뜨거웠던 시기의 미술 작품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의 초기 소장품들은 주로 뤽상부르 미술관과 죄 드 폼 국립 미술관으로부터 이전된 것들이다. 1750년에 문을 연 뤽상부르 미술관은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가 주관하는 살롱전의 입선작들을 보관하고 전시할 용도로 지어졌다. 당연히 해를 거듭할수록 작품 수는 늘어났다. 1894년 그 자신이 인상주의 화가이기도 했던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동시대 회화 작품들을 국가에 기증하면서 뤽상부르 미술관은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가 이단아로 취급하던 진보적인 화가들의 작품도 소장하게 되었다. 물론 보수적 잣대를 들이대는 아카데미는 카유보트가 내놓은 67점의 인상주의 작품 중 일부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미술관 밖 작은 전시장에 따로 두게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이르자 시대와 함께 취향이 변하면서 진보 작가들의 작품도 대거 수용하기 시작했다. 1939년 뤽상부르 미술관은 문을 닫았고, 소장품들은 루브르 박물관과 현대미술 전시관인 팔레 드 도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1947년 루브르 박물관이 재건축을 시작하면서 인상주의 작품들만 따로 보관할 목적으로 죄 드 폼 국립미술관이 탄생한다. 죄 드 폼 국립미술관은 대중의 열렬한 사랑을 받으며 그 위세를 키워나가는데, 상속세 대신 미술 작품을 기증하게 하는 법안까지 마련되면서 소장품이 어마어마한 규모로 늘어나기 시작한다. 결국 그 많은 작품을 다 수용할 수 없었던 죄 드 폼 국립미술관은 1870년 이후 태어난 미술가들의 작품만 따로 모아 1976년에 개관한 퐁피두 현대미술관으로 옮기게 된다. 한편 루브르 박물관으로부터는 1820년에서 1870년 사이에 탄생한 미술가들의 작품을 돌려받게 되자 포화상태가 된 소장품을 수용할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윽고 오르세 미술관 개관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오르세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의 소장품은 19세기 회화 작품의 비중이 높지만 엄청난 규모와 수준의 조각 작품과 사진, 그리고 장식 미술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 19세기 프랑스인들의 미적 취향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관람객은 총 세 층에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의 1층에 해당하는 0층에는 관학적이고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이상에 걸맞은 작품들과 변화라는 폭풍의 눈을 감추고 있던 진보적인 화가들의 초기 작품들을 전시해두었다. 0층을 다 돌아본 관람객은 자연스레 건물 오른쪽 끝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게 된다. 5층은 이 미술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걸작을 대거 전시해두었다. 5층 관람은 건물 오른쪽에서 시작해 왼쪽 끝으로 이어지고, 관람이 끝나면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통해 다시 0층이나 2층으로 내려올 수 있다. 2층은 유명한 고흐와 고갱의 작품을 비롯해 고갱을 추종한 퐁타방파와 나비파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자잘한 색점을 이어 그린 신인상주의자 쇠라와 그 추종자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오르세 미술관의 회화 갤러리 오르세 미술관 회화 갤러리 안내도 갤러리 안내도(0층 평면도) 0층(Rez-de-chaussée) 갤러리 안내도(2층 평면도) 2층(2e étage) 갤러리 안내도(5층 평면도) 5층(5e étage)  
893    [이런저런] - 고물차 몸값 = 6억 댓글:  조회:4050  추천:0  2016-12-27
녹슬어 보이는 이 고물차의 몸값 (ZOGLO) 2016년12월27일 10시04분  이 녹슬어 보이는 고물차의 몸값은 무려 6억이다.   지난 12월 21일(현지 시간)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40년 동안이나 방치돼 ‘고철 덩어리’처럼 변한 자동차의 반전 가격을 공개했다.   미국 매사추세츠의 한 산기슭에서 발견된 이 자동차는 낙엽에 뒤덮인 채로 버려진 고철 덩어리와 다를 바 없게 보인다. 곳곳이 녹슬었고 색도 바래 당장이라도 폐차장으로 향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예상한 감정가는 ‘6억’을 호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안기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자동차는 1960년대 영국에서 생산된 애스턴 마틴(Aston Martin)의 한 스포츠카 모델인 것으로 밝혀졌다.   출고 당시에 페라리, 마세라티와 같은 스포츠카와 견줄 정도로 고가였고, 그만큼 높은 인기가 있던 자동차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 자동차의 주인은 1970년대 이후 단 한 번도 주행하지 않은 채 숲속에 방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연히 주변을 지나던 등산객의 발견으로 인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자동차는 아직까지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경매에 부쳐질 것으로 알려졌다. /외신
892    력사, 주의(主義), 그리고 공(空)... 댓글:  조회:3966  추천:0  2016-12-27
      [인민망]= 소산(韶山) 모택동(毛澤東) 광장에서ㅡ,   2016년 12월 26일, 모택동 탄생 123주년 기념일... ============================ "한때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제작하던 그의 동상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인 판매용 조각물로 전락했다"는 게 신문의 진단이다. 대학 캠퍼스에 마오의 동상이 세워진 것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1967년 칭화(淸華)대가 처음이다. 칭화대를 시작으로 동상 건립 붐이 전국으로 몰아쳤다. 이 당시 마오 동상의 규격이 정립돼 마오의 키는 당 창건일에 맞춰 7.1m, 하단부를 포함한 동상의 전체 높이는 그의 생일에 맞춰 12.26m로 정해졌다. 동상은 두가지 포즈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다. 인민을 향해 오른 손을 들어 들고 있거나 뒷짐을 진 포즈다. 동상 건립 붐은 1969년 6월 중앙 정부가 마오의 이미지를 고양하기 위한 '형식적이고 격식을 차리는' 방식을 중단할 것을 지시하면서 사그라들었다. 마오의 동상 건립이 붐을 이룬 1967년에서 1969년까지 2년간 전국에서 2천 개 이상의 실외 동상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에 당중앙은 개인 숭배를 해서는 안 된다는 통지를 하달했고 그 이후 마오의 동상은 해체수순을 밟았다. 칭화대의 마오 동상은 1987년 해체됐다. 신문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문혁당시 만들어진 180개 실외 동상이 아직 남아있고 이중 일부는 문화유적으로 분류돼있다고 밝혔다. 마오의 탄신 100주년인 1993년에 일부에서 마오 동상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지만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제작한 이전과는 달리 지금은 돈을 벌 목적으로 만들어져 거래되고 있다. 2008년에 충칭(重慶)의과대학에서 만든 스테인리스스틸 동상은 높이가 37.4m에 무게는 46t으로 중국에서 가장 큰 동상이다. 신문은 정치적 상징에서 하나의 제품으로 변모하는 마오의 동상이 중국사회의 거대한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문은 또 마오의 동상이 한차례 철거 바람을 거치면서 지금은 대학에 남아있는 동상이 몇 개 안되지만 마오의 유산은 여전히 중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 베이징체육대학 남문에 서있는 마오쩌둥 동상. /출처:글로벌타임스 [이러쿵저러쿵]= ... 전문가들은 동상이 단순한 조형물이 아닌 한 사회의 방향과 역사적 판단을 내포하고 있는 만큼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동상을 둘러싼 논란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해외에서도 동상과 관련한 사회적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한 국가일수록 동상을 둘러싼 논란이 컸다.  ...동상 건립에 대해 연구한 정호기 사회학과 교수는 "이전에는 신적인 존재들을 인물상으로 만들었는데 근대에 들어 국가나 집단이 영웅화한 인물에 대한 동상 건립이 크게 늘었다"며 "특히 권위주의 성격이 강한 정부에서는 획일화된 가치를 강요하고 특정 인물에 대한 숭배의식을 부추기기 위해 지배 집단이나 국가가 일사불란하게 동상건립을 추진할 때가 있다"고 밝혔다.  지도자 '우상화'에 익숙한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1월 중국 허난성 퉁쉬현에서는 높이 36미터짜리 초대형 마오쩌둥 동상 완공을 앞두고 철거했다. 허난성이 마오쩌둥이 주도했던 '대약진운동'의 최대 피해지역인데다 우상화에 대한 중국 내외의 비판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이 동상은 마오를 열렬하게 지지했던 리싱 그룹의 쑨칭신 회장이 사재를 털어 제작한 것이다.  헝가리에서도 보수파로 알려진 오르반 빅토르 총리가 들어서면서 동상 관련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발린트 오만이라는 세계 2차대전 전범 동상을 헝가리 중부 도시인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세우겠다고 발표하자 헝가리 국민들은 물론 세계 지도자들까지 들고 일어섰다. 오바마는 지난 1월 "헝가리와 미국의 관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례적으로 강하게 비판했다.  이외에도 빅토르 총리가 헝가리 수도인 부다페스트 주요 광장에 기존 동상을 이전하면서까지 우익 인물들의 동상을 세워 헝가리 국민들이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러시아에서도 지난 10월 모스크바 남단에 위치한 도시 '오룔'에 러시아의 첫 공식 황제인 이반 4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반 4세는 수많은 정적을 죽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아들까지 죽인 폭군으로 알려져 비판 여론이 나오고 있다. 이반 4세 조각상 건립을 최근 러시아 내 민족주의의 대두와 푸틴 대통령의 권력 강화 등과 연계해 조명하기도 했다.  사회적 합의나 동의를 거쳐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동상을 건립하려는 움직임도 존재한다. 일부 국가나 지역단체에선 동상 건립과 관련해 논란의 소지가 있을 경우 스스로 철거하고 주민들의 동의하에 새 인물을 내세우기도 한다. 올해 미국 플로리다주 의회는 남북전쟁에서 활약했던 에드먼드 스미스 장군 동상 교체작업에 들어갔다.  인류의 평등이라는 가치에 비춰볼 때 노예해방과 직결되는 남북전쟁에서 공을 세운 스미스 장군의 상징이 제한적이라는 판단에서다. 플로리다 주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새 동상으로 세울 인물을 건의받고 있다. 해당 인물은 사망한 지 10년이 지나야 하며 플로리다 주민이어야 한다.  아직 살아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이미 동상이 된 인물도 있다. 스웨덴 출신 축구선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고국 수도에 2.7미터 동상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됐다. 이브라히모비치가 골든볼을 10년 연속 수상한 것을 기념해 스웨덴 축구협회가 스톡홀름 프렌즈아레나 외곽에 동상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한 인물을 동상으로 만드는 작업에 많은 사람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동상이 단순한 '조형물'의 의미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한번 건립된 동상은 좀처럼 해체되기 어렵기 때문에 집단 간의 갈등을 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의 동상제작은 여전히 '우상화'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어서 갈등의 '시한폭탄'을 품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 교수는 "동상에는 우상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뿐만 아니라 소녀상,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동상 등 평화를 상징하는 작품들도 있는 등 목적이 다양하고 동상 건립 자체를 통제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기념물 사업과 같이 '공공기념물' 건립에 심의를 강화하는 등 기준을 엄격하게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정부가 동상을 일방적으로 건립하는 것을 차단하고 사회적 합의를 거쳐 국가 기념물을 만들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말했다. =상강(湘江)에서 =심양(沈陽)에서 ==================   [자료]=마오쩌둥(毛澤東) 전 중국 국가주석의 탄생 120주년(2013년 12월 26일)을 앞두고 금으로 만든 좌상(坐像) 등장. 높이 82cm, 폭 80cm 크기의 이 조형물은 마오 전 주석이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무게는 약 50kg. 동상을 받치고 있는 백옥으로 만든 기단은 가로 138cm, 세로 128cm에 무게 6.83t에 이른다.     중국 광둥 성 선전 시에서 공개된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의 초호화 좌상. 사진 출처 중국왕     예술가 20여 명이 8개월 동안 만들었으며 총 제작비는 1억 위안(약 173억 원). 중국 전통 궁중금세공 기법과 꽃실(花絲)상감 방식이 동원. 이 조형물은 후난(湖南) 성 샤오산(韶山)의 마오쩌둥기념관에 전시. ====================[미술작품 자료]==== =길림시 박물관 앞에서    
피아노 의자에 등받이가 없는 이유는 피아노 의자에 등받이가 있으면 우선 연주하기가 불편하고, 집중력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아노의 구조를 보면 피아노는 건번 악기로, 가로로 길고 피아노 연주자들은 왼쪽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연주 하므로, 왼쪽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 때 허리를 돌리거나 몸을 움직이는 일이 많답니다. 그런데 의자에 등받이가 있다면 손을 옮길 때 등받이에 팔꿈치가 부딪힐수 있기 때문에 피아노 의자는 등받이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피아노 연주자들은 손가락으로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연주를 한답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연주를 하다 보면 몸을 조금씩 움직이게 되는데, 이것을 가르켜 흔히 음을 탄다고 합니다.  고정된 자세에서 연주를 하면 아무래도 좋은 연주를 할 수 없기 대문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피아노 의자는 등받이가 없는 것입니다.     총 획득메달 전문 분   추천추 답변 안녕하세요^^ 1.피아노 의자에 등받이가 있으면 우선 연주하기가 불편하고 집중력을 떨어뜨릴수 있다고 합니다. 2.피아노의 구조를 보면 피아노는 건반 악기로 가로로 깁니다. 3.피아노 연주자들은 왼쪽.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연주 하므로. 왼쪽.오른쪽 방향을 틀때 허리를 돌리거나 몸을 움직이는 일이 많습니다. 4.그런데 의자에 등받이가 있다면 굉장히 불편해질수 있습니다. 5.손을 옮길때 등받이에 팔꿈치가 부딪칠수도 있으므로 피아노 의자는 등받이가 없습니다. 6.피아노 연주자들은 손가락으로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연주를 합니다. 7.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연주를 하다보면 몸을 조금씩 움직이게 되는데 흔히 음을 탄다고 합니다. 8.고정된 자세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면 좋은 연주를 할수 없는 경우가 많아 피아노 의자는 등받이가 없다고 합니다. - 잘 해결되시길 바라고. 좋은 하루 되세요^^ 총 획득메 달   추천추천  답변 피아노는 손으로 연주하면서 몸이 보조하면서  마음을 다해 영혼의 소리를 낼수 있습니다. 그러니 편안한 등받이는 마음이 편안한 쪽으로 안주해 버립니다. 총     추천추천 답변 피아노 의자는 왜 등받이가 없나요? - 피아노 의자에 등받이가 있으면 우선 연주하기가 불편하고, 집중력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피아노의 구조를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피아노는 건번 악기로, 가로로 길어요. 피아노 연주자들은 왼쪽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연주 하므로, 왼쪽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 때 허리를 돌리거나 몸을 움직이는 일이 많지요. 그런데 의자에 등받이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굉장히 불편 하겠지요? 손을 옮길 때 등받이에 팔꿈치가 부딪힐수 있고요. 이런 이유 때문에 피아노 의자는 등받이가 없답니다. 또한 피아노 연주자들은 손가락으로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연주를 한답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연주를 하다 보면 몸을 조금씩 움직이게 되는데, 이것을 가르켜 흔히 음을 탄다고 해요. 고정된 자세에서 연주를 하면 아무래도 좋은 연주를 할 수 없어요. 그래서 피아노 의자는 등받이가 없는 거랍니다.   추천추천 답변 피아노 의자가 등받이가 없는 이유는 피아노의 구조와 피아노가 악기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고 해요 피아노는 건반악기로서 가로로 긴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피아노 의자에 등받이가 있다면 연주자가 현재 치고 있는 것과 거리가 있는 위치의 건반을 칠때 불편함과 함께 연주의 그루브감을 해쳐서 집중력이 떨어진다고 해요 방향을 틀때 허리를 돌리거나 손을 옮길때 부딪칠수도 있다고 해요 잘 해결되시길 바래요...
890    [쉼터] - 팔꿈치로 인생의 곡을 써가는 녀성 댓글:  조회:6523  추천:1  2016-12-27
      ▲ 지난 17일 대전 평송청소년문화센터 대공연장에서 열린 장애인의 날 기념 사랑의 음악회에 출연한 ‘팔꿈치 피아니스트’ 최혜연. 최 일 기자   대전 평송청소년문화센터 대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특별한 피아노 연주가 마무리되자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팔꿈치 피아니스트’ 최혜연(19) 양이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 곡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 라장조’로 감동의 무대를 선사한 것이다. 대전시립교향악단과 협연 후 상기된 표정으로 피아노에서 일어선 그녀는 무대 중앙으로 나와 고개를 숙이며 객석을 향해 인사하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제35회 장애인의 날을 기념해 ‘희망으로 노래하다’를 주제로 지난 2015년 4월 17일 ㈔모두사랑과 대전시향이 공동주관한 사랑의 음악회가 열렸고, 최 양은 이날 공연을 통해 어떠한 장애에도 인간은 강인한 자활·자립의지로 이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대전예고를 졸업하고 올해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한 최 양은 3살 때 불의의 사로로 오른쪽 팔꿈치 아래 부분을 잃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란 듯이 장애를 극복하고 음악으로 감동을 선물하는 아름다운 연주자가 됐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피아노를 좋아했던 그녀는 5년 전 정은현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외래교수(툴뮤직 대표)를 만난 것을 계기로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됐다.       지난 17일 대전 평송청소년문화센터 대공연장에서 열린 장애인의 날 기념 사랑의 음악회에서 혼신의 연주를 선보이는 ‘팔꿈치 피아니스트’ 최혜연. 최 일 기자 대학원에서 장애인 음악교육을 주제로 박사과정을 밟던 정 교수는 최 양이 왼손과 팔꿈치만으로도 연주가 가능함을 알게 된 후 기꺼이 그의 스승이 됐다. SBS ‘스타킹’,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 TJB ‘특집다큐 달팽이 쇼팽을 꿈꾸다’ 등에 출연하며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그녀는 2011년 제4회 장애인 음악콩쿠르에서 교육부장관상, 2013년 전국장애청소년음악콩쿠르 ‘기적의 오디션’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지난해 영국왕립음악원을 방문해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왼손 피아니스트 니콜라스 매카시를 만나 합동연주를 한 최 양은 올 3월 첫 앨범을 발표했다. 그녀를 위해 정갈하게 편곡된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타이틀로, 풍부한 화성과 서정적 멜로디의 스크리아빈의 작품 ‘왼손을 위한 프렐류드와 녹턴’을 수록했다. 이 곡은 작곡가가 골수염으로 오른팔에 장애를 겪고 있을 때 만들어 의미가 더 깊다. 고전 레퍼토리 중에는 왼손 피아노 작품이 적지 않아 그녀는 지속적으로 이런 작품들을 연주하며 보다 진솔한 음악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최 일 기자 ========================= 손가락 대신 팔꿈치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있습니다. 어린시절 사고를 당해서 오른팔의 절반을 잃었다고 합니다. 서울 신촌 거리에서 들려준 연주에 많은 시민들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주정완 기자가 그 모습 전해드리겠습니다. [기자] 하루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오가는 서울 신촌 거리, 광장 한쪽에 마련된 무대 위로 특별한 연주자가 등장합니다. 사고로 오른팔의 절반을 잃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왼손과 오른 팔꿈치로 연주하는 19살 피아니스트 최혜연 양입니다. 거리 무대는 처음이지만 팔꿈치로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모습엔 자신감이 가득합니다. 장애와 편견을 이기고 감동의 연주를 선보인 혜연 양에게 관객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최혜연/피아니스트 : 팔꿈치에 뾰족한 뼈가 나 있는데 그 부분으로 건반 하나씩 연주해요. 열심히 공부해서 작곡도 배워서 제 이야기를 곡으로 만들고 싶어요.] 현재 예술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며 꿈을 키워가는 혜연 양. 남들과는 다른 조건이지만 자신의 음악이 힘들고 지친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선물이 되길 기원합니다. ================== 8년 전 한 방송에서 어린 소녀가 팔꿈치를 이용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왼손의 다섯 손가락과 오른팔의 팔꿈치만으로 피아노를 치던 그 소녀가, 자신의 꿈이 ‘피아니스트’라고 당당히 말하는 모습이 꽤나 놀라웠다. 그동안 피아노는 손가락으로만 칠 수 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소녀가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은 한동안 잊혀 지지 않았다. 그 후 8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7일 다시 만난 소녀는 ‘팔꿈치 피아니스트’라 불리며 많은 이들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고 있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최혜연(19) 양이다. 어렸을 때 사고로 한 쪽 손을 잃었지만 운명처럼 피아노를 만났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혜연이의 특별한 손 경북 영덕이 고향인 혜연이는 태어날 때만해도 작고, 예쁜 두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세살이 되던 해 큰 사고가 일어났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정육점에서 고기 자르는 기계에 팔꿈치 아랫부분을 잃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렇게 혜연이에게 조금 특별한 손이 생겼고, 그 손으로 피아노를 친지도 벌써 15년이 다 돼 간다. 15년 전, 그러니까 혜연이가 5살 때 이모가 운영하는 피아노학원에서 처음 피아노를 만나게 됐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언니가 먼저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있었어요. 제가 그때 언니를 많이 따라서 언니와 같이 학원에 다니게 됐죠. 하다 보니 피아노 두드리는 소리가 재밌었던 것 같아요. 또 피아노를 칠 때면 금세 행복해졌던 것 같아요.” 그렇게 혜연이는 운명처럼 피아노를 만났고, 다섯 개의 손가락과 한 개의 팔꿈치를 가지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 6시간의 고된 연습과 노력 끝에 대전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됐고, 그곳에서 또 한 번의 운명을 만난다. 바로 정은현 교수. 그는 혜연이가 보다 많은 곡들을 칠 수 있도록 편곡 작업을 했다. 또 풍부한 감정 표현, 건반의 강약 조절 등 전문적인 교육을 진행했다. 혜연이는 성장했고, 2011년 ‘제4회 장애인 음악콩쿠르’ 교육부 장관 대상 수상, 2013년 전국 장애 청소년 음악콩쿠르 ‘기적의 오디션’ 전체 대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9월 말에는 방송국의 후원으로 영국왕립음악원을 방문해 영국의 왼손 피아니스트 ‘니콜라스 매카시’를 만나 연주를 진행했고, 올해 초에는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에 특별장학생으로 합격했다. #‘팔꿈치’로 희망을 전달하다 혜연이는 요즘 굉장히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학업은 물론이고, 꾸준한 연주활동으로 지난 3월 첫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앨범에는 그동안 혜연이가 무대에서 들려주었던 3개의 곡이 담겨 있다. 따뜻하고 정갈하게 편곡된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를 타이틀로, 풍부한 화성과 서정적인 멜로디가 아름다운 스크리아빈의 작품 ‘왼손을 위한 프렐류드와 녹턴(A.Scriabin Prelude and Nocturne Op.9 For The Left Hand)’을 함께 싣고 있다. 노래를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 앨범명은 ‘선물’이라 지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싶어 앨범 이름을 ‘선물’이라고 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음악을 듣고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셨으면 좋겠어요.“ 다음 앨범에는 작곡도 직접 할 생각이다. ”학교에서 작곡, 편곡, 실용음악 수업을 받고 있어요. 다음 앨범에는 자작곡을 실을 생각입니다.“ 독주회도 준비 중이다. ”2013년 11월24일 첫 독주회를 가졌는데 그때의 그 기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 떨렸고, 너무 설렜죠. 그리고 지난해 두 번째 독주회를 가졌습니다. 올해도 준비하고 있어요. 보다 성장된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어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준비하고 있죠.“ 또 틈틈이 방송 출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지난해와 올해 만도 MBC 휴먼다큐 사랑이 좋다, KBS 사랑의 가족·아침마당, SBS 스타킹·희망캠페인 등 다수의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혜연이에게 롤모델이 누구인지 물었다. “현정 피아니스트”라고 대답했다. “임현정 피아니스트는 무대에 오를 때 검은색 복장, 자연스러운 머리를 해요. 보통 화려한 의상을 입는 다른 연주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죠. 그런 모습들이 많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혜연이가 지금 꿈꾸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저에게는 그동안 많은 기회가 주어졌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친구들은 기회를 얻지 못해 자신의 꿈을 포기 하고 있어요. 대학 입시전형만 보더라도 특별전형 임에도 불구하고 지정곡을 해야 하는 상황이죠. 저만해도 연주하지 못하는 곡들이 많은데 말이예요. 참 아쉬운 부분이죠. 제가 더 열심히 노력해서 그 친구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지원하고 싶습니다.” /송시연기자 ========================   팔꿈치 피아니스트. 최혜연 왼손과 팔꿈치만으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최혜연은 세살 때 사고로 오른쪽 팔꿈치 아래 부분을 잃었지만 장애를 극복하고 음악으로 감동을 선물하는 연주자로 성장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피아노를 좋아해왔던 그녀는 어느 날 피아노를 전공하는 언니를 따라 우연히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고 5년 전 지금의 지도교사인 정은현(툴뮤직 대표,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외래교수)을 만나게 되었다. 대학원에서 장애우 음악교육을 주제로 음악학 박사과정 중인 그의 지도 아래, 그녀는 왼손과 팔꿈치만으로도 연주 가능한 다양한 작품들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고, 대전예고를 거쳐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SBS 스타킹, KBS 사랑의 가족, SBS 희망캠페인, MBC 휴먼다큐 사랑이 좋다, TJB 특집다큐 달팽이 쇼팽을 꿈꾸다 등에 출연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그녀는 삶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슈가 아닌 연주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2011년에 제4회 장애인 음악콩쿠르에서 교육부 장관 대상을 수상하였고, 2013년에는 전국장애청소년음악콩쿠르인 에서 전체 대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대전예술의전당과 KT체임버홀에서 2회의 개인 독주회를 가졌으며 예술의전당 IBK 홀에서 서울체임버앙상블과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협연하였다. 특별히 2014년에는 방송국의 후원으로 영국왕립음악원을 방문하여 그녀와 똑같은 장애를 가진 영국의 왼손 피아니스트 를 만나 연주와 촬영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올해 3월 10일에는 피아니스트 최혜연의 첫 번째 연주 앨범이 발매되었으며, 앨범은 그녀를 위해 정갈하게 편곡된 Amazing Grace(놀라운 은혜)를 타이틀로, 풍부한 화성과 서정적인 멜로디가 아름다운 스크리아빈의 작품 ‘왼손을 위한 프렐류드와 녹턴(A.Scriabin Prelude and Nocturne Op.9 For The Left Hand)’을 함께 싣고 있다. 특별히 이 곡은 작곡가 자신이 골수염으로 오른팔에 장애를 겪고 있을 때 왼손을 위해 작곡한 곡이기에 의미가 더 깊다. 고전 레퍼토리 중에는 풍부한 음악적 표현이 가능한 왼손 피아노 작품이 많이 있는 만큼 그녀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이러한 작품들을 녹음하며, 보다 진솔한 음악으로 청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난 팔이 언제 나와?" 묻던 아이, '팔꿈치 피아니스트' 되다   팔꿈치 피아니스트, 최혜연 오른쪽 손이 없어 팔꿈치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최혜연양이 지난 9일 서울 삼성동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에서 'Amazing Grace'를 연주하고 있다. /...     키 150㎝, 자그마한 소녀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왼쪽으로 몸을 약간 틀어 앉은 소녀는 지그시 눈을 감더니 건반을 두드린다. 연주하던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가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소녀의오른 어깨가 크게 들썩인다. 건반을 수놓은 건 소녀의 왼손과, 오른 팔꿈치. 오른 손이 없는 소녀에게 오른 팔꿈치는 여섯번째 손가락이었다. 9일 오전 서울 삼성동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15층 갤럭시홀. 최혜연(19)양이 정은현(35) 선생님과 연습 중이었다. 올해 이 학교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 혜연양은 입학식에서 기념 연주회를 하기로 돼 있다. 경북 영덕이 고향인 그는 ‘팔꿈치 피아니스트’다. 세 살 때, 부모님이 하던 정육점에서 놀다 고기를 자르는 기계에 오른쪽 팔 아랫부분을 잃었다. 눈 깜짝할 새였다. “저는 잘 기억도 안 나는데, 엄마 말이 7살 때까지 ‘엄마, 나는 팔이 언제 나와?’라며 물었대요. 그때쯤 스스로 안 것 같아요. 제가 특별하다는 걸….” 그가 피아노와 가까워진 건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던 이모 덕분이었다. 한 살 터울인 언니가 피아노를 배우는 게 마냥 부러웠다. 하지만 꿈일 뿐이었다. 다섯 손가락만으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던 2011년, 그의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갓 예고에 진학한 언니의 피아노 레슨 선생님 정은현(35)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다. ====================   ['팔꿈치 피아니스트' 최혜연씨]  세 살 때, 오른손 잃고도 꿈 이뤄… 28일 단독 콘서트, 첫 앨범도 출시 "내 팔꿈치는 여섯째 손가락이죠"   피아니스트 최혜연(20)씨는 오른손이 없다. 세 살 때 부모님이 운영하는 정육점에서 고기 자르는 기계에 팔꿈치 아랫부분을 잃었다. 뭉툭한 팔꿈치 바깥으로 작은 뼈 하나가 뾰족하게 나 있다. 그는 이 뼈를 "오른 손가락을 대신해 건반을 누르는 고마운 '여섯째' 손가락"이라 표현했다. 최씨는 28일 서울 강남구 올림푸스홀에서 열리는 단독 콘서트를 앞두고 하루 5시간씩 연습에 한창이었다. 어릴 적 이모가 운영하는 피아노 학원에서 처음 피아노를 접한 뒤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웠고, 지난해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에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다음 달 첫 미니 앨범이 나온다. 녹음한 7곡 중 3곡이 자작곡이다. 자작곡 'My Star'가 재킷 타이틀이 됐다. "'별처럼 빛나는 네가 내게 힘이 돼. 빛나는 너를 응원해. 네가 힘들고 지치면 내가 힘이 될게'란 생각이 들어 작곡했어요." 이번 콘서트에서 처음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오른쪽 손이 없어 팔꿈치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최혜연(오른쪽)씨와 스승 정은현씨. 최씨를 5년간 가르치는 정씨는 제자의 콘서트와 앨범 제작을 돕고 있다. /장련성 객원기자 최씨는 "자작곡은 사실 나를 응원하기 위해 만든 곡"이라고 했다. 연주 모습이 담긴 동영상은 페이스북에서 조회 수 600만건을 기록했다. 그간 음악 방송이나 지면보단 이런저런 다큐멘터리나 예능 프로에 나왔다. "꿈이 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최씨는 늘 "희망을 주는 피아니스트"라고 했다. 올해 초 출연한 방송에서 "사람들 시선에 힘이 들 땐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사전 질문을 받았다. "영화를 보거나 집에서 친구들이랑 논다"는 답에 제작진이 난감해했다고 한다. "친구가 피아노니까 피아노로 극복하지 않느냐?"로 대본이 수정됐다. "제가 이루고자 하는 꿈이 보여주기 식이 된 것 같았어요. 팔려고 내놓는 상품 같기도 하고 '이게 진짜 내 이야기가 맞나' 싶기도 해 힘들었어요." 최씨는 "내 노래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제가 연습실에서 함께 연주하는 모습. 최씨는 왼손과 오른쪽 팔꿈치로 건반을 쳤다. /장련성 객원기자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팔꿈치 피아니스트' '희망의 피아니스트'라 부른다. "희망 안 전해도 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피아노를 통해 감동을 전하면 되는 거지." 스승 정은현(36)씨가 말했다. 정씨는 혜연씨가 중학교 2학년이던 2011년 처음 만나 줄곧 선생 노릇을 하고 있다. 이번엔 제작자로 변신해 콘서트와 앨범을 기획했다. 처음엔 가르칠 자신이 없어 레슨을 거절했다. 교회에서 만난 한 할머니가 그 생각을 돌렸다. 당시 정씨는 환경을 탓하며 피아노를 그만두려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성가대 반주를 마친 뒤, 한 할머니가 그의 손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우리 반주자님 너무 귀해. 음악이 너무 좋아."     정씨는 "혜연이가 온전한 음악인이 될 때까지 갈 길이 구만리지만 혜연이만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했다. "남들보다 정확하고 빠르지 않아도, 팔꿈치로 하는 혜연이의 연주는 많은 관객에게 희망과 감동을 줄 수 있어요." 선생님의 꿈은 제자의 것과 조금 달랐다. 그는 "혜연이가 '지속 가능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기문 기자 /조선일보  
889    독일 군가 - 백합 세송이 댓글:  조회:6686  추천:0  2016-12-27
       독​일​ 군가 Drei Lilien(백합 세송이) ======================   이 곡은 1830년 사냥꾼의 담시(발라드)에서 개작되었으며, 제 1,2차 세계대전 당시 군가로 불렸고. 나치의 전체주의적 색깔이 전혀 없으므로 대전 후 독일연방군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경쾌하고 당당한 민요엥엥거리는 목소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음색이 인상적이라 판처리트와 함께 독일군가의 양대산맥으로 꼽히고 있다.[1] 절 원문 발음 한국어 번역 1절 Drei Lilien, drei Lilien, die pflanzt' ich auf mein Grab, da kam ein stolzer Reiter und brach sie ab. Juvi valle ralle ralle ralle ra Juvi valle ralle ralle ralle ra Da kam ein stolzer Reiter und brach sie ab. 드라이 릴리-엔, 드라이 릴리-엔, 디- 플란츠트 이히 아우프 마인 그랍. 다 캄 아인 슈톨처 라이터 운트 브라흐 지- 압. 유-비 팔레 랄레 랄레 랄레 라 유-비 팔레 랄레 랄레 랄레 라 다 캄 아인 슈톨처 라이터 운트 브라흐 지- 압. 백합 세 송이, 백합 세 송이, 난 그 백합들을 내 무덤 위에 꽂았네, 그 때 당당한 기사 한 명이 와서 그 백합들을 떼어갔네. 유-비 랄라 랄라 랄라 랄라 라 유-비 랄라 랄라 랄라 랄라 라 그 때 당당한 기사 한 명이 와서 그 백합들을 떼어갔네. 2절 Ach Reiter(Reitersmann), lieber(ach) Reitersmann, laß doch die Lilien stehn, die soll ja mein Feinsliebchen noch einmal seh'n. Juvi valle ralle ralle ralle ra Juvi valle ralle ralle ralle ra Die soll ja mein Feinsliebchen noch einmal seh'n. 아흐 라이터, 리-버 라이터 스만, 라스 도흐 디- 릴리엔 슈텐 디- 졸 야 마인 파인 스립-혠 노흐 아인말 젠 유-비 팔레 랄레 랄레 랄레 라  유-비 팔레 랄레 랄레 랄레 라 디- 졸 야 마인 파인 스립-혠 노흐 아인말 젠 아, 기사여(기사여), 친애하는(아) 기사여, 백합들을 그대로 두게나, 그 백합들은 내 연인이 한 번 더 봐야 한단 말일세. 랄라 랄라 랄라 랄라 랄라 랄라 랄라 랄라 랄라 랄라 그 백합들은 내 연인이 한 번 더 봐야 한단 말일세. 3절 Was schert(kümmert) mich (denn) dein Liebchen, was schert(kümmert) mich (denn) dein Grab! Ich bin ein stolzer Reiter und brech' sie ab. Juvi valle ralle ralle ralle ra Juvi valle ralle ralle ralle ra Ich bin ein stolzer Reiter und brech' sie ab. 바스 셰어트 미히 다인 립혠, 바스 셰어트 미히 덴 마인 그랍! 이히 빈 아인 슈톨처 라이터 운트 브레히 지- 압 유-비 팔레 랄레 랄레 랄레 라 유-비 팔레 랄레 랄레 랄레 라  이히 빈 아인 슈톨처 라이터운트 브레히 지- 압 무엇이 내 애인을 돌본단 말인가, 무엇이 내 무덤을 돌본단 말인가! 난 당당한 기사이므로 그들을 떼어간다네. 랄라 랄라 랄라 랄라 라 랄라 랄라 랄라 랄라 라 난 당당한 기사이므로 그들을 떼어간다네. [1] 판처리트 같은 경우는 발지대전투 등의 영화와 많은 컨텐츠 등으로 사람들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유명해진 곡이라면 이 곡은 순수 음가로 유명한 곡이다.           1절 .  Drei Lilien, drei Lilien, (세송이 백합, 세송이 백합이) Die pflanzt' ich auf mein Grab, (나의 무덤에 자라고있네)   Da kam ein stolzer Reiter (명예로운 전사들이 다가와) Und brach sie ab. (그 꽃을 꺾어갔다네 )   Juvi valle ralle ralle ralle ra  (랄랄랄라 랄랄라) Juvi valle ralle ralle ralle ra  (랄랄랄라 랄랄라)  Da kam ein stolzer Reiter (명예로운 전사들이 다가와) Und brach sie ab. (그 꽃을 꺾어갔다네 )    2절   Ach Reitersmann, ach Reitersmann, (친애하는 기사여, 친애하는 기사여,)     Laß doch die Lilien stehn, (백합 들을 건드리지 말게나)      Die soll ja mein Feinsliebchen (그 백합 들은 나의 연인 들이)     Noch einmal sehn.  (한번더 봐야 한단 말일세)   Die soll ja mein Feinsliebchen (그 백합들은 나의 연인 들이)     Noch einmal sehn. (한번더 봐야 한단 말일세)   Juvi valle ralle ralle ralle ra  (랄랄랄라 랄랄라)   Juvi valle ralle ralle ralle ra  (랄랄랄라 랄랄라)  Die soll ja mein Feinsliebchen (그 백합들은 나의 연인 들이)     Noch einmal sehn. (한번더 봐야 한단 말일세)   3절   Was schert mich denn dein Liebchen, (무엇이 내 애인을 방해한단 말인가)   Was schert mich denn dein Grab! (무엇이 나와 내 무덤을 방해 한단 말인가!)   Ich bin ein stolzer Reiter (난 당당한 기사 이므로)   Und brech' sie ab. (그들을 떼려 간다네)   Ich bin ein stolzer Reiter (난 당당한 기사 이므로)   Und brech' sie ab. (그들을 떼려 간다네)    Juvi valle ralle ralle ralle ra (랄랄랄라 랄랄라) Juvi valle ralle ralle ralle ra  (랄랄랄라 랄랄라)  Ich bin ein stolzer Reiter (난 당당한 기사 이므로)   Und brech' sie ab. (그들을 떼려 간다네)   4절   Und sterbe ich noch heute, (그리고 난 오늘 죽는 다네,)   So bin ich morgen tot, (그리하여 난 내일 죽는 몸 이라네)   Dann begraben mich die Leute (그럼 자네들이)   Ums Morgenrot. (날 서광이 비출때 묻혀주게)   Dann begraben mich die Leute (그럼 자네들이)   Ums Morgenrot (날 서광이 비출때 묻혀주게)   Juvi valle ralle ralle ralle ra (랄랄랄라 랄랄라) Juvi valle ralle ralle ralle ra  (랄랄랄라 랄랄라)  Dann begraben mich die Leute (그럼 자네들이)   Ums Morgenrot (날 서광이 비출때 묻혀주게) [출처] [MP3] 세송이 백합 - Drei Lilien (독일군가)|작성자 King 니알라토텝     [출처] [듣 기/가사/pv] 독일 군가- Drei Lilien (백합 세송이)|작성자 만월    
888    44, 10000, 66 댓글:  조회:5617  추천:0  2016-12-27
낙하산 없이 최고 고도서 추락한 생존자로 기네스북에 등재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44년 전 크로아티아 상공 1만m에서 추락한 유고슬라비아 JAT항공 여객기의 유일한 생존자가 66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세르비아 언론에 따르면 JAT항공 승무원으로 1972년 사고 여객기에 탑승해 있다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베스나 불로비치는 베오그라드의 자택에서 지난 24일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44년 전 사고 당시 22세이던 불로비치를 태운 유고 항공기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베오그라드로 향하던 중 1만m 상공에서 비행기에 장착된 폭탄이 폭발, 기체가 두 동강 난 채 체코 스르브스카 카메니체 지역의 눈 덮인 언덕에 곤두박질쳤다. 이 폭탄은 크로아티아 분리주의 그룹이 짐칸에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여객기 꼬리 부분에 음식 나르는 카트와 함께 끼어 있던 불로비치는 거짓말처럼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추락한 뒤 열흘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두개골에 금이 가고, 척추, 다리, 골반 등의 뼈가 부러진 채 허리 아래 마비 증상을 겪었으나 10개월 만에 다시 걸었고, 항공사 사무직으로 복귀해 일도 다시 시작했다. 1985년 가장 높은 상공에서 낙하산 없이 떨어져 생존한 사람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그는 세르비아에서는 스포츠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그는 이런 인기를 이용해 1990년대 독재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반대 시위에 앞장서는 등 정치적인 목소리도 적극적으로 냈다.   그는 2008년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누구도 내가 이렇게 오래 살 것으로 기대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사고 이후에도 승객으로 여전히 비행기를 타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생전에 "비행기를 타면 사람들이 항상 내 옆에 앉길 원한다"고 말하곤 했다.   1972년 1만m상공에서 추락한 비행기에서 생존한 세르비아 여성이 별세했다.[AP=연합뉴스] ====================== 기자 박상욱 기자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1985년 '가장 높은 고도에서 낙하산 없이 떨어져 생존한 인물'로 기네스북에 오른 JAT 유고슬라비아 항공 승무원 출신 베스나 불로비치(사진)가 현지시간 24일 자택서 숨진채 발견됐다. 향년 66세. 불로비치는 22살이었던 1972년 1월 26일, 덴마크 코펜하겐을 출발해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로 향하던 JAT 367편에서 근무중이었다. JAT 367편은 크로아티아 상공 3만3천 피트(1만160 미터)에서 짐칸에 실린 폭탄이 터져 체코에 추락했다. 이 폭탄은 당시 크로아티아 분리주의 반군이 설치한 것으로 조사됐다. 추락한 JAT 367편과 동일한 기종의 항공기 당시 사고로 탑승자 28명 중 27명이 숨졌고, 불로비치는 유일한 생존자였다. 당시 불로비치는 기내 끝에 있었는데 동체 꼬리 부분이 나무와 눈으로 뒤덮인 언덕에 닿으면서 기적적으로 충격이 흡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조된 불로비치는 열흘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었고 척추와 골반, 다리 등이 골절되고 하반신이 마비되는 등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사고 10개월 만에 복직, 사무직으로 근무했다. 이후 그녀가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으나 끝내 해결되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았다. 불로비치는 사고 13년 후인 1985년, 기네스북에 공식 등재되면서 화제를 모았고, 이후 인기인으로 거듭났다. 불로비치는 1990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대통령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하는 등 정치적 행동을 이유로 항공사로부터 해고당했다. 불로비치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자택에서 숨진채 발견됐으나 아직까지 사망 원인이나 정확한 사망 시각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DA 300   박상욱 기자 [출처: 중앙일보] 
887    칭키스칸의 전설이 숨쉬는 차간호에서의 전통식 물고기잡이 댓글:  조회:7122  추천:0  2016-12-26
중국 길림성 松原市 前郭蒙古族自治縣에 위치한 중국내에서 7번째로 큰 호수인 차간호에서 20,000여명의 관광객들이 운집한 가운데 영하 22도의 날씨속에서 얼음 눈 고기잡이 및 사냥 문화 축제가 벌어져 오랜전 부터 전래 되어온 몽골식 고기잡이를 시작 하여 하루동안 약 4천만원 어치의 고기를 잡았으며 작년에는 70여종의 물고기를 936톤이나 잡았다고 함.   이 전통적물고기잡이 의식은 2000년동안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몽고족의 전통문화로서 동계어획을 시작하기전에 "祭湖、醒网"仪式(호수신에게 제사를 올려 잠든 겨울 그물을 깨우는 의식 -  호수신을 통해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어 만물의 영생을 빌어  백성들의 평안을 바란다는 뜻)을 진행합니다.   이 의식이 끝난뒤 여러개의 그물을 놓아 고기를 잡게 되는데 각 그물에서 첫그물로 잡힌 고기를 头鱼(첫고기)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头鱼가 궁중에 보내져 궁중에서 이 고기로 头鱼宴(첫고기연회)를 벌였다고 합니다. 현재는 이 头鱼를 경매로 내놓습니다.   2006년 12월 28일에 있은  查干湖冬捕의  5마리 头鱼중에서 제일 비싸게 팔린것이 3099원(중국인민페)으로 팔렸고 다른것이 2499, 2799 등등 가격으로 팔렸다고 합니다.   查干湖冬捕 - zha gan hu dong bu  "祭湖、醒网"仪式 - ji hu xing wang yi shi  头鱼 - tou yu    头鱼宴 - tou yu yan                          중국 10대 자연생태 축제 중 하나인 ‘차간호 얼음낚시’는 2000년 전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으로는 1000년 전 요나라 황제가 해마다 신하들을 이끌고 차간호로 행차해서 첫 그물에 잡힌 가장 큰 물고기로 ‘대두어연’이라는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빙설축제가 열리는 차간호는 중국의 10대 담수호 중 하나다. 넓이가 420㎢로 서울면적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호수의 이름은 몽골족이 ‘차간낙이’ 즉 성스러운 흰색호수로 부르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됐으며 지린성 최대의 내륙호수로 꼽힌다. 그러나 이 호수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연이은 가뭄으로 단 60㎡만 남은 채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땅이 마르고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며 괴질이 돌아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이 된 것이다. 그러나 주민들은 좌절하지 않고 1976년부터 이곳에서 354km 떨어진 송화강과 수로를 연결하는 대역사를 벌여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다. 운하가 완공되고 호수에 물이 차오르자 1992년부터 치어를 방류하여 호수 전체가 양어장인 천연 양식장으로 재건됐다. 또 2002년부터는 빙설축제의 일부로 승화시켜 지역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어부들이 얼음구멍을 뚫고 있는 사이 아침 해가 떠오른다. 차간호의 겨울 낚시가 많은 사람에게 호평을 받는 첫 번째 이유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고기를 잡는다는 것이다. 그물에 쓰인 실이 아마실에서 낚싯줄로 바뀐 것과 장비의 일부분을 금속으로 대치한 것 이외에는 1000년 전의 방법과 다를 것이 없다. 두 번째는 1년 중 겨울과 여름에 각각 한 달씩만 기간을 정해 고기를 잡는다는 것이다. 여름은 8월, 겨울은 1월이다. 그래서 차간호에는 그물만 던지면 언제나 훌륭하게 성장한 물고기들이 풍성하게 잡힌다. 그물을 넣기 위해 말과 마부가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세 번째는 그것을 관광상품화한 것이다. 축제를 열고 회사를 설립해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면서 계획적인 고기잡이로 관광객을 불러 모은 것이다. 관광객들은 보고 놀라며 즐기면서 물고기를 사간다. 해마다 첫 그물에 잡힌 가장 큰 물고기는 경매에 붙여져 몇 배나 높은 가격으로 팔려나간다. 물고기를 사가는 사람들은 북경이나 장춘 등 대도시의 기업인들이다. 옛날 황제가 베풀었던 연회의 기분을 느끼려는 사람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또 차간호를 여행해본 사람들은 비슷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현지주민이나 어부들은 사진이나 비디오 촬영하는 사람에게 적극 협조한다. 다른 지역처럼 돈을 요구하거나 카메라를 피하는 일은 전혀 없다. 그것은 촬영된 그들의 작업이 매개체가 되어 국내외의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게 되며 마을의 수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물을 따라 올라오는 물고기들, 얼음낚시의 절정이다. 지린성의 유일한 몽골족 자치현인 이곳은 칭기즈칸이 금나라를 정벌할 때 이끌고 온 몽골기병의 일부가 정착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몽골족의 마을이 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의 행정지명은 중국 지린성 송원시 전곽(吉林省 松原市 前郭) 몽골족 자치현이며, 지린성의 성도인 장춘에서 북쪽으로 193km지점, 장춘공항에서 승용차로 3시간 거리다. 고기잡이를 나가는 어부들은 새벽 4시에 집결하는데 말 12필과 어부 50명을 한 팀 최소인원으로 해 네 팀이 운영된다. 그들은 전날 미리 꽂아둔 깃발을 따라 작업현장에 도착한다. 영하 30°c가 넘는 혹한에 마차를 타면 5분이 되지 않아 딱딱한 마차에 붙은 궁둥이는 마비되고 온몸이 얼어붙는 듯해진다. 이렇게 한 시간 동안 마차를 타고 간 어부들은 구멍을 뚫고, 그물을 치며, 말을 모는 역할 등으로 업무가 분담되어 있다. 마지막 그물에서 올라오는 물고기를 건져내고 있다 새벽 다섯 시 호수에 도착하면 바로 작업이 시작된다. 전날 옮겨뒀던 그물을 펼치고 얼음송곳의 날을 세운다. 2인1조로 진행된 얼음구멍파기는 해가 뜨면서 완료됐다. 5m 간격의 구멍 200여 개, 그중 출발선으로 잡아놓은 가장 큰 얼음구멍에서 줄을 연결한 6m 길이의 나무막대 두 개를 양쪽으로 집어넣는 것에서 그물 치는 작업은 시작된다. 얼음구멍 속으로 갈고리를 집어넣어 막대기에 달린 줄을 찾아 당기고 막대기가 다음 구멍으로 이동할 수 있는 방향을 잡아 준다. 이렇게 200여 개의 작은 얼음구멍으로 장대를 이동시키고 나면 그물이 빨려 들어가 금속 추를 단 쪽은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고 부표를 단 쪽은 위로 떠오르면서 높이 8m·길이 2km에 달하는 그물이 양쪽으로 펼쳐진다. 차간호의 평균수심은 5m, 그물은 차간호의 바닥까지 쓸고 지나가고 마부의 채찍질에 말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물을 끌어당긴다. 장대가 들어간 반대쪽에서 두 장대가 만나고 장대를 얼음구멍 밖으로 끄집어내면 그물치기가 완료된다. 그물치기가 완료되면 휴식시간이다. 새벽 세시에 집을 나와 시간은 11시가 넘었다. 준비해 온 물만두와 라면 등을 덥혀 한 잔의 술로 허기를 달래고 빙설위에 누워서 오수를 즐긴다. 그물을 넣고 난 어부들이 점심을 먹고 오수를 즐기고 있다 정오가 지나자 그물 당기기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그물과 진흙만 올라오다가 어느 순간 물고기들이 아우성치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50명의 어부가 당겨 올리는 그물에는 엄청난 물고기가 고함을 지르는듯 몸부림을 치다가 이내 얼어버린다. 수백 명의 관광객은 그 경이로움에 감동을 하고 한쪽에서는 물고기를 사기 위해 흥정을 한다. 그물을 벗어난 물고기는 바로 얼어 별다른 포장이 없어도 트럭에 실을 수 있다 큰 물고기는 한 마리에 40kg을 웃돌며 하루 최대 어획량은 168t, 잡은 물고기를 트럭에 싣고 나면 차간호의 하루해는 저물어간다. 어부들은 지는 해를 바라보며 타고 온 마차에 몸을 싣고 가족이 있는 마을로 되돌아간다. 일과를 마친 어부들이 귀가하고 있다       몽골어로 백색 빛깔의 신성한 호수라는 의미를 가진 중국 북부 지역 최대의 담수호인 이곳에는 500여 가구가 여전히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요.   한겨울에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는 그곳에서 어부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극한의 추위를 견디며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면서 물고기를 잡는데, 혹독한 환경이지만 일 년 동안의 어업량 중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들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고기잡이를 하고 있습니다.   혹독한 환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겨울의 차간호에서 펼쳐지는 어부들의 삶을 다큐를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들에겐 생존의 얼음판입니다.   극한의 추위와 싸워야 하지만 그 어느 곳보다 풍요로운 곳에서 얼음을 뚫고 고기를 낚는 사람들입니다.         겨울이 되면 중국 북동부에 위치한 지린성은 하얀 눈으로 덮이게 됩니다.   서쪽의 거대한 담수호는 중국 북방 지역에서 가장 큰데 송위안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고 총면적 420제곱 킬로미터로 무려 서울의 3분의 2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합니다.   5개월 이상 계속되는 이곳의 겨울은 영하 30도를 밑도는 혹독한 추위는 바다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호수를 얼음대륙으로 바꿔놓습니다.         추위가 절정에 이른 1월!   ​어부들은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고기잡이를 시작하게 됩니다.   겨울 차간호에서 사용되는 그물은 20미터 조각 백개를 이어 만들어 길이가 2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무척 길어서 이 작업엔 50명이 넘는 어부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눈 쌓인 얼음 호수 위에서 그물을 끄는대만 반나절의 시간이 흐르는데 견디기 힘든 건 이뿐만 아니고 혹독한 추위가 그들을 기다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손발과 얼굴이 얼어붙는 지경이네요.         ​   살을 애는 바람에 체감온도는 더 떨어지고 몸은 금세 녹초가 됩니다.   선조들부터 2천년을 이어온 생존의 방식을 고집하는데 오로지 말과 사람의 힘으로만 고기를 잡습니다.         일곱 시간의 작업 끝에 잡아올린 고기들을 보면 고된 작업의 피로가 한순간에 잊히게 됩니다.   그물 하나로 잡아올린 고기의 양은 적을 때는 40톤에서 많을 때는 100톤에 이를 정도로 많은 양입니다.   신이 내린 호수에서 어부들에게 주는 선물이네요.         10킬로가 넘는 큰 고기는 20에서 30장에 거래가 되는데 오늘 최대 월척은 사람의 키보다 약간 작을 정도로 거대합니다.   이곳의 고기잡이는 1월을 전후로 한 달 정도 계속되는데, 어획량이 총 1천 톤으로 이는 연간 어획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평소 어획량보다 10톤정도 많은 날이라 차에 싣는대만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힘들다고 말하는 어부의 얼굴에는 미소가 보입니다.           오늘은 많이 잡았고 이 고기들이 일하는 사람을 힘나게 해준다네요.   추운 날씨지만 일하다 보면 추위를 잊어버리게 되고요.   이곳에서 잡힌 고기는 정부가 관리하는 어창으로 옮겨진 후 중국 전역으로 팔려나갑니다.         작업이 모두 끝나고 그물까지 정리하니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지친 몸을 마차에 싣는 어부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어부의 손에는 물고기 한마리가 들려있고 내내 기다리던 딸이 아빠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고 달려간 아버지는 정겹게 안아줍니다.         고기잡이 일을 마치고 돌아와 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인데요.   20년 경력의 어부인 쿵샤오핑이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으로 일이 힘들지만 집에 오면 괜찮아진다고 말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피곤이 다 풀릴 거라고도 하고요.   아빠 손이 까칠하고 굳은살이 박여있으며 갈라졌다고 말하는 딸.   ​      저녁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오늘 메뉴는 갓 잡아올린 잉어로 만든 생선조림이며 신선해서 더 맛있다고 아내는 말합니다.   다른 생선의 서너배의 가격 때문에 정작 이곳 차간호 어부들의 식탁에는 자주 오르지 못 한다니 아이러니합니다.   모처럼 사온 잉어 덕분에 오늘 저녁상은 무척 푸짐하고 가족들도 좋아합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와 세 식구가 모여서 밥을 먹을 때 제일 행복하다고 이 집의 가장은 이야기하네요.         새벽 3시에 벌써 하루가 시작되는데 남편이 씻을 물을 준비하는 게 가장 먼저이고, 아내가 담당합니다.   아빠가 고기잡이를 나가는 기간에는 딸도 매일 새벽잠을 설치게 됩니다.   자신도 이렇게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아빠도 고생도 안 할 거라며 어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딸이 어리광을 부립니다.   어린 딸의 걱정과 염려를 겹겹이 입고 중무장을 시작하네요.         네시가 되어 집에서 호수까지 걸어가는 어부들이 발길을 재촉하는데 입구에 도착하면 대기하고 있던 마차로 나눠타고 어업 장소로 이동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얼음 벌판, 새벽어둠 속 호수 위를 달립니다.   고기를 잡을 중심부까지는 마차로 한 시간여를 달려야 할 정도입니다.         다섯시가 되면 어부들의 작업이 시작되는데, 새벽일에 익숙한 그들은 어둠 속에서도 손발이 척척 맞고, 먼저 전날 쌓아뒀던 그물을 펼치는 작업부터 시작합니다.   거대한 걸 펼치는 데만 두 시간이 걸리는데 모두 얼어붙어서 더욱 고된 작업이네요.   작업시간을 줄이기 위해 남은 건 통째로 뒤집습니다.   매일 아침이 이렇게 바쁜데 그물을 빨리 내려야 하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으면 얼음 구멍에 제때 넣을 수 없다고 합니다.         얼음 호수 위에 불이 피워졌는데 사람도 그렇지만 연장을 위해서도 온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연장이 다 얼어붙어서 녹이기 위함이기도 하네요.   오랜 경력을 가진 어부가 넣을 자리를 정하면 구멍을 뚫는 작업이 다른 인부에 의해서 시작됩니다.   50센티 두께의 얼음을 송곳으로 파서 구멍을 뚫습니다.         넣을 자리에는 큰 구멍을, 그 주위로는 작은 걸 뚫어야 하는데 이렇게 300여 개의 작은 걸 만들어야 합니다.   큰 구멍에서 바로 작은 구멍으로 그물을 보낼 수 없기 때문에 일정 거리를 두고 작은 구멍을 뚫어 긴 막대기를 넣고 조금씩 밀면서 다음 구멍으로 보내기 위해 이렇게 한답니다.   가로 3미터 세로 1미터 정도가 완성되면 그물이 연결된 긴 장대를 그곳으로 밀어 넣고 양쪽으로 하나씩 두개를 넣는데 얼음 속에서 제대로 방향을 잡으면 조금씩 이동시켜 저절로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군요.           그런데 2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게 얼음 호수 밑에서 어떻게 펼쳐지는 걸까요?   장대에 연결돼 호수 아래로 빨려 들어간 그물은 300개의 작은 구멍을 따라 양쪽으로 커튼처럼 펼쳐집니다.   타원형의 그물 안에 물고기들이 갇히게 되고 건너편에서 건져 올리면 물고기도 따라 올라온답니다. ​     거대한 그물을 이용한 전통 고기잡이.   이곳의 남자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어업 방법을 익히게 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대부분 어부였습니다.   사람의 힘만으로 부족할 때는 늘 말의 힘을 빌려왔는데 말이 하는 일은 그물이 잘 펴지게 중간중간 당기는 역할을 맡습니다.   한 팀으로 호흡을 맞춰 일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옵니다.         새벽부터 시작된 얼음구멍 뚫기는 날이 밝은 후에도 계속되는데 스무 명 남짓의 어부가 300개를 만들어야 하니 무척 고된 작업입니다.   쉴 틈 없이 일하다 보면 어느새 추위도 잊게 됩니다.   일이 힘들어 땀이 많이 나고 그걸 식히기 위해 차간호의 얼음을 씹기도 하고 갈증을 해소하려고 찬 호숫물을 마시기도 하네요.         잠깐의 휴식시간에는 삼삼오오 모여앉아 집에서 싸온 점심을 먹는데 알콜을 마셔서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몸도 녹고 피로도 풀기 위함이기도 하고요.   고된 노동을 잠시 잊고자 했던 동료와의 씨름을 한판 벌이기도 하고 쉬는 시간에 얼음송곳을 갈아놓는 일도 빼놓지 않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물이 나오는 큰 구멍이 완성되면 장대를 먼저 끌어냅니다.   끝에 연결된 줄을 당기면 서서히 따라나오기 시작하는데 다섯마리의 말이 연자방아를 돌리듯 돌면서 당겨주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끌려 나오면 이제 본격적으로 어부들이 나설 차례입니다.     ​   그런데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합니다.   변화무쌍한 호수 위의 날씨 때문에 바람에 밀리고 얼음에 미끄러지는 어부들은 작업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고된 작업을 이기지 못 한 말이 주저 않는 일도 벌어지는데 사람도 말도 견디고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혹한의 일터에서 쓰러진 말은 잠시 쉬게 하고 곧바로 교체를 하고 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사람과 말이 한발씩 움직이면서 온몸으로 하는 고기잡이.   오랜 작업 끝에 어부들의 고된 결실이 한가득 수면 위로 올라옵니다.         몸이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치열한 삶의 현장에 나온 17살의 어부는 추워서 힘들긴 하지만 가족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좋다고 말합니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방법으로 생활을 이어나가는 어부들의 고단하고 힘든 모습에서 진한 감동이 느껴지기도 하네요.   [출처] 중국 차간호, 극한의 추위에서 살아가는 어부들|작성자 우뭉아빠                 중국 지린성 차간호수의 겨울 고기잡이는 그물을 한번 던져 수십톤의 물고기를 잡는다.   영하 20도의 혹한, 꽁꽁 언 호수에 구멍을 내고 한번에 50톤의 물고기를 건져내는  이 고기잡이를 하는 차간호 마을은 세계의 진귀명기를 수록하는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어 있다.    
886    [쉼터] - 칭키스칸 노래 댓글:  조회:5541  추천:0  2016-12-26
내몽고자치구에는 몽골족이 숭배하는 칭기즈칸 능원이 있다. 유골은 묻혀 있지 않은 의관총(衣冠塚)이지만 영혼을 중시하는 몽골족들은 성역으로 떠받들고 있다. 중국은 내몽고자치구 어얼뚜어스 고원 일대 총 5.5헥타르에 칭기즈 칸 능원을 중심으로 전통 빠오와 철마상, 몽골 제국이 세계를 정복할 당시의 지도, 박물관 등을 한데 모아 대규모 역사문화 관광 단지를 조성했다.  칭기즈 칸 능원은 열 가지의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첫째 세계 최대의 몽골 역사문화 관광지, 둘째 티엔치(天驕) 호텔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몽골 빠오식 건축물, 세째 몽골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산(山)'모양의 문, 네째 철제 조형물로 재현한 세계 유일의 칭기즈 칸 군진, 다섯째 세계 최대의 몽골 제국 지도, 여섯째 세계 유일의 몽골 역사문화 박물관, 일곱째 세계에서 가장 긴 206m짜리 몽골역사 기록화, 여덟째 세계 유일의 몽골 문자 '칸(汗)'모양을 본 뜬 건축물, 아홉째 세계 유일의 800여년 동안 칭기즈 칸의 제사를 모시는 능원 관리인, 열번째 세계 유일의 칭기즈 칸 제사 완벽한 보존 등이다.    중국 내몽고자치구 어얼뚜어스에 위치해 있는 칭기즈칸 능원 입구의 산 모양 조형물 Sie ritten um die Wette mit dem Steppenwind, 1000 Mann (ha-hu-ha) 그들은 초원의 바람과 함께 앞다투어 말을 달렸다, 천의 대장부들.  und einer ritt voran, dem folgten alle blind, Dschinghis Khan (ha-hu-ha). 한 사내가 선두에서 말을 달리고, 모든 이들이 맹목적으로 그를 따랐다. 징키스칸. Die Hufe ihrer Pferde, die peitschten den Sand, 모래흙을 차며 날리는 그들의 말발굽들. sie trugen Angst und Schrecken in jedes Land, 그들은 모든 나라들에 공포와 두려움을 전했고, und weder Blitz noch Donner hielt sie auf (hu-ha). 천둥도 번개도 그들을 막지는 못했다. Refrain: (후렴) Dsching-Dsching-Dschinghis Khan, 징-징-징키스칸 hey Reiter, ho Reiter, hey Reiter, immer weiter. (헤이~) 기마병들이여, (호~) 기마병들이여, (헤이~)기마병들이여, 계속 나아가라.  Dsching-Dsching-Dschinghis Khan, 징-징-징키스칸, auf Bruder, sauft Bruder, rauft Bruder, immer wieder. 형제를 위하여, 마시자 형제여, 싸우자 형제여, 계속 그렇게. Laßt' noch Wodka holen, (ho-ho-ho-ho) 보드카를 더 가져오라 하라, denn wir sind Mongolen, (ha-ha-ha-ha) 왜냐면 우리는 몽고인들이고, und der Teufel kriegt uns fruh genug. 원래가 사납고 거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Dsching-Dsching-Dschinghis-Khan, 징-징-징키스칸 hey Reiter, ho Reiter, hey Reiter, immer weiter. (헤이~) 기마병들이여, (호~) 기마병들이여, (헤이~)기마병들이여, 계속 나아가라. Dsching-Dsching-Dschinghis Khan, 징-징-징키스칸 hey Manner, ho Manner, tanzt Manner, so wie immer. (헤이~) 장부들이여, (호~) 장부들이여, 춤춰라 장부들이여, 늘 그랬듯이. Und man hort ihn lachen,(ho-ho-ho-ho) 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듣는다. immer lauter lachen, (ha-ha-ha-ha) 점점 더 크게 웃는다, und er leert den Krug in einem Zug. 그리고는 그는 술잔을 단숨에 비워버린다. Und jedes Weib, das ihm gefiel, das nahm er sich in sein Zelt (ha-hu-ha). 그는 마음에 드는 여자마다 자기 천막으로 데리고 갔다. Es hieß, die Frau, die ihn nicht liebt, die gab es nicht auf der Welt (ha-hu-ha). 사람들은 말했다, 그를 사랑하지 않은 여자는 이 세상에 없었다고. Er zeugte sieben Kinder in einer Nacht, 그는 하룻 밤에 7 명의 자식을 만들었고, und uber seine Feinde hat er nur gelacht, 자신의 적들에 대해서는 단지 비웃기만 했다. denn seiner Kraft konnt' keiner widersteh'n (hu-ha). 왜냐면 아무도 그의 힘에 저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외곽에 있는 칭기즈칸의 초대형 기마상. Sie ritten um die Wette mit dem Steppenwind  -지 리텐 움 디 베테 밋 뎀 슈테펜빈트  -그들은 바람과 경쟁하며 말을 달린다  Tausend Mann (haa huu haa)  -타우젠트 만 하 후 하  -1000명의 전사 하-후-하  Und einer ritt voran, dem folgten alle blind  -운트 아이너 릿 포란 뎀 폴크텐 알레 블린트  -한명이 앞장서 달리고 그 뒤를 모두가 무조건 따른다.  Dschingis Khan (haa huu haa)  -징기스 칸 하 후 하  -칭기스칸 하-후-하  Die Hufe ihrer Pferde durchpeitschten den Sand  -디 후페 이러 페르트 두르히파이치텐 덴 잔트  -이들이 탄 말의 발굽은 모래를 박차고,  Sie trugen Angst und Schrecken in jedes Land  -지 트루겐 앙스트 운트 슈레켄 인 예데스 란트  -이 발굽은 모든 나라에 근심과 공포를 가져다 준다.  Und weder Blitz noch Donner hielt sie auf  -운트 베더 블리츠 노흐 도너 히일트 지 아우프  -천둥이나 번개도 이들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Chorus:   (huu haa) 후 하  Dsching, Dsching, Dschingis Khan  -징, 징, 징기스칸  -칭, 칭, 칭기스칸  He Reiter, ho Reiter, he Reiter, immer weiter!  -헤 라이터, 호 라이터, 헤 라이터, 이머 바이터  -헤이 기사여, 호 기사여, 헤이 기사여, 계속.  Dsching, Dsching, Dschingis Khan  -징, 징, 징기스칸  -칭, 칭, 칭기스칸.  Auf Bruder! Sauft Bruder! Rauft Bruder! Immer wieder!  -아우프 브루더! 자우프트 브루더! 라우프트 브루더! 이머 비이더!  -형제여 싸워라. 형제여 마셔라. 형제여. 계속.  Lasst noch Wodka holen(o ho ho ho)  -라스트 노흐 보트카 홀렌 오 호 호 호  -보드카를 가지러 가자, 오 호 호 호  Denn wir sind Mongolen(a ha ha ha)  -덴 비어 진트 몽골렌 아 하 하 하  -왜냐하면 우린 몽골인이니까. 아 하 하 하  Und der Teufel kriegt uns fruh genug!  -운트 데어 토이펠 크리크트 운스 프뤼 게누크  -악마는 이미 이전에 우리를 충분히 취하였다.  Dsching, Dsching, Dschingis Khan  -징, 징 , 징기스칸  -칭, 칭, 칭기스칸  He Reiter, ho Reiter, he Reiter, immer weiter!  -헤 라이터, 호 라이터, 헤 라이터, 이머 바이터  -헤이 기사여, 호 기사여, 헤이 기사여, 계속.  Dsching, Dsching, Dschingis Khan  -징, 징, 징기스칸  -칭, 칭, 칭기스칸  He Manner, ho Manner, tanzt Manner! So wie immer!  -헤 매너, 호 매너, 탄츠트 매너. 조 비 이머  -헤이 전사여, 호 전사여, 춤을 춰라 전사여, 계속.  Und man hort ihn lachen (o ho ho ho)  -운트 만 호르트 인 라헨 오 호 호 호  -사람들은 그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오 호 호 호  Immer lauter lachen (a ha ha ha)  -이머 라우터 라헨 아 하 하 하  -계속 더 크게 웃는다. 아 하 하 하  Und er leert den Krug in einem Zug  -운트 에어 레에르트 덴 크루크 인 아이넴 추크  -그리고 그는 단숨에 술잔을 비운다.  Und jedes Weib, das ihm gefiel, das nahm er sich  -운트 예데스 바이프 다스 임 게필 다스 남 에어 지히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여자는 누구든지  In sein Zelt (haa huu haa)  -인 자인 첼트 하 후 하  -자신의 천막으로 끌어들인다. 하 후 하  Es hiess, die Frau, die ihn nicht liebte, gab es nicht  -에스 히스 디 프라우 디 인 니히트 리프트 가프 에스 니히트  -그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는 세상에  Auf der Welt (haa huu haa)  -아우프 데어 벨트 하 후 하  -존재하지 않는다. 하 후 하  Er zeugte sieben Kinder in einer Nacht  -에어 초이크테 지벤 킨처 인 아이너 나흐트  - 그는 하루 저녁에 아이를 일곱명 낳는다.  Und uber seine Feinde hat er nur gelacht  -운트 위버 자이네 파인데 하트 에어 누어 겔라흐트  -그의 적들을 그는 조롱할 뿐이다.  Denn seiner Kraft konnt keiner widerstehen  -덴 자이너 크라프트 콘트 카이너 비더슈테엔  -아무도 그의 힘에 저항할 수 없으니까  ※ Chorus:(huu haa)- 코러스는 1절과 동일한 후렴구이므로 생략합니다.  Dsching, Dsching, Dschingis Khan  He Reiter, ho Reiter, he Reiter, immer weiter!  Dsching, Dsching, Dschingis Khan  Auf Bruder! Sauft Bruder! Rauft Bruder! Immer wieder!  Lasst noch Wodka holen(o ho ho ho)  Denn wir sind Mongolen(a ha ha ha)  Und der Teufel kriegt uns fruh genug!  Dsching, Dsching, Dschingis Khan  He Reiter, ho Reiter, he Reiter, immer weiter!  Dsching, Dsching, Dschingis Khan  He Manner, ho Manner, tanzt Manner! So wie immer!  Und man hort ihn lachen (o ho ho ho)  Immer lauter lachen (a ha ha ha)  Und er leert den Krug in einem Zug  [출처] [본문스크랩] 징기즈칸노래 가사뜻좀 알려주세요|작성자 잉꽁  
885    [쉼터] - 작문써클선생님들께; 칭키스칸 명언 댓글:  조회:6095  추천:0  2016-12-26
      세상에 도전하는 당신을 위한명언~          
88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깃대종이란?... 댓글:  조회:4313  추천:0  2016-12-26
요약 환경보전 정도를 살필 수 있는 지표가 되는 동식물종.   깃대종이란? 환경보전의 정도를 나타내거나 복원의 증거가 되는 한 지역의 생태계를 대표하는 상징 동식물종이다. 깃대종은 1993년 국제연합환경계획(UNEP)이 발표한 '생물다양성 국가연구에 관한 가이드라인'에서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방안으로 제시된 개념이다. 깃대종에는 시베리아호랑이·팬더·코알라·두루미 등과 같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종이 있는가 하면, 강원도 홍천의 열목어와 같이 한 지역에 국한되는 종도 있다. 멸종되었을 경우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기 때문에 종의 다양성 유지에 필수적인 동식물종인 핵심종(Keystone Species)과는 개념이 다르다. 각 지역의 생태적·지리적·문화적 특성을 반영하는 상징 동식물로서 한 종(種)을 보전함으로써 다른 생물의 서식지도 함께 보전할 수 있다. 외래 동식물이 확산되면서 토종 동식물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위해 환경운동단체에서 '깃대종 살리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운동은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생태보전활동으로, 지역마다 새롭게 깃대종을 선정하여 참여하고 있다. 단군신화로 한민족과 친근한 호랑이와 함께 한반도 생태계의 깃대종 역할을 해온 야생 반달곰이 지리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정부에 의해 2002년 공식 확인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환경보호와 함께 반달곰의 종복원사업이 계획되기도 했다. =========================== 旗杆種 용어설명 1993년 국제연합환경계획(UNEP)이 발표한 '생물다양성 국가 연구에 관한 가이드라인'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생태계의 여러 종 가운데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인식해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생물종을 통틀어 일컫는다. 이와 달리 생태계의 여러 종 가운데 한 종의 멸종이 다른 모든 종의 종다양성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종을 핵심종(keystone species)이라고 한다. 즉 생태계의 종다양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종으로, 불곰ㆍ수달ㆍ해달ㆍ코끼리ㆍ캐나다기러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깃대종과 구분되는 점은, 깃대종이 한 지역의 생태계를 대표하는 상징종이기는 하지만 이 종이 없어진다고 해서 생태계가 파괴되지는 않는다. 반면 불곰과 같은 핵심종은 그들이 잡아 먹는 동물의 밀도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시켜 다른 먹이 동물들의 서식처를 제공함으로써 군집을 구성하는 종다양성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종이 없어지는 것은 곧 생태계의 균형이 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88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지구상에서 가장 초현실적인 장소 댓글:  조회:4205  추천:0  2016-12-26
☆ 지구상에서 가장 초현실적인 장소 33곳 ☆ 1) 미국, 플라이 간헐천 2) 모리셔스, 수중 폭포 강한 해류가 바닷속으로 모래를 실어 내려가면서 특이한 '수중폭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3) 4) 남 아메리카, 로라이마 산 브라질, 베네수엘라, 가이아나 3국의 국경에 걸쳐있는 높이 2772m의 바위산입니다. 산 정상이 넓은 평지이고 측면은 등반이 불가능한 수직이라는 점이 매우 특이한데요. 무려 20억 년 전에 지층이 지각활동으로 밀려 올라온 것이라고 합니다. 5) 볼리비아, 살라르 데 우유니 (우기의 소금평원) 6) 중국, 텐즈산(천자산) 7) 바로 이런 멋진 풍경을 아바타에 가져오게 됩니다. 8) 핀란드, 북극의 감시병 9)  10) 중국, 루디옌 동굴 11) 아이슬란드, 스카프타펠 얼음동굴 빙하 속의 물이 흐르면서 생긴 얼음동굴입니다. 단단한 얼음들이 기포를 내뿜으며 대부분의 빛을  차단하고 파란색 빛만 남겨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합니다 12)  13) 미국, 앤텔로프 캐니언 미국 애리조나주에 있는 앤텔로프 캐니언은 암벽틈새로 물이 흐르면서 깊고 좁은 협곡이 되었습니다. 깊은 곳으로 내려갈 수 록 빛의 세기가 줄어들면서 아름다운 빛깔을 내는 것이라 합니다. 14) 루마니아, 비가 폭포 루마니아 사람들은 이 폭포를 "작은 협곡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이끼들 사이에서 흘러내린 물이 떨어져 8미터 짜리 호수가 되는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폭포 중 하나입니다. 15) 16) 몰디브, 별의 바다 (바드후 섬) 낮동안에는 평범한 해변처럼 보이지만, 밤이 되면 빛을 내는 식물성 플랑크톤들이 해변으로 몰려들면서 은하수같은 광경이 펼쳐집니다 17) 미국, 그랜드 프리즈매틱 온천 그랜드 프리즈매틱 온천은 미국에서 가장 큰 온천입니다. 미네랄이 풍부한 온천의 가장 자리에 미생물들이 자라면서  선명하고 화려한 색상을 자랑합니다. 18) 19) 나미비아, 데드블레이(Deadvlei) 이 사진은 초현실주의 회화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모래언덕 아래 '죽음의 계곡'에서 죽은 나무들을 찍은 사진입니다. 이곳에 한 때 번성했던 숲은 사막이 넓어지면서 사라져버렸습니다. 20) 러시아, 바이칼 호수의 청록색 얼음들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민물 호수입니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호수이기도 합니다. 바이칼 호수는 수심 40m깊이 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매우 깨끗한 호수인데, 겨울에 얼어붙은 호수에는 태양빛과 깨끗한 수질로 인해 마치  터키석 같은 청록색 빛깔의 얼음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21) 22) 예멘, 소코트라 섬 소코트라 섬에 사는 식물 중 3분의 1은 지구상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는 종들입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부채꼴 모양의 우산같은 용피나무 입니다. 23) 중국, 단샤지형 (간쑤성 장예시) 붉은 사암과 여러 광물이 2천 4백만년에 걸쳐 풍화되어 다채로운 색깔을 입었습니다. 자연이 바람으로 색칠해놓은 산들이 정말 멋진 광경을 선보입니다. 24) 우크라이나, 사랑의 터널(클레반) 이 기찻길을 하루에 세 번 기차가 운행하면서  수 년간 주변의 나무들이 기차모양으로 형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운행이 중단된 구간인데, 사랑의 터널이라는 이름으로 명소가 되었습니다. 25) 뉴질랜드, 반딧불 동굴 수천 마리의 반딧불이 동굴 천장에 붙어 공상과학 영화에 나올 법한 광경이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26) 27) 중국, 계단식 논 (허난성 위안양시) 계단식 논법은 하늘위에서 보면 놀라운 풍경을 만듭니다. 28) 29) 호주, 힐리어 호수 물속에 많은 박테리아와 조류에 의해 핑크빛으로 변한 호수입니다.  하지만 주변 생태계에 영향을 주진 않는다고 하네요. 30) 31) 터키, 파묵칼레 온천 수백만 년에 걸쳐 만들어진 온천은 얼핏보기에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힌 것 같습니다. 하지만 터키는 일년 내내 온난한 기후입니다. 사실 흰 눈과 얼음같은 주변 경관은 석회암입니다. 32) 33) 콜롬비아, 까뇨 크리스탈레스 강 광범위한 동식물의 서식지인 카뇨 크리스탈레스 강은 노란색과 빨간색, 녹색과 검은색으로 치장을 하고 세계에서 가장 예쁜 강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바위는 무려 12억 년 전에 생성되었다고 합니다. 34) 칠레, 파타고니아 대리석 동굴 부서지는 파도에 탄산 칼슘이 부서지면서 아름다운 소용돌이 모양의 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래 푸른 물과 어우러져 멋진 동굴 호수가 되었습니다. 35) 36) 북 아일랜드, 거인의 방죽길 37) 일본, 아오가 섬 (아오가시마) 아오가 섬은 일본에서 최남단 유인섬입니다. 화산섬 안에 또 화산이 있는 특이한 칼데라 지형인데, 상당히 특이한 지형이라고 합니다. 38) 39) 스코틀랜드, 핑갈의 동굴 거인의 방죽길처럼 핑갈의 동굴 외벽도  용암이 냉각하고 부서지면서 만들어졌습니다. 40) 41) 멕시코, 바닷속에 흐르는 강 42) 멕시코, 나이카 광산 광산이라 부르지만 자연적으로 형성된 수정동굴 입니다. 전 세계의 많은 동굴 애호가들의 버킷리스트에 았는 동굴인데, 15미터짜리 수정이 불규칙하게 바닥이나 벽, 천장에서 솟아나 있는 것이 43) 멕시코, 히든 비치 이 숨겨진 해변은 20세기 초 군사 실험으로 형성된 곳이라고 합니다. 외부에서 15미터 길이의 해저 동굴을 통해서 들어올 수 있다고 하네요. 44) 탄자니아, 나르톤 호수 소금 함량이 높은 호수인데, 소금을 먹고 사는 붉은 미생물들에 의해 붉은 빛이 강렬해졌다고 합니다. 보통 다른 동물들은 소금을 많이 섭취하면 석회화되어 돌처럼 변하는데 반해 이 호수의 미생물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네요. 45) 모리타니, 아프리카의 눈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에 난 모래 침식 지형입니다. 과학자들은 이곳을 오랫동안 운석 구덩이로 생각했다고 하네요. 46) 47) 아이슬란드, 고원의 오로라 아이슬란드의 고원은 낮에는 간헐천과 빙하, 분화구로 가혹한 환경을  보여주지만 밤이되면 멋진 오로라 현상으로 놀라움을 줍니다. 48)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호수   [출처] 지구상에서 가장 초현실적인 장소 33곳 |작성자 Kazu]   항상 건강하시고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소서!            
88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신비한 자연경관 댓글:  조회:6141  추천:0  2016-12-26
이 사진은 우리가 얼마나 놀랍고 독특한 행성에 살고있는지 다시한번 보여준다. 이렇게 신비하고 엄청난 자연광경을 어디에서 볼 수 있겠는가? 당신에게 가장 인상적인 사진은 무엇인가? 천둥번개가 무섭다면? "이곳"으로 절대 이사오지 말길. 이곳 베네수엘라의 리오 카타툼보(Rio Catatumbo)에서는 1년 중 160일은 하루에 10시간씩, 한시간에 160번 간격으로 천둥과 번개가 치기 때문이다!       인도양에 위치한 크리스마스섬(Christmas Island)에는 1,200만마리이상의 게가 서식하고 있다. 늦가을에 게떼가 짝짓기를 위해 숲에서 나와 바닷가로 이동한다. 번식을 위한 붉은물결의 집단이주는 이러한 장관을 이룬다!       바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살아있는 생물이다! 이 매력적인 해양생물은 칠레의 해변에 볼 수 있다.       파키스탄에 위치한 거미 서식지가 범람할 때, 이 기어다니는 생명체들은 나무를 은신처로 삼아 거미줄로 뒤덮어버린다.       이 특이한 구름층은 산악지형에 강한 풍류가 발생할 때 생기는 진동에 의해 형성된다.       얼어붙은 머리카락같이 보이지만! 사실 가느다란 얼음형태에 슈도모나스 시린가에(pseudomonas syringae)라는 박테리아가 덮힌것이다. 그 결과 얼음이 동그랗게 말린 형태가 되었다.        반짝이는 신비로운 초록빛 오로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광경중 하나이다. 오로라는 바람입자가 움직이면서 자기장을 벗어나 대기권으로 들어오면서 발생한다. 거기에서 가스원자와 만나 하늘을 아름답게 물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 사진을 한번 더 살펴보자. 강 안에 강이? 이 현상은 멕시코에서 발견된다. 더 무거운 입자가 강 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 강 안의 강 형태를 형성해 놀라운 광경을 보여준다!       이 바닷속 불빛은 플랑크톤이 물 안에서 움직이면서 발사하면서 바다를 파란카펫으로 물들인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이 천연 분화구는 "지옥으로 가는 입구(Gate to Hell)"라 불린다. 일렁이는 불꽃은 1971년에 분출된 후 계속 타오르고 있다!       이 엄청난 번개는 화산이 분출할 때 발생하는 많은 양의 에너지에 의해 발생하면서 숨막히는 광경을 연출한다!       최대 350kg까지 나가는 바위들이 켈리포니아 데스 벨리(Death Valley)에서 사람이나 기계없이 스스로 돌아다닌다. 과학자들은 최근에 그 원인을 밝혀냈다. 겨울철 발생하는 서리와 얼음이 지면을 너무 매끄럽게 만들어서, 바위가 모래사장에 덮힌 얇은 살얼음위로 미끌어진다는 것이다.        누가 이런 그림을 그려 자연을 훼손했을까? 그 누구도 아닌 대자연이다! 무지개빛 유칼리나무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자라며, 나무껍질이 죽으면서 다양한 색깔의 씨를 생성한다. 그로 인해 여러 색깔층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연한 녹색이 진한 녹색으로 바뀌고, 또 파란색, 보라색, 분홍색, 주황색, 빨간색으로, 마침내 갈색으로 바뀐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카와 이젠(Kawah Ijen)화산에서 솟아오르는 이것은 파란색 용암이 아니다. 이는 1,000도 가까이 되는 용암이 대기의 산소와 만나 나타나는 반응이다. 이는 순식간에 화염을 일으켜 폭발한 후, 화산 주위로 액체가 되어 흐르면서 어디에서도 볼수 없는 장관이 펼쳐진다!       이 탄자니아에 있는 소금호수는 염분이 너무 강해 동물시체를 끔찍한 소금형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오싹하면서도 매력적인 광경을 말이다. @@ 무지개 나무와 스스로 움직이는 바위, 그리고 강 안의 강, 이 모두는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가 지닌 놀라운 신비이다! 이 사진들을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면, 주위 사람들과 이 경이로운 광경을 공유해보자.     
88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지구상 특이한 동물 아시나ㅛ... 댓글:  조회:6815  추천:0  2016-12-26
1. 티베트 모래여우       2. 긴귀 날쥐       3. 애기사슴(쥐사슴)       4. 온두라스 흰박쥐       5. 넓적부리황새(슈빌)       6. 리프테일 게코(Leaf-tailed Gecko)       7. 유리개구리       8. 금빛원숭이       9. 오렌지거북거미         10.  게레누크(Gerenuk)       11. 코주부원숭이       12. 갈기늑대       13. 담요문어         14. 공작 갯가재           15. 아프리카 숲살모사       16. 동부긴목거북       17. 페니스 스네이크(Atretochoana)       18. 스캇토플래인(Scotoplane)       19. 대머리 우아카리       20. 헤어리 프로그피쉬(Hairy Frogfish)                
  몸길이 40∼85㎝, 어깨높이 20∼36㎝, 몸무게 1.7∼15㎏이다. 반추동물 중에서 매우 작은 편에 속하므로, 쥐사슴·작은사슴이라고도 한다. 몸빛깔은 갈색 또는 붉은색이며, 종에 따라서 흰 반점이나 세로줄무늬가 있다.  머리는 작고, 주둥이는 가늘며 뾰족하다. 몸은 땅달막하여 등이 둥글고, 허리가 높다. 네 다리는 짧아서 빠르게 돌아다닐 수 없으며, 발가락이 4개 있는데, 땅에 닿는 것은 가운데의 셋째발가락과 넷째발가락이다.  열대 원시림이나 바위가 많은 곳에 서식하며, 주로 식물성 먹이를 먹는다. 겁이 많고 사람 눈에 잘 띄이지 않으며, 야행성이다. 번식은 한배에 1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우간다 서부에 물애기사슴(Hyemoschus aquaticus)이 분포하고, 인도·스리랑카의 삼림지대에 인도애기사슴(Tragulus meninna), 동남아시아에 자바애기사슴(T. javanicus)·큰애기사슴(T. napu) 등 곳에 분포.  --------------------------------------------------------------------------------   혹시 쥐사슴 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최근 영국 체스터 동물원에서 이나라 최초의 필리핀 쥐사슴이 탄생해 화제가 되고있다고 하는데요. 필리핀 쥐사슴은 작은사슴과에 속하는 우제류의 일종으로, 몸길이는 40~50cm 이며 키는 18cm 정도 밖에 안된다고 해요. 정말 장난감 같죠 ㅎㅎ         주로 야행성인 이 필리핀 쥐사슴은 털빛이 전체적으로 진하고 어두운 갈색을 띠지만 배 부분은 좀더 밝은 편이고, 목 부분은 전반적으로 검은색이지만 특유의 흰색 세로줄 무늬가  3개가 있으며 이는 턱밑까지 뻗어있습니다.         필리핀 쥐사슴은 수명이 14년 정도이고 생후 5개월부터 번식 연령에 접어 든다고 해요.... 강아지보다 빨리 번식을 시작하는군요.. 너무 귀엽게 생기지 않았나요??           그런데 필리핀 쥐사슴의 서식지인 동남아시아에서 횡행하고 있는 대규모 삼림벌채탓에 지난 2008년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었다는데요. 거기에 필리핀 일부 지역에서는 이 작은 사슴을 식용으로도 사용한다네요.. 아니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걸 ...... 불쌍해...   사람에 의해서 동물들이 멸종되고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사실이죠.... 이제는 지키고 보호하는것에 신경을 써야할텐데요... [출처] 세계에서 가장 작은 사슴, 쥐사슴 알고있나요?|작성자 바구니씨    
879    로신과 평화의 비둘기 댓글:  조회:3918  추천:0  2016-12-25
        서거하기 1개월 전, 루쉰 선생은 유언으로 ‘(死)’라는 글을 써서 남겼다. 그 끝부분에 “유럽인이 죽음을 앞두고 타인에게 자신의 용서를 바라며 자신도 타인을 용서하는 의식을 한다는 이야기를 상기했다. 내 적은 상당히 많다. 만약 한 청년이 내게 그 같은 질문을 한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나는 잠시 생각한 뒤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마음대로 해라. 나는 절대 한사람도 용서할 수 없다!”라고 적혀 있다. 이 집념! 이 기백! 이 분노! 서거하기 이틀 전에도 투쟁의 글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전날 아침에도 “신문과 안경을 갖다 주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꼼꼼하게 신문을 읽었다고 한다.   내 가슴에는 은사 도다 선생님의 “추격의 손을 늦추지 마라!”라는 유언이 지금도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혁명에 ‘이것으로 끝이다’는 것은 없다! 영원히 전진해야 한다! 결단코 추격의 손을 늦추지 말라! 이 말대로 나는 끝까지 투쟁했다. 이것이 내 긍지다.   루쉰은 말한다. “‘혁명을 성취했다’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사실 ‘혁명은 아직 성취하지 못했다’ 혁명에는 끝이 없고 만약 이 세상에 실질적으로 ‘이것이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세상은 더는 움직이지 못한다.”   멈추면 혁명은 거기서 끝난다. 영원히 계속되는 변혁이 바로 ‘혁명’이다. 따라서 후계의 청년이 중요하다. 혁명이란 영원한 향상이다. 영원한 성장이다. 영원한 투쟁이다. ‘영원한 혁명’이 바로 루쉰 선생의 삶이다.   평화의 비둘기여 날아라   루쉰 선생과 일본인을 둘러싼 하나의 일화가 있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은 허위사실을 조작해 상하이 공격을 시작했다. (제1차 상하이사변) 거리는 파괴되고 많은 시민이 학살됐다. 이때, 자신의 몸을 바쳐서라도 상처 입은 중국인들을 구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 의료단을 결성해 상하이로 건너간 일본인이 있었다.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동양에서 최초로 로봇을 만든 니시무라 마코토 박사다.   니시무라 박사는 상하이 사변의 격전지인 ‘싼이리(三義里)’에 도착했을 때, 아무것도 먹지 못해 움직이지 못하는 한 마리의 비둘기를 발견했다. 박사는 이 비둘기를 간병해 오사카 도요나카 호즈미에 있는 저택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만약 일본의 비둘기 사이에 새끼가 태어나면 평화의 사절로 상하이에 보낼 생각이었다. 비둘기는 주은 곳의 이름을 붙여 ‘싼이’라고 불렀다. 싼이는 처음에는 건강해진 듯했으나 안타깝게도 끝내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니시무라 박사의 낙담을 위로하고 또 싼이의 죽음을 애도하며 박사의 집 정원에 돌로 무덤(싼이총. 三義塚)을 만들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머나먼 상하이에서 와서 호즈미에서 죽었으니 우리가 무덤을 만들어 주자!”   싼이총의 내막을 안 루쉰 선생은 ‘싼이탑’이라는 제목의 시(詩)를 썼다. ‘탑’이라는 글자에서 마을 사람들에 대한 최고로 존경하는 마음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둘기가 잠에서 깨면 옛 정위새(전설 속의 새)처럼 돌을 입에 물고 동해를 메우려고 할 것이다. 중일 양국의 투사들은 견고한 마음으로 협력해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고 있다. 대재난의 파도를 건넜을 때 비로소 양국의 형제가 있다. 우연히 만나 한번 웃고 나면 그때 비로소 옛 한은 소멸할 것이다.” 이 ‘싼이총’은 도요나카 시 중앙 공민관에 옮겨져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2002년에 루쉰 선생의 훌륭한 시비(詩碑)도 건립했다. 만대에 걸친 중일우호를 위한 희망을 지키고 전하는 뜻있는 분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다.  
878    중국의 대문호 로신 노벨문학상을 거절했다?!... 댓글:  조회:3820  추천:0  2016-12-25
  中 루쉰 라오셔 션총원 등 노벨문학상 못받은 이유 日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漁父之利,  무라카이 하루키는 漁父之害?   老舍   沈從文   중국 작가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에 가장 근접했다가 사망해 아쉽게 노벨상을 놓친 것으로 알려진 션총원. 중국의 대문호였던 루쉰(魯迅)과 라오셔(老舍), 그리고 션총원(沈從文) 등은 왜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을까?   중국의 모옌(莫言)이 중국 국적을 유지한 중국인으로서 사상 처음으로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뒤 중국의 현대문학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루쉰 라오셔 션총원 등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작가마다 작풍(作風)이 다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지만, 이들 3명은 노벨문학상을 받기에 충분히 수준 높은 작품을 많이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통신은 17번이나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 주임을 맡았던 스웨덴의 유명한 시인, 셸 에스마크(82)가 루쉰과 라오셔, 션총원 등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본인의 사양(루쉰)과 죽음(라오셔 션총원)으로 수상하지 못했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에스마크는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노벨문학상 선정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중국어를 모어(母語)로 쓰는 펄 벅(중국명 사이쩐주;賽珍珠)이 『대지(The Good Earth)』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1938년까지 아시아 작가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1930년대에 아시아 작가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며 루쉰을 주목한 뒤 ‘정부가 아닌 민간 통로’를 통해 루쉰에게 노벨문학상 후보로 선정되는 것에 대해 문의한 결과, 루쉰은 ‘노벨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안된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고 설명했다. 루쉰은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나는 중국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직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30여년이 지난 1968년에 중국의 라오셔는 노벨문학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에스마크는 “위원회는 1960년대에 아시아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을 주기로 내부방침을 정한 뒤 6,7년 동안 치열한 토론을 했다”며 “그사이 라오셔가 1968면에 사망하는 등 많은 작가가 사망했으며 그해 노벨문학상은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에게 돌아갔다”고 밝혔다.    『1Q84』등으로 유명한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모옌과 마지막까지 경합했지만, 모옌에 밀린 것은 1968년의 상황이 감안된 것 아닌가 하는 해석이 나오는 부분이다.    중국 작가로 노벨문학상의 문턱까지 가장 가깝게 접근했던 사람이 션총원. 에스마크는 “1988년에 션총원은 후보는 물론 초기 선정에 포함됐으며 5명의 최종 후보에 올라 선정위원으로부터 가장 호감을 받았다”며 “하지만 그는 노벨문학상이 발표되기 5개월 전인 5월에 사망해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에스마크는 “중국은 당시(唐詩)와 송사(宋辭)에 이어 서유기와 홍루몽 등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전통을 갖고 있다”며 “올해 문학상을 받은 모옌의 작품은 중국의 고대 민간 서사(敍事)에 서구의 근대성을 융합시켜 세계로 나아가는 데 성공한 것이 평가받았다”고 설명했다.    
‹처음  이전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