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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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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바닥에 떨어졌을 때 댓글:  조회:1681  추천:0  2014-06-28
바닥에 떨어졌을 때         바닥이라는 것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경기도 사실 바닥권이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때부터는 올라가는 일만 남은 거거든요.          뭐든지 제대로 되려면,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바닥권으로 뚝 떨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제대로 됩니다.  그렇게 안 되려고 미봉책으로 자꾸 땜질을 하니까 바닥으로 떨어지지도 못하고,  오히려 부작용이 납니다.         유능한 사람이라면 한번 그렇게 떨어져 볼 필요도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모든 면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다음에,  그 다음부터 곤두박질치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걸 죽기보다도 싫어합니다.  안 떨어지려고 대롱대롱 매달리는데, 한번 떨어져 보십시오.  그것처럼 후련하고 시원한 게 없습니다.  그 때는 위만 보면 되거든요.          그리고 한번 어떤 자리에 오르면 그 상태를 지키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수성(守成)이라고 하죠. 지키는 것이 더 힘듭니다.  올라갈 데가 있다는 건 참 행복한 것입니다.  바닥에 떨어졌을 때는,  편안히 떨어져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마음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124    뚝배기 한 그릇 댓글:  조회:938  추천:0  2014-06-25
뚝배기 한 그릇             “오늘 대전에서 잘 거지? 이따 다섯 시에 대흥동 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기다려.” 중학교 3학년 고입체력장 전날 옆 반 담임이신 사회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예.”라고 대답을 하고서도 우리 담임도 아니신 분이 무슨 일로 보자 하실까 의아했다. 소규모 시골학교라서 학생과장을 겸임하셨던 그분은 엄격하시기로 유명한 분이셔서 학생들이 무서워하는 선생님이었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대덕군 관내에 있었고 체력장은 1시간 3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유성중학교에서 시행되었다. 대전에 사시는 고모 댁에서 자고 아침에 유성으로 가기로 하고는 고모 댁에 들렀다가 시외버스터미널에 나가 선생님을 기다렸다. 곧 선생님께서 오시더니 따라오라신다. 한참을 가시더니 어느 식당으로 들어가신다. 시골에서 가난하게 자라서 자장면 한 그릇 사서 먹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고급 한식당의 분위기에 어리둥절하며 선생님을 따라 앉았다. 검은 뚝배기 그릇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처음 본 음식이 한 그릇 나왔다.  “이 집은 우족탕을 전문으로 하는 집이야. 돌그릇을 불로 달구어놓고 탕을 담아주니 다 먹을 때까지 뜨거울 거야.   조심해서 천천히 다 먹어.” 유난히 숫기가 없었던 나는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 뜨거운 우족탕을 천천히 맛있게 먹었다. 선생님께서는 맞은편에 앉아서 먹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나의 가정 사정을 잘 아셨기에, 학비가 없는 금오공고에 진학을 권유하시면서 학교장 추천을 받아주셨다. 그 학교는 10월에 따로 무시험 전형을 했는데, 담임선생님께서 첫 부임지가 그 학교가 있는 구미였다면서 함께 가 주셨다. 그리고 교통비와 숙식비를 모두 다 내주셨고 다행스럽게도 나는 합격을 했다.    그리고 대전고에도 원서를 내보라고 하셨다. 시험보기 전날, 선생님께서 대흥동 버스터미널 앞에서 기다리라 하셔서 나갔더니, 이 분도 나를 데리고 그 우족탕 집에 가셔서 우족탕 한 그릇을 주문하셔서 또 나만 먹게 되었다. 역시 고맙다는 말씀도 못 드리고 묵묵히 먹었다.   대전고에도 합격하여 선생님들이 많이 기뻐하셨다. 대부분 선생님들은 내가 대전고보다는 학비를 내지 않는 금오공고에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셨는데, 영어 담당 선생님께서는 대전고로 진학할 것을 권유하셨다. 그 선생님은 당뇨병이 심하셨고 귀가 어두우셔서 보청기를 끼셨다. 일제 시대에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셨지만, 학도병에 다녀오시지 않아 졸업장을 받지 못해서 평생 평교사로 지내셨다. 편찮으시면서도 참 열정적으로 가르치셨다. 그분은 내가 가정형편 때문에 대전고를 포기하는 것이 안타까워 그 고장 출신이면서 공화당 원내총무였던 어느 국회의원 사무실에 가서 장학금제도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러 다녀오시다가 뒤에서 오는 기차소리를 듣지 못하시고 사고를 당하실 뻔하기도 하셨다.   유난히 허약해 보였던 제자가 힘내서 시험을 잘 보라고, 함께 드시지 못할 정도로 가격이 부담스러웠을 우족탕을 사주셨던 사회선생님께서는 많지 않은 연세에 돌아가셨다. 대사동에 사시면서 새벽에 보문산 등산을 즐기셨는데, 어느 날 새벽 여느 때처럼 등산 가시다 쓰러지셔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나를 댁으로 데리고 가셔서 한 가족처럼 대해주셨고 나도 스스럼없이 선생님 댁에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소집되어 군대에 갔는데, 대전에서 근무하면서 종종 선생님 댁에 다니곤 했다. 그러나 제대하고 대학에 들어간 후부터 제대로 뵙지 못했다. 그리고 영어선생님께서는 정년퇴임 후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5공화국 시절이어서 대학생들의 과외가 금지되어 체육과 교수님들의 자료를 번역해 드리며 공부했는데, 무리하였는지 몸이 많이 아팠다. 졸업하고 인천으로 발령을 받은 후에 대수술을 했고, 계속 건강이 좋지 않았다.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제대로 놀 줄도 모르고, 항상 무슨 일에든 몸과 마음이 매여 무겁게 살아와서인지, 우울증환자가 되었다. 마음은 있어도 실행이 되지 않았다. ‘감사’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 우족탕과 함께 그분들의 제자 사랑이 떠오르고, 담임선생님을 찾아뵙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교사로 학교에 근무하면서 그 선생님들께서 베푸셨던 그런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그 선생님들 생각이 나면 죄스러운 마음이 크다. 스승의 날이 돌아오면 아이들 앞에 제대로 서지 못했다.    올해는 시간을 내어서 대전에 살고 계실 것이라 생각되는 옛 담임선생님을 수소문하여 찾아 뵐 것을 다짐해본다.   내리 사랑이라고, 그분들이 베푸신 은혜를 똑같은 형태는 아닐지라도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베풀어보고 싶다.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을 때 베풀어 주셨던 세 선생님들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되신 사회, 영어선생님이셨던 두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123    초승달과 보름달 댓글:  조회:1550  추천:0  2014-06-23
초승달과 보름달           지난날을 돌아보면 후회도 되고 아쉬운 점도 많으실 겁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시고 저녁에 지는 태양을 보십시오.  열두 시간도 못 돼서 한쪽에서는 떠오르고 한쪽에서는 집니다.          만일 ‘지금 나는 살만 하다’ 싶으신 분은  '나는 지금 떠오르는 태양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시고,  ‘내가 지금 곤궁하다, 마음이 가난하다’ 하시는 분들은  '나는 지금 지고 있는 태양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십시오.          그런데 해가 지고 그냥 마는 게 아니라 몇 시간도 못 견디고 또 떠오릅니다.  그렇듯이 '내일이면 나는 떠오를 것이다' 하면 됩니다.  또 지지 않는 해가 없습니다.  떠오르면 지기 마련입니다.         그보다 여유 있으신 분들은 '나는 달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십시오.  초라해지시면 ‘나는 지금 그믐달이구나,  커지려고 하는 초승달이구나’ 그렇게 생각하시고,  또 지금 살만 하고 기분 좋으신 분들은 ‘나는 지금 보름달이다.  머지않아 지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셔서,  자만하지도 말고 비관하지도 마십시오.          '만월이다, 초승달이다' 얼마나 쉽습니까? 한 달도 못 돼서 지는데  거기에 너무 만족하고 교만해지지 마십시오.  한 달 지나면 또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122    나 같은 사람 또 보면 안 되지! 댓글:  조회:1318  추천:0  2014-06-18
나 같은 사람 또 보면 안 되지!               징~ 슈~ 철거덕, 징~ 슈~ 철거덕…. ‘어? 기계가 왜 그러지? 설마!!!’  IMF로 회사는 망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겠기에 덜렁 들고 나온 풍선인쇄기계가 가끔씩 말썽이다. 풍선을 인쇄하는 일은 잔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풍선은 불면 부피팽창을 많이 하므로 불어서 인쇄를 하지 않으면 불었을 때 글자가 깨지게 된다. 꼭 바람을 불어서 인쇄를 해야 한다. 기계에 풍선을 하나씩 끼워 넣어주면, 한 칸씩 이동되며,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가고, 인쇄, 추출하는 공정을 반복하게 되는데, 하나씩 넣어주는 단순한 노동이 팔팔한 나이였던 나에겐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기계야 고장이 나면 고치면 되지만, 문제는 납기일에 쫓기고 있을 때 주로 고장이 난다는 것이고, 고장 나서 수리공을 부르려면, 최소 10~20번 전화를 걸어야 하고 밍기적 거리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한껏 내세우는 수리공들의 태도가 더 진저리쳐진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바람을 압축시키는 컴프레서가 고장인데, 기존 거래처는 얼마나 바쁘신지 오는 데 3시간, 부품 가져다가 수리하는 데 2시간, 도합 5시간이 걸린단다. 물어물어 알아둔 새로운 곳에 급하니 서둘러 달라며 수리를 부탁하였다. 납기시간을 계산하니 2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수리공이 오면 어떻게든 2시간 안에 고쳐야 하므로, 이 궁리 저 궁리하며 생각해 보건데 정중히 부탁하는 것이 제일일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얕잡아보고 늑장부리면 낭패인데 어쩌지?     이 일을 하고 있으면 참 여러 가지 황당한 경우가 부지기수로 발생한다. 급하다고 하여 밤새워 인쇄해주면 고맙다며 오늘 중으로 송금한다고 하고선 떼어먹고, 어떤 이는 사람을 믿지 못하면 어찌하느냐며 생떼 써서 믿어주면 떼어먹고, 자신은 그런 사람 아니라며 속고만 살았냐며 눈알을 부라려서 내어주면 떼어먹고, 사업하는 사람이 그깟 5만 원 때문에 쫀쫀하게 그러지 말라며 떼어먹고, 자신도 돈을 못 받아서 그러니 받으면 준다고 기다리라고만 하고, 돈은 있는데 차비가 없다며 3만 원만 나중에 준다며 소식 없고, 100만 원 수표 보여주며 90만 원 거슬러 달래서 나중에 현금으로 달라하면 떼어먹고, 처음엔 완결, 점차 일부를 덜 주다가 결국 미수금 떼어먹히고…. 그렇더라도 ‘난 단지 믿었을 뿐이고~’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일은 반드시 차질 없게 하려고 노력하는데 그 반대의 경우가 발생할 땐 어찌될지 암담하기만 하였다. 얼마 후 60이 넘어 보이고 평온해 보이는 인상의 아저씨가 와서는 컴프레서를 보자고 한다. '어휴, 인상은 좋은데 나이도 많고. 믿고 정중하게 부탁할까? 아냐! 일인데 인상과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2시간 안에 빨리 고쳐야 하는데' 납품을 못했을 경우를 생각하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페널티로 물어 낼 돈도 돈이지만, 줄줄이 빌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하니 아찔하다.   "아저씨! 2시간 안에 고칠 수 있어요?" "해봐야지요." "무조건 고쳐야 됩니다. 아시겠어요?" “….” "물건을 제대로 만들어야지! 이거 툭하면 고장이고. 아저씨들은 고장 나면 돈 벌어서 좋지? 그래 남 고통이 아저씨들에겐 기쁨이라니까! 2시간 넘을 거면 아예 손도 대지 마세요!"   아무 말 없이 얼마 정도 비용이 나온다며 바삐 손을 움직인다. 심하다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10분 정도 간격으로 들락거리며 무언의 압력을 가한다. 1시간 정도 시간이 지나자 전기를 넣어 보란다. 스위치를 올리자 컴프레서가 돌며 공기의 압력을 기계 쪽으로 보낸다. 성공이다!    '오! 주여, 오! 하나님, 오! 부처님, 감사합니다!' 속으론 만세를 연발했지만 겉으론 ‘수고 했습니다’ 소리도 안하고 퉁명스럽게 다음에 또 보자고 하였다. "나 같은 사람을 또 보면 안 되지!" "뭐라고? 이 아저씨가 일 잘 하고선?"    그때 아저씨와 눈을 마주쳤는데 순간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느껴졌다. 눈물이 핑 돌아 고개를 돌리곤 부끄러워 아저씨를 바로 볼 수 없었다. 그 말 속에는 자신을 무시하여 화를 낸 것도, 돈 때문에 이런 일 하는 것도 아닌, 부디 기계를 잘 다루어 자신과 같은 A/S 기사를 부르지 말라는 염려와 당부, 젊은 나이에 열심히 사는 모습이 예쁘다는 칭찬과 정이 들어 있었다.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이것저것 묻더니, 기계에 대해 설명해주며 또 볼 수 있는 거라며 오해하지 말란다. 자기는 컴프레서만 보면 그 집 상황을 다 안다고. 자네보다 더한 경우도 있다며 괜찮다고 위로를 해준다. 그 후에도 가끔씩 정기적으로 기사를 보내어 컴프레서를 점검하여 주고, 미리 조치를 취해주셔서 그 후 컴프레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지친 시기에 내 가슴을 울려준 고마운 한마디였다. 나의 잣대에 세상이 맞춰지기를 바라던 시기였다. 나의 무지가 깨지고 두들겨지는 만만치 않은 세상공부 중이었던 때였다. 하루하루를 넘기는 게 힘든 시기였지만,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 후에도 상황은 계속되었지만 비슷한 것은 있어도, 똑같은 것은 없는지 예상하고 준비한 일일지라도 막상 나의 일로 닥치면 새롭고 당황스러운 것이 삶인가 보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대입하며 선택의 기로에 설 때는 늘 외로울 뿐이다. 한 번의 실수가 하나의 경우의 수를 더하고, 경우의 수가 더해짐에 따라 나는 노회해진다. 열정이 식어야 주위가 보이는데, 다들 그러고 살고 있다. 그래도 내가 제일 잘났다는 자기 포만감과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를 갖고선 그냥들 산다.     8년이 지난 재작년에서야 그 아저씨 소식을 들었다. 몇 년 전에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하더니 소식이 끊겼었는데 그 사이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전부터 배가 좀 아프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술을 찾더니만 병원에 가보니 암이셨단다. 자기는 병원에 입원해야하니 이제 진짜로 자주 보기 힘들겠다고 하시기에 걱정 말고 병원 가서 치료 잘 받으시라고 한 것이 마지막 인사였다.    "알았다. 열심히 일 잘해라!" 하며 껄껄 웃으시더니 일주일 만에 돌아 가셨단다.   징~ 슈~ 철거덕, 징~ 슈~ 철거덕. 멈출 줄 모르고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는 컴프레서를 보고 있자니 그날 그분이 '나 같은 사람 또 보면 안 되지!' 하시며 웃으시는 것 같다.    
121    가난한 예술가의 행복 댓글:  조회:1581  추천:0  2014-06-10
      가난한 예술가의 행복           천상병 시인 얘기 아시죠.  하루에 천 원인가를 부인한테 타가지고 나와서 차 마시고 밥 먹고 술 마시고 다 합니다.  그런데 무슨 특별한 날에는 이발도 해야 되고 그러니까 더 달라고 떼쓰고,  이런 얘기가 시에 나옵니다.          그러면서 구박받는 것을 상당히 즐거워하시더군요.  왜냐 하면 그렇게 자기한테 용돈 줄 사람 있으니까…….  그런 분들이 시인입니다.           이상 시인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화류계 여성에게 얹혀살면서 굉장히 행복해 합니다.  바라는 게 없기 때문이죠.  그저 술 한 잔 마시면 되고, 누워서 잘 데 있으면 행복했답니다.            지금 제일 인기 있는 시인이 이상입니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몇 십 년 동안 계속 그래요.  또 가장 인기 있는 화가는 이중섭인데,  그분도 그렇게 살다 가셨습니다.         EBS에서 가끔 세계의 화가들을 순례하면서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합니다.  엊그제 르누아르 편을 봤는데 고흐가 나오더군요.  고흐가 너무너무 가난해서 하여간 물감 살 돈도 없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그걸 보고 르누아르가 먹을 것을 고흐에게 가져다주는데,  르누아르 부인이 우리도 먹을 게 없는 형편에 거기 퍼다 주냐고 하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그런 걸 딛고 이룬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건 돈 버는 게 아니고,  그림 그리는 거니까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그림을 그린 겁니다.  지금은 고흐 그림 하나에 몇 백 억씩 되죠.  그런데 당대에는 그렇게 가난했습니다.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은 그렇게 한 가지로 끝을 보는 분들입니다.  대개 옆에서 흔들면 같이 흔들리기 쉬운데,  내내 초지일관하시는 분들이 후세에 길이길이 작품을 남기시더군요.        
120    법복을 벗고 댓글:  조회:1594  추천:0  2014-06-07
법복을 벗고           정치나 경제를 하부구조라고 합니다.  그것이 근간이 되어서,  철학이나 아름다움의 추구,  인간답게 사는 것,  이런 것들을 받쳐주는 겁니다.          그런데 후진국으로 갈수록 정치나 경제가 지배하는 사회가 됩니다.  선진국에서는 정치나 경제는 기타 분야를 받쳐주는 근간이 되는 것이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야는 인간다운 삶이라든지 환경이라든지 그런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정치가 너무 많이 지배하고 경제가 너무 많이 지배하고 있는데,  그런 것들이 사실은 객입니다.  도와주기 위한 것인데 뒤바뀌어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철학이나 학문하는 분,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분들이 대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하고,  사람들이 그런 쪽 일을 하고 싶어 해야 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쪽을 하시하고  지금까지는 무조건 타이틀이나 학벌을 추구하는 사회가 되어 왔습니다.          앞으로는 점점 바뀔 것입니다.  요즘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럴 듯한 직업에 계신 분들도 다 던지고  진로를 전환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사회가 와야 되고요.  정말 내가 해야 되는 일이 뭔가, 이런 걸 찾는 사회가 와야 되는 겁니다.            신문에 가끔 소개가 됩니다.  어느 원로 법조인은 판결 한 번 잘못한 것 때문에 법복을 벗고 산으로 들어가셨다고 하더군요.  내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단 말이냐, 하는 거죠.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판사들이 판결하고 나서 자랑스럽게 ‘오늘 한 건 했다’ 하는 사회가 돼서는 안 됩니다.  과연 내가 이걸 제대로 했는가, 이렇게 두려워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요즘 드라마에도 보면 소시민들이 나옵니다.  분실물센터에서 일하는 여자, 전철기관사……,  등장인물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 소시민들이 주인공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구나’ 하고 반가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는 그럴 듯한 사람들이 늘 주인공이었습니다.  아니면 시청자들이 안 봤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김밥 말아서 시장에 내다 파는 사람들도 주인공으로 나오고,  어느 새 그걸 굉장히 좋아하면서 보는 사회가 됐습니다.  이 사회가 진짜 그렇게 되어야 하고요.              
119    나의 20대 댓글:  조회:1003  추천:0  2014-06-06
나의 20대           나의 20대는 늘 우울했다. 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가진 것이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에 가장 우울했던 건 가진 것이 없는 상황을 극복할 만한 긍정적인 사고가 그 시절 나에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30대로 오면서 뒤를 돌아다보며 깨닫게 된 것이지 20대는 그걸 극복할만한 위안을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시 20대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나의 대답은 'No'이다. 좌충우돌, 질풍노도…. 이런 단어들과 어울리는 20대는 한 번 경험으로 족하다.     1998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던 기억이 있다. 아마 나에게만 추웠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6명의 식구가 2층 슬래브 집에서 전세를 살던 시절이었는데, 집에 난방이 되질 않았다. 우리 동네는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LPG가스로 난방을 하곤 했는데, 가스를 주문할만한 돈이 없어서 난방을 하지 못했다. 날씨가 추워지면 추워질수록 집은 바깥 날씨보다 더 춥게 느껴지곤 했다.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던 아버지는 그해 겨울도 공장 하나를 정리하고는 이곳저곳을 전전하셨지만, 일을 해주고도 돈을 못 받는 상황만 되풀이 되었다. 엄마는 늘 그랬듯이 경제적인 문제로 아버지와 싸우셔서 집안의 냉기를 더욱 부추기곤 했다. 전기장판이 하나 있었지만, 형제가 4명이나 되다보니 서로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다가 먼저 드러눕는 사람의 차지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부모님은 한 번도 전기장판을 탐내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난 지금도 추운 것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해 겨울,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학교에서 1년에 4명씩 일본 문부성 추천으로 교환학생을 선발하는데 발탁된 것이다.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면 1년간 학비가 면제였고, 매달 8만 엔의 생활비를 지급받아 생활할 수 있었다. 발탁소식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아! 이제 추운 집은 벗어나는 구나’ 라는 생각이었다. 나중에 일본에 가서 보니 온돌시스템이 되어 있지 않아 추운 건 마찬가지였다.   일본에 갈 준비를 한참 하고 있을 때였다. 학교에서 1년에 4명씩 가게 되므로 먼저 간 선배들이 준비사항이나 여러 가지 정보를 올 사람들에게 미리 전화나 이메일로 전해주었는데 그 준비사항 중에 나를 당황케 한 목록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 갈 때 50만 원의 현금을 들고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슨, 우리는 월초에 들어가게 되어있는데 생활비로 나오는 8만 엔은 월말에 주어지므로 그동안 살 수 있는 생활비와, 그곳에서 구입해야 할 필수생활품 등을 구매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루하루 근근이 생활하는 빈털터리인 나에게 50만 원은 정말 큰돈이었다.   ‘이 돈을 어디 가서 구한다?’ 하루 종일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해도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부모님한테 이야기하면 어디 가서 돈을 꾸어서라도 보태주시겠지만, 왠지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돈이 있다면 차라리 난방이 되는 집에서 단 며칠이라도 동생들을 재우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가야한다. 아니, 가고 싶다. 돈은 없다. 돈을 마련해야 한다. 어디서 마련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퍼뜩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방학 때마다 한 연구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그 연구소의 한 박사님이 생각났다. 혼자 싱글로 사시면서 가끔씩 아르바이트생들을 모아서 맛난 것을 사주시곤 하던 분이다. 특이한 점은 점심시간마다 명상을 하신다면서 눈을 감고 몇 십 분씩 조용히 계셨고(나는 그것을 잠자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철저하게 채식을 하시는 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분이 모 학교의 교수님으로 가셨다는 소문을 접하고 그 학교를 찾아갔다. 그분을 찾아간 이유는 단순했다. 그 당시 아르바이트생들을 모아 맛난 것을 사주셨으니 돈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분한테 50만 원을 꾸어 일본 경비를 마련할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친하지도 않으면서, 밥 몇 번 얻어먹은 인연으로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해서 돈을 꿀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그분 학교로 가는 동안 내가 고민을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50만 원을 꾸어달라고 말을 할 때, 그분 얼굴을 보지 못하고 탁자만 멍하니 바라보다 일본 어쩌고저쩌고 앞 뒤 말은 다 빼먹고 50만 원이라는 주제어만 넣어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는 것과 그분의 당혹스런 표정과 첫마디, 그리고 그 후 한참 동안 울었다는 기억밖에는 없다.   “저… 저, 50만 원만 꿔주세요.” 그분은 몇 분 정도 망설이다 어렵게 말을 떼셨다. “음. 어쩌지? 나 돈 없어…. 생각보다 가난한 사람이야. 이걸 어쩌지?” 그분도 너무 당황스런 나머지 단어로만 이루어진 대답을 하셨다.   “네…, 괜찮습니다.” 라고 말했지만, 이미 내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미안함과 뒤늦게 느껴지는 창피함, 그리고 이젠 어쩌지… 하는 당혹감이 뒤엉켜 나오는 눈물이었다. 내 눈물을 보시던 그분은 더 당혹해하셨다.   “잠시만 기다려봐….” 그분이 잠시 나가시더니 손에 봉투 같은 걸 하나 들고 오셨다. “50만 원은 못해주겠지만, 얼마 안 되는 용돈은 줄 수 있을 것 같다. 이 돈은 내가 그냥 주는 거야.”  그러면서 봉투 하나를 내미셨다. 나는 그 봉투를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그분 방에서 나오면서 눈물이 너무 나서 화장실로 바로 달려갔다. 화장실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서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냥 창피하고, 또 미안하고, 그리고 너무 고맙고…. 그런 감정들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되어 흘러나왔다.    한참을 울고 나서 봉투를 열어보니 20만 원이 들어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분은 그 달에 번 돈을 모두 쓰는 분이었다. 즉 있으면 쓰고 베풀고 해서 잉여재산이 없는 분이셨던 것이다. 아마도 현금서비스를 받으셨거나 옆방 교수님께 빌리신 듯 보였다.    나머지 돈은 부모님이 융통을 해주셨다. 그렇게 50만 원을 마련하고 일본으로 날아갔다. 그날의 그 경험이 있어서인지 얼굴에 철판을 까는 용기가 더욱 강해졌다. 동네 소바 집에 들어가 일본어를 더 많이 경험해보고 싶어서 그러니 아르바이트를 달라고 당당히 말해 일주일에 두 번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고, 한국어 과외를 해서 교환학생 치고는 나름 풍요로운 생활을 하기도 했다.    교환학생에서 돌아온 이후 그분께 한 학기 등록금 후원을 받았다. 교환학생에서 돌아온 첫해에 장학금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아는 지인을 통해서 그분이 내 상황을 알고 먼저 연락을 해오셨다. 그냥 주면 빚이 된다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받아가라고 하셨다. 나중에 보니 아르바이트라기보다는 그냥 주는 돈이나 다름없는 아르바이트거리였지만, 그분이 내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배려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10년도 넘은 기억이지만, 그때의 그 경험으로 나는 좀 더 달라졌다. 좀 더 세상을 알게 되었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지금은 나름대로 직장을 잡고 안정적으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작은 평수지만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는 따뜻한 집이 생겼다. 지금 나는 소득의 일정부분을 아동후원과 몇몇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그것이 그분이 나에게 베푼 친절을 갚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 시발점이었는데, 베풀면서 내가 더 많이 얻는다는 것을 오히려 배웠다. 그러고 보니 인생은 배움의 연속인 것 같다.   몇 년을 기부해도 그 20만 원은 절대 갚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소득의 일정부분을 떼어 주는 것이지만, 그분은 바닥을 박박 긁어서 주신 돈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돈을 주실 때는 “이건 그냥 주는 거야.” 내지는 “대가를 치르고 가져가는 거야….” 라고 하시는 말씀들. 돈을 주신 고마움과 함께 나를 배려해주신 그분의 마음이 느껴져 고개가 숙여진다. 고마운 그분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118    행복이란 상대적인 것 댓글:  조회:1449  추천:0  2014-06-02
행복이란 상대적인 것         찾아보면 다 행복인데 왜 내가 찡그리고 있나 보면  그런 것들은 기본이므로 달갑지가 않고,  그 외에 더 뭔가를 원하고 상대적인 빈곤을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끔 일확천금하는 사람들을 보면 딴 세상 얘기 같고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죠.  제가 전에 북한 관련 드라마도 많이 썼는데, 북한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더군요.  왜냐 하면 다 같은 사람들만 보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너무 홍수와 가뭄이 많이 들다 보니까 먹을 게 없어서 불행해지기 시작을 했는데,  몇 년 전만 해도 이 지구상에서 자기네들같이 어버이 수령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사는 민족은 없는 줄 알았습니다.  왜냐 하면 비교할 게 없기 때문에.          상류층은 아예 격리되어 있어서 어떻게 사는지도 못하니까 비교 대상이 안 되고,  이웃집 사람들은 다 같습니다.  평양 사는 분들은 수도 평양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합니다.  대개 상대적인 빈곤 때문에 마음이 더 추운 것입니다.          여기서 불행한 건 잘 사는 사람들 보고 배 아파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세상에 공짜가 없습니다.  잘 사는 사람들 보면 그만큼 밤잠 안 자고 연구합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신문스크랩 해가면서 악착같이 인터넷 뒤지고  모든 정보와 매체를 다 활용하면서 부지런을 떱니다.         그분들이 괜히 편안하게 배 두드리고 있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다 그만큼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나는 그 대가를 다른 데 치를 뿐입니다.  별 차이 없습니다.  그분들은 그런 데 노력을 하는 거고, 나는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배 아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그렇게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데요.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거저가 없습니다.                 
117    시련을 통한 깨달음 댓글:  조회:1635  추천:0  2014-06-01
      최근에 제가 장영희 교수의 글을 인용하면서  참 너무나 좋아했는데, 바로 그 얘기에요.  그 분이 한 살 때부터 소아마비에요.  그래서 40여년 살아오면서 많이 깨달았습니다. 불구라는 것 때문에.      특히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면, '생명은 소중한 것'.  이걸 깨달았답니다.  두발로 디딜 수만 있다면 행복하다.  살아있다는 것은 행복하다.  기침을 하면서 재채기 한 번을 하면서도  통증을 느끼지 않고 재채기 한 번만 할 수 있으면 행복하다.  왜?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이죠.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고.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데, 죽으면 못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맙다.  그거를 절절하게 깨달았는데,  그렇게 충분히 깨달았는데,  최근에 암이 재발되고 이렇게 하면서 더 깨달았어요.      사람은 살다가 보면 잊어버리고 합니다.  한 번 깨달았다가도 세월이 좀 지나고 그러면 그걸 잊어버리고  다시 또 감사함을 모르는데,  그 분의 경우에는 그렇게 나온 스케줄이  아마 그런 걸 겁니다. 감사함을 알기 위해서.      혹독한 시련을 주는데, 확실하게 깨닫도록 하게 위해서 또 그렇게 선물을 주신 거죠     암이 저주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깨달음을 원하는 분들에게는 암을 통해서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하여튼 자기가 아픔을 통해서  만물에 감사한다는 것을, 부모님께 감사한다는 것을,  주변에 감사하는 그런 걸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선물이 되는 거죠.    
116    그래, 난 바보야 댓글:  조회:988  추천:0  2014-05-30
그래, 난 바보야       아침 식사를 마치고 봄방학이라 느긋한 오전, 따르릉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동서, 나야.”    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속으로 피식 웃는다. ‘우린 동서지간이 아닌지가 오래되었거든요’ 그러면서도, “예, 형님.” 하면서 대꾸를 시작한다.    자궁암 초기 진단을 받은 지 몇 개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수술도 하지 않고, 별다른 조치 없이 그냥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의 큰 엄마이다. 떠날 때를 대비하는 것인지, 친정 식구를 곁으로 오고 싶은 것인지, 떠나면 남을 두 아이들을 아이들의 이모들에게 맡기고 싶은 마음인지, 이 모든 혹은 내가 짐작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양산에서 친정 식구들이 있는 계룡산 부근으로 이사를 한 것이 거의 전부이다. 암 진단을 받고는 아등바등 살려고 노력하던 삶의 터전을 홀연히 정리하고, 계룡산 부근에서 몸이 불편하신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모든 것을 놓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하는 분이다.        나보다 조금 늦게 결혼을 했지만 나보다 조금 나이 많은, 참 특이한 시가(媤家)의 삶에 오로지 둘만이 나눌 수 있는 얘기들로 함께 밤을 새울 수 있는 분. 그렇게 서로의 상처의 한 부분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분. 너무 길게 하지 않으려 애를 썼건만 한 시간은 통화를 한 것 같다.    본인이 원하는 것과 너무도 차이가 나 버린 결혼 후의 생활에 대한 어려움을 이렇게나마 풀어내면 조금은 위안이 되는 모양이다. 대화 중간에는 또 아이들 아빠 이야기가 꼭 들어간다. 납득하기 어려운 일 처리 방식에 내 편을 들어주다가 못내 속이 상하는지 꼭 하는 말이 있다.   “동서, 바보야? 다 들어주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주니까 그러는 것 아니야!”  “전 남기고 싶지 않은 걸요. 제 마음에 걸림이 없도록 하고 싶은 걸요. 그래요, 전 어쩜 바보일지도 몰라요. 그냥 아이 아빠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것이 제 마음이 제일 편안해서. 아이 아빠에게 바라는 게 없고, 그냥 아이 아빠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며칠 전 아이 아빠가 와서 이틀을 머물다 갔다. 고등학생인 큰 아이에게 본인이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몇 년 전보다 많이 안정되어 보였다. 아이에게 해 주는 말을 들으며 늘어난 흰 머리를 보았다. 겉으로는 그래도 그 속은 얼마나 또 편하지 않은 부분이 있을까? 측은한 마음에 밥상도 정성으로 차려주고, 거실이나마 잠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언니가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아이 아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둘은 마주치고 말았다. 그 순간은 평온한 듯 지나갔지만 결국 다음 날 전화로 온갖 소리를 들어야했다.    “너 참 이상하다. 살림 차렸다면서 어떻게 이 집에 들어오게 할 수 있니?”    이야기인 즉, 결국 내가 바보라는 거다. 어쩌면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어떤 경우에도 너희들의 아빠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 아이들에게 나름 변명을 하며 내 편을 만들어야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는데 난 도무지 그런 것을 할 줄 모른다. 아빠도 힘드실 거라고. 아빠는 너희들을 사랑하고, 아빠가 잘 지내야 너희들도 좋은 거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것도 바보인지 모르겠다.    가끔 애들 아빠한테 이런 충고도 듣는다. 명상이나 수련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던 그가 어떤 수련원에서 며칠간 머물렀었는데 직장 동료 때문에 가게 되었다며 그 동료가 나보다 훨씬 낫다고 한다. 당신도 그렇게 여유 있고 활기차게 살고, 열심히 일 하라고. 그런 말을 들어도 이상하게 난 하나도 언짢지가 않았다. 아이 아빠도 나름대로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는구나. 그런 과정 중에 배움이 있겠지. 아~ 난 정말 바보인가 보다.     아이들 큰 아빠와 통화를 했다. 좀 답답하신 모양이다. 삶의 터전을 정리하고 가족들을 따라 처가댁 근처로 오고 나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신가 보다. 어릴 때 밖에 나갔다 오면 누군가에게 잠바를 벗어주고 오곤 해서 혼이 나기도 하셨다는 분. 마음 바탕이 선해서 가족들 모두에게 인정을 받지만 현실적인 능력 때문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으신 분. 그 어려움을 조금은 알고 있는 나. 그래서인지 가끔 전화가 오곤 한다. 그래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어 통화하고 나면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시원해진다고 하시면서.      그런 와중에도 긴 방학 동안 사촌인 아이들끼리 함께 놀 시간을 마련해주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을 전해주신다. 나 혼자 아이들과 어려움이 많을 텐데 도움 주지 못한다고 능력이 부족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을 담은 미안함도 함께 전해 주신다.    지난번에 우편으로 받은 명상 책을 읽고 참 좋다고 언젠가 좀 여유가 생기면 함께 하고 싶다는 말씀도 해 주신다.    20년 가까이 아이 아빠로 인해 맺어진 관계. 지금은 아이 아빠는 빠지고 우리끼리 친구처럼 되어버린 나와 아이들의 큰 아빠, 큰 엄마.    어쩌면 바보라서~ 내가 바보라서~ 앞이 캄캄하다고 느낄 때마다 내게 전화해서 때론 걱정하고 위로받으면서 서로를 격려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난 또 바보로 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난 바보인 내가 고마운지도 모르겠다. 그래. 난 정말 바보인가봐~^^  
115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댓글:  조회:1213  추천:0  2014-05-29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앞의 이야기를 왜 했느냐 하면  오늘 이렇게 쭉 둘러보니까  마음들이 추우신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그랬습니다.          사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축복이거든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겁니다. 그걸 느끼는 게 너무 오래 걸리더군요.  목숨 부지하고 살아있다는 건 기본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고마움을 전혀 안 느끼시는데,  이런 일을 경험하다 보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 경지가 되면 그냥 같은 하늘 아래 숨 쉬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만도 너무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인생이 참 행복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계속 속상하고 불만스럽습니다.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십시오.  생명이란 너무너무 고마운 것,  그리고 내가 남한테 빌어먹지 않고 내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것도 너무너무 행복,  또 가족이 있다는 것도 너무너무 행복…….  그 다음엔 바랄 것이 뭐가 있나요.         호주머니에 쓸 돈 있는 것만도 너무 행복한 거 아닌가요.  그런데 더 가지려 하고 더, 더, 자꾸 그렇게 되고 불만스러워합니다.         여기 와서 명상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너무 행복한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면 참 갈 데가 없는데, 이렇게 갈 데가 있고,  가면 대화가 통하는 선하기 그지없는 친구들이 있다는 행복…….  그렇게 생각하시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이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114    조용한 전쟁 댓글:  조회:883  추천:1  2014-05-27
조용한 전쟁         다섯 살 나던 해, 나는 신장염을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하고 나면, 물에 헹군 김치와 밥이 달랑 놓인 밥상을 받아 할머니와 나는 따로 식사를 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이라곤, 엄마가 고구마 씻은 물을 집 앞에 버리면 어디선가 숨어 있다가 잽싸게 뛰어나와 고구마 꼬랑지를 주워들고 후다닥 골목길로 뛰어 들어가곤 하던 모습이었다. 난 장난삼아 한 짓일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 보니 제한된 식사에 배가 고파서 그랬던 것 같다.   어느 날 외갓집에 갔다가 밤에 자다 일어나 배가 고파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본 외할머니께서, 죽을 때 죽더라도 먹고 싶어 하는 밥이나 실컷 먹이고 죽이자(?)는 마음으로 마음껏 밥을 먹게 하셨다고 했다. 다음날,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방문을 열어봤는데 아 글쎄, 쌔근쌔근 숨을 쉬며 잘도 자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후로 뽀얗게 살이 오르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온 들과 산으로 신나게 뛰어다니며 놀았다고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신장이 약하게 태어났는가 봐, 나는….     사실, 하루 이틀에 끝날 전쟁이 아니었다. 1초도 쉬지 않고 박동을 하던 심장도 몰랐던 일이니 만큼…. 그 전쟁은 아주 조심스럽고도 조용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혈관을 따라 돌던 혈액이 평소와는 다르게 속도가 느리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분과 포도당이 이리저리 밀려들며 점차 그 양이 늘어나고 있었고, 하수관을 타고 쭉쭉 내려가야 하는 노폐물마저 혈관 속에서 빙글빙글 돌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인가?   처음 반응을 보인 곳은 얼굴이었고, 제일 먼저 눈이 퉁퉁 붓기 시작했다. 양쪽 볼은 사탕을 한 개씩 넣은 것처럼 불룩해져 버렸다. 약간의 시간차로 다리에도 붓기가 시작되었고, 윗배 아랫배 사정 볼 것 없이 불룩해져 왔다.   다급하다! 코의 바로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 뇌하수체에 SOS를 쳤다. 호르몬 분비를 담당하고 있는 아주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곳이다. 전엽과 중엽에서는 이상 신호가 잡히지 않는데 후엽에서는 소식이 없다. 그럼 후엽에서 문제가? 다시 한 번 후엽에 SOS를 쳤지만 신호가 미미하게 잡힐 뿐이었다. 결국, 신장이 파업을 선언한 것일까?   며칠 밤샘 작업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등 뒤 갈비뼈 아래 신장이 자리한 곳에서 양쪽이 번갈아 가며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몇 번 두들겨 주면 괜찮아졌기에 계속 작업을 하곤 했었는데. 그것이 원인이었나 보다.   내 주먹 크기만 했던 신장이 갓난아기 주먹만 하게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다고 했다. 혈압이 떨어지면서 모세혈관에서 여과를 하지 못하자 아예 공장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올 것이 왔구나. 어릴 적부터 약하던 신장이 과로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구나!' 약으로도 달래고 조혈호르몬제 주사도 맞고. 건포도처럼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소변을 만들어내려고 젖 먹던 힘까지 내어 겨우 버티고 있는 신장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어찌 이 지경이 되도록 놔뒀단 말인가. 주인이 누구여? 결국 새로운 신장으로 대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물론 건포도 신장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주인님만 살 수 있다면 저는 아무래도 괜찮구먼요…."   쌍둥이처럼 꼭 같더라는 아버지의 신장을 이식받았다. 새로운 신장은 오른쪽 골반 바로 위로 이사를 왔다. 새 신장이 이사 온 지금, 몸 안에선 한창 전쟁 중이다. 식구로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처음 3년이 고비란다. 3년이 되는 올 봄엔 약 독이 심하게 올랐었고, 겨울엔 감기몸살이 지독하게 들었다. 그렇게 한고비를 겪어 넘겼나 보다.     창가에 드는 햇살에 눈이 부시는 봄날의 오후. 요즘 같은 날씨에 신장도 기지개를 켜나 보다. 살 만한 걸 보니.   고맙구나. 아직도 치러야 되는 고비가 여러 번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치러지는 전쟁을 방치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의 전쟁에서 많은 것을 잃고 배웠기 때문이다. 온몸으로 전하는 메시지에 항상 관심을 가지며, 애정 어린 마음으로 공장이 가동되는 것을 지켜본다면 꾀를 부리던 공장들도 속속 가동을 재개하리라.   오른쪽 아랫배를 살며시 만져보면 내 손바닥 안으로 쏙 들어오는 신장. 약한 떨림마저도 따스함으로 전해져 온다. 지금도 여전히 전쟁 중이지만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길지 않은 시간 내에.  
113    인간의 출생 4인자 댓글:  조회:1507  추천:0  2014-05-26
인간의 출생 4인자     인간의 창조목적이 ‘진화’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 진화할 수 있는 여지를 각각 다르게 만들어 줍니다. 전에 태어났던 영들은 이전의 삶을 기반으로 해서 진화할 수 있는 여건을 반반씩 포함시켜 프로그램을 짭니다. 인간의 열 가지 요소를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킬 때 다음의 네 가지 요소, 인자(因子)를 사람마다 다르게 주어 어떤 사람은 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가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적게 가지기도 합니다.     첫째, 핵(核)인자 입니다.  종자, 씨라고도 하죠. 핵 인자는 부모를 누구로 하여 태어날 것인가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둘째, 시간(時間)인자 입니다.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태어날 지가 결정되는데 시간에는 주관하는 오행이 있어 오행중에 어떤 요소를 많이 갖게 되고 적게 갖게 되고 하는 구분이 생깁니다. 흔히 사주팔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 기(氣)인자 입니다. 환경인자라고도 하는데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나도 어떤 장소에 태어났느냐에 따라 사주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또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 하는 것도 사람의 환경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넷째, 영성(靈性)인자 입니다. 진보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가름하는 인자입니다. 기도나 명상 또는 종교적인 활동이나 수련을 통해서 이미 주어진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입니다.     상기 네 가지 인자 중에서 핵 인자하고 시간인자는 이미 타고난 것이니까 변할 수 없는데 기인자와 영성 인자는 바꿀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50%는 타고난 것이고 50%는 노력여하에 따라서 바꿀 수 있는 것으로 공평하게 반반 나누어서 창조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112    고달픈 시절 댓글:  조회:1190  추천:0  2014-05-23
고달픈 시절           다음은 제 희곡을 추천해 주신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연극계에서는 존경받는 작가이신데,  한 때 이분이 너무나 가난해서 이가 아픈데도 치과에 못 가고 계셨답니다.  글로써 먹고산다는 게 참 고달프고 피눈물 나는 일이거든요.          차일피일 하다가 너무 아파서 치과를 찾아갔더니  이를 다 빼고 새 이를 해 넣어야 된다면서  치료비를 당시에 4000만원을 내라고 하더래요.  이분이 돈이 없으니까 소개를 받아 제일 싼 동네를 찾아갔더니  딱 반값에 해주겠다고 그러더랍니다.         이가 없으면 안 되니까 할 수 없이 집을 팔아서 이를 했는데,  그 치료하신 분이 의사가 아니었는지 무지막지하게 이의 반을 하루에 다 빼고,  며칠 있다가 나머지 반을 하루에 다 뺐답니다.  이는 절대 하루에 한 개 이상 빼는 게 아니거든요.  큰일 납니다.  되도록이면 빼지 마시고요.         그렇게 해서 이를 다 빼고,  맞추기 위해서 또 굉장히 고생을 했답니다.  너무너무 아파서,  세상에 이렇게 힘들게 살아왔는데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아픈 고통이 굉장히 심하지요.          그래서 몇 번 목숨을 끊으려고도 했답니다.  가난한 데다가 이까지 그러니 도저히 살맛이 안 나는 거죠.  약을 사가지고 어디서 죽을까 생각을 해보니  절에 가서 죽으면 그냥 내치지는 않고  화장이라도 해주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길로 마음을 다 비우고 절에 갔는데 웬걸,  하나도 안 아프더랍니다.  그렇게 아프고 진통제를 먹고 별 짓을 다해도 안 되더니,  마음을 비워서 그런지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안 아프더래요.  그래서 절밥만 축내고 내려왔다고 하시더군요.  안 아픈데 약을 왜 먹나요?  그렇게 회생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후 이를 전부 해 넣고 다니시는데  같이 식사를 하러 가면 밥 먹기가 괴로울 정도입니다.  나물도 못 씹으시기 때문에 음식을 갈기갈기 다 썰어야 드십니다.          게다가 식당에 들어가서 종업원에게 가위 좀 갖다 달라고  그러면 무지막지하게 큰 가위를 가져옵니다.  종업원이 어디 친절하기나 한가요.  왜 그러시는데요, 잘라 드릴게요,  어쩌고저쩌고 말들이 많아서 수모를 당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작은 수술용 가위를 사가지고 갔습니다.  식사할 때 드리면서 직접 잘라 드시게 하니까 보기에도 나쁘지 않고 잘 들더군요.  그랬더니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지금까지 아주 소중하게 보물처럼 지니고 다니십니다.  이분이 그것 때문에 저를 좋아하십니다.  제가 마음 안 다치게 그런 거를 살펴드렸다는 것 때문에.          나중에는 예술원 교수가 되시고 참 좋아지셨는데  그때 얘기를 하시면서 그러세요.  내가 그 때 죽었으면 얼마나 원통했겠느냐고,  살아있는 것이 너무나 고맙다고…….  그 때는 하도 전망이 안 보이니까 그랬던 거죠.  그렇게 추운 계절을 다 보내고  요즘은 참 행복하게 지내십니다.                 
111    아들이 알 수 없는 것 댓글:  조회:976  추천:0  2014-05-20
    사랑     아들 녀석이 깜빡 잊고 두고 간 도시락을 들고  이미 학교에 들어섰을지도 모르는 시간에  이것저것 재지 않고 냅다 뛰는 어미의 마음을  아들은 알 리가 없다.      내 새끼 배곯을까 백주대로에서 발견한 아들의 뒤통수에 대고  고래고래 이름을 부르며 도시락을 흔들어 대는 어미의 마음을  아들은 알 리가 없다.     동네방네 제 이름이 불린 것에 쪽팔려 하며  도시락을 가방에 쑤셔 넣기 바쁠 뿐이다.      지 새끼 세상에서 제일 예뻐 어쩔 줄 모르는 사랑이 얼굴에 뚝뚝 떨어진다마는  아들은 얼른 집에 돌아가시라고 툴툴대며  등을 돌려 학교로 들어가기 바쁘다.      쉴 새 없이 뛰어온 탓에, 언제 봐도 예쁜 탓에  어미 얼굴은 발갛고  쪽팔림에 아들은 얼굴이 발갛고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몇 번을 아들 녀석 바라보느라 뒤를 돌아보는 어미건만  한 번쯤도 돌아보지 않는 아들은  그 마음을 알 길이 없다.        사랑 ∥        머리가 굵어 이제 대들기까지 하는 아들은  아비의 애잔한 사랑을 알리가 없다.  술 때문에 언제나 얼굴은 발갛고,  입에선 언제나 바보 멍충이가 연발되는 아비를  아들은 좋아할 리가 없다.  누구를 위해 얼굴이 매일 그렇게 달아오르는지 알 리가 없다.      아들 녀석 군대면회를 가던 날,  면회 장소에서 한참 떨어진 PX까지  음료수를 사기 위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뛰어갔다 오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아비의 사랑을  아들은 알리가 없다.      원래 사랑한다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등골 휘게 일하는 재주만을 배운 아비의 마음을  지 혼자 큰 것처럼 착각하는 아들이 알리가 없다.      이제 30보다 40이 더 가까운 나이에  홀로 된 어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마는  달에 한 번 먼저 전화를 하는 것만으로 입이 귀에 걸리시는 어미의 마음을  아직도 아들은 알리가 없다.      자기를 위해 사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아비와 어미를  자기를 위해 사는 법을 배운 아들이 헤아리기엔  그 사랑이 너무 넓다.   
110    무슨 공부인가? 댓글:  조회:1306  추천:0  2014-05-19
  무슨 공부인가?         무슨 일이 닥치면 내가 이걸 통해 무엇을 배우면 되는가를 파악하십시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는가?          본인이 파악하고 넘어가면 다시는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뭔지 모르겠는 채 나자빠져서 대책 없이 지나가면  그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똑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한해를 돌아보면서 1월부터 기록을 해보십시오.  그리고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무슨 뜻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일이 나한테 벌어진 것은 무슨 뜻인가?  하늘의 뜻이 뭔가? 파악하고 넘어가면 공부가 되는 겁니다.  아니면 내년에 똑같은 공부를 또 해야 됩니다.         항상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반반입니다.  왜냐 하면 지구는 반반씩 섞인 학습장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도 좋은 일, 나쁜 일이 반반 섞여 있습니다.  사주팔자가 좋은 사람도 일 년을 반으로 나눠서  전반부가 좋은 사람이 있고 후반부가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반부에 타격을 받고 후반부까지 일어나지 못하기도 하고,  타격을 받은 것을 오히려 경험으로 삼고 일어나서  후반부에 재기할 수도 있습니다.  한 해를 돌이켜 보시면서 교훈을 얻으시고,  다음 해에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109    가난한 감사 댓글:  조회:928  추천:0  2014-05-14
가난한 감사           어느 추운 새벽, 겨울이라 늦은 시간인데도 이제서야 동이 트며 어두움을 겨우 몰아내고 있을 때, 난 훈훈한 거실 유리창으로 새벽을 보며 밖은 얼마나 추울까 싶은 생각에 차마 창은 열어보지 못한다.   아침 일찍 눈이 떠져 아무 걱정 근심 없는 마음으로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아래 길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멀리서   “재애애―첩 사-이소―, 재애애―첩 사-이소―.”하는 목청 좋은 아주머님의 목소리가 골목길을 울리고 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참 부지런하기도 하시지’ 하다가 다가오는 그분을 자세히 보니 아는 사람이었다.    머리에는 칭칭 목도리를 둘러싸고 두텁게 끼어 입은 옷으로 겨우 눈만 보이는 모습으로 입에는 김을 푹푹 내며 재첩 사이소―를 외치고 있었다.  얼마 전 추운 겨울에 맨손으로 생선 일을 하시며 얼어터진 손이 상처가 나고 부어서 너무 아파 움직일 수가 없다며 치료를 받으러 오신 그 아주머님이셨다. 손등과 손끝 마디마디가 퉁퉁 부어 사혈을 해 드리며 어떻게 이렇게까지 참으시며 일을 하실 수 있냐고 여쭈었던 그 아주머님. 생선내장은 맨손으로 긁어내야 한다며 일 하다 보면 그렇게 시린 줄은 모르시겠다고, 그런데 생선은 전부 얼려서 나오기 때문에 장갑을 껴도 손 시린 것은 마찬가지라고 대답하셨다.    그분이 추운 겨울날 새벽에 남이 다 자고 있는 한 밤중에 일찍 일어나 재첩국을 끓여 아침 식사용 국을 만들어 팔러 다니는 것이다. 매일 새벽마다 들리는 재첩사이소의 아주머님이 그분인 줄은 처음 알았다.  그런데 그런 추운 새벽에 꽁꽁 언 손을 목장갑으로 겨우 가리고 재첩 통을 끌고 다니며 소리치시는 그 상황을 접한 순간 갑자기 얇은 잠옷이 전혀 춥지 않은 거실의 훈훈한 온기를 느끼며 내 마음에 처음 올라온 생각은, 저 사람은 추운 겨울에 쉬지도 못하고 얼어터진 손으로 국을 끓여 팔러 다니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생각이 언뜻 들며 참 감사하다 하며 그분을 내려다보고 또 다른 의미로 또 내려다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혼란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 감사가 과연 옳은 감사인가?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갑자기 나보다 힘들게 느껴지고 추워 보이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나와 비교하여 갑자기 행복감을 느낀다면 이것이 과연 옳은 감사인가?      몇 년 전 백혈병으로 골수이식 수술까지 하였으나 30대 중반의 젊은 아내와 6살 딸을 남겨놓은 채로 한 젊은 남자가 죽었다. 내 친구는 졸지에 과부가 된 것이다. 오랫동안 그토록 친했던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서먹해서 그 친구와 아무런 이야기도 나눌 수 없었다. 내 남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고 아이들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단지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 친구가 갑자기 불행을 느낄까봐, 내가 행복한 모습을 보이면 그 친구가 우울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친구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 친구는 불행하리라 짐작했었다.  ‘저 사람은 저 환경에서 불행할 거야’ 라고 생각하고 대하는 그 마음 자체가 그 사람을 불행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것, 상대방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환경이 아니라 그 사람을 불행하게 보는 그 순간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난 그 친구와 드디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진심으로 그 친구의 감정에 대해 선입견 없이 물을 수 있었고 그 친구는 자유롭게 대답했다. 예전처럼 격의 없이 내 모습을 보일 수 있었고 그 친구도 자기의 사정을 불행한 일은 불행한 대로, 기쁜 일은 기쁜 대로 세월이 치료해준 상처를 내보여 주었다. 그 전처럼 자연스럽게 그 친구에게 물었다.    “어떤 가수가 하반신 불수가 되고 어느 정도 그 장애를 극복한 뒤에 방송에 나와 인터뷰하는 걸 본적이 있어. 리포터가 뭐가 제일 힘드냐고 물었는데, 뭐라 대답했는지 알아? 자신을 제일 힘들게 하는 건 사람들이 자기를 동정하는 시선이라고 말하더라구.” 했더니 친구가 대뜸, “나 그거 당하고 살고 있잖아.” 한다.  남의 불행을 보고 그 순간 드는 생각이 자기 자신의 그렇지 않은 조건을 떠올리며 감사를 한다면 그 감사는 과연 옳은 감사일까?     그 후로 많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고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 된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일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아니요. 틀렸습니다.” 라고 대부분 대답한다.    그러나 질문을 좀 바꾸어, “다리가 한쪽이 불편한 사람을 보고 난 두 다리가 멀쩡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생각한다면요? 난 두 눈이 멀쩡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한다면요?” 하면 그건 옳다고 대답한다.    우리의 감사는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느끼는 감사일 때가 많다. 나는 가난한 감사라고 이름 지었다. 남의 행복이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아주 자연스러운 인간의 심성으로 받아들이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버젓한 속담을 아무 부끄럼 없이 즐기고 있다. 놀라운 격언에서 답을 찾았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는 것을 말씀하신 분이 있었다. 남의 기쁨을 같이 기뻐할 수 있고 슬픔을 같이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이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마음이 깨끗해져야 하는 것인지, 겨우 오랜 시간을 들여 생각해낸 그보다 더 좋은 상태는 짐작컨대, 무심의 상태에서 불행과 행복을 바라보며 적절한 도움과 기쁨을 나누며 누리는 것이리라.  비교하지 않고 감사하고 비교하지 않고 행복을 누리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감사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감사에서 벗어나 진정 존재 자체로 감사한 따뜻한 감사를 올리고 싶다.   
108    첫 마음 댓글:  조회:1518  추천:0  2014-05-14
  첫 마음       하루의 기운은 아침이 좌우합니다.  눈 뜨자마자 일어나서 무슨 생각을 했고 무슨 일을 했는가,  그것이 하루를 끌고 갑니다.        마찬가지로 한 달의 운은 그 달의 첫날 무슨 생각을 했나,  어떤 상태에 있었나, 하는 것이 쭉 좌우합니다.        마찬가지로 새해 첫날 마음가짐이 어떤가에 따라서 일 년이 좌우됩니다.  새해 첫날은 각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므로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그 날의 기분이 일 년을 좌우합니다.  그러므로 연말은 다음 해의 준비를 착실히 하면서 정리하는 기간입니다.          한 해를 쭉 돌아보면 행복했던 분도 계시겠지만,  너무너무 지긋지긋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억장이 무너지고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 일들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은 항상 어때야 되느냐 하면,  ‘내가 비싼 대가를 치르고 공부를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지구에 태어난 목적이 공부 외에는 없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 비싼 대가를 치르고 출생을 하는 겁니다. 부모님 괴롭히면서 태어나고, 자라면서도 병치레 하면서  계속 부모님 고생시키고 본인도 고통 받고, 갈수록 되는 일도 없어서,  왜 이렇게 내 인생이 엉망진창인가 하실 수도 있는데,  다름 아니라 그게 공부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청천벽력으로 엄청난 일이 닥치고  마음이 아프고 인생은 고해라고 비명 지르고 싶은 분들은  ‘아, 내가 수업료 톡톡히 내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굉장히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특히 우리나라같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공부를 하기 위해  입시니 감원이니 온 나라가 가마솥처럼 들들 끓는 겁니다.          그 한가운데에서 같이 들끓으면 너무 끔찍할 수 있는데,  한 발 떨어져서 보면 본인의 모습이 바라보아지고 여유로워집니다.  항상 한 발을 떼고 바라보십시오.       
107    웃음과 울음사이 댓글:  조회:1038  추천:0  2014-05-11
웃음과 울음사이             그것이 진심(眞心)은 아니었다. 참 엉뚱한 말이기도 했다.  “오늘 가서 영영 돌아오지 마세요!” 아빠의 출근길에 엄마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다섯 살 꼬마아이가 건넨 배웅인사! 악동기질로 어른들을 웃게 하려 건넨 말이 너무 짓궂었던 걸까? 아빠가 멀어질 즈음 엄마가 내 머리를 심하게 내리쳤다.  “너 그것이 무슨 소리인 줄이나 알고 하는 거냐?” 너무 놀라 엄마를 바라보니 엄마의 눈에는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져 있다. 엄마는 내가 아빠에게 죽음을 암시하는 저주의 말을 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엄마의 눈물을 보고 깜짝 놀란 난 그날 하루 종일 아빠가 무사히 되돌아오기를 빌었다. 그리고 그날 아빠가 돌아와 주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엄마도 마찬가지였을까?     그 후 20년이 흐른 뒤 아버지는 위암말기 판정을 받고 몸져누우셨다. 아버지가 투병하시자 그동안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숨기고 싶었던 비밀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업실패로 재산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고 그 스트레스로 아버지는 병을 얻어 ‘죽음’을 마주하고 계셨다. 살고 있던 집 물건들에 분홍색 차압딱지가 붙으면서 어머니는 이 모든 상황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나날이 정신 줄을 잃어가셨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머니는 간신히 비틀거리며 침대로 걸어가시던 아버지의 등짝을 사정없이 때리면서 “어떻게 살라고, 다 정리해 놓고 가라고!”라며 한참을 울면서 절규하셨다. 난 정말 깜짝 놀랐다 아버지는 말기 암 환자로 가족도 못 알아볼 정도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인 보호받아야 할 분이신데 비겁하게 폭력(?)을 행사하다니!    그래도 난 어머니를 말릴 수가 없었다. 단 한 번의 등짝 폭력 사태는 이생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고받아야 할 무엇인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 뒤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는 아버지를 정성껏 간호하셨다. 난 이때를 회상하면 웃음과 애잔한 슬픔이 함께 밀려온다.   아버지는 말기 암 판정 3개월 후 한겨울에 돌아가셨다. 그 후 아버지에게 건축 자금을 빌려주었다 받지 못한 분이 남은 가족들에게 하소연을 하기 위해 찾아와 장남에게 책임을 묻겠다면서 장남 나오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셨다. 어머니는 장남인 오빠를 보호하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분이 집안 물건에 덕지덕지 붙은 차압딱지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되돌아가자 오빠가 휴지통에 무언가를 가지고 나오면서 한바탕 너스레를 떤다.    “아…. 방에 숨어 있는데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은 거야. 그런데 마침 보니 휴지통이 있는 거야, 얼마나 다행이야? 허허.”  너무나 명랑하게 말을 해서인지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그냥 한참을 웃었다. 그 상황에서 ‘웃음’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멋쩍고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을까? 방으로 돌아가서는 각자가 눈물을 훔쳤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 뒤 나는 14개월 아들 녀석의 ‘똥 덩어리’를 치울 때면 이때가 생각나 웃음과 울음이 함께 몰려온다.     아버지의 빚을 잔뜩 떠안게 된 어머니는 30년 전에 출가했던 친정으로 30년을 함께 했던 집안 가재도구들과 함께 귀환했다. 어머니 자식이었던 나도 함께 딸려서 말이다. 엄마는 생각보다는 씩씩해 보이셨다. 하지만 겨울에 한여름 옷을 입고 태연스럽게 외출을 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정신 줄을 놓으실까봐 걱정이 되어 외출 길에 함께 동행 하곤 했다.   때마침 꽃집 앞을 지나는데 봄을 알리는 꽃들을 분양하고 있었다.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흔하디흔한 꽃 화분 앞에 어머니는 쭈그려 앉으셨다. 꽃을 바라보며 한참을 울던 어머니는 마침내 미소를 지으시며 꽃이 참 곱다고 하셨다. 꽃을 보는 안목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였지만 그날 본 그 꽃은 어머니 말대로 너무나 고와 보였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꽃 화분 3개를 사들고 외가댁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곱디고운 꽃 화분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렇게 따뜻한 새봄을 맞이하셨다. 난 이 사건을 ‘꽃 화분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난 ‘인생은 해피엔딩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며 삶이 이렇게 헝클어진 채로 마무리 되는 것이라면 아버지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며 참 많이도 우울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가족이 ‘똥 덩어리’와 ‘흔한 꽃 한 송이’의 가치를 알 수 있었겠는가? 아버지가 살아 놓고 가신 삶을 마주하며 우리 가족들은 참 많이도 달라졌다. 깊은 미소를 갖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참 장하신 일을 하신 것이 아닌가.   넓게 바라보면 인생은 해피엔딩으로 향해 가고 있지 않은가. 세대를 넘어가는 지난하고도 더딘 과정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비로소 부모란 온몸으로 자신을 희생한다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그 뒤 난 아버지에 대한 애잔함이 깊이 올라와 크게 울었다. 한바탕 큰 통곡 뒤 난 아버지를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살아오면서 나에겐 참 많은 ‘울음’과 ‘웃음’이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삶에서 큰 울음이 있었던 때는 큰 웃음도 함께 왔던 것 같다. 어쩌면 울음과 웃음은 본디 하나가 아니었을까?     내가 살아가는 힘은 울음과 웃음이 어우러진 그 순간에 있는 줄도 모르겠다. 은은한 미소와 함께 눈가에 잔잔한 눈물이 살짝 맺혀 있을 때가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난, 웃음 속에서 울음을, 울음 속에서 웃음을 발견하는 것이 참으로 즐겁다. 그리고 사람에게 이 웃음과 울음의 묘한 조화가 있음이 그냥 무작정 고마워진다.   
106    내가 사랑받고 있는가 댓글:  조회:1436  추천:0  2014-05-11
내가 사랑받고 있는가 누군가가 너무 스트레스를 준다든지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세 가지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가?’,  ‘내가 이렇게 그 사람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인가?’,  ‘내가 존중받고 있는가?’입니다.  부부 간, 부모자식 간이라도 그 세 가지가 모두 아니라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배우자 때문에 너무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보세요.  그러면 우선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가를 생각해 보시고,  또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인가,  아니면 내가 그 노력을 하지 않고 다른 데다 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인가를 보시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상대방으로부터  내가 인간적으로 대우받고 있는가,  존중받고 있는가,  사랑받고 있는가를 판단하십시오. 아니라면 일고의 가치도 두지 마시고 정리를 하십시오.  그렇다고 부부간에 별거하고 부모자식 간에 인연을 끊으라는 게 아니라  생각과 마음으로 끊으시라는 얘기입니다.  인간관계는 그렇게 정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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