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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백야 김좌진장군 일대기
1889년(己丑): 병자호란당시 척화진으로 강화성에서 순국한 안동김씨 선원 김상용의 10대손 김형규(일명 형균)의 차남으로 11월 24일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향산리(원 고도면 상촌리)에서 출생.
名 佐鎭. 字 明汝. 號 白冶. 靜遠.
부친 26세. 모친 27세.
형제로 누님(9살), 형(5살)
김옥균은 11촌숙부됨.
1892년(4살): 남동생 동진이 태여남.
3개월만에 부친이 사망.
한산 리윤식의 딸인 어머니 리씨의 슬하에서 자라남.
1893년(5살): 서당에서 한문수업시작.
1896년(8살): <<통감>> 첫권을 독파. 공부보다 무협소설을 탐독하여 <<억강 부약>>이라는 깃발을 세워놓고 전쟁놀이에 더 열중했음.
1901년(13살): 2살우인 오씨와 결혼. 8월에 형(경진)이 일가집에 양자로 가게 되어 가계를 떠맡음.
1905년(17살): 대한제국무관학교졸업. 귀향한 후 가정에서 대연을 베풀어 50여호에 달하는 가노를 전부 해방하고 2,000여석을 추수하던 전답을 무상으로 나누어주어 조선근대화의 선구자가 됨.
1907년(19살): 다시 서울로 올라가 로백린 등과 하몌 조직적으로 구국운동 을 전개하고 홍성에 대한협회지부, 기호흥학회 등을 조직 운영하면서 갈산면 상촌리 325번지에 김병학의 후원을 얻어 낡은 주택 80여간을 개조하여 호명학교를 설립. 교장이 되어 신학문을 권장.
1908년(20살): 대한협회에 가입. 안창호, 리갑과 더불어 서북학회발족. 산 하교육기관으로 설립한 오성학교의 교장직을 맡고 안창호 등과 청년학우회를 결성함. 론산의 채기두에게 밀령을 보내 각지 의병규합을 지시. <<한성신보>>리사로 됨. 로백린과 손잡고 한성신문간부 리춘수가 경영하는 경성고아원의 총무직을 맡음.
1909년(21살): 관철동 대관원자리에 야창양행과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설립 하여 국내외련락기관으로 활용하면서 동지규합에 진력함.
1910년(22살): 8월 29일 로백린, 윤치성, 신대현, 신두현, 박상진 등과 회 동. 광복운동을 위한 동지규합, 무기구입을 위한 자금염출을 론하고 전국을 누빔.
1911년(23살): 2월 5일 독립운동자금 10만원중 부족분 5만원을 마련코저 문 중 김종근을 찾아갔다가 체포되여 강도미수죄로 2년 5개월의 언도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13년(25살): 9월 서대문형무소에서 형기마치고 출감.
1914년(26살): 중석광으로 무기구입할 생각을 품고 공주로 떠났다가 일본경 찰에 체포되여 리유없이 10개월간이나 류치장에 수감.
1915년(27살):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항일비밀결사대인 대한광복회를 새로발족. 그 중진이 되어 무력에 의한 적극항일을 결의.
1917년(29살): 8월하순에 각 도의 광복단핵심을 규합. 반역자, 악질친일관 리들을 응징하면서 독립운동자금조달을 결의.
9월 10일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던중 계동의 기생 김계월의 집에 뛰여 들어 은신하면서 그녀와 동거. 후에 남아 두한이 출생.
10월 그믐께 채기두, 강필순, 임세규, 이리견 등이 경북 칠곡의 친일 부호 장승원을 사살하고 일본경찰에게 체포됨. 이로하여 광복단조직이 위태롭게 되자 만주총사령으로 임명받은바있는 백야는 전라도 모처의 부자집에 뛰여들어 돈 3,000원을 협탈해가지고 급급히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함.
대종교 제2대교주 김헌을 만나 대종교에 입교함.
1918년(30살): 간도를 경유하여 길림에 도착. 길림성을 근거로 한 군정사에 참가. 김헌, 서 일, 김동삼, 조소앙, 김약연, 박은식 등 재만독립운동자 39인의 이름으로 <<무오독립선언문>>을 국내외에 선포함.
무오독랍군단을 군정부로 개편. 서일의 초빙을 받아 군정부로 감.
12월 군정부를 북로군정서로 개칭하고 총사령관에 취임. 왕청현 십리리평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양성에 전력함.
1920년(32살): 7월 대한군정서 사관련성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사령관을 겸 임. 일본군의 독립군협공기밀을 탐지하고 근거지를 옮기려고 왕청현을 출발하여 행군. 10월 16일 화룡현 삼도구에 도착. 수천명의 일본군을 청산리의 백운평과 천수평으로 유인하여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대소 10여차의 격전에서 홍범도부대와 함께 적 1,254명을 격살해 독립군전사상 가장 빛나는 청산리대첩이 되었음. 11월백야는 총재 서일과 더불어 홍범도와 협상해 각지에 산재해있는 독립군병사들의 회군과 여러 반일무장단체의 회합을 호소하는 <<권고서>>를 각지 무장단체의 지도자들에게 전함.
12월중순 북로군정서는 밀산에 도착.
1921년(33살):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간도대한국민회(예수교파), 대한신 민회(단), 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광복군단 등 10개 반일무장단체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편성, 서일을 총재로 하고 백야는 부총재에 취임됩과 동시에 참모부장이 됨.
1월 김좌진,홍범도, 최진동, 안무, 김규식, 리청천 등 지도자들이 거느린 독립군단부대는 선후하여 호림현경내의 호두에서 우쑤리강을 건너 대안의 로씨야 변경도시인 이만으로 전이함.
4월 12일 대소 36개의 반일무장단체 수뇌자들이 모여 대한의용군총사령부를 대한독립단으로 개칭.
백야는 사령관 겸 참모부장이 됨.
6월 28일 <<자유시사변>>이 일어났음.
1922년(34살): 8월 4일 만주로 되돌아옴. 대한독립군단을 재조직하고 총사령이 됨.
1925년(37살): 3월 15일 녕고탑(녕안)에서 신민부를 조직하고 군사위원장에 취임. 둔전양병하는 한편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정예군양성에 전력. 림시정부로부터 군무총장, 군무위원에 임명되였으나 모두 사절하고 독립군양성에만 전력.
1927년(39살): 신민부의 대표로 재만독립운동단체인 참의부, 정의부와 3부통합을 기도했으나 실패.
5월 4일(음력) 독립군원로와 림정특파원 김대지의 보증을 얻어 본이 김해인 김영숙녀인과 재혼함.
1928년(40살): 6월말 딸 강석이 출생함과 동시에 처 영숙이는 정체모를 자객의 손에 피살됨.
교포자치운동에 전력함.
참의부, 정의부의 대표와 합하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김동삼, 김승학, 김소하, 리청천, 김원식, 김상덕 등과 중심이 되어 한국유일당재만촉진회를 조직, 정치부 책임위원에 취임.
1929년(41살): 8월 무정부주의리론을 수용하여 신민부를 해산하고 한족총련 합회를 설립해 교포의 자치운동에 전력하는 한편 중국의 항일세력과 련합전선을 결성하여 대일작전을 준비.
1930년(42살): 1월 24일 중동로 산시역 마을의 자신이 경영하던 정미소앞마당에서 일찍이 왜놈의 휼계에 넘어가 변절한 고려공산청년회원 김봉환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의 흉탄에 암살됨.
1934년: <<8로>>들은 상의한 끝에 사람을 조선에 보내여 잔군의 본부인 오숙근을 데려온 후 5월 21일 새벽 장기덕이란 가명으로 잔군의 유해를 비밀리에 조선에 운구하였음.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오훈장 중장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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