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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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백포종사 서일 일대기제3부 3.
2011년 10월 12일 16시 46분  조회:5358  추천:2  작성자: 김송죽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3부             

  3.

   우뚝솟은 백두! 웅위로운 그 위용을 자랑하듯 장백산맥은 마치 꿈틀거리는 거룡인양 줄기줄기 기복을 이루면서 저 멀리 아득히 뻗었는데 산을 덮고있는 망망한 림해는 꿈을 꾸는 듯. 하지만 그 누가 알랴, 열혈이 끓는 단군의 자손들이 지금 망국의 원혼(冤魂)을 풀기 위해 천고의 잠을 깨우면서 여기서 웅지를 키우고있음을!    

   아직 30대에도 채 이르지 않은 두 젊은이가 장백산맥의 저쪽 서북간도를 동분서주하고있다. 하나는 대한제국의 시위대부교(侍衛隊副校)로서 한때 의병장이 되어 피를 흘리며 싸워 온 올해 27세의 김규식, 다른 한 젊은이는 참교(參校) 김찬수다.   

   《연기우, 강기동, 김민수, 조인환, 왕회종...내가 저 세상에 가신이들의 안식을 빈들 명복을 빈들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뒤를 꼬지 못해 왜놈한테 나라를 끝내 빼앗기고 말았는데. 가신이들이 구천에서 무능한 이 인간을 얼마나 원망하겠는가. 생각하면 가슴이 터지는구나.》

   희생된 동지들을 다시생각할 때마다 김규식은 자책에 잠기군한다. 그래서 한숨 쉬군한다. 적의 손에 먼저희생된 그들은 모두가 생전에 그와 혈맹을 맺앚던 경기의병(京畿義兵)의 거들이였다. 의병항쟁은 그야말로 눈물겨웠다. 김규식은 손잡고 싸우던 그들이 속속 적의 마수에 걸려 순국하니 본국내에서는 그 이상 별 도리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는 재기(再起)를 속다짐하여 다른 수 많은 의병장들의 뒤를 따라서 여기 만주땅을 향해 망명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한데 뜻과 같이 재기(再起)가 하루속히 이루어질 가능성은 전혀 보여지지를 않았다.

   《여기서만 맴돌지를 말고 우리 한번 동간도쪽으로 가봄이 어떠할까?》

   김찬수가 내놓는 의견이였다.

   동간도(東間島)란 용정과 연길, 왕청일대를 가리키는것인데 김규식은 그러나 여직 그 어디에든 광복을 위해 싸울수 있는 무장단이 조직되였다는 소리는 듣지 못한지라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만다.

   《거기간들 앞이 보일까, 그 꼴이 그 꼴이겠지.》

   김규식은 기분없이 토해놓고나서 한마디 더 보태는것이였다. 

   《빈 손으루 어떻게 싸운단말인가. 우선 무기를 구할 길도 없고. 그래 내가 거긴들 뾰죽한 수가 있겠는가 하는 그 소리야.》    

   《그럼 어찌할까. 그냥 이멋으로 류리표박 문전걸식 할 수야 없잖아.》

   두 젊은이가 이러면서 이젠 어쩌면 좋을지 유예미결(猶豫未決)하고있을 때였다. 나이가 10여살 위인 초면의 장년 하나가 지나다가 무심결에 그들이 주고 받는 소리를 잡아듣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주책없는 참견입네만 젊은이들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있나?》

   《객은 누구신데?...》

   김규식은 콧등에 검은테안경을 건 그를 눈여겨보면서 되물었다.

   《나 서울서 왔는데 성은 홍(洪)가고 이름은 충희라 하오. 충성 충자에 기뻐할 희자.》

   대방이야 경계하건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장년은 자기의 성명을 고스란히 알려준 후 입을 다시열어 부접좋게 말을 계속잇는것이였다.

   《보아하니 우국단심에 월경한 젊은몸에 거취를 정하지도 못한것 같은데... 혹시 의병으루 싸우지들 않았소?》

   《예. 싸웠지요. 건데 어른은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이번에는 김찬수가 의아쩍어하는 빛으로 되잡아 물는다.

   《제 신분을 이마빡에 찍었으니 아는게지. 생각해보게. 이 만주에 의병을 지내다가 온게 어디 자네들뿐인가.》

   홍충희의 말이였다.

   8년전이였던 1907년도는 일제의 <<차관정치>>가 조선인민을 극도로  분시켜 반일의병투쟁을 야기시킨 한해였다. 일제침략자들을 격멸소탕하자는 구호를 들고 무장투쟁을 먼저시작한 것은 중부조선일대였다. 그해의 8월 1일에 거세찬 군인폭동이 일어난 뒤를 이어 3일에는 충청북도 청풍에서, 4일에는 경기도 양근지방에서, 5일에는 경기도 지평에서... 이리하여 제천, 충주, 죽산, 장호원, 려주, 강릉, 앙양, 고성, 통천, 섭곡 등지에서 의병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던것이다.     

   그 정형에 대해서 <<속음청사>>는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기였다.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각도에 퍼져가고 있으며

     그 세력이 강대하여 적은 수의 일본군으로써는 탄압할수 없다.>>

  

    홍충희는 그때 여러 의병진을 돌아다니면서 <<격문>>과 <<통문>>을 써주었을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것들을 널리 살포하고 선전하여 백성과 유생들을 반일의병항쟁에로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는 광복이 되는 그날까지 구국항쟁에 목숨바쳐 싸우리라 맘먹은 피끓는 사나이였다.   

   지식인인 홍충희는 “한일합방”이 되자 왜정(倭政)에 불만을 품고 구국의 길을 모색하려고 만주로 건너왔다. 이 계단에는 많은 애국자가 그러하듯이 그도 김삿갓모양으로 정처없이 떠도는 망명객이였다. 처지가 같은지라 동정심이 생긴 그는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충고했다.

   《세월이 이런데 타발한들 무슨소용있겠소. 안그런가? 그렇다구 비관은 말게. 그런다면 앞이 점점 더 막막해질 뿐이네.》

   《글쎄요. 누구를 타박하겠소만은 건너오고보니 여기서도 재기를 할만한 기운은 그리 보이지를 않아서 죄쳐보는 소리였습니다.》

   《그 기운이라는게 어느건지 모르겠소만 그걸 누가 만들어주겠나. 행운은 바랄것이 못되니 차라리 분투를 합세. 그런다면 앞이 트일거야.》

   《홍선생님의 그 말씀 과연 옳은 것 같습니다. 자신이 노력하고 분투하면 앞이 트이겠지요. 비관은 절대안가질텝니다.》

   세 사람은 몇마디 주고 받는 사이 의기상투(意氣相鬪)함을 느껴져 마침내 고락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하고 극친한 동지로 사귀게 되었다.

   한편 지난해에 왕청을 떠난   성묵이와 이홍래는 각 독립운동진영의 사정을 료해하는라 고행(苦行)을 계속하고 있었다. 만주각지를 돌아다니노라니 지금도 가끔 괴나리보짐을 한손에 달랑 든 행객이나 정처를 잡지 못해 남부녀대로 류랑하는 동포난민을 어렵잖게 만날수 있었다. 비감과 우수만을 던져주는 그러한 광경이 지속되고있는데는 조선에서 일본의 식민지정책실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이다. 총독부는 1910년부터 토지조사사업을 전면개시했다. 이는 일제가 식민지수탈정책을 재편성하는 과정이였는바 결과적으로 농민층이 몰락하게 되었고 그러한 몰락은 불가피적으로 더 심한 외국이동을 유발시킨 것이다.

   두사람역시 여러곳을 돌면서 보았지만 만주에서 무장독립투쟁기분을 아직은 크게 맡아내기 어려웠다. 각지에 학교가 일어서서 민중계몽에 치중하는것이 보편현상이였다. 물론 무관학교로 명명된 것이 몇군데있기는하나 무기의 불비로 화성대 몇자루와 목총을 들고 하는 훈련이니 어설펐다.    

   집안과 류하현을 걸쳐서 관전 방취구에도 탐방의 발길을 돌려보았다. 거기서 그들은 들끓던 열망이 가라앉음을 보았을 뿐이다. 일사보국(一死報國)의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조국땅에서 의병항쟁을 오래동안 해오다가 남북만주로 진을 옮겨온, 력사가 가장 오랜 구국지사들과 연원이 깊은 유교학자(儒敎學者),사망한 유인석을 봐도 그렇다.  유린석  그가 이끌었던 일파는 재차의 대규모적인 의거를 기도하여 갖은 노력과 정열을 다해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나 물질문제(物質問題)는 인위적으로 기피할 수 없는 일이였다. 더구나 이역에서 류랑하는 망명지사의 처지였으니 그네들의 포부는 사실그대로 연목구어(緣木求魚)의 공상이요 덧없는 이국의 광음은 날이 갈수로 장사(壯士)의 빈발(鬢髮)을 쇠퇴하게 할 뿐이였다. 그러한즉 죽기를 한(限)하고 결심한 조국광복의 뜻과 왜적섬멸의 계책은 뜬 구름같고 흐르는 물과 같이 총총히 전환할 뿐이였다.

   조맹선(趙孟善), 이진용(李鎭龍) 일파역시 사정은 같았다.

     성묵이와 이홍래는 어느날 봉천(奉天)역에서 천도교(天道敎) 동포피난민을 만난적이 있다. 세 세대의 식솔이라는데 늙은이와 아이들까지 해서 무려 20여명가량 잘되였다.

   《우리는 해주서 살다가 건너왔수다. 여지껏 경작해 온 토지문제같아나 소송을 걸었다가 그만 패소를 하고만겁지요.》

    농부차림의 장정 하나가 자기들이 이주하게 된 리유를 직설했다.

   《아니, 여지껏 경작해 온 토지문제라니?... 어떻게 돼서 소송은 하게 된거요?... 대체 누구하구서?...》

   이홍래가 두서가 잡히지 않는 말에 리해를 못하겠노라했다.

   《그건 조상전래의 우리 땅이우다. 건데두 거기다가 공장을 짓겠다느니 이제는 국유로 만든다느니.... 하긴 땅값이라구 주네만 그게 뭐요, 눈꼽재기만하게. 그저 막 강탈이지유. 억울해서... 그래 소송을 걸었더니만. 후!...》

   그 농민은 낫날쥔 놈 낫자루쥔 놈을 당하는 수 있으랴하면서 같은 제동포끼리라 해도 어떠한 소송이 생길라치면 이쪽은 천도교도교인이라는데서 백안시하고 패소판결을 하기가 첩경이라했다.

   《세상에 그런놈의 법이 어디메 있는가!》

   《정녕 그러하다면야 이건 교도를 배척하고 타격하는게지 뭐야.》

    묵이도 이홍래도 적은 지금 법을 내놓아 그것으로 종교를 탄압하기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묵이 자기는 중국본토의 상황을 깊이 알아보리라면서 관내로 갔다.

   그와 갈라져 왕청으로 돌아오던 이홍래는 길림에서 김규식, 김찬수, 홍충희와 만났다. 그것은 그 도시의 번화거리에 있는, 동족의 한 교포가 경영하고있는 음식집에서 초면에 우연한 만남이였다. 정오때라 저쪽 세사람이 상을 금방 받고 술을 마시려 할 때에 이홍래가 나타났던것이다.

   《보아하니 저치도 우기같은 날객인 것 같구나!》

   김규식이 무심코 제 짐작으로 내뱉었다.

   《거 무슨소릴 그렇게 해쌌는거야. 누구가 날객이란말이여, 내가?》

   이홍래는 그 소리를 잡아듣고 보니 감정이 탈렸다.

   《보아하니 손님도 우리와 신세같아 뵈여 해보는 소리였을 뿐 악의는 아니였으니 노여워마시오. 그래 저의 점괘가 틀리는가요?》

   《틀리잖구. 버릇없이 아무소리나 죄치지 말어. 속상해. 나 이 홍래는 젊은이 처럼 헤매치는 빈털털이 날객은 아닐세. 》

   이홍래는 여전히 성난투로 저쪽의 변명을 일축해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홍충희가 오해를 풀게하느라 웃는 얼굴로 이쪽을 술상으로 끌었다. 김규식은 잘못을 빌었다. 오해가 풀리자 이홍래는 사람들이 보통 동간도라 부르는 왕청, 용정, 연길, 석현 일대의 상황을 그들한테 알려주었다. 그곳에도 동포마을이 생긴지  몇해된다는 것, 마을마다 학교가 새로일어서서 어린이는 물론 성인문맹자까지 눈을 뜨게끔 계몽하고있다는 것, 특히는 대종교인의 활동이 그 어디보다도 활발히 전개되고있다는 것, 그 일례로써 중광단이 조직되여 해산된 의병들을 규합하고있다는 것 등등.

   《의병들을 끌어모은다? 그래서는 뭘합니까? 》

   김규식이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물어보는 말이였다.

   《지금은 주로 학습을 하고있지. 일을 하면서.》

   《우리 거기루 가볼까?》

   이쪽이 말끝을 맺자 김찬수가 이러는데 김규식은 손사래를 친다.

   《그런소린 하지두말어. 일하며 공부할거면 고향가서 하지 거게 가서 할건뭔가. 글이나 읽자고 모여드는건 득책이 아닌거야. 내 말이 틀리지 않아. 틀리지 않다니까. 그런데서는 자칫 쓸데없는 공담이나 판을 치기 십상이야. 원쑤놈하고 싸움은 못해내면서.... 허니까 가겠거든 어디 거기서나 가라구. 난 안갈테야.》

   《아니 젊은이가?... 우리 하는 일 어떻게 보고?... 나 이 홍래가 월경의병장으루 조선일판에 만주일판을 다 다녔어두 자네같은 의병은 처음봐.》

   이홍래가 다시노하자 홍충희가 좋은 말로 감정을 눅잦히란다.

   《저 부위가 실은 정작 이역땅을 밟고 봐도 맘과같이 돼주지를 않으니 기분잡쳐 그러는겁니다. 리해를 해주시오.》

   김규식은 의병으로 많이 싸우긴했어도 지금와서는 빈털털이로 된 신세요 이 멋으로 찾아가는건 거렁뱅이모양이라 남의 빈축이나 살 일이라며 조선으로 되돌아가리라했다. 김찬수는 그를 좇았다.

   어떻다고 말을 할가. 떠돌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구름속에서 번쩍이는 번개처럼, 바람에 껌벅거리는 등잔불처럼 것잡기 어려워 보일것이요 그와는 반대로 안정을 바라는 사람은 마치 불이 꺼져버린 잿더미같고 말라버린 고목같아 생기를 잃은 것 처럼 돼보일 것이다. 한데 만물을 그렇게만 보는건 잘못이며 적합치않은것이다. 멎어있것같은 구름속에 날개를 펼친 소리개가 떠있고 흐르지 않는 물속에 뛰노는 고기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大倧敎가 기껏 무엇을 해내겠는가?》

   종교의 실력을 모르는 김규식이 가볍게 내친 말이였다.

   대종교는 과연 무엇을 해내고있는가? 총본사가 청호로 옮겨온 후 대종교는 특히 전 만주지역에서 목적한바의 항일황동을 활발히 펼쳐가고 있었다. 김규식이와 김찬수가 돌아다닌 동간도저쪽만봐도 그렇다.

   거기에서는 윤세복(尹世復)이 한창 포교를 널리하고있었다.

   안희제, 김동삼, 이원식 등과 더불어 대동청년당의 핵심인물인 윤세복은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항일운동단체를 모색하던 중 종교적인 단체의 성격을 띠면서 조선고유의 민족종교로 간판을 내건 대종교에 입교해야만이 항일투쟁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1910년 12월에 敎祖 라철을 만나 입교하였던 것이다. 대종교에 입교한 그는 항일독립운동의 화신이 되려는 결심을 품고 형 윤세즙(尹世葺)과 상의하여 부유했던 모든 가산을 총정리하여 1911년 2월에 함께 월경하여 만주의  환인현(桓仁縣)으로 정치망명을 단행한것이다.

   윤세복은 1913년에 知敎로 임명되였다가 다시 尙敎로 승진했다. 그는 제1단계로서 그곳에다 東昌學校를 설립하고는 자신이 직접 교사가 되어서 혁명동지들을 모아 계몽교육에 착수했다. 다시말해 만주에 와있는 동포 제2세대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지식수준을 높이는데 그 목적을 둔 것이다.

   이같이 서간도  류하현(柳河縣)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와 桓仁縣의 東昌學校는 다가 항일독립운동자와 독립군을 양성하는 대종교의 성향을 띤 혁명학교였다.    

   김규식도 김찬수도 고생스레 만주에 까지 오기는했어도 만주의 실태를 깊이 파악하지는 못한채 결국 환국(還國)하고말았다.     

   이때 조선에서는 大同靑年黨과 光復團이 국권회복을 위해 싸우며 활약하고 있었다. 大同靑年黨은 1909년에 청소년으로 조직한 비밀단체로서 당원수는 안희제, 이원식, 남 형, 김사용, 윤병호, 김기수, 김동삼, 윤세복 등 80여명이 되였다. 다른 한 비밀조직 光復團은 1913년에 채기중, 유창순, 류장렬, 한 훈 등 몇사람이 豊基에서 秘密結社大韓光復團을 조직하여 광복운동에 치력하던 중 대구에서 박상진, 량제안, 우재룡, 권녕만 등 일파와 합류하여 光復會라 개칭한 것이다.

   김규식과 김찬수는 물론 이러한 비밀단체가 있다는것도 몰라서 접근하지도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조선에 되돌아가 자체로 방법을 모색하여 광복운동을 해나갈 생각을 했던것이다. 

   그러나 홍충희는 생각이 좀 달랐다. 그는 대종교가 그저 일반적인 神敎는 아닐것이요 더구나 대종교인이 중축이 되어 조직한 중광단은 기필코 그 사명이 계몽으로만 그치지 않으리라는 판단에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홍래와  묵을 따라서 왕청으로 향했다. 우선 료해를 더 깊이 해본 후에 조선으로 건너가도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한편 동도본사 도교사로서 책임이 있는 서일은 자기 관할내에 있는 여러 시교당건설을 지도하느라 돌아다니다가 왕청 덕원리에 있는 제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 먼저 로인회에 가 거기 년세많은 독신의병들을 일일이 문안하고는 발길을 重光團室로 돌리였다. 거기서는 계화가 량현, 심권 그리고 박승익 등 여러교우들과 <<神壇實記>>을 펼쳐놓고 한창 자유토론을 하고있는 중이였다.

   그 책은 尙敎에 올라 지금 남도본사전리로 있는 김헌(金獻)이 지난해에 지은것인데 서일도 읽어보았다. 책은 神敎의 연원(淵源)을 력사적으로 밝혀 낸 값진 經典이였다.

   서일도 몇마디 참견했다.

   자유토론이 방금끝나자 이홍래가 들어섰다. 초면의 홍충희를 데리고.

   《이렇게 찾아주시여 반갑습니다.》

   서일은 홍충희를 동지로 여기면서 반갑게 대해주었다. 

   이홍래는  성묵이와 갈라지게 된 연유를 말하고나서 길림에서 구군대 육군부위 김규식과 참교 김찬수도 만나보았노라고 한마디 보태였다.

   서일이 귀를 세우고 듣더니 몹시 서운함을 드러냈다.

  《육군부위 김규식이라! 키큰 젊은이말이지요?... 옳군! 건데 왜서 그는 데리구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는 내가 여기에 있는걸 알면 꼭 올겁니다. 절대 그멋으로 돌아갈 사람은 아닙니다.》

   이러자 이홍래는 자신이 미런했다면서 대단히 죄송스러워했다. 대종교와 중광단에 대해 소개를 하면서도 단장인 서일에 대해서는 그만 까먹고 그들앞에 일언반구도 언급하지를 않다니 원... 자신이 민망할 뿐이다.

  《나와 친분도 친분이려니와 우리 중광단은 장차 그런 자격자가 수요되는것입니다. 그는 군사지식을 갖고있거든요. 실전경험도 있을거구.》

   서일이 그를 그리는 리유를 이같이 말하자 이홍래가 우쭐 일어섰다.

   《내 당장 가서 데려올까.》

   《이런 참! 그러지는 마시오. 때되면 다시봅시다.》

   서일은 성격이 워낙 불같고 무겁한 그를 눌러놓았다...  

서일이 모시고있는 큰할아버지 서장록(徐長錄)이  1835년에 출생했으니 이해 나이 팔순에 이르었다.  참으로  보기드믄 장수(長壽)요 잘 경축해야한다면서  마을의  시교회(施敎會)에서 주동적으로 그의 생일 잔치를 크게 차려주었다. 서일이 교인들에게 부담을 지우는것같아 자체로 차릴테니 그러지 말라고했건만 막무가내였다. 년년이 독신로인의 생일도 차려주지를 않는가, 장수하기만 하면 누구를 물론하고 잔치를 크게 차려주리라는것이였다.  

       그래서 이날은 온 덕원리마을이 또한번 명절기분이였다.              

   손자와 손부의 절을 받은건 물론이거니와 증손자와 증손녀의 절까지 받고보니 자기가 이같이 고령으로 살고있는 것이 행복하고 기적인것만같아서 서장록로인은 기쁘기가 한량없었다.

  《여보게 아우. 자네 이제라도 집간을 일구게. 로댁이 있어 사는거허구 없이 사는게 천양지차일세.》

   그가 이달문보고 하는 소리였다. 마을의 로인회에 의병독신이나 유생의 양반독신이 여럿되지만 어쩐지 그래도 친분이 더 두터운건 그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이달문은 그 충고를 시종 들어주려하지 않는다.

   《내 꼴을 좀 보시오. 이 외눈통배기 홀애비한테 어느 과부가 몸을 주자구할까. 이대로 늙어 살다가 껍벅 죽어버리는게 내 팔자외다.》

   과연 고집불통이란 소리를 들을만한 그였다.

   홍충희가 조선으로 돌아갔다. 자기는 아무때건 다시오리라면서.       

   한편 홍암대종사 라철께서는 년초에 還國하여 남도본사를 비롯한 조선국내의 포교정황을 다 알아보고나서 만주 청호 총본사로 되돌아온 후 모든 정력을 의연히 포교에만 몰붓고있었다. 가정을 멀리두고 있는 이같은 헌신적인 분투정신은 실로 모든 교직자의 구감(龜鑑)으로 될것이다.

   음력 8월15일, 해마다 맞이하는  가경절(嘉慶節)이 돌아왔다.

   서일은 이 명절을 전해와 마찬가지로 총본사에서 그와 함께쇠였다.

   

   가마히 우에 계시사 한으로 든

   보시며 낳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     

 

   매양 그러하듯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각사(覺辭)를 뇌이고 잠자리에 든 서일은 그날밤 꿈에 삼도구 안산에 올라 황홀한 자연경치를 보았다.

   《아, 嘉慶이로구나!》

   저도모르게 감탄사가 목구멍밖으로 튀여나갔다.

   그런데 깨고 보니 꿈이였다.

   《嘉慶이였지! 왜 이런 꿈은 왔을까?... 오호라! 라철도교사께서 못줏고계시는 두글자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서일의 머리속에 온통 이 생각만 갈마들어 다시 잠을 이를수 없었다.

   여러 도형들과 같이 아침식사를 할 때였다. 서일은 간밤에 꾼 꿈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꿈에 주은 그 두글자를 라철께 드리였다.

   《“玉殿金花嘉慶日”이라! 옳아, 과연 그렇군!》

    라철은 서일로부터 “嘉慶” 두글자를 받고 무등 기뻐했다.

    이날은 그가 하루종일 낯이 밝아지냈다. 

    總本司 天殿.

    그 안에는 天祖影幀(天眞)이 奉安되여있다. 천진(天眞)이 본래는 총본사가 서울에 있었을 때인 1910년 9월 24일(음력 8월21일)에 처음으로 그곳 천전에다 봉안하고 祭禮를 지낸것이다. 그것은 당시 궁중화가였던 김씨가 모사(暮寫)한 것으로서 史的으로는 신라때의 유명한 화가였던 솔거가 그린 것을 考證으로 삼고있는 것이다. 솔거는 그림에 각별한 소질과 취미가있었다. 그러나 농가에서 태여난 몸이라 가세가 빈한한탓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항상 한배검께 지성으로 신원(新願)한 결과 感天의 靈驗으로 神筆을 얻어 꿈에 나타난 몰골을 그린 것이 그대로 내려온다고 전한다.       

   서일은 天祖影幀정이 모셔진 天殿을 향해 숙연히 머리숙여 願禱를 하고나서 대교의 현황을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라철은 도교사로서 실로 많은 일을 해놓았다. 神恩의 大命을 받들어 1년간 성심원도한 끝에 대교를 중광한것이요 교를 관리하여 8여년간 그는 갖은 파란속에서 30여만의 교도를 얻은 것이다. 참으로 자랑할만한 성적이다. 그러나 교무행정면을 보면 교무의 크고 작은 것을 神政으로 처판(處辦)하였기에 아직 의회제도는 마련되지 않았거니와 홍범(弘範)과 규제가 현실에 맞지 않는것도 있는것이다. 이를 건의하여 장차 개정하도록해야지 하고 서일은 맘먹었다.   

   한편 그는 또 여러지역의 상황을 료해하고 돌아온 이홍래가 봉천역에서 법에 소송을 걸었다가 패소를 당한 천도교피난민을 만나본 일을 말한 후로 그것이 가끔 상기되면서 속이 개운치 않았다.

   《천도교인에 대해 그리도 심한 차별을 한다니 어찌되는 판이냐?... 이건 종교계에 엄한이 덥치고있다는걸 의미하는게 아닐가.》

   불길한 추측이 다시한번 신경을 긁어내린다.

   종교계의 형세는 과연 락관적이 못되였다. 

   天道敎는 조선에서 생긴 새교다. 갑오년(1894년)에 東學黨이 혁명의 선풍을 일으켰다가 외적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패하였고 主敎 孫秉熙는 망명생활 13년만인 1906년에 도오꾜오로부터 귀국하여 이전의 동학을 천도교라 개칭히였다. 천도교는 서울에 중앙총부를 두고 각지방에 敎區를 두었으며 自由平等을 敎理로 삼고 그를 주장하여 나섰다. 하기에 그것은 당연히 혁명적인 사상을 내포한 것으로 보이였다. 天道敎는 교육에 주력하였는바 각지에다 중학교와 강습소를 설립하고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교리를 선전했다. 그리하였기에 신도는 날로 증가하여 그의 총수는 어느덧 3백여만에 이르었으니 古今으로 종교계의 이채를 띄게됐다.

   天道敎가 이같이 교도가 급속스레 늘고 발전하게 되자 왜적은 조선사람이 단결되는것이 두려웠다. 더구나 天道敎는 東學黨이 만들어 낸 것이기에 그 기치아래 집결되는것을 일본은 원치않았던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왜적은 부디 해산만은 시키지 않았다. 그런다면 그 교도들이 예수교로 전교될것이 우려되였던것이다.

   왜적은 天道敎를 미워했거니와 지어는 그를 사이비 종교단체라면서 종교로 인정조차하지 않았다. 그자들은 항상 경관을 파견하여 天道敎 中央總部와 각지의 교구를 감시하였고 달마다 재산상황을 보고하게 하는 등 날로 구속과 제압을 혹심히 했다. 지어는 사소한 일에도 징역을 가하고 중요한 간부에 대해서는 그의 일거일동을 정찰하면서 자유를 속박하였던 것이다.

   그것뿐아니였다. 교인들은 심지어 일상적인 출입에도 속박을 받았으니 그 대우가 실로 노예나 가축과도 같았다. 교인에 대한 불공평은 더 말할것없었다. 례를 들어 교인과 비교인사이 소송이 생기게 되면 사안의 곡직이야 어떻든 불문하고 천도교인은 패소케하였고 일요일 집회강연 등에는 헌병순사를 파견하여 그 강연내용이 정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음에도 트집잡아 가두심문을 하는 등 자유를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三敎主의 受道紀念日인 天日, 地日, 人日의 기념식이면 경계와 감시를 특히 더 엄하게 하였다. 그리고 敎書出版과 月報發行을 정지시켰으며 강습소를 페쇠하였다. 지어는 宗理會가 조직되여 매주토요일에 교리를 연구하는것조차 명령을 내려 해산시켰던 것이다.

   天道敎를 대함이 이러하거니 배달민족의 얼을 부활시키고자 중광한 大倧敎에 대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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