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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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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7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올바른 세배 례절 가르쳐주기 댓글:  조회:4119  추천:0  2017-01-27
    내일이면 설 연휴가 시작된다. 세배를 하고 차례상을 차리는 일이 어른들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럽겠지만 초등생 자녀들은 왜 설날에 이런 것들을 하는지 또 어떻게 하는 것인지 궁금해 할 수 있다.    설 연휴 전날인 오늘, 초등생 자녀에게 설의 유래와 차례상의 규칙, 올바른 세배 예절을 알려주면서 설날의 의미를 함께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      ○ 낯설다, 사린다, 서다…‘설’의 의미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절인 설날. 이날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설’이라는 말의 유래는 다양하다. ‘사린다(삼간다)’는 말에서 유래됐다는 의견이 대표적이다.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이니만큼 모든 일에 조심해야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새로운 해에 익숙하지 않다는 의미로 ‘낯설다’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혹은 한 해를 새로 세운다는 뜻의 ‘서다’라는 단어에서 생겼다는 견해, 17세기 문헌에 ‘설’이 ‘나이, 해’를 뜻하는 말로 쓰였던 것을 미루어볼 때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날’이라는 주장도 있다.    초등생 자녀가 1월 1일은 이미 지났는데 왜 이 날을 새해 첫 날이라고 하느냐고 물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에는 달력을 보며 양력과 음력의 차이를 설명해주자. 예를 들어 “달력의 큰 숫자는 양력에 해당되는 날짜이고 작은 글씨는 음력에 해당하는 날짜”임을 짚어주는 것. 이어 양력이란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을 1년으로 정해 이를 12달로 나눈 것이고, 음력은 달이 지구를 한바퀴 도는 것을 한 달로 정해 날짜를 정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과거 조상들은 음력을 활용했기 때문에 설날을 지낼 때에는 전통을 지켜 음력으로 따지는 것이란다”고 덧붙여주면 더욱 좋다.     ○ 차례상에 재밌는 ‘규칙’이 숨어있다고?    설날 차례상을 차릴 때에는 재밌는 ‘규칙’이 숨어 있다는 것을 자녀에게 알려주자.    차례상은 우선 5열이 기본이다. 숨진 사람의 영혼이 머무는 ‘신위’가 있는 쪽을 1열로 두고 서쪽부터 시접(수저를 놓는 빈 대접)과 술잔, 떡국을 놓는다. 정면을 기준으로 떡국은 오른쪽에, 술잔은 왼쪽에 두고 시접은 중간에 올리면 된다.    2열에는 고기전과 고기 구운 것, 채소 구운 것, 생선 구운 것, 생선전 등이 올라간다. 이때 기억해야 할 것은 ‘어동육서’와 ‘두동미서’다. 즉, 생선은 동쪽, 고기는 서쪽에 두며 생선의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으로 올린다는 것. 초등생 자녀에게 각 한자가 어떤 뜻인지를 짚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3열에는 생선탕, 두부탕, 고기탕 등 다양한 탕 종류를 올린다. 탕의 개수는 홀수로 맞추는 것이 원칙이다.    4열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좌포우혜’. 이에 따라 북어, 대구, 오징어 등 각종 포는 왼쪽 가장 끝에 올리고 오른쪽 끝에는 식혜를 둔다.    마지막 5열에는 과일이나 과자를 올린다. 여기에 적용되는 규칙은 ‘홍동백서’와 ‘조율이시’다.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에 두는 것. 조율이시에 따라 왼쪽부터 대추, 밤, 배, 곶감 순으로 놓는다.   이때 초등생 자녀가 흥미를 가질만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차례상에는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것. 초등생 자녀가 이유를 묻는다면 “귀신은 붉은 색을 싫어한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줄 수 있다. 차례상에 올리는 떡에는 붉은 팥을 안 쓰고 흰 고물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차례상에는 ‘복숭아’와 ‘치’로 끝나는 생선을 쓰지 않는다는 것도 얘기해주자. 복숭아는 예부터 귀신을 쫓는 이상한 기운이 있다고 전해져왔기 때문. 조상들은 꽁치, 멸치, 갈치 등 ‘치’로 끝나는 생선들은 격이 낮다고 여겼었다.      ○ 세배하는 법…남자는 왼손, 여자는 오른손이 위    자녀가 올바른 방법으로 세배를 할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다. 세배는 어른들에게 하는 새해 첫 인사이므로 특별히 예의바르게 절을 해야 한다고 일러줘야 한다.    세배를 할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공수’. 공수란 손을 모으는 것으로, 남자는 ‘왼손’을 위로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세배를 시작할 때 남자는 공수를 한 뒤 눈높이로 올렸다가 내리면서 허리를 굽혀 바닥을 짚는다. 왼쪽과 오른쪽 무릎을 차례로 꿇고 팔꿈치를 바닥에 붙여 숙이며 이마를 공수한 손등 가까이에 댄다. 잠시 자세를 유지하다가 머리를 들고 오른쪽 무릎을 세워 공수한 손으로 짚고 일어난 뒤 가볍게 인사한다.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을 때에는 공손하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하도록 일러주자.   여자의 경우, 남자와 달리 오른손을 위로 한 뒤 손을 포갠 후 어깨 높이로 올린다. 시선은 손등을 바라본다. 그 다음 왼쪽, 오른쪽 무릎을 순서대로 꿇고 엉덩이를 깊이 내려앉는다. 이때 오른발이 아래쪽으로 가도록 발등을 포개야 한다. 이어서 몸을 45도 정도 굽혔다가 일어나서 두 발을 모은다. 올렸던 두 손을 배꼽에 내려 가볍게 인사한 뒤, 무릎을 꿇고 앉아 공손하게 인사를 하면 된다.    /에듀동아 이원상 기자 
956    [그것이 알고싶다] - 설날 차례상 차리는 법 댓글:  조회:5552  추천:0  2017-01-27
            설 명절이 얼마남지 않았다.매년 차리는 설날 차례상이지만차례상 앞에서 의견이 분분한 것을 경험하였으리라 생각된다.오늘은 설날 차례상차리는법과 차례지내법,그리고 지방쓰는법에 대하여 다시 한번 공부하는 기회를 가지면서 그 자료를 공유하는의미에서 아래에 정리하여 놓습니다. 참고하시어 도움되시기를 바랍니다.   ■ 설날 차례상차리는법     ◐ 차례상 차리는 순서맨 앞줄에 과일, 둘째 줄에 포와 나물, 셋째 줄에 탕, 넷째 줄에 적과 전, 다섯째 줄에 쌀밥과 갱을 차례대로 놓는다 또한 축문을 읽지 않고, 술을 한잔만 올린다고 하나, 지방이나 지방전통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설날 차례는 기제사 때와 거의 같지만 제사 밥(메)과 국(냉) 대신에 떡국을 올는 것이 기제사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 여기에 정리된 차례상차리는 견본은 일반적인 표본이라고 볼 수있다. 지방에 따라 다소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지방쓰는법     ◐지방(紙榜)은 종이로 만든 신주(神主)인데 지방을 보면누구의 제사를 지내는지알 수 있습니다.남자 조상의 본관과 성씨는 쓰지 않습니다. 여자 조상의 본관과 성씨는 쓰지만 이름은 쓰지 않습니다.지방은 한지에 붓으로 쓰는 것이 좋지만 부득이하면 컴퓨터로 정성껏, 깨끗이 작성,프린팅하면 됩니다.   ◐지방은 제사나 차례 마지막 부분에 태우지만 잘 보관했다가 다시 써도 됩니다.지방은 기제사,설,추석 다 똑 같습니다. 즉 한 조상의 지방은 어느 때에나 다 똑 같은 내용입니다.지방은부부별로 한 장씩 씁니다. 즉 지방 한 장에는 부부만 씁니다.그러나가정의례준칙에는 당시 차례지내는 모든 조상을 지방 한 장에 다 쓴다고 되어 있기도 합니다.   아래에 지방쓰는법을 참고하시면 큰 도움이 될것입니다.       ◆차례지내는 순서     ◐제상의 진설을 마치고 자손들이 둘러서서 엄숙한 가운데 제례를 시작한다. 이때 대문과 방문을 열어 놓아 조상이 들어도시도록 한다. 먼저 촛불을 밝히고 향을 피운다. 제례의 순서는 '계독' 이라 하여 위패를 모신 독을 열고 위패를 모셔 온다. 다음에 참신(신주에 절하는 것)을 행하고, 띠풀을 묶어 잘라 모사기에 세워서 제주가 술을 붓고 절을 하면 강신이 된다.◐다음은 헌주하는 순서다. 장손부터 차례로 초헌, 아헌, 종헌으로 제주를 석 잔 올린다. 지손(支孫)들은 첨작(添酌)을 한다.초헌으로 장손이 처음에 제주를 올리고 사제자가 축문을 읽고 일동 재배한다. 술잔을 올릴 때마다 일동 재배한다. 처음에 술잔을 올리는 것은 자손이 주안상을 올리는 격이므로 술잔을 올릴 때마다 젓가락을 안주가되는 제물인 적, 포, 간납 등을 올려 놓는다. ◐자세한 순서는 아래 내용을 참고하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열 : 시접, 잔반, 메(밥) - 떡국은 우측, 술잔은 좌측. 2열 : 어동육서(魚東肉西) - 어찬은 동쪽, 육찬은 서쪽. 3열 : 탕류 - 육탕, 소탕, 어탕 순. 4열 : 좌포우혜(左鮑右醯) - 왼쪽에 포(脯)를, 오른쪽에 식혜를. 5열 : 조율이시(棗栗梨枾) - 왼쪽부터 대추, 밤, 배.       홍동백서(紅東白西) - 붉은 과실은 동쪽, 흰 과실은 서쪽.       추천 답변     차례(茶禮)는 명절에 지내는 제사로 절사(節祀), 다례(茶禮)라고도 한다. 차례는 조상에게 달, 계절, 해가 바뀌고 찾아왔음을 알리는 의례이며 제사는 사망한 날을 추모하는 의례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로 설과 추석 명절에 차례를 지내며, 기제사와 더불어 조상에 대한 숭배사상이 깃들어 있다. 차례를 지낼 때 조상에게 올리는 음식은 조리 방법과 담는 방법에 있어서 지역 간에 차이가 존재한다. 차례상은 어떻게 차려야 하나요? 차례상은 각 지방이나 가정의 전통에 따라 다르게 차릴 수 있으며, 상차림은 제사와 동일하다. 각자의 방식에 따라 차례상 위에 음식을 차리는 것을 진설(陳設)이라고 한다. 진설(陳設)은 명절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설날에는 떡국, 추석에는 송편을 올린다. 기본적인 차례상 차림은 5열이며 다음과 같다. 차례상 차리는 방법 상을 차리는 사람 기준으로 가장 앞 줄, 다시 말해 신위1) 에서 가장 먼 줄이 다섯 번째 줄(5열)이다. 주로 5열에는 과일류가 진설(陳設)되며 대추, 밤, 배, 감, 사과, 한과류를 올린다. 5열과 관련된 차례상 진설의 한문어구로는 ‘조율이시(棗栗梨枾) 또는 조율시이(棗栗枾梨), 홍동백서(紅東白西)’가 있다. 조율이시(棗栗梨枾)는 좌측부터 조(棗)는 대추, 율(栗)은 밤, 이(梨)는 배, 시(枾)는 곶감의 순으로 올린다는 의미이며, 조율이시(棗栗梨枾)와 함께 조율시이(棗栗枾梨)도 가능한 방법이다. 홍동백서(紅東白西)는 동쪽에는 붉은 과일, 서쪽에는 흰 과일을 올린다는 의미이다. 차례상 차리는 방법 상을 차리는 사람 기준으로 두 번째 줄(4열)에는 포, 나물, 간장, 나박김치, 식혜가 올라간다. 지역에 따라 포, 식혜는 3열 또는 4열에 올리는 경우가 있다. 4열과 관련된 차례상 진설의 한문어구로 ‘좌포우혜(左胞右醯), 서포동해·혜(西脯東醢·醯), 숙서생동(熟西生東) 또는 생동숙서(生東熟西)’가 있다. 좌포우혜(左胞右醯)는 좌측에는 포, 우측에는 식혜를 올린다는 의미이며, 서포동해·혜(西脯東醢·醯) 역시 서쪽에는 포, 동쪽에는 생선젓과 식혜를 올린다는 의미이다. 숙서생동(熟西生東)은 서쪽에는 익힌 나물, 동쪽에는 생김치를 올린다는 의미이다. 차례상 차리는 방법 상을 차리는 사람 기준으로 세 번째 줄(3열)에는 육탕(육류), 소탕(두부, 채소류), 어탕(어패류) 등 3가지 종류의 탕을 올린다. 지역에 따라 적(구이)이 2열 또는 3열에 올리는 경우가 있다. 3열에는 양쪽으로 촛대를 올린다. 3열과 관련된 차례상 진설의 한문어구로 ‘어동육서(魚東肉西)’가 있다. 어동육서(魚東肉西)는 동쪽에는 생선, 서쪽에는 육류를 올린다는 의미이다. 차례상 차리는 방법 상을 차리는 사람 기준으로 두 번째 줄(2열)에는 서쪽에서부터 육전(기름에 부친 전), 육적(고기 구운 것), 소적(두부 부친 것), 어적(생선 구운 것), 어전(기름에 부친 것)을 올린다. 지역에 따라 2열에는 면, 탕, 떡, 간장이 올리는 경우가 있다. 2열과 관련된 차례상 진설의 한문어구로 ‘동두서미(東頭西尾), 적접거중(炙楪居中)’이 있다. 동두서미(東頭西尾)는 동쪽에 머리를 향하고, 서쪽에 꼬리를 향한다는 의미이며, 적접거중(炙楪居中)은 적(구이)는 중앙에 올린다는 의미이다. 차례상 차리는 방법 상을 차리는 사람 기준으로 가장 마지막 줄, 다시 말해 신위에서 가장 가까운 줄이 첫 번째 줄(1열)이다. 주로 1열에는 수저, 밥, 잔, 국을 올린다. 지역에 따라 1열에는 메(밥), 갱(국), 숭늉을 올리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명절에 따라 떡(송편)을 올리기도 한다. 1열과 관련된 차례상 진설의 한문어구로 ‘좌반우갱(左飯右羹)’이 있다. 이는 좌측에 메(밥), 우측에는 갱(국)을 올린다는 의미이다.     설날 차례상 진설법 차례상 차리는 방법 설날 차례상 진설의 경우는 1열에 메(밥), 갱(국) 대신에 떡국을 올린다. 다른 열은 추석 차례상 진설과 동일하다. 지역별 차례상 진설법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는 각 지역별로 특색을 가진 음식을 차례상에 올린다. 차례상 차리는 방법 충청도 차례상에는 삶은 닭고기, 대구포, 상어포, 가오리포, 오징어, 피문어 등의 건어물 또는 홍어, 병어, 가자미, 낙지, 서대묵 등을 올린다. 차례상 차리는 방법 전라도 차례상에는 대표 음식인 홍어를 비롯하여 병어, 낙지, 꼬막 같은 어패류 등을 올린다. 차례상 차리는 방법 경상도 차례상에는 대구, 돔배기, 문어, 안동 식혜, 조기, 민어, 가자미, 방어, 도미 등을 올린다. 차례상에 올리면 안 되는 음식 차례상 차리는 방법 차례상에는 올리면 안 되는 음식이 있다. 삼치, 꽁치, 갈치 등 ‘치’자로 끝나는 생선은 올리지 않는다. ‘치’로 끝나는 생선은 흔하고 값이 저렴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복숭아와 같이 털이 있는 과일은 조상님의 혼령을 쫓는다는 이유로 올리지 않는다. 또한 고추가루와 같은 붉은 양념은 쓰지 않으며 강한 향신료인 마늘 양념도 사용하지 않는다. 차례상에 올라가는 음식의 간은 간장 대신 소금으로 하며, 맵거나 자극적이지 않게 한다. 마지막으로 붉은색 팥고물 대신 흰 앙금을 사용하도록 한다.      
955    [그것이 알고싶다] - 지방(紙榜) 쓰는 법 댓글:  조회:6347  추천:0  2017-01-27
요약 지방은 제사를 모시는 대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당에서 쓰는 신주 대신 임시로 만드는 위패를 말한다. 깨끗한 흰 종이에 고인의 이름 등을 적어 사용하며 고인의 위치와 제사지내는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작성법이 달라진다. 죽은 사람의 혼을 대신하는 것이므로 제사 직전에 만들었다가 제사를 마치면 소각한다. 목차 펼치기 정의 지방(紙榜)이란 제사를 모시는 대상을 상징하는 신위(神位)의 하나다. 신위는 조상의 형체를 본따 나타낸 것으로 신주(神主), 위패(位牌), 지방 등이 신위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고인의 사진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그 중 신주는 나무를 다듬어 고인의 관직이나 친족관계 등을 적은 대표적인 신위로 중국 고대부터 사당에서 사용되었다. 위패는 신주를 보다 간단하게 만든 것이며 주로 사찰에서 사용한다. 지방은 사당의 건립이 어려운 경우 신주 대신 일회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깨끗한 흰색 한지를 사용해 제사 직전에 만들었다가 제사를 마치면 소각한다. 지방을 쓰기 전에는 몸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지방 역시 신위의 일종으로 조상의 혼이 들어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규격 지방은 흰색 한지를 사용해 만든다. 만약 한지가 없다면 깨끗한 창호지나 백지로도 가능하다. 규격은 가로 6cm, 세로 22cm이며 상단 모서리를 조금씩 접거나 잘라 각지지 않도록 만든다. 지방의 위를 둥글게 하고 아래를 편평하게 만드는 것은 둥근 하늘과 편평한 땅(天圓地方, 천원지방)을 상징한다. 지방 규격 쓰는 법 부모님 두 분이 돌아가셨을 경우엔 지방에 부모를 같이 쓴다. 이때 아버지는 왼쪽, 어머니는 오른쪽에 적는다. 부모님 중 한 분이 생존해 계신다면 지방에 한 분만 쓰면 된다. 조상의 경우에도 지방에 쓸 조상이 두 분 이상이라면 왼쪽에 남자 조상을, 오른쪽에 여자 조상을 쓴다. 여자 조상이 두 분 이상이라면 남자 조상의 오른쪽에서부터 이어서 쓴다. 지방의 글씨는 붓을 사용해 세로로 적는다. 내용은 주로 한자로 적지만 최근에는 한글로 적는 경우도 있다. 한글로 쓸 경우에는 한자 문구를 그대로 표기하거나 뜻을 풀어서 적는 경우도 있다. 지방은 고인과 제사를 모시는 사람(祭主, 제주)의 관계, 고인의 직위, 고인의 이름, 고인의 자리(神位, 신위)의 순서로 적는다. 대상이 제주의 아버지라면 지방에 '顯考學生府君神位(현고학생부군신위)'라고 쓰는데 이때 顯(현)은 존경의 의미를 지니며 考(고)는 고인이 제주의 아버지임을 의미한다. 고인이 제주의 할아버지라면 顯祖考(현조고), 증조할아버지라면 顯曾祖考(현증조고), 고조할아버지라면 顯高祖考(현고조고)라 쓴다. 마찬가지로 고인이 제주의 어머니라면 맨 처음에 顯妣(현비)라고 적는다. 여기서 妣(비)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의미하며 고인이 제주의 할머니라면 顯祖妣(현조비), 증조할머니라면 顯曾祖妣(현증조비), 고조할머니라면 顯高祖妣(현고조비)라 쓴다. '顯考學生府君神位(현고학생부군신위)'에서 學生(학생)은 본래 관직이 없거나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다만 과거제도가 없는 현대에는 특별한 변형 없이 고인이 남성이라면 모두 學生(학생)으로 적는다. 府君(부군)은 제사대상이 제주보다 윗사람일 경우 이름 대신 적는 문구로, 만일 제사 대상이 제주보다 아랫사람이라면 이름을 적는다. 여기까지 작성한 후 마지막에 조상의 자리를 의미하는 神位(신위)를 적는다. 여성의 경우 과거에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등 봉작이 있다면 봉작을 적고, 일정한 봉작이 없다면 孺人(유인)이라 적었으나 현대에는 고인이 여성이라면 孺人(유인)으로 통일해 쓴다. 고인의 이름을 쓸 때는 남성과 달리 이름 대신 본관과 성씨를 적는다. 부인이 여러 명 있을 경우 이를 구분하기 위한 관행이 이어진 것이다. 마지막에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조상의 자리를 의미하는 神位(신위)를 적는다. 고조부모 지방 쓰는 법 고인이 제주(祭主, 제사를 모시는 사람)의 고조할아버지일 경우 '顯高祖考學生府君神位(현고조고학생부군신위)'라 적는다. 顯(현)은 존경의 의미로 맨 먼저 쓴다. 高祖考(고조고)는 고인이 제주의 고조할아버지라는 뜻으로, 여기서 考(고)는 아버지를 의미한다. 다음엔 고인의 직위를 적는데 고인이 남성일 경우 學生(학생)으로 적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어 고인의 이름을 적을 때, 고인이 제주보다 윗사람이라면 이름 대신 府君(부군)이라 쓴다. 마지막엔 조상의 자리를 의미하는 神位(신위)를 적는다. 고인이 제주의 고조할머니일 경우엔 '顯高祖妣孺人+본관+성씨+神位'라 적는다. 顯(현)은 마찬가지로 존경의 의미로 맨 먼저 쓰며, 이어 고인이 제주의 고조할머니임을 뜻하는 高祖妣(고조비)를 적는다. 이 때 妣(비)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의미한다. 고인의 직위는 여성일 경우 孺人(유인)으로 통일해 적는다. 이어 고인의 이름에는 고조할머니의 본관과 성씨를 적고 마지막에 神位(신위)를 적는다. 고조할머니의 성이 청주 김씨(淸州 金氏)라면 예시 그림처럼 '顯高祖妣孺人淸州金氏神位(현고조비유인청주김씨신위)'가 된다. 고조부모 지방 예시 증조부모 지방 쓰는 법 고인이 제주(祭主, 제사를 모시는 사람)의 증조할아버지일 경우 '顯曾祖考學生府君神位(현증조고학생부군신위)'라 적는다. 顯(현)은 존경의 의미로 맨 먼저 쓴다. 고인이 제주의 증조할아버지라면 曾祖考(증조고)라 적는데, 이 때 考(고)는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어 고인이 남성이라면 지위는 學生(학생)으로 통일해 적는다. 고인의 이름을 적을 때는 고인이 제주보다 윗사람이므로 이름 대신 府君(부군)이라 쓴다. 마지막에는 조상의 자리를 의미하는 神位(신위)를 적는다. 고인이 제주의 증조할머니일 경우엔 '顯曾祖妣孺人+본관+성씨+神位'라 적는다. 顯(현)은 존경의 의미로 맨 먼저 쓰며, 이어 고인이 제주의 증조할머니임을 뜻하는 曾祖妣(증조비)를 적는다. 이 때 妣(비)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의미한다. 고인의 직위는 여성일 경우 孺人(유인)으로 통일해 적는다. 이어 고인의 이름에는 증조할머니의 본관과 성씨를 적고 마지막에 神位(신위)를 적는다. 증조할머니의 성이 안동 김씨(安東 金氏)라면 예시 그림처럼 '顯曾祖妣孺人安東金氏神位(현증조비유인안동김씨신위)'가 된다. 증조부모 지방 예시 조부모 지방 쓰는 법 고인이 제주(祭主, 제사를 모시는 사람)의 할아버지일 경우 '顯祖考學生府君神位(현조고학생부군신위)'라 적는다. 존경의 의미로 顯(현)을 먼저 쓴 다음, 고인이 제주의 할아버지임을 의미하는 祖考(조고)를 적는다. 여기서 考(고)는 아버지라는 뜻이다. 다음엔 고인의 직위를 적는데, 고인이 남성이라면 學生(학생)으로 적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어 고인이 제주보다 윗사람일 경우, 이름 대신 府君(부군)이라 쓴다. 마지막에 적는 神位(신위)는 고인의 자리라는 의미다. 고인이 제주의 할머니일 경우엔 '顯祖妣孺人+본관+성씨+神位'라 적는다. 顯(현)은 존경의 의미로 맨 먼저 쓰며, 이어 고인이 제주의 할머니임을 뜻하는 祖妣(조비)를 적는다. 이 때 妣(비)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의미한다. 고인의 직위는 여성일 경우 孺人(유인)으로 통일해 적는다. 이어 고인의 이름에는 할머니의 본관과 성씨를 적고 마지막에 神位(신위)를 적는다. 할머니의 성이 광산 김씨(光山 金氏)라면 예시 그림처럼 '顯祖妣孺人光山金氏神位(현조비유인광산김씨신위)'가 된다. 조부모 지방 예시 부모 지방 쓰는 법 고인이 제주(祭主, 제사를 모시는 사람)의 아버지일 경우 '顯考學生府君神位(현고학생부군신위)'라 적는다. 顯(현)은 존경의 의미로 맨 먼저 쓴다. 考(고)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제주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다음엔 고인의 직위를 적는데, 고인이 남성이라면 學生(학생)으로 통일해 적는다. 이어 府君(부군)은 고인의 이름 대신 적는 것으로, 고인이 제주보다 윗사람임을 의미한다. 마지막에 쓰인 神位(신위)는 고인의 자리라는 의미다. 고인이 제주의 어머니일 경우엔 '顯妣孺人+본관+성씨+神位'라 적는다. 顯(현)은 존경의 의미이며, 妣(비)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뜻한다. 고인의 직위는 여성일 경우 孺人(유인)으로 통일해 적는다. 이어 고인의 이름에는 어머니의 본관과 성씨를 적고 마지막에 神位(신위)를 적는다. 어머니의 성이 전주 이씨(全州 李氏)라면 예시 그림처럼 '顯妣孺人全州李氏神位(현비유인전주이씨신위)'가 된다. 부모 지방 예시 백부모 지방 쓰는 법 고인이 제주(祭主, 제사를 모시는 사람)의 큰아버지일 경우 '顯佰父學生府君神位(현백부학생부군신위)'라 적는다. 顯(현)은 존경의 의미로 맨 먼저 쓴다. 佰父(백부)는 큰아버지를 의미하며, 같은 의미가 반복되므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뜻하는 考(고)는 적지 않는다. 이어 고인의 직위를 적을 때는 고인이 남성이라면 學生(학생)으로 적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제사대상이 제주보다 윗사람이므로, 고인의 이름 대신 府君(부군)을 쓰며 마지막에 조상의 자리를 의미하는 神位(신위)를 적는다. 고인이 제주의 큰어머니라면, 큰 어머니를 의미하는 佰母(백모)를 넣어 '顯佰母孺人+본관+성씨+神位'라 적는다. 이 때 顯(현)은 마찬가지로 존경의 의미를 가진다. 고인의 직위는 여성일 경우 孺人(유인)으로 통일해 적는다. 이어 고인의 이름에는 큰어머니의 본관과 성씨를 적고 마지막에 神位(신위)를 적는다. 큰어머니의 성이 전주 이씨(全州 李氏)라면 예시 그림처럼 '顯佰母孺人全州李氏神位(현백모유인전주이씨신위)'가 된다. 백부모 지방 예시 형/형수 지방 쓰는 법 고인이 제주(祭主, 제사를 모시는 사람)의 형일 경우 아버지를 뜻하는 考(고) 대신 兄(형)을 넣어 '顯兄學生府君神位(현형학생부군신위)'라 적는다. 존경의 의미로 顯(현)을 먼저 쓰고 兄(형)을 이어서 적는다. 다음엔 고인의 직위를 적는데, 고인이 남성이라면 學生(학생)으로 적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인의 이름을 쓸 때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제사대상이 제주보다 윗사람이므로 이름 대신 府君(부군)을 쓴다. 마지막에 쓴 神位(신위)는 조상의 자리라는 의미다. 고인이 제주의 형수(兄嫂)일 경우엔 '顯兄嫂孺人+본관+성씨+神位'라 적는다. 형과 마찬가지로, 존경의 의미를 가지는 顯(현)을 맨 먼저 쓴 다음 兄嫂(형수)를 적는다. 고인의 직위는 여성일 경우 孺人(유인)으로 통일해 적는다. 이어 고인의 이름에는 형수의 본관과 성씨를 적고 마지막에 神位(신위)를 적는다. 형수의 성이 김해 김씨(金海 金氏)라면 예시 그림처럼 '顯兄嫂孺人金海金氏神位(현형수유인김해김씨신위)'가 된다. 형/형수 지방 예시 남편/처 지방 쓰는 법 고인이 제주(祭主, 제사를 모시는 사람)의 남편이라면 아버지를 뜻하는 考(고) 대신 임금 辟(벽)을 넣어 '顯辟學生府君神位(현벽학생부군신위)'라 적는다. 顯(현)은 존경의 의미이며, 이어 남편을 의미하는 辟(벽)을 적는다. 다음엔 고인의 직위를 적는데, 고인이 남성이라면 學生(학생)이라 적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인의 이름을 적을 때는 이름 대신 府君(부군)이라 쓴다. 府君(부군)은 고인이 제주의 윗사람일 경우에 쓰는 표현으로, 남편이 아내의 윗사람이라 생각했던 과거의 관행이 이어진 것이다. 마지막에 적은 神位(신위)는 조상의 자리를 의미한다. 고인이 제주의 아내라면, 顯(현) 대신 죽은 사람을 뜻하는 故(고)와 아내를 의미하는 室(실)을 넣어 '故室孺人+본관+성씨+神位'라 적는다. 고인의 직위는 여성일 경우 孺人(유인)으로 통일해 적는다. 이어 고인의 이름에는 아내의 본관과 성씨를 적고 마지막에 神位(신위)를 적는다. 아내의 성이 경주 김씨(慶州 金氏)라면 예시 그림처럼 '故室孺人慶州金氏神位(고실유인경주김씨신위)'가 된다. 남편/처 지방 예시 지방 접는 법 지방 접는 법  지방을 잘라 붙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접어서 만들 수 있다. 먼저 깨끗한 창호지나 한지 등 백지를 가로 40cm, 세로 25cm 크기로 준비한다. 1번 그림처럼 종이를 세로로 4등분해 선을 만든 다음, 2번 그림처럼 양쪽 면을 중심쪽으로 접는다. 양쪽 모서리를 3번 그림처럼 접은 다음, 뒤집어 4번 그림처럼 삼각형 부분을 위 아래 모두 앞쪽으로 꺾어 접어 5번 그림처럼 만든다. 중심선을 기준으로 양쪽을 뒷쪽으로 접으면 7번 그림과 같은 모양이 되는데, 이 상태에서 위 아래의 접힌 부분을 각각 재끼면 8번과 같은 모양이 된다. 지방 접는 법  
지구온난화 인류는 어디로 가는가?   김희수     지구온난화, 이제 우리는 피부로 이것을 실감하며 늘 입에 올리고있다. 여름은 너무 덥다. 겨울은 춥지 않아 겨울같지 않다. 스모그가 계속되고 불볕더위, 한파 등 이상기후가 빈번하게 발생된다. 이상기후가 몰고 온 한파를 제외하면 지금의 겨울은 엄동설한의 칼바람, 살을 에이는 강추위, 뼈속까지 얼어드는 맹추위, 꽁꽁 얼어붙은 강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과장된 느낌이 든다.   예전에 겨울이 오면 남자들은 모두 털모자를 꾹꾹 눌러 썼고 녀자들은 모두 두꺼운 머리수건을 꽁꽁 매고 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털모자나 머리수건이 사라진지 오래다. 왕바신(王八鞋), 따투쎄(大头鞋)를 신어도 발이 꽁꽁 얼고 개털모자를 써도 귀가 시리던 겨울은 어디로 갔지?   지구온난화로 인해 21세기말이면 빙하가 70%이상이 녹거나 완전히 사라질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였다. 빙하가 녹으면 해수면은 계속해서 상승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지대가 낮은 지역은 물에 잠기거나 페허로 변할수 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지구의 기온이 계속 올라간다면 장차 홍수나 가뭄, 도시가 바다물에 잠기는 큰 위험이  닥칠수 있다. 뿐만아니라 산소고갈이라는 더 끔찍한 재앙이 올수도 있다고 과학자들이 분석했다. 산소가 없으면 사람을 비롯한 지구상의 생물체가 살수 없다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지구온난화로 신강위글자치구, 서장자치구, 사천성, 청해성, 감숙성, 운남성의 빙하는 1950년대 이후 18%가 줄었고 매년 243평방킬로메터씩 줄어들고있다고 한다. 자난해에 신강 아커타오(阿克陶)현에서 빙하가 이동해 1000㏊의 농지와 70가구에 피해를 입혔다. 신화통신은 2013년에 신강의 빙하가 20년내에 60% 감소하고 50년내에는 80∼90% 줄어들것으로 전망된다고 보도했다. 신강정부는 관광객의 빙하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신강정부는 22698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신강지역빙하에 대한 관광객방문을 2020년까지 금지했다.   지구온난화의 원인은 온실가스이고 온실가스중 지구온난화를 일으키는 주범은 이산화탄소라고 한다. 인류는 갈수록 필요한 에너지가 더욱 많아졌기때문에 손쉽게 에너지를 얻을수 있는 석유나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를 무분별하게 소비했다. 이런 화석연료가 연소될 때 지구온난화를 일으키는 주범인 이산화탄소가 가장 많이 배출된다.   계속되는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인류는 이산화탄소배출을 줄이고 신재생에너지를 개발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하고있는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지구온난화방지에 얼마만한 효과를 거둘수 있을가? 딱히는 몰라도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200~300년후 혹은 500년후에 환경오염, 오존층파괴, 지구온난화, 핵전쟁, 소행성충돌, 화산폭발 등이 극에 달해 지구가 인류가 살수 없는 환경이 되면 인류는 어디로 갈가? 공룡처럼 멸종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질가? 우주의 어딘가에 있을 제2의 지구를 찾아갈가?   정말 인류가 살수있는 환경에 적합한 행성이 우주에 있을가? 있을수 있다. 그러나 인류가 살수 있는 행성이 있다고 해도 또 발견하였다고 해도 그 행성이 지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면 거기까지 가기 어렵다. 태양계 너머의 은하계의 어느 행성인가에 제2의 지구가 있다고 해도 거기까지 가는 우주선을 제조할수 있는지도 문제지만 거기까지 가는 동안 인류는 늙어 죽을수도 있다.   그러면 가까운 곳에서 찾아야 한다. 화성은 인류가 우주선을 타고 가서 착륙할수 있는 태양계의 행성중에서 지구와 가장 비슷한 행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화성은 기온이 너무 추워서 생명체가 생존할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고 인류가 생존한다는건 더구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인류는 어디로 갈가? 그때에 가면 과학이 상상할수조차 없이 발달하여 그런 상황에 대처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고 믿어야 할가? 우리가 죽은후에 지구가 멸망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하고 자포자기해야 할가? 나만 배부르게 살다가 죽으면 되지, 하고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수수방관해야 할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어야 할가? 지구가 곧 인류가 생존할수 없는 환경이 되면 인류도 끝장이구나, 하고 비관실망해야 할가?   정말로 지구온난화를 방지할 길이 없을가? 길은 원래 없는것인데 사람이 다녀서 만들어진것이라고 한다. 전 세계 200여개 나라가 합심하고 각 나라마다 전 국민이 하나가 되여 발벗고 떨쳐나선다면 “산이 첩첩 물이 겹겹 길이 없나했더니 굽이돌아 또 새 마을이 나타나네”하는 옛시처럼 낭떠러지같은 절망속에서도 희망의 새길이 열릴것이라고 기대해본다.    
953    [자료] - "훈민정음"은 문자에만 그치지 않는다... 댓글:  조회:3640  추천:0  2017-01-27
"훈민정음"은 문자에 그치지 않는다                  정신철 “훈민정음”은 조선시대 제4대왕 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이 집현전의 진보학자들을 인솔하여 창제한 우리문자로 1443년(세종 25년)에 완성되고 1446년에 반포되였다. 훈민정음의 뜻인즉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목적은 그 서문에서 말한바와 같이 “우리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데 편하게 하고자 할따름이니라”고 하였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는 우리민족 문화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인 거사였다. 봉건시대 통치자인 대왕이 백성들의 편리를 돕자고 문자를 창제한것은 지금에 와서도 아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기득권층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창제한 우리문자임에랴.  이처럼 세계 력사상 나라왕이 백성을 위해 문자를 만든 사례가 없듯이 “훈민정음”은 단순히 문자에 그치지 않았으며 그속에는 우리문화의 독자성, 민주성과 포용성 등이 뚜렷하게 보였다.  첫째, “훈민정음”은 민족자주성의 결실이였다. 세종왕이 “훈민정음”을 창제반포할 시기 조선은 깊은 사대주의경향에 빠져있어 “모화숭화”(慕華崇華)관례에 어긋나는 일을 하기에는 아주 어려웠다. 더우기 당시 집현전 사실상 책임자였던 부제학 최만리는 상소문을 올려 우리 조정은 태조대왕때부터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한결같이 중국의 법제를 따라와서 지금도 글자나 풍속이 중국과 한가지인 이때에 백성에게 훈민정음을 익히게 하는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리유로 반대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세종왕이 참여하고 지시하여 만든 “훈민정음”은 강한 민족자주성의 결실이라고 볼수 있다. 둘째,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에는 민본주의사상이 깊이 스며져있다. “훈민정음”이전에는 복잡한 한문과 이두(한문으로 우리말을 표기하는 글체)를 사용하였는바 이는 문신들조차 알기 어려운 글이였다. 이토록 어려운 글을 생활난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배운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였다. 따라서 량반이 아닌 백성들도 쉽게 읽고 쓸수 있도록 창제한 “훈민정음”에서 세종왕의 깊은 민본주의사상을 력력히 읽을수가 있다.  셋째, “훈민정음”은 백성들이 쉽게 익히고 편리하게 쓸수 있는 실용성이 강한 문자로 기층문화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일례로 리조시기의 “서당”과 일본 도꾸가와바꾸후시기의 “데라꼬야”(寺子屋)를 비교해볼수 있다. “서당”이나 “데라꼬야”는 모두 서민교육장소이다. 당시 리조인구 1300만에 서당이 16000여개 있었고 일본은 3000만 인구에 데라꼬야가 11000여개 있었다. 여기서 보다싶이 조선은 평균 800명에 서당이 하나 있은데 비해 일본은 1700명에 데라꼬야가 하나 있었다. 다른 한면 당시 일부 지배층들은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고 부르면서 업신여기고 잘 사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훈민정음”이 서민들의 교육열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였는가를 보아낼수 있다. 그리고 유네스코가 문맹퇴치 공로상이름을 “세종대왕상”이라 할 정도로 “훈민정음”은 우리민족의 문맹탈퇴와 기층문화보급에 아주 크게 기여하였다.  “말은 사람의 특징”이라고 하듯이 민족언어는 민족구성의 중요한 요소이며 민족문화의 표상이기도 하다. 민족의 기층문화는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단절되지 않고 유유히 전승되고있으므로 그 민족문화의 명맥을 이룬다. “훈민정음”은 민족문화의 명맥을 이루는 기층문화보급과 전승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는바 단지 문자에 그치지 않고 그속에는 우리의 문화가 스며있다.  민족문화는 민족력사의 결실이고 민족주체성의 뿌리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언어문자는 민족문화를 이어가는 가장 중요한 고리이며 민족존립과도 련결된다. 다문화시대에 사는 우리는 자기 문화와 언어를 잘 살리면서 타문화를 리해하고 포용해야 기타 민족으로부터 존경을 받을수 있고 자아발전에도 더욱 유리할것이다. 하지만 어떤 민족이든 막론하고 자기의 주체성을 상실할 경우에는 뿌리없는 부평초와 같은 운명을 면하지 못한다. 현재 도시화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주류사회진출을 운운하면서 민족언어를 무시하고 심지어 익숙한 민족문화마저 멀리 또는 포기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만약 이러한 경향이 깊어지면 민족 생존과 발전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것인지는 자명한 일이다.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민족학&인류학 연구소
952    [자료] - 조상들에게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댓글:  조회:3525  추천:0  2017-01-27
        하북성 석가장시(河北省石家庄市) 정형현 천장진 북관촌(井陉县天长镇北关村)에는 30여년동안 의무적으로 마애불상을 지켜온 한 남자가 있다. 정형현 천장진 북관촌 촌민 로천방(路千方)은 20세가 되던 해부터 어머니로부터 불상을 지키는 일을 이어받고 지금까지 줄곧 견지해왔다. / 중국망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조선족의 이중언어교육과 이중언어문화교육                          최학송(중앙민족대학교) 1. 왜 “족보”가 필요한가  족보(族譜)”란 흔히 한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부계를 중심으로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적어낸 책을 말한다. 한 가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적어냈기에 족보는 가문의 력사책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족보는 단순히 가문의 력사를 기록하는 역할에 멈추지 않는다. 족보는 후손들에게 하나의 전통을 만들어주어 후손들로 하여금 긍지감을 갖고 오늘을 살아가게 한다. 특히 역경에 처하였을 때 그것을 이겨나가는 무언의 힘과 동력의 원천이 된다. “조상들에게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서라도 다시 한번 역경에 도전하는 받침목이 되는것이다. 때문에 족보는 “뼈대있는 가문의 후손”과 “근본이 없는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한중수교이후 한국을 다녀온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의 종친회를 찾아가 중국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을 족보에 올리고 또 그 족보를 받아온것도 이런 맥락에서 리해할수 있겠다.  민족으로 말하면 민족의 력사가 곧 그 민족의 족보라고 할수 있다. 유감스러운것은 오늘날 우리 조선족들은 민족의 족보인 민족력사를 잊어가고있는것이다. 조선민족으로서 단군신화를 모르고, 조선족으로서 이주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있다. 선족은 또 중화민족의 일원이라는 신분을 갖고있다. 그러면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 중국의 력사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가? 솔직히 이 글을 쓰고있는 나 자신도 “중원(中原)”이란 오늘날의 하남(河南)성 일대를 가리킴을 안것이 불과 몇달전이다. 우리 조선족들은 중국의 력사도 잘 모르고있다.  족의 력사를 모르는 사람이 민족의 문화를 안다면 또 얼마나 잘 알가? 력사와 문화,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이런 상식들로부터 우리는 멀어지고있다. 우리의 력사와 문화를 모르고 단순히 언어만을 배웠다고 할 때 이는 하나의 외국어를 배운것과 큰 차이가 없을것이다. 민족적 정체성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어쩌면 언어보다도 력사와 문화를 장악하는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2.교육체계에서 사라진 력사와 문화 일전에 올해 대학에 진학한 조선족 신입생들에게 “단군신화”를 아는가고 물어본적이 있다. 대부분이 처음 들어보는 말이란다. 극소수만이 중학교시절 조선어문 선생님으로부터 단군신화를 들어본적이 있다고 했다. 조선족대학생들과 교류하다보면 이들이 알고있는 우리 민족의 력사나 문화 관련 지식이 너무나 빈약함을 실감하게 된다. 이럴수 밖에 없는것이 이들이 받은 교육체계에는 우리 민족의 력사, 문화 관련 지식이 거의 없었다. 단군을 모르는 단군의 후손이 나타난것은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내용을 배워주지 않은 학교 나아가서는 조선족사회의 문제이다. 연변대학 김해영선생의 론문 “중국 조선족학교 민족문화 교육과정 개발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보면 중국은 2001년부터 새로운 교육과정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번 교육과정개혁은 국가교육과정, 지방교육과정, 학교교육과정 3급 관리체계를 갖춤으로써 각 지방에서는 지방교육과정을, 각 학교에서는 학교교육과정을, 그리고 각 민족은 민족특색의 교육과정을 개발 및 실행할수 있는 정책적조치와 시공간이 마련되였다. 이와 동시에 연변조선족자치주교육국에서는 2007년 10월에 “전주조선족중소학교에서 조선족민족문화교육을 실행할데 관한 지도의견”을 제시하였으며 조선족 산재 지역들에서도 관련 정책에 근거하여 정도부동하게 소수민족학교에서 소수민족문화교육을 진행할수 있도록 정책적지원을 마련하였다. 이런 형세에 발맞추어 전국 조선족 중소학교들에서는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다루는 다양한 프로젝트가 실시되고 교재가 개발되였다. 하지만 대부분 학교들에서 민족의 력사, 문화 관련 교육과정은 실행되지 않고 형식에 머물러있다고 한다. 필자가 조선족대학생들과 교류하고 또 최근에 이 글 집필을 위하여 개별적으로 알아본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가르쳐라는 정책까지 마련되여있고 또 그것을 독려하지만 교육 현실은 대학입시 평가체계에서 배제되여있다는 리유로 이것을 외면하고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학교밖에서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배울수 있는 기회와 도경은 얼마나 되는가? 한족학생들이나 한국의 학생들은 어릴적부터 각 년령단계별로 설계된 도서나 영상물을 통하여 력사와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으며 또 현실적으로 그런 도경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익혀가고있지만 우리 조선족학생들에게는 이런 도서나 영상물이 아주 적음은 자명하다. 실제로 우리 학생들은 일단 교정을 벗어나면 중국의 주류문화와 각종 도서와 영상물을 통하여 들어온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한국문화에 무작위로 로출된다. 한족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계된 중국 주류문화체계나 한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계된 한국문화체계는 우리 조선족학생들로 보면 배워야 하는 대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현실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조선족학생들에게는 옳바른 정체성 확립에 필수적인 력사와 문화 습득 시스템이 결여되여있다고도 할수 있다.  3.언어교육과 문화교육을 결합시켜야  오늘날 조선족은 비록 세계화시대를 살아간다고 하지만 주요한 삶의 무대는 여전히 중국과 한국이다. 그리고 조선족의 최대경쟁력은 조선어와 한어라는 이중언어를 장악한것이다. 이때 말하는 “언어”는 단순한 “말”에 멈추는것이 아니라 “문화”도 포함되는것이여야 한다. 조선족(조선민족)의 문화와 중국의 주류문화를 모두 잘 알고있음으로써 단순히 “말”이 통하는것이 아니라 “생각”마저 통할 때 우리는 진정한 경쟁력을 갖게 되는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력사와 문화를 잘 모를뿐만아니라 언어마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있는 실정이다. 요즈음의 조선족대학생들을 보면 우리말 실력이 갈수록 저하되고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구두어도 문제이지만 서면어는 더욱 심각하다. 맞춤법이나 문법적인 문제가 적지 않을뿐만아니라 글의 론리성에도 문제가 많다. 그러면 한어는 잘 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닌것 같다. 조선족학생들의 한어수준이 전에 비하면 현저히 제고된것은 사실이지만 한족학생들과 비하면 아직도 차이가 존재한다. 한어실력이 제고된 동시에 조선어실력이 저하된것이 조선족중소학교 이중언어교육의 현실이다. 연변지역은 아직까지 괜찮다고 할수 있지만 산재지역은 많은 학생들이 한어를 일상용어로 사용하다보니 조선어가 거의 외국어처럼 사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어는 한족들보다 못하고 조선어는 한국인들보다 못한것이 오늘날 조선족의 현실이다. 현재 중국의 200여개 대학교에서 한국어학과를 개설하였으며 갈수록 많은 한국 학생들이 한어를 배우고 중국에 류학오고있다. 한중수교 초기 두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거의 조선족밖에 없었을 때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두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고있다. 더욱 큰 문제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중국의 주류문화에 대한 리해에서는 한족들보다 못하고 한국문화에 대한 리해는 한국인들보다 적다. 본격적인 교류에 들어가면 언어보다 중요한것이 어쩌면 문화일수도 있음을 감안할 때 조선족의 미래 경쟁력이 걱정되지 않을수 없다.  현재 이중언어교육 실시만으로도 학업부담이 적지 않지만 언어교육을 문화교육과 결합시켜 이중언어문화교육을 실시하는것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조선족에게 있어 조선어와 한어는 영어나 일어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언어이다. 조선어는 민족의 언어로서 우리의 민족적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며 한어는 국가의 통용어로서 중국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반드시 필요되는 존재이다. 때문에 조선어와 한어는 단순한 언어공부가 아니라 그 언어를 지탱해주고있는 력사와 문화를 배움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조선족(조선민족)으로,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력사와 문화는 결코 한권의 교과서로 배울수 있는것이 아니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기초적인 력사, 문화 지식을 전수하는 동시에 학생들을 인도하여 다양한 관련 서적을 읽게 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지식면을 넓혀나가게 해야 한다. 이런 독서과정은 다시 학생들의 언어수준의 제고과 론리성의 강화에 도움이 될것이다. /인민넷 10월 10일자
951    [자료] - 조선족도 믿을것이 후대에 대한 참교육밖에 없다... 댓글:  조회:3609  추천:0  2017-01-27
박광성 교육의 질은 결국 교육을 통하여 “힘”이 형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반듯한 직장과 든든한 생업을 갖는것으로 평가되여야 한다.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오고 아무리 고상한 품격을 가졌다 한들 좋은 직장과 생업을 찾지 못해 자기의 생활을 꽃피우지 못하고 사회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맹랑한것이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조선족 교육의 현황을 “맹랑한 상황”으로 진단하고싶다.    대학입시률만 본다면 조선족교육은 현재 호황기를 맞고있다. 학교마다 거의 대부분 졸업생들이 대학에 입학하며, 일부 학교들의 승학률은 90%를 넘어서고, 그중 적지 않은 학생들이 중점대학으로 진학하고, 성과 지역의 입시장원들도 속출하고있다. 본인이 근무하고있는 중앙민족대학만 보아도 조선족학생수가 지난 몇년간 줄곧 늘어나 현재 재학생수가 450명을 넘어서고있다. 지난해 9월 상해시 조선족대학생 신입생환영모임에 참석한적이 있는데, 그때 활동에 참가한 학생만 해도 200명이 족히 되는것 같았다. 이는 갈수록 많은 조선족학생들이 대도시의 대학들도 진학하고있음을 설명하는것으로 고무적인 측면이다.   허나 실상 대학에 와서 이들의 표현을 보면 실로 우려할만한 상황이다. 지난 몇년간 필자는 학교 학생처에서 근무하면서 각종 평의, 시합, 사회실천, 학술활동, 연구생추천 등 활동에 수없이 참가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많은 경합에서 조선족학생들이 결승에 참가하는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사회조사활동만 보더라도 많은 학생들이 조를 묶어 테마를 확정하고 연구계획서를 작성하여 학교의 경비지원을 받아 방학에 사회조사도 하고 연구보고서도 작성하여 장려를 받기도 하는데, 조선족학생들이 연구지원을 받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소수민족학생들을 우대하는 민족대학에서 이 상황이니 다른 학교에서는 더 말할나위 없을것이다. 연변대학도 상황은 마찬가지인것 같다. 이 몇년간 연변대학에서 추천하여 우리 대학 연구생으로 진학하는 학생 대부분이 한족학생들이며, 심지어 연구생학술대회에 참가하러 오는 학생들조차도 조선족을 보기 어렵다. 그 영문을 물으니 조선족학생들이 학습에서 한족학생들과 비길 바가 못된다는것이다.    혹자는 이 원인을 또 언어에서 찾을것이다. 한어에서 딸리기때문이라는것이다. 그러나 교육일선에서 본바로는 한어만 딸리는 문제가 아니라, 요즘 조선족대학생들중 조선어로 자기소개서를 그럴듯하게 쓸수 있는 학생도 몇몇 안되며, 조선어로 론리정연하고 설득력 있는 발언을 할수 있는 학생도 얼마 안된다. 소위 조선문학을 전공한다는 학부신입생들중 당시(唐詩) 다섯수도 제대로 외워두지 못한 학생이 대부분이란다. 조선어로도 제대로 쓰지 못하니 다른 언어로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부모들이 번 돈으로 겉모습은 날로 화려해지지만 속은 텅텅 비여가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조선족대학생중 국내에서 이름깨나 하는 대학의 연구생에 입학할수 있는 학생이 가물에 콩나물 나듯 하다. 다른 민족들의 경우 필자가 교편을 잡고있는 민족대학 사회학과만 보더라도 본과 졸업생중 70% 정도의 학생들이 명문대 혹은 중점대학 연구생시험에 합격되어 진학하는 상황이다. 대도시 정부기관의 공무원시험이나 사업단위시험에 합격되는 조선족학생은 10년동안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으면서 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했다. 조선족사회는 판이 좁아서 좋은 소식은 금방 알려진다. 이렇고 보면 아마 거의 없는것 같다. 다른 민족학생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가 하는 질문을 할수 있지만, 필자가 지도한 연구생들만 보아도 최근 몇년간 광명일보, 국가자연과학기금회, 대외경제무역대학, 북경시사법국, 북경시민정국, 운남성건축관리위원회, 회사의 경우 텐센트, 지프자동차 등에 취직하였다. 북경 본 지역 학생들은 없고 거의가 서부, 서남부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다. 그러나 조선족학생들은 거의가 표류하고있다.    국내에서 연구생시험이나 공무원시험, 번듯한 회사들의 입사시험에 합격될수 없으니, 조선족학생들이 많이 기웃거리는 곳이 한국류학이나 한국기업들이다. 그리나 실제 상황으로 볼 때, 소수 업종을 제외하고, 조선족이 한국에서 류학하고 국내로 돌아와서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는것은 이미 과거로 되였다. 공무원이나 사업단위의 경우 시험을 치러야 하기때문에 류학생들에게는 더욱 불리할수 있다. 한국기업 취직은 더욱 나쁜 선택이다. 중국에 와서 경영하고있는 한국기업들의 경우 직장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회사가 거의 없다. 흔히 젊었을 때 단물을 빼먹고, 젊은 기가 빠지면 눈치를 주어 스스로 물러나게 만든다. 따라서 요즘 90후 조선족청년들중 자리를 못잡고 중국과 한국 사이를 표류하다가 림시벌이로 전락되여가는 경향이 날로 뚜렷해지고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지금 어느 시대인데 직장소리나 하고 앉아있냐 하는 질문을 하면서 젊은 사람들이 창업도 하고 사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수 있다. 그러나 창업도 사업도 능력이 돼야 한다. 조선족이 요즘 세상을 헤집고 다니면서 쌈지돈 정도 벌었는지 모르겠지만, 미래세대를 볼 때 정말로 본인 스스로나 가족, 그리고 전 사회적으로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러다가 정말로 떠돌이집단으로 전락될수 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가? 사실 필자도 잘 모른다. 그저 대학에서 근무하면서 보이는것들이 이렇다. 혹 이 문장을 보고 반론 문장을 써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고, 대학생들이 나와서 반박해줬으면 더욱 좋겠다. 필자는 본인이 잘못 본것으로 결론 나기 바란다. 그러나 교육현장에 있는 분들이 공동히 느끼고있는 문제라면 본인, 가정,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돌려 원인을 찾고 하루속히 조치를 취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 2000여년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도 최강 종족집단으로 거듭나있는 유태인의 경우 가장 큰 신조가 자신을 영원히 지켜줄수 있는것이 머리에 든 지식과 손에 익힌 기술이라는것이다. 조선족도 믿을것이 후대에 대한 교육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허물어지고있다.   /박광성(朴光星) 중앙민족대학 민족학&사회학학원 
950    [자료] - 한 사람의 정신력 발전사는 그 사람의 열독사이다... 댓글:  조회:3488  추천:0  2017-01-27
독서를 즐기는 민족으로 거듭나야 한다                                     손경란 “정음문화칼럼 48”에 실린 “조선족교육질 저하에 경종을 울릴 때다”라는 글을 읽고 교육현장에 몸담고있는 교원으로서 또 9살 남자아이를 둔 가장으로서 똑같은 고민을 한적이 있고 생각되는바가 있어 글로 적어본다. 실제로 조선족교육현황을 살펴보면 대학입시률은 타민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지만 대학에 입학한후의 실제 능력발휘는 저하되여있는것이다. 다시말하면 입시시험에서의 높은 성적과 실제 소질능력은 비대칭관계에 놓여있다고 말할수 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가? 물론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필자는 독서부족에 따른 사고력의 저하가 주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저명한 교육학자 주영신(朱永新)교수님은 독서와 관련하여 아이들을 네 부류로 분류하였다. 첫째 부류는 교과서 공부를 하기 싫어할뿐만아니라 과외독서도 싫어하는 아이들인데 이런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무지몽매하다. 둘째 부류는 교과서 공부를 잘 할뿐만아니라 과외독서를 즐기는 아이들인데 이런 아이들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셋째 부류는 교과서 공부만 잘하고 과외독서를 하지 않는 아이들인데 이런 아이들은 일정한 단계까지 발전하면 자신의 능력에 한계성을 느끼며 결함이 속출한다. 넷째 부류는 교과서 공부를 싫어하고 과외독서만 즐기는 아이들인데 이런 아이들은 시험성적이 리상적이지 못한탓으로 진학, 취업면에서 장벽에 부딪칠수 있으나 농후한 독학흥취에 힘입어 얼마든지 자신의 일자리를 찾거나 창출한다. 깊은 사색을 이끌어내는 글귀라 아직도 머리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필자는 우리민족의 대부분 대학생들은 셋째 부류에 해당한다고 본다. 전면적인 사전조사가 없이 단지 대학교 교육현장에서 느낀 소감에 따른 판단임을 말해둔다. 이들은 분명 학교교육을 통한 교과서 공부에 성공한자들이다. 진학을 겨냥한 교과서 지식에 대한 열공과 대학입시에서의 소수민족 특수혜택을 통해 높은 성적으로 명문대학 혹은 중점대학에 진학할수 있는 기회를 얻을수 있게 된다. 하지만 대학교 공부는 차원이 다르다. 물론 똑같은 교과서 공부방식으로 지정된 한두권의 교과서나 해당 참고서에 대한 공부를 통해 학기말 성적에서 좋은 성적을 따내여 국가장학금생, 학교 1, 2등 장학금생 명예를 획득할수 있다. 하지만 종합적인 소질능력을 필요로 하는 론문작성, 사회실천프로젝트, 학술활동 등 분야에서 좋은 성과물을 내놓지 못하고있거나 혹은 참가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는 과외독서 부족에 따른 사고력 혹은 창의력의 결여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고력은 다양한 분야의 독서과정에서 이루어진다. 그만큼 우리민족 학생들의 과외독서량이 엄청 부족한 상황이라는것을 말해준다. 과외독서량이 부족하면 사고능력이 저하되고 사고능력이 저하되면 말하기능력이나 문장능력은 떨어질수 밖에 없다. 필자의 유년기에서 대학시절까지를 돌이켜보면 역시 셋째 부류에 속한다고 말할수 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소학교부터 시작해서 참 공부를 좋아했던것 같다. 그러나 아쉽게도 교과서 공부에만 한정되여있었다. 과외서적이라고는 학교에서 통일적으로 주문하는 “꽃동산”, “소년아동”, “소년보” 등 서너가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끈질긴 교과서 공부 덕분에 대학교에 순리롭게 입학할수 있었고 또 운좋게 대학 강단에 설수 있게 되였다. 이렇게 공부를 하다보니 뒤늦게야 과외독서의 재미와 중요성을 깨달았고 그후 한동안은 도서선택의 방황기를 겪으면서 홀로 좋은 책을 선택해서 구입하고 또 몰입하여 독서할수 있는 경지에 오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지금도 가끔은 “좀 더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섭렵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을 느끼기도 한다. 독서능력은 절대로 일조일석에 구축되는것이 아니다. 유아기, 아동기, 소년기, 청년기를 거치면서 그 년령단계에 걸맞는 다양한 분야와 다단계 독서과정을 통해야만 탄탄한 독서습관과 독서능력을 키울수 있는것이다. 그리고 교과서 공부는 주로 학교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과외독서 공부는 주로 가정교육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민족의 가정교육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가정교육의 중요한 책임자는 가장으로서의 부모님들이다. 헌데 그 자리는 대부분 “빈자리”상태이다. 많은 부모님들은 코리안드림을 안고 한국에 가계신다. 부모님들이 계시지 않는 가정교육,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몰려온다. 물론 경제적으로 부유해져 더 많은 책을 구입해서 볼수 있는 경제적여유가 생길수 있다. 하지만 독서습관은 절대로 많은 돈을 들여 다량의 책을 사주면서 “책보라, 책보라”라고 하는 “잔소리”에 의해 길들여지는것은 아니다. 특히 어릴적부터 독서습관과 독서능력을 키우는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그 시절 아이들의 취미에 맞는 서적선택과 독서안내가 중요할뿐만아니라 더욱 중요한것은 가장들의 독서참여이다. 반드시 가장들이 솔선수범해야 한다. 과외독서의 힘은 무궁무진하다. 한마디로 독서는 지식을 얻는 중요한 방식이며 우리의 심적능력과 사고능력을 키울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경로이다. 어떤 학자가 말한바와 같이 “한 사람의 정신력의 발전사는 그 사람의 열독사이다.” 그럼 같은 의미에서 한 민족의 정신적경지는 그 민족의 독서수준에 달려있다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우리민족은 반드시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를 막론하고 독서를 즐기는 민족으로 거듭나야 한다. 또한 학교교육을 통한 교과서 공부와 가정교육을 통한 과외서적 열독이 온전한 통합을 이끌어낼 때, 오늘날 상연되고있는 “좋은 학벌”을 손에 쥐고도 좋은 직장과 생업을 찾지 못해 여기저기 표류하는 조선족교육의 “맹랑한 상황”이 어느 정도 호전될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손경란(孙庆兰)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949    [이것이 알고싶다] - 전통호칭례절법 알아보기 댓글:  조회:4074  추천:0  2017-01-27
전통호칭례절법 알아보기 (ZOGLO) 2017년1월27일 결혼을 앞두고 있는 남녀라면 이번 설 연휴에 상대편 집에 인사를 갈 가능성이 크다.  약혼자 형제 혹은 자매의 배우자는 뭐라고 부르지? "저기요" 할 수는 없는데.... 처가 쪽 혹은 시댁 쪽 식구들의 호칭이 낯설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호칭이 마뜩치 않기도 하다.  전통적인 호칭법에 따르면 신부는 "도련님, 아가씨" 식의 호칭을 불러야 하는데, 신랑은 "처남" "처제"식으로 다소 하대하는 느낌까지 난다. 그래도 결혼은 남녀의 만남에서 더 나아가 두 집안이 사돈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맺는 절차기도 하다. 정확한 예절법을 익힐 필요가 있다. 주요 호칭을 다시 한번 정리해본다.  ■ 아내 오빠는 처남? 형님? 전통적으로 아내의 남자 형제들에 대해서는 아내의 오빠인지, 동생인지 따지지 않고 '처남'으로 불러왔다. 하지만 요즘에는 처남과 매부가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많아 손위 처남은 '형님'으로 부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배우자 호칭은 남편 호칭에 맞춰 아주머니 또는 처남댁으로 부른다.  아내의 여자 형제들은 손위 여부에 따라 처형과 처제로 구별해 부른다. 아내 언니의 남편은 형님(연장자) 또는 동서(연하)로 부르면 된다. 아내 여동생의 남편은 동서라고 부르지만, 통상 '김서방' '이서방' 식으로 많이 부른다.  ■ 남편 여동생의 남편은 뭐라 부를까? 남편의 형은 아주버님, 배우자는 형님으로 부른다. 남편의 남동생은 혼인 여부에 따라 도련님(미혼) 혹은 서방님(기혼)으로 호칭한다. 남편 남동생의 아내는 동서다.  남편의 여자 형제, 즉 시누이는 전통적으로 며느리에게는 어려운 존재다. 남편의 누나는 형님으로 부르고 동생이면 아가씨라 부르면 된다. 이 때 형님(남편의 누나)의 남편은 아주버님, 아가씨(남편의 여동생)의 남편은 서방님이 된다. 헌데 남편 여자 형제의 배우자까지 정식 호칭으로 부르기 어색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녀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철수(아이이름) 고모부' 식으로 부르면 덜 어색해 진다.  ■ 남편의 작은 아버지는? 양가의 큰 아버지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등의 기타 친인척에 대한 호칭으로 상식적으로 판단해 부르면 된다.  큰아버지는 큰아버님, 작은 아버지는 작은 아버님으로 호칭한다.  외조부모의 경우 그냥 할아버님, 또는 할머님이라고 부르면 자연스럽다. / kbs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중국축구협회가 최근 발표한 국가대표 소집 명단에 조선족 출신으로 중국 슈퍼리그 소속인 하북화하팀의 고준익과 연변부덕팀의 지충국 선수가 포함됐다. 이 명단은 오는 3월 23일로 예정된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한국전에 출전할 선수들로 구성한 것이어서 특별히 관심이 쏠린다. 두 선수는 지난 10∼15일 국제 A매치로 열린 '2017 중국컵'에서 국가대표로 뛰었고 이번에 다시 발탁됐다. 3월 23일로 예정된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예선 한국전을 대비해 중국축구협회가 최근 발표한 국가대표에 발탁된 조선족 출신의 고준익(사진 좌측)과 지충국   대표팀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1995년생으로 일본 프로 2부리그 출신의 중앙 수비수인 고준익은 1990년대 중국 국가대표를 지냈던 고종훈 씨의 아들이다.   고 씨는 중국이 준우승을 차지했던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대표팀의 주축멤버로 활약했다. 조선족 사회에서는 대를 이어 중국 축구 국가대표로 발탁된 첫 사례가 나왔다며 반기는 분위기라고 한다. 수비형 미드필더인 지충국은 슈퍼리그 2016시즌에서 23경기에 출전해 4차례 공격도움과 1득점을 올리는 활약으로 협회 관계자의 높은 점수를 받아 선발됐다. 이들은 오는 2월 9일부터 시작되는 대표팀 집중훈련 캠프에 합류해 본격적으로 팀워크를 맞출 예정이다. ======================== 1월 20일, 중국축구협회에서 최신 국가팀 집중훈련 대명단을 공개하였다. 이번에 소집한 국가팀원은 중국 슈퍼리그, 갑그리그의 12개 구락부에서 선출된 27명의 선수들인데 연변부덕팀의 지충국선수가 대명단에 입선되였다. 이번 집중훈련은 2월 9일부터 12일까지 진행되는것으로 알려졌다. ==================== {주: 필자}= 그 외 하북화하팀 고준익선수(조선족, 전 연변팀, 전 국가팀 고종훈선수 아들)의 이름도 보인다... /////////////////////////////// 연변일보넷/연변부덕축구구락부
947    파도 파도 한 우물 파기... 댓글:  조회:5972  추천:0  2017-01-23
박맹호 회장은 생전에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옥 사무실에서 문인·학자들과 토론하고 수많은 책을 기획했다. 사진은 2011년 5월 창립 45주년 기념 인터뷰를 하기 전 사무실 소파 위에 앉아 포즈를 취한 박맹호 회장. /이진한 기자 1966년 시작한 옥탑방 1인 출판사, 비룡소 등 8개 브랜드로 키워내 이문열·한수산 등 스타 작가로… 시인 고은 "실천이 빨랐던 사람"   "가끔 길을 가다 수십 층짜리 빌딩을 올려다보면서 생각한다. 누군가는 돈을 벌어 저 빌딩을 올렸을 테지만 나는 평생 책을 쌓아 올린 셈이다. 어느 쪽이 더 보람찬 인생일까."(박맹호 지음 '책'·257쪽) 한국 출판의 거목(巨木)인 민음사 출판그룹 박맹호(83) 회장이 22일 0시 4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6년 청진동 옥탑방에서 아내 패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시작한 1인 출판사는 그 사이 비룡소·황금가지 등 8개 브랜드·누적 1만종을 펴낸 '출판 명가(名家)'가 됐다.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한 그는 처음 '문학청년 박맹호'가 되기를 원했다. 등단의 꿈을 이뤘다면, 지금의 민음사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한 소설 '자유풍속'이 심사위원인 평론가 백철에게 '일석(一席)'으로 추천받았지만, 이승만 자유당 정권을 과도하게 비판했다는 이유로 최종 심사에서 떨어졌다. 이후 출판인의 길을 택한 그는 당대의 문재(文才)를 찾아내 적극 후원했고, 민음사의 기획들은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와 늘 함께하게 된다.   1973년 시작한 '세계 시인선'은 고은 김현 김주연 등 당대 최고의 시인과 문학평론가가 번역하고 원문까지 함께 실은 국내 최초의 시집이었고, 1974년 김수영 김춘수 정현종 이성부 강은교의 이름으로 출범한 '오늘의 시인 총서'는 선풍적 인기와 함께 단행본 출판의 본격 가로쓰기 시대를 열었다. 1977년 한수산(부초)을 1회로, 박영한(머나먼 쏭바강) 이문열(사람의 아들)을 스타로 만든 '오늘의 작가상' 역시 응모 원고를 심사해 선정한 최초의 문학상이었다. 문학평론가 김우창·유종호가 초대 편집위원이었던 계간지 '세계의 문학'이 문청(文靑)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음은 물론이다. 박맹호라는 나무 아래에서 문학의 꿈을 펼친 문인의 수는 헤아리기 어렵다. 동갑내기 시인 고은은 매일 청진동 옥탑방 시절의 민음사로 '출근'해 짜장면을 먹었고, 밤이면 함께 술집으로 향했다. 1970년대 '문학과지성사'를 차려 독립하기까지, 김현·김주연·김치수·김병익 등 '문지 4K'가 기획을 하고 책을 낸 곳도 이 옥탑방이었다. 고은은 시집 '만인보' 10권 박맹호 편에서 "발상에서 행동 사이에 거의 틈이 없다"고 그를 표현했다. 마치 '서론이 없는 본론'처럼, 바로 실천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고인과 대학 동기 동창인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젊은 시절 박맹호는 친구들을 먹이고 재우며 뒷바라지하는 일이 잦았다. 캐들어갈수록 속내가 깊은 사람"이라고 추억했다. 고인은 출판을 '벽돌 쌓기'에 비유하곤 했다. 대박을 꿈꾸며 쉽게 뛰어들어 서둘러 승부를 볼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대한출판문화협회장 시절이던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한국 주빈국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역시 임기 중이던 2007년 조선일보와 공동 주최로 '거실을 서재로' 캠페인을 1년 동안 전개했다. 조선일보 창간 기념일인 3월 5일 시작한 이 캠페인은 첫날 5000명이 신청했고, 사흘 만에 1만명을 넘어선 기념비적 독서 운동이었다.   박맹호 회장이 1966년 청진동 옥탑방에 있는 민음사 첫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 /민음사 팔순을 넘긴 뒤의 마지막 공식 석상은 2015년 2월 '오늘의 작가상' 개편 기자간담회였다. 수상작을 민음사에서 펴내던 예전 방식을 접고, 다른 출판사의 책까지 포함시켜 심사한다는 파격적 내용이었다. 그해 수상자였던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과 이듬해 수상자인 장강명의 '댓글 부대'는 모두 다른 출판사의 책이었다. 박 회장은 개편 간담회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이 팔십 넘어서 내가 새로 할 일이 뭘까, 생각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을 떠올렸다. 민음사가 얻는 것은 없다. 있는 거 다 뿌리고 가겠다." 한국출판인회의(회장 윤철호)는 "고인은 한평생 '책을 사랑하고 만들고 사라져 간' 영원한 출판인"이라고 추모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위은숙씨, 장녀 박상희 비룡소 대표, 장남 박근섭 민음사 대표, 차남 박상준 사이언스북스 대표, 큰며느리 김세희 민음인 대표, 둘째며느리 김현희 아주대 미디어학과 교수가 있다.     '올곧은 백성의 소리를 담는다'는 뜻을 담아 창립한 민음사... / ⓒ 조선일보 어수웅 기자
946    몸을 움추리고 있는 "동면"시기에는 독서 하라... 댓글:  조회:5058  추천:0  2017-01-22
백악관에서 8년을 버틴 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독서 8년이라는 백악관에서의 삶은 얼마나 치열했을까? 대통령은 매우 고립되고 외로운 직업 이라 말했던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생존 비결로 '독서'를 꼽았다.   일이 급하게 돌아가고 숱한 정보가 난무할 때 속도를 늦추고 다른 입장에서 생각하게 하는 능력을 준 것은 바로 독서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들기 전 1시간은 반드시 읽었던 책, 결정의 순간에 그가 펼쳤던 책, 과연 오바마가 선택한 책은 무엇이었을까     연대감을 느끼고 싶을 때면 에이브러햄 링컨과 마틴 루서 킹, 마하트마 간디, 넬슨 만델라의 책을 읽었다. - 버락 오바마 인터뷰     중국 공상과학 소설가 류츠신, "삼체(三體) 작품 스케일이 워낙 커서 백악관의 일상사가 사소하게 느껴졌다... - 버락오바마 인터뷰   내 직업은 국민들에게 정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고, 정부에게 국민들을 대변하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선택과 결정을 해야할 순간들이 있습니다 선택과 결정에 따른 책임도 우리의 몫이기도 하기에 문제의 본질을 깊이 있게 볼 줄 알고 현명하게 결정내릴 수 있는 힘이 독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갈채 받으며 떠나는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 중 독서의 힘에 공감을 느끼며 내려설 때 존경받는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를 느껴봅니다 [출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독서 - 백악관에서 8년을 버틴 힘|작성자 생각하는 주윤발  
94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인류와 야생 멧돼지와의 전쟁 댓글:  조회:4099  추천:0  2017-01-22
[동물 이야기] 농장 습격·어린 양 '꿀꺽'… 호주 생태계 파괴하는 야생 돼지       호주에서는 야생 돼지(feral pig)가 자연을 파괴하고 농장을 습격해 국가 차원의 문제가 되고 있어요. 호주 정부에 따르면 현재 호주 국토의 약 38%에 2400만마리의 야생 돼지가 살고 있습니다. 호주 전체 인구(약 2300만명)보다 야생 돼지의 수가 더 많아요. 야생 돼지들은 물길을 바꾸거나 땅을 마구 파헤치고 멸종 위기에 놓인 동물을 잡아 먹으며 호주의 생태계를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어요. 농장을 습격해 농부들이 공들여 기른 농작물을 먹어치우기도 하고 목장에서 기르는 어린 양을 사냥해 잡아 먹기도 합니다. 호주 대륙에는 원래 돼지가 살지 않았어요. 19세기 호주에 정착한 이주민이 유럽에서 가축용으로 돼지를 들여왔는데 이 중 일부가 농장을 탈출해 야생 돼지가 되었지요. 호주 정부는 야생 돼지의 사냥을 허용하고 그 고기도 거래할 수 있게 하고 있지만 번식력이 워낙 뛰어난 탓에 그 수가 좀처럼 줄지 않고 있습니다.   ▲ 호주 북부 이스트 엘리게이터 강 부근 평야에서 야생 돼지들이 떼를 지어 달리는 모습이에요. /토픽이미지   돼지는 가축으로 알려져 있지만 세계 곳곳엔 야생 돼지들이 많이 있어요. 겉으로 보면 다리가 짧아보이지만 살집에 가려져 있는 다리가 몸통 밖으로 드러난 다리만큼 길답니다. 그만큼 허벅지가 두껍고 다리가 튼튼해 높은 산도 잘 타고 넘어요. 돼지는 땀을 흘리지 않기 때문에 체온을 낮출 때 진흙탕을 뒹굴어 몸을 식힙니다. 그래서 주로 물가와 가까운 풀밭이나 숲, 늪지에 살지요. 물을 좋아해서 물을 많이 마시고 생김새와 달리 헤엄도 잘 쳐요. 잡식성이라 과일이나 씨앗, 나무뿌리도 잘 먹고 코로 땅을 파헤쳐 곤충이나 벌레를 잡아 먹기도 합니다. 배가 고프면 개구리, 뱀, 새까지 사냥해 먹지요. 돼지는 일 년에 두세 번 새끼를 낳는데 한 번에 8~12마리의 새끼를 낳아요. 많게는 20마리까지 낳기도 합니다. 새끼들은 보통 10~15분 간격으로 태어나는데 몸무게가 1㎏이 조금 넘어요. 암퇘지의 배 양쪽에는 젖이 14개나 있어 새끼들이 부족함 없이 젖을 먹을 수 있답니다. 태어난 지 3일이 지나면 새끼마다 자기 젖이 정해진대요. 일주일 사이에 몸집이 두 배씩 커지고 3개월이 지나 젖을 뗄 때는 몸무게가 12㎏까지 늘어나 있어요. 돼지는 약 9000년 전에 가축이 되었어요. 멧돼지를 길들여 가축으로 키우기 시작했는데 계속 품종이 개량되어 지금은 돼지의 종류가 1000종이 넘는답니다. 닭 다음으로 많이 도축되는 동물이 돼지예요. 세계적으로 한 해에 14억마리의 돼지가 도축되어 식탁에 오르지요. 야생 돼지의 수명은 25년 정도인데 가축용 돼지는 여섯 달 정도 키운 뒤 도축해요. 최근에는 돼지의 폐와 심장, 간 등을 사람에게 이식하기 위한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어요. 돼지의 장기가 사람의 장기와 아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돼지의 각막을 사람 눈에 이식할 날도 멀지 않았대요. 돼지의 장기를 사람의 몸에 이식할 때 생기는 면역 거부 반응을 없애기 위해 돼지의 유전자를 바꾸는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어요.       김종민 前 국립생태원 생태조사본부장 |
944    [쉼터] - 유사시 대비책 "생존배낭, 생존가방" 미리 준비하기 댓글:  조회:3904  추천:0  2017-01-21
한국 경주 지진을 계기로 여기저기 또다시 국민성이 나타나고 있다. 바로 재난에 대비한 생존배낭 (혹은 생존가방)이라 불리우는 재난 키트를 집집마다 구비하려드는 움직임이다. 사실 지진 대비 메뉴얼이란게 전무하다 시피한 상황에서 각자도생의 가장 기본이 바로 생존배낭이 아닐까 싶다.   일설에 따르면 현재 활성단층이네 뭐네 하는 조사는 일제시대 때 왜놈들에 의해 조사된게 유일하며 해방 이후 조사가 된 적없다한다. 지진 발생시 1차 지진 후 책상 아래에 몸을 숨긴 후 2차 지진 전에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라는게 일반적인 행동지침이지만 그것도 일본 같이 목조 건물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지 한국처럼 콘크리트 구조에선 폭싹 건물이 주저 앉아 버리기 때문에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라는게 일반적인 지진 대비 방책이라 한다. 하지만 LA지진때 경험한 바로는 1.5m 앞의 문으로 나가려 해도 지진발생시엔 움직일 수 조차 없으며 집안에 칼이며 접시들이 로또추첨기처럼 마구마구 날라다녔다하니 겪어보지 않고선 무어라 말할 수 없을듯 싶다. (조사와 지진 경험담 출처 : 팟캐스트 떡국열차 지진편 참조)   여하튼 상황을 종합해보자면 움직일 수 있다면 재빨리 나가고 못나가면 가능한 몸을 숨겨야 함이 맞을듯 싶다. 대충 행동방식은 이렇게 정리하고 그다음 생존배낭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튼 생존배낭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다. 일단 생존배낭은 거창한게 아니다. 단 몇일 동안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말 그대로 생존이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물품들을 가방에 넣어두는 것이다. 3인가족 기준으로 생수 2~4리터, 화장지1개, 전투식량 6~9개(전투식량이 없다면 통조림, 쇠고기 카레와 같은 즉석식품류, 햇반, 자유시간 같은 초코렛바 등등), 속옷, 여벌옷, 침낭(부피가 너무 크면 은박보온), 후레쉬 정도면 충분하고 여기에 미니라디오, 호루라기, 응급약품 정도가 추가되면 좋다. 내 경우 라이프 스트로우라 하여 정수기능을 갖춘 빨대를 추가로 구매하였는데 가격도 저렴하다. (24,000원)   침낭 대신 은박보온담요(조난현장이나 마라톤 뛰고 난 선수 체온을 보호하기 위해 덮어주는 은박 담요)를 구매하였는데 개당 500원밖에 안하는지라 여러개 사서 생존가방에도 넣어두고 차에도 넣어두면 여러모로 쓸모 있을듯 싶다.   끝으로 생존배낭은 차에도 비슷하게 구성해 둘 경우 유사시 도움이 될 수 있다. 일예로 10여년 전 고속도로에 폭설이 내려 차들이 고립된 적이 있었다. 지인들도 그 당시 고립되었었는데 고생이 말도 아니었다 한다. 헬기에서 구난 용품도 던져주기도 하고 차는 고립되어 기름 떨어질까봐 시동도 나중엔 끄게 되고 먹을것도 없고.. 등등등   이렇듯 평상시에 조금 준비 해두면 나중이 편하다. 보험을 그렇게들 들면서 왜들 이렇게 적은 금액으로 위험을 대비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냉소어린 눈빛으로 애써 외면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기사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 쓰고 나가는 사람 보면 한번씩 괴상한 눈빛을 보내는게 민도이니....
기자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우리는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팀을 희망·낙관·투지·노력으로 채울 것이다.”(플리니오 다비드 데 네스 샤페코엔시 회장) 비행기 추락 참사를 당했던 브라질 프로축구팀 샤페코엔시가 다시 일어서고 있다. 샤페코엔시 선수단은 지난해 11월 29일 코다 수다메리카나(남미컵) 결승전을 위해 콜롬비아로 이동하던 중 탑승기가 연료 부족으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77명의 탑승객 중 선수 3명,승무원 2명, 기자 1명을 포함한 6명만 살아남았다. 4부리그에서 2014년 1부리그까지 올라온 샤페코엔시의 팬들과 축구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DA 300   사고가 난지 두 달여, 생존 선수들이 그라운드 복귀를 목표로 발걸음을 뗐다. 브라질 현지 언론은 18일 “헬리우 네토(32)가 최근 휠체어에서 내려와 첫 걸음마를 시작했다”며 네토가 트레이너 도움으로 걸음을 떼는 모습을 공개했다(사진). 사고 2주 만에 의식을 되찾았던 그는 깨어나자마자 결승전 결과부터 물어봐 화제가 됐다. 그는 “다시 뛸 수 있다고 믿는다. 하루 빨리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복귀하겠다”고 말했다. 구단도 선수단을 새로 구성하는 등 팀 재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샤페코엔시는 지난달 10일 브라질 출신 바그너 만치니(51)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영입했다. 브라질 내 다른 팀으로부터 임대한 20명의 선수에다 육성선수를 더해 25~27명 정도로 선수단도 꾸렸다. 브라질축구협회는 “3년간 하부리그로 강등하지 않겠다”고 제안했지만 샤페코엔시는 특혜를 거절했다. 구단은 생존선수들의 조속한 복귀를 기원하며 이들의 등번호를 비운 채 기다리기로 했다. 네토 외에도 수비수 알란 루셀이 걸음을 뗄 만큼 호전됐다. 샤페코엔시는 오는 26일 홈에서 시즌 첫 경기를 치른다. /김지한 기자 [출처: 중앙일보] 비행기 참사 샤페코엔시 “우리 가슴은 이미 뛴다”   생존 선수 3명 중 한명인 골키퍼 잭슨 폴만(24)은 결국 오른쪽 다리를 절단,(사진에서 오른쪽)   사진에서 선그라스를 낀 수비수 알란 루스첼(27)은 척추수술,   다른 수비수 헬리오 네토(31)는 두개골와 가슴을 크게 다쳤다. ============================================== ▲ 비행기 참사로 샤페코엔시 선수단 가운데 19명이 숨졌다.     [스포티비뉴스=조형애 기자] 브라질 1부 리그 소속 샤페코엔시가 탄 비행기가 추락... '샤페코엔시 참사'는 2016년 11월 29일(한국 시간) 발생했다. 영국 매체 BBC 등 외신에 따르면 이번 비행기 추락으로 샤페코엔시 선수단을 비롯해 모두 71명이 목숨을 잃었다. 6명 만이 생존했으며, 그 가운데 샤페코엔시 선수 3명이 포함됐다. 사고 원인이 연료 부족으로 알려지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더해지고 있다.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선수 3명 잠피에르 네토, 알란 루셀, 잭슨 폴먼은 콜롬비아에서 집중 치료를 받고 있다. 아직도 사고 사실을 정확히 모르는 네토부터, 사고 후 첫걸음을 뗀 루셀까지. 생존자들의 이야기다.     ○…'아직 동료들의 비극 모르는' 네토 = 수비수인 네토는 비행기추락 참사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의료진이 정신적 충격을 고려해 네토에게 정확한 사고 소식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토가 '코파 수다메리카나 1차전 결과가 어떻게 됐나'를 물었지만 의료진은 함구했다.   ▲ 사고 사실을 전해 듣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 수비수 네토(흰색 유니폼)   담당 의사는 브라질 방송 TV글로보에 "심리학자가 네토에게 (비행기 참사에 대해) 말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며 "심리적 쇼크를 막고자 한 것"이라고 밝혔다. 치료 경과는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네토의 부친은 SNS에 "아들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며 "다리 수술을 받았는데, 의사가 다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단언을 해 줬다"고 적었다.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루셀 = 수비수 알란 루셀은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됐다. 여생 동안 휠체어 신세를 질 가능성도 있었으나, 최근 다리 부상 상태가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다. 부축을 받으며 걷는 짧은 영상도 공개했다. 루셀은 영상에서 "회복이 매우 잘돼 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며 "빨리 브라질로 돌아가 회복을 마무리 짓겠다. 힘을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 참사 후 첫걸음을 뗀 것으로 전해진 알란 루셀.   ○…'왼쪽 다리만은 지키게 된' 폴먼 = 24살 전도 유망한 골키퍼 잭슨 폴먼은 왼쪽 다리를 지킬 수 있게 됐다. 스페인 매체 아스에 따르면 폴먼은 사고 후 다리 상태가 심각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다. 경과를 지켜보던 의료진은 왼쪽 다리는 절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진단을 내렸다.            
94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솔香 따라 걷고싶은 금강송 숲길 댓글:  조회:5231  추천:0  2017-01-21
진한 솔香 따라 걷고, 또 걷는다     2017-01-19  울진군 금강소나무 숲길 매년 5월부터 개방 울진 금강소나무숲 1280만 그루의 소나무가 빽빽하다. 소나무계의 대궐이라 할 만하다. 국내 최대 규모의 소나무 천연림이자, 숙종 임금이 왕실의 황장봉산(黃腸封山)으로 지정한 숲.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 일대 금강소나무 숲은 2247만㎡(약 680만평)의 면적에 수령 200년 넘은 소나무 8만 그루, 520년 된 보호수 2그루를 포함해, 수령 350년의 미인송, 수령을 짐작하기 어려운 울진 대왕금강송까지 총 1280만 그루의 소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1959년 육종림, 1985년 천연보호림, 2001년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됐다. 거대한 줄기를 뽐내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등산객들이 하나둘 산책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다. 수백 년 된 소나무가 뿜어내는 청청한 초록이 이들의 폐를 맑게 할 것이다. / 울진군청 제공 생태 경관뿐 아니라, 생물 다양성 등의 가치를 인정받은 금강소나무 숲은 지난달 28일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국가중요농업유산 제7호(임업유산 제1호)로 선정됐고, 1월에는 문화체육관광부·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관광 100선'에도 뽑혔다. 이곳 금강송의 평균 수령은 150년에 이르며, 나무 지름이 60㎝ 이상 되는 금강송 1600여 그루가 진한 솔 그림자를 뿌리고 있다. 금강소나무 군락지 수계(水系)인 왕피천과 광천 유역은 멸종위기종 수달과 산양, 삵 등이 서식하는 자연의 보고. 세계 최고 수준의 우수한 산림 환경과 더불어 빼어난 자연경관뿐 아니라, 울진군 북면과 금강소나무 숲길엔 영동과 영서 지방의 물자를 교역하던 보부상이 다닌 십이령옛길과 산촌의 문화적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자랑거리는 산림청에서 국비로 조성한 제1호 숲길이다. 울진 지역의 우수한 산림자원과 역사·문화자원을 연계하기 위해 지난 2009년부터 조성한 숲길로, 2014년 조성한 4·5구간 24.4㎞를 포함해 모두 5개 구간 65.5㎞ 길이다. 특히 농도 짙은 피톤치드의 뛰어난 치유 기능을 인정받아 '힐링 코스'로 주목받고 있다. 걷기 여행으로 대표되는 웰빙 관광지이자 자연을 그대로 살려낸 친환경 숲길이다. 매년 5월 개방한다. 임광원 울진군수는 "체험과 휴양 위주의 산림 생태 휴양단지 조성과 함께 동해안의 새로운 산림관광지로 육성하기 위해 착실히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울진군은 울진 금강소나무의 생태 문화적 가치의 연구성을 모색하기 위해 학술프로그램 '울진 금강소나무 재선충병 예방대책 심포지엄'도 매년 열고 있다. 소나무가 완성한 한 폭의 수묵화가 노을에 젖고 있다.   /[조선닷컴]      # 수령 520년 금강송 보호수 지름 무려 95cm, 높이 25m.  
941    [이런저런] - 로봇이 <<春聯(춘련)>>을 못쓴다?... 쓴다!... 댓글:  조회:5180  추천:0  2017-01-20
알리바바 AI 로봇, 직원들에 ‘춘련’ 선사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알리바바가 춘절을 맞아 매우 특별한 ‘서예가’를 초청했습다. 아리윈 인공지능(AI) ET가 알리바바 시시단지에서 직원들을 위한 춘련(春联: 음력설에 문•기둥에 붙이는 대련)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직원들은 현장에서 ET와 대화를 나누고, ET의 안면인식 및 음성분석 등의 기능을 거쳐 ET가 직접 작성한 글자의 춘련을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출처] 중국은 지금… 2017년 1월 19일(목)|작성자 토마스 담덕
940    [쉼터] 18 : 7 : 1,2451 댓글:  조회:5789  추천:0  2017-01-20
   ㆍ‘소비재 천국’ 이우 출발,      7개국 거쳐 육로 수송 첫 성공 ㆍ유럽 15개 도시 직접 연결... 중국과 영국을 연결하는 최초의 화물열차가 1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의류, 양말 등 생활용품을 실은 이 열차는 지난 1일 중국 저장성 이우를 출발해 7개 나라를 지나 이날 런던에 닿았다. 런던 | EPA연합뉴스 영국 런던 동부에 위치한 바킹 지역은 백인 주민이 절반도 안될 정도로 이민자 비중이 높고 소득 수준도 낮은 편이다. 지난해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에서는 런던 안팎 다른 지역들에 비해 탈퇴표가 많이 나왔다. 그러던 곳이 유럽을 넘어 아시아와도 이어지는 신(新)실크로드의 거점으로 떠올랐다.  지난 18일(현지시간) 화물열차 한 대가 이곳에 도착했다. 열차가 끌고 온 40피트 컨테이너 34개에는 중국 저장(浙江)성 이우(義烏)시에서 실은 중국산 의류, 양말, 여행가방, 생활용품이 가득 차 있었다. 지난 1일 이우를 출발한 열차는 영불 해저터널을 통과하는 1만2451㎞의 여정을 거쳐 바킹에 도착했다. 이로써 중국과 영국을 잇는 첫 화물열차가 드디어 실현된 것이다. 열차가 거쳐온 나라만 카자흐스탄, 러시아, 벨라루스, 폴란드, 독일, 벨기에, 프랑스 등 7개국이다. 중국 온라인 매체 펑파이는 “이 화물열차가 아시아와 유럽의 무역로인 고대 실크로드를 재현했다”고 평가했다. 열차의 출발지인 이우는 ‘소비재의 천국’이다. 세계 최대 규모 상품 시장인 푸톈(福田)시장에는 매년 중국 내 바이어들만 1000만명, 해외 바이어 50만명 이상이 몰린다. 지난달 크리스마스에 세계에서 쓰인 장식물의 60%가 이 도시에서 생산됐다. 이우발 유럽행 철로가 이어지면서 더 많은 소비재가 육로를 통해 곧장 영국까지 갈 수 있게 됐다.  열차를 이용해 중국에서 유럽으로 화물을 수송하면 항공에 비해 가격은 절반이며 선박에 비해 소요시간은 단축된다. 그러나 컨테이너선과 비교하면 운송량이 100분의 1 수준이어서 경제적 파급효과는 당장 크지 않다. 하지만 상징적인 효과나 향후 성장 전망은 밝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육지와 바다 양쪽으로 중국과 세계를 잇는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 구상을 천명해왔고,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화물열차가 런던에 도착한 것은 일대일로가 현실이 됐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중국은 중앙아시아, 동유럽까지만 이어졌던 일대일로의 사업 영역을 서유럽으로 본격적으로 확대하고 싶어 한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19일 “그동안 이우에서 영국까지 이어지는 수송은 해운이나 항공운송뿐이었는데 철도가 개통되면서 육지화에 성공했다”며 “이는 중국과 서유럽의 상호연결을 강화할 뿐 아니라 일대일로 건설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도했다.  영국 유통업체들의 관심도 크다. 영국 슈퍼마켓체인 테스코는 이번 열차에 실린 화물 중 어떤 것도 주문하지 않았지만 열차 도착을 환영했다. 이 회사는 그동안 벨라루스와 슬로바키아에 있는 중국발 유럽 철도 하역장들에서 물건을 들여왔는데, 이제 영국에서 곧바로 물건을 받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우에서 출발하는 화물열차는 런던뿐 아니라 이탈리아 밀라노, 스페인 마드리드로도 향할 계획이다. BBC는 중국발 열차의 종착지가 유럽 15개 도시로 확대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2015년 3월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영국이 가입하면서 양국 관계는 황금시대를 맞았다. 같은 해 10월 시 주석이 중국 국가주석으로서는 10년 만에 영국을 방문, 긴밀한 파트너십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영국이 EU에서 나가기로 결정하면서 영국을 유럽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 했던 중국의 전략에 차질이 생겼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양국은 보고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권 출범으로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미국의 우방인 영국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중국에도 이익이다. 라몬 파체코 런던킹스칼리지 교수는 “중국은 유럽과 직접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이번 열차 도착은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분석했다.    ⓒ 경향신문     ▲ 지난 1일 중국 저장성 이우시를 출발한 화물열차가 1만 2451㎞를 달린 뒤 1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동부에 도착하고 있다. 런던 AFP 연합뉴스 중국의 화물 열차가 18일을 달려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19일 신화통신에 따르면 지난 1일 중국 저장성(浙江省) 이우시(義烏市)를 출발한 화물 열차가 18일에 걸쳐 1만 2451㎞를 달려 지난 1월 18일(현지시간) 런던 동부에 처음으로 도착했다. 열차는 카자흐스탄, 러시아, 벨라루스, 폴란드, 독일, 벨기에, 프랑스 등 7개 니라를 차례로 거친 뒤 영·프 해저터널을 통과했다. 기관차는 의류, 양말, 천, 여행 가방, 생활용품 등 3500만 위안(약 60억원) 상당의 제품을 실은 40피트짜리 컨테이너 34대를 끌었다. 이번 중국~런던 노선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 구상을 실현하려는 행보 중 하나다.  다만 애널리스트들은 컨테이너선을 이용하는 것과 비교해 운송량이 적어서 경제적으로 아직은 의미 있는 수준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출처: 서울신문]
939    [그것이 알고싶다] - UFO와 그 비밀 댓글:  조회:3941  추천:0  2017-01-20
출처= 미CIA 공식 홈페이지    미국 CIA가 UFO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을 공개하고 나섰다. 미국 현지 언론은 “CIA가 93만 건에 달하는 1300만 쪽의 기밀문서를 온라인상에 공개했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 문서에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의 심리실험과 UFO, 초능력 등의 자료들이 포함돼 있다. 또한 6·25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등 냉전시대 당시 주요업무를 했던 기관들의 활동도 기록됐다. 우선 UFO와 관련된 문서들이 시선을 끌고 있다. 외계인들이 마치 지구에서 실험을 하듯 펼친 대목은 사진이 공개되면서 관심을 끌었다. CIA는 “최고기밀 문서인 이 기록은 TV드라마 ‘X파일’에 출연한 멀더 요원과 UFO 회의론자인 스컬리 요원이 흥미롭게 읽을 법하다”고 밝혔다. 출처= 미CIA 공식 홈페이지    아울러 정신능력과 텔레파시는 다루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도 관심의 대상이다. 70~80년대 초능력자로 이름을 날렸던 유리 갤러의 초능력에 대한 연구 기록도 들어있다. 유리 갤러는 사기와 조작 파문으로 한때 큰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유리 갤러는 다른 방에서 그려지는 그림을 부분적으로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상이한 부분도 있기는 했지만 정확도가 꽤 높았다. CIA는 "자신의 초자연적인 지각 능력을 설득력 있고 모호하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준 바 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한국 전쟁 전후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열강들의 개입 가능성과 시나리오 등을 담은 보고서도 있어 궁금증을 자아냈다. 한편 기밀문서가 공개된 이유는 지난 1995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25년 이상 지난 CIA 문건의 보안을 해제하고 '역사적 가치'를 공유하는 시행령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동아닷컴 도깨비뉴스 통신원 트러스트 
938    [쉼터] - 물고기 한마리 한화 1억 5000만원 댓글:  조회:3966  추천:0  2017-01-20
  거대 물고기 한 마리가 1억 5000만 원에 낙찰돼 화제다. 외신은 "중국 지린성 차간 호수에서 열린 물고기 경매에서 25kg에 육박하는 거대 물고기가 무려 85만 위안(약 1억5000만 원)에 낙찰됐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제15회(2017년 1월 2일) 지린성(吉林省) 얼음 낚시 대회를 맞아 차간 호수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대회 취지는 물고기를 낚으며 호수의 신에게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것이다.  참가자들이 잡은 물고기 중 가장 큰 것은 그 자리에서 바로 경매에 부친다. 일명 '킹 피시'로 불린다. 올해 킹 피시의 무게는 25kg에 달하는 개복치로 알려졌다. 어마어마한 몸집에 무려 85만 위안에 낙찰됐다.  이곳에서 잡힌 겨울 물고기를 먹으면 새해에 복을 받는다는 속설이 있다. 그렇다보니 경매가는 치솟을 수 밖에 없다.  새해에 복을 받고 무수한 악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대회에 참가하면서 큰 물고기를 낙찰받으려 기원하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 네티즌들은 "상당히 먼 곳에서 꼭 찾아가는 행사 중 하나다"면서 "복을 받고 건강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뭐든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 중국에서 상당히 큰 차간 호수에서는 매년 얼음 축제가 열린다. 낚시, 경매 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가 준비돼 있다. /동아닷컴 도깨비뉴스 통신원 마부작
937    작곡가 윤이상 그는 누구인가... 댓글:  조회:6104  추천:0  2017-01-18
시대 현대 출생일 1917년 사망일 1995년 유형 인물 직업 작곡가 성별 남 분야 예술·체육/현대음악 요약 1917∼1995. 작곡가. 목차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윤이상 1917-1995. 작곡가. 1972년에 뮌헨 올림픽의 문화행사의 오페라 '심청'으로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개설 출생지는 경상남도 산청군. 출신지는 경상남도 통영. 1917년 9월 17일 산청군 시천면에서 아버지 윤기현과 어머니 김순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통영으로 이주하면서 통영에서 수학하며 성장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세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하였으며,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大阪音樂學校)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작곡을 비롯하여 음악이론, 첼로 등을 배우고 잠시 귀국한 후, 다시 1939에 일본에 건너가 이케노우치 토모지로우(池內友次郞)로부터 작곡을 공부했다. 1943년 항일지하활동에 참가한 이유로 감금을 당하기도 했으며, 해방 후 1952년까지 통영과 부산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였다. 1949년 <고풍의상>·<달무리>·<추천> 등이 수록된 가곡집 ≪달무리≫를 출판하였으며, 1953년에 서울로 이주하여 경희대·숙명여대·덕성여대 등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1957년까지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Paris Conservatoire)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공부하였고, 다시 독일로 가 베를린음악대학(Berlin Hochschule)에서 작곡을 전공한 후, 1959년 동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네델란드의 빌토벤과 독일의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이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독일에 체류하게 되었고 유럽 각지에서 활동을 하다가 1964년 독일 포드기금회의 요청으로 베를린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1965년에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와, 1966년에 독일의 도나우싱엔 현대음악제에서 대편성 관현악곡 <예악>을 발표하여 국제적인 작곡가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65년에 <현악4중주 1번>과 <피아노 3중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7년에는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에 연유되어 2년간 복역을 하였으며 1969년 다시 독일로 돌아가 1970년부터 1971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Hanover Hochschule ful Musik)에서 작곡을 가르쳤고, 1971년에는 독일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1972년에 뮌헨 올림픽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위촉받은 오페라 <심청>의 대성공으로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음악대학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985년에 튀빙겐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그리고 1970년에 킬 문화상과 1987년에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 훈장을 수여 받았다. 유럽의 평론가들에 의해 ‘20세기의 중요 작곡가 56인’,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1995년에는 독일 자아브뤼겐 방송이 선정한 ‘20세기 1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90년 10월 평양에서 개최된 ‘범민족 통일음악제’의 준비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남북한 합동공연을 성사시켰으며, 사망 전까지 함부르크와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 및 국제현대음악협회(ISCM)의 명예회원으로 활동했다. 작품으로는 <유동의 꿈>·<나비의 미망인>·<요정의 사랑>·<심청> 등 네 편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바라>·<무악>·<예악>·<광주여 영원히> 등 20여 편의 관현악곡, 오보에와 첼로를 위한 <동서의 단편> 등 40여 편의 실내악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등의 교성곡, 동요에서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1백 50여편을 남겼다. 1977년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을 엮은 자서전 ≪상처받은 용≫이 독일과 서울 그리고 평양에서 각각 출판 되었다.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을 시도하여, 서양 현대 음악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에 주력을 하였으며, ‘동서양을 잇는 중계자 역할을 한 음악가’라는 음악사적 지위와 함께 ‘독일 관념철학의 전통이 벽에 부닥친 서양문명의 흐름 속에서 동양사상을 담은 음악으로 세계음악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연 작곡가’로 평가를 받고 있다. ============================== 윤이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윤이상 尹伊桑 Isang Yun 기본 정보 출생 1917년 9월 17일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산청군 사망 1995년 11월 3일 (78세)  독일 베를린 국적  대한민국 (前)  독일(1971~1995)[1] 직업 바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 작곡가 장르 현대 음악 배우자 이수자 가족 슬하 2녀 남동생 1명, 여동생 3명 종교 불교 윤이상(尹伊桑, 독문명: Isang Yun, 1917년 9월 17일 ~ 1995년 11월 3일)은 서독과 통일 독일에서 활동한 대한민국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 겸 현대 음악 작곡가이다. 본관은 칠원이며 독일식 이름은 Isang Yun(이장 윤)이다.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하였고 경상남도 통영군 충무면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이후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에서 성장하였다.   목차   [숨기기]  1삶 1.1한국에서의 활동 1.2유럽에서의 활동 1.3동백림 사건 1.4동백림 사건 이후 1.5사망 2음악 3수상 4학력 4.1명예 박사 학위 5기념 5.1대한민국 5.2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5.3독일 6주요 작품 7참고 문헌 8각주 9바깥 고리   삶[편집] 한국에서의 활동[편집] 윤이상은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선비 출신의 윤기현(尹基鉉)과 농가 출신의 김순달(金順達)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이상의 어머니는 용이 지리산을 감싸고 있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2] 1920년 충무(지금의 통영)로 이사를 해 학교를 다녔다. 다섯 살 때부터 3년간 한학을 가르치는 서당에 다녔다. 여덟 살에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풍금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잘 부르고 악보를 곧잘 읽는 등 음악에 소질을 보였다. 열세 살 때에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웠고 직접 선율도 써보았다. 동네 영화관에서 자신이 만든 선율이 연주되는 것을 듣고 작곡가가 되기로 하였다.[3] 보통학교를 졸업한 윤이상은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통영협성상업학교에 진학했지만, 결국 2년 후 서울로 올라가 군악대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부터 화성학을 공부하고 도서관에 있는 악보를 보며 서양 고전 음악을 독학했다. 1935년 상업학교에 진학하면 음악을 공부해도 좋다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일본 오사카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하고 오사카 음악대학에서 첼로, 작곡, 음악 이론을 배웠다. 이때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사는 지역에 살면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고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갖게 됐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와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오페라 문헌을 연구하고 작곡을 계속하며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냈다.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노치 도모지로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1941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4년일제에 체포되어 두 달 간 옥살이를 했다. 석방 후 다시 저항활동을 도모하다가 일본경찰을 피해 서울로 도피했다. 결핵으로 쓰러져 경성제대병원에 입원 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유치환·김춘수·정윤주등 통영의 예술인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자신은 음악부문을 맡았다. 이때 통영고등학교 등 통영의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작곡했다. (고려대학교 교가도 그의 작품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부산으로 몰려드는 전쟁고아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다가 부산사범학교로 옮겨 음악을 가르치며 작곡을 했다. 이듬 해 8월 가곡집 《달무리》를 부산에서 출판했는데 여기에 실린 〈고풍의상〉이나 〈추천〉등은 60년대에 많이 불렸다. 1950년 1월 30일 같은 학교에 국어 교사로 있던 이수자와 결혼했다. 같은 해 8월 첫 딸 정이 태어났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의 전시작곡가협회에서 활동하고 부산고등학교에서 일하다가 1953년 휴전되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대학교 예술학부와 덕성여대 등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1954년 ‘전시작곡가협회’였다가 서울에서 새로 태어난 ‘한국작곡가협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글 《악계구상의 제 문제》를 썼다. 1956년 4월 《현악4중주 1번》과 《피아노 트리오》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당시 대한민국에서 습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떠나기로 했다. 유럽에서의 활동[편집] 1956년에는 파리에 머물다가 1957년에 베를린으로 갔다. 그의 스승으로는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쉴링, 보리스 블라허, 요세프 루퍼 등이 있다. 1958년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 현대 음악 강습에 참가해 다른 작곡가들과 안면을 텄다. 1959년 빌토번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작품》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했다.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시킨 그의 작품은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964년 부인과 두 아이와 함께 서베를린에 정착했다. 1965년 초연한 불교 주제에 의한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4)와 1966년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초연한 관현악곡 《예악》은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동백림 사건[편집] 1963년 4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오랜 친우인 최상학을 만났다. 또한 한 민족의 이상을 동물 형상으로 표현한 사신도를 통해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위해 방북하였다. 하지만 당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윤이상의 친북행적을 포착, 내사에 들어갔다. 1967년 6월 17일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되었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1969년 자살을 시도한 윤이상은 결국 음악 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오페라 《나비의 꿈》을 썼다. 완성된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어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는데, 31회의 커튼콜을 받는 등 큰 호평을 받았다. 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율》과 《영상》을 작곡하기도 했다. 한편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주축이 되어 200여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어 윤이상의 수감에 대해 항의했다. 서명한 사람 중에는 페르 뇌고르, 루이지 달라피콜라, 죄르지 리게티, 아르네 멜내스,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요제프 카일베르트, 마우리치오 카겔, 오토 클렘퍼러, 한스 베르너 헨체, 하인츠 홀리거 등이 있었다. 1967년 12월 13일 1차 공판에서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재심·삼심에서 감형받았고,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세계 음악가들의 격한 저항으로 서독으로 국적을 바꿨고, 그 뒤 그는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가 작곡한 음악의 연주를 금지했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동백림 사건 이후[편집] 윤이상은 1971년에 서독에 귀화하였다.[1] 이후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북한을 오갔다. 북한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 일본에서 남북 합동 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 정부에 건의하였는데, 이것이 이루어져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열렸다. 사망[편집] 1994년 도쿄에서 모든 정치적 활동을 중단한다고 발표 했다. 1994년 9월 서울·부산·광주 등지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열렸다. 윤이상은 참석하려 했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갈등을 겪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했다. 이때 그의 소지품 가운데는 안숙선의 남도민요 음반이 있었다.[4] 1995년 11월 3일 오후 4시 20분 독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하였다. 사망후 김정일 명의의 화환이 보내졌으며 북한에서 국가적 차원의 음악회가 열렸다고 함.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그가 연루되었던 동백림 사건이 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되고 확대 해석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공표했으며, 1년여 뒤인 2007년 9월 14일에는 미망인 이수자가 윤이상 탄생 90주년 기념 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40년 만에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음악[편집] 서양 음악에 동양적인 요소를 쓴 독자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도교와 불교를 소재로 하는 곡이 많고, 성서의 글을 가사로 한 곡도 있다. 생애 대부분을 기독교 신자로 보냈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였다. 클러스터 기법 등 당대 최첨단 작곡 기법을 응용하여 서양 악기와 음악체계로 동양적인 음색과 미학을 표현할 수 있게 고안한 주요음 (Hauptton) 기법과 주요음향 (Hauptklang) 기법이라는 작곡기법을 개척했다. 수상[편집] 1956년 서울시 문화상 1988년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1992년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공로상. 1995년 괴테 메달.[5] 학력[편집] 경상남도 통영보통학교 졸업 경상남도 통영 협성고등상업학교 중퇴 일본 오사카 상업학교 졸업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 졸업 프랑스 파리 국립음악원 졸업 독일 베를린 국립 예술대학교 음악대학원 졸업 (음악학 석사) 명예 박사 학위[편집] 독일 튀빙겐 에베르하르트 카를스 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기념[편집] 대한민국[편집]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윤이상 평화재단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국제 윤이상 작곡상 통영 국제 음악제 통영시 도천동 윤이상 생가터에는 윤이상 기념관 및 윤이상 거리가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편집] 윤이상관현악단. 1984년 9월 윤이상음악연구소 설립. 매년 윤이상음악회 개최. 독일[편집]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국제윤이상협회 루이제 린저는 윤이상과 대담록을 《상처받은 용(Der verwundete Drache : Dialog über Leben und Werk des Komponiste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같은 제목의 영화가 제작되어 2007년 개봉예정이었으나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1] 2011년 현재 개봉된 바 없다. 주요 작품[편집] 한국 가곡 《고풍의상》-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듣기 《달무리》 《편지》 《추천》 오페라, 성악곡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오라토리움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4) 오페라 《류퉁의 꿈》(1965)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 1968) 혼성 합창과 타악기를 위한 《나비의 꿈》(1968) 오페라 《요정의 사랑》(1969, 1970) 세 명의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나모(南無)》(1971) 오페라 《심청》(1971, 1972) 1972년 뮌헨 올림픽의 개막을 축하하였다. 목소리, 기타, 타악기를 위한 《가곡》(1972) 타악기, 오르간, 혼성 합창을 위한《도에서(道-)》(1972, 1982) 세 성부와 타악기를 위한 《추억》(1972)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6, 1987)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듣기 경련 스님, 박두진, 김남주, 고은 등의 시를 가사로 사용하여 한민족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칸타타이다. 소프라노, 3성부의 여성 합창과 다섯 개의 악기를 위한 《에필로그》(1994) 관현악곡 관현악을 위한 《바라》(1960) 대관현악을 위한 《교향악적 정경》(1960) 현악 합주를 위한 《교착적 음향》(1960) 관현악을 위한 《유동(流動)》(1964) 대관현악을 위한 《예악(藝樂)》(1966)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듣기 대관현악을 위한 《차원》(1971)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적 음형들》(1972) 대관현악을 위한 《서곡》(1973) 대관현악을 위한 무용환상 《무악》(1978) 관현악을 위한 《서주와 추상》(1979)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1981) 《교향곡 제1번》(1982, 1983) -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3악장 듣기 《교향곡 제2번》(1984) -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듣기 《교향곡 제3번》(1985) 교향곡 제4번 《어둠 속에서 노래하다》(1986) 대편성 관현악과 바리톤 독창을 위한 《교향곡 제5번》(1987) 대관현악을 위한 《윤곽》(1989) 관현악을 위한 메멘토 《화염에 휩싸인 천사》(1994) 협주곡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75, 1976) 플룻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77) 클라리넷과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81)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1번》(1981)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2번》(1983-1986)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3번》(1993) 실내악곡 현악 사중주 제1번 현악 사중주 제2번 현악 사중주 제3번(1959)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1959)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듣기 한국 정악(正樂)의 색채를 담았다. 실내 앙상블을 위한 《로양》(1962-1964)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歌詞)》(1963) 플룻과 피아노를 위한 《가락》(1963) -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듣기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노래》(1964)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律)》(1968) 플룻,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영상(影像)》(1968) 플룻, 오보에, 바이올린을 위한 《삼중주》(1972, 1973)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1972-1975) 세 성부와 타악기를 위한 《추억》(1974) 관악기, 하프, 타악기를 위한 《조화》(1974) 오보, 클라리넷, 바순을 위한 《론델》(1974) 실내 관현악을 위한 《협주적 단편》(1976)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이중주》(1976) 오보에, 하프,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1979) 관악기, 타악기,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무궁동》(1986) 관악기와 현악 5중주를 위한 《거리(距離)》(1988) 《실내협주곡 제1번》(1990) 《실내협주곡 제2번》(1990) 독주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1958) -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듣기 쳄발로를 위한 《소양음》(1966) 오르간을 위한 《음관들(陰管-)》(1967) 첼로를 위한 《활주》(1970) 오보에를 위한 《피리》(1971) 플루트를 위한 5개의 《연습곡》(1974) -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듣기 오르간을 위한 《단편》(1975)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대왕의 주제》(1976) 플루트 독주를 위한《살로모》(1976) 하프 독주를 위한 《균형을 위하여》 (1987) 플루트를 위한 《소리》(1988) 플루트를 위한 《가락》 -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듣기 및 악보 리코더를 위한 《중국의 그림》(1993) 참고 문헌[편집] 윤신향, 《윤이상 - 경계선상의 음악》. 파주: 한길사, 2005. 김용환, "다원적 세계주의자 윤이상의 삶과 음악", 『윤이상 연구 I』(김용환 편저),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1995년 윤이상, "나의 삶, 나의 음악, 나의 민족", 『윤이상의 음악세계』(최성만, 홍은미 편역), 한길사 1991년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상/하권, 창작과비평사, 2002년 ======================== 출생일 1917. 9. 17, 경남 충무 사망일 1995. 11. 3, 독일 베를린 국적 한국/독일 요약 윤이상은 동양의 정신이 충만한 독특한 색채의 선율로 현대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생전에 '현존하는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꼽혔다. 1959년 네덜란드 빌토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이,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이 초연되어 열광적인 호응을 얻음으로써 그의 이름이 세계 음악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으로 한국 중앙정보부는 그를 임의동행형식으로 귀국시켰으며 재판결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8, 1969년의 2번에 걸쳐 10년이 감형되었다가 동료음악가·교수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윤이상은 동양의 정신이 충만한 독특한 색채의 선율로 현대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생전에 '현존하는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꼽혔다. 시인 윤기현의 3대 독자로 태어나 어린시절을 통영에서 보냈다. 음악공부를 반대하는 아버지를 피해 17세에 일본으로 유학, 오사카[大阪] 음악원에서 첼로·음악이론·작곡 등을 배웠다. 1943년 무장독립운동을 하려다가 체포되었고 8·15해방 후 고아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있었고 1953년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있었다. 이즈음 가곡과 실내악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1956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프랑스국립고등음악원에서 P. 르벨과 T. 오벵에게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1957년 8월 서베를린음악대학에서 R. 슈바르츠 쉴링, J. 루퍼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우고 B. 블라허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59년 네덜란드 빌토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이,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이 초연되어 열광적인 호응을 얻음으로써 그의 이름이 세계 음악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0년 서독 프라이부르크에서 중국·한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했고 1962년에는 관현악곡 〈바라 婆羅〉가 베를린 라디오 방송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963년 북한을 방문했고 1965년 서독 하노버에서 〈오 연꽃 속의 진주여!〉를 초연했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으로 한국 중앙정보부는 그를 임의동행형식으로 귀국시켰으며 재판결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8, 1969년의 2번에 걸쳐 10년이 감형되었다가 동료음악가·교수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감옥에서도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을 작곡하고 그밖에 〈율〉·〈영상〉 등을 작곡했다. 1971년 서독 킬 문화상을 수상했고 독일국적도 취득했다. 1971년 8월 뮌헨 올림픽의 문화행사로 오페라 〈심청〉을 초연했고 1973에는 미국 애스펜 음악제에 작품을 발표했다. 1977년 서베를린예술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981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고, 1988년에는 일본 도쿄[東京]에서 민족합동음악축전을 제의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990년 10월 북한을 방문해 분단 이후 최초로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주도해 남북한 문화교류의 첫장을 열었다. 늘 고국을 그리워했던 그는 복권이 이루어진 1994년 9월 서울·광주·부산에서 개최된 '윤이상음악제'와 '한국창작오페라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고국을 방문하려 했으나 정부와의 갈등으로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그의 음악세계는 동양적 직관과 서양적 분석, 한국의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기법이 변증법적 긴장관계로 만나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그밖의 작품으로 〈낙양 洛暘〉(1961)·〈예악 禮樂〉·〈무악〉·〈무궁동 無窮動〉(1986)·〈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 오페라 〈요정의 사랑〉(1969) 등이 있다. 1995년 5월에는 민주화를 위해 분신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그의 마지막 교향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가 일본에서 초연된 바 있다. 1955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과 쿠세비츠키 음악재단상, 괴테메달, 튀빙겐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병인 당뇨병, 기관지천식, 신부전증이 악화되어 결국 그리던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베를린에서 숨을 거두었다.
936    [그것이 알고싶다] - 옛 "국기"는 폭파되고 사용금지 되다... 댓글:  조회:5873  추천:0  2017-01-15
하켄크로이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하켄크로이츠가 들어있는 나치 독일의 국기   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고 하켄크로이츠 폭파 나치즘 조직[보이기] 역사[보이기] 이념[보이기] 인종주의[보이기] 최종 해결책[보이기] 인물[보이기] v • d • e • h 하켄크로이츠(독일어: Hakenkreuz)는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당기로 제정되었다가, 1935년 9월 15일에 국기로 제정되었다. 현재 독일에서는 법적으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역사[편집] 하켄크로이츠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나치가 결성된 1920년이었다. 나치즘의 상징물 중에는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의 상징이자 전유물로 여겨지는 것들이 많다. 군인들의 거위걸음, 모자에 달린 해골마크, 검정색 제복과 갈색 셔츠, 장화, 오른손을 쳐든 그들의 인사법 등이다. 하켄크로이츠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하켄크로이츠는 원래 고대 게르만족의 상징이었다. 이른바 '룬 문자'라고 불리는 문자 형태의 한 종류로서 일종의 기호였던 것이다. 오른팔을 들고 높이 손을 뻗어 하는 경례법도 원래는 고대 로마 제국이 사용하던 것이었다 (이 인사법은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먼저 채용했다. 원래 로마 제국 군단병들의 경례였으며, 파시스트들이 자신들을 로마 군단의 후예로 선전하면서 채택한 것이다). 그러나, 하켄크로이츠는 이젠 완전히 나치를 상징하는 것만으로 굳어버려, 독일 현지에서는 이 하켄크로이츠를 사용할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현대 백인 인종 차별 극우파들의 깃발은 서로 저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켄크로이츠를 변형한 것이다. 히틀러는 일찍부터 선전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으로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군복무 경험을 바탕으로 깃발의 중요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자연스럽게 그는 일찍부터 깃발을 만드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물론 깃발을 제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했던 것은 자신들의 신념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줘야 하는 것이었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썼다: “ 효과가 많은 기장은 대개의 경우 어떤 운동에 대한 관심에 대한 최초의 유인을 줄 수가 있는 것이다 ” 각설하고, 히틀러가 깃발을 제정할 때 몇 가지 고려한 것이 있었다. 무엇보다 깃발은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 세계관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그가 고려한 것은 다음과 같다. 민족으로서 의미를 가질 것 공산당 및 사민당에 대항할 수 있는 색깔 새로운 운동으로써 상징함 민중에 대한 심리적 파급 효과 특히 그가 주목한 것은 색깔의 사용 문제였다. 적색은 필요했다. 적색은 붉은 피를 상징하고, 히틀러에게는 피의 순수성을 의미했다. 또한 사민당과 공산당의 색깔이기도 했다. 그들의 수단을 빼앗아 사용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투쟁을 극대화하려고 한 것이다. 또한 붉은색에서 오는 느낌이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그들의 충동을 유발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요아힘 페스트가 쓴 (히틀러 평전)을 보면, 히틀러는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의 이념을 배운 게 아니라, 그들의 수단과 방법을 배워 그것을 나름대로 정리, 발전시켜 그들을 타도하는 데 그는 사용했던 것이다. 하켄크로이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대 게르만족이 행운의 상징으로 사용하던 룬 문자의 하나이다. 게르만족과 아리아 인종의 고유성과 우월성을 주창하며 반 유대 투쟁을 벌여온 히틀러에게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게르만족 고유의 상징이다. 반 유대 민족주의 관점에서 당연히 게르만족 고유의 상징이 채택된 것이다. 새로이 제정된 당기는 1920년에 처음으로 그 모습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1945년까지 독일 전역에서 사용되다가 동독과 서독이 나치를 상징하는 하켄크로이츠를 법으로 금지하고 현재까지 역사 속의 기록과 영화로 볼 수 있다.
935    [쉼터] - 도전, 도전, 또 도전... 댓글:  조회:4500  추천:0  2017-01-15
[스포츠서울 이용수기자] =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350피트(약 106m) 높이의 절벽을 오른 남성의 모습이 화제다.   지난 9일(현지시각) 영국 '데일리 메일'은 헐벗은 채로 암벽 등반한 한 남성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산악 등반가 오스틴 하웰(29)는 암벽 등반을 할 때 최소한으로 입어야 된다고 믿고 있다. 이 때문에 하웰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린빌 계곡에 위치한 숏오프 마운틴 등반에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맨몸으로 도전했다.     특히 하웰은 수직으로 깎아지는 절벽에서 의지할 밧줄 하나 없이 등반해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이에 대해 하웰은 "때때로 나는 등반하는 것이 고지식하고 기운내야 하는 노인네들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무의미하고, 짧고, 유머러스한 무언가를 찾았다"라며 맨몸으로 암벽 등반에 도전한 사연을 설명했다. 사진 | 유튜브 영상 캡처   스포츠서울 / 조글로
934    [고향문단소식] - 연변에 "중국조선족문화예술궁전"을... 댓글:  조회:3469  추천:0  2017-01-14
    자치주 정협 제13기위원회 제1차회의에서 주정협 상무위원으로 당선된  정봉숙 위원 (사진설명)     정협 위원,중국조선족문학교류발전센터를 세워야 한다고       래원:중앙인민방송국 연변편집부 박경 김미나  2017-01-13               정봉숙 정협위원이 중국조선족문학교류발전센터를 세울데관한 건의안을 제기했다.          조선족문학은 근 100여년의 력사를 갖고 있다. 조선족문학교류발전센터는 문학박물관, 문학체험관, 조선족민족문학원, 다용도회의장, 다공능전시관, 500여명을 수용할수있는 민속문화극장, 연변작가협회기관사무실 등 으로 구성하여 조선족문학의 발전력사를 집대성한 전시, 교류, 학습, 공익공연, 사무처리 등 다각적인기능을 갖춘 문화공익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정복숙 위원은 중국조선족문학교류발전센터를 세워야할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1.백년의 발전로정을 걸어온 중국조선족문학은 소중한 사료적 소장가치를 가지고있다.         2.중국조선족문학은 여러 장르가 구전하고 풍부한 사료적가치를 갖고있기에 유용하게 일반에 전시하여 널리 홍보할 필요성이 있다.         3.문학유산을 보호하고 지키면서 문학후비력량을 키우는데 일조할수 있다.         4. 물질생활이 날로 풍요로워지는 현시점에서 시민들의 정신문화수요를 만족시킬수 있다.          한편 정봉숙 위원은 중국조선족문학교류발전센터를 세우는 의의에 대해서도 사회, 문화, 경제 등 방면으로 진술하였다. 그리고 중국조선족문학교류발전센터를 세울데 관한 부지선정, 자금유치, 대외홍보와 교류, 시민들에 대한 봉사의식, 진렬할 도서 등에 대한 자세한 방안도 내놓았다.  
933    [록색평화문학주의자] - 고래 "할머니"는 떠나가고지고... 댓글:  조회:4107  추천:0  2017-01-14
[IF 카페] = 범고래 무리의 '암컷 家長' 관찰 대부분의 동물 암컷과는 달리 폐경 후에도 오래 사는 이유 알아내 老産의 위험 감당하는 것보다 자식·손자 돌보는 게 유리하기 때문   2010년 촬영된 범고래 ‘J2’. 지난해 12월 31일 미국 고래연구센터는 무리를 이끌며 자식과 손자들을 먹여 살리던 최고령 범고래 ‘할머니’ J2가 105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발표했다. /미국 고래연구센터 '할머니'가 떠났다. 자식과 손자들을 지극정성으로 먹이고 키우던 할머니가 물결 속으로 사라졌다. 미국 고래연구센터는 지난해 31일 "미국 시애틀과 캐나다 밴쿠버 연안 살리시해(海)에 살던 최고령 범고래 암컷 'J2'가 105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밝혔다. 생전 J2는 무리를 이끄는 여가장(女家長)이었다. 나이가 많다고 할머니(Granny)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고래연구센터 케니스 발콤 소장은 1976년 4월 한 무리의 범고래를 발견하고 그중 나이가 많은 수컷은 J1, 암컷은 J2라 이름 붙였다. 그해 고래연구센터가 설립돼 지금까지 이어졌다. 발콤 소장은 센터 홈페이지에 올린 추도문에서 "J2가 지난해 10월 12일 무리의 맨 앞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목격된 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며 "이제 남은 무리는 누가 이끌까"하고 애통함을 나타냈다. J2의 죽음이 화제가 되는 것은 마치 거울을 보듯 그를 통해 인류 진화에 할머니가 미친 영향을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동물 암컷은 죽기 직전까지 새끼를 낳는다. 수명이 한참 남았는데도 생식능력을 잃는 폐경(閉經) 현상은 포유류 중 사람과 범고래, 들쇠고래 단 3종에서만 발견된다. 범고래 암컷은 12~40세에 새끼를 낳고 폐경을 겪는다. 그 후에도 90세 이상 산다. 사람과 흡사한 형태다. 고래연구센터는 지난 40년 동안 J2가 이끄는 무리를 관찰해 범고래가 왜 일찍 폐경을 맞는지 이유를 알아냈다. 그들이 찾은 답은 바로 '할머니 가설'이다. 나이 든 암컷이 노산(老産)의 위험을 감당하기보다 자식과 손자 고래들을 잘 보살피는 것이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퍼뜨리는 데 더 유리하다는 설명이다. 고래연구센터의 자문과학자인 영국 엑시터대 다렌 크로포트 교수는 수십 년간 범고래 무리를 촬영한 영상을 분석해 할머니 가설을 입증했다. 폐경이 지난 암컷이 맨 앞에서 무리를 이끈 경우가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암컷보다 32% 많았다. 다 자란 수컷보다는 57%나 많았다. 만약 나이 든 암컷이 없으면 30세 이상 수컷의 사망률이 14배나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영국 셰필드대의 비르피 루마 교수는 2004년 '네이처'지에 인간사회에서 찾은 할머니 가설의 증거를 발표했다. 루마 교수팀이 18~19세기 캐나다와 핀란드 여성 3000여 명을 조사한 결과, 여성은 폐경 이후 10년마다 평균적으로 2명의 손자를 더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할머니가 오래 산 가족은 아들딸이 더 빨리 결혼했으며 손자의 터울도 짧았다. 손자들이 탈 없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비율도 높았다. 사람이든 범고래든 할머니는 오랜 경험을 통해 자식과 손자들에게 먹일 게 언제 어디에 있는지, 먹을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은 어떻게 다른지 안다. 특히 살기 힘든 시기에 할머니의 지혜가 더욱 빛난다. 크로포트 교수는 범고래의 먹이인 왕연어의 수가 줄어들수록 나이 든 암컷이 더 자주 무리를 이끌었다고 밝혔다. 이 점에서 J2의 죽음은 남은 범고래 무리에게 더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현재 살리시해의 왕연어 개체 수는 J2가 태어날 때 개체 수의 5%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범고래 무리도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J2가 이끌던 무리는 현재 24마리다. 그들에게 올겨울은 어느 때보다 혹독하지 않을까. /ⓒ 조선일보 이영환 과학기자
932    우리 고향 출판사에서도 토트백속을 노려 "작은 도서"를... 댓글:  조회:3713  추천:0  2017-01-14
문고본이 돌아왔다, 달라져서] 50%까지 저렴… 작고 가벼워… 산뜻한 디자인으로 젊은 층 인기 '마음산문고' 요네하라 시리즈, 사흘 만에 완판돼 추가 제작 출판사마다 판형 달라 혼란도   작가 장정일은 '삼중당문고'라는 시에서 "150원 했던 삼중당문고 (중략)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문고"라고 썼다. 1970년대 전성기를 맞았지만 전면에서 밀려났던 문고본이 다시 재도전을 하고 있다. 출판사 마음산책은 지난 10일 '마음산문고' 첫 시리즈로 요네하라 마리 에세이집 5권을 내놨다. 600세트 한정판은 사흘 만에 동났고 추가 제작에 들어갔다. 박완서, 정이현 등 국내 유명 작가의 소설도 곧 내놓을 예정이다. 민음사도 작년 7월부터 새 문고본 시리즈 '쏜살문고' 11권을 펴냈다. 민음사는 올해 안에 '쏜살문고' 수십 권을 더 출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학동네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문고본으로 내놓은 바 있다. 살림지식총서, 책세상문고가 명맥을 잇던 문고본 시장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가볍고 작게, 그리고 아름답게   문고본은 단행본보다 싸고 작고 가벼웠다. 가격을 낮추기 위해 표지 디자인은 간결했고 깨알 같은 글씨로 본문이 담겼다. 새로 나오는 문고본 시리즈 역시 기존 단행본보다 저렴하고 크기는 작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은 쏜살문고(5800원)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1만1000원)의 반값. 요네하라 마리 '교양노트'는 마음산문고(9500원)가 단행본(1만2000원)보다 20%가량 싸다. 대신 디자인은 화려해졌다. 민음사는 과거 문고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컬러 색상 별색 인쇄를 시도했다. 단가를 낮추기 위해 삭제했던 책 날개 같은 디자인 요소도 되살렸다. 표지에 파스텔 색조를 활용해 산뜻한 느낌을 주거나(마음산문고), 디자이너에게 새로 표지 디자인을 맡긴다(쏜살문고). 한미화 출판평론가는 "과거 문고본이 박리다매를 추구하며 일본 문고본 제책 방식을 따른 것에 비해 최근 문고본은 젊은 층을 겨냥하기 위해 한국 시장에 맞는 재해석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문고본의 경제학 출판평론가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집에서 책 읽는 문화가 카페에서 2시간 책 읽는 문화로 바뀐 지금 문고본은 매력적인 선택"이라며 "카페에 앉아 토트백에서 세련된 디자인의 문고본을 꺼내 읽는 것을 멋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주력 독자층인 2030 여성이 핸드백에 넣어 다니기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와 무게, 2시간 정도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짧은 분량이 장점이라는 것. 과거와 달리 표지 디자인과 종이 질에 신경을 쓰는 것도 이런 이유라는 지적이다.   /오종찬 기자 아이돌 가수들이 기존 앨범에 노래 한두 곡을 추가하고 표지를 바꾼 '리패키징 앨범'을 내는 것과 비슷한 효과도 있다.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는 "요네하라 마리 문고본 소식을 들은 독자가 '너무하십니다. 너무 예뻐서 또 사야 하잖아요'라고 SNS에 글을 남겼다"며 "'쌍둥이 동생'(문고본)이 새로운 독자 확보는 물론 기존 독자가 책을 재독, 삼독할 기회를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것은 문고본이 아니다? 2014년까지 '에스프레소 노벨라'라는 장르문학 문고본 시리즈를 냈던 북스피어 김홍민 대표는 "앞뒤 표지에 책 날개를 안 만들면 권당 60원씩 원가가 절감된다"며 "문고본은 싼값에 읽고 버리는 책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디자인을 강조한다면 성격에 맞는지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판형에 대한 혼란도 계속되고 있다. 보통 105×148㎜ 규격이 표준인 일본과 달리 한국에는 문고본 표준 규격이 없다. 살림지식총서(128×188㎜), 쏜살문고(113×188㎜), 마음산문고(110×178㎜) 의 판형은 조금씩 다르다. 출판사 알마는 지난달 15일 '해시태그 시리즈' 첫 권으로 '#혐오_주의'를 내놓았지만 '문고본'이라고 홍보하지는 않고 있다. 무엇이 문고본인지가 여전히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백원근 출판평론가는 "1976년에는 무려 30여 출판사에서 약 1000종의 문고본이 발행될 정도"였다며 "당시 삼중당문고는 연간 판매부수가 250만부를 돌파할 만큼 청소년들의 필독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런 문고본 열풍은 왜 사그라들었을까.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2000년대 이후 문고본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정도를 제외하면 비문학 분야에서 대중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는 필자를 구하기 어려웠다"며 "새로 나온 문고본은 환영할 만한 시도지만 비문학 분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쏜살문고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의 작가 피츠제럴드는 "독자만 읽어준다면 2~3개의 이야기를 변주하고 포장해 10번이고 100번이고 반복한다"고 썼다. 책도 마찬가지 아닐까.   /ⓒ 조선일보 양지호 기자
931    [쉼터] - 지구위에서 썩소, 랭소, 실소, 폭소로 웃겨라... 댓글:  조회:3681  추천:0  2017-01-14
[지구를 웃겨라] /일러스트=손정호 만 105세 프랑스 남자 로베르 마르샹은 지난 4일 파리 인근 국립 경륜장에서 1시간 동안 22.547㎞를 달려 105세 이상 연령대 세계기록을 세웠다. 마르샹은 소방관과 벌목꾼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리느라 운동은 꿈도 못 꾸다가 68세에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1시간 동안 쉬지 않고 페달을 밟아 평속 22.5㎞를 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자전거를 탈 줄 알지만 주기적으로 타지 않는 20~30대 남자가 1주일간 맹훈련을 한다면 그런 기록을 낼 수 있다. 마르샹은 레이스를 마친 뒤 "챔피언이 되려는 게 아니라 105세가 돼도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직 챔피언이 되려는 자, 망한 꿈을 깨달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열중하는 자, 챔피언이 될 것이다.  Why? 생각         사마천의 6가지 불치병(六不治) 사마천 사기 편작열전에 보면 어떠한 명의라도 도저히 고칠 수 없는 6가지 불치병(六不治)이 있다고 합니다. 사마천 실존인물 그림 첫번째 환자가 교만하고 방자하여 내 병은 내가 안다고 주장하는 환자. (驕恣不論於理, 一不治也라) 내 병은 내가 안다고 하면서 주관적인 판단만 중요시하고, 정확한 의사의 진료와 충고를 따르지 않는 교만한 사람은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두번째 자신의 몸을 가벼이 여기고 돈과 재물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고칠 수 없다고 합니다. (輕身重財, 二不治也라) 몸은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돈과 명예를 중시하여 몸을 가벼이 부린다면 이것 또한 불치병이라는 지적입니다. 세번째 음식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사람은 고칠 수 없다. (衣食不能適, 三不治也) 옷은 추위를 견딜 정도면 적당하고, 음식은 배고픔을 채울 만하면 적당한 것인데 지나치게 음식을 탐하고 편안한 것만 쫓는 환자는 어떤 명의라도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네번째 음양의 평형이 깨져서 오장의 기가 안정되지 않는 사람은 고칠 수 없다.(陰陽幷藏 氣不定, 四不治也) 음양이 장기를 장악하여 혈맥의 소통이 단절되면 기가 불안정해져서 돌이킬 수 없다는 상태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도저히 약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形羸不能服藥, 五不治也) 어떤 명약을 쓰더라도 그 약을 받아들일만한 기본 체력이 없다면 이것 또한 고치기 힘든 병이라는 겁니다. 여섯째 무당의 말만 믿고 의사를 믿지 못하는 환자입니다. (信巫不信醫, 六不治也) 편작은 육불치(六不治)의 난치병을 말하면서 이 중에서 한 가지만 있더라도 병이 중하게 되고 고치기 힘들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이상 옮긴글입니다) 세간에 ‘천금을 가진 부잣집 자식이 길거리에서 죽는 법은 없다’라고 하는데 빈말이 아니다. 무릇 보통사람들은 자기보다 열 배 부자에 대해서는 헐뜯고, 백 배가 되면 두려워하고, 천 배가 되면 그 사람의 일을 해주고, 만 배가 되면 그의 노예가 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다. 사마천 [사기] 화식열전 중에서  
930    [쉼터] - 136 : 136 , "축구 기록 사냥꾼" 댓글:  조회:3709  추천:0  2017-01-14
[동아일보] =   한국 축구에서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를 가장 많이 뛴 선수는 홍명보(48)다. 대한축구협회 기록에 따르면 136경기를 뛰었다. 그 다음은 차범근(64)이다. 홍명보보다 딱 한 경기가 적은 135번의 A매치에 출전했다. 두 달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 차범근은 A매치 출전 수가 한 경기 더 늘어 136경기가 되면서 홍명보와 나란히 A매치를 가장 많이 뛴 한국 선수가 됐다.  그러면 최근 두 달 사이에 차범근이 A매치를 뛰었다는 얘긴가. 환갑이 지난 차범근이? 그럴 리가 있나…. 그동안 몰랐던 차범근의 A매치 출전 기록이 지난해 11월 새로 확인된 것이다. 1975년 3월 24일 태국에서 열린 아시안컵 예선 태국전에 차범근이 뛰었던 사실이 추가로 확인됐다. 지금까지 차범근은 같은 대회에서 말레이시아(3월 16일), 베트남(3월 19일), 인도네시아전(3월 22일) 출전 기록만 남아 있었다. 축구협회는 새로 알게 된 차범근의 출전 내용을 곧 홈페이지 ‘선수별 A매치 기록’ 코너에 추가할 예정이다. 학원을 운영하는 수학 강사 윤형진 씨(위쪽 사진)는 한국 축구대표팀의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 관련 기록을 찾는 ‘기록 사냥꾼’이다. 윤 씨는 한국의 첫 국제경기였던 1948년 7월 6일 홍콩과의 경기에서 첫 골을 넣은 선수가 고 정남식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는 기록을 찾아냈다. 아래 사진은 1954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스위스 월드컵 예선 일본과의 경기에 출전한 정남식(가운데). /김경제 기자 ·축구자료 수집가 이재형 씨 제공  42년 전 아시안컵에서 차범근이 태국과의 경기에 출전했었다는 기록을 찾아낸 주인공은 윤형진 씨(38)다. 윤 씨는 축구협회 직원이 아니다. 축구 선수 출신도 아니고, 축구와 관련된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는 학원을 운영하는 수학 강사다. 대학에서는 사학을 전공했다. 30대 수학 강사가 축구협회도 몰랐던 A매치 기록을 어떻게 찾았을까.  17년 전으로 돌아간다. 윤 씨는 대학생이던 2000년 ‘축구스포츠기록통계재단(RSSSF)’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RSSSF 사이트는 축구 관련 기록과 통계, 자료를 다루는데 전 세계 축구 기록 마니아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때만 해도 윤 씨는 “한국 축구 기록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주로 축구 선수, 그중에서도 특히 유럽 선수들에 관한 정보에 관심이 많았다. 이런 이유로 당시 윤 씨는 RSSSF 회원이던 프랑스의 한 대학교수에게 이메일을 한 통 보낸다.  얼추 이런 내용이다. “1984년 프랑스에서 열린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프랑스가 우승한 것 아시죠? 그때 프랑스 대표팀 선수들의 프로필과 개인 기록을 갖고 있으면 나한테 좀 주실래요?” 답장이 왔다. 내용이 대략 이랬다. “줄 수 있지. 그런데 나도 부탁이 있어. 한국 대표팀 A매치 관련 기록을 주면 네가 얘기한 자료를 줄게. 내가 일본 대표팀 A매치 기록은 웬만큼 갖고 있는데 한국 기록은 찾기가 어렵네….”  한국 대표팀 A매치 기록이라…. 이걸 어디서 구하나…. 이때 윤 씨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윤 씨는 중학생이던 1994년 PC통신 하이텔의 축구동호회 회원이었다. 이 해에 열린 미국 월드컵 때 축구 생중계를 처음 본 뒤로 축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졌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하이텔 축구동호회 회원 중 나중에 축구협회 직원이 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1996년 축구협회에 입사한 송기룡 씨(53)다. 지금은 축구협회 홍보실장이다. 윤 씨는 프랑스 교수에게 보내 줄 한국 대표팀 A매치 관련 기록을 얻기 위해 축구협회를 찾아가 송 실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이때 축구협회를 방문한 인연이 결국 두 달 전 차범근의 A매치 기록 발견으로까지 연결된다.  윤 씨는 송 실장의 도움을 받아 축구협회 자료실에서 몇 차례에 걸쳐 기록을 찾아 봤다. 하지만 1990년 이전의 자료는 부실했다. 원래부터 기록이 없었던 것인지, 있던 기록이 관리 부실로 사라진 것인지는 축구협회도 모른다고 한다. 이때부터 윤 씨는 한국 축구 A매치 기록을 찾기 위해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을 자주 드나들었다. 1990년 이전의 신문을 뒤졌다. RSSSF의 이란인 회원과도 정보를 공유했다. “내가 한국의 A매치 기록을 찾다가 이란 관련 기록이 나오면 알려주고, 이란인 회원도 자기 나라 대표팀 기록을 찾다가 한국 관련 기록을 보게 되면 알려주고 그런 식이었죠. 같은 아시아권이라 한국과 이란이 함께 출전한 대회가 꽤 있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차곡차곡 쌓은 자료를 바탕으로 윤 씨는 2005년 11월 ‘붉은 악마―그 60년의 역사’라는 책을 내게 된다. 1948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이 치른 경기 중 확인된 654경기의 날짜와 장소, 스코어, 득점자, 출전 선수 명단 등을 각각 한글과 영어로 깨알같이 정리한 책이다. 판매 목적은 아니었다. 100권을 찍어 주변에 나눠줬다고 한다. “700경기 가까이 정리를 하다 보니 이제는 스코어와 득점 시간대, 양 팀이 골을 주고받은 순서 등의 기록만 봐도 경기 내용이 어떻게 흘러가다 마무리가 됐을지 머릿속에 대략 그려질 정도입니다.”  시간이 흘러 2007년. 이번엔 송 실장이 윤 씨를 떠올린다. 이 무렵 축구협회는 대표팀의 누락된 A매치 기록 발굴 작업을 추진한다. 송 실장은 축구협회 직원이 아닌 윤 씨를 적임자로 추천한다. 그리고 이 해 8월 윤 씨는 축구협회의 지원을 받아 대표팀 A매치 기록 발굴을 위해 약 3주간의 일정으로 홍콩,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포르, 인도, 인도네시아를 차례로 찾는다. “누락된 A매치 기록이 많을 것으로 짐작되는 시기인 1960, 70년대에는 대표팀이 동남아시아에서 경기를 많이 했어요. 메르데카컵(말레이시아)이나 킹스컵(태국) 같은 대회가 대표적이죠. 그래서 이 지역 도서관들을 집중적으로 훑기로 한 거죠.”   윤 씨는 첫 방문지였던 홍콩에서 큰 수확을 얻었다. 한국이 치른 최초의 국제경기에서 첫 득점자가 누구인지를 찾아낸 것이다. 축구협회는 1948년 7월 6일 있었던 홍콩과의 경기를 첫 국제경기로 본다. 이 경기를 첫 국제경기로 보는 것은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한 1948년 5월 21일 이후 처음 치른 경기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경기는 한국의 5-1 승리로 끝났다는 기록만 남아 있었다. 누가 골을 넣었는지는 몰랐다. 그런데 윤 씨가 득점 선수와 득점 시간대를 찾아낸 것이다. “홍콩의 공립도서관에서 당시 경기 내용을 전한 신문 기사를 찾았습니다.”  첫 득점자는 선제골을 넣은 고 정남식 전 국가대표팀 감독(1917∼2005)이었다. “이 경기는 홍콩 팀을 중국연합(combined-Chinese)으로 묘사한 표현도 있어 국제경기인 건 맞지만 A매치로 볼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윤 씨는 당시 기록 찾기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홍콩의 또 다른 3개 매체에서 정남식 의 첫 득점 기록을 전한 보도를 확인했다고 한다. “요즘은 홈페이지를 통해 오래된 예전 신문 기사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외국 도서관들이 꽤 있어 2000년대 초반에 비해서는 기록 찾는 일이 조금 수월해지기는 했습니다.” 대한축구협회가 발간한 ‘한국축구 100년사’. 1940, 50년대 국가대표팀의 경기 결과를 정리해 놓은 페이지(오른쪽)를 보면 경기 장소와 상대 팀, 스코어는 나와 있지만 득점자는 절반 이상이 비어 있다. /이종석 기자   두 달 전 윤 씨는 A매치 기록을 찾기 위해 동남아 국가를 두 번째로 찾았다. 이번에는 일주일 일정으로 태국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세 나라를 방문했다. 2007년 첫 방문 때만큼의 성과는 내지 못했다. 하지만 차범근의 기록을 포함해 대표팀의 A매치 27경기와 관련된 정보들을 일부 찾았다. “A매치 기록을 찾다 보면 완전하지 못한 기록도 있고,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기록도 있습니다.” 완전하지 못한 기록이란 경기 시간과 장소, 스코어, 득점자, 득점 시간, 출전 선수 명단 중 하나라도 비어 있는 것을 말한다. 윤 씨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는 기록은 출전 선수 명단이 3명 이하로만 나와 있는 경우다.  윤 씨가 두 차례의 동남아 방문에서 얻은 성과 중 또 하나는 몇몇 축구인에게 ‘센추리 클럽’ 가입 자격을 선물했다는 것이다. 센추리 클럽은 FIFA가 인정하는 A매치를 100경기 이상 뛴 선수 그룹을 가리키는 말이다. 김호곤(66), 조영증(63), 박성화(62), 허정무(62)가 수혜자들이다.  윤 씨가 동남아를 찾기 전까지 이들 넷의 확인된 A매치 출전 횟수는 70경기 안팎이었다. “김호곤 축구협회 부회장의 경우 그동안 알지 못했던 A매치 출전 기록을 40경기 이상 찾았습니다. 나머지 분들도 30∼40경기 찾았고요.” 윤 씨의 기록 사냥으로 김호곤의 A매치 출전은 120회, 조영증 111회, 박성화 105회, 허정무는 102회로 늘면서 모두 센추리 클러버의 자격을 갖췄다.  축구협회는 윤 씨가 올해 한 차례 더 동남아 국가(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를 방문해 찾게 되는 내용까지 반영해 이들 넷의 A매치 출전 기록을 FIFA에 보낼 예정이다.  윤 씨는 A매치 관련 기록을 새로 찾아내기가 갈수록 더 힘들어질 것으로 본다. “그동안 웬만큼 찾았는데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것은 앞으로도 찾기가 쉽지 않겠죠.” 윤 씨는 아직까지 대표팀의 A매치 60경기가량은 기록이 완전하지 않다고 했다. 1960, 70년대 태국과 치른 방문 A매치 관련 기록을 새로 발굴하기는 특히 어렵다고 한다. “홍콩이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같은 나라는 유럽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어 그런지 영자 신문도 꽤 있고 양 팀 출전 선수의 라인업도 유럽 언론들처럼 꽤 충실하게 기록해 놓은 편이에요. 그런데 태국은 영어 매체도 적은 데다 자국 선수 위주로 득점 장면만을 전하는 경우가 많아 태국과 경기를 한 상대 팀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윤 씨는 차범근의 A매치 기록도 태국의 국립도서관에서 태국어로 된 신문에서 찾았는데 통역이 없었더라면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윤 씨는 한국 축구가 첫 국제경기를 치른 지 70주년이 되는 2018년에 ‘붉은 악마―그 60년의 역사’ 증보판을 낼 계획이다. 그간 새로 찾아낸 A매치 관련 기록과 대표팀이 2005년 이후 치른 A매치 정보를 추가로 담을 예정이다. “어떻게 보면 A매치 기록이 한국 축구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으니까요. 쉽지는 않겠지만 채울 수 있는 데까지는 한번 해 보는 거죠.” / 동아일보 이종석 기자 
929    [쉼터] - "축구선수 아버지", "축구선수 아들", "11 : 3" 댓글:  조회:3773  추천:0  2017-01-11
고준익 중국축구 대표선수 '조선족의 투지 대물림'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1월10일 09시32분       중국 조선족 축구계에 경사가 났다. 5일 소집된 중국 축구대표팀(23명)에 조선족 선수 5명이 합류했다. 7년 만에 대표팀으로 돌아온 백악봉(톈진 타이다)을 비롯해 지난 시즌 중국 프로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킨 옌볜 소속의 지충국, 지문일, 최민, 그리고 고준익(허베이)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탈리아 출신 명장 마르첼로 리피 중국 대표팀 감독은 대표팀 인재 풀을 넓히기 위해 이번 대표팀에 새 얼굴을 대거 뽑았다. 중국 언론들은 이번 대표팀을 역대 가장 젊은 팀으로 평가한다. 특히 고준익은 그 젊은 팀에서도 막내인 1995년생 3명 중 1명이다.  고준익은 축구인의 피를 타고났다. 아버지 고종훈 씨(52)는 1990년대 중국 대표선수를 지냈다. 중국이 준우승을 차지했던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경기 대표팀의 주축 멤버다. 당시 소속팀(지린)이 2부 리그에 머물러 있었지만 고 씨 실력은 가려지지 않았다. 13억 중국 인구 중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1.5% 정도. 한집에서 2대에 걸쳐 대표선수가 나온 건 조선족 축구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열심히 해서 자기 힘으로 대표팀에 발탁되었으니 기쁩니다. 민족이 다르니까 (선발에) 장애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또래 중 제일 (공을) 잘 차면 실력을 인정해 줍니다.”  전화기 너머 고 씨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자부심이 묻어났다. 고 씨는 아들의 미래를 체계적으로 준비했다.      “유소년 팀의 감독, 코치 월급을 보장해 주지 않으니까 은퇴 선수들이 축구학교로 가려고 안 합니다. 축구 선수 출신이 아닌 지도자가 있는 곳이 아직도 많아요. 내가 보기에는 한국, 일본과의 차이가 거기서 납니다.”   고준익은 유소년 시절 고향인 옌볜을 떠나 상하이에서 축구 기초를 배웠다. 중국 축구계에 발이 넓은 아버지 덕분이다. 프로 첫 무대는 일본 2부 리그였다. 이때 배운 컨디션 관리, 훈련 방식 등은 지금 요긴한 자산이 됐다.   “덩치나 힘, 기술 면에서 요즘 한국 선수가 중국 선수에 우세인 게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후반 40분에도 펄펄 뜁니다. 조선족 선수들도 한국과 매한가지입니다. 작년에 옌볜 팀도 체력이 관건인 여름에 좋은 성적을 냈습니다.”  조선족의 강인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고준익은 지난해 허베이로 임대 이적해 주전으로 뛰었다. 투지 넘치는 플레이 스타일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큰 키(186cm)를 바탕으로 중앙수비수와 수비형 미드필더를 오간다. 시즌 중반에 부임한 마누엘 페예그리니 감독의 인정을 받아 올 시즌 완전 이적에 성공했다.     중국 22세 이하 대표팀의 주축이기도 한 고준익의 꿈은 중국에 머물러 있지 않다. 고종훈 씨는 “부모의 욕심으로는 아들이 유럽으로 진출하길 바란다. 한국, 일본 선수도 많이 나가 있지 않나. 그 무대에서 실력을 겨룰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소망을 밝혔다.   유럽 진출이란 원대한 꿈이 실현될 수 있을까. 10일 시작하는 중국과 아이슬란드의 평가전이 그 첫 시험 무대다.    /동아일보 장치혁 기자 ======================================================== [中国杯] 11명중 3명 조선족!!! 얼었다 풀린 冰岛 최종승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1월11일 00시13분    보임까? 훤하게 보이는 지문일선수하고 깔깔하게 보이는 지충국 15번...이러고 보니 연변팀 아니 조선족 선수들이 제일 잘 생겨보임돠...최민선수요? 뒷심이 되여서 지켜주고 있슴돠...     이 감독님 오늘 더 멋있어보임돠...조선족선수들 출전시키는거 보면 뛰여난 혜안에 박수!!!   중국국가팀 꼴문은 지문일이 지켜낸다! 봤슴까? 영원한 22번   冰岛 축구실력은 거의 모든 분들이 알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전 0대 0 꼴문을 터뜨리지 못했어요. 왜 일까요?  "나름 엉터리분석 시작입니다" 冰岛감독이 출전선수들 쫙 미리 연구해보니 아이구 진정한 실력파 지문일이 정신력이 하늘끝까지 닿는 최고의 키퍼가 지키는구나...여러각도로 기회를 아껴서 공격해라...만만치 않은 키퍼인게 아니라 상당히 빈틈없는 실력파 키퍼다. 공격기회를 아껴서 효률있게 슛해라고 선수들에게 주문을 했을겁니다(추측) 요기서 지문일 선수의 실력의 파워를 알수 있습니다. 전반전...   그리고 지충국!!! 날아다니는 하프...머리좋은 중창     자랑스럽고  감동입니다. 13억 중국을 대표하는 선수중 한명이 조선족이라는 사실에...   그리고 또 놀라지 마세요...연변팀은 아니지만 고준익 누구 아들일까요? 아시죠!!!!   후반전 멋진 수비를 펼쳤던 고준익! 조선족!!!     거친 플레이를 보였던 冰岛 2번 선수에게 옐로카드를 내민 주심   11명중 3명이 조선족이라는 것은 무한감동과 우리의 무한한 자랑입니다. 연변팀의 대장 최민선수도 있습니다. 중국선수들 오늘 투지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축구장에서의 심사숙고하는 고심하는 순간순간들이 경기결과를 결정지었습니다. 결단성없는 플레이,악바리 근성이 보이지 않았던 수비...조선족 선수를 포함한 중국팀선수들이 선전하였지만 2골을 허락하면서 패하였습니다.    조글로미디어 횡설수설:김단비,  사진: 리계화   中国杯-尹鸿博失单刀 国足0-2冰岛开门黑 比赛图   中国队首发: 门将:22-池文一; 后卫:4-范晓冬、5-杨善平、6-高准翼、13-邓涵文; 中场:8-蔡慧康、15-池忠国、11-尹鸿博; 前锋:19-曹赟定、9-毛剑卿、21-惠家康; 替补:1-石笑天、2-柏佳骏、3-裴帅、7-王靖斌、10-胡人天、12-邹德海、14-冯刚、17-崔民、18-陈中流、20-汪晋贤、23-傅欢;  
928    [쉼터] - 연변축구와 "맹인할머니" 댓글:  조회:5682  추천:0  2017-01-08
2015년 10월 22일 오전 11시경 연변장백산축구구락부에 연길시의 한 맹인할머니 한분이 찾아왔다. 할머니의 성함은 김봉숙, 올해 80고령인데 연변축구를 사랑하는 축구팬이라고 했다. 김봉숙할머니는 연변장백산축구구락부 박성웅주임을 만나 길림신문사를 통해 어렵게 찾아오게 된 경과를 이야기했다. 할머니가 연변축구구락부를 찾은 목적은 단 하나, 올시즌 좋은 성적을 내고있는 손주같은 연변팀선수들에게 돈 5000원을 내놓겠다는것. 김봉숙할머니는 행복한 단란한 가정이 있었는데 그때는 남편과 함께 도시락을 사들고 경기장을 찾았다고 한다. 연변예술단에 다니던 딸이 29살 나던해에 불치병으로 돌아간후 매일 밤잠을 설친탓에 시력이 점차 내려가면서 실명하게 되였다고 할머니를 모시고 온 박철원씨가 소개했다. 연변팀 경기를 관람하였던 김봉숙할머니는 연변팀의 둘도 없는 열성축구팬이다. 현재는 앞을 보지 못하지만 매번 경기때마다 라지오방송을 통해 경기를 듣고있다고 김봉숙할머니는 말했다. 이에 박성웅주임은 구락부를 대표해 모든 선수들이 싸인한 축구공을 선물했다. 김봉숙할머니의 너무나도 뜻밖의 후원에 감동된 박성웅주임은 《김봉숙할머니와 같은 수많은 연변축구팬들의 열성적인 관심과 지지에 큰 힘이 생긴다》면서 《감독진과 선수단을 대표해 구단에서 유용하게 쓰겠다고 》말한후 《올시즌 갑급리그에서 좋은 성과를 취득했고 또 성공적으로 슈퍼리그로 진출한것은 감독진과 선수들의 많은 노력과 분투가 있은것도 중요하지만 연변팀을 지지하는 많은 팬들이 연변축구팀의 힘이 되여주었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연변팀을 위해 아껴쓰고 아껴모은 돈으로 수박할머니, 룡정시로인협회 등 많은 팬들이 여러모로 지지를 해왔다. 오늘 특히 김봉숙할머니가 아껴 모은 돈 5000원을 갖고 구락부를 찾아 선수들한테 전해달라는데 대해 구락부를 대표해 감사를 표한다. 이런 분들이 우리 뒤심이 되고 선수 매개인을 손주처럼 생각하고 수박, 랭면 등을 사드리라는 마음 고운 분들한테 감사를 표한다. 북산가두 뢰봉반 반장인 김봉숙할머니는 매껨 경기를 라지오를 통해 들으면서 혼자서 박수를 치며 우리 선수들을 응원해주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따라배워야 할바라고 생각한다.》고 감사를 거듭 드렸다. [출처] 맹인 할머니 연변장백산축구구락부에 5000원 의연 - 모이자    ============================   “연변팀 슈퍼리그 진출 소식에 요즘 너무 덩덩해 밤잠도 못잡니다.” 2015년 10월 22일 오전 11경, 귀중한 손님 한분이 지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연변장백산축구구락부 사무실을 찾아와 박성웅주임의 두손을 꼭 잡았다. 손님은 올해 80고령의 앞을 못보는 안로인이다. “한잎 두잎 모아 제 마음을 드립니다. 우리 선수들이 좋고 연변이 이름을 떨쳐 좋습니다. 눈으로는 못봐도 너무 기쁩니다. 꼭 받아주십시오.” 할머니는 축구구락부 박성웅주임의 손에 성금 5000원이 들어있는 돈봉투를 쥐여줬  다. 취재를 통해 알고보니 할머니는 연길시 북산가두 로인뢰봉반 맹인 반장 김봉숙할머니. 남편과 하나뿐인 딸님마저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혈혈단신으로 저그마한 퇴직금(연변고무공장서 퇴직)으로 살아가는 독거로인이였다. 남편을 보내고 딸까지 병으로 보낸뒤 고독함과 친척, 혈육 하나 없는 어려운 세상살이로 밤낮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인해 결국 실명하고 말았다. 6월 12일, 력서에서는 보통날인 이날은 김봉숙할머니에게는 특수한 기념일이다. 7년전, 사천성 문천지구에 특대 지진이 발생했을 때 김봉숙할머니는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페허속에서 신음하는 형제자매들의 모습을 텔레비죤화면을 통해 보면서 로인은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혈혈단신으로 저그마한 퇴직금으로 살아가는 그에게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문뜩 온 집안에서 제일 값진 물건인, 남편이 남긴 유일한 유물 결혼반지를 만지게 되였다. 이튿날 시장에 가 통사정을 하여 이 보석반지를 겨우 800원에 팔았다. 그길로 약을 사려던 돈 200원까지 보태 1000원을 북산가두에 바쳤다. 한 조선족 맹인할머니의 소행은 사천을 울렸고 전국을 감동시켰다. 지진이 발생한 한달후인 6월 12일, 사천텔레비죤방송국의 두 젊은 기자가 불원천리 기차편으로 변강도시 연길에 찾아와 “결혼반지”를 기부한 조선족맹인할머니를 인터뷰했다. 그날 할머니의 집은 잔치집마냥 들끓었다. 사천 기자는 사천성인민들의 경모의 마음이 담긴 마노반지를 할머니의 손가락에 정성스레 끼워드리며 눈물을 흘렸고 할머니는 묵직한 반지를 낀 손을 내려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올해는 연변팀 경기 시간때면 라지오 두개를 놓고 듣습니다. 신문도 못보고 텔레비도 못보는 처지라 저는 축구를 듣습니다. 연변인민방송국의 남철 아나운서와 윤일 아나운서의 생방송 해설을 통해 연변축구팀을 손금보듯 알고있죠.” 할머니에게 있어서 세상과 소통하는 라지오는 그만큼 소중했고 연변 축구팀 선수들은 씩씩한 손자들 같았으며 축구팀이 일궈내고있는 소식들은 세상을 더욱 즐겁게 살아갈수 있는 힘의 활력소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구락부를 찾아주셔서 감사하고 1년내내 힘이 돼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할머니의 이 돈을 꼭 유용하게 쓰겠습니다.” 박성웅주임이 로인의 소행에 머리숙여 인사하면서 박태하감독을 비롯한 선수단 전체가 싸인한 축구공을 선물했다. 축구공을 받아든 할머니는 축구공에 입을 맞추는 한편 얼굴에 환한 웃을을 지으며 “박태하감독님의 손을 꼭 잡아보고 싶었는데…”라고 말한다. 박성웅주임이 인츰 “할머니, 죄송합니다. 박태하감독이 지금은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나가있어서요. 아직 24일 경기에 대비해야 해서요.” 고 대답했다. 연변축구를 둘러싸고 벌어지고있는 이 기막힌 진풍경에 취재진도 머리가 숙여지고 마음이 숙연해졌다.  글·사진 리영수 리병천 기자  
927    [쉼터] - 연변축구와 "수박할머니" 댓글:  조회:5276  추천:0  2017-01-08
80세할머니 우리 선수들께 수박이나 사주오~ 2015-06-24 吉林朝文报体育 김애신할머니 연변장백산축구구락부 찾아 1000원 의연 6월 24일 오전 9시경 연변장백산축구구락부에 머리가 하얗게 센 안로인 한분이 찾아왔다. 할머니의 성함은 리애신, 올해 80고령인데 연변축구를 사랑하는 할머니 축구팬이라고 했다. 리애신할머니는 연변장백산축구구락부 박성웅주임을 만나 박성웅주임의 사진이 나간 길림신문을 들고 여기저기 길을 물어 어렵게 찾아오게 된 경과를 이야기했다. 할머니가 연변축구구락부를 찾은 목적은 단 하나, 고열에 열심히 훈련하는 연변팀선수들에게 시원한 랭면과 수박이라도 사주라면서 돈 1000원을 내놓는것이였다. 일찍 연변뻐스공장 제3직장에서 도장일을 하다가 퇴직한 리애신할머니는 연변팀의 둘도없는 열성축구팬이였다. 퇴직후 투병생활 와중에도 친구들과 함께 경기장을 찾았던 리애신할머니는 박성웅주임에게 자기는 70세이상 로인들에게 무료로 축구관람을 시킨 구락부덕분에 련속 3년간 공짜로 연변팀경기를 관람하였다고 감사를 표했다. 리할머니는 경기에서 넘어지고 까무라치고 긁히고 피터지는 우리 선수들을 볼때마다 가슴이 아팠다고 심경을 고백하였다. 현재 2000여원의 퇴직금으로 생활하고있는 할머니는 이젠 병도 다 나아 생활면에서 아무런 부담이 없다고 하면서 연변축구를 사랑하는 한 늙은 축구팬의 마음을 선수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올시즌 박태하감독의 지휘하에 성적도 좋고 열심히 훈련한다고 하니 어떻게 선수들에게 응원할지 고민하다가 주책없이 이렇게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 더운 날씨에 랭면이나 수박을 선수들에게 대접하면 땀도 들이고 기분도 날 것 같다면서 할머니는 지난 3년간의 무료로 축구경기를 관람한 표값을 내는셈 치니 절대 사절하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리애신할머니의 너무나도 뜻밖의 후원에 감동된 박성웅주임은 《리애신할머니와 같은 수많은 연변축구팬들의 열성적인 관심과 지지에 큰 힘이 생긴다》면서 《연변축구구락부에서는 더욱 좋은 성적으로 축구팬들의 따뜻한 관심과 지지에 보답할것》이라고 말했다.     =====*******=====*******=====  연변축구팬들사이에서는 물론 연변의 “스타”로 떠오른 “수박할머니”의 반가운 전화를 받고 할머니네 집을 찾아갔다. 전화 한통에 집까지 찾아간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두손을 꼭 잡아주시는 할머니,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눈물을 왈칵 쏟아내신다.   남다른 연변축구팀에 대한 사랑   흡사 창고와 비슷한 곳에서 생활하시는 할머니를 멍하니 바라보는 기자를 “누추하지만 어여 앉아~”하시며 침대로 끌고가 앉히고는 일인용 침대한켠에 가지런히 놓여진 연변축구팀 기사가 실린 신문과 경기일정뒤에 매 경기 결과를 적어놓으신 할머니의 “보물”들을 자랑하시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이신다. 신문에 실린 연변축구팀 선수들의 개인정보와 작년한해 선수들의 골을 넣은 차수까지 정확하게 술술 내뱉는 할머니에 입이 떡 벌어졌다. “수박할머니”의 남다른 축구사랑에 관해 소문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실제로 만나뵈니 상상 그 이상이였다. 할머니의 수많은 “보물”중 한자로 연변축구팀 선수들의 이름을 빼곡히 써놓은 전단지가 그중 단연 눈에 띄였다. 새로 영입된 윤빛가람, 김승대 선수의 이름도 한자로 씌여져 있었다. 놀라움도 잠시 할머니는 “슈퍼리그여 우리가 왔다!”라는 해드라인의 신문기사에 박태하 감독을 중심으로 임종현 국장, 박성웅 주임이 나란히 서서 만세포즈를 하는 사진을 가리키며 “우리 연변남자들은 키가 왜이리 쪼맨한지.. 박감독을 봐라 키도 크고 훤칠하니, 얼마나 이쁘야... 이런 아들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시며 박태하 감독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드러냈다.    3월부터 있을 슈퍼리그 경기일정표를 내보이는 할머니에 응원하러 가실거냐고 묻자 “꼭 가야지!”하시며 괜한 질문을 했다는듯이 딱 잘라 말씀하셨다. 또 “원정경기를 한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다. 공짜가 없는 법이니 돈은 내가 내갰다.”하시며 경기를 한번이라도 더 보고싶은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셨다. 퇴직금으로 어려운 생활을 보내고 계시지만 연변축구팀을 위해서라면 “큰돈”도 내놓으시는 할머니, 이런 할머니에 누군가가 “할머니, 할머니가 이렇게 하시면 사탕 한알이래도 생겨요? ”하며 안쓰럽게 물어보더란다. 이에 할머니는 “그러면 어쩌냐? 내가 좋은걸...”하시며 뒷말을 흐리시는 할머니에 코끝이 찡해졌다.  나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들, 감사하다고 전해라~ 할머니는 기자와 얘기를 나누시던중 할머니에게 호의를 베푼 몇몇사람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작년 연변축구팀 슈퍼리그진출이 확정된후 연변축구구락부에서는 팬들을 위한 팬미팅자리를 마련했다. 할머니는 당일 저녁 9시쯤에야 끝난 팬미팅에 할머니를 집까지 바래다준 연변대학 박사생 허옥영을 잊을수가 없단다. 그후 개인사정으로 전화번호를 바꾼 허옥영, 원래 전화번호는 허옥영의 할머니가 쓰고계셨다. 허옥영과 연락이 닿지 않아 애만태우던 할머니는 기자와 허옥영에 연락을 취해달라고 부탁, 허옥영 할머니와 사정을 말씀드리고 전화번호를 받아냈다. 허옥영과의 통화에서 할머니는 “옥영아, 할미다. 오래만에 목소리를 들이니까 좋다. 에휴 니 그날에 정말 수고가 많았다. 옥영아 꼭 놀라오라, 오면 같이 국수먹자!”며 목소리로나마 그리움을 달랬다. 이에 허옥영은 밝은 목소리로 꼭 놀라가겠다고 약속했다. 훈훈한 장면을 보고있으니 그들의 축구로 맺어진 아름다운 인연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허옥영과의 통화를 마치고 할머니는 또 다른 얘기를 꺼내놓으셨다. 할머니는 호남과의 경기가 있은 날 연변축구팬의 “자존심”인 빨간색 응원복을 입고 경기장으로 가셨단다. 체육장에 불어치는 거센바람에 떠는 할머니를 보고 30대로 보이는 녀성이 자신이 입고 있던 의상을 벗어 할머니에게 건네주었단다. 그녀는 거절하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우리 젊은이들은 옷이 많슴다. 비록 입던 옷이지만 할머니 입으쇼. 추워서 아이됨다”라는 말을 남기고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녀성이 준 옷 덕분에 할머니는 그날 따뜻하게 집으로 돌아올수 있었다고. 그후 녀성을 찾자고 해도 찾을 방법이 없다는 할머니, 기자에 옷을 보이며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고 하셨다. 추운날, 기꺼이 자신의 옷을 벗어준 묘령의 녀성의 베푼 사랑에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하시며 또 눈물을 글썽이셨다.   기자와 한참을 이야기 꽃을 피우시던 할머니는 회사에 들어가봐야 한다는 말에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꼭 놀라오라며 안아주셨다. 모습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손을 흔드시는 할머니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축구에 대한 남다른 사랑만큼 정이넘치는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한 모습으로 연변축구팬 자부심 “수박할머니”로 남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글/김미화 기자 사진/박군걸 기자 [출처] 수박할머니의 “은밀한 초대” - 모이자   ============================= 연변팀을 찾아간 《수박할머니》, 그는 누구?  6월24일, 연변축구구락부에 백발이 성성한 한 조선족할머니가 찾아와 수고하는 연변축구팀선수들에게 수박이나 랭면이라도 사주라면서 1000원을 놓고 간 감동적인 사연이 있었다. 이 사연이 인터넷길림신문과 길림신문위쳇계정 등을 통해 널리 확산되면서 이 할머니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고있다. 세집생활하는 할머니…의연사실에 주위사람들 경악 25일 오후, 기자는 백방으로 수소문한끝에 화제의 할머니가 연길시 연북소구역에 거주하고있다는 정보를 입수, 무작정 할머니를 만나보러 달려갔다. 연북소구역에 이르러 경비원에게 할머니 사진을 꺼내보이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경비원은 한눈에 할머니를 알아보고는 기자를 할머니가 사는 집쪽으로 안내했다. 평소 할머니의 람루한 옷차림과 특별히 적었던 말수탓에 할머니의 인적사항과 가정상황에 대한 큰 료해가 없다면서 경비원은 할머니가 생활형편이 어려워 보였다고 소개했다. 특히 경비원은 할머니가 연변축구팀에 1000원을 의연했다는 말을 듣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화제의 할머니를 찾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집부근 골목에 이르자 너무나도 눈에 익은 옷차림을 한 할머니의 모습이 안겨왔다. 바로 어제 연변축구구락부를 찾아왔을 때 입었던 옷맵시 그대로인 한 할머니가 아빠트구역에서 팔다리를 움직이며 열심히 운동하고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화제의 그 할머니였다. 기자의 돌연적인 방문에 할머니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할머니는 신문에 나자고 연변축구구락부를 찾아간것이 아니라면서 극구 취재를 거부했다. 그냥 축구로 고생하는 우리팀 선수들이 당신의 아들자식처럼 생각되고 안스러워 얼마 안되는 돈을 놓고왔을따름이니 결토 신문에 낼만한 일은 아니라고 말씀했다. 《생각해보우 이 고열에 우리가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나고 힘든데 땡볕에서 쉴새없이 움직이는 우리 선수들은 오죽 힘들겠소? 》그것이 바로 할머니가 두달간이나 호주머니에 의연금1000원을 넣고 다니면서 기어이 축구구락부를 찾아 선수들에게 시원한 랭면이나 수박이라도 사주라고 부탁한 전부의 리유였다. 대화에서 알려진바로는 할머니의 성함은 리애신, 1942년생으로 올해 74세이다. 어제 할머니가 김애신할머니로 잘못 알려지고 또 년세도 80세로 잘못 알려졌는데 할머니가 축구구락부를 찾아 돈을 내놓을때 전달이 제대로 되지않아 이같은 오차가 생기게 된점을 독자들에게 사과드리는바이다. 연변팀 선수들에 대한 지식… 전문가도 뺨칠 정도 할머니와의 대화는 당연히 제일 먼저 연변팀에 대한 축구이야기로부터 시작됐다. 《연변팀이 올해 왜 이렇게 뽈을 잘 차오?》 할머니는 연변팀에 대한 자랑이 줄줄이 이어졌다.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선수인 하태균은 물론 스티브, 챨튼 등 외적선수들의 나이며 생일, 키, 국적, 위치는 물론 연변팀의 경기성적마저 훤히 꿰고있었다. 《왜서 하태균선수가 좋으시냐?》고 물었더니 《그럼 연변팀을 위해 12개나 꼴을 넣어준 고마운 선수인데 왜 안 좋겠냐》고 반문하신다. 《나뿐만아니라 연변축구팬이라면 모두다 좋아하지 않을가》하고 반문하시는데 실로 우문현답이 따로없다. 연변팀의 본토선수들도 줄줄이 이름을 외울만치 익숙했다. 《축구선수들이 나를 모를수는 있겠지만 나는 축구선수들을 잘 알고있다》는것이 할머니의 당당한 자랑이였다. 할머니의 축구소식에 대한 료해는 홈장경기때는 한껨도 빼놓지 않고 직접 구경하는 것이고 원정경기때는 월요일날 아침일찍 신문매장에 나가 경기소식이 실린 당일 신문을 사보는것이라고 한다. 정보가 발달한 오늘날이지만 할머니는 집에 텔레비죤도 없다. 원래 하나 있긴 했지만 고장나서 버렸다고 했다. 신문에 실린 연변팀의 늦은 경기소식을 보고도 오늘있은 일처럼 기뻐할줄 아는 늦깍이 축구사랑도 할머니에게는 더없는 삶의 즐거움인것 같았다. 연변에서 경기가 있는 날은 도보로28선 정류장까지 걸어간후 공공뻐스를 타고 체육장에 간다. 연변팀이 경기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들은 날은 온종일 기분이 좋아 날아갈것만 같다는것이 70대 할머니 축구팬의 진솔한 고백이였다. 사람은 가는정 오는정 만들면서 살아가야… 리애신할머니는 가정형편이 어려워보였다. 현재 연북소구역에 살고있는 집도 지난해 할머니가 살고있던 북대신촌의 집이 파가이주에 들면서 잠시 살고있는 세집이였다. 북대신촌에 짓고있는 새집이 완수되면 거기로 다시 이사를 갈 예정이였다. 집을 다 지은후 새집에 들자면 장식도 해야 한다는데 주방과 화장실장식이 돈이 많이 들어 걱정된다고 할머니는 이야기했다. 벽은 돈이 얼마 안들게 회칠만해놓으면 사는데는 문제없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할머니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외지에 살고있어 자주 못온다고 말했다. 자식들에게는 부담을 주고싶지않아 할머니는 혼자 살고있다고 말했다. 남편은 위암으로 20년이나 되는 긴 투병생활을 하다가 10여년전에 세상떴다고 한다. 남편의 장기투병생활때문에 생활이 매우 쪼들렸다고 할머니는 얘기했다.북대신촌에 살고있던 낡은 집도 비가 오면 그릇을 30개나 동원해 비물을 받아야 할만큼 헐망했고 수도관이 고장나 몇년동안 물도 오지않아 고생이 많았다고 이야기했다. 살림집이 너무 헐망해 호구지책으로 지난해에는 경로원생활도 4달간 하다가 왔다고 말씀했다. 《어렵게 살던 시절에는 한달 로임이 다 합쳐봐야 200원밖에 안되였소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너무 잘 사는 부자지》 할머니는 현재 퇴직금으로 나오고있는 2100여원의 월수입에 만족감을 표했다. 할머니는 앓지만 않으면 괜찮은데 아프면 병원에 돈이 많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평소 검소한 생활이 습관된 할머니는 종래로 돈을 허투로 쓰는 법을 모른다고 말씀했다. 지금까지 변변한 옷 한벌 사본 기억이 얼마 없다고 한다. 할머니가 평소 입고 다니는 웃옷은 할머니가 51세때 퇴직하면서 공장에서 내준 작업복이라고하니 20여년을 입고있는 셈이다. 《생활형편이 어려운데 왜 돈을 의연하셨는가?》는 물음에 할머니는 《돈이 우리가 사는 삶의 전부는 아니다》고 말씀하셨다. 돈은 없다가고 다시 생길수있지만 사람은 죽으면 돈도 가져갈수 없고 또 필요도 없는 일이니 살아있을때 돈을 붙잡고만 있지말고 가는정 오는정 만들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만큼 혼자 외롭게 살고있는 리할머니는 사람이 제일 반갑고 귀하다면서 외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쨔유!연변축구팀을 향해 웨치는 할머니축구팬의 힘찬 응원 연변팀에 하태균같은 선수가 3명만 있어도 축구팀이 영낙없이 우승은 물론 슈퍼리그에까지 진출할수있다는것이 한 70대 할머니축구팬의 연변팀 슈퍼리그진출에 대한 소박한 소망이다. 어찌보면 리할머니식 연변팀전망은 조금은 우스울수도 있지만 뽈 잘차는 선수가 많아야 팀이 우수한 성적을 따내는 것은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닐가?! 스티브선수를 할머니는 기어이 스브티르선수라고 말씀하셨다. 외국선수들의 이름이 읽기 참 애나네 하고 할머니는 웃어보였다. 경륜있는 축구팬처럼 할머니는 어느 신문에서 읽었다는 어느 유명감독이 한 말이 인상깊다고 한마디했다. 하모니카를 혼자서 불기보다는 11명이 함께 불면 소리가 더 커진다는 내용이 감명적이라는것, 축구팀도 잘하는 선수 한두명에 의존하여 경기성적이 올라가는것이 아니라 경기장의 11명 축구선수가 함께 힘과 노력을 모아야 더 좋은 성적을 따낼수있다는 것이였다. 할머니에게 선물한 하태균선수의 인터뷰내용이 실린 길림신문을 보면서 할머니는 하태균선수가 참 잘생겼다고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거기다 뽈까지 잘차니 더 멋있다고 극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할머니의 연변팀에 대한 응원은 《쨔유! 연변팀!》이였다. 취재를 마치면서 할머니는 손에 든 신문을 높이 들고 연변팀에 힘찬 응원을 보내주는것을 잊지 않았다. ===========================     연변축구팀에 돈을 기부해 선수들에게 수박을 사주어 수많은 연변사람들을 감동시킨“수박할머니”를 기억하는가?   3일 인민넷 보도에 따르면 4월 30일, 상해 경기로 3연패를 당한 연변축구팀에 위로를 전하기 위해 “수박할머니”는 신체가 허약함에 불구하고 홀로 연길공항으로 연변팀을 맞이하러 왔다. 하지만 시간을 잘못 안 관계로 노인은 공항에 혼자서 꼬박 하루를 기다리다가 심야가 되여서야 선수들을 만났다. 할머니의 연변축구팀에 대한 이 열정과 집념은 많은 사람들을 탄복시켰다.   당일 오후, 한장의 사진이 연변축구팬들의 위챗 모멘트를 뜨겁게 달구었다. 사진속 주인공은 한 할머니었는데 연변축구를 관심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수박할머니”를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연길공항에서 혼자 외롭게 앉아 있었다.   사실, 할머니는 연변축구팀이 당일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공항에 나가 그들을 맞이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저녁 11시 20분을 오전 11시 20분으로 착각한 할머니는 아침 일찍 공항에 도착했고 오래동안 기다려도 축구선수들을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공항에서 기다렸고 점심밥도 들지 못했다.   오후가 되여서 공항 근무자들이 할머니가 오래토록 혼자 앉자 있는 것을 목격하고 사연을 물어 보았지만 할머니의 중국어가 잘 되지 않은 탓에 소통이 잘 되지 못했다. 나중에 할머니 휴대폰안의 연변축구팬클럽협회 회원과 연락을 취해서야 할머니가 점심밥도 들지 않은채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그들은 “수박할머니”에게 빵과 음료수를 사드렸다.   연변장백호축구팬클럽 조일규 부회장은 할머니와 소통하면서 할머니가 축구팀을 따라 꼭 한번 원정으로 가서 경기를 구경하고 선수들을 응원하고 싶다는 작은 소원을 알게 되였다.   조일규 부회장은 5월 22일 하북화화와의 원정경기때 할머니를 도와 이 소원을 이뤄줄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할머니는 올해 75세의 고령으로  긴 여정을 소화할수 있는지가 문제이고 또 할머니의 자녀들이 동의할지도 문제라고 한다.     축구팬클럽은 할머니의 자녀분들과 연락을 취해 그들의 의견을 청취할 것이고 만약 노인의 자녀분들이 동의하면 할머니의 소원성취에 최선을 다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날 저녁, 연길, 왕청, 안도 등 지역에서 온 축구팬 200여 명이 현장에 와서 선수들을 맞이했다. 그들은 “수박할머니”의 이야기를 알고나서 모두 감탄했고 분분히 할머니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어 할머니를 스타로 만들어 드렸다.   축구팀의 항공편이 곧 도착하기 앞서 팬들은 맞이할 준비를 마쳤고 “수박할머니”를 대오의 앞자리에 모셨으며 또 한 회원은 활짝 핀 진달래꽃을 할머니에게 드렸다.   선수들이 드디여 출구에 모습을 드러냈고 할머니는 선수들 한명 한명을 둘러보았으며 한편으로는 또 박태하 감독을 찾았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할머니는 박태하 감독을 기다리지 못했는데  박태하 감독은 이번에 선수들과 동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박할머니”는 손에 있던 진달래꽃을 선수이자 수석 보조코치인 리림에게 전달했다.   야심한 밤이 되여서야 하루동안 수고한 “수박할머니”는 조금의 아쉬움을 안고 귀가길에 올랐다. 하루동안 할머니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힘을 선사했는지 모른다.
926    [자료] - 축구의 유래?... 댓글:  조회:5353  추천:0  2017-01-08
알프스 마터호른산 ==================   물건을 발로 차거나 손으로 던지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다. 모든 스포츠가 이 본능에서 출발했고, 시대와 사람이 바뀌면서 다양 다기해져 왔다.  그러므로 어느 한 지역이나 인종에 의해 축구가 시작됐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고대로부터 신라, 중국, 일본, 이탈리아, 그리스, 이집트, 아시리아, 프랑스, 영국...등 세계 도처에 축구의 원형에 관한 얘기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에는 '축국'이라는 놀이가 성행했다고 한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농주(O×nA)를 가지고 노는 축국을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축국은 둥근 놀이기구, 이를테면 가축의 방광이나 태에 바람을 넣어 차거나 던지는 놀이였을 것이다.  기원전 7~6세기 경 그리스에서는 '하르파스톤(Harpaston)'이라는 경기가 성행했고, 이것이 로마에 전파돼 무사들이나 군대 스포츠로 발전하면서 '하르파스툼(Harpastum)' 또는 '파가니카(Paganica)'라는 새로운 경기로 변형됐다. 하르파스툼은 로마 제국 내에 급속히 확산됐다. 이 경기는 각기 자기진영의 골라인을 지키는 두 팀 사이에 벌어졌다. 경기장에는 중앙 원도 있었다. 이 놀이는 공을 차거나 던지면서 전진해 마지막에는 상대가 지키고 있는 골라인을 넘는 것이었다. 로마가 영국을 침략했을 때 하르파스툼이 영국에 소개됐다고 한다. 이집트에서도 둥근 물체를 발로 차거나 튀기거나 동료에게 패스하는 등의 놀이가 있었다. 약 3000년 전, 중국의 한조(uOðE)시대에는 축구의 일종인 '츄 슈'라는 경기가 있었는데, 목표 지점을 향해 공을 차고 나가는 놀이였다고 전한다. 일본 사람들은 '게마리'라는 경기를 했다고 한다. 여덟 명이 한 편이 되어 네 모서리에 각각 나무기둥을 세워 놓은 구역 안에서 우군끼리 공을 패스하는 놀이였다.  이러한 단순한 놀이들이 세계 도처에서 각각 독특하게 발생하고 성장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이렇게 여러 종류의 축구와 흡사한 놀이들이 있었다고 하나,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고있는 축구의 원류는 영국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설1 :  FIFA는 축구에서 파생된 '럭비 풋볼(rugby football)'과 구별하기 위한 축구의 이름 'association football'의 'Assoc'에 'er'을 붙여 부르다가 'soccer' 로 변했다고 전한다.  설2 : 1863년 10월 26일 축구의 공식기구 1호로 탄생한 영국에서는 축구를 'Association football'라고 불렀다. 'association'의 가운데 부분에 'er'을 붙여 'soccer'라는 축구의 별명을 만들었더는 설.  설3 : 미국에 축구가 도입되자 미식축구와 구별하기 위해 'Association Football'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Assoc. Football', 다시 'Assoc'로 줄었고, 유행에 따라 어미에 'er'을 붙여 'Assocer'로 변했다. 그 다음에 오늘날의 'Soccer'로 굳었다는 설.  설4 : 1863년 잉글랜드에서 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를 구성하면서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풋볼'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 해 잉글랜드축구협회 임원 찰스 레포드-브라운이 친구들로부터 "러거(Rugger)보러 가자"는 말을 듣고 "나는 사커(Soccer)보러 가겠다"고 대답한 데서 '사커(Soccer)'란 말이 생겨났다는 설.  미국, 호주, 캐나다에서는 축구를 Soccer라고 불러 미식축구와 구별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칼시오(Calcio)'라고도 한다.          기원전 중국과 일본, 그리스와 로마에서 고전적인 형태의 축구에 관한 기록들이 전해진다.  중세에 이르러 대영제국의 섬들과 이타리아, 프랑스에서도 축구의 기록이 나타난다.  대영 제국의 축구는 1500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형태로 지속돼 왔다. 안에 털을 넣고 짐승가죽으로 둥그렇게 싼 공을 차면서 마을과 마을 사이에, 때로는 쌍방에 수 백 명씩이, 수마일 떨어진 골을 향해 밀고 밀리는 맹렬한 크로스컨트리, 또는 시장과 거리에서 사납게 날뛰는 소란스런 경기였다.  1369년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이 소란스런 놀이에 병사들이 빠져 궁술연습을 게을리한다는 이유로 축구경기를 금지시키려고 했다. 그래도 축구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끈질기게 되살아났다. 다소 미개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축구는 세계적인 경기로서의 매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1561년에 리처드 물카스터라는 교사가 '축구가 청소년 교육에 좋은 효과를 준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영향으로 진취적인 생각을 가진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축구를 적극 권장했다.  1580년에는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바르디라는 사람이 '칼시오(Calcio : 축구)'라는 최초의 축구규칙집을 펴냈다. 이것이 영국축구와 이탈리아축구의 결합이었고, 서로 다른 두 나라의 축구가 동화되면서 큰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됐다.  1680년 영국의 왕 챨스 2세가 축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9세기초에는 말타기, 사냥, 낚시 같은 종래의 스포츠를 즐기던 소년학생들이 마을과 마을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친 경기의 원리를 빠른 속도로 학교 운동장이나 놀이터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후 학교들은 축구를 각각의 방식으로 발전시켜 대항전을 갖는 등 각 학교의 전통으로 가꾸어 나간다. 경기 방식은 대개 20명이 한 팀으로 구성됐으나 공을 잡은 사람이 단독으로 드리블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길게 차거나 앞으로 패스하는 방법도 드물게 쓰였다. 손은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1823년 여름 '윌리암 웹 엘리스'라는 학생이 손으로 공을 잡고 달려 득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럭비 학교에서는 공을 손으로 잡고 달려도 된다는 내용을 규칙에 추가했다. 이로부터 럭비 학교와 다른 학교들의 축구경기 방식이 달라지게 됐다. 엘리스의 돌발적인 행동은 럭비경기의 시초가 됐고, 오늘날의 미식축구에도 영향을 끼쳐 공을 차거나 손으로 잡고 달리게 됐다.  학생들이 공립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간에 경기규칙이 좀 달라도 별 문제될 일은 없었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하자 혼란이 생겼다. 대학에서도 경기를 계속하려면 공립학교마다 달랐던 규칙들을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통일된 규칙으로 정리할 필요가 대두됐다.  이에 따라 1848년 이튼에 있는 공립학교들을 대표하는 14명이 캠브리지 규칙(Cambridge Rules)으로 알려진 축구규칙을 처음으로 통합 정리했다. 이 규칙은 '실용(practical), 공정(fair), 합리(reasonable)'라는 3대 원칙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로부터 캠브리지가 축구규칙의 원산지가 된다.  1845년 영국의 이튼에서 축구경기에 심판이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심판(Referee)'가 아니라 '엄파이어(Umpire)로서 경기장 밖에서 조정역할 만을 했다.  1848년 이튼에 있는 공립학교들의 대표 14명이 캠브리지 규칙(Cambridge Rules)으로 축구규칙을 처음으로 통합 정리했다.  이후 축구경기는 일반적인 스포츠로 자리잡아 갔고, 모든 대학들과 공립학교들에 클럽이 결성되어 대항전은 더욱 활발해졌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그들은 축구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품어 사회에서도 계속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1855년 요크셔에서 쉐필드 크리켓(Sheffield Cricket)과 축구클럽Football Club)을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1857년 최초로 쉐필드 축구클럽(Sheffield FC)을 탄생시켰다.  1862년 노츠 카운티(Notts County)라는 축구리그 클럽이 창설됐다.  1863년 10월 26일, 드디어 런던 선술집에서 영국의 '축구협회(FA : Football Associaton)'가 창립된다. 이것이 축구의 공식기구 1호다. FA가 다소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웠던 이 놀이에 일정한 형태와 질서와 스포츠정신을 불어넣는 14개조의 보다 잘 정리된 규칙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축구경기의 기초들이 이 때부터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1866년 초 가장 오래되고 영향력 있는 쉐필드 클럽이 런던과 쉐필드에 있는 클럽들 간에 경기를 갖자고 제의해 3월 31일 경기가 열렸다.  1870년에는 FA가 팀의 구성에 관한 규정을 제정했다. 15명에서 60명까지도 뛸 수 있었던 한 팀의 선수를 11명으로 제한한 것이다.  1871년에는 FA 컵 대회가 시작됐고, 결승전이 2,000명의 관중 앞에서 치러졌다. 1888년의 결승전 관중은 17,000이었다. 1893년에는 45,000명이었다. 그리고 1901년 결승전에는 무려 110,000명의 대 관중으로 폭증했다. '골키퍼'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것도 1871년이다.  1872년 11월 30일에는 잉글랜드의 글래스고우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간에 세계 최초의 비공식 국제경기(0-0)가 벌어졌다. 그로부터 58년이 흐른 뒤에 세계 최대의 스포츠 제전 월드컵 축구대회가 탄생한다.  1877년에는 대영 제국 내의 축구협회들이 통합 경기규칙을 마련했다.  1878년 최초의 조명 아래 경기가 세필드에서 거행됐다.  1880년 최초의 여자 축구팀이 영국에서 '네틀 허니볼'이라는 이름으로 창단했다.  1883년 영국의 4개 축구협회들이 축구와 축구규칙에 관한 모든 것을 논의, 결정하는 기구인 국제축구평의회(The International Football Association Board)의 규약을 통일시키는 데 합의했다.  1885년 프로축구의 규범화가 잉글랜드에서 이루어졌다.  1886년 6월 2일, 국제축구협회평의회(IFAB)의 첫 공식회의를 열었다.  같은 해 IFAB는 경기관리자 양성사업에 착수했다.  1887년 경기장이 규격화됐다. 중앙선과 골 앞을 구획하는 선, 코너킥 에리어 등을 공식화했다.  1888년 4월 영국에서 6개의 클럽이 세계 최초의 공식리그를 시작했다. 축구는, 산업혁명이 일어나 시골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대영 제국 전역에서 재미와 여가를 위한 경기로 발전했다. 1888년에는 리그가 형성되면서 프로선수가 공인됐다. 그리고 영국은 축구를 세계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무역상인들은 물론, 다른 나라들의 공업화 요구로 파견된 기술자들, 숙련공들, 철도건설 노동자들이 축구를 확산시켰다. 축구는 체력과 투지, 그리고 개인의 능력과 조직력이 요구되는 경기다. 신체적으로는 심장과 폐기능을 향상시키고, 정신적으로는 용기와 결단력, 단결심을 길러준다. 또 축구경기는 매우 단순한 데다 규칙도 알기 쉬워 전세계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1890∼91시즌 아일랜드 축구협회에 의해 페널티킥이 처음 도입됐다. 세계 최초의 페널티킥은 1891년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열린 린필드FC와 미국 캐나다 혼성팀의 경기에서 있었고 혼성팀의 미국 출신 제프리 선수가 축구 사상 제1호 페널티킥을 성공시켰다.잉글랜드는 1891∼92시즌 페널티킥 제도를 채택했다.  1892년 2부리그가 출범했다.  1899년 축구의 국제 교류시대를 여는 개척자로 독일의 한 축구팀이 잉글랜드에 파견됐다.  1904년 국제축구연맹(FIFA)이 창립됐다.  1905년 알프 콤몬(Alf Common)이 £1,000($2,000)에 선더랜드에서 미들스브로로 이적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1912년 GK의 손사용을 페널티 에리어로 제한했다.  1913년 FIFA가 국제축구협회평의회(IFAB)에 가입했다.  1925년 오프사이드규칙이 3명에서 2명으로 변경됐다.  1927년 아스날 대 세필드 유나이티드 경기가 최초로 라디오 중계방송됐다.  1930년 제1회 월드컵축구대회가 우루과이에서 열렸다. 13개국이 참가했다.  1937-38년 국제축구협회평의회는 영국의 스탠리 라우스 경이 성안한 17개조의 축구규칙을 50년만에 개정해 1938년부터 시행했다. 1958년 처음으로 텔레비전이 스웨덴 월드컵 축구경기들을 전 세계에 생중계했다.  1962년 FIFA 회원국이 100개에 이르렀다.  1965년 선수교체를 처음으로 리그경기에서 도입했다.  1970년 월드컵 축구경기들이 위성을 통해 생중계됐다.  1970년 국제축구연맹(FIFA)은 페널티킥과 동일한 방법의 승부차기를 확정했으며 월드컵에는 82년 스페인월드컵에서부터 적용했다.월드컵 최초의 승부차기를 한 경기는 그 대회 준결승 서독(3-3, 5킥4)프랑스였다.  우리나라에서는 70년 6월3일 인천공설운동장에서 벌어진 제19회 대통령배축구대회 예선리그 해병대와 한전의 경기 때 시범적으로 운영됐다.승부차기가 채택되기 이전에는 대부분 추첨으로 승부를 가렸으며 결승전에서는 공동우승으로 처리했다.우리나라 축구 초창기에는 연장전에서도 결판이 나지 않으면 반칙이 적은 팀이나 코너킥을 많이 한 팀이 이긴 것으로 했다.  1971년 펠레가 브라질 국가대표로 111경기에 97골을 기록하고 대표에서 은퇴했다.  1976년 레드 카드와 옐로우 카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77년 제1회 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FIFA World Youth Tournament. 1981년 'World Youth Championship. 20세 이하'로 개칭)가 튀니지에서 열렸다.  1978년 수비팀이 자기 골에리어 내에서 얻은 프리킥은 '골에리어 절반 내 어느 곳에서 차도 된다'는 규칙 추가.  1979년 직접프리킥과 간접프리킥을 구분하기 위해 주심은 간접프리킥 때 한쪽 팔을 위로 들도록 국제축구평의회가 결정했다.  1980년 상대선수, 경기관련자, 그 밖의 사람들에게 욕설을 하거나 침을 뱉는 행위는 난폭행위로 간주한다.  1985년 제1회 16세 이하 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FIFA U-16 World Tournament. 1991년 'Under-17 World Championship'로 개칭)가 중국에서 열렸다.  1988년 FIFA의 페어플레이 캠페인(The FIFA Fair Play campaign)이 시작됐다.  1991년 제1회 여자월드컵축구대회(FIFA World Championship for Women's Football)가 중국에서 열렸다.  1994년 선수교체 수를 2명에서 3명으로 늘렸다.  1996년 '선심(Linesman)'을 '부심(Assistnt Referees)'로 변경했다.  1997년 3월 1일. 60년만에 국제 축구협회평의회 연례회의에서 오프사이드, 백패스, GK의 4보, 선수교체, 킥오프, 골킥 골...등 일부 규칙을 개정하면서 영어로 10,532개에 달하던 단어를 7,484단어로 30%나 줄였다. 스코틀랜드의 죠지 커밍(George Cummuing)이 책임자로 2년여에 걸친 연구와 정리작업 끝에 마무리된 이 개정규칙은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모습으로 1997년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1998년 블래터(Joseph S. Blatter)가 아벨랑제Joao Havelange)의 후임으로 FIFA회장에 취임했다.  1999년 2월 20일. 113차 총회에서 국제축구평의회(IFAB)는 새로운 선수교체 제도인 '플라잉 섭스티튜션(Flying Substitutions)'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1999년 7월부터 체력의 부담이 많은 여자축구, 16세이하 청소년, 35세이상 베테랑선수들에 적용된다. 그 내용은 *선수교체를 수시로 한다. *교체된 선수를 다시 기용할 수 있다. *교체는 교체장소에서만 한다. *교체시 입장선수는 퇴장선수의 번호판을 든다.  2002년 한국과 일본이 아메리카와 유럽을 처음으로 벗어나는 월드컵축구대회를 공동개최한다.  2004년 FIFA창립 100주년  공이 있으면 사람은 가지고 놀게되고,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과 경쟁하게 된다. 이것이 본능이고, 그 본능에서부터 3000여 년간 발전해 온 축구다. 이것이 오늘날 월드컵 축구에 이르렀다.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1998년 8월 현재 FIFA 회원국은 203개에 달하고 전 세계의 등록 선수는 무려 2억 5천만 명에 이르고 있다. 축구는 이제 단순한 스포츠에 그치지 않고 세계를 하나로 묶는 평화와 우호의 제전으로 굳어졌다.                                                  /    
925    [자료] - 녀자축구는 언제부터?... 댓글:  조회:5541  추천:0  2017-01-08
알프스 마터호른산 ======================= (흑룡강신문=하얼빈)      2015년은 국제축구련맹(FIFA) 녀자월드컵이 열리는 해다.   녀자축구의 력사는 남자축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16세기 영국에서는 녀자축구가 남자축구 못지 않게 성행했다.      첫 공식경기는 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기혼녀자팀과 미혼녀자팀의 경기였다. 이 경기는 이후 년례행사로 치러졌다.      케임브리지의 커튼녀자대학은 1877년 녀자축구를 최초로 체육교과 과정으로 채택해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이같은 인기를 바탕으로 1894년 잉글랜드의 산업도시 프레스턴에서는 최초의 녀자축구팀인 디커스 클럽이 탄생했다.     최초의 국제경기는 1920년 잉글랜드에서 열린 프랑스-잉글랜드 경기로 1만여명이 입장하는 대성황을 이뤘다.   1980년대 녀자축구의 세계화를 고민하던 FIFA는 1991년 중국에서 제1회 녀자월드컵을 열었다. 녀자축구의 가능성에 고무된 FIFA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적극적인 접촉을 벌여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 녀자축구를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시키는데 성공했다. [출처] 녀자축구의 력사는? - 모이자 뉴스  
924    [자료] - 옛사진으로 보는 연변축구 댓글:  조회:6135  추천:0  2017-01-08
“중국”을 입고 뛰였던 길림축구팀 그 후방엔 2번-박광순도 있었다   1958년,국가체육운동위원회는 길림축구팀에 구쏘련 중앙아시아지역 방문하여 원정 친선경기를 치를 기회를 준다. 뿐더러 전용기를 제공하고 “중국”을 입고 중국을 대표하여 뛸수 있는 “영광”를 준다.        1958년 구쏘련 우즈베끼스딴가맹공화국 체육장에서 경기에 앞서                         박광순-앞줄 왼쪽 두번째 1958년 구쏘련 방문시 경기를 마치고 기념 촬영 박광순-두번째 줄 첫번째   결과  “중국”은 예상외로 잘 싸웠다. 우즈베끼스딴,타지크스탄등 8개 구쏘련 가맹공화국팀들과의 경기에서 6승1패1무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국가체육운동위원회는 특별히 전문을 보내 축하와 함께 모스크바 유람을 장려 한다.   1958년 모스크바 붉은 광장앞에서 리광수와 함께 1958년 중국에서 온 미남 축구선수 박광순에게 미녀들이 다투어 싸인을 요청   이어서 1959년에는 구쏘련 극동지역을 방문, 1960년에는 조선을 방문하여 친선경기를 치르도록 한다. 련속 3년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 외국 원정 경기 기회를 부여 받는 다는 것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우대였다. 1959년 구쏘련 방문시 당지 신문에 실렸던 기념사진과 주전 선수들                            박광순-기념사진 맨 앞 1960년 함경북도 방문시 당지신문에 실린 길림팀 소개 박광순-아래줄 왼쪽 두번째   1959년 구쏘련 신시베리아체육장에서 경기를 앞두고 박광순-오른쪽 다선번째 1960년 조선 청진시 체육장에서 경기를 앞두고 박광순-앞줄 오른쪽 세번째 1959년 구쏘련 방문시 환영 꽃다발을 들고 팀 동료와 함께   팀설립 불과 3년, 문지기를 제외하곤 조선족이 주력을 이룬 팀을 국가체육운동위원회는 무슨 연유로 이토록 신임하였을까?   당시 12개 갑급리그팀중에 길림팀이 최강팀은 아니였다. 중국축구갑급리그가 개시된 1956년부터 1960년,팀이 장춘에서 연길로 홈장을 옮기고 연변주에서 팀을 대리관리하기전까지 5년 동안 길림팀이 우승을 한적은 없었다.하지만 1960년 갑급리그 4등을 비롯하여 번마다 5등안에 드는 강팀이였고 중국에 온 구쏘련 국가팀,조선국가팀을 비롯하여 외국팀과의 경기에 국가체육운동위원회는 곧잘 길림팀을 출전시키는 터였다. 최강팀은 아니였지만 풍격이 용맹하고 강팀에 강하고 선수들이 기률을 잘 지키고 신사답기로 자타공인하는 팀이였다. 1957년 구쏘련국가팀과 함께 광주 경기장에 입장하는 모습 박광순-흰옷 뒤로부터 여섯번째 1957년 광주경기장에서 구쏘련국가팀과 경기를 마치고 함께 박광순-앞줄 오른쪽 네번째 1956년 장춘체육장에서 조선국가팀과 경기를 앞두고 함께 박광순-뒷줄 오른쪽으로부터 여덟번째   1955년 7월,연변 각 지역 학교 학생과 교원중에서 선발된 조선족 열혈남아들로 구성된 길림축구팀(한족 2명).모이고 보니 나름 공부를 하던 사람들이였다. 말하자면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 다수였다. 1955년7월 연길 연변대학 기숙사 앞에서 갓 선발된 초창기 멤베들과 함께 박광순-뒷줄 오른쪽 두번째 1957년 지운봉 선수와 함께 김사종 감독을 모시고   1958년 각별했던 친구 지운봉 선수와 함께   1956년,국가체육운동위원회는 웽그리아의 축구 전문가를 모셔온다. 그리고 그를 다른팀이 아닌 길림팀을 지도하도록 한다. 이렇게 그는 중국축구갑급리그사상 첫 외국인 감독이 된다. 길림축구팀에 대한 국가체육운동위원회의 또 한번의 특별 “배려”였다.   1957년,특별 지도를 맡은 웽그리아인 보스까스(가운데 줄 왼쪽 세번째)를 모시고 박광순-뒷줄 오른쪽 네번째   이렇게 화려했던 길림축구팀 후방에는 창립멤버 2번 선수-박광순도 있었다. 길림팀 창립초기 5년간 치른 30여차례 외국팀과의 모든 경기를 주전으로 뛴 선수, 1955년 화룡현중학교 체육부 부장으로 약관의 19세에 어려운 가정 형편과 외국에 나가 보겠다는 일념으로 잘 하던 공부를 덮고 축구를 선택했던 박광순은 그 전해인 1954년 화룡현을 대표하여 길림성 중등학교 륙상,체조경기에 참가하여 허들항목 우승을 따낼 정도로 발이 빨랐던 선수다. 1957년 박광순   하지만 1960년말 간염 판정을 받아 축구장을 떠나고 1963년 팀을 떠나 주운수공사에 배치를 받고,1970년 주교통국에 전근, 연변 도로건설에 큰 키여를 하고 巡视员으로 계시다 1996년 정년퇴직 한다. 올해(2015년) 우리 나이로 80세 병원 건강검진 나이로 50세인 박광순옹은 오늘도 날렵하게 모아산에 오른다.   당년의 길림축구팀 창립멤버중 지금도 건재해 계시는 분은 박광순옹외 지청룡옹,허명룡옹 세명뿐이다.     2015년11월11일 연길에서   비고: 1.1960년 조선방문시 길림팀을 소개한 조선신문에 의하면 그해 중국갑급리그에서 길림팀이 4등이었다고 함 2.자료에 의하면 1956년 중국축구갑급,을급리그 개시,12개팀 1959년,제1회전국운동회가 있어 갑급리그 치르지 않음 3.이상 글과 자료는 박광순 원로의 기억과 인터넷 검색에 의거함. 기억과 인터넷 자료에 틀린 부분이 있을수 있으니 잘 아시는 분들께서 수정하여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특별히 1956년,1957년,1958년 길림팀의 갑급리그 성적을 알려 주시면 소중한 사료로 남을 것입니다.   제공: 방홍국 조글로미디어 ====================================   간도성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연길시민팀(1933년) 만주국도시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간도성 축구팀(1935년) 간도성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장동축구팀(1935년) 만주국도시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간도성 축구팀(1936년) 동만4성체육대회 축구종목에서 우승한 간도성 축구팀(1939년) 간도성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용정 대성, 동흥 학우회(1940년) 만주국 제3차중등전문학교축구경기에서 우승한 용정광명중학교(1940년) 간도성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용정 제2국민학교(1940년) 대동아축구대회에 참가한 만주국팀 조선족 선수들(1942년)    동북에 위치한 연변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중국축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연변축구의 명성을 들어본적이 있을것이다. 프로축구의 원년 멤버인 연변축구는 중국축구의 발전력사에 굵직한 한획을 그었다. 연변축구는 여러번의 시련을 이겨내고 흑마로 부상해 모두들 앞에 또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느날부터인지 모두들 슈퍼리그로 승격한 연변팀을 궁금해하고 그들의 전며 공격, 전면수비의 위력이 과연 날카롭다 감탄하기 시작했다. 보충명액으로 갑급리그에 출전한 연변팀이 신기하게도 중국식 “카이저”신화를 창조했다. 아래 우리는 이 서민축구팀—연변부덕축구팀에 대해 말하려 한다. 축구는 연변에서 백년의 력사를 가지고있으며 연변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축구운동을 시작한 지역중의 하나이다. 유구한 력사때문에 축구는 이미 연변의 정치, 경제와 문화 생활에 깊이있게 융합되였고 그 저력이 막강하다. 연변팀은 용맹한 작풍, 강경한 발놀림, 뛰여난 집단플레이, 전면 공격, 전면 수비라는 독특한 수법으로 유명하며 국내 축구계의 전통 강팀이다. 연변축구는 줄곧 중국축구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1955년 길림성축구팀이 성립되였다. 연변지역의 축구실력이 길림성의 다른 지역보다 뛰여났기때문에 오랜 시간동안 길림팀은 바로 연변팀이였다. 그해 길림팀은 대항전에서 2대1로 헝가리에서 류학을 마치고 귀국한 중국국가팀을 이겼다. 하룡원수는 용맹하고 완강한 길림팀을 극찬했다. 그는 길림팀은 국가팀의 기술을 배우고 국가팀은 길림팀의 량호한 풍격을 배우라고 지시했다. 20세기 50년대부터 지금까지 연변은 중국국가팀을 위해 고종훈, 김광주, 리홍군 등 40여명의 선수들을 육성해냈고 기타 성급도시에 400여명의 축구인재들을 수송했으며 전국에서 유명한 축구선수 배출 지역이다. 연변팀이 중국프로축구의 길에서 창조한 량호한 성적을 말하려면 두명의 한국감독을 빼놓을수 없다. 한 사람은 연변축구의 대부로 불리는 최은택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연변팀을 이끌고 슈퍼리그로 돌아온 박태하이다. 언어적인 우세때문에 연변팀은 한국감독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고 그 효과도 톡톡히 보았다. 1997년 연변팀에서 최은택교수를 감독으로 초빙했다. 최은택은 한국의 선진적인 축구지식과 관리방법, 기술과 전술, 완강한 투지를 연변팀에 융합시켜 그해 갑A리그에서 4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는 연변팀이 중국 최고 수준 축구리그에서 창조한 최고의 성적이였다. 그러나 1997년 휘황한 성적을 거둔후 경제, 체제 등 여러방면 요소의 제약과 영향으로 연변팀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2015년, 연변팀은 또 다른 한국인 감독 박태하를 영입했다. 박태하감독의 인솔하에 연변축구 스타일을 이어받은 이 팀은 놀라운 전투력을 보였다. 하태균, 스티브 등 외적선수들의 멋진 발휘와 최민 등 본토선수들의 든든한 뒤받침속에 이 이름없는 축구팀이 결국 2라운드를 앞당겨 슈퍼리그에 진출하게 되였다. 을급리그에서 슈퍼리그, 연변팀은 1년 사이에 거의 완성할수 없는 임무를 완성했다. 많은 사람들이 박태하에게서 그의 선배 최은택의 모습을 보아냈다. 연변축구의 휘황찬란한 성적은 연변인민들의 지지와 갈라놓을수 없다. 연변인민은 특히 축구를 좋아하며 수많은 팬을 보유하고있다. 연변의 축구팬은 어린이부터 로인까지 다양한 년령층에 분산되여있으며 이들에게 축구는 생활의 한부분이다. 통계에 따르면 연변의 홈장은 경기마다 관중이 평균 3만명이상에 달한다. 매번 연변팀 홈경기때면 축구팬들은 모두 장보러 가듯 경기장으로 몰려들어 경기를 관람한다. 축구는 이미 연변인민의 생활속 없어서는 안될 부분으로 되였다. 나무에 매달려 경기를 관람하던 “상고대 팬”들까지 포함해 말이다. 연변 축구팬들의 이런 애틋한 팬심은 아마 국내 그 어느 지역 팬들도 따라잡을수 없을것이다. 천시, 지리, 인화를 모두 갖춘 연변팀, 그래서인가 온갖 시련을 겪었지만 오늘날까지 전승되고있다. 연변팀은 중국 축구의 전체적환경이 어떻든 항상 변함없이 존재할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점점 더 단단하고 굳세여질것을 축복한다! /대중체육 [출처] 백년력사의 연변축구 오늘도 여전히 굳세게 - 모이자 뉴스    
923    [자료] - 연변 초대 주장 주덕해를 그리며... 댓글:  조회:3545  추천:0  2017-01-08
주덕해   朱德海   (1911~1972) 작성자: 조선족력사자료 원명은 오기섭. 길림성 룡정현사람(조선족). 1929년에 혁명에 참가하였고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초기에 흑룡강 녕안,  밀산과 벌리 등지에서 당의 지하사업에 종사하였다. 1936년에 당의 파견을 받아 쏘련에 가서 모스크바동방대학을 다녔다. 1939년에 귀국하여 팔로군 359려에서 정치사업을 하였다. 1944년에 연안조선청년군정간부학교에서 총무과장으로 있었다. 광복후 동북에 와서 선후로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치위원. 송강군구 제8퇀 정치위원.,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 처장으로 사업하였다. 1949년 3월에 연변에 와서 중공연변지위 제1서기, 연변전원공서 전원으로 있었고 1949년 전국제1차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였으며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된후 줄곧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위 제1서기, 자치주 주장 등 직무를 맡았었다. 그리고 또 중공길림성위 상무위원, 길림성 부성장으로 있었다. 제3기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이며 당의 제8차전국대표대회에서 중공중앙 후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문화대혁명”기간 림표-강청반혁명집단의 박해를 받아 1972년 7월 3일에 무한에서 서거하였다. 출처:《력사사전》 (박문일 주편/연변인민출판사/1984년) ======================= 연길 모아산 길을  “덕해로”로  개명했으면  조글로포럼 론평원   연길시민정국에서는 연룡로에 새 이름을 지어주기로 하고 도로명 공개모집을 공시했다. 연룡로는 연길시 남단 철남시장부근 철도와 도로 교차점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연변빈관, 중국조선족풍정원, 모아산에 이르는 구간을 말한다. 즉 연길에서 국가삼림공원인 모아산으로 오르는 길을 가리킨다.   모아산에는 소나무, 느릅나무, 미루나무가 우거지고 꿩, 산토끼가 서식하고 있으며 울창한 숲속에는 각종 버섯이 자라고 있다. 모아산은 또 부르하통하와 해란강의 천연관람대이기도 하며 그 정상에서는 연길시와 룡정시,조양천진 시가지까지 조망할수 있다. 모아산 등산길은 연길시민들이 자주 찾는 휴가와 레저의 명소이다. 모아산은 생태공간, 삼림공원, 휴가산지,록색레저,민속관광으로 이미 연길시의 상징으로 자리매김되여 있다.   이 모아산으로 가는 원 “연룡로”를 “덕해로(德海路)”라고 개명할 것을 건의한다.   “덕해”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주장 주덕해(1911-1972)의 함자이다. 주덕해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반 기틀을 만들어 반석우에 세우고 조선족의 사회, 교육, 문화의 기반을 닦았으며 지난 20세기 50년대초 민둥산이었던 모아산에 식수운동을 벌린 민족지도자이다.   연변주 초대주장이었던 그가 앞장서 모아산 식수조림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모아산은 오늘의 모습을 자랑할 수 없을 것이며 종합기능을 구비한 관광지로 부상될 수 없었을것이며 오늘날까지도 민둥산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아산은  원래는 민둥산이었다는 것, 현재의 울창함은 주덕해의 공로이며 은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으니, 오늘날 모아산 울창한 삼림에서 청신한 록색공기를 마음껏 향수하고 즐기는 우리들로서 우물 판 이를 망각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주덕해는 모아산 천지개벽 록화운동의 대표이고 리더이고 주역이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니  모아산을 허리띠처럼 감싸며 굽이 돈  원 “연룡로” 도로명을 그의 함자로 새롭게 명명하여 그의 뜻과 로고를 청사에 남기는 것은 지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1984년 당시 중공중앙 총서기 호요방의 지시에 따라 1986년  260만원을 투자하여 연길공원 서산 언덕에 20메터 높이의 주덕해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일반시민들이 평소에 찾아보기에는 지리위치상 일정한 제한이 따른다.   “덕해로”로 명명되면 시민들이 주덕해와 가까와지고 그의 공적과 의미를 되새겨 보며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분발노력하게 될 것이다. “주덕해” 하면 조선족이 떠오르고 조선족하면 연변이 떠오르고 연변하면 민족단결,조화사회가 떠오르는 양성순환, “덕해로”는 연변조선족이라는 민족관광자원, 모아산이라는 삼림관광자원과 함께 연변조선족 인적관광자원으로 연길시 도시관광 브랜드로 승화될 것이다.  또한 억울하게 루명을 쓰고 타계한 주덕해가 높이 모셔진 서산 기념비로부터  연변인민의 신변으로,마음속으로 다시 걸어내려와 하나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덕해로”로 명명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922    [록색환경운동者] - 산양은 케이블카를 타지 않는다... 댓글:  조회:3614  추천:0  2017-01-08
    30여년 전, 두 번이나 문화재위원회에서 부결된 이력이 있는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사업" 을 아시나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 사업이 다시 진행된다고 해 화제였죠. 부들부들...   녹색연합에서는 케이블카 설치로 인한 설악산 자연 훼손을 막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는데요. 마침내, 얼마 전 들려온 반가운 사업 부결 소식! 설악산의 자연을 사랑하는 모두에게 의미 있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겠죠? 도대체 오색 케이블카 사업이 무엇인지, 그리고 설악산을 앞으로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 지 궁금하시다면! 이 글에 주목해주세요~     #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그것이 궁금하다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는 양양군 서면 오색리 466번지와 산 위 끝청을 잇는 총 3.5km의 노선입니다. 양양군에서 설명한 이 사업의 추진 배경은 환경보호, 관광객 유입을 통한 지역경제발전, 노약자 및 장애인의 접근성 향상 등이라고 해요.   사진 : 강원도청. 오색 케이블카 예정지 모습   그런데 이 사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가 너무 크고, 사업성도 불확실하다고 하는데요.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 더 이상의 케이블카는 거부한다!    하나. 한국에서 없어지면, 전 세계에서도 없어지는 식물들! 케이블카 예정지 중 일부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아고산식생대로, 빙하기에 한반도로 유입된 수종들이 자생하는 공간입니다. 실제로 눈잣나무, 눈향나무, 눈측백나무, 분비나무, 만병초 등과 같은 아고산식생식물이 케이블카 예정지에서 발견되었고, 이곳은 한번 파괴되면 복구가 불가능해 보호가 필수적이라고 해요. 그런데 케이블카 지주를 심기 위해서는 주변 나무를 베어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나무가 사라질까요?   사진 : ©설악산국립공원지키기국민행동. 케이블카 예정지의 나무 수령 조사 결과 *아고산식생대 : 산의 중간지대에 분포한 상록침엽수림대. 빙하기에 우리나라로 유입된 식물들이 자생하는 곳입니다. 국립생태원은 아고산 침엽수군락을 생물다양성 핵심공간으로 분류하고 보호, 연구가 시급한 지역이라고 밝혔습니다.   둘. 귀염둥이 산양이 멸종될지도 몰라요   오색 케이블카 예정지에서 찍힌 산양의 모습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이 산양. 어디서 찍힌 사진일까요? 바로 오색 케이블카 예정지입니다. 전국에 고작 800여 마리, 그 중 설악산 지역에 25% 이상이 살고 있어요. 케이블카 설치공사가 시작되면 나무가 있던 자리에 철탑이 세워질 것이고, 산양의 서식지가 무참히 파괴될거예요. 서식지가 파편화되면서 해당 범위에 사는 산양은 멸종될 가능성이 크고, 순차적으로 설악산 전체에 살고 있는 산양에게까지 영향이 미치겠지요. 살 곳이 좁아지는 것보다 더 큰 위협이 있을까요?     사진 : ©설악산국립공원지키기국민행동. 케이블카 예정지 곳곳에서 발견된 다양한 산양의 흔적들 셋. 지역경제발전, 진짜야? 확실해?   권금성 케이블카가 운영 중인 설악동 일대 상가들은 이미 활기를 잃은 지 오래입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케이블카만 이용한 후에 속초, 강릉 등 멀리 나가버리기 때문이죠. 앞으로 건설될 서울-양양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2시간 만에 왕복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만큼 관광객들의 설악권 지역 체류시간은 감소할 것입니다.   또한, 오색 케이블카 사업 자체도 수익성 계산에 의문점이 남아있어요. 요금에 할인율을 적용하지 않고, 365일 연중무휴를 가정해서 수익성을 계산하는 등 경제성을 부풀려 사실을 많이 왜곡했습니다. 정말 지역에 도움 되는 것 맞나요? 확실해요?   # 권금성의 과거를 아세요?    풀 한 포기 없는 바위산 권금성까지 운행하는 ‘설악 케이블카’, 타보신 분들 많으시죠? 사실 이 곳도 케이블카 건설 전에는 울창한 숲이었다는 사실을 아세요? 탐방객이 늘어나면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던 풀들이 죽고, 결국 숲이 사라졌다고 해요. 오색케이블카의 종점인 끝청의 미래도 권금성이 될 지 몰라요.   우리는 이미 권금성을 통해 케이블카의 미래를 보았는데, 자연 파괴라는 과오를 '굳이' 되풀이할 필요가 있을까요?     사진 : 녹색연합 홈페이지 (© 박그림).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케이블카 건설 전의 울창한 권금성   사진 : 녹색연합 홈페이지. 케이블카 건설 후 황폐해진 권금성   # 같이가치 기부자 여러분의 힘입니다!    2015년과 2016년 총 두 번에 걸쳐, 같이가치에서는 사단법인 녹색연합이 설악산을 지켜내기 위한 활동비 모금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두 개의 모금함에 마음을 보태주신 기부자 분들이 무려 총 41,636명! 그 결과 모인 금액이 총 8,812,800원!   수많은 분들의 응원과 모금액의 도움으로 녹색연합은 케이블카 사업 저지 활동을 이어나갔고, 마침내 ‘케이블카 사업 부결’이라는 기쁜 소식까지 전해드리게 되었어요.   그리고 꼭 알려드리고 싶은 한 가지! 설악산의 자연을 지켜낸 것은 다름아닌 41,636명의 따뜻한 마음이라는 것!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케이블카 사업 저지 활동이 힘에 부쳤을지도 모릅니다.       # 끝으로, 녹색연합에서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Q. 사업이 부결된 소감이 어떠신가요? A. 각종 개발 정책에 맞서 환경 운동을 해왔지만, 굉장히 오랜만에 저희의 활동이 성과를 이루어낸 부분이라 감회가 새롭습니다. 앞으로의 활동에 있어서 이번 경험이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환경 운동가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는 현장을 지킬 수 있어 뿌듯합니다.     Q. 앞으로 설악산을 어떻게 지켜나갈 예정이신가요? A. 이번 사업 진행이 어려워진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케이블카 사업안이 신청될 것입니다. 저희는 이러한 시도가 산지보호제도의 맹점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궁극적으로는 산지보호 관련 정책과 법안을 바꿔가는데 초점을 두고 활동을 해나가려고 합니다.       Q. 마지막으로, 모금함을 응원해주신 기부자 분들께 한마디 해주세요!   A. 산에 무인카메라를 설치하고, 야생동물을 관찰하는 일에는 끈기있는 기다림이 필요한데요. 많은 분들의 저희 녹색연합을 지지해주시는 이유는 저희의 뚝심과 끈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지지를 통해 얻은 힘으로 앞으로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활동하겠습니다. 계속 지켜봐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사진 : 녹색연합 홈페이지     내용 자문 : 녹색연합     알프스에도 수백개의 케이블카와 산악기차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산에는 케이블카가 없어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도의 기차역으로 유명한 융프라우호역도 사실은 융프라우호 정상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있죠.   마터호른, 몽블랑도 마찬가지. 이 곳에 케이블카가 없는 이유가 기술이 부족해서일까요? 또는 환경보호가 사람보다 중요해서일까요?     자연과 사람은 한 배를 타고 있어요. 자연과 사람 중 한 쪽이 전복되면, 나머지 한 쪽이 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 아닐까요?   이제는 자연을 이용하기 보다는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케이블카를 타지 않는’ 산양과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 저지 활동을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회 변화를 만드는건 바로 당신입니다!
921    [쉼터] - 미스터리 UFO 댓글:  조회:4954  추천:1  2017-01-07
미확인비행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UFO     1952년 7월 31일, 미국 뉴저지 주 하늘의 미확인비행체 미확인비행체(未確認飛行體, Unidentified Flying Object; UFO)[1]는 미확인으로 남아 있는 지상이나 하늘에 나타나는 모든 비행체를 이른다. 그 정체는 우주인의 비행체·기상 기구·행성·유성·구름·신기루·방전 현상, 구름에 비친 서치라이트의 오인, 테스트 중인 미공개 항공기, 로켓, 인공 위성 등으로 오해되기도 한다.[2] 미확인 비행물체는 주로 사진과 목격담으로 보고되며, 외계인과의 접촉이 수반되기도 한다. 전 세계에서 비행접시가 보고되고 있다.   목차   [숨기기]  1용어 2UFO 목격 2.1초기 괴비행물체의 목격 2.2시기별 주요 UFO 사건 3UFO 조사 3.1서명 작전 (Project Sign) 3.2마그넷 작전 (Project Magnet) 3.3청색책 작전 (Project Bluebook) 3.4미국 3.5알려진 방법들 3.6캐나다 3.7프랑스 3.8영국 3.9우루과이 3.10Astronomet reports 4UFO 현상의 과학적 탐구 4.1UFO 체험의 신뢰도(Possibility) 4.2UFO 체험의 기묘도(Strangeness) 4.3UFO의 기묘한 운행 특성 4.4지면에 접근한 UFO의 영향 4.5UFO의 형태 4.5.1달 모양 UFO 4.5.2정팔면체형 UFO 4.5.3짐벌 모양 UFO 4.5.4새 모양 UFO 5피랍자 신드롬 5.1UFO 안에서 5.2피랍체험의 영향 5.3피랍 체험의 과학적 조사와 증거들 6UFO 신드롬 6.1정의 6.2UFO 신드롬의 종교적 성향 7과학적 해석 7.1구전 현상 가설 7.2지구 에너지 가설 7.3전기 과민 알레르기 가설 8회의론 9UFO의 특성에 대한 가설 10UFO의 기원에 대한 가설 10.1외계 가설 10.2초심리 가설 10.3신학 가설 11관련 기록 및 보도 12각주 13같이 보기 14바깥 고리   용어[편집] UFO가 처음 발견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고대 이집트 문서에서부터 중세 벽화 등에 UFO가 등장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진위를 파악하기에는 자료적 근거가 빈약하다. UFO의 유의미한 목격사건들은 대체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등장하였다. 그러한 비행체의 운동 원리나 내부 구조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존재하지 않고, 초자연현상으로 분류되고 있다.[3] UFO는 처음에 비행 접시라는 이름으로 1953년 도널드 E.키호(Donald E. Keyhoe)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이 되었고, 미 공군 조사단장인 에드워드 J. 러펠트(Edward J. Ruppelt)가 처음으로 UFO, 미확인 비행물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외의 용어로써는 ‘나는 팬케이크’, ‘알 수 없는 나는 디스크’, ‘확인불가한 비행 물체’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다.[4][5] 초기에 비행 접시로 알려졌던 이러한 알 수 없는 비행체를 UFO라고 처음으로 명명하는 데 계기가 된 사람은 케네스 아놀드(Kenneth Arnold)이다. 그는 1947년 6월 24일 미국 워싱턴 주 레이니어 국립공원상공을 비행하다 9대의 알 수 없는 비행물체를 목격하고, 이러한 목격담은 기자들에 의해 ‘비행접시’라는 이름으로 보도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공군이 조사에 착수하면서 비로소 UFO, 미확인 비행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UFO라는 이름이 관련 내용을 담은 공중매체로 인해 외계인의 우주선이라는 용도의 단어로 사용되다 보니,국립항공보고센터(NARCAP)의 일부 과학자들은 이를 미확인 공중 현상(UAP)라고 칭하는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6][7] UFO 목격[편집] UFO의 출현은 특정 시기에 특정 지역에 집중된다는 통계적인 추정이 있다. 초기 괴비행물체의 목격[편집] 푸 파이터즈(Foo-fighters) 제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 측과 일본, 독일 측의 비행사들이 지름이 수 인치에서 수 피트에 달하는 이상한 구형 또는 원반형 물체를 목격했다는 보고가 자주 있었다. 증언에 따르면 푸 파이터즈는 비행기의 날개 끝에서 기체 앞뒤로 왔다갔다 했고, 오렌지색이나 빨간색, 흰색의 빛을 발하거나 깜박거렸다. 하지만 레이더에는 잡히지 않았으며, 속도는 시속 300km에서 800km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푸 파이터즈는 정식으로 UFO라고 불리지는 않는다.[8] 유령 로켓(Ghost Rocket) 제 2차 세계대전 후, 1946~1948년에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소위 유령 로켓이라는 불꽃을 내뿜는 꼬리를 단 기이한 비행물체가 목격되었다. 특히 1946년 스웨덴 상공에는 1천여 번 이상 출몰하였다. 영국의 런던 데일리 메일지는 스웨덴과 덴마크에 특파원을 파견했으며, 특파원은 유령 로켓들이 시가형이고, 꼬리에서 오렌지나 녹색의 불꽃을 뿜고 있었고, 대략 300미터에서 1000미터 고도에서 비행기와 비슷한 속도로 날아다닌다고 전했다. 반면 영국 공군 참모본부 정보책임자인 리차드 존스 교수는 이 유령 로켓들이 대기원 진입 초기의 매우 밝은 유성들이라고 결론지었다. 위와 마찬가지로 유령 로켓도 정식으로 UFO라고 불리지는 않는다.[9] 시기별 주요 UFO 사건[편집] 케네스 아놀드(Kenneth Arnold)와 비행접시(Flying Saucer) 1947년 6월 24일, 미국 워싱턴 주 레이니어 국립공원 상공을 비행하고 있던 케네스 아놀드는 9대의 이상한 비행물체를 목격했다. 그는 지상 근무요원에서 자신의 목격을 이야기했고 곧 많은 기자들이 이를 신문에 실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케네스 아놀드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목격한 물체가 ‘수면을 튀어가는 접시’같았다고 했으며, 이 말이AP통신의 한 기자에 의해 '비행접시'라고 널리 보도되었다. 미 공군은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UFO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사건이 UFO 목격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10] 로즈웰 UFO 소동 1947년 7월 8일, 로즈웰 데일리 레코드지에 비행접시가 로즈웰 근교의 한 목장에 추락했고 그 잔해를 미 공군이 회수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 기사는 세계 각국에 배포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곧 미 군부는 이것이 오보였고 추락 물체가 기상관측 기구라고 증언했다. 그런데 나중에 미 군부의 어느 장교가 사실은 추락 물체의 잔해가 기상관측 기구의 잔해로 바꿔치기 되었다고 주장했고 사건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11] 프랑스 방데(Vendėe) 지구의 UFO 1954년 9월 14일,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백 50마일 정도 떨어진 방데 지구에서 대여섯 마을 주민 수백명에 의해 대낮에 UFO가 목격되었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갑자기 두꺼운 구름층이 밀려오더니 그곳에서 시가형의 밝게 빛나는 보랏빛 안개 덩어리가 수평상태로 튀어나왔고, 움직일 때마다 마치 안개에 둘러싸인 커다란 기계처럼 흐트러짐없이 전체가 한꺼번에 움직였다. 이와 동시에 1954년 10월까지 프랑스에서는 UFO목격 소동이 계속되었고, 증언된 UFO사이의 많은 공통점들이 발견되었다.[12] 소코로 사건 1964년 4월 말, 과속 차량을 쫓던 경관 로니 자모라(Lonnie Zamora)는 마을 근처의 고속도로에서 땅에 착륙해 있는 UFO를 목격했다. 그것은 계란 모양의 우주선이었고 그 옆에 키가 작은 난쟁이 2명이 서 있었으며, 그것을 본 경관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UFO는 아랫부분에서 화염을 분출하며 순식간에 이륙한 후 날아갔다. 그 후 FBI의 조사에 따르면 사건 시간대에 다른 3건의 UFO목격 제보가 있었고, 경관이 진술한 것과 마찬가지로 푸른색 섬광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UFO에 의한 모래땅의 자국과 탄 수풀의 흔적이 남았으나 어느 지구상의 비행물체도 그러한 흔적을 만들 수 없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13] 육군 헬기를 끌어올린 UFO 1973년 10월 18일 밤11시 경, 미 육군 소속 헬기가 운행 도중 UFO와 거의 충돌할 뻔했던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그 헬기는 오하이오 주 맨스필드 상공 2천 5백 피트를 순항중이었다. 그런데 헬기 앞에 서쪽에서 남쪽으로 움직이는 빨간 불빛이 나타났으며 헬기를 향해 매우 빠르게 다가왔다. 헬기의 기능은 곧 마비가 되었으며, 빨간 불빛은 헬기 정면에 10초 동안 멈추어 섰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 헬기의 탑승자 코인 대위는 분당 6백 미터로 하강하도록 조작된 헬기가 분당 3백 미터 상승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으며, 헬기는 지상 1.1킬로미터까지 상승한 후 다시 정상작동 하였다.[14] 한국에 나타난 UFO 1973년 충청 남도 보령군의 한 시골의 초등학교에서 한 선생님과 다수의 어린이들에 의해 UFO가 목격되었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산 위에서 갑자기 6개의 구름 덩어리가 밑으로 내려왔으며, 그 덩어리들이 한 덩어리로 뭉치더니 회전하며 타원형의 2개의 구름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구름이 걷히며 빨간색 물체가 나타났고, 그 비행물체들은 야산 중턱의 각각 다른 장소에 착륙했다. 잠시 후 그 비행물체들은 하늘을 가로질러 모습을 감추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은 일치했으며 학교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동네 주민들 중에서도 목격자가 약 30명 정도 나타났다.[15] 여객기를 쫓아온 UFO 1984년 말 티리시(Tilisi)를 출발해 탈린(Tallin)으로 가던 에어로플로트(aeroflot) 8352기편 제트 여객기가 민스크에서 12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UFO의 추격을 받았다는 기사가 1985년 1월 30일 타스통신을 통해서 보도되었다. 그 항공기의 기장 이고르 체르카신(Igor Cherkasin)과 부기장 게나디 라쭈린(Gennadiy Lazulin) 외 2명의 승무원은 그들의 항로 가까이에 있는 크고 노란 별과 비슷한 것을 목격했으며, 그곳에서 광선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 비행체는 지상에서 30킬로미터 이상의 높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곧 하강하여 그 항공기와 같은 높이인 1만 미터 상공에 도달했고, 녹색 구름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이 녹색 구름은 이 여객기가 목적지에 착륙하기 직전까지 비행기를 쫓아왔으며, 그 물체는 서서히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이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 1985년 3월 소련 과학아카데미 특별위원회에서 이 사건은 UFO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16] 요격기를 따돌린 삼각형 UFO 1990년 3월 30일 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UFO목격자 수십 명이 경찰본부에 알려왔다. 그와 동시에 브뤼셀 남단 글론스(Glons)에 설치된 나토(NATO)소속 레이더와 브뤼셀 서쪽 세머자(Semmerzake)에 설치된 레이더에 미확인 물체가 포착되었다. 이 두 레이더 기지들과 목격자들이 목격한 장소되는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 비행물체에는 비행기의 정체를 레이더에 확인시키는 트랜스폰더(transponder)가 없었으며 이는 벨기에 영공에 대한 무단침입으로 간주, 곧 F16 요격기 2대가 출동했다. 그러나 F16이 이 UFO를 추격하자 이 UFO는 3천 미터 상공에서 1천 7백 미터 상공으로 1초만에 이동하였으며 다시 2백 미터 상공으로 이동하여 지상 레이더망을 벗어났다. 수많은 목격자들이 이 추격전을 목격했지만, 아무도 비행기가 낮은 고도에서 소리의 속도 이상으로 비행을 할 때 발생하는 소닉 붐(Sonic Boom)을 듣지 못했으며 유리창 파열에 대한 피해조차 보고되지 않았다.[17] UFO 조사[편집] 오랜 시간 전부터 UFO에 대해서는 많은 조사가 이루어졌다. 미국, 캐나다, 영국, 일본, 페루, 프랑스, 벨기에, 스웨덴, 브라질, 칠레, 우루과이, 멕시코, 스페인 그리고 소련에서는 UFO에 대해서 다양하고 넓은 관찰과 과학적 엄밀함을 통해 조사를 해 왔다. 가장 잘 알려진 정부의 연구로는 스웨덴 군의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고스트 로켓 조사 (1946-1947),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Project Bluebook (1947-1969),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Green fireballs 대한 비밀 U.S. Army/Air Force Project Twinkle 조사 (1948-1951), 그리고 브라질 공군 Operation Saucer (1977) 이 있다. 프랑스는 우주 기관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CNES 를 통해 1977년부터 조사를 하였다. 우루과이 정부도 비슷한 것을 1989년부터 시행하였다. 서명 작전 (Project Sign)[편집] 1948년 시행된 Project Sign을 통해서 우주 연구에 대한 UFO 보고서들을 분류한 결과를 얻어내었다. 사적 기관이지만 높은 수준을 지닌 프랑스의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COMETA 연구 또한 1999년에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마그넷 작전 (Project Magnet)[편집] 1952, 1953년에 시행된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Project Magnet 의 보고서에서도 우주인의 기원에 대한 높은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다. 청색책 작전 (Project Bluebook)[편집]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Project Bluebook 의 과학적 조언자로 일했던 훈련된 우주비행사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J. Allen Hynek 은 처음엔 UFO 보고서들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결국에는 많은 보고서들이 만족할 만큼 설명이 되지 않고 그가 “the cavalier disregard by Project Blue Book of the principles of scientific investigation.” 이라 묘사했던 것에 대해 강하게 비평적인 결론에 도달하였다. 정부 일을 떠나면서 그는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Center for UFO Studies 라는 사적 펀드를 개설하였는데, 그는 남은 인생을 모두 그 곳에 바쳤다. Hynek 과 같은, Jacques Vallée는 과학자이며 현저한 UFO 연구자이다. 그는 대부분의 UFO 연구와 정부의 연구의 과학적 결핍을 지적해왔다. 그는 신화와 광신이 종종 현상에 대해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수백의 전문적인 과학자들 – 그와 Hynek 모두가 들어있던 “the invisible college” – 은 계속 개인적으로 UFO를 연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18] 미국[편집]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FOIA 에서 나온 수천의 문서들 또한 많은 미국의 정보국들이 UFO에 대해 모은 정보가 많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들은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Defense Intelligence Agency (DIA),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FBI,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CIA,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National Security Agency (NSA) 등 많은 군 정보국들이다. 알려진 방법들[편집] 뉴멕시코 거주자, 지방 법 집행원, US 군 등을 포함한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The Roswell Incident (1947) 에서 모은 UFO 충돌 방면에 대한 물리적 근거 The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Mantell UFO Incident January 7,1948 The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Betty and Bernay Hill abduction (1961)은 납치사건에 대해 처음 기술하였음 1965년 펜실베니아에서 일어난 the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Kecksburg Incident 는 종 모양의 물체가 지역에 떨어지는 것을 본 것에 대해 기술하였다. 경찰과 군 관계자가 조사를 위해 파견되었었다.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Travis Walton 납치 사건 (1975) : 영화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Fire in the Sky 가 이 사건을 토대로 하였으나 과한 윤색이 들어가있다. The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Phoenix Lights” , 1997년 3월 13일 캐나다[편집] 캐나다의 “the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Department of National Defence”는 캐나다 전역에 걸쳐서 UFO에 대해 조사하고 관찰하고 기술한다.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Duhamel과 Alberta 의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crop circles 도 조사한다. 일찍이 캐나다는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Project Magnet (1950-1954)와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Project Second Storey (1952-1954)를 the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Defence Research Board 에 기초하여 연구해왔다. 이 연구들은 우주의 기원을 지지하는 라디오 기술자 Wilbert B. Smith에 의해 진행되었다. The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Shan Harbour 사건 에서는 연속적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물체가 물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는 많은 증언들이 있다. 이 때 많은 기관이 연구에 착수하였지만 성과가 없었다. 프랑스[편집] 2007년 3월, 프랑스는 UFO 관찰과 다른 현상들을 기록하기 위해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Centre National d'Études Spatiales (CNES) 를 창립하였다. 프랑스는 정부가 지원하는 가장 오래된 조사로써 프랑스 우주 위원회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CNES 등에서 우주 현상을 연구하고 있다. 6000여 개의 사건들 중 14% 정도가 미해결로 남아있다. 프랑스의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COMETA (1996-1999)는 사적인 연구 기관으로써 대부분 우주 과학자들과 공학자들, CNES와 높은 수준의 프랑스 공군 정보 분석가를 회원으로 하는 기관이었다. 영국[편집]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UK’s Ministry of Defence (MoD, 1996-2000)은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Project Condign 이라 불리는 비밀 UFO 연구를 진행했었다. 그 결과 보고서로 "Unidentified Aerial Phenomena in the UK Defence Region", 이 2006년 출간되었다. 우루과이[편집] 우루과이 공군은 UFO 조사에 대해 1998년 이래로 2100여개의 케이스를 분석하였다. 그 중 오직 40여개의 사건만이 형식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최근에 모든 파일이 재분류되었다. 군 미사일 방해, 납치, 소 훼손, 물리적 착륙 증거 등을 포함한 설명 불가능한 파일들이 있다. Astronomet reports[편집] 미국 공군의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Project Blue Book 에서 아마추어와 프로 우주비행사들이나 다른 망원경 사용자사용부터 쓰여진 보고서는 전체 알려지지 않은 보고서의 대략 1%[19] 정도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1952년, 우주비행사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J. Allen Hynek 은 Blue Book의 컨설턴트였으며 45명의 펠로우 우주비행사를 배출했다. 1970년에 우주 물리학자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Peter A. Sturrock 은 설문을 통해서 5% 정도가 UFO 관측을 한 적이 있다는 결과를 얻었다. UFO 현상의 과학적 탐구[편집] UFO 체험의 신뢰도(Possibility)[편집]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UFO를 목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 중 약 6% 정도만이 진짜 UFO라고 밝혀졌다. 따라서 신뢰도를 매기는 것이 중요한데, UFO 체험의 신뢰도는 목격자의 신분이나 정신적 능력, 이를 조사한 기관이나 사람의 자질, 그리고 이를 통해 확보된 물질적 증거의 차원으로 세분해서 평가할 수 있다.[20] 이러한 항목들에 부합하여 UFO 목격에 신뢰를 주는 요건들을 살펴보면, 먼저 항공기 조종사나 과제요원 등과 같이 항공 분야에 매우 정통한 사람일수록 신뢰도가 높다. 또한, 다수가 동시에 목격해서 개인의 착각이나 환각의 가능성을 배제하면 신뢰도가 더욱 높아진다. 사진이나 레이더의 포착, 지면에 남긴 자국 등 물리적인 증거들이 뒷받침될 경우 집단 환각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다. 또, 목격자뿐만 아니라 물리적 증거들조차도 전문가가 엄밀히 검사하지 않으면 그 진위를 구분할 수 없으므로 공인 받은 기관에서 증거들을 확인해줄 때 신뢰도가 매우 높다.[21] UFO 체험의 기묘도(Strangeness)[편집] UFO 기묘도는 UFO 운행의 특성과 형태, 그리고 목격자에게 끼치는 영향의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20] 첫째로, UFO 운행 패턴의 기묘도는 UFO가 목격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그 형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 매우 중요해진다. 이런 먼 거리에서의 목격은 낮과 밤에 따라 야간 발광체와 주간 원반체로 나뉜다. 야간 발광체는 순간가속 및 정지를 자유롭게 하고, 음속 이상의 속도로 움직이면서도 소닉 붐을 내지 않거나 직각으로 회전하고, 순간소멸 등을 할 때 기묘도가 높다. 주간 원반체는 낙엽처럼 낙하하여 지표 가까이에 머물다가 목격자가 접근하면 빠른 속도로 수직상승할 때 기묘도가 높다.[22] 다음으로 UFO 형태를 살펴보면, UFO는 크고 둥근 3형태와 원통주 형태로 분류된다. 종종 분리합체가 자유롭고 형태가 변하는 UFO가 목격되기도 한다. 또한, UFO가 발산하는 에너지가 비교할 수 없이 크다면 기묘도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UFO의 근접 조우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례에서 탑승자가 목격되었는데, 이 경우 UFO 탑승자의 모습이 인간을 닮긴 했지만 지구 상의 어느 종족과도 닮지 않은 존재들이 나타나서 기묘도가 매우 높다.[23] UFO의 기묘한 운행 특성[편집] UFO의 운행에는 기묘한 특성들이 있는데, 먼저 낮에 목격되는 UFO가 낙엽하강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낙엽하강운동은 물리법칙을 위배하지 않고, 기존 유체역학의 테두리에서 보면 별도의 추진기구가 없는 비행체가 하강 시 마치 접시가 불 속에 가라앉듯 내려오는 것이 에너지 효율이 가장 좋으며 균형 유지에도 유리하다는 것이다.[24] 또, UFO는 음속을 돌파하더라도 소닉 붐을 일으키지 않는데, 이것은 겉보기에 물리법칙을 위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그 이유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UFO는 마하 6이 넘는 속도에서도 소닉 붐이나 어떠한 충격파도 일으키지 않는다.[25] 또 다른 기묘한 운행 특성으로 순간가속과 순간정지 및 직각회전이 있다. 이것은 뉴턴의 관성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26] 그리고 UFO는 특별한 추진 수단 없이 급가속하는데, 급가속 자체는 물리적으로 가능하나 어떤 추진 수단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27] 제임스 맥켐벨 박사는 전자기력 제어를 통해 관성을 0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순간정지와 순간가속, 급가속 등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28] 또한, UFO는 목격자들에게 발견되면 홀연히 사라지는데 이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비물질화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질량보존법칙을 무시하는 것으로 현대 과학으로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29] 사라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오히려 의식해서 움직이는 듯한 경우도 있다. 직선 비행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UFO는 불규칙적으로 보이기도하는 움직임을 포함한다. 동영상이 끊어지듯이 움직이기도 하고, 비닐 봉지가 날아가듯이 움직이기도 한다. 두 대가 이중 나선형을 그리며 새처럼 움직이기도 한다. 지면에 접근한 UFO의 영향[편집] UFO가 지면에 접근할 때 여러 가지 특이 현상이 발생하는데, 먼저 자동차의 엔진이 멈추는 현상을 들 수 있다. 이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다른 전기기구들에도 마찬가지인데, 제임스 맥켐벨 박사는 실험을 통해 마이크로파 영역에 속하는 전자기파가 헤드라이트나 자동차 엔진을 정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증명했다.[30] 또한, UFO는 지면에 자국을 남기는데, 착륙패드 자국, 둥근 자국, 환상의 고리, 새둥지 또는 밀밭 서클으로 나눌 수 있다. 이와 같은 자국은 2가지 이상의 종류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31] 다른 현상으로, 대규모 정전이 일어난다던가 목격자에게서 특이한 패턴의 화상 자국이 나타난다던가, 엄청난 빛과 열이 관측된다던가 하는 현상들이 있다. UFO의 형태[편집] UFO는 그 형태 또한 미스터리인데, 첫 번째로 구름 형태의 UFO가 있다. 이 UFO는 언뜻 구름처럼 보여 의심을 사지 않다가 기묘한 운행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32] 다음으로는 다변형성 UFO가 있는데, 이것은 형태를 계속 바꾸는 UFO를 말한다. 그 유형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먼저 아메바 형은 단단한 구조물이 스스로 변하는 경우를 말한다. 두 번째는 분리나 합체가 일어나는 경우이고 세 번째 유형은 기묘도가 매우 높은 특성으로 그 형태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다.[33] UFO는 무척 밝게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빛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두운 부분은 아예 안 보이고, 빛을 내는 부분은 별빛 처럼 보인다. 밝은 부분(광반사)은 인공적인 이미지처럼, 명암도 없고 빛이 가로등이나 별처럼 사방으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레이저도 손전등보다는 빛이 집중된다. 재질 자체가 광반사도가 높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달 모양 UFO[편집]  이 이 문단에는 기여자 고유의 독자적인 연구 또는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적절한 참고 자료나 출처를 제시해 주세요.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6년 5월 15일에 내용의 검증이 요청되었습니다.) UFO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달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모양이다. 노란색으로 밝고 달무리가 보이지 않는다. 모서리에 약간 흐린 부분이 있다. 직선 비행을 하고 그다지 흔들리지 않는다. 높이 올라가면 별처럼 보인다. 유사 나선형으로 흔들거리며 상승하기도 한다. 급정지, 급가속하며 그 외엔 상승시를 제외하고 등속운동을 한다. 회전은 하긴 하지만 저속에서는 그다지 하지 않는다. 정팔면체형 UFO[편집] 전체적인 형태가 정팔면체와 유사한데 원기둥에 원뿔 두 개를 합성한 것 같은 모양이고 원뿔 아래 부분에 초록색 라이트 같은 것이 둘러싸 있고, 중앙 원기둥 부분에 붉은 색 라이트 같은 것이 둘러싸 있다. 원기둥 부분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고, 원뿔 부분은 밝고 금속처럼 보이며 은회색이다. 원뿔이 특이하게 회전하는데 위아래로도 회전하고 동시에 옆으로는 한방향으로만 회전한다. 해파리같은 생명체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는데 중앙의 붉은 라이트가 눈 같은 느낌을 준다. 무척 유연하게 회전한다. 끊어지듯이 움직이며 지그재그로 움직이지만 크게 요동치지는 않는다. 비행 속도도 끊어질 때마다 다르다. 짐벌 모양 UFO[편집] 짐벌 모양으로 노란색으로 밝다. 빛이 강하게 나는 느낌은 아니다. 곡선 비행하며 고리가 회전한다. 바람에 날아가듯이 비행하는데, 그래도 목표 지점으로 비행한다. 중앙 부분이 있을 것 같지만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 새 모양 UFO[편집] 노란색으로 빛나며 마치 새같은 모습이다. 2대가 있을 때 나선형으로 비행하기도 한다. 높이 올라가면 노란색 별처럼 보이고, 공간 이동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UFO는 낮보다 밤에 잘 보인다. 그러나 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은 대부분 봐도 모르거나, 관심 없거나, 별을 보고 착각하기도 한다. 피랍자 신드롬[편집] 납치자들의 모습 납치자들의 모습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인간형, 괴물형, 난쟁이형 또는 동물, 기계이라고 증언된다. 납치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마음대로 변형(변신)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으며, 같은 모습이지만 피해가 심하여 기억력이 스스로 조작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납치자의 형태변형 피랍자들은 종종 자신이 납치되기 직전에 동물 혹은 사람을 목격한다고 증언한다.사람들에겐 다가가면 이상한 자극을준다. 휘틀리 스트리버 사례에서 피랍 직후 그가 떠올린 것은 올빼미 영상이었다.[34] 미국의 캐시 데이비스는 온 몸에 정전기가 일면서 갑자기 갈증을 느껴 음료수를 사려고 근처 가게로 갔을 때 그녀는 이상한 사람을 만났고, 곧 UFO에 피랍되었다.[35] 영국에서 길거리에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이 묘한 미소를 띤 채 빠른 걸음으로 피랍자 카렌 옆을 지나쳐갔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녀가 뒤돌아보니 그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36] 왜 피랍자들이 이처럼 피랍 직전에 변형된 형태를 보는지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의견이 있다. 데이비드 제콥스 교수는 그것이 피랍의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스크린 메모리일 뿐이라고 한다.[37] 한편 존 맥 교수는 실제로 UFO 탑승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38] 납치자의 분류 납치자들은 크게 난쟁이형, 인간형, 괴물형 3가지 형태로 분류된다.[39] 외형과는 상관없이 모두 “유리창, 벽 천장을 자유자재로 통과하며 인간들에게도 잠시 동안 그런 능력이 생기도록 한다. 또한 그들 자신이나 사람들, 그 밖의 다른 물체들을 잠시 동안 보이지 않게 할 수도 있고, 빛을 동반하여 순간적으로 눈앞에 나타날 수도 있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이들에게 납치된 후 초능력이 생겼다는 보고가 많다. 이런 점들 때문에 피랍자들은 종종 이들을 신과 인간 사이의 매개자인 천사로 생각한다.[40] 난쟁이형 키가 작고 추하게 생긴 납치자들을 난쟁이형이라 부르며 주류를 이룬다. 키는 100~160cm 사이이고 큰 서양배 형태의 머리에 크고 둥근 눈, 가늘게 찢어진 코와 입, 머리털이 없다. 그들은 또한 주름진 회색 피부에 검거나 녹색 유니폼을 입었다고 보고된다. 형태는 피랍자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로 보고되는데, 특히 머리 모양헤 대해서 램프처럼 둥글다거나 빗방울, 또는 버섯 모양으로 묘사된다. 대표적인 난쟁이형 외계인 피랍은 ‘휘틀리 스트리버 사건’, ‘베티 앤드리슨 루카 사건’, ‘캐시 데이비스 사건’을 들 수 있다. 인간형 인간형 납치자들은 전체 피랍사례의 25% 정도이다. 외형적인 특징은 인간과 흡사하다는 점이다. 남미의 경우 이들 인간형 납치자들은 주로 성적 접촉을 목적으로 사람을 납치한다. 하지만 유럽의 경우에는 매우 친절하며 인간과 철학에 대해 논하기를 좋아하고 인류를 위한 메시지를 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41] 대표적인 사례로는 ‘보아스 발라스 사건’, ‘디오니시모 랑카 사건’, ‘신시아 애플톤 사건’이 있다. 괴물형 전체의 10% 정도에서 괴물형 납치자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짐승이나 로보트 형태, 또는 이들이 복합된 매우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무표정하고 과묵하며 기계적인 행동이 마치 수동적으로 보인다.[42] 대표적인 사례로는 미국의 ‘힉슨 파커 사건’, 미국 ‘파르고 S부인 사건’, 미국 ‘애리조나 주 캠핑 사건’ 등이 있다.   잃어버린 시간 신드롬 피랍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피랍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UFO 목격이 고작이다. 이런 사실은 자동차를 타고 가다 납치되는 경우 즉시 깨닫는데, 집에 도착해 보니 평소 걸리던 시가보다 한두 시간 더 걸렸다는 것이다. 이것을 ‘잃어버린 시간 신드롬(Missing Time Syndrome)’ 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역행최면을 통해서 알 수 있다.[43] UFO 안에서[편집] UFO 안으로 끌려들어간 피랍자들은 여러 체험들을 최면요법을 통해 밝힌다. 그 체험은 여러 측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과연 그들이 어떤 체험을 하는지 알아보자. UFO 안의 극도의 추위 피랍자들은 그의 피랍 체험에서 흔히 얼음장처럼 차가운 느낌을 받는다. 임상의인 Aphrodite Clamer 박사는 UFO 피랍자와 다른 환자들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으로 최면 요법중에 느끼는 추위를 들고 있다. 캐시 데이비스는 최면 상태에서 피랍 직전 극도의 추위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p. 241) 마찬가지로 존 맥 교수가 조사한 에바도 피랍될 때 온 몸에 따끔따끔한 감각을 느끼며 동시에 방 안이 매우 춥다고 호소했다.[44][45] 피랍체험의 영향[편집] 피랍자 몸에 새겨진 홍적반 대부분의 피랍자들 몸에는 이상한 마크가 존재한다. 피랍자들의 마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나타낸다. 첫째, 그 흔적은 매우 깊지만 결코 피가 흐르지는 않는다. 둘째, 피랍자들은 그 흔적으로 인한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셋째, 이들이 잠옷이나 블루진, 또는 셔츠를 입고 있었어도 옷에는 아무런 엉김이 없이 몸에만 상처가 난다. 이 사실은 피랍자들의 신체 검사시에 그들이 옷을 벗고 있었다는 기억을 지지하는 증거로 보인다. 형상으로 볼 때, 몸에 나타난 마크는 크게 2종류로 분류된다. 그 첫 번째는 3~10 센티 길이의 길다란 상처이고 다른 한 종류는 4~20 밀리의 지름에 8밀리 깊이의 둥글고 움푹 팬 자국이다. 이런 흔적들은 피랍자들의 잃어버린 시간 체험 후에 나타나며, 일반적인 상처와는 그 특성이 매우 다르다.[46] 피랍 체험의 과학적 조사와 증거들[편집] 임상 전문의의 소견 영국의 임상 심리학자인 아프로디테 클레마(Aphtodite Clamar)는 20명의 피랍자들에게 최면요법을 실시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47] 나는 그 체험이 사실인지 아닌지 단정할 수 없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뭔가 이상하고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들에게 뭔가가 발생했다. 우리들 중 누가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클래마와 홉킨스의 공통점은 피랍자를 대상으로 여러 실험을 한 것이다. 하지만 둘은 외계인의 여부에 대한 의견이 달랐다. 클래마는 홉킨스와 달리 피랍자들의 UFO 피랍 체험에 진짜 외계인이 관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내린 결론은 단지, 피랍자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세가 알려져 있는 어떤 유형의 정신적 증세와도 구별된다는 것이다. 클래마는 또한 자신이 검사한 피랍자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철저한 검사를 실시했다. 기하학적인 도형을 묘사하는 벤더 시각운동 게슈탈트 테스트(Bender Gestalt Test), 웩슬러 성인용 지능 테스트(Wechsler Adult Intelligence scale), 잉크자국을 해석시키는 로샤하(Rorschach) 테스트, 그리고 개인의 인격을 그려내 거짓말 경향을 조사하는 미네소타 다면 인격 테스트(Minnesota Multiphasic Tests)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 실험들은 홉킨스 또한 실시하였다. 뉴욕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슬레이터(Elizabeth Slater)는 이 실험들을 주도했었다. 그는 조현병 환자로 판명된 2명을 제외하고는 피험그룹 전원에게 특별한 정신기능 장애가 없었다고 보고했다.[48] 피랍 체험의 객관적 증거 피랍자의 몸와 옷에 종종 생기는 핏자국과 이상한 홍적반 마크들, 피랍자들의 집뜰에서 발견되는 둥근 원 모양의 UFO 자국들, 피랍자 콧속에서 발견됐다는 작은 유기 합성물이나 금속물들 등의 주장은 많은 피랍자들과 연구자들이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당연하게도 피랍사건의 객관적 증거를 확보하기에는 부족하다. 피랍자건의 객관적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제콥스 교수는 피랍자들을 대상으로 VCR을 이용한 실험을 했다. 그의 실험 목적은 피랍자의 피랍 체험을 비디오 카메라에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VCR이 피랍자의 침실에 설치되자 더 이상의 피랍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다른 지방에 볼 일이 있어서 며칠간 여행을 할 때 거기에서 피랍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곤 했다. 스스로 카메라를 끄는 등의 행동을 했던 사람은 나중에 최면 상태에서 납치자가 비디오 촬영 영역 밖에서 그에게 비디오를 꺼버리도록 텔레파시로 지령했다고 털어놓았다.[49] 이처럼 영상에 피랍 현장을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기억을 잃는다는 공통적인 이유 때문이므로, 객관적인 증거는 기억을 잃지 않은 목격자가 있어야 한다. 1979년 11월 26일 새벽에 객관적 증거가 될 뻔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날 새벽 프랑스 퐁트와즈(Pontoise)에서 20대 청넌 프랑크 퐁텐은 그의 친구 둘과 차에 있었다. 그때 그의 친구 둘은 퐁텐이 탄 차가 하얀 수증기에 둘러싸인 것을 보았다. 이 안개 뭉치는 원통형 UFO로 들어갔으며, 차 안에는 더 이상 프랑크가 없었다. 경찰은 그가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잠적한 것으로 단정하고 인근을 철저히 수색했으나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돌아온 것은 1주일 후였다. 피랍의 가장 완벽한 조건으로 객관적 증거가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이 사건은 그 후 퐁텐 스스로가 꾸민 짓이라고 밝히는 바람에 GEPAN에 의해 모두 거짓으로 결론지어졌다. 피랍 체험의 주관적인 증거들 피랍 체험의 주관적인 증거들은 매우 많이 있다. UFO 피랍의 대부분은 육체와 분리된 정신의 피랍이다. 하지만 주관적인 증거들은 UFO에 대한 몇 가지 설 들에 대한 언급 뿐이다. UFO 신드롬[편집] 정의[편집] 어떤 명백한 원인이 주어지지 않은 채 여러 증상의 복합체로서 개인에게 정신적∘신체적 위해를 가하거나 사회적 현상을 야기시키는 것에 대해 흔히 ‘신드롬’ 또는 ‘증후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단어를 이용하여 항공기 조종사, 의사, 과학∘기술자, 사업가 등 사회적으로 안정된 신분의 정상적인 사람들이 하늘에서 이상한 물체를 본다고 믿는 것을 UFO 신드롬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 비행물체가 기존의 비행체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아주 특이한 비행 유형을 보인다고 주장한다.[50] UFO 신드롬의 종교적 성향[편집] 몇몇 지식인들은 UFO 신드롬이 전하는 본질적인 메시지가 ‘새로운 믿음의 형성’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UFO 신드롬만큼 매우 짧은 시기에 이토록 광범위한 믿음을 형성했던 예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합리주의와 실용주의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과학문명국 미국에서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과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 존재를 믿었던 일은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51] 혹자는 종교적 믿음과 외계인에 대한 믿음이 질적인 측면에서 전적으로 다르다고 지적할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고도의 문명을 지닌 외계인에 의해 인류가 창조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믿거나 그들이 지구의 파멸에서 인간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종교적 믿음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52] 오스트리아 아델레이드 대학 물리학과의 폴 데이비스 교수는 UFO 현상이 오랜 기원을 갖는 인류의 원시적 믿음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고등종교가 과학문명에 밀려 세력을 잃고 있는 시점에서 좀더 세련된 모습으로 등장하는 복합적 유형의 원시종교라는 것이다.[53] 한편 카를 융은 UFO 신드롬에서 고등종교의 모티브를 발견했다. 그는 UFO 신드롬을 구성하는 인류의심리영역을의식과무의식부분으로구분하고, 전자로부터 외계인과 우주선에 대한 루머나 추측이 발생하고 후자로부터 신화가 싹튼다고 말했다. 즉, 융의 입장에서 보면, 외계인 소동은 우주과학시대가 만들어낸 의식의 산물일 따름이고, 집단적으로 하늘에서 이상한 둥근 물체를 보게 되는 것은 오래전부터 전환기 때마다 무의식에 의해 발생해온 전통적인 신화 구조인 것이다.[54] 하버드 대학의 천체물리학 교수였으며 미 공군 프로젝트 블루북 자문을 맡았던 도널드 멘젤 교수는 신화란 세월이 흐르면서 대개 그 기원이 잊혀지는 이야기로, 어떤 믿음이나 관측 또는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인데, 특히 후자의 경우가 주종을 이룬다고 말했다.[55] 한편 코넬 대학 천문학과 칼 세이건 교수는 UFO 현상이 과학적 측면보다는 소원 성취의 종교적 필요성 측면에서 흥미로운 양상을 띤다고 말하고 있다. 즉, 비행접시는 과학이 몰아낸 신의 자리를 메우는 역할을 어느 정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56] UFO 신드롬에 관련된 네 석학의 공통적인 견해는 그것의 기원이 구약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종교적 신화라는 것이다. UFO 신드롬은 지난 역사의 주요한 숭배교 운동과 동일한 모티브와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UFO 신드롬이 종교 발생에 대한 가장 확실한 모델이 됨을 의미한다.[57] 과학적 해석[편집] UFO가 나타났을 때 일어나는 물리학적인 변화는 수많은 국가들의 군사시설에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관찰 결과는 아래와 같다.[58] UFO가 착륙한 흔적에서, 지면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는데, 탈수되고 타고 남은 바닥의 흔적, 타고 부러진 나뭇잎, 자기장의 이상 변화, 방사능 수치의 증가, 금속 자국 등이 존재했다. 사람과 동물들에게 생리학적인 변화를 일으켰는데, 일시적인 마비 증세, 피부 화상 또는 피부 발진, 각막 손상, Cash-Landrum 사건의 경우 방사능 피폭 증상까지도 나타났다. 소와 같은 동물의 신체 일부가 깨끗하게 절단되어 사라지는 현상 또한 UFO에 의해 일어난 현상으로 해석되고 있다. 식물에게의 영향으로는 성장 촉진 또는 억제, 씨앗의 유전적인 변화, 변형된 줄기 마디 등이 있고, 이들이 모여서 미스테리 서클과 같은 현상을 초래한다. 강력한 전자기적인 간섭 현상으로 인해 항공기간의 연락을 두절시키고, 제트기의 미사일과 같은 공격무기를 고장시키기도 한다. 비정상적인 방사능 수치가 관측되기도 한다. UFO를 체험했다는 사람들의 증언들에 대해, 그것들이 외계의 지적인 생명체의 행동이 아닌 자연스러운 과학적 현상이라고 설명하려는 가설들 또한 존재한다. 대표적인 세 가지 가설으로는 구전 현상 가설, 지구에너지 가설, 전기 과민 알레르기 가설 등이 있다. 구전 현상 가설[편집] [59] 첫째로, 구전 현상 가설의 경우 UFO의 불규칙적인 행동과 색상, 전자기적인 효과를 통해 그것은 플라스마 구체 또는 구전(Ball lightning)이라고 주장했다.[60] 이들은 5~10만 볼트의 매우 강한 전기장을 형성하여 방전되면서 플라스마를 형성하고 소멸하면서 UFO로 인식되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구전 현상을 UFO로 오인되는 사례도 있지만, 주먹만한 구전체의 크기와 맑은 날의 UFO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61] 지구 에너지 가설[편집] 마이클 퍼싱거가 주장한 지구 에너지 가설에 의하면 지구상에 산재한 크고 작은 지각 균열대에서 전자기파의 형태로 에너지가 방출되고, 이들이 대기중에서 플라스마 상태를 형성하여 전자기파를 발산한다는 것이다.[62] 이 설명에 따르면, 전자기장으로 인한 피부가 따끔따끔하는 등의 생리적 변화와 환상과 같은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전자기장이 교란되면서 이온화된 플라스마 소용돌이를 형성하게 되고, 이로써 풀밭이나 밀밭에 형성된 UFO 착륙 자국을 설명한다.[63]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전자기 효과에 의한 가설들은 밝게 빛나는 UFO현상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 맑은 날 낮에 등장하는 경우는 설명하지 못한다. 전기 과민 알레르기 가설[편집] 마지막으로, 전기 과민 알레르기에 의한 설명이 경우, 어린 시절 강력한 전기 쇼크에 노출되었던 사람들은 약한 전기적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환각 또한 일으킬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전기 과민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들이 TV나 라디오, 자동차 속의 무선 장비 등에 노출되면 어디에서든 환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UFO 현상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가설들은 오늘날의 UFO 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데 무리가 있다. 이러한 가설들로는 기본적으로 자동차의 시동을 멈추게 하고 다시 작동시키며, 엽록소를 증발시키거나 하는 기이한 현상은 물론, 체험자들의 일치하는 증언들을 설명할 수 없다. [64] 그 이외에도, UFO 현상에 대해 외계인이 아닌 나치스의 비밀 무기라는 주장이나, 외계가 아닌 해저의 지적 생명체로부터 나왔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회의론[편집] 하지만, UFO 현상에 대해 과학적이지 않다는 회의론 또한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Committee for Skeptical Inquiry(CSI) 라는 그룹은 수 년 간 UFO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실제로 일부 미스테리 서클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65] 천문학과 천체 물리학 연구 교수인 Thomas Djamaluddin는 UFO현상이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에 대한 학문이 과학으로 인정될 수는 없다며 INASA에서는 이를 사이비 과학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말했다.[66][67] UFO의 특성에 대한 가설[편집] UFO의 비물질적인 특성들은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경우들이 있다. 이러한 특성들에 대한 현대과학으로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음속 돌파를 하는 데도 일어나지 않는 소닉 붐과 소음: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의 플라즈마 물리 연구실 책임자인 장 피에르 프티 교수에 의하면, 강력하고 정교한 전자기파의 제어를 통해 라플라스의 힘을 끌어내어 충격파를 없애는 기술이 가능하다고 한다.[68] 추진체 없이 가속하는 운동 방식과 순간 가속, 직각 회전: 이러한 순간 가속과 직각회전이 가능할 수 있는 경우는 물리학 법칙에 의하면 가속도가 무한대일 경우에만 해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지구상의 기술로는 구현이 불가능하다. [69] 이밖에도 UFO의 불이 켜지고 꺼지듯 일어나는 소멸, 등장현상과 합체, 분리 현상 등과 같이 아인슈타인의 4차원 시공간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일어나기도 한다.[70] UFO의 기원에 대한 가설[편집] 외계 가설[편집] 사전적으로, UFO는 미확인된 비행 물체를 통칭하는 단어이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UFO가 외계인의 우주선과 거의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ETV (ExtraTerrestrial Vehicle)이라는 단어가 UFO와는 별개의 외계인의 우주선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외계 가설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물체가 기술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과 동반되어 나타난다고 말한다. 또한, 지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행체의 비행 기술과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는 기존의 과학을 뛰어넘는 알 수 없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71][72][73][74] 현대 과학에 따르면,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수많은 별들 중 하나에서의 행성에 불과하다. 이러한, 가정을 기반으로 생명체가 지구에만 존재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이러한 지능생명체가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물리학적인 분석을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는 드레이크 방정식이 있다. 드레이크 방정식에 따른 우리 은하 내의 문명 수는 약 백만 개에 육박하고, 문명 간 평균 거리는 150광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에 따라 일부 과학자들은 지구가 충분히 외계 문명과 접촉이 가능하다고 해석한다.[75] 초심리 가설[편집] 초심리학에서 연구하는 영역은 초감각 지각과 염력으로 나눌 수 있는데, 초감각 지각의 경우 예지, 투시, 정신감응 등과 같은 현상을 포함한다. 듀크 대학의 라인 교수는 무작위적인 경우의 수학적 확률이 인간의 정신력에 의해 유의할만한 빗나감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또한, 이전에도 초감각적인 현상, 예견이나 투시 능력을 가진 사람, 폴터가이스트 현상 등 물리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들이 존재했다. 초감각 가설은 이러한 현상들을 통해 초감각은 물리학적인 법칙을 거스를 수 있고, 이를 통해 UFO의 비물질적인 현상을 설명한다는 가설이다.[76] 신학 가설[편집] 신학 가설의 경우 기독교 신학자들 간에 공통적인 UFO에 대한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UFO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천사인지, 종말을 예고하는 사탄인지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그림이나 성경 속에서도 UFO와 유사한 물체가 등장하게 되는데, 현재로써는 천사론과 사탄론의 대립이 이루어지고 있다.[77] 관련 기록 및 보도[편집] 2008년 10월 13일 대한민국의 언론들은 2008년 10월 12일 광화문 상공에 나타난 미확인 비행 물체에 관하여 보도하였다.[78] 2010년 10월 7일 중국 상공에 UFO(미확인비행물체)가 지나가는 모습이 포착돼 공항이 일시 폐쇄되는 일이 벌어졌다[79] 2011년 8월 17일 대전 MBC는 “대전 도심의 한 주택가에서 빛을 내는 물체 약 20여 개가 대열을 갖춰 무리지어 이동했다”고 전했다[80] 2012년 1월 10일 아르헨티나의 코리엔테스 주에 있는 축구경기장에서 UFO 발견 역사상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선명하게 UFO가 발견되었다. 이는 아르헨티나 하부리그 프로축구클럽인 차코 포레버팀의 감독인 아리엘 메디나와 코치인 파비오 발라레알이 최초로 발견하여 차코 포레버 구단의 홍보팀이 이 UFO의 촬영에 성공했다.[81] 트라이버튼의 온라인 설문조사[82]에 따르면, 응답자의 42.7%가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변했다.
920    [쉼터] - 참깨, 들깨, 땅콩 ㅡ 혈관청소부 "삼총사" 댓글:  조회:4136  추천:0  2017-01-06
농촌진흥청은 동맥경화 예방에 좋은 작물로 참깨, 들깨, 땅콩을 추천했다. 기온이 낮은 겨울철에는 혈관이 수축하며 심혈관 질환에 대한 위험이 커진다. 하지만 예로부터 ‘좋은 음식은 약과 같다약식동원(藥食同源)’는 말처럼 평소에 먹는 음식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질병을 예방하고 다스릴 수 있다. 참깨, 들깨, 땅콩에 들어있는 기능성 성분인 세사미놀(참깨), 오메가-3(들깨), 라스베라트롤(땅콩)은 우리 몸 속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주며 혈관을 청소해 주는 효과가 있다.       참깨 한방에서는 참깨를 흑지마(黑脂麻)라는 약재로 쓴다. 참깨는 피부 점막의 회복을 돕고, 혈액 내 콜레스테롤 수치를 줄일 뿐만 아니라 장운동을 활발하게 한다. 세사미놀과 세사민은 참깨에 들어 있는 대표적인 기능성 물질이다. 이 성분들은 우리 몸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유해활성산소를 중화하는 작용을 한다. 농진청 국립식량과학원은 흰가루병과 잎마름병에 강한 ‘강안’, ‘건백’ 등 새 품종을 개발해 농가에 보급하고 있다.       들깨 들깨는 오메가-3를 포함하고 있어 건강식품을 생산하기 위한 작물로서 수요가 점점 늘고 있다. 들깨에는 식이섬유가 풍부해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주고 노폐물 배출을 도와준다. 들깨 잎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으며, 종자에서 짜낸 기름은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 오메가-3는 몸에서 만들지 못해 반드시 음식으로 섭취해야 하는 필수지방산이다. 혈중 중성지질 개선과 혈액순환에 도움을 주며, 치매와 심혈관질환 예방, 학습능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국립식량과학원은 착유량이 많고, 오메가-3 함유율이 높은 ‘들샘’, ‘다유’ 등의 새 품종을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땅콩 땅콩의 지방은 주로 불포화지방산이며, 이는 필수 지방산이다. 필수 지방산은 고혈압의 원인이 되는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면서 씻어내는 역할을 한다. 레스베라트롤은 식물에서 발견되는 항산화물질인 폴리페놀계열에 속하는 물질로 항암·항산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심장 동맥 손상을 줄여주고 심장 발작과 뇌졸중을 일으키는 위험한 현상인 혈액응고를 방지하는데 효과적이다. 국립식량과학원은 병해충과 재해저항성이 강한 ‘신팔광’, ‘풍안’ 등의 신품종을 개발해 농가에 보급하고 있다. /농촌여성신문  
919    {자료} - 기자, 죄범,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는가... 댓글:  조회:4272  추천:0  2017-01-03
1. 나는 어제 저녁 xxxx가 언론계에서 돌이킬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고 본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 방송사가 보도 윤리를 어겼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보도 윤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으로 보여서 사용하지 못할 뿐, 이제까지 규범으로 여겨져온 중요한 원칙 하나를 가볍게 던져 버렸다는 게 내 생각이다. 2. zvr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xxx기자는 현지 경찰에 신고를 하고 체포되는 장면을 촬영해서 보도한 것은 기자는 사건을 보도만 할 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명백하게 어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기자이기에 앞서 하나의 시민이고, 그의 신고는 양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개인의 결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시민으로서 신고하기로 했다면 보도를 포기했어야 했다. 그리고 만약 보도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관찰자로 남았어야 했다. 그게 보도윤리다. 그런 게 2017년 언론계에 남아있다면 말이다. 3. CNN의 정치부 에디터인 레이첼 스몰킨은 2006년에 American Journalism Review에 기고한 글에서, 언론을 공부하는 대학생들과 나누다가 깜짝 놀랐다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말리아에서 구호활동을 취재하던 기자에게 구호요원이 물을 나눠주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빨리 나눠주지 못하면 폭동이 날 것 같다는 거다. 기자는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가?" 활발한 토론을 기대했던 스몰킨은 그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도와줘야 한다는 대답을 하는 데 충격을 받았고, 기자는 역사의 관찰자이지 참여자가 아니라고 가르쳐줘야 하는 상황에 의아해했다. "요즘 학생들"이 '보도를 하는 기자는 자신이 취재하는 상황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일견 당연해 보이는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이티에서 지진피해를 보도하던 앤더슨 쿠퍼가 생방송 도중에 부상당한 아이를 구조하며 영웅이 되는 시대에 사는 기자들에게 냉정한 관찰자의 역할을 요구하는 건 고루해 보인다. 기자들이 이제는 스마트폰 카메라와 트위터로 무장한 일반시민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손발을 다 묶는 원칙을 지켜야 할까? 4. 하지만, 그것이 정말 불필요한 원칙일까? 몇 해 전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자연사진작가의 수상작에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새끼새들이 가지에 줄줄이 매달린 장면은 자연에서 일어나기 힘든 장면이고, 그것을 우연히 목격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는 주장이었다. (어두운 곳에 둥지를 짓는 새들을 찍기 위해 가지를 쳐냈고, 심지어 본드로 다리를 붙였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야생의 자연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먹이사슬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개입할 수 없는 원칙이 있다. 가령, 어린 새끼들 앞에서 치타에게 물려죽을 위기에 처한 어미 사슴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알려서는 안된다는 원칙 말이다. 사슴 한 마리를 살려준다고 아프리카의 생태계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선례는 다른 개입을 불러온다. 카메라맨들이 너도나도 불쌍한 사슴 살리기에 나서면서 유튜브에서 스타가 되기 시작하면 아프리카의 생태계는 영향을 받게 될 수 밖에 없다. 5. zvr는 체포되었어야 한다, 그것도 진작에...  하지만 그것은 기자의 역할이 아니다. 양심있는, 행동하는 시민으로서의 역할과 기자의 역할은 다르다. 특히 자신의 신고로 자신이 속한 언론사의 시청률이 올라간다면 그 때부터는 이해의 충돌(conflict of interest)이라는 심각한 문제 마저 낳는다. 신고하고 체포되는 장면까지 방송한 JTBC 보도는 재난 현장에 있다가 갑자기 도와줘야 하는 위치에 처한 기자의 윤리를 논하는 수준이 아니라 훨씬 더 심각한 명백한 이해의 충돌이다. 애널리스트라는 사람이 방송에 A사의 경영호전을 이유로 구매를 독려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잘못이 아니지만, 그가 A사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면 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비록 A사의 경영이 실제로 호전되어도 말이다. 6. "그럼 경영이 호전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말하지 말라는 말이냐"고 항변하는 애널리스트는 없다. 그들은 그 정도 윤리를 최소한 알고는 있다. 방송을 하는 애널리스트는 자신이 다루는 분야의 주식을 보유하면 안된다. 같은 이유로 xxxx기자는 "그럼 눈 앞의 범인을 신고하지 말라는 말이냐"고 항변해서는 안된다. 보도를 하기로 했다면 신고하지 말았어야 하고, 신고하기로 했으면 보도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게 프로페셔널리즘을 지키는 댓가다. 미국대학에서 교수나 조교는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을 듣는 학생과 데이트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 데이트를 하고 싶으면 학생은 그 수업을 마치거나 포기해야 한다. 그 규칙이 없을 때 일어날 엄청난 결과를 생각하면 "어떻게 사랑을 막을 수 있느냐"고 항변할 사람은 없다. 7. 나는 xxxx가 이번 p,c문제를 다루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권력 앞에 움츠러 들었던 언론사, 특히 방송사의 대열에서 이탈해 진정한 저널리스트로서의 용기와 직업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 저녁에 xxxx가 했던 보도를 상업적인 결정이라고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보도가 앞으로 hg언론에 중요한 선례를 남긴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이제까지 아무도 넘어서지 않았던 선을 넘었고, 열지 않았던 문을 열었다. 비록 xxxx는 선한 의도로 문을 열었겠지만, 문이 한 번 열리면 그리로 쓰레기가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918    [록색상식] - 잘못된 머리 감기 습관 10 댓글:  조회:4554  추천:0  2017-01-03
  겨울이 되면 실내에 난방을 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건조해지고 두피가 간지러운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아울러 매일 아침에 하는 머리손질 역시 머릿결을 상하게 할 수 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머리 감기로 머릿결을 손상시키고 있다. 미국 온라인매체 위티피드가 잘못된 머리 감기 습관 10가지를 소개했다. 1. 수건으로 털면서 머리 말리기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듯이 말리는 행동은 머릿결에 좋지 않다. 마찰을 일으켜 큐티클층을 파괴해 모발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기를 흡수시킨다는 느낌으로 젖은 머리를 감싸 꾹꾹 누르거나 약한 드라이 열이나 자연 바람으로 말려주는 것이 좋다. 면 수건보단 극세사 타월을 사용하면 머리카락과 마찰을 줄일 수 있다. 2. 샴푸 많이 사용하기 좋은 샴푸 혹은 컨디셔너라고 해도 많이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 동전 크기의 양으로도 충분히 머리를 깨끗이 감을 수 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샴푸 사용은 씻어내기 어렵게 두피 건강을 해칠 수 있다. 3. 세게 문질러 감기 두피를 박박 긁으며 머리를 감는 사람이 있다. 이는 머리카락을 얇아지게 하고 마찰로 인해 머리카락이 상하게 된다. 심할 경우 탈모까지 유발할 수 있데, 부드럽게 마사지하듯 머리를 감는 것이 좋다. 4. 제대로 씻지 않기 급하게, 혹은 대충대충 머리를 감아 머리카락과 두피가 제대로 씻기지 않으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샴푸를 사용할 땐 깨끗한 물로 충분히 씻어내고 린스는 머리끝에만 사용해야 한다. 5. 샴푸 사용 수많은 광고에 등장하는 샴푸는 머릿결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샴푸는 화학물질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당신의 두피를 건조하게 하고 머리카락을 손상시킨다. 최근엔 머리카락 건강을 위해 샴푸를 사용하지 않는 '노푸(no poo)'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처음엔 두피가 잘 닦이지 않는 느낌이 들지만 결과적으로 당신의 두피와 머리카락을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깨끗하게 씻기지 않는 기분이 든다면 천연샴푸를 사용할 것을 권한다. 6. 같은 제품 고집하기 머리카락과 두피의 컨디션도 계절이나 몸 상태에 따라 변한다. 현재 상태에 잘 맞는 천연제품으로 대체하는 것이 좋다. 7. 뜨거운 물로 머리 감기 지친 하루 끝에 따뜻한 물로 샤워하면서 피로를 푸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뜨거운 물은 머리카락 건강에 좋지 않다. 더 심한 손상을 유발하기 때문인데 미지근한 물로 감는 것이 좋다. 8. 컨디셔너 바로 씻어내기 바쁜 아침 머리를 감을 때 자주 하는 실수다. 두피를 씻어내는 샴푸 후 사용하는 컨디셔너는 바로 씻어내기보다는 1~2분 정도 마사지를 해주는 것이 좋다. 머릿결을 위해 5분만 일찍 일어나자. 9. 젖은 상태에서 스타일 주기 머리카락이 젖은 상태에서 묶거나 고데기를 하는 것은 머리카락 손상을 초래한다. 드라이 열을 이용해 두피부터 잘 말려주자. 10. 찬물로 마무리하지 않기 탱탱한 피부를 위해 샤워 마지막에 찬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머리카락도 마찬가지다. 미지근한 물로 머리를 감은 후 찬물을 이용해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씻어내면 머릿결이 건강해진다. / 세계일보 박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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