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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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39)
2014년 04월 10일 00시 53분  조회:3142  추천:1  작성자: 김송죽
 

39.

광복이 됐으니 이젠 고향에 돌아가 살아야겠다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대종교도들로 놓고보면 총본사의 환국이 제일의 관심사였다. 왜 그렇지 않으랴?... 만주로 들어온지 35년만인 1946년 1월에 대종교총본사는 윤세복 등 5명의 대종교골간들의 장악하에 할빈을 걸쳐 서울로 갔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총본사의 환국을 계기로 하여 많은 교도들이 가정을 데리고 고향땅을 찾아 떠났다.

한편 강석이네처럼 당장 떠나지 않고 훗날을 기약하고 남은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 중 많은이들이 도탄에 빠지고있는 동포들을 구원하고저 토비숙청에 탄원해 나섰다. 서일의 아들 윤제만보아도 출옥후 농사를 짓고있다가 녕안의 독립1퇀 12중대에 가입해 손에 총을 잡았고 서일의 사위 최관은 녕안현 고려인 민회회장이 되어 동포사업에 몸을 잠그었다.

이때의 북만주는 말그대로 살벌한 란장판이였다. 토비들이 저지르는 죄악은 날이 갈수록 우심해갔다.

1946년 1월, 산시에 있는 마룡강토비는 석하촌을 지날 때 쏘련홍군의 식량운반차를 습격하여 홍군 여럿을 살상하고는 식량을 구매할 돈 10만원을 략탈했거니와 길가던 조선농민 둘까지 죽이였다. 이러루한 일들은 비일비재였다.
어느날 목단강시 조선인민주동맹에서 발간하는 <<인민신보>>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보도되였다.

 

<<1946년 5월 14일밤중에 왕소정비도 200여명이 목단강북쪽 팔달구촌에 달려들어 촌장 장정국, 농회위원 김남수 등 4명을 살해하고 10명을 중상입혔으며 현금 7만원을 략탈하고 의복류 1,000 여벌과 촌자위대의 무기를 전부 거두어갔다.>>

 

이 보도가 신문에 실린지 열흘이 지난 1946년 5월 26일, 동안(밀산)에서 수백을 헤아리는 동포들이 무리죽음당하는 끔찍스러운 참극이 빚어졌다. 동안성보안대 총대장인 곽청전비도 700명이 안팍으로 짜고서 이날 갑자기 달려들어 <<이등황민>>은 싹 없새치워야한다면서 그곳에서 살고있던 조선사람만 닥치는대로 붙잡아 살해하였는데 이웃의 마음씨 좋은 한족이 자기집 천정우에거나 또는 마른 우물에 숨기거나 제집애의 옷을 갈아입히고 얼굴에 검댕이를 묻혀 속여넘긴 그 몇사람만 내놓고는 몽땅 죽은 것이다.

이 한떼의 피에 굶주린 살인백정들은 그같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고서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지 10일만에는 팔면통(八面通)에 달려들어 또 무고한 조선사람을 여럿이나 학살했다.

과연 기고만장해서 날뛰는 살인마귀들이였다!

그자들은 북만에 사는 조선사람은 로일령을 넘기지 않고 다 죽이려한다는 기막히고 무시무시한 소문까지 펴놓았다. 그래서 북만에 살고있던 조선동포들은 공포에 떨고 불안에 속을 태워야 하는, 말그대로 아비규환의 질곡속에서 허덤비며 이를 갈았다.

<<동포들이 이제 여기서 간또지진때 모양의 변을 당해야 한단말인가? 아, 저 아수라같은 토비놈들을 어찌할꼬!>>

김기철로인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복수하자! 우리 조선사람은 왜놈한테 죽고 되놈한테 죽고.... 그저 죽기만해야 한단말인가? 복수하자! 수난당한 동포의 원쑤를 갚자! 피빚은 피로 받아내야한다!>>

눈에 달이오른 동포젊은이들은 그 어떤 거조든 낼 잡도리였다. 보복심이 잘못되면 극단적인 민족반목으로 넘어가버릴 위험성이 잠복해 있었다. 그래서 부대에서는 사상교육을 가강히 했다. 토비들은 단지 조선사람한테 한해서만 만행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였던 것이다.

쏘련홍군이 귀국하고 국민당 <<중앙군>>이 금주, 심양, 사평을 공점하자 이른바 선견군이라는 토비들은 국민당의 지시에 쫓아 일제히 폭란을 일으켰다. 동녕 <<5.1>>폭란, 수분하 <<5.4폭란>>, 수양 <<5.8>>폭란, 목단강 <<5.15>>폭란, 밀산 <<5.26>>폭란은 모두가 토비들이 국민당의 공세에 배합하여 인민무장에 대항하며 지방에 수립된 인민정권을 전복하려고 시도한 한차례의 조직적인 발악이였다.

그중 목단강폭란이 가장무서웠는데 이 폭란을 진압하는 전투에서 조선인젊은이들이 가장 용감했고 공도 많이 세웠다. 15일 새벽 2시에 기차고동소리를 신호로 일어난 폭란은 아침 5시에 보안퇀과 민병, 자위대원들의 피어린 공동작전에 의하여 철저히 분쇄되고말았다.

5월 21일, 목단강역전광장에서 비도괴수 왕소정을 비롯한 5명의 혈채많은 비도들을 공판한 후 처단해버리였다. 같은날 녕안에서는 빈수도가경비사령(濱綏圖佳警備司令) 정운봉을 공판, 30일에 처단했다. 국민당지하조직과 비도들이 알림들여 획책했던 5월폭란은 이같이 전부 파탄되고말았다.

지나간 1945년도, 광복이 나서 3개월 반 그사이 형편은 말이아니였다. 목단강군구는 초기의 12개 퇀에서 14퇀(2영변절)과 새로조직한 목릉 15퇀을 내놓고는 10개 퇀이 변절했는데 그 인원이 1만 1천 6백명이였고 살해된 간부는 40여명이였다. 토비들은 기염이 충천하여 군수품을 빼앗고 철길을 끊고 도로를 파괴했다. 이때의 토비수자는 인민무장수자의 10배였다. 이켠은 인원이 그같이 적은데다 장비도 퍽 못했다. 그렇지만 대중의 민심을 얻고있었다. 이러한 정황하에서 인민무장력인 동북민주련군은 일취월장할 수 있어서 새해의 1월부터 7월까지 한계로 하는, 병력을 집중해 련합토벌하는 제2계단의 작전에 진입할 수 있었다.

 

<<(본보 수녕소식) 수녕군구의 우리 민주련군은 인민들의 간곡한 요구에 호응해 전역에서 큰무리의 토비를 소멸하고 지금은 심산으로 숨어드는 잔비들을 추격섬멸중이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우리의 수녕군구부대는 반년간의 토비숙청전역에서 살상포로한 토비는 도합 4,800여명(그중 포로 3,060명), 흩어진것이 1,000명(대부분 집에 돌아가 다른일을하고있다), 로획한 보총 5,100여자루, 경기관총 107정, 기관총 52정, 각종 포 56문, 국민당(위임)의 퇀급이상괴수 16∼17명(기타 탄알, 자동차, 권총, 수류탄 등 군수품을 상세한 통계가 없음)을 격살하고 수녕, 동안, 벌리, 수양, 동녕, 보청 등 현들을 해방하고 재난구의 백성들에게 구제량 5만여석을 내주었다.

..... 비도들의 방화, 살인, 략탈과 강박징수는 인민들이 도탄에 빠졌던 위만시기보다 더욱 심한바 수양에 있었던 비도들은 집집의 식량을 말끔히 들춰가고는 매일 호당 전병 1근씩밖에 안주었다. 동녕의 토비들은 매인에게 돈 250원씩 걷어들이였다. 수양과 동녕일대의 대부분 군중은 식량이 없어 매일 나뭇잎과 야채로 기아를 달래는 형편(우리 군은 수양에 진입한 후 비도들이 빼앗은 식량을 군중에게 돌리였고 동녕현성[부]에서는 지금 각지에서 모아오는 식량으로 구제준비하고있다)이였다.

목단강시 북쪽 사문동역도는 벌리에 들어갔을 때 아이들이 입은 바지마저 벗겨냈다. 수양성(綏陽城)에서 비도들이 태워버린 민가 30여채, 물러갈 때 성○○○○○○○를 옹근 이틀간이나 폭파해서 주위의 주민들은 목숨은 살려냈어도 재산은 모두 훼멸되고말았다.

5월 2일, 대전자에 이른 토비들은 주민 100여명을 학살해 피가 내를 이루었다. 수양으로부터 대전자사이 오가는 상인은 모조리 잡아가두고 내놓지 않았다. 재난당한 군중들은 국민당반동파를 몹시 증오하면서 그자들을 <<중앙호적>>이라 이름지었다. 군중들은 지금 민주련군이 하루속히 비적을 소탕해줄것을 간절히 바라고있다. 아군이 이번 수양을 해방했을 때 전 성의 남녀로소는 꿇어엎디여 <호적중앙>을 욕하였다. 지난날 기만당했던 사람들도 분분히 각오하면서 아군과 정부에 총을 바치고 새사람으로 되려한다....>>

 

이상은 1946년 7월 20일자 <<동북일보>>에 실린 기사였다. 고난속에 이어지는 생사판가름의 혈전으로 최후의 승이를 맞아오고 있었다. 군민일심이 되어 뭉쳐나서니 사면초가를 당한 북만주의 토비들은 이해의 8월부터 12월까지의 제3계단숙청에 이르러서는 거진전멸되여가고있었는바 그자들이 네 개의 <<깃발>>이라 부르던 사문동, 장흑자, 리화당, 손방유 등 하나하나 그믈에 들고말았다.

이리하여 <<공고한 동북근거지를 건립하자>>는 중공중앙의 지시대로 1946년, 이 한해동안에 초보적이고도 믿음성있는 창건사업을 완수할수있는 조건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발붙일수있게 되었다. 토비가 숙청되고 질서가 잡혀감에 따라 동북에서는 천지개벽의 토지개혁이 전면적으로 시작되였다. 목단강지구에서는 토지개혁을 1946년에 녕안, 목릉과 림구 등 몇곳에서 시범적으로 해본후 1947년부터 전면에 착수했다.

1946년 4월 3일자 ,<목단강일보>>는 사론에서 다음과같이 기술했다.

 

<<지나간 한달반사이 각지 민주정부들에서는 대량의 간부를 뽑아 공작단을 조직해가지고 적의 토지를 몰수, 분배하는 사업을 했었는바 뚜렷한 성적을 거두었던 것이다. 녕안과 목단강 이 두곳만 보아도 땅이 없거나 적은 농민들은 적들에게 빼앗겼던 토지를 이미 모두 자기의 수중에 넣음으로써 승리의 과실을 획득한 것이다. 이로부터 농민들은 일떠났음을 보아낼수 있다. 그들은 토지를 분여하는 한편 반간청산운동을 적위의 잔여세력과 죄악이 루루한 한간 악패를 징벌함으로써 적들의 반동기염을 꺾어버리였다. 그리고 농회, 자위대, 부련회 등을 조직하고 자기들이 애대하는 령도자를 선발하여 낡은 구정권(區政權)을 개조하였은즉 토지를 나누어가진 그런 농촌들에서는 이미 력사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신세고친 농민들은 자신의 힘을 알게되였고 자기의 운명은  자기로 결정해야 한다는것도 깨닫게되였다. 토지를 분여한 곳들에서는 지금 농민들의 열의가 부쩍오르고있다.>>

 

어느날, 위만때 자경단 단장노릇을 해먹은 류창수를 붙잡아 투쟁대에 올렸다.

<<저놈은 왜놈의 개다리였다. 저놈이 우리 큰오빠를 미쳐죽게 만들었다.>>

강석이는 두생의 처 정순이, 딸 선녀와 함께 달려나가 그자를 한바탕 패놓았다.

악행이 루루해 민분이 컸던 류창수는 그날 공판대회에서 마을사람들게 물매를 맞은 후 총살당했다. 해남촌의 토지개혁서막은 이렇게 올랐다.

토지개혁의 제1보가 반간청산(反奸淸算)부터 착수하는것이였는데 그 대상은 악패지주, 한간, 특무, 경찰, 반동회도문의 두목이였다. 정치상에서 그자들의 기염을 꺾어놓고 죄가 크면 지압이였다. 그러면서 감조감식하고 농민의 땅을 되돌리게 하며 농회를 조직하고 지방무장을 건립하는것 등이 그 중점이였다.

토개투쟁은 점점 긴장하고 격렬해갔다. 그런데 인식부족으로 적아를 가리지 못해 복수자가 극<<좌>>의 경향으로 나옴으로해서 한때 미런한 짓을 하기도했다. 해랑(海浪)에서는 아무런 혈채도 없는 지주를 둘이나 그저 지주라는 리유로 때려죽이였다. 그리고 남라고촌(南拉古村)의 조선사람들은 큰바람(刮大风) 대회를 열고 군중들이 죄없는 촌장을 때려죽였다. 이것이 실례다. 다행히 성위에서 이 일을 알고 3월에 손이근(孫以瑾)이란 녀공작원을 파견해 즉시 제지시켰기에 다시는 류사한 일이 공개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심보사나운 어떤자들은 암암리에 개인보복을 혹독하게 했다.

늦봄의 어느날, 목단강에서 조선족녀성 독창배우모집을 내려왔다.

강석이는 워낙 노래를 잘부르는지라 가볼가 응시했더니 경쟁자 여럿중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그래서 이젠 무대생활을 하게 됐다고 기뻐하는데 졸지에 입격이 취소될줄이야? 알아보니 어는 고약한 작자가 김강석이는 <<독립군딸이다. 친아버지 김좌진은 친일분자길래 공산당손에 총살당했다.>>는 험구를 만들어 가지고 작간을 논 것이다.

그래서 강석이는 기분이 탁 상하면서 치떨리였다. 그따위로 날조무함하고있는게 대체 누군지 알기만 하면 각을 찢어놓기싶었다.

녕안에서도 목단강에서도 간부훈련반을 꾸리여 강석이는 거기에 가고싶었지만 그것은 더구나 안될 일이였다.

양부는 진상을 모르는 미런한 자들이 원쑤가 되여 양녀가 김좌진의 딸인것을 알아냈으니 이제 어느때 기회를 노리여 독수를 뻗힐것만 같아 속을 조이였다.

<<애야, 석아! 안되겠다. 패수살이 비치는구나. 우리 이 고장을 떠나버림이 상책인것 같구나.>>

양부께서 하는 말씀이였다.

강석이는 만일의 험악한 경우를 생각해 서둘러 독립군이 휘날렸던 큰폭의 태극기와 그보다 좀 작은 태극기 둘 해서 모두 세폭을 미농지에 싼 후 그것을 집에 보관해오던 옛 문건과 함께 산시로 갖고가 생부 김좌진의 구광이 있는 북쪽골 비밀지점의 단지속에 넣어 감추었다.

이러고나서 며칠안되는 어느 하루, 회의한다고 불리워갔던 양부가 매를 맞고 돌아왔다. 뜻밖이였다. 여지껏 동네서 존경받아오던 로인이 이같이 험한 수모를 받다니? 시국이 바뀌니 혁명자로 변신하고 나타난 예전의 엠엘파분자아니면 화요파분자들이 묵은 장부를 들추면서 보복을 하는 판이였다. 병석에 누운 김기철로인은 일어도못나고 그길로 그만 돌아가고말았으니 향년 78세, 일제의 철창생활 더섯번, 추궁과 박해를 못이겨 해림 한곳에서만도 이주 18번, 국치를 울음으로 삼키며 거치른 만주땅에서 광복의 이날을 맞아오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바쳐왔던 이 한 독실한 대종교인 독립군의 마지막운명은 이러했다.

양모는 령감이 죽자 양녀의 목숨을 걱정했다.

<<애야, 안되겠다. 어서피하자.>>

어느날 강석이네는 남모르게 해남촌을 훌쩍 떠나고말았다.

그네들이 이사한 곳은 연수현 가신구 8퇀이였다. 이때로부터 강석이는 순옥으로 변성명하고 세상에 다시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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