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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半島의 血 제1부 16.
2012년 09월 16일 09시 54분  조회:4173  추천:0  작성자: 김송죽
 

16.    

 

   잠을 깨려해도 되지 않는다. 온 몸이 녹작지근하면서 맥골을 쓸수 없다. 반수반성 상태에서 고무라는 멍청스러운 할망구가 해여진 자루속의 쌀을 길바닥에 흘리듯이 잠에 젖은 소리를 입밖으로 중얼댔다.

   《내가....왜....이모양이 되나?....너, 너무....지쳤어!....》

    오랜 정신적인 긴장이 이제는 육체마저 물젖은 솜같이 돼게 만들고 있었다.

    요즘은 각 곳에서 올라오는 보고마다 골치거리였다. 온 조선땅에서 반일감정이 태풍같이 몰아치면서 고조되고 있었다. 말그대로 끓는 가마속같은데 이제 어느때 뼈도 못추리게 삶아질지 모를일이였다. 기꾸지 구마다로, 와까기 류히찌, 니사까와 견지, 오하다 쥰마.... 려주에서 지난 2월 9일 하루 의병의 손에 매맞아 죽은것만도 13명. 조선사람들은 지금 일본사람은 보이기만 하면 죽이려고 든다. 형편이 이렇다고 돌아갈수도 없었다. 패배자요 도주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도장이 등에 찍히는 날이면 그 자신은 물론 후대까지도 헤여나지 못할 오욕의 질탕속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정부가 직무를 철소시키기 전까지는 죽던 살던 여기서 뻗쳐내야 했다.

    탁상우에 어제밤 그가 읽어보고 내친 격문 한장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생각컨대 국세가 뒤집히고...민정이 위기에 빠졌다...가장 빛나는 문물을 자랑하던 나라로서 오랑캐의 피비린내 나는 땅으로 되어가니 어찌 이것이 선비들과 백성들이 통탄한 일로 되지 않겠는가....살아서 머리를 깎고 노예로 되느니보다는 죽어서 충혼으로 되는 편이 옳지 않은가 ....이날에 다 같이 모여 맹세한후 여러 부대들을 련합하여 용맹한 병사들이 수천명에 이르렀다. 곧바로 원쑤를 공격하는 것이 오늘에 있어서 상책으로 된다.>>

 

    강릉반일의병대에서 낸 삼가 북도 여러 고을에 호소한다라는 격문이였다.  고무라는 눈길이 거기에 닿이는 순간 온 몸이 오싹해남을 느꼈다.

    이 격문은 호소력이 강하여 상당한 효력을 내고 있었다.

    올해의 1월 의주지방에서는 조상학이 나라일을 근심하는 백성들로 의병대를 무어 의주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강계, 벽동, 위원, 초산지방에서도 김리언의 지휘밑에 사냥을 업으로 하던 포수들이 중심이 되여 반일의병대를 조직하였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주변일대는 물론 지어 압록강건너편에 살고있는 동포들에게 까지 알려져 일본사람이 미워서 고향을 등지고 만주땅으로 건너간 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하여 그들중 총을 가진 포수들은 강계지방 의병들을 따라 나서서 그 력량은 급속히 늘어났다.

    강계의병대는 강계를 습격한 다음 평양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허나 고산진을 공격한 다음 강계로 진격하다가 실패했고 의병장 김리언이 불행히도 정부군에 붙잡혀 학살을 당하게 되는통에 더 확대하지 못하고있다.

       

   《포수들 까지 임금의 령을 개방귀만큼이나 여기니 원. 김리언을 붙잡아 죽이기를 잘했지. 안그랬으면 이눔의 나라는 정말 왕도가 없는 나라로 되고말 것이다. 》

    고종은 자기의 통치지위가 의병들에 의하여 뒤집어질까봐 겁나 의병이 흥기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고종이 회유문을 수차나 내린 리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있는 고무라는 혼자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일본공사관의 비밀서류보관고에는 조선에서 지금 일어나고있는 의병정황과 그를 탄압하기위해 조선정부와 일본이 조치를 취한 상황자료들이 점점  많이 쌓여지고 있었다. 안동지방의 반일의병활동과 그에 대처한 상황기록만 봐도.

 

    <<강원도 원주부근과 충청도 충주부근의 단발 배척 자들은 서로 뜻이 통하여 충주로부터 안동에 와서 합세하려고 한다.>>

 

    1월 23일 부산령사 가또가 고무라에게 보낸 보고내용이다.

     

    <<안동의병들은 대오를 정비한 다음 1896년 1월 22일 안동부의 경무청을 습격하여 총과 칼 등의 무기와 식량을 빼앗아 의병대의 무장으로 군량으로 리용하였다.>>

    <<안동관찰사는 <내부>로부터 지금의 형세는 다른 나라 군대를 빌리기 어렵다는 회전을 받고 <내부>로부터 출병을 요구하는 것을 단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대구의 군대도 올 것 같지 않으니 속히 친위대파견을 희망한다는 취지를 <내부>에 전보하였다.>>

   

    1월 24일 인천 다까이병참에서 고무라에게 보낸 두통의 보고내용이다.

   

    안동지방의 의병을 진압하자고 보니 그를 토벌할 실제적인 병력이 없었다. 그래서 아직 아관파천 전이였던 고종은 왕궁수위를 담당하였던  진위대 1개중대를 안동지방으로 보냈던 것이다.

    1월 30일 토벌대가 온다는 정보에 접한 의병들은 일단 례안지방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안동지방에 온 토벌대는 의병들에게 위압되여 감히 접전을 못했다. 2월 20일에 하는수 없이 토벌대를 철수시켰다. 그것은 2월 17일 충주가 제천의병들에게 점령되여 거기에 토벌력량을 증가시켜야했기때문이기도했다.

    이 틈을 타서 의병들은 다시 안동에 모여들었다. 겁을 집어먹은 안동관찰사 김석중은 문경지방으로 도망쳤으나 그곳 의병들에게 체포되여 처단되고말았다.

    이 일대에는 7,000~8,000여명의 의병들이 모여있었는데 그들은 적측이 서로 련계를 맺지 못하게 하느라 일련의 파괴활동을 했다.

   충청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오늘 우편선로가 통하지 않는다. 현재 이 지방의 수비대인원을 송파진에 9명, 곤지암에 9명, 리천에 16명, 장호원에 8명, 가홍에 7명, 오늘 대구에서 오는 것 8명, 래일 락동에서 오는것 17명,기타 안포이북에서는 급히 이곳을 응원할 수비대의 여유가 없다.>>

   2월 10일 부산 제1대대장 이즈노소좌가 고무라에게 보낸 보고였다.

 

   3월 29일 태봉지방에서 의병은 정부군과 9시간가량 치렬한 접전을 치루고나서 룡궁지방으로 옮겨갔다.

   4월 2일 안동시안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날 의병들은 적이 안동시내에 진입한다는 것을 알고 시주변의 산지대에 진지를 정하였다.

        

   <<정부군은 안동시내에 의병이 들어와 머물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안동시가지에 불을 질러 시안의 집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후비보병 제10련대 제1대대장 야스노가 고무라에게 보낸 보고였다.

 

   이날 의성지방에서도 의병들이 군수를 비롯한 친일관리들을 처단했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는 의병들도 많았고 그들의 투쟁기세도 높았으나 의병지휘자들의 우유부단성으로 하여 투쟁을 보다 넓은 지역에로 넓혀가지 못하였거니와 부산을 공격하기로 설정된 초기의 작전계획을 실현하지 못한채 5월초에 이르러 투쟁은 기본상 끝나고말았다. 

   충청도지방의 일부 반일의병대도 안동지방의 의병대와 같이 설정된 공격대상지를 향해 진격하지 못하였다.

   의병투쟁초기 각지 의병대는 공격대상이 설정되였는데 인천은 충청지방의병들이 공격하기로 되어있었다. 이는 본질상 서울공격을 의미하는 것이였다. 한즉 충청도지방의 의병들은 초기설정에 따라 서울 또는 인천을 공격하여야만 했었다. 그러나 충청도지방 일부 반일의병대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한편 황해도에서도 의병이 일어낫는데 그 의병대의 선두에는 일본과 친일주구를 반대하는 농민폭동자들과 포수가 서고 있었다. 그들의 투쟁중심지는 해주지방이였다. 3월 24일 의병들이 해주를 공격하자 이곳에 있던 군대가 경무관을 처단하고 의병들과 합류하였다. 이 소식이 개성에 알려지자 개성에 있던 군대도 의병에 호응하여 나섰으며 해주를 향하여 떠났다. 그 영향은 삽시에 퍼져가 문화지방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황해도지방의 의병대는 농민폭동자, 포수대를 비롯하여 농민들과 지방군대들로 이루어져 그 전투력이 비교적 강한편이였으나 똑똑한 지휘성원이 없어서 그 전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전라도지방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늦어서 반일의병대가 조직되여 활동하였다. 1860년대에 활동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자인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이 전라도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면서 의병운동을 호소하였는데 호남, 장성 등 13읍이 이에 호응하여 그를 우두머리로 다시금일어났던 것이다.

   기우만의 지휘밑에 의병들은 각 지방으로 쳐들어갔다. 라주에서는 참서관 안종수를 비롯한 친일관리들을 붙잡아 처단하였다. 그러나 전라도지방의 의병무장활동은 다른 지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약하였고 얼마가지 않아 투쟁은 식어버리고말았다.

   기록들이 보여주다싶이 5월에 들어와서도 반일의병들은 상당한 력량으로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반일의병운동의 전반적 추세는 저조되여가고있었다.        

   일찍이 2월 8일에 원산령사 우에노 센이찌가 반일의병대의 작전계획을 탐지하여 고무라 공사에게 알린바가 있다. 그의 보고서에 보면 서울은 춘천에서, 인천은 충청도에서, 부산은 경상도와 강원도의 남쪽에서, 원산은 강원도의 반부(강원도북쪽지방의 절반)와 문천북쪽에서 남침을 취하기로 되어있었다. 뚜렷한바 의병대들은 인천, 부산, 원산 등 세 개의 개항장과 서울을 공격목표로 정하고 진격하자는것이였다.

   어떤 반일의병장은 서울공격을 중요시하면서 의병이 서울을 공격할 시 각지의 백성들이 일제히 호흥하게 발동해야 한다면서 구체적인 방안으로 첫째는 서울의 동, 서, 남, 북 네 개의 성문에다 일본과 악질관리들의 죄행을 폭로하는 글을 써붙이여 민분과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게 해놓고 공격이 개시되면 놀라지 말고 호응하게 할 것, 둘째는 먼저 남한산성을 장악하며 또한 남도지방에서 서울로 통하는 요지인 수원을 장악하여 서울에 식량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자고 하였다. 1개월만 이같이 하면 내부에서 소란이 일어날것이며 이 기회에 의병이 들이치면 시민들은 들고일어나 합세하여 원한많은 자들을 처단할거라는 것이다. 셋째는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서북3도의 의병들로 하여금 제천의병의 서울공격에 호응해 나서게 하는것이였다. 그것은 서북3도에 의병이 많이 일어나고있을뿐만아니라 그들은 굳세고 용감하기때문이라는거다.        

   고무라는 목하 반일의병중 제일 강하다는 제천의병대를 충주성에서 몰아버린 일을 다시금 회상했다. 그때 고무라는 대병력을 출동해서 충주성을 공점한 의병과 15일간 치렬한 격전을 해서야 성을 겨우겨우 도루탈환할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3월 3일날이였다.

   의병은 일본군과 맛서서 장기전을 할 수 있는 옳은 전술이 없거니와 무장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후퇴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원인이 그것이였다. 의병들에게는 충주성을 방어할수 있는 기묘한 전술이 없었거니와 적측의 포화를 당해낼만한 무장이 갖춰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원인은 의병들과 충주성내 백성들을 먹일만한 축적된 량식이 없었던 그것이였다.

   《우리가 식량 운수선을 철통같이 봉쇠하기를 잘했지!》

   고무라는 충주성탈환을 자기의 공적으로 여기면서 지금도 다소나마 즐거움과 안위를 느끼곤한다. 

   그러나 공개적인 대병력출동의 탄압은 할수 없지만 음으로 양으로 정부군과 협력하는 간고하고 피어린 작전은 앞으로도 계속될것이고 대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였다. 이것이 그래 외교관인 내가 할짓이란 말인가? 고무라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제기하고 자신이 대답을 찾는수 밖에 없었다.    

   

   <<려주부근에 전달된 정찰대의 보고에 의하면 우리의 척후병이 적의 보초와 충돌하였다. 적이 쏘는 총질에 맞받아 교전하게되였는데 적의 세력이 매우 우세하여 후퇴하게 되었다. 이때 근방의 마을 인민들이 호응하여 나서므로 간신히 장호원으로 돌아왔다. 오후 1시에 장호원부근의 인민들도 모조리 적에게 가담하여 이르는 곳마다에 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 이 정황으로 미루어보건대 려주의 적은 매일 어디에서인지 계속 증강되여 그 세력이 매우 크다. 거기에 철도연선의 인민들도 가담하는 형세이므로 금후 얼마나 우세한 세력으로 될는지 알수 없다. 현재의 병력을 가지고서는 우세한 적을 격퇴할수 없을뿐만아니라 우편선로개통도 쉽게 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2월 10일 충청북도 가홍주둔 일본 수비대 대장 이스노소좌가 고무라공사에게 보낸 보고였다.

 

   고무라는 경기도지방의 의병들이 서울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남한산성을 먼저 공점할줄을 미처 생각못했다.

   의병들이 남한산성을 점령하려고한 것은 첫째로 남한산성을 점령함으로써 서울점령목적을 쉽게 달성해보려는데 있었다. 남한산성은 서울의 동남쪽관문으로서 력대로 중요시해온 성새였다. 남한산성은 서울의 동남쪽 약 60리인 경기도 광주군에 있는 산성이다. 서울에서 광주, 충주를 지나 전라도로 통하는 도로와 수원에서 공주 혹은 청주를 지나 전라도로 통하는 도로를 끼고있는 요새지였다. 때문에 남한산성을 장악하는 것은 서울공격에 매우 유리한 것이다. 둘째로 의병들의 남한산성점령이 군사물자의 해결을 용이하게 해줄수있었다. 왜냐하면 남한산성에는 정부의 주요 군사요충지대였던만큼 이곳에는 군량과 대포, 소총 등 무기와 탄약들이 많이 보관되여있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을 점령하기 위한 전투에는 그와 가까운 지역에서 활동하고있는 려주ㅡ리천반일의병대가 앞장섰다. 의병들은 일본군의 병영을 습격 파괴하였을뿐만아니라 서울, 인천사이를 오고가는 우편물을 빼앗아냈으며 2월중순부터는 야간 운편송달까지 못하게 했다. 

  

   <<려주방면 폭도의 습격은 가장 심하여 이 부근의 소수의 일본병참성원으로써는 도저히 격퇴하기 어려웠으며 무참하게도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

   한성부의 기록이다.

 

   의병대는 광주지방의 포수 100여명이 가담함으로써 력량이 강화되자 2월 28일에 광주군수를 처단하고 그길로 남한산성을 점령하였다.

  《안된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남한산성을 탈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울은 먹히우고말 것이다. 서울이 먹히우면 일본은 조선을 잃고만다.》

   고무라는 밤잠도 자지 않고 수하 인원들과 함께 대책을 연구했다.

 

   3월 2일부터 량측간에 치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저녁에도 남한산성에 불길이 솟구쳐오르고 대포소리는 끊지 않았다. 과연 치렬한 전투였다.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의병들의 남한산성방어는 힘겨워졌다. 안성지방에 있던 포수들과 농민폭동군 그리고 부근의 농민 수백명이 남한산성이 위태로움을 보자 60~70명의 희생자를 내면서도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합세하였다.

   산성의 의병은 더욱 완강해지고 관군은 수자적으로 약하므로 그들의 식량공급로를 끊을수 없었다.

   3월 17일 오후에는 1,200여명 강원도 춘천지방의 반일의병들이 양근을 지나 광주에 이르러 남한산성을 포위하고있는 관군을 공격했다.

  

    <<광진의 적은 동문으로부터 돌진하여왔으며 한병을 협력하려고 하였다. 위험에 처한 한병은 대대장에게 원병을 요구하여왔으므로 1개소대를 파견하려고 한다.>>

   이틑날 송파진 혼다대위가 다가이대좌에게 보낸 청시보고였다.

 

   정부군이 일본군에 정식으로 원조를 구한 것이다.

   일본군과 관군은 강화도에 있는 관군까지 동원합세, 대부대로 남한산성을 기어히 탈환하려고 총공격을 하였다. 하지만 의병들이 성문을 굳건히 지키고있기에 들어갈수 없어서 그들은 남한산성의 동쪽성벽에 사다리를 걸쳐 놓고 기여들었다. 성안의 의병들은 목숨을 바쳐가면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을 끝내 내놓고말았다.

   의병지휘성원의 자리를 차지하고있던 박준영과 김귀성이 의병투쟁을 그만두면 수원류수와 광주류수를 시키겠다는 회유책동에 넘어가 성안으로 기여들려는 일본군과 관군에 문을 열어주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젠 한쉼 쉬게됐구나!》

    고무라는 남한산성을 의병들의 손에서 탈환했다는 소식을 듣자 어깨뼈마디에 소리 날 지경 두 팔을 머리우로 높이 뻣치면거 입이 째지도록 긴 하품을 내뿜었다.

   허나 시름을 놓을수 있는건 그 한 순간뿐이였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우에노가 환국(還國)하고 원산령사로 새로 부임한 니꾸찌가 서울에 와서 고무라공사를 직접만나 형세보고를 올린것이다.

   

  《요즘 그곳에서는 강릉의병의 활동이 창궐해지고있는 상황입니다. 그자들의 주요공격목표는 원산인바 아직 집접적인 진공은 없습니다만 그 준비사업은 끊지 않은 모양입니다. 학포선평장계선을 차지한 자들은 의병 매인에게 매일 쌀 두되와 엽전 50문씩 준다고 합니다.》

  《아니 뭐라! 그들이 배급제를 실시하고있단말인가?!....》

   이건 그야말로 거부기등에서 털이 자란다는 소문보다 더 희구한지라 고무라는 보고를 받으면서 일면 놀램을 감추지 못했다.

  《바로 그런가봅니다. 그자들이 그같이 공급하는 쌀과 돈은 군량도감 혹은 전도감이 당지 친일량반들의 재물을 몰수한 것이라고 합니다.》

  《허, 배포좋은 놈들이다!》

   고무라는 어이없어 턱을 치켜 천장을 보기도 하고 속털린 사람모양으로 허구푼 웃음을 웃기도했다. 

  《그자들이 18일에 고성에 들어와서는 <일본 사람을 도와줬으니 너는 친일분자다> 하면서 홍종현 군수를 살해하구는 장전지방으로 몰려들어 우리 어민들을...》

  《어민들을 어쨌다는건가?》

  《여럿이나 목숨잃었습니다. 한데 아직 그 시체를 못찾아와서...》

   니꾸찌령사는 거기에 그냥 벗치고있다가는 전멸될 위험성이 있는지라 죽은 자의 시체를 림시 묻어놓고 모두 장전에서 피난을 했다는 것, 림시 묻어놓은 시체를 날라가자고 원산에 정박해 있던 경비함 <<다가오호>>를 여러차례 장전지방에 보냈으나 의병의 활동으로 실어갈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대로 보고했다.

   장전지방은 강릉이북, 원산이남 동해안 지방의 포구가운데서 어업중심지의 하나로서 정어리, 명태, 청어, 방어 등의 명산지로 널리 알려져있다. 그래서 이곳에는 일본어민과 일본인 어물상들이 적잖게 몰려든것인데 그들이 지금 변을 당하고있다는것이다.

  《음ㅡ》

   고무라도 어찌했으면 좋을지 방도가 나지 않아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토해냈다.

   원산은 1879년에 개항이 된 항구도시다. 일본은 부산, 인천과 마찬가지로 이 항구의 문을 여느라 맥을 적잖게 뺐던것이다. 지금 시내에는 일본인 거주자가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본정부는 제 나라의 교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대고 령사관까지 설치해놓은 것이다. 말이 개항(開港)이지 실제상 원산은 일본이 조선동해안연선과 북조선일대의 어업자원을 략탈하는 중심역할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원산공격을 준비하던 강릉반일의병대에서는 원산거리의 내막을 잘 아는 통천사람 3명을 뽑아 그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 원산에 들어가 일본사람의 집과 그들이 집중해 살고 있는 거리에 불을 지르도록 획책했다. 그런데 준비부족으로 그 회책은 그만 파탄되고말았다.

   의병이 원산으로 들어온다는 정보를 받은 일본은 서울이나 부산에서 처럼 피동에 빠지지 않으려고 강릉의병대에 대해 선제공격을 취했다.

   3월 31일, 안변군 선평장에서 량측은 격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의 불의의 선제공격에 맞다든 의병대는 주동권을 잃고 수동에 빠지고말았다. 게다가 날씨마저 결정적으로 불리했다. 눈개비가 마구 내리므로 의병들은 부시를 쳐서 화승에 불을 달수 없어 총을 쏘지 못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일본군은 뢰관식무기인 5련발총을 가지고 계속 사격하면서 달려들었다.

   형편이 결정적으로 불리함에도 의병들은 창과 도끼, 칼로 치열한 육박전을 하다가 결국은 퇴각하고말았다. 량측은 모두 사상자를 많이냈다.....

   

   이에 앞서 부산 1등령사 가또가 고무라공사에게 보고서를 보낸것이 있는데 그도 다급한 소리를 했던것이다.

 

   <<유길준이 토벌에 나섰다.....대구에 있던 관군 60명을 진주에 보냈으나 싸움에 참패를 당했다. 그후 대구의 관군은 다시 병원수를 늘여 동지(진주)에 이르러 한번 폭도를 격파하였으나 그 수가 많아 대적할수 없었다. 드디여 폭도에게 패하여 <토벌군>은 다시 대구로 도주하였다. 또한 각 지방의 군수들가운데서 혹은 폭도에게 가담하고 또는 살해당하였으며 기타는 도망쳤다..>>    

    약 둬주일 전인 3월 17일에 보낸것이다.

   

   《폭도들은 혹은 상인처럼 가장하고 혹은 로동자처럼 차리고 각지를 돌아다니고있으며 김해, 구포, 부산 등지는 물론이고 일부분은 일본 거류지에 까지 침입하고 있다.》

    이것은 4월 17일에 보낸 보고다.

 

   부산은 1876년 강화조약이후 제일먼저 개항된 항구도시인데 일본인들의 주요출입구 중 하나였다.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은 지금 4,000명에 달했다.

   이 지방에서 활동하고있는 주요의병대는 진주와 안동의 의병대로서 그들은 부산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진주의병대는 2월19일에 조직되여 이틑날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그 의병대는 진주관찰사 조병필을 친일관리라며 잡아서 두발을 잘라버렸고 참사관을 잡아 죽이였다. 그 의병대는 관청을 점령하고 무기고에 보관되여있던 무기를 빼앗아 의병들을 무장시키고 진주관청에서 장악하고있던 별포군을 설복하여 저들의 의병대에 망라시켰다. 인원수는 약 1,000명가량.

   진주위병대는 4월 10일경부터 부산을 들이치기 위한 준비를 다그쳤다. 그들은 먼저 부산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김해로 진격하였다.

   김해를 들이친 의병들은 백성들에게 조세를 과중하게 부담시켜 수탈하는 군수와 세무주사를 친일관료라며 체포하여 처단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이 도주해버린통에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관청을 들이치고 리방, 책방, 례방, 호방 등을 비롯한 아홉을 붙잡아 죽이였다. 군수의 지령에 따라 백성들의 앞에 나타나 행패를 하는 아전이여서 그런다는거다.

   4월 11일경에 김해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지만 의병들을 함부로 건드릴수는 없었다.

   김해를 장악하고있던 진주의병들은 일본군과 관군이 다가가자 성문을 굳게 닫고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한편 성벽에 올라가 맹렬한 사격을 해서 접근하지도 못하게 했다. 4월 12일 일본군은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김해를 공격했다. 의병대는 지휘부내에 의견불일치가 생겨 패했다. 진주의병은 부산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들이대지도 못하고 실패하고말았다.

   일본군과 관군이 합쳐 남한산성을 탈환하기는 했으나 려주ㅡ리천의병성원은 소멸되지 않아 그 대부분이 경기도와 충청도 접경지대로 옮겨 그곳을 활동지대로 만들었다. 그들의 활동은 날이갈수록 더 극성을 띠였다. 일본군이 출동하여 관군을 도와 5월 17일 려주(장호원)에서 의병과 접전이 있었는데 의병은 죽산쪽으로 가서 대오를 보완하고는 20여리구간의 통신선을 끊어버렸다. 뿐만아니라 5월 19일 의병들은 가홍을 습격하여 거기서 이미 끊어놓은 전선을 다시잇는 작업을 하던 일본군인들을 죽이였고 하담부근에서 전주대를 20여개나 뽑아버렸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충주와 가홍사이는 물론 충주와 서울과의 전신력락도 할수없게 되었다.

   후비대 제1련대 제1대대장은 5월 20일 고무라공사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리였다.

 

  《하담부근에서 20여리간의 전주대를 뽑아버리고 전선을 끊어버리였으며 하담과 북창의 배를 빼앗아감으로써 배를 다른데서 가져다 쓰지 않으면 아니되였고 림시 교통로를 열었다.》

     

   《제길할! 이놈의 시달림을 내가 어느때까지 받아야 하나?....》

   고무라는 하기싫은 공사직에 매여있는 자기가 몸의 기름이 싹 빠지면서 지금 죽음의 지옥에서 헤매고있는것만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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