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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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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내 딸 천지수는요 댓글:  조회:1466  추천:0  2014-10-03
내 딸 천지수는요             “엄마, 나 대학 합격했어!” “뭐? 정말? 축하한다. 그동안 고생했어!” 제 딸 천지수가 요즘 기고만장해져 있습니다.   수능시험을 보고 수시에 떨어졌을 때는 코가 석자나 빠져 있더니 정시모집에서 합격하고 자신이 원하는 학과를 골라서 등록을 하니까 기가 좀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좋은 대학은 아니구요, 서울에 있는 대학입니다. 하지만 평상시 공부했던 것에 비하면 감지덕지한 대학입니다.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00여대 아동심리학과. 저는 다른 대학 일본어과를 추천했지만 제 딸은 저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습니다.     사실, 저는 지수가 대학에 갈 거라는 생각을 지레 접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볼 때만 책을 들여다보았고, 그것도 일주일 벼락치기 공부였으니 성적도 항상 중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수학은 20~30점대(저도 수학은 잼뱅이였음, 이런 걸 닮다니^^;;) 외우는 과목은 그래도 상위권, 평균하면 항상 중간이었습니다.   저는 지수가 공부하는 데 별로 보탬이 되질 못했습니다. 스스로 학원을 선택했고, 학원이 맘에 안 들어 인터넷 강의 듣겠다고 하면 강의료 내주는 정도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 끝나면 데리러 오라고 했을 때도 몇 번 데리러 다니다가 체력이 따라주기 않아 용돈 조금 올려주고 버스를 타고 오라고 했습니다. 새벽에 나가려면 일찍 자야 하는데 데리러 갔다 오면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혼자 공부하고, 혼자 대학 검색해서 등록하고, 거의 모든 걸 혼자 한 셈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 하늘의 보살핌’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수가 대학에 합격하고 며칠 후, 9년째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있던 전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지수를 잘 키워줘서 고맙다. 지수 등록금은 내가 대주겠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전화를 할 거라는 생각도 못했을뿐더러 ‘고맙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듣다니요!!! 더더군다나 등록금까지….   제가 키웠다기보다는 스스로 컸고, 그다지 잘 키웠다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어쨌든 등록금 대 준다는 말에 넘 감사했습니다. 제가 돈에는 좀 약합니다.^^;;   하지만 등록금을 꼭 받아야겠다는 마음은 접었습니다. 주면 감사하고, 안 줘도 그만이죠. 그 사람 형편이 그다지 좋은 것 같지도 않고, 그 사람 말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있던 중 얼마 후에 00여대 홈페이지를 열어 본 지수가 탄성을 지릅니다. “엄마! 나 장학금 받아!” “정말? 넘 잘됐다. 그동안 애쓴 보람이 있구나!”     남편과 이혼을 할 때 지수는 10살이었습니다. 저는 위자료도 양육비도 필요 없고 그저 이혼만 하기를 원했고, 어린 지수는 아빠랑 같이 살면 안 되냐고 울었습니다. 이혼을 하자 “아빠는 같이 살고 싶어 하는데, 엄마가 이혼을 한 거야.”라며 저를 원망하며 성격이 점점 더 송곳처럼 변해갔습니다. 지수를 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수가 미울 때도 너무 많았습니다. 지수의 삐딱한 행동에 울화통이 터질 때도 많았지요. 하지만 지금은요, 지수를 통해 저를 바라봅니다. 제 딸 천지수가 제 삶의 잣대입니다.  제가 부드러워지는 만큼 지수도 부드러워지고, 지수가 밝아지는 만큼 저도 밝아지고 철이 드는 만큼 저도 철이 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명상을 알지 못했더라면 아마 지금도 울화통을 터트리고 있을 겁니다.^^* 별 볼일 없는 부모 밑에서 큰 탈 없이 잘 자라준 지수. 오늘따라 불쑥 커 보이는 나의 딸. “지수야, 고마워! 사랑해!!!”  
144    아이들이 높을 수 있다 댓글:  조회:1314  추천:0  2014-09-24
아이들이 높을 수 있다  홍신자 씨가 책에 그렇게 썼더군요.  자신의 딸이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자기보다 훨씬 영성이 높은 아이인 것 같다고. 맞습니다.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이 영성이 많이 개발된 상태가 많고,  부모를 통해서 배우기보다는 오히려 부모에게 가르침을 주는 수준의 자녀들이 많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안 한다?  저도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해서 처음에는 걱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명상을 하면서,  사람마다 태어난 목적 자체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강요하지 않게 됐습니다.  사람은 다 다릅니다.  태어난 목적도 다 다르고 해야 되는 일도 다르고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공부가 목적이 아닌 아이들은 공부를 꼭 열심히 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연예계 쪽으로 뜻이 있다면,  타고난 바가 있고 기운이 그쪽으로 계속 쏠리기 때문에 분출을 해야 됩니다.  그걸 막으면 반작용이 되는 겁니다.  부모는 앞장서서 끌고 가거나 반대하기보다,  뒤에서 은근히 살려주는 정도로 하면 어떨까 합니다. 
143    한나절의 사랑 댓글:  조회:1679  추천:0  2014-09-21
한나절의 사랑               설날. 어머니와 삼형제. 가족이 모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그런지 예전처럼 흥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어떤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이 집에 있었다. 어머니만 살고 있는 집이지만 가족이 모이면 그 집은 가족 전체를 감싸고 보살피는 당신의 커다란 손길로 변한다. 갖은 음식은 당신의 몸에서 자라난 것 같고, 집안의 온기는 당신의 품 속 그대로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내 짐을 넣어둔 방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새로운 옷들이 옷걸이에 걸려 있다.  어릴 적 내 옷을 산 기억이 별로 없다. 넉넉하지 않는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아우가 자라기 전까지는 사촌형들과 친형의 옷을 입었고, 아우가 다 자란 후에는 아우가 산 옷도 입었다. 처음엔 옷 투정도 하곤 했지만 이내 어려운 가정 형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터인지 어머닌 내 옷을 챙기신다.   가족하면 가장 먼저 어머니가 떠오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 또한 그렇다.    고1 때,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의 병세는 더욱 나빠졌다. 간경화 때문에 대구의 유명한 병원을 다니곤 했는데 살 수 있다는 3년이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선친은 세상에 대한 도전도 남달랐지만, 세상에 대한 비관도 대단했다. 날로 늘어만 가는 한탄과 화풀이는 고스란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당신에게 우리는 그날그날의 불화가 빨리 잦아들게 하기 위해 당신이 모든 짐을 지시길 강요하곤 했다. 힘들어도 선친에게 맞추어  살면서 화목한 가족이 되는 것을 위해 한시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셨던 당신에게 그냥 어머니가 잘못했다고 그러시라며 당신의 편이 되어드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는 선친의 말씀에 형제들이 흩어져 어머닐 찾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부둣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어머닐 발견했다. 그 후론 물에 뛰어들어 죽으려 하다가도 자식들이 물에 어른거려 그러질 못했노라고 늘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다소나마 헤아릴 수 있을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대학에 들어가고 머리에 쓸데없는 지식이 들어차면서 내 자신을 '모성결핍'이라고 진단하였다. 어릴 적에 어머니와 처음으로 같이 산 기억은 9살 여름방학 부터였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날 때 건축업에 종사하던 선친은 공사 중이던 건축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갓 태어난 나를 업고 어머니가 시작한 일은 장사였고, 큰 시장에서 나를 등에 업고 무거운 배추와 무를 이고 들고, 힘겨운 걸음을 터벅거리며 먼 길을 오가며 길가에서 파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20대가 되기 전까지 내 기관지는 매년 한두 차례 탈이 났고, 기침 소리가 날 때마다 마치 힘겨웠던 그때의 무거운 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어머닌 안쓰러운 생각에 그때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곤 하셨다.    선친이 출감한 뒤 두 분은 어린 아우만 데리고 경찰을 피해 도피생활을 했었고, 형과 나는 큰댁과 이모 댁을 오가며 자랐다. 내 기억에는 가끔 어머니가 나타났고,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가 깨면 이미 사라져버린 당신을 찾아, ‘엄마’를 부르며 온 동네를 울면서 뛰어 다녔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성결핍은 작은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어릴 적엔 형과 아우에 대한 부모님의 편애가 있다는 피해의식도 있었다. 무뚝뚝한 외모에 늘 사마귀와 티눈이 얼굴과 손발에 가득했고, 눈에는 화상 자국도 나 있어서 그다지 호감이 가는 얼굴도 아니었다. 형제에 비해 작았고, 'ㅅ'발음도 되지 않아서 거의 불구자 취급을 받았다는 생각을 30살이 넘도록 하곤 했다.    식당을 하는 어머니를 돕는다고 나름 노력했지만, 잘못을 저지를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 가게에 가서 술을 몇 병 사오는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보통은 술을 배달해 주는 차가 오지만 그 차가 오기 전에 술이 떨어지면 인근 가게에서 좀 더 비싸게 술을 사 오곤 했다. 그렇지만 가게에서 사오는 술보다 우리 집에서 파는 술은 더 비쌌다. 안주도 나가고 자리도 차지하니 당연한 것이었지만 당시 어린 생각에는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차액에 맞추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사고는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잔돈이 없다는 내 말을 듣고 가게에 다녀오시더니 집 앞에 서 있는 나는 보시고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당시 선친의 사업은 몇 년의 실패 끝에 마침내 일어나고 있었지만 물건을 사간 사람으로부터 대금을 받지 못해 상당히 어려운 형편이었다. 한 푼이라도 보태려고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노력을 하시는 어머니였지만, 철없는 자식을 나무라진 않으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1년마다 있는 군민체육대회 때였다. 우리 면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우리 집에서 맡게 되어 인근 고등학교에 자리를 잡고 불을 때고 솥을 걸었다. 나는 고기를 사오는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평소 잘 아는 집이었지만, 그날따라 아주머니가 없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고기를 반만 썰어서 내게 건넸다. 반박하지 않고 그냥 가지고 돌아오니 어머니는 이게 전부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머니는 또 묵묵히 일을 하셨다.    나는 그 시절 어머니 마음만 아프게 하는 못난 사람 같았다. 나의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를 착하다고 자랑했다. 착하다고. 착하다고. 마치 곰이 사람으로 변하는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쩌면 나는 그 주문이 사실로 받아들여지도록. 그래서 어머니의 자랑이 사실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증명하려고 노력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주문이 없었더라면 아마 나는 어릴 적 친구들처럼 어두운 세계로 걸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기준점이다. 어느 곳에 있더라도 때가 되면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모이게 된다. 어머니가 있는 곳이 바로 사랑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게 있어 어머니의 사랑은 믿음인 것 같다. 어머니가 내가 있는 곳의 기준점이라면 이 믿음은 내가 가야할 곳에 대한 좌표라고나 할까? 당신이 믿어주시는 만큼 나는 나아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당신의 믿음은 자식에 대한 당신의 사랑만큼이나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곳에 가지 못하는 것은 단지 내가 한없이 어리석고 부족해서일 뿐일 것이다.     언제 어느 때고 전화하시곤 밥은 챙겨먹고 있냐고 물으시는 어머니. 그 마음은 온 우주를 덮고 있는 사랑의 파장에 연결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9년간 떨어져 살던 때에도, 형제를 편애한다는 생각을 할 때에도, 어디에서 그 어떤 바보 같은 삶을 살고 있을 때조차도 그 사랑의 마음과 믿음은 얇지만 질긴 옷처럼 항상 나를 감싸고 어루만져왔을 것이다.    그 옷이 펄럭이며 내게 이야기한다. 지금보다 백배 천배 어머닐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단 한나절 나를 사랑한 어머니의 고마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142    엄마의 고삐 댓글:  조회:1459  추천:0  2014-09-20
엄마의 고삐      제 아이들이 사춘기를 좀 빨리 겪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연락도 없이 늦게까지 안 들어오기도 하고 그랬는데,  저는 그때마다 뭐했냐고 꼬치꼬치 안 물어봤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닙니다.  전에는 저도 참 철저한 성격이어서 아이들에게도 많이 관여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명상을 하다보니까 아이들이 제 분신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독립된 개체이고 제 몸을 빌어서 나왔을 뿐이지  저하고는 전혀 다른 별개의 영체더군요.      그리고 나이가 어리든 공부를 했든 못했든 기본적으로 갖고 태어난 것이 있어서  ‘옳다, 그르다’ 하는 걸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걸 스스로 겪어보고 ‘좋지 않다’고 느껴서 자기가 안 해야지,  하고 싶은 건 옆에서 아무리 말려도 감쪽같이 꼭 하고야 맙니다.  그리고 반작용으로 거짓말하게 되고 불신만 쌓입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자’ 했습니다.  본인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잘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제가 집안에서 중심을 잡고 확실하게 있으면  남편이나 아이들이 크게 이탈하지는 않는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소의 고삐를 매놓으면 멀리 못 가듯이  엄마가 집에서 고삐를 잘 쥐고 있으면 거기서 돌아다니다 맙니다.      대개 탈선하는 아이들이나 남편의 경우는 안에서 어머니가 흔들리고 밖으로 나돌 때 그런 겁니다.  저는 밖에서 구할 게 하나도 없었고, 제 안으로 들어가는 명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너무 술을 많이 마신다?  집안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니까 그렇지, 집이 불안하면 못 그럽니다. 퇴근하기가 무섭게 들어오게 됩니다.       
141    내 사랑 호호 할머니 댓글:  조회:1625  추천:0  2014-09-15
내 사랑 호호 할머니         달님은 정월 대보름을 막 넘긴 것이 아쉬운 듯 아직은 동그랗게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혼자 수선을 피우며 해 먹는 것이 귀찮기도 해서 민숭민숭한 보름을 지내고 보니 해마다 어김없이 갖은 산나물과 찰진 오곡밥을 지어 주시던 할머니의 사랑이 그립습니다. 조미료를 넣지 않고 담백하게 조물조물 무쳐 주신 산나물 반찬과 기름기 좌르르 흐르는 구수한 오곡밥. 피부병 없이 무탈하려면 비린 생선을 먹으라시며 노릇하게 구워 주신 청어구이. 호두랑 밤으로 부럼을 깨게 하셨고, 귀밝이술로 직접 담은 포도주를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조금씩 마시게 하셨습니다.    손이 많이 가는 먹거리를 미리 다듬고 손질해 두셨다가 특별한 날이 되면 정성껏 만들어 주셨지요. 막상 엄마의 자리가 되어 아이들의 점심과 저녁식사 모두 학교에서 급식으로 해결하니 한편으로 편하기도 하지만 슬며시 미안한 마음도 듭니다.^^;   그때는 철도 없이 할머니가 해 주신 것은 촌스럽다고 타박 했었는데…. 이젠 할머니의 손맛이 그립고 감사합니다.   자그마한 체구와 조용하면서 자분자분 재미있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해주시던 할머니. 유난히도 하얗게 세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하얀 할머니 집’으로 불리기도 해서 초행길 친척들이 우리 집을 쉬 찾아올 수 있었지요. 한글을 깨치지 못하고 시집 오셔서 시조부님으로부터 글을 배우셨다는 할머니는 틈틈이 무슨 경전 같은 것을 열심히 읽곤 하셨습니다.   이른 새벽 한결같이 정갈하게 단장하시고 하늘을 향해 정성으로 기도를 올리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때는 원래 할머니들은 자식 잘 되라고 다들 그러시나 보다 했었지요. 배앓이를 할 때면 어김없이 약손이 되어 배를 슥슥 문질러 주시면 정말 감쪽같이 다 나았습니다. 누구나의 할머니처럼 그렇게 손녀에게 사랑을 녹여 주시던 할머니. 그런데 그런 할머니에게 대못을 박는 짓을 하고야 말았네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 해 칠월 칠석 무렵. 병석에 오래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를 묻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 사이 할머니는 우리의 추억이 담긴 가족사진들을 모두 태워 버리셨습니다.   어머니의 긴 투병기간 동안 나름대로 '착한아이 강박증'에 힘들었던 감정이 서운함을 빌미로 폭발하듯이 할머니에게로 풀려 나갔습니다. 그렇게 엄마가 죽기를 기다렸냐고. 뜻밖의 나의 행동에 죄인처럼 절규를 듣고 계시던 할머니….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내가 먼저 죽어야지 젊은 것이….” 하는 죄 아닌 죄책감으로 힘들어 하셨는데 철도 없이 내 감정만 표현하고야 말았습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사람 마음대로가 아님을 알면서도….  할머니는 그 후로 며칠을 앓으셨고 신념과도 같이 하늘을 향해 올리시던 간절한 기도마저도 며칠 동안 쉬셨습니다. 그 날 이후로도 삭아 버린 사춘기를 보내면서 늘상 마음씨 고운 할머니께 성질을 풀었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할머니의 가슴에 박은 대못이 부메랑이 되어서 나의 가슴에 되돌아와 박혔나 봅니다. 이제야 부끄러움을 넘어서 가슴이 절절해집니다. 기억 속에 머문 할머니의 모습을 차분하게 떠올리며 그려봅니다.     새하얀 머리카락  뽀얀 얼굴 총명한 눈빛 누구에게나 귀엽게 웃으시던 모습 내 사랑 호호 할머니   언제나 저에게 관대하셨듯이 지난날을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지상에서 인연이 되어 베풀어 주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을 놓고 가벼이, 가벼이 높이 오르시기를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    
140    새가 지저귀는구나 댓글:  조회:1454  추천:0  2014-09-12
새가 지저귀는구나      부부간에 스트레스가 있을 때도 가볍게 탁구 치듯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옆에서 바가지 긁어대면 ‘새가 지저귀는구나’ 하세요.  그게 다 살아 있다는 소리잖아요.      ‘내가 여기 살아 있으니까 나를 한번 쳐다봐 달라, 나를 사랑해 달라’ 이런 얘기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즐겁게 느껴집니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상대방이 다르게 보입니다.      사람들이 미련한 데가 있어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원하는 것을 파악하면 금방 대응을 할 텐데요.  다 관심 가져달라는 얘기입니다.  사랑해 달라, 내 옆에 있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못 알아듣고는 자꾸 딴청을 부립니다.    .  길게 얘기할 것도 없습니다.  옆에서 어쩌고저쩌고 하면 ‘그래, 내가 사랑해 줄게’ 그러면 되는 겁니다.  그렇죠? 긴 말이 왜 필요한가요?  미련스러우니까 길게 얘기하고 치고받고 계속 되풀이하는 겁니다.      말이 오고 갈 필요도 없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게 뭔지를 알지 않습니까.  그걸 맞춰 주면 되는데 정반대로 합니다.  그런 데다 자꾸 에너지 쓰지 마십시오.  쉽게 처리할 문제는 쉽게 처리해야 됩니다.  불필요하게 오래 기운 빼고 그러지 마십시오.         
139    바보엄마 댓글:  조회:1752  추천:0  2014-09-11
바보엄마             "엄마는 언니만 좋아하고, 오빠만 좋아하고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막내딸의 100데시벨이 넘는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온 집안을 휘감고, 나의 목을 휘감고, 나의 귀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시작하면 족히 그렇게 두 세 시간 걸리는 똑같은 이야기의 ‘소리 지르기’가 또 시작되었습니다. '아, 오늘도 그냥 안 넘어가는구나!' 점점 귀가 아파지기 시작했고, 드디어 귀에서 혈관이 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혈관이 튀는 부분을 누르고, 나의 딸은 그 모습을 보고는 더욱 더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또 내 말 안 듣고, 귀 틀어막는 거 봐!!!"  옆에 바짝 다가와서 더 크게 말합니다. 아이 덕분에 가는귀가 먹었습니다. 좀 작은 소리는 잘 안 들립니다. 조용히 말하라고 한마디 하자 대꾸가 세배로 돌아옵니다. 한마디 했다가는 더 길어 질 테니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대답을 않는다며 또 시비를 겁니다.    저는 '참자, 참자' 참습니다. 아이는 더 바짝 다가오며 악에 받쳐 소리를 지릅니다. 참다 참다가 한마디 했습니다. 대답이 거세게 돌아옵니다. 또 대답했더니 더욱 거세게 돌아옵니다.    '그래, 오늘은 그냥 뭐라고 하는지 끝까지 들어보자!' 하고 귀가 아프든 말든 가만히 앉아서 마주하고 들어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모두가 못 마땅한가 봅니다. 참고 더 듣자. 한 시간, 두 시간…. 이제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습니다. 나는 그냥 듣고 있습니다. 듣기 싫지만 듣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지금 나한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동안 하도 소리 질러대어 듣기 싫었던 그 말들을 또 말하고 있습니다. "엄마는! 엄마는! 엄마는!!!" “엄마는!” 이 말이 가장 많이 들립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보다' 목소리가 조금 조용해지는 것을 보니 힘이 드는 가 봅니다. '아! 내 딸은 나한테 자기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거구나.' 갑자기 말할 수 없이 아이가 측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내게 사랑을 갈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아이가 말하는 것을 참고 들으며, 물끄러미 바라보니 다른 때와 달리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아이가 못된 것이 아니라, 내가 못된 사람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리를 지르는 것은 내가 아이의 말을 잘 듣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별 생각 없이 말을 하여 아이로 하여금 기대감에 부풀게 하고 약속을 지키기 못한 것은 아닐까? 아이가 배려심이 부족한 것이 아니고, 내가 배려심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무심코 한 것이 비교한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들자 순간, 갑자기 내 입에서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아이는 '이 엄마가 또 우는가보다'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아이를 때리느니 차라리 견디기 어려워지면 가끔은 울고 맙니다. ‘이 아이가 나의 잘못된 점을 알게 하도록 나를 일깨우는 구나‘ 하는 것이 온몸으로 전해지면서 아이를 끌어안았습니다. 항상 그리 소리를 지르면 싸아~ 하니 냉담해지는 나의 태도에 익숙한 아이는 살짝 당황해합니다.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하고 끌어안았습니다. 아이도 가만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소리가 많이 잦아듭니다. 이런 것이었구나…. 엄마로서 나의 자존심만 세우고, 막내의 말은 소홀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아직도 매일의 전쟁은 심심찮게 벌어집니다. 당장 고쳐지지 않는 나의 단점들을 보며 한심하지만, 반드시 고치리라 다짐해봅니다. 내 딸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나에게 아픈 말들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알려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막내가 소리를 지르면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힘겹고 어렵지만, 그래도 감사를 드립니다. 나에게 마음 공부하라고 소리 지르는 막내의 외침이 잠잠해질 때면 나는 좀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오늘도 한바탕 전쟁이 휩쓸고 지나갑니다. 자식을 통해 조금씩 내 모습을 알아가면서, 아이의 행동이 나를 보며 배운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겨웠습니다. 올해는 몸과 마음의 여유를 갖고 막내와 나의 쌓인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직장을 휴직하였습니다. 적극적으로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아이에게 사랑을 퍼부어주는 시간을 만들렵니다. 이 많이 덜 된 엄마를 마음 공부시키느라 힘겨운 막내에게 감사를 보내며, 맑고 밝고 따뜻함을 이 엄마에게서 느낄 수 있도록 열심히 수련하겠습니다. 또한 딸로 하여금 나를 바로 보게 하고 제 자신을 다듬어주는 보이지 않는 따스한 손길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138    다양한 결혼 유형 댓글:  조회:1530  추천:0  2014-09-03
다양한 결혼 유형      개인마다 다르긴 하지만, 인간만큼 그렇게 많이 관계를 하는 동물이 없습니다.  살아가는 데 지장이 있을 정도로 너무 많이 성적인 만남을 가집니다.  그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이 아닙니다.      서구에는 다양한 유형의 부부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영국 같은 데는 십 년 전부터 벌써 ‘sexless couple’이 있었습니다.  결혼할 때 '우리는 섹스 없는 커플이다' 이렇게 서약을 합니다.      유럽은 2~30 년 전부터 모토가 ‘인간답게 살자, 자연으로 돌아가자’였습니다.  그런데 인간답게 사는 게 어떤 거냐?  너무 많이 관계를 가지는 것도 인간답지 않은 것입니다.      없다고 하면서 주어지는 건 너무나 즐거운 일인데  처음부터 너무나 당연하게 있는 것으로 시작을 하니까 불만이 많은 것입니다.  부부관계도 의무가 되면 피곤합니다.  아예 결혼할 때 없는 것으로 하고 시작하면 관계가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게 남녀 간에 꼭 필요한 사항은 아닙니다.  뭔가 부족하고 자꾸 확인해야 되니까 필요한 겁니다.  그 외에도 아기자기한 부부관계가 많이 있을 텐데  모든 걸 그것으로 해결해 버리려고 하는 무지막지한 관계가 되어 버립니다.      어떻게 하면 동물답지 않고, 인간답게 사느냐?  부부관계에 정형은 없습니다.  얼마든지 다른 유형의 부부가 있을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면에서 아주 미개한 편입니다.  부부는 다 어때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불행해합니다.         
137    성탄선물 댓글:  조회:1520  추천:0  2014-08-31
성탄선물           '고맙다고 말하는 것 잊지 않기!'  수첩 한 귀퉁이에 적힌 글귀를 중얼거리며 읽어본다. 이런 기본적인 것을 적어두고 기억해야 하는 모자란 인간이 나란 사람이다.   이런 내게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다. 여덟 살이 되던 해 성탄 전야.  아빠는 전에 없이 성탄선물에 예쁜 케이크까지 준비해 가족 모두 모여 성탄 전야 예배를 드리자고 하셨다. 그 날 밤에는 예쁘장한 여자 손님이 초대되었다. 지금의 새어머니이시다. 참 고맙지 않은 일이었다.    어색함을 달래느라 성탄선물로 받은 어린이 기도집을 이리저리 뒤적이다 보니 어느 페이지엔가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때 난 그 구절을 읽자마자 너무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린 나이에도 참 이해가 가질 않아 같은 구절을 읽고 또 읽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까지는 뭐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나머지 두 구절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항상 기뻐하라니…. 무슨 기쁜 일이 있어야 기뻐하는 거지! 범사에 감사하란 말은 더더욱 이상하다. 아무렇지 않은 일에 어떻게 감사하라는 것인지??? 더욱이 반갑지도 않은 손님과 함께 해야 하는 오늘 같은 밤에 말이다.    너무 이상해서 그 페이지를 넘기지도 못하고 뚫어져라 보고 있었더니, 속도 모르시는 아빠는 내가 그 구절이 좋아서 그런 줄 아셨던 모양이다. 우리 딸이 좋은 성경구절을 찾아냈으니 함께 봉독하는 게 좋겠다며 그 말씀을 소리 내어 읽으신다. 그리곤 다함께 눈을 감고 우리 모두 범사에 감사드리는 가족이 되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렸다.      내가 여덟 살이 되도록 언니와 내 곁엔 늘 엄마 대신 할머니가 계셨는데, 어린 내 기억속의 아빠는 늘 술을 먹고 늦게 들어와 주무시다가 토하시곤 했다. 그땐 너무 어려서, 세상의 모든 아빠는 원래 그렇게 늘 술을 먹고 토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린 두 딸과 함께 아내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술로 달래며 홀로 아파하시던 모습이었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술을 마시고 토하는 아빠를 위해 세수 대야를 가져다 드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빠는 내게 “고맙다.”고 하셨다.  고작 그것이 내가 어린 시절 익숙하게 들은 ‘고맙다’는 말의 전부였다. 암튼 그 이상한 성경 구절은 사는 동안 내내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새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갈등할 때도, 나를 낳기만 하고 버린 친엄마를 원망하면서 또 한 편 그리워할 때도….   ‘애증’이라는 감정은 내가 그 어려운 어휘를 습득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내 가슴속에 공기처럼 익숙하게 스며 있었다. 그 후로 갈등할 때마다, 그럴 때마다 난 이렇게 기도했다.  ‘이런 갈등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범사에 감사하란 말인가요? 알려주세요!’    극도의 갈등이 계속될 때마다 난 언제나 발전이든 퇴보든 양단간에 결단을 내야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난 스스로 강해지는 길을 택했다. 가슴속에 날카롭게 날을 세운 칼을 품고 극도의 갈등 속에서도 꿋꿋이 앞으로 나아갔다. 스스로 품은 칼날에 베이고 아팠지만 그래도 그 칼날은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굳은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누구도 못 말리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겉으론 온순한 듯 보여도 결정적인 순간 세치 혀 밑에 숨겨둔 날카로운 칼날을 꺼내 있는 힘껏 휘두르면, 세상없는 천하장사도 나를 이기지 못했다. 나는 직선적이고 지나치게 논리적인 말로써 빠져나갈 구멍이 없도록 궁지로 몰아넣는 아주 잔인한 구석이 있었다. 이 칼날에 가장 많이 베이고 다친 사람은 당연히 가족들이다.  자라는 동안 알게 모르게 내게 상처를 주었던 부모님께 난 가슴에 비수가 되는 몇 마디 말로 그동안 받은 상처를 단칼에 다 돌려 드리고도 남을 만큼 큰 죄를 지었다. 이런 나를 좋아해주고 사랑해 준 한 남자에게도.  그를 사랑했고 결혼을 했으나 그 또한 나의 칼날에 베여 많이 아팠으리라. 남편이 이런 나를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갈 무렵, 고맙게도 명상을 만났다.    이혼을 하고 명상을 시작할 무렵 객관적으로 난 너무도 외로웠다. 내 곁엔 부모도, 남편도….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었다. 감사라고는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갈등 속에 점철되어 온 내 삶이건만, 가슴 깊이 품은 칼날이 스스로도 아파 날마다 미친 듯이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라니….    고통은 마치 나를 한없이 나아가도록 곁에서 끝없이 채근하는 수석 코치마냥 내 곁을 맴돌았다. 덕분에 나는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내 허물들을 아주 자세히 현미경 배율로 확대하여 대형 스크린에 공공연히 비춰보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난 밑바닥의 편안함을 제대로 알게 되었고, 실로 그 공부는 내게 말할 수 없는 편안함과 자유를 선물로 되돌려주었다.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 같다.      이제야 깨닫게 된 한 가지 사실은, 고마움은 삶 속에서 뜻하지 않게 주어지는 선물에 대한 ‘결과’로서 일으켜지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마움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삶의 태도 중 하나이며, 스스로의 삶을 보다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여덟 살, 순수했던 어린 소녀가 장차 그렇게 무서운 비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게 되리란 사실이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성탄 전야에 찾아 온 그 이상한 성경 구절은 말하자면 소녀가 자신의 칼날에 다칠세라 염려하신 하늘이 미리 알고 예비해 두셨던 치유의 선물이 되었듯이.  그 사실을 깊이 깨닫고 나서야 난 비로소 ‘범사에 감사하라’는 오래된 성서의 가르침에 순순히 ‘예’하게 되었다. 여덟 살 성탄 전야에 드린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가 이제야 이루어 진 모양이다.    하늘은 늘 세상을 아름답고 섬세하게 연주하시는 음악가처럼 내 영혼을 어루만지신다. 그 섬세한 손길에 온전히 나를 맡길 수만 있다면 왠지 오늘은 지금 당장이라도, 온 우주를 통해 울려 퍼지는 조화로운 천상의 선율을 운 좋게 들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어둡고 둔한 나의 귀를 비비고 크게 키워 조심스레 귀 기울여 본다.    
136    나눌 수 있는 것을 나누는 부부 댓글:  조회:1665  추천:0  2014-08-28
나눌 수 있는 것을 나누는 부부      부부라는 게 자신의 생활을 가지면서 나눌 수 있는 부분을 나누는 겁니다.  전부 다 나누는 게 아닙니다.  둘이 합쳐서 짬뽕을 만들어서 같이 나누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공동으로 육아하고, 공동으로 경제활동하고, 공동으로 취미활동하면서  그 나머지 나눌 수 있는 것을 나누면 되는데,  완전히 ‘너+나, 1+1=2’ 이렇게 해서, ‘2’를 또 반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여자는 이래야 되고, 남자는 이래야 되고, 아내는 이래야 되고,  남편은 이래야 된다는 고정된 인식이 있습니다.      부모님들 살아오신 것을 보면서 어떤 상(像)을 만들어놓고 그걸 깨지를 못합니다.  얼마든지 다를 수 있는데 어떤 기준에 의해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이상하다고 합니다.      그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 됩니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그냥 인정하면 되는데 그 인정을 못합니다.  여기 계시는 분 중에도 같은 분이 어디 있습니까.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은 저렇게 다르다고 인정을 하면 되는데  부부라는 이유 때문에 같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다른 사람들이 만났는데 어떻게 같기를 바라십니까?      다른 게 당연하고 오히려 더 좋은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이 내가 아니잖느냐’ 그래야 됩니다.  그런데 수없이 ‘당신은 내 꺼’ 합니다      배우자가 잔소리를 하고 내 의견에 반대를 하면 그걸 인정을 하십시오. 설득하려고 하니까 다툼이 생깁니다.  그냥 인정하고 노랫소리로 들으십시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주면 되잖습니까.     그런 걸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라는 게 다방면에 필요한 겁니다.  좋게 협의를 볼 수가 있잖아요.  나는 여기까지는 되고 이건 안 되는데 어떡하면 좋으냐, 그래 보십시오.      이런 부부도 있더군요.  뭐 하나 양보하면 ‘얼마 줄래?’ 그런답니다.  늦게 들어오면 벌금 만 원, 그렇게 하고 넘어갑니다.  만 원이 커서 넘어가나요? 애교지.  그 부인이 남편한테 받은 벌금을 모아서 뭘 산답니다.  그렇게 좀 재미나게 사십시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배우자가 반대하면 상대편 보고도 그러십시오.  취미생활이든 일이든 당신도 원 없이 해라,  나는 참견하지 않겠다, 얼마든지 하고 싶은 걸 해라, 그래 보십시오.      그런데 요즘은 의식들이 많이 자라고 있어서 하고 싶다는 거 굳이 말리지 않더군요.  막무가내로 하지 않고, 적정선에서 서로의 행복을 위해 타협점을 찾는 부부도 꽤 있습니다.           
135    가장 기본적인 교육 댓글:  조회:1582  추천:0  2014-08-26
가장 기본적인 교육     가장 기본적인 것을 공부시키는 데가 없습니다.  인간관계나 부부관계에 대한 것도 참 잘못됐거든요.  자꾸 깨이게 해줘야 됩니다.  부인들이 남편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너무 부당합니다.      각자 독립된 개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쪽에 지나치게 의존적입니다.  매달려 있으니까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걸 자꾸 깨이게 해줘야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인식들도 안 합니다.  그러니까 내버려 두고 끌려가는데, 그런 교육들을 시켜야 됩니다. 의식을 독립시켜야 되고, 우선 경제적으로 독립시켜야 됩니다.      미국에만 가도 그렇지 않습니다.  밥값은 누가 내고 집값은 누가 내고, 서로 분담해서 합니다.  비행기 타고 12시간만 가면 그런 사회가 있는데  왜 여기서는 아직도 원시적으로, 누가 누군가에게 의존해 있고, 또 그걸 정당하게 요구하는가?  인식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남편이 월급봉투째 집에 갖다 주고는  손 비비면서 용돈 타 쓰는 부당한 나라가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성개발원에 있을 때 조사를 해봤거든요.      아내들은 무슨 권리로 그렇게 당당하게 요구합니까.  물론 가사노동이 가치가 있지요.  그 범위 내에서는 경제적인 면을 인정을 해주고,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해야지 부당하게 요구하면 안 됩니다.  독립을 해야 됩니다.             
134    딸의 결혼식 댓글:  조회:1748  추천:0  2014-08-25
딸의 결혼식         "엄마, 이분은 누구야?" "응. 엄마의 이모, 그러니까 주영이에겐 이모할머니가 되겠네. 왜 한두 번 뵈었잖아."   "아~ 김해 할머니! 부산할아버지는 지금보다 훨씬 젊으셨네. 히히. 근데, 엄마! 외할머니는 어디 계셔? 안보이시네?"   "음…."   엄마 아빠의 결혼 앨범을 들여다보는 아이는 신기한 듯 종알종알 갖가지 질문들을 쏟아낸다. 예쁜 새신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을 일견 뿌듯해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신나게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이의 마지막 질문에 나는 멍하니 할 말을 잊었다. 하던 말을 멈추고 쓰린 가슴을 쓸어안으며 나는 7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갔다.     "니 결혼식 못가, 아니 안 갈 거야. 스님이 무슨 딸 결혼식이냐. 됐다…. 절에서 결혼식 무사히 잘 끝나도록 염불이나 실컷 하련다. 결혼식 때 사고 많이 난다더라. 걱정 마. 엄마가 우리 정은이 잘 살라고 부처님께 기도도 많이 드렸어. 어린 것이 그동안 고생 많았지. 좋은 신랑 만났으니 이제 호강하면서 잘 살아야지. 그래, 둘 다 가진 것은 없어도 공무원이니 찬찬히 아껴서 잘 살면 그럭저럭 괜찮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그나저나 엄마가 해줄게 없어서 낯이 안 선다. 그 놈의 돈! 어째 그리 나한테는 안 붙어 있는지 모르것다. 으이구!"   새하얀 걸레로 불전을 정성스럽게 닦으시며 엄마의 넋두리는 끝이 없었다.    "걱정 마, 엄마. 내가 다 알아서 할께. 그리고 나 잘 살 테니 염려 마. 결혼식도 다 잘 될 거야. 주무세요. 저 가요…."   매번 이런 대화를 마치고 자취집으로 향할 때마다 나는 별을 보며 울었다. 나의 가난이 싫었고 일찍 가족을 떠난 아빠가 그리웠고 평범하지 않은 엄마, 그래서 딸의 결혼식에조차도 올 수 없는 엄마, 떠맡아야 하는 어린 동생,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현기증을 느꼈다. 모든 것을 혼자 끌어안고 내 가슴은 점점 피멍이 들어갔다. 그래서 난 떠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훌훌 털어버리고 나만 혼자 쏙 빠져나와 근사한 경찰 신랑이랑 보란 듯이 행복하게 ‘딴딴딴~’ 잘 살고 싶었다. 그 한 가지 생각으로 똘똘 뭉친 나는 혼신의 힘으로 결혼식을 준비했다. 이모, 외삼촌들, 큰아버지를 비롯한 친가에 결혼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고생바가지로 살던 나 유정은이 시집을 가니 이번에 확실하게 기부하시는 분에게는 그동안 우리 세 가족을 무시하며 살아온 세월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겠노라고. 그러니 동참하시라고 은근히 협박 아닌 협박을 하였다.   이모와 외삼촌들은 엄마를 대신하여 가구와 전자제품들을 책임져주셨고 친가에서는 몇 백 만원의 돈을 마련해주셨다. '아, 드디어 가긴 가는구나!'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결혼식 날 이모와 이모부가 부모 좌석에 앉을 거면 굳이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밝히지 말고 친 부모인 것처럼 연기를 제대로 하자는 거였다. 시어머니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나도 원하는 바였다. 30분이면 끝날 결혼식. 남들에게 구태여 불쌍하게, 가련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정말 그랬다.    결혼식 전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괜찮아? 내일이네. 무지 떨린다. 결혼식 마치고 저녁 비행기 타고 서울로 가요. 신혼여행은 그 다음날이니까 서울 도착하면 바로 달려갈게. 참, 준우한테 비디오 녹화하라고 확실히 얘기해 두었으니까 걱정 마세요. 생생하게 찍어서 보여드릴게. 엄마! 딸 시집가니까 좋지? 나 잘 살 거야. 걱정 마. 얼른 주무세요. 끊어요."   딸은 엄마에게 그래도 결혼식장에 오지 않겠느냐고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다. 엄마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가발을 쓰지 않아도 그 모습 그대로 너무 예쁘고 자랑스럽다고…. 빈 말 한마디 남기지 않는다.   결혼식 당일, 시작부터 끝까지 나의 가슴은 쉼 없이 울렁거렸고 긴장되어 있었다. 슬플 겨를이 없었다. 누가 알까 두려워 결혼식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쫓기는 마음으로 치룬 나의 결혼식. 모든 일정을 마치고 서울행 비행기에 탑승한 나는 텅 빈 마음, 씁쓸한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혼식은 완벽하게 잘 끝났지만 내 마음은 왜 이렇게 아프기만 한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검은빛 하늘을 보니 오로지 엄마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신혼집에 도착한 나는 짐만 내려놓고 무조건 뛰었다. 엄마에게로. 너무나도 오랜만에 엄마 손을 잡고 우리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엉엉 울었다.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고 되뇌면서 말이다.   나보다 더 슬프고 외로웠을 엄마는 초대받지 못한 그날, 하나뿐인 딸의 결혼식 날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까…. 지금도 나의 후회는 끝나지 않았다.   태어남의 기쁨을 주시고 진한 경험과 수확을 주시고, 사랑과 따뜻함을 알게 해주신 어머니께 이 자리를 빌어 가슴 깊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133    고정된 것 바꾸기 댓글:  조회:1463  추천:0  2014-08-21
고정된 것 바꾸기      나이가 들수록 가치관을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교수가 TV에 나와서 강의하는데 보니까 자기는 나이든 사람은 싫고,  젊은 사람만 제자로 받겠다고 그러더군요.      그 말이 정말 이해가 됩니다.  나이가 들면 생각이 고정이 되고 점점 더 굳어지거든요.  명상을 하면서도 자꾸 비워내야 되는데 할수록 점점 가득 찹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 너무 확고해서 비우지를 못합니다.      우리나라 드라마들 보면 아직도 정형적입니다.  부모 자식 관계도 그렇고 시집과의 관계도 아주 답답한데, 그걸 그렇게 못 바꾸더군요.  대만만 해도 훨씬 개화가 돼서,  무슨 영화에 보니까 아들이 미국 남자랑 동성연애를 하는데도 그냥 넘기더군요.  우리나라 부모 같으면 너 죽고 나 죽자 했을 텐데.      드라마 작가들이 대부분 여자인데 왜 그러냐 하면 피디들이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피디뿐만 아니라 그 위에 국장, 사장까지 다 남자입니다.  드라마가 워낙 광고주 노릇을 하다보니까 사활을 걸지 않습니까.  방송국의 주요 수입원입니다.  그러니까 사장부터 캐스팅에 관여할 정도로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조금만 다르게 전개되면 위에서 제동을 걸고,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 자꾸 주문을 합니다.  작가 마음대로만 쓸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 간의 대화도 여자는 으레 ‘그러셨어요, 저러셨어요?’ 합니다.  남편이 같이 존댓말 하면 ‘쪼다 남편’이라고 합니다.  여자가 남자한테 반말하는 경우는 학교 동창생이거나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그렇습니다.      대사 때문에 저도 많이 싸웠습니다.  처음에 존댓말 하는 남편을 썼더니 바보도 아닌데 왜 존댓말을 쓰느냐고 하더군요.  피디가 일단 자기 맘에 걸리니까 얘기를 하는데,  그게 자기 의사라기보다 시청자들이 항의를 하니까 그러는 겁니다.      ‘선생님, 대세대로 하시죠’ 그러더군요.  여성개발원에 계셨다는 건 잘 알겠는데 그래도 튀지 않으시는 게 좋겠다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그래요.  드라마에서 며느리가 시부모한테 바른 말 좀 하고 그러면  시어머니들이 그렇게 전화를 걸어 항의를 한다고 그러더군요.                 
132    좋은 사주 나쁜 사주 댓글:  조회:2273  추천:1  2014-08-01
    어떤 것이 좋은 사주인가도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사주도 평생을 놓고 보면 안 좋은 면이 있습니다.   또 부모의 관점에 따라 좋은 사주, 나쁜 사주가 달라집니다.       돈을 굉장히 좋아하는 부모는 다른 요인은 볼 것 없이 재운(財運)이 있으면 좋은 사주라고 생각합니다.   가치관에 따라서 재운이나 명예운보다는 성격이 온순하고, 부부간의 금실이 좋고.....,   이런 사주를 좋은 사주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대개 판단의 기준이 아이에게 있지 않고 부모에게 있습니다.   아이는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나도록 예정되어 있는데,   부모가 사업가 경향을 좋아하면 아이의 그런 면은 다 무시하고 사주가 나쁘다고 합니다.   관점이 상당히 일방적이지요.       인간의 머리로는 사주가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좋은 면만 있으면 나쁜 면도 있습니다.   좋고 나쁜 것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 살아지는 인생 vs 사는 인생 -  
131    상대가 원하는 걸 하게 해주는 사랑 댓글:  조회:1484  추천:0  2014-07-31
상대가 원하는 걸 하게 해주는 사랑      아는 사람이 미국에 이민을 가서 고생 끝에 자립해서 살고 있는데,  사십이 넘으니까 뭔가 갈급해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거기 일을 정리하고 여기 와서 명상을 하겠노라고  틈만 나면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하도 그러니까 그 부인이 이제는 그런답니다.  속상하지만 각오는 하고 있다고,  여차하면 자기가 생계는 맡아 하겠다고.          또 어떤 개인택시 하시는 분이 여기서 몇 달 계시다 가셨죠.  그분도 평소에 부인한테 자기는 이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  너무너무 그러고 싶다, 노래를 불렀답니다.  그랬더니 그 부인이, 남편이 너무너무 간절하게 원하는 일이니까 그렇게 하라고,  평생 가족을 먹여 살렸는데 이제 생계는 자기가 하겠다고 그래서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유능한 거죠.  나이 사십 넘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주변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놨다는 거,  그거 대단히 유능한 겁니다.        그렇게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합니다.  인간으로서 그 정도는 기본이 아닐까요?         
130    어머니의 밥상 댓글:  조회:1149  추천:0  2014-07-26
어머니의 밥상         된장찌개를 먹을 때면 아주 가끔씩 떠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두 가지의 기억이 있다.  나에게는 두 분의 어머니가 계신다. 한 분은 돌아가신 나의 친모이시고, 또 한 분은 지금의 계모이시다. 두 분의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두 분의 어머니를 사랑한다.    나는 두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따뜻한 밥상 이야기를 하고 싶다. 첫 번째는 나의 친모이신 어머니의 밥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몇 컷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 시절의 기억을 풍경화로 표현하자면 온통 흑백으로 칠해진 우울한 그림처럼 어두운 그림으로 남아있다. 그 그림들 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모습이 있다. 구석진 곳에서 울고 있는 한 아이 모습이다. 왜 그렇게 부부싸움을 많이 하셨는지 당시 나는 몰랐었다. 몇 컷 안 되는 기억 속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매 맞는 어머니와 그 옆에서 공포에 떨며 울고 있는 나의 모습…. 슬픔으로 가득 찬 어머니의 모습과 눈물. 이 모습이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의 대부분이다.    한동안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전에도 그런 적이 종종 있었던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것을 보면 그렇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도박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우리 집뿐만 아니라 외가댁에도 많은 도박 빚을 남겨서 그 빚을 갚느라 거동이 불편하신 외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환갑이 훨씬 지난 나이인데도 어부생활을 이어가셔야 했고, 부유했던 우리 집은 생계를 위한 화물차 한 대만을 남겨 둔 채 모든 재산을 정리해야 됐다.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3~4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는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쓰셨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고, 집에서는 간혹 교인들이 아버지가 없는 시간에 찾아와 함께 찬송가를 부르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주님의 자식에게 용기와 격려를 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번 잃었던 신뢰는 회복하기가 어려웠다.    운송업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야 했던 아버지는 집을 비우는 일이 많으셨고, 자신이 집에 없는 시간에 어머니가 무엇을 하며 다니는지 철없던 나에게 물으시고 주변 사람에게 물으시며 뒷조사를 하고 다니셨다. 그런 날이면 언제나 부부싸움이 있었다. 부부싸움이라고는 하지만 일방적으로 매 맞는 어머니의 모습만 머릿속에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저녁으로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어머니는 물으셨다.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나는 옛날 기억을 더듬으며 어머니가 해 주신 음식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 기억이 오래되어서 모르겠는데 엄마가 해주던 건데…. 국물이 빨갰던 것 같고, 꼬랑내 같은 냄새가 났었지만 아주 맛있었어. 두부도 들어갔던 것 같은데 그게 제일 먹고 싶어." 그것이 된장찌개였다는 것을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얼마 후 어머니는 맛있는 된장찌개와 반찬들이 맛깔스럽게 어우러진 푸짐한 저녁을 준비해 놓으시고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밥을 먹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계셨다. 밥을 다 먹고 나자 조용히 눈물을 흘리시며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갑자기 나를 확 껴안으시더니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셨다. 영문도 모르고 품에 안긴 나는 어머니의 가슴이 따뜻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었다. 그렇게 한참을 우시고 나서 어머니는 만원을 건네주며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맛있는 거 사먹고 놀다오라고 하셨다. 그것이 내가 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다.   어머니는 자살을 하셨다. 내가 밖으로 나간 뒤, 바로 농약을 먹고 한 많은 인생을 스스로 마무리하셨다.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어머니의 심장소리를 내 귀로 똑똑히 들었었는데, 영안실에 싸늘히 누워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믿겨지지가 않았다. 큰 충격이었다.    그 뒤로 나는 명상을 만나기 전까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어머니가 새어머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친구 녀석들이 “어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셨냐?” 라고 가끔 물을 때마다 나는 “아파서 돌아가셨다.”고 얼버무리고는 죽음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기 전에 얼른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 그때의 기억을 닫아 버렸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밥상의 추억이다. 가슴 아픈 순간이지만 나는 이때 느낀 어머니의 따뜻했던 가슴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어머니에 대한 유일하게 따뜻했던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모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때면 이 순간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아픈 기억도 함께 해야 하기에 따뜻한 슬픔으로 아마 오래도록 기억이 될 것 같다. 자식을 앞에 놓아두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심정을 느낄 때면 그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와 한참을 운다. 명상에 입문하고 나서 ‘나는 누구인가?’를 쓰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 밥상의 기억이 떠올라 몇 시간을 서럽게 울었다. 그 눈물은 어머니의 선택과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해 그 짐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자식의 서러운 삶이 함께 어우러진 두 모자의 눈물이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이 지나고 나서 지금의 새어머니가 오셨다. 두 번째 어머니의 밥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잠깐 가족 이야기를 먼저 해야 될 것 같다.      나는 3형제 중 막내이고 아버지는 두 번의 결혼을 하셨다. 첫 번째 결혼하신 어머니와 지금의 형들인 아들 둘을 낳으시고 이혼을 하셨다. 왜 이혼을 했는지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만남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당시 아버지는 화물차 10대를 보유한 운송업체 사장이었고, 어머니는 그 회사에 근무하던 경리였었다. 외할머니의 말로는 당시 20살이었던 어머니는 영화배우 뺨치는 이국적인 외모의 아버지를 엄청 사모했었다고 했다. 당시 유부남이었던 아버지와 결혼을 하겠다고 때를 써서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시고 그 후 내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그동안 어머니의 빈자리와 돌보지 못했던 가정, 그리고 남아있는 아들들을 위해서 이혼하신 어머니와 다시 재혼을 결정하셨다. 아니 설득당하셨다고 해야 될 것 같다.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문 앞에 놓인 수 켤레의 신발들과 아버지의 구두를 보았다. 아버지는 허전함을 달래보고자 친구들과 종종 재미삼아 고스톱을 치셨다. 나는 아버지 옆에서 담배 심부름을 거들며 용돈 버는 재미에 신나게 고스톱 판을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때론 똥 광에 가위눌린 꿈을 꾸기도 하면서 말이다.    나는 예전처럼 아버지 친구들이 고스톱을 치러 왔는가 보다고 생각하며 무심코 방문을 열며 “학교 다녀왔습니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처음 보는 낮선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선은 근심과 걱정, 한숨이 섞인 애달픈 눈빛들이었다. 그중에는 지금의 새어머니도 있었다.    새어머니가 들어오고 나서 10년 정도의 생활은 지금의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어머니에게 구박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그 구박은 밥상 앞에서 더욱 심했다. 난 혼자서 밥 먹은 적이 많았다.    큰 형은 지방에 대학생이었고, 작은 형은 입시준비로 밤에야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화물차 운전을 하시느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으셨다. 또 집에 있는 날에는 장시간 운전으로 인해 잠을 청해야 하셨기에 아버지를 볼 수 있는 시간도 드물었다. 집에 있는 날이면 행여나 아버지가 잠에서 깰까 봐 방문도 도둑놈처럼 소리 없이 열고 닫아야 했고, 발뒤꿈치는 항상 들고 다녔다. 조금이라도 발소리가 나면 새어머니가 당장 달려와서는 불호령을 내리셨다. 아직까지도 이때 베인 습관이 종종 나오기라도 할 때면 습관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어쩌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을 때가 있다. 같은 밥상에서 나는 찬밥을 먹고 내 앞에는 김치만 놓여있다. 반면 형과 아버지 앞에는 따뜻한 밥과 반찬들이 풍성하다. 그 상황을 접하면 그냥 눈물이 먼저 나왔다. 참으려 해도 서러움이 밀려와 목이 메여 밥이 잘 넘어가지가 않는다. 그냥 고개만 푹 숙이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는 밥만 몇 번 씹어 삼키고는 얼른 그 자리를 피했다. 이 같은 일들은 종종 되풀이 되었다.    이런 광경을 접하는 아버지와 형들은 어머니를 나무랐고, 그런 일들로 인해 나는 언제나 부부싸움의 화근이 되었다. 당시 나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    집에서 보내는 하루하루의 시간들이 생존을 위한 눈치의 연속이었고 구박을 덜 당하기 위해서 최대한 머리를 굴려야 했다. 숨 조이는 시간들의 연속이었기에 나는 신경쇠약이라는 정신질환을 얻었다. 또 제대로 된 영양분을 섭취하지를 못해 황달과 간염 등의 질병들도 동시에 얻어 불행하고도 우울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힘겨운 중학교 시절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부터는 집에서 조금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는 집 앞에 있는 인문계를 선택하지 않고 차를 타고 30분은 가야 되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될 수 있으면 집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부터 집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밖에서 풀 수가 있었다. 고등학교 3년 중 반은 친구 녀석들의 집에서 보냈으며 녀석들은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을 알아가면서 각자의 환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나만 힘들고 어려운 줄로만 알았었는데 정도의 차이일 뿐 다들 비슷한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많은 친구 녀석들이 아버지나 어머니 중 한 분이 안계시고 생활 형편도 넉넉지 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환경을 접하고 그들의 고충을 바라보면서 새롭게 느낀 것이 있었다.    비록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그래도 집에 가면 밥이라도 차려주는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이 참 고마웠다. 그것이 김치 하나에 찬밥이라도 나는 그 수고로움에 처음으로 새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물론 그 마음이 계속 유지되지는 못했지만 생각을 다르게 하고 마음을 바꾸어 먹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새어머니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조금씩 바뀌면서 새어머니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바뀌었다.    비록 학창시절 동안 냉전은 지속되었지만 친구들의 환경을 접하면서 나는 새어머니를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어 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군대에 가게 되었다. 6개월 만에 첫 휴가를 받고 집에 왔을 때 새어머니는 펄펄 끓는 된장찌개와 내가 좋아하는 총각김치와 오징어채 등 맛깔스런 반찬들을 장만해 놓으셨다. 나에게 고생했다고 환하게 웃으시며 따사로이 반겨주셨다.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밥상 앞에서 새어머니에 대한 생각들을 하였다.    배 아파 낳은 두 아이를 놔두고 아내로, 어머니로서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시리고 아팠을까….    자식과의 생이별이 얼마나 서럽고 슬픈 일인지 나는 그 기분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고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렇게 아픈 기억을 가지신 새어머니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원수 같은 여자의 자식을 지난 10년 동안이나 밥을 먹이고 키워준 것이다. '얼마나 미웠을까, 힘드셨을 텐데….'    입장 바꾸어 생각해봐도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신 것이다.  나는 이런 새어머니가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다. 감사하는 마음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왔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서 자신의 자식들을 흉보면서 ‘자식 키워도 다 소용없다고, 내가 지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하시면서 나에게 푸념을 털어 놓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하다. 나는 어머니를 보며 이렇게 말씀 드린다. “어머니, 형들이 싫으시고 불편하시면 제가 꼭 모실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 편히 계세요.” 차려주신 밥상을 물리며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이렇게 너스레를 떨어본다. “밥이 참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어머니!”   
129    바라는 게 없으면 댓글:  조회:1553  추천:0  2014-07-24
바라는 게 없으면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와서 저한테 큰 소리로 돈을 달라고 하더군요.  그동안 열심히 직장 다니면서 도와줬으니까 자기가 어려울 때 도와 달라는 말이었는데,  저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를 많이 도와줬으니까 이번에는 형편이 되면 내가 돕는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부부간의 대화도 그런 식입니다. 제가 많이 나와서 지내니까 미안한 마음에 ‘다 늙어서 밥해 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딸들 결혼하고 나면 좋은 사람 만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진작 그러지, 나는 이제 버려도 주워 갈 사람도 없어' 그럽니다.      친정 식구들은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느냐며 질색을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아무렇지도 않고 진심입니다.  정말 그 사람이 좋은 사람 만나서 재미나게 살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런 식으로 서로 걸리는 게 없습니다.      부부 사이라는 게 그래야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자기가 행복하게 해줄 수 없으면 자리를 비켜줄 줄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게 길을 열어 주는 겁니다.      남녀 간에도 가로 막고 있지 말고 비켜 주십시오.  좋은 사람 있다고 하면 손 흔들어 주고 잘 가라고 보내 주세요.  ‘니 꺼 내 꺼’ 싸우지 마시고요.      그리고 만약 다른 길을 가게 되면 원하는 건 다 주고 싶어요.  최선은 다했지만 형편이 이렇게 됐으니까 가진 거 다 주고 잘 살아라, 하고 싶어요.  이런 마음이어야 되지 않겠는가 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이 거짓말 같은가요?  부부간에도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거만 해주면 됐지 뭘 더 바라나요.  바라는 게 없으면 요구할 것도 없습니다.           
128    지금처럼 뚱뚱했어요? 댓글:  조회:1024  추천:0  2014-07-09
  지금처럼 뚱뚱했어요? (눈물의 3단 찬합을 쓰신 분의 부인이야기입니다~)             1997년 IMF 한파가 몰아칠 때 불황이다, 감원이다 다 남의 일인 줄 알았다. 금융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직접 피부에 와 닿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잘 나가던 회사가 금융회사 구조조정으로 퇴출되었다. 10년 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특별한 능력도 없던 나는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퇴출된 회사의 정리 작업 중에 함께 일했던 분의 추천으로 지금 다니는 회사에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봤다. 함께 면접 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입사를 포기 하는 바람에 내가 입사하게 되었다. 당시 팀장님은 나와 같이 면접 본 사람이 더 맘에 들어서인지 처음부터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다. 지원팀 직원이라고 해봐야 전체 10명 정도인 회사에서의 생활은 이렇게 불편하게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 말 한마디 안하고 퇴근한 날이 많았다. 1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떠나 새로운 조직에 들어가 사교성이 뛰어난 것도, 음주가무에 능한 것도 아닌 내가 새로운 팀에 적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팀장님.” 하고 부르면 팀장님은 다른 사람은 그냥 “팀장님.” 하는데 은영 씨만 “○팀장님.”으로 부른다고 꾸중을 하시는 등 하는 일마다 꼬투리를 잡고 잔소리를 하셨다. 그 팀장님의 특징은 화를 낼 때 불편한 사람에게는 꼭 존댓말을 쓰시곤 하셔서 기분이 좋은지 아닌지는 존댓말 여부로 확인이 가능했다.    팀장님과 하루도 그냥 지나가는 날이 없을 정도로 견디기 힘든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새로운 업무로 나를 채용했는데 새로운 일은 점점 더디게 진행됐고 팀장님과의 관계도 계속 악화되었다.    어느 날 저녁 팀장님이 맘에 안 든다는 얘기만 계속하자 이제 그만 다니겠다고 큰소리치며 울면서 회사를 뛰쳐나오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상황을 안 중간관리자인 대리가 저녁을 사주면서 “1년만 같이 일하자. 그 이후에 떠나도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그만두면 억울하지 않겠느냐!”며 설득을 하기 시작했고 설득에 넘어간 난, 1년만 있자고 결심하고 다시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후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열심히 다니고 있다.^^      대리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첫 출근 하던 날, 술을 얼마나 드셨는지 출근시간에 출근도 못해 지각했다고 엄청 혼나고 계셨다. 얼굴은 검은데다가 술 냄새 팍팍 풍기고 몸은 뚱뚱하고 약간 느끼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날 이후 새로운 업무를 같이 시작하게 되었다. 전에는 혼자 덩그러니 떨어져 일했는데 옆에 앉아서 회사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업무를 많이 챙겨 주셨다.    한 사람으로 인해 회사생활이 괴로울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경험했다. 밤늦게까지 야근을 해도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그때 그 시절의 대리님은 얼마 안 있어 다른 곳으로 이직했으나 그는 현재 내 남편이자 도반이 되었다. 무뚝뚝한 나를 대신해 약간의 애교로 나를 웃게도 해주고 내가 마음 아파 괴로울 때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고마운 남편이다.    지금이야 이렇게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 남편이 결혼 초에는 무던히도 속을 썩였다. 결혼하자마자 남편만 지점으로 발령 났는데 회사에서 영업하라고 압박을 하니 결국 일반적으로 증권사 영업사원들이 망하는 지름길로 가는 일임매매를 하였다. 파생상품이라는 것이 어렵다 보니 아줌마들이 스스로 투자 하지는 못하고 돈 불려 달라고 남편에게 맡긴 것이다. 남편 또한 실적에 쪼이다 보니 덥석 받았고…. 그러면서 항변하길,  “지점장님 이하 모든 영업직원들이 다 이렇게 영업해. 실적도 채우고 돈도 벌면 일석이조니 얼마나 좋아? 믿어봐!” 큰 소리 뻥뻥 치고….    이 장면을 보는 나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증권사 생활 10년 짬밥의 선배인 내가 보기에 남편은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절벽을 향해 가는 어린 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장 경험이 많아 돈을 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당시에는 남편 또한 파생금융상품 투자에 초보라 1년 동안 무려 1억씩 까먹었다. 한 달에 150만 원 정도 받으면서 두 달을 주기로 몇 천씩 대출을 받아 회사에서 정한 목표를 채우느라 힘써 계좌를 돌린 결과이다.   참다 참다 못해서 내가 한마디 하면 그날은 서로 한바탕하고 2~3일 냉전 기간을 거쳤다. 이후 잠잠하다가 또 대출 받아야 할 때쯤 되면 전쟁을 되풀이 하니 지금까지 결혼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바로 이 1년 동안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남편은 어떻게 하든지 그 상황을 타개하려고 무지하게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남편 왈, “그때 시장에 대해서 공부한 것처럼 학교 다닐 때 공부했으면 아마 고시도 몇 번은 붙었을 거야~”   지금은 그 동안 진 빚은 다 갚고, 남편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큰 집은 아니지만 빚 없이 집을 마련했다. 이직하고 회사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었을 때 내게 베푼 따뜻함에 이끌려 사랑을 느껴 결혼을 했다. 결혼 초엔 무던히도 애를 먹이더니만 2002년 가을부터 명상을 시작한 이후 서로 동일한 가치관을 공유하면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었다. 싸울 일도 줄어들고 어느덧 마음의 여유도 생기면서. 사람들은 지금도 가끔 나에게 묻는다.   "결혼 전에도 지금처럼 뚱뚱했어요?"  "네, 지금보다는 약간 슬림했지만 기본체형은….”  "그런데 어떻게 결혼했어요?" 그러면 나는 그냥 배시시 웃는다. 그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배불뚝이고 못 생겼지만 마음은 참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여보!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워요.   
127    천하태평 댓글:  조회:1538  추천:0  2014-07-07
  천하태평       저를 포함한 저의 가족 4명의 공통적인 성격은 천하태평이라는 점입니다. 남편은 20여 년 다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사표 내고 들어온 날 밤, 쿨쿨 잠을 자 저를 감탄하게 했습니다.      큰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 년여를 실업자로 지내면서도 태평하여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요즈음, 매일 입으로는 '죽겠다'를 연발하지만  전혀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둘째 아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매일 지각을 하여 담임선생의 전화 항의를 여러 번 받았습니다.  한번은 몸이 아프다는 아이를 차로 학교 앞까지 바래다 주고  우연히 만난 담임선생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는 그 같은 항의를 더 이상 받지 않게 되었지요.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너무나 태평한 아이 엄마의 태도에 질렸었나 보다 합니다.      현재는 대학을 그만두고 식당 종업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몇 달 만에 '우수직원상'을 두 번이나 받더니  오늘은 그 상으로 그 식당에 가족 저녁초대를 받았다며 오라고 야단이에요.  내년 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지만 식구들은 모두 그런가 보다 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업자 남편을 두고, 혼기를 앞둔 딸이 속절없이 나이 먹어 가는 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고,  국내 대학에서도 공부를 못해 중단한 딸이 아르바이트로 여비를 마련해 해외 유학을 가겠다고 까불어도 아무렇지 않은 태평한 제가,  지난번에 다녀간 몇몇 분의 고통이 가슴 깊이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 분은 가정불화에 대해 물어왔습니다.  되풀이되는 이야기인데, 본인들은 여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가정불화이면 집에 가서 당하면 될 일이지 왜 자나깨나 그 걱정이란 말입니까.  퇴근해서 집에 가면 저녁 먹고 잘 때까지 두세 시간 겪고 쿨쿨 자면 될 일을  왜 24시간 겪느냐는 말입니다.      다른 한 분은 남편의 종교에 대해 관여해야 하는지 고민입니다.  부부간이라고 해도 배우자가 어떤 종교를 갖건 그건 그 사람이 결정할 일입니다.  성인이란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행하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배우자라고 해도 상대방의 어떤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한 번 전달하면 그것으로 책임은 다한 것입니다.  매번 항의하고 화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변한 모습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도록 행동으로 보여 주면 그뿐입니다.  왜 소모를 한단 말입니까.     또 한 분은 하는 일이 잘 안 되어 얼굴이 새카매져서 고개를 들지 않는군요.  초상집 분위기이고. 왜 그러는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가.  바닥이면 올라가면 될 일을 가지고 왜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신경 쓰게 하는가.  자신의 감정을 주체 못하는 모습입니다.      갈등과 고통은 한 순간으로 족하며 깨닫는 순간 놓여나야 합니다.  24시간 갈등하지 마십시오.  24시간 고통 받지 마십시오. 그런 일에 에너지 소모 말고 자신을 더 크게 확대시켜 창조적인 인간으로 만드십시오.      텔레비전에서 수천 명의 인명이 한꺼번에 살상되는 순간을 목격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분들이  자신의 눈곱만한 일에는 어찌 이다지도 고통스러워하며 헤어나지를 못하십니까.      이 글을 읽는 즉시 자신의 문제를 훌훌 털고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일들에 자신을 소모하기에는 우주는 너무 넓고 할 일은 너무 많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일이 문제가 아닌 우주와 인류를 위한 진화된 우주인으로 살아가며  답답하지 않은 세상을 만듭시다.       
126    눈물의 3단 찬합 댓글:  조회:1001  추천:0  2014-07-04
눈물의 3단 찬합           4,50대 사람들에게 ‘지금으로부터 2~30년 전 대학 1년 때의 그 환경 그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겠는가?’ 라고 질문을 한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다시 그 젊은 시절로 돌아가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젊음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정말 보람 있게 인생을 다시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인 유혹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만약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듣자마자 ‘Never!’ 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때의 생활을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40대 중반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지금까지의 고생 중에서 대학 생활 때만큼 고생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대학 입학금만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고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받은 기억이 없다. 등록금 및 생활비 등 모든 것은 내가 벌어서 충당했다. 입학한 첫 학기부터 생활고로 인해 눈물의 연속이었다. 그 고통이 직장에 취직할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대학생에게는 불법이었던 과외를 하면서 지하철에서 신문팔이도 열심히 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니 자연히 공부는 등한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과외하다 해고된 달은 돈 천원이 없어서 굶기가 다반사였다. 어떤 때는 3일 동안 자취방에 앉아서 물만 먹은 적도 많다.  “3일 굶고 남의 집 담을 안 넘을 사람 없다.” 그 말은 정말 진실이었다.    객지생활에서 제일 서러운 것이 차디찬 겨울에 연탄 한 장 살 돈, 밥 먹을 돈, 약 사먹을 돈도 없는 상황에서 배도 고프고 아파서 골골하면서 차디찬 방에 혼자 누워 있을 때이다. 여기에 명절까지 겹치면 정말 서럽다.    이 다섯 가지가 함께 하면 정말 외로움이 무엇인지 막막함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대학 생활 7년 동안 딱 세 번 펑펑 운 적이 있었는데 한 번은 견디다 견디다 도저히 못 견딜 만큼 너무 힘들고 서러워서 울었고, 두 번은 너무나 감사해서 울었다. 1992년 12월 31일 저녁, 이 날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대학졸업반이었고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 조건이 완벽하게 구비된 날이었다. 남들은 신년을 맞이하는 즐거움에 취해 있을 시간, 나는 차디찬 자취방에서 몸져누워 있었다. 주인아주머니가 불쌍해서 몇 장 준 연탄이 떨어진지도 며칠 째, 나는 또 한 번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온 몸이 불덩어리처럼 타 오르고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 헤매고 있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미닫이문이 열리며 대학 과 친구와 그의 여자 친구가 들어왔다. 내 사정을 잘 아는 친구였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찾아 왔다면서 무엇인가 꺼내어 앞에 내려놓았다. 3단 찬합이었다. 열어 보니 정성스럽게 싼 김밥, 유부초밥, 그리고 각종 맛깔스런 반찬들이었다. 보온병에 담아온 따뜻한 차 한 잔 건네주면서 배가 고플 텐데 먹으라고….   김밥 한 조각을 먹고 씹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눈물을 쏟고 말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그때를 떠 올리자 다시 눈물이 난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 고맙다는 말이 목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 친구는 내가 먹는 동안 조용히 나가더니 약을 사 가지고 왔다. 밥 먹고 약 먹으라고…. 다시 한 번 내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맺혔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다짐을 했다. 평생 동안 베푸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매달 내 수입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내고 매달 그 이상을 나 또는 가족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쓰겠다고. 친구가 가져온 3단 찬합은 평생 고마운 기억으로 남아, 그때의 다짐을 실천하며 지금의 삶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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