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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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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너의 령혼을 다 알게 되면 눈동자를 그려넣어줄께..." 댓글:  조회:4234  추천:0  2017-05-01
      그 유명한 시 애드가 앨런 포의 ‘애너벨 리’다. 작가 애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 : 1809~1849)는 시인이자 소설가로 영미문학사의 거목이다. 그러나 대단한 프로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철저히 불행으로 점철되었다. 절대빈곤과 조실부모, 비관주의, 알코올 중독, 요절 등. 포는 대학시절부터 술과 도박, 그로 인해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언제부턴가 그는 술을 마셔야만 글을 쓸 수 있었다. 그의 알코올 의존증세는 결혼 후에도 나아지지 않고 악화되었다. 어린 나이에도 온갖 궂은일을 다하며 생계를 책임지고 남편을 뒷바라지했던 착한 아내 클렘. 그녀는 빵보다 술을 더 필요로 하는 남편을 위해 밤낮으로 술을 사 날라야 했다. 결국 결혼 11년 만에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급성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고 죽고 마는 클렘. 자신의 전부였던 아내를 그렇게 가엾게 떠나보내고 포는 절망과 한탄 속에서 더욱 술독에 빠져 지냈다. 얼마 후, 재혼하기 위해 고향으로 간 그는 어느 거리에서 불현듯 죽음을 예감한다. 그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마을에서 열린 파티에서 그는, 허기진 듯이 술을 마시다가 결국 인사불성이 되어 죽고 만다. 그의 나이 이제 40세, 아내 클렘이 떠난 지 정확히 2년 반만이었다. 제아무리 술꾼, 술꾼 해도 브람스처럼 지독한 술꾼도 드물 것이다.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 1833~1897)는 술과 담배, 커피를 유난히 좋아했던 음악가였다. 중후한 외모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술 관련한 그에 대한 평가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지저분하다. 그는 특히 위스키를 좋아했는데 다른 사람이 있든 없든, 절친한 사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술이 위스키 잔에 넘치면 무지 아까워하면서 잔과 탁자를 혀로 핥았다고 한다. 품격에 손상이 되는 경박한 행동이었지만 브람스는 제 품격보다도 위스키가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그가 술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스승인 작곡가 수만의 아내 피아니스트 클라라 수만을 평생토록 짝사랑해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여자를 제 목숨보다 더 사랑했지만, 스승의 아내였기에 함께 할 수 없었던 사무치는 절망을 한 잔의 술로 달랬으리라. 클라라가 사망하자, 브람스는 밤낮을 술로 보내다가 결국 다음 해에 간암으로 죽고 만다. 브람스는 죽기 직전까지도 술을 원했다. 사망 2시간 전 친구에게 와인을 부탁한 그는, 술을 마시고 “좋았어. 자넨 정말 친절한 친구야. 고맙네”하며 좋아했다고 한다. 정열적인 색채와 격렬한 필치로 독특한 색채 마법을 보여주는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 1853년~1890년). 그와 ‘압생트’라는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였다. 압생트는 본래 알코올 함량 80도 내외의 독한 술이다. 당분이 전혀 없고 향초를 원료로 해 에메랄드빛의 술이다. 가격이 엄청 저렴했기에 ‘초록 요정’, 혹은 ‘초록 마주’로 불리며 가난한 예술가나 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환각을 일으켜 영감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어,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술에 취해 시나 그림을 그렸다. 에밀 졸라와 피카소, 헤밍웨이 등이 압생트를 사랑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고흐가 이 술 때문에 자신의 귀를 잘랐는가 하면 시인 랭보는 에메랄드빛 마주의 취기를,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하늘하늘한 옷’이라고 예찬하기도 했다. 압생트의 중독자였던 고흐가 정신병원에 입원 중일 때,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고 주치의가 나무라자, 그는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고 한다.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라오. 올 여름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나로선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소.” 고흐 그림의 특징이 과도할 정도로 밝은 노란색을 많이 사용한다는 것과 회오리치는 빛의 모양 등인데, 이게 바로 고흐가 즐겨 마셨던 압생트의 후유증 때문으로 추측된다. 약쑥을 증류해 만든 압생트에는 시신경을 손상시키는 테레벤이라는 물질이 들어있다. 그로 인해 그가 시신경이 손상되어 황시증에 걸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인물의 목과 얼굴을 길쭉하게 늘어뜨린 비대칭 구도의 그림을 주로 그린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 1884~1920). 그의 그림은 우수에 젖어있다. 모딜리아니도 술을 좋아한 화가지만, 그가 원래 술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매사 격정적이고 즉흥적이었던 첫 연인 베아트리스를 만나면서부터 그녀와 함께 위스키와 진을 즐겨 마셨는데 이 때문에 그의 술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그녀와 동거한 2년간의 폭풍우 같은 시간 내내 그는 술과 아편에 절어 있었다. 그는 몽마르트 언덕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미술담론을 나누기보다는 자유스럽고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술을 마시는 걸 더 즐겼다. 그래서 그의 36년 동안의 짧은 삶은 가난과 술, 아편, 결핵 등으로 망가졌다. 이로 인해 그의 두 번째 연인이자 영원한 피앙세 잔느는 밤낮으로 술을 사 날라야 했다. 모딜리아니는 절망했다. 천사 같은 아내가 자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당시 불치병이자 1종 전염병인 폐결핵에 걸린 자기 때문에 친척집으로 보내진 어린 딸을 볼 수 없음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술에 의지해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결국 모딜리아니는 36살의 나이에, 딸이 있는 이탈리아를 그리워하며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리고 며칠 후, 그의 아내 잔느도 둘째 아이를 잉태한 채 그의 뒤를 따랐다.   술술풀어가는 술과 예술 이야기… ㅡ"알코올과 예술가"  술은 예술가에게 숙명처럼 보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가들은 술을 통해 영감을 얻기도 하고, 술의 힘을 빌려 창작의 고통을 감내했으며 술에 대한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알코올 중독 상태에서 글을 쓰는 능력을 지닌 예술가였다.  을 쓸 때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하루에 포도주를 6ℓ씩 마실 정도였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술을 마셨다"는 뒤라스는 "그런 상태의 나 자신을 혐오하는 게 좋았으며 그럼으로써 일종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소설가가 펴낸 는 이렇듯 작품 혹은 삶을 통해 술과 깊은 관계를 맺었던 예술가들을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은 알코올 중독이라는 말이 사전에 등록된 1858년에 나온 샤를 보들레르의 산문시집 을 기점으로 현대 작가들의 음주 형태와 태도, 그리고 그것이 작품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차례로 살펴본다.  에드거 앨런 포, 제임스 조이스처럼 지독하게 술에 탐닉했던 작가와 취기의 힘을 빌려 창작했던 이들, 반대로 금주를 선! 택한 작가들도 등장한다.   술에 대한 작가들의 예찬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시인 랭보는 "푸른빛 도는 화주가 가져다 주는 취기야말로 가장 우아하고 하늘하늘한 옷"이라고 했으며 보들레르는 "끊임없이 취해야 한다.  술이건 시건 덕성이건 그대 좋을대로 취할 일이다"라고 말했다.   뒤라스처럼 술을 통해 예술적 성취를 이뤄낸 또 다른 예로 영국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을 들 수 있다.  술을 마신 다음날 오전에 그림을 그리는 습관이 있었던 베이컨은 보름간 만취와 숙취의 상태를 반복하며 를 완성했다.   술이 작품 성향이나 삶을 바꿔 놓기도 했다.  젊은 시절부터 알코올 중독이었던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엘로이는 치료를 받고 금주로 돌아서면서 작품세계도 환상에서 현실로 바뀌었다.  위스키를 폭음함으로써 자신의 지성을 확인하고, 불안감을 진정시켰던 의 미국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은 술을 끊은 뒤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들었다.   술에 취해 걸작을 만들어낸 작가가 있는가 하면 술에 대한 탐닉으로 20년간 절필한 앙투안 블롱댕 같은 예술가도 있었다.  저자는 "술은 ? 링冗뭏?이후 문학의 혁신에 가장 크게 기여한 동인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술은 인간이 의식의 분열을 인식하는 데 동참했으며 도덕적 질서를 흔들고 폭력과 성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1116    [쉼터] -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술은 "예술" 댓글:  조회:6184  추천:0  2017-05-01
술과 예술의 놀라운 밀월 /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술은 ‘예술’   글ㅣ홍경한 월간 퍼블릭아트 편집장     프란츠 할스   미술사를 보면 술의 힘을 빌려 걸작을 만들어낸 예술가가 있는 반면 타고난 천재성을 술로 마셔버린 불행한 예술가들도 적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요하네스 베르메르나 반 리즈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프란츠 할스(Frans, Hals), 드 호흐(Pieter de Hooch), 반 고흐(Vincent van Gogh),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oer),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에드가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 Gas),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등 숱하게 많은 예술가들은 술 자체를 화면에 담거나 취흥에 젖어 강한 인상을 심어 넣었으며 어느 경우엔 자신이 아예 그 쓰디 쓴 독주를 들어 술 속에 인생을 묻기도 했다.   이처럼 예술가에게 있어 술이란 떨쳐버리기 어려운 매혹적인 요소이자 동시에 예술을 꽃피우는 발화점이었고 때론 묘약이 되거나 독이 되어 나타나곤 했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많은 예술가들이 술에 탐닉했을까. 왜 술은 그렇게 많은 그림들과 문학작품에서 주요 소재로 다뤄졌을까. 예술에 있어 술은 과연 독일까, 약일까? 장관 인선도 영 마음에 안 들고 비정이 판치는 요즘,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여 유독 술 한 잔이 그리운 시대, 모처럼 술에 관한 이야기 좀 해보자.     예술가에게 ‘술’은 묘약인가 독약인가  ‘술, 영감을 불어넣는 묘약인가 파멸의 독약인가.’ 예술가와 술이라는 두 단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스치는 질문의 하나가 바로 이것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은 술이 없으면 못 살 것이라는 편견이 강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마신다고들 여긴다. 이를 100%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딱히 틀린 생각이라고 단정하기도 곤란하다. 작금엔 예전과 달리 건강을 생각해 금주를 하는 예술가들도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작가들은 보통사람들의 경우보다 많은 술을 취하고 그것을 예술의 발로로 치부하는 경향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매일 술을 마신 후 다시 그 공병을 팔아 물감을 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술을 마셔야만 그림이 술술 풀린다고 하는 부류, 술을 너무 좋아해 그림 어디에서든 술병을 등장시킨다는 작가, 심지어 술이 없으면 아예 그림이나 글을 그리거나 글을 쓸 수 없다는 사람들에 대한 후일담은 잘 알려져 있는 스토리 중 하나이다.    어떤 이들은 예술가들이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싶으면 농담 삼아 작가들을 만나려거든 수요일 밤 늦게 인사동에 나가면 된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불과하지만 경험해 보면 이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작업실에 전리품처럼 늘어서있는 술병들이 많을수록 그의 작가적 기질도 눈여겨 봐야한다는 비과학적인 주장도 일견 타당성이 없지 않다. 이것만 봐도 역시 예술가들은 술을 즐기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어찌되었든 ‘늘 술에 절어 있는 예술가’라는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이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니라는 얘기가 성립된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왜 그토록 쓰디 쓴 술을 찾았던 것일까. 답은 쉽다. 즉 이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그만큼 이기기 위한, 견디기 위한 조건들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다.   일부를 제외하곤 어느 누구도 압박하는 경제적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창작의 고통은 늘 머리를 짓누르는 면류관과 같았다. 작가들은 이를 이기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술을 즐겼다. 다만 일반인들과 예술가의 차이라면 범인들이 숙취에 못 이겨 제대로 출근조차 못하는 신체적 무력함에서 그친다면 이와는 달리 예술가들 대부분은 술에서 빚어진 에너지를 창조력과 깊은 관계를 맺는데 활용했다는 것에 있다. 따라서 예술가들이 술을 좋아했던(하는) 것은 술을 통해 현세를 잊고 예술적 영감의 세계로 비상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술에 취하고 예술에 취한 사람들 지금도 심심찮게 들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국내외를 막론하고 술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꺼리를 생산해낸 예술가들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3대 화가이지만 술이 있어야 비로소 그림을 그렸다는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은 술과 관련해 역대 가장 유명한 국내 작가이다. 최민식이 영화 에서 호연했던 것처럼 실제의 그도 권위나 금전보다는 좋은 술과 인격적인 대우에 따라 그림을 그려주곤 했다. 장승업은 좋은 술을 실컷 마시고는 취흥이 도도한 가운데 기운 생동하는 명화들을 그려냈으며 일생의 대부분을 오직 술과 예술, 그리고 방랑으로 일관했다.   또한 훌륭한 작품을 600여점이나 남겼지만 일본으로 떠나보낸 아내와 아들을 잊지 못해 허구한 날 술병을 기울였던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의 비루한 삶은 우울증을 이기는 약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안쓰러운 경우로 남아 있으며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가 피난시절 그림을 판매한 돈을 모두 어려운 시절을 함께 했던 동료 작가들과의 술값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낭만적인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고 송혜수 증언) 이뿐이랴, 술에 취하면 시원시원한 발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장기였다는 예술적 감성이 뛰어났던 양수아(1920~1972)는 우리나라에 앵포르멜(Informel)을 전개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가난과 빨치산 화가라는 분홍글씨로 인해 살기 위해 술을 마셨다고 한다.    자주 마셔 잔의 밑바닥에 진주와 같이 아름다운 광택을 보여주는 펄 어니언이 가라앉은 우아한 칵테일의 이름으로 더 유명해진 영국의 궁정화가 ‘리차드 기브슨(Richard Gibson)을 비롯해 서양에선 지독한 외로움과 광기를 억누르기 위해 압생트를 즐겼던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늘 가난과 외로움에 쪼들렸던 화가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는 찬란한 노란색도 압생트에 들어있는 산토닌(santonin)이란 성분이 신경을 손상시켜 이른바 환각 증세를 일으켰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을 만큼 술에 의지하는 정도가 남달랐다. 흔들거리는 거리, 물결이 일듯 요동치는 독특한 화풍 뒤에도 그가 즐겨 마셨던 술 ‘압생트(Absinthe)’라는 싸구려 술이 존재한다. 평소 그림 한 점 변변하게 팔지 못하고 스스로 못생겼다는 자책에 시달리며 사창가를 드나들던 고단한 삶을 영위하던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한 잔의 술뿐이었고 19세기를 살다간 여러 가난한 작가들처럼 그에게도 이 ‘악마의 술’이라고 불렸던 독주는 현실도피를 위한 인기 있는 해방구였던 셈이다.   그 외에도 역사상 적지 않은 예술가들이 이 술에 심취해 예술을 논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해 2002년 출판된 프랑스의 젊은 소설가 ‘알렉상드르 라크루아’가 집필한 역동적인 저서 를 보면 보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라크루아가 저술한 책에는 우리가 궁금해마지않던 알코올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소설가, 시인, 화가, 철학자들이 알코올과 예술가들이 주연으로 등장하고 그들 간 유기적이고 신비로운 관계가 적나라하게 규명되어 있다. 특히 알코올과 예술과 술의 매우 끈적한 관계를 유추하게 함은 물론 그 취기의 경험이 예술가에게 미친 영향을 작가별 시대상과 작품의 특성들을 아울러 흥미진진하게 서술해 놓고 있다...   중국 최고의 고전 시인은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입니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 알고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 모두 당나라 사람인데 시풍은 매우 달랐다고 합니다.   이태백이라고도 불리는 이백(李白)은 주로 호방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로 자연과 인생을 노래했다고 합니다.   두보(杜甫)는 신중한 태도로 나라에 대한 충성과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가족에 대한 애정을 노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두 사람은 모두 술을 좋아했다는 점입니다. 술에 취해 채석강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남겨질 정도로 이백이 술을 좋아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후세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백보다는 두보가 훨씬 더 술꾼이었다고 합니다. 시 속에 나타난 것만 보아도 1050여 수의 이백의 시 중에서 16%가 술을 언급한 것에 비해 두보는 1400여 수의 시중에서 21%가 술에 관한 것이라고 합니다.   술을 마시는 방법도 달랐다는데요.   이백은 술을 즐기면서 마셨지만 두보는 술에 원수진 사람처럼 마셨다고 합니다. 두보가 일단 술을 마시면 완전히 취할 때까지 2차, 3차를 가고 말에서 떨어져 다쳤을 때도 병 문안 온 친구와 술을 마셨다고 하니...   말년에 당뇨와 폐병으로 고생할 때도, '흰머리 몇 개 났다고 술을 버릴 수야 없지 않는가'하고 노래한 두보는 59세에 힘든 방랑 생활을 끝내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1115    술에서 문학예술작품 제작의 령감을 못얻는다?... 얻는다!... 댓글:  조회:6630  추천:0  2017-05-01
목차 술 제조의 전통 술의 종류와 음주 풍속 술의 노래 술집 풍경 술 마시는 사회 금주령의 시행 술 제조의 전통 술을 언제부터, 어떻게 만들었는지 확실한 건 알 수 없다. 하지만 『삼국지』 「위지동이전」, 『제왕운기(帝王韻紀)』의 동명성왕 설화, 김유신과 천관의 설화 등에 술과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술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소주(燒酒)는 고려 후기에 몽고의 영향으로 제조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술의 원료가 멥쌀에서 찹쌀로 바뀌고 발효기술이 발달하면서 질 좋고 다양한 술들이 제조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의 술은 지역마다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술을 만드는 방법도 다양해졌는데, 약재를 이용한 이강주(梨薑酒)와 죽력고(竹瀝膏), 양조주와 증류주를 혼합해 산패를 방지할 목적으로 개발된 과하주(過夏酒) 등이 제조되었다. 『해동농서』1) 에서는 구황작물인 고구마를 술 만드는 원료로 소개하고 있어 고구마 전분을 이용한 술 제조 방법을 알려주는 효시가 되었다. 술은 만드는 재료와 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크게 과일이나 동물의 젖과 같이 당분을 함유한 원료를 효모로 발효시킨 과실주나 유주(乳酒), 누룩이나 맥아로 당화시킨 곡물 양조주로 나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곡물 양조주가 주종을 이루었는데, 누룩은 국(麴)이라 하여 곰팡이 균사에 덮여 썩은 것을 말하며, 얼(蘖)은 보리를 물에 담가 싹을 틔운 것으로 술을 빚는 데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여러 책에는 누룩을 사용해 술을 만드는 방법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누룩의 형태는 크게 분곡과 조곡으로 나뉘는데, 분곡은 밀가루로 만들었고 약주(藥酒)나 과하주용으로 사용되었다. 조곡은 밀을 세 조각으로 쪼개어 얻은 가루와 밀기울을 함께 써서 만든 것으로, 탁주(濁酒)나 소주용으로 사용되었다. 소주용 조곡에는 옥수수 · 콩 · 팥 · 보리 등을 섞은 것과 귀리로 만든 것, 소주 지게미에 쌀 등을 섞은 것이 있었는데, 충청도와 경상도에서는 조곡과 밀가루를 일정 비율로 섞어 체에 내린 나머지로 만들었으며, 함경도에서는 귀리 · 겉보리 · 피 등을 술지게미와 섞어서 찐 것을 원료로 삼았다. 그런데 원재료와 제조법, 그리고 모양에 따라 누룩의 이름이 달랐으며 술의 이름도 달랐다. 대표적으로 진면국(眞麵麴), 요국(蓼麴), 녹두국(綠豆麴), 추모국(秋麰麴), 미국(米麴), 이화주국(梨花酒麴), 동양주국(東陽酒麴), 홍국(紅麴), 신국(神麴) 등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밀가루, 쌀, 녹두, 솔잎, 연꽃, 도꼬마리, 담죽의 잎, 찹쌀 등을 재료로 했다. 이 재료를 단독으로 하거나 섞은 뒤 나름대로의 방식에 따라 술을 제조했다. 16세기 초까지 누룩이 매매되었는데, 중종 때에는 도성 내 7, 8곳의 시장에서 누룩을 팔았다. 하루에 거래되는 양도 700~800문(文)에 이르렀으며, 술을 빚는 데 들어가는 쌀도 거의 1,000여 석이나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누룩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명산지가 형성되었다. 사찰에서 누룩을 만들던 전통은 고려 때부터 이어졌는데, 동래 범어사와 양산 통도사의 누룩이 유명했다. 일반 민가의 것으로는 평양과 원산의 만두형 누룩이 있었다. 그밖에 곱게 가루를 내어 탁주나 약주용으로 두루 쓰인 고양군 공덕리의 누룩, 절구 모양의 남한산성 누룩, 타주(馱酒, 질이 좋지 않은 술)와 약주용인 경북 위천의 누룩, 선산의 분곡, 온양과 평택의 누룩, 경북 오지의 각형 누룩, 전남 목포의 3홉 크기의 누룩 등이 있었다. 대한제국 시기까지도 농가에서는 부업으로 누룩을 조금씩 만들어 시장에 갖고 나가 팔았다. 그러나 일제의 강제 합병 이후 세금 확보와 통제를 위해 누룩 제조에 면허제를 시행하면서 전통술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신식 술이 등장했다. 그 결과 누룩의 형태도 바뀌었다. 술의 종류와 음주 풍속 조선시대에는 질병 예방, 건강 추구, 장수 기원, 혼인, 기타 연회에서 술을 이용했다. 노동 과정에서 흥을 돋우거나 문학예술작품 제작에 영감을 얻기 위해, 그리고 친목 도모를 위해 술을 이용하기도 했다. 또한 각 절기에 맞게 술을 빚어 때에 맞춰 마셨으며, 술의 명칭도 달리 붙였다. 이는 건강 특히 불로장생과 벽사(辟邪) 관념 등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보름날 이른 아침에 청주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했던 귀밝이술, 무더운 여름을 탈 없이 날 수 있는 술이라는 뜻의 과하주 등이 대표적인데, 이것들은 약효를 지닌 술로 여겨졌다. 야연(野宴) 소나무 아래에 문인들이 모여 운취 있는 연회를 열고 있다. 이런 자리에는 항상 술이 빠지지 않는다. 아래쪽으로 술병을 들고 오는 어린아이도 보인다. 〈행려풍속도병〉 부분, 김득신, 호암미술관 소장. 중국에서도 술이 약으로 쓰인다는 의미에서 약주라 했다. 명대의 학자 이시진(李時珍)은 『본초강목(本草綱目)』이라는 의서에서 술을 이용한 처방들을 소개했는데, 이때 약주는 질병을 예방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장수를 기원하는 술로는 율무쌀주(薏苡仁酒), 천문동주(天門冬酒), 지황주(地黃酒), 구기주(枸杞酒), 복령주(茯笭酒), 황정주(黃精酒) 등이 있었다. 중국의 주조법은 조선의 주조법에도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의 약주는 술을 빚은 단지에서 얻은 말갛게 익은 술이나, 용수2) 를 박아서 떠낸 맑은 청주를 지칭했다. 또 소주 등에 약재를 넣은 술을 의미했다. 술이 약주라고 불리게 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17세기 인조 때의 문신 서성(徐渻)은 호가 약봉(藥峰)이었는데, 그의 집안에서는 좋은 청주를 빚었다고 한다. 그의 집이 약현(藥峴)에 있었으므로 그의 집안에서 빚은 술을 약산춘(藥山春)이라 했고, 사람들은 이를 약주라고 불렀다 한다. 약주 외에도 탁주가 있었다. 손님이 방문하거나 갑작스런 상을 당하면 속성으로 술을 빚어 손님을 대접해야 했다. 이때 제조된 술은 투명한 윗부분과 탁한 아랫부분으로 나뉘는데, 윗부분을 청주라 하고, 가라앉은 아랫부분을 탁주 또는 막걸리라고 했다. 그런데 탁주에 대해 다르게 설명하기도 한다. 누룩과 술밥을 잘 섞어 담근 술을 그대로 고운 체로 거르면 그 색깔이 뿌옇고 흐려서, 이를 탁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설명은 쌀누룩으로 만든 이화주 같은 술을 탁주라 부르고, 밀누룩으로 빚은 것을 탁배기라 부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명칭은 같아도 술의 맑은 정도에 따라서, 또 재료 자체에 따라서 탁주가 뜻하는 내용은 달랐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탁주는 술 단지 윗부분의 맑은 술을 퍼낸 뒤 밑부분에 가라앉은 술을 휘젓거나 물을 타서 마시는 것으로, 흔히 막걸리라고 부른다. 약주가 고급술에 해당한다면, 막걸리는 그야말로 일반 백성이 즐길 수 있는 값싼 술이었다. 김홍도의 〈주막〉은 주막에서 국밥을 팔면서 술도 함께 파는 그림이다. 이때 사용된 술잔의 형태와 양을 보면 그 술은 틀림없이 막걸리였을 것이다. 주막 조선시대 주막 풍경이다. 이때 사용된 술잔의 형태와 양을 보면 그 술은 틀림없이 막걸리였을 것이다. 《단원풍속화첩》, 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앞서 열거한 것 외에 조선시대에 자주 거론되는 술 중에는 소주가 있다. 조선 초만 하더라도 소주는 사대부가에서 드물게 쓰는 고급술이었다. 소주가 민간에 널리 퍼진 것은 세종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세종 때의 이조판서 허조(許稠)는 술로 인해 목숨을 잃은 자가 많다며 과음하지 못하도록 영(令)을 내릴 것을 청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벼슬에 처음 오른 시절에는 소주를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집집마다 있으며, 그 호화롭고 사치함이 극에 달했다고 했다. 이를 통해 당시 소주가 대중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술의 노래 허조의 이야기를 보면 조선 초에는 소주가 고급술이었고 구하기조차 힘들었던 모양이다. 소주에 대한 선호도는 세종 때에 더욱 높아졌고, 사치를 대변하는 것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조선 초기 문장가인 서거정(徐居正)은 『태평한화(太平閑話)』에서 죽으면 소주인 삼해주(三亥酒)를 마시지 못할 터이니 죽는 것이 싫다는 표현을 썼다. 당시 술에 대한 선호도를 간접적으로 살필 수 있는 예이다. 그러나 소주든 청주든 탁주든,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굳이 종류를 따지지 않았다. 몇몇 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그런 모습들이 잘 드러나 있다. 신흠3) 은 이렇게 노래했다. 술이 몇 가지요, 청주와 탁주로다. 먹고 취할지언정 청탁이 관계하랴. 달 밝고 풍청한 밤이어니 아니 깬들 어떠리. 술이 있으면 됐지, 청주와 탁주를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작자가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 그대로 알 수 있다. 김창업4) 은 관직을 중시하는 현실 사회에 대한 조소와 자신의 건강을 따져야 하는 처지에서, 술을 매개로 그런 문제들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마음을 이렇게 토로했다. 벼슬을 저마다 하면 농부 할 이 뉘 있으며 의원이 병 고치면 북망산이 저러하랴.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이 시는 다소 현실 회피적이다. 하지만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오래 가면 술에 절어 중독이 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그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초상화는 그 사람의 인품과 인상까지 보여준다. 그림에 곰보 자국을 비롯한 잡티까지 자세히 그려 그 인물이 지닌 결점도 그대로 표현했다. 그런데 그림 중에는 주인공의 코끝을 붉은색으로 표현한 것들이 적지 않다. 이는 피부색이 변조된 것이 아니라, 술을 많이 마셔 알코올 중독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러 코가 빨갛게 된 것이다. 술은 기호품에 불과하지만, 인간 관계 특히 연애하는 대상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작가 미상의 다음 시는 사랑하는 사람과 대작하면서 술맛도 좋지만 임과 함께하는 기쁨이 더함을 술 마시는 분위기를 이용해 토로하고 있다. 금준(金樽)에 술을 부어 옥수로 서로 권하니 술맛도 좋거니와 권하는 임 더욱 좋다. 아마도 미주미행(美酒美行)은 너뿐인가 하노라. 술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친분을 돈독히 하고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기도 하며, 그것을 매개로 분위기를 만들고 농을 치기도 했다. 세조는 신숙주와 구치관(具致寬)이 정승 자리에 있을 때 두 사람을 ‘신정승’, ‘구정승’이라 놀리면서,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면 벌주를 주어 분위기를 북돋았다고 한다. 이는 술을 좋아하던 세조가 정승들과 격의 없는 술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기지와 장난기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술은 개인의 감성을 풍부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고, 인간 관계를 끈끈하게 맺어주기도 한다. 술집 풍경 술을 팔고 마실 수 있는 곳이 주막(酒幕)이다. 조선시대에 주막은 주가(酒家), 주점(酒店), 주사(酒肆), 주포(酒鋪) 등으로도 불렸다. 또 주막에는 주기(酒旗) 또는 주패(酒旆)라 불리는 깃발을 달았다. 『한국사회풍속야사』에는 조선시대 주막이 나그네가 하룻밤 쉬어가는 여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다만 객줏집이나 여각(旅閣), 원관(院館)과 달리 비슷한 영업 형태 중에서 가장 소박하다는 특징이 있었다. 주막은 전국 방방곡곡에 손쉽게 차릴 수 있었다. 삼남(三南) 대로를 비롯한 전국의 길거리, 부근의 큰 마을, 소읍, 선착장, 장터거리는 말할 것도 없고 광산촌과 산간벽촌까지 으레 존재했다. 그리하여 주막은 원래 술을 파는 것이 본업이지만, 도회지에서는 음식점을, 시골에서는 여인숙도 겸했다. 주막의 영업주는 대개 남의 소실이거나 일선에서 물러난 작부들이 많았다. 술집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그림인 신윤복의 〈주사거배(酒肆擧盃)〉는 약주가(藥酒家)를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술집 주변 건물이나 기와를 덮은 담장, 그리고 술 마시는 자들이 의금부 별감이나 양반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주사거배 술 한 국자를 떠주는 주모와 술을 마신 일행들의 모습이 섬세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약주가(藥酒家)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혜원전신첩》, 신윤복, 간송미술관 소장. 주점들은 드러내지 않게 나름대로 술을 파는 데 장사 수완을 발휘했다. 1894년에 혼마 규스케(本間九介)가 여수거사(如囚居士)라는 필명으로 쓴 『조선잡기(朝鮮雜記)』에는 술집 문에 이렇게 써놓은 곳이 있었다고 한다. “술상머리에 술값을 내놓는 것을 아까워하지 마시오(莫惜床頭沾酒錢).” 이곳에서는 안주로 명태와 돼지고기, 김치를 팔았다고 한다. 19세기 말 조선 주막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야말로 운치 있는 장사법이라 하겠다. 고문서 중에는 주점을 매매하는 내용도 있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고문서 수기(手記)와 가옥문기5)에는 주점을 매매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주점을 파는 이유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주막 외에 술을 파는 들병장수도 있었다. 노상술집이라고나 할까? 술병 몇 개와 술잔들을 놓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술을 팔았는데, 유숙(劉淑)의 〈대쾌도(大快圖)〉에서도 그런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도 색주가(色酒家)를 들 수 있겠지만 자세한 소개는 하지 않겠다. 대쾌도 우리나라 고유놀이인 택견과 씨름을 하며 즐기는 모습을 그렸다. 씨름판을 둘러싼 다채로운 인물들의 모습과 복식 등에서 당시의 풍속을 엿볼 수 있다. 유숙, 1846년, 서울대박물관 소장. 들병장수 술병 몇 개와 술잔들을 놓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술을 파는 들병장수의 모습이다. 〈대쾌도〉 부분. 주막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술통, 술항아리, 술병, 술잔 등을 들 수 있다. 술통이나 술항아리는 양조 과정에서 술을 모으는 역할을 했으며, 술병은 호리병이나 장군(缶) 모양이었다. 술병이나 술잔은 양반들이 들놀이를 가거나 기생들과 노니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에 자주 등장한다. 찻잔과 유사한 형태의 고급스런 술잔도 있었지만, 서민들은 주로 사발과 같은 막잔을 사용했다. 막잔의 형태는 김홍도의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김홍도의 〈주막〉에서는 아낙네가 손님에게 국자로 술을 퍼주고 있는데, 이때 손님이 술을 받는 잔이 막잔이다. 주막에서는 대체로 사기나 질그릇을 잔으로 이용했고, 주막이 아닌 곳에서는 더 다양한 재료들로 만들어진 술잔을 사용했다. 술잔의 재료로는 금 · 은 · 놋쇠 같은 금속, 옥이나 사기, 그리고 흙 등을 들 수 있다. 술잔은 재료와 모양 · 무늬 · 색깔 · 용도에 따라 명칭이 달랐으며, 음주 습관과 술 따르는 횟수, 술을 주는 주체에 따라 술잔의 성격이 달라졌다. 때문에 술잔에 대한 표현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술을 마실 때 미사여구로 들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은 『춘향전』에 등장하는 ‘금준미주(金樽美酒)’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금준이란 금으로 된 술동이 또는 술잔을 말하며, 미주는 좋은 술을 지칭한다. 하지만 『춘향전』에서는 여러 사람의 피땀을 비유한 표현이었으며, 이는 곧 관리들의 착취로 인한 민중들의 고통을 상징했다. 술 마시는 사회 술꾼들은 술을 잘 마시는 것, 특히 마신 술의 양을 자랑으로 내세울 때가 많다. 그런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면 유명한 술꾼들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조선시대에는 술을 잘 마시는 것이 자랑처럼 분위기가 조성되어, 국왕이 신하의 엄청난 주량을 들어 당호(堂號)를 지어준 적도 있다. 당대에 술꾼으로 유명했던 홍윤성(洪允成)의 일화가 있다. 홍윤성은 주량이 엄청나서 술을 많이 마시더라도 전혀 괴로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는 바다를 기울여 술을 마실 정도라는 의미인 ‘경해(傾海)’를 홍윤성의 당호로 지어주고, 인장도 새겨주었다. 홍윤성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한림(翰林) 진감(陳鑑)은 그에게 ‘경해당(傾海堂)’이라는 당호를 써주기도 했다. 홍윤성이 술을 잘 마시는 점을 알고 그를 만나려고 했던 어떤 사람은 “바다를 기울이는 주인에 바다를 기울이는 손님이라, 주인이 바다를 기울이면 손님 어찌 사양하리(傾海主人傾海客, 主人傾海客何辭)”라는 시를 지어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한다. 술은 양을 잘 조절해 마시면 몸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약으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과음했을 때에는 독이 되었다. 서호수의 『해동농서』에는 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술은 조금 마시면 인간에 도움이 되고, 과다하면 사람을 해친다. 기를 화락(和樂)하게 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옳다. 적게 마셨을 때에는 체기를 끌어내어 약의 힘을 이끌어주고, 피부를 윤택하게 하며, 얼굴색을 환하게 해주고, 피를 통하게 하고, 더러운 것을 막아준다. 과다하게 마시면 간과 담에 부담을 주어 여러 맥이 부딪쳐서, 그로 말미암아 콩팥을 망치고, 근육 · 뼈 · 위에 문제를 일으키고, 오래 지속되면 먹을 것을 먹지 못하게 된다. 홀로 술과 함께하면 죽을 날이 멀지 않다. 술을 단순한 기호식품이라 여기면 즐기는 차원이지만, 과도한 음주는 문제가 되었다. 그 정도가 되면 술은 이미 기호식품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다. 조선시대에 과도하게 술을 마신 후 병을 얻거나 심지어 사망에 이른 예도 적지 않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종 때의 이조판서 허조는 술을 절제하도록 국가에서 영을 내릴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당시에 이미 술로 몸을 망친 자가 많다고 했다. 허조는 당시 술로 사망한 자로 이방우(李芳雨)의 아들 봉녕군(奉寧君), 신숙주의 아버지인 신장(申檣), 세종 때 우사간(右司諫)을 지낸 김고(金顧) 등을 들었다. 그러나 이중에서 봉녕군의 사망 원인이 술 때문인지 실록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아버지 이방우가 술로 인해 사망한 기록이 있어서 허조가 이름을 혼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이들은 독주인 소주를 과하게 마셔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세조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잦은 술자리를 마련했다. 세조는 원래 술을 좋아했지만, 종친을 비롯한 공신 및 고위 관료들도 잦은 술자리에 참석해야 했다. 그 때문에 과음으로 술병을 얻어 고생한다든지 심지어 사망하는 자도 있었다. 세조가 신숙주에게 “공신들 중에 과음하여 죽은 자가 자못 많다. 이계전(李季甸), 윤암(尹巖) 같은 사람이다. 또한 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 계양군(桂陽君) 증(璔),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홍달손(洪達孫) 등은 비록 죽지는 않았으나 역시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라고 했던 이야기에서도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정치권 내의 한정된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여파가 술을 마시는 사회 분위기로 이어졌다. 또 세조가 홍윤성에게 ‘경해’라는 당호를 지어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술을 잘 마시는 것을 내세우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므로 술 마시는 분위기를 진정시킬 필요도 있었다. 특히 조선 초만 하더라도 고려 말의 분위기가 이어져 술을 마시는 정도가 지나쳤다. 1433년(세종 15)에는 술의 폐해와 훈계를 담은 교서(敎書)를 간행해 나누어주기도 했다. 교서에는 술의 해독(害毒)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무릇 술의 해독이 매우 크다. 어찌 곡식을 썩히고 재물을 허비하는 것에 그치겠는가? 안으로 사람의 마음(心志)을 손상시키고 겉으로는 위의(威儀, 예법에 맞는 몸가짐)를 잃게 한다. (술 때문에) 부모를 봉양하지 않고,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한다. 해독이 크면 나라를 잃고 집을 패망하게 하며, 해독이 적으면 성품을 파괴시키고 생명을 잃게 한다. (술이) 인간의 윤리를 더럽혀 문란하게 하며 풍속을 퇴폐시키는데,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교서를 내린 이유는 술로 인해 사망자들이 증가했기 때문인데, 세종은 교서에서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록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지는 못할망정, 제 한 몸의 생명도 돌아보지 않는단 말인가. 조정에서 벼슬하는 신하인 유식한 자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거리의 아래 백성들이 무슨 일인들 안 하겠는가. 형사소송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이것에서 생기는 것이 많았다. 세종이 이와 같은 교서를 내린 까닭은 금주령을 내려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심지어 사망하는 자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위 글은 조선 초에 술 마시는 분위기가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교서를 통해 요구한 것은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되 절제하라는 것이다. 술 마시기를 즐기다가 일을 망치거나 하지 말며, 과음하여 몸에 병이 들게 하지 말며, 몸가짐을 조심하고 술을 상음(常飮)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쾌도 술에 만취한 남자를 두 사람이 밀고 끌면서 가고 있다. 곡물이 부족한 시기에는 금주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 이미 인간 생활에 깊숙이 자리잡은 술은 어떤 권력으로도 막기 어려웠다. 김후신, 간송미술관 소장. 술이 몸에 악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었다. 시인들이 술을 시의 소재로 삼았듯이, 술을 통해 영감을 얻은 화가도 있었다. 취옹(醉翁)이라는 호를 사용했던 김명국(金明國)은 술을 마신 뒤 떠오르는 영감과 감흥을 이용해 그림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조선 후기에 뛰어난 서화 비평가였던 남태응(南泰鷹)은 김명국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김명국은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해 그림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술을 찾았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그 재주가 다 나오지 않았고, 또 술에 취하면 취해서 제대로 잘 그릴 수 없었다. 오직 술에 취하고 싶으나 아직은 덜 취한 상태에서만 잘 그릴 수 있었으니, 그와 같이 잘된 그림은 아주 드물고, 세상에 전하는 그림 중에는 술에 덜 취하거나 아주 취해 버린 상태에서 그린 것이 많아 마치 용과 지렁이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술을 마신 후 나타나는 부작용은 주정이다. 주정은 취객에 따라 다양한 행태로 나타났다. 심한 경우 주정꾼이라고 조롱을 받거나 모주망태라는 소리를 들었다. 술주정하다가 싸우는 일은 현재도 흔히 벌어지지만 조선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조 때 액정서6) 에서 대궐 문의 열쇠를 관리하던 백경전(白景旜)은, 상급 관청 세력가의 부하나 사대부 집안의 종들이 취해 행패를 부려도 삼사(三司)에서 어쩌지 못하는 반면,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술잔을 모조리 비웠을 때는 술주정한다고 붙잡아 가서 혼을 낸다고 했다. 그는 술주정을 금하는 것은 법을 따르는 것이지만, 세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해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법적으로 다루어야 할 정도로 술주정이 많아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금주령의 시행 술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국가와 사회 집단, 그리고 개인이 제례나 연회를 행할 때 술은 필수적으로 이용되었다. 금주령이 내려져 술을 제조하거나 마시는 것을 금지한 때도 있었으나, 금주령은 대부분 재해를 당했을 때 기한을 정해 시행되었다. 주로 곡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기에 내려졌다. 금주령은 조선 시기를 통틀어 영조 때에 가장 심했다고 하는데, 제사를 지낼 때도 술 대신 식초(醋)를 사용하게 할 정도였다. 다른 왕대에도 상황에 따라 금주령을 내렸지만, 전격적으로 금지하지 않았던 점과 비교하면 영조는 매우 엄격했다. 금주령에 따른 문제점은 이미 조선 초에 나타났으며, 세종의 교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세종은 신하들의 금주령 요청에 반대하면서, 청주를 마신 자들은 걸리지 않고, 탁주를 마시거나 사고판 자만 도리어 걸려들어 처벌받고 있다고 했다. 또한 금주령으로 벌을 받는 자들은 모두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며, 넓은 집에 깊이 들어앉아 호화롭게 살며 향락하는 자는 하나도 처벌받지 않는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이는 금주령에서 나타나고 있던 문제점과 불공평한 법의 시행을 지적한 것이었다. 금주령을 내릴 때 가장 큰 명분은 쌀의 소비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체로 금주령은 한시적인 조치로 내려질 때가 많았다. 중종 때에도 호된 금주령을 내렸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술을 빚었다. 술을 금지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또한 누룩 판매를 금지하는 것은 재화의 유통을 막는 것이므로 다음해 가을까지만 한정해 시행하자고 할 정도였다. 이미 인간 생활에 깊숙이 자리잡은 술은 어떤 권력으로도 쉽게 막기 어려웠다. [Daum백과] 술과 함께하는 조선시대 생활 – 조선시대 생활사 3 -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 한국고문서학회, 역사비평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장고인생 60년, 전통은 미래를 위한것 (ZOGLO) 2017년4월21일  인물이름 : 김인석 “우리 소리와 친숙해진다는것이 참 쉬운일이 아닌것 같습니다. 우리가 젊은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신세대들에게는 더욱 그런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1996년에 연변가무단에서 장고연주자로 퇴직하고 그후 쭈욱 연변대학예술학원에서 전통악기 강의를 해온 김인석(81살)옹, 그가 “우리 소리”의 미래가 참으로 걱정된다면서 한 얘기이다.   한평생 한 악기와 동지처럼 함께 할수 있다는것, “소리”에 평생을 바친 예술가는 오롯이 그만의 향기를 지닌다. 장고와 함께 한 세월만 60여년, 단 하루도 가야금을 연주하지 않고는 “흥”이 나지 않는다는 장고의 명인 김인석옹, 18일 그의 자택에서 인생과 버무려진 장고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는 일상의 소소한 대화에서 음악관, 인생관까지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단칼같은 답변을 쏟아냈다.   그와 장고의 만남은 연길시가무극단에서 무용수로 있던 1957년으로 되돌아간다. 21살 때였다. 그해에 전 주적으로 연변가무단무용전수반이 조직됐는데 마침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 학습반에서 장고를 가르치던 하태일선생을 만나게 되면서 장고는 이후 그의 60여년 세월 반려자로 됐다. 장고를 보는 순간 그는 감전된듯 멍해졌고 한참을 서서 장고를 뚫어지게 쳐다봤다고 한다. 운명이였다. 장고와 김인석옹과의 첫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장고가 너무 신기했죠. 집에 돌아가서 모양을 흉내내서 장고를 만들었지요. 널판자 같은것에 천을 대고 철사줄과 바줄로 메서 그걸 혼자서 갖고 놀았어요.”   평생을 장고를 옆에 끼고 살아온 그에게는 아픈 기억도 많다. 문화대혁명은 그에게서 장고를 앗아갔고 그는 장고 대신 어쩔수없이 타민족 전통음악인 경극을 부르고 단면고를 연주하면서 서러움을 꾹꾹 눌러야 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상하네요. 10년동란이 끝난 뒤에 다시 장고를 받아안았던 그 순간을 말입니다. 어린 아이마냥 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엉엉 울어댔지요.”   이미 놓은줄 알았던 장고를 여전히 마음에서 놓지 못했던것이다.   “한번은 비오는 어느날 거리를 걷는데 어데선가 귀에 익은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거예요. 장고소리인줄 알았더니 기타소리였어요. 환청이 들린건데 ‘내가 미쳤구나’싶었죠.”   이제는 추억이 되여버린 “그때 그 시절”이였다.   그는 “장고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다른것과 어울리면서도 자신의 기품은 잃지않는 울림이 매력적이죠. 장고는 ‘내가 최고다’라고 나서는 악기가 아니예요. 다른 악기가 내는 소리를 받쳐주면서 어떤 때는 강력한 리듬으로 치고 나가죠. 다 포용하면서 섬기는 리더 느낌이라고 할가요?”라고 장고에 대한 례찬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 민족의 장고는 대중들이 널리 사용하여왔는데 산조합주나 시나위 등에서는 반주악기로 사용되지만 사물놀이 등에서는 중요한 작용을 한다.    현재 우리 지역에서 사용하고있는 장고는 연주의 편리를 위해 장고채의 길이는 일바적으로 40센치메터 좌우로 되여있고 그의 무게는 대체로 만년필 하나의 무게에 해당한다. 우리 조선족 민족장단은 장기간에 걸쳐 리론보다도 실천 즉 연주에 힘을 많이 기울여왔다. 하기에 장단에 대한 리론적규명은 중요한 의의를 갖고있기도 하다.   지난 2004년 김인석옹은 근 10여년이 다 되는 시간을 들여 우리의 신명을 가르칠 교재와 리론을 개발했다. 그가 직접 집필한 《장고연주와 조선민족장단》은 현재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교재로 쓰이고있다.   “장고가 없었으면 인생이 참 외로웠을것”이라는 김인석옹은 “장고와 더불어 행복했고 인생공부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가?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고있는 전통악기의 현실에 대해 그는 할말이 많다.   “전통은 현재를 지탱하고있는 중요한 기틀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전통적인것을 제멋대로 고치고 하니 전통성이 없어져 속상한 일이 아닐수 없네요.”   그리고는 “함께 어울리던 이들 중에서 내가 제일 어렸는데 다들 죽고 나만 살아있네. 나이 먹으며 다들 죽게 마련이지. 지금은 옛날처럼 장고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네.”라고 서글픈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김인석옹은 전통적이것을 그대로 배우는것은 힘이 들기 때문에 완벽하게 장고를 다룰수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아쉬워한다. 전통은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문화적 가치나 유산이다. 시대가 바뀌여도 전통을 우리 사회의 기본질서라고 보는 시각이 팽배해 가는 지금, 장고소리를 올곧게 지켜 온 김인석옹의 자리가 더더욱 크게 느껴지고있는건 어쩔수가 없다   정부가 장고와 같은 많은 전통악기를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전승체계를 마련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전문가의 육성이나 이를 즐기려는 애호가의 층은 엷기만 한 상황에서 그동안 김인석옹의 건재는 후진들에게 커다란 버팀목이였던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것이다.   그동안 전국 각지는 물론 1985년에는 미국에서도 방문공연을 하면서 그가 이토록 우리의 전통문화를 알리는데 열성인것은 연변을 찾는 많은 외국인과 국내인들이 연변에 대해 너무나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변하면 랭면, 장백산을 주로 떠올려요.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너무나 모르는게 안타깝죠. 우리가 얼마나 다양한 문화를 갖고있는지 당연히 알려야죠.”   그는 연변을 알리는데는 전통무대예술로 접근하는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갖고있다.   그리고 전통문화 알리미 노릇을 자임하는 또 하나의 리유는 그 스스로가 장고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글·사진 신연희 기자/연변일보
1113    [그것이 알고싶다] - 바이올린의 유래?... 댓글:  조회:5311  추천:0  2017-05-01
  *바이올린족 12~15세기 유럽에는 비엘(vielle)이라는 대표적인 찰현 악기가 있었다. 15세기경부터 비엘은 비올(viol)이라 불렀으며 이것은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와 비올라 다 브라치오(viola da braccio)로 나뉘어졌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바이올린(violin),비올라(viola), 첼로(cello)로 발전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까지 300년 이상이나 비올을 다양하게 변종/제작시킨 비올라 다 브라치오는 비올라의, 비올라 다 감바는 첼로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바이올린족은 16~18세기에 걸쳐 크레모나 지방을 중심으로 아마티 일가,루제리,로페리,그리고 최대의 명가 구아르네리우스,스트라디바리우스 등에 의하여 완전한 물리적 음법칙의 정수라고 일컬을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다. 바이올린족에게는 바이올린,비올라,첼로,더블베이스가 있으며 오케스트라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 더블베이스의 최저음에서부터 바이올린의 최고음까지 약 7옥타브에 이르는 넓은 음역을 같은 음절로 표현할수 있다.   *바이올린의 유래 바이올린을 처음 고안해 낸 사람을 누구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악기가 아마도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만들어졌을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정답은 "아니다!" 아마 몇몇 사람들은 믿기 힘들겠지만 이집트의 음악가 모클리라는 사람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어느 여름날 나일강변을 산책하던 중 무심코 발 끝에 걸린 거북 등껍질에서 공기가 진동되며 소리가 난다는 것을 발견한 뒤 이 원리를 이용하여 최초의 바이올린을 만들었다고 한다.       -출처:지식in       1. 바이올린 악기명칭의 기원 유래 ‘바이올린(violin)’이라는 명칭은 중세 라틴어 ‘vitula’에서 왔다. ‘현악기’라는 의미의 이 단어는 게르만어로 ‘피들(fiddle)’이라는 뜻으로, 요즘에도 피들이라는 명칭은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명과 더불어 사용되고 있다. 바이올린은1550년경 이탈리아에서 비로소 바이올린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악기가 나왔는데, 최초의 발명자라 할 수 있는 제조가와 정확한 발명시점을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미 1520년경부터 3개의 줄로 된 바이올린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그 이전부터 바이올린의 형태가 존재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바이올린의 기원을 밝히는 문제는 지금까지도 어려운 숙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바이올린은 400여년 전 그 규범적인 형태가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며 약간의 변화만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음향적인 면에서 그 자체로 완벽한 악기임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2. 바이올린의 특징 바이올린은 ‘악기 제조의 위대한 승리’라 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고 완벽한 악기이다. 길이 35.5cm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크기에도 4옥타브 이상의 음역을 소리 내는 바이올린은 표현력이 풍부하고 다양한 음색을 연출해낸다는 점에서 ‘악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지닌다. 바이올린은 부드럽게 노래하는 대표적인 ‘선율악기’로, 특히 음을 지속시키는데 뛰어나며 여러 음을 부드럽게 연결하는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성악에 비견되곤 한다. 그러면서도 성악보다 긴 호흡을 지닌 바이올린은 특유의 민첩성으로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 악기로 꼽히고 있다. 또한 바이올린은 오케스트라에서 교향악단의 주요 부분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관현악곡의 주된 선율을 담당하는 악기라 할 수 있다.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재즈, 집시음악, 민속음악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연주되고 있는 바이올린은 모든 계층에게 사랑 받는 악기이다. 바이올린은 한 종류의 악기지만 같은 모양의 다른 크기의 바이올린이 제작되고 있다. 연령과 신장을 고려해 여러 크기의 악기가 제작되는 바이올린은 성인을 위한 가장 큰 사이즈의 악기 4/4를 기준으로, 그보다 작은 사이즈로 3/4, 1/2, 1/4, 1/8, 1/16 사이즈의 악기가 제작되고 있다. 따라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아이들의 경우 자신의 키와 팔길이에 맞는 적절한 크기의 바이올린을 선택해야 올바른 자세를 익힐 수 있다.   3. 바이올린의 음역 (1) 바이올린의 개방현 바이올린은 완전5도 간격으로 된 G-D-A-E의 네 개의 개방현(Open Strings: 현악기에서 줄을 손가락으로 누르지 않은 상태로 연주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2) 바이올린의 음역   바이올린은 연주자가 손가락으로 현을 짚어, 그에 따른 진동수의 변화로 음고(음높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바이올린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음역은 고정되지 않은 넓은 범위라 할 수 있다. 바이올린은 일반적으로 4옥타브의 음역을 소리 내며, 연주자의 재량에 따라 그 이상의 음역도 만들어낼 수 있다. 또한 평균율로 조율된 피아노와 달리 바이올린은 온음과 반음뿐만 아니라, 반음보다 더 작은 미분음(microtone)도 연주할 수 있는 악기이다.       4. 바이올린 구조       5. 바이올린 활   출처 : 네이버캐스트
1112    [쉼터] - 료동에 "과수박물관" 없다?... 있다!... 댓글:  조회:3936  추천:0  2017-04-30
료령 무순 련칼촌 만무 산야에 하얀 꽃물결 일렁인다     무순 련칼촌 만무 산야에 하얀 꽃물결 일렁인다. 4월 23일 료녕성 무순현 련칼촌의 만무 산야에 하얀 배꽃이 피여 절정에 다달았다. 온 누리가  생기와 명절의 환락으로 차 넘쳤다. 유구한 배나무 재배력사를 갖고 있는 이곳은 일찍 1918년부터 배나무를 재배해 왔다. 현재 100년이상 이상 되는 배나무가 200그루,  200년이상 되는 배나무가 100여그루 있다. 하여 ‘료동의 과수박물관’ 이란 미명을 갖고있다. 자연의 오묘한 조화와 순리에 아름다움이 묻어나고 배꽃향연에 벌떼와 나비떼들이 날아들며 하얗게 물든 들과 산에 방방곡곡의 수만명 상춘객들을 잡는다. /길림신문// 사진 글 김경덕
1111    [그것이 알고싶다] - 피아노의 유래?... 댓글:  조회:6715  추천:0  2017-04-25
      피아노의 유래 ▷최초의 피아노 1698년 이탈리아 하프시코드(harpsichord) 제작자인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Bartolomeo Cristofori)에 의해 새로운 건반악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악기 소리 자체를 크거나 작게 조절하여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당시 하프시코드는 음량 조절을 할 수 없어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습니다.) 1709년 이 새로운 악기는 ‘피아노와 포르테가 되는 챔발로’(gravicembalo col piano e forte: harpsichord with soft and loud)라는 이름을 가지고 완성되었고 이후 피아노포르테(pianoforte), 피아노(piano)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기존의 하프시코드의 건반 끝에 가이레드 잭(guilled jack) 대신 해머 액션을 고안해 장착한 것으로 건반을 누르면 액션부분의 운동에 의해 해머가 튀어 올라 현을 치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터치의 강약에 의한 음량을 변화시킬 수가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건반악기는 설계상 많은 문제점이 나타납니다. 특히 해머가 제대로 작동이 안되어 연주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크리스토포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늘날 탈진(escapement:피아노의 해머를 되돌아 오게 하는 장치)을 고안하고 또 레피티션(repetition), 뎀퍼(damper)를 개발하여 좀더 개량된 피아노들이 개발됩니다.  1732년 작곡가 루도비코 기스티니(Lodovico Giustini)는 크리스토포리가 만든 피아노를 위한 12곡의 소나타를 작곡하였는데 악보에는 음의 세기(piano, forte 등)가 표시되었습니다. ▷질버만(Silbermann)의 새로운 모델 크리스토리의 발명은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곧바로 다른 악기 제조사들도 피아노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독일의 오르간 제작자인 고트프리드 질버만(Gottfried Silbermann)은 만든 피아노를 바하(Bach)에게 보여주었는데 당시 바하는 높은 음정에서 소리가 빈약하고 건반이 너무 무거워 연주하기 어렵다며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질버만은 좀더 쉽게 연주할 수 있도록 다시 설계하였고, 바하는 이 새로운 악기를 연주하여 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스퀘어 피아노(square piano) 초기 피아노는 그랜드 피아노의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크기가 매우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피아노 제작자들은 일명 스퀘어 피아노라 불리는 작은 형태의 악기로 만들고자 시작하였습니다.  질버만의 제자였던 요하네스 즘페(Johannes Zumpe)는 1760년 영국으로 건너가 스퀘어 피아노를 개발 대중화 시켰습니다. 이후 즘페의 피아노는 프랑스는 물론 미대륙까지 퍼져나가 인기를 얻습니다.  ▷철골 구조와 서스테이닝 페달 피아노의 현은 하프와 마찬가지로 프레임 구조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초기 악기들의 프레임은 나무과 철제 버팀대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기후적 조건으로 인해 나무 프레임이 팽창 또는 수축하여 현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자주 조율해야만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1825년 보스턴의 피아노 제작가인 알페우스 밥콕(Alpheus Babcock)은 프레임 전체가 철제로 된 프레임을 고안합니다. 이러한 제작 방식의 프레임은 나무 프레임의 단점을 보완해 주기 때문에 피아노 제작회사에서 널리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철제 프레임은 현을 탄력 있게 유지해 주기 때문에 그랜드 피아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더 굵고 단단한 현의 출현을 가져 다 주었으며 이로 인해 악기의 음색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세기 말 런던에서 피아노 제작기술에 핵심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1783년 영국 브로드우드(Broadwood)사에서 모던 피아노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 ‘서스테인 페달(sustaining pedal)’을 발표한 것입니다. 이 장치는 모든 피아노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나중에는 소프트 페달이 첨가되어 발전됩니다. ▷업라이트 피아노(Upright piano) 스퀘어 피아노의 성공과 함께 피아노 제작자들은 그랜드 피아노의 사운드 질을 유지하면서 크기는 작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면서 마침내 그랜드 피아노의 액션과 현이 차지하는 공간에 주목하기 시작하여 소위 ‘기린 피아노(Giraffe Piano)’로 불리는 키가 큰 피아노가 탄생합니다. 그러나 작은 방에 놓기엔 여전히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후 1811년 런던에서 피아노 제작자인 로버트 워넘(Robert Wornum)이 좀 더 작은 업라이트 피아노를 발표한 후 점차 발전을 거듭하면서 현재의 업라이트 피아노에 이르게 됩니다.     피아노의 음계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유래와 의미   Do : Dominus 하나님 Re : Resonance 울림,하나님의 음성 Mi : Miracle 기적 Fa : Famille 가족,제자 Sol : Solution 구원,하나님의 사랑 La : Labii 입술 Si : Sanctus 거룩 Do : Dominus 하나님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전 세계에서 공용되는 계이름은 11세기경에 음악이론가이자 성직자였던 귀도 다레초(Guido d‘Arezzo) 는 이름과 성(姓)이 아니랍니다. 당시 귀족이 아닌 사람들은 성(姓)을 가질 수 없었기에 ‘아레초 마을의 귀도’라는 뜻으로 ‘귀도 다레초’라고 부른 것이 마치 이름처럼 불리는 것이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사실은 ‘빈치 마을의 레오나르도’라는 뜻입니다.)에 의해 처음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귀도는 당시 성가대원들이 새로운 성가를 배울 때 단순히 여러 번 듣고 반복적으로 따라 부르며 암기에만 의존하기보다 더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배울 방법이 없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에 잘 알려져 있던 성가인 ‘성 요한 찬미가(Ut queant laxis)’라는 노래 가사의 첫 음절이 각각 한 음씩 상행하는 음계의 여섯 음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 음들로 시작하는 가사 음절의 여섯 음절을 따와서 ‘ut, re, mi, fa, sol, la’라는 이름을 정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Do Re Mi Fa Sol La Si’와는 좀 다르지요? ‘ut’가 ‘Do’로 바뀌고, ‘la’ 위에 ‘Si’가 첨가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입니다. 1673년 이탈리아 작곡가 보논치니(G. M. Bononcini·1670∼1747)가 발음상의 이유로 ‘ut’를 부르기 쉬운 ‘Do’로 바꾸었는데, ‘Do’는 라틴어로 주님인 ‘Dominus’의 첫 번째 음절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아직도 ‘ut’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레고리오 성가 시대에는 성가가 6음 음계에 기초했기 때문에 일곱 번째 음인 ‘Si’가 없었으나, 음계가 늘어나면서 1600년경에 7번째 음이 추가되었고, 그 이름을 성가 마지막 가사 두 개의 단어들 ‘Sancte Ioannes’의 첫 문자들인 S와 I(I는 나중에 J로 표기되었습니다)로부터 유래된 ‘Si’라는 음절이 붙여졌습니다.      의 악보를 보면 음표가 지금의 동그란 음표와는 달리 사각형이고 서로 붙어 있기도 하며, 5선이 아닌 4선보에 표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악보로 옮겨 적으면와 같습니다. 비록 4선보라 지금과는 다르지만, 이전에 가사 위의 부호(neuma), 그 이후에 선 하나 또는 둘로 음의 높낮이를 표현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기보법의 발전이 있었던 것인데, 이렇게 4선보를 널리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귀도 다레초입니다. 또한 귀도는 처럼 왼손의 손가락 마디마다 음이름을 적어 넣고 그것을 짚어 가며 선율을 익히도록 하여 악보가 없던 시절에 학생들이 성가를 익히는 데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귀도 다레초 덕분에 당시 성가대원들은 정확한 음 높이를 잡고 새로운 성가를 편리하게 연습하여 단 며칠 만에 배울 수 있게 되었으며, 기보되지 않은 성가들도 듣고 기보할 수 있게 되어 많은 성가들이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출처] 2. 피아노의 음계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유래와 의미|작성자 클로이    
1110    [작문써클선생님들께]-식사시간, 잠자는 시간, 스마트폰= 0 댓글:  조회:3989  추천:0  2017-04-24
(런던=연합뉴스) 황정우 특파원 =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공동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아이들이 14세가 되기 전에는 스마트폰을 주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게이츠는 최근 영국 일간 미러와 인터뷰에서 "우리 가족은 식사할 때 스마트폰을 갖고 오지 않는다. 14살 전까진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주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더 일찍 스마트폰을 가진다고 우리 아이들이 불평했다"고 말했다. 20살, 17살, 14살 세 자녀를 둔 게이츠는 "우리 가족은 가끔 스크린이 없는 시간을 정하는 데 아이들이 적당한 시간 잠자는 걸 도와준다"고 말했다. 게이츠는 "숙제도 하고, 친구들과 연락도 하고, 스마트폰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지 알고 있지만 동시에 스마트폰 사용이 지나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영국 시민단체 '디지털 어웨어니스 UK'와 영국교장협의회가 11~18세 학생 2천여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82%가 식사시간에는 가족이 스마트폰을 쓰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36%가 부모에게 스마트폰을 손에서 내려놓으라고 요구한 적 있다면서 46%는 부모가 자신들의 말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 단체가 부모 3천명을 대상으로 따로 벌인 설문조사에선 43%가 자신이 많은 시간을 스마트폰으로 보낸다고 인식하면서도 자신의 스마트폰 사용이 자녀에겐 걱정거리일 것이라고 자각하는 사람은 10%에 그쳤다.  
1109    [그것이 알고싶다] - 미국 국가의 뒷이야기... 댓글:  조회:5148  추천:0  2017-04-23
                  미국 국가(國歌)   National Anthem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e Star Spangled Banner(별이 빛나는 깃발 : 성조기)   미국의 국가 성조기(The Star-Spangled Banner, 별이 빛나는 깃발)는 법률가이자 시인이었던 프랜시스 스캇 키(Francis Scott Key)가 작사했고, 곡조는 존 스태포드 스미스가 작곡한, 영국의 한 클럽에서 술을 마실 때 부르던 '천국의 아나크레온에게'(To Anacreon in Heaven)라는 노래를 사용한다.       1. 미국 국가의 가사 이야기   미국 국가의 가사(歌辭)는 Francis Scott Key라는 워싱턴 출신 미국의 법률가가  1814년 볼티모어의 맥헨리 전투를 보고 쓴 ‘맥헨리 요새의 방어’(The Defence of Fort McHenry)라는 詩에서 유래하는데, 이 시는 다음과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1814년 9얼 13일 아침, 영국함대가 볼티모어 만의 입구에 위치해 있던 작은 규모의 맥헨리 요새에 집중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포격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지속되었다. 맥헨리 요새에서는 천여명의 미국측 방어군들이 영국군의 포격에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맥헨리 요새에서 영국함대에 대포를 쏘아도 대포의 사정거리가 영국군 함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새는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당시 미국 방어군은  이 요새에서 용케도 영국군의 포격을 견디어냈다.   한편 '프랜시스 스캇 키'라는 워싱턴 출신의 변호사가 한 척의 영국 군함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미전쟁 당시 볼티모어의 의사 한 명이  영국 배에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때 미국은 프랜시스 스캇 키를 협상단으로 보내 영국과 협상을 벌이게 하였다.  억류된 의사의 석방 협상을 위한 협상단의 자격으로 영국의 한 군함에 있었던 스캇 키가 마침 맥헨리 전투를 목격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포격이 끝나고 14일 아침이 밝아왔을 때  격렬했던 전투의 결과를 보기위해 맥헨리 요새를 바라보게 된 스캇 키, 그가 목격한 것은 포격 당한 맥헨리 요새 위로 당당하게 휘날리는 성조기였다. 엄청난 감동이 그의 가슴을 고동치게 했다. 지난 밤의 그 치열했던 전투에도 불구하고 어스름 새벽 여명에 찬연히 빛나는 성조기를 보자 벅찬 표현들이 마음속에 솟구쳐 올랐고 마침 가지고 있던 편지봉투 뒷면에 그 문구들을 적어 내려갔다.   ...O say, can you see, by the dawn’s early light,  What so proudly we hailed at the twilight’s last gleaming,  Whose broad stripes and bright stars, through the perilous fight,  O’er the ramparts we watched, were so gallantly streaming?  And the rockets’ red glare, the bombs bursting in air,  Gave proof through the night that our flag was still there  O say, does that star-spangled banner yet wave  O’er the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 이른 새벽의 빛에 오, 그대는 보이는가,  어제 황혼의 마지막 빛 속에서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환호했던,  넓은 줄과 빛나는 별들이 새겨진 저 깃발이, 치열한 전투 중에서도  우리가 사수한 성벽 위에서 당당히 나부끼고 있는 것이,  포탄의 붉은 섬광과 창공에서 작렬하는 폭탄이,  밤새 우리의 깃발이 있었던 증거이다.  오, 성조기는 지금도 휘날리고 있는가 자유의 땅과 용감한 자들의 고향에서.                                                                    미국 국가도 4절까지 있다.   1절 O say, can you see, by the dawn’s early light. What so proudly we hailed at the twilight’s last gleaming, Whose broad stripes and bright stars, through the perilous fight, O’er the ramparts we watched, were so gallantly streaming? And the rockets’ red glare, the bombs bursting in air, Gave proof through the night that our flag was still there; O say, does that star-spangled banner yet wave O’er the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   2절 On the shore, dimly seen thro’ the mist of the deep, Where the foe’s haughty host in dread silence reposes, What is that which the breeze, o’er the towering steep, As it fitfully blows, half conceals, half discloses? Now it catches the gleam of the morning’s first beam, In full glory reflected, now shines on the stream ’Tis the star-spangled banner. Oh! long may it wave O’er the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   3절 And where is that band who so vauntingly swore That the havoc of war and the battle’s confusion A home and a country should leave us no more? Their blood has washed out their foul footstep’s pollution. No refuge could save the hireling and slave From the terror of flight, or the gloom of the grave, And the star-spangled banner in triumph doth wave O’er the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   4절 Oh! thus be it ever, when freemen shall stand Between their loved homes and the war’s desolation, Blest with vict’ry and peace, may the Heav’n rescued land Praise the Pow’r that hath made and preserved us a nation! Then conquer we must, when our cause it is just, And this be our motto: "In God is our trust." And the star-spangled banner in triumph shall wave O’er the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         1절 오, 그대는 보이는가, 이른 새벽 여명 사이로 어제 황혼의 미광 속에서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환호했던, 넓직한 띠와 빛나는 별들이 새겨진 저 깃발이, 치열한 전투 중에서도 우리가 사수한 성벽 위에서 당당히 나부끼고 있는 것이. 포탄의 붉은 섬광과 창공에서 작렬하는 폭탄이 밤새 우리의 깃발이 휘날린 증거라. 오, 성조기는 지금도 휘날리고 있는가 자유의 땅과 용자들의 고향에서! 2절 저 깊은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해안, 오만한 적군도 공포의 적막 속에서 숨어 있는 그 곳에서 드높이 치솟은 절벽 위로 변덕스런 산들바람 따라 반쯤 가려졌다 반쯤 드러나 보이는 저것이 무엇이냐? 이제 아침의 첫 광휘를 받아 충만한 영광에 반사되어 강물 위로 빛나는, 그것은 바로 성조기. 오! 영원토록 휘날리소서 자유의 땅과 용자들의 고향에서! 3절 그토록 자신만만 호언장담했던 그 무리는 어디 있느뇨? 그리고 전쟁의 파괴와 전투의 혼란 속에서 우리에게 집이고 조국이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리라 그들의 피로 더러운 자신의 발자국의 때를 씻어냈도다. 그 어떤 피난처도 그 용병들과 노예들을 패주의 공포와 무덤의 암흑으로부터 구해주지 못했고, 성조기는 승리차게 휘날리누나 자유의 땅과 용자들의 고향에서! 4절 오! 그리하여 자유로운 사람들이 사랑하는 그들의 고향과 전쟁 폐허 사이에서 언제나 일어서리라. 승리와 평화로 축복을 받으며 하늘이 구한 이 땅이 우리의 나라를 만들고 지켜 준 신의 권능을 찬양하게 하소서. 대의가 정당하면 우리는 필승할 것이오, 우리의 좌우명은 "하느님 안에 우리의 믿음이". 그리고 성조기는 승리차게 휘날리리라 자유의 땅과 용자들의 고향에서!              2. 미국 국가의 곡 이야기         그런데 이렇게 엄숙한 가사에 붙여진 곡이 권주가(勸酒歌)라는 사실이 좀 의외다. 즉, 스캇 키가 쓴 가사에 영국에서 술을 마실 때 부르는 일종의 권주가인  ‘천국의 아나크레온에게’(To Anacreon in Heaven)라는 노래의 곡조를 갖다 붙여 국가로 사용한 것이다.   "To Anacreon in Heaven"이라는 노래는 존 스태포드 스미스라는 영국사람이 작곡하여 영국의 "the Anacreonic Club"이라는 사교클럽에서 클럽 회원들이 술울 마실 때 부르던 권주가였다.  "마시자~ 한 잔의 술~"이런 식으로 술을 마실 때 흥을 돋우던 노래였던 것이다.                                                      3. 가사와 곡의 만남 그리고 國歌로 채택     프랜시스 스캇 키의 시는 '맥헨리 요새의 방어(The Defense of Fort McHenry)'라는 제목으로 1814년 처음 출판되었고 출판되던 그 해에 가사와 곡이 어우러진 노래가 낱장 악보로 다시 출판되면서 제목이 바뀌었다.   이후 이 미국 국가는 오랫동안 출판이 거듭되면서 가사와 곡조 모두 조금씩 바뀌었으며 많은 편곡도 이루어졌는데 행진곡으로 유명한 존 필립 수자가 미국 육·해군을 위해 편곡했고 그밖에도 여러 음악가들이 다양한 편곡을 남겼다.   전체 4절로 이루어진 이 곡은 이후 지속적으로 불려지다가 1889년에 해군으로부터 인정 받았고, 1916년에 백악관으로부터 인정 받았으며 1931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후버의 요청으로 의회로부터 공식 국가로 채택되었다.   1931년 이전에는 '컬럼비아 만세'라는 곡 등이 국가로 쓰이기도 했다.                                                         4. 비공식적인 미국국가 "America The Beautiful"   우여곡절 끝에 미국국가로 채택된 "별이 빛나는 깃발" ....   그러나 현재 미국 국가인 "별이 빛나는 깃발"의 국민 지지도는 30%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4절까지 되는 긴 곡이어서 외우기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어려운 박자가 많아 따라 부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미국 국가가 연주되면 미국인 모두 의기롭게 따라 부르다가 점점 더 목소리가 잦아든다. 부르기가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수퍼보울 등의 행사가 있으면 유명한 가수들이 국가를 부르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따라 부르기 어려운 국가를 친숙하게 하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여류시인이자 교수인 Katharine Lee Bates가 1893년에 작사하고   오르가니스트이자 교회성가대 지휘자인 Samuel A. Ward가 작곡한 "America the Beautiful" 이라는 노래가 오히려 더 많은 미국인의 사랑을 받고 널리 불려지고 있다.     "아름다운 아메리카"는사실상 '비공식적인 미국 국가'가 되었고 정식 국가 대신 많이 연주된다.  미국 프로야구 게임에서는 시작전에 공식국가를 부르고 7회 중반에 이 노래를 또 부른다고 한다.   이 곡은 공식 국가에 비해 훨씬 더 서정적이고 평화롭고 따라 부르기도 쉽다. 따라서 "별이 빛나는 깃발" 대신에 이 노래를 공식 국가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예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별이 빛나는 깃발"을 사수하려는 여론도 만만치 않아 "비공식적으로만" 미국의 국가처럼 연주되고 있다.                                                                        America The Beautiful       O beautiful for spacious skies, For amber waves of grain, For purple mountain majesties Above the fruited plain! America! America! God shed His grace on thee, And crown thy good with brotherhood From sea to shining sea!   O beautiful for pilgrim feet Whose stern impassion'd stress A thoroughfare for freedom beat Across the wilderness. America! America! God mend thine ev'ry flaw, Confirm thy soul in self-control, Thy liberty in law. O beautiful for heroes prov'd In liberating strife, Who more than self their country loved, And mercy more than life. America! America! May God thy gold refine Till all success be nobleness, And ev'ry gain divine. O beautiful for patriot dream That sees beyond the years Thine alabaster cities gleam Undimmed by human tears. America! America! God shed His grace on thee, And crown thy good with brotherhood From sea to shining sea.     [출처] 미국의 國歌 이야기|작성자 솔잎향기  
1108    [그것이 알고싶다]-"도, 레, 미, 파, 솔, 라, 시" 계이름 유래?... 댓글:  조회:4688  추천:0  2017-04-23
  음악에서의 계이름 오선보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음표입니다. 음표의 높낮이에 따라 우리는 계이름을 붙여 부릅니다.  흔히 도레미파솔라시도로 부르는 계이름은 11세기 이탈리아의 귀도 다레초가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웃, 레, 미, 파, 솔, 라, 시라고 붙였습니다.  성 요한을 찬양하는 가사에서 본따 만들었습니다.   Ut queant laxīs    resonāre fībrīs Mīra gestōrum    famulī tuōrum, Solve pollūtī    labiī reātum, Sancte Iōhannēs.   “너의 시종들이 마음껏  너의 공적을 노래하게 하라.  그들의 더럽혀진 입술에서 모든 죄악을 없애고,  오, 성 요한이시여”       '웃'은 훗날 라틴어로 '주님'을 의미하는 Dominus에서 따와 '도'로 바뀝니다.    ===============================     계명의 유래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음악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계명이다. 그런데 이 계이름은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 혹시 발음하기에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하기에 그렇게 굳어진 것은 아닐까? 아니다. 실은 그레고리오 성가 중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의 저녁기도"의 가사에서 첫 머리를 따온 것이다. Ut Queant laxis resonare fibris Mira gestorum famuli tuorum, Solve polluti labii reatum Sancte Joannes. 위 가사의 첫 머리인 우트(Ut), 레(re), 미(Mi), 파(fa), 솔(Sol), 라(la)에 시(Si)를 첨가하고 발음 편의상 우트(Ut)를 대신에 하느님이란 뜻의 Do(Dominus)를 써서 만든 것이다.(그러나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우트(Ut)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1107    [그것이 알고싶다] - 거문고의 유래?... 댓글:  조회:4382  추천:0  2017-04-23
ⓐ@ 거문고는 한자로 현금(玄琴)이라고 표기하며,  삼현삼죽(三絃三竹) 중 삼현(三絃)의 하나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악지(樂志)에  "중국 진(晋)나라 사람이 칠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냈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비록 악기인줄은 알면서 그 성음과 타는 법을 알지 못하므로 고구려 사람으로서 칠현금을 연주할 줄 아는 이를 널리 구하여 후한 상을 주기로 하였다. 이 때에 제2상(第二相) 왕산악(王山岳)이 그 본 모양은 그대로 두고 그 제도(制度)를 고쳐서 새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였고 그 후에 악곡도 백여 곡을 지어 연주하였다.  거문고를 연주할 때에 검은 학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다 하여 이름을 현학금(玄鶴琴)이라 하였으나 그 후에 학(鶴)자를 버리고 다만 현금(玄琴)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늦어도 5세기 이전 고구려에서 발생한 국악 현악기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거문고의 원형으로 보이는 것은 중국 길림성 집안현(輯安縣) 통구(通溝)에 있는 고구려의 옛 무덤인 무용총(舞踊塚) 주실(主室) 좌벽(左壁) 천정(天井)의 벽화와 안악(安岳) 고분 제3호분 후실동벽(後室東壁)의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악 고분의 현악기는 그림이 선명하지 못하여 그 줄과 괘가 보이지 않지만, 통구 무용총의 벽화에 나오는 현악기는 4현 17괘인 점이 다를 뿐, 그 모양과 타는 법은 현재의 거문고와 거의 흡사하다.  왕산악의 거문고는 통일 신라 이후 전국에 퍼지면서 신라의 신문왕(神文王681~691)무렵 신라에 전해져 신라 사람 사찬공영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거문고를 지리산에 들어가 50년 동안 공부하고 스스로 상원곡(上院曲) 등 30여 곡을 지어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였다. 속명득은 귀금(貴金)선생에게 전하였으나 귀금선생은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으므로 임금이 거문고의 가락이 끊길 것을 염려하여 윤홍을 남원공사(南原公事)로 부임케 하여 총명한 소년을 가리어 귀금 선생의 거문고 가락을 전수받도록 하였다.  그 때 윤홍은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을 가려 지리산에 들어가게 하였는데, 3년이 지나도록 귀금 선생은 그의 비곡(秘曲)을 전수하지 않았다. 그래서 윤홍 내외가 직접 지리산에 들어가 귀금선생에게 예를 깍듯이 하고 지성으로 간청한 연후에야 비로소 그의 비곡(秘曲) 표풍(飄風)등 3곡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克相)과 극종(克宗)에게 전하였고 극종 이후에는 거문고를 직업(業)으로 삼는 이가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신라 말엽부터는거문고가 널리 보급되어 현재까지 전래되고 있다.  이로부터 고려,조선조를 통하여 거문고는 선비들 사이에서 즐기던 대표적인 악기였다.  이제는 다 늙거다.  므스 거슬 내 아드냐.  이하의 황국(黃菊)이요,  안상(安上)의 현금(玄琴)이로다.  이 중에는 일권가보(一券歌譜)는  틈 업슨가 하노라.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조를 통하여 학문과 덕을 쌓은 선비들이 책상 오른쪽에 거문고를 비껴 놓고 손때 묻은 일권가보(一券歌譜)로써 장식함은 그 운치도 운치려니와 낙빈안도(樂貧安道), 학문 닦는 선비의 다시없는 자랑이요, 덕(悳)을 기르는 상징이기도 했다. 책과 더불어 가장 아꼈다하여 금서라는 말을 낳을 정도로 선비 수업의 필수과목으로 꼽혀왔고 '군자의 벗'으로서 마음을 담고 뜻을 기르는 데에 쓰였기 때문에 거문고는 백악지장(百樂之丈)으로서 숭상되었고, 따라서 거문고를 타는 이도 그만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 ◈통일신라시대까지의 거문고의 유래와 전승과정   거문고의 소리는 둔탁하면서도 힘이있고 거친 듯 하면서도 맑은 음색으로 옛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악기 중에 으뜸이라 하여 백악 지장(百樂之丈)이러 불리어졌다. - 거문고를 한자어로 표기하면 현금(玄琴)으로 표기하는데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진나라에서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내왔다. 고구려 사람들은 그 악기의 연주법을 알지 못하여 칠현금을 연주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때 왕산악이 칠현금의 본 모양을 그대로 두고 새로이 악기를 만들어 100여곡을 만들어 연주할 때 검은 학 이 날아들어 춤을 추었다. 2천년이상 산다는 신비한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 하여 현학금(玄鶴琴)이라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학'자를 떼어 버리고 현금(玄琴)이라 하였다"는 내용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현금(玄琴)은 순 우리말인 거문고의 한자식 표기일 뿐 검은 학의 이야기는 거문고를 신성화한 설화로 보아야 한다. 양주동 박사의 말에 거문고의 '거문'의 어원은 '감', 혹은 '검'으로서 신의 옛말이니 거문고란 신의 악기라는 뜻으로 그 이름에서 신비한 여운이 감도는 듯하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의 나라 이름인 검, 감, 곰에서 이름을 따서 거문고라 하였으니 거문고란 고 구려의 현악기란 뜻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 거문고의 유래   - 한반도의 북부와 만주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거문고의 원형은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舞踊塚)벽화와 안악(安岳)고분의 제3호실 벽화에 그려져 있고 그 모습은 4줄과 17개의 괘(기타의 브릿지와 비슷하며 음의 높낮이를 조절함)를 가지고 있다. 또한 거문고는 제작 연대에 대한 정확한 연대가 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설이 음악학계에 있다.  그러나 진나라를 서진이라기보다도 좀 늦게 잡아서 동진으로 볼 때 왕 산악의 연대를 대략 4세기경으로 추정할 수 있고 따라서 거문고가 4세기경에 제작됐을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최초의 거문고의 모양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에 없어서 자세하지는 않지만 안악 제 3호분의 후실에 그려진 거문고 그림이나 통구 무용총의 주실에 그려진 거문고 그림, 그리고 길림성 집안 장천 1호분의 전실 남벽에 그려진 거문고 그림을 통하여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안악과 통구 그리고 집안에 있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거문고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은 현행 거문고처럼 악기를 땅바닥과 연주자의 무릎 위에 놓고서 오른손에 술대 모양의 막대를 쥐고 연주하는 모습이다. 2. 거문고의 전승   - 문무왕 8년(668년) 신라가 통일되었는데, 거문고는 이 당시에 고구려로부터 전해진 것 같다. 그 뒤 거문고가 연주되지 않고, 신기(神器)로 간주되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되어 오다가 9세기경부터 일반인들이 연주 악기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에 거문고가 들어온 이후 악기로 사용하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라 사찬 벼슬을 가진 공영의 아들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서 50년간 거문고를 익혀 스스로 30곡을 작곡하여 이를 속명득에게 전하였는데, 속명득은 다시 귀금선생에게 전하였고, 귀금선생은 역시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신라왕은 금도(琴道)가 단절될 것을 두려워하며 이찬 벼슬의 윤홍으로 하여금 그 음악을 전수받기 위해 남원 공사로 임명하였다. 윤홍이 부임하여 안장과 청장 등 총명한 두 소년을 뽑아 지리산에서 거문고 음악을 전수받도록 하였다. 귀금선생은 그들에게 거문고를 가르쳤으나, 비곡(秘曲)은 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윤홍은 부인과 함께 귀금선생에게 가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나를 남원에 파견한 것은 선생의 음악을 전수받게 하고자 함인데 3년이 지나도 비곡을 가르쳐 주지 않으니 내가 왕에게 무엇이라 말하리이까' 하고 부인과 더불어 모든 예의를 갖추니 비로소 표풍(飄風)등 3곡을 전수하였다.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과 극종에게 그 음악을 가르쳤고 극종이 7곡을 작곡했는데, 극종 이후로는 거문고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 당시 거문고 곡은 187곡이 연주되었고, 평조(平調)와 우조(羽調)로 되어 있으며, 옥보고가 작곡한 거문고 곡 30곡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상원곡(上院曲) 1,  중원곡(中院曲) 1,  하원곡(下院曲) 1, 남해곡(南海曲) 2,  기암곡 1,  노인곡(老人曲) 7, 죽암곡(竹庵曲) 2,  현합곡(玄合曲) 1,  춘조곡(春朝曲) 1, 추석곡(秋夕曲) 1,오사식곡(五沙息曲) 1,  원앙곡(鴛鴦曲) 1, 원호곡(遠岵曲) 6,  비목곡(比目曲) 1,  입실상곡(入實相曲) 1, 유곡청성곡(幽谷淸聲曲) 1,  강천성곡(降天聲曲) 1   -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거문고는 오동나무로 앞면을 만들고 밤나무로 뒷면과 옆판을 만들고 밤나무로 뒷면과 옆판을 붙여 만드는데 굵기가 서로 다른 6개의 줄과 16개의 괘를 지니고 있어 벽화에 그려져 있는 거문고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며 시대가 변하면서 악기의 모습 이 바뀌고 발전하였음을 볼 수 있다.  
1106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임금은 "배", 백성은 "물" 댓글:  조회:5091  추천:0  2017-04-23
군주민수(君舟民水)의 한자유래 古今東西/四字成語 2016.12.26 15:15 ◎ 글자풀이 : 임금 군(君) 배 주(舟) 백성 민(民) 물 수(水) ◎ 뜻풀이 : “강물(백성)이 화가 나면 배(왕)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것. ◎ 설명 : 올해 교수(敎授)들이 선정한 2016년 사자정어(四字成語) 군주민수(君舟民水)의 뜻은 “강물(백성)이 화가 나면 배(왕)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것으로서 교수 61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設問調査)를 통해 32.4%의 선호도(選好度)를 얻었다. 임금 군(君)의 구성(構成)은 다스릴 윤(尹)과 사람의 입모양을 본뜬 입 구(口)로 이루어졌다. 윤(尹)은 지휘봉(指揮棒) 역할을 하는 지팡이(丿)를 오른손(彐=又)으로 쥐고 있는 모양(模樣)을 그려낸 것으로, 권위(權威)의 상징인 지팡이를 쥐고 있기에 ‘다스리다’는 뜻을 부여(附與)하였다. 이에 따라 군(君)의 의미는 통치(統治)의 상징인 지팡이를 오른손에 쥐고(尹)서 입(口)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곧 ‘임금’이나 ‘주권자’라는 뜻이다.    배 주(舟)의 구성(構成)을 “설문(說文)”에서는 “주(舟)는 배를 말한다. 옛날에 공고(共鼓)와 화적(貨狄)이 나무를 쪼개어 배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 노를 만들어 통하지 못했던 곳을 건너게 하였다. 상형글자(象形字)이다.”고 하였다. 갑골문(甲骨文)을 보면 여러 개의 판자(板子)를 덧대어 만든 직사각형(直四角形)의 네모진 배를 그리고 있다.    백성 민(民)은 상형글자(象形字)로 갑골문(甲骨文)을 살펴보면 뾰족한 바늘과 같은 꼬챙이로 한쪽 눈을 찔린 사람을 뜻하는데, 고대(古代)에는 주로 죄수(罪囚)나 포로(捕虜)를 지칭(指稱)하는 글자다. 즉 지배계층(支配階層)이 아닌 노예(奴隸)와 같은 하층의 사람을 뜻한다. 그러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일반적인 사람 모두, 즉 평민(平民)을 뜻하게 된다. 민(民)은 금문(金文)에서 예리한 침 같은 것에 한쪽 눈이 찔린 사람의 모습(模襲)이다. 옛날 전쟁(戰爭)에서 포로를 잡을 경우, 남자이면 한쪽 눈을 찔러 노동력(勞動力)은 보존(保存)하되 반항능력(反抗能力)은 줄여 노예로 삼는다. 이러한 모습은 착할 장(臧)이나 아이 동(童)에서도 그 흔적(痕迹)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민(民)의 원래 뜻은 노예(奴隸)이며, 이후 지배자(支配者)의 통치(統治)를 받는 계층(階層)이라는 의미에서 ‘백성(百姓)’이라는 뜻이 나왔고, 다시 ‘사람(人)’이라는 일반적 의미로 확장(擴張)된다.    물 수(水)자는 흐르는 냇물의 물줄기(氺)와 반짝이는 물결 꼴을 본뜬 상형자(象形字)로'물(水)'이라는 뜻의 4획 글자이다. 그런데 수(水)자는 글자 내에서 물 수(氺), 꼴로 변형(變形)되거나 본래 꼴인 ‘水’ 모습(模襲)으로 나타난다. 물은 고대(古代)부터 우주 만물(宇宙萬物)의 근원(根源)으로 인식(認識)되어져 왔으며, 지구(地球)의 약 70%가 물로 구성(構成)되어 있고, 신체의 70% 이상을 차지(借地)하고 있다. 물은 자연(自然)과 인간의 구성비(構成比)를 보더라도 우리들과 얼마나 친숙(親熟)한지 쉬 알 수 있다.그래서인지 우리가 사용(使用)하는 한자 가운데 수(水) 부수(部首)에 속하는 글자가 가장 많이 사용(使用)한다. 수(水)자는 '강 강(江)'이나 '바다 해(海)'자처럼 왼쪽에 쓰일 때 '氺'의 꼴은 '삼수변(氵)'이라 칭한다. 삼수변(氵)은 세(三) 점을 찍은 꼴로 물(水)을 나타내며 글자의 왼쪽 끝인 변(邊)에 놓여서 '삼수변(三水邊)' 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 또한 수(水)자는 '클 태(泰)'자나 '사나울 폭(暴)'자처럼 글자의 밑에 놓이면서 형태가 변형(變形)된 '氺'의 꼴로 쓰이기도 한다. 물의 '氺' 꼴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氺) 양옆으로 물이 끊어져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매우 동적(動的)인 장면을 연상(聯想)시킨다. 이와는 대조적(對照的)으로 수(水)자는 수부(水部) 글자인'샘 천(泉)'이나 '미음 장(漿)'자 또는 전부(田部) 글자인 '논 답(畓)'자의 위나 아래에서 '水'의 꼴로 쓰이는 예도 있다. 이런 쓰임은 물이 고요하게 고여 있는 물의 정적(靜的)인 장면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삼수변(氵)은 물의 움직임 관점(觀點)에서 보면 글자 내에서 동적(動的)인 '氺' 꼴과 정적(靜的)인 '水'의 중간 정도(程度)의 움직임으로 여기면 된다. 이처럼 한자(漢字)는 보편적인 것을 중심으로 양쪽 극단(極端)의 현상까지를 보여주는 경우(境遇)가 많다. 수(水) 부수는 대부분 왼쪽 가장자리에 놓이는'삼수변(氵)'으로 쓰이고, 간혹 글자 밑에 놓여 '氺' 꼴로 변형(變形)되어 쓰인다.수(水) 부수에 속하는 글자는 1) 물의 명칭(名稱)이나 종류, 물이 놓인 장소, 2) 물의 성질(性質)이나 상태, 3) 물의 움직임이나 사람의 행위(行爲)나 동작에 관한 의미(意味)들이 스며있다. 수(水)자는 ①물, ②육지(陸地)의 상대 개념, ③홍수(洪水), ④액체(液體), ⑤평평하다-수평(水平), 수준(水準), ⑥오행(五行)의 하나, ⑦수성(水星)등을 뜻한다. 이 중에서 물의 의미(意味)와 우리 전통과 밀접(密接)한 관계가 있는 오행과 결부(結付)시켜 물의 속성(屬性)에 대한 상징성(象徵性)을 맛보자. 먼저 수(水)자가 물의 의미로 쓰인 예는 수어지교(水魚之交)나 산전수전(山戰水戰) 등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는 물속의 고기처럼 매우 친밀하게 사귀는 '물과 고기의 사귐'이란 뜻으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를 비유(比喩)하는 말로, 주로 임금과 신하 사이의 친밀(親密)함을 이른다. 그리고 산전수전(山戰水戰)은 산에서 싸우고 물에서 싸운다는 뜻으로 세상일의 온갖 고난을 겪은 경험(經驗)을 비유한 말이다. 보통 임금과 신하는 수어지교(水魚之交)와 같이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인 만큼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으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維持)하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이다. 다음으로 수(水)자는 오행(五行)의 하나이다. 물은 음(陰)의 기운을 갖으며 오행(五行)의 하나로 여겨졌는데, 이는 고대인(古代人)에게 물이 우주(宇宙)를 구성하는 원소(原素)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水)자는 혹성 중에서 가장 작고 태양(太陽)에 가장 가까운 별인 수성(水星)을 상징하며 오색(五色) 중에서 흑색(黑色)을 상징한다. 그리고 물(水)은 나무(木)를 만들고 불(火)을 극복하는 팔괘(八卦)의 북(北)쪽을 가리킨다. 북쪽하면 연상(聯想)되는 색깔은 흑색(黑色)이며 북망산으로 가신님을 생각하며 슬프게(哀) 울어 옷깃에 눈물 적시는 애닮은 감정(感情)과 통한다. 또한 수(水)자는 사람의 오장(五臟) 중에서 콩팥인 신장(腎臟)에 해당하여 인체의 노폐물(老廢物)을 오줌과 함께 내보내며 체액의 균형(均衡)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오행 중의 물이 짠맛(鹹)과 관련이 있는 것은 짠 음식을 많이 먹으면 물을 많이 들이키는 것으로 쉬 알 수 있는데, 이는 체내의 염분농도(鹽分濃度)를 희석(稀釋)시키려는 작용(作用)이다. 마지막으로 수(水)자는 유교에서 일컫는 다섯 가지 덕목인 오상(五常)에서 지혜(智)를 나타내는 것으로 어진 사람은 나무가 많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智慧)로운 사람은 물이 많은 바다를 좋아한다는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智者樂水)"란 말을 보아도 쉽게 이해(理解)할 수 있다. 인자(仁者)는 중후한 산처럼 변치 않는 의리 때문에 산을 좋아하는 것과는 대조적(對照的)으로 지자(智者)가 물을 좋아하는 이유(理由)는 물과 같이 막힘없이 사리(事理)에 통달(通達)하고자 하는 성향(性向) 때문이다. ◎ 유래 : 군주민수(君舟民水) 뜻 자세히 살펴보면 ‘군주민수(君舟民水)’는 순자(苟子) 왕제(王制)편에 나오는 사자성어(四字成語)로서 원문(原文)은 ‘군자주야 서인자수야(君者舟也 庶人者水也). 수즉재주 수즉복주(水則載舟 水則覆舟). 군이차사위 즉위장언불지의(君以此思危 則危將焉而不至矣).’로 풀이하면 “백성은 물, 임금은 배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내용(內容)이 담겨져 있다.(한국뉴스투데이)
1105    [그것이 알고싶다] - 지휘대에서 최초로 지휘한 인물은?... 댓글:  조회:4025  추천:0  2017-04-23
합창, 오페라, 관현악 등을 연주함에 있어서 연주자들에게  악곡의 속도, 박자, 강약, 표정 등에 관한 해석의 통일을 기하며, 또 자기의 표현 해석을 지시함으로써, 연주에 빛을 더하여 음악적으로 마무리하는 작업을 지휘라고 한다.   그 작업에 필요한 방법적 체계를 지휘법, 그리고 그 작업의 담당자가 지휘자이다. 지휘자 그 자신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물론 성가대의 경우에는 지휘자가 적당히 원하는 소리를 직접 내줄 수 있으면 좋다). 말하자면 상대에게 소리를 내게 하는 연주자이며,  다루는 악기는 "살아있는 연주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휘의 역사는 길지만 전문적인 지휘자가 등장하게 된 것은,  19세기 들어서 관현악법이 발달하고 악보가 복잡해지면서부터이다. 라이햐르트(J. F. Reichardt; 1752-1814)는 지휘대에서 지휘한 최초의 인물이다. 베버는 1814년에 지휘봉으로써 프라하에서 지휘했고,  멘델스존은 1835년부터 라이프찌히에서 게반트퓻스 관현악단을 지휘했다. 지휘가 근대적인 직업으로서 작곡가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것은  한스 폰 뵐로(Hans von Bulow; 1893-1957)부터이다. 그의 지휘는 템포루바토(tempo rubato)가 상당히 많았지만, 그 때는 로맨티시즘 전성기여서 청중들은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반해,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 토스카니니(A. Toscanini; 1867-1957)는 악보에 충실했고, 연주에 있어서의 주관성, 자의성을 되도록 배제하였다.   ////////////////////////////////////////////////////지휘봉 사용법=== 지휘자들 중에는 지휘봉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맨손으로 지휘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지휘봉을 사용할 때의 장점중의 한 가지는 지휘하는 동작이 그 길이만큼 확대되어 대원들이 보기가 쉬워진다는 것이며 지휘봉을 사용하지 않을 때의 장점은 손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표정을 만들 수 있다는 것과 부드러운 곡을 지휘할 때도 표현이 효과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기자신이 판단하여 편리한대로 선택하면 된다. 여기서는 기본 테크닉을 연습하는 동안 지휘봉을 사용하기로 하자.  지휘봉은 지휘봉의 손잡이 끝을 손바닥 가운데 부분에 대고 집게손가락의 첫마디와 엄지손가락으로 지휘봉을 잡은 후 나머지 손가락을 가볍게 굽힌다. 팔을 움직일 때는 팔의 하박과 지휘봉이 항상 수평이 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박이란 팔꿈치에서 손목까지를 말한다)  처음에는 지휘봉 잡는 것이 어색할 수 있으나 연습을 하는 동안 점차 익숙하여질 것이다. 지휘봉을 사용하여 기본 테크닉을 잘 연습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휘봉을 잡지 않고 지휘하는 손 모양까지도 훨씬 더 보기 좋게 변해있을 것이다.
1104    [고향문단소식]-화룡출신 김영자 소설가 "거부기" 등을 타다... 댓글:  조회:3878  추천:0  2017-04-23
김영자 소설집 《거부기 바다로 가다》 출간 (ZOGLO) 2017년4월21일  소설가 김영자의 소설집 《거부기 바다로 가다》가 일전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됐다. 연변작가협회계렬총서중 7번째 작품집으로 《거부기 바다로 가다》는 김영자가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최근 년간까지 창작한 중단편소설들을 엄선해 묶었으며 여기에는 2편의 중편소설과 9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됐다.   소설들은 녀성특유의 섬세한 필치와 탄탄한 서사로 인간 삶의 보편적인 문제들을 다뤘으며 특히 소설집의 제목으로 된 단편소설 “거부기 바다로 가다”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제33회 “연변문학”상 후보작으로 선정돼 큰 호평을 받았다.   한편, 작가는 창작후기에서 “이 세상에 ‘꽃’으로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져가는 녀인들, 그 ‘꽃’들의 여리디여린 혼을 나의 두손안에 놓고 입김으로 불며, 시린 손을 불듯이 그 아픈 마디마디를 불어서 피워낸것이 나의 소설”이라고 말하면서 “힘 없고 고초 많은 민초들의 삶이 내 글이 되고 소설이 되였다”고 고백했다. 또한 “초심을 잃지 않고 한없는 열정으로 생명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며 문학인으로서의 소신을 지켜갈것”을 밝혔다.   /연변일보 박진화 기자  
1103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 댓글:  조회:3829  추천:0  2017-04-20
  자아를 변화시키는 좋은 습관                                                                                         ∘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                                   - 일찍이 로마의 16대 황제이자 의 저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작이 반’이라고 말함.                ∘ 돈을 모으려면 의식부터 바꿔라!                 - 모아야겠다는 의식이 없을 때의 돈은 물이다.                 어디로 새어 버렸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 모아야겠다는 의식을 갖기 시작하면 돈은 모래가 된다.                 알게 모르게 새기 시작하고, 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때는 가슴이 아프다.               - 반드시 모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면                 비로소 돈은 자갈이 된다.                 손아귀를 벌리지 않는 한 절대로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               - 그러기 위해서는 돈쓰는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                  1. 돈은 뭉칫돈으로 모을 것                  2. 생활비는 보너스 같은 가욋돈으로 사용할 것                  3. 사고 싶은 물건은 최대한 미룰 것                     일주일 뒤, 한달 뒤, 일년 뒤로 미뤄라.                ∘ 노력은 재능을 뛰어 넘는다.                                 - 아인슈타인 ‘나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호기심이 왕성했을 뿐이다.’               - ‘천재’라고 소문난 피아니스트나 첼리스트의                 연습량을 한번 보라. 박세리는 어떠한가?                                  ∘ 효과적으로 인맥을 관리하라                  - 헤드헌팅 전문회사에서 3년차 이상의 직장인                 1,122명을 대상으로 앙케트조사               - 인맥 관계의 중요성을 묻는 질문에 96%가                 중요성을 인정했으나 그 가운데 제대로 인맥                 관계를 하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34%에 불과               - 인맥관리가 부실한 이유에 대해서 ‘소극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30.5%, 방법을 몰라서                 라고 대답한 사람이 29.3%였음                 ※ 인맥관리는 수평적으로 하는 게 좋다.                  사람만나는 것 자체를 즐겨야 한다.                ∘ 생각을 바꾸면 통찰력이 키워진다.                 - ‘나비효과’란게 있다.                 서울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짓을 하면                 다음달 쯤 미국에서 태풍이 일어날 수 있다는                 기상학적 연구에서 비롯된 말이다.               -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로 1979년 ‘브라질에서 나는                 나비의 날개짓이 텍사스 주에서 발생한 토네이도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라는 논문을 발표.               - 그는 ‘현대 과학은 천체운동과 로켓운동은                 정확히 예측하면서, 날씨의 변화만은 왜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는가?’ 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는 컴퓨터를 통해 실험한 결과                 날씨는 끊임없이 불규칙적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일주일 뒤의 날씨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               - ‘나비효과’가 좀더 발전한 것이 ‘카오스이론’                 이며, 현대인의 생활을 돌아보면 ‘카오스적’인                 것과 ‘비카오스적’인 것으로 둘러싸여 있다.                 ※ 통찰력은 노력하면 키워진다.                  성공하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작은 변화에 눈여겨보라.                ∘ 내 곁에 잠들어 있는 리더쉽을 깨워라                  - 삼국지의 유비를 보라. 칼 싸움을 잘하지도 못하고,                 장비보다 호탕하지도 않고 관우보다 인품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또한 제갈공명처럼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리더 아닌가                ※ 훌륭한 리더가 되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대의와 봉사와 희생정신이 리더가 갖추어야 할 기본 자질이다.                  ∘ 책을 안 읽는 사람은 진화를 포기한 사람이다.                 - 일본 고이즈미 총리 ‘책을 읽고 사물을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얼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 책은 많이 읽는 사람에게서는 품격이 느껴진다.                 아무말을 하지 않고 있어도 얼굴과 몸짓에서                 삶의 깊이가 느껴진다. 책을 전혀 읽지 않은                 사람은 고급스런 옷을 입고 있어도 왠지 가볍고 경박해 보인다.               - 진화론에 의존하여 인간이 계속 진화되어 왔다고                 가정한다면 인간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그 진화를 가능케 한 것이 책과 같은 지식의                 전달체이나, 한 사람이 읽은 책은 그가 죽음으로써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 속에 지식이 새겨지고                 그 유전자는 다시 자식을 통해 전달된다.                ∘ 승자가 될 것이냐, 패자가 될 것이냐                  -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렌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 고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일 뿐 하루아침에 성공 할 수는 없다.                  ※ 성공을 하겠다는 각오, 성공을 향한 치밀한                   계획, 성공을 향한 자기혁신, 부단한 노력 등                   수많은 것들이 하나가 되었을때 비로소                   성공이라는 문턱을 넘을 수 있다.                    ∘ 아이디어는 가까운 곳에 있다.                     1. 고정관념 깨기                   2. 고정되어 있는 것 회전시키기                   3. 반대로 생각하기                   4. 재질 바꾸기                   5. 용도 바꾸기                   6. 보다 편리하게 하기                   7. 보다 안전하게 하기                   8. 보다 재미있게 하기                   9. 추가하거나 생략하기                  10. 남의 아이디어 변형하기                  11. 폐품 이용하기                  12. 소리 첨가하기                  13. 과학적 원리 접붙이기                  14. 에너지 절약하기                ∘ 모리스 마테를 링크의 동화극 ‘파랑새’                                  「- 틸틸과 미틸은 요술쟁이 할머니의 부탁을 받고                   행복의 상징인 파랑새을 찾아 나선다.                   ‘추억의 나라’, ‘달이 비치는 숲속’, ‘한밤중의 묘지’                   ‘행복의 궁전’, ‘미래의 나라’를 찾아 가지만                   결국 파랑새를 찾지 못한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나니 새장속에 그토록 찾던 파랑새가 있다.                 - 틸틸과 미틸이 찾아 헤맸던 파랑새를                   가까이서 발견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행복은 먼 별나라에서 온 생물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 속에서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불교에서의 일화와 일맥상통              ∘ 신하나 노예가 되지 말라                 - 고사성어 중에 반식재상(伴食宰相)이라는 말이 있다.               -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무능한 재상을 일컫음.                 ※ IMF이후 구조조정의 한파가 몰아쳐 평생 직장의                  개념이 희박해지면서 무능자 퇴출.             ∘ 칠전팔기의 사업가가 내린 ‘사업의 정의’                 - 사업은 동전으로 탑을 쌓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쉽지만 높이 쌓을수록 무너질 확률이                 높아진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고 바닥을 넓게 깔면서 차근차근                 쌓아올려야 한다. 대부분의 사업가들이                 빈약한 기초를 보강할 생각은 하지 않고                 높이 쌓으려고만 한다. 그러니 조금만 외풍이                 불어도 쉽게 무너져 버린다.               - 개구리와 황소개구리의 배는 크기가 다르다.                 시합을 하면 개구리 배가 터질 수밖에 없다.                 현명한 개구리라면 황소개구리만큼 몸집을                 키워놓고서 누구 배가 더 큰지 시합을 해야한다.                  ※ 인간은 경쟁심을 통해 발전한다.                  그러나 지나친 경쟁심은 때로 파멸을 낳기도 한다.                ∘ 실패를 빨리 잊어라.                  - 투견은 한번 싸움에서 패하면 제대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다. 특히 같은 상대를                 만나면 싸우기도 전에 꼬리를 내린다.                 자신보다 강하다는 인식이 뇌리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 사람은 투견과 다르다. 그러나 한번 실패하면                 위축되기는 마찬가지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무작정 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보다는                 계기를 만들어서 실패를 잊는 것이다.                ∘ 일과 여가를 구분하라.                  - 직장인이든 자영업자이든 일을 하기 위해                 여가를 즐기고,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일은 한다. 떠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일을 하기 위해 열심히 떠난다.                 20세기인이 미래를 위해 살았다면 21세기인은                 현재를 위해 산다. 가치관이 변한 것이다.                 ※ 건강한 미래를 위해 레저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다.                ∘ 빠른 결단이 성패를 좌우한다.                  - 야구에 보면 ‘타이밍’이 있다. 뛰어난 투수들은                 다양한 볼 배합으로 타자의 배팅 타이밍을 뺏는다.                 축구에도 ‘타이밍’이 있다. 한국축구가 문전에서                 골 처리 능력이 부족한 것은 번번이 슛을 해야                 할 타이밍을 놓치기 때문이다.               - 사업을 시작하는 데도 ‘타이밍’이 있다                 ※ 결단력이 없는 사람은 매번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고 뒤늦게 후회한다.               ∘ 자신만의 것을 가져라.                  - 꽃들은 모두 자기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를 갖고                 있다. 과일은 모두 자신만의 맛과 향을 갖고 있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각기 다른 자신만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               - 성공한 사람을  벤치마킹 하다보면 자신만의 것을                 잃어버리기 쉽다. 나쁜 습관은 버리되 자신의                 고유한 것은 발전시켜 나가자. 그것은 취미일 수도                 있고, 스트레스 해소법일 수도 있고, 꿈일 수도 있다.               - 향기 없는 꽃에는 벌이 모여 들지 않는다.                 특색 없는 인간은 매력이 없다.                 그런 인간에게는 좋은 사람이 달라붙지 않는다.                 ※ 시장L씨의 취미: 색소폰                  보험회사 지사장B씨 불우이웃돕기: 연봉 2%               ∘ 경쟁 보다는 협력을 하라.                  - 현대사회의 새로운 조류는 합성어 코피티션 (copetition):                 협력(cooperation)+경쟁(competition)               - 삼성과 도시바, LG텔레콤과 KTF의 합작 등과                 같은 경쟁 업소 간의 전략적 제휴                    - 협력은 시너지 효과를 낳는다.                   1+1=2가 아니라 때로는 3이되고, 4또는 그이상이 된다.                ∘ 실패는 성공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 실패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 까지 147번이나                   실패했고, 라이트 형제는 비행에 성공하기                   까지 무려805번이나 실패                  ※ 실패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깨달았다면                   더 이상 실패에 연연해 하지 마라.                ∘ 신상필벌/논공행상                   - 의 ‘오서고담전’편에 보면 논공행상이                   나온다. 손권은 위나라 군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차별을 두어서 상을                   내렸다. 고담은 큰 상을 받았는데 그를 미워하던                   장수들이 고담을 모함하였다. 손권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고담을 좌천시키고, 고담은                   그런 손권을 원망한다는 내용.                 - 전국시대 통일을 앞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있었다. 공을 세운 가신들에게                   토지를 나눠줘야겠는데 토지가 턱없이 부족했다.                   논공행상을 어설프게 했다가는 지방 호족들이                   힘을 합쳐 반란을 일으킬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생각도 못한 그는 대륙을                   점령해서 호족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대륙진출’이라는 명분아래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물론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는 복잡하나                   그 중에서 경제적 요인으로 꼽히는 것이 논공행상이다.                ∘ 한 분야의 선구자가 되어라.                       - 만약 백남준씨가 다른 화가들처럼 캔버스                   에다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면 지금처럼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그가 아무리 훌륭한 그림을 그린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기존의 대가들과 그림                   애호가들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는 1963년 ‘비디오아트’라는 독특한                   장르를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였다. 그로부터                   36년 뒤인 1999년, 세계적인 미술전문지인                   미국의 ‘아트뉴스’는 지난 1세기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25인에 백남준을 피카소,                   달리, 킨딘스키 등과 함께 나란히 올렸다.                   그의 개척자 정신이 빚은 결실이다.
110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동북범"아, 맘대로 뛰여 놀아라... 댓글:  조회:3518  추천:0  2017-04-20
中, '동북범국가공원' 건설계획 승인 (ZOGLO) 2017년4월20일  (선양=연합뉴스) 홍창진 특파원 = 중국 동북지방에 들어설 동북범국가공원(东北虎豹国家公园) 건설계획에 대한 중앙정부 승인이 나왔다고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밝혔다. 19일 국가발전개혁위 홈페이지에 따르면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이 공동 수립한 '동북범(백두산호랑이의 중국식 명칭) 국가공원 체제 시행방안'에 대해 중앙정부가 비준을 완료하고 두 성성 정부에 시달했다. 이에 따라 지린·헤이룽장성 정부는 삼림총국 및 임업청, 성 발전개혁위 등 10여 개 부서이 참여하는 동북범국가공원 건설사업 영도소조, 건설본부를 구성해 사업에 착수키로 했다. 동북범국가공원은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칭(汪淸)·훈춘(琿春)과 헤이룽장성 닝안(寧安)·둥닝(東寧)을 아우르는 라오예링(老爺嶺) 남부지역에 총 1만5천㎢ 면적으로 조성될 계획이다. 이는 서울 면적(605.21㎢)의 24.8배에 해당한다. 이 중 지린성이 차지하는 면적이 1만700여 ㎢(71.3%), 헤이룽장성 면적이 4천300여 ㎢(28.7%)이다. 中 헤이룽장성에서 카메라에 포착된 동북범 [중국 신화사 캡처] 2016년 7월 中 헤이룽장성 헝다오허쯔(橫道河子)진에서 촬영된 백두산호랑이의 모습.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은 호랑이공원 조성면적 내 경지, 인삼밭, 목장, 저수지, 광산, 도로와 철도 등을 단계별로 이전하고 주민 보호대책을 마련해 시행할 방침이다. 헤이룽장성은 야외 데이터 검측 등 우선적인 사업추진에 필요한 6천만 위안(약 99억3천500만원)을 중앙정부에 지원 신청키로 했고, 지린성도 사업비 지원을 신청할 예정이다. 국가발전개혁위는 "지금까지 흩어진 동북호랑이 서식지 관리를 맡은 행정단위가 별개인 탓에 통일된 보호·관리가 힘들었고 호랑이, 표범의 서식공간이 축소되고 분할됐다"며 "국가공원 건설 및 조성사업을 통해 이들의 생태환경을 보호하며 개발제한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가 멸종위기종인 동북범(백두산호랑이) 보호를 위해 2013년 이후 지린·헤이룽장성 내 서식지 일대 벌채를 금지하고 보호활동을 펼친 결과, 현재 지린성 연변자치주 자연보호구에 호랑이 27마리가 서식하고 헤이룽장성 라오예링보호구에 8~10마리가 서식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1101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의 높이는 2,750메터이다... 댓글:  조회:7305  추천:0  2017-04-20
  위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강도와 중국 지린 성이 접하는 국경 크기 높이 2,750m 대륙 아시아 요약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과 국경을 이룬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백두산의 중앙부에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회백색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 7개는 중국에 속하며, 3개는 국경에 걸쳐 있다.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회백색 산봉우리들이 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백두산에 대해 기록한 최초의 기록에서는 이 산을 불함산으로 불렀으며, 이후 기록에는 단단대령·개마대산·태백산·장백산·백산 등으로 나타난다. '백두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기록한 문헌은 〈고려사〉다. 목차 자연환경 ┗ 지질과 화산활동 및 지형 ┗ 기후 ┗ 동·식물과 토양 ┗ 물과 자원 한민족과 백두산 조사활동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 지린 성 안투 현[安圖縣] 얼다오바이허 진[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백두산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長白山脈]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창바이 산[長白山]이라고 하며, 만주어로는 '귀러민산예아린'이라고 부르는데 '귀러민'은 길다(長), '산예'는 희다, '아린'은 산을 의미한다. 문헌에 나타난 백두산 최초의 이름은 〈산해경 山海經〉에 불함산(不咸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단대령(單單大嶺)·개마대산(蓋馬大山)·태백산(太白山)·장백산(長白山)·백산 등으로 불렸다. 한국의 문헌에서 백두산에 관한 기록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이편에 태백산(太伯山)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나며, 〈고려사〉에도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했다"하여 '백두산'의 명칭이 문헌상에 처음 기록되었다. 한민족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본격적으로 숭상한 것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고 추정된다. 백두(白頭)라는 이름은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 東國名山記〉,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 林下筆記〉 등의 문헌에 의하면 백두산의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범위는 천지 중심의 마그마 활동에 따른 화산암의 분포지로 한정해보면 현재 북한측의 면적은 8,000㎢로 전라북도의 면적(8,052㎢)과 비슷하고 개마고원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중국측의 백두산 화산암의 분포지까지 합하면 3만㎢에 이른다. 또한 해발고도 1,800m까지는 완만한 경사(8~12°)를 나타내어 방패 모양의 순상화산이나, 1,800~2,500m는 급경사로 종 모양의 화산을 이룬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741m의 백암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 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자연환경 지질과 화산활동 및 지형 백두산지역 지질 단면도 그림1. 백두산지역 지질 단면도 1. 선캄브리아기 화강편마암류 2. 제3기말 현무암대지 3. 제3기말 경사 현무암 고원 4. 제4기 알칼리조면암류 5. 부석 백두산은 구성암석과 지질구조에 의해서 크게 5부문의 수직구조로 파악된다(그림 1). 백두산의 밑바닥은 선캄브리아기의 화강편마암류이며, 그위에 제3기말의 현무암대지, 제3기말의 경사 현무암고원, 제4기의 알칼리 조면암류, 부석의 순서로 덮여 있다. 백두산의 밑바닥을 이루는 선캄브리아기의 화강편마암류는 평안북도에서 함경북도에 걸치는 평북육괴·함북육괴로 백두산의 지표에서는 극히 일부분의 침식산지를 빼고는 노출되어 있지 않다. 제3기에 들어서 지표로부터 60~70㎞ 깊이의 지하에서 상부 맨틀을 구성하는 암석 가운데 방사능원소들이 붕괴되면서 열점이 만들어졌다. 이의 영향으로 당시의 지표암석인 화강편마암류에 수직방향의 쪼개진 틈(열곡구조)이 만들어졌다. 백두산 형성사 그림2. 백두산 형성사 1. 제3기 열곡구조 형성 2. 제3기말 현무암대지 형성 3. 제3기말∼제4기초 경사 현무암고원 형성 4. 백두산 형성(제4기 화산활동 사이 사이에 5번의 빙하작용 겪음) 해발고도 1,000m까지는 완만한 경사의 현무암대지이다. 이는 제3기말인 310만~1,990만 년 전 6회의 화산분출로 200~400m 두께의 현무암대지가 만들어졌다. 이는 방사능원소들의 붕괴로 만들어진 열점에서의 열에 의해서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의 마그마 챔버(magma chamber)에 모였다가, 자체 압력이 증가되면서 열곡구조의 약한 틈을 따라서 분출한 현무암이다. 이 현무암은 잘 흐르는 염기성 용암이 굳어진 것으로 천지 주변의 200~300㎞ 범위에 흘러서 3만㎢의 백두산 화산암의 분포지가 되었다. 백두산의 중국 쪽의 사면에서는 해발고도 1,000~1,800m 55㎞의 거리가 경사도 8~12°의 완만한 현무암고원이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초의 제2차 염기성 용암의 분출(약 260만~290만 년 전)로 만들어진 녹회색의 현무암으로 470m 두께로 덮여 있다. 해발고도 1,800m까지, 즉 현무암대지와 경사 현무암고원까지가 순상화산을 이루는데 이는 잘 흐르는 염기성 용암이 여러 번 분출된 까닭이다. 해발고도 1,800~2,500m는 보다 급경사(35~40°)의 종 모양 화산을 나타낸다. 이는 제4기에 21만~61만 년 전, 13만 년 전, 9만~10만 년 전의 3회에 걸쳐 잘 흐르지 않으며 점성이 큰 산성 용암이 분출하여 만들어진 조면암이기 때문이다. 그 두께는 약 650m이다. 백두산 화산재의 분포범위 그림3. 일본 북부에 도달한 백두산 화산재의 분포범위(○표는 확인된 지점, 숫자는 화산재의 두께[cm], tr.는 두께 1cm 이하) 천지 주변의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백두산 꼭대기 지표면은 40~60m 두께의 회백색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는 가스가 많고 폭발력이 큰 화산에서의 분출 마지막 시기에 나타난 것으로, 공중 분출물이 떨어져 덮인 것이다. 부석은 고온의 마그마가 지상에 분출됨에 따라서 이에 용해되어 있었던 휘발성분과 수증기 등의 가스가 증발되어 바위 부스러기에 구멍이 많이 생기게 된 것으로, 가벼워서 물에 뜬다. 이와 같은 천지 주변의 부석더미는 백두산 화산활동의 최후시기를 나타내며, 천지 형성과정과 그 시기를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 천지는 수면의 해발고도 2,190m, 평균수심 213.3m, 가장 깊은 곳 384m, 남북거리 4.85㎞, 동서거리 3.55㎞, 둘레 14.4㎞, 면적 9.165㎢로 매우 넓고 깊은 호수이다. 일반적으로 마그마의 분출만으로 이루어진 화구는 그 둘레가 2㎞ 이상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천지 둘레는 이보다 훨씬 길며 주변의 외륜산에는 화산폭발의 최후시기를 나타내는 부석이 두껍게 덮여 있다. 따라서 천지는 이 부석의 공급원이 되었던 화산폭발과 함께 화구가 함몰하여 이루어진 칼데라에 빗물 등이 모여서 된 칼데라호이다.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매우 강대하여 화산재가 대류권 상층까지 올려져서 이곳에서 부는 강한 서풍인 제트기류에 의해서 백두산에서 약 1,000㎞ 떨어진 일본의 동북지방 북부에서 홋카이도[北海道] 남부까지 흩어져 있다(그림 3). 이 화산재는 그 성분이 천지 주변의 회백색 부석과 같으며, 가까운 동해 밑바닥에서는 10㎝ 내외의 두께이고 멀리 떨어진 일본 북부에서는 5㎝ 내외로 보다 엷어진다. 일본에서는 이 화산재가 헤이안[平安] 시대 후기의 유물포함층에 존재하여 10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에 화산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두산 정상부에서 부석으로 덮여 있는 탄화된 나무등걸(그림 4의 매몰림대)을 이용한 탄소 동위원소 연대측정값도 1050±70년 B.P.(B.P.는 before present의 약자로 1950년을 기준하여 그 이전의 연대값을 나타냄), 1120±70년 B.P.를 나타낸다. 따라서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금부터 약 1,000년 전인 고려시대 초기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97년(선조 30) 8월 26일, 1668년(현종 9) 4월, 1702년(숙종 28) 4월 14일의 3번의 분화가 기록되어 있다. 백두산의 화산활동은 천지 밑 62~67㎞ 깊이의 상부 맨틀 암석 중 방사능 원소들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열에 의해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 깊이의 마그마 챔버에 모였다가 자체압력이 증가하면서 지각의 약선대를 따라서 분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지금부터 1,000여 년 전 대규모 화산폭발이 나타나면서 마그마의 저장고였던 마그마 챔버가 함몰되어 천지의 칼데라를 만든 후 화산활동은 차츰 약화되면서 휴화산이 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질연대로 보면 오래지 않아서 그 영향으로 천지를 중심으로 반지름 50㎞ 이내에는 소규모의 지진이 자주 나타나고(중국측 자료에 따르면 1973년 4월과 6월에 진도 2.1 및 2.5의 지진이 있었음), 온천이 많다. 백두산의 특색있는 지형으로는 화산지형·빙하지형·주빙하지형 등을 꼽을 수 있다. 화산지형은 주변부의 순상화산과 중앙부의 종상화산이며, 중심부는 칼데라와 외륜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번의 화산분출로 이루어진 복성화산임을 알 수 있다. 빙하지형으로는 U자곡과 권곡이 있다. 중국 쪽에서 천지에 이르는 길인 얼다오바이허의 골짜기 가운데 창바이 폭포-빙장 사이의 길이 4㎞, 너비 1㎞의 골짜기가 빙하침식곡인 U자곡이다. 이는 현재 중국의 영토이다. 남포태산(2,433m)의 남쪽 기슭인 포태천 계곡에 빙하퇴적 제방인 빙퇴석(maraine)이 있고, 천지 주변의 칼데라 벽에 빙하침식의 흔적인 권곡과 빙퇴석의 존재가 보고되었다. 이들 빙하지형은 마지막 빙하기(약 1만~7만 년 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어왔으나, 이는 약 1,000년 전 백두산의 화산폭발과 그 함몰에 따른 천지형성과 모순된다. 권곡이 이때의 파괴에서 남은 것이라고 해도 빙퇴석의 존재는 여전히 모순된다. 천지 주변 외륜산 기슭의 빙하지형 문제는 우리나라에서의 마지막 빙하기의 빙하와 천지형성 문제를 푸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백두산은 해발고도 약 2,000m가 수목한계선이 되어 이보다 높은 지대는 짧은 여름철에 풀만 자라는 산악 툰드라 지대에 속해 주빙하지대이다. 천지 주변의 그늘진 골짜기에는 가장 더운 달인 7월에도 눈이 남아 있고, 땅속 0.8~1m 깊이 이하에 영구동토층이 있어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 주빙하지형으로는 백두산 기상대 근처 동쪽 사면에 표토가 얼고 녹는 것의 반복에 의해 형성된 계단 모양의 솔리플럭션(solifluction), 역시 기상대 부근 2,180m 고도에 작은 무덤 모양으로 표토가 0.3~0.4m 높이로 부풀어 오른 대규모의 유상구조토, 잔설의 재동결과 녹은 물의 침식에 의해서 지면이 둥그렇게 움푹 파인 설식요지, 암석이 얼고 녹는 것의 반복에 의해서 부서지고 무너져내려 바위부스러기 더미를 이룬 애추(talus) 등이 보고되어 있다. 백두산 꼭대기에서는 강한 바람이 부는 때가 많아 바람이 깎은 지형현상으로 풍식구멍·풍식버섯·풍식기둥 등이 암석에 많이 나타나 있다. 기후 천지 주변의 연평균기온은 -7.3℃이며, 1월평균기온 -24.0℃, 7월평균기온은 8.5℃이다. 월평균기온으로 보면 영상의 기온은 6~9월의 4개월간 10℃ 이상으로 오르지 않고, 영하의 월평균기온은 10월에서 다음해 5월까지 8개월간 계속된다(표). 이를 쾨펜의 기후구로 나타내면 한대기후 가운데 툰드라 기후에 속한다. 천지 주변의 백두산 기후는 동결기(10~5월의 8개월간)와 해빙기(6~9월의 4개월간)의 2계절로 나뉜다. 동결기에는 기온이 매우 낮아서 가장 낮은 기온이 -40℃까지 나타나고, 해빙기(이곳의 여름철)에도 월평균기온은 10℃ 이상으로 오르지 못해 땅표면이 녹기만 할 뿐 서늘하여 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풀만 자란다. 첫서리는 8월 상순에, 마지막서리는 7월 하순에 내려서 무상기간은 7월말에서 8월초까지 20일간이다. 연강수량은 1,500㎜로 주변의 낮은 지대인 삼지연보다 600㎜ 더 많다. 이는 해발고도가 높아서 응결고도 이상 지역이 넓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개가 자주 발생하여 강수량이 많은 6~9월에 월평균안개일수는 15일이며, 그중 80%가 비와 함께 하여 안개의 평균 계속시간은 6.6시간이다. 7월과 8월에는 비가 많고, 6월과 9월에는 우박으로 내릴 경우가 많다. 눈은 9월 중순에서 다음해 6월 중순까지 9개월간 내리며, 8개월 이상 눈이 쌓여서 1.2~2m 정도의 두께에 이른다. 바람이 매우 강하며, 겨울철에는 북서풍이, 여름철에는 남서풍이 주로 분다. 따라서 백두산의 기후는 기상변화가 매우 심한 고산 툰드라 기후를 나타낸다.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연평균 월평균기온(℃) -24.0 -21.5 -16.6 -7.5 -0.6 3.9 8.5 8.5 1.7 -5.2 -13.8 -21.1 -7.3 풍속(m/s) 15.6 14.5 14.1 12.0 11.3 7.4 7.3 6.8 8.5 10.0 15.5 17.4 11.7 천지주변의 월평균기온과 풍속1)1) 동·식물과 토양 백두산 그림4. 백두산 동쪽사면의 식물분포와 지질추정도 1. 고산대 2. 침엽수림대 3. 침·활엽수림 혼재림대 4. 매몰림대 이 화산재는 그 성분이 천지 주변의 회백색 부석과 같으며, 가까운 동해 밑바닥에서는 10㎝ 내외의 두께이고 멀리 떨어진 일본 북부에서는 5㎝ 내외로 보다 엷어진다. 일본에서는 이 화산재가 헤이안[平安] 시대 후기의 유물포함층에 존재하여 10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에 화산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두산 정상부에서 부석으로 덮여 있는 탄화된 나무등걸(그림 4의 매몰림대)을 이용한 탄소 동위원소 연대측정값도 1050±70년 B.P.(B.P.는 before present의 약자로 1950년을 기준하여 그 이전의 연대값을 나타냄), 1120±70년 B.P.를 나타낸다. 따라서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금부터 약 1,000년 전인 고려시대 초기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97년(선조 30) 8월 26일, 1668년(현종 9) 4월, 1702년(숙종 28) 4월 14일의 3번의 분화가 기록되어 있다. 백두산의 화산활동은 천지 밑 62~67㎞ 깊이의 상부 맨틀 암석 중 방사능 원소들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열에 의해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 깊이의 마그마 챔버에 모였다가 자체압력이 증가하면서 지각의 약선대를 따라서 분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지금부터 1,000여 년 전 대규모 화산폭발이 나타나면서 마그마의 저장고였던 마그마 챔버가 함몰되어 천지의 칼데라를 만든 후 화산활동은 차츰 약화되면서 휴화산이 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질연대로 보면 오래지 않아서 그 영향으로 천지를 중심으로 반지름 50㎞ 이내에는 소규모의 지진이 자주 나타나고(중국측 자료에 따르면 1973년 4월과 6월에 진도 2.1 및 2.5의 지진이 있었음), 온천이 많다. 백두산의 특색있는 지형으로는 화산지형·빙하지형·주빙하지형 등을 꼽을 수 있다. 화산지형은 주변부의 순상화산과 중앙부의 종상화산이며, 중심부는 칼데라와 외륜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번의 화산분출로 이루어진 복성화산임을 알 수 있다. 빙하지형으로는 U자곡과 권곡이 있다. 중국 쪽에서 천지에 이르는 길인 얼다오바이허의 골짜기 가운데 창바이 폭포-빙장 사이의 길이 4㎞, 너비 1㎞의 골짜기가 빙하침식곡인 U자곡이다. 이는 현재 중국의 영토이다. 남포태산(2,433m)의 남쪽 기슭인 포태천 계곡에 빙하퇴적 제방인 빙퇴석(maraine)이 있고, 천지 주변의 칼데라 벽에 빙하침식의 흔적인 권곡과 빙퇴석의 존재가 보고되었다. 이들 빙하지형은 마지막 빙하기(약 1만~7만 년 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어왔으나, 이는 약 1,000년 전 백두산의 화산폭발과 그 함몰에 따른 천지형성과 모순된다. 권곡이 이때의 파괴에서 남은 것이라고 해도 빙퇴석의 존재는 여전히 모순된다. 천지 주변 외륜산 기슭의 빙하지형 문제는 우리나라에서의 마지막 빙하기의 빙하와 천지형성 문제를 푸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물과 자원 천지의 총저수량은 20억t으로 그 가운데 70%는 빗물이며, 나머지 30%는 지하수가 솟아 오른 용천수이다. 천지에는 물고기는 없고, 식물성 플랑크톤이 5종, 작은 동물과 곤충류가 4종, 그리고 이끼가 생장한다. 천지의 물은 중국측의 달문으로만 유출되어 창바이 폭포에서 얼다오바이허를 흘러 쑹화 강[松花江]을 이룬다. 압록강과 두만강으로는 지하수로서 유출될 뿐이다. 장군봉(2,750m) 부근의 해발고도 2,000m에 있는 백두폭포는 높이 18m, 너비 0.8m로 1단계에서 7m, 2단계에서 11m의 높이를 나타내는 2단계 폭포이다. 천지의 물이 지하수화해 용천수로 떨어져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1년 내내 흐른다. 중국의 창바이 폭포-얼다오바이허 계곡에는 수온 37~82℃의 온천이 13개 있고, 북한에서도 천지 남서부에서 수온 73℃의 온천이 발견되었다. 백두산의 최대자원은 적송·잎갈나무·가문비나무·자작나무 등의 삼림으로서, 이들 목재는 철도와 압록강 및 두만강의 뗏목에 의해서 길주·만포·무산의 제재소로 운반된다. 기타 자원으로는 건축용의 골재와 단열재로 이용 가능한 부석, 천연수로 이용되는 천지의 물, 약초와 산나물 등을 들 수 있다. 한민족과 백두산 백두산 천지 백두산 분지에 물이 고인 칼데라 호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신산(神山)으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숙신족·읍루족·말갈족·여진족·만주족 등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전설화·신격화했다. 풍수지리에서는 지세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을 '기'(氣)가 결집된 머리로, 낭림-태백-소백 산맥을 백두산의 기가 전달되는 등뼈산맥으로서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인식했다. 그밖에 청나라의 번영도 태산(泰山)·장백산(長白山) 지맥설(支脈說)을 통해서 풍수지리상으로 백두산의 정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북방 이민족의 정신적 구심점과 활동무대가 되어왔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국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개척하자 백두산을 그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려고, 1712년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백두산정계비). 그 내용 가운데 토문강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청나라와의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으며, 간도 및 녹둔도의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09년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두만강이 국경선으로 결정되었으며, 지금 백두산은 천지까지도 분할되어 천지 북쪽 2/5는 중국측에, 남쪽 3/5은 북한측에 속한다. 조사활동 백두산에 관한 최초의 등산기록은 1764년(영조 40) 함경도의 실학파 선비인 박종이 쓴 〈백두산유산록〉이다. 그는 5월 14일 함경북도 경성을 출발하여 5월 23일 백두산 꼭대기에 오른 후, 6월 2일에 돌아와 18일간에 걸쳐서 백두산을 등산했다. 최남선은 1926년 7월 24일부터 8월 7일까지 동아일보사의 백두산 탐험대에 동행하여 백두산 정상까지 오른 후, 1927년에 기행문인 〈백두산근참기〉를 발표했다. 이는 백두산의 지리·역사·민속 뿐만 아니라 백두산 문화론, 민족정기의 고취, 조국애의 고창 등을 내용으로 한 웅대한 기행문학이다. 더구나 1931년에 행방불명된 백두산정계비의 자세한 내용과 그것을 세울 때의 자세한 상황을 기록하여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1936년 8월 7일부터 18일까지의 12일 동안 조선일보사가 주관하여 조사한 후, 그 탐험대원들이 펴낸 〈아아! 천지다〉는 쉽게 씌어져서 일반인들이 백두산을 인식하기에 적절한 책이다. 겨울철의 등산기록으로는 〈백두산-교토제국대학 백두산원정대 보고〉가 있다. 1934년 12월 20일 일본 교토를 출발하여 다음해 1월 21일 교토에 돌아오는 등산보고서로, 겨울철 등산의 어려움과 당시까지의 백두산에 대한 문헌, 등산 중의 사진 등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최근의 조사보고로는 1989년 8월 2일부터 6일까지 백두산 식물을 조사한 〈백두산의 꽃〉이 있다. 중국측의 조사뿐이지만, 백두산 식물의 천연색 사진과 생물학 분야의 조사가 요약되어 있어서 생생한 자료가 된다. 북한은 백두산의 일부를 1959년에 '백두산 자연보호구'로 지정했으며, 1976년에는 이 구역을 확장했다. 중국은 1958년 천문봉(2,650m) 부근에 기상대를 설치하고, 1960년에는 2,100㎢를 '창바이 산 자연보호구'로 지정했다. 북한과 중국측의 자연보호구는 1980년에 '국제생물권보호구'로 지정되었다. 백두산의 교통로는 북한이나 중국을 통하는 2가지 방법이 있다. 북한에서는 평양에서 백두산 입구인 삼지연까지 비행기·열차·자동차 편이 있다. 삼지연에서 백두역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이며, 백두역에서 향도역까지는 케이블카로 10분 걸린다. 향도역에서 장군봉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이다. 중국 쪽에서는 연변 조선족자치주 내의 얼다오바이허가 백두산 입구가 된다. 이곳까지는 옌지[延吉]나 화룡[和龍], 안투[安圖]에서 열차나 자동차 편이 있다. 얼다오바이허에서 창바이 폭포 입구까지는 50㎞의 거리로 버스를 이용하며, 버스 종점에서 창바이 폭포를 지나 천지 물의 단 한곳의 유출구인 달문까지는 2㎞의 거리로 걸어서 오른다... ==============================     위치 함경북도 혜산군, 중국 동북 지방 지린 성 대륙 아시아 요약 해발 2,190m, 면적 9.165㎢, 둘레 14.4㎞, 평균너비 1.975㎞, 최대너비 3.550㎞, 평균수심 213.3m, 최대깊이 384m이다. 화산활동에 의한 칼데라 호로, 장군봉, 망천후·백운봉·청석봉 등 높은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다. 일대에 구름과 안개가 자주 끼며, 여름철에 비가 많이 온다. 표면수온은 7월에 9.4℃, 내부수온은 연중 4℃이다.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5월 중순까지 어는데 쌓인 눈의 두께까지 합하면 6m 이상 된다.  호수물은 비룡폭포, 창바이 폭포로 흐르며 얼다오바이허 강으로 흘러간다. 호수 주변에는 만병초를 비롯한 120여 종의 식물이 자란다. 북쪽 기슭에는 온천이 수십 개 있는데 황화수소, 탄산가스 등이 함유되어 있다. 사계절 경관이 뛰어나며, 백두산 관광의 핵심이 되고 있다.   백두산 천지 호수면 해발 2,190m, 면적 9.165㎢, 둘레 14.4㎞, 평균너비 1.975㎞, 최대너비 3.550㎞, 평균수심 213.3m, 최대깊이 384m이다. 화산활동에 의해 백두산 화구가 함몰된 후 융설수·우수 등이 고여 생긴 칼데라 호로, 분화구의 전체면적 가운데 천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40.6%에 이른다.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2,750m)을 비롯해 망천후(2,712m)·백운봉(2,691m)·청석봉(2,662m) 등 높은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다.예로부터 대택·대지·달문지라고도 했으며, 99명의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높이가 560m에 이르는 절벽으로 된 화구벽이 호수를 둘러싸고 있다. 호수물은 화구벽이 터져서 생긴 북쪽의 달문을 통하여 흘러내려 비룡폭포(68m), 창바이 폭포[長白瀑布:70m]를 이루면서 쑹화 강[松花江]의 상류인 만주의 얼다오바이허 강[二道白河]으로 흘러간다. 달문을 통해 유출되는 양은 1일 약 36만㎥(7월)에 이른다. 표면수온은 7월에 9.4℃, 내부수온은 연중 4℃이다. 물은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5월 중순까지 약 3m의 두께로 어는데 그 위에 쌓이는 눈의 두께까지 합하면 6m 이상 된다. 천지 일대에는 구름과 안개가 자주 끼며, 여름철에 비가 많이 온다. 연강수량은 1,500㎜이며, 바람이 강하게 불 때는 수면 위로 최대 1~1.5m의 파고가 일기도 한다. 물이 맑고 푸른빛을 띠므로 가을에는 물 속을 14m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한다. 호수는 수온이 낮아 어류가 서식하지 않고, 식물성 부유생물 5종(種), 작은 동물 및 곤충류 4종, 이끼류 등이 서식하고 있다. 호수 주변에는 만병초·좀참꽃을 비롯한 12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북쪽 기슭에는 지름이 50㎝ 이상 되는 온천이 3개 있으며, 그보다 규모가 작은 것도 수십 개 있는데 황화수소, 탄산 가스 등이 함유되어 있다. 사계절 경관이 뛰어나며, 백두산 관광의 핵심이 되고 있다.→ 백두산 ============================ ============================   ▲ 중국에 거주하는 대학생이 찍었다는 백두산 천지 괴물 사진. ⓒ 중국 관영 신화통신     해마다 괴생물체 목격담이 이어지는 백두산 천지에서 최근 정체불명의 괴물체가 또 다시 카메라에 포착됐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2011년 7월 25일 “지린성 창춘에 사는 대학생 한모씨가 지난 22일 백두산 서쪽 정상인 서파(西坡)에서 천지 경관을 찍은 사진에서 검은색 물체가 떠 있는 모습이 보였고, 사진을 확대해보니 2개의 뿔이 달린 머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 사진에는 백두산 천지 괴물로 추정되는 생명체의 모습이 찍혀있지만, 화질이 좋지 않아 명확한 형체 구별은 불가능하다.  지린성 천지 괴물 연구회 관계자는 “컴퓨터로 확대해보니 머리에 2개의 뿔을 달고 있는 모습”이라며 “너무 먼 거리여서 포착된 물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청나라 말기에 편찬된 ‘장백산(백두산의 중국 명칭)강지략’이라는 서적에 천지 괴물을 봤다는 사람들의 목격담이 실려 있는데 뿔이 달렸다는 대목이 나온다”며 “뿔이 달린 형상을 한 괴물체가 사진으로 찍히기는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중국 언론은 해마다 천지 괴물에 대한 보도를 쏟아내 천지 괴물의 실체를 놓고 논란이 돼왔다. 수년 전 지린의 발전소 직원 정모 씨가 천지의 수면에 거대한 동심원이 생기면서 검은 물체가 수면 위아래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을 캠코더로 포착한 장면이 현지 TV는 물론 홍콩과 미국에서도 ‘천지 괴물’로 소개된 바 있다.  또 2008년 여름엔 관광객 1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두산 천지에서 괴물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물체가 모습을 드러내 약 10분 동안 호수 표면에 멈춰 있다가 거센 물결을 일으키며 사라졌다고 중국 매체들이 보도했고, 지난 2009년 9월에도 연길(延吉)에 거주하는 하모 씨가 천지를 찍은 2장의 사진에 좌우 날개를 단 채 유유히 헤엄치는 듯한 모습을 한 괴물체가 포착됐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공개된 사진이나 동영상 대부분이 원거리에서 찍힌 탓에 형체가 불분명해 일각에서는 ‘백두산 관광을 끌어모으기 위해 천지괴물을 활용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실제 백두산 인근의 ‘장백산 박물관’에 ‘천지 괴물관’ 전시실이 마련돼 있고 연길 등에서 천지 괴물 인형을 판매하고 있기 때문.  백두산 천지에 괴물이 살고 있다는 목격담은 그동안 꾸준히 제기됐다. 1960년대 중국 지린성 기상국 직원들이 괴물 6~7마리를 보았다는 목격담을 시작으로 해마다 괴물을 찍었다는 사진과 영상이 보도됐지만, 여전히 그 진위 여부는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불과 100여년 전인 1903년에 백두산이 분화했다는 기록이 있고 천지가 연중 대부분 얼어 있어 생명체가 살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환경”이라며 “천지 특유의 자연현상이나 백두산 유역에서 서식하는 동물을 괴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입장이다. [데일리안 = 스팟뉴스팀] ==============================================   백두산 천지에 과연 괴물이 살고 있을까? 여러 나라마다 호수에 괴물이 산다고 하는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져내려오는 데 백두산의 천지에서도 괴물이나 괴생명체가 산다고 해서 큰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중국의 신화통신에 따르면 백두산 관리사무소 직원이 백두산 천지에서 괴물이 수면위로 나타났다고 다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했다고 하며 백두산 괴물이 나타났다고 사라질 때마다 엄청나게 큰 굉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중국 길림망 매체에 따르면 백두산 화산관측소 직원 우씨가 백두산 천지 수면위를 빠르게 이동하는 괴물을 포착해서 카메라로 촬영했다고 하며 그 괴물이 다시 물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엄청난 굉음소리가 울려퍼졌다고 한다. 백두산 천지 괴물은 한번 나타났다가 사라질 때마다 커다란 굉음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마치 천둥소리 같은 굉음소리로 인해서 백두산 천지의 절벽일부가 허물어질 정도라고 한다.     백두산의 화산활동을 측정하기 위해 천지 부근에 파견나와 온천의 수온을 측정하고 있는 직원 우씨는 그순간 백두산 천지 수면위로 헤엄치는 괴생명체를 발견했다고 한다.  직원 우씨가 목격한 괴생명체의 모습은 머리부분만 수면위로 드러낸 채, 빠르게 헤엄쳐갔다고 하며 머리부분이 연한 녹색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우씨가 찍은 사진을 얼핏 보면 마치 뿔을 단 사슴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그렇지만 너무 멀리고 찍은 사진이고 화질이 선명하지 못해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기가 곤란하다.   백두산 천지의 괴생명체 출현 목격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백두산을 관광나온 관광객들에 의해서 수없이 많은 목격담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   2000년도부터 2013년도까지 계속해서 백두산 천지괴물 목격담이 흘러나오고 있는데 중국의 신화통신, 길림망 매체 등 중국의 여러매체들은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백두산 천지의 괴물출현이라는 기사와 목격담을 계속해서 보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2003년도의 백두산 천지괴물 20마리 목격담이다. 2003년 7월 11일에 백두산 천지의 수면위에서 20마리의 괴물이 나타나서 수면위로 빠르게 가로질러 갔다고 신화통신이 보도하면서 백두산 천지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불이 붙기 시작했으며  그당시 천지에 20여마리의 괴생명체가 무려 50분동안 수면위를 유유히 헤엄쳐갔다고 하며 백두산에 관광하러온 관광객 10명이 동시에 목격했다고 한다.     중국 길림성 림업성부청장 장우펑씨도 그당시 20마리의 괴물을 함께 목격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괴생명체들이 5번이나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며 짧게는 2분에서 길게는 30분 이상 계속해서 수면위에 떠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괴생명체들이 나타난 곳은 2~3㎞나 멀리 떨어진 지점으로 50배 망원경으로 봐도 정확하게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곤란하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그렇지만 백두산 천지에 이처럼 20마리의 괴물이 동시에 나타난 것은 목격담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1960년도에 길림성 기상국 직원이 백두산 천지에서 7마리의 괴생명체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나온 이래에 2003년, 2007년, 2009년, 2013년까지 끊임없이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백두산 천지괴물 목격담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백두산은 우리 한민족의 혼과 얼이 새겨진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린 곳으로 한민족의 상징과도 같은 명산이다. 백두산의 천지는 둘레가 14km나 되고 20억톤이나 되는 물을 저장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깊은 칼라라호라고 한다. 백두산 천지의 깊이는 평균 210m이고 최대 깊이는 384m로 왠만한 강보다도 더 깊다.   백두산 산허리에 있는 바위골짜기에서는 곰이나 호랑이, 표범같은 야생 포유류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2,700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 자연생태계의 보고 같은 곳이다. 백두산이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이고 동북아에서는 각종 시조신화가 탄생한 명산이어서 그런지 이곳을 관광나온 사람들에 의해서 미스터리하고 신비로운 목격담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으며 한번 목격담이 나오고나면 계속해서 다른 목격담들이 줄을 잇는 도미노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백두산 천지에서 괴물을 보았다고 하는 목격담과 함께 목격자들이 찍은 사진들도 여러 장 존재하고 있는데, 그 촬영된 사진들이 대부분 형체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해상도가 낮아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는 점이 문제다.     백두산 천지괴물은 50년에 걸쳐서 목격자들과 소문만 무성하게 나왔지만, 그 명확한 실체는 전혀 감을 잡지못하고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장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2013년도 화산관측소 직원 우씨가 촬영한 사진을 보면 명확하지는 않지만, 마치 사슴의 뿔같은 것을 머리에 달고 빠르게 백두산 천지를 헤엄치는 듯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만주나 연해주에 서식하는 순록이 혹시 백두산천지에 와서 헤엄치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하고 판단된다. 만주에 사슴이나 순록이 많이 서식하고 있으므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거대한 파충류과 동물들이 백두산 천지에서 번식해서 새끼들을 거느리고 수면위를 헤엄쳐다니는 것은 아닐까? 혹자는 새같은 조류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는데, 사진으로 보기에는 분명 새는 아니다.   그리고 천지 수면위로 돌출된 부분은 분명 뿔같은 딱딱한 물체를 머리에 달고있는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 인류가 모르고 있던 제3의 생명체가 백두산 천지 속에서 서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같은 호수괴물의 목격담은 배단 백두산 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지역에서도 종종 전해지고 있다. 중국 호수괴물, 미국의 호수괴물, 아이슬란드의 호수괴물, 영국 스코틀랜드 네스호의 호수괴물 네시 등 세계의 여러지역에서 호수에 미확인 괴물이 산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전래되고 있다.   물을 마시기 위해 호수로 찾아온 낙타나 말을 한입에 꿀꺽 집어삼킨다고 하는 중국의 카나스호수 괴물 이야기도 횡행하고 있고, 20m가 넘는 거대한 뱀처럼 생긴 괴물이 호수의 꽁꽁 언 얼음위에 자주 출현한다는 아이슬란드의 호수괴물 이야기도 회자되고 있다.   백두산 천지 괴물목격담은 목격자들에 의해서 구체적인 몽타즈까지 제작되기도 했는데, 목격자들은 20m가 넘는 거대한 수장 공룡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가하면 네스호의 네시와도 흡사한 형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만약 이같은 목격자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백두산 천지의 괴물은 중생대에 살았던 수장공룡 플레시오 사우루스를 의미하는데, 플레시오 사우루스는 긴목과 긴꼬리를 가지고 네 개의 지느러미로 헤엄쳐다니는 파충류과 속하는 수장공룡이다.  그런데 6천5백만 년전에 이미 멸종한 수장공룡이 아직까지 백두산천지에 살고있다는 것인데, 도무지 말이되지 않는다. 이렇게 오랫동안 백두산일대에 살아왔던 수장공룡 플레시오 사우루스가 왜 이제야 그실체를 나타내는가?     거대한 몸집의 수장공륭 플레시오 사우루스는 물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육지에도 왔다갔다 하는데, 발견되어도 벌써 진작 발견되었어야 하며, 그 기록이 사서에도 여러번 나왔어야 한다. 그리고 목격자들이 촬영한 사진을 보면 몸체의 극히 일부분만이 촬영되거나, 매우 멀리서 희미하게 촬영한 것들이 대부분인데, 정확한 실체를 보여준 사진은 하나도 없는데 이것은 무슨 다른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닐까?   중국과 길림성측에서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홍보의 수단으로 이같은 목격담을 고의적으로 퍼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특히 많은 목격담들이 중국측 관리들이 직접 목격했다는 내용들이 특히 많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백두산 천지괴물 출현설을 퍼트림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서 백두산관광객특수를 누려볼 의도가 아닌가 판단된다.     더욱이 백두산 주변에 있는 ‘장백산 박물관’에는 ‘천지괴물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천지괴물 인형까지 판매하고 있다는 점을 보더라도 중국과 길림성당국에서 백두산관광 마케팅의 일환으로 백두산 천지괴물설을 활용한다는 의심을 받고있는 것이다.     ◇ 중국 창바이산(長白山 백두산의 중국명) 자연보호관리구 연구소 황샹퉁(黃祥童) 연구원은 지난 21일 천지 관광중 괴물로 추정되는 물체를 목격한후 찍었다는 사진을 공개했다. /연합 백두산 천지에서 괴물을 목격한후 사진을 찍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창바이산(長白山ㆍ백두산의 중국명) 자연보호관리국 연구소 황샹퉁(黃祥童) 연구원은 지난 2005년 7월 21일 가족과 함께 천지를 관광하던중 망원경으로 ‘괴물’이 헤엄치는 것을 본후 디지털 사진기로 찍었다는 사진을 공개했다고 관영 신화 통신이 31일 보도했다.  사진에는 호수 위의 물체가 보이기는 하지만 너무 먼 거리에서 찍혀 정체가 구체적으로 식별되지 않는다.  황 연구원의 형인 황샹언(黃祥恩)은 이날 오전 10시께 천지의 ‘보천석(補天石)’ 바위 위에서 망원경으로 천지 경치를 감상하다 백운봉 아래 약 600m 수면위로 물체가 튀어 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황샹퉁 연구원은 형의 다급한 소리를 듣고 망원경을 건네받아 괴물을 확인했다.  앞 부분이 반쯤 뾰족했고 곤충의 날개 비슷한 것이 보였고 길이는 약 7~8m 로 추정됐다. 전반적으로 검은 흑색을 띠고 배 부분은 흰 색으로 고래 비슷해 보이기도 한 괴물은 20여분간을 힘차게 헤엄친후 물 속으로 사라졌다.  황 연구원은 괴물이 잠수하기전 니콘 쿨픽스 775 디지털 사진기에 괴물의 모습을 담았다.  이에 대해 창바이산 보호국 연구소 류쥔(劉軍) 소장은 1989년 천지를 조사한 결과 천지에는 무게가 3~4㎏나가는 홍린어와 무린어(無鱗魚)등 대형 물고기가 살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고 말하고 물의 굴절 현상으로 이 물고기들이 더욱 크고 이상하게 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베이징=연합 ================================================ 1. 백두산천지에 사는 괴물에 대해 - 괴물이 나타났다는 말 때문에 천지는 더욱 신비로움을 갖게 되었다. 이 괴물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부석이라고 하며 어떤 사람들은 곰이 천지를 헤엄치는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1903년에 천지에서 화산폭발이 있었기에 괴물이 있을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 자료와 목격담에 의해 천지에 괴물이 있다고 인정한다. 1908년에 출판된 '장백산지략(長白山志略)', 1928년에 출판된 '무송현지 (撫松縣志)', 1992년에 출판된 '안국현지(安國縣志)'에는 천지에서 괴물을 보았다는사실이 적혀 있다. 또 괴물을 직접 본사람들도 적지 않다. 목격담 1962년 8월 중순에 주봉영이 천문봉에서 6배 망원경으로 천지 동쪽 천지 수면에 있는 괴물을 보았다고 하는데 몸체는 흑갈색 으로 머리는 개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1976년9월 천문봉에서 휴식하고 있던 36명의 유람객들이 천지 복판으로 헤엄쳐 가는 괴물을 보았는데 크기는 소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1980년8월 기상소의 많은사람들이 사흘동안에 세 차례나 보았는데 머리는 사람머리 정도이고 눈은 밤알만큼 컸다고 했다. 1981년 6월 백두산 자연보호국에 있는 6명의 직원들이 괴물을 보았는데 길이는2미터,머리는 표범 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1981년9월 이소빙 기자가 천지 괴물의 사진 찍었다. 1962년부터 1993년에 이르는30여 년 동안에 수백 명이 수십 차례나 천지의 괴물을 보았다. -최근 목격 소식- 2002년 7월 백두산 천지연 주변에서 `천지(天池)괴물'이 두 차례나 출현했다고 홍콩의 문회보(文匯報)가 2002년 7월31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날 중국 주민 2명이 지난 6일 백두산 북쪽 산비 탈에서 괴물을 발견한 데 이어 지난 25일 서쪽 산비탈에서 또 다시 괴물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송장허(宋江河) 장백산 자연보호관리국 관광분국 국장은 "100-200여명의 관광객들이 25일 오후 2시를 전후해 서쪽 산비탈 언덕 위에서 괴물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송 국장은 "망원경으로 봤더니 시커먼 물체가 보였다"면서 "그렇게 크지도 않았고 무엇인지 분명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물고기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괴물이 천지연 물 위에서 10여분 정도 헤엄을 친 후 물속으로 완전히사라져 버렸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중국 개인 사진가 쉐준린(薛俊林)과 천지연기상대 요리사 류보(劉波)도 지난 6일 약 1시간 동안 바로 10m 앞에서 괴물을 목격했다. 괴물을 본사람들의 말을 정리하여 괴물의 모습을그리면 소만큼 크고 회색이고 반지르하다. 머리는 개 머리와 비슷하고 눈은 밤알만 하며 주둥이는 앞으로 나왔다. 목의 지름은 약 10cm, 길이는 1.5 ~ 2m, 몸체 쪽에는 흰 무늬가 있다. 또다른 모습은 몸의 길이는 2미터 정도이고 머리는 표범 비슷하고 머리 위와 앞턱은 흰색이고 다른부위는 노란색이라 한다. 괴물을 본사람들의 시간기록을 정리해 보면6월 중순, 8월 중순,9월 중순인데 8월 중순에 나타난 것이 가장 많다. 그러므로 백두산을 관광하는 사람들은 어느달이든 괴물을 볼수있는 가능성이 있게 된다. - 천지의 괴물은 길상의 상징이므로 순간을 잡아 보기만 하면 그들에게는 행운이 기다리고 있다고 전한다.
1100    [쉼터] - "네시"야,- 네시(四時)에 나올수 있는 확률은 얼마?... 댓글:  조회:6617  추천:0  2017-04-20
네스 호수에 괴물 네시가 존재할 확률은 얼마일까? Q)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의 네스 호수에서 괴물 네시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수가 10,000명을 넘고 그 중에는 괴물 네시의 사진을 찍어서 보여 준 사람들도 있어요. 과연 네스 호수에 괴물 네시가 실제로 살고 있을 확률은 얼마일까요?   정답 : ④ 알아보기 괴물 네시의 이야기는 6세기경부터 나돌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1933년 네스 호수 근처에 도로가 생기자 네스 호수에서 네시를 봤다는 목격자가 많아졌어요. 하지만 과학자들은 괴물 네시가 실제로 있다고 믿지 않았지요. 윌슨이라는 사람이 네시의 머리 부분을 찍은 사진을 공개하자 사람들은 더더욱 네시가 있다고 믿게 되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 윌슨이 사진을 조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네시 이야기는 또다시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답니다. 이런 경우, 괴물 네시가 존재할 확률은 얼마일까요? 확률이란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올 확률, 주사위를 던져 1이 나올 확률처럼 어떤 특정한 결과가 나타나는 비율을 말합니다. '네시가 있을까, 없을까?'와 같은 문제는 확률로 따질 수가 없어요. 확률은 확실히 일어난 일이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놓고 계산하는 것이니까요. '귀신이 있을까?', '외계인이 있을까?' 같은 문제들도 확률을 따질 수 없습니다.   잠깐 퀴즈 히말라야 산맥에 설인이 살 확률은 얼마일까요? 정답 : 확률을 말할 수 없다. ///////////////============////////////////           요크셔주에 사는 실험실 연구원 고든 홈즈(55)씨가 영국 네스호에 사는 괴수 '네시'를 찍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동영상을 공개해 괴수의 실존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습니다.   홈즈 씨는 지난 26일 괴수의 형체를 한 물체가 네스호에서 시속 10km의 속도로 똑바로 나아가고 있는 동영상 비디오물을 찍어 공개하고 이 괴수의 크기가 대략 15m 정도였으며 뱀장어의 모습과 같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동영상은 이 물체는 시속 10km의 속도로 이동했는데, 길이가 15m에 달했다는 것으로   지금까지 촬영된 어던 것보다 선명한 영상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네시 촬영 동영상을 접한 일부 전문가들은, 화면 속 괴물체가 바람의 영향으로 발생한 '파도'로 보이지는 않는다면서 깜짝 놀랐다고 영국 언론들이 전했습니다. 지난 4월에도 영국 노팅엄에 살고 있는 시드니-자넷 윌슨 부부가 스코틀랜드 네스호에서 유람선을 타고 관광을 즐기다 찍은 사진이 네시로 추정된다고 영국 하이랜드 뉴스가 공개했었습니다. 모터보트가 물살을 일으키는 광경을 목격한 후 그 흔적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사진을 확대해보니 머리와 지느러미가 달린 '네시'임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스코틀랜드 괴물에 얽힌 전설은 565년 스코틀랜드 교회의 창시자중 한 명인 성 콜롬바가 괴수를 물리쳤다는 기록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30년대에는 한 외과의사가 찍은 선명한 사진이 공개되어 화제가 됐지만 후에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사진은 아직까지도 괴수 네시 이미지를 대표하는 사진으로 유명합니다. 이후 네시를 목격했다는 증언은 무려 4천 여건에 이릅니다.   일각에서는 네시가 철갑상어의 일종이거나 지금은 멸종된 공룡이 살아남은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네시의 존재를 부정하는 쪽에서는 다른 현존하는 생명체나 단순한 물결을 잘못 본 것이거나 심리적 현상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괴물 이름 위치 나라 네시 네스 호 스코틀랜드 챔프 챔플레인 호수 미국/캐나다 스토르시외오류레트 스토르시왼 호수 스웨덴 오고포고 오카나간 호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나후엘리토 나후엘후아피 호수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나할릭 인디언 유토피아 호수 캐나다 뉴브런즈윅 마니포가 마니토바 호수 캐나다 마니토바 베시 이리 호 미국/캐나다 백두산괴물                        백두산 천지                  중국/조선 ///전설적인 호수 괴물 [Daum백과] 전설적인 호수 괴물 – 손안의 지구과학, 마이클 브라이트, 지브레인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Daum백과] 네스 호수에 괴물 네시가 존재할 확률은 얼마일까? – 과목별 학습백과 퀴즈 초등, 천재교육 편집부, 천재학습백과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9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183  추천:0  2017-04-20
[경향신문] ㆍ기후변화로 생육기반 악화 탓…10년간 45억 들여 복원 추진 구상나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만 자생하는 나무다. 지리산 등에도 분포하지만 제주 한라산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숲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한라산 구상나무의 절반이 고사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구상나무 보전에 비상이 걸렸다. 한라산에서 세계최대 규모 구상나무숲이 빠른 속도로 고사하고 있다. 제주도 제공 제주도는 올해부터 2026년까지 10년 동안 국비 45억9000만원을 투입해 구상나무의 고사 원인 연구와 복원 사업을 추진한다고 19일 밝혔다. 한라산 구상나무는 최근 10년 동안 급속도로 고사가 진행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제주도 조사결과 한라산 구상나무숲 중 고사목이 차지하는 비율은 45.9%로 절반 가까이 됐다. 1㏊당 평균 2028본이 자라는데 이중 930본이 고사목이라는 이야기다. 어린나무 역시 1㏊당 260본으로 매우 낮다. 이로 인해 한라산 구상나무숲 면적은 2006년 738㏊에서 2015년 626㏊로 15%(112㏊) 줄었다. 구상나무의 고사 원인으로는 기후변화에 따른 생육기반 악화가 지목된다. 2000년대 들어 기후변화에 따른 적설량 감소, 잦은 태풍과 집중폭우가 고사를 부추긴 요인이 됐다. 고정군 생물권지질공원연구과장은 “구상나무는 일정 기간 눈에 묻혀 있어야 하는데 최근 적설량이 줄면서 윗부분은 빛에 노출돼 광합성을 하는 반면 뿌리는 얼어 있는 상황이 된다. 즉 수분 불균형, 수분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이라며 “과거에 비해 강해지고 잦아진 태풍, 집중강우로 인해 토양이 유실되고 뿌리가 흔들리는 상황도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는 구상나무의 고사가 빨라짐에 따라 복원사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해발 700m 지점에 구상나무 생산 기반을 마련해 매년 2만본 이상의 양묘를 공급한다. 올해는 종자로 증식한 3~5년생 어린나무 2000본을 해발 1550~1650m의 한라산 영실등산로에 심어 복원시험을 할 예정이다. 한라산 영실등반로는 최근 10년간 숲을 이뤘던 구상나무가 대부분 고사해 거의 사라진 지역이다. 구상나무는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이 지정한 멸종위기종이다. /박미라 기자
1098    [쉼터] - "네시"야,- 네시(四時)에 나와 놀자!... 댓글:  조회:6004  추천:0  2017-04-19
네스호서 사라진 ‘네시’… 스코틀랜드가 벌벌 떤다 (ZOGLO) 2017년4월19일  흔히 ‘괴물의 원조’라 불리는 스코틀랜드 네스호(湖)의 네시(Nessie)가 자취를 감췄다는 보도가 나왔다. 최근 영국언론 데일리메일은 지난 8개월 간 네시를 목격했다는 보고가 한 건도 나오지 않아 관련 전문가와 지역당국이 걱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존재하는지도 불투명한 네시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유는 네시가 일자리 창출 및 지역 관광수입에 기여하는 ‘효자’이기 때문이다. 현지언론에 따르면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 덕분에 매년 네시가 벌어다 주는 수입이 무려 6000만 파운드(약 860억원)에 달한다. 곧 더이상 네시의 목격담이 나오지 않는다면 네스호는 관광객이 더이상 찾을 이유가 없는 장소가 되는 셈. 네시 전문가인 게리 캠벨은 "지난해 8월 마지막으로 네시가 목격된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서 "장기간 목격담이 없다는 사실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이어 "네시는 통상 여름에 자주 목격되는데 이는 관광객이 더 많이 찾기 때문으로 풀이된다"고 덧붙였다.   보도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관광청은 네스호의 관광객 유치를 위해 다양한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그중 하나가 네시같은 정체불명의 물체를 촬영하면 상금을 주는 것. 지난해에는 미국 텍사스에서 온 한 여성이 호수 안의 검고 큰 물체를 찍어 1000파운드(약 140만원)를 챙겼다.   그간 수많은 조작 논란을 일으킨 네시 신화의 시작은 지난 1933년 4월 1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 영국인 부부가 자동차를 타고 가다 호수에서 공룡처럼 크고 검은 물체를 목격했다고 주장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 부부의 목격담은 당시 언론을 통해 보도돼 화제가 됐고 이후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네시를 목격했다고 주장이 이어졌다. 급기야 네시를 연구하는 단체까지 등장했고 수많은 과학자와 언론사들이 네시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으나 모두 수포에 그쳤다. 특히 1934년 세간에 널리 알려진 마치 공룡과도 같은 선명한 네시 사진이 공개돼 전세계 언론들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지난 1994년 조작으로 밝혀졌다.  /서울신문 =======================//////////////////////////////////////////=================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의 3일자 보도가 된 기사인데요, 영국에 사는 조지 에드워드는 지난 해 11월 2일 오전 9시경 네스호를 유유히 헤엄치는 ‘네시’의 모습을 포착한 사진을 공개했다고 합니다.   사진을 찍은 에드워드는 “당시 네시의 몸은 짙은 회색을 띠고 있었으며, 보트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서 “약 5~10분 정도 수면위에 있다가 서서히 사라졌다.”고 인터뷰했다고 합니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지난 26년간 일주일에 60시간 이상 네스호에 머물며 네시를 포착하려 노력해왔다는 사진의 주인인 조지 에드워드도 대단하네요.   ///////////////////////////////////////////////////////// 네시[Nessie]란?   스코틀랜드 인버네스에 있는 호수인 네스호(湖)에 산다는 괴물. 영국인들 사이에는 이 호수에 괴물 '네시(Nessie)'가 산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6세기 경부터 네시 이야기가 나돌았으나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영국인 부부가 관광 도중 거대한 공룡 같은 검은 물체를 봤다고 주장한 이후이다. 그러다 75년 미국인 변호사가 네스호에서 찍었다며 목을 길게 내놓은 공룡형태의 사진을 내놓아 신비감을 더했으며, 이후 네시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정체는 알 수 없었다. 현지 설화에 나오는 지옥의 요정이라 는 설과 추락한 군용기의 잔해라는 설 등 추측이 분분했으며, 최근엔 그동안 공룡과 함께 멸종한 해양 파충류 ‘사경룡(蛇頸龍)’으로 추측돼 왔다. 그러나 2003년 7월 영국의 BBC방송이 수중탐험 전문가와 생물학자들은 음파탐색기와 위성추적장치를 이용해 네스호 내부를 샅샅이 탐색했지만 네시의 존재는 탐지되지 않았다. ... 1933년부터 영국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네스호의 괴물. 이 사진을 찍은 내과의사는 1993년 임종직전, 이 사진은 자신이 만들어낸 가짜내시를 찍은 사진이었다고 증언을 하였습니다.    英 네스호(湖) 괴물은 코끼리?  [한국일보 2006-03-09 ]     지난 2년간 네스호의 비밀을 추적해 온 영국 글래스고 대학 헌터리안 박물관의 밀 클라크 고생물학 담당 학예관은 “서커스 단장이 네스호에서 코끼리 한 마리가 헤엄치는 것을 보고 네스호 괴물 ‘네시’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고 월 스트리트 저널이 9일 보도했다. 그에 따르면 네시가 처음 목격된 1933년 서커스 단장 버트람 밀스는 런던에서의 흥행을 위해 이 괴물을 잡아오면 2만 파운드(현재 180만 파운드ㆍ36억원)를 주겠다고 했다는 것. 호수에서 코끼리가 헤엄치도록 놔두자 밖에서는 오직 코와 두 개의 혹만 볼 수 있었는데 앞의 혹은 코끼리 머리이고  뒤의 혹은 코끼리 등이라는 것. 그래서 밖에서 보기엔 긴 목을 갖고 혹이 두 개 달린 짐승처럼 보이는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영국 BBC 방송의 ‘네스호의 괴물’ 제작팀은 2003년 음파탐지기와 인공위성자동위치측정시스템(GPS) 등의 첨단 장비로 호수를 샅샅이 뒤진 끝에 ‘괴물은 없다’고 결론내린 바 있다.   네스호 괴물은 서커스단 코끼리”  [KBS TV 2006-03-07 ]  백두산 천지의 괴물 얘기와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호수의 괴물로 가장 유명한 것이 네스호의 괴물 네시입니다. 이 네스호의 괴물이 다름아닌 코끼리였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네시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습니다. 런던에서 김종명 특파원이 보도입니다. 스코틀랜드 북부, 네스호에서 촬영했다는 전설 속의 괴물 네시의 사진들입니다. 지난 2년간 네시를 연구해온 이곳 고생물학자 닐 클라크씨는 네시가 공룡이 아닌 코끼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습니다. 코끼리가 헤엄칠 경우 코와 등이 수면 위로 보이는데, 이를 괴물로 착각했다는 주장입니다. 네스호 주변지역은 전통적으로 코끼리 서커스단이 자주 찾던 지역이며, 서커스단이 호숫가에서 쉬면서 코끼리들이 수영을 즐기도록 풀어놨다는 고증도 덧붙였습니다. 닐 클라크(스코틀랜드 고생물학자): "코끼리들을 쉬게 해줄 때 호수에서 헤엄을 쳤고,네스호 주변 사람들이 이 코끼리를 봤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클라크씨는 괴물소동이 시작된 1930년대 초에 특히 코끼리 공연이 활발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서커스단 방문이 중단된 지 오래인 2000년대에 들어서도 네시 목격담이 이어지고 있어 수십년 계속되온 네시 논쟁은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 네시가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동안 해발 2,744미터인 백두산 천지에도 길이가 2미터에서 5미터에 이르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풍문이 꾸준히 나돌았다. 백두산은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중국 지린 성 조선족 자치주가 맞닿은 곳에 있는데 정상에 있는 천지에 괴물이 산다는 것이다. 천지의 물은 60퍼센트 이상이 지하수며 나머지는 비나 눈이다. 천지의 평균 수심은 213.3미터, 최대 수심은 384미터며 수온은 0.7도에서 11도 사이다. 정상에 있기 때문에 비교적 차다. 겨울에는 수면이 언다. 1994년 9월 10일 중국 신화통신은 백두산 천지에서 누런 황소 머리를 한 거대한 괴물이 파도를 일으키며 솟구치는 모습이 잇달아 목격됐다고 보도했다. 이에 앞서 1994년 8월 20일에는 호수에서 유유히 유영하던 괴물이 2미터 높이 물보라를 남기고 사라지는 모습을 한국 관광객이 찍었다고 한다. 게다가 9월 2일에는 천지를 관광하던 중국 지린 성 조선족 자치주 관리들이 황색 머리를 한 괴물을 발견하고 비디오로 찍었는데 괴물 모양이 선명했다고 한다. 천지 북쪽에서 남서쪽으로 헤엄치다가 약 10분 뒤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중국 언론이 보도한 백두산 괴물의 모습 백두산 불구덩이에 사는 쥐처럼 생긴 괴물인 화서를 그린 그림 백두산에 괴물이 출현했다는 소식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백두산에는 괴물이 세 마리 있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다. 하나는 당나라 황제가 가죽을 갖기 원했다는 ‘화서(火鼠)’다. 화산인 백두산에는 불구덩이에 사는 쥐처럼 생긴 괴물이 있는데 그 모피로 옷을 만들면 불 속에서 타지 않고 데지도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다른 괴물은 온몸에 털이 난 사람으로, 짐승처럼 네 발로 나무를 타고 토굴에서 사는 ‘모인(毛人)’이다. 흉년에 함경도에서 산에 들어갔다가 눈에 갇혀 야생화된 모녀(毛女)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 백두산에 야생 인간이 살아 있다는 전설은 매우 오래전부터 있었다. 셋째가 바로 네시와 같은 괴물로, 중국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청나라 강희제 연간에 사냥꾼 넷이 천지에서 괴물이 목을 내미는 것을 봤는데 황금색으로 물동이만 한 모난 머리에 뿔이 돋아 있고 긴 목에 돌기가 나 있었다고 한다. 사냥꾼들은 겁이 나 도망쳤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괴성이 울려 돌아봤더니 괴물은 사라지고 없었다는 것이다. 괴성은 천지 백 리 밖에서도 자주 들렸으므로 천지 아래 있는 용궁의 북소리로 구전돼왔다. 청나라 때인 1879년에도 유복 등 여섯 명이 수면에서 물소만 한 괴물이 머리를 들고 포효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천지 북쪽 끝에 있는 천활봉 중턱 벼랑에 동굴이 있는데 커다란 이무기처럼 생긴 괴물이 이곳을 드나드는 장면이 목격됐다는 기록도 있다. 이 지방 지현(知縣)을 지낸 유건봉이 편찬한 『장백산강지략(長白山崗志略)』을 보면 길 안내인인 서영순이 중국인 여섯 명과 함께 백두산에서 사슴을 사냥하다가 천지에서 어떤 동물을 만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물소처럼 크고 우는 소리가 귀를 울리며 사람들에게 쳐들어오려는 것 같아 여러 사람이 모두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일행 중 한 명이 총을 꺼내 쏘려 하니까 발사되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려 육 연발 권총을 꺼내 발사해 괴물의 배에 맞추자 괴물은 크게 울부짖으며 호수 안으로 엎어져 사라졌다. 오래전부터 괴물이 산다는 소문이 퍼졌던 백두산 천지 백두산 괴물이 본격적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62년부터다. 지린 성 기상 기자재 공장에 근무하는 한 중국인이 천지를 망원경으로 살펴보다 천지 동북쪽 귀퉁이에서 동물 두 마리가 물 위로 머리를 내밀고 다투는 장면을 봤다. 동물 머리는 개보다 훨씬 크고 흑갈색이었는데 1시간 뒤에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괴물에 대한 목격담은 더욱 구체적으로 변한다. 1980년 8월 목격자가 1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백두산 괴물 이야기는 점점 더 큰 파문을 일으킨다. 저명한 작가인 뢰가는 『천지 괴수 목격기』에서 백두산의 괴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8월 21일 새벽 4시 나는 기상대 문 앞에서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8시에서 8시 반쯤 되는 시간에 천지에서 거대한 나팔 모양 물갈래를 봤다. 꼭지 부분에서 꺼먼 흑점을 봤는데 머리 같았다. 때로는 북 같은 것이 길게 끌리는 것을 봤는데 아마도 척추 부분일 것이다. 그것은 물속에 비친 장군봉에서부터 나 있는 쪽으로 헤엄쳐 왔다. 이틀 뒤인 8월 23일 새벽, 이번에는 지린 성 기상국에 근무하는 세 사람이 가까운 거리에서 괴물 다섯 마리를 봤다. 30미터 앞에서 괴물의 머리와 가슴이 4미터나 물 위로 나와 있는 것을 봤는데 머리는 소와 비슷하고 몸은 개, 입은 오리, 등은 검은색으로 기름을 바른 것처럼 미끄러워 보였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종려나무 잎 같은 긴 털이 있었으며 배 부분은 희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놀라 소리 지르며 총을 쐈지만 괴물을 맞히지는 못했다. 괴수는 민첩하게 물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같은 날 다른 사람이 다시 괴물을 봤다. 괴물의 위치는 천지 북쪽 기슭에서 40여 미터로, 두 마리가 앞뒤로 서서 빠르게 헤엄치고 있었다. 그중 한 마리는 물 위에 나온 부분이 좀 많았고 머리는 뱀 모양, 지름은 약 15센티미터, 눈동자는 밤알만 했고 주둥이가 앞으로 뾰족 튀어나와 있었다. 목 굵기는 10센티미터, 피부는 백색이고 마치 바다표범처럼 몸이 매끄러워 보였지만 무늬는 없었다. 몸을 틀 때 물 자취가 상당히 둥글고 컸다. 1995년 8월 31일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백두산 괴물을 목격해 큰 파문이 일었다. 중국령 백두산의 관광 명소인 천문봉에 올라간 장남철은 천지 한가운데에서 검은 점 하나가 빠른 속도로 천문봉 밑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고성능 베타 카메라로 촬영했다. 당시 천문봉에는 한국인 관광객 수십 명이 있었는데 일제히 “괴물이다!”라고 소리쳤다. 테이프를 분석한 UFO 연구회 조사부장 서종한은 수장룡과 형태가 매우 유사하다고 말했다. 입을 크게 벌린 머리와 거북이 앞 지느러미, 불룩하게 튀어나온 등과 허리 등을 근거로 들었다. 경북대학교 교수 양승영은 “꼬리가 물고기 꼬리지느러미와 흡사하고 수중 생활을 하는 수장룡이나 어룡의 일종이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다만 꼬리 부분이 뱀처럼 길쭉하면 뒤로 흰 거품이 일 정도로 빠르게 헤엄치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있었다. 2010년 9월에는 좌우 날개가 달린 백두산 괴물 사진이, 2011년 7월 22일에는 뿔이 두 개 달린 머리를 물 위로 드러낸 백두산 괴물 사진이 공개됐다. 백두산 천지 괴물 목격담 중에는 괴물 머리에 뿔이 달려 있다는 증언도 있는데 뿔이 있는 괴물이 사진으로 찍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2012년 7월 7일에도 백두산 천지에서 물 위를 이동하는 괴생명체가 포착됐다. 괴생명체는 백두산 천지 화산관측소 직원인 우 아무개가 백두산 남쪽 정상 전망대에서 화산을 관찰하던 중 촬영한 것인데 천지 수면에 크고 긴 물체가 마치 물고기처럼 헤엄치다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가 공개한 사진은 모두 석 장이었다.   [Daum백과] 백두산 천지에도 괴물이? – 미스터리와 진실, 전설편, 이종호, 북카라반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97    [회음]=2014년도에 제기되였던 일인데 지금의 실시상황은?... 댓글:  조회:3997  추천:0  2017-04-19
조선어작품 원고료 낮아도 너무.. (ZOGLO) 2014년1월22일  우광훈위원(연변작가협회 창작련락부 주임) 정협길림성제11기위원회 제2차회의(2014년도)에 참가한 연변작가협회 창작련락부 주임인 우광훈위원(주; 퇴직했음)은《길림성조선족작가 모어창작 원고료에 대한 제안》을 내놓았다. 그의 소개에 의하면 연변작가협회는 전국 55개 소수민족가운데서 유일하게 전국에 회원을 갖고있는 단체로 협회에는 조선족작가가 600명, 근 90%이상이 모어로 창작하고있다. 현 그들의 문학원고료는 천자당 15-30원에 그치는데 국가의《문자작품 원고료 지불방법》(토론고) 새 규정에 따르면 천자당 문학원고료 표준은 100-150원이다. 기타 소수민족 모어창작 작가들의 원고료 례로 신강, 서장, 내몽골, 청해 등 지역의 원고료는 130-300원에 이른다고 한다. 《목전 낮은 원고료는 길림성 문학발전의 주요 장애이다. 이는 조선족작가의 창작 적극성, 문학인재양성 등을 저애하고있다》고 걱정하는 우광훈위원은《길림성정부에서 시대발전에 따른 원고료표준을 제정해 소수민족문학발전을 추진했으면 한다》고 제안하였다. /길림신문 최화기자  
1096    [쉼터] - 세기의 도서 100 댓글:  조회:5691  추천:0  2017-04-18
    제목 저자   1 《이방인》 알베르 카뮈  1942년 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1913년–1927년 3 《심판》 프란츠 카프카 1925년 4 《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1943년 5 《인간의 조건》 앙드레 말로 1933년 6 《밤이 다 갈 때의 여행》 루이페르디낭 셀린 1932년 7 《분노의 포도》 존 스타인벡  1939년 8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어니스트 헤밍웨이  1940년 9 《대장 몬느》 알랭 푸르니에 1913년 10 《도레미파솔라시도》 보리스 비앙 1947년 11 《제2의 성》 시몬 드 보부아르 1949년 12 《고도를 기다리며》 사뮈엘 베케트  1952년 13 《함무라비 법전》 장폴 사르트르 [] 1943년 14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1980년 15 《수용소 군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3년 16 《꽃집에서》 자크 프레베르 1946년 17 《알코올》 기욤 아폴리네르 1913년 18 《푸른 연꽃》 에르제 1936년 19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 1947년 20 《슬픈 열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1955년 21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1932년 22 《1984년》 조지 오웰 1949년 23 《골족(族)의 영웅, 아스테릭스》 르네 고시니, 알베르 우테르조 1959년 24 《대머리 가희》 유진 이오네스코 1952년 25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지그문트 프로이트 1905년 26 《암흑 작업》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1968년 27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1955년 28 《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 1922년 29 《타르타리의 황야》 디노 부차티 1940년 30 《위폐범들》 앙드레 지드  1925년 31 《지붕위의 기병》 장 지오노 1951년 32 《영주의 연인》 알베르 코엔 1968년 33 《백년 동안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1967년 34 《소리와 분노》 윌리엄 포크너  1929년 35 《테레즈 데케루》 프랑수아 모리아크  1927년 36 《지하철 소녀 쟈지》 레몽 크노 1959년 37 《감정의 혼란》 슈테판 츠바이크 1927년 38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거릿 미첼 1936년 39 《채털리 부인의 연인》 D. H. 로렌스 1928년 40 《마의 산》 토마스 만  1924년 41 《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1954년 42 《바다의 침묵》 베르코르 1942년 43 《인생 사용법》 조르주 페렉 1978년 44 《바스커빌 가문의 개》 아서 코넌 도일 1901년–1902년 45 《사탄의 태양 아래》 조르주 베르나노스 1926년 46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1925년 47 《농담》 밀란 쿤데라 1967년 48 《경멸》 알베르토 모라비아 1954년 49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애거사 크리스티 1926년 50 《나자》 앙드레 브르통 1928년 51 《오렐리엥》 루이 아라공 1944년 52 《비단구두》 [?] 폴 클로델 1929년 53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루이지 피란델로  1921년 54 《아르투로 우이의 저지 가능한 상승》 베르톨트 브레히트 1959년 55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미셸 투르니에 1967년 56 《우주 전쟁》 허버트 조지 웰스 1898년 57 《이것이 인간인가》 [?] 프리모 레비 1947년 58 《반지의 제왕》 존 로널드 루엘 톨킨 1954년–1955년 59 《포도덩굴》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1908년 60 《고뇌의 수도》 폴 엘뤼아르 1926년 61 《마틴 에덴》 잭 런던 1909년 62 《염해의 발라드》 우고 프랏트 1967년 63 《영도의 글쓰기》 롤랑 바르트 1953년 64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1974년 65 《시르트의 바닷가》 줄리앙 그라크 1951년 66 《말과 사물》 미셸 푸코 1966년 67 《고을과 도시》 [?] 잭 케루악 1957년 68 《닐스 소년의 신비로운 여행》 [?] 셀마 라겔뢰프  1906년–1907년 69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1929년 70 《화성 연대기》 레이 브래드베리 1950년 71 《롤라 V. 스타인의 환희》 마르그리트 뒤라스 1964년 72 《조서》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1963년 73 《트로피즘》 나탈리 사로트 1939년 74 《일기》 쥘 르나르 1925년 75 《로드 짐》 조지프 콘래드 1900년 76 《에크리》 자크 라캉 1966년 77 《연극와 이중성》 앙토냉 아르토 1938년 78 《맨해튼 트랜스퍼》 존 더스패서스 1925년 79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1944년 80 《모라바지누》 블레즈 상드라르 1926년 81 《죽은 군대의 장군》 이스마일 카다레 1963년 82 《소피의 선택》 윌리엄 스타이런 1979년 83 《집시 시집》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1928년 84 《수상한 라트비아인》 조르주 심농 1931년 85 《꽃의 노트르담》 장 주네 1944년 86 《특성없는 남자》 로베르트 무질 1930년–1932년 87 《분노와 신비》 르네 샤르 1948년 88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1951년 89 《미스 블랜디시》 제임스 해들리 체이스 1939년 90 《블레이크와 모티머》 에드가 자코브 1950년 91 《말테의 수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 1910년 92 《변경》 미셸 뷔토르 1957년 93 《전체주의의 기원》 한나 아렌트 1951년 94 《거장과 마르가리타》 미하일 불가코프 1967년 95 《섹서스》,《프렉서스》,《넥서스》 헨리 밀러 1949년–1960년 96 《거대한 잠》 레이먼드 챈들러 1939년 97 《항로 표지》 생종 페르스  1957년 98 《가스통》 앙드레 프랑캥 1957년 99 《화산 아래서》 맬컴 라우리 1947년 100 《자정의 아이들》 살만 루슈디 1981년
1095    한국 국내 최초 주간문예지를 알아보다... 댓글:  조회:4918  추천:0  2017-04-18
선문대가 일반에 공개한 국내 최초 주간문예지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   선문대가 국내 최초 주간문예지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를 2016년 10월 24일 일반에 공개. 선문대 개교 30주년을 맞아 ‘책에게 길을 묻다’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지난 1918년 9월 26일 창간한 태서문예신보를 대학 중앙도서관에서 전시. 태서문예신보는 창간 이후 이듬해 2월 17일까지 통권 16호를 끝으로 발행이 중단됐다. 순 한글 타블로이드판 8면으로 제작됐으며 장두철, 김억, 황석우가 편집에 참여해 주로 번역했다. 태서문예신보는 창간호에서 태서(서양)의 유명한 소설, 시, 산문 등을 충실하게 번역해싣겠다고 밝혔다.   창간호부터 서구문학 작품과 사조에 관한 글을 주로 게재했다. 코넌 도일의 ‘충복’, 이반 투르게네프의 ‘밀회’ 등 번역소설과 폴 베를렌이나 레미 드 구르몽 등 프랑스 상징파 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소개했다. 또한 백대진의 ‘뉘우침’ 김억의 ‘봄은 간다’ 등 창작시와 ‘최근 태서문단’ ‘시형의 음률과 호흡’과 같은 평론도 실었다. 김억은 이 잡지에 발표한 번역시를 모아 1921년 한국 최초의 번역시집인 ‘오뇌의 무도’ 를 펴냈다. 태서문예신보가 소개한 번역시들은 한국시가 신체시를 벗어나 근대적 시 형태로 발전하는 데 많은 영향을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문대는 태서문예신보 공개와 함께 귀중 도서 50여점을 전시하고 정보검색대회, 책속 보물찾기, 국제 4대 영화제 입상작품 상영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진행. 27일, 소설가 한승원을 초청 강의. 윤주학 중앙도서관 관장은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이미지를 벗어나 복합문화공간으로 인식되길 바라면서 이번 행사를 개최했다”며, “학생, 교직원 및 지역 주민들의 도서관 이용이 활성화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준호 기자 
1094    [쉼터] - 고봉에 고봉을 올라 조선족의 자존심 세우기만을... 댓글:  조회:3523  추천:0  2017-04-18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고종훈 VS 고준익 누가 강해? (ZOGLO) 2017년4월15일  축구명장 고종훈과 “뜨는 별” 고준익, 이들 부자를 두고 구경 누가 더 강한가를 두고 요새 중국축구계가  화제다.   발단은 지난 8일 하북화하가 4:2로 상해신화를 완승한 경기에서 고준익이 슈퍼리그 첫꼴을 터뜨리면서 시작되였다. 이날 중앙수비에 나선 고준익은 세계적공격수 디베즈를 잘 묶어놓은 한편 48분경 측면에서 올라오는 킥을 상대 수비들 포위속에서 솟아오르며 멋진 헤딩꼴을 터뜨렸다.     역시  예전처럼 매체들은 고준익을 말하면서 또 아버지 고종훈을 끄집어내서 화제를 만들어 요즘 이리저리 굽고있다. “구경 고준익이 아버지 고종훈의 높은 산을 넘을가?”를 두고    류건홍: 큰 재목이지만 아버지 높이까지는 끌쎄  …   항상 고종훈의 팬임을 자처하는 유명 축구해설가 류건홍(刘建宏)은  “준익이가 아버지보다 한어를 더 잘한다”다고 우스개로 시작하면서 주장하기를:    이들 부자는 모두 축구에 천부적 소질이 있다. 고종훈은 속도가 빠르지않지만 머리로 공을 차는 “팀의 두뇌”다. 공간수, 공격조직, 득점력이 모두 뛰여나다. 또  공격형, 수비형, 측면 등 여러위치의 미더로 포지션이 다 가능하다. 최은택감독 시절에는 자유인(自由人)으로도 활약했는데 연변팀을 리그 4위까지 올려놓았다.   한편 고준익을 두고 류건홍은 “ 속도나 신체소질이 좋고 예판능력, 공 차단기술도 뛰여나다”면서 “분명 미래 중국국가팀의 수비선 절대주력이다. 이제 세계적 명감독 리피의 지도에서 크게 자랄것이다”고 전망했다. 그러면서도 이들 부자를 굳이 대비한다면  “같은 나이떄를 비교해도 아버지 수준과는  아직 멀다”고 평가하면서 아직 지켜보아야 한다는 태도였다.   지난해 고준익은 슈퍼리그 최우수신인 후보에 올랐으며 올해 U23선수지만 또 팀의 절대주력이 되였다. 지난 시즌 수비형 미더로 뛰다가 올해 페라니감독은 그를 전직 중앙수비로  내리웠다. “아름다운 축구”를 숭상하는 “축구공정사”로 세계적 명성을 갖고있는  펠라니는 명감독인데 고준익은 그의 큰 신임을 받고있다. 경기후마다 고준익을 불러 분석을 해주고 따로 지도해주면서 아껴 키우고 있다고 한다.    국가팀에서도 리피감독은 "중국컵"  두번 A급 매치에서 어린 고준익을 주력 중앙수비에 기용하는 사랑을 보였다.  크게 키우겠다는 심산이다.       고준익은 축구팬들사이에서도 찬사로 일색이다. 네티즌 안체노님은 “이 년령대에서 보면 현재 张玉宁 외에는 국내선수중 고준익이 최고다. 후방선수지만 이만큼 주목을 받는다는것은 대단하다. 미래 10년 중국국가팀 수비선의 기둥이다.”고 평했다.   네티즌 류156님은  "아버지를 초월하는것은  모든 남자들의 목표다. 올바른 인생관을 가지고 바르게 자라고 집단영예를 우선하는 멋진 남자가 되여  껨마다 진보하고 해마다 몰라보게 크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고준익 실토 : 아버지와 다른 고봉에 오르고싶다     매체들은 겸손하고 바르게 자란 고준익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않으면서 그때마다 항상 아버지 고종훈과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다.    "중국컵" 초청경기에서 소문난후 뉴스에 많이 오르고 유명세를 타고있는데 대해  고준익은 “이젠 뉴스보기도 두려워요. 저는 잘한다고 춰주면 기분이 둥둥 뜨는 타입이셔서 자칫 자만할가 두렵습니다. 지금 경험과 판단능력, 경기읽는 능력 등 많이 부족합니다”고 귀엽게 대답해 화제다.    지난 9일 懂球帝의 취재를 받을때 고준익은 “경기마다 2백프로 열정을 쏟아야 세계적 공격수들을 막을수 있다. 디베즈 등 스타들은 실력이 엄청나 처음에는 어떻게 막을지 골치가 아팠지만 후반전이면 그들의 습관을 파악하게되고 잘 막아낼수 있었다.”고 실토했다.    아버지와 대비하는것을 두고 “저는 저구요. 아버지와는 포지션도 다릅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극히 엄하고 지극정성입니다. 매 경기마다 끝나면 전화가 오시는데 실수나 공처리를 지적해줍니다. 아버지는 늘 자만하지말고 정신을 바짝 차리라고 채찍질합니다. 결국 제 스스로 노력이 중요하죠”고 고준익은 대답한다.     신화사도 9일 “미래의 별로 불리우는  고준익”이라며 인터뷰기사를 실었다. 고준익은 아버지에 비하는 기자의 질문에  “아버지와 다른 고봉에 오르고 싶다. 사람은 힘든 단련속에서 성장한다.”고 대답했다. 고준익은 산동로능에 있을때 같은 포지션에 우수한 선수들이 많아 밀렸다가 리철의 눈에 들어 하북화하에 이적한후 점차 주력으로 되였다.    “기회가 된다면 유럽행도 꿈꾼다”는 고준익은 “이딸리아 유벤투스팀 팬”이라고 실토했다. 고준익은 “페라니감독이 선수들에 대한  신임이 팀을 완전히 변모시켰다”현 현재 2승 2무를 달리고있는 팀의 변화를 말했다.      오는 16일 집에 돌아오는 고준익이 고향팀을 상대로 어떤 경기를 보여줄지가 연변부덕-화북화하전 하나의 관전포인트다. 조선족선수라는점은 자랑스럽지만  한편  팀의 기둥으로 큰몫을 해주는 U23선수라는 점이 부럽고 또 한편 우리의 창을 막는 방패로 나선다는 점이 야속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프로축구의 현실이고 ...                                                                           /길림신문   정하나
1093    [쉼터] - 꼬마축구팬 행동거지에 그만 나도 눈물이 왈칵!... 댓글:  조회:3511  추천:0  2017-04-18
꼬마축구팬의 눈물, 연변축구정신의 발로 (ZOGLO) 2017년4월17일 16일, 연변팀 대 하북팀전에서 첫꼴을 넣은 김승대와 그 꼴에 도움을 준 윤빛가람 못지 않게 관중들의 주목을 받은 축구팬이 있었다. 경기 78분경, 윤빛가람이 후방에서 칼날같이 찔러준 장거리 패스를 받은 김승대가 하북팀의 문전으로 령리하게 뚫고들어가며 키퍼와 1:1, 잠간 키퍼앞에서 멈칫하는가 싶더니 키퍼의 겨드랑이밑으로 공을 랭정하게 쏘아넣었다. 올시즌 첫꼴이 터졌다. 선수들과 팬들이 환호하는 사이 생방송 카메라는 한 꼬마 축구팬을 포착했다.     또래 친구와 함께 첫꼴에 환성을 올리던 이 꼬마(왼쪽)는 격동에 못이겨 그만 눈물이 왈칵, 목에 두르고 있던 응원 타올로 눈물을 연신 훔친다.   이 장면은 생방송중 여러차례 되풀이되여 나오면서 관중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경기가 끝난 뒤 많은 축구팬들은 꼬마의 눈물장면을 캡쳐하여 모멘트 등에 올리며 감탄했고 성인축구팬들도 이 꼬마처럼 홈팀에 애착을 가져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연변축구정신이 이 귀여운 꼬마축구팬의 한몸에서 돋보이고 있다.   /길림신문 최승호 기자    
1092    세계 영화사 100 댓글:  조회:4646  추천:0  2017-04-10
  뤼미에르, 그리피스로 이어지는 영화의 태동은 1995년으로 100년의 역사를 맞이했습니다.  빛과 잔상의 예술이 펼치는 영화는 시대의 이념과 조류,  그리고 수많은 영화작가의 고뇌와 정열을 담고 흡사 긴 강처럼 흘러 우리곁에 자리잡았습니다. 이에 [스크린]에서는 세계영화사에서 한 획을 그은 영화 100편을 선정,  전세계 영화인의 현당에 바치고자 합니다.  이 100편 선정의 기준은 [키네마준보] [까이에 뒤 시네마] [프리미에]를 참조해  영화가 갖는 역사성, 예술성, 흥행성, 기술적 업적 등을 그 잣대로 삼았습니다.  1. 잔다르크의 수난 - La Passion De Jeanne d"Arc-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2. 수색자들 - The Searchers-죤 포드  3. 게임의 법칙 - La Regle du Jeu-장 르노아르  4. 7인의 사무라이-구로자와 아키라  5. 비정성시 - 悲情城市-후샤오시엔  6. 스트레인지러브 박사 - Dr. Strangelove:Or How I Learned to Stop Worring and Love the Bomb-스탠리 큐브릭  7. 도쿄이야기 - 東京物語-오스 야스지로  8. 흔들리는 땅 - La Terra Trema-루키노 비스콘티  9. 나폴레옹 - Napoleon-아벨 상스  10. 적과 백 - Csillagosok", Kantonak-미클로스 얀초  11. 사랑은 비를 타고 - Singin" in the Rainㅡ스탠리 도넨  12. 알제리 전투 - La Battaglia di Algeri-길로 폰터코로보  13. 협녀 - 俠女-호금전  14. 아푸 3부작 - Pather Panchali, Aparajito, Apu Sansar-사티야지트 레이  15. 시간이 흐르면 - Im Lauf der Zeit-빔 벤더스  16. 신봉자 - Il Conformista-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17.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Angst Essen Seele Auf-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18. 자전거 도둑 - Ladri di Biciclette-비토리아 데 시카  19. 쟝 콕토의 미녀와 야수 - La Belle et la Bete-장 콕토  20. 카사블랑카 - Casablanca-마이클 커티스  21. 유랑극단 - O Thiassos-테오 앙켈로폴로스  22.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 Once Upon a Time in America-셀지오 레오네  23. 아기레, 신의 분노 - Aguire, der Zorn Gottes-베르너 헤어조크  24. 시민케인 - Citizen Kane-오손 웰즈  25. 파드레 파드로네 - Padre Padrone-파올로 따비아니, 비토리오 따비아니  26. 시티 라이트 - City Lights-챨리 채플린  27. 메트로폴리스 - Metropolis-프릿츠 랑  28. 전함 포템킨 - Bronenosets Potyomkin-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  29. 세도 - Ceddo-우스만 셈벤  30. 안드레이 루블레프 - Andrei Roublev-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31. 아라비아 로렌스 - Lawrence of Arabia-데이비드 린  32. 8 1/2 - Otto E Mezzo-페데리코 펠리니  33. 와일드번치 - The Wild Bunch-샘 페킨파아  34. 알렉산더 도브첸코의 대지 - Zemlya-알렉산더 도브첸코  35. 칠레전투 - Batalla de Chile-파트리시오 구스만  36. 현기증 - Vertigo-알프레드 히치코크  37. 부르조아의 비밀스런 유희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루이스 브뉴엘  38. 무쉐뜨 - Mouchette-로베르 브레송  39. 정사 - L"Avventura-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40. 무방비도시 - Roma Citta Aperta-로베르토 롯셀리니  41. 에디푸스왕 - Edipo Re-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42. 400번의 구타 - Les 400 Coups-프랑소와 트뤼포  43. 줄 위의 종달새 - Larks on a String-이리 멘첼  44. 환타지아 - Fantasia-월트디즈니 스튜디오  45. 어린이들의 왕 - 孩子王-첸 카이게  46. 대부 2부작 - The Godfather, The Godfather Part2-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47. 재와 다이아먼드 - Popioli Diament-안제이 바이다  48. 이레이저헤드 - Eraserhead-데이비드 린치  49. 블레이드 러너 - Blade Runner-리들리 스코트  50. 맨하탄 - Manhattan-우디 앨런  51. 이지 라이더 - Easy Rider-데니스 호퍼  52. 천국의 아이들 - Les Enfants du Paradis-마르셀 카르네  53. 벤허 - Ben-Hur-윌리암 와일러  54. 몽콕하문(열혈남아)-왕가위  55. 2001년 우주여행 - 2001:A Space Odyssey-스탠리 큐브릭  56. 금지된 장난 - Jeux Interdits-르네 클레망  57. 모던타임즈 - Modern Times-챨리 채플린  58. 제 3의 사나이 - The Third Man-캐롤 리드  59. 네 멋대로 해라 - A Bout de Souffle-쟝 뤽 고다르  60.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Gone with the Wind-빅터 플레밍  61.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 West Side Story-로버트 와이즈  62.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Last Tango in Paris / Ultimo Tango a Parigi-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63. 시계태엽 오렌지 - A Clockwork Orange-스탠리 큐브릭  64. 서부전선 이상없다 -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루이스 마일스톤  65. 프라하의 봄 -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필립 카우프만  66. 터미네이터 - The Terminator-제임스 카메론  67. 사운드 오브 뮤직 - The Sound of Music-로버트 와이즈  68. 이블 데드 - The Evil Dead-샘 레이미  69. 혹성 솔라리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70. 쥘과 짐 - Jules Et Jim-프랑소와 트뤼포  71. 로이사이더의 째즈 클럽 - All That Jazz-밥 포시  72. 여름의 폭풍 - Senso-루키노 비스콘티  73. 베니스의 죽음 - La Morte A Venezia-루키노 비스콘티  74. 국가의 탄생 - The Birth of a Nation-D.W.그리피스  75. 킹콩 - King Kong-메리안 C 쿠퍼, 에네스트 B 슈드자크  76. 사이코 - Psycho-알프레드 히치코크  77. 산딸기 - Smultronstallet-잉게마르 베르히만  78. 지옥에 떨어진 용감한 자들 - La Caduta Degli Dei-루키노 비스콘티  79. 지옥의 묵시록 - Apocalypse Now-프란시스 포드 코포라  80. 워터프론트 - On the Waterfront-에리아 카잔  81. 길 - La Strada-페데리코 펠리니  82. 아메리칸 그래피티 - American Graffiti-죠지 루카스  83. E.T. - The Extra - Terrestrial-스티븐 스필버그  84. 장 꼭또의 흑인 올페 - Orphee-장 꼭토  85.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 Ascenseur Pour L"Echafaud-루이 말  86. 전화의 저편 - Paisa-로베르토 롯셀리니  87. 제7의 봉인 - Der Sjunde Inseglet-잉게마르 베르히만  88. 양철북 - Die Blechtrommel-폴커 슐렌도르프  89. 엠 - M-프릿츠 랑  90. 외인부대 - Le Grand Jeu-쟈크 페데르  91. 욜 - Yol-일마즈 귀니  92. 분노의 주먹 - Raging Bull-마틴 스콜세스  93. 나쁜 피 - Mauvais Sang-레오 까락스  94. 파리 텍사스 - Paris, Texas-빔 벤더스  95. 나막신의 나무 - L"Albero Degli Zoccoli-엘만노 올리  96. 바그다드 까페 - Bagdad Cafe-퍼서 아드론  97. 브라질 - Brazil-테리 길리엄  98. 역마차 - Stagecoach-죤 포드  99. 달콤한 인생 - La Dolce Vita-페데리코 펠리니  100. 스타워즈 - Star Wars-죠지 루카스          1. (1941) 오손 웰즈   2. (1955) 찰스 로튼   3. (1939) 장 르누아르   4. (1927) F.W. 무르나우   5. (1934) 장 비고   6. (1931) 프리츠 랑   7. (1952) 진 켈리/ 스탠로 도넌   8. (1958) 알프레드 히치콕   9. (1945) 마르셀 까르네   10. (1956) 존 포드      11. (1925) 에릭 본 스트로하임 --- 한글 자막이 없지요, 보고싶은데...   12. (1959) 하워드 혹스   13. (1942) 에른스트 루비치   14. (1953) 오즈 야스지로   15. (1963) 장 뤽 고다르   16. (1953) 미조구치 켄지   17. (1931) 찰리 채플린   18. (1927) 버스터 키튼   19. (1922) F.W. 무르나우   20. (1958) 사티야지트 레이  --- 요즘 곰플레이 고전 무료영화 목록에 있더군요.     21. (1932) 토드 브라우닝   22. (1954) 니콜라스 레이   23. (1973) 장 으스타슈   24. (1940) 찰리 채플린   25. (1963) 루치노 비스콘티   26. (1959) 알랭 래네   27. (1929) 조지 윌름 파비스트 ---- 이건 무성영화일 듯, 구하기 어려운   28. (1959) 알프레드 히치콕   29. (1959) 로베르 브레송   30. (1951) 자크 베케르      31. (1954) 조셉 L. 맨키위즈   32. (1955) 프리츠 랑 ---- 이것도 구하기 어려울 듯   33. (1953) 막스 오필스   34. (1952) 막스 오필스   35. (1978) 마이클 치미노   36. (1960)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37. (1925)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38. (1946) 알프레드 히치콕   39. (1944)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40. (1972)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41. (1958) 오손 웰즈   42. (1928) 빅터 소스트롬 --- 이것도 무성영화에 구하기 어려울 듯   43. (1968) 스탠리 큐브릭   44. (1982) 잉마르 베르히만   45. (1928) 킹 비더   46. (1963) 페데리코 펠리니   47. (1962) 크리스 마르케   48. (1965) 장 뤽 고다르   49. (1936) 사카 기트리   50. (1974) 페데리코 펠리니      51. (1946) 장 콕토   52. (1959) 빌리 와일더   53. (1958) 빈센트 미넬리 -- 이걸 어디서?   54. (1964)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55. (1933) 머리안 C. 쿠퍼/ 어니스트 B. 쇼드샤크   56. (1944) 오토 프레밍거   57. (1954) 구로자와 아키라   58. (1959) 프랑소와 트뤼포   59. (1960) 페데리코 펠리니   60. (1987) 존 휴스턴  -- 회고전 할 때 봤어야하는데     61. (1932) 에른스트 루비치   62. (1946) 프랭크 카프라   63. (1947) 찰리 채플린   64. (1928)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65. (1959) 장 뤽 고다르   66. (1979)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67. (1975) 스탠리 큐브릭   68. (1937) 장 르누아르   69. (1916) D.W. 그리피스   70. (1936) 장 르누아르     71. (1967) 자크 타티   72. (1945) 로베르트 로셀리니   73. (1954) 루치노 비스콘티   74. (1936) 찰리 채플린   75. (1991) 모리스 피알라   76. (1939) 레오 맥커레이   77. (1966)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78. (1934) 조셉 본 스텐버그   79. (1954) 미조구치 켄지   80. (2002) 페드로 알모도바르      81. (1968) 블레이크 에드워즈 --- 이건 어디서 구해?   82. (1931) F.W. 무르나우   83. (1953) 빈센트 미넬리   84. (1954) 조지 쿠커   85. (1953) 자크 타티   86. (1963) 엘리아 카잔   87. (1952) 루이스 브뉘엘   88. (1955) 로버트 알드리치   89. (1984) 세르지오 레오네   90. (1939) 마르셀 까르네      91. (1948) 막스 오필스   92. (1961) 자크 드미   93. (1979) 우디 알렌   94. (2001) 데이빗 린치   95. (1969) 에릭 로메르   96. (1955) 알랭 래네   97. (1925) 찰리 채플린   98. (1932) 하워드 혹스   99. (1948) 비토리오 데시카   100. (1927) 아벨 강스    
1091    [쉼터] - 먹는 꽃과 먹지 못하는 꽃 알아보기 댓글:  조회:4444  추천:0  2017-04-02
최근 웰빙(참살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꽃을 이용해 비빔밥, 쌈밥, 샐러드, 샌드위치, 튀김 등 다양한 형태의 꽃 요리가 개발되고 있다. 하지만 꽃 중에는 먹을 수 있는 게 있고 먹어선 안 되는 것도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자료를 토대로 식용 꽃의 종류와 올바른 섭취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꽃을 이용한 요리는 꽃에 함유된 비타민, 아미노산, 미네랄 등 다양한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고 꽃잎의 화려한 색과 고유의 은은한 향기로 먹는 사람의 입맛을 돋운다. 일반적으로 먹을 수 있는 꽃 중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꽃은 진달래, 국화, 동백, 호박, 매화, 복숭아, 살구꽃 등이 있다. 서양이 원산지인 꽃으로 먹는 꽃은 베고니아, 팬지, 장미, 제라늄, 재스민, 금어초, 아카시아 등 수십 종이다. 진달래는 전통적인 꽃 요리로 화전에 사용된다. 국화와 아카시아 꽃은 꽃잎차로, 호박꽃, 매화 등은 떡에 많이 사용된다. 최근에는 비빔밥, 쌈밥, 샐러드, 튀김 등 다양한 형태의 요리가 개발 이용되고 있다. 케이크 등을 장식할 때도 꽃이 사용된다. 그러나 식용 꽃이라 하더라도 꽃가루 등에 의한 알레르기가 일어날 있다. 그래서 암술 수술 꽃받침은 제거하고 쓴다. 특히 진달래는 수술에 약한 독성이 있으므로 반드시 꽃술을 제거하고 꽃잎만 물에 씻은 후 먹는다. 진달래와 철쭉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철쭉에는 그레이아노톡신이라는 독성 물질이 있으므로 절대 먹으면 안 된다. 그밖에 은방울꽃, 디기탈리스, 동의나물꽃, 애기똥풀꽃, 삿갓나물꽃 등에도 독성이 있어 먹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장식용 꽃은 농약으로 재배했을 수 있다. 식용 목적으로 따로 재배한 꽃을 먹어야 한다. 꽃잎은 따서 바로 요리하는 것이 좋지만 보관해야 할 경우에는 마르지 않도록 밀폐된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한다. 고유의 색과 향을 오래 보존할 수 있다. 꽃잎차 등에 쓰기 위해 말릴 때 꽃 본연의 색을 최대한 살리려면 꽃잎을 연한 소금물(1%)로 살짝 씻어 한지 위에 펼쳐 놓고 서늘한 그늘에서 바짝 말린다. 강한 향과 신맛을 내는 국화나 민들레 등은 살짝 쪄서 연한 설탕물을 뿌리며 말리면 맛이 부드럽다. [사진출처=아이클릭아트]
1090    "6.10 "과 10억 댓글:  조회:3646  추천:0  2017-03-29
밥 딜런 노벨상 상금 10억원 "버리는가?"… 美 '음유시인' 밥 딜런[연합뉴스TV 제공] (스톡홀름 AFP dpa=연합뉴스) = 지난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이 상 수락 강연을 아직 하지 않아 상금 10억 원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 싱어송라이터인 딜런은 다음 달 1일과 2일, 9일에 각각 스웨덴 스톡홀름과 룬드에서 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그러나 딜런은 스웨덴 방문이 임박했는데도 노벨 문학상 수락 강연을 할 것인지 아닌지를 상 주관 기관인 스웨덴 한림원에 아직 밝히지 않고 있다.  한림원은 지난해 10월 딜런을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으며, 같은 해 12월 10일 시상식을 열었다. 당시 딜런은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고 감사 연설문을 보냈으며, 이 연설문은 주스웨덴 미국 대사가 대신 읽었다. 수락 강연은 시상식이 거행된 날로부터 6개월 이내인 오는 6월 10일까지 해야 하며, 수락 강연을 하지 않으면 상금인 800만 크로나(약 10억1천만 원)을 받을 수 없다. 사라 다니우스 한림원 사무총장은 지난 27일 블로그를 통해 "최근 몇 달 동안 딜런과 전화 통화한 적 없으나, 상금을 받으려면 6월 10일까지 노벨상 수락 강연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다"며 "어떻게 할지는 전적으로 그에게 달렸다"고 밝혔다. 다니우스 사무총장은 "어떤 경우에도 2016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딜런임이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딜런은 지난해 시상식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불참 사유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 중에는 건강 등을 이유로 시상식에 참여하지 않은 예가 가끔 있었다. 그러나 수상자들은 강연문을 한림원으로 보내거나, 강연을 스웨덴 외 다른 나라에서 하는 등 수락 강연을 하지 않은 사례는 없었다. 수상 강연은 정해진 길이가 없으며 공연, 비디오, 짧은 연설, 노래 등 어떤 형태로든 할 수 있다.   
1089    [고향문단소식]- "흑토 녕안 파수군=최화길 "사랑" 출산하다... 댓글:  조회:5460  추천:0  2017-03-27
최화길의 시집 《사랑,그 찬연한 빛발》 출간 (ZOGLO) 2017년3월24일  최화길의 시집 《사랑,그 찬연한 빛발》이 일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의해 출간됐다.   시집은 “사랑을 클릭하다”, “사랑하면서 사랑을 배운다”, “사랑 만세”, “사랑이 멀어져 갈때”, “사랑,그 찬연한 빛발” 등 5개 부분으로 나뉘여 도합 90여수의 시들을 실었다.   최화길은 1962년 12월 28일에 림구현 흥푸촌에서 출생, 연변대학 조문전업(통신교육)을 졸업했다. 시, 수필, 동시, 가사 등 다양한 쟝르의 문학작품 500여수(편)을 발표했고 시집 《봄날의 사색》, 동시집 《해님의 낚시질》 등 출간경력이 있다.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흑토문학상”시부문 대상 등 10여차의 수상경력이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천고의 사랑을 시로 표현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지만 사랑을 떠나서는 시가 따로 존재할는지 또한 의심스럽다.이 시집은 오직 사랑을 숭상하는 내 마음의 충성어린 고백이고 영원한 송가일것이다.”고 적었다.   시인 강혜라는 최화길의 시집을 놓고 “‘사랑의 지게군’ 최화길시인은 이웃집 아저씨의 말투처럼 하나도 세련되거나 멋지지 않지만 바로 그속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절절한 메시지가 숨겨져있으며 그런 진솔한 메시지는 독자들에게 소박하고 솔직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다가가면서 큰 울림이 되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연변일보 장향월 기자 ==========================덤으로 더 @@ '좋을 법하다(원칙)/좋을법하다(허용)'로 두 가지 띄어쓰기가 가능합니다. 우리말에서 '법하다'는 보조 용언으로 쓰이는데, 제47항에 따르면, "보조 용언은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하되, 경우에 따라 붙여 씀도 허용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의존 명사 ‘양, 척, 체, 만, 법, 듯’ 등에 ‘-하다’나 ‘-싶다’가 결합하여 된 보조 용언(으로 다루어지는 것)의 경우도 앞말에 붙여 쓸 수 있다."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예) 보조 용언 /   원칙              /     허용      양하다     /  학자인 양한다. / 학자인양한다.      체하다    / 모르는 체한다.  / 모르는체한다     듯싶다    / 올 듯싶다.        /  올듯싶다.     뻔하다 /  놓칠 뻔하였다.  / 놓칠뻔하였다.     법하다 / 있을 법하다.      /  있을법하다.    
1088    전통예술은 절대로 포기할수 없다... 댓글:  조회:6039  추천:0  2017-03-23
습근평총서기께 장고춤을 선보인 23세 조선족청년 (ZOGLO) 2017년3월22일  인물이름 : 박경무 “춤은 내 운명”, 습근평총서기께 장고춤을 선보인 23세 조선족 청년 지난 2월 24일,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제3채널 “무용세계” 프로에서 소고춤을 추는 한 청년의 무대를 우연히 접했다. 조선족인듯한 모습에 이끌려 자막정보에 따라 중앙민족대학교 무용학원을 찾았다. 그리고 취재중에 알게 된 또 한가지 빅뉴스! 수소문 끝에 찾아간 TV속 주인공이 지난해 8월 중국소수민족문예합동공연 때 우리민족 무용의 상징 장고춤으로 클로징무대 한가운데를 근사하게 채웠던 출연자와 동일 인물이였던 것!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디선가 잔잔한 위안이 일었다. 그 이야기속으로 안내한다. ▲ CCTV 3채널에서 방송된 중앙민족대학교 졸업공연 독무 흥소리 중앙민족대학교 무용학원에 재학중인 박경무군, 그가 바로 지난해 8월 “조선족 출연진”의 명찰을 달고 중국소수민족문예합동공연에 참가했던 23세 남무용수다. 중국소수민족문예합동공연 준비를 앞두고 장고춤 안무를 짜달라는 교수님의 요청을 받고 박경무군은 민족가무단을 찾았다. 현장에 가보니 함께 무대에 올라야했던 상황, 그렇게 박경무군에게 소수민족의 일원으로서 조선족을 대표해 소수민족 최대의 문예공연 무대에 설 기회가 찾아들었다. ▲ 제5회전국소수민족문예합동공연 개막식 《幸福鼓·中国梦》 여러민족 솔로 무용수들과 함께 박경무 (우) ▲ 제5회전국소수민족문예합동공연 페막식 《阿里郎随想》 박경무 (좌) 북경에서 가장 무더운 시기인 8월, 박경무군은 소수민족문예합동공연을 위해 학교체육관에서 전국의 민족대학 학생 800여명과 함께 이른 아침부터 밤 11시까지 50일간의 집중 연습에 돌입했다. 땀으로 질퍽한 체육관 바닥에 미끌어 넘어져도 다른 출연자들은 알아채지 못하고 그대로 밟고 지나갈 정도로 방대한 수의 출연진이였다. 대형 공연인지라 넘어져도 아파도 지체할 시간없이 재빨리 대오에 합류해 동작의 순서를 따라야 했고 그속에서 박경무군도 례외는 아니였다. 연습이 끝난뒤 퍼렇게 멍들고 찢겨 피자국이 남은 다리를 보며 연습중에는 그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박경무군 자신도 놀랐다. ▲ 제5회전국소수민족문예합동공연 페막식 박경무 (좌) 총서기의 앞에서, 그것도 어린 나이에 대선배와 호흡을 맞추며 조선족의 대표적 무용인 장고춤을 대중들에게 선보였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너무 뿌듯한듯 경무군은 그때의 설레임을 어조에 그대로 담아냈다. “총서기의 앞에서 춤을 춘 것도 엄청난 영광이였지만 전국적인 큰 무대에서 저의 구상을 입힌 장고춤을 대중에게 선보였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 졸업공연 때 아버지랑 아버지는 연변오동팀 전 축구선수 박문호씨 지금은 아들의 무용수 삶을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워 하는 아버지다 춤에 대한 박경무군의 열정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천생 춤꾼”이라는 단어가 썩 어울릴 것 같았다. 축구선수 출신의 아버지는 아들 역시도 무용수가 아닌 축구선수로 키우려했지만 공이 멀리 굴러가면 주어오길 그렇게도 싫어하던 아들을 보며 마음을 접었다. 아버지가 무용을 반대했던 리유도 그랬다. “공도 줍기 싫어하는 애가 무슨 무용을 한다고!” ▲ 졸업공연때 고모와 함게 연변대학예술학원 무용계 박설화교수 (우) “경무가 11살의 나이에 저를 찾아와 무용을 배우겠다고 할 때 한사코 말렸습니다. 지금은 경무가 더 잘 할 수 있도록 항상 이끌어주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생각은 빗나갔다. 현재 연변대학교에서 무용을 가르치고 있는 고모의 모습이 어린 경무군에겐 가장 근사하고 아름다워 보였단다. 고모의 무용수 인생은 경무군에게 나침반으로 작용했다. 춤에 일가견이 있었던 친할머니의 장단을 들으며 자라온터라 그 친숙함이 무용을 시작할 때 경무군에게 큰 도움이 되였단다. 그래서인지 대중가요나 팝댄스에 열광하는 90년대이후 출생자 답지않게 우리 민요를 들으면 괜스레 흥이나고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싶다는 박경무군이다. ▲ 2015년 1월 《天天向上》프로그램 록화 현장 ▲ 2015년 연변TV음력설문예야회 박경무 (가운데) 전통무용의 매력에 사로잡힌 후엔 정규적인 리론과 실기수업을 받고 싶어 중앙민족대학교 무용학원에 지원했다. 연변예술학교에서 4년, 중앙민족대학교에서 보낸 4년의 시간까지 합치면 경무군이 무용의 길을 걸은지도 올해로 8년철에 접어든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는데” 라는 생각으로 무용에 뛰여들었들 땐 우리민족의 전통무용이 이렇게 힘든줄을 몰랐다는 박경무군, 멋모르고 애착으로만 시작했을 때는 호흡법도, 정서도 모른채 무작정 모방만 했었다. 하지만 8년의 연습시절을 지나온 지금의 박경무군에겐 나름의 소신이 생겼다. ▲ 취재를 받고 있는 박경무군 “우리민족 전통무용의 정수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갈수록 많은 대학의 무용학원들에서 조선족 전통춤 수업을 개설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민족의 춤이 매력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우리춤에는 우리 민족만의 멋과 맛이 있습니다. 춤을 추는 사람이 지닌 마음과 생각, 흥과 신명이 어우러져서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는 것이지요. 민족무용을 하면서 아무리 본따도 완전히 소화할 수 없는 게 바로 우리민족의 전통춤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우리민족의 춤은 모방한다고 해서, 따라서 춘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무대활동을 많이 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조선족의 전통무용이란 이런것이다! 라는 걸 제대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 2014년 제1회중국조선족무용대회 금상 ▲ 중앙민족대학교 건교 65주년 기념무대에 선 박경무군 남들보다 빼여나게 잘해서가 아니라 조선족이기 때문에 그 정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사랑받고 더 “애용”되고 있으며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는 박경무군, 대학에 와서 여러 민족, 여러 쟝르의 춤을 접한 뒤로 조선족 전통무용의 진미를 더 깊이 알게 되였고 그만큼 전통무용에 대한 박경무군의 사랑도 날이 갈수록 애틋해져갔다. ▲ 조선족 무용가 지복자 교수님으로부터 교습을 받고 있는 박경무군 ▲ 경무군의 하루 일과 대회 준비를 앞둔 2개월간은 아침 6시에 눈을 떠 운동장 15바퀴를 시작으로 잠들기 전까지 연습한다. 아무리 아파도 연습에는 빠지지 않는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며 과도한 연습 때문에 인대를 다치기도 했었다. 해외 공연때면 시차 적응이 안된 상태에서도 최상의 컨디션을 보여야한다. 실수없는 무대 위 화려한 모습뒤에는 경무군의 뜨거운 “열정”과 끊임없는 도전이 있고 우직한 의지가 있었다. “무용수란 그런것 같습니다. 힘이 빠지다가도 무대에 오르면 열정이 솟구쳐요!” 그 열정의 한모퉁이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깊숙히 자리해 길을 밝혀주고 있다. 어머니는 경무군을 위해 현재 한국에서 일하고 계신다. “밥은 먹고 연습하니? 시간날 때 영상통화 할가?” 긴 시간의 연습에 아들의 몸이 축날가 항상 걱정인 어머니다. 지난해 서울국제무용대회에 오른 아들의 모습을 어머니는 처음으로 무대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감상평은 특별히 없었지만 공연후 아들의 공연 사진을 지인들에게 돌리는 어머니를 보는 것만으로도 경무군에겐 큰 기쁨이였다. 경무군에게 그 무대는 어머니께 드리는 보답이자 지난 7년간 아들에게 몰부어온 어머니의 정성과 수고에 대한 보상이였다. ▲ 서울국제무용대회 때 어머니와 함께 “민족무용은 항상 저의 존재를 느끼게 해줍니다. 하루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배기지 못하는 걸로 보아 저에게 춤은 ‘밥’과 같은 존재라고 할가요? 하하! 전통무용 하면 보통은 녀무용수들의 아름다운 춤사위를 떠올리실텐데요, 그건 아마 남성 무용수들이 적어서일거에요. 전통에 현대미를 입힌 남무용수의 박력있는 춤을 보시면 색다른 멋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박경무군은 지금까지 한번도 포기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활발한 무대활동으로 우리민족 전통무용의 정수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이로써 우리민족의 더 많은 남무용수 지망생들에게 힘을 주고싶은 것이 현재 경무군의 바람이다. 그가 제시하는 “꿈의 로드맵”에는 민족무용의 발전과 계승이 늘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 중앙민족대학교 무용학원 최월매 교수 (좌)  안무가 김영삼 선생님 (우) ▲ 소고춤 작품을 준비중인 박경무군 현재 경무군은 전통과 현대미가 어우러진 “소고춤”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경험을 많이 쌓아 향후에는 단독 작품활동도 하고싶다며 작품창작에 대한 욕심도 살짝 내비쳤다. 우리민족의 젊은층 남무용수가 많이 부족한 현실이다. 많은 대학교에서 민족무용 전공을 설치하고 있지만 전공자 대부분이 타민족 학생이다. 취재를 마치고 다시 연습에 몰입하는 경무군의 모습을 창문너머로 들여다보노라니 어떤 든든함과 위안, 희망의 감정들이 창문틈으로 전해져왔다. 중앙인민방송국 구서림 ========================================= 애절한 새납소리 어찌 취하지 않으리... (ZOGLO) 2017년3월23일 16시34분     인물이름 : 김호윤 나의 새납도 새 주인 찾아야 할텐데. 문화예술이 빠르고도 자연스럽게 국경을 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그러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있다. 이제 누군가는 전통을 외면한다. 전통 자체가 현대인의 정서에 공감을 주지 못하기때문이란다. 또 누군가는 가슴 한가득 그 외면받은 전통을 그러안고 여전히 뜨거운 열정을 쏟아낸다.   ◆“나는 새납에 미쳤다!” 여기, 이 빠른 시대의 변화에서 잠시 비켜선 한 새납연주자의 이야기로 우리의 전통악기인 새납이 만들어내는 가락에 귀를 기울여 본다. 연변가무단에서 장새납 연주자로 있는 김호윤(59살)씨는 자신의 40년 새납연주인생에 대해 매일매일이 “설렘”이라고 표현했다. 도대체 새납이 그에게 어떤 존재이기에 산전수전 다 겪으며 반세기 넘게 살아온 사람이 매일 설렜을가. “그냥 놀러만 오세요. 아이고, 인터뷰는 안할래요. 새납 부는 사람이 새납만으로 말하면 됐지, 뭔 다른 할말이 있겠어요.” 인터뷰하려고 전화를 넣었더니 무작정 사양을 하던 그가 그의 작업실을 찾은 기자를 무척이나 반갑게 맞이한다. 그가 꿈에서도 잊지않는다는 새납을 꼭 부여잡은채로 말이다. 거절은 했지만 전통악기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현실이 안타까워 뭐라도 해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차라 기자의 방문이 내심 반가웠던 눈치다. 고향이 왕청인 그의 새납인생 40년은 한번의 우연에서 출발했다. 그저 그의 고향으로 연변가무단이 공연을 왔던 그날, 지금은 고인이 된 김석산선생의 새납연주를 들은 그 한번이 그를 지금의 새납 “미치광이”로 묶어두는 “끈”이 됐다. “그 수많은 악기가 내는 가락들중 오로지 새납소리만이 제 귀를 파고들었답니다. 날아갈듯 가벼우면서도 애절했고 또 신명나는 독특한 음색이였죠. 그 가락을 뭐라고 말할가. 피를 토하듯 외친다고 할가? 애간장이 끊어질듯 아팠다고 할가?” 그 이후부터 어린 김호윤은 기차로 왕청에서 도문으로, 도문에서 다시 연길로 오고가면서 새납을 배우기 시작하다 연변예술학교 대학반에 진학했고 졸업 후 바로 연변가무단에 몸을 담그면서 전국 방방곡곡 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납은 오롯이 그의 삶이 되여 그동안의 세월을 견뎌왔다.   ◆우리가 접하고있는 “장새납” 우리 민족의 전통새납은 “태평소”라고도 불리는데 목관부류에 속하며 리드를 가진 세로 부는 취주악기이다. “태평소”는 조선반도에서 주로 궁중음악에 쓰일 때 부르던 이름이고 민간에서는 “호적”, “새납”, “쇄나”, “철적”, “랄라리” 등으로 불리웠다. 지금 우리가 접하고있는 새납은 바로 장새납, 조선에서 개량한 새납이다. 초창기에 사용했던 전통새납은 음색이 예리하고 짙으며 음량이 크고 통제가 힘들었다. 전통새납은 음량이 큰 장점으로 인해 농악, 무당음악, 군악 등 실외음악에서는 빠질수없는 악기로 사용되였지만 실내에서는 다른 악기들과의 조합이 어려워서 독주곡을 제외하고 일반합주에는 거의 사용되지 못했다. 이러한 전통새납의 단점들을 극복하고저 1972년에 김석산을 위수로 한 민족예술인들은 12평균률로 조률되고 전통새납과 조선장새납의 장점을 보완하고 단점은 극복시킨 연변개량새납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연변새납은 리드가 크므로 공기량의 차이가 크고 또 악기의 음공도 크기때문에 연주에서 가까운 음들의 진행은 쉬우나 4도조약의 진행에서부터는 음의 정확도를 확보하기 힘든 문제가 존재했다. 그 단점때문에 연변새납의 “수명”은 그리 길지 못했고 현재 보급된 새납은 바로 날로 발전하는 현대음악의 수요에 의해 조선에서 1970년대에 전면적인 민족악기개량을 시작해 만들어낸 장새납이다. 장새납은 전통새납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개량악기로서 12평균률로 조률되였을뿐만아니라 음역도 크게 확대됐다. 우리 전통악기 대부분이 국가급, 성급 및 주급 무형문화재에 등록되여있지만 장새납은 개량새납이라는 리유로 등록이 거부됐다.   ◆장새납의 미래는 청춘들에게 서양악기의 습격으로 우리의 전통악기는 이미 저만치 밀려난 상황, 서운함이 몰려올 때도 많다는 김호윤씨이다. “전통악기중에서도 특히 새납은 불고싶어도 시장수요가 많지 않다보니 아무리 악기시장을 둘러봐도 제대로 된 새납 하나 장만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라고 김호윤씨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우리 민속악기가 내는 소리에 공감할수 있는 정서를 가지고있다. 우리는 소리와 함께하는 민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새납연주자들이 설만한 무대가 점점 좁혀지면서 “밥벌이”도 안된다고 점점 외면을 받고있다. 현재 현역으로 뛰고있는 기성세대 새납연주자는 김효윤씨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전통을 이으려는 청춘들의 발걸음도 뜸해진지 오래다. 지금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새납전공을 선택한 학생은 단 3명뿐, 그들마저도 어려운 상황에 이길을 계속 걸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다고 한다. “우리 전통음악문화의 미래는 우리 청춘들이 얼만큼 관심을 갖고 이어가는지에 달려있어요. 전통을 잇기 위한 젊은이들의 노력이 이어져야죠.” 결코 소박하지 않은 김호윤씨의 바람이다. 그리고 이내 그는 혼자말을 하듯 나지막이 얘기를 이어간다. “흐르는 세월은 어쩔수 없는거예요. 언젠가는 고음을 내던 내 새납소리도 점점 약해져 숨이 차 더이상 연주를 할수 없게 되는 날이 올거예요. 그때에는 분신처럼 따라다니던 제 이 새납이 새 주인을 찾아야 할텐데…”. 연변일보 글·사진 신연희 기자
108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몰상식한이 호랑이를 죽여버리다... 댓글:  조회:4482  추천:0  2017-03-22
호랑이 포획해 동물원으로 옮기려다가 그만... (ZOGLO) 2017년3월22일 야생동물 서식지 보호 구역에 살던 호랑이가 굴착기에 깔려 억울하게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야생동물 서식지 보호 구역에 살던 호랑이 / Jaidev Dhadha 20일(현지 시간)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인도의 한 채석장에서 광부 두 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동료의 사고를 본 다른 광부들은 겁에 질려 채석장에 나가기를 꺼렸다. 그러나 채석장 근처는 야생동물 서식지 보호 구역으로 지정된 곳이어서 호랑이를 불법으로 포획할 수는 없었다. 이에 광산업체 측은 산림청에 호랑이를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광산업체의 압박에 떠밀린 산림청은 결국 호랑이를 포획해 동물원에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일이 급하게 진행된 탓에 포획자들은 모두 경력이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호랑이는 광부들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강제로 동물원에 보내지게 됐다 / Jaidev Dhadhal 포획자들은 호랑이에게 진정제를 투여한 뒤 굴착기로 들어 올려 옮기려 했다. 호랑이는 움직이는 굴착기에 큰 관심을 보이며 경계심을 풀고 다가왔고, 얼굴을 비비며 애정을 표시했다. 그러나 굴착기 기어 조작에 서툴렀던 포획자는 그만 굴착기로 호랑이를 짓눌러버리고 말았다. 굴착기에 깔린 호랑이는 빠져나오려 애를 썼지만, 진정제가 과다 투여된 탓에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다. 호랑이 잡기에 급급했던 포획자들은 이 틈을 타 호랑이를 포획했지만, 호랑이는 결국 무거운 굴착기에 척추가 깔려 죽고 말았다. 무리하게 진행된 작업 탓에 호랑이는 굴착기에 깔려 죽고 말았다 / Jaidev Dhadhal 인도 산림청 수의사는 “진정제 과다투여나 척추골절로 죽은 것이 확실하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현재 경찰은 규범을 위반한 포획자들을 대상으로 사건의 정확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한편, 호랑이의 죽음을 본 네티즌들은 “살던 곳에서 내쫓는 것도 모자라 죽여 버리기까지” “인간이 제일 잔인하다.” 등의 반응을 보이며 포획자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조선일보
1086    [고향문단소식] - 화룡 출신 정세봉 평론집 출간되다... 댓글:  조회:3739  추천:0  2017-03-22
정세봉평론집 '문학 그 숙명의 길에서' 한국서 출판 (ZOGLO) 2017년3월22일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중국 조선족 소설가 정세봉(74) 씨의 문학세계를 정리한 평론집 '문학 그 숙명의 길에서'(신세림출판)가 국내에서 출판됐다.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출신의 정 씨는 문화대혁명 이후 등장한 문학사조인 '상처문학' 분야에서 조선족 작품을 처음 알린 '하고 싶던 말'과 이후 반성문학 사조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볼셰비키 이미지'를 저술해 조선족사회뿐만 아니라 중국 문단에서도 화제가 된 작가이다. 1975년 등단 이래 40여 편의 소설을 발표했고 옌볜문학상, 배달문학상, 제1회 중국소수민족문학상 등 16개 문학상을 받았다. 평론집에서는 조선족 대표작가로 불리는 김학철을 비롯해 한광천 흑룡강신문사 사장, 임규찬 성공회대 교수 등 30여 명의 작가, 언론인, 평론가, 학자 등이 칼럼·평론·인터뷰 등을 통해 정 작가의 문학세계를 조명하고 있다.   옌볜작가협회 부주석을 역임한 이상각 시인은 "농민작가 출신인 정 씨는 빈틈없이 따지는 과학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작가적 양심을 지켜온 대표적 문인"이라고 소개했고, 김학철 작가는 "'볼셰비키의 이미지'가 문단에서 필화직전까지 갔던 이유는 '거짓말을 안 한 죄'"라고 언급했다. 평론가 이시환은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변모하는 조선족 사회를 가감 없이 그려낸 전형적인 리얼리즘 작가"라고 평가했고, 한광천 사장은 "역사를 마주한 사명감으로 글을 써온 그는 성공작보다는 문제작을 더 많이 세상에 선보였다"고 분석했다. 편저에도 참여한 정 씨는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현대사의 다양한 질곡을 헤쳐온 조선족의 삶을 글로 옮기는 것은 나의 숙명"이라며 "등단 후 40여 년 소설가로서 살아온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해 칭찬과 격려뿐만 아니라 혹평까지 가감 없이 담았다"고 밝혔다. 조선족 문단 유력 문예지인 옌볜문학의 편집 당당을 역임했던 정 작가는 2005년 옌볜소설가학회를 설립했고 '김학철 문학상'을 제정하는 등 조선족 문학의 저변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그는 해방 후 국군과 인민군으로 갈라선 형제가 6·25 전쟁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뤘던 아픈 가족사를 소재로 한 장편 소설을 집필 중이다.  ////////////////////////(자료)=   룡정 문예창작의 새로운 스타트 뗀다 (ZOGLO) 2017년3월21일  3월 18일 오전, 룡정시 제1기 문예창작강습반이 룡정시문화관 4층회의실에서 개최되였다. 이번 강습반은 룡정시 정부에서 룡정시를 문화관광도시로 건설하는 보조에 발 맞춰 룡정시 문예창작대오건설을 진일보 강화하고 문예창작을 활성화하여 문예작품의 내용을 보다 풍부히 하고 작품의 질을 높이며 전시 문예창작일군들의 수준을 제고시키려는 취지하에 룡정시문화라지오텔레비죤신문출판국에서 추최하고 룡정시문화관과 룡정시작가협회의 협찬으로 조직되였다. 룡정시문화관 문예창작부 주임이며 룡정시작가협회주석인 리승국의 사회하에 조직된 이번 강습반에는 룡정시작가협회 회원과문예창작애호가들, 그리고 전시 각 향, 진과 가두의 문예골간 등 30여명이 참가하였다. 특강을 하고 있는 김혁 작가. 강습반에서 룡정시문화관 관장 김금순이 개막사를 하고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음악부 김창근 주임과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겸 룡정시윤동주연구회 회장인 김혁이 특강을 하였다. 김창근은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음악부에서 다년간 쌓은 자신의 경험에 결부하여 가사창작에 대한 몇가지 주의사항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가사창작은 문예창작자들의 개인적 구상에만 의거하지 말고 꼭 작곡가들과 의사소통을 거쳐 서로 협력하여야원만한 작품을 창작할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김혁은 중국조선족의 백년이민사에서 나타난 문학인들과 예술가들의 력사를 소개하면서 문예창작은 반드시 사회현실에 립각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자기 민족사를 료해하고 이 민족사에 뿌리박고 창작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사진/글 룡정시 룡정중학교 김군욱)/길림신문
1085    [록색문학평화주의者]-중국 훈춘 경신벌에 기러기 날아들다... 댓글:  조회:6380  추천:0  2017-03-21
훈춘 기러기관상축제 거행, 3천여명 자원봉사자 적극 참여(ZOGLO) 2017년3월21일    인민넷 조문판: 사회적으로 철새를 애호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의식을 진일보 증강하고 광범한 시민들이 자각적으로 철새를 애호하고 보호하는 사업에 참여하는것은 인도하고 동원하기 위해 3월 18일 훈춘시에서는 한달간의 제6회 훈춘 기러기관상축제 및 "철새애호, 환경보호" 자원봉사활동을 정식으로 가동했다. 3천여명의 자원봉사자 "기러기관상축제"에 참가 18일 오전, 훈춘 세기광장에서 훈춘시 각 기업과 사업 단위 및 새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조직의 300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청산록수를 보호하고 아름다운 훈춘을 건설하자"를 주제로 한 기러기관상축제 가동식에 참가했다. 이어 자원봉사자와 촬영애호가들은 차를 타고 기러기활동이 비교적 빈번한 경신진 룡산호저수지부근에 도착했으며 철새들에게 먹이를 주거나 현장수집활동을 벌였다. 붉은색 자원봉사자 조끼를 입은 마사는 로씨야에서 왔는데 기자의 취재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자원봉사자로서 이번 활동에 참가하여 아주 흥분된다. 철새는 국경선이 없다. 중국인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것은 아주 의의있는 일이다." 새를 사랑하고 새를 보호하려면 전민의 행동과 힘이 필요 경신습지에서 새를 사랑하고 새를 보호하는 자원봉사자들은 이주과정에 보양이 필요한 철새들에게 미리 준비한 옥수수 등 먹이감을 던져주었다. 자원봉사자 장향양은 기자에게 이미 련속 3년간 먹이를 주는 활동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최근년간, 관리강도가 부단히 높아짐에 따라 훈춘의 생태환경은 더욱 좋아졌으며 훈춘을 경과하여 이주하는 조류의 수량과 종류가 더욱더 많아졌는데 그중 많은 종류는 국가1급보호조류에 속한다. 그는 "철새들이 훈춘에서 서식한다는것은 훈춘의 생태건설이 장족적인 진보를 거두었다는것을 설명한다. 물론, 이는 모두의 노력과 갈라놓을수 없다. 훈춘사람으로서 나는 자호감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기러기(자료) 기러기는 오리과에 딸린 겨울 철새이다. 크기는 큰 오리와 고니의 중간이다. 수컷이 암컷보다 크고 색깔은 암수가 같다. 몸길이는 40cm가량이고, 목은 몸보다 짧고, 부리 밑 부분은 둥글고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 다리는 빨리 걸을 수 있도록 고니와 오리보다도 더 앞으로 나와 있다. 날 때나 위험에 처할 때는 암수 모두 큰 소리로 울고, 화가 나면 목의 깃털을 떤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가 겨울을 난다. 우리나라에는 10월에 와서 이듬해 3월에 떠난다. 이동할 때는 V자 모양을 이루어 높게 날아간다. 바닷가의 갯벌이나 강가와 논밭 등지에서 물고기 · 벌레 따위를 잡아먹는다. 봄이 되면 시베리아로 가서 4~6개의 알을 낳는다. 암컷이 알을 품는 동안 수컷은 주위를 살핀다. 기러기의 수명은 30년 가량이고, 쇠기러기 · 흰기러기 · 큰기러기 따위의 종류가 있다. 물가에서 먹이를 찾는 기러기 떼 〈물가에서 먹이를 찾는 기러기 떼〉 기러기는 논 · 밭 · 저수지 · 습초지 등에서 벼 · 보리 · 밀 또는 연한 풀 따위를 먹고산다. 울음소리가 구슬퍼 가을 경치와 더불어 처량한 정서를 나타내는 새이다. 기러기의 한 종인 흑기러기 큰기러기 인도기러기 쇠기러기 V자 모양으로 하늘을 나는 기러기 떼 [Daum백과] 기러기 – 학습그림백과, 천재교육 편집부, 천재학습백과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분류 오리과 흑기러기속과 기러기속 문화재 지정 천연기념물 제325호 성격 동물, 새 유형 동식물 분야 과학/동물 요약 오리과 흑기러기속과 기러기속에 속하는 새의 총칭.   기러기 기러기의 무리가 나르는 형태. 내용 한자로는 보통 안(雁)이 쓰였고, 홍(鴻)·양조(陽鳥)·옹계(翁鷄)·사순(沙鶉)·가아( 0x954e鵝)·육루(鵱鷜)·주조(朱鳥)·상신(霜信)·매매(䳸䳸)·홍안(鴻雁)이라고도 불렸다. 우리말로는 기러기·기럭이·기럭기라고 불렸다. 전세계에 14종이 알려져 있으며, 우리 나라에는 흑기러기·회색기러기·쇠기러기·흰이마기러기·큰기러기·흰기러기·개리 등 7종이 기록되어 있다. 북반구의 북부에서 번식하고 겨울에 남하, 이동해 온다. 흰이마기러기·회색기러기·흰기러기 등 3종의 길 잃은 새[迷鳥]를 제외한 나머지 4종은 모두 겨울새들이다. 개리는 매우 희귀해졌고 흑기러기는 전라남도 여수에서 부산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는 해상에서 월동하는데, 그 무리는 모두 약 1천 마리 정도이다. 아직까지 한반도의 전역에서 흔히 월동하는 기러기는 쇠기러기와 큰기러기의 2종뿐인데, 그들 월동군도 개발로 인하여 월동지가 협소해짐에 따라 한정된 곳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쇠기러기는 몸길이 72㎝로 회갈색의 깃털로 덮여 있고, 큰기러기는 몸길이 85㎝에 흑갈색의 깃털로 덮여 있다. 쇠기러기는 특히 복부에 불규칙적인 가로줄무늬가 있으나 어릴 때는 없으며, 부리 기부(基部) 주위의 흰색 테도 어린 새는 없다. 이들 두 종의 새는 10월하순경에 우리 나라에 날아오기 시작하여 논·밭·저수지·해안과 습초지 또는 해안 갯벌 등지에 내려앉으며, 하천가와 하천의 섬에서도 눈에 띈다. 주로 초식을 하는 새로서 벼·보리와 밀, 기타 연한 풀과 풀씨를 먹는다. 기러기는 한방에서 약으로 쓰인다. ≪동의보감≫에는 기러기 기름은 풍비(風痺:몸과 팔다리가 마비되는 증상)에 연급(攣急)하거나 편고(偏枯:신체의 일부에 마비가 일어나는 증상)하여 기(氣)가 통하지 않는 것을 다스리고 머리털·수염·눈썹을 기르고 근육이나 뼈를 장하게 하며, 살코기는 모든 풍(風)을 다스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기러기는 가을에 오고 봄에 돌아가는 철새로서 가을을 알리는 새인 동시에 소식을 전해주는 새로서 인식되었다. 고전소설 <적성의전>에서 성의(成義)는 기러기 편에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다시 소식을 전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춘향전>의 이별요(離別謠) 중에 “새벽서리 찬바람에 울고가는 저 기러기 한양성내 가거들랑 도령님께 이내소식 전해주오.”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달거리>라는 단가(短歌)에서도 “청천에 울고가는 저 홍안 행여 소식 바랐더니 창망한 구름 밖에 처량한 빈 댓소리뿐이로다.”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기러기는 그 울음소리가 구슬퍼서 가을이라는 계절의 풍광과 어울려 처량한 정서를 나타내 주는 새이며, 사람이 왕래하기 어려운 곳에 소식을 전하여 주는 동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기러기를 ‘신조(信鳥)’라고도 한다. 한편, 기러기는 암컷과 수컷이 의가 좋은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홀아비나 홀어미의 외로운 신세를 “짝 잃은 기러기 같다.”고 하며, 짝사랑하는 사람을 놀리는 말로 ‘외기러기 짝사랑’이라는 속담도 있다. 혼례식에서 목안(木雁)을 전하는 습속은 이러한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신랑은 신부집에 이르러 혼례의 첫 의식으로 나무로 깎은 기러기를 신부집에 전한다. 그래서 혼인예식을 일명 ‘전안례(奠雁禮)’라고도 한다. 또한 남의 형제를 ‘안행(雁行)’이라고 하는데, 기러기가 의좋게 나란히 날아다니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규합총서≫에서도 기러기를 평하여 “추우면 북으로부터 남형양에 그치고 더우면 남으로부터 북안문(北雁門)에 돌아가니 신(信)이요, 날면 차례가 있어 앞에서 울면 뒤에서 화답하니 예(禮)요, 짝을 잃으면 다시 짝을 얻지 않으니 절(節)이요, 밤이 되면 무리를 지어 자되 하나가 순경하고 낮이 되면 갈대를 머금어 주살(실을 매어서 쏘는 화살)을 피하니 지혜가 있기 때문에 예폐(禮幣:고마움의 뜻으로 보내는 물건)하는 데 쓴다.”고 하였다. 이처럼 기러기는 가을을 알리는 새로서, 소식을 전해주는 새로서, 또한 정의가 두텁고 사랑이 지극한 새로서 우리에게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Daum백과] 기러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기러기에게서 배우다♡ 당신은 기러기들이 먹이가 있는 따뜻한 곳을 찾아 4만Km가 넘는 먼 길을 어떻게 날아가는지 아십니까? 기러기는 리더를 중심으로 V자 대형을 그리며 머나먼 여행을 합니다. 가장 앞에서 날아가는 리더의 날개짓은  기류에 양력을 만들어 주어 뒤에 따라오는 동료 기러기가 혼자 날때 보다는 70%정도 쉽게 날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이들은 이렇게 먼길을 날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울음소리를 냅니다. 그 울음소리는  앞에서 거센 바람을 가르며 힘들게 날아가는 리더에게 보내는 응원의 소리입니다. 기러기는 4만km가 넘는 머나먼 길을 옆에서 함께 날개짓을 하는 동료를 의지하며 날아갑니다. 만약 어떤 한 기러기가 아프거나 지쳐서  무리의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면... 다른 동료 기러기 두마리도 함께 대열에서 이탈해 지친 동료가 원기를 회복해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또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동료 기러기를 마지막까지 함께 지키다 다시 무리로 돌아옵니다. -기러기 이야기 중에서 -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도 기러기처럼 멀고도 험한 길을 날아가고 있습니다. 폭풍 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거친 곳을 뚫고 날아가야 하는 힘든 여정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나와 당신과 우리들이  함께 날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제발 자신의 안위와 사리사욕을 채우기위해 서로 물어뜯고 할퀴고 짓밟으려고만 하지말고 사람으로서의 도리와 사회정의에 맞춰가며 기러기처럼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1084    "竹林七賢"을 알아보다... 댓글:  조회:4217  추천:0  2017-03-20
                    죽림 칠현(竹林七賢) 술을 마시는데도 품격[品格]이 있는데 중국의 어느 술꾼이 왕에게 이를 9품으로 나누어 설명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통속에 사는 "디오게네스"에게 " 어떤 술이 제일 좋습니까? "하고 묻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남의 집 술" 집 한 칸 없는 "디오게네스"에게 술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남의 집 술이 좋다고 한 모양이다. 옛 중국의 서진[西晋:265 -316]시절 혼탁한 시절을 한탄하며, 낙양 성 밖 대나무 숲에 모여 술과 시[詩]로 시름을 달랬다는 "죽림 칠현[竹林七賢]"의 주량과 술 마시는 태도에서 나온 말인데 죽림칠현은 산도(山濤) 완적(阮籍) 혜강( 康) 완함(阮咸) 유령(劉伶) 상수(尙秀) 왕융 (王戎)으로 도읍 낙양(洛陽) 근처의 대나무 숲에 은거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술에 취한 채 '청담'으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의 청신기경(淸新奇警:산뜻하고 기발함)한 이야기, 곧 세속의 명리(名利) 명문(名聞) 희비(喜悲)를 초월한 고매한 정신의 자유 세계를 주제로 한 노장(老莊)의 철학을 논하며 명교(名敎:儒敎) 도덕에 저항했다. "죽림 칠현[竹林七賢]"은 이 일곱 사람을 지칭한 말이다. 술을 마시는데는 호주가[豪酒家]와 지주가[知酒家]가 있다. "호주가[豪酒家]"란 주량이 많은 사람을, "지주가[知酒家]"는 조금씩 마시면서도 즐길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죽림 칠현[竹林七賢]"중 대표적인 "호주가[豪酒家]"는 산도[山濤]이고 "지주가[知酒家]"는 유령[劉伶] 이었다. 아무튼 이들 일곱 사람은 어딜 가나 수레에 술독을 싣고 다니며 술을 즐겼고 이 장면을 그린 그림이 지금도 많이 나돈다. 임어당[林語堂]은 "生活의 發見"에서 계절에 따라 술 마시는 정취가 다르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봄철에는 집 뜰에서 마시고, 여름철에는 교외에서, 가을철에는 배[船] 위에서, 겨울철에는 집안에서 마실것이며 밤[夜]술은 달을 벗삼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풍류에 속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술을 자주 그리고 많이 마시게 된다. 그럴수록 "孔子는 술을 사양하지 않고 마시지만 난[亂]의 정도에 미치지 않게 하였다." 술은 인류 공통의 음식이지만 술을 대하는 태도는 나라나 문화에 따라 차이가 크다. 술자리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격언이 있다. 바로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過猶不及:과유불급)는 옛말이다. 원래 술은 술을 부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이를 이기지 못하면 술에 사람이 먹히고 만다. 중간에 도망가기, 잠들기, 시비 걸기, 옷 벗기, 울기, 허풍떨기, 깨부수기, 물어뜯기.......등등 술버릇이 나쁜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 문제는 이런 추태가 '상습범'들만의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누구라도 연출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술 주정은 술에 강하고 약한 것과 상관없다. 이런 장면은 오히려 술을 자신하는 이들에게서 더 빈번히 관찰된다. 주도(酒道)란 ? 주도(酒道)란 ? 바로 이 같은 추함을 막기 위해 몸으로 익혀야 할 예절이다. 옛 사람들은, 술은 어른 앞에서 배우라고 했다. 술을 가르친다는 것은 못 마시는 술을 억지로 먹게 한다는 뜻이 아니고, 술자리에서의 몸과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오경의 하나인 예기(禮記)는 하늘이 낸 술과 음식을 함부로 다루지 말 것과 아름다운 모임을 흐뭇하고 절도 있게 즐기도록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적고 있다. 관례 혼례 상례 제례 상견례와 더불어 유가의 여섯 가지 예에 속하는 예절인 향음주례는 중국의 것이지만, 구한말까지 전국 360개 향교에서 1년에 한 차례씩 치러졌다. 향음주례는 의관을 갖춘 주인이 손님의 집을 미리 찾아가 초청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당일 손님을 대문에서 맞은 주인은 손님들에게 먼저 잔을 권하고, 이어 그들이 따라주는 술을 받는다. 주인은 반드시 술잔 하나로 술을 돌려가며 권하지만, 잔이 바뀔 때마다 잔을 물에 씻는다. 이렇게 엄격한 가운데서도 음악연주로 흥을 돋우길 빼놓지 않는다. 향음주례의 구구한 절차는 요즘의 사정과 어울리지 않는 점이 많아 일일이 따를 방도가 없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상대방에 대한 공경심과 청결심, 절도는 난장판으로 끝나기 일쑤인 요즘의 우리 술자리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옛 중국에서는 군주가 신하를 술자리에 부를 때는 상 맨위에 물이 든 통을 갖다 놓았다고 한다. '현주'(玄酒·무술)라 불리는 이 맹물은, 물처럼 마시되 취하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고 술의 고마움을 알고 마시라는 의미다. 예전처럼 어른 앞에서 술을 배우는 일이 자취를 감춘 오늘날, '술 권하는 사회' 대한민국의 술꾼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술꾼의 등급 시인 조지훈은 술을 마신 연륜이나 마시게 되는 동기, 술버릇 등 여러 가지 특성을 종합해 술꾼의 등급을 18단계로 나누었다. 9급부터 9단 까지다. 먼저 초보단계는 술을 마실 줄은 알지만 어떤 이유로든 잘 안 마시는 사람들이다. 9 급[不酒 불주] 아주 못 마시진 않으나 안 마시는 사람. 8 급[畏酒 외주] 마시기는 하나 술에 겁을 내는 사람. 7 급[憫酒 민주]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 6 급[隱酒 은주]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까워 잘 안마시는 사람. 다음 단계는 술을 마시되 어떤 목적을 위해 마시는 사람들이다. 5 급[商酒 상주] 거래를 위해 마시는 사람. 4 급[色酒 색주] 성생활을 위해 마시는 사람. 3 급[睡酒 수주] 잠을 자기 위해 마시는 사람. 2 급[飯酒 반주] 밥맛을 돕기 위해 마시는 사람. 이런 단계들을 지나면 비로소 술을 제대로 마시는 단계에 들어선다. 1 급[學酒 학주] 술의 진경[眞境]을 배우는 사람. 초단부터는 이른바 "술꾼"이다. 초단[酒徒 주도] 술에 취미를 붙인 사람. 2 단[酒客 주객] 퇴근 무렵 술친구를 기다리는 사람. 3 단[酒豪 주호] 술을 탐하는 사람. 4 단[酒狂 주광] 마구 퍼마시는 폭주가. 이 이상이 되면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고수"들이다. 5 단[酒仙 주선] 하루종일 술을 마시는 사람. 6 단[酒賢 주현]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7 단[酒聖 주성]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으로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 8 단[酒宗 주종]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술을 마실 수 없는 사람. 9 단[涅槃酒 열반주] 술로 말미암아 저 세상으로 가는 사람. 당신의 주도[酒道]는 ?  
1083    11개의 세계기록을 보유한 99세 할머니 댓글:  조회:3679  추천:0  2017-03-20
  99세 수영 선수, 나가오카 미에코  세계대회 메달 60개, 신기록 11개… 70대까지 수영장 근처에도 안 가 미켈란젤로, 70세 성당 천장화 완성 신문사 선배도 방송·인터넷서 맹활약… 은퇴 후 30년은 또 다른 靑年期 박정훈 디지털 담당 부국장 새해 결심 목록에 '은퇴 후 어떻게 살지 미리 생각해놓기'를 올렸다. 무얼 하면서 나머지 30여년을 살아갈 것인가. 젊은 시절 로망처럼 꿈꾸던 전업 작가에 도전해볼까. 자그마한 출판사를 하는 것은 어떨까. 이런저런 궁리의 나래를 펼쳐보지만 결국엔 '내가 될까…' 하는 좌절감에 부닥치곤 한다. 나이 든 내게 경쟁력이 있을까. 무엇보다 새로 일을 벌였다 망신당하면 어쩌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새해 벽두 일본 아사히신문에 한 장의 사진이 실렸다. 꽃무늬 수영복 차림 할머니가 수영장 한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깊게 파인 주름살에 세월의 흔적이 찬란하지만 군살 하나 없는 날렵한 몸매다. 사진엔 '세계기록을 11개 보유한 99세'란 제목이 붙었다. 그녀의 이름은 나가오카 미에코(長岡三重子), 곧 100세 생일을 맞는 시니어 수영 선수였다. 그녀는 아마추어 동호인 대회인 마스터스 수영선수권의 세계 챔피언이다. 2년마다 열리는 세계 대회에서 지금까지 메달을 60개 따냈다. 그녀가 활약하는 95~99세 체급에서 세운 세계신기록만 11개에 달한다. 주(主)종목인 배영(背泳)은 적수가 없는 최강이고, 자유형·평영에서도 대회만 나가면 메달을 따낸다. 신문은 그녀가 53세 때 남편과 사별한 뒤 야마구치현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전했다. 내 눈길이 확 꽂힌 것은 그녀가 수영을 시작한 나이였다. 나가오카 할머니는 원래 수영 선수 출신이 아니다. 70대까지는 수영장 근처에도 안 가보았다고 한다. 무릎 통증에 좋다는 아들 권유로 난생처음 동네 수영장을 찾은 것이 80세 때였다. 처음엔 그냥 물속을 걷기만 했다. 25m를 헤엄칠 수 있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실력이 늘자 욕심이 생겼다. 87세부터 미국·이탈리아·뉴질랜드 등에서 열린 세계 대회에 출전했다. 90세에 처음으로 은메달을 땄고, 95세 땐 배영 200m 종목에서 첫 세계기록을 세웠다. 이후 95~99세 체급의 최강자로 군림하면서 신기록을 쏟아내고 있다. 지금도 일주일에 3~4회 수영장을 찾아 1㎞씩 연습을 한다. 새해엔 100~104세 체급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 목표다. 치열하도록 아름다운 99세의 '청년 정신'이었다. 나가오카 할머니의 사례를 일반화하기는 힘들 것이다. 100세 시대, 30~40년의 삶을 덤으로 갖게 됐지만 행복한 노년을 보내는 경우가 다수는 아니다. 많은 노년이 가난과 질병, 무관심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말년을 맞는다. 그래서 국가 책임론이 화두(話頭)로 등장했다. 국민의 은퇴 후 삶에 국가가 더 큰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동시에 노년층 스스로도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노년에 새로운 일에 도전해 일가(一家)를 이루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작년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賞)을 받은 작가는 75세 할머니였다. 그녀는 교사·사무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써 정상에 올랐다. 99세에 처음으로 출간한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됐던 여류 시인(고·故 시바타 도요)도 있었다. 국내에서도 70대가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한 사례가 나왔다. 미켈란젤로가 그 유명한 성베드로 성당 천장화를 완성한 것은 70세 때였다. 디포는 59세에 '로빈슨 크루소'를 썼고, 칸트는 57세에 '순수이성비판'을 세상에 내놓았다. 76세에 처음 붓을 들어 101세로 눈감을 때까지 '미국의 국민 화가'로 불렸던 모지스 할머니(1860~1961) 케이스도 유명하다. 기자의 신문사 대선배 중에도 새로운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분이 적지 않다.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낸 안병훈(76) 기파랑 대표는 66세 때 출판사를 세웠고, 편집국장 출신의 인보길(74) 뉴데일리 사장은 69세 때 온라인 매체 대표를 맡았다. 두 분 모두 지금 제2의 전성기를 구가 중이다. 조갑제(68) 조갑제닷컴 대표나 류근일(76) 전 조선일보 주필처럼 방송·인터넷으로 무대를 옮겨 맹활약하는 논객도 있다. 이런 대선배를 뵐 때 느끼는 공통점은 여전히 열혈 청년 같다는 점이다. 열정과 의욕에 넘치고 싸움이 필요할 땐 피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구나 80세에 시작해 챔피언이 될 수는 없다. 다만 마음먹기 따라선 노년을 새로운 인생으로 맞을 수는 있다. 중요한 것은 '주책' 소리 들을까 봐 겁내지 않는 청년 정신일 것이다. 은퇴 후 30년은 또 다른 청년기(期)의 시작이다.     박정훈 | 디지털 담당 부국장   
1082    윤동주 재판 기록 판결문 공개되다... 댓글:  조회:3657  추천:0  2017-03-18
  시인 윤동주 재판 기록 판결문 공개한 일본 검찰청 일본 시민의 양심의 힘으로 공개된 윤동주 재판 기록 자료   2010년 07월 15일 (목) 18:02:32 이수경 도쿄가쿠게이 대학교 교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일, 일본 교토 지방검찰청에서 우지시의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안자이 이쿠로 대표(安斎育郎,교토 평화박물관 관장, 리츠메이칸 대학교 교수)와 곤다니 노부코(紺谷延子) 사무국장, 교토대학교의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교수 등은 지금까지 검찰에서 공개를 하지 않았던 시인 윤동주의 재판 기록 판결문을 확인했다. 물론 이 자료는 과거에 누군가가 변칙적으로 내용을 몰래 찍어서 보내온 것은 있지만  일본 검찰청이 재판 판결문을 공식적으로 열람허가를 한 것은  이례적이다. 그 현장의 생생한 기록을 이수경 도쿄가쿠게이 대학교 교수가 보내왔다 - 편집자주 이번 윤동주 시인 재판 기록 판결문 공개는 어디까지나 문화적 차원에서 [학문적 이용을 위한] 열람이라는 지검의 조건이 붙긴 했지만, 일제 강점기의 치안 유지법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던 문학가 등의 재판 판결문이 공개되지 않았던 기존 상황을 생각한다면 과거사 정리를 위한 하나의 물꼬가 트인거라고 평가할 수 있는 작지만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 공개된 판결문 1페이지 재판 판결문을 공개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자면, 지난 2010년 4월 8일에 ‘윤동주 시비건립위원회(2005년 결성)’의 곤다니 노부코 사무국장의 노력으로 일본인 및 재일교포 교수들과 변호사 등 11명의 이름으로 윤동주 관련 재판 소송문 및 관련 기록 공개 요구서를 제출했다. 일본 형사 소송법 53조 1항의 [누구나 피고 사건의 종결 후, 소송 기록을 열람할 수 있다. 단, 소송 기록의 보존 또는 재판소 혹은 검찰청의 사무에 지장이 있는 경우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과 형사 확정 소송 기록법 2조 3항의 [보관 검찰관은 필요가 있다고 인정했을 때는 보관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는 항목으로 윤동주의 [예심 종결 결정서] 혹은 [예심 종결 결정문]이라는 자료의 행방 조사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판결문 2페이지 그리고 기념비 건립위원회 주최 제 12회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시민 모임에서 필자는 [우지(宇治), 여기에 기억되어지고 있는 평화를 사랑한 사람들(이 강연은 리츠메이칸 대학교 산업사회학 논집 제 46권 제1호 논문으로 게재)]이란 제목으로 기조 강연을 하였고, 그날 저녁 및 다음날까지 곤다니씨와 필자는 우리가 일본에서 해야 할 향후의 실천적 행동에 대해 많이 논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교토와 도쿄를 잇고 협력적으로 시민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자고 약속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6월 10일, 교토 지검에서 윤동주 재판 판결문이 나왔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이번엔 시간이 없었던 관계로 급히 안자이 대표와 곤다니 사무국장, 미즈노 교수와 필자의 이름으로 열람 신청 수속을 하였고, 서둘러 필자도 수업 중에 교토행을 하게 되었다.     ▲이 날을 위해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했다는 곤다니 사무국장과 안자이 대표 우리는 지검 정보 공개실에서 판결문을 확인하고 다양한 질문을 지검 담당자에게 하면서, 학술적의도로 다른 서류들과 윤동주의 시집 혹은 그가 한글로 적었던 작품 등의 자료 및 송몽규 관련에 대한 자료 공개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물었다. 이미 65년전의 일이기에 담당자는 많은 자료들이 폐기처분 되었고, 다른 서류들로 상당히 찾기 곤란할 것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물론 그 말은 솔직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과거 것이 아니라 최근의 자료들만으로도 산더미 같이 자료가 쌓이는게 검찰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향후도 많은 배려를 부탁한다고 우리는 거듭 인사를 해 뒀다. 우리는 윤동주의 판결문을 직접 손으로 눈으로 확인하며 가슴이 벅찼다. 더더구나 한일근대사를 전공으로 하는 한국인 교수라는 입장도 있었기에 필자로서는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판결문 전체 그래서 윤동주의 죄목을 적은 행간을 확인하면서 나도 모르게 [판결문에 적힌 것처럼 이토록 민족 문화 고취를 위해 애를 썼던게 일본인이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일본에선 영웅이겠지요?]라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필자의 만용이기도 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필자를 이해해 주었다. 판결문을 보면 윤동주는 항소도 하지 않고 판결문에 게재된 죄목을 전부 받아들이고 있다. 그 판결문은 총 7쪽으로 되어 있고, 1944년 3월 31일 교토 지방 재판소 제 2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과 와다나베 츠네죠, 가와라다니 스에오 판사 명의로 판결이 내려지고 다음 날인 4월 1일에 판결 확정이 지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내용이야 이미 누군가가 몰래 내용을 빼와서 현재 독립기념관 내의 한국어 번역도 간단히 볼 수 있다. 고유명사의 표기가 좀 섬세하지 못하여 오기가 많은 편이지만 내용 전체는 한국어 번역이 잘 된 편이라서 알기쉬울 것이다.      ▲내용을 확인하는 안자이 교수 판결문의 결론은 결국 한민족에 대한  애착이 반제국주의 행위이기에 치안유지법 위반이 되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 판결문에는 윤동주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 피고 사건에 대하여 당 재판소는 검사 에지마 다카시가 참여하여 심리를 한 결과 징역 2년의 판결을 내리고, 구류되었던 120일은 징역일수에 산입 처리한다고 밝히고 있다. 징역형의 이유는 윤동주가 어릴 때부터 민족 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감화 등에 의해 치열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갖고 있었으며, 일본의 조선 통치 방침을 비판하고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에 직면해 열세한 일본의 패배를 몽상하고 그 기회를 틈타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는 것이 이유로 적혀져 있다. 이어 “피고인은 만주국 간도성에서 반도 출신 중농의 가정에 태어나 같은 지역의 중학교를 거쳐 경성 소재 사립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쇼와 17년(1942년) 3월 일본에 건너와서, 일시적으로 도쿄 릿교대 문학부 선과에 재학했지만 10월 교토 도시샤대학 문학부 선과에 옮겨와 현재 이른다”고 돼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독립기념관 사이트 등에서도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이 열람 허가는 지금까지 일제 시대의 문인이나 범죄자로 치부된 한국인 출신 민족 운동가들에 대한 재판 기록이 공개되어오지 않은 상황에서 과거를 청산하려 하는 시민측 움직임의 집요한 양심 운동이 거둔 쾌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토 평화박물관 입구에서 안자이 이쿠로 관장 이미 12000명을 넘는 서명을 받고 우지의 공원에다 시비를 세우려고 준비를 해오면서 적극적으로 한일 근대사 청산에 몸 바치고 있는 건립위원회 안자이 대표와 곤다니 사무국장의 열정과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실로 아름답고 믿음직스러울 따름이다. 이런 일본의 움직임과 더불어 우리도 이젠 한일 병탄 100년의 청산을 위해 가까이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과거의 진실을 알고, 한일 관계에 대해 미래 지향적인 시민 연대의식을 키워야 할 것이다.     ▲교토지방 검찰청 전경 필자로서는 일본의 교원양성대학에서 한일근대사를 가르치며 2005년부터 연세대 교정에 머물면서 윤동주의 흔적을 느꼈고, 중국 허베이 대학 등에서 윤동주 논문을 발표하여 왔으며, 윤동주와 송몽규의 생가와 무덤ㆍ학교 등을 방문 해왔고, 매년 도쿄가쿠게이대학교에서 윤동주 문학 추모제를 개최하고 있는터라 참으로 의미있는 역사적 교류에 몸 담고 있는데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7월17일엔 마츠사카시에서, 7월 24일에는 LA에서 윤동주 송몽규와 관련하여 일본의 시민운동과 근대사에 관한 강연을 하게 된다. 그 때, 필자는 참으로 든든한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의 활동도, 향후의 우리가 쌓아가야할 한일 시민 연대의식도 확인하고 올 마음이다. 안자이 교수 및 곤다니 노부코 사무국장의 국경을 초월한 휴머니즘과 평화를 사랑하는 행동에 다시금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본지 문화칼럼니스트) 
1081    중국 연변 가야금의 산증인들을 알아보다. 댓글:  조회:5789  추천:0  2017-03-16
23현 7성음계 가야금, 40년 세월 함께 하다 (ZOGLO) 2017년3월16일 인물이름 : 김성삼 제자를 가르치고있는 김성삼선생. 손끝이 선우에서 춤을 춘다. 둥기당당 둥당당… 아름다운 선률은 이내 공간을 가득 메운다. 15일, 국가급무형문화재 가야금전승인 김성삼선생(62세)을 만나 우리의 전통악기 가야금의 흥미로운 세계를 엿볼수 있었다. ■ 우리의 정서를 품은 악기 김성삼선생은 모든 민족악기가 그러하겠지만 가야금은 특히 우리 민족의 정서와 애환이 잘 담겨져있는 악기라고 소개했다. 특히 선을 타고 울리는 애달픈 곡조는 언제 들어도 심금을 울린다. 망국노의 슬픔을 가슴에 담고 괴나리보짐을 지고 두만강을 넘어섰던 우리 선조들, 이 땅에서 황무지를 개척하며 새롭게 민족문화를 꽃피운 우리의 정서가 어쩌면 가야금의 소리와 닮지 않았는가! 관악기와 활을 사용하는 현악기들과 달리 가야금은 선의 자유진동에 의해 소리가 울려나오며 부드럽고 우아하며 구성진 가락이 뽑아낸다. 김성삼선생이 처음으로 가야금을 접하게 된것은 지난 1973년, 예술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녀성연주자가 타는 악기로만 알고있었던 가야금을 연주하라니, 그는 전공이 맞지 않다고 불평을 부리다 종내는 이불짐을 싸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가야금선생님이였던 조순희선생의 질긴 설득끝에 마지못해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고 배우다보니 그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그렇게 내처 가야금과 함께 한 40여년의 세월동안, 그는 선배들과 함께 가야금의 개량에도 참가했고 세계 방방곡곡을 돌며 공연에 참가하거나 자신의 개인연주회를 가지면서 영예를 빛냈으며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해내 연변의 가야금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중국조선족가야금발전의 현주소를 대표하는, 연변가야금발전사의 산증인으로 평가받는다. ■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가야금 이날 기자는 김성삼선생으로부터 연변 가야금의 개량에 대해 그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 초기, 연변지역에서는 가야금에 관해 정규적인 연주기록이 불투명했다. 그러다가 1952년이 되여 작곡가이며 지휘가인 안국민선생이 연길에서 가야금을 타는 권번출신인 할머니 한분을 발견했다. 그 이듬해에는 또 훈춘에서 한분을 발견, 이렇게 되여 안국민선생은 그들로부터 가야금연주를 배워 본격적으로 가야금이 정규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후 민족악기개량, 연구의 장인인 리정도선생이 연변에서 첫 가야금 두대를 제작했다. 전통가야금은 오동나무로 된 판우에 명주실로 꼬아만든 12개의 선을 괘우에 얹었으며 1950년대초부터 시작된 민족악기개량을 통해 연변에서는 5성음계의 13현, 15현 가야금을 주로 썼다. 하지만 이와 같은 5성음계는 중국음악환경에 썩 맞지가 않았다. 우선 악기 자체가 명주실로 되여 음이 온정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화성이 풍부하지 못했으며 음역도 좁고 음량이 적은 등 제한성을 갖고있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초소의 봄”이라는 가야금곡이 류행이였는데 김성삼선생은 가야금으로 변조까지 소화해내는걸 보아 그것은 절대 5성음계의 악기가 아님을 직감으로 느꼈다. 1978년, 김성삼선생은 종전까지 쓰던 15현가야금을 7성음계의 가야금으로 개량하려고 맘 먹었으며 스승인 조순희선생과 함께 12현, 13현, 15현 가야금을 23현 7성음계로 개량하기 시작했다. “사실 당시 조선에서는 21현 7성음계 가야금이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답습하려 했으나 그것으로 웬지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21현은 음이 ‘파’로 끝나는데 두줄만 더 보태서 ‘라’로 끝나면 소조음악도 잘 소화해낼수 있기때문이다.” 당시를 떠올리며 김성삼선생이 설명했다. 즉 라로 끝나면 소리가 밝아 듣기에도 좋으며 전조를 하더라해도 “미”로 끝나기에 역시 소조음악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에 대해 당시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다. 원인인즉 23현 가야금은 너무 넓어 보기에 싫다는것이다. 그러나 연주실정에 어울리는 악기로 개량해야 한다는 의견이 앞서면서 끝내는 23현 가야금의 개량이 시작되였다. 너비 33센치, 두께 3.3센치, 길이 153센치의 23현 7성음계 가야금이 새롭게 탄생했다. “1978년 5월 23일”, 새 가야금으로 연주를 하던 어느날 김성삼선생은 문득 가야금에 그날의 날자를 새겨 드디여 자기만의 가야금이 생긴 기쁨을 간직했으며 이 가야금은 지금까지 줄곧 40년 가까이 그와 함께 세월을 보냈다. “그때 모두 5대를 만들었는데 제가 가지고있는것을 내놓고 나머지 4대는 모두 사라져 아쉽습니다.” 이후에 김성삼선생은 상해음악학원에서 자신의 가야금종목의 록음을 마치고 그 보수로 받은 3000원의 돈을 투자해 나이론으로 되여있던 워낙의 가야금선을 상해음악학원 악기공장에서 생산하는 질 좋은 복합선으로 교체했다. 이로써 음이 어둡고 불온정하며 자꾸만 늘어나 번마다 조절이 필요했던 나이론선의 불편함을 해결할수 있었다. ■ 활발한 보급과 계승 현재 우리 주, 나아가 각 조선족산재지역에서는 가야금의 보급이 아주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는 대학전업과정은 물론 지난 2000년부터는 가야금석사학위점까지 설치해 가야금 관련 교육을 아주 체계적으로 진행한다. 뿐만아니라 전국에는 약 25개의 중소학교들에서 학생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치고있으며 가야금을 통한 여러 과외활동을 진행하고있다. 사회적인 중시도 전보다 훨씬 높아져 여러 예술단체와 사회구역에도 가야금이 잘 보급된 상태다. 특히 지난 2013년, 룡정시에서는 “가야금병창 기네스세계기록”을 창조하면서 “중국조선족가야금의 고향”이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이날 연주에 참가한 854명 연주자가운데는 9살 나는 최연소 연주자로부터 70세를 훌쩍 넘긴 고령의 연주자까지 있어 가야금이 군중문화생활과의 융합정도를 잘 보여주었다. /연변일보 박진화 기자
1080    중국 길림성 연변 룡정시 동불사진에서 공룡발자국 발견하다 댓글:  조회:3331  추천:0  2017-03-16
길림성 연변에서 대량의 공룡발자국 발견 (ZOGLO) 2017년3월16일  인민넷 조문판:= 일전에 중외 고생물학자들이 선포한데 따르면 그들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공룡 발자취를 발견했는데 이 연구는 중국, 나아가서 동북아 백악기동물군의 분포 및 다양성 연구에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한다.  중국지질대학교(북경) 청년학자 형립달부교수, 미국 클로라도대학 발자취박물관 관장 마틴루클레교수, 한국 진주 국립교육대학 과학교육부 교수 김경주와 한국 국가문화유산연구소 과학보호부 주임 림종진 등 전문가들은 영국 권위 학술잡지 《백악기연구》에 공동으로 문장을 발표해 이 진귀한 표본을 묘사했다. 형립달은 이 화석은 연변주 룡정시 동불사진 산교도로의 한켠에 위치해있는데 약 20년전에 처음으로 일본 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였지만 당시 이에 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간단했다고 밝혔다. “우리는 2년간의 시간을 들여 새로운 탐색을 했고 대량의 새로운 발자국을 발견했다. 이번에는 거대한 하드로사우르스의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이것의 완전한 사이즈는 55cm로 예상되며 발견된 발자국 공룡의 몸길이는 7메터 이상에 달해 대형 공룡일것으로 추측된다”라고 말했다.
107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동북범, 표범 국가공원을 설립해야... 댓글:  조회:3855  추천:0  2017-03-13
리경호대표: 동북범, 표범 국가공원 설립은 리정비적 의의가 있어 (ZOGLO) 2017년3월13일    리경호대표: 동북범, 표범 국가공원 설립은 리정비적의의가 있어(인민넷 기자 김황화 촬영) 인민넷 조문판: "동북범, 표범 국가공원의 설립은 중국생태문명건설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중대한 공정이다. 특히 연변을 놓고 말하면 생태건설을 강화하여 록색전형발전을 추진하는것은 시대적이고 리정비적인 의의가 있다"고 리경호대표는 말했다. 동북범은 현존해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고양이과동물중의 하나로서 300만년의 진화사가 있고 먹이사슬 최상단에 있으며 그들의 생존상황은 한 지역의 생태발전정황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동북표범은 전세계에서 멸종위기에 처한 대형 고양이과동물로서 주요하게 로씨야 원동, 중국 동북과 조선 북부지역에 분포됐고 야생 동북범보다 더 위급한 처지에 처해있다. 고무적인것은 동북범과 동북표범이 최근 길림성 동부 산지역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내"면서 "왕자의 귀환"을 알려주고있는것이다.  "천연림보호공정의 실시와 자연보호구건립에 따라 특히 지난 세기 90년대 중기 흑룡강성과 길림성에서 전면으로 수렵금지를 실시함에 따라 동북범과 표범의 서식지 생태환경은 점차 개선되여 야생동물개체가 회복됐다. 현재 길림성 경내에는 야생동북범 27마리, 동북표범 42마리를 감측해냈다. 곧 건설되는 동북범, 표범국가공원은 우리 나라 생태보호의 모범구, 생태자연의 체험구와 생태경제발전의 선행구가 될것이다". 올해 전국 "두 회의"에서 전국인대 대표, 연변주 주장 리경호는 기자에게 동북범, 표범 국가공원의 초보적인 방안을 공개했는데 공원기획총면적은 1.46만평방킬로메터이고 계통적인 복구, 전체 보호, 공동 건설과 향유를 통해 현유의 동북범, 표범 번식 개체군을 공고히 하고 안정적인 근원지역을 형성할것이라고 했다.  리경호는 "몇년동안 동북범, 표범의 수량은 회복적인 증가를 보이고있는데 이는 길림성이 시종 록색발전을 견지하고 연변주가 환경보호와 생태회복면에서 대량을 사업을 했기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북범, 표범 개체는 먹이사슬의 가장 상단에 있는 동물로서 서식지환경에 대한 요구가 아주 높다. 이런 많은 동북범과 표범이 이곳에 서식하고 번식하는것은 연변의 자연자원이 풍부하고 생태질이 우월함을 충분히 증명한다. 이때문에 2014년 국가는 연변을 전국의 첫번째 생태문명선행시범구에 포함시켰고 작년 12월 중앙개혁심화소조는 "동북범, 표범 국가공원 체제시범방안"을 통과했다. 리경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북범, 표범 국가공원의 확정된 범위는 흑룡강성과 길림성이 있는데 그중 70%가 연변주경내에 있고 면적은 미국의 옐로스톤국립공원보다 50%가 더 크다. 공원은 야생동북범, 표범의 주요서식지, 확산 회랑과 잠재적 분포구에 근거해 인구가 밀집된 구역과 경제활동이 빈번한 구역을 최대한 피해 생태계통의 완전성과 자연성을 보장한다.  리경호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시범방안에 근거하여 연변은 아래와 같은 세가지를 잘할것이다. 첫째는 동북범, 표범국가공원의 건설을 연변생태문명건설의 중점공정으로 삼고 보호와 발전, 보호와 민생, 보호와 국방건설, 보호와 대외개방 등 일련의 관계를 정확하게 처리해 보호에도 유리하고 발전에도 유리하며 특히 주변 백성들이 보편적으로 혜택을 받는 공유기제를 구축한다. 둘째는 지방정부에서 전력으로 지지하고 주동적으로 시범의 순리로운 추진을 협조하여 특히 생태이민을 순서적으로 추진한다. 셋째는 상응한 정책조치를 취하고 기초시설건설 등 공원과 주변의 생태환경보호를 강화한다.  "동북범, 표범국가공원의 설립은 중국생태문명건설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중대한 공정이다. 특히 연변을 놓고 말하면 생태건설을 강화하고 록색전형발전을 추진하는것은 시대적이고 리정비적인 의의가 있다. 우리는 공원의 생태보호와 관리의 체제기제혁신을 효과적으로 추동하여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생을 실현하여 아름다운 중국건설의 새로운 지표로 되게 할것이다"라고 말하는 리경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1078    윤동주 유품을 보다... 댓글:  조회:4324  추천:0  2017-03-12
    윤동주 유품                                                생가  톱                     윤동주 재학시절 당시의 모교가방                                 생가 대패               윤동주 시인이 동시집 만들었던 등사기                            윤동주마시고 자란  생가 우물목판                  윤동주 시인이 앉던 모교 의자       윤동주 육필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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