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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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백포종사 서일 일대기 제3부 4.
2011년 10월 12일 17시 01분  조회:4623  추천:1  작성자: 김송죽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3부

 

  4.

   단기 4373년. 서기로는 1916년.

   이해는 조교 라철이 54세요 서일은 36살을 먹는 해였다.

   한국의 國祖로 받드는 태초의 임금인 檀君. 일종의 開國神으로서 기원전 24세기경 단군조선을 건국하였다는 그가 실재한 인물인지 아니면 그 시기의 특정된 하나의 통치집단을 의미하는것인지 딱히는 알수 없으나 어쨌든 그것이 한국민족의 조상으로 신봉되고있는것만은 사실이다.     

   檀君을 태초임금으로 믿고 숭경하게 만들어진것이 곧 대종교가 아닌가.

   경전의 하나인 <<神理大全>>에다는 단군을 신격화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혀놓았다.

 

             神者는 桓因과 桓雄과 桓儉也

             (신자) (한인) (한웅) (한검야)

 

    풀이를 이렇게 했다.

 

   환(桓)의 본음은 <한>이오 인(因)의 본음은 <임>이다.

   <옛말>에  한울(天)을 가론 <한>(桓)이니

   곧 <큰하나>(大一)의 뜻(義)이라. 합하여 말하면

   한인(桓因)은 <한울아버님>이오,

   한웅(桓雄)은 <한울스승님>이오,

   한검(桓儉)은 <한울임금>이니라.

 

   서일은 생각에 잠겼다.

   《우리의 신교는 조선사람 고유의 민족교다. 라철조교가 왜서 7백여년간이나 닫혔던 교문을 다시열고 지어 교명을 바꾸면서 까지 이 교를  살려냈는가? 목적은 민족혼을 환기하고 민족적 혈통을 고수하기 위함이 아닌가. 이 교를 믿으면 일정(日政)에 반발할것이며 대일적개심(對日敵愾心)을 환발할 것이다. 교도는 다가 뭉치여 국권회복에 선봉이 되어 싸울것이다.

   일제는 아무때든 이를 눈치챌것이다. 한 민족을 동화시키려면 그 민족의 정신을 압살해야 하고 그러자면 오직 그 나라의 력사를 없애고 그 민족의 민족성을 끊으며 나아가서는 언어, 례절, 문물, 풍속... 각 방면에 걸쳐 그 독립성과 고유성을 뿌리뽑아야 된다는 것을 그자들은 깨달을 것이다. 한데 독립성과 고유성이 집중된 것이 바로 민족의 종교가 아닌가. 그러하니 우리의 이 대교가 장차 어떤 운명에 놓일가?...》

   계속 더 생각하자니 불길한 예감만 뇌리에 고패칠 뿐이다.

   찬바람이 불어온다. 추위가 터지려는 모양이다. 드팀없이 찾아드는 계절이야 무슨 방법으로 막는단말인가.

   11월중순의 어느날, 라철 조교는 돌연히 불행한 통보를 받게되였다. 조선에 있는 남도본사로부터 <<宗敎統制案>>이라는 것을 전해온 것이다. 이른바 朝鮮總督府令 第83號로 내린것인데 찍혀진 날자를 보니 1915년 11월 9일(음력 10월 1일)이다.

   그것을 갖고 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남도본사에서는 총독부의 이 종교통제령을 받자 당황한 나머지 어쩔바를 몰라 갈팡질팡하다가 처리방안을 품의(稟議)하기 위하여 급급히 사람을 띠워 만주 청호의 총본사에 와있는 라철에게 알리는 판이라 한다.

   《그렇겠지! 엄한이 끝내 덥치는구나!》

    서일은 예감이 있던차라 이 일을 알자 탄식했다.

    총본사에 있는 교도는 모두가 얼굴에 어두운 구름장이 덮이였다. 

   《예측했던 시기가 도래하였으니 지성해결함이 가하다.》

    라철은 가라앉듯 침중한 어조로 한마디 부탁하고는 總本司 總典理 강우와 함께 남도본사에서 온 사람을 돌려세워 급히 환국하였다.  

    일제의 수법은 지독했다. 大倧敎가 국내에서부터 그 근거를 만주로 옮긴 후 만주를 비롯한 중국본토와 로씨야에 이르기까지 널다란 령역에서 포교를 하여 짧은 시일내에 교도 수십만을 획득하였을뿐만아니라 독립운동을 하고있으니 이에 대경실색하여 이 교를 대처할 정책에 고심하던 끝에 마침내는 페교처분할 것을 결정하고 그것을 합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위 <<宗敎統制案>>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라철은 서울에 있는 남도본사에 이르자 그곳 여러 교우들로부터 그지간 정황을 상세히 보고받았다. 그들역시 포교를 열심히 하였기에 남도본사는 교도수가 썩 늘어났고 각종 활동도 빈번했다고 한다.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이 뒤를 이어서 타교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현재 조선에는 수자적으로 기독교인이 많습니다. 일제는 그들에 대하여 배일파라 억설하고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목사의 전도기관을 신설했습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그건바로 한국인 교도들을 저들에게 동화시켜보자는 수작이지요.》

   지교(知敎) 엄주천이 좀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한국인 교도로 하여금 서양선교사와 리탈하게 한 다음 저들 일본측으로 돌아서게 리간책을 쓰고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되고있겠습니까. 가면적인 허위책이 성공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여 음모가 드러나 신도들을 반감만 사게 만들었지요.》

   사실 그러했다. 목적한 것이 빗나가게 되자 일제는 박멸을 기도하여 소위 데라우찌총독 암살의옥(暗殺疑獄)을 일으켜 수백명의 중진급 교도들을 불법체포하여다가 고문할뿐만 아니라 악형을 가했고 지어는 사형 또는 불구페인이 되게 백계를 다하여 탄압에 광분하고있는 것이다.

   라철의 사촌아우이자 참교(參敎)인 나주영(羅宙永)이 고발쪼로 말했다.

   《교회당이며 설교소며 강의관같은 것을 허가없이는 일체 설립하지 못한다구했답합니다. 신교는 믿어도 된다해놓고서 아무럼 이정도로 까지 억압하는게 어디있습니까. 어떤데서는 일년이 지났는데도 건설허가를 받지 못하고있답니다. 이 구실 저 구실을 붙여가면서 고의로 시일을 지연하는게 빤하지요.》

   《못난것들!》

    라철은 일제의 무도(無道)한 만행에 격분했다.

   《어디 그러고만있는다구요. 그자들은 전도회, 복흥회, 기도회의 례배시면 밀정을 밀파하여 감시를 하군한답니다. 혹 설교때 <신앙의 자유>라는 언사가 나오기만 하면 련행하여 고문을 함은 물론 명망있는 교역자에게는 항시 형사나 밀정이 뒷따르면서 감시를 한답니다.》  

   이번에는 안영중(安英中)이 알려주는 말이였다. 그역시 참교(參敎)였다. 

   라철은 불교의 사정은 어떠한가고 물었다.

   《불교라해서 편안할 리가 있겠습니까. 사찰의 토지가 그자들 손에 넘어가나답지 않거니와 사사건건에 일본고문이 나서고있답니다.》

   참교(參敎) 김서종(金書鐘)이 이같이 운을 떼고나서 그 상황을 좀 더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불교는 조선에 들어온 이래 1500여년간에 교세의 흥체(興替)도 빈번하였지만 高僧道師가 속출하고 법통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사찰소유의 림야(林野)와 토지가 거대한 부력을 형성하였었다.

   일제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우선 사찰령을 제정공포하여 그 재산을 반관적(半官的)인 소유로 만들어 어용화하고 승려교육기관에 일본인 고문을 파견하여 재산을 관리하고 감독하게했거니와 지어 주지(主持)를 선출하는데도 무단적인 간섭을 했던 것이다. 중론(衆論)에 의하여 선출한 주지(主持)라하더라도 일제당국의 허가를 얻어 담임케하고 일반 主持就任認可申請이 제출되면 사찰담당관서에 그의 신변조사를 하게했는바 항일기미가 조금치라도 있기만 하면 취임을 불허했거니와 설사 취임이 허가된 자라할지라도 그 인가를 취소하고 오직 부일맹종도배(附日盲從徒輩)만을 그 직을 맏도록했던 것이다.

  《왜정은 우리의 대교에 대해서만은 지어 페교처분까지 내리는 상태인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상교 강우가 우울한 심정에서 내놓는 말이였다. 

  《왜정이 페교처분을 내렸다하여 곰상히 받고있을 일이 아니지 않는가. 능력이 미치는한 구원책을 써봐야 할것이오. 안그렇소?》

   라철은 이렇게 태도표시를 해놓고나서 여러모로 생각을 굴린 끝에 마침내 12월 21일자로 총독부에다 신교포교규칙(神敎布敎規則)에 준한 신청서를 제출했다. 물론 그것은 대종교가 神敎인데 왜서 무단적으로 금지시키느냐 하는 항거의 표현이기도했다.

   신청서를 받은 총독부측은 종전의 태도에 변함이 없었다. 일반적인 종교단체로 보아온 자그마한 신앙단체는 모두 서류를 접수하였으나 오직 大倧敎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종교는 神敎가 아니라는 리유를 만들어 고의적으로 신청서류를 각하(却下)하는것이였다.

   《“대종교는 종교유사단체”라구요? 그래서 종교로 인정하지 않는다구요? 원, 어쩜 그리두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답니까?》

   김두봉은 신청이 각하된 리유를 듣고 몹시 억울해하였다.

   다른이들도 다가 그러했다.

   총독부는 집회나 시교당설치를 허락치 않는건 물론이요 “대종교인은 자유가 없다”고 까지 했다.

   《세상에 이런 억압이 어디있는가?》

   라철의 조카 라정수(羅正綬)를 비롯한 나어린 신도들은 억울함이 극에 이르는지라 주먹을 어스러지게 부르쥐면서 총독을 찾아가 질문을 해보자고까지 했다. 되지도 않을 일이였다. 찾아간들 총독부에 한발짝 들여나놓을가. 일제는 대종교도들은 교내에서나 교밖에서까지 활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지어는 조교의 수도(修道)행사까지 저애하는 한편 구속하겠다고 위협을 해오기까지했던 것이다.    

   《꼬리가 생겨 거치장스럽구나.》

   라철은 헌병과 경찰이 자기를 미행감시하고있음을 발견고는 대단히 언잖아했다. 일제가 그럴수록 반발심만 일었다. 라철은 배짱이 있는 사람이라 네놈들이 아무리 어째도 나는 내할일을 하리라했다.

   그것은 또한 대종교를 이끌고있는 지도층 모두의 배짱이기도했다. 몽골침략자에 의하여 神敎가 수백년간이나 빛을 잃은것만도 통분한 일인데 야만스러운 네놈들이 이제 우리 이 배달미족의 종교를 압살하려든단말이냐, 네놈들이 대체 뭔데 하면서 그 어떠한 방법으로든 교를 살려내야 한다고 맹세한 것이다. 그들은 비밀적으로라도 포교를 계속할것이요 종교활동을 이어나아갈것이라했다.       

   서울에서 활기가 흐르고있는 곳은 이방인의 땅으로 알려진 이태원(利泰院)였다. 자국민이 아닌 그네들이 되려 활개를 치면서 그렇게 자유롭게 살아갔던겄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세밑이 다가오니 서울시내 다른구석들도 전만은 좀 명랑한 기분이 감드는 것 같았다. 고달픈 역경속에서도 한해에 한번맞이하는 설명절만은 즐겁게 쇠보내보곱푼 가냘픈 소망이 백성들의 맘속에 있었기 때문이였으리라.

   라철은 호석 강우(湖石 姜 虞), 손암 오 혁(巽庵 吳赫) 등과 토론하여 정월초하루날 남도본사에서 三神殿에서 天祭儀를 특행하기로했다. 오혁인즉 초휘(初諱)는 기호(基鎬)이니 라철과 함께 비밀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에 진력하다가 병오년에 乙巳五賊을 동시에 주살(誅殺)하려했고 그것이  실패하니 라철과 함께 형을 선고받아 진도로 정배(定配)하였다가 5개월만에 황제의 특사로 석방되여 돌아온 그 사람이다. 대종교 중광이래 독신(篤信)하여 시교(施敎)에 전무(專務)해온 그는 1914년에 尙敎로 승질(陞秩)된것이다.

   준비가 다 되자 라 철, 강 우, 오 혁을 비롯한 일행 여럿이 강화도를 향해 출발했다.  

   강화도! 경기도 서해안 강화만에 있어 강화군을 이루는 섬. 고려가 전재(戰災)에 빠져있었던 13세기, 한때 몽골의 침략에 못견디여 수도가 이리로 옮겨옴으로 하여 번화해지기는했지만도 늘 공포속에서 전전긍긍하였던 곳. 자랑보다는 비운의 력사를 더 지니고있는 이 강화도는 동서너비가 16㎞, 남북의 길이가 28㎞이며 그 둘레가 99㎞나 되는 큰 섬이다.

   강화도에는 마니산(468m)을 제일 높은 봉우리로 하여 혈구산, 별립산, 진강산 등 험한 산들이 솟아있음으로 이곳은 천연의 요새지였다. 강화도는 또한 김포반도와 200m~1㎞를 사이에 두고있으나 바다로 막히여 배를 타지 않고는 건널수 없는 곳이였다.

   섬의 중심지는 강화읍이다. 이 강화도는 유적도(遺蹟島)로서 마니산(摩尼山) 산정에는 단군성지가 있는 것이다. 참성대(塹星臺ㅡ祭天壇), 전등사(傳燈寺), 연미정(燕尾亭), 충열사(忠烈祠), 표충단(表忠壇), 고려산(高麗山)...

  《오, 강화도야. 네 몰골이 왜 이다지도 초라해진거냐? 력사가 창상(創傷)을 남겨서였더냐?... 몰락한 최가여! 무너진 무신이여!》

  라철은 강화땅을 밟고보니 가슴이 답답해나면서 각가지 착잡한 생각이 타래쳤다. 몽골침략자에 의한 수도이전(首都移轉), 60여년간이나 고려의 정권을 쥐고 흔든 최가정권의 몰락과 100여년간 존속했던 무신정권의 붕괴를 생각하면서 멀리 흘러가버린 력사를 새삼스레 머리에 떠올렸다.

  《애환이 얼룩진 력사를 남기고 사라진 고려! 어쩌면... 아, 그렇지! 그럼에도 공전절후의 대무장가가 났었지. 그것이 다시는 없을 옛말로만 영원히 되고말건가.? 오늘 무장(武將)이 새삼스레 그리워짐은 왜서일까?》

  강우가 말을 하자 오혁이 그에게 물음으로 동을 단다.

  《고려라? 자네는 고려때 무장 최충헌을 놓고 하는 소리아닌가?... 하긴  옛이야기로만 되고있으니 그리워질수도 있는거야. 공과 죄로 얼룩져 시시비비도 많은 무장이지만 현세에는 그런 무장마저도 전혀 나타나지을 않았으니.》

   최충헌(崔忠獻)은 관연 력사상 공전절후의 대무장가였다. 고려 19대왕 명종(明宗)때로부터 고종(高宗) 6년까지 5왕을 지나면서 무려 24년간 정권을 독장(獨掌)한, 그가 장군 이의민(李義旼)을 죽이고 그의 권세를 대신 틀어쥐고는 영종, 희종(熙宗) 그 두 왕을 페하고 대살육과 대발호(大跋扈)를 행하였던 세월은 국사가 전혀 살풍경으로 화한 동시에 조정은 최씨의 왕국으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그에 대해서 후세사람 安自山은 다음과 같이 기록해놓았다.

  

   <<관(官)은 상장군으로서 후작까지 이르렀으니, 제택(第宅)은 수리(數里)에 연하여 궁사극치(窮奢極侈)하여 장구화과(帳具花果)와 사죽음악(絲竹音樂)이 날을 떠나지 아니하니, 삼한이래에 신가(臣家)로서는 미소유(未所有)한것으로서 그 장엄 화려한 것이 왕궁이상에 달했던 것이다.

   사병(私兵)이 수만이요, 문객은 일등무사 3천인이 상유(常有)하였다. 그의 죽음도 와석종신(臥席終身)하되 운명하는 날도 악공(樂工)수십인을 불러 좌우에서 주악할새 그 음악이 끊이기 전에 작고하였다.

   그의 호령이 일하(一下)하면 왕공서민(王公庶民)은 물론이요 산천초목도 전율치 아님이 없었나니, 그렇듯 호화롭고 그럿듯 강포(强暴)한 것은 세계사상에도 필주(匹儔)가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의 강포는 오직 맹한(猛悍)만 하여 무인지경으로 나간 것이 아니다. 그의 흉중에는 의리도 있었고 염치도 없지 아니하였다.

   그가 이의민을 참하고 왕에 봉사(封事)한 것이 십 조(條)가 있는데, 그 내용은 철저이 보국안민의 혁구도신(革舊圖新)을 취한 책(策)이였다. 즉 태조의 정법(正法)을 일준(一遵)하여 중흥을 광계(光啓)함일세, 먼저 승려가 궁중에 방자히 출입하여 기강을 문란케 하니 이것을 숙청케 함이요, 세가(勢家)가 무수히 민재(民財)를 탈취하여 민생이 불안하니 그것을 적간(摘奸)하여 일일이 환본(還本)하며, 송사 조부(租賦)를 고루하여 국고를 풍부케 하며, 음양미신을 일절 금단(禁斷)하여 정의 인도를 찾아라 한 것이다....그의 심중에는 결코 포학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최충헌이 사병만도 수만을 거느렸다는데 대한제국은 국군이 겨우 칠천여명뿐이였으니 그게 글쎄 무슨꼴이였나말이요. 제 스스로 나라망쳐먹을 짓을 했으니 한심했지.》

   오혁이 먼 옛날을 오늘에 비하면서 리조가 망하게 된 원인을 다시금 원통하게 되새기였다.

   맥없어 하는 그를 보자 라철이 말했다. 

  《우리는 이미 중광단을 갖고있잖소. 그것이 장차는 무장단체로 변할것이고 한걸음 전진해서는 독립군으로 성장을 할것이요. 때가 오면 일본군과 결전을 벌릴것이며 싸워서는 승첩을 올릴것이요. 광복이 되는 그때에 가서는 대종교의 이 군대는 국군으로 자라나 국방을 지키게 될것이요. 이건 나 이 철 하나만이 무근거하게 품어 보는 환상이 아니요, 욕망도 아닌거요. 서일 그이가 신심포만해서 하는 소리를 내가 들은거요. 두고 보오만 교무에 열중하면서 단장직 역시 훌륭히 맡아서 해내고있는 서일은 문무겸비의 탁월한 지휘자가 될거요.》

  《아니, 라형! 라형은 그 젊은이가 그리두 신심있어보인단말입니까?!》

   말만들어왔지 아직 서일을 한번도 보지 못한 오혁이 하는 말이다.

  《그렇소. 나 이 철은 성품이 활달한 그를 믿고 하는 소리요.》

   라철이 절 때 빈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있는 오혁은 그의 장담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선에 있는 자기는 언제면 그와 만날 수 있을까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강우가 4월중순쯤에 가서는 천궁령선식(天宮靈選式)을 남도본사에서 행하게 되지 않는가 그때면 서일도 와서 참석할것이라 알려주었다.

   일행은 제천단(祭天壇ㅡ塹城壇, 塹星壇이라도 함)이 있는 마니산에 올랐다.

                 

   東史에 이르기를:

   “제천단은 江華 摩尼山에 있으니 단군님께서 혈구의 바다와 마니  언덕에 성을 쌓고 단을 만들어서 제단으로 이름하였다. 제단높이는  17척인데 돌로써 더하여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그니 우의 네모는  각각 6척 6촌이요 아래의 둘레는 60척이라 혹자는 이르되 마니는 강과 바다의 모퉁이라 땅이 따로 떨어지고 깨끗하며 고요하여 神明의 집이 된다.

    그러므로 제터를 닦아서 한얼님께 제사하는 것이다. 또 이르되  하늘은 그늘(陰)을 좋아하고 땅은 볕(陽)을 귀엽게 하므로 제단을 반드시 水中山에 하는것이요 위가 네모나고 아래가 둥글음은 천지의 뜻을 세우는 것이다.”

                  

   勝覽에는 또한:

   “강화부의 남쪽 53리에 마니산이 있고 산이마에 참성단(塹城壇)이 있으니 돌을 더해 쌓아서 우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근지라 이것이 단군님이 제천(祭天)하시던 곳이니 李朝에서 高麗의 옛제도로 인하여 볕을 제사하고 조선 太宗이 임금이 되기 전에 친히 제계하였다.”

 

    비고(備考)에 고려고종 46년에 校書郞 경 유(景瑜)가 말하되 “대궐을 마니산에 세우면 가히 나라 복조(福祚)를 늘게하리라”함에 명령하여 리궁(離宮)을 그산 남쪽에 세우니라.

    조선인조 17년에 고쳐짓다. 또 조선 숙종(肅宗) 26년 5월에 고쳐짓고 석패를 세워 기록하니 가로대

    “동토 수십리에 둘러서 강화가 보장하는 중한 땅이 되고 강도 수백리에 울러서 모니가 멀리 제사(望秩ㅡ망질)하는 이름난 산이 된다. 산서쪽 가장 높은 곳에 돌을 덧놓아 대(臺)를 만드니 곧 이른바 참성단이라 세상에 전하되 단군님이 쌓아 제단으로 하고 한얼님께 제사하는 곳이 된다하니 돌아보매 연대가 멀어서 바람이 갈고 비가 먹으니 서북 두쪽이 절반이나 무너지고 동변의 층계가 또한 기우러져서 고을사람들이 매양 탄식한지 오랜지라 불녕(不佞)이 외람히 류수(留守)가 되어 이 고을을 지닐새 순돌이하여 한번 올라보고 분하게 중수(重修)할 뜻을 가졌다..... 그 일을 맡아서 고쳐 쌓으니 20일만에 공사를 마쳤다.

    슬프다 무너짐을 일으키고 이즈러짐을 기움은 벼슬로 지키는 이의 마땅히 힘쓸바이오 하믈며 단군께서 제단에 베픔이 또한 한얼게 제사하는 땅이라 수천년을 지난 지금까지 끼친 백성들의 첨앙하는 바인즉 중수(重修)하는 일을 어찌 말것인가. 신묵(愼黙)이 이 사실을 적어서 뒷사람에게 보임을 청할새 이것을 써서 기록하노라.”

 

     제천단은 한배검이 366사로 치화(治化)의 공을 세움과 아울러 천제(天帝)의 대례(大禮)를 하고 보본(報本)의 정신을 드높인 제정일치(祭政一致)의 거룩한 령적(靈蹟)으로 오늘도 마니산정에서 반만년의 민족문화와 값진 얼굴을 자랑하고 있었다.

   오전 8시가 되였다. 봉식의원이 머리에 대례관을 쓰고 몸에다는 대례복을 입고 천단아래에 경숙히 서서 의식을 집행했다.

   《홀기를 읽으니 다들 들으시오. 이제 우리 인생들이 이 죄악을 쌓아 이 비참을 당하고도 이 잔명을 보존함은 참 거룩하신 천왕은택상제은택이오 또 하믈며 하늘에 절하고 신을 섬김은 우리 대종문의 근본이 아닌가. 오늘에는 우리들이 일제히 근본에 돌아와 죄인짐을 벗고 은혜를 갑기 맹세하여 다 한마음 한정성으로 제천합시다.

    제천식을 열터이오니 각의원 제원들은 다 자리를 정하고 일제히 정숙. 의식을 열으오니 다 공경과 정성으로 일심

    일제히 배

    일제히 흥

    봉향의원은 대향을 올리고 주제의원은 훈향.

    일제히 배

    일제히 흥

    봉축의원은 대축을 읽고 각의원 제원들은

    일제히 부복

    일제히 흥

    일제히 배

    일제히 흥

    페식하오니 천단에 제의를 철하고 일제히 퇴.》

    

   하늘제의식은 길지 않고 간단했다. 허나 그것은 정숙한 속에서 진진하게 진행된 행사였다.

   음력설이 지나 한달만에 뜻밖에 조성환이 서울에 나타났다.

   《나는 월경해서 곧추 이리로 오는 길입니다. 아니 건데 그새 서대문이 없어졌구만유. 그걸 허물리라는 소리를 내가 중국에서 듣고는 간대르야했었는데 사실이요 이리 빨리잃어질줄은 몰랐지.... 뭐, 지난해 12월달에?》

   조성환이 하는 말이였다.

  《없어진게 어디 서대문뿐인가 뭐. 흥례문도 헐리웠네.》

  라철이 알려주었다.

  《아니 뭐랍니까? 흥례문도요? 언제요?》

  조성환은 놀래여 눈이 둥그래진다.

  《요즘일세.》

  라철의 말에 그의 부인 知敎 奇姑가 끝을 달았다.

  《기분만 상하게 만들고있지. 글쎄 요즘은 그 자리에다 총독부를 지으리라는 소문이 파다히 나돌고있어요.》

  《총독부를 짓자구 흥례문을 허문단말인가? 개자식들!》

  조성환은 얼굴을 붉히면서 목청을 높혔다. 일제가 조선땅에서 전횡무도한 짓을 하고있음에 가슴이 떨리면서 격분이 끓어 번지였던것이다.

  《이러다가는 서울이 무슨 꼴이 되겠는가. 역적놈들이 왜의 개가 되어 이제 어느때 종묘사직마저 없애치우게 내버려둘 것이다. 더러운 놈들. 아!... 속에서 불이붙습니다.》

   속에서 불이 붙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애국심이 한쪽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서대문이 헐리우고 흥례문이 헐리워 거기에 일제의 통치기관이 들어앉는 것을 보면   그 누구나 격분할 일이였다. 

   조성환이 이번 월경을 하여 입국한 리유를 말하지 않았다.

   라철역시 알려고 그와 캐묻지를 않았다. 그가 그같이 국경이 없이 동분서주하는데는 그만이 아는 비밀적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동지요 가까운 처지일지라도 필요이상의 물음은 하지 않는 것이 례의를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만난김이니 이건 꼭 물어봐야했다.

   《조선생은 언제쯤 건너가려오?》

   《오래머무를 필요있는 것 같잖습니다. 가급적 속한 시일내에 만주로 돌아가렵니다. 왜 그러십니까? 조교께서 무슨 부탁이라도 있으십니까?》

   《있네. 있어. 돌아오는 음력 4월에 여기서 천궁령선식을 행하려는데 그때면 백포역시 참석을 해야겠네. 중요문제를 상의할 일이 있어서. 그러잖아 내이제 곧 사람을 보내려했는데...》

   《4월언제쯤인가요?》

   《중순일세. 그 전에 도착하면 되는거네.》

   《백포더러 4월중순전에 남도본사레 오라하라구요?  내 꼭 그리알리지요.》   

   조성환은 조선에 나갔다가 이렇게 서일을 환국시킬 심부름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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