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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금을 울리는 한편의 생명비가
- 김혁의 장편소설《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를 론함
최삼룡
김혁씨의 장편소설《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는 우선 전형적인 비애소설이다.
요즘 문학계에서는 그리 강조하지 않지만 소설학에는 오래전부터 비애소설이라는 쟝르가 있었다. 한자로 쓰면『悲哀小說』영어로는 『tragedy』 인생의 불행과 비참을 제재로 하여 독자들에게 비애감을 맛보게 하려는 소설을 비애소설이라고 하였다.
박신애라는 이름의 주인공, 초생달의 눈과 매력적인 덧이의 임자 20세의 그녀는 고향 공주촌을 떠나 국자가에 진출한후 몇년간 자기의 꿈을 실현하려고 아글타글하다가 나중에 한국으로 밀입국하는 도적배에서 마지막 생명의 비곡을 울리고 짧고도 고된 삶에 종지부를 찍는다.
혹자는 이러한 이야기는 중국조선족이라고 불리우는 이 민족공동체 내부에 요즘 들어 항다반사(恒茶飯事)여서 뭐 그리 놀랄바가 아니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예사로운 일이라고 해도 한편의 소설, 아니 한편의 장편소설로 씌여졌을 때는 신변에서 이따금씩 들리는 골목소식과는 틀리는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창조주체에 의하여 창조된 한편의 문학작품이기때문이다.
다음 김혁씨의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이 장편소설은 전형적인 「저층서사」소설이다.
저층서사(底層敍事)란 새 세기에 진입한 이래 중국사회에 이미 표면화된 민생문제에 대한 관조를 나타내면서 빈부차이, 새로운 도시빈민층, 도시에 진출한 농민공 등 밑바닥인 생을 영위하는 계층의 궁핍한 삶과 정신실존을 사실주의방법으로 표현하는 작품들을 통털어 이르는 말이다. 저층서사소설에서는 아직까지도 도시에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분망한 소외된 계층을 주요 묘술대상으로 삼고 이 부류 사람들의 처지를 우리 시대의 대사로 대할것을 주장하며 그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내면서 이를 통하여 시대의 일부 삐뚤어진 가치관념을 비판하고 아울러 개체생명의 독립과 존엄을 고양하고있다.
여기서도 혹자는 저층의 삶의 현장을 조명한 작품은 우리 문단에도 이미 적잖이 창출되였다고 하면서 뭐 대단한것이 없다고 할수도 있다.
그러나 한부의 장편소설로서 우리 시대의 믿바닥인생을 영위하다 비명에 죽어가는 한 처녀의 짧고도 슲은 인생을 다룬 작품은 김혁씨의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가 우리 문단에 첫 작품인줄 안다.
그러므로 김혁씨의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라는 이 비애소설 내지 저층서사소설에 어떻게 접근하겠는가? 이 소설에 창조된 비극적 인물 박신애의 형상에 체현된 문화적내포는 어떠한가? 이 비애소설 혹은 저층서사 구경 어떻게 씌여졌는가? 김혁씨는 어째서 이 비애소설을 썼는가? 등등 문제에 대한 우리의 진지한 해답이 요청된다.
1)《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이 장편소설에 접근하는 몇가지 전제.
박신애라는 녀자는 공주촌이라는 농촌으로부터 국자가가는 도시에 들어온 사람이다.
이로부터 우리의 뇌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것은 요즘 우리 민족사회에 박신애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다.
북경 어느 조선족학자의 통계에 근거하면 개혁개방 30년래 할빈으로부터 대련까지 동북의 철도연선 크고 작은 도시에 진출한 농민신분의 조선족인구가 40만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통계에 근거하면 북경에 진출한 조선족이 10만이 되고 산동반도에 진출한 조선족이 20만이 넘고 산동반도밖의 동남부연해도시에 진출한 조선족이 10만이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설과는 관계가 없지만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이 20만이 넘는다고 한다.(이 통계는 말그대로 불완전한 통계이다. 특히 이 통계에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이 포함되였을수 있다.ㅡ필자 주)
그러므로 우리가 박신애라는 이 인물에 접근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야할것은 박신애는 현대화건설의 물결속에서 도시에 진출한 100만 조선족의 일원, 하나의 생명개체라는것이다.
다시말하면 박신애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가 주는 제일 크고 제일 주요한 정보는 농촌을 떠나 도시에 진출한 조선족농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데 대한 정보이다.
물론 김혁씨의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이전에도 이 제재를 취급한 문학작품이 있었으며 개중에는 성공적인 작품도 있었다.
그러나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와 같이 장편소설의 쟝르로 이 제재를 취급한 작품은 없었으며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처럼 예술문학적으로 성숙한 작품은 많지 않다고 말해야 할것이다.
다음, 박신애는 농촌으로부터 도시에 진출한 20세의 녀성이다.
여기서 주제어는 녀성인데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녀성주의 혹은 녀권주의 문제가 제기된다.
영어로 「feminism」즉 페미니즘은 중국에서 처음에는 「녀권주의」로 번역되다가 다시 「녀성주의」로 번역되는 개념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녀성의 사회적 , 정치적, 법률적 권리의 확장을 제창하는 주의 혹은 운동이다.
주지하다싶이 오래동안 전통문화에서 녀성은 주체로 되지 못하였으며 주류담론에서 남성과 녀성의 권리는 사실상에서 불평등하였으며 남성은 초자연적인 지위에 처하여있고 녀성은 여전히 남성의 한부분으로밖에 되지 못하였다. 이른바 페미니즘이란 남권의 압박에서 녀성의 해방을 주장하는 리론이며 운동이다.
문학창작에서 페미니즘은 남성중심의 의식형태에 대한 청산이며 「녀성서사」의 발굴과 제창이며 남성문학과 다른 특색이 있는 녀성문학의 건설이다
페미니즘은 지난 세기 80년대로부터 중국문학계에 수용되기 시작하여 녀성의 독립자주와 물질, 정신상의 철저한 해방을 요구하는 녀성들의 시점에서 남권주의중심의 문학과 문화에 대하여 엄격한 해부와 비판을 진행함으로써 주국의 문학창작과 문학비평의 발전에 홀시할수 없는 공헌을 기여하고있다.
물론 성별로 보면 김혁씨의 작품활동을 「녀성사작」에 귀납할수 없지만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이 장편소설은 박신애라는 녀자의 비극적 운명을 반영하고있다는면에서는 이 소설에 접근하는데 있어서 일부 페미니즘적시각이 요청되는것이 사실이다.
그 다음 박신애는 도시에 진출하여 성공한 인물이 아니고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비극적인물이라는데 대하여 충분한 주의를 돌려야 한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이 작품을 한번 읽어본이들은 누구나 알겠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박신애가 국자가에 첫발을 들여놓아서부터 죽을 때까지 만나는 모든 사람중에서 신애를 진심으로 도와주는 사람은 거의 하나도 없으며 ,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아울러 신애의 인생은 십분 비참한 인생이며 신애는 철저하게 비극적인 인물이다. 소설학에 근거하면 박신애는 계속 하강선을 그으며 발전하는 운명선에서 죽음으로 내달리는 인물이다.
어찌 보면《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이 한부의 장편소설은 신애의 꿈이 어떻게 박살나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수 있으며 혹은 박신애라는 이 한떨기 생명의 꽃이 어떻게
시들어가고 죽어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이 소설에 접근함에 있어서 비극에 대한 리해는 필수적이라 하겠다.
2)《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의 주인공 박신애라는 녀자.
우에서 언급된바와 같이 박신애라는 이 녀자 참으로 운명이 기막히게 불행한 녀자이다.
원체 신애는 어려서 어머니가 그녀에 대한 부양을 포기하는 바람에 다병하고 유약한 이모의 손아래에서 자랐다.
이모에게서 듣기로는 어머니가 신애를 낳고 죽었다고 하지만 기실 어머니는 처녀의 몸으로 신애를 밴 신애를 낳던참에 집에 버린채 야밤도주를 해버렸던것이다.
결국 신애는 일찍 남편을 잃고 네살 되는 아들을 키워가는 이모네 집에 얹혀서 엄마, 엄마라는 말 대신 이모, 이모 하면서 자랐다.
그러다가 갖 스무살이 되는 해 겨울 인구의 대이동이라고 불리우는 농민의 도시에로의 진출에 밀려 신애는 국자가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 박신애라는 국자가에 들어올 때 이 시골녀인의 꿈은 구경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도시에 들어와 공부를 하여 무슨 교원이 되거나 학자가 되려는 꿈이 있고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 큰 부자가 되려는것이고 어떤 사람은 문학예술의 꿈을 실현하려 도시에 들어오지만 신애의 꿈은 너무나 소박하였다. 눈물이 날 정도로 소박하였다.
광천수차기사 인철이와 같이 처음으로 교회당에 갔을 때 하는 신애의 기도에서 우리는 그의 꿈이 무엇인가를 보아낼수 있다.
나더러 돈을 많이 벌게 해주옵소서. 김밥집 마담만큼은 못 되여도 나중에 그 절반만큼이라도 돈이 있게 해주옵소서. 앓지 말게 해주옵소서. 이제 귀찮은 감기 그만 하게 해주옵소서. 고향계신 호준오빠랑 이모랑 동생이랑 몰래 떠나 버린 나를 나쁜년이라 욕하지 말게 해석해주옵소서. 아무쪼록 그들이 무사하게 지내게 해주옵소서. 하루빨리 나도 경자처럼 시내물이 들게 해주옵소서. 그리고… 그리고 나에게도 다른 시내애들처럼 삐삐 호출기가 있게 해주옵소서 아멘!
사실 김밥집마담에게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딱히 모르겠지만 상식으로 추측해도 그리 많지 않을것이라는것이 뻔한데 신애는 그 절반만큼이라도 벌게 하여달라고 기도하며 국자가에 들어온후 지금까지 아직 경자를 만나 보지 못하였지만 전에 환고향한 경자를 본 인상으로 경자만큼 도시에 물들게 하여달라고 기도한다.
이렇게 소박한 꿈을 안고 국자가에 들어온 박신애는 임시 먹고 잘수 있는 일자리를 찾기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특히 국자가의 지정학적위치의 우월성으로 녀자, 특히 젊은 녀자들이 임시로 입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는 그리 힘들지 않는 도시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인생의 길에서 자기의 꿈을 이룩하려면 의식주문제의 해결뿐아니라 필연적으로 앞에 놓이는 「생물사슬」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례를 들면 최저한도의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여야 할뿐만아니라 영원히 독신으로 살수는 없고 결혼하여야 하고 자식을 낳아 독립인으로 키워야 하고 병이 나면 치료를 받아야 하고 혼자가 아닌 한 가정이 거주할 집을 마련하여야 한다.
분명한바 신애에게도 인생의 길에서 반드시「생물사슬」을 하나하나 풀어나가야 한다는데 대한 정신적준비는 없었던것이다. 이를 우리는 국자가에 온 박신애의 모든 언행으로 증명할수 있다.
국자가에 진출한 그가 제일 처음 발을 붙인곳은 「오씨네 김밥집」이다. 같이 일하는 장아주머니도 좋았고 주인마담도 괜찮았고 여기서 성격이 쾌활한 광천수차기사 양인철과도 사귀고 같은 성씨의 털보아저씨 운수회사 박기사도 알게 되였다.
그러다가 김밥집이 파가이주를 당하게 되고 신애는 그 박기사의 소개로 운수회사에 차장으로 취직하게 된다.
간호사와 더불어 버스차장은 원래 박신애가 아주 선망하던 직업이였다.
과연 운수회사는 신애에게 새로운 생활을 약속하는것 같았고 신애의 꿈을 실현하는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는것 같았다.
김밥, 김국, 오징어볶음, 두부볶음, 철판소고기구이, 조기구이, 오이무침, 버섯무침…하고
료리메뉴를 외우기보다 더 품위있고 운치있는 노릇이라 신애는 느껴졌다. 음식점에서 접시나 나르던 시골애가 차장이 되어 도시를 거침없이 누비며 달린다는것은 그녀로 말하면 중요한 전환이기도 했다. 매양 출입문곁의 차장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가는 도시의 풍경을 새로나온 그림책 보듯 흥미에 절어 지켜보며 신애는 가슴 들먹히 괴여오르는 만족감을 주체할길 없어했다. 그리고 신애는 시시때때 그 어떤 냄새를 맡을수 있었다. 봄의 훈향속에 담담한 휘발유냄새에 섞여 신애만 맡을수 있는 그내음은 시골처녀 스스로가 만들어내고 감득할수 있는 희망의 냄새였다.
그리하여 집채처럼 큰 버스를 신애는 신명을 바쳐 닦으면서 이렇게 큰 버스, 이렇게 멋진 버스, 도시의 네거리를 보란듯이 누비는 버스의 차장은 바로 나다! 라는 흥분에 버거움을 잊었고 맡겨지는 모든 일에서 남보다 열성을 보이며 점심에 운수회사 공공식당에서 밥을 먹는다는 그 자체에 대하여 무한한 행복감에 잠기기도 하며 푸른 제복과 두리모자를 감추어가지고 나와 버스차장 제복차림으로 사진을 찍어 이모에게 붙여보냈던것이다.
아직 세속에 물들지 않은 단순한 시골처녀 신애는 운수회사의 버스차장이 되는것으로 자기의 꿈이 이룩된다는 착각의 늪에 빠져들어갔던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골처녀, 소박한 꿈의 소유자 박신애의 무의식에 깊숙히 간직된 소망을 잘 생각해볼것이 요청된다.
사실 변강의 시골농촌에서 스무살까지 향소재지를 중심으로 행동반경이 10리를 벗어나본적이 몇번 없는 그녀, 작품에서 딱히 밝혀진것은 아니지만 중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농촌처녀 신애에게도 농촌을 벗어나고 농업에서 해탈되고 농민이란 신분을 버리고 시민이 되려는 세기적인 숙망이 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앙금처럼 깔려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가장 심각한 의미에서 박신애의 꿈이였을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신애의 이러한 소망을 여지없이 박살내였다.
「왕제」라는 1호차장 그녀의 권세앞에서 신애는 끝내 운수회사에서의 모든 희망을 포기하여야 하였다. 그녀는 이 운수회사의 차장중에서 왕질을 하는 녀자였는데 신애에게 한자(漢字)에서 죽음의 의미의 「死」와 통하는 「4」호선로 버스를 맡기고 목욕탕에서 남의 머리감는 비누도 빼앗아 쓰고 자기의 청소주번날에도 신애에게 강제로 소제를 시키고 신애에게 오는 표창신도 자기것으로 만들어 표양을 받는다.
다시 박기사의 도움으로 장거리차의 차장으로 자리를 바꾼다.
신애보다 1년 먼저 도시에 들어온 경자는 버스회사에서 신애의 곤혹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아직 시내 이곳저곳에 발이 익지 못한 촌바우, 눈에 띄는 변변한 옷도 없는 촌바우, 좋은 음식 먹어 못본 촌바우, 그런 촌바우에 존경심이 갈 사람이 있어. 업신보고 깔보기 마련이지. 나라도 그래. 먹기 좋은 떡부터 먹어치워야지. 이는 과정이다. 억울해도 참아야 돼. 네 눈에 먹기 좋은 다른 떡이 보일 때까지. 문제는 언제까지 남에게 만만한 떡으로 보이는가 하는거지"
경자가 신애의 현실상황을 놓고 장황설로 풀고있는 떡의 론리는 바로 권세자들앞에서 먹기 좋은 떡으로 되는 신애의 처지에 대한 가장 비근한 해석이지만 이에 대하여 신애는 납득되지 않았다. 신애로서는 아직 중국에서 권력의 힘이 얼마나 센가에 대하여 알수 없었던것이다. 자그마한 운수회사의 차장중의 우두머리도 이렇게 세력을 부리는데 진짜 권력을 잡은 권세자들의 세도야말로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런데 어느날 사람 좋은 박기사가 술에 흠뻑 취하여 신애를 「기사의 집」에 불러내서 자기의 녀편네에 대한 불만을 하소연한다. 신애는 별수 없이 온밤 내내 술을 마시는 박기사와 응부하는데 갑자기 박기사의 마누라와 그가 휘동한 한떼의 녀성들이 들이닥쳐 신애를 사정없이 구타하고 몸에 구정물까지 쏟아버리고 머리까지 마구 잘라버린다.
이 사건은 버스회사에서 박기사와 신애사이의 "염문"으로 확대포장되여 사람들의 화제로 된다. 치욕을 받은 신애는 억울한 심정으로 버스회사를 떠난다.
그후 경자의 하숙집에서 신애는 어느 여름날 4호버스안에서 도적을 발견하고 소리쳐 도난에서 면하게 했던 그 미남ㅡ 윤승원이라고 부르는 신사를 만나게 된다. 「늑대」표양복을 입은 이 남자는 박신애와 버스안에서 맺은 인연이 있는외에 또 그 출중한 미모와 스타일로 언녕 박신애가 마음속으로 반해버린 남자였다.
신애는 기꺼이 그 남자가 경영하는 「유리구두」라는 자호를 건 신발쇼핑몰에 판매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오래잖아 둘이는 애인관계를 맺게 되고 신애는 처녀의 정조를 윤승원에게 바치고 윤승원은 신애에게 유리구두 놀음감과 진짜 고급구두를 선물하고 또 신애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세방집을 잡아준다. 순진한 신애는 이 모든것을 진정한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결혼할 꿈으로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신애의 가슴에는 무지개가 솟고 신애의 육신은 행복감에 전률하고 신애의 심신속에서 희망의 나무는 창공을 향해 소리치며 자라나는것 같았다. 더욱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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