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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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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7    [그것이 알고싶다] - "비키니"의 유래?... 댓글:  조회:4221  추천:0  2017-05-24
비키니 수영복의 유래 -비키니(bikini)는 위아래가 떨어진 여자 수영복을 가리키는 이 말은 본래 태평양 상에 떠 있는 작은 섬의 이름에서 나왔습니다. -비키니 수영복은 프랑스의 디자이너 루이 레아드가 1946년 7월 9일 파리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발표한 옷이다. 이 패션쇼가 있기 4일 전인 7월 5일에 미국이 태평양 상에 떠 있는 비키니 섬에서 원자폭탄 실험을 했는데, 디자이너는 이 수영복이야말로 패션의 원자폭탄과 같은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 옷에 ‘비키니’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최초의 비키니 수영복은 신문지를 도안해서 프린트한 무늬의 면 수영복으로 당시 선풍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요즘은 위아래가 떨어진 투피스 모양의 여자 수영복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는 1961년에 (주)한국샤크라인의 전신인 백화사가 상어표 수영복이란 브랜드로 수영복 시장을 열었다. =================== 때는 1946년 프랑스의 디자이너 에임이 초소형의 수영복을 개발, '아톰'이라고  이름 짓고 그 상표 이름을 공중에 쓰는 곡예 비행으로 광고 했다.  이에 라이벌 디자이너가 때마침 비키니 원자 폭탄 실험이 충격을 주고 있음을 타고 '비키니'란 수영복을 개발, 역시 곡예 비행으로 맞섰다  이렇게 해서 유사 이래 숨겨온 여성 알몸의 90%를 노출시키고 만다. 비키니 수영복이 디자인 되기 전까지만 해도 유럽이나 미국에서 수영복은 발목까지 가리는 치마였다. 다리를 노출시킨다는 것은 바로 외설이었다. 영국의 경우 피아노의 다리마저도 양말을 신겼으며 숙녀 앞에 닭다리를 내놓는 것도 큰 실례였다. 그러나 7월 5일, 파리 모리토르 수영장에서 열린 수영복 대회. 자동차 기술자 출신의 루이 레아드(1897-1984)가 만든 수영복을 보는 순간 1만 명의 관중은 넋을 잃었다.  모델이 남자 손수건 절반만한 크기의 천으로 가슴과 아랫도리를 가리고 나온 것이다. 아무리 수영복이라도 배꼽과 허벅지가 나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비키니 수영복의 모델이 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키니를 만든 레아드는 카바레 스트립 댄서인 미셸 베르나르디니를 기용했다.  사진 작가와 뉴스 영상 기사들이 정신없이 그의 모습을 담았다. 덕분에 그는 이듬해 5만 통에 이르는 팬레터를 받았다고 한다. 방송매체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점잖은 이들의 반응은 직선적이었다.  바티칸은 '부도덕'하다고 비난했고, 이탈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은 법적으로 비키니를 입는 것을 금지시켰다. 소련은 '퇴폐적 자본주의의 또 다른 샘플'이라고 매도했다. 그 후에 비키니를 만든 레아드는 곧 상표를 등록했다. 그러나 별 재정적 재미를 못봤다. 극소수 육체파 여배우를 제외하면 입으려는 여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 여배우 다이애나 도어스가 55년 베니스 영화제에 밍크로 만든 비키니를 입고 나타나고,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에서 비키니를 입고 나와 화제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60년대 들어 바뀌기 시작했고. 60년 브라이언 헤이랜드가 비키니를 주제로 부른 노래가 히트 치며, 히피 문화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퍼지면서 비키니가 점차 대중화되었다. 64년에는 가슴 가리개 부분이 없는 더 과격한 모노키니까지 등장했다. 70년 신축 소재인 라이크라가 개발되면서 더욱 작고 다양한 스타일이 가능해졌다. 패션 저널리스트들은 종종 비키니가 '여성 해방의 상징'이라 주장하였다. 이렇게 비키니의 인기와 여성의 노출은 계속 이어지다가 어느 때부터 인가 그것이 보편화 되었다. 1961년에 (주)한국샤크라인의 전신인 백화사가 상어표 수영복이란 브랜드로 수영복 시장이 열렸다.
1156    [그것이 알고싶다] - 행주치마의 유래?... 댓글:  조회:4920  추천:0  2017-05-24
  성격 복식, 치마 유형 물품 재질 무명 용도 노동복, 복식보호 분야 생활/의생활 요약 여자들이 일할 때 치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그 위에 덧입는 작은 치마.   김장 담그기 김치 저장하기 내용 본래 ‘행주’란 그릇을 훔치거나 씻을 때 쓰는 헝겊을 말하는데, 행주치마는 이러한 용도도 겸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 같다. 또한, 일설에는 1593년(선조 26) 2월 행주산성에서 권율(權慄)이 왜병을 맞아 싸울 때, 성 안의 부녀자들까지 합세하여 치마에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당시의 부녀자들의 공적을 기리는 뜻에서 치마의 명칭에 ‘행주’라는 지명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일컫게 되었다고도 한다. 흰색 무명류를 사용하여 치마의 반폭 정도로 만들어 뒤가 휩싸이지 않게 하였고, 길이는 치마보다 짧게 만들었다. 걸을 때나 일할 때에는 치마가 늘어지는 불편을 덜기 위하여 위를 걷어올리고 허리띠로 매어 ‘거들치마’를 하였는데, 그 위에 행주치마를 둘렀다. 행주치마를 입고 일을 하다가도 웃어른 앞에 나설 때에는 반드시 이를 벗는 것이 법도였다. [Daum백과] 행주치마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행주치마가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1593년)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행주라는 고장 이름에 연관지어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민간어원이다.    기록에 의하면 행주대첩 훨씬 이전인 중종 12년(1517년)에 발간된 『사성통해(四聲通解)』에 ‘한자한자쵸마’라는 표기가 나오며, 1527년에 나온 『훈몽자회(訓蒙字會)』 등 여러 문헌에도 ‘한자한자쵸마’라는 기록이 나온다.    지금이나 그 당시나 ‘행주’는 그릇을 씻어서 깨끗하게 훔쳐내는 헝겊이었으므로, 행주치마는 부엌일을 할 때 치마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앞에 두르는 치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밖에도 행주치마의 유래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얘기도 전해지고 있는데 제법 그 개연성이 있다 하겠다. 불법에 귀의하기 위해서 절로 출가를 하면 계(戒)를 받기 전까지는 ‘행자’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수행승인 행자가 주로 하는 일이 아궁이에 불 때고 밥 짓는 부엌일이었다. 행자가 부엌일을 할 때 작업용으로 치마 같은 천을 허리에 두르고 했는데 그것을 ‘행자치마’라 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오늘날의 ‘행주치마’라는 얘기다...
1155    [고향문단소식]- "28년"아, 외쳐라... "100년"아, 이야기하라... 댓글:  조회:4621  추천:0  2017-05-24
제18회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 시상식 열려 (ZOGLO) 2017년5월24일      (흑룡강신문=하얼빈)류설화 연변특파원= 1917년부터 옹근 100년의 “바람이 불어”그의 “고향집”마당엔 봄빛이 그토록 완연한데…“소년”은 짧은 28년 동안 사랑했고 꿈꿨고 잃어버린 “길”을 찾아 3국을 넘나들었다   별이 되여 반짝이는 영원한 젊음의 시인,여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쉽게 쓰여진 시”를 부끄러워한 그는“무서운 시간”들속에서도 “별헤는 밤”을 읊었다         “초한대”에서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된 사람 그리고 “삶과 죽음”사이 괴로웠던 그의 “참회록”이제 모두가 듣고싶은 그이 절절한 “산울림”이제 모두가 기리려는 그이 순결한 “자화상”   “달을 쏘던” 저 “창공”에 그를 더 새겨야 할 올 “닭”해는 “십자가”에 민족의 제단이 된 그가 태여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또 18회째로 시상식이 펼쳐지는 “이런날”은 한순간만이라도 그이를 닮아갈수 있는 그런날...       18년 동안, 일년에 꼭 한번 그런날이 있었다. 지난 5월 20일도 그런날이였다. 단한순간이라도 학생들 모두가 시인을 닮아가고자 하는 그런 순수한 모습들이였고 순결한 눈빛들이였다. 올해 제18회로 펼쳐지는 중국조선족중학생잡지 '윤동주문학상'시상식은 늘 그랬듯 변함없이 연변인민출판사 '중학생'잡지사의 주최와 한국 연세대학교, 한국민족문화교육원, 한국전력기술, (주)쌍방울, (주)국제려행사, 윤동주유가족의 후원으로 백산호텔에서 성대히 진행되였다.       18년을 거치면서 총 800여명의 조선족중학생들이 크고작은 상들을 거머쥐는 동시에 민족심과 자부감을 키우도록 격려한 '중학생'잡지 윤동주문학상은 산재지역 학생들을 아우르며 동북3성 각 지역 조선족중학교학생들에게도 꿈과 용기와 희망을 실어줬으며 중국조선족중학생들의 문학상 중 운영기간이 가장 오래되고 잡지의 발행범위도 가장 넓은것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윤동주시인이 태여나고 자라고 묻힌 고장에서 진행되는 행사이기에 저마다의 감회들 또한 자못 뜻깊다고 한다.       연세대학교 김영석 행정대외부총장은 학생들에게 제국주의라는 그 혹독하고 처절한 시대에서도 그가 지키려했던 정신과 얼을 기리면서 우리언어로 가슴적시는 그런 글들을 많이 써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오경준 ‘중학생'잡지 주필은 "새 세기 시작과 더불어 첫선을 보인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 백일장이 해마다 수백명의 참가자들로 대성황을 이루며 한결같이 이어져왔다. 조선족학생들이 윤동주시인의 훌륭한 인품을 본받으며 순수한 우리언어를 고집해온 윤동주식의 인재로 자라나는데 더할나위없이 좋은 밑거름이 될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히며 연세대학교와 유가족, 후원과 관심을 준 국내외 지성인들에게 일일이 고마움의 인사를 전했다.       초중부와 고중부로 나뉘여 진행된 시상식. 초중부 대상에는 료녕성 심양시조선족제6중학교 9-2 김우석의 ‘금수저 흙수저'》(지도교원:계영애), 금상에는 길림성 룡정시 룡정중학교 8-2 김현주의 ‘인생의 동반자 청춘'(허국철)과 흑룡강성 해림시 조선족중학교 8-2 문수진의 ‘연어와 가물치'(장영자), 그리고 고중부 대상으로 길림성 연길시제2고급중학교 2-2 박세리의 ‘느린 편지'(박미자), 금상에 길림성 통화시 조선족중학교 1-1 진해봉의 ‘아름다운 달밤'(리림숙)과 길림성 룡정고급중학교 1-6 리명아의‘커피'(오월하) 등 총 31명의 글들이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흑룡강성의 수상자 문수진양은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여 글짓기작업에서 좋은 성과를 내겠다고 소감을 말했고 연길의 박세리양은 민족의 얼을 키워나가는데에 작은 보탬을 하고싶다고 밝혔다.       한편, ‘중학생'잡지는 시인의 탄생 100돐을 맞으며 한국민족문화교육원 박종오리사장의 대폭적인 후원으로 수상우수작품선집을 출간하여 시인의 모교인 대성중학교, 현 룡정중학교에서 출간식과 더불어 세미나를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조선족인구가 격감하고 수십만이 해외에 돈벌이를 나가있는 조선족사회의 전도와 실황이 풍전등화같이 흔들리고있는 현시점에서 윤동주를 기념하는 이런날은 특히 학생들이 시인의 고결한 넋을 기리는 면에서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1154    [그것이 알고싶다] - 치파오의 유래?... 댓글:  조회:18180  추천:0  2017-05-24
    차이나 드레스라고도 불리는 치파오는 몸의 라인을 강조하는 곡선 화려한 색상, 각종 도안이 특징이죠. 남성용도 있는데요. 남성용은 창꽈라고 합니다.    청을 건국한 만주족이 입었던 창파오라는 옷에서 유래한 치파오는 원래는 말을 탈 일이 잤었던  만주족을 위해 디자인 된 옷이라고합니다. 남녀 구분없이 입었던 옷이며  당시에는 치파오만 따로 입지 않고 바지와 함께 입었다고 합니다.   치파오는 청 말기부터 중화민국 시절에 서양 의복에 영향을 받아 변화하면서  여성전용의 의상이 되었죠. 반소매나 민소매의 스타일의 치파오는 산해헉명이 이후 생긴 디자인이라고합니다.    치파오에 하얀색 부츠 등을 착용하는 스타일은 원래 중국에 없엇는데요. 스트리트파이터의 춘리이후 그런 스타일이 생겼다고합니다. 치파오는 다리 노출이 심하기 때문에  하체가 굵은 사람에게는 어울리기 힘들죠.  거기다가 어지간히 마른 사람이 아니면 입고서 밥 한끼 먹기 힘들다고 합니다.  [출처] 중국하면 떠오르는 드레스 치파오의 유래|작성자 부엉부엉   =====================================   여러분 안녕하세요*^^*  한국의 전통의상은 한복!  일본의 전통의상은 기모노!  베트남의 전통의상은 아오자이!  중국의 전통의상은 치파오!   치파오의 특징 치파오 사진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의 전통의상 모두 각 나라의 고유한 미를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중에서 오늘은 중국의 전통의상인 '치파오의 특징 치파오 사진'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치파오의 특징 치파오 사진     [ 치파오 (旗袍) ]   원래는 중국의 남녀 의상 모두를 일컫는 단어였지만 현재에는 여성의 원피스 형태의 의상을 지칭해요 몸에 딱 맞는 형태의 옷이며, 다리 옆 라인을 드러내어 여성미를 강조한 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마와 소매의 길이, 그리고 옷감까지 다양하기 때문에 어느 체형에나 잘 어울릴 수 있죠.   치파오의 특징 치파오 사진   [ 치파오 유래 ]   치파오는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기인들이 입던 긴 옷 에서 유래 되었다고 해요. 신해혁명을 걸치며 서양식 의상의 영향을 받게 되어 간결한 디자인과 우아한 색깔로 개선 되었다고 하네요. 1940년대에 들어와 옷의 실용성이 강조되어 치파오의 길이가 짧아지게 되는데요. 계속 발전해 오다가 세계적으로 독창성과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현재는 다양한 디자인과 옷감으로 중국의 예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치파오를 입은 모습을 보아도 너무 귀엽네요...   ///////////////////////////////////////////////////////////////// ============================ /////////////////////////////////////////////////////////////////   치파오를 입은 여성   비누 포장지에 그려진 치파오를 입은 여성 치파오(중국어: 旗袍, 병음: qípáo, 영어: Chinese dress, cheongsam)는 만주족 의상에 영향을 받은 의상이다. 청나라 말기 당시에 만들어진 의상으로, 일반적으로 원피스 형태의 여성 의복을 말한다. 역사[편집] 청대(淸代) 에 형성된 중국의 전통의상이다. 치파오는 만주족 여인들의 창파오(長袍)라는 옷에서 유래하였는데, 만주족을 부르는 명칭을 치런(旗人)이라고 하여 그들이 입는 옷을 치파오라 부르게 되었다. 본래의 형태는 발목을 넘는 길이의 옷이었다. 1919년 신해혁명 이후 서양식 의상의 영향으로 치파오는 시대와 유행에 따라서 그 길이와 형태가 변화하였다. 1920년대 말에는 불필요한 부분이 축소되어 치마가 무릎까지 오고 소매가 짧아졌다. 또, 전체적으로는 밋밋한 통 구조에서 몸의 곡선을 살리는 구조로 변하였다. 1930년대 초에는 긴 것이 유행하면서 치마의 길이가 다시 길어져 땅에 닿을 정도가 되고, 옷깃은 높고 소매는 길게 하여 입었다. 치마의 옆 트임은 허벅지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1960년대가 되면서 다시 짧은 것이 유행하자 민소매 형식의 치파오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1. 개요2. 역사3. 이모저모   1. 개요[편집] 旗袍 (Qípáo) 만주어로 sijigiyan(시지갼/袍子). 영어권에선 치파오 말고도 광동어에서 유래한 Cheongsam[tʃɔ:ŋsӕm](←長衫, coeng4 saam1, 쵱쌈)이란 단어가 많이 쓰인다. 만주에서 유래된 중국의 의상으로 만주족의 지배를 받던 청나라 시절 변발과 함께 강요된 것 가운데 하나다. 청나라 이전 중국의 전통의상은 한족들이 입던 한푸로, 치파오와는 모양이 완전히 다르다. 치파오는 본래 중국 옷이 아니었지만,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의 잔상 때문에 지금까지 중국의 이미지로 굳어졌고, 중국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영어로는 Mandarin gown이라고도 부르며 일본식 영어로는 차이나 드레스(China dress)라고 부른다. 일본어표기는 (チャイナドレス).  높은 칼라, 깊게 파인 슬릿, 장식용 단추를 갖추어야 차이나 드레스에 포함된다. 몸의 라인을 강조하는 유려한 곡선, 화려한 색상과 각종 도안 또한 특징. 남성용은 "챵꽈" 라고 부른다. 중국집에 흔히 그려져 있는 중국인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은 마과라고도 부르며 우리 한복의 마고자의 원형이 되었다. 2. 역사[편집]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이 입었던 창파오(長袍)라는 옷에서 유래하였다. 원래는 말을 탈 일이 잦았던 만주족을 위해 디자인된 옷으로 기마에 편하게 자연스럽게 옆트임이 생겼다고 한다. 남녀 구분 없이 입던 옷이었으며 이것만 따로 입진 않았고 바지와 함께 입었다. 그리고 길이도 원래는 발목을 넘었다. 청 말기부터 중화민국 시절에 서양 의복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면서 여성 전용의 의상이 되었다. 반소매나 민소매 스타일의 치파오는 신해혁명 이후 생긴 디자인이다. 이 치파오가 중국 전통의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히려 당나라 때 입었던 당복(唐服)이나 명나라 때 입었던 명복(明服)이 한족의 전통 의상에 가깝다. 한푸(漢服)라고 하는데 자세한 설명은 해당 항목을 참고. 그래서 중국의 한족주의자들은 치파오 대신에 일부러 당복 혹은 명복을 패션쇼 등에서 강조하기도 한다. 이렇게 만주족이 아닌 한족의 전통의상을 강조하는 경향은 최근에 생긴 것이다.  반청, 한족주의적 성격을 띤 신해혁명 직후에도 중국인들은 치파오를 계속 발전시켰다. 그리고 현대중국은 개혁개방 후 국제적인 이미지상으로도 치파오를 더 밀어주고 있다. 이소룡이 입었던 것으로 유명한 탕좡도 역시 만주족 의상이다. 이집트인들이 입는 갈라베야와 비슷한 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원래 이집트인들은 로인클로스나 드레이퍼리라고 해서 지금은 입지 않는 고유의 의복문화가 있었다. 그런데 아랍문화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들이 입던 옷에서 유래된 갈라베야를 스스로의 의복문화로 받아들였는데 이게 중국과 상황이 비슷하다. 중국이나 이집트나 옷의 생김새도 비슷하고 농경, 정착생활을 하던 민족이 유목민족의 의복문화를 수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해혁명에서 중화민국 시절에 치파오를 현대에 맞게 여러가지로 개량하고 활용하는 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교복으로 국민 교복(?)으로 치파오를 개량한 민국학생장(民國學生裝)이 있다. 이 외에 제복과 치파오의 퓨전이나 규정은 상관없이 집에서 치파오를 입고 나오면 교복으로 치는 곳도 있었다. 지금도 유니폼 등으로 치파오의 개량 및 활용은 끊임없지만 너무 앞서나간 경우엔 SF 제복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 문화대혁명때는 치파오 역시 사구(四旧, 없어져야 할 낡은 네 가지)라며 탄압받는 대상이었다.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도 외국 순방 때 치파오를 입었다는 이유로 혁명의 죄인이 되기도 했다.  3. 이모저모[편집] 미중 국교정상화 회담에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영부인 패튼 여사가 치파오를 보고 "중국의 인구가 많은 이유를 알겠다"(…) 고 한 일화가 유명하다. 비슷한 옷으로는 베트남의 아오자이가 있다. 사실 아오자이의 기원이 치파오라서 복식이 여러 모로 비슷하다. 추운 만주 지방의 민속의상이 더운 지방으로 전래되면서 얇은 명주천을 쓰도록 개량된 것이다. 2011년 11월 27일, 개그콘서트 감수성 코너에서 걸그룹 소녀시대의 멤버 유리, 수영이 게스트로 등장했을 때 치파오를 착용하여 실시간 검색어에도 오르며 화제가 되었다. 그 전주에는 걸그룹 원더걸스의 예은, 유빈, 혜림이 입고 나왔다. 그 후 12월에는 함은정을 제외한 티아라 멤버 전원과 비스트의 멤버 장현승과 함께 유닛 그룹 트러블 메이커의 멤버로서 등장한 포미닛의 현아도 이 옷을 입고 나왔다.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선 한 중 국여성이 치파오 차림으로 중국 식당을 연 적이 있었다. 당연히 여성은 부르카 차림을 하는 게 당연시하던 여기에선 난리가 벌어졌고 아프가니스탄 정부 측은 그 여성에게 당신도 이 부르카 차림을 하던지 아니면 식당 문닫고 나가라고 엄중히 경고했음에도 여성은 씹고 계속 영업했다. 하지만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중국인 노동자들도 가리지 않고 폭탄 테러로 죽이던 사건이 터지던 터에 반중 분위기를 더 크게 만들까봐 중국 대사관이 계속 압력을 가하여 치파오 차림으로 영업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식당이 돼지고기를 쓰던 게 드러나서 결국 강제로 가게 문을 닫히고 여주인은 3년 동안 현지 교도소에서 복역한 다음, 영구 추방당했다. 탈레반에게 죽을 일 있나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머무른 한국군 육군 중령 채수문은 이 일을 두고 당시 아프가니스탄 남성들에겐 그야말로 문화적 충격이었다고 회상했을 정도이다.    
1153    @연길시인민경기장 16구 1패 32번은 "울컥" 아기엄마축구팬... 댓글:  조회:3977  추천:0  2017-05-24
스티브의 통쾌한 꼴에 울음 터뜨린 아기엄마 (ZOGLO) 2017년5월23일  알고보니 그녀는 녀성축구팬동호회의 성원, 년표를 산 16구 1패 32번 좌석의 열혈축구팬 양혜남 5월 20일 오후에 연길시인민경기장에서 펼쳐진 2017슈퍼리그 제10라운드경기에서 연변부덕팀은 산동로능팀과 아쉽게도 1:1로 빅었지만 올시즌 최고로 잘한 경기를 보여주어 팬들로부터“연변팀이 다시 돌아왔다”는 평을 받았다. 이날 경기 22분경에 스티브가 자기가 얻은 패널티킥을 시원하게 찔러서 선제꼴을 뽑자 경기장은삽시에 기쁨의 도가니로 들끓었다.     선제꼴을 터뜨린 스티브가 팬들쪽으로 달려가고 있다. 바로 이때 어린 아이를 목마 태운 한 젊은 아기엄마팬이 격동을 참지 못한채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터지는 울음을 참느라고 손으로 얼굴을 싸쥔 장면이 기자의 카메라렌즈에 포착되였다.  스티브의 통쾌한 꼴에 너무 감동된 나머지 울음을 왈칵 터뜨리는 아기엄마팬-양혜남 섭씨 30도이상 되는 찌물쿠는 무더위속에서 어린애를 목마태우고 연변팀을 응원하는 아기엄마팬의 형상이 돋보인다. 연변축구에 대한 깊은 사랑이 흘러넘치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슈퍼리그년표(年票)를 살펴보니 그녀의 좌석은 16구 1패 32번이고 이름은 양혜남이였다. 16구에는 녀성축구팬동호회가 활약하고 있는데 그들이 앉은 관람석 앞에는“나는 청춘을 축구장에 바치련다.”(吾将青春奉球场)라는 커다란 프랑카드가 가로 걸려있다. 울음을 터뜨린 아기엄마팬이 바로 녀성축구팬동호회의 성원이다. 그녀는 “제일 아름다운 녀성축구팬”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연변은 녀성팬과 어린이팬이 특별히 많기로 소문났다. 장유빈의 울음에 이어 터뜨린 아기엄마팬의 울음에서 연변축구의 오늘과 래일을 읽어본다.     /김성걸기자 찍음/길림신문
1152    [그것이 알고싶다] - 중산복의 유래?... 댓글:  조회:4095  추천:0  2017-05-23
중산복의 유래와 함의            중산복(中山裝)은 1923년 세상에 나온 이래, 줄곧 중국 남성들이 가장 즐기는 복장이다. 중산복의 창시자는 바로 중국 민주혁명가 손중산(孫中山-쑨원) 선생이다.  손중산 선생은 1923년 광저우에서 중국혁명정부의 대원수직을 맡았다. 양복은 복잡하고 입기가 불편해 중국인들의 일상생활에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 전통의상은 중국인들의 향상되는 시대정신을 표현하지 못했고 일상생활에서도 양복과 비슷한 결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남양(南洋) 화교들 사이에 유행되던 상의에 양복 와이셔츠식의 빳빳한 옷깃을 달았다. 이리하여 양복 상의와 와이셔츠의 작용을 겸비하게 됐다. 또 남양화교 복장의 3개 호주머니를 4개로 바꿔 실용성을 더했다. 아래 쪽 두 개의 호주머니는 넣는 물건의 부피에 따라 부풀 수 있도록 주름을 넣었다.  손중산 선생이 호주머니를 이렇게 개량한 이유는 책이나 노트 및 업무 필수품을 넣기 위해서였다. 호주머니에는 또 덮개를 달아 물건이 쉽게 분실되지 않도록 했다. 양복 바지는 앞에 구멍을 내고 단추를 사용했으며, 좌우에는 각각 호주머니를 달았다. 뒤쪽 좌우 둔부에도 호주머니를 각각 하나씩 만들고 덮개를 달았다. 이렇게 만든 바지는 편리하고 많은 물건을 지닐 수 있게 됐다.  손중산 선생을 도와 중산복을 만든 조수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양복점을 경영하던 광둥성 타이산(臺山) 사람인 황룽성(黃隆生)이다. 1902년 12월, 손중산 선생이 하노이에서 흥중회를 조직하던 중 우연히 황룽성의 양복점에 들어가게 됐다. 황룽성은 손중산 선생에게 매료돼 흥중회에 가입하고 혁명을 위해 힘쓰겠다고 했다. 1923년 황룽성은 손중산 선생을 따라 대원수부에서 근무하게 된다. 손중산 선생이 중산복을 설계할 때 황룽성은 기획과 재봉을 책임져 첫 번째 중산복을 만들어 냈다.  손중산 선생은 처음으로 몸소 설계한 중산복을 입어보고 “이 복장은 보기도 좋고 실용적이며 편리하고 저렴하다. 양복처럼 상의와 바지 외에 외투를 따로 만들 필요가 없다. 또 양복은 수입품이므로 너무 비싸다”고 말했다. 손중산 선생의 제의는 많은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중산복의 특징  중산복은 간단하고 실용적으로 신해혁명 시기부터 유행됐다. 1912년 민국정부는 중산복을 예복으로 명명했고 중산복을 개량해 새로운 함의를 부여했다. 옷깃을 세우고 앞자락에 5개의 단추, 4개의 호주머니, 소맷부리에 3개의 단추를 달고 뒤에는 구멍을 내지 않았다. 여기에는 ‘주역’에 실린 주나라 시대의 예절 등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각각 다음과 같다.  1. 앞면의 4개 호주머니는 각각 예, 의, 염, 치(禮, 義, 廉, 恥)를 의미하며 호주머니 덮개는 ‘문(文)으로 나라를 다스림’을 상징한다.  2. 앞자락의 5개 단추는 서양의 3권 분립과 구별되는 5권 분립(행정, 입법, 사법, 시험, 감찰)을 상징한다. 3. 소맷부리의 단추 3개는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를 상징한다.  4. 뒤에 구멍을 내지 않음은 국가의 평화통일을 상징한다.  5. 봉폐식으로 접은 옷깃을 사용함은 ‘엄숙하게 나라를 다스림’을 상징한다.     중국의 공식 예복,"중산복(中山服)"의 유래는? 오권분립과 삼민주의를 의미   중국은 "중산복(中山服),일명 마오룩(Mao look)"을 일찍부터 "국가의 공식 예복"으로 지정했다. 중산복의 창제는 근대의 중국 복식 역사상 하나의 대변혁이다.  '중국 동맹회(同盟會) 성립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세미나'에서 상하이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리젠(李堅) 부교수는 '중산복은 닝보지이(寧波籍) 홍방이 재봉한 옷이고 최초의 정식 중산복은 홍방의 회원인 왕차이윈(王才運)이 쑨중산(孫中山)의 요구에 따라 1916년에 만들어졌다'는 새로운 설법을 제기했다.  리젠의 소개에 따르면, 중산복의 최초 형식은 19세기말 20세기 초에 나타났는데 당시 일본 복장계의 화교계 장팡청(張方誠) 등이 설계한 한벌의 중산복은 곧게 열린 깃의 앞가슴에 7개의 단추가 있다. 이후 양복이 중국으로 반입 함에 따라 사람들은 전문 양복을 재봉하는 재봉사를 "홍방재봉"이라 불렀는데 왕재운이 바로 당시 재봉계의 중요 인물이었다.  1916년, 왕차이윈 등은 손중산의 뜻에 따라 원래 기초상 다시 개선하여 재봉한 중산복은 웃옷에 5개의 단추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입법(立法)·사법(司法)·행정(行政)·감찰(監察)·고시(考試)의 오권분립을 의미하고 옷소매에는3개의 단추가 있는데 이는 민생(民生)·민주(民主)·민족(民族)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나타낸다.  
1151    [그것이 알고싶다] - 신사복 옷깃 왼쪽 단추구멍의 유래?... 댓글:  조회:3773  추천:0  2017-05-23
쇼울 칼라(Shawl-collar)의 턱시도(Tuxedo)를 제외하고는 더블 브레스티드 수트(Double Breasted Suit)의 라펠(깃)은 항상 피크드 라펠(Peaked Lapel)이어야 합니다. 라펠에는 전통적으로 단추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자켓을 여며 입었던 데서 비롯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장식적인 기능으로 남아 있습니다. 원래 윗쪽 라펠에도 단추와 단추구멍이 있었고 또한 채울 수 있도록 되어있었지만 복식의 변화 또는 유행의 과정에서 용도는 사라지고 형태만 남은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펠은 처음부터 지금처럼 펼쳐진 모양이 아니었습니다. 세워서 단추를 채워 입는 것이었습니다. 라펠 왼쪽에 있는 단추구멍은 바로 그 흔적입니다. 전통적으로 신사복의 라펠은 '튜닉(tunic)'이라는 깃이 높은 군복 상의에서 유래했습니다. 그 군복의 맨 윗단추를 풀어 깃을 양쪽으로 펼쳐 입은 모양에서 비롯된 것이죠. 단추는 없어졌지만 단추구멍은 남아서 그 자리를 요즘은 단추가 아닌 뺏지(패치)가 차지하고 있죠. 불과 10여 년 전만해도 구멍이 있었지만 근래에 구입한 양복들은 구멍마저 없어진 채 단추구멍의 형태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양복의 소매에 달린 단추도 비슷한 경우라 볼 수 있는데 소매단추 또한 지금은 고정되어서 풀 수 없게 되어있지만 이 또한 원래는 단추를 채우고 풀 수 있도록 만들어졌던 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용도를 상실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신사복의 옷깃을 보라. 그 깃을 라펠(lapel)이라고 하는데 그 왼쪽에는 단춧구멍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 회사 배지를 달고다니는 이들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그것말고 이 단춧구멍은 이렇다 할 쓸모가 없다. 그런 단춧구멍이 왜 신사복마다 있는 것일까? 라펠의 단춧구멍의 또 다른 쓰임새에는 결혼식 때 신랑이 여기에 꽃을 꽂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양복 왼쪽 가슴의 포켓에 꽃을 꽂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꽃은 라펠의 단춧구멍에 꽂아야 합니다.    
1150    [그것이 알고싶다] - 넥타이의 유래?... 댓글:  조회:3801  추천:0  2017-05-23
넥타이의 유래    넥(neck, 목)과 타이(tie,매다)의 복합어인 넥타이는 고대 로마 병정이 무더운 여름에 더위를 식히기 위해  스카프를 찬물에 적셔 목에 감던 것에서 유래한다. ​ 본격적인 넥타이의 등장은 17세기 프랑스 군대의 용병인 크로아티아 병사들에게서 시작된다 터키 전투에서 승리한 병사들이 목에 붉은 천을 두루고 시가행진을 벌이는 것을 본 루이 14세가 이를 따라하기 시작하자 뒤이어 파리에서 유행했다. ​ 목에 붉은 천을 두른 것은 생명을 해치는 마귀가 몸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는 뜻에서 였다. 훗날 이들의 이름을 따 '크라바트(cravat)' 라고 불렀으며이는 오늘날에도 넥타이의 점잖은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 넥타이는 17세기 중반 이후 포인핸드 (four-in-hand, 매었을 때의 길이가 주먹의 4배)와 같은 현대적 넥타이는 19세기 말 부터 등장했다.   슈바이처 박사는 장례식 등 예식이 있을때 마다 넥타이를 착용할 만큼 예의의 상징물로 여겼고,  또 500여개의 넥타이를 가지고 있었던 미국의 가수 겸 배우인 프랭크 시나트라는  공연 중에 환호하는 팬들에게 넥타이를 풀어 주곤 했다.   아무리 자유 분방한 나라 미국이라 해도 공식행사에는 넥타이를 메고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유분방한 옷차림 보다는 기준이 잡힌 사람으로 여겨지려면 넥타이를 매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넥타이는 BC 1세기경 고대 로마 병사들이 착용한 '포칼(Focal)'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당시 포칼은 단지 '추위 방지용'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688년 '문장(紋章) 아카데미'란 책을 발간한 영국 귀족 랜들 홈은 "넥타이는 기껏해야 칼라에 덧붙인 긴 타월에 그쳤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일종의 냅킨 역할을 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현대와 같은 넥타이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7세기경 프랑스에서 귀족들이 착용한 것에서부터인 '멋'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30년 전쟁' 당시 파리로 들어온 크로아티아 기병들의 목에 감겨 있던 띠를 보고 파리 귀족들이 장식품으로 응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불어로 넥타이를 뜻하는 '크라바트(cravate)'의 어원은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루이 14세에 대한 충성심의 표시로 장군이하 신하들이 목에 매기 시작한 '크라바트(Cravate)'라는 것이었으며   매는 법을 달리하면서 1770년대 워털루 전쟁 이후'넥타이(Neck-Tie)'로 불리어지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1149    [그것이 알고싶다] - 양복의 유래?... 댓글:  조회:3691  추천:0  2017-05-23
한국에서는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을 계기로 정부가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제반제도를 개혁하는 데에서 복제개혁에 따라 입게 되었다. 96년(고종 33) 4월 7일 칙령 제78호로 육군복장규칙을 제정하여 구군복을 폐지하고 서양식 육군복장을 제정하였으며, 1900년(광무 4) 4월 17일 칙령 제14호로 문관복장규칙을 정하였고, 제15호로 문관대례복제식(文官大禮服制式)을 정하여 서양식 관복으로 바꾸었다. 서양식 문관복은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것이며, 일본은 영국의 대례복을 모방한 것이었다. 개화기의 양복은 주로 관복으로 입은 것이며, 일부 상류층에서만 드물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상의 칙령은 군복과 공복(公服)에 관한 규정이지 일반 남자나 부녀자들의 복장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서유견문》 《고종시대사》 등 한말의 자료를 보면 공복이 아닌 일반시민복으로서 양복을 제일 먼저 입은 사람들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1881년을 전후하여 정부의 수신사 또는 신사유람의 자격으로 일본에 파견된 개혁파 정객, 김옥균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 ·윤치호 등이 양복을 사입고 돌아와 물의를 일으켰는데, 이들이 한국인으로서는 제일 먼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양복은 문명 개화의 선두에 선 사람들이 착용한 것이라 해서 한때는 개화복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들이 입은 양복은 영어로 색코트(sack coat)라는 것으로, 18세기에 유럽에서 스포츠복으로 등장하여 미국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1870년대부터 남성들의 평상복이 된 것인데, 깃은 턱 밑으로 바싹 다가가 있고 앞섶이 가슴에서 무릎까지 벌어졌으며, 와이셔츠는 칼라가 둥근 크라이앵 셔츠이고 넥타이는 보타이처럼 생긴 크라바트였다.  그러나 이들이 양복을 사입은 후 한국에서 양복 착용이 법령으로 공인을 받기까지는 14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후 일부 상류귀족과 외교관, 해외유학을 한 고급관리들은 프록코트나 색코트를 한복 대신 신사의 평상 복장으로서 착용하는 일이 많아졌다. 남자보다 조금 뒤져서 양장을 하는 여성도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1899년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윤치오(尹致旿)의 부인이 양장을 입은 것이 효시이고, 1900년에는 외국유학을 마치고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에스터가 양장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진명여학교 여교사 에밀레 황이 양장을 하고 다녔다. 이들이 양장에 양산을 쓰고 거리에 나타나면 호기심 어린 대중이 구경나와 앞뒤로 막아서서 좀처럼 길을 가지 못했다고 한다. 비슷한 연대에 고종황비(高宗皇妃)인 엄비(嚴妃)도 양장에 모자와 양산을 갖추고 기념촬영한 사진이 있다.  그러나 이 때는 일부의 상류귀족 여성들과 외교관 부인, 해외유학을 하고 온 고급관리의 부인, 선구적 개화여성들에게만 양장이 유행하였는데, 양장의 형태를 보면, 상류여성들은 당시 유럽 상류사회에서 유행한 버슬 드레스를 착용하였고, 개화여성들은 당시 선교사들이 입은 것으로 짐작되는 테일러 슈트나 깁슨 스타일, 자고 드레스, 도렌 드레스 등을 입었다.  교복으로서 양복을 가장 먼저 채택한 학교는 남자학교로는 배재중학교이고, 여학교로는 숙명여학교였다.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徐載弼)이 1896년 귀국하여 그 해 4월에 《독닙신문》을 발간했는데, 동지 4월의 ‘논설’에서 의생활의 개선을 강조하였고, 6월 16일자 ‘잡보’란에서는 배재학당 학도들이 머리 깎고 제복 입은 모습이 활발하고 믿음직스럽다고 찬양하였다. 숙명여학교는 당시의 간호복과 비슷한 형태인 영국의 메린스식(式) 자줏빛 원피스에 안을 받친 분홍색 보닛을 갖추어 유럽식으로 교복을 제정하였다. 이와 같은 교복은 재래식 한복에 변화를 가져왔고, 당시의 개화사조나 양복의 형태를 반영하였다.  그 무렵 서양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라서 거추장스러운 코르셋과 버슬 드레스에서 쇼트 스커트라는 통형의 기능적인 20세기 스타일로 바뀌었다. 한국에서도 종전보다 다소 간편해진 스타일인 테일러 슈트나 재킷 슈트, 원피스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1920년대는 여성의 지위 향상과 아울러 활발한 사회진출로 말미암아 1910년대에 국권피탈로 위축된 복식계도 다시 활발한 활동과 변화를 보이는데, 당시 동덕여학교장 송금선(宋今旋)은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양복을 입자는 글을 발표하였으며, 곳곳에서 재단 강습회가 열렸다. 블라디보스토크 공립양복학교를 졸업한 이정희(李貞嬉)는 1922년 남녀양복과 어린이 양복을 만들어냈고, 일본에서 돌아온 오엽주(吳葉舟)는 1920년 화신백화점에서 개업하여 단발머리를 보급시키기도 하였다. 당시의 양장미인의 패션은 망토 ·코트 ·흰 원피스 ·재킷 ·투피스 ·플리츠 스커트 ·스카프 ·넥타이 등이었다.  그러나 주류는 역시 한복이었으며 양장은 단편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당시 양장미인의 치마길이는 무릎 밑까지 올라갔고 소매는 어깨선에 가깝도록 짧아졌다. 또 20년대의 특기할 만한 것은 장갑과 우산과 수영복의 등장이다. 당시의 수영복은 20년대 초에는 종아리와 팔꿈치 아래만 노출시킨 것이었는데 28년경에는 팔과 다리가 모두 노출되는 것이었다.  30년대에도 대부분은 한복을 입었으나 일부 상류사회의 여성이나 일본 ·미국 등지의 유학생들은 플레어 스커트 ·세퍼릿 슈트 ·스포티 코트 등을 착용하였다. 30년대에는 일제가 여학교의 한복교복을 세일러복으로 바꾸어 제정하여 착용을 강요하자, 일반여성들에게도 블라우스나 스웨터 ·스커트 ·세일러복 ·스포츠 웨어 ·스카프 ·모자 등의 양장이 비교적 많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헤어스타일은 20년대에 일부에서만 단발이 유행했는데 37년경부터 핀컬과 퍼머넌트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침체된 양장의 변화는 30년대에 좀 활발해지는가 했으나 일제 말기의 카키색 국민복 및 여성의 몸뻬 착용 강요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전국에 보급된 몸뻬와 원피스식 간편복, 군국조(軍國調)의 카키색 국민복 등은 모든 국민의 필수복이 되었다.  8 ·15광복 후 한국의 복장은 많은 변화를 보였는데, 한복은 노년층이나 일부 농촌지역의 복장으로 후퇴하고 양복이 일상생활에 파고들어 현대 한국인의 복장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6 ·25전쟁의 참화를 겪었으면서도 60년대는 C.디오르의 처진 어깨와 우아한 롱스커트가 등장하여 우리의 의상계를 풍미하였고, 70년대는 화학섬유의 발달과 더불어 의료(衣料)의 풍족으로 기성복이 발전함으로써 패션 산업의 소지를 만들었으며, 80년대에는 캐주얼 스타일이 의상계를 이끌었다. 서양복장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색, 즉 젊은층의 리더십, 레저복의 전파, 남자복의 컬러화, 논슈트화, 기타 유행의 다양화 등이 그대로 한국의 복장에도 새로운 현대적 요소로서 가해지고 있다.    
1148    [그것이 알고싶다] - 청바지의 유래?... 댓글:  조회:3948  추천:0  2017-05-23
청바지의 유래와 연혁 청바지는 진(Jean)이라는 직물에서 시작되었다.  올이 가늘고 질긴 능직(綾織) 면(綿)이 바로 진이다. 능직은 사선방향의 이랑무늬가 있기 때문에 사문직(斜紋織)이라고도 한다. 청바지의 원료가 되는 진은 마차의 덮개 등을 만드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진의 주된 생산지는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제노아(Genoa)였다. '진'이라는 명칭도 제노아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료의 생산지도 아닌 미국에서 진이 옷감으로 사용된 것은 한 재단사의 관찰력 덕분이다. 1840∼50년대 미국 서부에서는 금을 채취하는 것이 붐이었다. 부를 축적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서부로 길을 떠났다.  그들이 하는 일은 금을 파내는 거친 작업이다. 열 일곱 살에 미국으 로 이민을 간 재단사 레비스트로스는 이들이 입는 바지가 너무 쉽게 헤어져버린다는 것을 알고는 텐트나 마차의 덮개로 이용되던 진을 떠올렸다. 투박하고 뻣뻣한 직물이지만 대신 질기고 튼튼하기 때문에 험한 작업을 하는 데에는 아주 적합했던 것이다. 이때의 진은 물론 청색이 아니었다. 1860년대 초에 레비스트로스는 너무 뻣뻣한 진 대신 데님(Denim)이라는 직물로 바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데님은 보통 날실에 인디고(Indigo) 염료로 선염된 경사와 염색되지 않은 위사로 짜여진 능직물이다. 특이한 직조방법 덕분에 진은 특유의 청색을 갖게 되었다. 190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본격적인 산업화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청바지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함께 유도했다. 막일을 하던 노동자들이 착용했던 작업복이라는 인식은 사라지고 도시의 일반인들도 착용할 수 있는  평상복 개념의 청바지가 등장한 것이다. 1930년대, 서부영화에서 카우보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들이 가진 남성미나 힘, 근육미 등이 부각되었다. 이때 그들이 입고 등장하는 청바지는남성미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청바지가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은 1950년대 중반이다. 전후세대가 자라 새로운 세대를 형성하였을 즈음인데 제임스딘이나 말론 브란도 같은 배우들이 청바지를 입고 나서면서 청바지에 가죽 재킷을 입어 반항적인 분위기를 나타냈다.  이때 미국 사회에서 청바지는 반항적 이미지와 기존 질서에 대한 불신, 자유로움, 해방 등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물이 되었다. 1960년대에는 페미니즘의 열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남성과 여성이 같은 옷을 입는 소위 유니섹스(Unisex) 모드가 등장했다. 전통적인 성역할을 거부하고 동등한 입장에서의 경쟁과 성취를 추구하는 새로운 경향과 더불어 청바지는 여성의 해방을 상징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미국의 청바지가 세계 젊은이들에게 급속도로 전파되면서 각 나라에서 다양한 문화적 움직임을 낳았다. 우리나라에 청바지가 도입된 것은. 1950년대 미군들에게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서양의 괴상한 옷, 예의에 어긋나는 옷. 특히 '막되 먹은 아이'들만 입는 옷으로 여겨졌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때 청바지를 입는 사람이 '개화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의 선진문물에 대한 강한 동경과 열등의식이 청바지에 대해 이렇게 상반된 인식을 만들어냈다. 1970년대 전후세대가 대학생으로 자랐을 무렵 청바지는 건방지고 불량한 사람들이 입는 옷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신과 독재정부에 반발하는 젊은이들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청바지는 또 한 번의 인식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1982년에 내려진 교복자율화는 중고생들이 교복 아닌 다른 옷을 입도록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때 교복을 대체한 옷이 바로 청바지였다. 이 무렵부터 청바지는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 더 이상 어떠한 상징도 담지 않은  그저 수수한 옷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우리나라 청바지 시장은 일대 변화를 겪게 된다. 개성을 추구하는 X세대의 등장과 그들을 노리는 마케팅 전략으로 청바지는 또 다시 화려한 변신을 하게 돈 것이다. 본격적인 청바지 브랜드의 등장과 외제 청바지의 유입이 가속화되면서 청소년들은 '이름값 하는' 청바지를 입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청바지를 안 입으면 왕따 당하는 묘한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때부터 단순한 모양 의 청바지는 배꼽이 훤히 보이도록 지퍼를 짧게 달거나 다리가 길어 보이라고 아랫단 옆선을 터놓거나 물들인 청바지를 모래로 탈색시켜 만든 '스노우 진(Snow Jean)'이 등장했다. 멀쩡한 무릎 찢어 입는 것이 유행하고 미국에서 입다 버린 청바지를 구제품이라고 부르며 비싼 값에 구해 입는 황당한 일들도 일어 난 것이다. 1993년을 즈음해 나온 헐리우드의 영화에서 마약과 술에 쩔어서 사는 불량 소녀와 반항아, 사회적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일탈자들이 입고 있는 것은 청바지나 청재킷이다. 드류 배리모어 주연의 건크레이지, 파트리샤 아케트 주연의 트루 로맨스, 이온 스타이 주연의 개스 푸드 로징, 줄리엣 루이스 주연의 칼리포니아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들의 패션은 찢어진 청바지, 가죽 재킷, 반쯤 벗겨진 빨간 매니큐어, 어깨를 드러낸 옷, 주먹만한 플라스틱 귀고리, 그물 스타킹 등이다. 패션업계는 이런 경향에 재빨리 편승, 이들의 차림새를 패션 특선으로 내놓은 것이다. 소비자의 취향이 다양해지고 고급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유명 디자이너의 라벨을 붙인 새로운 진이 등장했다. 그러니 애초부터 청바지가 가지고 있었던 그 순수와 정열, 젊음의 상징, 실용성은 사라지고 고가(高價)의 차별화 된 청바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외국에서 청바지는 남녀노소가 계절 없이 입는 실용적인 옷이다.  그러나 한국의 청바지는 특이하게도 부드러운 촉감을 내느라고 가공을 하도 많이 해서 "세탁기에 넣고 빨지 마시오"라는 주의사항이 붙어 있는 청바지까지 있다.  한국에서 청바지는 이제 고도의 패션상품으로 통한다.  주요 소비층인 10대 후반∼20대 초반 젊은이들에겐 '신분을 나타내는 구실까지 한다.  어느 브랜드의 것인지, 얼마 짜리인지가 그 기준이 된다. 고가의 청바지 경쟁은 다분히 한국적인 현상인 겄 같다.  청바지 특유의 실용성을 잊은 젊은이들과 그것을 부채질하는 업계가 함께 만든 기묘한 합작품이다. 미국에서 청바지는 노동, 서부, 반항, 자유, 젊음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새로움, 젊음, 반항, 그리고 평상복. 개성의 표현물. 경제력, 유행 등 새로운 의미들을 부여받게 되었다. 한 벌의 옷이 그것이 생겨난 지역에서 갖는 문화적 의미와 다른 나라에 전파 되었을 때 갖는 의미가 다른 이유는 문화적인 차이와 그것을 받아들일 당시의 상황적 차이 때문인 것 같다. =====================     ** 리바이스 청바지의 유래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는 투박한 갈색 천막을 이용해  `리바이의 바지’(리바이스 팬츠·Levi’s Pant’s)를 만들어 팔았다.  리바이스(Levi’s)라는 상표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창립자의 이름 리바이 스트라우스.바로, 청바지를 발명한 사람이 Levi Strauss 입니다. 1847년 독일 바바리아 출신의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는 22살의 나이로 미국 으로 이민을 갔다. 레비는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온 많은 사람들이 잘 곳이 없어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천막장사를 했다. 그리고 운도 따라 그 근처 부대의 군용천막을 독점으로 제작해 어느 정도 돈도 벌었다. 그 당시 천막천 생산업자였던 스트로스는 대형 천막 10만여개 분량의 천막 천을 납품하 도록 주선하겠다는 군납 알선업자의 제의에 따라 3개월만에 주문 받은전량을 만들어 냈 습니다. 그러나 군부대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천막용 천이 잔뜩 쌓여서 커다 란 손해를 본 리바이는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술집을찾았다. 그런데 그 곳에서 광부들이 입고 있던 옷들은 모두 구멍이 나고 형편 없었다. 광부들 은 질기지 못한 옷에 대해 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리바이는 "질긴 천막천을 쓰 면 닳지 않을 텐데.." 라고 생각했습니다.그로부터 1주일 후 천막은 모두 청바지가 되어, 시장에 나왔답니다.   그 날로 레비는 아무리 험하게 입어도 구멍이 나지 않는 천막용 천으로 만든 맵시는 없지만 주머니에 징까지 박은 리바이 바지를 광부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그 옷들은 삽시간에 팔려 나갔고 맵시를 살려 바짝 몸에 붙는 바지를 만들어 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즐겨 입는 리바이스 청바지의 시초이다.   푸른색의 잘 닳지 않는 바지 이름하여 청바지는 뛰어난 실용성을 인정받아 광부뿐 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불티나게 팔려 나갔습니다. ‘1년 판매량 2천만 개, 순이익 6천만달러.’ 당시 전 산업분야에 걸쳐 단일품목 중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큰 순이익을 올린 것으로 기록되었다. 투박한 갈색 천막 바지가 푸른색 청바지가 된 이유는 푸른색 염료가 당시 광부들을 괴 롭혔던 독사의 접근을 막아준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한다.   ■ 1850∼70년대 초 1800년대 중기, 개척 시대가 활발했던 미국에서는 튼튼한 노동복이 필요하였습니다. Levi는 텐트에 쓸 수 있었던 두꺼운 갈색 캔버스(canvas)지에서, 세계최초의 청바 지를 상품화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바지를 만들려고 연구를 하고 있었을 때에, 야곱(Jacob)·데이비스(Davis)가 리벳(rivet)으로 포켓(pocket)을 보강 하는 방법을 문뜩 생각해냈습니다. (1870년 리벳(rivet)이 첨부된 바지가 시작)   ■ 1873년 Levi's사는 리벳(rivet) 보강의 아이디어(idea)를 낸 야곱(Jacob)데이비스(Davis)와 함께 「의복에 포켓(pocket)의 보강에 금속 리벳(rivet)을 사용하는 방법」에 관한 특허권신청하여 1873년5월20일에 인가되었습니다. 이것이 Levi's·청바지가가 「오리지 널 리벳티드 클로징」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이 역사적인 일은, 가죽패치에 도안화되어 오늘의 제품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1873년 리벳보강에 관한 특허를 인정을 받아 Levi's 사에 독점 사용권이 주어짐) (뒷주머니에 쌍아치 모양(arcuate) 스티치(stitch-박음질)가 들어감)   ■1873∼80년대 초두 리벳(rivet)의 사용에 관한 특허를 인정 받은 그 해, 뒷주머니에 스티치(stitch)가 안 으로 접어 꿰매지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쌍아치 모양(arcuate)스티치(stitch)」는 Levi's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의 하나로서 등록되어 현재 사용되는 의복들의 상표에서는 리바이스가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1873년부터의 10여년간에 가죽패치등, 현재의 501의 기본 디테일이 완성되었습니다. (1886년 Two Horse 마크의 가죽패치가 붙음.) (1890년 Lot Number를 도입. Watch 포켓과 백요크가 붙음.) (1900년 Back Pocket이 2개가 되고, 5포켓의 스타일을 완성.)   *Watch 포켓 -일명 동전주머니라고 불리며 오른쪽주머니의 작은주머니 *요크 - 청바지 엉덩이 부분에 혁대 라인과 호주머니가 부착되는 부분 사이에 있는 역삼각형 모양의 천조각 *5포켓- 청바지 앞주머니2개+Whatch포켓+뒷줘머니2개   ■ 1906년 Levi's의 본거지인 San Francisco에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Levi사역시 지진으로 인해 사무실과 공장등 모두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 이미 시내에서 가장 유력한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진이있은후 불과 몇주일후에는 생산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5개월후에는 근대적인 설비를 도입한 발랜시아 (Valencia) 공장을 완성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지금도 Levi's의 전통 모델인 501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 1920년대 Levi's는, 의류품 업계에서 처음으로 콤베어 시스템에 의한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주목의 디트로이트(Detroit)의 포드(Ford) 자동차공장의 시스템을 의복의 재료물건의 봉제 공정에 응용한 것으로 미국 전체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1922년·벨트(belt) 루프(loop)가 붙는다. 서스펜더버튼과 병용.) (1935년·여성용 컷트 진(jeans)을 처음으로 발매.) (1936년·레드 탭(tab)을 붙임.) (1937년·백 포켓의 리벳(rivet)의 모양 변화. 서스펜더 버튼 폐지.) (1938년·레드 탭(tab)이 상표등록됨.)   ■ 1940년대 Levi's· 청바지는는, 미군병사를 비롯해 직접적으로 전쟁에 관여하는 사람에게만 구입이 허용되었습니다. 또한 트레이드마크(trademark)의 하나인 「쌍아치 모양(arcuate) 스티치(stitch)」는, 실의 낭비로 간주되어 그 대용으로서, 페인트에 의해 그려졌습니다. 제품에 철저한 고품질주의를 관철해 온 Levi's에 있어서 가장 힘든시 기였습니다.   (1942년 가랑이 아래 부분의 길이 리벳의 사용 중지. 혁대 고리의 설치 중지.)   일설- 가랑이부분 리벳은 복각품에서는 보이지만 요즘나오는 리바이스에서는 보이 지 않고있습니다.(예외적으로 엔진에는있습니다) 1940년대당시 모닥불을 피워놓고 즐기던 이들중 리바이스진을 입고있던 남성 이 가랑이 부분의 리벳이 모닥불의 열기에의해 달궈져 남성의 그곳에 화상을 입는 사건이 있은후 그부분의 리벳 사용이 중지되었다고합니다.^^;;   ■ 1945년 청바지가 만들어진지10년 지나도, ”서부의 옷” 이었습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중에, Levi's의 품질과 명성이 동부나 유럽(Europe)의 병사에게 전해 지고 대전종결 후 Levi's는 세계의 주목을 모았습니다.   ■ 1954년 라이터 블루스 라고 불려지는 세계최초의 낡은 청바지를 발매. 제임스 딘 ,마론·브랜 드 라고 하는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두사람의 영웅이 탄생하고, Levi's의 인기는 급 상승 했습니다.   (1954년 가죽 패치의 사용을 중지. 새로운 재질이 됨.)   ■ 1950∼60년대 1950년대 후반부터 청바지(jeans)의 대붐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청바지가 미국인 뿐만아니라, 세계의 젊은이의 옷이 된 것도 이 시기입니다. Levi's는 청색(blue), 흰 색(white)의 색상의 청바지뿐만아니라 나 골덴(corduroy)등의 제품을 잇달아 개발 그 모두 베스트 셀러가 되고, 오늘에는 베이식진즈(Basic jeans)라고 불리는 상품체 계가 확립되었습니다. 드디어 60년대 후반에는, 라이프 스타일(life style) 혁명이나 히피(hippie) 문화의 가운데에서, Levi's는 젊은이들의 Status Symbol으로서, 그 지위를 확립했습니다.   (1961년·골덴(corduroy)등 데님(denim)이외의 청바지를 차례로 개발함.) (1963년·방축 가공 데님(denim) + 지퍼플라이의 청바지를 발매.) (1964년·화이트(white)·Levi's 발매.) (1967년·Back Pocket)의 컨실드 리벳을 폐지)   ■ 1970년대 전반 1971년에 일본 지사를 설립. 리바이스는 현재 청바지패션의 선두주자인 일본 시장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73년에는 청바지를 캔버스(canvas)를 보고 밝혀낸 '데님 아트 콘테스트'가 개최되어 많은 주목을 모았습니다.   (1971년·탭(tab)의 로고(logo)가” 빅(big)E”로부터” 스몰(smallness)e”이 됨.)   ■ 1992년 미국에서 빈티지제품으로 'Big E' 제품으로 빈티지 모델의 기획 생산이 시작됨   ■ 1996년 'Big E' 제품이 빈티지라인으로 전세계에 판매되기 시작함   ■ 1999년 리바이스 고가모델 리바이스 501을 기초지다인으로 한 Red™ 출시   ■ 2000년 인체공학디자인 Engineered Jeans™ 전세계에 동시에 출시   ■ 2001 일본에 Circle R™ 이라는 일본 고유의 청바지 기술로 새로운 고가의 리바이스 라인이 등장   ■ 현재 리바이스 청바지가가 탄생하고나서 현재까지, 35억개이상이 생산되었습니다. 이 천문학적인 숫자는 지금도 급상승하고 있습니다. 미국, 워싱턴의 국립 스미스소니 언(Smithonian) 박물관에는, Levi's501이 영구 콜렉션(collection)으로서 소장되어 있습니다   ■ 2003 리바이스의 혁신이라고 말하는 Type 1™ 2003년 세계동시 발매예정 일본에서는 2002년 10월중순쯤 먼저 시판 홍콩에서 12월 초에 시판   Type 1™특징 과감한 종이패치와 뒷주머니무늬인 아치형 리바이스 무늬의 과감한 표시등 1950년대 501의 특징을 살림    
1147    [쉼터] - 결혼, 싸움터, 날바다, 그리고 긴 대화... 댓글:  조회:3634  추천:0  2017-05-23
♣ 결혼에 관한 세기의 명언들.. ♣  결혼이란 단순히 만들어 놓은 행복의 요리를 먹는 것이 아니라,  어제부터 노력해서 행복의 요리를 둘이서 만들어 먹는 것이다.  - 피카이로 - 결혼에서의 성공이란 단순히 올바른 상대를 찾음으로써 오는 게 아니라 올바른 상대가 됨으로써 온다. - 브리크너 - 사랑이란 돌처럼 한번 놓인 그 자리에 있는게 아니다.  그것은 빵처럼 항상 다시 새로이 구워져야 한다.  - 르권 - 남자는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한 사람이 되고,  악한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된다. - 소크라테스 - 가능한 한 일찍 결혼하는 것은 여자의 비즈니스이고, 가능한 늦게까지 결혼하지 않고 있는 것은 남자의 비즈니스이다.  - B.쇼 - 결혼은 어떤 나침반도 일찌기 항로를 발견한 적이 없는 거친 바다이다. - 하이네 -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면 그들은 일심동체가 된다.  어느 쪽이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 조르주 에르고지 - 결혼식의 행진곡 음악은 늘 나에게 전투에 나가는 병사의 행진곡을 생각케 한다. - 하이네 - 좋은 결혼은 있지만, 황홀할 만큼 즐거운 결혼은 없다.  - 라 로슈프코 - 초혼은 의무, 재혼은 바보, 세 번째 결혼하는 자는 미치광이다.  - 네덜란드속담 - 결혼만큼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의 행복이 걸려 있는 것은 없다.  결혼 생활은 참다운 뜻에서 연애의 시작이다.  - 괴테 - 결혼 전에는 공작, 약혼을 하면 사자, 결혼을 하면 당나귀.  - 스페인속담 - 결혼 생활은 모든 문화의 시작이며 정상( 頂上 )이다.  그것은 난폭한 자를 온화하게 하고, 교양이 높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온정을 증명하는 최상의 기회이다.  - 괴테 - 결혼하는 편이 좋은가, 아니면 하지 않는 편이 좋은가를 묻는다면 나는 어느 편이나 후회할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 소크라테스 - 결혼을 미루는 인간은 전장에서 도망하는 병사와 같다.  - 스티븐슨 - 결혼 생활은 긴 대화이다.  - 니체 - 결혼에 대하여 긴요한 것은 스무 번이고 백 번이고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람은 항상 어찌할 수 없을 때 죽음에 임하듯,  다시 말하면 그렇게 할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을 때 결혼할 것이다.  - 톨스토이 - 결혼의 성공은 적당한 짝을 찾기에 있기보다는 적당한 짝이 되는데 있다.  - 모로아 - 결혼은 개인을 고독으로부터 구하며,  그들에게 가정과 자식들을 주어서 공간 속에 안정시킨다.  생존의 결정적인 목적수행이다.  - 시몬느 보봐르 - 결혼이란 남자의 권리를 반분(半分)해서 의무를 두 배로 하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 - 결혼이란, 사람들이 사랑에 어떤 종교적 표현을 부여하는 것.  사랑을 종교적 의무로 높이는 것 외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 키에르 케고르 - 결혼의 유일한 매력은 쌍방의 허위(虛僞)생활을 절대로 필요하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 오스카 와일드 - 성공적인 결혼이란 매일같이 개축해야 하는 건물과 같은 것이다.  - 모로아 - 땅을 사려거든 서둘러라, 그러나 결혼을 하려거든 시간의 여유를 가져라. - 이스라엘속담 - 똑같은 영혼의 높이에 서 있는 사람들의 결혼은 실현성이 희박하며,  관념적인 여자와 관능적인 남자의 결혼은 파괴적인 결혼이고,  일방이나 쌍방의 부정과 동시에 관용으로 이어져 나가고 있는 결혼이 가장 흔하다. - 루이제 린저 - 마음이 끌린다는 것만으로 결혼하지 말라.  누가 보든지 이 여자(남자) 라면 할 정도라야 한다.  바가지 긁는 소리를 듣고 싶으면 결혼하라, 칭찬을 듣고 싶으면 죽어라.  - 아일랜드속담 - 사랑할 때는 꿈을 꾸지만, 결혼하면 잠을 깬다.  - 포프 - 사랑은 욕구와 감정의 조화이며,  결혼의 행복은 부부간의 마음의 화합으로부터 결과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 발자크 - 어울리는 결혼을 원한다면 대등한 사람과 하라.  - 오비디우스 - 아내는 남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다한다.  이것이 바로 부부를 일생동안 맺어주는 유형의 매카니즘이다.  수없이 많은 이혼과 결혼의 기초를 이루는 감정이 바로 상실감( 喪失感 )이다. - 프란체스코 알베로니 - 애정 때문에 결혼하는 자는 분노 때문에 죽는다.  - 이탈리아속담 - 이별이나 이혼은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실패의 상징어이다.  인생에서 지워버려야 할 대목이다. 성생활이 좋아봤자 2개월이니,  사랑없는 결혼은 언제 무덤으로 변할지 모른다.  결혼이란 독립은 동등하고, 의존은 상호적이며, 의무는 상반되는 남녀간의 관계이다.  - 안스파 - 결혼은 일체의 것을 삼키는 요물과 부단히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요물이란 습관을 말한다.  - 발자크 - 결혼의 행복은 무언가 둘의 힘으로 이루어 나가는 성취감의 공동체 의식이 가장 중요하다.  결혼도 역시 일반 약속과 마찬가지로 성을 달리하는 두 사람 즉, 나와 그대 사이에만 아이를 낳자는 계약이다.  이 계약을 지키지 않는 것은 기만이며 배신이요, 죄악이다.  - 톨스토이 - 결혼 전에는 눈을 크게 뜨고, 결혼 후에는 반쯤 감아라.  - 토머스 풀러 - 여자는 남자의 활동에 있어 큰 걸림돌이다.  여자를 사랑하면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사랑이 방해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연애하는 여자와 결혼하는일이다.  - 톨스토이 - 여인들이 혼자 있을 때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를 남자들이 안다면, 남자들은 결코 결혼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 O.헨리 - 사람들은 대개 정신없이 서둘러 결혼하기 때문에 한평생 후회하게 된다.  - 몰리에르 - 싸움터에 나갈 때에는 한 번 기도하라,  바다에 갈 때는 두 번 기도하라,  그리고 결혼을 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하라.  - 러시아속담 - 만일 고독을 두려워한다면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 - 안톤 체호프 - 삼 주 동안 서로 관찰하고, 석 달 동안 서로 사랑하고,  삼 년 동안 서로 싸우고, 30년 동안 서로 참는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 아폴리트 텐 - 연애가 결혼보다 즐거운 것은 소설이 역사보다도 재미있는 것과 같은 이유다. - 샹포르 - 연애 없는 결혼이 있는 곳에 결혼 없는 연애가 생길 것이다.  - 벤자민 프랭클린 - 혼인의 일에 재물을 논함은 오랑캐의 도이다.  - 명심보감 -    
1146    [쉼터] - 술놀자와 몸놀자... 댓글:  조회:3685  추천:0  2017-05-20
술값과 몸값 2017년 05월 18일 작성자: 최장춘       요즘 우리 사는 주변에는 갖가지 핑게를 대고 벌이는 술판이 많다. 동창생 모임이요, 직장동료 파티요, 기념행사요, 하여튼 이름이 가닿는 대로 모여앉는 장소에서 어떤 술을 쓰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진다. 그저 돌림식으로 잇대는 술추렴이라면 보통술로 대충 얼버무려도 무방하겠지만 명심하고 본때있게 청하는 좌석에서 고급명주가 안 오르면 서글퍼진다.   높은 술값이 초청 받은 손님들의 몸값을 은근슬쩍 올려주어 가슴이 뿌듯한 나머지 자세부터 고쳐앉으며 경건함을 표시한다. 오가는 말투도 체호브의 에서 나오는 대화처럼 “이렇다, 저렇다”가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 존칭어로 바꿔쓴다. 선배이든 후배이든 례우를 갖춰서 고급술을 선사한 귀인의 말씀을 잠자코 듣는 게 이미 굳어진 관례이다.   접때 친구의 초청을 받고 파티에 참석한 적 있다. 장소가 뀀점이라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아 갈가말가 망설였는데 정작 가보니 웬걸 엄청 수량의 장어구이와 모태주, 독일맥주를 올렸다. 찌뿌둥하던 날씨가 갑자기 쨍ㅡ하니 해 뜨는 기분이랄가, 감지덕지해 두손 맞비비며 후한 대접을 받고보니 헤여질 무렵 저마다 황송해서 초청인의 손목을 오래도록 잡아주며 감개무량해했다.   력대로 술문화는 태반 사회 상류층에 속해있었다. 자연재해가 련속부절히 들이닥칠 때마다 온갖 금주령을 내려 백성들은 술맛을 잊은 채 살아야 했다. 매일 흥청망청 술판을 벌리는 임금에게는 의례당당할지 몰라도 영웅호걸이나 음풍영월을 읊던 풍류인들은 술잔을 기울이면서 자신들이 정신상 받은 트라우마를 무마하려 애썼다. 그 와중에 량산박 무송이 술기운을 빌어 맨주먹으로 범을 때려잡은 전설이 생겨났는가 하면 한번의 음주에 백편의 즉흥시를 날리는 리백의 신화가 세상을 희한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시대가 변하여 옛날 그처럼 귀하던 술이 백성들의 밥상에 싫을 정도로 오른다. 아침 한잔, 저녁 한잔, 누군가 명절에 들고온 고급술을 음미하면서 셈평 좋은 생각에 웃음집이 흔들흔들해진다. 어찌 보면 고급술이 더 이상 부자들의 독점물이 아닌 듯하면서도 일반인이 선뜻 손을 대지 못하는 리유는 무엇일가. 단지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 비싼 가격 때문일가?   사실 눈덩이처럼 부풀어오른 명주가격이 저소득계층이 아연실색할 정도여서 입맛만 쩝쩝 다시기 일쑤이다. 저 비싼 술을 누가 마실가, 고개 갸우뚱 해봐도 십중팔구 구매자 본인이 마실 것 같지 않고 마시는 이들은 또한 제 돈으로 산 것인지 분명치 않다. 한때 청탁놀음이 사회 도처에서 기승을 부렸다. 어린이 유치원부터 성장하여 대학까지, 직장에서 승급은 물론 생활의 구석구석에 포도넝쿨처럼 청탁놀음이 뻗칠대로 뻗쳐있었다. 마치 거대한 치륜이 서로 이가 맞물려서 잘 돌아가는데는 윤활제가 필수인 것처럼 끊어진 사슬을 이어주며 성패를 가르는 최대 변수는 역시 술이였다.   천마디, 만마디 말보다 한병의 고급술의 힘이 막강하다. 값진 술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요지경과 같다. 언제부터인지 술값과 몸값이 정비례 관계로 전환됐다. 술값이 오르면 몸값도 잇달아 오른다. 그라프를 살펴보면 변곡점을 모르는 불마켓 양상으로 줄곧 오르기만 한다. 인간의 허영심과 과시욕이 사회 베블런효과를 극도로 팽창시켜 고급술을 마시는 사람은 유능하고 재부를 축적한 귀중한 신분을 지닌 존재로 부상했다.   혼사집에서 아무리 상다리 부러지게 산해진미 차려놓아도 고급술이 없으면 하객들은 시큰둥한 기색을 떠올리지만 값비싼 명주가 등장하면 벌써 흥분에 들떠 어깨부터 으쓱해진다. 먼 후날에 가서도 기억을 더듬으며 “그때 참 잘 차렸다” 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성의를 표시하려면 반드시 고급술을 대접해야 배배 탈렸던 일도 술술 풀리는 신통력을 가지지만 차원이 낮은 술은 결례가 되여 오히려 대사를 그르친다는 인식이 사회 보편성을 이룬다. 그 서슬에 가짜술 때문에 생긴 일화가 폭죽처럼 여기저기서 터져나와 사회 물의를 일으켰다.   어느 량반은 평소 몸속에 배일 정도로 가짜 모태주를 마셨던 까닭에 진짜 모태주를 맛보고 가짜라고 오판해서 항간의 웃음거리가 됐다. 고급은 거룩함을 자랑하여 맹목적인 숭배를 받고 일반은 소박하고 단백해서 의미지가 없어보여 거부한다. 서로 비기며 끓어번지는 소비심리가 인간의 진국을 배척한 탓으로 사특한 기운이 술잔을 추켜든 팔뚝에서 감때사납게 불끈거린다.   과연 공손히 서서 따르는 술잔에도 표리 부동한 그림자가 비껴든다면 괴리에 따른 우롱과 모멸감이 인간의 성실성을 맥없이 무너뜨리지 않겠는가. 술값이 부추켜준 몸값이 화려하게 포장해낸 상품처럼 인기를 누릴 때 값싼 술은 차가운 시선을 피하기 어렵다. 워낙 한토양, 한뿌리에서 태여난 쌀이건만 가격차이란 이슈가 딱지를 붙여 술가마에서 익혀져 뿜기는 냄새부터 은은한 품위를 느끼게 한다. 그런 고가의 술을 여유작작 마실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시선이 가닿는 곳의 차이는 천양지차이다.   혹자는 뛰여넘을 수 없는 장벽에 막혀 곤혹스러운 몸짓을 드러내겠지만 하필 참새가 기어이 황새걸음을 쫓아가야 한다는 리유는 없을 것이다. 그저 인간의 원초적 본새를 감추지 말고 스스로 우러나오는 성심성의를 표현할 줄 알고 또 너와 나의 꿈의 거리를 단축하는 즐거움 속에 인간의 몸값이 약속되여있음을 굳게 믿고 살뿐이다. /길림신문 2017-5-16
1145    [고향문단소식]- "늦깎이"로 "빗장" 열어 제쳐 시집 선보이다... 댓글:  조회:3479  추천:0  2017-05-18
한영준 시집 '빗장 없는 고생문' 펴내 (ZOGLO) 2017년5월16일  한영준이 그의 첫 시집인 《빗장 없는 고생문》을 펴냈다. 일전 연변대학 출판사에 의해 출간된 이 시집은 제1부 버들개지, 제2부 사랑의 매, 제3부 새 아리랑, 제4부 고향의 하루길, 제5부 나의 부림소, 제6부 인생의 덤불길, 제7부 한시 등 7개 부분으로 나누어 도합 132수의 시를 담아냈다.   출판사 편집으로 퇴임하고 뒤늦게 문단의 문을 두드린 한영준의 이번 첫 시집에 대해 리상각시인은 “이 시집은 그 자신의 모습 그대로 누구도 상관없이 평생의 명상과 령감을 고스란히 담았기에 옛스러운 맛이 있으면서도 새로운 발견이 돋보인다. 시로서의 격이 성숙되여 글이 맑고 깨끗하며 시의가 깊은데서 음미할 멋과 맛이 다분하다. 누구나 부딪치고 체험할수 있는 수수한 생활현상에 숨겨진 깊은 뜻을 감칠맛이 나게 그려준데서 독자들은 우아한 시편들을 즐겁게 감상할수 있는 행복한 기회를 가질것이다”라고 시집의 머리말에 적었다.   한영준은 책의 맺는 말에 “문학의 꿈을 이루려고 뼈물던 초심과 지향을 철이 한참 지난 오늘 이루었다. 회춘 맞은 기분이다”라고 적어넣었다.   /연변일보 신연희 기자  
114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우표에 오르다... 댓글:  조회:4222  추천:0  2017-05-13
멸종위기 12종 담겨..미국, 스위스, 유럽서 판매 유엔우편행정부(UNPA)는 11일(현지시간) 새로운 멸종위기종 우표를 공개했다. © News1 (서울=뉴스1) 김윤정 기자 = 멸종위기종의 아름다운 모습이 담긴 유엔 우표가 공개됐다. 가디언에 따르면, 유엔우편행정부(UNPA)는 11일(현지시간)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종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서 지정한 멸종위기종을 담은 우표를 출시했다. 우표에 들어가는 멸종위기종은 총 12종으로 미국, 스위스, 유럽연합(EU) 버전으로 제작됐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우표엔 큰머리 도마뱀붙이(Paroedura masobe), 진환도상어(Thresher shark), 클라리온엔젤피쉬(Clarion angelfish), 블래니 피시후크 선인장(Blaine’s fishhook cactus)이 담겼다. 스위스에서 판매되는 우표엔 피그미 카멜레온(Pygmy chameleons), 악마가오리(Devil ray), 바오밥나무(Grandidier’s baobab), 초록굴개구리(Green burrowing frog)가, 유럽에서 판매되는 우표는 코카시안염소(Caucasian tur), 앵무조개(Nautilus), 일렉트릭블루게코(Lygodactylus williamsi) 등으로 제작됐다. 이들은 모두 지난해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제17차 CITES 당사자회의(CoP17)를 통해 등재된 것들이다. 우표는12종으로 크기는 가로 39.2 mm, 세로 28.6 mm다. 한 장에 4가지 디자인 우표 16개로 구성된다. 가격은 장당 1.15달러(약 1300원)로 약 5만여장 정도 제작될 예정이다. 12종 모두 담긴 우표 세트는 18.8달러(약 2만1200원)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각 멸종위기종에 대한 설명까지 담겨있다. UNPA는 "지난 20여년간 멸종위기종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우표를 발행해 왔다"며 "이번 컬렉션에 새로운 종을 추가할 수 있게 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유엔우편행정부(UNPA)는 11일(현지시간) 새로운 멸종위기종 우표를 공개했다. © News1
1143    [쉼터] - 눈도 즐겁게... 입도 즐겁게... 댓글:  조회:3500  추천:0  2017-05-13
멕시코 천재 예술가의 작품 (ZOGLO) 2017년5월10일    [인민망 한국어판]= 멕시코시티 출신의 그래픽 디자이너 폴 푸엔테스(Paul Fuentes)는 각종 사물과 음식을 조합해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타코로 만든 지갑, 아보카도로 만든 기타 등은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많은 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폴 푸엔테스의 작품 배경은 ‘상상력’이다. 그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두 사물에 상상력을 더해 예술로 재탄생 시킨다. 지난주 폴 푸엔테스는 자신이 완성한 새로운 작품인 ‘인어 초밥’을 공개했다. 길게 늘어져 있는 인어 초밥은 핑크색 플라스틱과 금속 재료를 이용해 만든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생화로 만든 파인애플, USB 튀김, 아보카도 기타 등도 있다. 폴 푸엔테스는 초밥을 아주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그의 작품에 고양이가 올라간 초밥도 있기 때문이다. 폴 푸엔테스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아이들이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우면 좋겠고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면 좋겠다고 전했다. (번역: 은진호) 원문 출처: 환구망(環球網)         [인민망 한국어판 ] 중국에 졸업시즌이 다가왔다. 많은 대학교 졸업생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졸업사진 촬영을 통해 캠퍼스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만끽했다.   최근 산둥과기대학(山東科技大學) 졸업생들이 항공촬영한 ‘졸업사진’은 참신한 아이디어, 촬영 이후 센스 있는 보정 등으로 미묘한 운치를 더하고 있다. (번역: 은진호)
1142    [고향과 자연과 함께]-나무로부터 배우지 않고 되겠습니까?!.. 댓글:  조회:4921  추천:0  2017-05-13
박태동, 고목과 20년, 자연에서 인생 배우다 (ZOGLO) 2017년5월11일  작업중에 있는 박태동씨. 연길시 중심에서 부르하통하가 조용히 누워있는 강변도로를 따라 동으로 가다보면 “일송정”이라고 쓴 나무간판이 발목을 잡는다. 통나무를 세로로 잘라 그 단면을 부착해 만든 출입문부터가 기상이 남다르며 안으로 들어서면 그윽한 나무향이 페부에 와닿아 잠시나마 깊은 자연속으로 순간이동이라도 하지 않았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바로 고목수집가 박태동씨(44세)가 정성으로 꾸며놓은 공간, 이 곳에는 박태동씨가 그간 수집해온 고목이나 괴목들과 그의 나무조각작품들이 소장되여있으며 여기에는 나무를 향한 한 사나이의 소박한 사랑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공부보다는 산에서 뛰노는것이 더 즐거웠던 개구쟁이 시절부터 박태동씨는 산에 오르면 모양새가 특이한 솔방울이나 나무가지를 주어오는것을 좋아했다. 그랬던 그가 본격적으로 나무뿌리수집을 시작한것은 20년전이다. 그때 그는 늘 여가시간을 틈내 산에 들어가 여러 자연조화로 끊어져 넘어진 나무나 희귀한 모양새를 가진 나무뿌리들을 찾아다니군 했다. 죽은 나무뿌리를 구해오는 일이지만 그것은 자연 그대로의 예술품을 수집하는 일이며 그래서 박태동씨는 더욱더 대자연이 만들어준 천태만상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빼앗길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연변의 깊고 얕은 산은 그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소장하고있는 고목들 가운데서 박태동씨가 가장 아끼는것은 수령이 약 2000년 되는 호박목(琥珀木)이다. 호박목이란 홍송이 자연환경에서 늙거나 넘어진 후 홍송 송진의 유지성분에 의해 완전히 부식되지 않은 상태의 목재를 말하는데 일명 침향목(沉香木)이라고도 한다. 무게가 150킬로그램을 육박하는 이 호박목을 산에서부터 옮겨오기까지는 장장 사흘이 걸렸다. 박태동씨가 친구와 둘이서 이틀간 산에서 먹고 자며 바위덩이 구을리듯 안간힘으로 굴려서 산 아래까지 내려왔으며 산중에서 길까지 잃어 헤매기도 했다.   수령이 2000년이 되는 호박목. 장백산 원시림에서 발견한 3천년 되는 홍송도 있었다. 자연속에서는 넘어져 생명을 다한듯 보였지만 박태동씨가 손수 나무 겉의 썩은 부분을 손질해버리고 원상태만 남겨놓아도 그것은 영락없는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해 기둥처럼 공간의 한 가운데를 받치고 서있었다.   그는 또 어깨 너머로 배운 조각기술로 가끔 령감이 떠오를 때면 직접 나무조작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작업실에 전시된 작품만 해도 여러 점이 되며 요즘은 또 수집해온 나무로 풍수어로 유명한 아로아나(金龙鱼)를 조각하고 있다.   최근에는 나무뿌리를 수집하는 동호인들이 많이 늘어났고 고목이나 괴목의 관산용 가치가 높아감에 따라 시장도 전에 비해 훨씬 넓어진 편이다. 그러나 20년 전만 해도 이 분야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은 너나 할것 없이 그에게 “무모한 행동을 그만두라”고 권고했다. 그깟 죽은 나무들을 모아서 뭘 하겠느냐 하는것이다.   “그저 나무가 좋은걸 어쩝니까. 나무만 봐도 기분이 좋고 나무향을 맡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또 내가 직접 찾고 품을 들여 깎고 다듬어서 하나하나 모양을 갖춰가는 나무들을 보면 정말 성취감이 크지요.”   말을 하며 그는 기자를 한켠으로 이끌었다. 한메터 남짓한 느릅나무였는데 수령은 그닥 길어보이지 않으나 울퉁불퉁하게 자란 표면이 인상적이였다.   “사람으로 말하면 참 아픔이 많은 셈이지요. 이 울퉁불퉁한 마디 모두가 나무가 어떤 아픔에 맞서기 위해 자아보호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몇백년 지어 몇천년을 자라니 나무의 의지가 얼마나 굳셀가요? 그러니 우리가 나무로부터 배우지 않고 되겠습니까?” 박태동씨의 의미심장한 말이다. 어쩌면 그의 “화려한” 인생경력도 나무와 닮아있지 않는가. 살면서 마주친 갖가지 간난신고에 그는 단 한번도 굴해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16살에 연길알루니늄공장에 취직해 로동자로 일했으며 6년만에 공장이 부도나자 생활을 위해 산약재수구며 잣농사, 미역장사까지 마르고 궂은 일을 가리지 않고 했다. 역경은 많았으나 워낙에 성정이 굳고 호방한 박태동씨는 언제나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하늘을 향해 굳센 가지를 펼치는 나무처럼 그 역시 옹이마다 아픔을 감내하면서 오늘까지 걸어왔다. 그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그래도 나무와 함께 했던 시간이 그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여주었다.   현재 박태동씨는 작업실 한켠에 나무테이블 몇개를 놓아 동호인들과 함께 차 한잔 기울일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앞으로도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나무향 가득한 공간에서 서로의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 받을수 있기를, 그들과 함께 나무사랑을 교류하고 싶은것이 가장 큰 바람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박진화 기자 / 오준길 ///연변일보
1141    [록색환경주의者]- 울고 있는 룡정 말발굽산, 언제면 웃으랴... 댓글:  조회:4095  추천:0  2017-05-12
울고 있는 룡정의 말발굽산 2017년5월10일 작성자: 김삼철 산이 운다고 하면 누구하나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필경은 울고 있으니깐. 룡정시 옛 농학원 서쪽에 있는 말발굽산은 지금 울고 있다. 그것도 부시우고 뜯기여 만신창이 된 몸뚱이를 겨우 지탱하면서 매우 서럽게 울고 있다.   앞날의 자기의 존재마저 기약할 수 없는 불운한 신세를 한탄하면서 처량하게 울고 있다. 그런데 이 울고 있는 말발굽산을 지금 인정하는 사람도 있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정말 말발굽산이 울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사람마다의 시각차이에서 보여진다.   말발굽산을 룡정의 명물 나아가 나라의 문화재로 생각한다면 말발굽산의 울음소리는 들릴 수 있고 명물로 보지 않고 일반적인 돌산으로 본다면 말발굽산의 울음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감촉하지 못할 것이다.   말발굽산은 우리 나라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된 이후 그것도 우리 나라 유람업이 전국에 성행되여 파문을 일으킬 때 지방 령도의 무지한 비준밑에 개인들의 채석장으로 전략되여 볼품없이 파괴되고 방치돼 있다. 이로 하여 사회 여러 면의 질타와 군중들의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도 말발굽산은 원형태 복원은커녕 관계하는 사람, 관리하는 사람조차 없다. 이런 위법행위는 응당 유관 부문의 감시를 받아야 할 뿐더러 법적 책임을 추궁하고 법의 징벌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아마도 7년 전의 일일 것이다. 나는 말발굽산 마구잡이 채석을 막아보려고 룡정시국토자원국을 찾아갔는데 유관 인원들이 아주 열정적으로 접대해주었다. 그들도 나의 의견을 지지해 나섰는데 큼직한 승용차까지 내여 함께 말발굽산을 답사하였다. 정상까지 올라가 보니 말발굽산의 파괴정도는 심각하였다. 동쪽켠이 제일 엄중했고 정상 부분도 여러 곳이 심히 파괴되여있었다. 아니, 원 말발굽 형태를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룡정시국토자원관리국의 분들이 “말발굽산은 룡정과수농장 관할구역”이라고 하여 우리 일행은 룡정곰락원 뒤에 새로 지은 룡정과수농장 판공청사를 찾아갔다. 유관 지도자가 없고 모두들 “모른다”고 하여 그저 판공실 책임자에게 말발굽산에 대한 불법채석을 귀띔하고 귀로에 올랐다. 그후로 지금까지 그 어디에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돌자원이 많은 룡정시 구역에서 하필이면 말발굽산을 채석장으로 선택할 때에 신청하는 사람이나 비준하는 사람이나 모두 명물에 대한 인식이 너무도 박약하고 법적 개념이 취약했다고 본다.   우리 나라에 하나 밖에 없는 말발굽산은 군용지도에도 명물로 등록되여 룡정을 지켜주는 하늘이 준 자연의 선물이다. 아득히 먼 그 옛날 부자집 딸과 머슴군 총각이 부자놈의 살인흉계를 피해 천리백마를 타고 도망할 때에 생겼다는 전설의 말발굽산을 이제 더는 방치하지 말고 하루속히 유람지로 개발하여야 한다고 본다. 불법채석의 책임을 추궁하고 징벌할 사람은 해당 법에 따라 처리하고 원상태를 복원하여 룡정시의 유람지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 명물이 없는 지방에서도 거액의 자금을 투자하여 명물을 만들고 문화재를 찾느라 애쓰는데 일부 지방의 지도자들은 자기 신변에 있는 훌륭한 명물도 보아내지 못하고 관리할 줄 모르고 리용할 줄 모른다. 이런 무지의 관리들은 자리를 내야 한다고 본다. 전국적으로 유람업을 대폭 흥기시키는 현실 속에서 "우리 지방은 명물이 없고 문화재도 없고 명산이 없어 유람업을 발전시키기 곤난하다"고 하는 지도자들은 조건부를 버리고 현실에 립각하여 지방 우세를 리용하고 자원을 발굴하여 볼거리와 먹거리를 만들어 유람객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우리 연변은 고속철, 하늘길, 바다길까지 통하는 이 우세를 리용하여 명산, 명물, 혁명전적지 등 문화재에 민족특색이 있는 볼거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볼거리가 많으면 유람객들이 오기 마련이다. 유람업이 지방경제를 춰세우고 나라 경제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은 지금 소학교 코흘리개 아이들까지 다 아는 현실이다.   지금 룡정시에는 ‘해란강의 전설’, ‘형제산의 전설’, ‘말발굽산의 전설’, ‘대포산의 전설’, ‘선바위 전설’, ‘륙도하의 전설’, ‘달라재 전설’, ‘장재촌 백년가옥’, ‘송이버섯의 최대 산지 천불지산’, ‘주덕해의 고향 승지촌’, ‘15만원 탈취유적지’, ‘ 5.30 폭동 지휘부 유적지’, ‘3.13반일의사릉’ 등 많고 많은 명물, 문화재들이 있다.   룡정에서 삼합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오랑캐령은 우리 백의동포들이 조선에서 살길을 찾아 쪽박을 차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오는 유일한 길목으로서 추위에 떨며 흘린 눈물 너무 많아 륙도하 발원지로 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이런 명물, 문화재들을 ‘일본령사관 유적지’, ‘대성중학’, ‘ 명동중학’, ‘한락연공원’, ‘룡정우물’, ‘윤동주생가’, ‘일송정’ 그리고 민속촌과 눈물의 오랑캐령을 유기적으로 잘 접목하여 개발한다면 력사적 의의가 깊은 볼거리가 되고 거기에 대외홍보를 잘하기만 하면 많은 유람객들을 유치할 수 있다.   그러자면 유람지 개발에 대한 투자도 해야 하거니와 문화예술부문과의 합작도 잘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명실상부한 유람지는 시간문제라고 본다. 각급 지도자들은 눈앞의 리익만 보지 말고 멀리 내다보면서 지방마다의 특색 있는 유람지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본다. 이름만 있고 내용이 없는 유람지는 생명력을 잃고 만다. 유구한 력사를 빛내고 있는 룡정시에서 주위에 있는 명산, 명물과 문화재를 잘 복원, 흥기시킨다면 유람업으로 벌어들이는 경제수입이 만만치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 울고 있는 말발굽산이 래일 웃고 있는 말발굽산으로 되기를 기대해 본다. /길림신문 2017-5-10
1140    [그것이 알고싶다] - 젓가락의 유래?... 댓글:  조회:5160  추천:0  2017-05-07
젓가락의 유래, 왜 '筷子'일까?       최초의 숟가락과 젓가락은 무엇이었을까 ‘은 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난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물려받을 유산이 많은 부잣집에서 태어났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왜 포크도 나이프도 아닌 숟가락일까요? 동서고금,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사용하는 물건이지만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 빈부귀천을 가르는 경우가 많지요. 나무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사람과 은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사람의 형편이 어떻게 다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빈부귀천이 따로 없던 시절, 최초의 숟가락은 조개껍질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숟가락을 쓰기 시작한 중세에는 나무를 깎아 만들었는데 그중엔 공들여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어서 훗날 인기 있는 기념품이 된 것도 있습니다. 바로 영국 웨일스에서 나오는 ‘사랑의 숟가락’입니다. 웨일스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면 나무 숟가락에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서 사랑의 증표로 주었는데 비록 은 숟가락은 아니라도 세상에서 하나뿐인 특별한 숟가락이었습니다. 특별한 숟가락은 우리나라의 각 가정에도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숟가락이지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숟가락과 젓가락이 다른 식구들 것과 섞이지 않도록 특별히 따로 챙겨두었습니다. 또 아버지가 숟가락을 들어야 비로소 식구들의 식사가 시작됐지요. 이처럼 아버지의 숟가락은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상징했습니다. 그 숟가락에 밥이 담기고 국물이 담겨 입으로 들어가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가족을 꾸릴 힘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것도 담지는 못하지만 집을 수 있는 젓가락이 등장한 것은 5천 년 전 중국에서였습니다. 그때는 요리를 익힐 때 필요한 연료가 대단히 귀해서 음식을 빨리 익히려고 식재료를 잘게 잘라서 요리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누군가 불을 내는 연료로 사용했던 나무의 잔가지 한두 개를 이용하면 작은 음식 조각을 쉽게 집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지요. 이것이 젓가락의 시작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비록 무엇으로 어떻게 만드느냐는 달라도 예외없이 평등한 일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손으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해 밥을 먹는 일 같습니다. 만약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면 병들거나 죽음을 맞이했다는 뜻이겠지요. [Daum백과] 최초의 숟가락과 젓가락은 무엇이었을까 – 문득, 묻다 : 첫 번째 이야기, 유선경, 지식너머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젓가락은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우리말 ‘젓가락’은 ‘箸’와 ‘가락’(가늘고 긴 모양을 이르는 말)을 합한 것이다. 숟가락도 유사한 조합이다. 젓가락을 사용하게 된 것은 중국에서부터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젓가락을 筷子라 하는데, 중국인에게 젓가락은 세끼 식사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왜 음식을 먹을 때 젓가락을 사용하게 됐을까?또 ‘筷子’라는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중국 고대에는 지금 한국과 마찬가지로 젓가락을 ‘箸’라고 불렀다. ‘사기’의 ‘宋微子世家’에는 “紂王이 象牙로 젓가락을 만드니 箕子가 ‘주왕이 상아로 젓가락을 만드는 것을 보니 필경 옥으로 잔을 만들겠구나!’라고 탄식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象箸란 상아로 만든 젓가락을 말하는데 기자가 주왕의 사치가 극에 달할 것임을 예측한 것이다. 약 3천 년 전 은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젓가락이 널리 사용됐고 상아와 같이 특수한 재질로 만든 젓가락도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중국 전설에 따르면 물을 다스리는데 큰 공을 세운 大禹는 젓가락의 달인이었다. 대우는 물을 다스리기 위해 애쓰던 시기에는 자신의 집 앞을 세 번이나 지나쳤음에도 단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다.공사 진행을 지체할까 염려해 들판에서 식사를 하고 음식이 익으면 바로 먹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음식이 탕 속에서 펄펄 끓고 있을 때는 손으로 건져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뭇가지를 잘라 고기나 야채를 건져먹었는데 이것이 바로 젓가락의 시초다. 箸가 등장하는 또 다른 고대문헌으로는 ‘禮記’가 있다. ‘禮記 曲禮上’에 “기장밥을 먹을 때는 젓가락을 사용하지 말라(飯黍毋以箸)”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에는 밥을 먹을 때 손으로 먹는 것이 바른 예절이었고, 젓가락으로 밥을 헤집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또 같은 편에는 “국에 나물이 있는 것은 젓가락을 사용하되 나물이 없으면 사용하지 않는다(羹之有菜者用梜,其無菜者不用梜)”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梜은 나무로 만들어 음식물을 사이에 끼우는 젓가락을 말한다. 지금도 일부 중국인들은 젓가락을 가리킬 때 협제(梜提)란 단어를 사용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중국은 先秦시기에 이미 젓가락을 널리 사용했지만 용도에 제한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밥을 먹을 때는 주로 손으로 먹고, 젓가락은 뜨거운 국에서 건더기를 건질 때만 썼다.   중국 역사상 젓가락을 보편적으로 쓰기 시작한 시기는 漢나라 때로 여겨진다. 또, 젓가락을 가리키는 단어가 箸에서 筷子로 변한 것은 明나라 이후의 일이다. 명나라 때 陸容이 지은 ‘菽園雜記’에는“민간에도 避諱가 존재하는데 특히 吳中 지방이 심하다. 가령 ‘住(머무른다는 뜻)’나 ‘飜(뒤집힌다는 뜻)’을 휘해 ‘箸’도 ‘快兒’라 한다”고 적혀 있다. 오중 지방은 수운이 발달한 곳이라 배를 타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에게 가장 불길한 단어는 배가 뒤집히거나 혹은 멈춰서는 것이라 이와 비슷한 발음을 지닌 단어들을 꺼렸다. 그런데 멈출 住와 젓가락을 뜻하는 箸의 중국어 발음이 ‘zhù’로 같았다.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은 젓가락을 지칭할 때 ‘箸’라 하지 않고 ‘快兒’라고 불렀다. 빨리 움직인다는 의미인데 나중에 젓가락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대나무 竹을 덧붙여 ‘筷’로 만들었다. ‘筷子’라는 단어는 이렇게 생겨났다. 한편, 쾌자가 외형이 곧고 굽은 곳이 없어 선인들은 젓가락에 여러 가지 美德을 덧붙였다. 예로, 五代 王仁裕가 편찬한 ‘開元天寶遺事’에 따르면 당 현종 시대에 宋璟이란 재상이 있었는데 지조가 굳고 법을 잘 지켰다고 한다. 이에 현종은 자신이 사용하던 금 젓가락을 하사해 그의 강직하고 굳센 지조를 표창했다.   한국에서 쇠젓가락이 발달한 이유   원래 한국인들도 나무로 된 젓가락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쉽게 변형되고 오래 쓸 수가 없자 한국인들은 우리들만의 아주 독특한 쇠젓가락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금속을 다루는 문화가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쇠를 수저에 이용하는 방법이 보편화된 것이죠. 그런데 왜 우리 민족은 금속으로 만든 젓가락을 선호하였을까요? 신라시대 때 김씨가 정권을 잡으면서 금속을 귀하게 여기는 풍속에서 시작하였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우리네 선조들은 금속젓가락의 내구성과 음식을 잡았을 때 잘 떨어지지 않는 장점을 알았기에 지금까지 선호되어 온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한중일 삼국은 식생활이 달라 젓가락의 크기와 모양이 나라마다 다른데, 중국 사람들은 온 식구가 둘러앉아 식사를 해 음식과의 거리가 멀고 반찬에 기름기가 많고 집기가 어렵기 때문에 젓가락이 길고 굵죠. 반면에 일본 사람들은 밥 그릇과 반찬, 국 그릇을 모두 자기 앞에 놓인 상에서 먹기 때문에 젓가락도 짧습니다. 또 가시가 있는 생선이나 껍데기가 있는 해산물, 우동과 같은 면류를 많이 먹기 때문에 젓가락의 끝 부분이 뾰족합니다. 우리의 젓가락은 지리적 위치 만큼이나 중간입니다. 25㎝ 안팎 길이에 끝은 뾰족하지도 뭉툭하지도 않고 차라리 납작한데 김치와 같은 채소를 집게 편하게 앞쪽이 납작해진 것으로 음식문화의 차이입니다.  
1139    [그것이 알고싶다] - 우산의 유래?... 댓글:  조회:5328  추천:0  2017-05-07
우산을 발명한 사람은 누구일까 비가 내리면 우산을 씁니다. 정확히는 머리 위에 받쳐 비를 가리지요. 그래서 우산이라는 한자도 비 우(雨)에 우산 산(傘)을 쓰는데요. 우산을 영어로는 ‘umbrella(엄브렐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는 우산보다 양산에 가깝습니다. 라틴어로 그늘을 뜻하는 ‘옴브라(Ombra)’에서 유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서양의 우산, 엄브렐라는 비가 아니라 햇볕을 가리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양산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등장한 곳이 B.C. 9~7세기 중동을 다스렸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였습니다. 뜨거운 중동의 태양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 위에 옴브라, 그늘을 드리웠던 거지요. 그러나 아시리아를 비롯해 이집트, 로마, 그리스 시대를 거쳐 르네상스 초기까지 옴브라는 귀족 이상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단순히 햇볕을 가리는 그늘을 넘어 신이 보호해주는 그늘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도 미사 시간에 옴브라를 사용했는데 햇볕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이 보호해주는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중동의 옴브라가 유럽에 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양산이 우산이 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서 18세기 중엽이 돼서야 비를 피하는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계기는 이렇습니다. 비 오는 어느 날, 영국의 멋쟁이 신사 조나스 한웨이가 양산을 쓰고 거리에 나타났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남성들이 열광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남성도 양산을 쓸 수 있구나, 둘째, 양산으로 햇볕뿐 아니라 비도 피할 수 있구나, 였습니다. 이렇게나 간단한 발상의 전환을 하는 데 무려 2천4백 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리고 1830년, 양산이 아닌 최초의 우산 전문점이 영국 런던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그곳에서 파는 우산은 우리가 옛날에 볼 수 있었던 종이우산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나무로 우산살을 만들고, 기름을 입힌 캔버스를 덮어 씌웠지요. 1852년에 철제 우산살이 등장한 데 이어 1920년대에 접이식 우산이 개발되면서 누구나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게 됐는데요. 단순한 우산의 역사인 것 같지만 여기서도 일정한 방향을 갖고 있는 문명의 발전이 읽힙니다. 부와 권력을 소유한 소수만 누릴 수 있었던 것에서 다중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더 튼튼해지고 더 작아지고 더 편리하게, 라는 방향 말이지요. 이렇듯 오랜 세월에 걸쳐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등장한 서양의 우산과 달리 동양에서 우산은 처음부터 우산이었습니다. 누가 우산을 발명했는지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춘추시대 노나라의 발명가인 노반(魯班)입니다. 원래 이름은 ‘공수 반’이지만 ‘노나라의 반’이라는 뜻으로 노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중국에서는 각지에 그를 모신 사당이 있을 만큼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톱을 비롯한 다수의 건축 도구와 성(城)을 공격하는 장비 등을 개발해서 중국 토목산업의 시조로 불리는데요. 노반이 우산을 발명한 것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노반이 부인과 나들이를 하던 중 비가 내렸습니다. 다행히 근처에 정자가 있어서 비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부인이 무심히 “정자를 많이 세우면 행인들이 비를 피할 수 있어서 좋겠다”고 했고, 이 말이 노반의 영감을 자극했습니다. 노반은 “정자를 들고 나가면 된다”는 말을 남긴 채 집으로 돌아가 작업에 몰두했는데, 며칠 만에 들고 나타난 것이 바로 우산이었습니다. 2천 년 하고도 몇백 년이 넘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다 보니 다른 버전도 전해집니다. 노반의 부인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밖에서 궂은 작업을 하는 남편을 위해 이동형 정자처럼 생긴 우산을 만들어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버전이든 노반 부부는 금실이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서양에서는 신이 보호해주는 천장이었고, 동양에서는 들고 다니는 정자였던 우산. 어떤 우산이 마음에 드시나요? [Daum백과] 우산을 발명한 사람은 누구일까 – 문득, 묻다 : 두 번째 이야기, 유선경, 지식너머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138    [그것이 알고싶다] - 거울의 유래?... 댓글:  조회:4270  추천:0  2017-05-07
거울의 역사(유래)   거울은 물체의 모양을 비추어 보는 도구이다. 일반적으로 투명한 유리 뒤쪽에 아말감을 바르고 그 위에 습기를 막는 연단을 칠해서 만든다. 거울은 오랜 동안 가정용품과 장식용품으로 사용되었는데, 옛날에는 은, 청동, 철의 표면에 매끈하게 광을 내어 사용하다가, 12-13세기 무렵 유리로 만든 거울이 최초로 등장하여 16-17세기에 전유럽에 퍼졌다. 2개의 거울을 90도 각도로 붙이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거울(鏡)의 어원은 그림자 영에다 볼 견「影・見」 에서 왔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자견「姿見(모습을 본다)」 라는 추측도 있긴하지만, 본 설은 언어학적 논증이 되어있지 못합니다. ● 거울의 역사 ● 거울의 기원 거울의 기원은 인류와 같을만큼 낡고, 최고의 그것은 물거울(수면)에 거슬러 올라갑니다. 동물의 지능을 측정하기 위해서 거울이 이용되도록(듯이)(거울에 비친 자신을 자신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경영인지」라고 부릅니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자기인 것을 아는 것은, 자기 인식의 제일보이라고 되고 있습니다. 거울에 의해서, 처음으로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수단을 얻었습니다. 침팬지 등에 있어서는,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자기 자신으로서 인식해, 털고르기 때에 유용하게 쓴다고 합니다. 거울에 영상이 「비친다」(실제로는 반사하고 있지만)이라고 하는 현상은, 고래 지극히 신비적인 것으로서 파악되었습니다.그 때문에, 단순한 화장 용구로서보다 먼저 제사의 도구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거울의 면이, 단지 광선을 반사하는 평면이 아니고, 세계의 「이 쪽편」과「저 쪽편」을 나누는 렌즈와 같은 것이라고 파악할 수 있어 거울의 저 편으로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라고 하는 관념은 통문화적으로 존재해,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물거울과 금속거울 밖에 없었던 시대・고대의 철학 등에 있어서는, 경상은 어슴푸레한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졌습니다.한편 근대가 되어 유리거울이 발달하면, 슈피겔(독일어)이나 미러(영어)라고 하는 이름을 씌우는 신문이 등장하게 됩니다.스이것은 「거울과 같이 분명히 세태를 비춘다」베구 붙일 수 있었던 명칭입니다. 거울은 귀감이라고도 써, 이 때는 인간으로서의 모범・규범을 의미합니다. 표본과 차분히 대조하는 것을 귀감 본다(한아 본다)라고 하는 것도, 여기로부터 와있습니다. 또 일본어라도 「거울」이라고 망원경, 확대경 등은 같은 거울이라고 하는 글자를 이용하고 있어 영어의 글래스도 또 유리, 렌즈 뿐만이 아니라 거울의 의미도 가집니다. ● 거울의 기술적 변천 옛날에는 금속판을 닦은 금속거울로, 많게는 청동등을 이용한 청동제의 거울로, 후에 주석 도금을 실시해지게 되었습니다(표면거울). 현대의 일반적인 거울은 유리의 한 면에 알루미늄이나 은등의 금속의 도금을 베풀어, 한층 더 산화 방지를 위해 동도금이나 유기 도료등을 거듭한 것입니다(이면거울). 최초의 거울은, 웅덩이에 스스로의 자형등을 비추는 물거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돌이나 금속을 닦아 거울로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 유적 발굴등에서 알고 있습니다. 현존 하는 금속거울로 가장 낡은 것은, 이집트의 제6 왕조(기원 전 2800년)의 것입니다. 이래, 동・주석 및 그러한 합금을 닦은 것, 및 수은이 거울로서 이용되었습니다. 1317년에 베니스의 유리공이, 수은 어말검을 유리의 이면에 부착시키고 거울을 만드는 방법을 발명하고 나서, 유리를 이용한 반사가 뛰어난 거울이 생산되게 되었습니다.이것은 유리 위로 해 원이 없는 주석박을 두고, 게다가보다 수은을 따라 방치해 순서들에 어말검으로서 밀착시켜, 약 1개월 후에 여분의 수은을 흘려 떨어뜨리고 거울로서 완성한다고 하는 수고가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1835년에 독일의 폰・리빗히가 현재의 제경기술의 근원이 되는, 질산은 용액을 이용해 유리면에 은을 침착시키는 방법(시로미 반응)을 개발해, 이래제 거울 기술은 품질, 생산 방법 모두 개량계속 되어 왔습니다. 오늘로는, 거울은 고도로 기계화 된 방법으로 대량생산 되어 광택면보호를 위한 금속 도금이나 도료의 궁리에 의해 비약적으로 내구성이 향상했습니다만, 유리의 이면을 은도금 한 거울인 점은 19 세기 이래 바뀌지 않습니다.이것은 은이라고 하는 금속은 가시광선의 반사율(전기 전도율 및 열전도율에 유래한다)이 금속중에서 최대이기 때문에입니다. 현재는 유리를 사용하는 거울 외에, 폴리에스텔등의 필름의 표면에 금속을 증착 해, 가반성이나 안전성을 높인 것도 있습니다.   =================================   한국에서 거울이란 말은 '거꾸로'라는 뜻을 나타내는 '거구루'에 어원을 두고 있다. 먼 옛날에는 흔히 냇가나 개울의 물을 거울로 삼았는데 얼굴을 물에 비춰 보면 좌우가 바뀌어(거꾸로)보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무언가에 비춰보는 것을 '거구루'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거울'로 변하여..  오늘날 '얼굴 같은 것을 비춰 보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게되었다.   영어의 'mirror'는... '보다'라는 뜻의 라틴어 'mirare'에서 유래되었고, '신기하게 생각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mirari'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역사상 최초의 거울은 손거울이었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은 놋쇠를 반짝일 정도로 가공하여 거울로 사용했고 , 기원전 300년경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는 거울의 광학적 원리들을 알아냈다. 이 원리들은 기원전 3세기 말 아르키메데스가 자신의 고향인 시칠리아를 공격하는 로마 함대에 대항하는 데 적용했다고 한다. 그는 광택나게 가공한 금속제 거울로 태양 광선을 집중시켜 로마 배들을 불태우려고 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거울은 로마 시대 때 보편화되었고 중세에 유럽 전역으로 널리 퍼졌다.  이 때는 광을 낸 청동거울을 쓰기도 했지만 보통은 은으로 만들었으며 단순한 볼록 원판이었다.   이러한 거울이 오늘날의 거울로 탈바꿈한 사람이 이탈리아의 달가로우 형제다. 1508년, 유리 뒤에 은을 칠하여 뒤가 비치지 않게 한 것이 거울의 원리인데 이러한 거울을 만드는 비법을 이탈리아에서는 비밀로 하고 있었을 정도로 소중히 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처들어와 당시 이탈리아의 거울 만드는 기술자를 강제로 훔쳤고 그래서 프랑스에서도 거울을 만들게 되어 결국 전세계로 뻗어나가 기술의 발달과 함께 지금의 거울이 탄생되었다. 최초의 거울의 유래를 찾자면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가는데.. 당시엔 유리가 없어 물이나 청동에 얼굴을 비쳐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거울은 부족장의 권위를 상징할 정도로 귀하고 신비스러운 물건이었다.     
1137    [그것이 알고싶다] - 비누의 유래?... 댓글:  조회:6657  추천:0  2017-05-07
비누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최소한 2,300년 전부터이다. BC 600년경의 기록에는 페니키아에서 산양의 우지와 나무재로 만들었다고 나와 있다. 로마 제국 당시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로마인이 비누의 이용법·제조법을 고대 지중해 부족들이나 켈트족에게서 배웠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켈트족은 비누를 'saipo'라 명하여 현재의 'soap'(비누)이란 명칭이 유래하게 되었다. 초기의 비누는 주로 의약품으로 사용되었고, 8세기경에 와서 세정제로서의 용도가 강조되었다. 영국에서의 비누생산은 12세기경부터 시작되었으나 제조업자에게는 높은 세금이 부과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높은 세금제가 폐지되어 비누가 보편화되었고 비누 소비량은 문화의 척도로 여겨졌다. 초기의 비누제조는 재와 동물성 지방을 사용했다. 탄산칼륨을 함유하고 있는 식물성 재를 물에 풀고 지방을 첨가하여 가열하면 지방산이 알칼리 금속의 탄산염과 반응하여 비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방법은 중세말까지 이용되다가 1790년경 르블랑이 식염으로부터 소다 제조하는 법을 발견하고, 1823년 슈브뢸의 연구로 지방이 지방산의 알칼리염(비누)과 글리세린을 형성하는 반응(비누화)이 발견되면서 중요한 전환을 맞이했다(→ 르블랑법). 또한 19세기말에는 증기가열에 의한 비누생산법이 도입되어, 비누공업은 또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미셸 외젠 슈브뢸(Michel-Eugène Chevreul) 프랑스의 화학자 합성세제는 제1차 세계대전중 독일에서 처음으로 생산되었다. 이것은 프로필알코올 또는 부틸알코올과 나프탈렌과의 짝지음 반응을 한 후에 술폰화 반응을 거쳐 만들어졌으며, 네칼(Nekal)이라는 상품명으로 통용되었다. 세제는 비누와는 달리 금속염과 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1136    [그것이 알고싶다] - 치솔의 유래?... 댓글:  조회:5104  추천:0  2017-05-06
중국인들이 치아의 구세주를 도입하다. 현대의 강모 칫솔은 일반적으로 15세기 중국에서 유래했다고 추정된다. 1498년 집필된 중국의 백과사전은 시베리아 야생 멧돼지의 목 부분에서 채취한 짧고 거친 강모를 동물의 뼈로 만든 손잡이에 심은 기구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이를 닦는 데 사용된 것이었다. 중국 상인들은 이 브러시를 유럽에 가져갔으며, 멧돼지의 털이 예민한 유럽인의 잇몸에는 너무 거칠다고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누렸다. 좀더 부드러운 말의 털이 대안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멧돼지 털이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남아 있었다. 칫솔이 치위생을 위한 인류 최초의 시도는 아니었다. 기원전 3000년경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치아 막대기'들이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출토되었다. 이들은 얇은 나뭇가지나 섬유질이 많은 관목의 목재로 만들어졌으며 치아 사이를 닦고 입 냄새를 없애기 위해 사용되었다. 구강 위생과 입 냄새 제거를 위해 향이 나는 관목으로 만들어진 '씹는 막대기'는 16세기에 중국인들이 사용했다. 최초로 대량 생산된 칫솔은 1780년에 영국의 발명가 윌리엄 애디스에 의해 만들어지고 상품화되었다. 이것은 멧돼지 털과 돼지의 광모를 소의 허벅지 뼈 끝에 부착한 것이었다. 1840년대 중반에는 보다 기하학적인 디자인이 등장하였으며, 이때 처음으로 칫솔모가 일렬로 정렬되었다. 1938년에 뒤퐁 드 느무르가 나일론을 발명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천연모가 사용되었다. 세계 최초의 전동 칫솔은 1939년에 등장했다. 칫솔은 현재까지도 사용되는 가장 오래된 발명품 중 하나로, 없어서는 안될 물건의 리스트에서 자동차나 퍼스널 컴퓨터 등의 더 멋진 발명품들보다 상위를 차지한다. =============================   ​   통상적으로 칫솔은 15세기 중국에서 유래 했다고 추정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중국인이 아니고 북만주 일원에 살던 발해인들이 동물뼈에 털을 꽃아 칫솔로 사용한것...   ​   1498년 집필된 중국의 백과사전은 시베리아 야생 멧돼지의 목 부분에서 채취한 짧고 거친 강모를 동물의 뼈로 만든 손잡이에 심은 기구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이를 닦는 데 사용된 것이었다.       그후 멧돼지털로 만든 칫솔이 유럽으로 들어갔고,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최초로 대량 생산된 칫솔은 1780년에 영국의 발명가 윌리엄 애디스에 의해 만들어지고 상품화된 것으로 멧돼지 털과 돼지의 광모를 소의 허벅지 뼈 끝에 부착한 것이었다.       1840년부터는 현제의 칫솔형태로 개선을 하면서 1938년 뒤퐁 드 느무르가 나일론을 발명하면서 인조모로 칫솔재질이 변화되었고 1939년 전동칫솔이 등장하였다.   어째던 처음에는 멧돼지 털로 만든 칫솔이 칫솔의 유래이다.   오복중 하나인 치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칫솔사용을 적절히 하여야한다.     ​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칫솔,치아관리를 어떻게 하였을까?​   ​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 12년 2월 28일 연산군은 봉상사(奉常寺)의 종에게 "양치질하는 나무를 만들어 바치라"고 명한 기록이 있다.   ​   나무로 칫솔질을 한다?   예전에는 부드러운 버드나무를 깍아서 양치질을 한것으로 보인다.   버드나무는 재질이 부드럽고 소독성분이 있어 예전부터 버드나무를 깍아 칫솔대용으로 사용한것 같다.   ​   서민들은 소금으로 잇빨을 헹구어 냈다는 기록이 잇다.​   ​   지금도 인도에는 서민들이 "치약나무​"로 잇빨을 딱아내고있다.   부드러운 나무를 입안에 넣어 질겅질겅 씹어면 거품이 나고 잇빨사이의 음식물이 빠져 나오는데 "치약나무"를 판매하는곳도 있다.       인도 서민들이 사용하는 치약나무   ==================================   종종 보기에 나오던 것이 바로 "양치"!   그저 그때까지 '양'은 무슨 단어인지 몰랐지만 '치'가 우리가 '치아'라고 할 때 그 "치"인줄 알고 살았었는데요.   그게 아니라 '양치질'이라는 단어는 양지>양치로 바뀌었다고 하더라구요.   ● 그럼 "양지"가 무엇이기에?   버드나무 가지를 잘 잘라서 이를 쑤시는 것을 버드나무 가지를 말하는 양지(楊枝)에서 따서 "양지질"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이 후에 "양지질"은 시대를 거쳐서 "양치질"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는데요.   혹시 어르신들이 "이쑤시개"를 '요지'라고 하는 거 들어보셨나요?   그것도 같은 어원으로 일본에서는 "양지"를 "요지"라고 읽는다고 해요.   ● 양치질은 그럼 언제부터 하게 되었을까요?   직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칫솔이 더 먼저 만들어졌을 것 같지만 치약이 칫솔보다 먼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 역사는 꽤 오래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느데요.   바로 기원전 5000년경에 고대 이집트에서 황소의 발굽과 몰약, 구워서 부순 달걀 껍질, 화산재 등을 조합해서 치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치약을 손으로 문질러서 사용했구요.   그러던 것이 요즘 우리가 흔히 치약이라고 부르는 암모니아, 글리세린, 탄산염 등의 성분이 들어간 치약으로 발전한 것은   18세기 이후이고 지금처럼 튜브 형태로 나온 것은 1892년 영국에서 미국의 워싱턴 셰필드 박사에 의해서라고 합니다.   ● 그럼 칫솔은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요?     기원전 3500년경 바빌로니아에서 이쑤시개라고 말하기에는 좀 큰 나뭇가지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러던 것이 현대의 칫솔처럼 막대기에 털을 박아넣은 형태가 된 것은 1498년 중국의 황제가 사용한 칫솔이었다고 하는데요.   동물 뼈에 돼지털을 박아서 만들었지만 가격은 만만치 않아서 황제를 포함한 소수의 귀족 외에는 여전히 이쑤시개를 사용했다고 해요.   그러다가 1789년에야 영국의 윌리엄 애디스가 야생 곰이나 말의 털을 이용한 칫솔을 만들어냈고   그의 후손이 19세기부터 대량생산하기 시작하면서 광범위하게 퍼졌다고 합니다.     [출처] 치솔의 유래|작성자 와송명인  
1135    [그것이 알고싶다]-지퍼,청바지,면도기,통조림,맥주의 유래?... 댓글:  조회:3898  추천:0  2017-05-06
★지퍼의 유래  미국 시카고에 사는 저드슨이라는 젊은이는 남달리 뚱뚱해 외출할 때마다 허리를 숙여 군화끈을 묶는다는 것이 힘든 나머지 간단하게 군화끈을 묶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지금의 지퍼를 발명하게 되었다.  오늘날 각종 단추류제품 중에서 최대의 찬사를 받고 있는「지퍼」는 바로 이 군화에서 비롯되었다.  1893년 미국 저드슨은 아침마다 수 많은 끈을 매야 하는 군화의 불편함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연구에 몰두한 끝에 지퍼를 발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1893년 지퍼를 시카고 박람회에 출품하였지만 그의 발명품은 기대 이하로 흥미를 끌지 못하였다. 처음에 저드슨이 개발한 지퍼에는 소형 쇠사슬에 끝이 구부러진 쇠돌기를 집어넣은 형태여서 옷에 사용하기엔 모양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1913년 굿리치 회사의 선드백에 의해서 지퍼가 군복과 비행복에 사용되면서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923년 이를 접한 쿤 모스라는 한 양복점주인이 옷에 맞게 형태를 고치면서 지퍼는 오늘날의 영광을 맞게 되었다.  그 방법은 지퍼의 경사면을 지나는 작은 힘이 수직방향의 큰 힘으로 바뀌는 원리를 이용한 제품이다. 손으로 아무리 힘을 써도 지퍼의 이빨들을 서로 맞물리게 하거나 떼어내지 못하지만 지퍼를 쓰면 쉽게 열고 닫을 수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 후로 지퍼의 발달은 계속 진보되어 지금의 지퍼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 지퍼시장은 일본의 YKK가 전세계의 60%를 장악할 정도로 YKK에 의해 기술개발이 이뤄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방수가 가능한 평면지퍼, 지퍼의 고리를 들때만 지퍼가 상하로 움직이는 안전지퍼 등이 개발되어 있다.  ★청바지의 유래  청바지는 천막천 생산업자였던 미국인 '스트라우스'가 발명하였다. 1930년대 초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많은 양의 금이 나왔다. 자연히 금을 캐려고 모여드는 사람들로 이른바 '골드러시'를 이루었고, 이에 따라 전 지역이 천막촌으로 변해갔다.  이때에 스트라우스는 밀려드는 주문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어느날 그에게 군납알선업자가 찾아와 대형천막 10만여개 분량의 천막천을 납품하도록 도와주겠다고 제의했디. 뜻밖의 큰 행운을 잡은 스트라우스는 즉시 빚을내어 생산공정에 들어갔다.  공장과 직원을 늘려서 밤낮으로 생산에 몰두해 3개월 만에 주문 받은 수량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얼마후 문제가 발생하였다. 빚까지 내어 생산을 마치고 나자 어찌된 일인지 납품의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산더미 만한 양의 천막천이 방치된 채 빚 독촉이 심해지고, 직원들도 월급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이었다.  헐값에라도 팔아 밀린 빚과 직원들의 월급만이라도 해결하고 싶었으나 엄청난 양의 천막을 한꺼번에 사줄만한 사람이 나설리가 없었다.  스트라우스는 고민하던 어느 날 주점에 들렀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금광촌의 광부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헤어진 바지를 꿰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트라우스는 그때 문득 생각했다.  '그래 바지를 찔긴 천막천으로 한번 만들어 보자'  1주일 후 스트라우스의 골치거리였던 천막천은 산뜻한 바지로 탈바꿈 되어 시장에 첫선을 보였다.  푸른색의 잘 닳지 않는 바지 이름하여 청바지는 뛰어난 실용성을 인정받아 광부들뿐 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특히 청바지가 유행을 일으킨 것은 미국 영화(이유없는 반항)'에서의 제임스 딘이 청바지를 입은 것을 보고 많은 젊은이들이 이를 흉내내어 청바지를 입기 시작하였다.  이후 서부 카우보이 영화를 그리며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청바지를 입고 나와 크게 인기를 끌게 되었다.  한편 대학생들은 노동자들과의 단결의 표시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청바지를 입게 되었고 유니섹스의 첫 출발이기도 하였다. 세상에 나온 지 3년만에 스트라우스의 청바지는 지구촌 곳곳에 탄탄히 뿌리를 내렸고, 스트라우스는 그야말로 평생을 황금방석 위에서 살 수 있었다.  ★면도기의 유래  면도기 (Shaving)  면도기의 유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해왔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로마 시대 그 전부터 사람들은 턱수염이나 머리를 깍을때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가지 도구, 벽화, 그 밖의 여러가지 증거가 아직도 남아있다.  유물에 의하면 이미 B.C 1400년대의 이집트에서 청동제 도끼모양의 면도칼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앗시리아에서는 편편한 면도칼이 사용되었으며, B.C 321년경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했던 초생달 모양의 면도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젖은 수염이 깊게 잘 깎인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도 로마인들이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도 흔히 쓰였던 긴 자루가 달린 이른바 '서양면도칼'을 사용하기 시작한 장본인들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머리털이나 턱수염을 깎은 것은 수염에 벌레가 기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전쟁이나 사냥할때 방해를 받지않기 위해서 일 것으로 추정된다.  20세기에 안전 면도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면도를 제대로 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또한 날이 쉽게 무디어지는 바람에 쓸 때마다 가죽에 갈아서 날을 세워야 했고, 얼굴을 베이지 않고 보다 깨끗하게 면도를 하려면 이용소에 가서 전문 면도사의 서비스를 받아야 했다.  그 후에도 면도칼의 변천과정은 상상을 초월해서 발전을 거듭해서 오늘날의 안전면도기에 이르게 되었다.  면도기의 종류중에서 가장 유명한 질레트 면도기는 최초의 안전 면도기이다. 이 면도기를 발명한 질레트라는 사나이는 자신이 면도를 하다가 얼굴을 베어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얼굴을 베이지도 않으면서 안전하게 면도를 할 수 있는게 없을까 하고 고민하게 되었다.  그때에 면도기 연구를 하뎐 질레트는 안전 면도기야말로 분명히 성공할 수 있는 발명 과제라 생각하고 개발에 착수했다.  철물점에서 시계 부품에 쓰이는 강철 리본, 손줄 등을 사다가 많은 밤을 지새우며 발명에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발을 하러 갔다가 이발사가 머리에 빗을 대고 머리카락만 안전하게 자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칼날을 얇은 철판 사이에 끼워서 털만 칼날에 닿도록 하면 살을 베일 염려가 없을 것이다."  질레트는 즉시 집으로 돌아와 신제품을 만들어 시험해 보았다. 실험한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는 곧 특허를 출원하고 친구의 도움으로 공장을 세워 안전 면도기를 생산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업 자금 부족, 소비자의 인식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1904년 11월 5일 특허를 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안전 면도기는 남성들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오늘날 세계 면도기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질레트사의 안전 면도기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그 후, 안전 면도기는 몇 번의 개량을 거쳐 오늘날 질레트면도기에 이르렀고, 20세기 주요 발명품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샴푸의 유래  일본의 다케우치 고도에라는 여사장은 양털 세척 액을 만들어 파는 중소기업인이었다. 양털은 깨끗이 세척하여 오물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므로 세척 액은 불티나게 팔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집에서 돌같이 단단한 비누로 머리를 감는 것을 보고는 양털처럼 세척제로 감는 것이 편리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들고 있는 양털 세척제를 분석해서 인체에 해로운 독성을 제거하였다. 또한 향기로운 향료를 첨가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하였다.  '모발용 세척제 탄생' 샴푸의 탄생을 알리는 기사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다케우치사장은 중견 기업으로서 하루 아침에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초창기의 샴푸는 환경문제에 관한 고려를 하지 않아 수질오염 등의 논란을 받았다. 그 당시 환경오염 문제까지도 해결된 샴푸가 개발되었다면 그 명예는 영원히 지속 되었을 것이다.  그 후 샴푸의 성분을 연구해 조금씩 샴푸의 광고와 마케팅에 힘써 예전 만큼은 안 되지만 샴푸의 인기를 끌어 올렸다.  샴푸의 성분 연구를 계속 하게 되면서 지금은 샴푸뿐만 아니라 린스, 그 외에 다른 종류의 제품들도 만들어졌다.  ★통조림의 유래 (Canned)  식품은 짧은 자연보존기간이 지나면 금새 변질되어 먹을 수 없게 된다. 그러던 것이 통조림에 의한 획기적인 식품보관법이 발명되면서, 비로소 식품의 장기보관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조림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병조림을 사용했다.  이 병조림은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장악하고 있던 1809년에 전쟁의 지속적이고 빠른 수행을 위해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식료품의 새로운 저장 포장법을 공모했다.  여기에서 아페르라는 한 요리사가 만든 병조림법이 선택 되었고, 그것이 식료품의 가공 보관에 혁신을 가져온 통조림의 모태가 되었다.  그 후로 병조림은 인류 식생활 개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병조림이 세상에 나온지 10년후인 1819년 병조림은 많은 단점 때문에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병조림의 병은 보관하기 어렵고 떨어뜨리면 깨지는 이유가 있어서 여행이나 야외 소풍을 가거나 할때에 병조림의 무게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병조림을 워낙 즐겨 먹던 영국의 주서 기술자인 듀란드는 자연히 병조림의 단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점심식사 때마다 자주 병조림을 애용하던 듀란드는 어느 추운 겨울날 차가워진 병조림을 그냥 먹을 수가 없어서 자신이 만들고 있던 조그만 깡통에 쏟아 불에 데워먹었다.  식사를 마친 듀란드는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병조림 대신 깡통을 이용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통조림을 하면 깨질 염려도 없고, 게다가 추운 날에는 그대로 난로 위에 얹어 데워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신을 얻은 그는 즉시 특허출원을 한 뒤 깡통을 이용해 통조림을 만들어 보았다.  대단한 인기였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발명가의 손으로 기업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생산과정이 거의 손 작업에 의존하던 실정이었기 때문에 통조림 역시 뚜껑을 일일이 납으로 땜질해내는 원시적인 공정에 그쳐야만 했다.  세계 최초의 통조림공장이 세워진 것은 1830년 영국 런던의 한 자본가가 시효가 끝난 듀란드의 특허를 차용,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본격적인 통조림 문화시대를 열었다.  ★맥주의 유래 (Beer)  맥주의 유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맥주가 인류 역사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인간이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 나타난 것으로 이집트의 맥주 양조에 대한 유적은 기원전 3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기원전 1500년경의 제5왕조 무덤에는 비교적 상세한 맥주 제조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맥주는 8세기에 이르러 중부 유럽에서 홉 재배가 시작되면서부터 만들어졌다.  맥주의 기원과 전래 경로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로제타석에 기록된 문자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바빌론 고도(古都)를 발굴한 결과, 기원전 3500년경에 바빌로니아인들이 보리술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집트에서도 기원전 3000년에 맥주를 만들었으므로 두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각각 맥주가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맥주를 약으로도 사용했다. 의사가 처방한 700종의 약 가운데 100종이 맥주였다.  이집트인들에게 맥주는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이집트인들은 마시기도 했지만 벌레에 물리거나 위급한 병 등 온갖 병에 효험이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했다. 이집트인들처럼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도 맥주를 마셔댔고 시저의 군대는 갈리아(중유럽)와 영국에 맥주파티 풍습을 전파했다.  중세시대에는 수도원에서 맥주양조를 독점하여 맥주는 수도사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었다.  그 뒤 1040년 서독의 프라이징에 상인들이 바이헨슈테판 양조장을 세웠고, 1292년 보헤미아의 필센 지방에 맥주의 황태자인 필스너가 나타났다.  필스너는 석회석 동굴에서 반년 동안 숙성되어 독특한 맛이 일품이었다. 이 당시의 맥주는 귀족들의 전유물로 귀족들은 궁궐에서 밤마다 흥청망청 생맥주 파티를 열곤 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맥주는 귀족의 손에서 시민의 손으로 넘어갔으며 부르주아와 노동자층 모두에게 사랑 받는 음료가 되었다.  19세기 프랑스의 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는 맥주의 역사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 전까지 맥주는 발효균을 살균하지 않은 생맥주였으나 루이 파스퇴르는 저온 살균법으로 오늘날과 같은 질 좋은 맥주를 맛보게 해 주었다.  최근에는 비열처리된 맥주가 인기가 높다. 비열처리 맥주는 저온 살균된 맥주보다 맥주 맛이 부드럽다.  저온살균 맥주는 발효된 맥주를 여과할 때 단백질 등의 불순물을 처리하기 위해 60도로살균 가열처리를 하지만 비열처리 맥주는 저온에서 미세한 필터로 효소와 잡균을 완전히 제거해 맥주의 맛을 부드럽게 하고 신선함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때문이다.  한편 캔맥주는 1935년부터 시판되었고 희귀한 맥주캔을 수집하는 매니아들도 생겨났다.  이렇게 맥주의 사용과 인기가 증가하면서 맥주의 인기는 전세계로 늘어나 지금은 남녀 할 것 없이 맥주를 애용하고 있다.   
1134    [그것이 알고싶다] - 반지의 유래?... 댓글:  조회:5446  추천:0  2017-05-06
반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69년 카르티에 (보석 디자인) 반지. 반지(斑指, ring)는 손가락에 끼는 장신구이다. 보석과 같은 조각을 박아서 장신구로서의 가치를 높인다. 반지의 치수는 1~27번까지 있는데, 1번 지름이 13mm로 가장 작으며, 27번은 21mm 2/3로서 가장 크다.   목차   [숨기기]  1보급 2역사 3소재 4분류     보급[편집] 최근에 반지가 세계에 보급되고 정착하게 된 계기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생활이 풍요로워짐에 따라 취미나 장신구에 쓰는 지출이 늘어남에 있다. 또 이를 부추긴것은 결혼 관련 회사들의 광고이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사랑의 상징이라는 광고나 유럽 점성술의 탄생석과 반지가 결합되면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반지에 대한 이미지를 정착시켰다. 역사[편집] 반지를 주고받는 역사는 48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네 번째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는 것은 대다수 국가의 관습이다. 이는 16세기에 튜더왕조가 왼손의 약지가 심장으로의 혈관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은데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반지를 세 번째 손가락에 끼는 것은 착용자가 연인관계에 머물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근엔 이런 관습에 구애받지않고 원하는 손가락에 반지를 끼곤 한다. 소재[편집] 금, 은, 플라티나, 나무, 아크릴 등. 분류[편집] 용도상 클래스 링 : 학년(學年) 표지를 새긴 반지 참 링(charm ring) : 부적반지 가드 링(guard ring) : 값진 반지가 헐거울 경우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손가락에 꽉 끼는 단순한 형태의 반지 모닝 링 : 죽은 자의 초상 ·문장(紋章) ·명(銘) 등을 새겨 넣어 17세기에 사용한 복상반지(服喪斑指) 실 링(seal ring): 납(왁스)을 묻혀 봉인(封印)하는 데 쓰는 반지 결혼 반지 : 결혼시 신랑과 신부가 서로 교환하는 반지 주교 반지 : 주교가 주교 표지로 사용하는 반지 인장반지 : 반지에 도장을 결합시킨것, 기원전 4000년 경 수메르에서 사용되던것에서 유래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의 왕위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 형태상 제미널 링(geminal ring) : 2개의 반지를 합친 가락지 포지 링(posy ring) : 안쪽에다 시문(詩文)이나 명을 새긴 반지 스파이럴 링(spiral ring) : 나사형 반지 섬 링(thumb ring) : 엄지손가락에 끼는 반지, 힘이나 에너지, 믿음의 상징이다. =========================== ? 엄지손가락 엄지에는 어떤 종류의 반지든 간에 되도록 끼지 않도록 한다. 엄지는 자유를 갖게 하는 것으로 그 자유를 억압하지 않도록 편안하게 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나 때로는 건강을 위한 하나의 치료방법으로 은반지를 엄지에 끼기도 하지만 이와같은 경우에는 가능한 한 남이 안 볼 때, 취침시에 끼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집게 손가락 둘째 손가락은 방향을 지시하는 손가락이다. 이 검지에 보석이 닿게 되면 우리의 의사전달, 목표, 꿈, 그리고 욕망 같은것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왼쪽에 낀 보석반지는 내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갖게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에 낀  보석반지는 당신이 하고자 하는 행동에 에너지를 나누어 주게 될 것이다. ? 가운데 손가락 세 번째, 즉 중지는 당신의 직관력인 능력과 영감력을 가진 손가락이다. 만일 당신의 직관력을 발휘하고 싶을 때는 오직 이 가운데 손가락에 자기에게 해당되는 보석반지를 끼도록 한다. ? 무명지 반지를 끼는 손가락, 또는 일명 약지라고 부르는 네번째 손가락은 창조력을 지닌 손가락이다.  특히 왼손의 약지는 모든 창조력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사랑 까지도 받아 들인다.  그리고 이 약지는 당신의 심장에 직접 정신적 전파를 보낸 다는 사실 때문에 약혼반지나 혹은 결혼반지를 여기에 끼는 것이다. ? 새끼 손가락 다섯 손가락중 제일 작아 새끼 손가락이라 불리우는 다섯 번째 손가락은 우리 생의 변화 혹은 어떤 새로운 기회를 갖게 하여 주는 손가락이다. 왼손 새끼 손가락 에 낀 반지는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며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맞는 적절한 보석반지를 끼게되면 당신의 행운 또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줄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보석이나 돌이 있을 것이다. 자기가 소망하는 어떤 일 즉 새로운 로맨스, 사랑, 부, 그리고 성공을 위하여 해당되는 위치에 적절한 장식을 하도록 한다. 만일 새로운 보석을 구입할 때는 어떤 돌이 자기가 목적하는 일에 가장 도움이 될 것인지를 미리 생각하고 구입하도록 한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절대로 고가의 보석이 아니라 아무런 무리 없이 가질 수 있는 것 중에서 즐거운 마음의 자세로 구하도록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무리를 하게되면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동안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없게 된다.   다섯손가락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 첫째 손가락 : 엄지손가락, 무지(拇指), 벽지(擘指), 대지(大指), 거지(巨指) ▷ 둘째 손가락 : 집게손가락, 검지, 식지(食指), 인지(人指), 염지(鹽指), 두지(頭指)  ▷ 셋째 손가락 : 가운뎃손가락, 중지(中指), 장지(長指), 장지(將指)  ▷ 넷째 손가락 : 약손가락, 약지(藥指), 무명지(無名指)  ▷ 다섯째 손가락 : 새끼손가락, 소지(小指), 계지(季指), 수소지(手小指)   명칭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엄지'는 '첫머리'라는 뜻으로, '엄'은 '어미'와 어원이 같습니다. '무(拇)' 와 '벽(擘)'은 '엄지손가락'이라는 뜻의 한자이며, '대(大)'와 '거(巨)'는 엄지손가락이 가장 큰 것에서 유래하였습니다.   2. '검지'의 어원은 못찾았습니다만, '식지(食指)'라는 명칭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옛날 중국의 춘추시대에 宋(송)이라는 공자가 입궐하는데 갑자기 食指가 떨리는 것이었다.  이것을 동행하던 친구에게 보이면서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더라는 말을 하였다. 궁에 들어가 보니 과연 요리사가 커다란 자라를 요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자 왕이 그 까닭을 물으므로 食指가 떨린 일에 대해 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장난을 할 생각에 그를 밖으로 내보내 요리를 먹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래도 그는 나가면서 요리 솥에 食指를 넣어 국물을 맛보고는 물러났다"   3. '중(中)'은 가운데에 위치해서, '장(長)'은 길어서, '將(장수 장)' 역시 가장 길어 우뚝 선 모양에서 유래하였습니다.   4. 원래는 이름이 없다고 하여 '무명지(無名指)'였으나, 이 손가락은 심장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어져서 독이나 해로운 물질이 있으면 이 손가락에 증세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약을 저을 때 반드시 무명지를 사용하였으므로 '약지(藥指)'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5. 가장 작고 끝에 있으므로 '새끼', '小(작을 소)', '季(끝 계)'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 참고로 영어에서 'finger'는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4개의 손가락만을 지칭하며, 엄지손가락은 따로 'thumb'이라고 하므로, 약손가락은 'fourth' 가 아닌 'third' finger 입니다. thumb - forefinger(index finger) - middle finger - ring finger - little finger 무명지가 심장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군가가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세간에서 부여한 근거없는 속설이 아니며, 한의학에서 말하는 경혈이나 경락이라는 개념에서 나온 것입니다. 심포경이 심포에 통속하고, 향하 횡격막을 통과하여 무명지 끝까지 연장된다고 나옵니다.   "무명지가 퇴화할 것"이라고 언급하셨는데, 오히려 현대에 타자기와 키보드 덕분에 무명지가 제 소임을 찾아서 역할이 증대됐다고 생각됩니다. 미래에는 입력장치도 변화할 것이므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 학창시절 화학을 배운 사람들은 “칼카나마알아철니주납구수은백금”으로 이어지는 이온화 경향을 기억할 것이다. 이 암호 같은 글귀는 각기 칼륨(K), 칼슘(Ca), 나트륨(Na), 마그네슘(Mg), 알루미늄(Al), 아연(Zn), 철(Fe), 니켈(Ni), 주석(Sn), 납(Pb), 구리(Cu), 수은(Hg), 은(Ag), 백금(Pt), 금(Au)을 의미하는데, 앞쪽에 위치한 금속일수록 이온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쉽게 산화된다.  그런데 이 중에서 금(gold)은 이온화 경향에서 가장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곧 금이 쉽게 산화되지 않고 용액에도 잘 녹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금은 예로부터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대표적인 귀금속으로 인류역사에서 항상 귀한 대접을 받았다.  세계 각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금의 용도는 무엇일까? 아마도 결혼반지 아닐까? 우리나라에서는 결혼반지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많이 선호하지만 서구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는 결혼이 아닌 약혼반지로 통용된다. 서구인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별다른 장식이 없는 심플한 금반지를 결혼 선물로 교환한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결혼이 아닌 약혼반지로 통용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다이아몬드 반지는 르네상스 초기에 베네치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당시 유럽 최고의 무역국가였던 베네치아에는 뛰어난 보석 세공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베네치아에서도 물론 다이아몬드 반지는 고가에 살 수 있는 귀중품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귀족과 부자들은 베네치아에서 만들어진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약혼식 때 신부에게 줌으로써 신부의 몸값을 지불한 셈으로 쳤다고 한다. 알고 보면 다이아몬드 반지에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유래가 숨어 있는 셈이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탄생한 해양도시 베네치아에서는 베네치아와 바다의 상징적인 결혼식이 매년 열리는데, 이때 베네치아 시장이 바다에 던지는 결혼반지 역시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닌 금반지라고 한다. 아무튼 결혼식장에서 신랑 신부의 손가락에 끼워지는 금반지는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의 맹세를 대변한다. 이는 금이라는 금속이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사랑이 영속할 것이라는 믿음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흔히 알고 있는 지식과는 달리, 금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강한 셈이다. 다이아몬드는 불 속에 넣으면 연소되어 이산화탄소로 변한다. 그러나 금은 비록 불에 녹아 형태는 변하지만 그 물리적, 화학적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도 금은 다이아몬드보다 결혼에 더 어울리는 귀금속인 듯싶다. 그렇다면 금은 과연 영속적일까?  오스트리아 빈 공대의 연구원인 게오르그 슈타인하우저 박사는 결혼을 하면서 1년간 자신의 금반지가 얼마나 닳을지를 알아보겠다는 다소 엉뚱한 결심을 했다. 슈타인하우저 박사는 결혼 후 매주 목요일마다 자신의 금반지를 초음파 세척기를 사용하여 깨끗이 세척한 후에 정밀한 저울을 사용하여 질량을 측정했다. 그가 끼고 있는 5.58387 그램짜리 18캐럿 금반지는 매주 약 0.12mg씩 닳고 있었다. 결혼한 지 1년 후에 슈타인하우저 박사의 금반지는 6.15mg 줄어들었다. 대략 0.11% 정도 줄어든 셈이니, 결혼 50주년인 금혼식 무렵에는 결혼식 때 주고받은 금반지의 1/20 이상이 닳아 없어진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계산은 물론 결혼 후 계속 금반지를 빼지 않고 끼고 있다는 가정하에서다. 아무튼 이 비율로 계속 닳는다면 금반지도 900년 후에는 완전히 닳아 없어질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렇게나 오래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부부는 지구 상에 없을 테니, 이 정도면 금이 변하지 않는 귀금속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신랑 신부가 조금 더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일한다고 하면 이야기가 약간 달라진다. 힘든 노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금반지의 닳는 속도가 더 빨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래 해변에서 놀다 온 후에 박사의 금반지는 0.23mg, 정원 일을 한 후에는 0.22mg이 닳았다. 스키를 타고 온 후에는 0.20mg, 록 콘서트장에서 열심히 박수를 친 주에는 0.17mg이 닳았다고 한다. 이에 비해 독감에 걸려 침대에 누워 있었던 주에는 반지가 거의 닳지 않았다고 하니, 결혼반지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는 일을 하지 않거나, 아니면 자주 앓아누워야 하는 것일까?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인구 170만인 빈에 약 30만 커플이 있고, 이 중 약 60%가 18캐럿 금반지를 끼고 다닌다면 1년에 2.2kg이 닳고 금액으로는 약 6만 달러가 없어지는 셈이다. 비슷한 공식을 우리나라에 적용하면 매년 61kg의 금반지가 닳아 없어지고 약 1,640,000 달러가 사라진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재미난 연구결과는 학술지인 골드 불루틴(Gold Bulletin)에 발표되었고, 미국화학회 소식지에도 요약 소개되었다. 슈타인하우저 박사는 지금은 6개월에 한 번씩 결혼반지의 무게를 재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를 자신의 결혼생활 내내 지속할 생각이고,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마감하는 마지막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산화되지 않는 성질, 즉 잘 부식되지 않는 성질 때문에 고대 이후 금은 장신구 외에 화폐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유명한 투탕카멘의 데스마스크처럼 왕이 죽은 후, 부장품을 만드는데도 금이 사용되었다. 또한 CD 등의 데이터 저장 층에 금을 사용하면 저장의 신뢰도를 증진시켜 준다. 잘 부식되지 않는 성질 외에도 금은 전기와 열을 잘 전달하는 성질이 있어서 전자부품에서 빠질 수 없는 재료다. 매년 수백 톤의 금이 TV, 휴대전화, 컴퓨터, 반도체 등의 제작에 쓰인다. IT 강국 코리아는 금의 희생(?)을 통해 이룩된 셈이다. 금은 얇게 실이나 막 형태로 가공하기 쉬운 특성을 가지는데, 이를 이용하여 유리창을 아주 얇은 금박으로 코팅하면 빛은 투과되지만 열은 반사하는 성질을 갖는다. 그래서 항공기 조종석의 창을 얇은 금으로 코팅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불투명한 금박을 우주선의 취약부분에 코팅하면 우주공간에 존재하는 산소 라티칼이나 강렬한 방사선으로부터 우주선을 보호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다양한 쓰임새가 있는 금이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는 곳은 반도체나 우주선, 여인의 손가락이 아니다. 전 세계의 금 중 상당량은 가공되지 않고 금괴 형태로 은행의 금고에 쌓여 있다. 또, 금 자신은 잘 부식되지 않는 ‘깨끗한’ 금속이지만 금을 채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파괴가 너무 커서 채금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산업’으로 손꼽힌다. 특히 아프리카의 빈곤국가들이 채금산업으로 인해 대규모의 하천 오염과 열대우림 파괴라는 피해를 입고 있으며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고단한 채굴작업에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은 금이라는 귀금속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글 : 이식 박사(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책임연구원) [Daum백과] 결혼반지의 무게 – 과학향기, KISTI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133    [그것이 알고싶다] - 모기의 수명?... 댓글:  조회:6835  추천:0  2017-05-06
모기는 완전변태 곤충으로 알·유충·번데기·성충의 생활환(生活環)을 거친다. 알은 일반적으로 물 위에 낳는다. 숲모기의 알은 물 위에 뜨게 기포(氣泡)를 지니고, 집모기는 알덩이를 물 위에 띄운다. 얼룩날개모기는 알의 등쪽에 부레가 있다. 물 위에서 알을 낳은지 약 3일 만에 부화되어 유충이 된다. 이 유충은 머리·가슴·배로 뚜렷이 구분된다. 머리에는 1쌍의 더듬이, 1쌍의 겹눈, 입부분을 갖추어져 있고 가슴등판이 3부분으로 구획되어 있다. 배는 8마디로 되어 있고, 끝에는 공기호흡 기관인 원통 모양의 기관 1개, 또 한쪽은 물 속 호홉기관인 아가미가 있다. 이 유충은 약 7일간 4회의 탈피를 하는 4령기(齡期)를 거쳐 번데기가 된다. 번데기는 유충의 모양과는 달리 머리·가슴부가 합쳐져 있고, 정수리에 뿔 모양으로 된 1쌍의 호흡각(呼吸角)이 있다. 머리·가슴부 속에는 1쌍의 더듬이, 3쌍의 다리, 1쌍의 날개, 머리부에는 1쌍의 겹눈과 입의 부분이 접혀져 있다. 그래서 껍질만 벗기면 성충이 될 수 있는 기관들이 갖추어져 있다. 배는 8마디고 끝 부분에는 1쌍의 납작한 난원형(卵圓形)의 유영편(游泳片)이 있어, 물을 헤쳐 운동할 수 있는 기관이 부속되었다. 번데기는 물 속에서 약 3일이 지나면 성충으로 변태하게 된다. 모기는 알에서 성충이 되기까지 약 13∼20일 걸리고, 성충의 수명은 1∼2개월이다. 흡혈은 암컷에 한정되고, 수컷은 식물의 즙액(汁液)이나 과즙(果汁)을 빤다. 암컷은 흡혈을 한 번 또는 두 번 하고 4∼7일 만에 알을 낳기 시작한다. 빨간집모기의 경우 72일간 생존한다고 보고 13번 알을 낳는데, 1회에 약 155개를 낳는다. 암컷의 흡혈은 살기 위한 것보다 알을 낳는 데, 결코 겪지 않고서는 안 되는 일이다. 모기 암컷이 숙주를 쉽게 찾아내는 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으나, 동물이 발산하는 이산화탄소가 유인원(誘引源)이라고 한다. 모기 채집에 드라이 아이스를 쓰면 효과적이다. 모기의 활동시각은 얼룩날개모기류와 집모기류는 주로 밤이고, 숲모기류의 어떤 것은 낮에 흡혈한다. 흡혈활동은 주로 빛자극에 지배되고, 여름철이면 오후 7시경(약 50lux)부터 시작된다. 모기의 교미는 수컷이 많이 모여 모기기둥을 만든다. 암컷은 한 번 교미로 족하고 몸속에 정자를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는 수정낭(受精囊)이 있다. 그렇게 때문에 알을 낳기 전에 필요한 수만큼 정자를 내어 수정시킬 수 있다. 알 낳는 곳은 물 괸 하수구 및 방화용수, 계곡의 바위의 움푹한 곳에 괸 물 속, 바닷가 바위에 괸 물 속 등이다. 화학적 조건은 부패한 물, 바닷물과 민물이 섞인 물 등 주로 지표수(地表水)가 발생원이 된다. 물리적 조건으로는 빛이 잘 들고 물의 온도가 적당한 곳이고, 생물학적 조건은 천적(天敵)의 피해가 없는 곳을 택한다. 모기가 나는 거리는 종류에 따라 다르나 1∼2km라고 한다. 모기의 암수 구별은 육안으로 가능하다. 즉, 더듬이 전체에 긴 털이 많이 난 것이 수컷, 더듬이마디에 몇 개의 털이 돌려난 것이 암컷이다. 또한 아랫입술수염이 긴 것이 수컷, 짧은 것이 암컷이다.   =동물들의 동물별 평균수명= 개, 고양이의 평균 수명은 대략 13~15년정도... 그렇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동물들의 동물별 평균 수명은? 우리가 좋아하는 토끼와 동물의 왕 사자와 호랑이, 그리고  기린과 고래는 몇살까지 살까요~   꾸준히 사랑받는 반려동물로 꼽히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토끼의 평균 수명은 12년으로 생각보다 기네요~ ^^   동물의 왕으로 불리는 사자는 20년, 호랑이는 25년 가량 산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일찍 죽는군요 ㅠㅠ   좀처럼 보기 힘든 기린의 경우 평균 수명은 28년으로 조사되었고, 말은 30년, 코뿔소는 40년, 침팬지는 무려 50년의 평균 수명을  기록했다고 하니 사람과 비슷하네요!   해양포유류에서는 범고래가 90년, 수염고래가 200년을 살았다고 하며 대양 백합 조개는 400년, 영어 이름 '죽지 않는 해파리'를 가진 홍해파리는 불멸의 삶을 산다고 해요. 이 홍해파리의 학명은  투리토프시스 누트리쿨라로  노화되면 죽지 않고 어린 개체로 돌아가  노화와 유화를 거듭하는데요,  이런 독특한 세포 분열로  불멸의 삶을 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곤충의 평균 수명은 어떨까요? 하루살이는 1시간 ~ 1주일, 나방과에 속하는 화랑곡나비는 5일~13일을 살다가 죽으며 모기는 1~3개월, 잠자리는  4개월이 평균 수명이라고 합니다. ^^ [출처] 모기와 고래의 수명? 동물별 평균수명|작성자 기운찬닥터    
1132    [그것이 알고싶다] - "붓두껑 속 목화씨" 허구?... 댓글:  조회:4002  추천:0  2017-05-06
    2 흔히 알려진 사실 고려 말의 문신으로,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붓두껑 속에 목화씨를 몇 알을 숨겨 가지고 왔다는 일화로 매우 유명하다. 원나라로부터 자주 독립을 꾀하는 공민왕을 옹호하다가 원나라 황제의 미움을 사서 귀양을 갔고, 그곳에서 목화를 발견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건 밀수를 했고, 온갖 고초 속에서 밀수에 성공하여 백성을 등따시고 배부르게 사는데 만든 아주 훌륭한 인물이라는 것이 흔히 알려진 이야기. 그러나... 3 '붓두껑 밀수'가 허구라는 증거 우선 이 이야기는 기초적으로 원나라가 목화씨를 금수물품으로 지정했다는 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실제로 원나라가 금수품목으로 지정한 품목은 무기나 화약 등 국방에 있어 매우 중대하거나 희소성이 높은 품목일 뿐, 남쪽에 널리고 널린게 목화인 만큼 희소성 없는 품목을 금수품목으로 지정했을까가 의문이라는 것. 다만 면화가 화기나 화약의 심지를 만드는데 쓰이기 때문에 군수품으로 간주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의 전국 시대에 조총이 빠른 속도로 보급된 것도 조선을 통해 들어온 면화가 심지를 만드는데 요긴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설사 금지품목이었다 해도 당시 원나라의 상황을 보면 전혀 금수가 지켜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고, 문익점은 다년생의 강남산이 아니라 일년생의 강북(화북)산의 목화를 가져왔다는게 주 내용. 게다가 백제 위덕왕 시기 건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충남 부여군 능산리 절 유적에서 목화에서 뽑은 면사(綿絲)로 직물(면직물)이 발견되어 문익점이 고려에 처음으로 목화를 들여옴으로서 면직물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통념은 완전히 허구임이 밝혀졌다. 다만, 수입산 면사를 이용했을 수도 있으므로, 면직물 생산이 이뤄졌다고 해서 목화 재배가 이뤄졌다고 단정할 수 없는데다가, 문익점이 들여온 것은 생산성이 높도록 개량된 종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문익점 이전에는 재배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등 재래종의 가치가 매우 낮았던 것으로 보이기에 그 공로가 깎인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목화 보급 100년만에 조선 전체로 펴져나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 시대 서민은 일반적으로 흰 모시옷을 즐겨 입었음을 알 수 있는데, 겨울에는 원시 시대부터 입어 온 갖옷이나 (상류층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활발히 생산된 계(罽) 등의 모직물로 만든 옷을 갖춰 입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무명(면포)는 베나 모시에 비해 더 부드럽고 따스해서 추위를 막는 데 효과적이었으며 특히 목화 솜으로 솜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개량종의 도입이 당시 한반도인의 의생활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는 붓두껑 목화씨 얘기가 일언반구도 없다. 실록에는 다만 이렇게 적혔을 뿐이다.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緜)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4 기록으로 남아있는 진실 공민왕 연간에 문익점과 그 일행들이 사신으로 원에 갔고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반발한 원 조정에서 충선왕의 손자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임명해서 군사를 주어 고려로 보냈다. 이에 원 조정에 있던 사신들은 덕흥군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와 공민왕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로 나뉘었고 이중 덕흥군파 사신들은 덕흥군이 고려 조정을 석권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익점이 바로 덕흥군파였다. 고려 공민왕의 입장에서는 역적. 덕흥군의 군대는 압록강 근교에서 최영과 이성계에게 패배했고, 결국 원나라는 이들에 대한 송환 결정을 내린다. 어쩔 수 없이 고려로 돌아온후 문익점은 파직되어서 시골로 내려가게 된다. 여기까지 정치적 행적으로 보아 나쁜 쪽으로 과장해서 말하자면 원나라부터 자주 독립을 꾀한 공민왕에게 반역한 종묘사직의 역적놈이고, 우호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줄을 잘못 서서 출세길 막힌 문인이다. 5 실패한 정치가, 성공한 사업가 파직 후 고향으로 돌아와 목화 재배를 시작한다. 문익점이 목화를 밀수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분명 목화의 개량과 보급에 있어 일대 혁신을 가져와 민간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한 공로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우왕 1년에 조정으로 돌아와서 벼슬자리 올랐다. 어디까지나 목화 포급 공로 때문이었다. 이후 다시 문익점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온건파 사대부와 함께하느냐 급진파 사대부와 함께 하느냐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문익점은 온건파와 입장을 같이했다. 매번 줄을 잘못 선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문익점은 이후 조선에서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조선 조정에서는 후에 후손에게 벼슬을 주고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6 문익점 통념의 형성 그리고 이후 조선 초기의 권신 권근을 비롯한 수많은 인사들이 시기를 이어가면서 살에 살을 붙여서 문익점 오류를 만들어 나갔다. 몇 줄 없는 역사서의 기록으로 소설을 써 버릇 했던 위인적 작가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문이나 가문의 문제 등이 얽혀 있었기 때문에 문익점 스토린 사실상 조선시대에 이미 완성된 것. 그리고 완성본은 이렇게 되었다. 고려에서 사신으로 파견된 문익점은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는 문제를 접하고(여기까지는 사실) 공민왕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다고 주장하여 3년간 강남으로 유배를 간다. 그리고 유배 기간 동안 농민들이 무명옷을 입는 것을 보고 이를 가져가려고 하지만 목화는 금수품목이었기 때문에 붓두껍에 숨겨서 가지고 왔다. 이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낙향하였다가 목화씨를 심은 것이 문익점의 밭에서는 전멸하고 장인 정천익의 밭에서 겨우 겨우 몇 포기 살려내었다. 하지만 원(나라)면에서 씨앗을 제거하여 실을 뽑는 기술이 없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중국 승려가 목화를 보고 반가워하는 것을 보고, 문익점과 정천익이 국가 기밀이라고 알려줄 수 없다는 승려를 어르고 달래서 결국 씨아와 물레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이 후 이걸 문익점의 후손들이 개량했는데, 특히 목화씨에서 실을 뽑아내는 방적기를 만든 사람이 문익점의 아들 문래라서 물레라고 한하고, 실로 천을 짜는 방직기를 개량한 것이 문래의 동생 문영이라서 솜으로 짠 옷감을 무명이라고 한다. 일부분은 최무선의 화약 개발 일화를 표절참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최무선의 경우 화약은 분명히 금수품이었다. 이래서 스파이보다 공돌이는 안습한 것이다 문익점이 버려둔 목화를 정천익이 길렀다며 진짜 위인은 정천익이라고 정씨 후손들이 클레임을 거는 경우도 많았다고. - 출처 : 엔하위키긴 하지만. @@=팩트= 1 목화씨는 원나라의 금수품목이 아님. 2 고려시대에는 목화씨를 가져왔다고는 하지만, 숨겨왔다는 기록 없음. 3 조선실록엔 주머니에 넣어왔다고. 4 800-1000년 앞서 백제,신라에서 면직물 발견.  
1131    [고향문단소식]- 청산아, 이야기하라... 어랑촌아, 말하라... 댓글:  조회:3443  추천:0  2017-05-05
화룡시 작가들 청산리대첩기념비 찾아 (ZOGLO) 2017년5월5일  원로작가 림원춘선생이 참가자들에게 청산리대첩 경과를 소개하고 있다. 5월 1일 오전, 화룡시 작가협회는 화룡시 룡성향 부흥촌 로년협회와 함께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를 찾아 여러 가지 기념활동을 조직하였다. 화룡시 작가협회 고문인 윤동길의 사회하에 진행된 기념활동에서 화룡시 작가협회 주석 안수복과 부흥촌 로년협회 회장 함순란이 기념비에 화환을 드리고 전체 참가자들은 기념비 앞에서 묵도를 했다. 중국작가협회 회원이며 연변작가협회 원 부주석인 원로 소설가 림원춘이 이날 자리를 같이 하여 “청산리항일대첩 경과보고”를 했다. 그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이 지역에서 벌어진 10여차례의 치렬한 전투를 소개하였다. 그는 “청산리전역의 승리는 우리 조선족인민들의 애국적인 헌신정신으로 바꾸어온것이다. 청산리전역에 참가한 반일부대의 병사들 거의 모두가 연변조선족인민들의 아들들이였으며 반일부대의 무기와 군수품들도 모두 우리 겨레들이 가난속에서도 자진하여 헌납한 성금으로 구입한것이였다. 우리의 백의동포들은 자기들의 아들들을 반일부대에 용약 입대시켰고 반일부대의 군자금과 식량공급을 부담했으며 정보공급, 길잡이로 나서기도 했다. 우리 겨레의 녀성들은 생명의 위험도 무릅쓰고 음식을 전연진지에까지 날라다주었다.”고 하면서 당년에 청산리대첩에서 희생된 100여명의 반일투사들에게 경의를 드렸다. 연변작가협회 주석 최국철도 이번 기념활동에 자리를 같이 하여 화룡시 작가협회 회원들의 창작활동과 현지답사 등에 대해 긍정하고 정품창작에 힘다할 것을 바랐다.   이날 참가자들은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고 청산리대첩에서 희생된 반일투사들과 산너머에 위치한 화룡현항일유격구에서 희생된‘어랑촌의 13용사’들을 떠올렸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1130    [그것이 알고싶다] - 한복의 유래?... 댓글:  조회:5665  추천:0  2017-05-05
한복의 유래 상고시대 우리나라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과 그 북족에 부여, 동북쪽에 예맥, 남쪽에 진이들 부족국가는 한사군이 설치되자 북쪽에 옥저 동예등이 나타났으며 남쪽에는 삼한이 이루어졌다.고조선은 단군광검에 의하여 기원전 2333년 에 세워졌다 단군 조선때의 복식에 관해서는 에 머리에 개수아는 법을 가르쳤다 라고 기록된것으로 보아 우리 고유의 복식이 이미 이때부터 형성된것으로 보인다. 또한 위만 조선이 조선에 입국할때 추결만이복 하였다고 기록한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의 복식은 한족과는 달리 북방호족 계통임을 알려 준다 부여 해모수가 기원전 59년에 세웠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면 흰옷을 좋아하여 흰천으로 지은 대메포와 바지를 입고 갖신을 신었다고 한다.옥저와 동예는 후에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었는데 의복제도는 곡령을 입었으며 남자는 은화장식을 하고 여자는 바지를 입지 않고 준의를 입었다.삼한중 마한 사람들은 무명을 짜고 전잠을 하였으며 상투틀고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변한진한 사람들은 잘발에다가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고깔을 좋아하고 넓은 폭의 곱고 자는 삼베를 잘 짰다고 한다. 삼국시대 우리나라 상고 복식의 원형은 저고리 바지 치마로 갈라져 있는 북방 호복계통의 옷이다. 삼국시대에 복식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 볼수있는 데 머리에는 관모를 썼으며 저고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오고 직선으로 교차시켜 여미는 깃형태의 직령교임식으로 외쪽여밈이다. 또 깃 부리 도련에는 다른 천으로 선을 두르고 바지는 가랑이가 좁은 홀태바지 형이다 그리고 양복바지와 같은 궁고 가랑이가 넓은 광고 잠방이와 같은 바지도 있었다. 치마는 길이가 길고 거단까지 잔주름이 잡혀 있다 두루마기는 무릎을 내려갈 정도로 길고 저고리와 같이 선도 보인다. 신은 주로 화를 신고 이도 병용하여 신었다. 이와 같이 실용적이고 활동적이며, 북방 한대성 기후에 알맞은 옷이다. 신라시대 신라의 복식은 관모에는 복두 상의로는 표의 , 반비, 단의 ,내의 배당이 잇었다. 띠에는 보통의 띠와 용대가 있었고 하의로는 고와 상, 발에는 버선,이 화대가 달린 화를 신었으며 표라는 목수건이 있었다. 통일신라는 문화의 전성기로 복식도 발달. 흥덕왕9년에는 계급적 복식질서를 쥬지하기 위해 복식금제명령이 내려짐.우리고유의 관모인 소골,절풍 대신 진골에서 평민에 이르기 까지 일률적으로 복주를 썼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절상건에서 나온것으로 여겨지며 단석산 공양인물도에서 복두의 모습을 볼 수 있다.표의,바지,저고리 :웃옷으로 표의라는 두루마기가 잇는데 남자의 겨우는 포란이라 하였다. 이포란의 형태는 문관은 옆이 막혀있고 무관은 아래가 한자 정도 틔어 잇어 직책에 잘 어울렸다. 표의는 상하구별없이 통요되었으며 평인은 마포나 갈포를 사용하고 4두품이상은 면주로 하였다.저고리는 흥덕왕 복식 금제에 단의라 기록하고 있는데 그뜻은 요즘의 저고리 처럼 길이가 짧아서 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또 내의 는 포를 입엇을때 저고리`를 말하는것과 같다.치마, 반비 배당 : 신라에서 당나라의 복식을 모방하여 상을 입었으나 여자의 치마인 군과는 다른 형태이며 의례용이었던것같다 복식 금제에서는 내상과 표상의 구별이 보이는데 내상은 속치마로 추측된다.반비는 남녀공용으로 소매가 짧으며 전복이나 답호와 같다. 에 보면 배자와 같다고 한다. 배당에도 배자와 같으며 소매가 없다 복식금제에서 보면 6두품에서 4두품까지 여자에게 허용하였던 옷이다. 고려시대 남자복식 백관의 공복을 4가지 색으로 구분하여 제정한것으로 원윤이상은 자삼, 중단경,이상은 담삼,도항경 이상은 비삼, 소주부이상은 녹사밍었다. 이로부터 고려는 22대 강종 원년 1212년까지 거란,송,요,금등의 관복을 다르고 있다. 왕복: 상복,공복,조복,연복,에복이 있다. 상복은 고려도경에 의하면 오사고모를스고 금벽을 수놓은 담황색의소매가 좁은 포를 입었으며 자색 늑건을 띠었다고 기록되어잇다. 여기에 오사고모는 중국천자의 조사절상건은 복두에서 일어난것으로 조선시대의 익선과이 되었다고 한다.공복으로는 자라공복을 입고 상아홀과 옥대를 갖춘다 조복은 평상복위에 복두를 쓰고 속대를 띠며 연복은 조건에 백저포를 입어 서민과 다를 바 없이 우리 고유 복식을 입었다고 한다. 제복으로는 구류면,구장복은 면복인데 이것은 나라의 제향 ,가례등 특수의식에 입는 법복으로 면류관과 거기에 따르는 복식의 총칭이다. 의복만을 할때 십이면류 십이장문을 수놓은 십이장복이다. 제복의 구성을 보면 면류관,면복,상,백사중단,폐슬,수,혁대,옥패,대대,흰버선,붉은신이다. 그런데 제례인 경우에는 방심곡령을 한다. 또 고려말 공민왕 19년 5월에 명의 복제의 영향으로 자주성을 모색해 보고자 중국황제와 동격의 십이류면,십이지장복을 입었으며, 조복에도 중국천자와 같은색의 원유관에 강사포,홍상 백사 중단 강사폐슬 백가대 방심곡령 홍햐대흰버선,검은신을 제정하고 있다. 고종18년 몽고의 침입을 받아 그영향 권에 들어섬.. 백관복: 제복,조복,상복,공보이 있다 제복에서는 칠류면 오장복은 1풍의 6월을 입고 오류면,삼장복은 2품에 대상경 이하 15원 까지 무류면은 3품의 41원 이 입었다.조복과 상복에 대하여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고 공복은 복두를 쓰고 광종대의 사색공복제도에 따르고 있는데 그 색복계급에 잇어 자, 단, 비, 녹의 4색 공복을 이루고 있다. 민서복 : 몽고풍에 비해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가 좁아 졌으며 고름을 매게 되었다. 진사는 사대문락건에 조주구를 입고 흑대를 혁리를 신었다. 농민이나 상인은 백저포에 조선, 민장은 조주구에 문라건,흑각대,오혁리였다. 뱃사람은 바지저고리를 입지 아ㅎ고 죽관에 단갈만 입었다고 하는데, 그형태는 잘 안수 없느나 현재의 승복인 동방과 비슷한것으로 짐작된다.불자는 일반사람들이 좋아하는 청적황배흑의 5가지 색을 제외한 잡색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국사는 납기사에 장수편삼과 자상을 입고 오혁대를 띠면 행전과 같은 금발을 치고 방울 달린 영리를 신었다. 두루마기는 유학자들은 조주구위라는 중국식두루마기를 입엇다. 농공상기인들은 두루마기형의 백저포를입고 속대를 띠었다. 여자복식 고려의 여자복식은 통일신라 이래 별로 변함이 없었고 다만 원의 영향을 받아 몽고풍이 궁양을 이루었다. 왕비복과 귀부녀복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왕비복 : 원과의 국혼관계로 원의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됨으로 궁중관복에 몽고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것은 상류층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서민사회에서는 예복도 우리의 고유 복식을 입었다. 궁중관복은 고려 말렵 공민왕 19년 5월에 면의 효자황후가 보내온 적의를 보면 알수 있는데 이것은 칠적관, 적의 중단, 폐슬 대대 혁대, 수, 청말, 청석으로 이어짐 위부녀복 : 에 보면 고려의 미혼귀녀들은 황의를 많이 입었다고 하며 상류층에서는 역시 몽고의 영향을 많이 받음. 몽수 : 고려도경에 보면 귀부인들은 머리의 쓰개로서 몽수를 쓰고 다녔는데 그것은 1폭의 길이가 8자나 되는 검은 비단 3폭으로 만들며 이것을 머리위에서 드리워 얼굴만 내놓고 나머지는 땅에 끌리게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일면 개두라구 함 화관,족두리 :화관은 신라문무왕 당시 당의 복식 제도에서 수입하여 궁양의 관모가 되었고 그후 고려세서도 귀족예급의 예복에 착용하였다.족두리는 고고리라하여 변발에 아름답게 장식하여 예복에 착용하였는데 이것은 중국의 원세조후의 고고관과 비슷하다. 두루마기 : 남자두루마기와 비슷한 형의 백색 두루마기를 입고 허리띠를 맸다. 이띠에는 채색끈에 금방울이나 향낭을 찼는데 이것이 많을 수록 귀인으로 여겼다고 한다. 저고리: 저고리는 차차 짧아져 띠가 없어지고 원의 영향을 받았을대는 아주 짧아진 것을 볼수 있다. 그리고 저고리 길이가 허리위로 올라가게 됨으로 자연히 저고리 의 띠가 없어지고 고름이 생기게 된것으로 보인다. 바지 : 무늬있는 비단으로 만든 통넓은 것을 입었는데 생견으로 안을 받쳐서 옷이 몸에 붙지 않도록 품을 크게 하는 관고를 좋아했다.. 치마 : 가을과 겨울에는 색이 짙거나 엷은 황색면주치마를 공격대부의 부인에게 사민 유녀에 이르기 까지 특별한 차별없이 입었다.그리고 왕비의 겨울용치마는 홍색에 수를 놓았는데 일반 부녀자들의 치마에는 못하게했다. 이것이 조선조의 스란치마가 될것같고 이로부터 황유홍상이니 녹의 홍상이니하는 조선여자의 복색이 된것으로 짐작된다. 선군 : 속치마의 일종으로 치마폭을 넓게 하기위한것이었으며 조선시대의 무지기치마 같은것이었다.따라 이 선군위에 입는 겉치마는 8폭에 길이가 꽤 길어 서 걸을때 겨드랑이에 끼고 다녔다고 하는데 부귀한 집의 부인은 치마 한벌 만드는 데 옷감을 7~8필이나 드였다고 한다. 저상 : 3폭을한 가랑이로 한다는 것으로 왕에게 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입었다.옷감으로주로 여름에는 모시를 겨울에는 비단을 사용 또한 선이 없어지고 대신 동정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손끝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비록 주채를 들 때라도 붉은 주머니로 손을 가렸는게 이것은 한삼의 용도와 비슷하다. 조선시대 남자복식 조선중기후기의 임진, 병자 양란 후에 실학 사상으로 말미암아 복식에도 실용성을 부여하게 되고 단순화 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고종 21년 갑신정변과 더불어 복제 변경을 단행하였다 개화기에 이르러 우리나라 복식은 고유복식과 양복의 소용돌이 속에서 끈질기게 그전통을 발전시켜 왔다. 왕복 : 제복으로 면복,조복에는 원유관,강사포,상복에는 익선관,곤료오,첩리,답호가 있으며 전쟁시에 전립으에 융복을 입고 한가히 지낼대는 편복을 입었다. 면복: 왕의 제복및 대례복으로 면류관에 곤복으로 구성된다 면류관은 위모관과 더불어 중국 고유의 관모로 주나라에서 유래된것이다. 면류는 황제가 12류 12옥이고 황태자,친왕은 9류 9옥이며 옥의 색채도 5채옥과 3채옥등을 엮었다. 익선관.곤룡포: 익선관에는 왕의 상복으로 평상 집무때입는 옷이다. 세종 26년 3월 에 사은사 유수강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왕의 상복을 보면 익선관,곤룡포로 기록되어 있다. 익선과은 복두를 모방하여 만든 관모로 탕건위에 썼다.그리고 명사 에 기록된 곤룔포를 보면 황제는 황색포에 앞뒤와 양어깨에 용문을 직금하엿고 황태자는 색만 다른 홍색포역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친왕례에 따라 세종조에서 조선 말가지 홍색의 곤룡포를 입었으나 고종의 황제가 된후에는 황색포를 입었다. 사인복 : 사인복은 유관자 아닌 반인 계급의 복식을 말한다., 남삼,심의 : 남삼은 단령에 선을 두른 형태로 상사의 복식으로 삼앗는데 이것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입는 옷이다. 아울러 생원,진사,창방이 입었으며 앵삼과 같은 것으로 옥색길에 검은선을 둘렀다. 심의는 고대 중국 의 천자 ,제후의 평복이었고 사대부에게는 상복,서인에게는 길복이었으며 유자의 법복이었다 그형태는 백포로 만들어 의 4폭,상 12폭을 서로 연하여 둥근 소매,모난깃,굽은 단을 가졌으며 깃,도련,부리에 검은선을 두르고 복건을 썼다. 굽은 단을 가졌으며 깃,도련,부리에 검은 선을 두르고 복건을 썼다. 여기서는 치마폭의 12폭인 것은 1년 12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심의의 재료는 세포(세마포),명주를 썼으나 툭수층은 비단을 사용하였다. 이옷에 매는 띠오 흰색에 검은 선을 2줄 둘렀으며 매는 방법은 동심결로 맨다. 여자복식 조선시대의 여자 의복에는 저고리 치마 속옷 비롯하여 버선신까지 포함한 평상복과 의식이나 혼례때 입던 적의 활옷, 원삼, 당의 등 예복이 있따. 저고리 : 조선초기 1530년대의 순천 김씨의 갈색명주 솜저고리는 길이가 70cm이며 1580년 청주 한시의 덧저고리 길이가 70cm이며 1580년 청주 한씨의 덧저고리 길이는 81cm나 되었는데 1616년 판것이고 1700년대의 누비 삼회장 저고리는 길이가 42cm 점점 짧아지고 깃도 당코깃으로 변하였따 1780년 청연군주의 문단 삼회장저고리는 길이가 19.5cm이며 조선만 1900년대의 저고리길이가 극도로 짧아진 때는 14.5cm로 거의 진동선과 일치하게 되고 진동의 길이는 13cm이며 곁마기는 진동선위로 올라가는데 앞도련이 가장 짧아진 부분의 길이는 12cm밖에 안된떄도 있었따. 1930년대의 반회장저고리는 길이가 26cm인데 이때부터 현재의 저고리길이와 비슷한 25~26cm 정도의 길이로 정착된 것을 볼수 있따. 이들 저고리의 길이가 아주 짧아지는 변천은 임진왜란 전 조선초기의 저고리들과 비교하면 그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복식흐름의 성향은 전란 후라는 사회적 요인에 의하여 단순화된것이며 형태는 축소되고 계급적으로 평등화되었으며 제도적으로 자유화되는 것으로 해석할수있따 배자 : 장배자,단배자,배자의 세종류가 있다 장배자는 양옆을 꿰매지 않은 요즈음원삼이고 다배자는 뒤의 다으이를 말하며 반비의 짧은 것이 요즈음 볼수 잇는 배자이다. 갓저고리: 초구라고도하며 중국 혁철족의 복식에 서 그 원류를 볼수 잇다. 갓저고리와 갓두루마기는 상류층에서 입은거 같고 세종11년 2월 사헌부에서는 초구피를 양반자제에게 허용 하였다. 치마 :우리나라 여자옷의 기본인 치마 저고리 의 형태가 다 같이 단일적이면서 저고리에는 다소 변화를 갖는데 비해 치마에는 별로 변천이 없었고 그길이는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주기로 유행하였다 속치마는 겹겹이 5~6겹입었는데 처음은 짧게 하고 차례로 길게 하여 겉치마를 입은 모습은 비약한 가슴에 비해 둔부는 종을 엎어 놓은 듯하였고 그 위로 긴 치마가 끌릴 때의 미는 생명력을 갖고 유행하엿던 것을 알 수있다,치마입는법은 반가부인은 외로 여미고 서민 계급은 바로 여며 반상을 가렸다. 색에 있어서는 양반 계급은 어려서부터 출가하여 아기를 낳을 때가지 다홍치마를 주로 입고 중년이 되면 남색치마 노년이 되면 옥색회색 계통의 치마를 입었으나 부부가 함께 살아 있으면 아무리 늙었어도 큰일 때에는 남색치마를 입었다. 노비들은 5세가량까지는 별차이 없이 다홍치마를 중년이후에는 감색이나 고동색을 많이 입었다. 옷감에 있어서 양반은 주로 단 사 주 를 입었으며 고동색을 많이 입었다. 두루마기 :두루마기는 갑오경장이후의 표를 말하며 삼국시대에는 포로 불리었는데 그 모습을 고구려 벽화에서 볼수 있고 신라의 표의 백제 국사의 포가 그것이며 고려 조선시대까지도 남녀 비슷한 형태엿다. 두루마기 원류는 구에서 발전한것으로 보이며 그 복식용어는 조선후기로 보는데 몽고의 xurumakci에서 나왔다고 한다.조선시대의 여자 의복에는 저고리 치마 속옷 비롯하여 버선신까지 포함한 평상복과 의식이나 혼레때 입던 적의 활옷,원삼, 당의 등 예복이 있다.  
1129    [그것이 알고싶다] - 귀걸이의 유래?... 댓글:  조회:4050  추천:0  2017-05-05
  귀걸이의 유래 귀걸이는 고대 중국에서 시작됐다. 배를 타는 선원이 사고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귀를 뚫게 됐는데,귀를 뚫고 나니 더 멀리 볼 수 있게 됐다. 그때부터 선원들은 유행처럼 귀고리를 하게 되었다. 눈이 밝아지는 효과뿐만 아니라 배멀미에도 좋다는 것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귓불 가운데 부분은 눈에 해당하는데,그곳을 자극하거나 귀고리를 하면 눈이 밝아진다. 귓불의 윗부분은 머리에 해당하는데,멀미나 두 통이 있으면 여기에 귀고리를 해주면 좋다.  바람둥이의 장기 드라마나 영화에서 바람둥이가 여자를 안고 춤을 출 때 항상 나오는 장면이 있다. 나지막한 소리로 귀에 속삭이면서 뜨거운 입깁을 불어넣는다. 이때 여성은 얼굴이 빨개지며 성적인 흥분에 어쩔줄 모른다. 일리가 있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귀 안쪽에 난소에 해당하는 반사구가 있기 때문에 그곳을 자극하면 성적으로 흥분되기 때문이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이같이 자극받으면 흥분하기는 마찬가지다.  귀는 인체의 축소판 귀는 인체의 축소판이다. 뱃속에 태아가 거꾸로 있는 모양을 생각하면 된다. 귀에 우리 몸의 오장육부가 리모컨처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귀를 자극하면 건강이 좋아진다. 건강에 좋은 귀마사지 요법에 대해 알아보자.  건강 귀마사지 요법 중국에서는 장수하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귀를 마찰하고 지압하는 양생술이 있다. 만일 어깨가 아프다면 어깨를 주무르는 것보다 그에 해당하는 귀의 특정 부위를 주무르면 훨씬 효과가 있다. 따라서 맨손체조 하듯이 귀를 주무르면 몸이 유연해지며 기가 활발해진다.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 우선 귀는 부드러우면 좋다.  지금 당신의 귀를 반으로 접어보라. 조금 아플 것이다. 반으로 접어서 비벼주면 척추가 유연해진다. 눈이 피로하다면 귓불을 꾹꾹 눌러라. 소화가 안된다면 귀를 쭉쭉 잡아당겨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활발하게 기를 통하고 싶다면 귀의 연골을 마찰시킨다.  이렇게 귀를 누르고 당기고 마찰하면 귀는 더욱 부드러워지고 건강이 좋아진다. 귀를 만졌을 때 왼쪽 귀가 아프면 몸의 왼쪽이 나쁜 것이고,오른쪽 귀가 아프다면 몸의 오른쪽이 나쁜 것이다.
1128    [그것이 알고싶다] - 하모니카의 유래?... 댓글:  조회:5749  추천:0  2017-05-05
            하모니카의 유래   문헌상으로 기원전 3000년경의 ‘닝쿠와’(Nyn-kwa) 황제때 주발모양의 쉥(Sheng) 이라는 대나무로 만든 관악기를 만들면서부터라고 한다. 그 후 18세기경에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이 악기를 유럽에 처음 소개하여 이 악기의 영향으로 풍금, 아코디언, 섹소폰, 하모니카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오늘날의 하모니카 형태와 특성은 1821년 독일의 시계 제조공인 크리스찬 프리드리히(Christian Friedrich)와 루드비크 부슈만(Ludwig Bushman)이 15개의 피치파이프를 묶어서 한 면이 4인치인 네모난 악기를 만들면서 이것을 문데올린(Mundaeoline-독일말로 입이라는뜻)이라고 불렀으며, 건반없이 연주하는 최초의 악기로 전해집니다. 그후 1827년 독일의 슈텐베르크 시의 트로싱겐(Trossingen.방직공장 지대)이란 시골마을에서 한스크리스찬 메슈넬(Hans Christian meshunell)이라는 19세된 편물직공인 소녀가 아코디언을 개조해서 입으로 불 수 있게 만든 것이 하모니카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유명한 음악가인 베토벤, 슈베르트 등도 하모니카를 위한 교향곡이나 소나타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모니카가 일반대중에게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857년 24세 된 마티아스 호너(Matthias Honner)가 트로싱겐 이라는 곳에서 자기 아내와 2명의 직공을 데리고 650개의 하모니카를 만들어 보급하면서 부터였다. 그후 그의이름을 딴 호너(M.Honner)회사는 세계 최대 하모니카, 아코디언 제조 및 연구업체로 발전하였다.   동양에서는 하모니카 발명 68년 후인 1895년 일본에 전해져 1995년 하모니카가 들어 온지 100주년을 기념해 요꼬하마에서 세계대회를 주최한바 있으며, 2002년 제 4회 ‘아시아태평양하모니카페스티벌’이 앗쓰기(ATSUGI)시에서 7월 30일~8월 4일까지 열렸다. 일본 하모니카 제품도 세계적으로 알려지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국민생활악기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하모니카 유래   우리나라는 1920년 평양교보 하모니카합주단(이정석 단장)을 조직하여 활동한 것을 시초로 보고 있다. 그후 1935년 평양YMCA하모니카 밴드를 시작으로 1936년 평양쎈니하모니카 5중주단이 창단 되었다. 해방 전 1940년 일본의 야마하 하모니카합주단이 평양YMCA강당에서 연주회를 계기로 하모니카가 활성화 되다 6.25사변을 거친 후 1952년 고려하모니카 악단, 1957년 대한하모니카협회(회장 조응천박사)와 1965년 사단법인 대한하모니카협회(당시 공보부 등록)가 수많은 학교, 직장, 단체에 보급활동을 해오다 안타깝게 경영난으로 단체가 사라졌다가 다시 부활했고  1980년대부터 한국하모니카연맹과 함께 체계적으로 하모니카가 다시 보급되기 시작했고 2000년 국제 하모니카대회인 아시아태평양하모니카 페스티벌을 한국하모니카연맹 주최로 서울에서 개최했다.  현제 한국하모니카연맹, 사단법인 대한하모니카협회, 한국 하모니카교육협회, 한국 최대의 온라인 하모니카 동호회 하모사랑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하모니카가 보급되어지고 있다.             하모니카의 특징   크기와 기능이 다른 하모니카의 종류는 150여 가지나 되며, 하모니카 한가지악기로 독주, 중주, 오케스트라까지 연주 해낼 수 있는 악기의 음색과 음력을 갖춘 유일한 악기이며, 진한 애수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색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친숙함을 주며, 크기가 작아 간편하게 휴대가 가능하며, 가격이 비교적 저렴하여, 누구나 손쉽게 구입하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즐겨 연주할 수 있는 웰빙 생활악기로 세계적으로 수천만의 사람들이 애용하고 있다. 특히 하모니카는 유일하게 불고 마시면서연주하는 호흡하는악기로 심폐기능을 강화할 수 있어 건강에도 도움이 되며, 숨쉬기 힘든 만성폐질환, 호흡기질환, 천식, 고혈압, 고질병을 힘을 들이지 않고 불고마시는 하모니카요법으로 기능회복과 치료가 가능하다는 의학계와 건강정보사이트에 논문과 자료가 많이 나오고 있다. 또한 호흡의 강약과 혀의 움직임, 입 크기의 조절, 손 잡는 모양에 따라 하모니카만의 특이한 주법이 30여 가지나 되며, 멜로와 화음 반주를 겸할 수 있어“주머니속의 작은피아노”라고 말할  수 있다.         하모니카에 대하여   하모니카의 매력은 작은 악기로 포크나, 컨츄리음악에서 익숙하게 접해왔지만 그 외에도 동요, 명곡, 클래식, 재즈, 블루스 등 어떤 장르의 곡이라도 제한 없이 연주할 수 있으며, 요즘 들어서는 영화나 드라마 배경음악으로도 많이 애용되며, 리드군과 공명을 통하여 소리가나며, 불고 마시는 호흡과 사람의 입김을 통해서 표출되는 감성적인 악기로, 관을 통하지 않고 호흡이 직접 리드에 전달되기 때문에 호흡의 숨결이 살아있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매력있는 악기입니다. 특히 하모니카악기 하나로 세계하모니카대회(세계하모니카 페스티벌) 아시아 하모니카대회인 (아시아태평양하모니카페스티벌) 국제대회를 2년마다 각국 주최로 돌아가면서 개최 되고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제 3회 아시아 태평양 하모니카 페스티벌을 12개국에서 1300여명의 연주자가 2000년 8월 1일~ 4일까지 서울에서 한국하모니카연맹 주최로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근래에는 2005년 독일트로싱겐에서 제 5회 세계대회가 개최되었고, 2006년 8월3일~6일까지 대만(타이페이)에서 제6회 아시아태평양페스티벌이 열렸으며2007년 8월3일~5일까지 말레이지아에서 세계대회가 개최되었다. 국내 청소년들이 열악한 조건에서도 각종 국제대회에 참석하여 좋은 성적으로 국위를 빚내고 있다.   하모니카가 과거 초등학교 4학년 음악교과서에 게재되었다가 슬그머니 빠져버렸는데 온국민의 정서함양과 생활악기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하루빨리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우리가 잘 아는 동요 ‘옥수수하모니카’와 함께 하모니카가 복귀되어야 하며, 나아가 예중, 예고, 음대에 하모니카과가 외국처럼 빨리 개설되길 기대해본다. 하모니카만의 국제대회와 함께, 국내에서 오랫동안 하모니카만 제조해왔던 미화악기사에서 독주용 하모니카(복음,다이아토닉,크로매틱)를 몇 년전부터, 장조,단조 모든 key(조)를 생산해낼 수 있게되어, 국내에서도 요즘 하모니카가 활발히 재조명 되며, 여러 하모니카 합주단과 함께 하모니카 지도자의 보급 노력으로 하모니카의 가치가 재인식되며 음악의 3요소인 리듬, 멜로디, 하모니를 완벽하게 표현해내어 초등학교 음악 기초교육에 탁월한 하모니카가 수년내에 온 국민의 생활악기로 확실히 자리 매김할 수 있음을 확신한다.             하모니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마찰에 의해 소리를 내는 글라스 하모니카(벤저민 프랭클린이 유리 사발들을 순서대로 늘어놓아 만든 악기)와 1821년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부슈만이 만든 자유 리드 취주악기(吹奏樂器)인 문데올리네 2종류가 있다. 자유 리드식 하모니카는 직4각형의 작은 나무틀에 여러 개의 홈을 파서 그위에 자유 리드를 배열한 금속판을 덮고 다시 그 바깥쪽을 금속 커버로 씌운 구조이다. 2줄로 평행하게 늘어선 구멍으로 불면 소리가 나며, 필요없는 구멍은 혀로 막아 바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리드가 어긋나게 붙어 있어 바람이 상반된 방향으로 통과하기 때문에 온음(7음)을 내려면 불고 들이마시기를 차례로 계속해야 한다. 반음계(12음) 하모니카에서는 한 손가락으로 2줄로 나 있는 구멍의 한 쪽을 눌러 반음을 따로 연주한다. 음역은 2~4옥타브이고 하모니카 밴드에서는 베이스 하모니카가 포함된다. 뛰어난 기교를 가진 현대의 하모니카 연주자들의 출현에 자극받아 유명한 작곡가들이 하모니카를 위한 곡을 썼다. 가장 오래된 형태의 하모니카는 중국의 '생'(笙)으로 18세기에 유럽에 소개되어 오늘날 하모니카의 원리를 제공했다. '생'의 원리는 또한 하나의 통로로 바람을 불어 단추의 조종으로 적당한 리드에 이르게 하여 소리를 내는 악기 '심포니움'에도 적용되었다.               하모니카 (위키백과사전)   리드 하모니카 (harmonica)는 단일 구멍 (떨림판 방) 혹은 다수의 구멍 위에 입술을 놓고 공기를 불거나 빼면서 연주하는 프리 리드 관악기이다. 단일 구멍 속으로 공기를 불거나 빼면서 생긴 압력은 떨림판 혹은 다수의 떨림판으로 하여금 만들어낸 소리를 고저가 있게 울려퍼지게 한다. 각 방은 한 쪽 끝에 안정되고 나머지 끝이 풀린, 소리를 진동하고 만드는 느슨한 끝과 함께 복합적이고 가변적으로 조율된 황동 혹은 청동 떨림판을 가지고 있다. 떨림판은 단일의 음으로 미리 조율되었으며 각 음은 떨림판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긴 떨림판은 깊고, 낮은 음을 만들고 짧은 떨림판은 높게 조정된 소리를 만든다. 미리 조율된 떨림판은 방 안에 공기 흐림의 방향을 바꿈으로서 또다른 음색으로 바꿀 수 있다. 온음계, 트레몰로, 오케스트라용, 베이스 버전을 포함하는 많은 하모니카 형태가 있다. 하모니카는 블루스와 포크, 재즈, 서양 고전 음악, 컨트리 음악, 로큰롤, 팝 음악에서 이용된다. 하모니카는 특히 블루스 음악에서 "하프(harp)," "블루스 하프(blues harp)," 그리고 "입 오르간(mouth organ)"을 포함하는 다른 별명을 가지고 있다.              
1127    [그것이 알고싶다] - 기타의 유래?... 댓글:  조회:4086  추천:0  2017-05-05
       기타의 종류   클래식기타   줄이 나이론으로 되어있어 매우 부드럽고 지판의 너비가 넓어 줄을 누를때 다른줄을 누르는 실수가 적지만 넓은 지판때문에 때로는 연주가 어려울때도 있다. 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보조도구 없이 소리내는게 가능하며 음색은 부드러운 음색을 띈다. 보통 손가락으로 연주하고 코드를 잡고 스트로크(여러줄을 한번에 튕김) 하는 경우보다 코드음들을 손가락으로 따로 연주하거나 한음한음 멜로디를 연주하는 경우도 있다.         포크기타(일명 통기타)   줄은 금속재질로 되어있으며 탄성이 강한편이다. 통이 있기 때문에 별도의 보조도구 없이도 소리가 큰편이다. 음색은 약간 강한듯한 소리를 낸다. 줄의 탄력이 강하기 때문에 운지할 때 손가락 힘이 많이 들어간다. 넥이 클래식기타보다 좁기때문에 코드를 잡는데는 유리하지만 줄의 탄력이 강하고 줄 간격이 좁아 한음한음 운지하는데는 불리하다. 보통 코드를 잡고 피크를 이용해 스트로크를 하여 연주하며 간혹 손가락을 이용해 클래식기타처럼 연주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기타에 익숙한 사람은 통기타로도 애들립 연주를 하는 일도 있다.                              오베이션기타(통기타+일렉기타)   포크기타의 통속에 픽업(일종의 마이크 쯤으로 생각하면 된다)을 가지고 있어서 앰프(스피커 정도로 이해해도 무리없다)에 연결하여 연주가 가능한 기타 특성은 포크기타와 비슷하며 일렉기타처럼 앰프에 연결하여 연주할 수도 있고 포크기타처럼 앰프 없이 연주도 가능하다           일렉기타   전자기타라고도 부르는 일렉기타는 기타 단독으로는 소리가 매우 작다. 그러나 앰프에 연결하면 비로소 일렉기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줄은 금속성이지만 통기타처럼 직접 소리를 울리는게 아니라 픽업이라는 부품을 통해 소리를 잡아 앰프로 증폭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에 줄의 탄력이 약해 운지하기가 매우 쉽다. 세게 누르지 않아도 깨끗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일렉기타는 보조도구들이 매우 많이 필요한 악기이다. 기본적으로 기타소리를 내기위해서는 앰프가 필요하고 이 앰프에 기타를 연결할 잭이 필요하다.   기타를 직접 앰프에 연결하여 나는 소리를 클린톤이라고 하는데 이 소리는 (물론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통기타 보다 가볍고 조금은 밋밋한 음색을 지닌다. 일렉기타의 백미는 역시 이펙터. 이펙터란 기타와 앰프 중간에 연결되는 보조도구로서 기타의 음색을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이펙터는 디스토션, 딜레이, 오버드라이브가 있다. 디스토션은 흔히 하드락밴드에서 들리는 찡~ 하는 소리를 만드는 이펙터이다. 딜레이는 실제 연주된 음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다시 들리는 효과를 내며 오버드라이브는 락/메탈 밴드에서 기타 솔로를 할때 휘몰아치는 듯한 소리를 낸다.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이펙터들이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           베이스기타   일반 기타보다 한옥타브 아래의 음을 내는 기타. 보통은 4줄짜리가 많고 5현, 6현 베이스도 있기는 하다. 기타의 종류라고 부르기가 좀 애매한것이, 베이스기타는 기타와는 역할 부터가 다르고 베이스기타 만으로 독립적인 훌륭한 악기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기타의 한 종류라고 봐야하는지는 좀 애매하다.             특이한 기타 이 기타는 모양도 특이하지만 한정이라서 구입하고 싶지만 쉽지않을듯 종류는 이렇습니다.                   기타 모델 McPherson 양궁의 주요 기능적 특허권을 갖고 있는 세계적 기업 CEO이자 CCM 뮤지션이기도 한 맷 맥퍼슨이 과학적으로 완벽하고 예술적으로도 최고인 어쿠스틱 기타를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설립한 회사가 바로 맥퍼슨 기타 아래와 같은 현신적인 기술과 설계로 지극히 소량만 제작되는 맥퍼슨 기타는 현재 전세계 뮤지션은 물론 애호가들로 부터도 극찬을 받고 있는 명실상부한 하이테크 & 하이엔드 기타이다. 모든 모델이 상판의 사이즈는 같지만 측판의 폭에 따라 4종의 모델을 선보이고 있다.    
1126    [그것이 알고싶다] - 생일노래의 유래?... 댓글:  조회:4431  추천:0  2017-05-03
19세기 미국 켄터키주 유치원 보모로 있던 밀드레드와 패티라는 자매가  원생들에게 아침 인사를 가르치기 위해 ‘굿 모닝 투유’를 작곡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듣고 매료된 로버트 콜만이 어린이 애창곡집을 편찬하면서  ‘해피 버스데이 투유’를 2절 가사로 덧붙여 출판한 것이 생일축하 노래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노래가 뮤지컬로 만들어져 무대에 오를 정도로 유명하게 되었을 무렵  작곡한 두 자매의 막내 동생 제시카가 저작권을 주장하게 되어 원작곡자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저작권은 저작권자 사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소멸되기 때문에  지금은 세계 어디서나 또 누구든지 마음놓고 불러도 어느 누구도 저작권료를 요구할 수 없다.  그래서 아이 생일은 말할 것도 없고 어른 생일에도 너나 할 것 없이  ‘해피 버스데이 투유’로 통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케잌의 유래 케익은 서양에서 전래된 음식 중 이제는 우리 문화에서도 매우 친숙해진 것 중의 하나이다.  흔히 "축하", "무병장수에 대한 기원", "약혼 및 결혼등의 경사" 등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필수 음식이 된 케익은 대중예술의 총아인 영화에서도 극 중 긴장감이나 사실감을 부각시켜 주기 위해 아주 요긴하게 쓰이기도 한다. 생일 케익을 촛불로 장식해서 생일파티를 갖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인류학자들은 "중세 독일 농민들 사이에서 '킨테 페스테'라고 하는 어린이를 위한 생일 축하 행사가 기원이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킨테 파스테'는 생일을 맞은 아침에 눈을 뜨면 촛불로 장식된 케익을 아이 앞에 놓으면서 시작되며, 이 촛불은 저녁 식사 때 온 가족이 케익을 먹을 때가지 계속 켜 놓았다. 특히 촛불은 아이나이보다 하나 더 많게 하여 밝혀 놓았는데 하나 더 많게 밝힌 그 촛불은 "생명의 등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생일을 맞은 아이들은 선물과 음식을 나눠 먹고 소원을 빌며 촛불을 끄는 오늘날의 관습도 바로 독일의 '킨테 페스테'에서 유래된 것으로 "촛불은 단숨에 끌 것" "소원은 곡 비밀에 부쳐야 할 것"등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요즈음 청소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케익 크림 씌우기 등은 '루킹래징(Rooking Razzing)'이라 불리우는서양인의 오랜 관습 중 하나이다. 이것은 "신체에 피해가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벌이는 장난으로 상대방에게 호의적인 태도로 받아들어져 웃고 즐기며 친분관계를 확인하는 풍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 생일뿐만 아니라 축하할 때나 약혼,결혼등등 너무도 많이 먹는 케익은 언제부터 먹게 되었을까요? 처음 케익의 형태를 갖춘 나라는 이집트입니다. 그러나 그땐 얼음으로 만든 샤베트 였어요. 그 후 8-9C 그리스에서는 이미 달걀,유지를 넣어 만든 케익이 100여종에 달았답니다. 빵과 케익 명칭이 명확하게 분류된 것은 로마제국시대때 였다 하구요..  11-13C는 십자군 원정으로 동양에서 설탕과 각종 향신료가 유입되어 케익의 질과 맛을 높였구요. 산업혁명을 통해 대중화가 되었으며 20C에 들어서 다양화 국제화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생일날 케익에 촛불 켜서 노래 부르고 소원 빌고 촛불 한번에 불어서 끄고.. 거의 의무처럼 되어버린 절차죠.. 중세 독일 농민 사이에서 '킨테 퍼스테'라고 하는 어린이 생일날에 처음으로 축하 행사를 했다는 인류학자들의 주장이 있습니다. 그땐 촛불 하나를 더 붙였는데 그 하나의 촛불의 의미는 생명의 등불이었다고 하네요.. 또 하나의 절차인 생일날 주인공 얼굴에 케익 크림 씌우기는 서양인의 오랜 관습 중 하나입니다.  한 사람의 파티에서 행했던 일이 지금은 전 세계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하고 있다니 좀 놀랍지 않으세요?      
1125    [그것이 알고싶다] - 만화의 유래?... 댓글:  조회:5614  추천:0  2017-05-02
만화의 역사와 종류 만화는 그림을 그리는 형식의 하나이다. 자유로우면서도 과장되게 표현하고, 현실을 비판하는 풍자성(비꼼)이 있으며 모든 사람이 알기 쉽고 유머(익살)가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과장 · 생략 · 비유 등의 수법으로 그리는 점이 사실적인 그림과 구별된다. 유럽에서는 캐리커처, 미국에서는 카툰, 우리 나라 · 일본 · 중국에서는 만화라고 한다. 1. 역사 만화는 처음에는 일상 생활과 사회를 빗대어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가장 오래 된 만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를 비롯하여 이집트의 신전에 새겨진 새와 동물들이 만화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그리스 · 로마 시대를 거쳐, 중세 르네상스기에는 목판화 · 동판화의 형식으로 많이 등장하였다. 산업 혁명 이후에는 영국에서 우수한 만화가들이 많이 나타나 현대 만화의 기초를 이루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19세기 무렵부터 인쇄술과 신문의 발달에 따라 만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1909년 대한민보에 실린 시사 만화를 '삽화'라고 불렀으나 1920년대에는 '철필 사진', '그림 이야기'라고 부르다가 1923년 이후부터는 만화로 부르게 되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순수 만화가는 김규택이다. 그는 1930년대의 잡지에 수많은 단편 만화와 함께 만화를 연재하였다. 1935년에는 노수현이 월간 〈소년 중앙〉에 〈돈주머니〉라는 어린이 연속 만화를 그렸고, 그 뒤 일간지의 어린이 난에 어린이 만화를 그렸다. 광복 후 김용환은 어린이 잡지〈서울 타임스〉에〈코주부〉를, 김의환은 〈소학생〉에〈속담풀이〉를 연재하였다. 1960년대부터 어린이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소년 동아 일보 · 소년 조선 일보 · 소년 한국 일보 등에 단편 만화와 연재 만화가 실렸다. 1990년대에는〈점프〉〈나나〉〈터치〉등의 만화책이 나와 인기를 끌었고 만화로 만든 학습용 서적도 나오고 있다. 초기의 만화는 어린이와 일부 사람들의 보고 즐기는 물건처럼 취급되었으나 점차 만화의 비중이 커졌다. 최근에는 만화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영화 · 텔레비전과 함께 현대 사회에서 대중 예술의 한 분야로 자리를 잡고 있다. 2. 종류 형식에 따라 한장 만화(한 장의 만화 속에 모든 내용을 간추려 나타낸 것), 계속 만화(2개 이상의 장면이 이어져 하나의 내용을 이룬 것) 등이 있다. 내용에 따라 정치 · 경제 · 문화 등을 풍자한 시사 만화, 예술성을 목표로 하는 유머 만화, 줄거리가 있는 긴 이야기를 장면마다 순서 있게 엮은 극화, 만화 영화나 텔레비전용의 단편 만화인 애니메이션 등이 있다. 여러 종류의 만화책 만화 학습서. 어려운 내용을 만화로 엮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만화가 만들어지기까지 ① 연필로 지문을 쓰고 밑그림을 그린다. ② 연필선을 검은 펜으로 자세한 곳까지 그린다. ③ 배경을 그리고 검은 곳을 붓으로 칠한다. ④ 무늬 등은 스크린톤을 잘라 붙인다. ⑤ 더러워진 곳을 수정하여 완성시킨다. ⑥ 완성된 원고에 사식을 붙이고 인쇄를 한다.   [Daum백과] 만화 – 학습그림백과, 천재교육 편집부, 천재학습백과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124    [그것이 알고싶다] - 영화의 유래?... 댓글:  조회:8992  추천:0  2017-05-02
1. 영화의 발명  영화의 발명물체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재현코자 하는 인간의 꿈은 태곳적부터 있어 왔다. 지금부터 2∼3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에스파냐 알타미라의 라스코 동굴에는 다리가 8개인 황소의 벽화가 있는데, 이는 바로 인류의 그와 같은 꿈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1초에 24개의 정지된 화상(畵像:frame)을 연속적으로 돌려 인간의 잔상(殘像) 현상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영화가 발명되기까지는 기원 2세기부터 시작하여 무척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완구식(玩具式) 움직임을 보여주는 장치인 타우마트로프(thaumatrope)나 페나키스트로스코프(phenakistroskope), 그리고 주트로프(zootrope) 등 19세기에 들어와 움직이는 그림을 보여주는 기계가 나타났지만 영화의 발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사진술(寫眞術)의 발명이었다. 1823년 프랑스의 N.니에프스와 다게르 등에 의해 사진술이 발명되었고, 1878년 미국인 E.마이브리지가 24장의 달리는 말[馬]의 모습을 촬영한 데 이어, 프랑스인 J.E.마레이가 사진총(寫眞銃)을 고안해냈으며, G.이스트먼이 셀룰로이드에 의한 ‘롤 필름(roll film)’을 제조한 데 힘입어 에디슨이 혼자서 움직임을 볼 수 있는 키네토스코프를 1889년에 발명하였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완구식 원리와 사진술과 필름 및 위에 든 그 동안의 몇 가지 실험 등을 이용하여 프랑스의 L.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라프라는 촬영기와 영사기를 발명하여, 95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영화를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에디슨은 이보다 1년 늦게 여럿이 볼 수 있는 비타스코프를 발명했고, 이어 독일의 E.스클라다노브스키와 영국의 R.W.폴은 각각 독자적으로 비오스코프를 발명하였다. 이렇듯 영화는 19세기가 거의 끝날 무렵 비슷한 시기에 여러 나라에서 과학문명의 발달이 가져다준 필연적인 산물이었다. 2. 영화의 발달  카메라를 일정한 위치에 고정시켜 피사체를 촬영하는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는 영상의 사실성(寫實性)과 기록성(記錄性)이나 사건의 현장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나타났지만, 영화를 속임수(트릭)와 몽환적(夢幻的)인 이야기로서 구경거리로 만든 것은 G.메리에스였다. 영화 초창기의 이 두 가지 길은 전자가 후에 기록영화나 뉴스 영화 등의 길을 열었고, 후자는 극영화의 길을 개척케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연극적 방법이었고 영화상으로 전진시킨 것은 미국의 E.S.포터로부터 시작하여 미국 영화의 아버지요 영화문법(映畵文法)과 영화언어(映畵言語)의 완성자인 D.W.그리피스에 이르러 마침내 무르익었다. 《국가의 탄생》(1915) 《인톨러런스》(16) 등의 작품에 이르러 비로소 영화는 고유한 언어를 가진 예술적 표현의 매체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화는 예술이나 오락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자본이 필요했고, 이 자본은 급기야 영화기업을 탄생케 하였다. 프랑스의 파테나 고몽 등 초기의 영화 제작사들, 그리고 에디슨을 비롯한 미국의 독점업자들이 영화기업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했으며, 그 후 대제작사들에 의해 영화는 산업으로 발전, 미국에서는 한때 4대 산업의 하나로까지 부상하였다. 또한 영화에는 배우들이 중요한 매력으로 등장하여 미국에서는 ‘스타 시스템’을 이루기도 했다. 새로운 예술매체를 얻은 미국은 M.세넷의 희극을 비롯하여 서부극(西部劇) 등 독창적인 장르를 개척해나갔으며, 희극의 천재 C.채플린은 《황금광시대(黃金狂時代)》(25) 등을 통해 영화의 독특한 희극성을 살리면서 인간본능의 추구를 묘사해나갔는가 하면, 사실주의의 극치인 E.슈트로하임의 《그리드》(23) 등이 미국 영화예술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 ‘포토제니(photog暴nie)’이론을 제창한 프랑스의 L.델뤽을 중심으로 모인 일단의 감독들은 이론과 작품제작을 겸하였으며, 그 중 A.강스는 《철로(鐵路)의 백장미》(23)와 3면화면(三面畵面)에 의한 《나폴레옹》(27) 등의 문제작을 발표하였다. 독일에서는 R.비네의 《칼리가리박사》(19)를 비롯하여 F.무르나우의 《최후의 인간》(24), F.랑의 《니벨룽겐》(24) 등 표현파영화가 등장하여 독일영화의 황금기를 장식하였다. 이것은 W.파프스트의 심리적인 기법에 의한 영화들로 이어졌다. 스웨덴에서도 V.셰스트룀, M.스틸레르 등의 장려(壯麗)한 인간 드라마가 북유럽의 독특한 자연풍경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혁명 이후 소련에서는 몽타주 이론을 중심으로 V.푸도프킨의 《어머니》(26), S.M.에이젠슈테인의 《전함(戰艦) 포템킨》(25), 그리고 시적 상징주의(象徵主義)의 감독인 우크라이나 출생의 A.도브젠코 등이 독특한 세계를 펼쳐갔다. 한편,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상업주의 영화에 반발하는 순수한 영화예술운등의 하나인 아방가르드 영화[前衛映畵]들이 나타났다. R.클레르의 《막간(幕間)》(24), L.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28) 등이 프랑스에서, 독일에서는 추상화가들인 H.리히터, O.피슁거, V.에겔링 등에 의한 기하학적 도형이나, 선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한 아방가르드 영화가 등장하였다. 이와 같이 무성영화시대(無聲映畵時代)에 꽃핀 각국의 영화예술을 마무리짓는 것은 프랑스의 문제작인 C.드레위에르의 《잔다르크의 수난》(28)이었다. 영화는 27년 소리를 갖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워너브러더즈사에서 창안해낸 발성영화(發聲映畵:토키) 《재즈 싱어》의 출현은 영화가 시각적인 면에다 청각적인 위력을 덧붙임으로써 이중의 칼날을 지니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초기의 발성영화는 R.클레르의 《파리의 지붕 밑》(30) 《파리제(祭)》(33) 등에서 화면과 음향의 예술적인 대위(對位)를 위해 합창 등을 도입하여 발성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발성영화기를 맞은 프랑스와 미국의 30년대는 시나리오가 중심이 된 시기였다. 극성(劇性)이 중요시되던 이 시기는 드라마적인 구성에 의해 약속된 틀 속에서 영화를 발전시킨 것이다. 프랑스의 시적 사실주의의 감독인 J.페데르의 《외인부대(外人部隊》(34) 《여자만의 도시》(35), J.르누아르의 《위대한 환영》(37) 《게임의 법칙》(39), J.뒤비비에의 《망향(望鄕)》(37) 《무도회의 수첩》(37), M.카르네의 《안개 낀 부두》(38) 등 사실적인 작품이 등장, 시대적인 우울과 염세적인 사상을 담은 C.스파크와 J.프레베르 등의 시나리오에 의해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를 장식하였다. 미국에서는 뉴딜정책 이후 미국 사회의 낙관주의가 주조(主潮)를 이루며 F.캐프라의 《어느날 밤에 생긴 일》(34), J.포드의 사실적인 작품 《밀고자(密告者)》(35)나 《분노의 포도》(40), W.와일러의 《공작부인(孔雀夫人)》(36) 등이 R.리스킨과 D.니콜스의 시나리오에 의해 제작되어 발성영화의 성숙기를 이루었다. 미국의 천재 오손 웰스가 감독·각본·주연한 《시민(市民) 케인》(41)은 디프 포커스(deep focus, 또는 pan focus)를 사용, 공간의 깊이를 추구하여 영화미학적(映畵美學的)인 혁신을 이룩한 문제작이었다. 이 영화는 그 독특한 소급법(遡及法)에 의한 스토리 진행방법과 함께 시간의 지속성을 유리시키는 기법으로 영화사에 영원히 기록될 금자탑을 쌓았다. 마침내 영화는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매체로 성장한 것이다. =========================   요약 1894년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시작으로 영사기들이 등장했으며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현재와 같은 형식의 영화인 시네마토그래프를 공개하자 에디슨은 무성영화의 표준으로 확대 발전시켰다. 이후 뤼미에르 형제가 카메라·영사기·인화기를 일괄한 시네마토그래프를 개발함으로써 영화의 상영이 가능해졌다. 다양한 기술의 발달로 영화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서 극장이 커짐에 따라 오디오 증폭기로 음향을 키워야 했고 필름식 음향장치를 개발함으로써 소리문제를 해결하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다층식 발색법을 활용한 대형영화 제작도 쉬워졌다. 현대 영화계는 텔레비전에 빼앗긴 관객을 유혹하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영화계는 그 대안으로 대형영화 시네라마와 입체영화 3D를 개발 시험하고 있다. 목차 개요 사진 소리 색채 와이드 스크린(대형화면) 개요 1894년 4월 14일 영화는 어느 발명가의 이론과학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토머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그것이다. 이것은 1명씩 동전을 넣고 보는 '들여다보는 영화'였는데 약 15초 동안 실물과 똑같이 움직이는 사람과 물체의 필름을 구경할 수 있었다. 1895년말에 런던·파리·뉴욕에서 각종 영사기가 완성되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루이·오귀스트)는 파리에서 시네마토그래프를 공개했다. 이것이 현재와 같은 형식의 최초의 영화였다. 곧이어 에디슨이 발명한 비타스코프가 1896년 4월 23일 뉴욕에서 공개되었다. 그해에는 미국 및 각국에서 여러 가지 영사기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흑백의 그림자로써 살아 있는 움직임을 재현시켜 보이는 신기한 구경거리에 대하여 갑자기 높아진 대중의 강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거의 75년에 걸친 국제적 규모의 연구·실험·발명의 성과가 축적된 것이었다. 운동중인 물체의 광학적 특징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영국의 피터 마크 로제로부터 시작되어 존 허셀, 마이클 패어리 등에게 영향을 주어 여러 가지 실험·연구를 촉진했다. 유럽에서는, 벨기에의 조제프 앙투안 플라토, 오스트리아의 지몬 리터 폰 슈탐퍼 등이 운동의 위상을 나타내는 일련의 그림을 보는 방법을 개발했다. 또 1853년 오스트리아의 폰 우하티우스는 원반과 환동의 그림을 결합해서 스크린 위에 애니메이션을 영사했다. 플라토와 슈탐퍼의 연구는 조이트로프의 발명에 공헌했다. 이것은 회전하는 원통 틈새로 들여다보면 속의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장치이다. 에밀 레노가 발명한 같은 원리에 의한 프락시노스코프는 더욱 정교한 것이었다. 그는 계속 이 기계를 개량했고, 1892년에는 파리에서 테아트르 옵티크('시각 극장')라는 이름으로 움직이는 그림을 공개했다. 이것은 운동하는 모습을 묘사한 수백 개의 그림을 연결해 15~20분 길이로 편집한 이야기 필름이었다. 1900년까지 레노는 이러한 움직이는 그림을 공개했는데, 진짜 영화와의 경쟁에는 이기지 못하고 흥행을 중지했다. 사진 영국에서 로제가 시각적 성질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을 무렵, 프랑스에서는 실용적인 사진기술의 연구가 진전되고 있었다. 1822년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는 조잡하지만 연속성 있는 사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루이 다게르의 협력을 얻어, 1839년에 다게레오타이프(은판사진)라고 불리는 실용적인 사진술을 개발했다. 또 그해 영국의 윌리엄 헨리 폭스 탈벗은 근대 사진술의 기초가 된 네거와 포지티브에 의한 인화법을 개발했다. 1860년 미국의 콜먼 셀러스는 처음으로 사진을 조이트로프의 원리와 결합시키는 데 성공, 이듬해 키네마토스코프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따냈다. 이 방법을 응용하여 1870년에 헨리 레노 헤일은 파즈마트로프의 영사를 1,600명의 관객에게 공개했다. 1872년 영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는 기사 존 D. 아이잭스와 공동으로 셔터가 장착된 12대(후에 24대)의 카메라로 이루어진 1벌의 장치를 고안하여 질주하는 말의 움직임을 분석한 사진을 찍었다. 그후 셔터 장치가 개량되어, 1877년에는 동작이 빠른 피사체도 촬영할 수 있게 되어 노광(露光) 속도 1/2,000초라는 단시간에까지 이르렀다. 영화 발전상의 다음 단계는 고속의 속사 사진이 가능한 단일 카메라의 개발이었다(모션 픽쳐 카메라). 프랑스의 에티엔 쥘마레가 1882년에 발명한 '사진총'이야말로 이 분야에서 성공한 최초의 것이었다. 사진총이란 라이플 총 모양으로 윤동(輪胴)에 인화지판을 끼우고 방아쇠를 당겨 연속적으로 노출시키는 장치였다. 그후 10년간 그는 조수 조르주 도메니노와 함께 일련의 실용 카메라의 개발을 계속하여, 1888년 크로노포토그래프를 발명, 이에 의해 매초 60매의 사진 촬영이 가능해졌다. 1885~95년 10년 동안에 전세계의 발명가들은 사진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일에 주의를 돌렸다. 영국의 윌리엄 프리스 그린을 비롯한 몇 사람은 1890년을 전후해 촬영기·영사기 등의 특허를 땄지만, 상업적 성공은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에디슨은 조수 윌리엄 케네디 로리 딕슨과 함께 띠 모양의 사진 필름 등의 실험 고안에 힘썼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딕슨은 조지 이스트먼이 1889년에 제조하기 시작했던 질화면(窒化綿)을 기초로 한 사진용 필름을 채용하여 1890년에 키네토그래프를 개발했다. 그후 에디슨이 그것을 다시 키네토스코프로 발전시켰다. 이것은 대체로 높이 122cm, 너비 61cm 크기의 기계로 필름은 내부의 확대경과 광원 사이를 끊임없이 움직이며, 회전 셔터에 의해 화면이 순간적으로 보이게 되어 있다. 필름의 길이는 50피트가 한도이고, 화상은 매초 48컷의 속도로 들여다보이는 구멍의 앞을 지나가는데, 1회 상영 시간은 13초가량이었다(프레임). 화면수는 뒤에 매초 16컷으로 줄었지만 이것이 무성영화 시대의 표준이 되었다(토키의 경우는 매초 24컷). 필름의 너비(35㎜)나 화면의 형상, 필름을 보내는 스프로킷(필름 구멍과 맞물려 필름을 움직이게 하는 원형의 톱니바퀴) 등도 대형 화면이나 대형 필름이 출현하는 1952년까지는 표준이었다. 키네토스코프는 실험실에 방치된 채 있었는데, 1894년 4월 14일 처음으로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그것을 공개하는 축음기관이 개관했다. 가을에는 몇 대가 외국으로 수출되었다. 이윽고 유럽에서도 영화는 최종 발전단계를 맞이 했다. 에디슨의 발명이 계기가 되어 영국에서는 로버트 W. 폴이 포터블 카메라를 고안했고, 독일에서는 스크라다노프스키 형제가 비오스코프를 개발했다. 프랑스에서는 뤼미에르 형제가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와 레노의 테아트르 옵티크의 투영화상을 결합시켜서 그것을 영사하는 시네마토그래프를 고안하여 1895년 2월 13일 특허를 받았다(오귀스트 뤼미에르, 루이 뤼미에르). 이것은 카메라·영사기·인화기를 일괄한 것이었다. 시네마토그래프는 1895년 12월 28일 그랑 카페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화의 탄생이었다. 이것은 즉시 유럽으로 퍼졌고, 이듬해에는 미국에까지 침투하여 에디슨의 경쟁 상대가 되자 에디슨 자신도 다른 발명가에 대한 대항 때문에 키네토스코프 영사기의 개발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드빌 레섬, W.K.L. 딕슨, 잔 릴로이, 유진 로스트 등도 각기 독자적인 카메라와 영사기를 발표했고, 1895년 토머스 아멧이 현대 영사기의 원리를 고안했다. 이것은 연속되는 영상을 정지시키고, 그동안은 영상이 움직이고 있을 때보다도 많은 광선을 받을 수 있는 몰타 십자형의 화면전송장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다 필름에 구멍을 내어 필름이 영사기 속을 통과할 때의 부담을 경감시켰다는 점에서 에디슨이나 뤼미에르의 영사기와는 달랐다(아멧 루프). 이것이 후에 비타스코프로 알려지게 되었다. 1896년 에디슨의 영사기로 공개된 것은 이 아멧의 기계장치이다. 초기 영화는 미국·유럽 모두 50피트의 필름을 사용했고, 상영시간은 1분이 채 안 되었다. 모든 발명에 전기의 응용을 생각하고 있었던 에디슨은 거의 피아노만한 전지로 움직이는 카메라인 키네토그래프를 제작했고, 이것을 수용하기 위해 '죄수 호송차'라고 일컬어졌던 세계 최초의 스튜디오를 세웠다. 이것은 타르 칠을 한 종이를 바른 조그마한 스튜디오로, 거기에서 연예·서커스 같은 구경거리와 뉴욕의 인기있는 연극 따위가 상연되었다. 한편 유럽인은 비교적 가볍고 기동성있는 수동식 카메라에 만족했으며 어디로든 가볍게 떠나 무엇이든지 촬영했다. 따라서 초기 영화는 행진이나 열차의 도착, 도시의 군중 등 현장감이 강조되었다(기록영화). 이 특징은 영화의 특성과도 잘 어울려서 에디슨도 그뒤를 따랐다. 연예장의 구경거리의 하나로 등장한 영화는 영사기의 능력에 맞추어 필름의 길이는 1,000피트로 정해져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연예나 구경거리 1편의 상연시간과 같았으며, 이 길이가 현재 1권(305m)의 기준이 되었다(릴).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단순한 움직임의 신기함만으로는 싫증을 내게 되었기 때문에 제작자는 보다 야심적이고 이색적인 소재를 찾게 되었다. 최초로 이야기를 가진 영화(스토리 영화)가 상영된 것은 1897년 호라만이 전문 배우와 본격적인 세트를 사용하여 제작한 3권짜리 수난극일 것이다. 파리에서는 조르주 멜리에스가 카메라 트릭을 주로 한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환상적인 상상력을 구사하여 도처에서 인기를 얻었다. 영국에서는 1900년 직후 이른바 '브라이튼파'의 활약이 활발해져 즉각 창조적인 영화 제작에 진출했다. 그러나 스토리 영화의 진정한 탄생은 1903년 에디슨 회사의 에드윈 S. 포터가 감독한 〈대열차 강도 The Great Train Robbery〉로 시작된다. 고작 8분 정도의 1권짜리였지만, 거기에는 현대의 편집기술의 싹이 보였고, 그 급속한 인기상승에 의해 여기에 니클오디언(5센트 극장)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대열차강도〉는 영화의 예술·산업의 2분야에 있어서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 소리 영화 초기부터 발명가는 영사에 소리를 접합시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에디슨은 처음부터 카메라는 축음기를 위해 제작한 부수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레온 고몽이 1900년 이전에 콩스탕 코크랑이나 사라 베르나르 등의 명배우가 출연하는 단편 토키 영화 연작을 제작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영상에 축음기의 음성을 일치시키려고 한 것이다. 또 이것은 많은 발명가들이 생각했던 바였는데, 에디슨도 1권짜리 토키를 몇 편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로스트가 필름에 직접 녹음하는 방법으로 특허를 내고 전시했다. 1912년경 영화 흥행은 니클오디언의 단계를 끝냈다. 극장이 커짐에 따라 토키 영화는 소리의 증폭 문제에 직면했다. 그러나 로스트의 기계나 초기의 축음기로는 홀 구석구석까지 퍼질 만한 충분한 음량을 낼 수는 없었다. 이 결함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리 디 포리스트가 개발한 셀레늄 진공관을 사용한 오디오 증폭기에 의해 해결되었다(진공관 검파기). 제1차 세계대전 후 필름에 소리를 옮기는 방법이 개발된 데서부터 문제는 해결되었고, 거기에서 뒷날의 폭스 무비턴이 생겨났다(포노필름). 한편 바이타폰을 사용한 디스크식 부분 토키인 〈돈 주앙 Don Juan〉이 1926년에 워너브러더스사에 의해 발표되었고, 이듬해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에 의해 영화계는 일약 토키 시대로 돌입, 얼마 후 디스크식 음향장치는 필름식 음향장치로 대체되었다. 1930~52년은 기술혁신시대로 일컬어지지만 영화의 음성기술은 본질적으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1952년 시네라마의 등장은 스피커를 스크린 뒤로부터 해방시켰고, 해저드 리브스가 개발한 7채널 방식에 의해 보다 충실도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1953년에 등장한 시네마스코프에는 경제적 이유로 퍼스펙트 A. 사운드 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색채 채색되어 움직이는 화상에 대한 탐구도 영화시대 이전부터 시도되고 있었다. 20세기초까지는 필름의 화면마다 손으로 채색을 했는데, 프랑스의 파테사는 1905~30년경 반자동으로 인쇄해넣는 방식(형치법[stencil system])을 채택하고 있었다(스텐실). 1906년 영국에서 찰스 어번, G. 앨버터 스미스가 2색법의 키네마컬러의 특허를 땄는데 촬영과 영사 때 렌즈 앞에 빨강과 녹색의 회전 필터를 붙여 그것을 통해 발색시키는(필름 속도는 1초에 32컷)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색채는 매우 불완전했다. 1915년 허버트 캘머스와 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연구 팀에 의해 개발된 테크니컬러(선명한 색채)는 3색분해법에 의한 컬러 사진 재판법의 첫걸음이 되었다. 그리고 월트 디즈니의 〈숲속의 아침〉(1932)은 그 방법에 의한 최초의 영화가 되었다. 거기에 루벤 마물리언의 〈베키 샤프 Becky Sharp〉(1935)는 예술적인 최초의 장편 컬러 영화로서 주목을 받았다. 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1939)의 흥행 성공으로 컬러 영화 시대의 도래가 확실해졌다. 테크니컬러에 이어 다층식 발색법에 의한 미국의 코닥컬러, 독일의 아그파컬러, 이탈리아의 퍼라니아컬러가 실용화되었다. 다층식 발색법은 촬영이 간단하기 때문에 이스트먼 코닥과 안스코 계통은 표준형일 뿐만 아니라 대형영화의 제작도 용이하게 했다. 와이드 스크린(대형화면) 1947년에 최전성기를 누렸던 미국의 영화 산업도 1948년말경부터 관객을 텔레비전에 빼앗기자 영화계는 그 타개책으로 1952년 대형영화 시네라마와 입체영화 3D(three dimensions picture)를 개발했다(영화관, 영사막). 3D 영화는 관객이 색안경을 껴야 했으므로 흥행에 실패했고, 오래지 않아 사라졌지만, 3벌의 필름을 이어 합친 만곡된 대화면과 6개의 사운드 트랙으로 완전한 입체음향을 재현시킨 시네라마는 그 입체적인 박진감으로 인기를 끌었다. 더구나 1952년에는 20세기폭스사의 대형영화 시네마스코프도 발표되었다. 이것은 세로 대 가로의 비가 1 대 2.3의 스크린으로 3개의 입체음향장치를 가졌으며, 제1회 작품 〈성의(聖衣) The Robe〉(1953)의 대성공 이후, 순식간에 미국은 물론 유럽·아시아에까지 보급되었다. 얼마 후 시네라마와 시네마스코프와 같은 효과를 노린 비스타비전에 기타의 여러 방식이 서양 여러 나라에 등장했다. 또한 〈오클라호마! Oklahoma!〉(1955)는 70㎜ 필름을 사용한 토드 AO(Todd-AO) 방식의 첫작품이었다. 그리하여 1890년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이래 표준이었던 35㎜로부터 영화용 필름의 크기는 대폭적으로 바뀌었다. 이어 테크니컬러가 개발한 테크니라마를 비롯하여 갖가지 대형화면이 등장했으나, 모두가 시네라마, 시네마스코프, 비스타비전(1954), 토드 AO 등의 원리를 기초로 한 것들이었다. ===============================   영화란 영화는 촬영기로 움직이는 모습을 연속적으로 찍은 필름을 그것을 영사기로 스크린(화면)에 비춰 움직이는 영상을 보이게 하는 예술이다. 필름에 기록된 영상을 영사기에 걸어 매초 16도막 또는 24도막의 조금씩 다른 여러 사진을 계속하여 비춤으로써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필름의 각 도막을 빠른 속도로 차례로 비추어 나가면, 우리 눈에는 마치 상의 내용이 잇달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은 사람의 눈에 어떤 상이 비치면 그 상은 약 15분의 1초 동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화 영화를 보고 있는 어린이들. 영화는 빠른 시간 안에 가장 널리 퍼진 예술이다. 영화의 발달 1889년에 미국의 에디슨이 35mm 영사기를 발명하고, 필름 가장자리에 구멍을 뚫어 영사기를 돌리면 필름이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 기계는 위에서 돋보기를 통하여 사진을 들여다보게 되어 있어 불편하였다. 이 영사기가 세계 각국에 공개되자,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는 이것을 응용하여, 1894년에 혼자 보는 대신 스크린에 확대시켜 비추는 영사기를 발명하여 여러 사람에게 발표하였다. 그 뒤로 세계 각국에서 다투어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의 영화는 천연색이 아닌 흑백 영화일 뿐 아니라 소리가 나지 않는 무성 영화였다. 그래서 영화를 상영하려면 자막을 이용하거나 옆에서 변사가 장면에 맞추어 설명을 해 주어야 했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1926년과 1935년에 각각 소리가 나는 토키와 천연색 영화를 만들어 낸 뒤로 영화는 대중 예술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어서 입체 영화와 시네라마 · 시네마스코프 같은 큰 화면의 영화가 등장했다. ▶ 영화 기기의 발달 초기의 영화 카메라 뤼미에르 형제가 1894년에 만든 영사기 프라키시노스코프. 회전하는 둥근 통 안에 연속되는 그림을 말아 놓고 중심에는 10개의 거울을 붙여 돌려가며 보았다. 영화의 제작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것은 제작사가 작품을 결정하거나 제작비를 모으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작품을 결정하고 제작비가 모이면 제작자는 연출자를 결정한다. 영화의 총지휘자인 연출자는 작품을 보고 스태프와 배우를 정한다. 스태프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로 조감독 · 카메라맨 · 조명 기사 · 미술 담당자 · 음악 담당자 · 녹음 기사 · 기록계 · 분장사 · 스턴트 맨 · 편집 기사 등이다. 스태프와 배역이 정해지면 촬영 대본을 만들어 연습을 한다. 연습은 많이 할수록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으므로 꼭 필요한 과정이다. 모든 준비를 마치면 비로소 촬영을 한다. 촬영은 반드시 이야기 순서대로 하는 것은 아니며 편리한 것부터 찍는다. 촬영은 촬영소 안에 배경을 꾸며 놓고 하기도 하고, 밖에서 하기도 하는데 밖에서 촬영하는 것을 로케이션이라고 한다. 촬영이 끝나면 필름을 편집하여 필요 없는 부분은 잘라 내고 순서를 바로잡는다. 영화는 보통 촬영과 함께 배우의 대사나 음향을 녹음하는 동시 녹음 촬영이 원칙이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그렇지 못할 때는 녹음실에서 영화를 보면서 따로 녹음한다. 이렇게 대사와 음악을 영화 필름에 함께 실으면 비로소 영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 촬영기의 구조 촬영기의 구조 ▶ 영사기의 구조 영사기의 구조 ▶ 영화의 제작 ① 각본을 쓴다. ② 제작자와 연출자는 스태프와 배우를 정한다. ③ 정해진 배역에 따라 연습을 한다. ④ 배경, 의상을 준비하고 분장을 한다. ⑤ 여러 가지 촬영 준비를 마치면 촬영을 한다. ⑥ 촬영한 필름을 편집한다. ⑦ 화면을 보며 말을 넣는다. ⑧ 음악과 음향을 넣는다. ⑨ 완성된 필름을 극장에서 상영한다. 영화 촬영 장면   [Daum백과] 영화 – 학습그림백과, 천재교육 편집부, 천재학습백과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123    [그것이 알고싶다] - 마술의 유래?... 댓글:  조회:3724  추천:0  2017-05-02
마술의 유래 -마술은 기원전 5000년 경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도 발견될 만큼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최초의 마술은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거위 목을 잘랐다가 다시 붙이거나, 컵 속에 있던 구슬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이 있었음이 그림이나 글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중국 당나라에서는 750년 경 불 뿜기와 칼 먹기 마술이 인기를 끌었으며,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부터 항아리에 몸을 숨기는 마술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서양의 중세 시대 때는 마술이 나쁜 악마의 술수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1800년대 이후에는 유럽 상류 사회의 놀이 문화로 발전하게 된다. 성경을 비롯하여 각 나라의 모든 기원 신화에서 마법과 마술이 나오고 있다. /출처(마술의 역사) 기원 전 2700 BCE - 고대 이집트에서 마술사 Dedi에 의해 컵과 공 마술을 보여준 유명한 첫 번째 공연이 이루어졌다. Dedi는 새를 참수한 다음 머리를 다시 붙여서 살려내는 것과 같은 다른 마술도 보였다. (Dedi에 관한 참고문헌, 특히 그가 컵과 공 연출을 했다고 알려주는 Westcar Papyrus 에 대한 논쟁 남아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Beni Hasan과 무덤에서 발견된 두 사람이 컵과 공 연출을 하는 그림이 빵 굽는 사람이 빵 곰팡이로 빵을 만드는 장면이라고 믿는다.) (주석 : Dedi가 컵과 공 연출을 했다는 증거가 존재하지 않고, Beni Hasan 상형 문자가 그 연출을 나타낸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그 시대에 컵과 공 마술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없다.)   기원 후 50-300 CE - Acetabularii 가 컵과 공 마술을 고대 로마에서 돌과 작은 식초 컵을 이용해서 시현했다. Acetabulum은 고대 로마에서 사용된 식초 컵의 이름이고 거기에서 Acetabularii 의 명칭이 유래되었다. Acetabularii 는 컵과 공 마술을 전문적으로 하는 마술사 모임이다. 400-1000 - 마술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암흑 시대이다. 하지만 많은 부분이 초자연적인 주술과 연계되었고, 유희로써의 마술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1000-1500 - 마술이 여전히 주술과 신비술과 연계되어있는 중세시대이다. 물물교환이 늘어나면서 길거리에서나 서커스에서 연출을 하는 사람들이 컵과 공과 같은 고전에서 벗어나서 동전이나 작은 물체들에 대한 잔기술을 통한 변화기술과 같은 근대적인 아이디어들이 나왔다. 1584 - Reginald Scot이 The Discoverie of Witchcraft(신비술의 발견)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중세시대의 신비술에 관한 책인데, 많은 마술의 비밀에 대한 내용도 있다. 마술과 신비술은 여전히 연결되어있었으며, 1600년대 초에 Scot의 책의 대부분이 불에 탔다. 1750 - 18세기 마술에 중요한 인물인 Pinetti가 태어났다. Pinetti는 엄지손가락 묶기 연출을 처음으로 시현한것으로 기록된 사람이다. 그는 또한 투시 마술과 오랜지 나무에서 저절로 열매가 자라는 마술을 공연했다. [1] 1805 - 마술사 로베르 우댕이 태어난 해 이다. "근대 마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길거리와 서커스에서 하던 마술을 우아한 무대나 응접실로 가져왔다. 1874 - 카드 마술의 왕, 수갑 마술의 왕으로 유명한 마술사 해리 후디니가 태어난 해 이다. 실제 이름은 Ehrich Weiss 이고 탈출 마술가로 유명하다. 1876 - Louis Hoffman 교수에 의해서 "Modern Magic(근대 마술)"가 출판되었다. 이 책은 그 당시의 기술에 대해서 권위 있는 책이었다. 1894 - 후디니를 속인 사람, 또는 마술의 교수으로 알려진 다이 버논이 태어난 해 이다. 다이 버논의 본명은 David Frederick Wingfield Verner이고 출생지는 오타와(Ottawa)이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마술사이다. 1902 - Erdnase가 쓴 "Expert At The Card Table(테이블 카드에서 전문가)" 책이 The Charles T. Powner Co.에서 출판되었다. 카드 마술에 관한 중대한 책이며,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이다.   1902 - 미국 마술사 모임(SAM)이 뉴욕에 있는 Martinka의 마술 상점에서 5월 10일에 결성되었다. SAM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마술 모임이다. 1905 - 2월에 영국 마술사 모임이 런던에서 결성되었다. 지속적인 모임이 있는 마술 모임 중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초대 회장은 데이빗 데번트(David Devant)이다. 6월에는 마술 서클로 변화했다. 이 prestigious한 모임은 마술사들에게 무역 연합과 같은 역할을 하며, 해법 노출에 대한 엄격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많은 유명한 마술사들이 해왔던 해법 노출을 이유로 창립자를 모임에서 퇴출시켰다.) 1911 - Nevil Maskelyne과 David Devant가 우리의 마술 책을 썼다. 마술의 이론에 관한 중요한 책중 하나이다. 1911 - 미스토 마술 회사(The Mysto Magic Company)가 Gilbert, Gilbert, Petrie에 의해 설립되었다. 1918 - 후디니의 첫 번째 공연인 Morritt의 코끼리 없애기(Morritt's Elephant Vanishing)가 Hippodrome에서 1월 7일에 열렸다. 1921 - P.T. Selbit 가 처음으로 "반으로 톱질하기(Sawing in half)"를 시연했다. 현재 시현되는 마술과 같은 마술이다. 1926 - 핼러윈 전날 오후 1시 26분에 해리 후디니가 고인이 되었다. 1940년 부근 - Edward M. Massey가 많은 마술사들이 처음으로 배우는 마술인 손가락 자르기 마술을 고안해냈다.[2] 1949 - Royal Road to Card Magic가 Jean Hugard와 Fred Braue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것은 현재 카드 마술에서도 중요하다. 1952 - JB Bobo가 쓴 Modern Coin Magic 가 처음으로 출판 되었다. 이 책은 동전 마술의 "바이블"과 같으며, 많은 다른 것들이 이 책을 출처로 하고 있다. 1956 - 데이빗 카퍼필드가 David Seth Kothin 라는 이름으로 9월 16일에 태어났다. 1960 - 렌스 버튼 이 3월 10일에 루이스빌(Louisville, Kenturcky)에서 William Lance Burton 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1963 - 최초의 매직 캐슬(Magic Castle)이 할리우드에서 Milt Larsen에 의해 만들어졌다. 마술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1908 빅토리안 저택을 바꾸었다. 많은 뛰어난 마술사들이 이곳에서 공연을 하였다. 다이 버논은 나중에 자신의 여생을 이곳에서 상주 마술사로 보낸다. 1968 - 토니 코린다가 13 Steps to Mentalism(심리 마술의 13단계)를 출판한다. 이 책은 심리 마술에서 유명한 책 중 하나이다. 1974 - 뮤지컬 THe Magic Show(마술 쇼)가 더그 헨닝(Doug Henning) 주연으로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면서 마술의 "황금 시대"를 열었다. 1977 - Marco the Magi presents Le Grand David and his own Spectacular Magic Company의 첫 번째 공연이 2월 20일에 매사추세츠 베벌리(Beverly, Massachusetts)에서 열렸다. 이것은 역사상 상주 마술로는 가장 긴 공연이다. 1994 - 최초의 인터넷 마술 상점이 인터넷 게시판과뉴스 그룹을 통해 열렸다. 사진과 정보들이 있는 사이트들이 계속 생기면서, 마술을 배우고 전파되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1997 - 타이거 마술사로 알려진 발 발렌티노가 폭스 티비 특집에서 많은 마술의 비밀을 밝히면서 논쟁을 일으켰다. 데이빗 블래인이 "길거리 마술"을 미국에서 선보였다. 1998 - 크리스 앤젤이 World Of Illusion(일루전의 세계)를 매디슨 정원 광장에서 공연했다. 이후 Criss Angel Mindfreak으로 2003년까지 계속 했다.
1122    "저 이러쿵 저러쿵 하는 자들이 막걸리와 무슨 상관이리요"... 댓글:  조회:3654  추천:0  2017-05-02
江風索我吟  山月喚我飮 강풍삭아음  산월환아음 醉倒落花前  天地爲衾枕        취도락화전  천지위금침          楊萬里 강 바람 날더러 시 지으라 하고    산 달은 날 불러 술마시게 하는도다.              취하여 진 꽃 위로 거꾸러지니  천지가 바로 이부자리로구나.  강 바람 솔솔 불어와 시심을 붇돋우고,  산 달은 내게 거나한 주흥을 부추긴다.  강 바람 산 달에 주흥이 도도하니  시 읊다 취한 술에 진 꽃잎 위로 아예 드러눕는다.  편안하구나.  꽃잎 깔린 대지는 향기로운 요가 되고,  달빛 밝은 저 하늘은 비단의 이불이라.  건곤일척에 不知老之將至로다.  늙음이 장차 오는 것도 모르겠네.  이수광은 또 言志란 작품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天地大衾褥  江河一酒池 천지대금욕  강하일주지 願成千日醉  眠過太平時  원성천일취  면과태평시 천지는 커다란 이부자리요    강하는 하나의 술 연못일세.               천날을 깨지말고 취하여보자              꿈속에 태평시절 지나쳐보자. 천지를 이부자리로 깔고 덮으니,  드넓은 강물이 그대로 술이로구나.  그 술을 천일 동안 마시어 보자.  취하거든 깨지말고 잠을 자리라.  그 사이에 인간세상에는  태평성대의 노래가락이 울려 퍼졌으면 하는 것이다.  이렇듯 술은 가슴 속 깊은 시름을 녹여주는 묘약이 된다. 아니 깬들 어떠리                           李鼎輔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 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하네 언제면 꽃 아래 벗 데리고 玩月長醉(완월장치) 하려뇨               꽃 구경은 달빛 아래서 해야 제격이고,  술은 꽃 아래서 달빛 보며 마셔야 제맛이 난다.  맛진 술이 있어도 벗이 없대서야 무슨 맛이 나겠는가.  어여쁜 꽃과 흐는한 달빛,  매운 누룩으로 담근 술에 싫증나지 않는 벗.  꽃 향기에 취하고 달빛에 취하고,  누룩에 취하고 우정에 취하니  이 취기는 영영 깨지 않아도 좋을 법하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디 그런가.  술이 취하거든 깨지말게 삼기거나 님을 만나거든 이별 없게 삼기거나 술 깨고 님 이별하니 그를 슬허 하노라   취하거든 깨지를 말고,  만났거든 이별을 모르고 지낼 일이다.  취한 술은 쉬이 깨고 좋은 님은 쉬 떠나니,  인생에 무슨 이런 장난이 있단 말인가?  술 깬 뒤 님 떠난 빈 자리를 더듬는 슬픔에  인생의 시름만 깊어 간다.  쇄酒待君來  橫琴惜餘景 쇄주대군래  횡금석여경 溪流流向君  一路春松影                    계류류향군  일로춘송영          白光勳 술 걸러 그대 오길 기다리면서     거문고 빗겨 들고 봄볕 아까와.                   시냇물도 그댈 향해 흘러가누나                  길 따라 솔 그림자 늘어섰구나.  상쾌하지 않은가.  병들어 누운 친구를 그리며 지은 시다.  동지 섣달에 담근 술 항아리에서  굼실 풍겨나는 누룩의 향내.  진작에 탁주를 잘 걸러 놓고  그대가 자리 털고 일어나  나를 찾아 주길 기다리고 있다.  거문고를 빗겨 들고 한 곡조 타는 뜻은  남은 볕이 아쉽고 아까운 때문이다.  그대에게 향하는 나의 이 마음,  시냇물도 내 안 같아서 흘러 흘러 흘러가고,  그 길 따라 솔 그림자가 줄줄이 늘이웠다.  이 솔의 푸르름 닮아 그대 빨리 쾌차 하소.  따뜻히 손을 잡고 술 한잔 나눕시다.  逢人覓酒酒難致  對酒懷人人不來 봉인멱주주난치  대주회인인불래 百年身事每如此  大笑獨傾三四杯          권필 백년신사모여차  대소독경삼사배 님 만나 술 찾으면 술이 없더니    술 두고 님 그리면 님이 오잖네.                  백년간 이 내 일이 매일 이렇다                  혼자 웃고 서너잔을 주욱 들이키노라. 함께 술마시기로 약속한 친구가 오지 않자,  무료히 앉았다가 속이 상해 혼자 술 마시며 지은 시다.  벗이 있고 술이 있대서 그 자리가 늘 유쾌할 수도 없다.  벗은 마음에 맞는 벗이라야 벗이랄 것이요,  술은 즐거워 마시는 술이라야 술이랄 것이다. 一定 백년 산들 긔 아니 초초한가 초초한 浮生(부생)이 무슨 일을 하려 하여 내 잡아 권하는 잔을 덜 먹으려 하는가          정철  아마도 좌중에 한 친구가  권하는 술잔을 자꾸 내밀며 흥을 깼던 모양이다.  에이 못생긴 친구.  백년을 산다해도 흰 말이 벽 틈 사이로 지나가듯 짧은 세월인데,  덧 없는 뜬 인생이 무엇이 바빠  이 정다운 술잔마저 마다한단 말인가.  안돼.  내 잔 한잔 기어이 받게.     ------------------------------     선조 때 시인 권필은 과거 응시를 권유하는 벗의 편지를 받고  보낸 답장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내게는 고서 여러 권이 있어 홀로 즐기기에 족하고,  시는 비록 졸렬하지만 마음을 풀기에 족하며,  집이 비록 가난해도 또한 막걸리를 댈만은 하니,  매양 술잔 잡고 시를 읊조릴 때면  유연히 스스로 얻어 장차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오.  저 이러쿵 저러쿵 하는 자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리요. 戱題(희제)란 시에서는, 詩能遣悶時拈筆 酒爲요胸屢擧광  시능견민시념필 주위요흉루거광 시는 고민 걷어가 때로 붓을 잡았고   술은 가슴 적셔줘 자주 잔을 들었지. 라고 하여 시와 술로 밖에는 풀길 없는  뜻같지 않은 세상에서의 갈등을 씁쓸히 노래하고 있다.  또 이수광은 〈술회〉란 작품에서,  詩似巧工雕萬物  酒爲長추掃千愁 시사교공조만물  주위장추소천수 시는 교묘한 솜씨로 만물 아로새기고   술은 빗자루 되어 온갖 근심 쓸어가네.  라고 노래한 바 있다.  가슴 속에는 활활 타오르는 정염이 있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지울길 없는 근심이 있다.  시가 있어 이를 노래하고,  한잔 술이 빗자루 되어 그 근심을 깨끗이 쓸어내매,  마음 속에는 어느새 호연한 기상이 솟아난다.  술은 언제 나고 시름은 언제 난지 술나고 시름난지 시름 난 후 술이 난지 아마도 술이 난 후에 시름 난가 하노라  술과 시름은 동무 삼아 다닌다.  시름 때문에 술을 마시는가,  술 때문에 시름이 생기는가?  시름이 있으니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다 보면 시름은 간데 없다.  술만 있고 시름이 없다면,  시름만 있고 술이 없다면 세상은 아무 살 재미가 없지 않겠는가?  술을 취케 먹고 두렷이 앉았으니 억만 시름이 가노라 하직한다 아희야 잔 가득 부어라 시름 전송 하리라        정태화(鄭太和) 상쾌하지 않은가.  허리를 곧추 세우고 도연히 앉았노라니,  가슴 속에 숨었던 시름이란 놈들이 일제히  그 앞에 무릎을 꿇고서, `이제 물러 가렵니다` 하며  하직을 고해 온다.  내게 왔던 손님이니 그냥 보낼 수야 있나.  넘치는 한 잔 술로 가는 시름을 전송하련다.  또 이런 시는 어떨까.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을 부르시소 초당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를 청하옴세 백년간 시름 없을 일을 의논코저 하노라                김육(金堉)  술이 굼실 익으면 술 익었다 벗을 청하고,  꽃 피어 향기 흐르자 또 그 핑계로 동무를 부른다.  만나서 하는 얘기는 무슨 얘긴가?  더도 덜도 말고 딱 `백년간` 시름 없을 일을 의논코저 함이다.  시 있는 곳에 술이 있고 술 있는 곳에 노래가 있다.  더욱이 세상일은 언제나 공정치 아니하고,  시비는 늘 전도되며,  정의는 불의 앞에 항상 좌절을 경험하기 마련임에랴.  주선(酒仙) 이백은 일찍이  抽刀斷水水更流  擧杯消愁愁更愁 추도단수수경류  거배소수수경수 칼 빼어 물 베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   잔 들어 시름 달래도 시름은 더 깊어지네.   라 하여 늘 지니고 가는 가눌 길 없는 삶의 근심을 노래한 바 있다.  가뜩이나 쓴 인생에 한 잔 술이 없대서야 무슨 낙이 있겠는가.  滌蕩千古愁  留連百壺飮 척탕촌고수  류련백호음 皓月未能寢  良宵宜淸談 호월미능침  량소의청담 醉來臥空山  天地卽衾枕      취래와공산  천지직금침  李白 〈友人會宿〉 천고의 이 시름 씻어내고자    연거퍼 백병의 술을 마신다.                      좋은 밤 소곤소곤 청담 나누며                   두둥실 흰 달에 잠 못 이룬다.                    거나해 공산에 드러누우면                       천지가 그대로 이부자린걸.                       백병의 술로도 씻어낼 수 없는 근심이 있다.  천고의 근심을 씻자고 마시는 술이니  목전의 상황에 얽매여 일희일비하는 소인배의 근심은 아니다.  우주를 품어안고 천고를 가늠하는 위대한 고독자의 근심이다.  어느덧 흰달은 동산 위로 두둥실 떠올라  어둡기만 하던 자리를 구석구석 비춰준다.  거나해 그대로 드러 누우면 드넓은 우주가 마치 포근한 솜이불 같구나.  
1121    길가다 누룩 실은 수레만 보아도 군침을 흘리다... 댓글:  조회:4075  추천:0  2017-05-02
중국 시가(詩歌)의 역사에서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뛰어넘는 시인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을 시선(詩仙)과 시성(詩聖)이라 부르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시의 수만 하더라도 이백의 시가 1,100여 편, 두보의 시가 1,400여 편에 이른다. 작시(作詩)의 수도 압도적이려니와 그 중 술과 관련된 시가 각각 170여수, 300여 수에 이를 정도로 두 시인 모두 술을 좋아했고 시의 소재로 술을 즐겨 이용했다.  이백의 경우 '술 한 말에 시 백편을 쏟아 냈다'(李白一斗詩百篇)하니 이백이 두보보다 술을 훨씬 잘 마시고 술 관련 시작(詩作) 능력도 뛰어났을 것이라는 선입관을 갖게되나 사실은 술 관련 작품과 술 실력면에서는 두보가 이백을 압도하는 것 같다.  여러 기록으로 보면 이백이 술을 즐기면서 마셨던 것과는 달리 두보는 목숨을 걸고 마신 것 같다. 그가 병상에 누워 상처를 치료하는데 벗들이 술과 고기를 가지고 병문안을 오니 물 맑은 계곡으로 물려가 신나게 술을 마셨다는 일화만 봐도 그의 술사랑 크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보는 정작 자신의 얘기만 쏙 뺀 채 이백을 비롯한 당대의 유명했던 술꾼들을 모아 한편의 시가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음중8선가'(飮中八仙歌)이다.  이 시가는 비록 시기적으로는 일치하지 않지만 한 때 장안(長安)에 머물렀던 공통점을 지닌 8인(李白, 賀知章, 李適之, 李璡, 崔宗之, 蘇晉, 張旭, 焦遂등)의 인물들을 '술'이라는 끈으로 묶어내어 이들의 특징있는 술버릇을 마치 만화그리듯이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막역한 지기였던 이백을 고주망태로 묘사하면서도 시선(詩仙)으로 승격시키고 있다. 특별히 이백에게만 4구(句)를 할애한 것도 주목할 만 하다. 아마  더 큰 존경과 우정과 연민을 표시하려 한 듯 하다. 그 내용을 들여다 보자. 知章騎馬似乘船,眼花落井水底眠。 汝陽三斗始朝天,道逢麴車口流涎,恨不移封向酒泉。 左相日興費萬錢,飲如長鯨吸百川,銜杯樂聖稱避賢。 宗之瀟灑美少年,舉觴白眼望青天,皎如玉樹臨風前。 蘇晉長齋繡佛前,醉中往往愛逃禪。 李白一斗詩百篇,長安市上酒家眠。天子呼來不上船,自稱臣是酒中仙。   張旭三杯草聖傳,脫帽露頂王公前,揮毫落紙如雲煙。 焦遂五斗方卓然,高談雄辯驚四筵。   하지장(賀知章)은 (술에 취해) 말 탄 모습이 배를 탄 듯하며  눈이 어릿어릿 하여 우물에 빠져 자곤 했네  * 하지장(賀知章, 659-744) : 시인 이백의 발견자로 알려진 당나라 시인.      자는 계진(季眞). 호는 사명광객(四明狂客)   여양왕(汝陽王)은 술 서말을 마시고야 조정에 나가고  길 가다 누룩 실은 수레만 보아도 군침을 흘리고  주천(酒泉)의 왕으로봉해 지지 못함을 한탄했다네       * 여양왕(汝陽王) 이진(李璡) : 당현종(玄宗)의 사촌으로 하지장과 시와 술로 교유했으며     두보를 좋아 함.     주천(酒泉)은 감숙에 소재한 도시로 술맛나는 샘이 있다 하여 붙여진 술의 명산지   좌승상(李適之)은 하루 주흥에 만전을 쓰고      큰 고래가 백천(百川)을 빨아들이듯이 술을 마시며      청주만 좋아하고  탁주는 멀리했다네    *좌승상 이적지(李適之) : 황족 출신으로 이임보(李林甫) 일당의 모략으로    746년에 파면되고 747년에 자결함.     시를 잘 지었고 밤마다 시우(詩友)들과 주연을 베풀었다고 함. 최종지(崔宗之)는 우아한 미소년이라  잔을들어 푸른 하늘 쳐다 볼 때면  그 맑고 밝은 모습 마치 옥으로 다듬은 나무가 바람 앞에 선 듯하다네   최종지(崔宗之). 시어사(侍御史)를 지냈으며  이백과 술, 시 등으로 자주 어울렸다 함. 소진(蘇晉)은 수놓은 불상앞에서 오랫동안 정진하다가도  걸핏하면 술을 마시고 선을 멀리하네.    * 소진(蘇晉) : 벼슬은 호부시랑(戶部侍郞). 문장가. 734년 사망.     수놓은 불상을 모셔 놓고 "이 부처는 곡차를 좋아하니 내 마음에 든다"고     농을 했다고 함. 이백(李白)은 술 한 말에 백 편의 시를 쏟아내고  장안 저자거리 술집에서 잠들기 일쑤며  천자가 불러도 술에 취해 배에 오르지 못하고  스스로 일컫기를 술의 신선(酒中仙)이라 했다네    * 이백(李白, 701-762) :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고의 시인, 시선(詩仙).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두보(712-770)와는 11살 위로 돈독한 우정을 유지했다 함 장욱(張旭)은 석잔의 술에 초서의 성인이 되고  모자 벗고 맨머리로 왕공앞에 나서  구름과 연기가 일 듯 일필휘지한다네.    * 장욱(張旭) : 초서의 대가. 머리털에 먹물을 묻혀 쓰기도 했다 함 초수(焦遂)는 닷말 술을 마셔야 의젓해져서  고담웅변으로 좌중을 놀라게 한다네    * 초수(焦遂) : 벼슬에 오르지 않은 평민.     말을 더듬어 누구를 대하여도 말이 없다가 술이 취하면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펴서 그 말재주에 사람들이 놀랐다 함  두보의 시를 통해 주선들의 재미있는 행동을 감상하다보면 과연 이들은 그 당시 어떤 술을 마셨을까 궁금해진다.   이백을 예로 들면 그의 행적과 그가 지은 시를 통해 마신 술의 종류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그가 쓰촨성(四川)  출신이니 당연히 쓰촨의 명주들을 많이 마셨음이 자명하다. 중국의 명주중 90% 가까이가 쓰촨성에서 나온다 하니 이백의 술취향은 이미 이 때 결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지역의 술로 가장 유명한 것은 지방 이름(劍南道)을 딴 '지엔난춘'(劍南春)이다. 청대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며 이 술의 원래 명칭은 '劍南燒春'으로 이백이 즐겨 마셨다 한다. 북송의 소동파(蘇東坡)가  ‘항아리를 여니 3일 동안 성안에 향이 가득하네(三日开瓮香满城)’ 라고 극찬했다고 전해지는 술이기도 하다. 이후 쓰촨을 떠나 후베이(湖北)지방에서 결혼을 했으니 이지역의 명주 미주(米酒, 현미나 백미를 쪄서 누룩을 넣고 糖化·발효시킨 후 증류하여 만든 증류주)를 마셨을 것이다. 필자가 앞 글에서 언급했던 山西省의 펀주(汾酒)를 좋아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한 때(玄宗 시기) 궁중에서 한직이지만 벼슬을 한 바 있는데 이 때는 포도주를 즐겨 마셨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냥 좋아했던 정도를 지나 집착에 가까울 정도였다 한다. 그의 시 '襄阳歌'에서는 몽롱한 술기운에 강물을 포도주로 환상하면서 매일 3백잔을 마시고 백년을 계속 마시고 싶음을 노래했다.    이백이 포도주를 즐겨 마셨다는 주장이 포도주를 서양술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으나 사실 포도주는 이미 당나라 때 고조나 태종을 비롯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즐겨했으며 태종은 직접 자신이 포도주를 양조해 마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중국에서는 역사가 오래된 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백이 최후로 마신 술은 무엇이었을까? 이백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채석강에 비친 달을 잡으려 하다가 익사했다는 설도 있으니 당연히 최후로 마신 술은 물(水)이 아닐까 싶다. 중국 인터넷망을 써핑하다가 발견한 유머 한 쪼각이다.            
1120    타는 저녁 놀속에 술 익는 마을이 그립다... 댓글:  조회:5653  추천:0  2017-05-02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가나니                    나이들어 늙어 죽기 전에                     알게 될 진실은 그것뿐                         나는 입에 술잔을 쳐들어                      그대 바라보며 한숨짓는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술잔 세며 한없이 먹세그려 죽은 후엔 거적에 꽁꽁 묶여 지게 위에 실려 가나 만인이 울며 따르는 고운 상여 타고 가나(매한가지) 억새풀, 속새풀 우거진 숲에 한번 가면... 그 누가 한 잔 먹자 하겠는가? 무덤 위에 원숭이가 놀러와 휘파람 불 때 뉘우친 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 송강(松江) 정철(鄭澈) 눈물처럼 뚝뚝 낙엽지는 밤이면 당신의 그림자를 밟고 넘어진 외로운 내 마음을 잡아 보려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그렇게 이별을 견뎠습니다 맺지 못할 이 이별 또한 운명이라며 다시는 울지 말자 다짐 했지만 맨 정신으론 잊지 못해 술을 배웠습니다 사랑을 버린 당신이 뭘 알아 밤마다 내가 마시는건 술이 아니라 술보다 더 독한 눈물 이였다는 것과 결국 내가 취해 쓰러진건 죽음보다 더 깊은 그리움 이였다는 것을 박인환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술 없이는 나의 생을 생각 못한다 이제 막걸리 왕대포집에서 한잔 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한다 젊은 날에는 취하게 마셨지만 오십이 된 지금에는 마시는 것만으로 만족하다 아내는 이 한잔씩에도 불만이지만 마시는 것이 이렇게 좋을 줄을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천상병 술은 물이외다 물이 술이외다 술과 물은 사촌(四寸)이외다. 한데 물을 마시면 정신을 깨우치지만서도 술을 마시면 몸도 정신도 다 태웁니다 술은 부채외다, 술은 풀무외다 풀무는 바람개비외다, 바람개비는 바람과 도깨비의 어우름 자식이외다 술은 부채요 풀무요 바람개비외다 술, 마시면 취(醉)케 하는 다정한 술 좋은 일에도 풀무가 되고 언짢은 일도 매듭진 맘을 풀어주는 시원스러운 술 나의 혈관(血管) 속에 있을 때에 술은 나외다 되어가는 일에 부채질하고 안 되어가는 일에도 부채질합니다 그대여, 그러면 우리 한잔 듭세, 우리 이 일에 일이 되어가도록만 마시니 괜찮을 걸세 술은 물이외다, 돈이 물이외다 술은 돈이외다, 술도 물도 돈이외다 물도 쓰면 줄고 없어집니다 술을 마시면 돈을 마시는 게요, 물을 마시는 거외다 김소월 독한 술 마셨다 지구가 흔들리는지 어쭙잖은 내가 흔들리는지 흔들흔들 잘도 춤춘다 취한 눈 부릅뜨고 어금니 깨물며 쳐다본 세상 소복입고 달그랑 달그랑 천상으로 향한다 의식은 깨어 이렇게 숨쉬는데... 안택상 부용원 밖의 강 어귀에 앉아서 돌아가지 아니 하니 수정같은 봄 궁전 빛이 볼수록 아른아른 거리네 복숭아 꽃은 가늘게 버들꽃을 쫓아서 떨어지고 꾀꼬리는 때때로 백조와 함께 나는구나 맘껏 마셔 사람이 모두 버림을 오래 저바리고 조회조차 게을리하니 진실로 세상과 서로 어긋나네 관리의 마음으로는 다시 창주가 먼 것을 아노니 늙어서도 한갓 옷을 떨치지 못함을 슬퍼하네 두보 兩人對酌山花開 / 둘이서 한 잔하니, 산꽃이 피네 一杯一杯復一杯 / 한 잔, 한 잔, 또 한 잔 我醉欲眠君且去 / 나는 취해 자고 싶네, 자넨 가고 싶으면 가게 明朝有意抱琴來 / 내일 아침에 맘 있거든 거문고나 갖고 오게 - 이태백- 1. 花間一壺酒 / 꽃나무 사이에서 한 병의 술을 獨酌無相親 / 홀로 따르네 아무도 없이 擧杯邀明月 / 잔 들고 밝은 달을 맞으니 對影成三人 / 그림자와 나와 달이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 / 달은 술 마실 줄을 모르고 影徒隨我身 / 그림자는 나를 따르기만 하네 暫伴月將影 / 잠시나마 달과 그림자 함께 있으니 行樂須及春 / 봄이 가기 전에 즐겨야 하지 我歌月徘徊 / 내가 노래하면 달은 거닐고 我舞影零亂 /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네 醒時同交歡 / 함께 즐거이 술을 마시고 醉後各分散 / 취하면 각자 헤어지는 거 永結無情遊 / 무정한 교유를 길이 맺었으니 相期邈雲漢 / 다음엔 저 은하에서 우리 만나세 2. 天若不愛酒 / 하늘이 술을 사랑치 않았다면 酒星不在天 / 주성이 하늘에 있지 않을 거고 地若不愛酒 / 땅이 술을 사랑치 않았다면 地應無酒泉 / 땅에 주천이 없었을 거야 天地旣愛酒 / 하늘과 땅도 술을 사랑했으니 愛酒不愧天 / 내가 술 사랑하는 건 부끄러울 게 없지 已聞淸比聖 / 옛말에, 청주는 성인과 같고 復道濁如賢 / 탁주는 현인과 같다고 하였네 賢聖旣已飮 / 현인과 성인을 이미 들이켰으니 何必求神仙 / 굳이 신선을 찾을 거 없지 三杯通大道 /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할 수 있고 一斗合自然 /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되는 거라 但得酒中趣 / 술 마시는 즐거움 홀로 지닐 뿐 勿爲醒者傳 / 깨어 있는 자들에게 전할 거 없네 3. 三月咸陽城 / 춘삼월 함양성은 千花晝如錦 / 온갖 꽃이 비단을 펴 놓은 듯 誰能春獨愁 / 뉘라서 봄날 수심 떨칠 수 있으랴 對此徑須飮 / 이럴 땐 술을 마시는게 최고지 窮通與修短 / 곤궁함 영달함과 수명의 장단은 造化夙所稟 / 태어날때 이미 다 정해진 거야 一樽齊死生 / 한 통 술에 삶과 죽음 같아보이니 萬事固難審 / 세상 일 구절구절 알 거 뭐 있나 醉後失天地 / 취하면 세상천지 다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 / 홀로 베개 베고 잠이나 자는 거 不知有吾身 / 내 몸이 있음도 알지 못하니 此樂最爲甚 / 이게 바로 최고의 즐거움이야 4. 窮愁千萬端 / 천갈래 만갈래 이는 수심에 美酒三百杯 / 술 삼백잔을 마셔볼거나 愁多酒雖少 / 수심은 많고 술은 적지만 酒傾愁不來 / 마신 뒤엔 수심이 사라졌다네 所以知酒聖 / 아, 이래서 옛날 주성이 酒감心自開 / 얼근히 취하면 마음이 트였었구나 辭粟臥首陽 / 백이는 수양 골짝에서 살다 죽었고 屢空飢顔回 / 청렴하단 안회는 늘 배가 고팠지 當代不樂飮 / 당대에 술이나 즐길 일이지 虛名安用哉 / 이름 그것 부질없이 남겨 무엇해 蟹오卽金液 / 게 조개 안주는 신선약이고 糟丘是蓬萊 / 술 지게미 언덕은 곧 봉래산이라 且須飮美酒 / 좋은 술 실컷 퍼 마시고서 乘月醉高臺 / 달밤에 누대에서 취해 볼거나 - 이태백 君不見 /그대 보이지 않는가 黃河之水天上來 /황하의 물은 하늘가에서 흘러내려 奔流到海不復回 /바다로 여울져 돌아드나 돌아오지 못하네 君不見 /그대 보이지 않는가 高堂明鏡悲白髮 /높은 누각 밝은 거울에 비친 백발이 서럽구나 朝如靑絲暮成雪 /아침녘 푸르른 실타래같던 머리카락,노을지니 눈처럼 바래었어라 人生得意須盡歡 /거칠것 없던 인생, 그 즐거움은 이미 다하였으되 莫使金樽空對月 /달을 우러러 아름다운 술잔 홀로 기울이지 말지니 天生我材必有用 /이 땅에 태어난 나의 재주 기필코 쓰일곳 있으리라 千金散盡還復來 /흩어진 천금도 언젠가는 순리를 따라 돌아오는 일 있듯이 - 김삿갓 책 읽느라 머리는 희어지고 칼 익히는 동안에 해는 기우네 가없는 게 하늘과 땅뿐이리, 이 내 한도 길어라 장안의 붉은 술 열 말을 앓듯이 들이킨 뒤 가을바람에 삿갓 쓰고 금강산에 드노라 - 김삿갓 찬 소나무 아래 외딴 주막 안 한가롭게 누웠으니 딴세상 사람 같네 가까운 골짜기서 구름과 함께 즐기고 개울가에서는 새소리 이웃한다 시끄러운 세상일로 어찌 뜻을 거칠게 하리 시와 술로 내 몸을 즐겁게 하네 달이 뜨면 곧 옛생각하며 유유히 단꿈에 빠져들겠네 - 김삿갓 신선의 자취는 구름길처럼 아득하고 먼 길 떠도는 나그네 회포 날 저무니 더 어둡네 학 되어 날아간 신선 간 곳 물을 데 없고 봉래산 소식은 꿈속에서만 희미하네 젊은 몸에 기생 안으니 천금이 지푸라기 같고 대낮에 술독을 끼니 만사가 구름 같구나 먼 하늘 날으는 기러기 물따라 날기 쉽고 푸른 산 지나는 나비 꽃 피하기 어렵네 술을 마시면 누구나 다 기고만장(氣高萬丈)하여 영웅호걸이 되고 위인현사(賢士)도 안중에 없는 법이다. 그래서, 주정만 하면 다 주정이 되는 줄 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酒歷)과 주력(酒力)을 당장 알아낼 수 있다. 주정도 교양이다. 많이 안다고해서 다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듯이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드는 것만으로 주격은 높아지지 않는다. 주도에도 엄연히 단(段)이 있다는 말이다. 첫째 술을 마신 연륜이 문제요, 둘째 같이 술을 마신 친구가 문제요, 세째는 마신 기회가 문제며, 네째 술을 마신 동기, 다섯째 술버릇, 이런 것을 종합 해보면 그 단의 높이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음주에는 무릇 18의 계단이 있다. (1) 부주(不酒) : 술을 아주 못 먹지는 않으나 안 먹는 사람. (2) 외주(畏酒) : 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3) 민주(憫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4) 은주(隱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쉬워서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 (5) 상주(商酒) : 마실 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잇속이 있을 때만 술을 내는 사람. (6) 색주(色酒) : 성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 (7) 수주(睡酒) : 잠이 안 와서 술을 먹는 사람. (8) 반주(飯酒) : 밥맛을 돕기 위해서 마시는 사람. (9) 학주(學酒) : 술의 진경(眞境)을 배우는 사람(酒卒). (10) 애주(愛酒) : 술의 취미를 맛보는 사람(酒徒). (11) 기주(嗜酒) :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酒客). (12) 탐주(耽酒) :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酒豪). (13) 폭주(暴酒) : 주도(酒道)를 수련(修鍊)하는 사람(酒狂). (14) 장주(長酒) : 주도 삼매(三昧)에 든 사람(酒仙). (15) 석주(惜酒) :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酒賢). (16) 낙주(樂酒) :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酒聖). (17) 관주(觀酒) :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는 없는 사람(酒宗). (18) 폐주(廢酒 : 열반주(涅槃酒) :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부주 · 외주 · 민주 · 은주는 술의 진경 · 진미를 모르는 사람들이요, 상주 · 색주 · 수주 · 반주는 목적을 위하여 마시는 술이니 술의 진체(眞諦)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학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주도 초급을 주고, 주졸(酒卒)이란 칭호를 줄 수 있다. 반주는 2급이요, 차례로 내려가서 부주가 9급이니 그 이하는 척주(斥酒) 반(反) 주당들이다. 애주 · 기주 · 탐주 · 폭주는 술의 진미 · 진경을 오달한 사람이요, 장주 · 석주 · 낙주 · 관주는 술의 진미를 체득하고 다시 한 번 넘어서 임운목적(任運目適)하는 사람들이다. 애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주도의 초단을 주고, 주도(酒徒)란 칭호를 줄 수 있다. 기주가 2단이요, 차례로 올라가서 열반주가 9단으로 명인급이다. 그 이상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니 단을 매길 수 없다. 그러나 주도의 단은 때와 곳에 따라, 그 질량의 조건에 따라 비약이 심하고 강등이 심하다. 다만 이 대강령만은 확고한 것이니 유단의 실력을 얻자면 수업료가 기백만 금이 들 것이요, 수행년한이 또한 기십 년이 필요할 것이다(단 천재는 차한에 주배이다). 술은 비와 같다. 진흙 속에 내리면 진흙을 더 더럽게 하나 옥토에 내리면 그 곳에 꽃을 피게 한다. - 존 헤이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보다 술에 빠져 죽은 사람이 더 많다. - T. 풀러 까닭이 있어서 술을 마시고 까닭이 없어 마신다. 그래서 오늘도 마시고 있다. - 돈키호테 어떤 일이 발생할지 전혀 알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남자가 처음으로 술을 마실때이고, 또 하나는 여자가 마지막으로 술을 마실 때이다. - O.Henry “술 한 잔은 건강을 위해, 두 잔은 즐거움을 위해, 석 잔은 방종을 위해, 넉 잔은 광란을 위해 있는 것이다.” - 그리스 철학자 아나카리시스 알콜은 사랑과 같다. 첫키스는 신비롭고 두번째는 감미롭고 세번째는 일상적이고 그 후는 여자의 옷을 벗겨버린다. Alcohol is like love. The first kiss is magic, the second is intimate, the third is routine. After that you just take the girl's clothes off. - R.Chandler 술고래가 술을 마신다. 술은 그때서야 비로서 술고래에게 복수한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술을 권하지 않을 사람에게 술을 권하는 것은 술을 잃어버리는 것이요, 술을 권할 사람에게 권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 김승호 술은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 다만 친구가 있고 술이 있으면 더 즐거워질 뿐이다. 기분 나쁠 땐 아예 안 마시는게 좋다. - 일본 사케(청주)전문가 기요쓰네 맥주는 인간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그 맛은 쓰지만 마음을 여는데는 묘약이다 -휴꾸자 유기찌 술을 탐내는 마음은 본질적으로 바른 마음이다. 술과 차를 대비할 때, 그 차이점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차는 은자(隱者)와 같고, 술은 기사(騎士)와 같다. 술은 친구를 위하여 있는 것이고 차는 조용한 유덕자(有悳者)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 임어당 인생은 짧다. 그러나 술잔을 비울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 - 노르웨이 속담 거울은 당신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르쳐 준다. 술은 당신의 흐트러진 마음을 가르쳐 준다. 술잔 앞에서는 마음을 여미라! - 독일 속담 술이 머리에 들어가면, 비밀이 밖으로 밀려 나간다. - 탈무드 웨이터의 매너가 좋으면, 어떤 술이라도 미주(美酒)가 된다. - 탈무드 악마가 사람을 방문하기에 너무나 바쁠 때에, 그 대리로서 술을 보낸다. - 탈무드 꽃은 반만 핀 것이 좋고 술은 조금 취하도록 마시면 이 가운데 무한한 가취(佳趣)가 있다. 花開半開 酒飮微훈 此中有佳趣 - 後集 [출처] 술과 관련된 시 명언|작성자 나그네
1119    리백은 술 한말에 백편의 시를 못썼다?... 썼다!... 댓글:  조회:3882  추천:0  2017-05-02
  (能飮一杯無)  ㅡ누구 술 한잔 할 이 없는가?   술과 함께 떠나는 한시 여행 이백, 술 한말에 시 백편 술은 삶의 열정과 초탈의 묘약     이철성  우리술문화원 향음 이사, 전 JP모간 상임고문       ..시작하며... 이 칼럼의 소제(小題)인 '能飮一杯無'는 "술 한잔 하실래요? 정도의 뜻이다.  백거이의  '問劉十九'라는 시의 마지막 구에 나오는 표현으로, 술이 보글보글 익어 가는데 마침 눈 까지 내릴 것 같으니 친구와 술 한잔 하고픈 생각이 간절해서 던진 말이다. 중국 사람들이 참으로 애용하는 시 구절이기도 하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의 말미에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면서 암송하기 쉬운 시 한 편씩을 골라 발음과 함께 소개해 볼까 한다. 필자의 중국생활 경험에 비추어 중국인들과 친분관계를 쌓아가는 데는 시 한 수로 교감을 나누는 것 이상 손쉬운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우연히 나눈 시 한수의 정담이 꼬여가던 중국 사업을 술술 풀어가게 하는 묘약이 될 지 누가 알겠는가.     춤(舞), 노래(歌), 시(詩), 그리고 술(酒)...  우리 인류의 삶의 모습에 관한 기록이 남겨지기 시작한 이래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언급되어 온 친숙한 단어들일 것이다. 춤과 시가(詩歌)는 인류의 초기부터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원초적인 감정 교류의 수단이었고, 술은 그 감정의 폭을 넓고 깊게 하는 촉매제로서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리라.   이 네 가지 요소는 나름의 독자적인 영역을 지키면서 각기 발전해 오기도 했지만, 때로 각 요소끼리 이리 저리 붙어서 서로의 가치를 높여 왔다. 시와 술의 관계가 특히 그러하다.   중국에 '인간관계는 시(詩)와 술(酒)과 차(茶)로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다. 차(茶)가 냉정과 이성과 현실을  담아낸다면 술(酒)은 열정과 초탈과 예술세계를, 시(詩)는 이 모든 것을 버무려 담아내는 용광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은 아닐까.   '술이 없었다면 이백의 시도 없었다' 중국의 시를 살펴보면 예나 지금이나 술과 관련된 시(飮酒詩)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중국 성당(盛唐) 시기의 주선(酒仙)으로 불리는  이백(李白)이 지은 1,100여 수의 시중 170여 수가,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두보(杜甫)의 시 1,400여 수 중 300여 수가 술을 소재로 삼았다. 이백의 경우 술을 마시면서 시상(詩想)에 겨워 쓴 시 까지 포함할 경우 사실상 그의 모든 시가 음주시라 할 것이다.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그가 술을 먹지 아니하고 맨 정신으로 지낸 시기는 당 현종 때 2년 남짓 한림공봉(翰林供捧, 일종의 황제의 藝人)의 직책을 수행하던 기간, 그것도 현종을 알현할 때의 극히 짧은 시간에 그쳤다고 한다.     두보가 지은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를 보면 이백의 음주 행태가 눈에 선히 그려진다. 성당(盛唐) 시기에 유명했던 酒仙 8인(李白, 賀知章, 李適之, 李璡, 崔宗之, 蘇晉, 張旭, 焦遂)의 술 실력에 대해 묘사를 하고 있는 이 시는 특히 이백에 대해 가장 긴 문장을 할애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백은 술 한 말에 백 편의 시를 쓰고  장안 저잣거리 술집에서 잠들기 일쑤며  천자가 불러도 술에 취해 배에 오르지 못하니  스스로 일컫기를 술의 신선이라 했다네"   李白一斗詩百篇  長安市上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   한 말의 술에 시 백편이 쏟아져 나오고, 당 현종이 불러도 강 건너 저잣거리에서 술을 퍼 마시다가 취한 상태에서 의관을 겨우 갖추고 현종 앞에 허겁지겁 나타나는 모습이 눈에 선히 그려진다. 어디 이백과 두보  뿐이랴. 도연명, 백거이, 소동파 등 중국의 시사(詩史)에서 내로라하는 시인들의 인생 역시 술을 빼놓고 얘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떼어내고 싶어도 그리 할 수 없는 술이란 존재는 도대체 어떻게 인간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백주 시조 의적·두강, 후세엔 상표권 다툼 사실 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다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머루와 같은 과일이 자연적으로 발효하여 알코올을 함유하는 액체가 된 것은 오히려 인류의 탄생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었을 것이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맛있게 마시는 과일주의 초기 형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술의 발전사를 크게 자연 발효 단계, 인공적 발효 단계, 증류 단계의 세 단계로 나누어 본다면 그 첫 번째인 자연발효단계는 이와 같이 이미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저절로 발효된 술을 인류 중 누가 처음 발견하고 마시기 좋은 형태로 제조하기 시작하였는지도 궁금한 일이다.   어느 나라에나 술의 기원에 관한 설화가 있지만 중국 사람들은 夏나라 禹王 시기 의적(仪狄)이란 사람에게 술 발명의 공을 돌리기를 좋아한다. "옛날에 제녀(帝女)가 의적으로 하여금 좋은 술을 만들게 하여 우(禹) 임금에게 받쳤으며 우임금이 이를 달게 마셨다.", "우 임금이 이를 달게 마시고 뒷날 술로서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면서 의적을 멀리 했다" 등등의 얘기가 «世本», «吕氏春秋», «战国策» 등에 전해진다.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의 얘기다.   허난성(河南省) 핑딩산(平頂山)의 바오펑현(宝丰县)에 생산되는 바오펑주(宝丰酒)라는 술이 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옛날 의적의 설화가 전개된 곳이 자기네 고장이라며 이 술이 의적의 대를 잇는 적통주 라고 주장한다. 이 술을 생산하는 공장의 정문에는 의적의 동상까지 세워져 있다.   오늘날 술의 이름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杜康"을 중국 술의 시조라고 보는 주장도 많다. 두강(杜康)은 中厦시기 사람으로, 먹다 남은 밥을 주먹밥으로 만들어 뽕나무의 구멍 속에 넣어 두었는데 며칠 지나 우연히 술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 이것이 두강주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두강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世本》, 《吕氏春秋》, 《战国策》, 《說文解字》 등과 같은 고서에 다수 기록되어 있는 만큼 실존 인물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여겨진다.   두강주는 중국의 한시에도 자주 등장한다. 위나라의 武帝였던 조조(曹操)의 '단가행(短歌行)'에는 "무엇으로 근심을 풀까, 오직 두강이 있을 뿐이네 (何以解憂, 唯有杜康)" 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 진대(晋代)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시인 완적(阮藉)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즐겁지 아니하고 오로지 두강주만이 중하도다 (不樂仕宦,惟重杜康)"라며 두강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또 시성(詩聖)인 두보(杜甫)는 '題張氏隱居'에서 "봄풀에는 사슴들이 울어대고 두강주는 권하기 바쁘다(春草鹿呦呦 杜酒偏勞勸)"라고 두강주 마시는 즐거움을 묘사하고 있다.   시인들이 다투어 두강을 찬미하였기 때문일까. 중국내의 이런 저런 지역(陝西省의 白水懸, 河南省의 汝陽縣 및 伊川縣등) 양조회사들은 자기네 술이 적통 두강주라 서로 주장하며 상표권 분쟁도 불사하고 있다.     시 속에 술 이름이 처음 들어간 예는 중국 최초의 시가집인 시경(詩經)에서 찾을 수 있다.  詩經의 《豳风.七月》에는 "為此春酒,以介眉壽"。冬天酿酒,經春始成,名爲"春酒"。즉 "여기 봄에 빚은 술로 장수(長壽)를 축하하다. 봄에 술을 빚고 봄을 지나 숙성하니 이것이 춘주다."라 하여 지금까지 특정 술의 명칭으로, 때로는 일반 명사처럼 쓰이기도 하는 춘주(春酒)가 이미 2000여 년 전에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이상에서 인류의 역사를 같이 하는 술의 기원과 시와 술의 관계, 전설과 시로부터 탄생하게 된 전통 명주 등에 대해 살펴봤다. 다음 회 부터는 1000여 년 전의 기라성 같은 중국 시인들과 함께 음주시의 세계를 여행해 보기로 하자. 술을 인생철학의 경지로 승화시키며 자연과 함께 무위의 생활을 한 도연명, 술을 인생과 시의 소재로 삼고 호방 표일한 술 속의 삶을 살았던 이백, 술을 벗 삼으면서도 냉철한 이성으로 엄격한 시 미학세계를 구축했던 두보, 스스로 술을 담고 음식을 개발하며 불우했던 긴 기간을 백성과 함께 하였던 소동파 등이 우리 여행의 반려자가 될 것이다. 이 여행을 통해 자연과 함께 유유자적하는 여유를, 회재불우(懷才不遇)의 한을, 때로 인생 득의의 달콤한 감격을 느끼면서 우리네 고단한 인생살이를 술 한잔 시 한수로 위로받을 수 있다면 이 이상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두강의 양조도 ( 출처 : 바이두 )  
1118    "취기와 광기를 저버리는것은 시인에게는 죽음=..." 댓글:  조회:5142  추천:0  2017-05-02
  ▲조지훈(왼쪽)과 아들 조광렬 술을 즐겨 '주선(酒仙)'으로 통했던 시인 조지훈은 술을 마시는 격조, 품위, 스타일, 주량 등을 따져 주도(酒道) 18단계를 밝혀 놓았다.   1. 불주(不酒) :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 2. 외주(畏酒): 술을 마시긴 하지만 겁내는 사람 3. 민주(憫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4. 은주(隱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까워서 숨어서 마시는 사람 5. 상주(商酒) : 마실 줄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이득이 있을 때에만 술을 내는 사람 6. 색주(色酒) : 성생활을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7. 수주(睡酒) :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8. 반주(飯酒) : 밥맛을 돋우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9. 학주(學酒) : 술의 진경을 배우는 주졸(酒卒) 10. 애주(愛酒) : 술을 취미로 맛보는 사람. 주도(酒徒) 1단 11. 기주(嗜酒) : 술의 미에 반한 사람. 주객(酒客) 2단 12. 탐주(耽酒) :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 주호(酒豪) 3단 13. 폭주(暴酒) : 주도(酒道)를 수련하는 사람. 주광(酒狂) 4단 14. 장주(長酒) : 주도 삼매(三昧)에 든 사람. 주선(酒仙) 5단 15. 석주(惜酒) :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주현(酒賢) 6단 16. 낙주(樂酒) :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 주성(酒聖) 7단 17. 관주(觀酒) : 술을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 없는 사람. 주종(酒宗) 8단 18. 폐주(廢酒) :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9단          술이 없다면 詩人도 없다? 문인들을 왕창 만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서울 인사동 밤거리에 나가는 것이다. 골목을 누비며 왁자한 술판을 벌이는 문인들의 낯설지 않은 풍경이 이곳에 있다. 술은 그들의 굿거리다. 마실 때의 행복감과 깨어날 때의 황폐함을 왔다 갔다 하면서 그 희열과 고통으로 글을 얻는다. 술은 소설보다는 시를 짓는 사람들과 좀더 친밀하다는 인상이 짙다. 가깝게는 고은 때문일 수도 있고, 멀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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