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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25.
전쟁을 끝마치자 서일은 북로군정서는 계속 장백산으로 행군할것이 아니라 방향을 되돌려 왕청쪽으로 후퇴해야한다 하고는 과단적인 명령을 내린것이다. 총재다운 명지한 선택이였다.
이번 청산리전쟁에서 일본군은 패배했어도 계속 병력을 보충할 수 있고 무기도 계속 보급될것이다. 허나 그에 반하여 북로군정서는 무기도 계속보급키 어렵거니와 탄약도 제한되였기에 그 보급은 용이치않은 것이였다. 이런 형편에 백두산밀림으로 들어가서는 어떻게 하는가?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자금만있으면 무기를 계속 로씨야에서 구입할 수 있거니와 만약 구입이 어렵게된다면 낡은 무기라도 들고 다시싸울 수는 있는것이다. 서일은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왕청을 떠날 때 낡은무기들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거기 한곳의 은밀한 곳에다 아무 때든 다시파내여 쓸수 있게끔 저장을 해놓은 것이다,
이같이 무기도 문제려니와 북로군정서는 백두산으로 들어가면 무엇보다 병력을 충원하기가 불량한 상황이였다. 다같은 독립군이였건만 보면 홍범도의 大韓獨立軍과 北間島國民會의 최진동과는 종래부터 화애롭지 못하고 알력으로 상호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의 독자적(獨自的)으로 대일항전(對日抗戰)을 계속해온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지경에 이르러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정세는 변화하고있다. 불쾌한 마찰로 북로군정서가 이제 또 독자적(獨自的)인 방식으로 계속적인 전쟁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였다. 서일은 이 점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이다. 이번 청산리전투에서 처음부터 련합작전을 하였다면 보다 더 휘황한 전과를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 왕청일대에의 대종교도들은 아직은 거의가 흩어지지 않은것이다. 그들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들을 잃른다면 북로군정서는 후원이 끊어짐을 의미하는 것이요 이 대종교부대는 그 존재마저 없어질 것이다.
김좌진사령은 서일총재의 명령에 복종했다. 그는 우선 부상병과 락오병은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돈화현방면으로 개별행동을 취하여 피신하도록 령을 내리였다. 그러면서 청산리전투를 치른 참전병력을 전부이끌고 곧 왕청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 전만주의 사정을 보면 왜적의 공세외에 어떤 지방은 동북군벌의 몰리해로 인하여 간섭과 방해가 우심하였다. 왜군을 방어하면 토군의 래습을 당했고 토군이 퇴각하면 왜경의 추격을 받았다. 독립군은 토벌에 나선 2만명 일본군의 추격을 받는데다 그같이 토군의 습격도 피해야했다. 더욱히 좀처럼 치안을 확보할 수 없는 이때에 마적의 떼마저 득의양양하여 도처에서 방화, 략탈, 살육 등의 만행을 기탄없이 감행하니 말이 아니였다. 이 무지한 오합지중(烏合之衆)은 靑龍刀와 紅槍을 휘두르면서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불쌍한 조선사람을 무자비하게 살상하였다. 환경이란 이같이 날이갈수록 점점 더 말할수 없이 험악해고있었던 것이였다.
1월 2일. 임강현의 경찰은 외적의 간계에 빠져 삼도구의 교포 13명을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애국청년 김봉익(金鳳益)은 중국 보갑대에 체포되여 사살되였다.
1월 22일. 적의 경찰 40명은 警部 김극일(金極一)을 앞세워 안동현 泰誠堂病院에 침입하여 치료중인 홍성익을 체포하고 병원장 李某를 협박하여 홍성익의 동지 洪某, 金某, 張某의 은신처에 홍성익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통신을 하게하여 세사람을 무난히 체포하고 홍성익도 잡아갔다. 홍성익은 그달 24일에 신의주감방에서 사망했다.
2월 16일. 모연대원 조희성(趙熙晟), 이승윤(李承潤), 원문화(元文化) 세사람이 돈 1천 5백원을 가지고 다른청년 셋과 함께 장백현 호동령상판자의 중국인 려관에 류숙하다가 토비로 가장한 14명의 왜경에게 포박당하였는데 그 다음날 도착한 軍備團員 4명과 함께 총살당하게 된 순간 원문화(元文化)는 월래 중국어에 능통하고 또 많은 돈을 가지고있었으므로 중국상인으로 인정되여 조성희, 이승윤과 같이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그 외 사람은 다 목숨을 잃었다.
2월 25일. 왜경 수십명이 마적으로 변장하고 장백현 19도구에 침입하여 교민 정명옥(鄭明玉)외 9명을 잡아갔는데 그중 2명은 도망하고 7명은 행방불명이였는데 4월중순경 마적소굴인 그 현의 22도구를 수색하여 7명의 유체를 발견하였다. 그런데 그곳 산야(山野)에 내버린 시체가 첩첩하였으며 혹은 참살, 총살, 할복하고 또는 철사로 목을 꿰여 수십명을 나무가지에 매달았는데 살은 까마귀밥이 되었다.
3월 5일. 왜적과 마적 수십명이 한무리가 되어 중국관병으로 가장하고는 장백현 17도구 천수평에 침입하여 교민남녀를 한군데 집합하게하였는데 그 중 한 청년이 그 무리에 왜놈이 섞여있는것을 발견하고는 고함치며 도주했다. 그래 여럿이 도망치게되였는데 남녀 6명이 총에 맞아 당장에서 죽고 중상을 입은 부녀 하나는 사흘후에 죽었다. 왜적은 민가에 불을 질러 전부태워버렸다.
그 한무리가 이틑날에는 15도구에 침입하여 이시우(李時雨) 등 13명을 살해하였다.
이성배(李聖培)는 삼수군출생으로서 軍備團 第8支團財務였는데 장백현 13도구에서 3월 9일에 중국경찰에 체포되여 4월 14일에 신갈파진 왜경에 넘겨졌는데 적은 그를 살해하여 압록강에 버리였다.
3월 13일. 적의 밀정 등 수십명의 왜경과 중국경찰 10명이 같이 통화현 괘마자구에 래습하여 이흥필(李興弼), 박문규(朴文奎) 등을 란타하고 약장(約章), 민적(民籍), 공문서(公文書)를 빼앗아갔으며 환인현(桓仁縣) 앵구(鶯溝) 허사준(許謝俊)에게서 현금 4백원 기타 교포에게서 돈 1,600원을 빼앗아갔다.
신덕룡(申德龍)은 밀정 김하진(金河珍)의 밀고에 의하여 독립군과 련락하였다는 혐의로 적에게 암살당하였다.
통화현 팔도구 이화운의 처는 토군과 마적의 교전장에서 달아나려다가 토군에게 피살당하였다.
3월 14일. 匡正團員 김용태(金用泰), 김화성(金和聲), 유영기(劉永基) 세사람은 이날 중국경찰에 잡혔는데 장백현지사가 왜적에게 뢰물을 받고 김용태를 왜경찰에 넘기였다.
4월 7일. 혜산진의 왜경 10여명이 장백현 만보강 농민 김해룡의 집에 침입하여 김해룡을 총살하고 그 처를 중상시킨 다음 세포(細布) 3필을 빼앗았으며 린가에서 은가락지 3상을 강탈했다.
같은 달 상순. 해빙기에 이른 압록강 물우에 표류하는 조선사람의 시체가 많았는데 모두 썩어서 누구인지 분별할 수 없었으며 그중 삼수군 호인면에 적을 둔 최병헌(崔秉憲)은 도장이 있었으므로 그 친척들이 가져가 장사를 지냈다.
독립군의 활약이 심할수록 왜적의 저해(沮害)도 컷다.
왜적의 령사관에서는 주구를 리용하여 반독립단체인 朝鮮人會를 각처에 세우고 독립운동을 내부로부터 파괴하려하였다. 왜적의 이와같은 노력은 3.1운동때부터 감행되여 1920년 2월 4일에는 창성군대안인 대석사구에 주구 김용국(金用國), 윤태경(尹泰京), 강제봉(姜齊封), 허상룡(許祥龍) 등을 시키여 朝鮮人會를 조직하였고 10월 안동현 朝鮮人會는 장백현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장백현지부장에 이청포(李淸浦), 김화포지부장에 이성실(李成實), 13도지부장에 이상섭(李象涉)을 임명하여 왜적에게 충성을 다하게 하였다.
이상의 사실들은 김성(金星)의 파견을 받고 나선 “일민보”와 “신국보”의 편집, 기자 그 몇이 북로군정서가 왕청을 떠나기전에 각지로 다니며 여러날의 신고 끝에 조사해낸 일부의 자료들이다.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라 일일이 매거불능(枚擧不能)이니 곤난이 첩첩이요 한마디로 말해 기막히는 현실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오랫동안 만주에서 활약한 많은 애국자들은 대략 네가지 방향으로 자기들이 갈길을 선택한 것이다.
1. 시운(時運)이 불리하여 조국광복의 성업(聖業)을 이루지 못할바에는 차라리 적과 싸워서 깨끗이 순국하는 길이요
2. 아무리 시국이 불리할지라도 본래 시대와 환경이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니 좋은 시기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南中國으로 가서 항일운동을 계속하는 길이요
3. 본래부터 공산주의에 공명하던 적색운동자들은 자기네 조국 쏘련으로 가는 길이요
4. 본래부터 의지가 박약한데다가 무슨 애국심에 불타서 독립운동에 참가한것이 아니라 혹은 부득이한 환경에 몰려서 혹은 독립이 되면 높은 지위나 차지해보겠다는 정권욕에 끌려서 독립운돈에 참가한 무리들이 왜적의 세력하에서 구차하게 생명이나 유지해보겠다는 심정과 또는 요행으로 왜적에게 붙어서 명예와 지위를 획득해보겠다는 야망으로 적에게 굴복하는 것이다.
이렇고 볼때 그 누가 독립군을 감히 경시(輕視)을 하랴, 그들 다가 자기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는데야!
그어떤 악렬한 환경속에서도 기가 죽어들어 머리숙일 사람들이 아니였다.
북로군정서가 왕청에 방금이르자 최삼용이 유령같이 다시나타났다.
《좋은 땅에 박히면 상등뿌리가 되고》
《굳은 땅에 박히면 하등뿌리가 되나니》
《상등뿌리는 밝은이요》
《하등 뿌리는 어리석은 이니라》
서일의 둘째딸 죽청이와 아들 윤제가 마주앉아 “會三經”의 한구절을 대화식으로 뇌이는데 전에 처음왔을때의 모양으로 귀를 기우리던 최삼용이가 찔끔 놀래는 것이였다. 미세하지만 낯빛이 그같이 달라지였다. 아마 애들 형제가 자기를 들으라 빗대고 그러는것 같았던 모양이다.
《평평한 것은 넓고 비어서 막힘이 없으며》
《화창한 것은 환하고 밝아 어둡고 그윽함이 없으며》
《안정한 것은 완전하고 튼튼하여》
《비뚤어지고 어지러짐이 없네라.》
손님의 감정을 알 리가 없었던 두 형제는 이렇게 제 아버지가 친히 지은 “會三經”의 글귀를 맞춰가면서 그냥 뇌였다.
《그자식이 어떻게 알고 묻어온거야? 아예 그 개를 잡아치워버려.》
성묵이 이번에도 이러는 것을 서일은 침착하게 눌러놓았다.
《우리가 여기로 퇴각했다고 보고하라 해. 그러는게 차라리 낮지. 생각해봐, 다까시마사단장이 바보가 아닌이상 지금도 그냥 그의 정탐을 믿어주고 흥미를 가질까? 안그럴거야, 두고봐, 끝장이 어떻게 되는가구!》
言中有言이라, 말속에 말이 있다고 서일은 이러면서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었다.
그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 이번 청산리전투에서 북로군정서의 손에 녹아남으로 하여 구곡간장이 끊어질것 같아 절치부심(切齒腐心)하게 된 다까시마사단장은 자기가 대방을 그토록 경시하게 된 원인은 첩자(諜者)로 내놓은 최삼용이가 북로군정서의 무장장비실태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판정하고는 그가 돌아가자마자 군도를 뽑아 목을 찍어 날려버린 것이다.
한편 독립군의 활약이 심할수록 왜적의 저해(沮害)도 심해갔다. 왜령사관은 임무를 맡고 독립운동진영을 내부로부터 파괴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는바 그 주요수단이 바로 朝鮮人會회를 각처에 세우는 것이였다. 한가지 례로 이해 즉 1920년 2월 4일에 창성군대안인 대석사구에 김용국(金用國), 윤태경(尹泰京), 강제봉(姜齊封), 허상룡(許祥龍) 등의 주구를 시켜 朝鮮人會를 조직하였으며 삭주대안인 관전현에도 朝鮮人會를 조직하였고 10월에는 안동현 朝鮮人會가 장백현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장백현부장에 이청포(李淸浦), 김화포지부장에 이성실(李成實), 13도지부장에 이상섭(李象燮)을 임명하여 왜정에게 충성을 다하게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의주군 길관면 상당동의 최영하(崔英廈)모양으로 스스로 일제의 주구로 된자도 있었다. 이자는 3.1운동때부터 태도가 반동적이더니 의주헌병대를 찾아가 자진하여 일제의 밀정이 되어서는 독립운동자들을 박해한 것이다. 그 지방은 압록강과 40리 떨어진 유벽한 곳이기에 내외지사가 국경을 출입하는 관문이였다. 하여 상해임정 각단체의 기관이 있게 된것인데 그자의 방해가 컷던 것이다. 그자는 헌병대를 찾아가 수백명의 武裝義兵이 부단히 국경을 넘나든다고 밀고하여 의주수비대 50명, 헌병 20명, 주재소 왜경 30명이 함께 출동하여 동리에 침입했거니와 홍주(洪疇)의 전가족을 구타하고 가택을 불태우게 한 것이다. 홍주의 가정은 하는 수 없이 만주로 망명했고 최영하(崔英廈)는 구장이 되어 더더욱 기고만장하여 유지청년들을 암해하고 중상한 것이다. 동리의 김학준(金學俊)을 독립운동 협력자라 밀고하여 왜경에게 악형을 받게했고 김학준(金學俊)은 고향에서 살 수 없어 도시로 도피한 것이다.
최영하(崔英廈)는 그 외에도 조덕화(趙德和)경찰과 짜고서 리의 사람 장덕신(張德信)을 비롯한 6명을 살해한 것이다. 제민족내에서 비렬한 망나니는 이렇게 생겨났던 것이였다.
일제와 크고 작은 형형색색의 주구들이 그같이 인간의 량심을 잃어가면서 준동(蠢動)하고 있는 이때에 순수한 민족종교로서의 대종교는 의연히 제 목적과 지향에 따르는 활동을 끊지 않고 계속이어나갔다. 그 교도들은 손에다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뛸쳐나가 독립이니 만세니 부르짖지 않았다. 그리했다하여 다른교(他敎)의 의심과 미움과 배척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하여 그들은 고립된것이 아니였고 그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았다. 대종교도들은 다른 교도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그들은 외면상 독립정신을 표출한 것이 아니라 내심의 의분(義憤)으로 혈전(血戰)을 다지면서 실제적인 행동을 준비했으니 그것의 표현인즉 북로군정서의 결성과 무장이였고 청산리전투와 같은 실전(實戰)을 치른것이였다.
서일은 자기가 맡고있는 각 시교당에 지시했다.
<<동도교구는 그어떤 상황에서든 교의 활동을 중지하지 말고 견지하라!>>
일제는 이해의 5월부터 만주에 군림히고있는 장작림(張作霖)과 수차 회합을 갖고 독립군토벌에 대한 것을 협의한 뒤, 4개월간에 걸친 독립군수색작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것이 표면적으로는 중일합동작전이였으나 실상은 각지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를 앞세운 일군의 독립군학살 작전이였던 것이다.
5월 13일부터 7월 3일사이에 흥경(興京), 유하(柳河), 해룡(海龍), 통화(通化) 등 각 현이, 5월 15일부터 8월 18일까지는 안동(安東), 관전(寬甸), 환인(桓仁), 통화(通化), 집안(輯安), 임강(臨江), 장백(長白) 등의 각 현이 일제의 토벌작전에 의하여 짓밟혀졌다. 하여 무구한 독립단체본거지가 분쇄되였거니와 독립운동인사와 무수한 동포들이 학살당한 것이다.
일제의 야만적인 학살로 인한 참혹한 광경을 서양사람 스탠리 마아틴(Stanly Martin)은 자기의 수기에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10월 31일, 우리들은 축성(築城)에서 12마일이나 되는 찬나파위촌(瓚拉巴威村)에 사실을 알려고 갔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27일 새벽부터 무장을 한 보병 1대가 이 예수교촌을 포위하고 산적한 밀짚위에 방화하고 남자라면 노유를 막론하고 옥외로 끌어내다가 사살하고 채 죽지 않은 자는 불속에 집어넣고 집안에서 울면서 이 비참한 광경을 보는 어머니와 처자의 가옥을 또 방화하여 마을 전체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이와 같이 몇 개 마을을 불태우고 병영에 돌아가서는 천황(天皇)의 탄생일을 경축하였다.
우리 일행이 부근촌락에 이르렀을 때 끝으로 조선식 큰집을 보았는데 아직 연소중에 있었고 곁에는 불로 재가 된 거퇴(巨堆)가 있었는데 이것은 3년간 저장하여 두었던 식량의 잿더미라고 한다.... 잿더미중에는 시체가 겹겹이 쌓여 있어 우리들은 이 재를 헤치고 한 노인의 시체를 보았는데 시체 여러곳에는 총탄이 박혀있고 몸은 벌써 고스라지고 간신히 목만 붙어있었다.
우리는 사진 몇장을 찍고 다른데로 갔는데 방화한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시체가 타는 악취가 나고 지붕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길에서 네사람의 부인을 만났는데 각각 어린아이를 업고 무덤옆에 앉아 우는 소리가 처참하였다. 타다남은 19집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며느리가 통곡을 하면서 잿더미속에서 못다 탄 살덩어리와 부서진 뼈를 줍고있는 것을 보고 나는 동네 사람을 청하여 기도드리고 협조하여 잿더미속에서 시체 하나를 끌어내여 잘라진 팔, 다리를 제자리에 주어 모은 다음 사진을 찍었다. 이때 나는 어찌나 분했던지 사진기를 고정시킬 수 없어 네 번이나 다시찍었다. 내가 알고있는 36개촌에서만 피살자가 모두 1백 40명이나되였다.>>
또한 당시 노루바위촌에서 한국인의 시체가 타는것을 3주야기도로써 지켜보았다는 선교사 푸우트(D.D. Foote)는 수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11월 4일에 노루바위촌(獐岩洞)에 갔더니 마을사람들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참상을 말하여 주었다. 즉 10월 30일에 일본군이 습격하여 3백 31인이 거주하는 촌락을 방화하고 총격하였다고 했다. 나는 가옥 9간 및 교회당, 학교가 불탄것을 보고 그 사실이 진실임을 알았다. 또 2월 1일에는 일본군 17인과 경찰 2명이 이 촌에 와서 남자를 모조리 끌어다가 죽인 후 죽은자의 아내를 불러내여 그의 경력을 대라고 고문을 하였고, 그 다음 촌락의 주민 전체를 모아 일장 연설을 한 후 외국인선교사가 이곳에 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또 벌써 죽어버린 시체를 마을 사람들을 시켜 한곳에 모으고 그 시체에 연료를 덮어 불을 질러 재로 만들어 없애버리였다.>>
1920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사한 자료에 의해서 쓴 박은식(朴殷植)의 “朝鮮獨立運動之血史”에 씌인 글은 이러했다.
<<왜적들은 교포가 사는 각 촌락을 습격하여 가옥, 교회, 학교 및 곡식 등을 닥치는대로 불질러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학살하였다. 그 살해방법을 보면 총으로 쏘아 죽이고 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끈으로 묶어죽이고, 주먹으로 때려 죽이고, 발로 걷어차서 죽이고, 돌로 찍어죽이고, 생매장하고, 화장을 하고, 솥에 삶아죽이고, 해부하여 죽이고, 코를 꾀어 죽이고, 배를 가르고 머리를 베여 죽이고, 눈을 뽑아 가죽을 벗겨 죽이고, 허리를 잘라죽이고, 사지에 못을 박고 손발을 토막내여 죽이는 등 인간으로서는 참아 볼 수 없는 일을 일본군은 장난삼아 행하였다.
우리 동포들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또는 부자가 함께 죽었으며, 남편을 죽이고 그것을 아내에게 보이거나 아우를 죽여서 형에게 보였으며, 상주가 신주를 가지고 도망하다가 형제가 함께 피살 당하였으며, 산모가 갖난이를 안고 달아나다가 모자가 함께 학살당하는 등 일들이 허다하였다.>>
당시 상해임정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은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또, 군정서 사관학교의 소재지인 왕청현 서대파도 이보다 더할지언정 못하지는 않았다합니다. 화룡현장암동(和龍縣獐岩洞)에서는 28명의 기독교인을 한 곳에 정열하고 병졸들의 사적(射的)을 삼아 소총사격을 연습하였으며, 연길현의란구(延吉縣依蘭溝) 남쪽 마을은 전체 30여호되는 이씨(李氏)촌락인데 3인만이 간신히 성명을 바꾸어 모면하고 그 나머지 전부가 학살되였으며, 어떤 4형제는 불타는 가옥속에 던져 넣어 태워 죽였다합니다.
그 외에 3명 혹은 수 10명의 학살은 없는데가 없습니다. 방화도 그러합니다. 이는 간도(間島)전체입니다. 아! 잔인과 포악의 화신인 일병이며 2,3세 되는 소아를 창 끝에 꾀어들고 그 앞에서 울부짓는 것을 보고 손벽을 치고 즐겁게 여겼습니다. 제조가 방정한 수저와 부녀자의 반지와 노인이 입는 털옷 등 어느것이나 다 략탈되지 않은 것 없었고, 소녀를 학살 할 때에는 반드시 강간하였소. 사람을 학살할 때에 일시에 총살하는 것보다 창으로 찔러 견디지 못하여 소리를 지르고 고민하다가 죽는 것을 즐겨하였소. 수10일전만 하여도 간도 어디를 가던지 죽은 시체가 쌓여 있지 않은 곳이 없었소. 그러나 그 시체는 반드시 면피(面皮)를 벗겨내어 누가 누구인지 판명치 못하게 만들었다 합니다.
예수교신자를 학살한 곳에는 서양 선교사의 조사가 심함을 증오하며 땅에 파묻고 썩은 시체를 다시발굴하여 유해 하나 없이 태워버렸다 합니다....
그러나 그 무참하고 잔인한 총창의 제물이 된 남녀는 이미 수만에 달하였다 합니다. 소화된 가옥도 그러합니다. 또 그 창검에 팔과 다리가 끊기고 혹은 눈을 혹은 옆꾸리를 찔러 끝내 불구자가 된것도 수천이로소이다. 이는 속일 수 없는 사실이외이다.>>
(“독립신문” 1920년 12월 19일)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에서 피해당한 조선동포의 생명, 재산은 다음과 같았다.
피살자ㅡ 3,469명.
피체된 자ㅡ 170명.
강간ㅡ 71명.
소각된 민가ㅡ 3,209채.
소각된 학교ㅡ 36개.
소각된 교회ㅡ 14개.
곡식ㅡ 54,045석.
이와같은 일제의 극악무도한 만행은 아무런 주저와 장애없이 자행되였다.
당시 간도방명으로 출동하던 일본군을 종군취재하던 “동아일보”의 기자 장덕준(張德俊)은 일군이 장암동에서 20여호의 한국인촌락을 습격하여 부락민을 한곳에 가두고 태워죽인 사건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일군지휘관에게 항의하였다. 이에 저들의 만행이 신문지상에 공개되는 것이 두려워 그들은 그를 현장에 가자고 유인하여 암살하였던 것이다.
독실한 대종교도인 서일은 하가야이찌의 “국민성십론”을 처음 읽노라니 檀君과 天皇사이에 등호를 치게 되는 것이 있어서 어느정도 호감이 생겼던 것이다.
<<일본의 <고사기(古事記)> 신화에 조차 “천조대신(天照大神)은 황실의 조상이요, 일본국토와 황실은 갈라놓을 수 없다.... 이장약의 존귀한 자손으로서 국토와 황실은 갈라놓을 수 없다... 우리의 국토는 천손(天孫)이 다스리는 것이어니 천손혈통이 아니면 다스리지 못한다.”고 씌여있는 것이다.>>
전국무장(戰國武將)ㅡ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웅재대략(雄才大略)
막부장군(幕府將軍)ㅡ 도구가와 이에야즈의 용지기모(勇智機謨)
유신공신(維新功臣)ㅡ 사이고우 타가모리의 병공무사(秉公無私)
지리학가(地理學家)ㅡ 이노우다 타다가의 분발노력(奮發努力)
녀류작가(女流作家)ㅡ 무라사끼 시끼부의 다재다예(多才多藝)
이같이 이름난 사람들을 렬거하면서 그는 일본은 력사상 영웅호걸과 才子佳人이 수없이 많다했고 한걸음 나아가 예언까지 했다.
19세기가 끝나감과 함께 아리안인종의 세력은 따라서 쇠퇴할것이고 20세기이후로는 몽고리안인종의 세력이 점차 흥기 할 것이다. 일본으로 놓고 보면 20세기는 의연히 희망이 차있는 세기며 할 일이 많은 세기인 것이다라고 했다.
하가야이찌(1867~1927)은 명치, 대정시대의 저명한 일본고전문학전문가로서 독일서 류학하고 도오꾜오대학 문과교수로 있으면서 맨처음으로 고전문헌학, 고대문학사 등 학술연구방면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는 만년에는 國學院교장을 지내면서 황태자 裕仁, 황비 良子의 시강(侍講)을 했는바 일본주의파경향을 가진 사람으로서 國家主義, 天皇主義의식이 대단히 농후했다. 그가 1907년 12월에 <국민성십론(國民性十論)>을 내놓은 것이다.
하가야이찌는 또한 <천황대가장론(天皇大家長論)>까지 내놓았다.
<<황실은 “공(公)” 즉 “큰집(大家)”을 뜻함이요, 백성은 모두가 “작은집(小家)”으로서 황실은 우리의 본가(本家)며 종가(宗家)인 것이다. 이러한 의식에는 황실과 국민간 진정이 있는바 단순히 통치자와 비통치자관계가 아닌 속심으로부터 우러나는 서로 공경하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서.... 일종의 부자간의 감정인 것이다. 부모의 명을 그릇칠수야 없지 않은가. 천황의 명은 거역말고 복종해야하는 것이다.>>
이러면서 일본사람은 옛날부터 목욕하기를 즐긴다, 몸에 묻은 때만 씻는것이 아니라 더러워진 령혼도 씻어버리기 위함이라했다. 지어는 죄악마저도 목욕으로 씻어버린다고 했다.
그들만의 인생철학이랄가, 의(義)를 중히 여기고 리(利)를 경시하며 일낙(一諾)을 천금(千金)으로 여기고 주군(主君)을 위해서는 친구지간에도 서슴없이 칼을 빼든다. 그러다 일단 제대로 안돼서 잘못이 생기면 할복자살을 하고마는 것이 일본사람이다.
무사졸병들은 지어는 생(生)을 경시하고 죽음을 락으로 여기다보니 자연히 싸움에 용감해지고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하가야이찌는 다음과 같이 론했다.
<<일본민족은 무(武)를 숭상하지만 싸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용감히 왜적을 막아낼 뿐이지 남의 나라를 침략할 줄은 모른다. 무사의 칼은 호신자위(護身自衛)에 쓰이는 것이지 절대 남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유사이래 조정에서 중국대륙이나 조선반도로 이주케한것도 너그러움에서 출발한 타당한 안치요 그것은 안거락업을 하게끔 하기 위함이였다. 섬나라에서 살다보니 내란이라는 것이 적은 편이고 력사나 신화에 봐도 도살을 하거나 략탈을 하거나 남을 제 노예로 만드는 것과 같은 잔혹한 일은 아주적었다.>>면서 <<무사는 “무사본성”을 강구(講究)하길래 부녀자와 아이와 약자들을 동정해주고 지어는 원쑤라도 죽음에 처하면 구해주고 상처까지 치료해준다>>느니 뭐니 하면서 <<일본사람이 마음이 측은한건 제집의 짐승을 잡아먹는 습관이 없는 것을 봐서도 알수있다.>>고 했다.
갑오, 일로 이 두차례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일본사람들의 자존심을 대단히 높혀주었다. 국수주의 일본의 사조는 명치중기에 일본사회를 크게 흔들어놓았는바 정교사와 민우사의 겨룸은 특히 젊은 지식인들의 사상을 대단히 진동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국력증강을 위한 사상기초를 닥음에 필요한 것이였다.
이럴때 하가야이찌가 쓴 “국민성10론”은 영향이 컷다. 한데 그의 이 글이 절대적으로 옳은건 아니였다. 무사도정신을 구가한것을 빼놓고는 국민성의 몇가지 우점, 이를테면 초목을 사랑하고 자연을 좋아하며 담박쾌락하고 솜씨가 기묘하다는건 과연 옳은것이다. 일본은 천연적으로 산천이 수려하여 자랑할만도했다. 허지만 장엄한 경관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일본사람은 마음이 측은>하다? 그래서 제집의 짐승은 잡지 않는단말이지? 새빨간 거짓말! 타민족은 제멋대로 학살하고... 하가야이찌 그게 그래 일본사람의 선량한 량심이란말인가? 세상 비렬하고 더러운 악종들! 》
가슴믿바닥으로부터 분노와 증오가 치밀어 오른 서일은 그 책이 다시금 눈에 띄이자 그만 난로의 불더미에 확 집어 던지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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