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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흔히 알려진 사실
고려 말의 문신으로,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붓두껑 속에 목화씨를 몇 알을 숨겨 가지고 왔다는 일화로 매우 유명하다. 원나라로부터 자주 독립을 꾀하는 공민왕을 옹호하다가 원나라 황제의 미움을 사서 귀양을 갔고, 그곳에서 목화를 발견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건 밀수를 했고, 온갖 고초 속에서 밀수에 성공하여 백성을 등따시고 배부르게 사는데 만든 아주 훌륭한 인물이라는 것이 흔히 알려진 이야기. 그러나...
3 '붓두껑 밀수'가 허구라는 증거
우선 이 이야기는 기초적으로 원나라가 목화씨를 금수물품으로 지정했다는 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실제로 원나라가 금수품목으로 지정한 품목은 무기나 화약 등 국방에 있어 매우 중대하거나 희소성이 높은 품목일 뿐, 남쪽에 널리고 널린게 목화인 만큼 희소성 없는 품목을 금수품목으로 지정했을까가 의문이라는 것. 다만 면화가 화기나 화약의 심지를 만드는데 쓰이기 때문에 군수품으로 간주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의 전국 시대에 조총이 빠른 속도로 보급된 것도 조선을 통해 들어온 면화가 심지를 만드는데 요긴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설사 금지품목이었다 해도 당시 원나라의 상황을 보면 전혀 금수가 지켜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고, 문익점은 다년생의 강남산이 아니라 일년생의 강북(화북)산의 목화를 가져왔다는게 주 내용.
게다가 백제 위덕왕 시기 건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충남 부여군 능산리 절 유적에서 목화에서 뽑은 면사(綿絲)로 직물(면직물)이 발견되어 문익점이 고려에 처음으로 목화를 들여옴으로서 면직물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통념은 완전히 허구임이 밝혀졌다. 다만, 수입산 면사를 이용했을 수도 있으므로, 면직물 생산이 이뤄졌다고 해서 목화 재배가 이뤄졌다고 단정할 수 없는데다가, 문익점이 들여온 것은 생산성이 높도록 개량된 종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문익점 이전에는 재배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등 재래종의 가치가 매우 낮았던 것으로 보이기에 그 공로가 깎인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목화 보급 100년만에 조선 전체로 펴져나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 시대 서민은 일반적으로 흰 모시옷을 즐겨 입었음을 알 수 있는데, 겨울에는 원시 시대부터 입어 온 갖옷이나 (상류층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활발히 생산된 계(罽) 등의 모직물로 만든 옷을 갖춰 입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무명(면포)는 베나 모시에 비해 더 부드럽고 따스해서 추위를 막는 데 효과적이었으며 특히 목화 솜으로 솜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개량종의 도입이 당시 한반도인의 의생활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는 붓두껑 목화씨 얘기가 일언반구도 없다. 실록에는 다만 이렇게 적혔을 뿐이다.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緜)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4 기록으로 남아있는 진실
공민왕 연간에 문익점과 그 일행들이 사신으로 원에 갔고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반발한 원 조정에서 충선왕의 손자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임명해서 군사를 주어 고려로 보냈다. 이에 원 조정에 있던 사신들은 덕흥군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와 공민왕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로 나뉘었고 이중 덕흥군파 사신들은 덕흥군이 고려 조정을 석권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익점이 바로 덕흥군파였다. 고려 공민왕의 입장에서는 역적.
덕흥군의 군대는 압록강 근교에서 최영과 이성계에게 패배했고, 결국 원나라는 이들에 대한 송환 결정을 내린다. 어쩔 수 없이 고려로 돌아온후 문익점은 파직되어서 시골로 내려가게 된다.
여기까지 정치적 행적으로 보아 나쁜 쪽으로 과장해서 말하자면 원나라부터 자주 독립을 꾀한 공민왕에게 반역한 종묘사직의 역적놈이고, 우호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줄을 잘못 서서 출세길 막힌 문인이다.
5 실패한 정치가, 성공한 사업가
파직 후 고향으로 돌아와 목화 재배를 시작한다. 문익점이 목화를 밀수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분명 목화의 개량과 보급에 있어 일대 혁신을 가져와 민간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한 공로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우왕 1년에 조정으로 돌아와서 벼슬자리 올랐다. 어디까지나 목화 포급 공로 때문이었다. 이후 다시 문익점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온건파 사대부와 함께하느냐 급진파 사대부와 함께 하느냐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문익점은 온건파와 입장을 같이했다. 매번 줄을 잘못 선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문익점은 이후 조선에서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조선 조정에서는 후에 후손에게 벼슬을 주고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6 문익점 통념의 형성
그리고 이후 조선 초기의 권신 권근을 비롯한 수많은 인사들이 시기를 이어가면서 살에 살을 붙여서 문익점 오류를 만들어 나갔다. 몇 줄 없는 역사서의 기록으로 소설을 써 버릇 했던 위인적 작가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문이나 가문의 문제 등이 얽혀 있었기 때문에 문익점 스토린 사실상 조선시대에 이미 완성된 것. 그리고 완성본은 이렇게 되었다.
고려에서 사신으로 파견된 문익점은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는 문제를 접하고(여기까지는 사실) 공민왕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다고 주장하여 3년간 강남으로 유배를 간다. 그리고 유배 기간 동안 농민들이 무명옷을 입는 것을 보고 이를 가져가려고 하지만 목화는 금수품목이었기 때문에 붓두껍에 숨겨서 가지고 왔다. 이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낙향하였다가 목화씨를 심은 것이 문익점의 밭에서는 전멸하고 장인 정천익의 밭에서 겨우 겨우 몇 포기 살려내었다. 하지만 원(나라)면에서 씨앗을 제거하여 실을 뽑는 기술이 없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중국 승려가 목화를 보고 반가워하는 것을 보고, 문익점과 정천익이 국가 기밀이라고 알려줄 수 없다는 승려를 어르고 달래서 결국 씨아와 물레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이 후 이걸 문익점의 후손들이 개량했는데, 특히 목화씨에서 실을 뽑아내는 방적기를 만든 사람이 문익점의 아들 문래라서 물레라고 한하고, 실로 천을 짜는 방직기를 개량한 것이 문래의 동생 문영이라서 솜으로 짠 옷감을 무명이라고 한다.
일부분은 최무선의 화약 개발 일화를 표절참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최무선의 경우 화약은 분명히 금수품이었다. 이래서 스파이보다 공돌이는 안습한 것이다 문익점이 버려둔 목화를 정천익이 길렀다며 진짜 위인은 정천익이라고 정씨 후손들이 클레임을 거는 경우도 많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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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엔하위키긴 하지만.
@@=팩트=
1 목화씨는 원나라의 금수품목이 아님.
2 고려시대에는 목화씨를 가져왔다고는 하지만, 숨겨왔다는 기록 없음.
3 조선실록엔 주머니에 넣어왔다고.
4 800-1000년 앞서 백제,신라에서 면직물 발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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