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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25.
몇달전이였던 이해(1905)의 1월1일에 일본군은 드디여 려순항을 공략한 것이다. 그야말로 오랜 혈전끝에 헤아리기 어려운 고생과 희생으로 바꾼 승리였다.
려순항은 10여년전 갑오년에 한차례 전쟁을 겪었다. 앞쪽에서 이미 기술한바와 같이 그때의 려순항은 이홍장이 광서6년(1880)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여 1885년에는 큰 부두로 되었고 해군제독아문(海軍提督衙門)을 설치하여 산동의 위해위와 더불어 북양군의 중요한 근거지로 된 곳이다. 청일전쟁당시 일본군은 려순항을 치기 어려우니 그곳은 일부러 놔두고 대신 화원항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이 이곳을 점령하고 상륙하자 겁을 집어먹은 청나라군대는 려순항을 견결히 사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본군이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려순항은 거의 손상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한데 청일전쟁후 일본이 3국간섭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차지할수 있었던 료동반도를 도루내놓게 되니 려순항역시 중국의 소유로 다시 된 것이다. 한데 후에 그것이 로씨야의 손에 들어가게될줄이야.
제국주의렬강의 눈에는 중국이 다만 한덩어리의 먹기좋은 고기덩이로밖에 보이지 않아 그들은 치렬한 쟁탈전을 벌렸는데 로씨야 역시 일본에 못지 않게 파렴치하고 탐욕스러웠던 것이다.
1891년 봄에 짜리로씨야는 첼랴빈쓰크에서는 동쪽으로, 울라지보스톡(해삼위)에서는 서쪽으로 서로 마주향해 동시에 길이 7,000㎞에 달하는 씨비리철도부설공사를 벌리였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길다란 혈맥과도 같이 구라파의 로씨야본토로부터 우랄산맥을 지나 원동지구에까지 뻗쳤다. 한편 또 그해에 짜리정부는 하바롭스크(백력)에서 흑룡강과 우쑤리강을 굽어볼수 있는 층암절벽에 전임 씨비리총독 무라비요브의 전신부각상을 세웠다. 중국의 령토를 100여㎢나 탈취한, 죽은지 10년이나 되는 오만한 무바비요브는 한손에는 "중로애훈조약" 본문을 쥐고 다른 한손에는 만원경을 들고 중국의 광활한 내지를 노려보고 있다.
1898년에 벌써 로씨야는 중국주차공사 빱빠브에게 명령하여 이홍장과 9개조로 된 려순,대련조차조약(旅順,大連租借條約)을 체결케한바있다.
1. 중국은 려순과 대련 두 지방 및 그 부근 일대의 지방을 로씨야에게 조차하되 25년을 기한으로 하며, 만기가 되면 계속 협의하여 이를 조차할 수 있다.
2. 려순은 로씨야의 해군항으로 하며, 대련은 통상항구로 개방한다.
3. 로씨야는 려순, 대련에다 포대를 구축할 수 있다.
4. 할빈으로부터 려순, 대련에 이르는 철도와 우장(牛莊)으로부터 압록강에 이르는 철도는 모두 로씨야가 부설한다.
이상이 그 조약의 주요한 내용이였다.
로씨야는 바로 이 조약에 의하여 려순항을 제손에 넣고 난공불락이라며 자랑하는 요새로 만든것이다.
려순군항에 있는 해안포대 13개소와 륙상포대 9개소에 대포 80여문이 그대로 장치되여있었거니와 대련만에 있는 포대 6개소에 장치된 24문 포도 그대로 있었다.
로씨야는 려순항을 장악하자 포대를 더 구축하고 여기다 전기철조망까지 늘이여 침입하는 적을 막아내려했다.
치렬한 공방전은 달에 달을 이어 오래도록 반복되면서 지속되고있었다. 일본군은 저들의 시체로 전기철조망을 덮었고 살아있는 군인들은 그 시체를 밟고 넘어 들어가 마침내 동방제1의 난공불락이라는 요새를 최후로 점령하고야말았던것이다. 얼빠진 려순함대사령이 제부인의 <<명명일무도만회)>>를 연 그 기회였다.
그러니 어찌 경축하지 않으랴! 려순항을 함락했다는 소식이 일본땅에 전해지자 일본국민들은 미칠지경 기뻐날뛰였던 것이다.
《대일본제국 만세! 만세! 만만세!》
그들은 거리에 뛸쳐나와 밤에 낮을 이어가며 춤추고 환호하면서 목이 터져라 웨쳐댔던 것이다. 희생자의 가족들은 비통하여 눈물을 뿌리면서도 죽은 이의 위패가 신사(神社)에 세워지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기에 그정도되였던 것이다.
려순항이 함락되면서 부터 일본군은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무기의 불비로 참중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들이 만주대륙으로 진격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전선으로부터 날아온 하나의 끔찍한 보고가 사람들을 몹시 경악케하였던 것이다. 로씨야군이 발사하는 이름모를 무기에 무수한 생명이 날아나고있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괴물이 나타난것일가?
그것은 막심기관총이였다. 1887년에 막심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새로 발명한 기관총을 가지고 뻬제르부르그에 가 거기에 있는 한 장군을 찾아 만났다. 그는 장군앞에서 당장 사격표연을 했는데 반분이 되나마나하는 사이에 330발의 탄환을 다 쏴버렸다. 로씨야장군은 놀라고 기뻐하면서 이 사실을 즉각 짜리황제에게 알리여 그 기관총을 사들이게 했다. 그러면서 그것을 “막심기관총”이라 이름지었다. 로씨야는 그런 것을 이번 전쟁에 사용한건데 그 기관총에 일본군은 한차례의 고지쟁탈전에서만도 4,000여명이나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일본은 자기들의 무장장비가 뒤떨어진 것을 통탄하면서 절치부심했다. 싸움에서 승전하자면 오로지 생명을 무수히 바치는 길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희생을 많이 내면서 계속싸워 3월에 가서야 드디여 봉천(심양)부근에서 로씨야군을 격파할수 있었다. 한편 로씨야는 만주대륙에서 륙군이 참패한 뒤를 이어 5월하순에 이르러서는 발찍해로부터 극동에 증원하여 온 방대한 빨찍함대마저도 대마해협을 채 벗어나지도 못한채 일본해의 대전에서 패하고말았다. 로씨야는 륙, 해군의 전부가 패배 하였으며 일본역시 전쟁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느끼게 되었다.
동경. 수상관저.
지니간 5월달말의 어느날 수상 가쯔라 다로오와 추밀원 의장 이또오 히로부미, 륙군총참모장 야마가따 아리또모와 내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대신 고무라 주따로 그리고 외무성 정무국장 주라찌 데쯔기찌로가 한자리에 다시모였다. 미국정부로부터 이제는 로일전쟁을 결속짓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제의해왔기 때문이다.
《로씨야는 이제와서야 우리와 화의할 것을 바라고있습니다. 이제 더는 뻣설 힘이 없으니 할수없이 자신의 패배를 승인하지요. 》
외무대신 고무라 주따로가 말했다. 뽀마도를 바른 그의 검은 머리가 오늘따라 윤기가 더 흐르고 있었다.
《저깟것들이 백기를 들어야지. 그렇게 세궁력진해갖구서 어떻게...》
주라찌 데쯔기찌는 숱많은 그의 멋진 팔자수염을 부러운 듯 보면서 감정을 맞추어주었다.
《세궁력진하기야 마찬가지요.》
이번에는 이또오 히로부미가 백발이 된 머리를 가로 젖고나서 말했다.
《일년 삼개월이요! 솔직히 말해 우리도 이젠 너무지쳤소. 병력이 이십여만이나 소모된것이요!》
야마가따 아리또모가 년장자다운 침착하고도 느러진 어조로 말하였다.
《총참모장말이 옳은데 어디 그것뿐일까. 내 한마디 덧붙이지. 우리는 이번전쟁에 이미 17억원이나 넘어 말아먹었소. 당초의 예견이야 5억원이 아니였는가. 이로인해 우리는 또한번 진통을 크게 겪어야한단말이요.》
가쯔라 다로오가 두 눈썹을 실룩거렸다. 늘 정장을 하여 멋스러워보이는 군인타입의 이 사나이는 이번전쟁이 또다시 경제공황을 몰아오게 되었음을 환기시시키느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초의 예견비용은 5억원. 그중 3억 5,000원을 영국과 미국의 외채에 의하여 충당하려한게 아닙니까. 그러나 1년 3개월간의 전쟁행정에 실지로 지출된건 17억 4,600만원이나되였습니다. 70%에 달하는 12억원을 외채에 의존한거죠. 이 빚을 우리가 어떻게 다 상환한단말인가?...》
그는 심각한낯색을 지은채 일장의 구술을 마치였다.
(부담을 자국민에게 더 지워서는 안된다. 그런다면 기필코 폭동을 야기시키게 될 것이다. 방법은 오로지 한가지ㅡ조선을 어서 먹어치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조선의 재정체계를 완전히 장악하여 식민지통치비를 전가하여 부담시켜야 한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입을 열었다.
《사실말해 우리도 이제는 더 이상 뻣힐 맥이 없는거요. 그러니 강화를 기껍게 접수하고 승전국으로서 의례 받아내야 할 대가나 빠뜨리지 않게끔 연구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 같구만.》
유도적인 발언이였다.
일본정부는 미국의 제의를 즉각 접수하여 6월상순에 전투를 정지했다. 그리고는 외무대신 고무라 주따로를 강화위원으로 미국 포츠머스에 파견하여 로씨야와 담판하기로했다.
8월에 로일강화조약의 성립을 보게되였다. 이 조약에 의해 로씨야군이나 일본군이나 다가 만주에서 철거했거니와 전패국인 로씨야는 화태도(樺太島)남부를 일본에 할양해야했다. 그외에도 로씨야는 종전에 중국에서 조차하였던 려순 및 대련과 장춘 려순간의 철도를 일본에게 양도해야했거니와 조선에 뻗혔던 세력도 거두어야했다. 하여 일본은 조선에 대한 특권마저 갖게된 것이다.
<<로씨야는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상 군사상 및 경제상의 탁월한 리익을 가지고있음을 승인하며 일본이 조선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치를 취하는데 대해 이를 저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이것은 조선문제에 관한 포츠마스강화조약 제2조의 규정이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빨리 손을 써서 조선의 모든 외교권을 장악해야겠다고 맘먹었다. 외교권만 앗아내면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식미지로 만들어버린거나답지 않은 것이다. 7월 29일에 미국과 "가쯔라ㅡ타프티비밀협약"을 맺음으로써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조선강점에 대한 담보를 받아냈다. 그리고 8월에 제2차"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일본은 영국으로부터도 조선강점을 지지한다는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이쯤하면 주요한 열강들은 일본이 조선을 집어 삼키는데 찬동한 셈이였다. 그러니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건 다만 시간문제일뿐이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야마가따 아리또모 룩군총참모장과 개별적으로 다시만났다.
《총참모장께서는 왜 료양을 하시지 않습니까, 로고가 많으셨는데?.... 이젠 예쉰여엷입니다, 년세가 많은데. 신외무물이라 자기 신체도 돌보셔야합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한테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인사차림을 했다.
《관심해줘서 감사하외다. 로고를 따지면야 나보다도 의장께서 휴식을 먼저해야지. 난 아직 뻗힐만하오다. 건데 무슨일루서 나를?....》
야마가따 아리또모는 이렇게 응대하면서 조선문제를 놓고 내내 머리를 썩히는 추밀원 의장이 자기를 찾아 온 본의가 무엇일가고 속으로 점쳤다.
《하세가와 요시미찌에 대해서 좀 알고싶어서 그럽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잡담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요건을 말했다.
《그가 이번 전쟁에 대장으로 승급한거야 의장각하께서도 아시는 일이 아니요. 그런데 뭘 더 알고싶어 그러시오?》
《그 본인이 출국하여 사업해 볼 맘이 없는지?》
《의장께서는 그를 조선에 파견 할 생각이시오?》
《딴은 그런가봅니다. 누구를 보냈으면 좋을지 궁리가 나지 않다가.... 내가 그를 처음으로 알게된건 경부선부설권문제같아나 조선으로 가기직전이 아닙니까. 첫인상부터 좋게 안겨오더군요. 그리구 그 누구보다 실적도 있다구하니.... 그래서 그를 점찍은건데 본인이 이에 대해서 별 이의가 없다면 당장 그를 보낼가 합니다. 그곳의 군사를 시급히 유력하게 장악해야 할 적임자가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면야 어련히 반가와 하지 않으리. 맡겨보시오. 그는 잘해낼겁니다.》
야마가따 아리또모는 장담까지 해가면서 하세가와 요시미찌를 적극 추천했다. 백락일고(伯樂一顧)라 훌륭한 군왕에게 재능을 인정받게 됨으로써 신하가 실력을 발휘할수 있게 되는게 아닌가. 아무리 천리마라도 백락이 그를 몰라봐주면 별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전선에서 돌아오자 가정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해변가 료양지에 가있는 하세가와 요시미찌를 불러 조선주둔군 사령으로 임명해서 곧 파견했다. 그리고나서 이또오 히로부미는 한편 조선문제에 대한 최종결론을 내리기위해 부지런히 서둘렀다.
그러노라니 그는 머리가 더 희여졌다. 턱수염도 하얘졌다. 흡사 늙어가면서도 위풍을 보이느라 여력(餘力)을 과시하는 한 마리의 억대센 승냥이와도 같았다.
(네가 무던히도 참아왔구나. 그 속을 내가 이제 당장 풀어주마.)
수상 가쯔라 다로오는 그가 낯색이 누렇게 뜨고있으니 념려했다.
《의장각하께서 뻗혀내실만합니까?》
이 물음에 이또오 히로부미는 만면에 그믈그믈 웃음을 피여올렸다. 그는 여지껏 한국을 서둘러 병합해야한다고 주장해온 이 고집스러운 군벌출신의 단행론(斷行論)자에 대해 전에 없던 흥미를 가지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뻗혀내는가 못내는가는 나중에 볼 일이구 절대 중도이페지 할수야 없지. 안그렇소, 가쯔라수상! 우리는 더 기다릴 것 없소. 이제는 서둘러 결정을 내림이 지극히 필요하다고 보오.》
가쯔라 다로오는 이또오가 제구미에 맞는 말을 하는지라 기뻐했다.
《아, 예! 저도 바로 그 생각을 해온겁니다! 아무 극이나 막간이 길면 재미가 없지요. 안그렇습니까, 의장각하! 우리는 두차례나 혹독한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그 댓가가 무엇인가를 국민앞에 어서 보여줘야지요.》
그의 이런 말속에는 전쟁으로 인한 자국민의 불만을 갈아앉힐만한 가장 합당한 방도는 오로지 시간을 더 끌 필요없이 하루속히 조선을 일본에 예속시키는 일이라는 뜻이 함뿍 담겨있었다.
《한데 정부가 이제 한국보호권 확립에 관한 결정을 한다면 어떻게?..》
가쯔라 다로오는 방안을 들어보고싶어했다.
《<한국에 대하여 우리의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은 이미 내각회의에서 결정된 바이지만> 허두는 이같이 떼놓고 아래에 <우리는 오늘이 가장 좋은 시기로 본다>고 역점을 찍어 밝혀야 할 것이요.》
이또오 히로부미는 고심히 연구한 방안을 제 머리속에서 끄집어냈다.
가쯔라 다로오는 머리를 수긋하고 귀를 기울였다. 계모가 출중하여 자기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초월하는 그의 그 비범한 재능과 사업실적에 대해서 그는 오늘도 속으로 못내 경탄하고 만족스러워 하면서 명심해들었다.
《왜서 오늘을 가장 좋은 시기라 하는가? 그것인즉은 이에 대하여 미영량국이 이미 동의하였을뿐만아니라 이외의 여러 나라들도 역시 한일 두 나라의 특수한 관계와 전쟁의 결과를 고려하거니와 따라서 최근에 발표한 영일동맹, 로일강화조약의 명문에 비추어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되는 것은 피할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묵인하고있기 때문인것이요.》
《지당한 말씀이군요!》
가쯔라 다로오는 숙였던 머리를 치켰다 다시 수굿하는 것으로 솔직히 경의의 뜻을 표시했다.
10월 27일, 일본정부는 내각회으를 열고 기본상 추밀원 의장인 이또오 히로부미와 수상 가쯔라 다로오의 설계에 따라서 미리작성된 《한국보호권 확립실행에 관한 내각회의 결정》을 채택하였다. 이 문건에 수상과 단둘이서 나눈 대화의 요점과 이또오 히로부미의 언론이 그대로 수록되였다. 내각회의 결정에는 뜻과 같이 순조롭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무력적인 위협과 공갈로 한국정부에 조약을 강요하기로 하였으며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일방적으로 한국을 향해서는 보호권을 확립하였다는 취지를 통고하고 여러 나라들에 대하여서는 일본정부가 이러한 조취를 취하게 된 것은 부득이한것이라는 리유를 설명하며... 여러 나라들의 조선에서의 상공업상의 리익은 해치지 않는다는 취지를 선언할것이라는 것을 규정해놓았던 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같이 내각회의에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한다는 결정을 채택하자 곧 조약문을 구체적으로 다시 한번 연구했다. 물론 조약내용을 이제와서 구상하는건 아니다. 초도가 나와서 이날까지 임신부가 복통을 겪듯 무던히 오래동안 재검토하면서 암중에 길러온 것이다.
이른바 보호조약(保護條約)이라 명명한 그 전문은 다음과같았다.
日本政府 및 韓國政府는 兩帝國을 結合하는 利害共通의 主義를 鞏固케하고자 하여 韓國의 富强의 實을 가지게 될때 까지 이 目的으로써 左의 條款을 約定함.
제1조. 일본정부는 동경의 일본외무성으로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와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겠으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령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의 신민과 그 리익을 보호할사.
제2조. 일본국정부는 한국과 타국간에 현존한 조약의 실행을 완전케하는 임에 당하고 한국정부는 금후에 일본국정부의 중계에 유치 아니하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또 약속을 아니할 것을 약함.
제3조. 일본국정부는 그 대표로써 한국 황제페하의 관하에 통감일원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친히 한국 황제께 내갈하는 권리를 가짐. 일본국정부는 또 한국의 개항장과 기타 일본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곳에 리사관을 두고 권리를 가지되 리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서 종래 한국에 주재하는 일본령사에게 속하였던 일체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 사무를 집행할사.
제4조. 일본국과 한국간에 현존한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 조관에 저촉하는 자를 제한외에 총히 그 효력을 계속하는 것으로 함.
제5조. 일본정부는 한국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함.
우의 증거로 하여 하명은 본국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조약에 기명 조인함.
광무9년 11월 17일 외부대신 박제순
명치38년 11월 17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께
조약일자와 서명은 후에 조약을 맺을 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추밀원 의장관저.
겨울철이 다가와서 싸늘하건만 관저의 방안은 난방이 잘되여 훈훈하다.
추밀원 의장 이또오 히로부미와 대장대신 소네 아라스께, 외무대신 고무라 주따로, 부름을 받고 서울에서 방금 온 조선주재 공사 하야시 곤스께 이렇게 넷이 따로 조용히 한자리에 모였다. 조선정부와 보호조약을 맺을 임무를 맡은 주역들이다. 년령을 볼것같으면 이또오 히로부미가 제일많아 63세이고 그 다음은 소네 아라스께 56세, 고무라 주따로 50세, 하야시 곤스께는 이제 36세 제일어리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고 사려깊고 허심하며 교오하지 않고 선배들을 존중하고 총명해서 전도유망한 젊은이라 보고있다. 20살나던 해(1889)에 벌써 인천주재 부영사로 부임하여 외교관생애의 첫발자국을 뗀 그는 30살에 조선주재 공사로 다시부임했고 로일전쟁이 일어나자 제1차 한일협약을 맺은 경력을 갖고있다. 이제는 외교가로서의 기틀이 잡혀 뒤에서 잘만 받들어주면 실수없이 자기의 재능을 발휘할 사람이였다.
그들은 이제 조선땅에 건너가서 자기들이 해야 할 행사와 그 절차에 대해서, 그리고 이에 따라 용이하게 부딧치게 될 난관들을 놓고 구체적인 대응책을 연구하고있었다.
《조선민족을 우매하다고만 보아서는 절대 아니될것입니다. 물론 세상일에 암매한 자가 아직도 많기는 하겠지만 자존의식이 높아 일단 깨닫고 각성하기만 하면 분노하여 분발함이 성난 둥글소와 같은겁니다.》
외무대신 고무라 주따로는 10여년전 민비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자기가 뒷수습을 하느라 조선에 건너가 여러해 땀을 뺀 일을 상기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미우라대신에 공사일을 맡아하는 기간 조선정부를 추겨 단발령(斷髮令)을 내리게했다가 생 애를 먹었던 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외교란 대방을 알고 자기를 내세워 교제함으로써 리득을 보자는게 목적인 것인만큼 자연히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게 된다면서 손해를 줄이고 불필요한 희생을 면하기 위해서는 항시 머리를 쓰면서 경각성을 높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때 내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가 나타났다. 개인적으로 조선에 가게되는 친구의 안녕을 빌어주자고 온 것이다.
《조선사람은 현세에 뒤떨어져 살기 때문에 암매하여 어리석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이 렬도의 야마도민족보다 더 외유내강한 민족인거요.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해.》
이노우에 가오루의 말이였다.
300만원을 갖고 로씨야쪽으로 마음이 쏠려버린 민비를 어떻게든 돌려세우려했다가 되려 돈만 잃고 곤궁에 빠져 돌아와야만했던 과거가 새삼스레 상기된 것이다. 그때는 로씨야를 위시한 3국간섭이 성공되여 일본의 위신은 저락되고 대신 로씨야의 위신이 올라가 친로파들이 활기를 띄면서 배일감정이 높아졌던것이다. 오또리공사가 소환되고 대신 그가 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해 조선에 갔으나 별 방도가 없었다. 그가 고심히 꾸려놓은 김홍집내각은 두 번이나 무너지고 왕실의 특사를 받고 다시 정계에 진출한 친일파 박영효도 미움을 받기 시작하고... 지난 과거는 쓰고 달고 맵고 시였다. 그런가하면 외교가의 회억은 이같이 가슴이 쓰라리는 반면에 또한 자랑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우리가 조선이 문을 열게 만든 것이 어느때더라?.... 운양호사건이 있었을 때니 어언 삼십년이 흘러갔구려!》
이노우에 가오루가 추억에 잠기면서 입을 다시열었다. 그가 올해 벌써 나이가 69살이였다.
(내 친구여, 이젠 칠십고개에 올랐구려!.... 우린 다 늙었어!)
이또오 히로부미는 몇오리 남지 않은 친구의 흰 머리를 보노라니 이름모를 련민이 가슴을 허비였다.
《내무대신은 그때 마흔살이였지요. 우리가 조선을 들쑤셔 첫조약을 맺었을 때가말입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도 따라서 과거를 상기했다.
《그렇소. 그때 내 나이 마흔이였지. 의관 나는 부사로서 개척사 구로다 기요다까를 따라가 조선정부와 강화도에서 조약을 맺었더랬지.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감슴이 벅차오르는구만.》
《그럴수맞아. 내무대신께서는 우리의 일본을 위해서 그때 과연 벅찬 일을 해놓았으니까. 개척사라는 명예는 구로다 기요다까 한분만 가질것이 아니라 어련히 내무대신께서도 함께 공유해야 할겁니다. 두분 다 조선의 대문을 맨처음 활짝 열어재꼈으니까.》
《그때가 있었기에 오늘을 맞볼 수 있게 되였지요. 력사는 공신들을 잊지 않고 기록해줄것입니다.》
고무라 주따로가 이또오 히로부미의 말끝에 이같이 발라맞추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그 후 임오군란 때 일본측 피해보상에 관한 한성조약(漢城條約)“도 체결했지만 첫조약때처럼 그렇게 보람찬건 아니였다. 강화도에서 체결되였다하여 일면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라 부르기도 하는 그 번의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의 내용을 보면 일본은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인정할 것, 일본과 조선은 서로 외교사절을 파견할 것, 조선은 인천과 원산을 통상항구로 개방할 것, 일본 군함은 언제든지 조선 해안지대를 측량할수 있다는 등등. 조선에 대한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얻어냈던 것이다.
그것은 일본이 조선을 삼키려고 내디딘 첫 행보였다.
《어언 삼십년이요, 이날을 위해서 우리가 살아온 것이.》
이노우에 가오루는 자기가 이미 한번 내친 말을 곱씹었다.
《기실 우리는 이날을 위해서 분투해왔지요. 안그렇습니까.》
고무라 주따로의 말이였다.
《맞아. 이날을 위해서 살고 노력하고 분투해온것이지요.》
하야시 곤스께가 두 선배의 말을 받아 종합하자 이또오는 부르짖듯 말했다.
《과거가 있음으로 하여 오늘이 있게 된것이니 우리의 삶이 이만하면 충실했지! 이제 이 보람찬 일을 해놓는다면 우린 후세에 부끄러움이 없게 될거야. 이 점을 생각하면 나는 스스로 자신을 위안하게 되거니와 떳떳이 자부하게 되는거요. <이또오 너는 헛살지 않았다.> 하고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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