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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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백포종사 서일 일대기 제3부 2.
2011년 10월 12일 16시 41분  조회:5565  추천:0  작성자: 김송죽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3부

 

2. 

   왕청 덕원리마을. 자그마한 벌판을 가로지나고 있는 류수하의 물은 예나 다름없이 맑게 흐르고 있다. 저 멀리 바라보이는 마반산 저쪽의 동포들은 어떻게들 살고있을가. “뻑발골”이라 불리워진 이 고장이 지금은 옛날처럼 가난하지 않았다. 신근과 꾸준함으로 주민거의가 가난과 궁핍에서 벗어나고 있다.

   기쁨과 즐거움이 어찌 만풍수를 안는 이 고장 농부들에게만 있으랴.

   개천 4371년(1914) 음력 10월3일ㅡ이해의 양력 11월 19일은 개천절이였다. 전 민족의 명절로도 되는 대종교의 특대명절인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풍수해에 금상첨화(錦上添花)라 할가, 하늘이 열린 영광의 날을 앞에 두고 대종교도 모두의 가슴속에서는 희열이 물결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 한해는 대종교사상(大倧敎史上) 대서특필을 해야 할 한해이기도했다. 5월 13일 총본사를 청호(靑湖)에 권설했거니와 백두산을 중심으로 4도교구(四道敎區)와 외도교계(外道敎界)를 정했고 고경각(古經閣)도 권설한것이다.

   대종교는 바야흐로 발전의 일로를 걷고 있는것이다. 

   10월초를 잡아들면서 3일과 5일에는 총본사에서 제천의(祭天儀), 제산의(祭山儀)와 고령사제향(古靈祠祭享)을 각각 하게되여있다.

   그 행사를 치르고자 계화와 더불어 마을의 시교회책임자 셋을 데리고 화룡의 청호로 향하고있는 서일의 가슴은 뿌듯했다.

   돌이켜 보면 1905년도가 막가던 12월 30일 羅喆조교가 백전(佰佺)으로부터 신고(神誥)와 신사기(神事記)를 밀수(密受)하고 봉교(奉敎)해서부터 어언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시교당과 대종교도수는 계속늘고있는 추세였다.

   《나라는 이미 망하였으나 민족에게만은 진정한 의식을 배양시켜 민족부흥의 원동력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대종교의 종지가 아닌가. 重光團을 창립하면서 입교를 한 서일은 오로지 4도교구에 있는 시교당 전체를 항일단체로 만들고 30만 교도 모두를 투사로 만들고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날 뿐이였다. 그는 책임자들이 발벗고 나서면 시교당이 모두 대종교도가 모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있다. 서일은 동포들을 모여놓고 수차나 부르짖었던 것이다.  

   《지금은 존귀비천을 가릴 때가 아닙니다. 배달민족 전체가 깨여나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할 길은 있는것입니다. 오늘에 이르러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한얼의 교화를 받고 조국의 처지를 자기 운명으로 생각해야하는것입니다. 선조가 물려준 삼천리 강토를 빼앗은 자가 누구였는가? 현해탄너머 저 섬나라 왜놈이 아닙니까. 그자들이 우리에 대해서는 여지껏 해만 끼쳐왔지 좋은일은   한번이라도  해본적이 있었던가? 일본열도의 그 족속에게는 유전된 하나의 치명적인 결함이 있으니 그것은 성정이 조급하고 협애하며 허심성이 결여하여 비렬한 짓을 거침없이 하는 그것입니다. 그 가운데 특히는 반민족주의자들, 대외팽창주의를 고창하면서 침략을 도락으로삼는 전쟁미치광들은 본심이 잔인무도한 악당인것입니다. 그자들이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쑵니다. 그래 그러한 원쑤를 친구나 벗으로 여겨서야 되겠습니까?.. 그런자에 빌붙는 친일분자와 한간역시 천추에 용납못할 역도인것만큼 우리는 타도를 해야합니다. 원쑤를 모르면 제 생명을 그한테 저당잡히는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뼈속에 증오가 배이는 그때에 가면 나역시 참인간이 되고 애국자로 될것입니다. 오늘도 래일도 먼 장래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간 일이라 하여 력사로만 취급하고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민족의 수치스러웠던 력사를 자자손손 가슴속에 새겨두고 기억하게 합시다. 오늘에 이르러 너마저 그것을 잊는다면 너는 너무도 무책임한 존재요 그래서 종묘사직마저 잊고마는 불초자임을 알아야할것입니다.   우리는 왜 고향을 버리고 만주땅에 왔습니까? 와야만 했던 리유가 무엇이였습니까?...여러분, 잊지 맙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구국항일이며 독립투쟁인것을!》

    이 시각에도 서일은 말했다.

   《저는말입니다. 우리 大倧敎는 民族宗敎이기에 육탄혈전으로만이 승리가 가능한 救國對日抗爭을 해내리라 굳게 믿고 자부합니다.》

   계화가 동을 단다.

  《나역시 그러하오. 우리는 결심대로 대교신봉자 모두를 결전판에 몸을 내놓게 이끌어야하오.》

  동행인중 다른 셋도 동감임을 표현했다.

  《그렇지요! 그렇구말구!》

   그들은 길을 걸으면서 지난일들을 즐겁게 상기했다. 밀산의 송지주가 소작료를 감히 배로 받아내지 못하는데 대하여, 이동춘선생이 동포를 위해 큰공을 거듭세운데 대하여 고마움에 찬탄하였다. 이동춘선생이 한 일은 그것만이 아니였다. 그는 제1회 대한국민총회를 개최한 결과 동지와 일반교민의 생계유지책을 결의하기로 되어 연길도윤공서외교부에 종사하게 된 사람으로서 자기의 직책을 다하고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법령을 내려 한교(韓僑)가 소유하고있는 토지를 전부 몰수하려들자 북경에 있는 총통 원세개를 다시찾아가 억울함을 신소하여 그 법령을 물시(勿施)케 했거니와 한교(韓僑)를 간민(墾民)이라 칭하고 토지를 소유하게끔 만들어놓은 것이다. 

  《듣자니 이선생은 용정에 그냥 계시면서 아예 제 가옥까지 간민회관으로 사용하게 내놓으셨다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아니구. 그분이야말로 사심없는 지성인이지!》 

  《그분은 교육을 권장하여 지금도 계속 북만 각처에다 학교를 세우고있다니 과시 선구자답습니다!》

  《그렇구말구. 그같이 헌신하는 선각자가 있길래 우리는 용기가 더 생기게 되고 희망이 보이는겁니다.》

  일행 다섯은 한편 원세개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가 옛교분을 잊지 않고 망국민으로 돼버린 조선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주니 참으로 고맙다. 하지만 전해에 민주주의혁명가인 송교인(宋敎仁)을 암살한건 대단히 잘못된 비렬한 행위였다고 비난하기도했다. 송교인은 두해전에 남경림시정부 법제원 총재로 되었고 그해의 5월에 북경에 가서 농림총장으로 되었으며 8월에는 동맹회를 국민당으로 재조직하고 리사장대리로 된 사람이다. 그는 국회선거에서 국민당이 다수석위를 차지하게 되자 정당내각을 조직하여 원세개를 제약하려했던것이다. 이에 원세개는 앙심을 품고 작년 3월에 자객을 상해에 보내여 그를 암살하게 한것이다. 그것은 정권욕이 팽창할대로 팽창한 자가 제 야심을 적라라하게 드러내보인 전형이였다. 

   《원세개는 <선후대차관>을 얻고나서 내전을 일으킨게 아닙니까. 내전 때문에 중국은 형세가 어떻게 변해갈지?... 북경뒤에 위치해 있는 여기 동북은 장차 어떤모양이 될지?...》

   서일은 장래를 걱정했다. 안그럴리있는가. 여기 이 동북땅ㅡ만주는 일본이 언녕부터 호시탐탐 노려온 대륙인데. 

   일행 다섯이 화룡의 청호에 도착한 것은 이틑날 오전. 라철조교는 서일이 오기를 기다리고있던차라 일행을 반가히 맞아주었다. 그도역시 내내 포교를 열심스레 해온 것이다. 그간 그혼자 있은것이 아니였다. 남도본사의 책임을 맡고 경성(京城)에 가있던 53세의 강우도형(姜虞道兄) 5월에 상교(尙敎)로 승질(陞秩)한 후 총본사전리(總本司典理)에 피임된 관계로 청호에 와  있었고  전해에 지교(知敎)로 승질한, 올해 51세의 백순도형(白純道兄)역시 와있었다. 그들은 청호로 오는 敎友들을 누구라 없이 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 하여 대종교의 이 신성한 성지는 시종 화기 애애한 분위기에 푹 잠기였다.

   

   兄弟들아 姉妹들아 倍達겨례 모든 人衆 우리 兄弟姉妹들아 함께至誠으로 一心하여 빛내보세 빛내보세 大皇祖의 베푼 神敎 빛내보세     

   나철교조가 만든 단군가 중에 끝절의 내용을 대문자로 쓴 프랑카트가 총본사 처마밑에 가로 쭉 걸려 있었다.

   단군가는 구절마다 단군대황조의 은덕을 찬양하고 있는바 특히 이 종절에서는 배달민족이 일치단결하여 민족종교인 단군교를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서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거족적인 항일투쟁을 하자는 뜻이 력력히 내비치고 있었다.          

   지난해의 10월에 령계(靈戒)와 참교(參敎)로 被選되여 시교사(施敎師)를 잉임(仍任)한 서일이 올 5월에 東道敎區의 책임자로 되어서는 더 적극적으로 포교를 하고있는 것 처럼 이때는 총본사는 물론 백두산을 중심으로 설치한 4敎區의 책임자 모두가 줄기차게 활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祭天日ㅡ開天日, 御天日, 重光日) 총본사에서의 祭天儀가 오전 8시에 교도들이 운집한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거행되였다. 머리에 대례관을 쓰고 대례복을 입은  봉식의원(奉式儀員)이  천단(天壇)아래에 경숙히 서서 미리 암기해둔바나 답지 않는 홀기(笏記)를 높은 목청으로 읽었다.

  《홀기를 읽으니 다들 들으시오.

    이제 우리 인생들이 이 죄악을 쌓아 이 비참을 당하고도 이 잔명을 보전함은 참 거룩하신 황천은택(皇天恩澤) 상제은택(上帝恩澤)이시오 또 하물며 한울에 절하고 신을 섬김은 우리 대종문(大倧門)의 근본이 아닌가. 오늘에는 우리들이 일제히 근본에 돌아와 죄인짐을 벗고 은혜를 갚기 맹세하여 다 한마음 한정성으로 제천합시다.》

    제천의식을 끝마치자 라철조교가 각 교구의 산하 시교당운영상황과 포교상황을 일일이 보고받았다.  

   동만일대와 연해주지방까지 포함한 東道敎區의 서일은 근일 왕청일대를 東一道本司로 녕안일대를 東二道本司로 정하고 자신이 직접 이 두곳의 도교사를 겸해 담임하였다는것, 고려령일대(지금의 신흥, 석현)와 삼차구일대(지금의 천교령)는 사교(司敎) 김준섭과 참교(參敎) 채규오에게 각각 맏기여 시교를 해나고있다는 것을 아뢰였다.

   라철은 보고를 받고 그의 포교사업에 대해 만족스러워했다. 

   이틀후인 5일(양력 11월 19일)에 고령사제향(古靈祠祭享)을 받들고 준봉(遵奉)케 했다.

   점심식사가 방금 끝나서였다. 백순지교(知敎)가 얼굴을 라철쪽에다 돌리고  문득 물는것이였다.

   《재작년 도형께서 꿈을 꾸시고 착수한 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시상이 고갈됐나보지. 부끄러운 소립니다만 아직까지도 글귀를 줏지 못해 내버려둔채 그대로있네.》

   서일은 어인영문인지 몰라 두분의 얘기를 묵묵히 듣기만했다.

   두해전인 1912년의 음력 8월 15일(추석날) 호석 강우(湖石 姜虞), 은계 백순(隱溪 白純)과 함께 삼도구 안산(案山)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면서  산자운(山字韻)으로 漢詩를 지었던 라철조교는 두달후인 10월 8일밤 꿈에 안산에 다시올라보니 경치가 전날의 가배절(嘉俳節)과 꼭같은지라 전에 사용했던 운자를 따서 절구3수를 지은 것이다. 그는 꿈을 깨자 꿈속에서 지은 그 漢詩를 종이에 적었다. 그런데 마지막행 日字위의 두글자는 지금까지도 도무지 머리에 떠오르지를 않는 것이다.

   서일이 요청하여 라철은 즉시 그  몽작시(夢作時)를 읊었다.

 

                  秋風吹我上檀山  檀山逈出雲霧間

                  何處天然神靈跡  笻屐翩翩却忘還

                 檀山高處拜崇山  崇山獨立天地間

                  長白四千三百年  神租洋洋如復還

                 南宗北族祖玆山  萬姓洞開兩白間

                  玉殿金花○○日  一符三印再回還            

 

   《시구가 과연 절묘합니다!》

   《반성반숙일세, 두글자를 아칙도 채 줏지 못했으니 .》

   라철조교는 머리를 절레절레 젓는것이였다.

   서일역시 漢詩에 흥취가 있는지라 야릇한 시흥에 빠져들면서 그가 스스로 반생반숙(半生半熟)으로 인정하는 그것을 속으로 음미해보았다. 그가 아직도 줏지 못하고 있는 두글자가 대체 무엇일가?.....

   總本司에서 祭天儀를 치르고나서 며칠안되여 서일은 의암 유인석(毅庵 柳麟錫)로인을 방문하러 먼길을 떠나게 되었다. 동행인은 지금 重光團사업을 열성스레하고있는 채오(蔡五)와 량현(梁玄) 외 다른 한사람 김성(金星)이였다. 을미년(乙未年)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 랑인의 손에 시해됨으로 하여 의거할 마음을 굳혀 의병진의 총수(總帥)가 되어서 항쟁을 시작하였던 유인석, 국내에서 어려움을 느껴 의병진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가 청나라장군 왕모염(王模閻)의 손에 전원 무장해제를 당하여 통탄해하였던 유인석,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국하였으나 항쟁은 하지 못하고있다가 1908년 마지막으로 고국을 등에 지고 로씨야로 건너갔던 유인석은 거기서 여러 지사들의 간청으로 13도 의군도총재(義軍道總裁)로 추대되여 일거에 조국탈환을 도모했으나 일제의 짖꿎은 음모로 하여 실현못하고 있다가 하는 수 없이 로씨야를 떠나온것이다.

    3월에 월경한 그는 처음 남만(南滿) 서풍현(西豊縣)에 도착했고 5월에는 흥경현(興京縣) 난천자(暖泉子)에, 8월에는 마침내 관전현(寬甸縣) 방취구(芳翠溝)에 정착한 것이다.

   《로인 모색이 어떤분인지 한번 꼭 보고싶습니다.》

   김성은 이러면서 따라나선 것이다. 모자도 안쓰고 빡빡 깎아버린 중머리바람으로 로씨야땅을 밟았다가 하마터면 목숨잃을번했던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는 그였다. 김성은 철딱서니없이 나덤빈 자신을 탓하기는하지만 무지할 지경 과격했던 그때의 의병에 대해서는 전혀 호감을 가지지 않는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유인석은 전기의병의 상징적 존재로 그 위상이 떠올랐거니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논리를 펴서 항일독립운동의 선구적 구실을 해왔다는데서 맘속으로 높이 경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은 또한 그곳으로 가는 길도 알고있었다. 그는 동만의 왕청에 오기전에 남만일대를 싸지르고 다니면서 면목을 두루익히고 사귀여 둔 친구도 몇이 되는데 그들을 한번 만나보기싶기도하다고 했다.

   방취구(芳翠溝).

   73세의 고령인 유인석은 정주칸과 웃방이 따로인는 제 민족식의 초가집에 들어있었는데 신병으로 앓고 있었다.

   《오, 자네로군! 만주에 건너왔다는 소리를 내가 뉘게선가 듣었네.》

   서일이 무릅꿇고 절을 올리니 로인은 알아보고 반기는 기색이였다.

   유인석은 로씨야에서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그대로 유림의 의관을 갖추고 있었다. 과연 그가 말했듯이 “만일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끝까지 이역에서 우리의 옷을 입고 우리의  구제(舊制)를 지키다 죽어서 귀국 할 모양이다.   

         

             保華於國,  守華於身, 以身殉於華.

 

   서일은 비록 그의 문인(門人)은 아니였지만 국가가 멸망하게 되니 그가 자기의 문인들에게 제시했었던 이 세가지의 처신방법을 속으로 다시금 뇌여보았다. 국가가 일제에 강점됨으로 모든 지사들은 만주로 망명하여 수절해야한다고 주장하였던 그 자신역시 이제는 만주로 왔다. 보아하니 자칫 여기서 생을 마칠것만같았다. 

   그가 서일을 향해 물어보는 말이였다.

  《중국은 전만 크게 변해버렸네. 안그런가. 황제는 없고 대통령이 있는 나라로 바뀌여버렸네. 젊은의 생각에는 공화제가 어떤가?》

  《저는 아직 그에 대해서 깊은 연구가 없었습니다. 공화제라면 선거에 의해 산생되는것일텐데 아마 그 나름의 도리가 있겠지요.》

   서일은 말해놓고 보니 대답이 완정치못하고 애매하게 되버린지라 스스로 낯을 붉히였다.

   유인석은 그를 한번다시 눈여겨보고나서 입을 열어 주장을 피력했다.

  《내 생각에는 그래도 군주제를 그냥 하기만같잖네.... 군주제가 페단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외세가 내정을 간섭는건 허용치를 않는거네. 공화라 해서 선거제를 하면 외세의 내정간섭을 초래할것이고 그러게 되면 국가는 지키기 어렵게 되어 궁지에 몰리게되는걸세.》

  그는 숨을 돌리느라 잠시 쉬였다기 입을 다시열었다.

  《젊은이도 보고있다싶이 서구열강은 침략만을 일삼는거네. 이러한 상황에서 주권이 상실되는 비운을 모면하자면 다른 방법이 없는거네. 첫째는 정치가 안정해야 하고 다음은 군사적자립이 필요한것일세. 서양은 병기가 발달했으니 우리도 이제는 그네들의 병기들을 도입하기에 노력해야 하고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실시함이 마땅한줄로 아네.》

   조선이 언녕부터 그리했으면 되었을건데 하면서 그는 공화제를 비난했고 따라서 전제군주제로서의 복국(復國)을 주장하고 있었다.

   서일은 령감이 복벽적 민족주의사상이 전보다 더 철저하거니와 짖꿋도록 완강함에 놀랬다. 유린석도 민족대교가 이미 중광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에 대해 다른 견해나 태도표시는 없다가 대종교의 명의하에 비밀적인 민중항일단체인 重光團이 이미 조직되였거니와 그 인원수가 점점 많아져 오라잖아 천에 이를것이요 그 지부가 각지방에 분포되여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거기에 무장까지 되는 날이면 아마 불비함이 없겠네!》

   《장차는 꼭 그리될겝니다. 저는 결심하고있습니다.》

   《듣자니 거기 동만 어디에 무관학교가 섰다는게 정말인가?》

    왕청에서 멀지 않은 라자구 태평구에 리동휘(李東輝)의 무관학교가 생겨났는데 유인석은 그에 대해서 묻고있는 것 같았다. 서일은 알려줬다.

   《그렇습니다. 라자구 태평구에 무관학교가 생겨났습니다. 학생수가 현재 삼백명정도되지요. 본래는 삼도하자에 태흥서숙이 있었는데 올봄에 교학내용이 불순하다고 페교령이 내렸던것을... 연길도대부에 상소를 제기한 결과 학교운영이 다시금 허락이 된것입니다. 이동휘가 김립과 함께 태흥서숙의 학생들을 위주로 태평구에다 다시금 그같이 아예 무관학교를 세운걸로 알고있습니다.》

   유인석은 그런가고 머리를 끄덕이였다.

   이동휘는 20세때 조선에서 무관학교를 졸업하여 국군에서 참령(參領)벼슬을 하였고 일제에 의하여 조선군대가 강제해산을 당할 때에는 강화도 진위대의 대대장이 되어 싸우기도 하였다. 그는 고루한 낡은 사상과 관념이 서방의 진보적인 신문화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은 국민의식이 락후해졌고 종당에는 욕심사나운 열강들의 침탈대상이 되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는 한때 망해가는 나라를 다시일으켜세워보려고 교육구국론자의 행렬에 들어서서 헌신하기도했다. 안창호, 이동녕 등 인사들과 손잡고 “신민회”, “서북학회”를 꾸리여 활발히 활동하기도했던 그는 지어 일경에 체포되여 룡산헌병대 류치장에 갇힌일까지 있다.

   이동휘는 1912년에 석방되자 만주로 건너와 훈춘, 연길, 왕청 등지를 돌면서 동지들을 만나면서 다시금 반일민족계몽에 전력하기 시작했다. 현시점에서 장래의 항일무장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군사지식부터 전수해야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그는 무관학교를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삼도하자의 태흥서숙은 본래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들인 이권용, 김관은, 렴재군이 세운 것이였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반일민족주의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런다하여 불순하다는 딱지가 붙어 학교는 페교령을 받은것이고 이 내막을 알아낸 이동휘는 그들과 손을 잡고 상소를 올려 학교를 다시금 운영하게 된 것이다.

   이 무관학교는 한말의 군무대신을 지낸바있는 이용익과 전 로씨야주재공사 이권익 등이 사심없이 의연한 수만원의 금액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학교운영이 순풍에 돗단 듯이 쉬운것은 아니였다. 학생들이 산에 가 목재를 하여다 교사를 새로 지었고 숙사가 없어서 외양간을 수리하여 들어야했다. 그런속에서 사생모두 열의만은 끓었던것이다.

   무관학교에서는 군사훈련과 반일민족독립사상교양을 기본으로 하는 군사정치학교였다. 한데 군사골간을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였지만 무기가 없었다. 한즉 군사훈련이란 목총을 만들어 그것을 갖고 도수조련을 하는데 불과했다. 중광단과 꼭 같은 실정이였다.

   학교의 지도자로는 교장 이동휘이와 김립, 오광선, 김관응, 장기영, 김영학 등이였다.        

   서일과 김성 등 일행은 왕청으로 돌아오면서 태평구 무관학교의 장래발전이 어떠할까고 각자 점도 쳐보면서 제나름대로 운운했다.

   《중광단이야 민중계몽단체라 소문을 내었지만 이건 그러지를 않고 외부에 무관학교라 버젓이 소문을 내고있으니 장차 무사할 수 있을까?...》

   서일의 머리속에 이런 의문이  다시금 갈마들었다.

   《로인이 구사상에 물젖어 복고를 고집하니 참으로 우직할 지경 완고합니다. 이제는 시대를 따를줄을 알아야지.》

   김성이 유인석을 만나본 감상을 이렇게 토로했다.

   채오나 량현도 마찬가지였다.

   서일은 유인석에 대한 평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그저 묵묵히 들어주기만했다. 그 본인이 아직은 공화제와 군주제의 우열등을 내심판정못하고있는 상태였으니 주의주견이 설수 없었다.

   불행은   언제나 말없이 갑자기닥치는 것이다.

   11월달에 대종교는 한차례 타격을 받게되였다. 일본총령사의 교섭으로말미암아 간도일대의 신설교당 10처가 일시에 봉페하게 된 것이다. 예견못한 것은 아니였지만 일제의 수단은 과연 악랄했다. 대교의 발전이 승승장구하는것을 보고 그자들이 그래 가만있을리있을가?

   중국에는 <악한 자에게 는 악취가 만년난다>는 속담이 있는데 어쩌면 일제를 놓고 비유하는 말같기도하다.  

   어찌 운명을 믿으랴, 구원은 자신의 투쟁에 있을 뿐. 일제가 탄압한다고 숙어들 일이 아니였다.

   용정(龍井)에 살고있는 박찬익이 라철조교의 명을 받고 나섰다. 그는 먼저 동변도대(東邊道臺) 도빈(陶彬)을 찾아가 신소를 올리였고 이어서 길림성장 진소상(陳昭常)과 동삼성주병사 장병린(張秉隣)과 교섭하였다. 그리한 결과 봉페되였던 교당문은 다시열게되였다.  

   1915년 새해(乙酉)를 잡자 년초에 뜻밖에 부고가 날아왔다. 유인석이 타계를 한 것이다. 중광단은 추모식을 갖고 비통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의암 유인석선생.

   1894년 갑오경장이후 친일파 김홍집내각에 반항하여 거병. 거병후 제천, 단양, 원주, 안동 등지에서 항일활동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했고 1909년에는  러씨아에 건너가 블라디보스톡에서 13도 의군도총재에 추대. 1914년 3월 도만(度滿), 관전 방취구에 정착. 1915년 정월 29일 74세의 일기로 서거.

    중광단이 등사프린트를 한 전단(傳單)이 동포들이 주거하고있는 만주각지에 널리 배포되였다. 좀 늦기는 하지만 전기의병항쟁의 상징적인 수령이였던 그를 동포 모두가 알고 깊이 추모하게끔하기 위함이였다. 이 일은 서일이 생각하고 지시하여 행하여진 사업이였다.

   전단에는 또한 의암 유인석이 생전에 지은 “우국(憂國)”이란 漢詩도 한수 실었다.

 

               우국복우국(憂國復憂國)

               천애노백두(天涯老白頭)

               추풍당차력(秋風戃借力)

               취살제산우(吹橵際山憂)

 

               나라일 걱정하고 근심에 쌓여

               어느덧 늙어서 흰머리 되었네

               봄바람의 거센 힘

               산같은 근심을 불어 흩어버릴까.           

             

   2월 27일(음력정월 14일)에 라철조교 국내의 교회와 포교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남도본사를 향해 만주를 떠나갔다. 서일과 청호에 있는 총본사의 교우 몇이 그를 안동역(安東驛)까지 전송하였다.

   《어려움에 봉착할 시 기지있게 침착히 풀어나가기를 바라오.》

    갈라지면서 그가 부탁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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