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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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반도의 혈 제1부 8.
2012년 09월 13일 13시 52분  조회:3807  추천:0  작성자: 김송죽
 

  8.

     

    조선대륙에서 청군이 물러가기는 했지만 청,일 두나라의 전쟁이 결속된건 아니였다. 만청의 해군이 압록강입구에서 패전하자 일부 군함은 려순으로 철거하고 다른 일부는 위해위(威海衛)에 집결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하여 려순항 방어전이 벌어졌다.

   리홍장은 1880년부터 려순군항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계속 포대를 수축하였고 5년후에는 큰 부두를 건축하였고 해군제독아문(海軍提督衙門)을 설치하여 산동의 위해위와 더불어 북양(北洋)해군의 중요한 근거지로 만들었다. 려순군항에는 해안포대 13개소와 륙상포대 9개소에 대포 80여문이 장치되여 있었는데 그중 대포 4문만 본국에서 제조한 것이고 기타는 전부가 독일 크로벨병기공장에서 제조한 것이였다. 려순항의 뒤에 있는 대련만(大連灣)에는 포대 6개소를 건축하고 역시 독일 크로벨병기공장에서 만든 최신식 대포 24문을 장치하였다. 려순에는 6개의 군(軍) 도합 30개 영(營)이 주둔하고 있었다. 리홍장은 공조여(?照璵)에게 6군을 맡겨 인솔케 하였는데 공조여는 위인이 욕심이 많고 비겁하고 용렬하여 각군을 실제상 통일시키지 못했다.

   한편 일본은 전술을 바꾸어 려순을 정면으로 치지 않고 만청군대가 방비하지 않는 곳으로부터 착수했다. 일본군은 화원항(花園港)을 공격하여 그곳을 점령하고 비자와(?子窩)로 상륙하면서 12일간이나 군대와 무기와 식량 등을 륙지에 실어올렸는데 만청의 해군과 륙군은 이를 어쩌지 못했다. 려순수비를 맡았던 만청군은 일본군대가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황히 도주해버렸고 남겨두고 간 무기 탄약들은 전부 적에게 빼앗기고말았다. 대련은 이렇게 한번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고말았다.

   일본군은 대련에서 10여일간 휴식한 후 려순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청군대의 각 장령들은 이미 적이 오면 도망할 준비부터 하고 있었으며 통수 공조여는 지휘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리고 이미 천진으로 도망가버렸다. 만청정부가 동방제1이라 자랑하던 요새는 이렇게 일본해군의 근거지로 변하고말았다.

   일본은 려순을 함락하자 4일간 걸쳐 그곳 시민들을 학살했는데 그중에는 녀자와 아동들의 피해가 특히 많았다.

   리홍장은 16년동안 신고하여 려순군항을 건설하면서 군비 수천만량을 허비하여 부두, 포대, 무기창고 등을 건설하였는바 이곳은 실로 북양해군의 정화(精華)라 하겠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대련만과 함께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고말았으니 통분할 일이였다.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을 침범하고나서 중국역시 무력으로 침략하고 있었다.      리홍장은 렬강들이 나서서 이를 정지시켜줄 것을 백방으로 획책했다.

 

   도오꾜오의 정부관저.

   지난해 수상자리에 올라서부터 량어깨가 더 무거원진 감을 느끼고 있는 이또오 히로부미는 등나무넝쿨로 만든 의자에 등을 지개고 두 다리를 길게 뻗은채 눈을 지긋이 감고 오래동안 꼼짝안했다. 조선에서 일어났던 동학란을 머리속에 다시금 떠 올리니 자책감이 깊어지는 것이였다.

  《주검을 30만이나 넘어내다니! 진압이 너무나 잔혹했구나. <정의없는 힘은 폭군>이라하지 않았는가. 이래놓구는 장차 어떻게 통치를 해낸단말인가. 차라리 국가지간의 전쟁이였으면 몰라도.》

   일본정부는 오도리 게이쯔께를 철환하고 그 대신 이노우에 가오루를 공사로 조선에 파견했다. 그런데 그곳으로부터 지금 조선의 백성은 거의가 일본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몹시 조심스럽다는 사신(私信)을 친구에게 보내온 것이다.

  《하나부사 모양으루는 꼴이 되지 말아야겠는데....제발 무사하기를!》

   이또오 히로부미는 속으로 친구의 안녕을 곱잡아 빌었다. 

   하나부사 요시다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고종 8년(1871)에 공사관서기생(公使官書記生)으로 조선에 가 1880년에 변리공사(辨理公使)로 승진하여 원산, 인천의 개항에 진력했었다. 그런데 임오군란때 그만 넉살먹고 도망쳐 돌아온 것이다. 그때 그는 제 손으로 공사관에 불을 질러놓고는 그것을 폭동자들게 뒤집어씌웠더랬다. 얼마후 이노우에 가오루가 건너가 일본측의 피해보상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남의 뒷수습을 잘해준 셈이다. 한데 이노우에가 일을 내고 쫓겨오면 그때는 어쩐다?....

   이또오 히로부미가 이따위 불쾌한 생각에 잠겨 헤매고 있는데 인기척이 났다.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외무대신 무쯔 무네미쯔가 방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있는걸 보니 필경 좋은 소식이라도 갖고 온 모양이다.

  《방금 단닌이 나를 찾아와 만청 정부의 취지라며 전달하더구만. 그네들이 먼저 강화를 하자고 나섭니다. 내놓는 조건은 두가지. 하나는 조선독립을 승인한다는 거고, 하나는 우리 일본에 군사비를 배상하겠다는겁니다.》

   외상이 하는 말이였다.

   얼마전 리홍장은 로씨야와 영국에 사정해서 그들이 함께 나서서 전쟁을 정지시켜줄 것을 일본에 요청해 왔다가 거절당하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미국에 빌붙는 판이다. 중국주재 미국공사 덴퍼이가 일본주재 미국공사 단닌에게 중국이 직접적으로 강화회담을 열기 위하여 나에게 위탁하여 왔다. 그 강화조건은 조선의 독립을 승인할 것과 일본에게 군사비를 배상하겠다는 두가지인바 청컨대 이 취지를 일본 외무대신에게 전달하여 달라는 전문을 발송했던 것이다.

  《조선독립 승인이라...군사비 배상이라... 하긴 먼저 빌고 드니 고맙긴한데 고것갖구 될 법이나 한 일인가, 원. 어리석게!》

   이또오 히로부미는 웃음집이 흔들리면서도 배짱을 부렸다.

  《전하라구 하시오, 청정부가 직접 일본에 회답을 요청하라구.》

   이같이 태도를 표시하는 동시에 위해위를 적극진공하라고 전선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과연 이또오 히로부미가 바라는대로 일이 되여갔다. 만청정부는 또 다른 외국사람을 보내온것이다. 이번에 온 사람은 천진 해관세무사(海關稅務司)인 독일사람 떼제링이였다. 그는 강화조건에 대한 일본정부의 의견을 타진하러 온 것이다. 

  《리홍장, 불쌍한 늙은 물소여! 믿을만한 산이 그리도 없느냐?》

   이또오 히로부미는 물에 빠진 자가 짚오라기 잡듯 바빠나서 허우적거리는 리홍장의 가증스러운 몰골이 눈앞에 떠올라 이렇게 비웃었다. 그는 떼제링이 서양사람이고 만청의 고급관리가 아니라며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다. 떼제링은 하는 수 없이 헛탕을 치고 돌아갔다.    

   전쟁은 갈수록 중국에 불리해져 련순함락후에는 위해위가 또 함락되였다. 위해위의 포대는 남 북 두 곳에 나뉘여져 있었다. 남쪽에는 포대 3개소에 대포 13문이 있었고 북쪽에는 포대 7개소에 대포 14문이 있었는데 그 대포들도 다가 독일 크로벨병기공장의 제품이였다. 수비부대는 도합 8개 영(營). 그런데 청군측은 적의 유인술에 걸려 작전상 수동에 처한데다 주력함정 4척이나 적의 어뢰에 맞아 침몰되고 다른 배도 나포되니 그만 사기가 동요되기 시했다. 계다가 내부에 알륵이 있어서 그것이 적측에 리용되였거니와 죽음을 무서워 하며 목숨을 아끼는 장령들은 투항심을 갖고 배에있는 서양직원들과 작당하여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정제독에게 살길을 요구하자.》

    영국인 호웨이는 뒤에서 이렇게 충둥질해놓고는 정녀창앞에서는 좋은 얼굴로 권고했던것이다.

   《제독어른께서 용감무쌍하기 이를데 없습니다만 형세가 이러하니...우선 투항하여 부하 군중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보는게 좋지 않을가요?》

   《내가 반드시 먼저 죽을지언정 결단코 내 눈으로 이런 꼴을 볼 수는 없다.》

    제독 정녀창은 10여척 선박이 일제히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게 함으로써 담은 한두척이라도 살려내려 했다. 그러나 장령들은 그의 명령을 듣지 않거니와 어떤 자들은 칼을 빼들고 제독을 공갈하기까지 했다. 정녀창은 행패하는 폭도들을 설유해도 듣지 않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그와  같이 결사전을 주장하던 장령 몇도 자기 부하들을 휘여잡지 못하게 되자 독약을 먹고 자결하고말았다....

    만청정부는 할 수 없이 시랑 장음환(侍郞 張蔭桓)을 전권대신으로, 소우렴(邵友濂)을 그의 부사(副使)로 하고 미국 전임 국무장관이였던 꼬스따를 초빙하여 강화조약체결의 협조자로 일본 히로시마에 보내여 회담하게 했다.

   《삼백만원 배상하라했더니만 전민이 떠들었다며. 나라가 작으면 어떻단말인가? 어디 작은 일본의 고추맛 좀 보시지.》

   이또오 히로부미는 배상금 300만원을 내면 조선에 출병한 군인을 철회하리라 했더니 중국의 백성들이 작은 일본 나라로서 감히 중국과 같이 큰 나라에 반항하느냐며 분노해서 떠들어댔다던 일을 새삼스레 상기하고는 이렇게 뇌까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장음환, 소우렴 두 사람은 직위가 낮고 신망이 적어 전권의 자격이 없다는 구실을 대고 회담을 거절해버렸다.

   《중국이 진정으로 강화를 하겠거든 리홍장을 파견해야지, 리홍장을!》

   《그렇게 해야만 하는 리유가 뭔데?》

    꼬스따가 의문을 가지고 물었다.

   《다른게 아닙니다. 피차에 회담의 결과가 지상공문으로 되지 않고 반드시 유력하게 실시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리유를 그럴 듯 하게 주어붙이였다. 리홍장은 이젠 나이가 많고 의리(義理)같은거나 잘 따질줄을 알았지 쇠궁력진해서 얼빤한 김에 나라주권을 쉽게 팔아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거다.

    장음환은 온갖 모욕을 당하고 결국 쫓겨오고말았다.

    만청정부는 일본의 요구에 감히 거역못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천황의 부름을 받고 황궁입시(入侍)했다.

    올해 나이 43세인 메이지천황은 건강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앓음으로 근심스레 나날을 보내는 약관(弱冠)은 아니였다. 효명천황(孝明天皇)의 둘째아들로 태여난 그의 이름은 무쯔히또(睦仁). 15세에 황위를 계승해 오늘까지 28년간을 풍운속에서 일본과 운명을 같이해온 사나이다운 군주라 할 수 있겠다. 메이지유신이 락후하고 암흑한 이 나라에 밝은 빛을 가져왔건만 한편에서는 력사의 수레바퀴를 역전시키려 드는 자들은 그냥 자기의 세력을 부식하고 있었다. 9년세월이 흘러갔다. 1886년, 반바꾸후파가 정변을 발동함으로 하여 왕정복고가 선포되고 쇼군 도꾸가와 요시노부의 정권을 천황에게 환부하게 하였던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뒤이어 도바, 후시미전쟁을 치루어서야 에도바꾸후의 통치를 철저히 뒤엎고 통일된 천황의 정권을 걸립할 수 있었으니 과연 순탄치가 않은 려정이였다.

   메이지천황이 지금도 제일 믿어 존대하는 사람은 이또오 히로부미였다. 나이를 보면 11년 차이. 관계를 따지면 황신(皇臣)이오만 서로간에 격세지감이 없을 정도로 속맘을 주면서 회포를 나누는 사이이기도 했다. 오늘 천황이 그를 부른건 전쟁끝마리를 어떻게 풀어가는지가 답답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물론 보고야 수시로 올렸지만.

   서재의 탁상우에 유수록(幽囚錄)이 펼쳐진대로 있었다. 

  《다시보는 중입니다.》

   천황은 이또오 히로부미를 밝은 얼굴로 맞으며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그 책이 아마 퍽 맘에 드시는 모양이죠?》

  《짐은 우리 야마도민족도 이러한 인재가 나졌다는게 자랑스럽구, 사람을 몰라준 무지한 폭력에 격분하게 됩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 책을 읽은 천황의 감수가 단지 그것뿐이 아리라는것을 잘알고 있다. 유수록(幽囚錄)은 그도 다시 한번 읽어 본 글이였다.

   유수록(幽囚錄)의 작자는 요시다 마쯔가게이다. 그는 1830년에 태여났는데 어려서부터 병서(兵書)읽기를 즐겼다. 1853년 페르리가 이끄는 미국 동인도함대가 강호만(江戶灣)으로 들어와 200여년간이나 국수(國粹)를 고집해 온 일본을 핍박해서 서방에 문을 열게 만들었다. 그때 요시다 마쯔가게는 미국 함포가 위력이 대단한 것을 친히 목격하고는 일본은 문을 열지 않으면 출로가 없음을 심심히 느끼게 되었던것이다. 이듬해 페르리가 다시 일본에 왔을 때 24세 열혈의 청년이였던 그는 배에 가만히 올라가 페르리를 찾아  자기를 해외로 실어다 달라고 간청했다. 한번 세상구경을 해서 눈을 띄우고싶었던 것이다. 한데 훗날 관부에서 발견하고 그를 체포하여 안정대옥(安政大獄)에다 가둬버렸다. 요시다 마쯔가게는 나오지 못하고 29살먹던 해에 그 감옥안에서 죽고말았다. 옥사하기 전에 그는 유수록(幽囚錄)을 썼는데 이 책에는 대외확장사상이 집중적으로 반영되여있는 것이다.

   《<국가가 강성하려면 근근히 자기의 것을 잃지 않는데만 만족해하지 말고 응당 한 걸음 나아가서 아직 제 손에 넣지 못한 것을 넣자고 힘써봐야할 것이다. 지금부터 반드시 군사준비를 잘해야 한다. 군함과 대포를 잘 갖추기만 하면 하와이를 개척하고 제후(諸侯)와 맛서 깜챠까반도를 탈취하고 이르쯔쿠해를 강점하고 류구를....조선을....북으로는 중국의 동북지방을 할거하고 남으로는 대만을 빼앗음으로써....> 명지한 권고였지요!》

   천황은 낮으나 격정이 다분히 담겨진 음조로 책에 씌여진 한단락을 읽고나서 이어서 말했다.

  《<류구를 수복하고 조선을 탈취하라>했지요?... 늦지는 않습니다. 당년에 요시다가 품고 간 꿈이 이제는 현실로 돼가고있는게 아닙니까. 문제는 우리가 이제 만청의 철문을 어떻게 철저히 부셔버리는가 하는 겁니다.》

  《담판하러 온다더니....》

  《오늘쯤 도착하게 될겝니다. 요구한 대로 리홍장이 친히 출마를 하는건데 아들을 대동한다는구만요. 교섭자는 의연히 꼬스따구요.》

  《그 미국 사람말이지요?》

  《걱정하실거야 없지요, 그쪽은 량해를 얻어 나서는건데 외면으로만 <공정>하게 <우의적 조정>을 하기로 미리 약속이 돼있으니까.》

  《수상께서 몸소 출면하시되 무쯔외상과 언행상 일호반점 엇갈림이 없도록 조처해주십시오. 담판대방의 정상을 가긍히 여겨 한 보 한 보 양보하다보면 혹시....》

  《뜻대로 되어갈겁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천황을 안심시켰다.

   메이지천황은 혹 어페가 생겨 제사람끼리 의합이 맞지 않을까봐 념려돼 귀띔을 해주는건데 그것은 피가 안보이는 담판석의 유화롭고 지독한 결투는 보지 못해 리해가 깜깜한 사람이 보통갖는 로파심에 불과한 것이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담판석에 내놓을 준비된 사항을 조목조목 알려줬고 천황은 묵묵히 귀담아 들었다. 잘 만들어진 극본이라 마치도 꽃보라속 황홀경에 빠져버린 것 같이 마음도 몸도 둥둥 떠서 무아(無我)에 이를지경이였다. 그러다 두 사람은 이제 조약이 다 맺어지고  나면 그때가서 얻게 될 태산같은 리득과 눈부신 전망을 놓고 기분좋게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까비 놀음을 무당이나 알런지?.....

   조선 사람이나 중국 사람의 입에서는 마관(馬關) 아니면 하관(下關)으로 불리우는 일본의 야마구찌현 서남단의 해변도시ㅡ시모노세끼. 서쪽으로부터 풍파가 심한 2월의 현해탄에서 일어나 매섭게 불어오는 차디차고 비릿한 해풍은 해골같이 말라버린 삭정이와 파선조각들이 나딩굴고 널려있는 사장(沙場)을 쓸고 륙지로 치달아 올라와 도시주변을 핥아주고 있었다.

   부두는 분주하고 항만에는 각양각색의 이양선(異樣船)이 여럿이 정박했다.

   만선기를 올리고 돌아왔던 고기배가 먼바다로 다시떠나노라 웅글진 고동을 틀어 올리는데 방금 들어서는 커다란 중국범선이 닻을 내리고 가교(架橋)를 뭍에 내린다. 머리가 이마우로 쭐덕 벗겨져 올라간 나막신 모양의 이 구식의 획혜(劃鞋)배는 거폭의 돗들을 내릴 준비를 하고있는데 거기로 부터 각기 승여(乘輿), 람여에(藍輿)에 앉은 거물급의 인물 셋이 사람들의 머리우에 들리여 하선(下船)하고 있다. 례포가 몇방 울리였다. 의장대의 장엄한 환영을 받은 귀빈행렬은 삼엄한 호위속에서 방어며 대구며 정어리를 파는 어물전이 줄지어 앉은 거리를 지나 곧추 국빈관으로 향했다. 이번 담판에 참석하게 될 리홍장일행이였다.

   《대신각하를 이렇게 다시 만나뵙게 됐습니다요!》

   이또오 히로부미의 첫 인사말이 이러했다.

   올해 72세의 고령인 북양대신 리홍장은 그사이 몰라보게 늙었다. 하기는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해도 사람이 이렇게 형편없게 늙어버릴 수는 없었다. 천진에서 만났을 때는 이순(耳順)의 나이였건만 그보다 썩 젊어보여서 중년의 장골같지를 않았던가. 그때 청나라측에서는 그를 전권대신으로 오대징을 부사로 하고, 일본측에서는 궁내대신이였던 이또오 히로부미와 농무대신 사이고 노리미찌가 특파되여 담판석에 마주앉았던 것이다. 기세 도고하던 그때의 리홍장은 어디로 가고 지금 다시 앞에 나타난건 늙고 병들어 사경에 이르고 있는 한 마리의 무기력한 숫사자였다. 이번 전쟁에서 참패가 안겨준 타격이 그리도 셋던 모양이다. 그는 제 아들 리경방(李經芳)을 참찬(參贊)으로 하여 데리고 왔다. 50대의 그는 정신이 맑아서 단엄한 기색을 짓고있으나 패배자의 위축감은 감추지 못했다. 협조자로 따라온 꼬스따는 여유작작한 뚜쟁이모양으로 코구멍의 털을 뽑으면서 윈선으로 포장된 열강의 오만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만청의 최고위급관리가 입고 온 그 락후하고 봉건적이고 꼴불견인 복장을 보고 이또오 히로부미와 무쯔 무네미쯔 외상은 눈길을 마주쳐 비웃어주었다. 그래도 대방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못 긴장해진 그들이였다.

   회담이 정식 시작되가 중계자로 나선 미국 전임 국무장관 꼬스따가 중,일량국은 전쟁을 속히 결속짓고 강화를 해야 한다면서 그 필요성에 대해 구구히 말했다.  

  《우리 휴전을 합시다.》

   리홍장이 마침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도 불필요한 사망은 바라지도 않거니와 시달림이 싫어서 휴전건의에 완전히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저자면 조건이 있습니다. 받아주겠는지?》

  《조건이 뭔지 말해보시오. 우선 들어봅시다.》

  《만청은 우리 일본군이 대고와 천진, 산해관을 점령하는걸 허락하고말입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요지부동의 자세로 대방의 안색을 살펴가면서 속타산을 꺼냈다.

  《남을 깔봐도 분수있지! 그게 뭡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

   리경방이 격분을 참지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부르짖었다.

  《그렇다면야 방법없지.》  

   이또오 히로부미는 낯을 돌려 진붉은 쟁반을 그려놓은 히노마루에 눈길을 박으면서 배포유하게 나왔다.

   꼬스따가 헝클어진 사태를 수습해보려했지만 헛짓이였다.

   일본측의 무리한 요구로 하여 담판은 열어서 몇분만에 중단되고말았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전선사령관에게 절대 전진을 멈추지 말라고 전보로 명령했다. 일본군은 위해위를 함락하고나서 우장(牛莊), 영구(營口)를 련속 함락했다. 그리고 나서 천진, 북경을 진공할 준비를 했다.

  《서울의 위급은 바로 눈앞에 닥치였고나. 이를 어쩌면 좋을고?》

   리홍장은 안절부절을 못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측이 내놓은 휴전조건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이 멸시보다 더 큰 모욕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외상 무쯔 무네미쯔를 시켜 리홍장을 가보게 했다.

   무쯔 무네미쯔는 리홍장을 만나자 그의 앞에다 《조선의 독립, 령토의 할양, 군비의 배상》등 10개 조항의 회담조건을 내놓고 《승낙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못하겠는가?》 둘중에 결정을 하라고 협박했다.    

   리홍장은 똥집이 타들었다. 애초에 일본이 죄꼬많다고 허술히 보고 대국과 감히 무엄하게 맛선다고 했는데 이꼴로 역전 될 줄이야. 전패가 완전히 확정된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배가 터지도록 게걸스레 먹자고 달려드는 일본의 무리한 조건을 다 들어줄수는 없어서 그는 우유부단했다.

  《저 령감두상을 내가 어떻게 하면 무릎꿇게 만들가?》

   이또오 히로부미는 일시 궁리가 나지 않았다.

   이러고있을 때 당일 시모노세끼 신문에 어물전의 돈을 뜯어먹으며 살아가는 부랑자들이 지역쟁탈로 패거리싸움을 크게 해서 사달을 일으킨 사실이 상세히 보도되였다. 경찰에 잡힌 주범은 고야마 로꾸노스께라고 하는 젊은 부랑자였다.

  《지역쟁탈로 패거리싸움질이라....》

   그것이 어쩌면 정계의 싸움질과 흡사한지라 이또오 히로부미는 보도를 읽고나서 자기가 청년시절에 해온 일들을 새삼스레 회상했다.

   미국의 페르리가 함대를 몰고와 대포를 쏴대며 무력시위를 해서 일본이 문을 열게 되자 일본의 양학가(洋學家)들은 서양의 문화를 접촉하면서 일본은 물질문명방면에서 구라파 여러 나라에 비해 많이 뒤떨어졌음을 깨닫았다. 그들은 화혼양재(和魂陽才), 화양절충(和洋折衷) 등을 주장해나섰고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문명개화“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극력 서방사회의 가치관념과 사유방식으로서 일본을 비롯한 동양 여러 나라들의 기질과 기풍, 지어는 인종까지 개량해야한다고 주장해 나섰다. 그러자 자유민권운동은 잔혹한 진압을 받았다. 하지만 록명관(鹿鳴館)을 비롯한 구라파주의는 의연히 일본국토를 뚫고 들어왔다. 양차와 양산, 서양복장, 개화장과 쇠고기신선로같은 박래품이 쓸어들었다. 노란 머리 파란 눈이 별스레 호기심을 끌었다. 어떤 이들은 일본어를 페지하고 영어를 보급하자고 했거니와 지어는 섭외혼인을 격려하고 인종을 개량하자고 까지 주장해나섰다.

   당시 이또오 히로부미는 존왕양이(尊王洋夷)의 급선봉이였는바 무지하게도 선지선각자의 국로(國老) 사까이 죠라꾸가 개국진취의 대책을 주창하는 것을 보고 히사사까 등 여섯청년과 작당하여 그를 암살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여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후 그는 이노우에 가오루와 같이 시나가와(品川)에 있는 영국공사관에다 불을 지르고 숨어버려 붙잡히지 않았다. 친구 이노우에 가오루와 같이 영국으로 류학을 가기 전의 일이였다.

   류학을 하고 돌아와서 그는 전비(前非)를 뉘우치고는 시세가 한번 변하고 나니 원쑤로 보았던 자유당을 중심으로 한 정우회(政友會)의 총재가 되어 천황의 개국진취의 뜻을 도와 지금은 일본 제1의 원훈(元勳)이 된 것이다. 그때 나는 칼을 들고 남을 암살하려들었으니 그게 폭도나 망나니 짓과 뭐가 다른가. 잡히지 안았을망정이지 잡혔더면 에누리 없이 폭도, 망나니로 사회의 버림과 지탄을 받았을 것이다. 회개하면 사람이 되는거다.

   여기까지 회상하고 보니 문득 신문에 난 저 부랑자를 내가 공신이 되게 부려먹지 못할가 하는 기발한 궁리가 떠올랐다.

  《가만있자, 그자식 이름이 뭐라했지?...그렇지,고야마 로꾸노스께라..나이는 스믈네살.》

   이또오 히로부미는 외상 무쯔 무네미쯔와 모략을 꾸미였다. 그리고나서 시모노세끼시의 경찰관을 불러다 문제의 부랑자 고야마 로꾸노스께에게《국가의 리익을 위하여》 립공속죄할 극비의 중대한 임무 한가지를 맡기게 했다.

   담판이 다시 시작됐지만 리홍장이 일본의 요구를 접수할 수 없다고 하였기에 또 중단하고말았다.

   이날 부랑자는 시키는대로 했다. 그는 회의장소에서 나와 려관으로 돌아가는 리홍장을 중도에서 칼질하여 왼편 얼굴에 중상을 입혀놓은 것이다.

   각국은 여론을 일으켜 일본을 비난하게 되였다.     

   일본은 세계의 여론이 더 커질까봐 두려웠다. 특히 로씨야가 이 기회를 타 구실을 대고 간섭해 나설까봐 두려웠다. 하여 일본은 리홍장을 죽이지는 않고 살려주면서 그를 안위했다.

   3월 3일에 일본은 정전하고 먼저 중일량국의 휴전조약을 체결하기로 승인했다. 일본측에서 강화조약초안을 제출하였고 리홍장은 다시 수정안을 제출하였다. 쌍방은 루차 협의를 거친 후 1895년 4월 15일에 드디여 시모노세끼조약(馬關條約)을 체결하게 되였는바 그 중요한 내용은 이러했다.

   

   1. 중국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승인하며 조선으로부터 받던 조공을 페지할 것.     2. 중국은 료동반도(압록강으로부터 봉황성, 해성, 영구에  이르기까지), 대만 및 팽호도를 일본에 양보할 것.                                  

   3. 중국은 일본에 군사비로 고평은(庫平銀) 2억만량을 배상 할 것.             4. 사시, 중경, 소주, 항주를 통상지로 개방할 것이며 일본은 각 통상지에 령사관을 설치할 수 있다.                                

    5. 본 조약의 집행을 보장하기 위하여 당분간 일본은 위해위를 점령하고 있을 것이며 그에 소요되는 군사비는 중국이 담당할 것.                                 

 

   시모노세끼조약(馬關條約)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확립시켰으며, 마치 월남과 비르마가 영국과 불란서의 식민지로 된 것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조선을 일본의 독점적식민지로 되게 하였으며, 또한 조선을 남만주 침략을 위한 경제적 군사적 근거지로 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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