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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멸망ㅡ 관건은 통치자의 부패에
리조 500년의 력사가 어딘가, 조선은 너무나 오래고 오랜 봉건세습에 억매여 몽매해진 나라였다. 백성은 다가 철통같이 밀페된 속에서 살다보니 제나라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보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자기만을 알았지 남은 전혀알지 못했다, 근본알수도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눈이 틔이지 못한것만은 사실이다.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한지가 어느때고 벨(Bell,A,G)이 전화를 발명한지가 어느때였는가, 서양에서는 전기가 있어 밤도 대낮같이 환히 보내고 전화를 놓아 먼곳의 소식도 금방알수있고 스티븐슨이 만든 기차가 대륙에서 줄달음쳐 아무리먼곳도 갈 수 있어서 많은 편리를 주고있었다.
하건만 그럴때의 조선은 어떠했던가? 과학이 많이 뒤떨어진 동양의 여러나라들 중에서도 한심하게 뒤떨어진것이 물론 조선이였다. 조선사람들은 세상이 그같이 발전했다는 것을 들어서 알뿐 제눈으로 보지 않은이상 그저 머릿속에 상상으로나 그려볼 정도였다. 그런주제에 서양사람이 말한것과 같이 동양의 잠자는 나라 조선은 고작안다는 것이 노새타고 풍월이나 하면 그것을 지고지상의 락으로 여겼으니 몽매해도 한심하게 몽매했다고할수밖에 더 있는가! 량반쌍놈이나 가리다보니 발전하지 못해도 한심하게 발전못한것만은 사실이였다.
꼭같은 목숨갖고 세상에 태여났어도 조선사람들은 부귀비천이나 비길줄을 아는 세월을 살다보니 웃사람과 아랫사람ㅡ 지배자와 비지배자지간에, 말하자면 계급모순은 점점 쌓이고쌓일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패해질대로 부패해진 봉건관료통치배들의 압박과 착취에다 잔인한 학대가 가해져 년년이 이어지니 임금을 하늘같이 믿고 숭상하는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면양같이 순직했던 백성이였건만 결국은 더 참고 견뎌낼수 없어서 들고일어났으니 곧바로 민란이요 그것은 또한 폭란으로 번지기가 일수였던 것이다.
근대의 조선은 바로 그같이 모순이 점철된 불온한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했으니 김문학의 서술대로 외국인들의 눈에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당연히 온정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깨지못하여 락후한 것으로 보였을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한데 문제는 그렇다고 망국의 책임이 백성의 락후성에 있었다고 질타하하면서 같은 동양국가라지만 한걸음 발전했던 일본을 비롯하여 서양국가들의 비난과 질타를 아주 정당한것으로 인식해야한다는 리론은 맞지 않은 것이다.
락후한 나라면 발전한 나라의 기시를 받기마련인데 그렇다고 반드시 침략을 받아야만이 발전할수 있는건가? 꼭 그렇지는 않은것이다.
김문학의 리론을 보기로하자.
"억울한 '한국병합' 역시 우리 민족자신의 결함에서도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한다."
"당시 서양인 관찰자들은 일본을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로서 서양문명을 수용하여 충천하는 기세를 보여주었다고 하는 반면, 한국은 '고요한아침의 나라로 아직은 전근대의 잠자는 나라'로 보았다"는건 비유가 맞고 "한국은 대체로 부패와 착취로 점철한 사회"였다는것도 맞는말이다. 면바로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애국심이 결핍하며 더럽고 무례하고 게으른'표상이 주되었다"는건 틀린다. 력사를 잘 모르고하는 말이다. 김문학의 글에서 "한국은 '문명퇴화'의 모델"이였다고 함에 나도 동감하나 "1911년 한국에 왔던 웨브부부는 '무지하고 미개한', '더럽고 무식하고 미개한 사람들이', '진흙과 짚풀의 오두막에서 살면서', '문명개화가 안된 농부의 나라'가 문학예술에서는 높은 수준을 창조했다고 경탄한다."고 하는건 심히 모순된다. 웨브부부의 그 언론에는 발전한 서양사람의 오만함과 타민족에 대한 경멸과 멸시가 너무나 로골적이거니와 비렬할정도로 과분한 것이다. 조선사람대부분이 '진흙과 짚풀의 오두막에서 산것만은 사실이였으나 과연 "무지하고 미개"했던가? "더럽고 무식하고 미개한 사람들이"였던가? 발전하지못한건 사실이였으나 그렇다하여 "무지"하다느니 "미개하다"느니 "더럽다"느니 한건 고의적인 악의에서 나온 지독스런 모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서 더구나 "문학예술에서는 높은 수준을 창조했다고 경탄했다"니 이는 모순되거니와 말한자 스스로가 자가당착(自家撞着)빠지고만게 아닌가. 보아하니 "1911년에 한국에 왔던 그 웨브부부"야말로 판단력이 엉망이면서 무지하기가 짝이 없는 말새꾼임이 분명하다. 웨브부부는 한국에 왔다가 분명 조선사람들에게 대접받지 못하고 괄시를 받은것이다. 내가 왜 이같이 긍정하는가? 그당시의 외국사람이면 몰밀어 침략자라 여기고 증오하는것이 온 조선국민의 심정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판이였으니 그들도 당연히 의심받아 배격당했을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조선이 인상이 좋을리만무인 것이다. 김문학은 아무런 려과도 없이 그런사람의 언론을 론거로 잡고 지금 앵무새같이 되뇌이고있다.
진정 학자라면 자중해야할것이다.
그때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이하여 10여년간의 의병항쟁이 거의끝나가고있는 때였다. 일제의 의병학살상황을 보기로하자.
1907년 7월이후 12월사이에 3,627명,
1908년 1만 1,562명,
1909년 2,374명,
1910년 125명.
* <<조선폭도토벌지>>(일문), 조선주차군사령부, 1913년판,통계자료.
지난때를 평하겠거든 우선 그때의 력사환경을 잘 연구해보고 해야 옳을것이다. 실질을 떠난 평가나 리론은 아무런 가치도없는 것이다. 몇몇 외국사람의 감상적인 그릇된 견해로 엄연한 력사를 일괄하면 잘못된다는것을 김문학은 그래 모른단말인가? 조선의 흥망과 성쇄르 보면 그 책임이 전적으로 나라백성을 지배해 오면서 썩을대로썩어버린 봉건관리통치배들에게 있지 백성들에게 있는건아니였던 것이다, 물론 백성의 각성이 늦은것을 탓할수도 있겠지만.
우선 이점을 명확히 말해둔다.
19세기말 조선의 정세를 보면 봉건통치배들의 사대매국이 로골화되면서 따라서 제국주의렬강의 침략이 강화되엿던 것이다.
<<울바자가 헐면 동네집 개가 드나든다.>>는 속담이 있다.
조선에 대한 무력침략의 기회만 노리고있었던 일본은 1894년 2월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에 있는 일본거류민들을 <<보호>>해야한다는 구실을 꾸며대고 무력침공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무력침공의 야망은 갑오농민군에게 거듭 참패를 당한 리조봉건정부가 봉건중국군대의 지원을 요청한것을 기회로 더욱 로골화되였던 것이다.
당시 조선주재 일본공사관 서기관(림시대리공사) 스기무라는 다음과같이 말했다.
<<조선정부가 자기의 란민(갑오농민군)을 진압할수 없어 외국으로부터 원병을 요구하는 처지에 있는데 우리 나라가 안심하고 그의 보호에 의뢰할수 없으며 또 조선국내에서 청나라의 보호를 받고싶지 않다. 때문에 우리 나라는 자기 나라의 병력으로써 자기를 보호하려고 한다.>>
( <<조선교섭자료>> 중권. 비서류찬간행회, 1936년판 330~331페지)
일본은 이해의 6월에 7,000여명의 군대를 조선에 침입시켜 왕궁을 점령하고 민비정권을 뒤집어엎으며 친일매국역적들을 정권에 끌어들이려고 책동했다. 그리고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봉건중국과 시모노세끼조약(1895.3)을 체결함으로 하여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력의 확립과 배상금략탈 등 대륙침략의 유리한 조건을 둘러싼 렬강들의 각축전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열강들의 눈에는 조선이 그야말로 쉽게 먹어버릴 수 있는 고기덩이였다. 하여 조선침략을 둘러싸고 크게 일, 미, 영을 한편으로 하고 짜리로씨야, 독일, 프랑스를 다른편으로 하는 두 침략집단이 대립하게되였던 것이다.
일본천황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을 먹는것은 그렇게 빨리되지는 않을것이다. 이번전쟁(1894ㅡ1895년 중일전쟁)에서 지리와 풍속도 알게되였으니 멀지 않아 조선이나 또는 다른곳에서 다시 전쟁을 할 기회가 올것이다. 그때에 가서 조선을 먹게 될것이다.>>
(<<일본력사>> 하(일문), 이와나미서점, 1872년판, 69페지)
보다싶히 일정한 기간 전쟁준비를 다그쳐 힘을 기른 후에 경쟁자 짜리로씨야를 무력으로 타승하고 조선을 강점하자는 일본의 침략야심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19세기말에 이르어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렬강들의 침략책동 특히 일제의 침략이 강화되던 시기에 봉건통치배들의 사대매국행위가 더욱로골화되였다.
봉건통치층안에서 사대매국행위는 대원군으로부터 정권을 가로챈 민비일파속에서 심하게 나타났다. 외세에 아부굴종하여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민비일파는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제에 반대하여 투쟁할 대신 1876년 <<강화도조약>>체결로 조선침략의 길을 열어주었고 1882년부터는 구미자본주의렬강과의 불평등조약을 통하여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렬강에게 조선침략을 허용한 것이다.
이어서 봉건통치배들은 저들의 통치지반을 유지하기 위해서 제가끔 외세를 끌어들이였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야 어떻게 되든지 일신의 안락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제각기 외세를 등에 업었으니 그것은 철두철미한 매국배족의 투항주의였던것이다.
친미세력만봐도 의정부 및 외부고문으로 리젠드를,
외부 및 법부고문으로 그레트하우수를,
군부고문으로 다이를,
학부고문으로 길모아를,
궁내부고문으로 산도를 받아들이여 내정을 감독하게 함으로써 나라의 정치를 그릇된 방향에로 이끌게하였던 것이다.
<<말로만 자기의 힘으로 정치를 해야한다고 하고 재정권이 외국인에게 양도되는가 하면 군사권도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고 심지어 인사문제까지도 자유로 못하는 실상이다.... 이와같이 나간다면 며칠이나 몇 달안에 모든 주권이 통털어 외국인에게 넘어가리라는 것을 누가 짐작못할것인가?.... 슬프다... 이 어찌된 까닭이냐!>>
(<<대한계년사>> 권3, 1898년 2월.)
조선은 1894년 7월에 일본에 철도부설권과 전선의 가설권을 내맡기였으며 구미에는 광산채벌권과 목재채벌권 등을 넘겨주었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볼것인가? 그것을 일본이나 구미의 선의적인 지원으로 볼건가? 아니다. 그런것이 아니였다. 승냥이가 왜서 문을 긁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답안은 인츰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외래제국주의자들의 리권략탈행위와 봉건통치배들의 사대매국행위로 하여 나라의 주요경제적 리권들이 모두 제국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갔거니와 외국의 경제적략탈이 더욱 강화되였다는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건만 김문학의 말처럼 외세의 침략이 조선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느니 어쨌다느니 할수 있을가? 번연한 사실을 갖고도 외곡하는것은 오로지 일제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극우세력에 동조하는 것으로밖에 되지 않는다.
조선사람은 결코 미개하지 않았다. 봉건통치배들의 부패로인하여 나라가 발전하지 못하고 외세의 침범하니 조선의 방방곳곳에서 제나라를 사랑하는 백성들은 들고일어나 손에 무장을 잡았다.
<<각국 사람들은 통상만을 하였는데 일본사람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머물러있으니 이것은 우리 나라의 국토를 침략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일제를 반대하여 투쟁할데대한 결심을 다지였던 것이다. (<<정봉준공초 재초>> 을미 2월 11일)
그들 농민군의 반일애국사상은 1894년 9월이후 일제무력침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단계에 이르러 더더욱 뚜렸이 나타났다. 농민군은 1894년 11월 12일(양력 12월 8일) 론산에서 국문으로 발표한 호소문에서 <<척왜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왜국이 되지 않게 하자.>>라고 웨치였다. 이것은 그당시 나라에서 조성된 민족적모순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선차적이며 중요한것인가를 옳게 판단하고 제기한 반일애국구호였다. (<<선유방문 병 동도상소서 지동서>>)
1894년 2월 15일, 고부에서 투쟁을 시작한 농민군은 전주감영에서와 리조봉건정부에서 보낸 관군을 련속격파하고 인민들을 억압착취하던 봉건통치기관인 관청들을 모조리 파괴소각하였고 악질관리와 량반들을 처단하였으며 감옥을 마스고 죄없이 감금당하였던 인민들을 석방하였다. 한편 인민탄압과 억압에 써먹던 문건들을 불태워버리였고 전라도의 전지역과 도소재지인 전주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일본무력침공자들의 침략적만행이 감행되고있는 위급한 시기에 농민군은 이와같은 반봉건투쟁만을 계속 벌리고있을수는 없었다. 하여 대담하게 투쟁방향을 바꾸어 반일투쟁에로 검어갔던 것이다.
<<....개화를 운운하면서....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들어와 야밤중에 왕궁을 습격하고 국왕을 위협하였다. 그러므로 일반 인민들이 충군애국심에서 분개함을 금치 못하였으므로 의병을 모아 일제와 싸웠다.>> (<<전봉준공초 초초>> 1895년 2월 8일.)
력사는 이러하다.
그런데 김문학은 영국인에 비친 한국인이라면서 "세상의 채찍아래서 침묵의 무관심을 고집하는, 건강하지만 무관심한 양들의 나라"로 비유한다 따라서 특기할 것은 일본인들의 지대한 애국심에 비해 동시의 한국인에게 민족감정이 없고 국가나 집에 대해 자부심이 없다고 판단한다"면서 "그리하여 영국인 관찰자들은 '한국이 어차피 독립국자질을 가지지 않았다'라는 결론을 내린다."고 하는데 그것이 맞는가? 김문학에게 묻겠다, 그대는 외국 특히는 일본이 조선의 독립권을 왜서 뺏아갓는지를 아는가모르는가? 일본인들의 지대한 애국심에 비해 동시의 한국인에게 민족감이 없었다니 므슨소리를 하는가? 그야말로 김문학의 입에서나 나올수 있는 허튼소리다. 애국심이 없으면 온 나라에서 의병투쟁이 줄기차게 일어났을 가? 력사를 아는가 모르는가?
김문학은 "영국인들은 한국을 '3천마리의 소를 기르면서도 30년 동안 한번도 외양간을 청소한적이 없다는 그리스 신화속의 '아우게아스담의 마구간'에 빗대며, 이것을 '청소 할 수 있는 자는 일본뿐이라 판단했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일본의 조선침략은 정당화하는 제속심을 내비치지 말라.
미국의 전임총통이였던 프랭클린D 루즈벨가 일찍이 일본에 대하여 “일본인은 유사이래 내가 본중에서는 가장 비렬하고 가장 무치한 민족이다”라고 질책한바있다. 100%정확하다고할수는 없겠지만 일본이 지금까지도 고집스례 과거사를 반성할줄을 모르고 뻣히는 꼴을 보면 그의 질타와 비난은 틀리지 않은것 같으니 김문학은 일본국적에 올랐다하여 제민족의 과거마저를 잃어가면서 량심없이 너무 일본의 우익세력에 빌붙어놀아대지말기를 바란다. 충고한다.
일본땅에 지금도 조선사람에게는 영원한 철천지원쑤로 되고있는 豊臣秀吉 ㅡ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하여 만들어진, 지금은 <<귀무덤>>으로 이름이 고쳐진 <<코무덤>>이 있으니 한번 가보기 바란다. 그리고 아래의 전쟁범들의 위패가 야쿠샤신사에 있으니 가서 참배하고 아베 신조의 품에 안겨 그를 애비로 받아주고 차라리 조상을 바꾸기를 바란다. 그러지를 않고 생명을 이어간다면 그건 개목숨이될거다. 조선사람의 망신이다.
일본의 전범들
伊藤博文 ㅡ 이토 히로부미
大由岩 ㅡ 니이오 시와
裕仁天皇 ㅡ 히로히토 천황
東条英機 ㅡ 도조 히데키
岡村寧次 ㅡ 오카무라
梅津美治郞 ㅡ 우메즈 요시하루郞
谷壽夫 ㅡ 도시오
土肥原賢二 ㅡ 도이하라 켄지
石井四郞 ㅡ 이시이 네郞
野田ㅡ 노다
石原慎太郞 ㅡ 이시하라 마코토
前原誠司 ㅡ 마에하라 세이지
李登輝 ㅡ 리노보르끼
玄叶光一郞 ㅡ 현광일란
岡 田克 ㅡ 오카다 카쯔
石破茂 ㅡ 이시바 시게루
森本敏 ㅡ 모리모토 사토시
藤村修 ㅡ 후지무라 오사무
韦伯 ㅡ 하쯔
德尔 ㅡ 톡
罗萨里奥 ㅡ 사도오쯔
小野寺五典 ㅡ 오노 데라
麻生太郞 ㅡ 아소 태랑
岸田文雄 ㅡ 기시다 후미오
谷內正太郞 ㅡ 다이니
豊臣秀吉 ㅡ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래는 어느 한 네티즌이 정리해낸 글인데 김문학은 보면 리성을 잃어 추악해진 제면모를 보게 될 것이다.
김문학은 2004년 《미친듯이 일본을 반대하는 중국, 친선을 구걸하는 일본》(東京 祥傳社 2004년) 이라는 책을 일본에서 출판하였다.
"중국의 교과서들과 선전부문들에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일본의 ‘절대 악’을 부풀려 선전한다. ……중국교과서들에서 사실을 외곡하고 허튼소리를 소리를 친 것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P.43)
‘침화일군남경대도살조난동포기념관”을 세운것은 지극히 우둔한 짓거리로서 국제적인 웃음거리를 제공했을 따름이다.”(P.68)
“삼광정책(三光政策)‘은 순전한 날조로서 중국 쪽의 상상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전후에 몰수된 일본군의 문건에서 ‘삼광(三光)’ 정책이라는 낱말이 없다. 만일 일본어로 표술한다면 ‘삼광(三光)’ 정책은 마땅히 ‘삼진(三盡)’ 정책으로 되어야 할것이다. 즉 살진(殺盡), 소진(燒盡), 창진(搶盡)으로 되어야 할것이다. ‘삼광(三光)’ 정책은 중국 쪽의 신문, 잡지들에서 제일먼저 나타났다. 그러므로 ‘삼광(三光)’ 정책은 중국인들이 날조한 것으로서 일본인을 추악화 하기 위한데 그 목적이 있다.”(P.164)
“나는 전반적으로 부정을 당한 나치스 독일의 전쟁에도 정의와 비정의를 초월하는 공헌이 있다고 인정한다.” (P.99)
“일본이 일으킨 전쟁은 아세아주에 대해 거대한 공헌을 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전쟁, 특히는 일본의 ‘침략전쟁’ 역시 간단하게 ‘절대 악’ 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전반적으로 긍정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적어도 마땅히 진솔하게 그 적극적인 면이 아주 많았음을 긍정해야 한다. 이래야만이 비로소 공정하다.” (P.98)
“일본의 침략을 전반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사실을 승인하지 않는 중국과 한국의 비열함이다.” (P.104)
“일본의 ‘침략전쟁’은 세계사, 근대사의 의의에서 말할 때 수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중국과 한국은 영원히 일본과 친선관계를 맺을 수 없다. ‘침략전쟁’이 초래한 살육, 폭력, 착취 따위의 가지가지의 나쁜 점은 이미 너무 곱씹어서 이제는 신물이 난다. 금후에는 마땅히 ‘전쟁’의 적극적 요소를 긍정하여 량호한 관계의 전제를 구축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P.105)
“중국에서 야스구니진쟈 참배를 반대하는 리유는 ‘갑급전범(甲級戰犯)’을 제사 지낸다는 점이며 참배는 전쟁을 긍정한다는 것과 련계되여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건대 ‘갑급전범’ 자체는 실제상에서 전승국 입장에서의 견해에 불과하다. 일본의 립장에서 생각할 때는 자기의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전승국에 의해 처형된 희생자들이며 애국영령들인것이다. 이러한 시점을 홀시해서는 절대 안 된다. ……정신문화의 차이를 알지못하고 자기의문화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타국의 습속을 존중하지 않는 오만이다.” (P.110)
“만주국의 건설은 일본에게 있어서는 아주 드문 체험이였으며, 아세아와 세계에 은혜를 가져다 주었다.”(P.128)
“우리 중국인들은 마땅히 당당정정하게 만주국에 대한 일본의 공헌을 긍정해야 한다.” (P.145)
“내가 생각하건대 만일 만주국이 지금까지 줄곧 일본이 차지하고 있었더라면(오늘의 조선반도를 포함하여) 만주는 반드시 일본 같은 강국으로 되었을 것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대일본제국의 붕괴로 말미암아 그 꿈이 깨여지고 말았다. 그러나 만주국의 리념과 정신은 의연히 오늘날 글로벌화 시대에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P.145)
“일본점령구는 ‘락원’이였다.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해방구와 국민당통치구역을 ‘락원’이라고 하고 일본점령구역을 지;옥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상에서는 어떤 상황이였던가? 그 진면목을 알려면 력사 자체에로 돌아갈 수 밖에 없으며 력사 사실을 발굴하는 수밖에 없다. 우선, 만일 중국의 두 대도시 상해와 북경 같은 일본이 점령했던 도시들을 공산당이 통치한 해방구--연안과 비교한다면 이 량자 사이의 차이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P.146)
“도우죠 히데키(東條英機)는 진정한 애국자이다.”(P.230)
“이미증명되였는바 원동국제군사법정의 심판은 부당하다.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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